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세진(문화비평가, 시인)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사실이나 진실일까? 1670년경, 플랑드르 출신의 화가 코르넬리스 헤이스브레흐트는 <그림의 뒷면> 이라는 작품을 그렸다. 그림을 보면, 실제의 캔버스 액자를 뒤집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 그림들을 ‘언뜻 보기에 현실로 착각하게 하는 효과를 가진 그림’이라는 뜻의 프랑스어‘트롱프뢰유(trompe-l‘oeil)’라고 불렀다. 당시에 유행했던 트롱프뢰유는 그림으로 착시를 만들 수 있다는 기술적인 의미가 컸다. 그림의>
트롱프뢰유는 17세기 이전에도, 이후에도 있었다. 신라의 솔거가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도> 나, 고대 그리스 시대에 제욱시스와 파라오시스가 대결을 펼치며 그린 그림들도 트롱프뢰유라 할 수 있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전반까지는 하이퍼리얼리즘(극사실주의)이 유행했다. 유행은 지났지만, 지금도 극사실주의 그림들은 계속해서 그려지고 있다. 노송도>
극사실주의 작품은 사진을 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한다. 정말 실제 같구나 하는 감탄과 함께 한편으로는 왜 사진과 같은 그림을 그리는 가에 대한 의문도 생긴다. 극사실주의는 트롱프뢰유의 현대적 재현이라는 의미만 가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실제처럼 보이는 허구를 굳이 만들어, 우리가 믿고 있는 어떤 것들을 뒤집으려는 것일까?
사물이나 현상을 뒤집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기술적 방식이고, 하나는 내용적 방식, 즉, 사유의 전복이다. 방식은 두 가지로 나뉘지만, 우리 눈에 먼저 다가오는 것은 기술적 방식의 산물인 미술작품이고, 내용적 방식조차도 작품을 보고 난 후의 해석에서 끌어내어진다.
현대인들은 선호하는 매체와 정도는 다르지만 거의 모두 SNS를 하고 있다. SNS를 통해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의 대부분은 이미지다. 현대인의 삶은 이미지 속에 들어있고,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기술들과 동거하고 있는 셈이다.
마셜 맥루언은 기술이 확장하는 것은 “인간의 신체와 감각”이라고 했다. 현대문명의 기술들은 여러 측면에서 예술의 영역을 확장했다. 극사실주의가 그 증거 중 하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확장해야 할 것은 감각과 신체가 아니라, 사유다.
삶은 비슷하다. 자신의 정체성을 상업적 사물을 통해 드러낼 경우에는 여러 범주(알고리즘)의 하나에 해당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다름을 얻는 방법은 다른 이들의 것과는 다르게 해석되는 내용을 갖는 것이다.
누구도 기술적 양식들을 피해가며 살기는 어렵다. 하지만 트롱프뢰유처럼 보이는 삶은 피해야 한다. 자신의 삶을 예술적으로 표현했을 때 트롱프뢰유 단계인지, 그걸 넘어서 사유의 전복 단계에 이르렀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삶의 명작처럼 보이는 대중 스타의 삶을 베낀다고 해서 멋진 삶이 되지는 않는다. 가짜를 보고 날아간 참새가 될 수도 있다. 멀리서 선망하는 삶이 실제로 보일지라도, 가까이 다가가 보면 꾸민 것일 수 있고, 알맹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처럼 다를 수 있다.
‘이것이 나의 삶’이라고 내놓은 이미지가, 체험으로 일군 풍경들에서 얻은 이미지가 아니라, 누군가 만들어 놓거나 제공한 것들에서 얻은 이미지라면, 그 삶은 트롱프뢰유에 깜박 속은 시간의 이어짐일 뿐이다. 언젠가 가짜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공허밖에 남지 않는다. 삶은, 이미지를 넘어선 알맹이가 있어야 한다. /천세진(문화비평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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