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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상상력

천세진 문화비평가·시인

천세진 (문화비평가·시인)
천세진 (문화비평가·시인)

전업 작가로 살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택한 곳이 전주였다. 전에 살던 곳의 인구가 145만 정도였고, 전주는 65만 정도이니 절반이 채 안 되는 공간으로의 이주였다. 모든 것이 전보다 부족하리라는 예측이 가능했지만, 오히려 작은 도시가 갖고 있을 문화에 마음이 끌렸다. 전주로 온 후에 일상의 파도는 잔잔해졌고, 복잡했던 공간을 헤집던 발길은 한적한 곳을 딛고 다닌다. 누군가는 그 한적함을 ‘결여(缺如)’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비어 있는 공간’이란 판단은 오해다. 그곳에는 분명 무언가 자리하고 있지만, 그 존재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뿐이다.

공간을 인공적인 것들로 채워야만 문화가 되는 건 아니다. 누군가 ‘결여’로 보는 것을 누군가는 ‘여백’으로 읽는다. 서울에 있는 것이 전주에 없다는 사실을 결여로 볼 것이 아니라, 문화적 형상이 다른 것으로 읽으면 된다. 한 공간에 사는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위해 인공적 구성요소들을 선택하는데, 인구 수, 면적, 강과 산, 언덕의 높낮이 등에 맞게 선택한다. 그러고도 비어 있는 공간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상상력이 숨 쉬는 여백이 된다.

공간은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으로 확장해서 해석해야 한다. 물리적 공간이 문화적 장소가 되려면 사람과 시간이 어우러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어우러진 시간이 쌓이면 ‘공간’은 지리적 개념을 넘어서서, 정신적 개념이 짙게 밴 ‘장소’가 된다. 이―푸 투안이 『공간과 장소』에서 “장소는 정감어린 기록의 저장고이며 현재에 영감을 주는 찬란한 업적”이라고 말한 것을 떠올려봄직 하다.

옛 법조지구를 두고 전주시와 개발 기업 사이에 견해가 갈린 모양이다. ‘발전’이라는 개념을 생각할 때, 먼저 떠오르는 것이 개발이다. 개발도 문화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다른 문화다. 빅토르 위고는 『레 미제라블』의 원고 대부분을 망명지인 영국 남단의 건지 섬에서 썼다. 1870년 위고가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는 나폴레옹 3세가 주도한 파리 개조사업을 지휘한 오스만 남작에 의해 소설 속 공간이 사라지고 난 뒤였다. 위고는 소설의 배경이었던 곳에 자리한 낯선 건물들과 거리를 보고 어떤 심정이었을까. 새로운 파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했을까? 위고가 아름답다고 느꼈다면, 기억의 미학을 배제한 건축적 아름다움에 대한 것에 그쳤을 것이다.

도시는 상상력과 꿈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자신만의, 자신에게 어울리는 상상력과 꿈이어야 한다. 한국의 도시들은 서울을 닮으려고 한다. 장 보드리야르는 『아메리카』에서 ‘뉴욕’에 대해 “도시의 회전이 그토록 강하고 원심력이 너무나 커서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 누군가와 삶을 공유하는 것은 초인적인 일이다. 오직 부족들, 갱들, 마피아들, 비밀결사집단들 혹은 도착적인 집단들, 확실한 공모 집단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으며, (……) 이것은 반(反)노아의 방주다”라고 말했다.

서울이 그런 뉴욕을 닮아가고 있으므로 서울은 닮을 이유가 없는 도시다. 전주는 어느 도시도 닮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느 장소도 다른 도시들과 닮지 않은 때문에, 상상력이 남다른 도시라고 불렸으면 좋겠다. 장소가 갖고 있는 기억을 지키는 것도 상상력이 된다. 새로 만들어진 장소가 푸른 이끼 같은 기억을 덮고 문화적 장소가 되려면 시간이 다시 오래 흘러야 한다. /천세진 문화비평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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