올해 초 오피니언 필진을 의뢰받고 문화예술계 내 다양한 이슈에 대해 또 이를 바라보는 사회적 통념에 대해, 예술인 당사자로써 느낀 어려움과 불편함에 대한 글을 주로 기고했다. 코로나19로 멈춰버린 문화예술계의 시간에 대하여, 비대면 공연이 주류가 되면서 관객을 만나지 못해 극심한 고민에 빠진 연극 연출자의 시선에 대하여, 지역 예술가를 대하는 우리사회의 선입견에 대하여. 그리고 무엇보다 힘주어 이야기했던 소재는 바로 전라북도 문화예술계 내 안전한 창작환경 구축의 필요성에 관한 것이었다. 칼럼 뿐 아니라 일상과 일터에서도 성평등의제를 주로 피력하는 나의 행보를 지켜본 예술인 동료는 이렇게 물었다. “안그래도 먹고 살기 힘든 문화예술계에서 왜 하필 성평등이야?” 이 질문이 함의한 바를 알기에 나는 그 자리에서 선뜻 그를 설득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이 글을 읽는다면 성평등은 문화예술계 내 불평등한 구조와 불합리한 지원과정을 가시화한 예술인 복지의 첫 단추임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예술작업이 여타의 노동과 다른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종사자의 생계를 위한 행위와 구별되는 분명한 특징이 있다는 점이다. 예술인의 작업은 어떤 결과물이든 관객을 만나고, 독자를 만나고, 리스너를 만난다. 예술인이 창작해낸 모든 것을 대중은 향유하고 이 과정을 통해 대중과 예술인은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관계임을 자각한다. 파급력, 영향력, 전파력과 같은 단어가 문화예술계의 수식어로 붙는 이유도 이와 같다. 이 지점에서 예술인의 젠더감수성과 안전한 창작과정은 문화예술계에 상당히 중요한 요소이며 성평등한 창작물이 대중과 만났을 때 그 여파가 어떤식으로 맞닿게 되는지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인의 먹고사니즘과 그 시급성을 주장하며 성평등을 번거로운 과제로 인식하는 동료들의 피곤함이 여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너무도 오랫동안 오로지 결과물로 평가받는 방식에 익숙해진 나머지 내부를 돌보지 못하는 공동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잘 만들어진 결과물’만이 다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고 그를 위해 ‘소음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프로젝트라는 좋은 평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작품에 참여한 예술인 개개인의 다양한 맥락과 어려움, 고통은 생략된 채 결과물만 남기는 기이한 현상은 현실이 되고 수도 없는 착취와, 성폭력, 성차별은 만연하고 이것을 견뎌내는 것이 마치 예술의 미덕인양 포장되기 일쑤였다. 결국 가난한 예술인들은 결과물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당연하게 인식하는 존재들이 되어버렸다.
나는 문화예술계를 다시 쓰길 원한다. 작품을 수치화하는 방식의 선정 과정을 뒤집고 예술가를 양적척도로 평가하는 모든 기준이 바뀌길 원한다. 예술인은 창작물을 찍어내는 기계가 아니라 대중과 소통하며 세상을 바꿔가는 변화의 주체임을 인식하길 원한다. 예술인의 노동력은 가치 있으며, 이것을 외치는 우리 모두가 서로의 동료임을 발견하길 바란다.
대중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창작환경 속 예술인은 고통에 처해있다. 왜 성평등이 아니라 이제 겨우 성평등을 외칠 뿐이다. 성평등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 등한시 했던 예술인 복지의 시작일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말로 출발점에 서있는 것이다.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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