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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에 시작된 직조업계의 호황으로 많은 업체들이 경쟁적으로 설비의 자동화고속화로의 전환을 추진했다. 이에 따른 원사 수요도 급증하면서 삼양사도 본격적인 증설을 시작했다. 베트남의 직물 수출, 중국 특수 등이 맞물리면서 삼양사의 설비 증설은 약 10년동안 집중적으로 이어졌다. 전주공장의 설비 증강은 1990년대 들어 SAMY-12까지, 중합설비는 CP-9까지 계속됐다. 여기에 고강력사, 극세사의 증설 등이 계속됨에 따라 단일공장으로는 국내 최대, 세계 4위가 됐다. 또한 필라멘트의 지속적인 수요에 대응해 1994년까지 1054억원을 투입, 대규모 증설(SAMY-1112)을 완료함으로써 필라멘트 하루 생산능력이 300톤에 달하게 됐다. 전주공장은 필라멘트 증설로 인한 중합생산과의 불균형을 막고 PET병 공장의 안정적인 원료 공급을 위해 대구모 중합설비 증설(CP-7)에 나섰다. 429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된 이 증설로 전주공장의 폴리에스테르 중합능력은 1100톤으로 증대돼 단섬유 530톤, 장섬유 246톤과 함께 그룹 매출에서 차지하는 화섬비율이 50%에 이르게 됐다. 이후에도 전주공장은 대전 PET병 공장의 증설과 필라멘트 등 다운 스트림의 생산능력이 확대되면서 중합연속공정 9번째 증설을 단행해 일관적인 생산체제를 마무리했다. 이에 따라 전주공장은 하루 1350톤의 중합능력을 확립해 생산 개시 30년만에 약 100배의 증산을 이룩했다. 전주공장은 품질과 환경, 기술경영에서도 수범을 보였다. 1994년 영국 LRQA로부터 장섬유 등 섬유부문 6개 품목에 대해 ISO 9002 인증을 획득해 품질보증체제를 구축했고 환경경영에서도 1996년 화섬업계 최초로 환경친화기업으로 지정됐으며 1998년에는 ISO 14001 인증을 취득해 품질환경안전 전반에 통합시스템을 구축한 것. 그러나 1990년대 진입이후 화섬경기가 하강세를 보인데다 중국이 설비를 대폭 확충, 자급능력을 키우면서 수출전선에 빨간불이 켜졌다. 여기에 폴리에스테르 원료인 TPA 가격이 급등해 수익구조를 악화시키면서 삼양사 매출의 4050%를 점유해온 섬유부문이 1996년 결산에서는 197억원의 당기 순손실을 내기에 이르렀다. 이에 삼양사는 섬유부문에 대해 대대적인 변신을 꾀했다. 사업구조 고도화, 판매력 강화, 기술 선진화, 국제화 추구 등 4개 분야를 중심으로 변화를 추진한 것. 특히 섬유부문의 사업구조가 필라멘트와 산업자재부문으로 전환되는 추세에 맞춰 필라멘트 설비를 국내 최대로 증강하는가 하면 고강력사 증설 및 스펀본두로의 진출을 확대했다. 또 직물은 다운 스트림 사업에 집중하고 생산에서는 자동화무인화에 대한 투자와 함께 차별화 제품에 주력했다. 이러한 사업구조 개선 노력을 통해 획득한 결과로는 크게 염색가공업 신규 진출, 비섬유 및 세계화 전략 강화, 공동마케팅 전개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삼양사는 1995년 230억원을 투자해 삼양텍스를 설립, 염색가공업에 진출하면서 원료에서 직물 가공까지 일관화를 갖춰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을 촉진하게 됐다. 비섬유분야 강화는 높은 섬유의존도에서 탈피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그 결과 1992년 섬유 매출에서 비섬유의 비중이 51%로 앞서게 됐다. 또한 1989년 준공한 SAMY-10의 가동을 계기로 하이 멀티사 등 차별화 제품의 생산비율이 크게 향상되면서 화섬부문의 선진화 기틀을 마련했고 고강력사, 모노 필라멘트 등 산업용 자재를 생산함으로써 삼양사는 1990년대 국내 폴리에스테르 제품의 고급화 및 다양화를 선도했다.
삼양사의 계열사인 삼양화성은 1991년 5월 473억원의 사업비를 투자해 연간 생산능력 1만5000톤 규모로 전주 2공단에 전주 폴리카보네이트 수지(PCRPoly carbonate Resin)공장을 완공했다. 이로써 삼양사는 세계적 메이커들이 장악해온 국내 PCR시장을 대체할 수 있는 일대 전환점을 만들었다. 전주공장은 국내 최초의 PCR생산공장으로서 첨단소재산업 진출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PCR은 투명성, 내충격성, 내열성 등 부품소재로서의 물성이 우수해 자동차와 전자제품은 물론 컴팩트디스크, 카메라 몸체, 인공신장기, 강화유리, 고통신호기 등 다양한 용도에 사용되며 산업 발전에 따라 그 수요가 무궁무진하다. 전주공장에서 생산된 PCR은 합작투자 계약에 의해 삼양사와 일본 미쓰비시화학이 공동판매하는 이원판매체제로 운영했다. 전주공장은 가동 첫해인 1992년 7000톤의 제품을 판매해 145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등 순조로운 출발을 보이며 삼양사가 첨단산업 진출을 통한 사업구조의 고도화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설비가동과 함께 시작된 무재해운동은 해마다 기록을 경신하면서 1997년에는 무재해 6배(2240일)를 달성했다. 또한 설비효율의 극대화와 제품의 품질 안정에 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결과 ISO 9002, ISO 14001 인증을 취득하는 등 품질환경안전경영으로 면모를 일신해 나갔다. 전주공장은 초기 경영기반을 착실히 다져나가는 한편 공장 가동직후부터 늘어나는 PCR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증설을 준비했다. 합작선인 미쓰비시화학과의 계약조건에 따라 PCR생산량의 50%를 일본에 수출해야 하는데다 국내 수요 증가로 공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주공장의 생산력 증강은 1990년대 최대의 경영과제로 부각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전주공장은 공정 합리화를 통해 연간 생산능력을 1만6000톤으로 늘린데 이어 1995년에는 자동차와 전자사업의 호황으로 PCR의 국내 수요가 급증하자 405억원을 투입 1만9000톤 규모의 1차 증설에 착수해 연간 총생산능력을 3만5000톤으로 늘렸다. 또한 증산을 위한 대대적인 합리화 작업을 추진, 2000년 10월에는 연간 생산능력이 5만톤으로 증대되었다. 그럼에도 경영 화두는 여전히 증설에 집중됐다. 국내 공급량을 늘려 입지를 보다 확고히 하고 규모의 생산을 이룩해 경쟁력을 높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2차례 합리화 작업을 완료한 뒤 다시 3차 증설을 추진했다. 2000년 10월 착공된 3차 증설공사는 정교한 설계 및 시공으로 이루어졌으며 전 공정이 자동화시스템으로 2002년 4월에 마침내 준공됐다. 좁은 공간에 최대의 생산능력과 최고의 효율을 창출한 3차 증설은 기술적으로도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뒀지만 수익성 제고를 위해 초저원가 실현, 제품 특성화가 반영된 원?ㅑ┎?경쟁력 확보, 친환경적 공정 구축 등의 결실도 일궈냈다. 삼양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2002년 중기전략의 기본 목표를 10만톤 체제 확립, 10만톤 설비 신설로 설정하고 시장 상황에 맞춰 20만톤 생산체제 구축을 단계적으로 추진키로 했다. 이에 따라 2003년 5000톤, 2005년 1만톤의 설비 합리화를 단행해 전주공장의 10만톤 생산체제를 계획했다. 이 설비 합리화는 별도의 증설을 하지 않고도 세정 및 건조계 증강, 압출사이로 증강, 배수 Stripper 증강 등 기존 설비에 대한 합리화만으로 계획한 것이 특징이다.
