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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가담항설] (2) 지금은 꽃동산, 100년 전엔 동학농민군 피 물든 '완산칠봉'

1894년 4월 8일간 세 번의 전투, 수천 명 전사
전주성입성비 새겨진 '보국안민' 한자 오류 등
관련 시설 무관심 속 방치⋯ 체계적 관리 필요

​전국적인 꽃놀이 명소로 소문나면서 매년 20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전주 ‘완산칠봉 꽃동산’. 지난 주말에도 만개한 봄꽃을 즐기기 위해 수많은 시민이 이곳을 찾아 완연한 봄의 한가로움을 만끽했다.

하지만 120여 년 전 이곳은 동학농민군의 피로 얼룩진 전쟁터였고, 수백 수천의 민초들이 지배층의 수탈에 맞서 목숨을 바쳤던 처절한 항쟁의 현장이었다. 화사하고 아름답게 핀 꽃동산의 이면에는 이들의 한과 눈물이 켜켜이 쌓여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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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산칠봉 꽃동산에서 바라본 전주시내 풍경./사진=이준서기자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는 시민은 얼마나 될까. 완산동에 터를 잡고 오래 살아온 주민 사이에서 '동학농민혁명 당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동학농민군이 완산칠봉에서 전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뿐, 아마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1894년 4월 완산칠봉에서 벌어졌던 민초들의 항쟁 현장을 되짚어봤다.

 

△전주화약에 가려진 ‘완산전투’

완산전투는 1894년 1차 동학농민혁명 당시 완산칠봉에서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과 '진압을 위해 한양에서 파견된 조선 중앙군인 경군' 사이에 일어난 전투다. 

그러나 완산전투는 '전주화약'에 가려져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학생들이 접하는 교과서에서도 동학농민군이 전주성 점령 이후 별 어려움 없이 조정과 화약을 맺고 자진 해산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을 뿐, 완산전투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다.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군은 1894년 4월28일부터 5월3일까지 8일간 완산칠봉 등지에서 경군에 맞서 일진일퇴의 격전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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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산전투 지형도.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다음날, 한양에서 내려온 초토사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 부대가 전주성에 도착해 포위를 시작했다. 

전주성을 포위한 경군의 규모는 1500명이었으며, 이들은 서양식 무기인 ‘개틀링 기관총’· ‘크루프 야포’ 등을 갖춘 조선 최정예 신식 군대였다. 

홍계훈은 부대를 세 군데로 나눠 각각 오늘날 신흥고등학교 인근 다가산 황학대와 한옥마을 오목대, 그리고 완산칠봉 등지에 배치했다. 이후 평지성인 전주성을 향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크루프 야포를 동원한 포격을 가했다.  

기껏해야 임진왜란 당시에나 쓰이던 ‘화승총’·‘천보총’ 등을 다루던 동학농민군에게 500m 밖에서 날라오는 경군의 포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당시 경군이 쏜 포탄이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에 떨어지기도 하는 등 전주성 곳곳이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결국 동학군은 경군의 포위망을 뚫고자 공세를 감행했고, 이내 완산칠봉을 중심으로 양측의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2~3만 명에 달하는 동학군은 천보총과 갑주를 갖춘 기병을 앞세워 공세를 퍼부었으나, 언덕 위에서 동학군을 내려다보며 조준 사격할 수 있는 경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황토현 전투에서 동학군을 총탄으로부터 지켜주던 장태(대나무를 쪼개 원형으로 이어 붙인 방어구) 역시 언덕 지형에선 무용지물이었다. 게다가 경군은 당대 최신 무기인 개틀링 기관총 진지마저 구축한 상태였고 결국 동학군은 경군의 압도적인 화망에 밀려 패퇴했다.

전투 직후 홍계훈이 조정에 올린 ‘양호초토등록’에 따르면 8일간 세 번의 교전 끝에 완산칠봉 산자락에서 전사한 동학군은 2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에 비해 경군은 전사자 1명과 부상자 2명만을 내었을 뿐이었다.

 

△무관심 속 잊혀진 동학농민군 발자취

완산전투는 당시 전주성 인구가 2만 명이 채 안 됐던 것을 감안한다면 2000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한 만큼 상당히 규모가 큰 사건이었다.

그러나 동학군이 수세에 몰린 전투였으며 청일 양국의 파병으로 인해 당황한 조선 조정이 급하게 전주화약을 체결해 마무리 지었고, 이에 묻힌 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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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산칠봉 중턱에 있는 '동학전적지'. 관리 주체가 없어 오랫동안 부식이 일어나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사진=이준서 기자

현재 완산칠봉에 있는 완산전투 기념 시설은 관련 내용을 기술한 ‘동학전적비’가 유일하다. 해당 비석은 80년대 건립된 이후 오랫동안 관리 기관 없이 방치되다 보니 부식이 심하게 이뤄져 육안으로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게다가 지난 1991년 동학군의 전주성 점령을 기념해 민간단체가 건립한 ‘전주성입성비’의 경우 기념비 하단에 새겨진 ‘나라일을 돕고 백성을 편하게 한다’는 동학의 교리인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도울 보(輔)’가 ‘보전할 보(保)’로 잘못 새겨져 있다는 지적이 여러 차례 제기됐지만, 현재까지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

지난 2019년 전주시가 건립한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인 ‘녹두관’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해 인근 꽃동산을 찾은 연 평균 수십 만 명의 관광객에 비해  방문 인원이 현저히 적은 실정이다.

사실상 관련 지식이 없다면, 완산칠봉을 찾은 방문객이 이곳이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역사적 현장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셈이다.

이에 대해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은 “완산칠봉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사한 수많은 농민들의 원혼이 잠들어 있는 역사적 현장이지만 유해 발굴을 위한 기본적인 학술조사조차 진행되지 않은 상황”이라며 “완산전투에 대한 재조명을 통해 지자체와 관련단체가 관심을 가지고 완산칠봉의 역사적 의미를 시민들에게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관련기사 [영상]전주 완산칠봉 동학전적비
이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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