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크, 전라감사와 1880년대 동아시아 정세를 논하다.
1884년 11월 11일 11시에 포크는 사진기구를 챙겨들고 전라감영으로 향했다. 그리고 전라감영 선화당의 압도적인 형태와 주위 환경에 다시 깊은 인상을 받고 선화당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포크는 전라감사가 궁금해 하는 국제정세에 대해 설명하였다. 먼저 청나라와 프랑스의 전쟁(청프전쟁1884.8-1885.4.)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였다. 또한, 당시 일본과 중국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를 물은 전라감사에게 류큐 제도(오키나와 섬)의 문제(1872년 일본에 완전 복속)를 말해주고 ‘앞으로 발생할지도 모를 중국과 일본의 전쟁’과 관련하여 ‘조선이 어떤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했다.
이 내용은 정확히 10년 후인 1894년 조선을 장악하기 위해 일본이 일으킨 청일전쟁(1894.7-1895.4)과 전쟁 승리후 일본이 진행한 조선 강점 계획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즉, 청일전쟁 10년 전에 일본과 중국이 조선을 대상으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국제 정세를 조선 정부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면 1894년 발생한 ‘동학농민혁명’시 국내 문제가 이들 제국주의 침략세력의 빌미가 되지 않게 대처해 이를 방지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되지 못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어 안타깝다.
특히, 갑신정변(1884.12.4.-7.) 실패이후 포크가 ‘미국 대리공사’로서 조선의 고종과 민비 등과 긴밀히 접촉하며 활동한 내용 등을 고려할 때 이 같은 조언을 제시했을 것이란 점에서 이때 피력된 포크의 동아시아 정세에 대한 파악과 예측은 매우 주목되는 내용이었다. 당시 1884년 11월경 조선정부 및 주요 정책 결정자들의 국제정세에 대한 정보와 이해력이 포크의 표현처럼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이후 10년의 기간은 충분히 대비하고 국내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재 우리의 상황에서 반면교사의 역사사실로 더욱 부각된다.
그런데 포크가 만난 상당수 조선의 고위관리에 비해 전라감사는 “그는 깊은 관심을 보였고 내가 말한 내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표현처럼 적극적 수용자세와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전라감사 김성근은 식사중 대화에서 “나는 나이가 50인데 (서양의 문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너는 28살이고 나는 오히려 (나이는 많지만) 어린아이, 학생일 뿐이다. 많은 백성을 다스리는 높은 지위의 관리인데도 (새로운 과학과 문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을 하였다. 포크는 타 지역에서 만난 관리들과 달리 전라도 최고 관리인 전라감사가 백성을 다스리는 지도자로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솔직한 말을 듣고 “이는 좀 이상한 말이지만 나의 가슴을 파고드는 말이었다. 나는 이 말에 무척 감명을 받았다.”라는 표현을 남겼다. 이후 기록에서도 많은 조선관리를 만났던 포크는 이 같은 평가를 더 이상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전라감사 김성근에 대한 평가는 매우 주목된다. 이 같은 지도자의 겸손과 자신의 책임성을 강조한 표현은 현재의 우리에게 큰 울림이 된다.
△포크, 최첨단 사진기로 전라도 최초의 사진(寫眞)을 찍다!
포크는 11월10일 처음 전라감영을 방문했을 때 전라감사에게 전주를 둘러보는 것과 카메라 촬영허가를 요청하였다. 그런데 전라감사는 이미 카메라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자신을 찍어 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나는 감사에게 전주를 둘러보겠다고 요청했고 그에게서 마지못한 답변을 받았다. 그는 내가 고을에 나가볼 수 있게 집사를 보내겠다고 했다. 나는 카메라를 꺼내면 사람들이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말하면서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는 카메라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그러더니 자신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그는 몇 장의 사진을 꺼내어 놓았는데 그것은 바로 미국 군함 앨럿 호(USS Alert)와 앨럿 호에 승선했던 하웰(Howell)이 찍은 다른 사진들 이었다. 이것은 내게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어딘가에서 독일인을 통해 그 사진들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 내용은 앞서 조선정부의 지도부가 조세 곡물의 안전 운반을 위해 ‘화륜선’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사실을 설명하며 전라감사가 화륜선 사진을 갖고 있었음을 소개하였던 내용이다. 주목되는 것은 전라감사가 ‘카메라’에 대해 알고 싶어했고 ‘자신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한 부분이다.
전라감사 김성근이 ‘카메라’에 관심을 갖은 것은 당시 조선 사회 지도층에서 ‘사진(寫眞)’ 촬영이 최고의 신드롬적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은 공식적으로 발명된 것이 1830년대이었고 발명 후 전 세계로 급속히 확산된 서양 근대 문명의 대표 주자였다. 1830년대에 서구에서 발명된 '포토그라피(Photography)‘는 그리스어 ’빛’을 의미하는 포스(Phos)와 ‘그리다’라는 그라포스(Graphos)가 합쳐진 말이다. 1840년대 중국에 전해진 이 기술은 ‘빛을 담는다’라는 의미의 섭영(攝:당길 섭, 影:그림자 영)이란 단어로 표현되었는 데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초상화' 또는 ‘그림을 정확히 그린다.’는 의미인 ‘사진(寫:베낄 사,眞:참 진)’으로 표현되었다. 이 표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인의 사진인 1863년 청나라 사행단 이의익(李宜翼) 일행이 북경 아라사관(러시아공사관)에서 찍은 기록(이항억, 연행초록』)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이후 조선이 개항후 1870, 80년대 중국 및 일본에 파견한 영선사, 수신사 등에 참여한 사신들은 중국과 일본 방문시 사진관을 찾아 개인사진을 촬영하는 것이 필수 일정이 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전주 감영을 방문한 포크가 카메라 촬영을 하겠다고 하자 전라감사 김성근은 자신의 사진 촬영을 적극적으로 부탁한 것이었다.
포크는 전라감사와의 대화가 끝나고 자신을 위해 춤을 춘 4명의 무용수들의 공연이 끝나자 카메라를 꺼내놓고 이를 설명했다. 그리고 조명이 무엇인지, 유리컵에 든 신비로운 약이 무엇인지 따위와 같은 질문들에 최선을 다해 대답했다. 참석한 대인들 전체가 아이들처럼 순진한 표정을 짓고 내 지식에 경외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감사는 신문물에 관한 대화를 나누면서 부하 관리들과 더 친밀한 태도를 보여줬다.
포크는 이 같은 전라감영에서 본 “기묘하게 흥겨운 춤을 추는 소녀들, 우뚝한 기단 위의 관아건물(선화당), 용, 호랑이가 그려진 병풍, 커다란 북, 붉은색 기둥, 창과 무기들,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채 이리저리 움직이는 무리들, 문 옆에 초록색 옷을 입고 일렬로 선 소년들의 모든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고 ”이 모든 모습들이 모여 내가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선 하나의 멋진 장관을 만들었다.”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그 표현에 적확히 부응하는 모든 장면을 담기위해 기생과 감사, 전체 군중 등의 사진 6장을 찍었다. 이들 사진은 노출 시간은 28-35초, 조리개 노출은 ½-¾인치로 찍었다고 기록하였다. 이들 사진은 안타깝게도 나주-광주길에 짐실은 말이 물에 빠지며 상당수 망실되었는데 천행으로 전라 감사와 전주 기생의 사진이 남아있다.
/조법종(우석대 교양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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