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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조선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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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성 전 동아일보 전문기자

햐아, 숨이 막혔다. 춘분을 앞두고, 올해도 어김없이 구례화엄사 각황전 옆 수백년 늙은 홍매가 몸을 풀었다. 너무 붉어 검은빛마저 감도는 흑매(黑梅)’. 붉고 깜찍한 홑꽃들이 검은 줄기에 ‘꽃등불’을 조롱조롱 매달고 있었다. 발갛게 우꾼우꾼 달아오른 숯불. 마치 두루미가 외발로 서 있는 듯, 허리를 살짝 비틀고 무심하게 먼 하늘을 돌아보고 있었다. 꽃마다 앙증맞은 다섯 장의 선홍 꽃잎. 영락없이 뿌루퉁하게 입을 내민 철부지 막내딸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홍매의 ‘검은빛’을 잡기 위해 스마트폰을 들고 헤덤볐다. 

순천선암사 늙은 매화들도 우르르 꽃을 토해냈다. 사람들은 육백 살이 넘는 무우전 담장곁 홍매와 원통전 뒤편의 백매(이상 천연기념물 제488호) 주위를 쉽게 떠나지 못했다. 뒤틀린 가지에 부르트고 거무튀튀한 껍질. 나비처럼 매달린 분홍 홑꽃. 녹갈색 꽃받침에다 모시적삼 같은 하얀 꽃잎. 벌들이 잉잉대며 정신없이 꽃 속에 코를 박고 있었다. 매화방창! 선암사는 조선매화의 전시장이었다. 무려 20여 그루의 토종매화(100~300년)가 꽃터널 꽃대궐을 이뤘다. 온종일 매화 향기에 취해 선암사를 떠나지 못하고 서성대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 매화는 역시 고묵은 토종매화가 으뜸이다. 떼로 핀 매화는 ‘양계장 닭’ 같다. 섬진강변 농원매화는 대부분 매실을 따기 위해 ‘대량 양식’하는 일본개량종이다. 꽃이 덕지덕지 달린다. ‘매화’라기보다는 ‘매실나무’다. 아무래도 고고한 맛이 덜하다. 향기도 위쪽으로 붕 뜨는 감이 있다. 후욱! 약간 지분 냄새가 나는 듯도 하다. 우르르 피었다가, 우르르 진다. 수명도 짧다.

조선매화는 뿌리가 만수산 드렁칡처럼 서로 얽혀야 좋다. 둥치는 껍질이 트고 구불구불 틀어져야 한다. 나무껍질은 검고 푸른 이끼가 수염처럼 늘어져 있어야 제맛이다. 늘어진 이끼는 바람이 살랑거리면 마치 푸른 실이 너울거리는 것 같다. 조선매화는 꽃이 작고 얇지만 야무지다. 열매가 부실하지만 오래 산다. 꽃이 띄엄띄엄 듬성드뭇하다. 향이 은은하고 오래간다. 저녁밥 짓는 냄새처럼 가만바람에도 낮게 깔려 스며든다. 알근한 암향(暗香)이다. 만고풍상 검버섯 마른명태 같은 몸에서 어느 날 안간힘을 다해 한 점, 두 점 꽃을 밀어 올린다. 깊은 산속에 저만치 홀로 핀 늙고 수척한 조선매화 한 그루. 

  선암사 ‘뒤깐(해우소)’은 늙은 매화에 둘러싸인 ‘고매 측간(古梅 厠間)이다. 홍매 두 그루와 백매 세 그루가 해우소 앞뒤로 가부좌를 틀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매화향이 그득하여 구린내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조선 땅에서 제일 오래되고, 가장 멋들어진 우물마루의 선암사 뒷간. 누구든 들어서기만 하면 그깟 변비쯤이야 제풀에 스르르 괄약근 빗장이 풀어져 버린다. 오죽하면 정호승 시인은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라고 했을까. 

문득 전주 경기전 사고(史庫) 앞뜰의 늙은 청매를 떠올린다. 좋이 백 살은 됐을까? 가지가 땅위 2미터쯤에서 누워 퍼진 와룡매(수양매·垂楊梅)라 더 애틋하다. 3겹 꽃잎이 맑고 투명하다. 푸른 빛마저 감돈다. 전주 사람들처럼 누가 알아주건 말건 혼자 벙글고 홀로 진다. 언젠가 달빛 슴베든 봄밤에 다가가, 이리저리 톺아보고 또 톺아봤던 일이 생각난다. 왜 그때 울컥했을까? 코끝에 걸리던 청아한 향기가 새록새록 생생하다. 요즘 서울 창덕궁 매화들이 우우우 한창이다. 하마 경기전청매는 지금쯤 이울었으리라. 타향살이 핑계로 못 본 지 오래됐다. 내년 봄엔 때맞춰 볼 수 있을까? 이렇게 또 봄날은 간다. 

/김화성 전 동아일보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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