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고요하고 따스한 곳에서 안녕하시지요? 올해 초 가신 어머니도 만나셨는지요? 이곳에서는 많이도 다투셨는데, 그곳에서는 어떠세요? 그래도 떠나신 후 어머니께서 늘 아버지를 그리워하셨어요.
그나저나 제가 전북일보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자랑스러우시죠?
저보다 더 고향을 사랑하셨던 아버지. 얼마나 고향을 사랑하셨으면, 우리 형제들 이름에 ‘흥’자를 넣으셨을까 싶습니다. 제가 태어나고 아버지께서 청장년을 보내신 동네가 전라북도 군산시 흥남동이잖아요.
지난번에 군산을 찾아 흥남동을 찾고자 했는데, 도저히 못 찾겠더라고요. 제 어린 꿈이 서린 팔마산은 물론, 밤낮으로 돼지 울음소리가 가슴을 아프게 했던 도살장도 사라졌더라고요. 아이들과 숨바꼭질하던 토마토 밭의 진짜 향기는 두말할 나위도 없고요.
그래도 군산 아니면 맛보기 힘든 박대구이도 풍족히 먹었습니다. 다시 형님이 청년 시절을 보낸 전주로 차를 돌렸는데, 전주 역시 옛 시절을 그리워할 만큼 충분히 발전했더군요. 그래도 남도와는 또 다른 북도 사투리는 여전했고, 호남제1문은 더 확장된 모습으로 저를 맞아주더군요.
아버지, 기억나시나요? 제가 그 무렵 S그룹에서도 꼽히는 J기획에 입사원서를 낸다고 하니, 이력서에 출신도를 서울로 쓰라고 하신 것 말이에요(요즘은 이력서에 학교 이름도 쓰지 않는 블라인드 채용이 일반적인데, 그때는 출신도 쓰는 난까지 있었지요). 그렇게 고향을 사랑하시던 아버지께서도 꺼리실 만큼 그 무렵에는 호남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 같은 게 있었던 듯합니다. 하지만, 제가 누구인가요. 오히려 눈에 잘 띄게 한자로 全北(전북)이라고 썼는데도 300대 1을 뚫고 최종합격했지요. 그러니 호남에 대한 차별은 지레짐작이었지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모난 세월을 살아야 했던 아버지께서는 충분히 우려할 시대였지요.
그런 시대를 지나 이제는 차별과 우려 없는 맑은 사회가 된 듯합니다. 고향이 변한 만큼 세상도 많이 변한 셈이지요.
그래도 여전히 고향에 대한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집안이 너무 어려워 국민학교(초등학교)를 3년밖에 못 다니셨잖아요. 그래서 제가 아버지 미수(米壽)를 맞아 순창군 동산초등학교에 연락을 했지요. “저희 부친께서 그 학교를 중퇴하셨는데, 명예졸업장이라도 받을 수 없을까요? 그리고 부친처럼 집안이 어려운 친구들에게 적으나마 장학기금을 기탁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전쟁 때 학적부가 소실되어 아버지의 재학 기록이 사라졌대요. 결국 명예졸업장 프로젝트는 실행하지 못했지요.
그래도 자식들만은 당당히 교육을 시키셨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신의 평안보다는 사회와 이웃을 위해 싸우셨으니 참으로 대단한 분이셨지요. 그 덕분에 우리 가족에게 경제적 곤란은 숙명이 되었지만 말이지요.
그래도 저는 아버지께서 남겨주신 정신 덕분에 평생 책 만들면서 잘살고 있습니다. 저도 이제 머리는 하얗고 허리가 굽어가지만, 아직도 아버지 모습만 떠올리면 불효를 일삼던 10대가 된 듯합니다. 이제 불효를 일삼을 아버지, 어머니도 안 계시지만 말이지요.
아버지, 다음에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아버지 타시던 차를 지금도 몰고 다니는 둘째아들이 노는 모습을, 늘 앉으시던 뒷자리에 지금도 꽂혀 있는 전주 태극선을 천천히 부치시며 바라봐 주십시오.
불초 둘째아들 올림
/김흥식 도서출판 서해문집 대표
△김흥식 대표는 군산에서 태어났고 서강대학교를 졸업했으며 <행복한 1등 독서의 기적>, <세상의 모든 지식> 등의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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