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칠곡할매글꼴(이하 할매글꼴)이 전국적 유명세를 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각계에 보낸 신년 연하장을 할매글꼴로 제작하면서부터다. 연하장에는 "76세 늦은 나이에 경북 칠곡군 한글 교실에서 글씨를 배우신 권안자 어르신의 서체로 제작되었습니다"라고 적혀 국민적 관심을 불렀다.
경주 황리단길엔 할매글꼴로 제작한 대형 글판이 내걸렸고, 해병대는 할매글꼴을 활용해 입대 환영 현수막을 제작했다. 할매글꼴은 한컴오피스·MS워드·파워포인트 정식 글씨체로 등록되고, 국립한글박물관 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대통령도 반한 칠곡할매글꼴
할매글꼴을 모르면 간첩(?)이란 시쳇말이 있다. 할매글꼴이 시사용어 사전에 등재될 만큼 관심이 높다는 의미다. 할매글꼴은 칠곡군이 시행한 성인문해교육을 통해 일흔이 넘어 한글을 깨친 추유을(89), 이원순(86), 이종희(81), 권안자(79), 김영분(77) 할머니에 의해 탄생했다.
할매글꼴 주인공들은 지난 1월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윤 대통령, 김건희 여사와 특별한 만남을 가졌다. 할머니들의 사연을 들은 대통령실 초청으로 이뤄진 만남이었다. 이 자리서 대통령은 할머니들이 작성한 '대통령에게 전하는 희망 메시지'에 서명했고 대통령 기록물로 영구 보전했다.
윤 대통령은 검찰총장 신분일 때 젊은 세대와 소통하기 위해 자신의 SNS에서 할매글꼴을 사용한 바 있다. 그때 "칠곡군 문해교실에서 한글을 배운 어르신의 사연을 듣고 SNS에 사용하게 된 것"이라며, "어르신들의 손글씨가 문화유산이 된 것과 한글의 소중함을 함께 기리는 차원"이라고 설명, 관심을 보였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학교에 다니지 못한 할머니들을 위해 40여 년 만에 교사로 돌아와 수업을 진행하고 명예졸업장을 전달했다. 이 도지사는 "칠곡 할머니의 글씨를 처음 보는 순간 돌아가신 어머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했다"며 "어르신이 남긴 소중한 문화유산을 계승·발전시켜 평생 교육의 중요성과 가치를 널리 알려 나갈 것"이라고 했다.
할매글꼴 전시회도 이어지고 있다. 대통령실과 경북도청에서는 할머니의 일상과 시화 특별기획전이 이미 진행됐고, 국립한글박물관에는 할매글꼴로 제작한 표구가 상설 전시되고 있다.
16일부터는 어린이 동화작가 전이수와 함께 제주시 걸어가는 늑대들 미술관에서 '괜찮아'란 주제의 특별기획전이 한달간 열린다. 이 기획전은 코로나와 고물가로 힘들어하는 국민에게 따뜻한 위로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마련됐다. 오영훈 제주도지사가 홍보에 나설 만큼 기대가 크다.
칠곡군은 할매글꼴을 활용한 카카오톡 이모티콘, 농산물 포장지를 제작하고, 칠곡할매거리를 조성하는 등 지역 대표 브랜드로 육성할 계획이다. 김재욱 칠곡군수는 "할매글꼴은 일제 강점기와 산업화 시대를 견뎌내며 '근대 속의 전근대'를 살아온 할머니들이 남긴 문화유산"이라며 "글꼴을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다양한 상품을 개발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각고 노력의 산물 칠곡할매글꼴
할매글꼴은 일제강점기와 가난으로 한글교육을 받지 못한 마지막 세대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성인문해교육의 성과를 점검하고, 한글 문화유산으로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칠곡군은 2019년 9월 글꼴 제작을 위해 성인문해교육을 받는 400여 할머니 글씨체 가운데 개성 있는 다섯 분의 글씨체를 선정했다. 선정된 할머니들은 자신의 글씨체가 디지털화되어 영구 보존된다는 소식에 마지막 유언을 남기듯 온 힘을 다해 글씨 연습을 했다.
