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가(一家)’. 사전적 의미로 한집에 사는 가족을 말하기도 하지만 학문이나 기술, 예술 등 한 분야에서 독자적인 경지나 체계를 이뤘을 때 이 말을 쓰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일가를 이루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전북일보는 평범한 '우리'를 만나고자 합니다. 특별한 성공과 사건보다는 일상과 삶의 궤적, 특히 사람 그 자체를 들여다보겠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현시대의 전북을, 전북에서 살아갈 우리가 되짚을만한 의미를 찾아보려 합니다.
‘술’이 이 사람의 인생이다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전통주, 그중에서 '이강주'가 이 사람의 인생이다.
전주이강주 고천(古泉) 조정형 명인(81)의 이야기다.
배와 생강을 이용해 빚는 이강주는 육당 최남선이 평양의 감홍로, 전라도의 죽력고와 함께 조선 3대 명주로 일컬었을 만큼 유명했던 술이다. 그러나 일제가 통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공포했던 주세령과 주세법은 우리 전통주 문화를 말살시켰고, 해방 이후에도 그 여파가 이어졌다. 원형을 잃었던 전통주를 복원할 수 있도록 실마리를 찾아준 이가 바로 조정형 명인이다.
이강주에 대해 들어봤지만, 접할 기회는 없었다. 2022년을 앞두고 명인을 만나기 위해 전주시 원동 전주이강주 공장을 찾았다. 무엇이 그를 이강주 복원과 확장에 매진토록 했는지 궁금했다.
한복을 차려입은 조 명인은 호방한 웃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인사를 나눈 후 자리에 앉자마자 곧장 서류철 하나를 꺼내 건넸다. A4 용지 열 장 남짓. 그동안 그가 언론과 인터뷰한 기사 중 일부다. 이강주에 대한 설명은 여기서 참고하면 된다고 했다. 지난 7월 조윤주 식품명인체험홍보관장과 함께 출간한 ‘전통주 비법과 명인의 술’이라는 저서도 함께 건넸다. 여기에는 본인 약력이 있으니 참고하라 말했다.
명인이 숱한 인터뷰를 해왔음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인터뷰어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다는 인상이었다. 실제로 전북에서 조 명인 만큼 전국적 주목을 받은 이도 드물다.
"이강주에 대한 내용은 모두 거기(건넨 자료)에 있으니, 다른 이야기를 합시다." 명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질문에 대한 답은 거침이 없었고, 지나온 세월에 대한 기억도 끊김이 없었다.
술은 운명이었다
술빚는 가마솥이 땅속에서 치솟아 오르는 태몽 때문일까. 그에게 술은 운명처럼 여겨졌다. 대대로 전주 부사를 해온 집안. 향토사학자이자 서예가이며 시조 시인인 작촌(鵲忖) 조병희 선생의 아들. 명인이 태어나기 전부터 전주 다가동 본가에는 전라도에서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오갔고, 사람들이 모이다 보면 빠지지 않는 것이 술이었다. 집안에는 늘 술빚는 냄새가 가득했고, 어린 시절 술지게미를 먹으며 컸다. 이강주는 조 명인 가문의 6대째 내려오는 가양주(집에서 담근 술)다.
술 빚는 삶은 대학 졸업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전북대 농대에서 발효학을 공부했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학교 추천으로 당시 국내 굴지의 양조회사인 목포 삼학소주에 입사했다. 공무원 봉급 세 배가 넘는 월급과 사택 제공 등 파격적인 대우에 고민하지 않았다. 풍족하지 못했던 가계를 부양할 기회였다.
