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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미술 이야기] 신처럼, 황제처럼, 노예처럼

콘스탄틴 브랑쿠지 '입맞춤'
콘스탄틴 브랑쿠지 '입맞춤'

“편안한 여행”을 최고의 사치로 여기는 루마니아의 은자 브랑쿠지(1876-1957)의 작업실에는 “네가 예술가임을 잊지 말아라. 신처럼 창조하고, 황제처럼 주문하고, 노예처럼 일 하라.”라는 글이 있었다 한다. 어쩌면 게을러질 수도 있는 자신을 다잡아 가는 글귀로 이만큼 처절하도록 절실한 말은 흔치 않다.

파리의 작업실에서 브링쿠지 자신을 역사적인 조각의 거장들과 비교하며 존경하는 숭배자들에게 ”그러지들 마. 그 작품들은 밥벌이로 만들어진 것들이야. 젊은 시절의 나 역시 그 모든 시간을 밥벌이와 해부, 그리고 모방이나 재현 속에서 손쉽게 그러나 스스로는 독창적이라는 생각 속에서 일을 했지. 그러다가 어느 날 나는 부끄러웠어. 묘지의 비석으로 한 쌍의 부부를 닮게 만들었는데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깨닫게 된 거야. 닮은 것 보다는 서로 사랑했으나 이제는 땅 속에 묻혀 있을 모든 부부의 마음과 닮은 어떤 것을, 그 영원을 표현해야 했다는 말이지.”

자신이 혼자서 일을 시키는 황제가 되고. 죽어라 일만하는 노예가 되고. 그것도 모자라 신과 같이 창조해야 된다는 주문처럼 그는 제자도 조수도 없이 평생을 혼자서 만들고 부수고 다시 만드는 과정을 되풀이 하며 보냈다. 그러면서 그가 그토록 노력하는 것에 걸맞게 상당히 빠른 시간에 원시적이고 본질적인 양감으로만 재현되어서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모두 벗어 버린 형태, 또는 기하학적인 형태에 접근하고 있었다.

1908년 파리에 온지 4년 만에 그는 몽빠르나스의 묘지에 있는 ‘입맞춤’으로 그의 미래를 예고하고 있었다. 루마니아의 목동이었다가 미술학교의 최우수 학생이었다가 루마니아의 메달과 상금을 독차지 했다가 좁은 환경에 한계를 느끼고 더 넓고 더 좋은 환경을 찾아 파리까지 걸었다. 별을 이불 삼아 노숙을 하며 무작정 걷다가 병을 얻어 류네빌에서 머물고 있을 때 파리의 루마니아 친구가 2루이를 보내주어 기차를 탈 수 있었고 1904년 7월 14일 지친 몸을 끌고 파리에 입성했다. 그래서 그는 평생 편안한 여행을 원했고 파리의 기차 시간표를 모두 외웠으며 ‘나의 생애를 돌아보면 기적의 연속이었다’는 말을 남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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