삼양화성은 국내 유일의 PCR 메이커로서 평가를 받았지만 경영에서는 적지 않은 시련을 헤쳐 나가야 했다. 전주공장 가동 초기부터 시작된 경영의 어려움은 IMF 경제위기까지 지속됐다. 이에 삼양화성의 자생노력은 전주공장 설립 초기부터 집중되면 1991년 자본금을 200억원으로 확대하고 경영합리화를 위한 조직개편을 단행하는 한편 1993년 3월에는 본사조직을 공장에 통합함으로써 관리의 효율화를 도모했다. 증설을 추진하는 한편 재해고장불량불만낭비 등 5 Zero의 실천을 통해 생산량 및 판매량의 증대를 꾀한 것. 또한 제품 경쟁력 확보를 위해 원가의 주요 요소에 대한 원 단위 중점관리와 TOPPSM 추진 등 프로세스 혁신에 박차를 가했다. 제품 특화를 위해서도 설비의 전용 라인화를 추진하고 A격률을 99.3% 이상 높이는 한편 환경친화공정 구축으로 MC용제 회수율을 99.9% 이상 강화해 나갔다. IMF 이전 구조조정도 단행해 자동화 추진, 본사와 공장 통합으로 조직 슬림화 등을 미리 시행함으로써 큰 충격없이 IMF 위기를 벗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종합적인 노력에 힘입어 전주공장은 1998년부터 흑자로 전환하는 경영성과를 거두게 됐다. 전주공장의 비전은 준공후 10년동안 5차례의 증산증설을 통해 축적한 역량을 토대로 세계 최고의 품질과 최고의 생산성, 생산효율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수익은 수익대로 지키면서 성장하지 않으면 도태한다는 전략으로 일관되게 경제규모의 생산을 추진한 삼양화성은 전주공장의 생산 및 판매량을 10만톤으로 증대시킴과 동시에 건전한 재무구조를 지향해 부채비율을 낮추고 초우량 폴리카보네이트 공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한편 현재 전주공장의 연생산능력은 12만톤으로 공장 설립 초기 1만5000톤에 비해 10배 이상 크게 증가했다.
삼양사는 스포츠 분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삼양사는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 등 국제 스포츠 제전을 앞두고 비인기경기연맹의 발전과 저변 확대, 지역사회 공헌을 목적으로 1986년 1월 전주공장 복지관에서 삼양사여자사이클팀 창단식을 갖고 공식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사이클팀은 전주공장장을 단장으로 남철우 감독, 강해신 코치(전 국가대표) 그리고 전 국가대표인 최은숙을 주장으로 권미숙, 오영미, 이현주 등으로 팀을 구성했다. 전주를 연고지로 한 삼양사여자사이클팀은 창단 첫해에 최은숙홍영미 선수가 국가대표 후보로 선발되었고 MBC배 전국 사이클대회에서 한국신기록으로 단체우승을 차지하는 등 괄목할만한 성과를 올렸다. 이후에도 삼양사여자사이클팀은 잇단 신기록 경신과 우승으로 한국 여자사이클 명문으로 부상했다. 1989년 전국 사이클인의 밤 행사에서는 여자 일반부 단체상을 비롯해 홍영미 선수가 미스 사이클에 뽑혔으며 강해신 코치가 우수코치상을 차지하면서 삼양사여자사이클팀의 위상을 높이기도 했다. 삼양사여자사이클팀은 올해에도 지난 5월 전남 나주 벨로드롬에서 열린 제28회 대통령기 전국사이클경기대회에서 육지영 선수가 여자 일반부 10㎞ 스크래치 경기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한국여자사이클의 명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삼양사는 1985년 첨단소재 산업의 하나로 전자산업용 기기의 부품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엔지니어링 플라스틱(EP)의 사업화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삼양사가 이 사업을 검토하게 된 것은 전주공장의 폴리머 합성기술과 성형기술을 바탕으로 축적해온 고분자 관련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삼양사는 1987년 미쓰비시화학과 PBT(폴리부틸렌 텔레프탈레이트) 제조기술 및 EP 콤파운드 기술 도입 계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1988년 원료 설비인 콤바운딩공장(연간 생산규모 3000톤)을 준공한데 이어 PBT 중합공장을 완공했다. 삼양사는 이를 계기로 1989년 화학본부를 신설해 그동안 섬유본부 산하에 있던 이온교환수지PET사업부를 편입시켰다. 이로써 삼양사는 자동차부품, 전기전자제품, 기계부품 등에 사용되는 금속과 열경화성 수지의 대체 소재로서 고도의 기능을 발휘하는 EP사업화를 실현하게 되었다. 전주EP공장은 제품 개발과 신규 용도를 창출하기 위한 연구개발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1990년대에 그 성과가 가시화되었다. 품질 향상과 더불어 콤파운드 기술과 폴리머 블랜딩 기술, 폴리머 합성기술 등을 응용한 폴리카보네이트, PBT 등 생산의 기술이 진전된 것. 또 플라스틱 합성수지를 블랜딩한 제품을 개발하는가 하면 1991년부터는 PBT제품의 주원료인 DMT 등을 국내에서 생산함으로써 원료에서 제품생산까지 국내 산업의 안정에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의욕적으로 추진한 삼양사의 EP 사업화는 사업 초창기부터 좋은 실적을 거두기 힘든 제품 특성 등으로 첫해부터 적자를 보여 수익성 확보라는 무거운 과제를 떠안아야 했다. 1970년대는 신제품 개발과 새로운 시장 개척이 기업의 사활에 직결하는 시대였다. 따라서 이를 뒷받침할 연구개발의 수준이 기업의 핵심 역량으로 평가받았다. 삼양사도 이같은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979년 전주공장 실험실을 모체로 해 삼양종합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리고 1982년 제1실험실 준공을 시작으로 제2실험동, 제3실험동 준공 등 연이은 증축을 통해 연구개발 기능을 대폭 강화했다. 삼양종합연구소는 해를 거듭하면서 괄목할만한 연구성과를 올렸다. 특히 섬유부문에서는 PET섬유와 나일론 섬유의 장점을 살린 PBT섬유를 개발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고신축성 직편물 분야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또 폴리에스테르 섬유의 최대 결점인 염색성을 개선해 실크라이트사와 스펀라이트사 등을 개발해 제품 차별화와 새로운 시장 창출에 크게 기여했다. 삼양종합연구소는 1단계 목표를 어느 정도 충족시켰다고 보고 1985년부터 기업의 생산성국제 경쟁력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신제품 개발에 총력을 기울였다. 삼양사는 연구발표회를 정례화해 성과를 체계화하고 연구원별로 매년 1건 이상 특허출원을 하도록 1인 2특허 출원 목표관리제를 도입했다. 또 직무발명보상제도를 마련홰 특허출원을 적극 장려한 결과 1990년까지 94건을 특허출원하고 23건을 특허등록했다. 특히 1990년에는 미국에 폴리에스테르 수지 조성물에 관한 특허출원으로 해외 특허등록 1호를 탄생시켰다. 삼양종합연구소는 KAIST와 아스파탐 합성연구를 시작으로 산학연 구축에도 참여해 단기간에 첨단 연구분야에 대한 기술을 축적하기도 했다. 공동연구과제로는 고려대와 PET/PBT 재질에 관한 연구를 비롯해 성균관대와 도전성 유기고분자에 관한 연구, 미국 바론테크와 PET진공채혈관 시스템 개발 등이 있으며 1985년부터 10년동안 24건의 산학연 공동연구를 수행했다.
