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고, 여전히 경제학자와 정책 입안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스는 <고용, 이자, 화폐의 일반이론>(1936)의 말미에서 실비오 게젤(Silvio Gessel)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 못해 안타까워한다.
“앞으로 우리는 마르크스 보다는 게젤의 정신에서 다 많은 것을 배울 것이라 믿는다 … 그의 스탬프를 붙인 화폐(stamped money)는 어빙 피셔교수로부터도 호의적인 승인을 받았다.”
흥미롭게도 실비오 게젤은 화폐에 유통기한을 정해서 돈을 오래 갖고 있을수록 손해보고 시간과 함께 가치가 사라지는 노화하는 돈(aging money)을 발명했다.
과연 그런 돈이 있을까 싶지만 실제로 통용되었다.
1929년 세계대공황으로 부채가 많고 실업자가 넘쳐나던 오스트리아 뵈르글 도시에서 노화하는 화폐시스템이 도입되었다. 돈은 매월 1%씩 가치가 감소한다. 뵈르글 시민들은 매월 1%분의 스탬프를 사서 노화하는 돈에 붙여야만 화폐가치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노화하는 돈을 은행에 저축하면 손해만 보다가 휴지조각이 될 터였다. 즉각 소비하는 것이 이득이었다. 이자도 없기 때문에 누구든 돈을 쉽게 빌려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실물경제가 힘차게 돌았다. 노화하는 돈을 시행하고 2년 후 뵈르글에는 공공부채와 실업자가 사라졌지만 오스트리아 국가가 개입해서 중단시키고 말았다.
노화하는 돈의 정신은 보편적 화폐 용도에 제한을 가하는 특수목적 화폐를 통해 발전해왔다. 화폐에 로컬리티를 부여하고 인간화하는 작업은 디지털 시대에 더욱 손쉬워졌다.
간단히는 코로나 19 사태의 재난지원금이나 지역화폐가 대표적이다. 재난화폐는 국내(달러와 교환 불가능)를 벗어나지 못하고 대형마트와 온라인 쇼핑 몰 사용이 제한되었다. 은행 저축이 불가능하여 이자도 기대할 수 없었다. 지갑에 넣어두기만 해도 안 되었다. 일정 시간이 지나서도 돈을 쓰지 않으면 자동으로 기부되어 카드에 충전된 돈은 사라져버렸다. 지자체별로도 다양한 지역화폐가 소비를 촉진하고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케인스가 실비오 게젤의 정신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것이라 말했던 역사적 내용이기도 하다.
지역화폐는 부가 밖으로 유출되지 않고 순환하여 지역의 생산과 소비를 촉진하고 살찌우는 휴먼 로컬 화폐로서 지속적으로 발전해왔다. 취약계층이나 특정대상에게 지급되는 바우처를 비롯해 지역사랑 상품권이나 교통카드 지원도 모두가 화폐를 인간화하고 지역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로컬 화폐시스템이다. 작년도 전북의 경우 내 지갑에 있는 전주사랑 상품권(돼지카드)을 포함한 지역화폐 사용액은 1조 7231억 원으로 전국에서 가장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지금 지역화폐가 멈칫하게 되었다. 윤석열 정권이 내년도 지역화폐 국비지원 예산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전액 삭감하였다. 문제는 더 큰데 있다. 몰인격화된 시장 화폐를 시장 밖의 따뜻한 커뮤니티에 ‘배태시키고 묻어서(embed)’ 연대, 애정, 활력을 불러일으킨다고 하는 지역운동의 고유한 가치와 역동성이 국가에 의해 부정당하는 것이다. 거장 케인스의 고전에 기대서 보니 공부와 성찰이 부족한 경제 관료들의 무지 또한 끔찍하다. 지역화폐 덕분에 그나마 사람들이 오가던 따뜻한 골목 동네가게에 찬바람이 분다.
/ 원용찬 전북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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