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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정경 시인- 도대체, '그럴수록 산책'

기뻐도 슬퍼도 걷는 인간, 어느 산책가의 일상 유람 기술

아버지에게 불효한 얘기부터 해야겠다. 때는 바야흐로 2021년 9월 20일, 추석 전날의 일이다. 부모님과 동생 내외, 두 조카와 나. 식구들이 둘러앉아 배불리 저녁 식사를 마쳤다. 명절 연휴에 설거지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설거짓거리가 정말 끝도 없이 나온다. 설거지 당번이었던 나는 꼼짝없이 서서 화수분처럼 자꾸만 솟아나는 빈 그릇들을 해치워야 했다. 고독한 분투를 끝낸 뒤 버릇처럼 “아이고, 허리야.”라고 한 모양인데, 그 말을 들으신 아버지가 “나가서 좀 걸어라!” 하고 말씀하신 것. 나는 그만 욱하고 말았고, 예순 중반에 접어든 늙으신 아버지와 마흔 중반을 바라보는 늙어가는 딸이 서로에게 삐쳐서 쌀쌀한 밤을 보냈다. 그래서 이 책이 생각났다. 『그럴수록 산책』!

『그럴수록 산책』은 ‘도대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작가의 여덟 컷 만화와 짧은 에세이가 어우러진 책이다. 작가는 산책길에서의 에피소드를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버무려낸다. 「노래하는 돌」, 「지렁이의 보은」, 「개미 정도는」 등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만화와 「오디가 익어가는 동안」, 「가방의 무게」, 「오리도 그랬구나」와 같이 통찰력이 돋보이는 에세이가 곁들어져 있어 뜻밖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필코 즐거움을 찾아내고, 거기에서 웃음 나는 이야기를 추출하는 데 탁월한 기술을 가진 작가다. 억지스러운 교훈과 섣부른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는 것도 이 책의 미덕이랄 수 있겠다. 다만, 자연 속에서는 아무도 초조해하지 않고 각자 다른 빠르기로 찬찬히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그림과 글로 보여준다.

「잘했어, 순록들!」에서는 눈이 많이 오기로 유명한 일본 홋카이도에서 순록을 이용한 피자 배달 서비스를 계획하고 있다는 기사를 소개한다. 그 무렵 ‘영혼 없는’ 직장 생활을 하던 작가는 순록들에게 감정이입 해서는 순록이 “과연 피자를 배달하는 게 맞단 말인가?” 하고 착잡해 하다가 피자 회사가 순록 배달 시스템을 최종 보류했다는 후속 기사를 보고는 환호한다. 순록들이 빈번히 길을 벗어나고, 집 앞에 멈추기를 거부하고, 심지어 피자를 길가에 버리고 가버리는 통에 순록 길들이기에 참패했기 때문. 작가는 “세상의 순록들이 엉뚱하게 피자를 나르지 않고 눈 쌓인 길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닐 수 있기를 기원한다. 어쩌면 산책도 그런 게 아닐까.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면서 나에게 집중했다가 서서히 바깥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는 것. 또는 그런 힘이 생기도록 만들어주는 시간.

“저는 많이 걷습니다. 이유는 대체로 별거 없습니다. 날이 화창해서 걷고, 날이 흐려서 걷고, 기분이 좋으니까 걷고, 기분이 나쁘니까 걷습니다. 좋아하는 길이라서 걷고, 걸어보지 않은 길이라서 걷고, 버스를 타기엔 어정쩡한 거리여서 걷죠. 그리고 슬플 땐 좀 더 많이 걷습니다.” (『그럴수록 산책』, 4쪽, ‘프롤로그 – 걷기 시작했습니다’ 부분)

나는 이 책을 일터에 놓아두고 야금야금 읽었다. 점심시간에 책상에 앉기 전에 잠깐, 야근할 때 스트레칭을 하려고 일어선 채로 몇 분. 그렇게 틈틈이 내키는 대로 어느 날은 조금 오래, 어떨 때는 아주 짧게 책 속으로 산책을 떠났다가 돌아왔다. 이것은 내가 즐기는 산책의 방식과도 닮았다. 발바닥이 아프지만, 조금 더 걷고 싶을 때가 있고 왠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날도 있으니까. 그게 바로 산책의 묘미 아니겠는가. 산책하기 전과 산책 후의 기분이 미세하게 다른 것처럼 『그럴수록 산책』을 읽기 전과 읽고 난 후의 기분이 달라졌다. ‘아무렴, 어때.’ 하고 싱긋, 웃을 수 있게 된다.

“아버지, 다음에는 꼭 우리 같이 나가서 함께 걸어요.”

 

 

김정경 시인은...

201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시 「검은 줄」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 시집 『골목의 날씨』가 있다. 자칭 ‘산책중독자’. 오래된 골목을 유람하며 채집한 이야기로 시도 쓰고, 산문도 쓰며 살고 있다. 현재 전주문화재단 문예진흥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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