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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정유재란 속의 전북] 전주 침공 막은 웅치전투

왜란 초 어려운 전황에서 병참기지 전라도 사수한 ‘신호탄’
실제 전투 패했으나 왜군 목표 전주부성 점령 방어에 기여
조정 중추인물 유성룡, 한문4대가 이식 전투성과 높이 평가
“전주부성 지켜내 왜란 군량이 부족 문제 대비할 수 있어”
“전쟁 이후 조정 필요한 군량이 상당수 호남지역서 확보”

웅치전투전적비 /사진제공=완주군
웅치전투전적비 /사진제공=완주군

1592년 7월 진안과 전주의 경계인 웅치에서는 전주로 침공하려는 왜군과 이를 막으려는 관군·의병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바로 웅치전투이다. 웅치전투는 왜란 초기 어려운 전황에서 병참기지인 전라도를 사수한 전투들의 ‘신호탄’과 같은 성격을 지닌다.

실제 조선시대 인물들은 자신이 저술한 문집, 묘비의 행장에 전투의 성과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당시 왜군도 웅치전투가 가장 큰 손실을 안겨준 전투로 인식했는데, 이는 당대 문헌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웅치전투의 실상과 역사적 의의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이번 기사에서는 웅치전투 전개과정과 전장의 주역, 당시 중추인물인 유성룡의 평가, 임진왜란사에서 가지는 의의 등을 재조명한다.

 

 

웅치 전투 직전 전라도 상황

1592년 4월 임진왜란 발발 직후, 전북은 한양과 함경도, 경상도와 달리 왜군의 공격목표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 때문에 전라도 내 각 수령들은 미리 방어태세를 갖추고, 관군을 정상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조정은 전라관찰사 겸 순찰사인 이광에게 근왕병 10만 명을 이끌고 북상해 왜군을 방어토록 명했다.

전북대 사학과 하태규 교수는 “당시 근왕병이 대규모로 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전라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안정적으로 관군을 정비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근왕병은 충청도 공주에서 한성 함락과 임금의 피난 소식을 듣고 전주로 돌아왔고, 6월 초 다시 북상했지만 경기도 용인에서 왜군에게 대패했다. 패배 원인은 농민출신 군인의 전투능력 부족과, 선조의 피난소식으로 인한 사기저하, 병력 동원에 대한 반발 등이 꼽힌다.

이때의 패배로 전라도에는 관군이 부족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특히 전라병사 최원이 관군 2만 명을 거느리고 경기도로 다시 올라가 병력부족 현상은 가중됐다.

이런 가운데 한양을 점령한 왜군은 조선 8도를 분할 지배하려는 전략으로 전환했다. 결국 전라도가 공격대상에 포함됐고, 같은 해 5월 중순부터 공격이 시작됐다.

 

웅치전투

정담을 김제군수에 임용하는 교지. 1592년(선조25년) 임금 선조가 정담을 김제군수에 임명한다는 내용이다. /사진제공=정담문중, 전라북도
정담을 김제군수에 임용하는 교지. 1592년(선조25년) 임금 선조가 정담을 김제군수에 임명한다는 내용이다. /사진제공=정담문중, 전라북도

왜군 6번 대장 고바야카와 다카가게(小早川隆景)와 그의 부장 안고구지에케이(安國寺惠瓊)는 6월 무주 경계를 거쳐 금산 제원으로 쳐들어왔다. 당시 제원을 지키던 권종은 싸우다가 전사했고, 방어사 김종례와 곽영은 고산으로 퇴각했다. 같은 달 23일 금산성이 함락됐으며, 전라도는 왜군의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했다.

전라감사 이광은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나주판관 이복남, 김제군수 정담 등을 웅치에 보내 방어하게 했다. 웅치는 진안에서 전주로 넘어오는 경계로 반드시 지켜야 할 요지였다. 당시 전 전주만호 황박도 의병 200명을 모아 웅치에 합류했다.

7월8일 웅치에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정담, 이복남, 황박 등은 당시 왜군 수천 명을 상대로 칼을 휘두르고 활을 쏘며 정면으로 돌진했으며, 이 과정에서 왜군을 대거 죽였다. 그러나 조선군은 병력 수가 부족해 패배했다.

정담이 진중에서 아들에게 보낸 유서. 웅치 전세의 급박함을 전하면서 갑옷에 이름을 써놓았으니 자신이 죽거든 이를 보고 시신을 찾으라고 하고 있다. /사진제공=정담문중, 전라북도
정담이 진중에서 아들에게 보낸 유서. 웅치 전세의 급박함을 전하면서 갑옷에 이름을 써놓았으니 자신이 죽거든 이를 보고 시신을 찾으라고 하고 있다. /사진제공=정담문중, 전라북도

 

웅치전투에 대한 조선시대 인물의 평가

실제 전투는 패했지만, 당대 인물들은 전투의 성과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왜군의 최종목표인 전주부성 점령을 막아내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실제 왜군은 웅치전투에서 전력을 대거 잃어, 전주 인근 안덕원 부근에서 전주부성을 정탐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라감사 이광의 명령을 받아 남원에서 웅치로 가던 동복현감 황진과 관군이 안덕원에 있던 왜군을 격파했다. 그 결과 왜군은 진안으로 물러났다가 7월 17일께 금산으로 완전히 철수했다. 왜군이 당초 목표인 전라도 점령을 실패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정의 중추인물이었던 유성룡은 당시 상황을 기록한 <징비록> 에서 ‘적(왜군)은 정예병들을 웅령(웅치)에서 많이 잃어 사기가 많이 떨어져 있었다. 이 싸움으로 전라도 만은 홀로 온전했다’고 했다.

