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지희 썰지연구소장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되는 시간, 햇살에 눈부셔 눈을 반만 뜨고 있던 시간. 내 가까운 이의 가까운 이가 작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인은 심근경색. 이송 중 운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페이스북으로 그를 찾아보니 많은 이에게 온정을 베풀었고, 강단 있게 본인의 신념을 실천했던 호인이었다. 쉰넷, 영면에 들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다.
어제까지도 활발히 일을 하던 사람을 이제는 볼 수 없다. 그 소식을 들은 친구에게 나는 어떤 위로의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가까운 이를 상실했다는 감정. 내가 아직 경험한 적 없는 감정. 그 감정을 겪는 이에게 나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미안해하는 나에게 그는 ‘늦게 알수록 좋은 감정’이라고 담백하게 말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날 나는 떠돌이처럼 하루를 돌아다녔다. 사색을 하다가, 책을 읽다가, 산책을 하다가, 영화를 보았다. 이날 하림의 〈사의 찬미〉를 듣고 마음이 쿵 하였다. 이날 다큐멘터리 영화 〈여파〉를 보고 또 마음이 털썩 하였다. 페이스북을 보니 고인을 애도하고 그리워하는 편지들이 하나둘 올라온다. 밤이고 낮이고 올라온다. 그렇기에 오늘은 그리움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흔적이 없어진 정약전·정약용의 이별 터, 나주 율정점
최근 ‘나주 율정점(栗亭店)’을 찾으러 간 적이 있었다.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의 깊은 우애를 이야기할 때 항상 등장하는 장소이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함께 한양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던 중 이 둘이 헤어졌던 곳이 바로 율정점이었다. 율정점은 밤나무가 줄지어 있던 곳이라는 율정(栗亭)과 가게(店)가 합쳐진 단어이다. 주막과 민박이 모여 있는 작은 교통로를 상상할 수 있다.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이별을 직시하고 함께 내려가던 그 상실감이 어땠을까. 정약용이 쓴 시 〈율정별(栗亭別)〉에는 그 마음이 담겨있다.
초가 주막의 새벽 등잔불 시나브로 꺼질 듯,
일어나 샛별 보니 장차 헤어질 일 참혹하다.
물끄러미 마주 보며 할 말을 잃어,
억지로 말 꺼내려다 흐느낄 따름이다.
이번에 개봉한 영화 〈자산어보〉에도 율정점에 이별을 애처롭게 그렸다. 짙은 안개 속 길목에서 형제는 서로를 바라보다 헤어진다. 그 둘이 짐작한 대로 정약전과 정약용은 끝내 만나지 못하였다. 이처럼 나주 율정점은 200년 전부터 이어진 깊고 슬픈 이별의 장소이다. 최근까지 이 오래된 그리움을 마주하러 나주를 찾았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주일 전, 필자가 율정점을 방문했을 때는 그 흔적을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동행했던 신정일 선생님이 꼭 가야한다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지나갔을 정도였다.
결국 블로그를 검색하여 위치를 찾았다. 율정점의 흔적이라고는 마을주민이 만든 것 같은 ‘율정별리’란 팻말과 도로 표지판 ‘율정교차로’ 뿐이었다. 신정일 선생님은 과거 2차선이던 길이 6차선으로 확장공사를 하면서 사라진 것 같다고 했다. 넓어진 풍경에 연신 당혹해 하셨다.
흔적이 있어야 시선이 머문다. 시선이 머물러야 추억한다. 추억할 거리가 있어야 그리움이 생긴다. 이제 이곳을 방문한 사람은 누구도 율정점을 그리워하지 못할 것이다.
반민특위 습격사건, 김진혁 감독의 영화 〈여파〉
〈여파〉(2021)는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났다. 우연히 객사를 걷다 운이 좋게 현장예매를 하였다. 돌이켜 보니, 우연으로 관람했다는 게 부끄러울 만큼 깊은 상실의 이야기였다. 1949년 6월 6일, 친일 경찰들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를 습격하고 ‘빨갱이’란 주홍글씨를 씌웠다. 이후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후손들은 선친의 업적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가난과 이념의 굴레에 살아가고 있었다.
세상사를 살다보면 명확히 깨닫는 것들이 있다. 가령 인정받지 못한 순간, 존중받지 못한 태도. 그것이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와 같은 것들이다. 후손들은 기나긴 시간을 그런 비참함과 상실 속에서 버텨나갔다. 이 모든 상황이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닌 아버지의 유산이라는 것이 억울할 따름이다. 그 모습 속 후손들의 마음을 감히 짐작하여 아래에 몇 자 써본다.
‘가족을 돌보지 않아 원망한다. 찢어지게 가난한 이 삶을 원망한다. 나라만을 생각한 당신을 원망한다. 그리고 당신이 무엇을 어떻게 희생했는지 다 알지 못한 나 자신을, 원망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시대가 많이 나아졌다며 담담하게 사진첩을 보며 아버지를 추억하였다. 그럼에도, 선친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외치고 있었다. 〈여파〉에는 어떤 과정과 시간을 거치며 모았을지 모를 사진들과 자료들이 잔뜩 나온다. 조명 받지 못한 사건의 자료 찾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감히 짐작할 수 없다. 김진혁 감독과 반민특위 후손들은 오늘도 아버지의 일이자 대한민국의 역사를 천명하기 위해 행동하고 있다.
왜 〈여파〉라고 지었는지에 관한 질문에 김진혁 감독은 답하였다.
“미시사적 관점으로 제목을 지었습니다. 근현대사 교과서에 실린 그 짧은 한 줄의 사건, 그 사건 이후 남겨진 이들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반민특위 사건 이후 후손들의 인생의 여파.. 이 주제를 10년의 세월 동안 잡고 있는 내 인생의 여파.. 그리고 여러분이 이 영화를 본 이후의 여파.. 그런 의미로 ‘여파(餘波)’라고 지었습니다.”
역사의 존재이유는 간단하다. 온전히 나를 알고 온전히 상대를 바라보기 위함이다.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에서 무슨 일들이 있어났는지 알아야 한다. 내 부모님의 부모님이 무슨 일을 경험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를 본 오늘의 나는 너무도 부끄러웠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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