삼양사는 국내산업의 급속한 근대화에 힙입어 전주공장을 세계 굴지의 화학섬유메이커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제조원료인 텔레프탈산(TPA)의 자체 생산시설이 없어 막대한 양을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TPA는 폴리에스테르 섬유 외에도 산업용 자재, 용기, 포장용 자재,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에까지 광범위하게 이용되는 기초소재로 국내 수요가 끊이없이 급증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삼양사는 전주공장의 TPA 수요을 직접 해결하기 위해 기술 도입을 추진했다. 장기간 TPA를 공급해온 일본 미쓰비시화학을 기술 도입선으로 확정하고 1987년 TPA 생산공장 기술도입 계약을 체결한 것. 이어 삼양사(40%)느, 미쓰비시화학(40%), LG칼텍스정유(20%)와 합작투자계약을 체결했다. 합작내용에는 지분 외에도 역할 분담이 포함됐다. 제품 구매는 삼양사, 기술지원은 미쓰비시화학, 원료공급은 LG칼텍스정유가 각각 맡기로 합의했다. 그 결과 1988년 1월 삼남석유화학(주)이 공식 출범했다. 경영진으로는 삼양사가 대표이사를, 미쓰비시화학은 부사장을 맡았다. 삼남석유화학은 출범과 함께 원료 수급 및 출하여건이 가장 유리한 여수석유화학단지 내 부지를 매입해 공장 건설을 추진했다. 당초 삼남석유화학은 TPA의 국내 수요가 연평균 10% 정도 증가할 것으로 예상해 공장 건설계획 단계부터 경제규모의 생산을 검토했다. 하지만 초기에는 자체 수요량 정도의 생산능력을 갖추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란 판단아래 1차로 연간 생산능력을 20만톤 규모로 정했다. 시설 투자부담을 덜고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TPA 생산기술을 축적해 증설을 추진할 계획이었다. 1990년 2월 마침내 연간 생산능력 23만톤의 TPA 공장이 완공됐다. 총 919억원이 투입된 여수 TPA공장 가동으로 삼양사는 연간 1억4000만 달러의 수입대체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됐다. 또한 제조원료의 안정된 품질은 물론 적기 공급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폴리에스테르 사업의 경쟁력이 보다 강화되는 성과도 거뒀다.
삼양사는 1982년 전주공장의 폴리에스테르 연속중합설비가 완공되면서 섬유부문사업 다각화에 나섰다. 전주공장에서 생산되는 고상중합 칩이 PET병의 원료가 되었던 것이다. PET병은 1972년 미국의 듀퐁이 개발한 것으로 펩시콜라가 이를 채택하면서 세계적으로 보급되었다. 국내에서는 1980년 효성그룹에 의해 본격적인 상업화가 이뤄어졌으며, 이후 삼양사와 두산유리가 진출했다. 고상중합 칩 생산을 통해 획득한 폴리에스테르 관련 기술로 PET병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력을 보유하게 된 삼양사는 국내 PET시장이 형성되던 1986년 전주공장에 소규모 설비를 갖춰 소주병을 생산하면서 첫 가동을 시작했다. 이후 삼양사는 청량음료용 PET병 수요가 팽창 추세를 보이자 생산설비 증설에 나섰다. 하지만 전주공장은 실수요자와 멀리 떨어져 있어 대규모 PET병 설비를 갖추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삼양사는 코카콜라 메이커인 범양식품 공장에 월 260만개의 생산능력을 갖춘 인플랜트 공장을 건설했다. 삼양사의 PET병은 세계적인 음료 메이커인 코카콜라, 펩시콜라로부터 품질을 인정 받는 등 초기부터 경쟁력이 높았다. 여기에 PET병 시장이 활황세를 이어가자 청량음료용 PET병 설비 증설이 시급한 현안으로 부상되었다. 이에 따라 1990년에는 우유탄산음료용 내열내압병을 생산하기 위한 설비를 도입하였으며, 1991년에는 탄산음료용 PET병 양산체제를 구축했다. 연이어 주스 및 스포츠음료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내열성 설비가 실설돼 1991년말 총 생산능력은 월 1320만개로 증대되었다. 산업자재부문은 1980년대 후반에 그룹의 새로운 성장엔진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추진된 사업 가운데 하나였다. 1980년대 시작된 산업용 원사 및 고강력사에 대한 관심은 전주 제2공단에 모노 필라멘트와 고강력사를 생산하는 신공장 건설로 이어졌다. 삼양사는 1989년 1일 생산량 2톤의 PET 모노 필라멘트 생산설비가 준공되고, 이어 1990년에 1일 생산량 10.5톤의 고강력사 생산설비가 가동함으로써 산업자재 분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삼양사는 설비 가동과 동시에 지퍼용 모노 필라멘트를 주로 생산했으며 제품의 차별화 전략에 따라 제지기 캔버스용 모노 필라멘트 생산도 병행했다. 모노 필라멘트는 주로 텐트, 연구실험실용 위생복, 폴리에스테르 지퍼 등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국내 수요가 적고 선발업체의 견제가 심해 생산초기 시장 진입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삼양사가 모노 필라멘트 시장에 소규모 투자를 통해 첫 발을 내딛은 것은 다분히 산업자재산업에 대한 실험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고강력사는 처음부터 산업자재의 사업화를 선도했다. 고강력사는 일반 원사보다 높은 인장강도로 인해 열적 안정성이 요구되는 분야에 적용되었다. 국내 산업자재업계에서는 후발주자 위치에 있던 삼양사는 기술과 품질 등 불리한 입장을 극복하기 위해 처음부터 세계시장을 겨냥한 전략으로 성능이 우수한 유럽지역의 설비를 도입했다. 총130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된 고강력사 설비는 1990년 7월 본격적인 가동을 시작했다. 삼양사가 주력한 전략품목은 타포린용과 안전벨트용이었다. 특히 타포린용은 국내 최고의 품질로 평가받았을 뿐 아니라 국내 업체의 품질 향상을 촉진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이처럼 삼양사는 모노 필라멘트와 고강력사의 생산기초를 다짐으로써 1990년대 산업용 자재 분야의 성장을 도모했다. 이를 기반으로 삼양사는 방사용 부직포, 지오그리드, 수지벨트 등 고부가가치 산업용 자재로 사업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삼양사 전주공장은 지난 1969년 12월 전주시 팔복동에 둥지를 튼 이후 40년 넘게 전북지역 토착기업으로서 지역경제 발전에 일익을 담당해왔다. 전주공장의 모태인 삼양사(회장 김윤)는 올해로 창립 87주년을 맞으며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삼양사는 지난달 10일 이사회를 열고 삼양사를 지주회사인 삼양홀딩스와 삼양사, 삼양바이오팜 등 3개 회사로 인적물적 분할하기로 공시하고 주주총회 승인을 거쳐 오는 11월 11일부터 지주회사 체제로 출범, 글로벌 혁신기업으로의 변신을 추진하고 있는 것. 인적분할로 생기는 삼양사는 화학식품부문과 신성장 동력 발굴을 맡으며 물적분할을 통해 삼양홀딩스의 자회사가 될 삼양바이오팜은 의약사업을 담당한다. 지주회사인 삼양홀딩스는 화학부문 계열사인 삼남석유화학과 삼양화성, 삼양EMS, 삼양제넥스, 삼양밀맥스, 삼양윌푸드 등을 자회사로 두게 된다. 삼양사는 1924년 수당 김연수 회장이 창업한 이래 중용을 기본정신으로 정도경영과 신뢰경영을 통해 꾸준히 내실을 다져왔다. 설립 초기 삼양사는 만주일대에서 간척 및 개간사업과 근대적인 농장경영으로 민족의 경제 자립과 국민소득 증대에 이바지했다. 삼양사는 1939년 만주에 남만방적을 설립, 국내 기업 최초로 해외공장을 세웠으며, 같은 해 국내 기업 최초의 민간장학재단인 양영재단을 설립해 인재양성과 사회공헌의 효시를 이뤄었다. 근대기업의 선구자인 삼양사는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1955년 제당사업을 시작했고 이듬해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한 뒤 1969년 전주에 폴리에스테르공장을 준공하면서 화학섬유사업에도 첫 발을 내딛었다. 