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치전투는 조선의 최대 위기 상황에서 전라도 점령의 예봉을 꺾어 전선 확대를 저지한 전투로 평가된다.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의 시원을 남기기도 한 전투로 실질적인 육상에서의 조선군 최초의 승전으로 평가받는다.
웅치전투는 지난 15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왜군은 금산성(현재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을 점령하고 이후 진안을 거쳐 전주(현재 완주)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전라도 관군과 의병이 호남수비군을 꾸려 웅치 일원에서 왜군을 막아낸 전투다.
웅치전투는 하나의 승전을 넘어 임진왜란 초기 조선 8도 중 마지막 남은 호남을 지키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전투로 평가받는다.
또 호남지역으로 공격해 오는 왜군을 막아내고 호남지역으로부터 군량과 물자를 조달하려던 왜군의 전략을 무력화시켜 일본의 조선 정복을 좌절시킨 결정적인 전투였다.
전라도가 보전되고 조선은 왜군에게 대항할 수 있는 군사력을 공급할 수 있게 됐으며 이후 전라도로부터 동원된 관군과 의병들이 주요 전투마다 참전해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임란 극복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특히 웅치전투를 계기로 전주사고의 실록과 태조의 어진을 안전하게 봉안한 조처는 향후 역사 연구에 큰 기여를 했다.
이 때문에 웅치전투는 역사적·전사적으로 중요한 전투일 뿐만 아니라 한국 임진왜란사를 재인식할 수 있는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이러한 웅치전투에 대한 증언은 수 많은 고서에서 나타난다.
웅치전투 관련 기록은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유성룡의 징비록, 조경남의 난중잡록,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이항복의 백사집, 진안지, 사천김씨세보 등에 기록되어 있다.
그중 유성룡의 징비록에서는 “왜적의 군사들이 전라도를 침범하자 김제 군수 정담과 해남 현감 변응정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때 왜적은 경상우도로부터 전주지경으로 들어와 정담, 변응정 등이 이를 웅령에서 막았는데 목책을 만들어 산길을 가로질러 끊어 놓고서 장병들을 독려하여 종일토록 크게 싸워 적병들을 헤아릴 수없이 많이 죽였다”고 웅치전투를 기술했다.
특히 유성룡은 “왜적의 정예부대가 웅령에서 많이 죽었으므로 그 기세가 이미 흩어져 버렸고 전라감사 이광이 또 의병을 성 밖에 베풀고서 낮에는 깃발을 많이 벌려 세우고 밤이면 온산에 횃불을 가득히 벌려 놓으니 왜적은 성 밑까지 와서 여러 번 돌아다니며 살피다가 감히 공격치 못하고 달아나 버렸다”며 “왜적은 돌아가다가 웅령에 이르러 전사한 사람의 시체를 모두 모아 길가에 묻고 몇 개의 큰 무덤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나무를 그 무덤 위에 세우고 쓰기를 ‘조선국의 충간의담을 조상하노라(弔 朝鮮國 忠肝義膽)’고 하였다”고 기록했다.
이 목비의 뜻은 ‘조선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군사에게 조의를 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만큼 웅치전투의 기세가 왜군의 입장에서 얼마나 웅장하고 대단했는지 또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지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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