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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그런 새를 본다면 총으로 쏘겠습니까? - 브랑쿠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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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랑쿠지, bird in space(공간 속의 새)/사진=THEMET

그때의 그는 이미 아모리 쇼(The Amory Show)와 보자르의 국전 살롱 도튼느 등을 통하여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양치기 소년이 아니었던 것이다. 루마니아의 조그만 마을에서 양떼를 몰며 주머니 칼로 나무에 그림을 새긴다거나(조각) 겨울이면 눈으로 설상을 만들고(소조), 읽고 쓰는 것마저 혼자 익혔던 그가 11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등지자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다가 부카레스트에 있는 미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학창시절의 브랑쿠지는 피카소처럼 그 미술학교의 최우수 학생이어서 모든 공모전에서 메달과 상금을 독차지하여 그 당시 자기 나라의 전위적인 화가들을 매료시켰으나 좁은 환경에 한계를 느끼고 보따리를 꾸려 길을 떠났다. 

때로는 별을 이불 삼아 노숙을 하면서 파리를 바라보고 무조건 걸었다. 그러다가 병을 얻어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류네빌에서 머무르고 있는 사이에 파리에서 그 소식을 들은 루마니아인 친구가 2루이를 보내주어서 마침내 기차를 탈 수 있었다. 마침내 1904년 7월 14일, 지칠대로 지친 그는 파리에 도착하였다. 이 여행은 나중에 그가 돈을 벌었을 때 그의 유일한 사치가 “편안한 여행”이었을 정도로 힘들고 길게 느껴졌다.

동료 화가인 수틴과 어울려 영화를 본다거나 자신의 기타 반주에 맞춰 루마니아의 노래를 부르고 집시 같은 옷차림으로 바이올린을 켜다가는 보비노에 가서 이본느 조르주나 다미아의 노래를 듣는 것이 그의 기쁨이었다. 여성들에게 친절하기는 했어도 이성문제가 사건화되거나 밖으로 알려지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그의 작업실을 드나들던 친구들은 그가 매우 풍부하고도 다양한 애정생활을 즐기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소문난 호사벽은 여행이었다. 이 목신과도 같은 루마니아의 은자隱者는 모든 기차와 선박의 시간표를 암기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그가 1926년 브루머화랑의 전시를 위해 미국으로 여행을 갔다가 대기(공간) 속의 새라는 브론즈 작품 때문에 발생한 뉴욕 세관과의 재판은 매우 유명한 사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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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브랑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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