이후에도 삼양사는 화학, 식품뿐 아니라 의약과 산업자재, 용기, 사료, 무역부문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했다. 특히 지난해에는 글로벌 R&D 혁신기업으로 새롭게 도약하기 위해 '2015년 비전'을 발표했다. 2015년까지 화학, 식품, 의약의 3대 핵심사업에서 선택과 집중을 통해 지속적인 성장과 혁신을 통한 차별화로 강력한 시장 리더십 확보, 적극적인 신사업 도전으로 새로운 성장동력을 구축하기로 한 것.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화학부문은 성장성이 높은 고부가가치 소재분야에 집중하는 한편 지속 가능한 성장 플랫폼 및 글로벌 제조기반을 확보해 고객 가치를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올해 헝가리 야스베레니시에 연 생산규모 1만톤의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컴파운드 회사인 삼양EP헝가리 주식회사를 설립, 유럽 진출을 본격화했으며 최근에는 중국과 미국, 유럽 등 해외시장 공략을 강화하고 있어 글로벌 시장 확대에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식품부문은 기존 사업 외에 B2C(기업과 소비자간 거래) 식품 및 외식분야에서 적극적인 성장을 도모해 가공유지 회사인 삼양웰푸드를 지난 2004년 10월 인수한데 이어 2006년 4월 샐러드&그릴 레스토랑 '세븐스프링스'를 인수하고 같은 해 7월'삼양푸드앤다이닝'을 설립하는 등 외식사업을 강화했다. 또한 이에 앞서 중국 진황도에 전분당 공장인 '진황도삼양제넥스식품유한공사'를 2005년 12월 설립하고 인도네시아 현지 원료사업에 진출하는 등 해외 현지화와 사업 다각화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의료바이오사업부문은 봉합사업의 경쟁력 강화, 의료용구 사업 제품의 포트폴리오 확대, 항암제 중심의 제품개발에 주력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위해 삼양사는 항암제 주사제 공장을 완공해 원료부터 완제품까지 생산하는 시스템을 구축, 항암제 개발 역량을 강화하고 있으며 새로운 항암제인 도세탁셀 공장 착공에 들어가 국내 유일 항암제 원료 생산업체로서의 위상을 정립하고 있다. 또한 삼양사는 지난 3월 삼양사가 보유한 약물전달기술을 이용해 일본 1위 제약회사인 다케다와 기술개발 공동연구 및 라이센스 계약을 체결했으며, 의약전문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경기도 성남에 약 1200억원을 투자해 그룹의 성장을 견인할 R&D센터를 확대 이전할 예정이다. 새로운 R&D센터가 건립되면 R&D부문의 시너지 효과와 함께 의약부문의 급속한 성장이 기대된다. 신사업부문은 시장 성장성이 높은 사업영역을 지속적으로 탐색해 2015년 이후 그룹의 성장동력으로 삼을 계획이다. 삼양사는 지난 3월 미래성장과 사업전략 실행에 대한 책임경영 강화를 위해 조직개편을 단행, 그룹 최고의사결정 조직인 최고경영회의와 그룹 내 비즈니스간 통합운영 책임자인 그룹장 제도도 신설했다. 올해를 2015비전 달성의 원년으로 삼은 삼양사는 명확한 방향성과 강력한 실행력을 바탕으로 목표 달성에 매진해 향후 100년 역사를 향안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군산지역의 대표적 향토기업인 페이퍼코리아가 공장 이전 등을 통해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페이퍼코리아 이명철 사장으로부터 페이퍼코리아의 경쟁력과 향후 청사진 등을 들어본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신문용지와 산업용지를 모두 생산 할 수 있는 생산체제를 구축했는데 이에 따른 가시적 효과는 무엇인가요. ▲국내 신문용지 산업은 정보전달의 매체로서 광고시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최근 정보전달의 매체가 신문, 인쇄물에서 인터넷, 스마트폰 등 IT기기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으며, 뉴미디어의 발달에 따라 신문광고의 점유율이 하락해 성장이 정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산업용지 시장은 인터넷 쇼핑의 발달 및 정부의 친환경 정책에 따른 재생종이 사용 증가로 매년 약 9%의 성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회사는 이러한 시장변화에 맞추어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탈묵기술(폐지에서 잉크를 빼내어 재생지를 만드는 기술)을 활용한 산업용지(포장지 등)를 개발함으로써 신문용지와 산업용지의 균형있는 사업구조를 구축하였고, 이를 통해 위기상황에서도 일사불란하게 대응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페이퍼코리아는 지역의 대표적 향토기업인데 기업의 사회적 책임 이행을 위해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페이퍼코리아는 군산지역에 공장만을 가동하는 타기업과 달리 1943년 설립시부터 현재까지 본점을 군산시에 두고 고용창출 및 세금납부 등을 통해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면서 명실상부한 군산 최고의 향토기업 중 하나로 지속되어 왔습니다. 또한 경영이념인 '사람중시 경영'이 회사 내의 제도와 문화로 정착이 되어 임직원이 자발적으로 지역사회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으며, 매년 이웃사랑 운동이나 자선행사를 통하여 지역민에게 봉사하고 있습니다. -현재 페이퍼코리아가 차지하는 국내 신문용지 시장 점유율과 해외수출 현황 및 향후 계획은. ▲국내의 신문용지 생산 업체는 페이퍼코리아(당시 북선제지)가 1943년 근대식 제지회사로 처음 설립된 이후, 현재 4개의 회사가 신문용지를 생산하고 있으며, 페이퍼코리아는 국내 시장의 약 20%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동종업계에서 유일하게 전북일보를 포함한 조선, 중앙, 동아, 매경 등의 대형 신문사를 영업거래선으로 확보하고 있어 매출이 안정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회사는 전체 생산량의 약 30%를 홍콩 등의 세계시장에 수출을 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세계시장에서도 원가경쟁력이 있는 산업용지의 수출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공장이전으로 얻는 효과와 향후 회사발전을 위한 장기 프로젝트는 무엇인지요. ▲페이퍼코리아는 1943년 현재의 위치에서 공장을 가동하였으나, 군산시의 발전에 따라 도심화 되어 환경 관련 민원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또한 지역사회의 균형 발전을 위해 공장 이전을 지속적으로 요구받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에 페이퍼코리아는 지역 주민들과 군산시의 의견을 수용해 지난 2월 14일 군산시와 '페이퍼코리아 공장이전 및 공장부지 개발사업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8월19일 공장이전을 위한 추진위원회의 첫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회사는 공장이전을 통해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활용하고자 하며, 공장이전적지 개발사업은 세계적인 컨설팅업체 및 관련 전문 용역업체와 협력해 지역사회의 랜드마크로 개발하여 군산시의 균형발전에 도움을 주고자 합니다. 회사는 향후 제지업 및 개발 관련 신규사업을 주축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구성하고, 이를 통해 지역사회에서도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자 합니다.
