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명창인 송우룡(宋雨龍)은 조선 순조 25년인 1825년 전라남도 구례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 집안의 어른들은 ‘우렁이’라 칭하고 항상 아명으로 불렀는데 사연을 한번 살펴보자. 그의 부친인 송광록은 얼마나 우렁이를 좋아했던지 우렁이가 논에 나오는 5월만 되면 우룡의 모친은 매일 논에 가 우렁이를 잡아 항상 식탁에 내놓았다고 한다. 그날도 우룡을 잉태하여 만삭이 된 몸이었지만 모친은 논으로 우렁이를 잡으러 갔다가 그만 논두렁에서 우룡을 분만하게 된다. 그래서 우렁이를 잡으러 갔다 세상에 나온 사연으로 ‘우렁이’라 불렀고 청년이 돼서야 아명(兒名)인 우렁 중 ‘렁’을 ‘용 룡(龍)’자로 고쳐 “우룡”이라 이름을 짓는다. 아버지 송광록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왕 송흥록의 친동생이다. 그러한 이유로 송우룡은 집안 내력의 힘을 얻어 소리의 법도를 계승하였고 성장 후 조선 철종과 고종 임금 양대 간의 이름을 떨친 명창이 된다. 판소리가 집안의 전통인 만큼 조선 소리판을 아울렀는데 한때 큰아버지 송흥록의 제자 박만순과 백중(伯仲)을 다투다가 송우룡이 어떠한 사연으로 목을 상한 후 박만순이 소리판을 주도했다고 전한다.
김창록은 송우룡과 같이 한 시대를 풍미한 명창으로 순조 22년인 1822년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에서 태어났다. 동편제의 명창으로 김세종, 박만순에게 뒤처지지 않을 만큼의 명성이 높았는데 그의 <심청가>는 가히 독보적이었다고 전한다. 또한, 그가 부른 <춘향가> 중 ‘춘향 방에 놓인 팔도 담배 대목’은 각기 다른 담배의 특색을 하나하나 들어 말하고 소리하는 것으로 그의 특기였는데 그 재담과 사설의 재미는 상상을 초월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대목의 소리는 전해오지 않는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김창록은 50세 이후 <심청가>를 부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청중이 자신의 소리를 듣고 흐느껴 울음을 그치지 않아 그로 인해 자신도 상심(傷心)하는 때가 많았기 때문이라 한다. 참으로 타고난 하늘의 감성을 지닌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소리 중에 혹, 까치 소리가 나는 대목이 나오면 마치 하늘을 나는 실제 까치인 줄 오인하고 모든 청중이 하늘 보았다 하니 가히 시대를 풍미한 명창이라 하겠다.
지나온 근대 두 명창의 일화를 보듯 그들의 삶은 희로애락 안에 녹아난 예술가의 혼과 같다. 환한 웃음과 신기한 이면 생활 속의 일화지만 그들의 모습은 예술 자체였다. 청중과 함께 소리판을 즐겼고 삶의 자체를 소리로 만들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그들의 소리를 즐겼고 품은 고된 삶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승화시켰다. 현대에는 그러한 생활 속 소리판의 모습이 점점 사라져만 간다. 우스개 일만의 일화도 찾아볼 수 없고 아집과 독선이 가끔은 구설(口舌)에 올라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이제 옛 그리운 명창들의 일화를 생각하며 잠시라도 여유롭고 쉼이 있는 삶의 시간을 그려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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