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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가 후백제 서울 맞나

김원용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김원용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경북 문경시가 최근 이 고장 출신의 후백제 견훤왕을 테마로 본격적인 관광자원화에 나섰다. 탄생 설화의 마을에 후백제 민속촌과 테마영상 전시관을 조성하고, 견훤의 활동과 관련된 유적지를 둘레길로 조성하는 계획 등을 내놓았다. 이런 문경시의 견훤왕 프로젝트는 뜬금없이 진행되는 사업이 아니다. 문경시는 견훤의 출생과 관련한 전설 및 유적에 대한 학술조사를 실시했고, 이를 토대로 출생 설화가 전해지는 금하굴을 정비하는 등 성역화 사업을 벌였다. 20년 전이다.

문경이 견훤의 탯자리 설화를 바탕으로 관광자원화에 관심을 갖는다면, 충남 논산은 묫자리로 견훤을 기념하고 있다. 충남 논산 연무읍의 나즈막한 야산에 자리한 견훤왕릉은 1981년 충남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논산시는 견훤왕릉을 국가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 2000년부터 견훤왕릉보존위원회가 발기돼 해마다 왕릉제를 지내고 있으며,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을 꾸준히 건의할 정도로 왕릉에 대한 지역의 자부심은 적지 않다.

그렇다면 후백제 왕도였던 전주에서 그에 걸맞게 견훤과 후백제를 기억하고 있을까. 전주를 본거지로 한 후백제에 대한 연구와 지역의 관심은 여전히 적다는 게 답일 것 같다. 후백제는 짧은 기간 존속했지만,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중국·일본과 다각적인 외교 활동을 펼쳤으며 백제문화를 재현했다. 그 중심이 전주였다. 후백제를 빼고 언제 전주가 한 나라의 중심에 섰던 적이 있었던가.‘조선의 본향’ 이상으로 후백제가 전주의 역사에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삼국시대 이후 유일하게 왕궁을 찾지 못한 나라가 후백제다. 문헌 기록이 거의 없고, 급속한 도시화 진행에 따라 발굴에 한계가 있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후백제와 같은 시기에 존립하며 후백제보다 훨씬 열세였던 강원도 철원에 위치한 태봉만 해도 고대 왕도로서 기본적인 성격과 특징이 대부분 밝혀졌다. 후백제에 대한 지자체의 의지와 연구자들의 집요한 노력이 강원도 만큼 따랐는지 태봉 사례로 돌아볼 일이다.

물론 후백제 왕궁터를 찾기 위한 노력과 활동이 나름 꾸준히 이어지기는 했다. 특히 고 전영래 박사(전 원광대 교수)가 90년 대 초 후백제 왕궁터로 동고산성을 지목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전 박사는 당시 발굴 조사를 통해 주건물지를 포함해 여러 건물지를 확인하고, 건물지에서 발견된 ‘全州城’이라고 쓰인 기와 등을 통해 동고산성을 왕궁지로 확신했다. 그러나 자연환경적 위치와 일상 생활에 쓰인 유물이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학자들 사이에 의문이 제기됐다. 이후 물왕멀설, 전라감영설, 인봉리설 등이 나왔으나 가능성만 열어둔 채 지금껏 확실한 왕궁지를 지목하지 못하고 있다.

후백제 유적의 백미는 왕궁일 수밖에 없다. 후백제 왕궁 찾기가 계속되는 이유다. 그렇다고 왕궁터를 확인할 때까지 후백제를 재조명하고 역사자원으로 활용하는 일에 손을 놓아야 할 것인가. 후백제 관광자원화에 본격 나선 문경과 경쟁하라는 말이 아니다. 문경의 견훤유적지 정비사업은 오히려 후백제 역사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 논산의 견훤왕릉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견훤왕이 논산 개태사에서 임종할 때 완산이 그립다고 해 현 위치에 묘지를 잡았는데, 실제 맑을 때 그곳에서 모악산이 보인다고 왕릉 안내문은 적고 있다.

그간 후백제 관련 발굴조사와 연구활동으로 쌓인 성과물이 적지 않다. 그 성과물이 어떻게 보존되고 관리되는지 지역민들조차 모른다. ‘눈으로 보는 역사’가 만들어질 때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도 높아진다. 후백제 홍보관 하나 없어서야 전주가 어디 후백제 서울이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지역에서 단 한사람‘나는 왕이다!’라고 부르짖었던, 파란만장의 풍운아였던 백제가 망한 후 오늘날까지도 기죽어 사는 우리 향민에게 무한한 꿈과 긍지를 간직하게 해왔던 그의 발자취를 밝히고야 말겠다는 마음다짐이 한시도 나의 뇌리에서 사라진 일이 없었다.” 동고산성을 발굴한 뒤 30년 전 본보 기고를 통해 밝힌 전영래 박사의 소회가 후학들을 부끄럽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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