신문용지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페이퍼코리아(대표이사 사장 이명철)는 그 전신인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제지회사인 북선제지가 군산시 조촌동에 68년전에 자리한 이후 고려제지, 세대제지, 세풍이란 사명의 변경을 거쳐 오늘날 군산을 대표하는 향토기업으로서 우뚝 자리매김하고 있다. 긴 역사 만큼 수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페이퍼코리아는 주력인 신문용지 사업을 기반으로 신규사업을 적극 발굴하며 사세를 넓혀왔다. 디지털미디어의 특수용지를 생산하는 나투라미디어, 동제련 제품을 생산하는 나투라금속, 제지 보전, 플랜트 전문회사인 나투라엔지니어링 등을 설립 또는 인수해 총 5개의 계열회사로 이루어진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페이퍼코리아는 현재 한해 매출만해도 5000억원에 달한다. 특히 페이퍼코리아는 최근 IT 등의 발달에 따른 신문용지의 매출 감소를 극복하고자 2010년 폐지를 원료로 사용하여 산업용지를 생산하는 기술개발에 성공, 산업용지 시장에 진출함으로서 국내에서 유일하게 신문용지와 산업용지를 모두 생산할 수 있는 경쟁력 있는 생산 체제를 구축하며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또한 페이퍼코리아는 1943년 설립이래 현재의 군산지역에 자리잡아 성장함으로서 지역경제 발전에 일익을 담당해 왔지만 최근에는 도시의 발전 과정에서 공장 위치가 도심 한복판에 위치해 2010년 지방선거시 군산시장 및 시도의원 후보들의 선거공약으로 채택되는 등 지역사회의 공장이전 압력이 거세어짐에 따라 공장 이전을 추진하고 있다. 현 공장의 위치가 도시의 균형발전에 걸림돌이 된다는 판단아래 대승적 차원에서 지난 2월 군산시와 공장 이전 및 개발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페이퍼코리아는 군산시 균형발전을 위해 도심에 위치한 공장을 이전하고, 이를 위해 군산시는 제반 인허가등 행정상의 지원을 할 것을 합의했다. 페이퍼코리아는 공장 이전 후 현 공장부지에 대규모 복합주거단지를 조성할 계획으로 있다. 이번 MOU 체결로 군산시는 공장 인근 주민들의 주거 환경 개선을 통한 민원 해결 및 군산시 균형발전을 통한 '50만 국제관광 기업도시' 건설에 더욱 박차를 가할수 있게 됐다. 최근 군산은 OCI의 10조원 투자, 현대중공업의 1조2000억원 투자 등 대기업의 잇따른 투자 결정으로 외부 유입 인구 증가와 신규 일자리가 늘어나고 있어 공장 이전이 완료되면 지역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페이퍼코리아도 수조원대의 공장 부지(533,530㎡16만1400평) 개발을 통하여 공장 이전 재원 마련 및 신규사업 진출 등으로 제2의 성장을 기대하고 있다. 페이퍼코리아가 추진하는 공장용지 개발과 공장이전 사업은 규모만 수조 원대에 이르는 대규모 프로젝트로 세계적인 컨설팅업체 등 관련 전문업체와 협력해 추진할 계획이며,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될 경우 오는 2015년까지 현 제지공장을 군산지역 산업단지로 이전할 계획이라는게 페이퍼코리아측의 설명이다. 회사측 관계자는 "현재 군산 새만금 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활발한 투자가 진행되어 꾸준한 인구 증가를 보이고 있다"고 언급하며, "현 공장부지에 상업주거오피스로 구성된 복합주거단지를 조성해 '50만 국제관광 기업도시'의 랜드마크로 개발, 새만금 배후지로서의 역할 수행과 군산시의 균형발전을 이끌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더욱이 페이퍼코리아의 이명철 사장은 한솔제지 및 종합리조트인 오크밸리를 운영하는 한솔개발의 전문 경영인 출신으로 제지경영 및 부동산 개발 경험을 살려 공장 이전에 만전을 기하고, 현재 제지산업에 편중되어 있는 사업구조를 향후에는 제지업 및 개발관련 신규사업 등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구성해 회사 성장의 토대를 마련함은 물론 지역사회에서도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어 지역사회의 관심과 기대가 집중되고 있다.