할머니들에게 글꼴 제작은 힘겨웠다. 4개월여 동안 1인당 2천여 장 종이를 글씨체로 빼곡히 채웠다. 획의 굵기를 일정하게 하려 네임펜을 사용했는데 한명당 7~8개를 쓸 정도로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영어 알파벳과 특수문자는 그림 그리듯 글자를 그려냈다. 가족들은 강사로 나서며 응원했다.
2019년 12월 마침내 할매글꼴은 한글과 영문 폰트로 칠곡군 홈페이지를 통해 정식으로 배포됐다. 폰트는 글씨체 원작자의 이름을 따 칠곡할매 권안자체, 이원순체, 추유을체, 김영분체, 이종희체로 이름 붙여졌다.
할머니들은 코로나 상황에도 값진 문화유산을 만들어냈고, 문화 수혜자에서 공급자로 우뚝섰다. 할매글꼴이 공개되자 "폰트를 보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작년에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이 난다"는 등의 극찬이 쏟아졌다.
추유을 할머니는 "살면 얼마나 더 살겠나. 아들, 손주, 며느리가 우리가 죽고 나면 글씨를 보며 기억했으며 좋겠다"고 했다. 자신의 글씨체가 대통령 연하장에 사용됐다는 소식을 접한 권안자 할머니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칠곡할매글꼴 날개를 달다.
칠곡군 내에 내걸리는 현수막은 대다수가 할매글꼴을 사용해 제작된다. 공직자들은 할매글꼴로 만든 명함을 사용하며 홍보를 한다. 분식집과 치킨집 등 식당은 할매글꼴 배달 손님에게 편지를 쓰자 호응이 이어졌다.
할매글꼴은 방송인·역사학자 정재환 전 성균관대 교수가 홍보대사를 맡으면서 대중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개그맨으로 활동한 정 교수는 우리말 겨루기 TV 프로그램 진행으로 한글과 인연을 맺은 이래, 한글문화연대 공동대표를 지내는 등 자타 공인 한글지킴이다.
연간 100만 명에 이르는 관광객이 찾는 경주 황리단길 입구에는 권안자체로 '지금 너의 모습을 가장 좋아해'라고 쓴 5mⅹ10m 대형 글판이 내걸려 있다. 글판 앞은 사진촬영 명소로 유명하다. 수원 해병대 사령부와 포항시 오천읍 해병대 교육훈련단은 '해병대 입대를 환영합니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란 현수막을 걸었는데, 할매글꼴이 장병들에게 고향의 정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 이유다.
충북 충주시 우리한글박물관은 할매글꼴로 제작한 표구를 상설 전시하고,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에게 공개하고 있다. 또 할매글꼴에 담긴 숨은 이야기와 제작 과정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안내 책자를 비치하고 별도의 기획전을 개최했다.
할매글꼴이 한컴오피스에 공식 탑재됐다는 소식에 할머니들은 토마토, 가지, 오이 등 직접 재배한 농산물을 한글과컴퓨터에 전달해 달라며 칠곡군청을 찾기도 했다.
국립한글박물관은 정규 한글교육을 받지 못한 마지막 세대가 남긴 문화유산으로 한글이 걸어온 역사에 발자취를 남기고 새 역사를 쓴 것으로 평가해 할매글꼴을 USB에 담아 유물로 영구 보존하기로 했다.
△칠곡할매글꼴 문화관광상품 된다
칠곡군은 할머니들과 어린이 동화작가 전이수가 16일 제주시 걸어가는 늑대들 미술관에서 '괜찮아' 특별기획전을 여는 것을 시작으로 할매글꼴 문화관광상품화에 나선다.
