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흙냄새가 콧속으로 훅 들어오면서 후두둑 비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느긋하게 천변을 산책하다 깜짝 놀라 함께 온 강아지 두 마리와 정신없이 달리는데, 소나기가 계속 뒤를 따라온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우릴 따라붙은 소나기 때문에 신흥계곡은 검은 바닷속이 되었다. 나는 깊은 바닷속 풍경 앞에 모종의 두려움 섞인 경이로움에 꼼짝 못 하고 현관에 서 있었다.
리호이나키였나, 한 장소를 안다는 것은 그 땅의 영기에 사로잡혀, 거기에서 두려움과 공경심, 겸손과 감사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을 뜻한다고 했던 이가.
바닥이 훤히 보이는 맑은 계곡물 속에 자유로이 유영하던 물고기, 새우, 다슬기, 가재 등 온갖 수생물이 점점 사라져가고, 자연의 풍광은 쓸쓸하고 황량한 것으로 되어가고 있다. 신흥계곡이 점점 무시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계곡을 먹어 치운 자본의 욕망이 그려놓은 지금의 풍경이 신흥계곡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의 위기이다. 지금의 이 풍경에 익숙해진다면 우리는 영영 풍경의 기원을 찾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걷기 시작했다. 매주 토요일, 한 주도 빠지지 않고 걸었다. 지난주에 161회를 걸었으니 그간 흔들렸지만, 오래 걷기에 필요한 근기나 결기는 입증되지 않았나 싶다. 소수였기에 ‘지는 싸움’일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지만, 걷기는 “신흥계곡을 모두의 품으로”라는 구호를 가슴에 안고 현실의 벽 앞에서 속절없이 주저앉는 대신 출구가 돼 주었다. 욕망의 기분에 이끌려 호락호락 호출당하지 않고 매주 토요일 오전이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진득하게 따라 걸으면서 주고받은 충만한 대화는 연대의식을 솟아오르게 했다. 비록 사소해 보이지만 걷기는 동무들을 신흥계곡으로 매주 불러들였고, 신흥계곡을 둘러싸고 있는 자본제적 체계 밖으로 나가는 길을 함께 모색하게 했다. 언제쯤 발전이나 개발에 식상해하며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다 쓰지 않고 남겨둘 수 있을까. 자본주의의 동선과 속도를 벗어난 사라진 기원을 회복하는 것이 가능할까. 특히 걷기는 우리의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어 주었다. 걷기를 시작한 후로 위기 상황이 아닌 적이 없었지만, 사회가 바뀔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가능하게 했다. 무엇보다 자본의 탐욕은 무시간과 탈역사로 터질 듯 채워져 있으니, 그 속을 느리게 걸으며 바람과 구름, 금낭화와 찔레꽃, 하늘을 나는 새가 이렇게 가까이 있음을 느끼며 어떤 삶의 양식을 몸에 익혔다. 조금씩 탈자본주의적 시간성과 역사성을 회복하여 둔해져 버린 감수성을 벼리고 비틀거리면서 지속할 수 있었던 어떤 삶의 양식, 그것이 바로 걷기였다.
신흥계곡에 살면서 갖게 된 기이한 느낌이 있다. 그것은 가끔 어떠한 장소가 오히려 나에게 먼저 다가와서 자신을 열어 보이는데, 그때 느끼는 그 친숙함은 무어라 설명할 수가 없다. 이러한 설명할 수 없음은 마치 이곳에 우연히 그러니까 아주 우연히 들어간 복덕방에서 그곳에 놀러 온 아저씨와 몇 마디 나누다가 그 아저씨의 소개로 이사 오게 된 이 사건이 사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신흥계곡이 나를 이곳으로 부른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여전히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니 걷는다.
“내가 위태로운 길 진물 나게 걷는 동안
그대는 다만 무사하신가”(권경인)
/이선애 농부∙완주자연지킴이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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