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세진(문화비평가, 시인)
팔복예술공장 <크리스 조던:아름다움 너머> 전시를 보며 말문이 막혔다. 시작부터 충격을 받았다. 작품 「침묵의 봄」은 농약으로 숨진 18만 3천 마리의 새들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새들임을 알 수 있는 형상 외에, 구별할 수 없는 무수히 작은 점들마저 모두 인간에 의해 사라진 새들이었다. 분명 아름다웠지만, 너무 아픈 아름다움이었다. 크리스>
전시의 마지막 순서였던 다큐멘터리 <알바트로스> 는 마음이 아파 끝까지 보지도 못했다. 함께 사는 생명체들에게 인간이 얼마나 사악한 존재인지를 다시 통렬하게 실감했다. 보들레르는 시집 『악의 꽃』, 「알바트로스」에서 이렇게 썼다. “뱃사람들은 아무 때나 그저 장난으로, / 커다란 바닷새 알바트로스를 붙잡는다네, / 험한 심연 위로 미끄러지는 배를 따라 / 태무심하게 나르는 이 길동무들을. / 그자들이 갑판 위로 끌어내리자마자 / 이 창공의 왕자들은, 어색하고 창피하여, / 가엾게도 그 크고 흰 날개를 / 노라도 끄는 양 옆구리에 늘어뜨리네. / 이 날개 달린 나그네, 얼마나 서투르고 무력한가!”알바트로스는 거대한 날개 때문에 활주 공간이 없으면 날아오르지 못한다. 인류 문명은 알바트로스의 활주공간을 계속해서 파괴했고, 더는 날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알바트로스>
크리스 조던의 작품 중에 「미드웨이 : 자이어의 메시지」라는 것이 있다. ‘나선형, 소용돌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Gyre는 아일랜드 태생의 시인 예이츠가 인류 문명이 2천년 주기로 순환한다는 이론을 만들었을 때 사용하기도 했다. ‘자이어론’을 문명발전론에 대입한다면 같은 모습이 순환하면서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문명이 순환하며 점진적으로 나아간다는 이론을 거부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문명은 그렇게 변모해왔다. 그런데 그런 이해가 인간의 삶을, 멈추는 순간 쓰러지는 무한질주의 자전거타기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중학교 시절, 체육대회 때마다 빠지지 않았던 경기가 자전거 천천히 타기였다. 넘어지지 않고 가장 늦게 결승점에 닿는 사람이 승리하는 경기였다. 지금 우리는 그 경기 규칙을 배워야 한다. 문화는 거꾸로 가면 안 된다고 믿겠지만, 얼마든지 거꾸로 갈 수도 있고 어쩌면 지금은 바로 그렇게 해야 하는 시간인지 모른다. 이제껏 질주하며 만든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후세에게 물려줄지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멈추고 뒤돌아서는 것도 문화다. 앞으로만 질주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전의 문화를 불완전하고 미개한 수준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맞는 생각일까? 우리가 찬양하는 모든 문화는 과거의 것이다. 한편으로는 찬양하며, 한편으로는 나아가야 한다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불일치를 갖고 있다.
구르는 것은 언젠가는 멈춘다. 시간의 장단이 있을 뿐이다. 인류는 지금의 예측치보다 더 오래 구를 수 있었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말을 실현하며 구를 수 있었다. 앞으로도 더 구르기는 할 것이다. 그런데 이끼는 끼지 않는데, 바퀴를 부식시키는 독이 자꾸 끼고 있다. 바퀴를 더 잘 구르게 하려고 윤활유를 쳤는데, 그게 독이어서 바퀴를 부식시키고 있다.
자전거는 멈출 때의 자세가 중요하다. 너무 속도를 낸 자전거는 멈추기 어렵다. 속도를 줄인 뒤에야 안정적으로 멈출 수 있다. 멈추자는 것이 아니다. 천천히 달리며 더 많은 풍경을 오래 보자는 것이다. /천세진(문화비평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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