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4-12-01 16:26 (Sun)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오피니언 chevron_right 문화마주보기
일반기사

객미(客味), 손님 맛이라니?

김병기(전북대 명예교수)
김병기(전북대 명예교수)

12월 중순, 지금쯤은 대부분의 가정이 김장도 마쳤을 것이다. ‘추수동장(秋收冬藏)’이라는 말이 있다. 천자문의 한 구절이다. 가을 추, 거둘 수, 겨울 동, 감출 장. 가을철에 거둬들여 겨울철엔 잘 저장한다는 뜻이다. ‘겨울철의 저장’을 대표하는 일이 바로 김장이다. 그래서 혹자는 김장의 어원이 침장(沈藏:담글 침, 저장할 장) 즉 ‘담가서 저장’하는 데에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요즈음이야 농사기술과 자연저장 기술이 발달하여 겨울철에도 싱싱한 채소를 얼마든지 먹을 수 있지만 아직 냉장고 보급률이 낮았던 1970년대까지만 해도 김장은 겨울철 먹거리를 장만하는 필수행사였다. 많은 양을 오래 저장하기 위해 시골에선 김치나 동치미 항아리를 땅에 묻기도 했다. 잘 익은 김치는 겨울철 밥상을 풍성하게 했다. 김치 그대로도 먹고, 찌개나 볶음도 해먹고, 전도 부쳐 먹었다. 이렇게 김치를 다양하게 조리해 먹으면서 그 맛을 평할 때면 다른 지방은 몰라도 전라도에서는 “개미가 있다” 혹은 “계미가 있다”는 말을 하곤 하였다. 어떤 이는 ‘갱미’가 있다고도 한다. 물론 김치뿐 아니라 어떤 음식이라도 맛이 있을 때면 으레 이런 표현을 하곤 하였다. 무슨 의미일까? 우선 바른 말부터 찾자면 개미도 계미도 갱미도 아니고 ‘객미’이다. 한자로는 ‘客味’라고 쓰며 각 글자는 ‘손님 객’, ‘맛 미’라고 훈독한다. 글자대로만 풀이하자면 ‘손님 맛’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예술은 전통적으로 ‘상외지상(像外之像)’, ‘운외지운(韻外之韻)’, ‘미외지미(味外之味)’를 숭상해 왔다. ‘外’는 ‘밖 외’라고 훈독하고, ‘之’는 흔히 ‘갈 지’라고 훈독하지만 ‘…의’라는 뜻으로 많이 쓰는 글자이다. 따라서 ‘…外之’는 ‘…밖의’라는 뜻이다. ‘像’은 ‘형상 상’이라고 훈독하며 ‘韻’은 ‘운 운’이라고 훈독하는데 ‘시나 음악의 운율’, 사람이나 예술작품의 멋스러움인 ‘운치(韻致)’를 뜻하는 글자이다. 그러므로 ‘상외지상’은 ‘형상 밖의 형상’이라는 뜻이고, ‘운외지운’은 ‘운치 밖의 운치’라는 뜻이며, ‘미외지미’는 ‘맛 밖의 맛’이라는 뜻이다. 시나 그림이나 음악에 직접 표현된 형상이나 운치나 맛 말고 그 이면(裏面) 즉 행간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형상과 운치와 맛을 그렇게 표현해온 것이다.

배추에 소금, 젓갈, 고춧가루 등을 넣고 버무려 담은 것을 일정기간 발효시킨 후에 맛 봤더니 배추 맛도 아니고 젓갈 맛도 아니며 소금 맛은 더욱 아닌 제3, 제4의 오묘한 ‘이면(裏面)’의 맛이 난다. 정말 감칠맛이 난다. 바로 그 맛을 일러 전라도 사람들은 ‘손님 맛’ 즉 ‘객미’라고 표현한 것이다. 음식을 이룬 주체(주인) 즉 사용한 재료는 배추, 젓갈, 고춧가루 등인데 그 주체의 맛은 어디로 가고 제3의 손님 같은 맛이 난다고 해서 ‘객미’라고 표현한 것이다. 참으로 맛깔 나는 멋진 표현이다. 판소리를 가르치는 스승들도 ‘이면(裏面)’을 무척 강조했으니 이 또한 객미에 다름이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맛과 멋만이 아니라, 숨어있는 깊은 맛과 멋을 더 중시한 것이다.

오늘 날 국어사전은 객미를 “객지에서 겪는 고생의 쓰라린 맛‘으로만 풀이하고 있다. 삭막한 현실의 반영이다. MSG로 위장한 사특한 맛이 아니라 곰삭은 김치 같은 객미를 느끼고 창조하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김병기(전북대 명예교수)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오피니언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