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께 올리나이다.
제번하고 모자 이별 후로 소식이 서로 막혀 막막하였습니다. …… 처음에 나주 동창 유기모 시굴점 등에서 죽을 고생하다가 한 사람을 만나서 소자의 토시로 신표를 하여 보내어 어머님 함께 오시길 기다렸더니, 12월 20일 소식도 모르고 오늘 나주 옥으로 오니 소식이 끊어지고 노자 한 푼 없어 우선 굶어 죽게 되니 어찌 원통치 아니하리요.
돈 300여 냥이 오면 어진 사람 만나 살 묘책이 있어 급히 사람을 보내니, 어머님 불효한 자식을 급히 살려 주시오. …… 부디부디 명심불망 하옵고 즉시 오시기를 차망복망 하옵니다. 남은 말씀 많으나 서로 만나 말하옵기로 이만 그치나이다.
1894년 12월 28일 달문 상서
2022년 국가등록문화재 825호로 지정된 이 편지는 동학농민군 참여자가 고향의 어머니에게 인편으로 보낸 한글 편지이다. 편지의 요지는 돈 300냥을 마련하면 풀려날 방법이 있으니 꼭 자신을 구해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담은 편지이다.
편지의 주인공이 나주 감옥에 있던 때였던 1895년 1월 3일 나주 감옥으로 이송된 부안 출신 농민군 김낙철의 일기를 보면, 당시 나주옥 수감자들의 형편을 짐작할 수 있다. 수성군 100여 명이 돈 400냥을 주지 않는다고 나무나 철로 된 몽둥이로 3시간 동안 차고 때려서 그 광경은 차마 입으로는 다 말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날 어깨와 갈비뼈가 부러진 자가 허다하고 피가 흘러 시내를 이룰 지경이었지만 자신은 손가락 하나만 부러진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는 당시 수감자들이 하루하루 목숨의 위협을 받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수성군에 의한 무자비한 폭행과 가혹행위며 금전 갈취가 일상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수감자들에 대한 무차별 폭행과 고문의 관행은 3.1운동 참여자나 독립운동가들, 해방 후 6.25전쟁과 80년대 민주화운동 수감자들에게까지도 이어왔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큰돈을 주면 중죄인이라도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던 당시 사회의 부패상은 감옥에 갇혔던 다른 농민군의 사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편지를 쓴 사람은 한달문(36세)으로 그 후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화순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동학농민군에 참여하였다가 민보군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받았던 인물이다. 당시 돈 300~400냥은 쌀 20~30섬 정도의 값어치로 서울에서 작은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가격이다. 이 정도의 돈을 가져오라는 요청을 한 것은 그 집안의 경제력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동학농민군들이 가난한 농민뿐만이 아니라 가세가 넉넉한 부유층이나 양반층까지도 참여한 사실을 입증하는 편지이기도 하다.
한달문은 1895년 봄에 감옥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나아가 그의 농민군 참여 사실 때문에 갑오년 이후 온 집안은 고향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고 가세는 기울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 편지는 동학농민혁명 연구뿐만 아니라 국어학적으로도 당시의 편지 형식이나 사투리 연구의 중요 자료로 평가되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엄동설한에 냉기 시린 감옥에서 삶과 죽음을 가늠하기 어려운 아침을 맞으며, 날마다 폭행과 가혹행위에 시달려야 했던 갑오년 농민군의 간절한 염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130년이 지난 오늘에도 가슴에 새겨야 할 편지이다.
/신순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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