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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화백의 미술이야기] 가장 거만한 사내 2- 쿠르베

절망하는 남자
절망하는 남자

낭만주의의 거장 들라크루아는 이들을 향해 “이 저주받을 리얼리스트여. 너희들은 내가 보는  환상을 보여줄 수 있느냐. 내가 창작세계로 은신한 것은 바로 사물의 실상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을 보여주는 너희들의 일상이 나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모든 더러움과 빈곤을 나에게 보여 주고 있구나”라며 악의에 찬 독설을 퍼부었다. 

정작 당사자인 쿠르베는 “그렇다면 나에게 날개 달린 천사를 보여주시오. 그러면 그려 보이겠소. 나는 나에게 보이는 것 이외에는 그리지 않겠소”라며 철저하게 반박하고 나섰다. 

반 부르주아적이고 민중공화국인인 그는 시민들의 친구이며 혁명의 지지자였다. 들라크루아에게 보들레르라는 이론적 후원자가 있었다면, 쿠르베에게는 샹플뢰리라는 이론적 지지자가 있었다.   

사실주의라는 단어를 맨 처음 사용한 선언에서 “다행스럽게도 어리석은 환상이나 자연과의 유희를 하는 범신론자들의 시대는 지났다. 진지하고 확신에 차 있으며, 아이러니하고 야수적인, 그리고 성실하며 시적인 사실주의가 나타났다. 이제부터 비평가들은 사실주의에 찬성이냐 반대냐 하는 것만 결정하면 된다”며 사납게 쐐기를 박아 버렸다. 한 시대의 풍운아로 우여곡절을 겪던 쿠르베는 그의 나이 51살 때 예술가 협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어 나폴레옹 광장에 있는 나폴레옹 기념 원기둥의 제거를 요구하고 시민들의 박수갈채 속에 파괴시켜 버렸다. 세월이 지나 다시 그 책임을 문책 받아 체포, 억류되었다. 더구나 그 원기둥의 재건 비용에 따른 배상금으로 전 재산을 몰수당하자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스위스로 망명하여 쓸쓸하기 짝이 없는 4년여의 생활을 하다가 죽었으며, 그의 시신마저도 42년 후에야 그의 고향인 오르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때까지의 미술사에서 본인의 사인을 가장 크게 했던 만큼 자신감이 넘쳤던 사내, 당시 왕실미술관 총장 뉴우엘케르크 백작에게 “각하,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거만한 사나이올시다”라고 했던 자신만만했던 쿠르베도 이제는 그를 혐오했던 사람이나 추종했던 사람들과 함께 과거에 머물러 있다.

인생은 그야말로 흘러가는 구름 한 조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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