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것들이 가까워졌습니다. 눈은 또렷하고 귀는 밝아졌습니다. 처서 지나고 백로 지나 엊그제 추분도 지났습니다. 느티나무 아래 모기와 귀뚜리 놈 멱살잡이에 끼어들었던 걸까요? 가을, 지각이라서 더욱 반갑습니다.
무더위와 장마에 갇혀 못 듣던 세상이 들리네요. 못 보던 세상이 보이네요. 툭 툭 앞산에서 몇 톨 알밤 구르는 소리 들리고, 그 알밤 까먹는 다람쥐가 보이네요. 겨를 없었던 사람이 생각나고 까마득히 잊고 있던 일들 또렷해지네요. 한나절 서풍을 따라나섭니다. 포쇄, 장마철 눅눅한 책이며 옷가지를 햇볕에 말리고 바람을 치던 일이었지요. 열두 필 하늘 아래, 한 자락 바람 앞에 젖은 마음과 육신을 내놓습니다. 속이는 것은 어제도 오늘도 삶일 뿐, 계절은 절대로 속이는 법 없지요. 내장산 단풍도 닷새나 늦는답니다. 늦게 오면 늦게 갈 겁니다.
오보에 소리로 오케스트라를 조율하듯, 까치 소리가 세상을 조율합니다. 라-, 뒷산 메아리가 답하네요. 그래요, 이 계절엔 누구든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이든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자를 벗고 신발을 벗고 맨땅을 걸어봅니다. 정녕코 가을입니다. 산과 들, 하늘과 그대가 내게로 옵니다. 여섯 살 손녀의 눈처럼 땅바닥을 가는 개미가 보입니다. 갈꽃 피어나는 소리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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