당시 왜군들도 웅치전투를 가장 크게 패배한 전투로 인식하고 있었다. 당대 문신이었던 조익은 저서인 <포저집> 에 “(임란 이후) 일본 승려 화안이 부산에 왔을 때 이성구가 영위사로 파견돼 그를 접대했다. 그 승려는 일본이 대패한 전투 가운데 첫 번째로 웅치전투를 꼽았는데, 대개 자기네 명장(名將)이 죽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다.

조선시대 한문4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택당 이식이 쓴 이광의 행장(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에는 ‘왜적들 자신이 지금까지도 조선의 3대 전투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웅치의 전투가 그 중 하나로 일컬어지고 있다’고 나와 있다.

 

전투가 가진 의의

웅치전투전적비 /사진제공=완주군
웅치전투전적비 /사진제공=완주군

최근 역사학자들은 임진왜란사에서 웅치전투가 지닌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란 초기 어려운 상황에서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사수한 첫 전투여서다. 뒤 이어 발발한 이치전투도 승리할 수 있는 계기도 제공했다.

하 교수는 “웅치전투 이후 벌어진 안덕원 전투와 연결선상에서 봤을 때, 임진왜란 초기 관군의 실질적인 첫 승리에 해당한다”며 “개전 초기 관군은 일방적인 패배를 면치 못했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 이전 육상에서 거둔 첫 승리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며 “그 동안 호남이 이순신 장군의 수군에 의해서만 지켜졌다는 시각이 강했다”고 부연했다.

국방대학교 노영구 군사전략학과 교수는 “전주부성을 지켜내 왜란 당시 군량미가 부족해질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할 수 있었다”며 “이후 조정은 전쟁에 필요한 군량미의 상당수를 호남지역에서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왜란당시 육상에서 활동했던 관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바로잡을 수 있는 사례라는 주장도 나온다. 하 교수는 “임란초기 경상도 수령이나 장수들이 비겁하게 도망하는 사례가 있어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육상 관군은 의병, 수군보다 별 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평가받는다”며 “그러나 전라도 관군은 미리부터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으며, 웅치전투 역시 의병과 관군이 화합해서 이끌어낸 승리도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종우 전북문화원연합회장(원광대 사학과 명예교수)도 “다른 지역과 달리 전라도 의병은 공적인 개념에 입각해 관군과 정상적인 관계를 가지려고 노력했다”며 “그 결과 관군과 의병의 연합작전이 가능했으며, 관군에 자연스레 예속되는 의병도 많았다”고 설명했다.

 

△웅치전 주역 김제군수 정담

정담정려각. 1690년(숙종 16년) 이조참판 이현일이 “고(故) 김제군수 정담이 임진난 때 웅치 싸움에서 힘껏 싸우다가 힘이 다해 죽었으니 모두 정려해야 한다”고 건의해 지어졌다. /사진제공=정담문중, 전라북도
정담정려각. 1690년(숙종 16년) 이조참판 이현일이 “고(故) 김제군수 정담이 임진난 때 웅치 싸움에서 힘껏 싸우다가 힘이 다해 죽었으니 모두 정려해야 한다”고 건의해 지어졌다. /사진제공=정담문중, 전라북도

정담은 야성(평해)정 씨로 1583년 무과에 급제했다. 같은 해 여진족 3만 여 명이 함경도 북부를 침입한 ‘이탕개(泥湯介)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고, 여러 벼슬을 거치다 1592년 김제군수로 부임했다.

당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주판관 이복남, 해남현감 변응정, 의병장 황박 등과 함께 웅치를 방어했다.

그는 전쟁이 벌어졌을 때 웅치에서 후퇴를 거부하고 결사항전을 주장해 종사관 이봉, 비장 강운·박형길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충열록. 웅치전투에서 전사한 김제군수 정담의 활동과 그를 기리기 위한 노력들을 적은 책. /사진제공=정담문중, 전라북도
충열록. 웅치전투에서 전사한 김제군수 정담의 활동과 그를 기리기 위한 노력들을 적은 책. /사진제공=정담문중, 전라북도

정담의 활약상과 평가는 사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애 유성룡의 <서애선생문집> 에는 “전라도 웅치의 싸움에서 김제 군수 정담은 종일 힘써 싸워 적을 죽인 것이 헤아릴 수 없으나 끝내는 화살이 다해 군사는 패하고 자신도 죽었습니다”고 나와 있다.

이항복의 시문집 <백사집> 에는 그의 장인인 권율이 정담을 상찬하기까지 했다. 문집에는 “장인 권율장군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 사람들이 내가 주도한 행주싸움의 공이 크다고 하나 사실은 전라도 웅치싸움을 주도한 정담이 가장 크고 다음은 행주 싸움이다’라고 하셨다”고 돼 있다.

1690년(숙종 16년) 그의 순절을 기리는 정려가 세워졌다. 병조참판에 중직되고, 영해 충렬사에 제향됐다. 시호는 ‘장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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