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11월1일-12월14일까지 조선의 충청-전라-경상 등 삼남지역 조사를 위한 포크의 전체 일정 가운데 이번 기획을 통해 연재한 부분은 11월8일-11월 20일 사이의 전라도 지역을 대상으로 하였고 실제 내용은 전라북도 권역에 한정하였다. 이번 연재를 마치며 남원일대에 대한 소개로 마무리 짓고자 한다.
11월 15일 나주에 도착한 포크는 자신이 나주까지 와야 했던 핵심 목표인 나주앞 영산강 포구에 쌀을 수송할 수 있는 ‘침몰하지 않는 증기선’이 들어올 수 있는 지에 대한 내용을 집중 조사하였다. 포크의 나주 물길에 대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나주의 내륙수로) 남쪽으로 1마일(1.6km) 거리쯤에 폭이 좁은 강(江)[영산강]이 있었다. - 지도 [대동여지도]에 나와 있는 강이었다. 이곳에는 조수가 있었는데 조수간만 차이가 대략 4-5피트(1.2-1.5m)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 하지만 배는 나주에서 10리 안쪽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
이 같은 조사내용 결론은 결국 나주 영산포까지 쌀 수송을 위한 증기선의 진입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후 포크는 광주로 가는 도중에 영산강 나루에서 자신의 짐을 실은 나귀가 물에 빠져 공들여 찍은 대부분 사진의 유리원판들이 깨지거나 물에 젖어 손상되는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1월 18일 담양을 지나며 사찰터에서 만난 석당간의 신비로움에 빠져 직접 담양 석당간을 그려 수첩에 남겼다. 이 같은 한국의 종교신앙과 불교문화에 대한 포크의 호기심과 관심은 남원 초입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11월 19일 순창을 지나며 ”순창은 미소(miso, 일본 된장)를 만드는 소스인 된장과 빨간 고추로 만드는 고약 같은 혼합물(고추장)로 유명했다. 조선에서 최고였다! “는 찬사를 남기고 남원으로 진입하였다. 이때 포크는 전라도는 대체로 나무와 목재가 매우 희귀하며 충청도에서도 비슷했다는 점을 강조하였고 길의 협소성과 관리의 문제를 들며 조선의 마을들은 도로가 발달되어야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남원초입에서 현재의 만복사지 유적을 만난 포크는 ”수많은 불교 유물들이 있었다. 나는 네 장의 사진을 찍었다. 노출 시간은 11-13초(해가 밝고 날씨가 좋았다)였다.“라고 적고 특히, 만복사지 입구의 석인상과 불상 등에 매료되어 ”부처의 얼굴과 옷, 자세는 평생 본 중에 가장 즐거운 것이었다. 진정으로 아름다웠다.“와 같은 많은 설명을 남겼다. 또한 남원 성벽이 보수되고 있는 상황을 기록하고 남원지역 전체 도면을 작성했다. 특히, ”남원 주변에서 나는 옷을 잘 차려입은 사람들을 특이할 정도로 많이 봤다. 그리고 키가 무척 큰 남자들도 많았다. 일부는 완전히 유럽 사람의 얼굴이었다.“ 라고 기록해 남원사람들 가운데 키 크고 옷 잘 입고 이국적인 얼굴 모습이 많이 남아있음을 기록하였다.
한편, 포크는 남원 초입부터 가마꾼들이 기생 여주인공이 살았던 곳이 어디냐며 흥분했던 곳을 찾아 오작교(烏鵲橋)(O-chak-kyo)와 광한루(廣寒樓)(Kwang-wol-nu)에 올라 강 건너 언덕들과 연못을 보며 ”이 다리와 집은 조선에서 무척 유명했다. 모두에게 알려진 전설적인 판소리의 무대였다.“고 소개하였다, 그리고 말미에 춘향전 내용을 소개하였다. 이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춘향전 영문번역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와 가치가 매우 높다.
남원 광한루 오작교 이야기 (포크는 춘향전 제목을 이같이 붙였음
옛날 옛적에 남원 부사가 있었다. 그에게는 아이 때 이름인 이도령으로 불리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가장 아름다운 기생인 춘향이와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서로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약조를 했다. 그런 후 부사와 아들은 서울로 갔다. 그리고 새로운 부사가 남원에 내려왔다. 그는 백성들을 착취하기로 악명을 떨치는 나쁜 사람이었다. 그는 춘향을 원해서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응하지 않았다. 그가 묻자 그녀는 이유를 말했다. 그는 그녀에게 매질을 하고 감옥에 가뒀다. 그리고 5-6년을 가둬두고 때때로 불러서 매질을 했지만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 동안 이도령은 이 소식을 들었다. 그는 과거시험을 통과하고 어사 벼슬을 얻어서 세 마리의 말이 새겨진 마패를 품고 전라도로 파견됐다. 그는 거지처럼 더러운 옷을 입고 남원으로 내려왔다. 부사는 자신의 생일을 맞아 광한루에서 진수성찬을 차리고 잔치를 벌였다. 이웃 고을에서 관리들이 참석했다. 술, 여자, 밥, 그리고 시(詩)가 있는 호화로운 잔치가 벌어졌다. 손님이 모이고 더러운 옷을 입은 어사도 참석한다. 부사는 서둘러 하인들을 불러 그를 쫓아내라고 한다. 하지만 운봉(雲峯)(Unpong)의 영장이 어사의 신분을 반쯤 알아차리고 말한다. “그를 머물게 합시다.”(그의 주장은 그도 부사와 마찬가지로 남자이므로 그 역시 이곳에서 즐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그가 말하길 자신의 차림새가 거지같아서 한 명을 제외하면 어떤 기생도 그의 곁에 앉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가 어느 소녀가 곁에 있다면 술맛이 더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하자 옆의 기생이 그를 의심했다. 그는 운봉을 팔꿈치로 쿡 찔렀다. “소고기를 좀 주시오.” 운봉이 많은 양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다리를 뻗고 긴 소매로 고기를 쓸어버리고 관리의 얼굴에 국을 엎어버렸다. 그는 시를 한 수 쓰겠다고 했다. 운봉이 그러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썼다. “금잔의 술은 천인(千人)의 피요, 옥쟁반의 음식은 만인(萬人)의 기름이다. 음악은 백성들의 신음이다.” 운봉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시를 이해하지 못했다. 운봉영장은 “저는 이만 가보겠소이다, 여러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말을 타고 채찍질을 하면서 자신이 왜 앞으로 가지 않는지 의아해 했다. 바로 그때 어사 역시 자리를 뜨고 그의 일행들이 쳐들어와서 부사와 군중을 두들겨 패고 일부를 잡아갔다. 부사는 바지에 일을 보고 말았다. 임실의 현감은 쥐구멍에 머리를 쳐 박아서 사람들이 머리가 어떻게 사라졌는지 신기해했다. 어사가 의복을 갖춰 입고 돌아와 춘향이를 불렀다. 다른 기생들이 그녀가 쓴 칼을 벗겨냈다. 그는 모든 사연을 편지로 써 왕에게 보냈다. 왕은 춘향이를 어사에게 아내로 주고 관직을 내렸다.
여기까지는 이도령의 일생에 관한 아주 긴 노래(판소리)의 일부분이다. 전라도에는 위와 같은 이야기를 노래하는 직업을 가진 남자들이 많았다.
△필자는 향후 이들 자료의 구체 내용에 대한 보다 심도있는 검토를 약속하며 본 연재를 마칩니다. <끝>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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