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소'와 '침체'. 1945년 해방 이후 전북의 역사를 함축하는 단어다. 그간 전북은 광주‧전남에 밀려 중앙의 철저한 소외와 배제를 받아 왔으며, 오늘날에도 낙후된 인프라로 인해 나날이 지역을 떠나는 청년들이 줄을 잇고 있는 암울한 형국에 놓여있다. 내년부터 출범하는 ‘전북특별자치도’의 행보에 귀추가 주목되는 이유다.
전북 도민은 중앙 정부의 간섭없이 전북만의 자치를 통해 지역 발전과 성장의 달콤함을 처음으로 맛볼 수 있기를 염원하고 있다. 이러한 기대감은 역사적 경험에 의한 기대심리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전북은 고대부터 수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독자적인 ‘자치의 역사’를 써왔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 고대 : 전북에 정착한 고조선‧고구려인들
'자치(自治)'는 주민들 스스로 책임지고 처리하는 것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등의 정부가 직접 통제하고 주관하는 통치형태인 '관치(官治)'의 반댓말로 쓰인다.
고대 전북의 자치는 민족을 아우르는 '융화'의 역사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한반도 최초의 국가 고조선부터 다양한 민족이 이곳에 들어와 토착 세력과 결합해 새로운 자치 집단을 형성하는 과정을 수차례 밟아왔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0여 년 전, 고대 전북 지역에 고조선의 지배층이 바닷길을 통해 대거 유입됐다. 삼국지 동이전 등 중국사서는 기원전 194년경 고조선의 준왕이 신하인 위만에게 왕위를 뺏긴 후 이곳으로 이동해 스스로 '한왕(韓王)‘에 올라 '마한'을 건국했다고 전한다. 이때 준왕이 남하해 온 지역의 위치는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고문서를 검증했을 때, 오늘날 익산과 부안 지역에 해당한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당시 준왕이 자칭한 '한'이란 명칭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원이 됐으며, 전북을 기점으로 한반도 남부를 수백년 간 지배한 삼한 연맹체가 형성됐다.
이후 삼국시대를 거쳐 670년경, 전북 지역에 다시 낯선 이주민이 들어왔다. 668년 고구려가 당에게 멸망하자 왕족 고안승이 고구려인을 거느리고 익산 지역에 내려와 '보덕국'을 건국한 것이다.
'전북의 고구려' 보덕국은 신라와 연합해 당나라와 맞서 싸우고, 매년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엄연한 자치국가로서 존속했다.
그러나 676년 신라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보덕국은 존폐의 위기에 놓였다. 당나라의 위협을 물리친 신라가 보덕국을 자국 영토로 편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보덕국은 684년 신라의 압력에 저항하고자 수 개월간 무력 봉기를 일으켰으나, 이내 진압돼 15년만에 완전히 소멸하고 말았다.
비록 나라는 멸망했지만, 보덕국의 고구려인은 전주와 남원 지역으로 이주해 그 명맥을 이어갔다. 신라는 수도를 대신해 지방을 관할하던 5소경 중 하나인 남원경에 대다수 고구려 유민을 이주시켜 살게 했다. 이들이 백제인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신라에 동화할 수 있도록 유도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전북 지역이 고대부터 고조선 등의 이주민과 지역 토착민이 스스로의 자치를 통해 하나의 집단으로 동화하는 민족 '융화의 장'이었음을 보여준다.
△ 중세 : 전국을 호령한 또 하나의 백제 '후백제'
중세 전북 자치는 '팽창'의 역사였다.
통일신라 말기, 전국은 여러 군웅이 할거하는 대 혼란기를 맞았다. 이때 전북지역은 전주를 수도로 하는 '후백제'가 자리잡았다.
후백제는 신라의 군인이었던 '견훤'이 900년에 건국했으며, 중국에 사신을 보내고, '정개(正開)'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전북인이 중심이 된 후백제는 신라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고려를 수 차례 격파하는 등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 후백제는 신라의 9주 중 6주를 차지할 만큼 강력한 국력을 자랑했으며, 삼국 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후백제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935년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고려에 귀순해버린 것이다. 나라의 창업자가 적국에 망명한 최악의 상황에 놓인 후백제는 급격히 무너졌다. 결국 후백제는 고려와의 '일리천 전투'에서 패해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후백제는 비록 존속기간이 36년에 불과한 단명 왕조라 존재감은 낮지만, 수도였던 전북 일대에서는 후삼국 시대 혼란기 속에서 전국을 호령하던 당당한 자치 국가, 후백제 계승 의식이 남아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 근세 : 이름없는 민초의 손으로 ‘집강소’
근세 전북 자치는 '변혁'의 역사였다.
강력한 중앙집권국 고려와 조선의 행정력 아래 천년 넘게 이어지던 전근대적인 통치 질서가 전북에서 발발한 동학농민혁명으로 인해 무너지고, 민중 중심의 자치가 실현된 것이다.
1894년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해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순식간에 전라도 전역을 석권하고 조정과 '전주화약'을 맺었다.
전주화약 이후 전주성에서 철수한 농민군은 각 지역에 농민 자치조직인 집강소를 설치하고, '신분제 철폐', '토지개혁' 등 농민들이 염원하던 개혁 내용이 담긴 폐정개혁안을 실천하고자 했다.
전주와 김제 원평을 중심으로 전라도 53개 고을마다 설치된 집강소는 동학교도가 우두머리인 '집강'이 되어 지방의 행정과 치안 전반을 담당했다. 기존 군수나 현감은 이름뿐으로 형식상 존재할 뿐, 실질적인 지방 권력은 농민이 장악하게 됐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구성면에서 소농, 빈농에 신분면에서는 백정, 노비 등 천민이 대다수였다는 점에서 집강소의 등장은 양반 기득권 중심의 지방 권력이 피지배층인 일반 민중에게 넘어온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사실상 집강소 운영을 통해 전북에서 우리 역사상 최초로 민중 중심의 지방 자치권의 대변혁이 시작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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