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4-12-11 17:38 (수)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기획 chevron_right 전북 가담항설(街談巷說)
자체기사

[전북 가담항설](6) 일생 바쳐 500년 역사 지켜낸 전북 선비들

임란 때 '조선왕조실록 전주사고본' 내장산으로 옮겨 보존
안의·손홍록 '1호 문화재 지킴이'⋯매년 6월 22일 기념행사

"의병은 창을 메고 눈과 비를 잊었는데 못난 선비는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아침저녁 그저 지키기만 했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전주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긴 뒤, 매일 그 곁을 지킨 한 선비가 남긴 말이다.

'안에 숨겨진 보물이 있는 산'으로 불리는 내장산(해발 796m)은 그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지금으로부터 431년 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됐던 곳이다. 일본군을 피해 내장산 깊은 산중 절벽 위 '은적암'이라는 곳에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이 옮겨져 1년 간 보존된 역사가 있다.

image
정읍시가 내장산에 설치한 조형물. 당시 실록을 운반했던 이들의 모습을 구현했다.

지난 20일 오전 그날의 역사를 떠올리며 실록을 옮기던 선비와 같이 책 30권을 짊어진 채 내장산 은봉암을 향했다. 6월의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내장산 관광해설사의 안내를 따라 실록길을 오르고 또 올랐다.

총 8개의 다리로 이뤄진 실록길은 정읍시가 조선왕조실록 보존의 역사적 의의를 기리고자 내장산에 조성한 길이다. 지금은 반듯한 길이지만, 임진왜란 당시엔 인적이 드문 험한 산길이었다는 해설사의 설명이다. 1시간 남짓 수풀이 우거진 실록길을 지나 450여 개의 계단을 오르니 실록이 보관됐던 은봉암이 자리해있었다. 거친 산세 속에 파묻혀 있는 형국이라 무언가를 숨기기에 안성맞춤으로 보였다. 

지금처럼 인위적으로 조성된 길이 아닌, 깎아지른 절벽을 1000여 권이 넘는 실록을 짊어진 채 올랐던 선비의 정체가 궁금했다.  마땅한 길도, 운송할 수단도 없던 조선시대에 자신의 일생을 바쳐 이 험난한 여정을 떠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image
전주 한옥마을 경기전 내부에 있는 전주사고. 1592년 이곳의 실록이 내장산으로 옮겨졌다.

△일본군 피해 정읍 내장산으로 옮겨진 최후의 '전주사고본 실록' 

기록에 '진심'이었던 조선은 개국 이래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하는데 열심이었다. 실록은 조선의 정치와 경제, 사회 뿐만 아니라 당시의 문화와 생태계까지 당대 모든 것이 담겨있었다. 그런 실록의 소실을 막고자 조선 왕실은 서울의 춘추관 사고, 충주 사고, 성주 사고, 전주 사고 등 전국 4곳의 사고에 실록을 각각 나눠 보관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발발로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진 춘추관, 충주, 성주의 사고가 모두 불 타 소실되고, 전주사고본 실록만 온전히 남게됐다. 전국이 전쟁터로 변하는 상황에서 전주까지 일본군의 침입을 받기 전에, 실록 이전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이에 경기전 참봉 오희길과 선비 손홍록, 안의 등은 여러 논의 끝에 정읍 내장산을 실록의 보관처로 결정했다. 내장산은 산세가 거칠고 험해 일본군을 피해 실록을 숨기기에 최적이라는 판단이었다. 당시 64세의 안의와 56세의 손홍록은 이미 상당한 고령의 나이였음에도, 기꺼이 실록 운반에 나섰다. 이들은 전 재산을 털어 30명의 인부를 고용해 조선왕조실록과 고려사, 태조어진 등 전주사고에 보관돼 있던 총 1368권의 국가 서적을 전주에서 내장산까지 운반했다. 나이에 불문없이 실록이 담긴 60여 개의 궤짝을 짊어진 상태로.

image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안의와 손홍록이 1년간 숙식하며 지냈던 은적암 터.

△'1호 문화재 지킴이' 실록 보존에 평생 바친 안의와 손홍록

그렇게 1592년 6월22일, 실록은 90도에 가까운 가파른 절벽 40m 높이의 내장산 용굴암과 은적암에 옮겨졌다. 이곳은 안에서 밖은 보이지만, 반대로 밖에선 안이 보이지 않는 천혜의 요지였다.

그럼에도 마냥 안심할 순 없었다. 전화나 통신이 없던 조선시대에 전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실록과 함께 내장산 깊숙히 들어온 안의와 손홍록 등에겐 더더욱 그랬다. 이들은 전주에 일본군의 그림자가 점점 드리우는 긴박한 상황속에서 매 순간 일본군의 습격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안의와 손홍록은 370일의 시간 동안 7평 남짓의 은적암에서 교대로 숙식하며 무더위와 혹독한 추위, 궃은 비바람을 이겨내고 실록의 곁을 지켰다. 이후 실록을 내장산에서 충청도 아산과 황해도 해주, 강화도와 묘향산 등으로 옮길 때에도, 안의와 손홍록은 전쟁이 마무리될 때까지 실록과 항상 함께였다.

image
수직상체일기. 정읍 선비 안의와 손홍록이 조선왕조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기고 지킨 당시를 기록한 일기다./정읍시청 제공.

이후 1596년, 이미 환갑을 넘긴 나이였던 안의는 실록을 강화도로 옮기는 과정에서 더 이상 몸이 버티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안의가 사망해 일기가 끝을 맺었음에도, 손홍록은 홀로 실록 보존을 이어갔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해 또 다시 일본군이 침입해오자, 그는 묘향산으로 실록을 옮기고 그곳에서 당직을 섰다. 이렇듯 실록 보존에 평생을 바친 안의와 손홍록은 공로를 인정받아 고향인 정읍 칠보면의 남천사에 배향됐다. 

이에 대해 매년 6월 22일 내장산에서 '문화재지킴이의 날' 행사를 주최하는 정읍문화원 관계자는 "만약 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태조부터 명종대까지의 조선 초중기 역사는 완전히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며 "이번 문화재지킴이의 날을 맞아 우리 역사를 지키는데 큰 공헌을 한 선조들의 희생과 뜻을 기리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기획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