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성 전북대 명예교수
연말이다. 한해의 시작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 나에게는 세월의 흐름이 급류와 같이 느껴진다. 젊을 때 조용히 흐르던 강물이 오십을 넘으면 성이 잔뜩 난 급류가 되고 육십이 넘으면 강둑 무너져 흐르듯 무서운 속도로 변한다. 나도 나이가 들어서 일까. 어떻든 한해를 마무리 하면서 세상 모든 만사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게 마련인 이 단순한 이치가 새삼 가슴깊이 깨달음으로 다가 온다. 나에게만은 끝없이 영원할 것만 같아 기고만장했던 젊음도 가고, 삶의 끝자락이 잡힐 듯 가까워지고 있다. 그렇다, 인생도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일 년 사계처럼 그 속에 크고 작은 희로애락들로 채워져 왔으니, 요즘은 하는 일 모두가 다 조심스럽고 또 그간에 맺어왔던 이런저런 인연들 모두가 다 귀하게만 느껴진다. 되돌아 생각해 보면 가슴을 흥분케 했거나 아련하게 했던 일들이 참 많았다.
어디 삶만 그려라. 일도 인간관계도 역시 모든 것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게 마련인 것을. 이 작은 진리마저도 깨닫지 못하고 덤벙댔던 시간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기에 인간관계 중 가장 위대하여 그래서 항상 생각만 해도 가슴 저 밑바닥까지 아련해 지는 어머니와의 관계도 탄생의 시작과 죽음이라는 끝이 있기에 크게 가슴 아파 하지 않던가. “이 생애/ 잊지 못할 두 번의 울음소리/ 한번은, 내 생명의 시작에 있었고/ 다른 한번은, 당신 생명의 마침에 있었으니, 첫 번째 울음은/ 전 기억할 수 없었지만, 당신이 말해 주어 알았고/ 두 번째 울음은/ 당신께선 알 수 없었겠지만, 제가 말해 드려도 아무 소용없었지요.” 라며 중국의 시인 위주앙종은 ”두 번의 울음과 그 사이“라는 모난일(母難日)에서 탄생과 죽음사이의 가슴시린 애절함을 시로 노래하고 있다.
올해는 유난히도 흘려보내기에 참으로 힘든 한 해였다. 코로나로 전 인류가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오죽하면 코로나 블루(blue)라고 코로나로 인한 우울한 사회적 분위기를 대신하는 용어가 만들어졌겠는가. 금년은 바이러스로 특별히 더 힘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살아보니 어디 어느 한해 쉽고 즐거움만으로 가득 찼던 시절이 있었던가. 되돌아보면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거의 없었던 것만 같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지금까지 삶을 영위해 왔고, 앞으로도 또 계속해서 이어만 가야 하기에, 눈앞에 마주선 어려움을 강인함으로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이 몇 년을 걸려 세운 것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라. (중략) 당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세상과 나누라/ 언제나 부족해 보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것을 세상에 주라.” 인도 꼴까따 마더하우스(사랑의선교회 본부) 벽에 붙어 있는 시의 한 구절이다. 그렇다 이 시의 언어처럼 무너져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또 일으켜 세우는 강인함으로 지속되어야 한다. 삶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 그것이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다. 그리고 걷는 길 굽이굽이 마다 잊지 말고 가져야 할 모습은 ‘위대하게 생각하고, 당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세상과 나누는 것’ 그것이어야 한다.
곧 새해가 시작된다. 내년에도 여러 가지 상황들이 크게 좋아질 것만 같지 않아 걱정이 크다. 그래도 어찌 하랴. 여기서 주저 앉아버릴 수는 없지 않는가. 흔들리지 않고 항해하는 배가 어디 있으랴. 희망을 갖고 다시 시작하자. 더 나은 이념과 가치창조를 위한 위대한 발 거름이 멈추어져서는 안 된다. 가자. 다시 일어서자. /한병성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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