세풍은 기존의 합판과 제지 중심에서 벗어나 사업 다각화를 통한 대대적인 사세 확장을 위해 전주지역 민영방송사업에 뛰어들었다. 지난 1996년 세풍은 전주지역 민영방송 사업권을 획득하기 위해 전북지역의 대표적인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는 하림 등 2개 업체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세풍은 당시 민영방송 사업자 선정 경쟁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 "지난 1953년 이래 전북과 함께 성장한 지역의 대표적인 향토기업으로 지역에 뿌리 박고 도민과 고락을 같이 해온 기업이 민영방송의 주체가 돼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민영방송 사업에 참여하게 됐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참여배경으로는 신문용지 생산업체의 특성때문에 언론출판사업에 관심이 많았고 세대문화재단 등을 운영하며 전북지역 문화에 대해 연구를 하는 등 언론매체에 원료를 공급하는 사업의 담당자로서 방송사업에 대해 많은 관심과 사업 추진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는 점을 피력했다. 컨소시엄 구성에 대해서도 다른 지역에 비해 전북은 기업이 많지 않은 상태지만 다행히 세풍은 본사와 계열사가 모두 전북지역에 있어 컨소시엄을 구성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고 밝혔다. 또한 민영방송 운영을 위한 재정능력도 자산총액이 5000억원에 달하는 등 경쟁업체에 비해 월등히 앞서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사업 특성상 공해기업이어서 민영방송 사정자로 적정치 않다는 일각의 지적에 대해서도 세풍은 해명했다. 세풍은 제지업종의 특성상 폐수가 많이 나오나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 500억원을 투자했고 1965년부터 조림사업을 시작해 현재 4500만 그루의 나무을 심었다며 공해기업이란 이미지를 불식시켰다. 사업자로 선정된 후 민방운영 계획에 대해서도 '세상을 풍요롭게'라는 기업 경영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도민들의 문화적 경제적 수준을 높여 나가겠다며 수익성보다 기업 이익의 환원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밝혔다. 그 결과 세풍은 마침내 1996년 11월 전주지역 민영방송 사업자로 최종 선정되며 방송사업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주)세풍의 최대주주인 버추얼텍은 구형우 전 한솔그룹 부회장을 회장으로 영입해 새로운 경영진을 구성해 회사 정상화에 박차를 가했다. 구형우 회장 등 새로운 경영진은 2002년 11월 은행채권단으로부터 공개매각을 통해 버추얼텍을 제1대 주주로 경영권을 인수했다. 제지산업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능력을 바탕으로 워크아웃 상태였던 세풍에 대해 재무구조조정을 단행, 부채비율을 1140%에서 200%로 대폭 낮추며 2002년 12월 위크아웃에서 벗어났다. 세풍은 워크아웃 종료를 계기로 과거 한국의 대표적인 제지기업으로서의 명성을 되찾기 위한 첫 조치로 2003년 2월 회사이름을 현재의 사명인 페이퍼코리아(주)로 변경했다. 워크아웃을 종료한 페이퍼코리아는 이후 3년반 동안 대대적인 경영 혁신을 통해 3년 연속 흑자 실현, 부채비율 120% 수준으로 감축, 종업원에 대한 대폭적인 처우 개선 등을 통해 매우 안정된 노사관계를 실현하며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변모했다. 이러한 실적 개선뿐 아니라 경영권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구형우 회장을 비롯한 경영진이 자신들이 출자한 제지원료 공급업체인 (주)글로벌P&T를 통해 세풍의 최대주주인 버추얼텍으로부터 25%의 지분과 경영권을 지난 2006년 8월께 인수한 것. (주)글로벌P&T의 총 인수자금은 200억원으로 경영진의 경영능력과 실적을 높이 평가한 거래은행으로부터 MBO(Management Buyout)자금을 조달했다. MBO란 '경영자 매수'로 회사의 경영진에 의한 기업 인수를 뜻하는데 고용 안정과 기업의 효용성을 동시에 제고할 수 잇다는 장점때문에 선진국에서는 많이 활용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최초였다. 경영진이 페이퍼코리아를 인수한 것은 최대주주인 버추얼텍이 경영 불안으로 지분의 일부를 외국계 기업에 넘긴 것이 계기가 됐다. 경영진은 경영권이 외국계 회사로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자신들이 세운 (주)글로벌P&T를 통해 지분을 인수하기로 결정하고 페이퍼코리아를 통해 선급금 명목으로 40억원을 지급하고 은행 연대보증을 서주는 등 200억원의 인수자금을 마련해 경영권을 인수했다. 하지만 페이퍼코리아의 소수 주주들이 채무를 부담할 이유가 없는데도 경영진이 연대보증을 서줘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입혔다며 불만을 제기하면서 법정공방으로 사태가 확산됐다. 이에 재판부는 경영권 인수와 관련된 전현직 임직원 전원을 유죄로 판결했다. 경영진은 재판부에 "글로벌P&T에게 대출금 상환능력이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페이퍼코리아에 손해발생의 위험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며 "회사의 경영권 안정을 위해 부득이하게 연대보증을 선 것에 비춰보면 범죄 의사가 있다고 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 사건을 외부차입인수(LBOLeverage Buy Out)라고 봤다. 실제 재판부는 "경영진이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그 인수자금 대부분을 외부에서 차입했고 페이퍼코리아로 하여금 연대보증으 서게 한 LBO방식의 인수"라고 판시했다. 이어 "연대보증에 따른 위험 부담에 상응하는 반대급부를 제공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며 "이런 행위는 경영상 판단에 의한 것으로 배임의 고의가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M&A업계에서는 내부 경영진이 경영권을 인수하는 것은 속칭 '먹튀'의 가능성이 없다는 점에서 외부에서 회사를 인수하는 것과 엄연히 다른데도 재판부가 이같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우여곡절에도 세풍은 페이퍼코리아로 회사명을 바꾼 뒤 환골탈태하며 국내 신문용지업체의 핵심으로 재부상하며 사세를 확장해갔다.
