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소설 「대지」의 작가 펄벅(1892∼1973)이 한국에 왔을 때, 이규태는 그와 여행을 함께했다. 늦가을, 덜컹거리는 차를 타고 시골길을 달렸다. “저거 봐요.” 펄벅이 외쳤다. 지게에 볏단을 짊어진 농부가 볏단을 실은 소달구지를 끌고 있었다. 첩첩산중 장수가 고향인 새내기 기자에게는 새로운 것 없는 풍경이었지만, 펄벅의 흥분은 가시지 않았다.
“미국 같으면 지게의 짐도 달구지에 싣고 농부도 올라탔을 거야. 소의 짐마저 덜어주려는 저 마음, 내가 한국에 와서 보고 싶었던 모습이었어.”
한국의 역사와 한국인의 의식을 탐사하고 기록하는 일에 생애를 바친 이규태(1933∼2006)의 ‘한국학 시리즈’는 이렇게 잉태되었고, 소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지게에 볏단을 짊어진 농부의 마음은 한국인의 정신과 기상으로 승화되었다.
이규태는 평생 언론인으로 지내면서 120권에 이르는 저서를 냈다. 한국인 마음씨의 원형을 파헤친 『한국인의 의식구조』와 『한국인의 민속 문화』, 『한국인의 샤머니즘』, 『한국인의 밥상 문화』, 『한국인의 정신문화』, 『한국인의 생활문화』 등은 우리에게 한국인이 누구인가를 깨우치며 ‘한국인의 힘’을 느낄 수 있게 해 준 ‘국민필독서’들이다.
저작들의 많은 부분은 1983년 3월 1일부터 2006년 2월 23일까지 24년간 조선일보에 연재한 ‘이규태 코너’에서 비롯됐다. 장장 6,702회. 한국 신문 사상 최장기 연재 기록이다. 그와 전주사범학교 동문인 소설가 최일남은 이 연재물을 “나날의 생활 속에서 불거진 파편 같은 현실에 나름의 줄기를 세우고 가닥을 잡는다.”라고 말했으며,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많은 이들은 “대한민국의 든든한 박물관 하나가 사라진 것”이라고 애통해했다.
그의 글은 문학작품과 영화로도 태어났다. 1961년 그는 나병 환자의 요양원이 있는 소록도를 취재하고 바다를 메워 ‘천국’을 만들겠다던 그들의 ‘눈물’을 기사로 썼다. 그 기사를 바탕으로 이청준(1939∼2008)이 쓴 소설이 「당신들의 천국」이다. 소설 속 취재기자 ‘이정태’는 이규태였다.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당시 ‘정전 암흑 속에 좀도둑도 없었다.’라는 제목의 현장 사설은 국민적인 성원을 끌어냈다. 한국의 ‘씨받이 문화’를 세상에 알린 이도 그다. 1971년 취재한 대리모 할머니의 기사를 바탕으로 쓴 칼럼 「씨받이 부인」(1984년 2월 9일 자)이다. 임권택 감독은 이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고, 배우 강수연(1966∼2022)은 1987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어릴 적 종이를 처음 보고 너무 신기해서 그걸 자다가 펴보고 자다가 펴보고 반복했다.”라던 그는 “전주 쪽에 철길이 나서 기차가 다닌다는 말을 듣고 땅바닥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들어보려고 했다.”라면서 고향에서의 추억을 말하곤 했다. 칼럼을 통해 전주를 ‘오두막 기둥에도 붓글씨를 써 붙이고 사는 예향의 수읍(首邑)이요, 먹물 잘 먹기로 옛 중국 천지에까지 소문났던 조선종이의 고장’이라고 표현한 그는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전주전동성당, 전주비빔밥, 콩쥐팥쥐의 고장 완주 등 전북의 이곳저곳을 글에 담았다.
고금의 역사와 동서 문물의 귀재를 직접 만날 수는 없지만, 그의 노고는 글로 남아 한국인의 삶과 의식에 영원히 살아 있다.
최기우 극작가는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소설)로 등단했다. 전북의 역사와 설화, 인물과 언어, 민중의 삶과 유희, 흥과 콘텐츠를 소재로 무대극 집필에 힘을 쏟으며, 희곡집 『상봉』 『춘향꽃이 피었습니다』 『은행나무꽃』 『달릉개』 『뽕뽕뽕 방귀쟁이 뽕함나니』 등을 냈다. 현재 최명희문학관 관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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