기획전은 '10대 같은 80대 칠곡 할머니, 80대 같은 10대 제주 소년'이 국민에게 따뜻한 위로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한다. 기획전은 전 작가가 2020년 칠곡군 수피아미술관에서 가족과 자연, 사랑을 표현한 그림 전시회를 연 것이 계기가 됐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전 작가의 작품 40여 점에 담긴 의미를 할매글꼴로 설명하고, 칠곡 할머니의 인생과 삶이 녹아 있는 시집과 시화를 선보인다. 할머니들은 전 작가의 그림을 감상하고 "시험 못 봐도 괜찮아, 손자는 잘만 살더라"처럼 "○○해도 괜찮아 ○○○하더라"는 형식의 대국민 응원 문구를 캔버스에 담아 전시한다.
오영훈 제주도지사는 "일제강점기를 온몸으로 견뎌낸 칠곡 할머니와 제주의 푸른 바다를 보고 자란 소년의 특별한 만남이 기대된다"며 "제주도민을 비롯한 관람객 모두가 깊은 울림이 있는 희망을 얻고 돌아가길 기대한다"고 소개했다.
칠곡군은 전시회에 이어 전 작가의 작품과 할매글꼴을 활용한 카카오톡 이모티콘을 제작해 가정의 달에 배포할 계획이다. 앞서 칠곡군 관광 명소를 배경으로 할매글꼴과 할머니들이 쓴 시를 이용해 만든 이모티콘을 제작해 배포했다.
할매글꼴 문화관광자원화를 위해 칠곡할매문화관 건립에도 나선다. 칠곡군은 윤 대통령으로부터 문화관 건립에 필요한 국비 200억원 지원에 대해 긍정적 답변을 받아놓은 상태다. 이 밖에 할매글꼴을 활용한 농산물 포장지, 벽화거리 조성 등 다양한 영역으로의 확장을 앞두고 있다.
한국지방신문협회 매일신문 이영욱 기자 [email protected]
△칠곡할매들이 전하는 위로와 사랑의 메시지
칠곡할매글꼴 할머니들이 어린이 동화작가 전이수와의 '괜찮아' 특별기획전과 관련해 힘들어하는 국민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사랑의 메시지를 내놓아 관심이 모아진다. 기획전은 전이수 작품 40여 점에 녹아있는 의미를 할매글꼴로 설명하고, 칠곡 할머니의 인생과 삶의 애환이 담겨있는 시집과 시화를 선보인다.
추유을 할머니는 "공부를 좀 못해도 괜찮더라"라는 메시지를 내고, "공부가 다 아니더라. 나는 4남매를 키웠는데, 그중에 공부하려는 애는 많이 시켰고, 하기 싫어하는 애는 적게 시켰다. 공부 적게 한 아이가 가까이 있으면서 더 자주 오가고, 효도한다. 공부가 다 아니고 성격이 좋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원순 할머니는 "돈이 없어도 괜찮더라"고 했다. 할머니는 동네에 돈이 있는 사람도 못쓰고 결국 가드라면서, 잘 먹고 마음 좋게 살다가 가는 게 좋다면서 할머니와 같은 세대들이 공감할 수 있는 삶의 지혜를 내놓았다.
젊은 세대에 전하는 메시지도 있다. 이종희 할머니는 힘들어 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시간이 지나니 어려운 일도 다 괜찮더라"며, "힘든 일도 괴로운 일도 시간 지나니 추억 같고, 눈감고 생각해보니 세월이 보약이더라"는 삶의 지혜를 던졌다. 김영분 할머니는 "혼자라도 괜찮아. 동네 할매 할배들이랑 10원짜리 화투도 치고. 음식도 맛있는 것 먹고 하니 괜찮다"면서, "너희는 나보다 젊으니까 낫잖아. 그러니까 걱정하기 보단 노력하고, 버티면서 살아보자. 내가 옆에서 도와줄께"라면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한편 할머니들의 연륜과 삶의 지혜가 담긴 메시지는 복잡다단한 현대를 사는 할머니와 같은 세대와 젊은 세대에 큰 울림으로 다가가면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할머니들의 메시지를 들은 한 칠곡군민은 "힘들어하는 나에게 딱 맞는 위로였다. 젊으니까 걱정하기보다는 노력하고, 버티면서 살아보자는 김영분 할머니 말씀에 한 번 더 용기를 낸다"고 소감을 전했다.
매일신문=이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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