이후 25년 동안 목포 삼학소주를 거쳐 전주 오성주조, 이리 보배소주, 제주 한일소주 등 유수의 양조회사 공장장을 맡았다. 그러다 문득 "애주가들 기호에만 맞춘 술이 과연 좋은 술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당시 시중에 나온 술들은 수입산 주정에 물을 섞는 희석식 소주뿐 아니라 위스키도 원액을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술 회사에 다니고 있었지만 자신이 만드는 술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우리 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공장장으로 지내면서 머리가 트이다 보니,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 길로 본격적인 전통주 연구를 시작하고자 관련 기록을 찾기 시작했다. 회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국 도서관을 돌며 전통주 자료를 수집했다. 직원을 몰래 서울대 규장각에 보내 '술 주(酒)만 보이면 앞뒤 장을 복사해오라'고 시키기도 했다. 시간만 있으면 산골 오지나 조그마한 섬까지도 직접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전국을 누비다 보니 가산은 탕진되고 회사도 결근이 잦았다. 이는 명인이 25년 동안 많은 회사를 옮긴 이유이기도 했다. 가족과의 갈등도 당연히 불거졌다.
전주이강주 공장 한편에는 명인이 70년대부터 조사한 자료들이 빼곡히 꽂혀있다. 명인이 전국 각지를 돌며 보고, 들은 기록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잘나가던 공장장도 그만두고, 집까지 팔아가며 모은 기록들이다. 당시 이사만 11번을 했다고 하니 가족들의 고생이 얼마나 컸을지는 짐작이 갔다. 명인은 아내와 세 딸에게 특히 미안함을 전했다.
"지금이야 사업도 안정됐고 아이들도 모두 장성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독한 짓을 했지."
특히, 아버지의 반대가 가장 컸다. 명인이 제주로 내려갈 때는 아버지로부터 부자의 연을 끊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던 터다. 안정된 삶이 보장된 길을 차버리고 험한 길로 들어서는 자식을 막고 싶었으리라. 다만 훗날 자식을 인정한 것은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고천(古泉). 옛날 술을 만든다는 의미의 조정형 명인의 호(號). 전통주 제작을 그토록 반대하던 아버지, 작촌 조병희 선생이 아들을 위해 지었다.
이강주는 '문화재'
조 명인에게 '이강주'로 기뻤던 일을 꼽아달라고 부탁했다. 큰 고민하지 않고 두 가지를 말한다. 이강주를 생산할 수 있게 된 일과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았던 일. 서울 올림픽을 한해 앞둔 1987년, 정부는 대한민국을 대표할 술 제조자를 찾아 향토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 '우리 것 찾기' 열풍에 더해 올림픽을 앞두고 전통 유산을 발굴하겠다는 취지였다. 당시 전주 이강주와 문배술, 안동소주 제조자 세 명이 기능보유자로 지정됐다. 1996년에는 전통식품명인 9호로도 지정받았다.
밀주 취급을 받던 전통주를 본격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된 것도 기뻤던 일이다. 1990년 정부의 허가를 받아 이강주를 생산한 지 30년이 지났다. 대학 졸업 후 25년을 소주 회사에서 일하다, 50세에 이강주 회사를 창업했던 조 명인도 팔순을 넘겼다. 6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오로지 '술'에만 매달렸다. 사명감, 또는 전통주를 빚는다는 자부심이 아니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이강주에 대한 자부심은 명인의 말 곳곳에서 스며 나왔다. "이강주는 따로 광고하고 싶지 않아. 문화재인데, 광고하는 것은 맞지 않지.", “대량으로 생산하면 작품이 아니라 상품이지. 문화재는 대량으로 나오지 않아.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해.”
혼자 이룰 수 있는 건 없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모든 것이 '운명'처럼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조 명인은 이 모든 게 '우연'이라 말한다. 이강주를 부활, 복원하고, 사업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지만, 모든 것이 본인이 아닌 남이 만들어준 것이라 한다.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겸손의 표현으로 읽혔다.
조 명인의 인생에는 두 가지 키워드가 있다. 진실과 노력. 진실한 마음으로 끈기 있게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고, 또 그래왔다.
"나는 진짜를 좋아해요. 그래서 국회의원들이 싫어. 차라리 농사짓는 사람이 애국자 아닐까요. 자기 일을 철두철미하게 하는 사람이 진정한 애국자라고 생각해요." 명인은 이런 마음이 자신의 뿌리에 배겨있다고 말했다.
대화를 나누는 짧은 시간 동안 그가 일궈낸 '전주이강주'라는 성과물 자체보다, 이를 위해 노력한 지난한 시간이 깊이 있게 전해져왔다.
그가 이강주였고, 이강주가 바로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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