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문창 소설가는 1948년 6월 29일, 남원시 운봉면 주촌(배멀마을)에서 아버지 형진우, 어머니 이호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운봉초등학교, 운봉중학교, 전주공업고등학교를 거쳐 1967년 전북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하였다. 1970년 전주 중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세례명은 아오스팅이었다. 1971년 대학 졸업 후 전북대학교신문사 전임기자를 역임하였고, 1973년에는 무주중학교 국어교사 발령을 시작으로 26년간 재직하였으며, 작가로 정진하기 위하여 51세 때인 1999년 전주중앙중학교에서 명예퇴직했다.
1968년, 대학교 2학년 때 시(詩) 「겨울이 지난 자리에서」가 대학신문에 발표된 것을 시작으로, 1969년 단편소설 「눈사람」으로 제13회 전북대학교 학예상에 당선되었으며, 1970년 단편소설 「출타(出他)」로 제1회 전국대학문화예술축전에서 우수상을 받으면서 작가적 역량을 높이 평가받았지만, 그의 문단 등단은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뒤에야 이루어졌다. 역작(力作)을 써서 등단하려 했는데, 문우들과 술 마시고 귀가하다가 그만 원고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후 오랜 시련을 겪었으며 1996년에야 『월간순수문학』에 단편소설 「조개껍질은 녹슬지 않는다」로 등단하였다.
2003년에는 ‘좋은 소설’이라는 카페를 만들어서 180여 명의 문우들과 교류하였으며 그해 3월 단편소설집 『엉클린 머리를 비다듬다』를 상재하였다. 2004년에는 장편소설 『여자 이야기』를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동희(시인, 평론가)는 이 작품의 서평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덧칠한 그림을 벗기고 보니 여자 이야기의 밑그림은 페미니즘에 경도된 여성찬가요, 나아가 사람 이야기였다. 또한, 적나라한 음란성과 외설성은 서사적 리얼리티를 담보하기 위한 의도로 읽었다. 이런 이야기가 세태 풍속을 공론화는 담론의 화두가 될 수 있을 것이냐는 논외의 문제다.”라고 밝히면서 문학은 문학의 방법으로 이야기하고, 소설은 소설의 길로 갈 것을 주문하였다. 작가는 이후로도 『불효자전』, 『대박』, 『자화상 그리기』, 『그 여름 깊은 잠』, 『참말같이 쓴 소설』 등을 연달아 발표하였다.
작가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해서 문단에서 인기가 아주 많았다. 1996년 가톨릭문우회에 입하였고, 2001년 전북가톨릭문우회장을 비롯하여 한국문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 한국가톨릭문우회, 국제펜클럽, 전북문협, 전주문협, 문예가족, 한국미래문학 등에서 활동하였다. 2006년에는 전북문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한 바 있고, 제17회 표현문학상(2002)을 비롯하여 전북예술문학상(2004), 한국미래문학상(2007), 전북문학상(2009)을 수상하였다. 아직 쓸 이야기가 많은데도, 그는 2011년 2월 12일 새벽 심장마비로 세상을 하직했다. 그때 그의 나이 63세였으니,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문단의 선후배들은 모두 황망하기만 했다.
조기호 시인은 형문창과의 인연을 애틋하게 회상했다. 첫 만남에서부터 그의 이름은 시빗거리(?)였다고 했다. 그보다 나이 많은 문단의 선배들은 그를 ‘형문창’이라 부르는데 난색(?)을 표했고, 그래서 곧잘 ‘아우문창’으로 고쳐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상수리 열매보다 더 커다란 두 눈을 끔벅도 않고 / 두꺼피 파리 차먹듯’ 술도 잘 마셨고, ‘검정 무쇠로 지어 부은 가마솥 뚜껑 같은 사람/ 뜸이 들면 주르륵 눈물 한 방울’ (조기호의 시 「막이야기꾼 아우문창」에서) 흘릴 줄 아는 인정이 넘치는 사람이었으며, 뛰어난 글쟁이였다고 했다. 『참말같이 쓴 소』과 『거위의 꿈』을 이승의 마지막 이야기로 남기고 떠났다며 안타까워했다.
김상휘 소설가는 형문창을 지구에 내려온 ’반달곰‘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지구에서 감성어린 형(邢) 작가의 외로움을 충족시켜주지 못하여 그가 떠났다고 했다. 아름다운 낭만주의자였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그 모습이 ’도토리를 배 속에 잔뜩 채워놓은 욕심만은 반달곰‘ 같았다고 그를 회상하였다. 형문창이 훌쩍 떠나버렸던 2011년 11월에 발행한 『문예가족』에는 ’소설가 형문창 추모 특집‘을 실었는데, 여기에는 이목윤 시인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와 형제처럼 지냈던 이목윤 시인이 직접 그의 연보를 추적하였고, 그를 사랑했던 문우들이 추모의 글을 모았다. 올해 초, 고인(故人)이 된 이목윤 시인은 그의 말대로 지금쯤 어느 행성에서 ’형‘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함께하고 있을 것이다.
여보게 아우!
아니 이제 형이지, 자네 먼저 그 행성에 갔으니
뒤따라가야 할 우리는 그날부터 아우가 되는 걸세
그래 자네는 형문창이니 항상 형인데도
아우 먼저 형님 먼저가 늘 어울하다던 자네
호랭이가 답싹 물어갈 사람아!
그래서 그리 서둘러 갔으며
진짜 형님 되는 거 생각만 해도 기분이 째지는가!
이목윤 시인의 시 「백만 불의 눈웃음 형문창」의 일부
정군수 시인(전 전북문인협회 회장)도 형문창과 각별한 사이였다. 대학 선후배로, 재학 중 소설가 최명희와 형문창과의 추억을 비롯하여 많은 이야기를 했다. 특히, 형문창이 등단하려고 준비했던 원고 뭉치를 잃어버리고 겪었던 시련에 대해서는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했다. 늘 함께하며 문학과 인생을 토로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은 다음 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대 함께 가던 길 멈추고 어느 주막에서
물 먹은 별 서성이는 밤
호올로 누구를 기다리는가
입술 닿은 술잔 아직 온기 남았는데
어쩌자고 휴대전화에 모두 실려 보내고
아득하게 혼자서 멀어져 가는가
달밤 아니더라도
그대 그리우면 이승길 저승길 맞닿아 있어
소리쳐 부르면 달려오기도 하련만
비오고 길 잃은 날은 어이하리
사랑은 늘 울음으로 다시 피더라.
우리 걸어온 발자국 노을이 붉다.
-정군수 시인의 시「악수」의 일부
참고자료 : 문예가족동인회 발간 『문예가족』 제19집(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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