세풍그룹은 지난 1996년 당시 유종근 도지사의 지원 아래 F1그랑프리 대회 국내 유치에 나서며 국내외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세간에서는 자본금 200억원의 세풍이 3000억원이 넘는 사업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다. 그 당시 농림지로 묶인 자동차경주장 부지였던 세풍 소유의 군산일대 한국염전 부지 100만평을 준도시지역으로 용도 변경해 F1그랑프리를 유치하겠다는 세풍의 계획이 과연 자동차산업 및 모터스포츠 활성화를 위한 순수한 의도였는지 땅값 상승을 노린 것인지 명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1997년 자동차 경주장 부지가 용도변경됐고 이어 교통영향평가를 비롯한 각종 계획의 승인이 떨어지면서 평당 몇백원하던 자동차 경주장 부지가 순식간에 몇만원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세풍은 이를 담보로 약 1000억원을 대출받아 F1측에 개최권료로 300억원을 주고 대회 유치를 가시화했다. 그러나 간척지를 경주장으로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지반 침하 등 땅의 상태가 자동차 경주용 트랙을 만들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1997년 10월에 시작된 자동차 경주장 공사는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인한 자금난과 때맞춰 닥친 외환위기로 1998년 2월 세풍그룹의 모기업인 (주)세풍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전면 중단됐고 이로 인해 F1그랑프리 대회의 한국 유치 역시 무산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대출을 해준 제일은행은 수백억원을 떼였고 당시 민주당 대통령 경선에 나갈 야망을 품었던 유종근 도지사도 세풍으로부터 3억원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되면서 정치생명을 마감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자동차 경주장 부지였던 염전 부지도 2002년 다시 준농림지로 환원되면서 세풍의 F1그랑프리 대회 한국 최초 유치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군산의 토착기업으로 제지와 합판사업으로 성장한 세풍그룹도 계열사를 무리하게 늘리는 과정에서 자금난에 봉착, 1998년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이에따라 매각작업을 진행한 채권단과 회사는 지난 2002년 10월 버추얼텍 컨소시엄과 2023억원에 매각을 위한 본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정보통신업체인 버추얼텍의 세풍 인수에 대한 특혜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인수 회사들이 채권단 출자분 747억원을 179억원에 인수하는 등 감자와 주식 헐값 매입 등으로 실제 인수대금이 200억원에 불과하고 액면가로 인수한 전환사채를 주식으로 전환하면 150억원의 이익이 생겨 결국 공짜로 세풍을 인수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에 업계에서는 김대중 정권 말기에 기업의 워크아웃을 서두르는 모습과 함께 버추얼텍이 자기보다 덩치가 10배나 큰 세풍을 인수했다는 자체에 강한 의혹을 제기했다. 전통적으로 50년을 제지사업에 투자하고 제지사업을 일구어 낸 세풍을 이제 막 시작하는 IT벤처회사가 어떻게 인수하며, 제지와는 전혀 다른 업종의 회사가 어떻게 회사를 운영해 나갈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조흥은행 등 채권단이 산정한 세풍의 청산가치는 1800억원였다. 하지만 버추얼텍은 140억원 정도를 투자해 총지분의 30%이상을 확보함으로써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문제는 인수하기 전 해에 매출액 123억원에 80억원의 적자를 본 버추얼텍이 어떻게 세풍을 인수할 수 있었느냐다. 주채권은행인 조흥은행은 이같은 의혹에 대해 "버추얼텍이 300500억원의 자금을 보유하고 있어 인수능력이 충분하다"고 밝혔지만 설득력이 약하다는게 업계의 시각였다. 당시 H증권의 한 애널리스트가 "2000억원대의 부동산과 4000억원대의 생산설비, 500900억원의 현금을 보유한 회사를 채권단이 불과 2000억원에 매각하면서 2100여억원의 손실을 초래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듯이 버추얼텍의 세풍 인수에 대한 의문점은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2004년까지 가면 모든 돈을 다 갚을 수 있다는 세풍을 도중에 제값도 못받고 버추얼텍에 넘긴 정부의 정책에 특혜 의혹을 제기하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더욱이 지난 2000년 외국기업이 2400억원에 세풍을 인수하려 했을 때 가격이 낮다고 팔지 않았던 채권단이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버추얼텍에게 헐값에 세풍을 넘긴 것은 정부의 무언의 압력(?)때문이었다는게 중론였다. 세풍 관계자도 "워크아웃에 관여하고 있는 정부와 채권단이 인수나 매각을 할 상대가 정말로 잘 해낼 수 있는지 따져 보아야 함에도 거저 주듯 팔아버린 행태는 누가 보더라도 말이 안되는 처사다"고 주장했다. S증권의 한 애널리스트도 "채권단이나 은행단에서는 버추얼텍이 몇 백억원의 자본금이 있기 때문에 매각 할 수 잇다고 하나 자금능력이 탄탄하지 않은 회사의 무엇을 보고 채권단이 굳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이해가 안된다"며 의문을 제기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려되는 점은 제지사업 경험도 없는 버추얼텍이 자칫 경영을 잘못해 또 다시 세풍이 파산으로 몰릴 경우 미칠 수 있는 파장이었다. 하이닉스와 현대오일뱅크가 그 대표적 실례로 제기됐다. 현대는 정부의 중재 아래 퇴출 위기에 있던 한화에너지를 맡았지만 결국 파산의 길을 걸으면서 유동성 위기를 맞이했고 정유업계를 퇴보시키는 악역을 담당했던 것. 이에 따라 업계에서는 "세풍이 흑자를 내고 있음에도 기업주에게 억지로 경영권을 가로채 덤핑 처리하듯 세풍을 정리한 것은 결국 제살 깎아먹기일 뿐이며 이로 인해 부실이 양산된다면 공적자금 투입으로 이어져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가될 수 밖에 없다"며 정부 및 채권단의 처사에 불만을 표명했다.
세풍은 내수시장에 만족하지 않고 해외시장 진출에 총력을 기울였다. 한국합판과 세대제지는 1968년 수출 유공으로 철탑산업훈장을, 1975년에는 동탑산업훈장, 1988년에는 모범납세업체로서 대통령 표창, 1992년에는 석탑산업훈장을 수상하는 등 수출과 납세면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올리는 등 수출 확대에 전력을 쏟았다. 세풍은 주력사업인 제지사업본부의 활성화를 위해 1990년부터 1차적으로 1300억원을 투입해 1992년 9월부터 하루 생산량 400톤 규모의 신문용지 증설공사를 성공리에 마무리지어 가동에 들어감으로써 21세기에 대비한 새로운 성장기반을 구축했다. 또한 세풍은 해외시장에서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1996년부터 3년간에 걸쳐 약 2000억원을 투입해 하루 생산량 800톤 규모의 신문용지 증설계획(N-3호 초지기)을 추진했다. N-3호 초지기는 지폭이 국내 최대인 9456mm로 심문용지 6폭을 뜰 수 있으며 초속 역시 국내 최고 속도인 1700m의 생산능력을 갖췄다. 이밖에 세풍은 백상지 500톤 등 하루 총생산량 2000톤 규모로 생산라인을 확장해 국제 경쟁력을 갖춘 종합제지회사로 거듭났다. 세풍은 1995년 약 29만톤을 생산, 매출액 2075억원으로 국내 신문용지 시장 점유율 28%를 기록했으나 1996년부터 1998년까지 1개 라인을 증설해 국내 신문용지 공급량을 40%까지 끌어 올렸다. 세풍은 주력업종인 제지사업본부외 전통사업인 합판제지본부와 석유사업본부를 운영하고 있었다. 또 산하에 호남잠사, 한국견직, 우민주철, 내장산관광호텔, 세대건설, 한국염업 등 7개 기업을 거느린 그룹으로 성장했다.
