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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史로 밝혀지는 ‘장수 아이언 로드, 솔트 로드’

장영수 장수군수

장영수 장수군수
장영수 장수군수

금강의 첫 물줄기가 시작되는 장수군은 그동안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이란 큰 산줄기에 가로막혀 당연히 백제권역이라는 인식하에 한국 고대사가 정립되었다.

하지만 1995년 삼고리 가야 무덤의 발굴조사에서 이러한 인식을 전환 시켜 백제의 권역이 아닌 가야문화가 자리한 곳으로 확인됐다.

토기백화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당시 전국각지의 토기들이 무덤에서 출토되었으며 장수군 일원에 전국 최대규모의 철 생산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또한 문헌에서 화려하게 등장했던 강력한 가야의 소국인 반파국이 자리했던 것으로 뒷받침해주는 봉화 유적까지 많은 고고학적 증거들과 문헌자료가 장수지역의 중요성과 당시의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철을 다루는 기술력으로 성장했을 장수지역 가야는 그 당당함이 최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장수지역은 철기제작 기술력을 바탕으로 밤낮으로 쇳소리가 멈추지 않고 철을 사기 위해 모여든 전국각지의 사람들로 북적이는 생동감 넘치는 지역이었을 것이다.

이는 장수에서 출토되는 유적과 유물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특히 최근 호남과 영남을 잇는 상생의 장으로 떠오르고 있는 육십령 고개가 이를 잘 뒷받침 해주고 있다.

당시 철 생산지로서의 아이언 로드(철의 운반로)와 솔트로드(소금 운반로)의 중간쉼터인 장수는 도적떼가 들끓어 60명이상이 모여야만 이 고개를 지날 수 있었다는 지명유래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경제적으로 교류가 활발했던 곳이다. 상상만으로도 전율이 느껴지는 그런 부강한 나라였을 것.

시기는 조금 다르지만 삼봉리 봉화터에서 출토된 다연(차를 빻는 도구)은 당시 장수지역 사람들의 사치스러움을 잘 보여주는 출토품이기도 하다.

이후 후백제의 견훤이 국력을 다해 쌓아 올린 침령산성과 합미성은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을 지키기 위한 최고의 방어수단 이었을 것이다.

왕건의 후삼국통일과 고려의 건국은 우리나라 역사의 중요한 사건이지만 장수지역은 천년 간의 긴 잠에 빠져들어 쇠퇴를 거듭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니다.

왕건의 고려는 행정구역을 장수와 장계로 나누고 전략적으로 필요 없어진 장수지역의 중요 유적지들을 폐쇄 시켰다.

화려함을 수놓았던 가야문화가 잠들기 시작한 것. 간혹 강인한 DNA를 통해 2덕 3절 5의라는 역사적 인물과 장수향교라는 문화유산을 남겼지만 타 지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지금부터라도 모두가 하나 되어 험난한 백두대간을 넘어 화려함을 수놓았던 가야문화의 증거들을 돌아보고자 하는 의지를 불태워야 한다.

이를 통해 지역의 자긍심을 고취 시키고 많은 역사유적의 학술적 근거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교과서를 다시 쓰고 역사문화가 감미된 장수관광의 명품화를 실현 시켜야 한다.

이룩할 수 있는 가능한 실현을 통해 비로소 생동감 넘치는 장수로 환원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또한 장수군에 자리한 가야문화유산은 240기의 무덤 70여곳의 철생산유적 이를 지키기 위한 22개소의 봉수유적(인근지역 110여개소), 4개소의 산성이다. 이들 유적지들이 있는 자체만으로도 훌륭하다.

우리 장수군민의 역사의식도 매우 훌륭하고 자랑스럽다.

역사의 올바른 인식으로 부터 풍요로운 미래의땅을 준비하는 장수군의 모습은 모든 장수군민의 염원일 것이다.

나아가 백두대간을 넘은 장수가야를 통해 서가야 중심이었던 가야사를 새롭게 정비하고 동·서의 화합, 영호남 화합을 이끌길 바란다. /장영수 장수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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