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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홍시가 익어가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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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은 여성주의문화기획사 우만컴퍼니 대표

오랜만에 엄마 밥을 먹었다. 배가 고프다는 말에 “별 건 없는데.”라며 배추와 시래기를 넣고 할머니가 준 된장으로 끓인 된장국을 식탁에 차려줬다. 곁들여 나온 김치는 군산 친구네서 받아 온 김치란다. 외식이 잦은 나를 0.5인분으로 계산한다면, 해봐야 1.5인분의 식탁을 차리는 엄마는 올해 김장을 고사한 대신 이모와 친구의 집에서 받아 온 김치들로 한 해를 날 예정이다.

3개의 집에서 각각 온 김치들은 청주, 부안, 군산의 지역 특색만큼 맛이 다르고 빛깔이 다르다. 이번 김치는 어떤 맛일까, 생각하며 먹었다. 아직은 풋내를 풍기는 매콤한 김치와 함께 겨울의 재료로 만들어진 된장을 느끼고 있으면, 계절이라는 게 촉각뿐만 아니라 미각에서도 느껴지는구나 확신하게 된다. ‘엄마’는 어쩌면 이렇게 계절마다 상차림을 바꿔서 먹지. 혼자 살 땐 느끼기 힘들지만, 엄마 집에서는 집안 곳곳의 물건과 식탁에서 계절을 실감한다. 볕이 잘 드는 창가에는 이미 땡감이 홍시로 익어가고 있는지 오래다.

“네가 좋아하잖아.” 나란히 놓여있는 땡감 3개를 보며 아는 체를 하자 엄마가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단단하던 감이 볕에서 말랑하게 무르익는 것처럼 마음이 물러진다. 계절의 흐름 속에서 계절의 간식과 풍경을 맞이한다. 당연하게 느껴졌던 것들이 요즘엔 당연한 풍경이 아니었구나 싶다. “봄이라서 냉이로 된장을 끓여봤다.”, “겨울 무는 달아서 무채 해 먹으면 맛있다.”, “5월에 나는 양파로 김치 담그면 시원하고 맛있단다.”, ‘무슨 계절엔 무엇이 몸에 좋단다.’ 등등. 옛날처럼 아궁이를 떼고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집이 아닌 네모난 시멘트 상자 속에서 살지만, 삶에 담긴 풍습은 여전히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진다.

삶 속속히 담긴 풍습과 얕은 믿음이 삶을 풍요롭게 지탱함을 느낀다. 생일을 이야기할 때 12월 22일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팥죽을 먹는’ 혹은 ‘밤이 가장 긴 동짓날’에 태어난 탓일까. 아니면 내가 24절기를 구구절절 외우고 다니는 사람이라 그럴까. 여름엔 열무와 같은 여름의 채소로 배를 채우고, 여름의 물건으로 더위를 나누고, ‘염소 뿔도 녹는 대서’라는 말로 여름을 나듯 겨울엔 냉이와 같은 겨울의 채소로 식탁을 차리고, 겨울의 물건으로 추위를 견디고, ‘얼음이 얼기 시작하는 소설’이라는 말로 겨울을 대비한다. 

할머니가 만들어준 된장으로 밥을 먹으면서, 시장에 나가 메주를 사와 옥상에서 잘 씻어 볕에 말린 장독대에 된장을 담갔을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고 ‘맛의 비법을 배우러 가야 하는데.’라며 조바심도 내고. 친구 A의 집 베란다 캣타워에 매달려 있는 풍경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풍경소리는 액운을 풀어주지.’라는 말을 떠올리며 평온을 바란다. 풍습이 내게 스며드는 게 지겹거나 고리타분하다고 느껴지지 않고 삶을 충만하게 영위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느낀다. 

이렇게 어른이 되는 걸까. 사회에서 말하는 ‘어른’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과거 크게 느껴졌던 어른이란 게 별거가 아니구나 싶어진다. 하지만, ‘별일 없이 산다’는 말이 대단한 말이 듯이 ‘별거가 아니다’는 건 어떤 의미에선 큰 의미이다. ‘자기 몫을 하고 살며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자신의 삶을 자신만의 가치와 방식대로 스스로 영위하는 사람’이 내가 생각하는 어른의 한 모습이다. 어느 계절엔 시래기를 베란다에 잘 말려뒀다가 친구들이 놀러 오면 무 조림이나 국을 끓여 먹으며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다. 계절에 맞는 식탁을 차려 음식을 나눠 먹고, 생활 방식을 계절에 따라 바꾸는 것이 익숙하고 능숙해지면서‘어른’이 될 수도 있겠다. 식탁 위에 차곡차곡 쌓인 계절들을 음미하면서 말이다.

김나은 여성주의문화기획사 우만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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