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 [울림의 탄생](2020)은 60년 인생을 걸어 북을 만드는 악기장 임성빈 보유자가 그의 아들이자 전승교육사 이동국과 함께 ‘대북’을 제작하는 영화이다. 소아마비 장애를 가진 고아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 북을 만나 평생을 바쳐 경기도무형문화재 제30호 악기장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귀에 이상이 있음을 감지한 보유자는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안 남았음을 직감하고 사람들에게 마음을 위로하는 마지막 울림을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주목해야할 것은 두 가지이다.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작업에 임하는 임성빈 보유자, 그리고 그 곁을 지키고 힘을 더하는 아들 이동국이다.
문화유산은 윗세대에서 아랫세대까지 유산처럼 전해지는 문화를 뜻한다. 건강한 문화유산을 만들려면 훌륭한 작품을 만들고 전하는 윗세대도 중요하지만, 본질을 바르게 익히고 시대의 흐름과 자신의 개성에 따라 변화를 만드는 아랫세대도 중요하다. 이번 이야기는 가족이 함께하는 명절, 추석을 맞아 문화유산을 잇는 2·3세대들의 이야기를 담아 전한다.
내 정체성은 전통, 판소리 최잔디 이수자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심청가) 이수자 최잔디는 2018년 전주대사습놀이 ‘젊은 판소리 다섯 바탕’에서 판소리의 정석을 보여주었다. 최잔디는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노래 잘하는 아이’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설장구 최막동 명인이고, 고모는 성찬순 선생님의 제자였을 정도였다. 6살 때 이모와 함께 길을 걷다 우연히 소리를 듣고 시작한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이모랑 지나가다가 국악 소리에 꽂혔어요. 2층 국악학원에서 나던 소리였죠. 고집 부려서 학원에 올라갔던 기억이 나요. 내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실력과 응원이 더해지니 승승장구했다. 국립국악고등학교를 다녔고,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입학했다. 그러나 스무 살을 전후로 삶이 크게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한예종 입학 이후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가구는 물론 평생을 간직하고 싶었던 피아노까지 팔았다. 공연하는데 드는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학교도 나가지 않게 되고 시험을 치지도 못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도 하고 보컬트레이너로 일을 하였다. 그렇게 20대의 8년이 사라졌다.
어느 날, 큰 수술을 하게 되었고 회복을 위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병원 안을 걸어가던 중에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게 되었다. 마침 [국악 한마당]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남도민요를 부르고 있는 사람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하더라고요. ‘소리를 너무 하고 싶다. 안 하면 안 될 거 같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안되겠다. 다시 시작해보자’하고 퇴원하자마자 학교에 재입학 서류를 제출했어요.”
지금은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지만 과거 탄탄히 다진 실력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그만둘 생각을 한 그의 이야기는 참 파란만장했다. 그는 국악인의 길을 응원해준 가족과 선생님께 너무 감사하다고 한다. 최잔디는 어릴 적 광주에서 김향순 보유자와 이순자 보유자에게 판소리를 배우고, 강정숙 보유자에게 가야금 병창 미 산조를 사사하였다. 그녀의 20대를 품어준 고 성창순 보유자와 30대를 함께하고 있는 김수연 보유자까지. 이렇듯 최잔디의 판소리와 가야금, 철현금에는 모든 인연과 사건이 담겨있다.
“올곧이 전통을 이어가고 싶어요. 예술가라면 일단 자신의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에게 정체성은 전통이고 명맥을 잇는 거죠.”
전통이라는 질문과 답, 옻칠장 이선주 이수자
전북무형문화재 제13호 옻칠장 이수자 이선주는 작품 활동, 문화재 보존처리, 대학교 출강 등 활발히 옻칠 활동을 하고 있다. 부친 이의식은 전북무형문화재 제13호 옻칠장 보유자이다. 어릴 적부터 놀이터는 아버지의 공방이었다. 한창 때에는 4~5명 정도 삼촌들이 계셨고, 늘 작업하는 모습을 구경하였다. 옻칠 일을 시작한 것은 고등학생 때, 마감이 바빴던 아버지의 일손을 돕기 시작하면서이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전공은 이과였다. 대학도 자연계열로 진학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일손을 도울 때가 훨씬 재밌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버지 일을 이어받아 공부해보자고 다짐하였다.
“적성에도 맞다 싶어서 옻칠을 평생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게 쭉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일본 교토조형예술대학교 유학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계속 더 공부할 수 있는 학교에 가고 싶었거든요.”
어느 날은 교토 시내를 지나다 우연히 지도교수님을 뵈었다. 골동품을 보러 간다는 교수님 말을 듣고 따라갔다. 쉽게 보기 어려운 옛 물건들이 골동품상에 많았다. 이전부터도 보존처리를 하고 있었으나, 이때의 경험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으로 보존처리일도 시작하였다.
전통을 크게 보존과 활용으로 구분한다면 이선주 자신의 성향은 보존이 더 맞는다고 한다. 그러나 출강을 나가는 지금. 전통의 내일을 그리는 것도 후학을 위한 자신의 몫이라고 말한다. 깊은 탄탄함 위에 새로운 것을 만드는 맛이 전통이라 설명하였다.
이선주는 옻칠과 더불어 다양한 것을 배웠고, 그것이 모두 옻칠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그는 지금도 전통과 새로운 사이의 적당한 지점을 찾기 위해 고심 중이다.
“전통은 전통대로 살리면서 새로운 것을 하고 싶어요. 최근에는 벽화를 그려봤어요. 이런 저를 보고 한편에서는 좋은 기술을 가지고 왜 벽화를 그리느냐고 하시는 분들도 있었고요. 저는 새로운 도전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에요. 아마 앞으로도 꾸준히 절충점을 잘 찾아나가야겠지요.”
/썰지연구소 소장 설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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