세대제지의 모회사인 한국합판은 산업합리화로 국제 경쟁력을 제고하고 계열기업을 재편성하기 위해 1985년 8월 세대제지를 흡수합병하고 회사 명칭을 주식회사 세풍으로 바꾸었다. 합판과 제지라는 이종업종이 세풍이라는 한 회사로 합병되었기 때문에 세풍은 산하에 제지공업본부와 합판사업본부란 두개의 본부를 두어 각각 제지사업과 합판사업을 관장케 하였다. 한국합판이 합병의 이유로 내걸었던 산업합리화는 합판산업이 1970년대 후반기를 고비로 급속히 사양화하기 시작하면서 합판의 감산을 위한 포석이었다. 한 때 국내 최대 수출품목으로 세계 제1위의 수출고를 기록했던 합판산업은 1980년대부터 세계 각국마다 자원보호정책을 감행하면서 수출경쟁력이 급속히 악화된 반면 세대제지는 제3호 초지기 신설에 이어 N-1호 초지기까지 증설 가동되면서 연간 생산능력이 16만2000톤으로 제고돼 생산시설규모면에서 계속 우위를 지켜온데다가 내수는 물론 수출까지 활발해 장래가 매우 유망했기에 한국합판그룹을 지탱해주는 핵심기업으로 부상, 합병이란 결과를 도출했다. 제지사업이 합판사업보다 우위를 확보하게 되면서 한국합판그룹의 주력업종이 합판에서 제지로 옮겨진 것. 새로 출범한 세풍은 전열을 가다듬고 제지사업에 총력을 기울이며 재도약을 시도했다. 세풍은 1988년 9월 공장 설비의 일부를 보완해 초지속도를 분당 870m로 높여 하루 생산능력을 250톤에서 300톤으로 증가시켰다. 하지만 생산시설면에서 오랫동안 거의 같은 수준을 유지해오던 전주제지가 잇따라 생산시설 증설을 통해 격차를 크게 벌여나가자 비상이 걸렸다. 1990년 현재 양사의 생산능력 현황은 세풍이 하루 생산 500톤 규모에 신문용지 생산능력은 하루 291톤인데 비해 전주제지는 하루 생산량 1390톤 규모에 신문용지 생산능력은 하루 1175톤이었다. 더욱이 전주제지는 신문용지 내수시장 점유율이 1984년 43.6%에서 1987년에는 52.2%에 달했다. 이같은 전주제지의 과감한 증설에 자극받은 세풍은 그동안 자금사정으로 보류해왔던 증설계획에 박차를 가해 1990년 9월 일본 미쯔비시중공업과 하루 생산능력 400톤, 규모의 N-2호 초지기 도입계약을 체결, 2년여의 건설기간을 거쳐 1992년 9월부터 본격 가공에 들어갔다. 이 초지기는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벨로이드사의 벨베이 포머형의 쌍둥와이어식 구조로 와이어가 지층의 양면을 압축 탈수하기 때문에 기존의 N-1호 초지기보다 휠씬 개량된 최신예 기계였다. 특히 자체 기술진에 의해 조립되었는데 시운전한 지 한달만에 제 성능을 완전히 발휘해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고판남 회장은 이와 관련 "세풍 제지사업본부의 가장 큰 자랑은 군산제지공장 현장기술자들의 높은 기술 수이다"며 "제지시설과 장치가 아무리 첨단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조정하고 조작하는 것이 인간인 이상 우수한 기술자들의 존재야말로 가장 귀중한 자산이다"고 강조했다는 후문이다. 이에따라 세풍의 연간 생산능력은 24만4000톤으로 증대됐고 국내 신문용지 공급능력도 연간 59만여톤에서 72만여톤으로 늘어나면서 1989년 이후 계속돼온 신문용지 공급부족 사태가 다소 완화됐다. 이외에도 세풍은 1991년 12월 발전량 1만2000㎾ 규모의 열병합발전소를 완공함으로써 월 평균 2억2000만원의 생산비를 절감하는 한편 1995년 7월에는 국내 신문용지업계에서는 한솔제지에 이어 두번째로 국제적 품질인증기관인 한국표준협회 부설 품질인증센터로부터 ISO인증을 획득해 품질의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공인받았다. 세풍은 지역사회에서의 기업의 책임을 수행하는데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75년 세대문화재단 설립이후 지방의 각종 문화발전사업을 적극 후원했으며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개정간호전문대학과 제일 중고등학교를 운영하면서 가정 형편이 어려운 우수인재들에게 매년 40005000만원 상당의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지역사회 발전에 공헌했다.
처음 제지사업에 진출한 한국합판은 안종렬 공장장을 중심으로 하는 현장 기술진에 대해 깊은 신임과 기대를 갖고 있었다. 고려제지가 힘 없이 무너진 것은 기술 부족이나 불화에 의한 것이 아니라 김원전 사장의 무리한 사업 확장 때문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안 공장장을 비롯한 핵심간부들이 종업원들에게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었을 뿐 아니라 상호 이해와 협조를 통해 모든 과제를 차질없이 수행함으로써 인화를 최고 덕목으로 삼고 있는 한국합판으로서는 여간 믿음직스러웠다. 특히 자체 기술진에 의해 제3호 초지기가 조립 완공됐고 이어 국내 최초로 도입된 최신설비인 N-1호 초지기도 무난히 준공시킴으로써 안 공장장에 대한 신망은 더욱 두터웠다. 그러나 그는 잇따른 공장 화재로 인해 실로 어처구니 없이 세대제지를 떠나게 됐다. 세대제지 군산공장은 1980년 11월 불의의 화재가 발생, 1억6000여만원의 재산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은 화재를 낸 용접공이 실화혐의로 입건 되는 것으로 일단락됐지만 1982년 1월 또 다시 현장 종업원들의 실수로 화재가 발생해 34억원의 피해가 나면서 기술진 개편이란 후폭풍을 맞았다. 회사측에서는 잇따른 화재가 종업원들의 근무기강 해이에서 비롯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회사측은 우선 감독 소홀에 대한 책임을 물어 1982년 3월 기술담당 상무이사인 안종렬씨를 공장장직에서 해임하고 한국합판 상무이사로 전보발령하는 한편 관리담당 상무이사도 서울사무소 판매담당 상무이사로 좌천시켰다. 하지만 이 인사에 대해 종업원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이번 화재가 관리담당 상무이사의 소관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기술담당 상무이사인 안 공장장까지 문책한 것은 회사측이 현장 기술자들의 권익을 지나치게 내세우던 안 공장장을 쫓아내기 위해 화제를 빌미로 의도적인 인사를 단행했다는 것이다. 또 이듬해인 1983년 8월에는 고려제지 출신인 생산부장마저 공장을 그만 두면서 세대제지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주역들이 모두 세대제지를 떠나면서 기술직의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세대제지는 1981년 4월 창업주인 고판남 사장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부사장인 고병옥씨를 사장으로 취임시키면서 경영체제를 바꿨다. 고 신임 사장은 창업주 고판남 회장의 외아들로 이때부터 세대제지는 2세 경영체제로 돌입했다. 고 회장이 주력업종의 하나인 세대제지의 경영을 아들에게 맡긴 것은 고령에 의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모기업입 한국합판이 여러 업종의 사업체를 거느린 그룹으로 성장함에 따라 그룹 총수로서의 역할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오랜 경영수업을 통해 아들인 고 사장이 경영인으로서 자질을 갖췄다고 인정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이밖에도 고 회장이 제11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하려던 것도 한 아들에게 세대제지를 맡긴 또 하나의 이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 사장은 서울대 공대 화공과 출신으로 1961년 12월 그의 부친인 고 회장이 경영하던 배달산업주식회사에 취체역(감독관 역할)으로 취임해 이때부터 부친의 사업을 돕기 시작했다. 배달산업은 1953년 고 회장이 군산에 설립한 성냥제조회사로 이후 1962년 상호를 한국합판으로 변경했ㄷㅏ. 고 사장은 한국합판에서 감사와 상무이사를 거쳐 1968년 1월 전무이사로 승진했다. 그 는 여기에서 탁월한 경영수완을 인정받아 1973년 새로 출범한 세대제지의 부사장으로 취임해 최고 경영진의 한 사람으로 경영 일선에 나섰다. 이후 그는 한국합판 부사장을 거쳐 1978년 2월 대표이사 사장에 올라 한국합판의 경영대권을 물려 받았다. 그는 한국합판을 직접 운영하면서 기술개발과 경영합리화를 시도했다. 그 결과 이 회사의 합판은 동종 기업체 제품보다 질적인 면에서 우수성을 인정받아 당시(1980년) 원가 상승 및 불경기 속에서도 계속 제값을 지킬 수 있었다. 고 사장의 진가는 세대제지 부사장 시절에 더욱 빛났다. 새로 창업된 세대제지의 부사장으로 취임한 그는 기업가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던 옛 고려제지 종업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줘 새 출발을 도왔고 기술진을 독려해 제3호 초지기가 단시일 안에 조립 완공시킨데 이어 N-1호 초지기를 도입 증설해 생산능력면에서 동종업계를 제치고 계속 1위를 지키는 등 큰 업적을 남겼다. 이때문에 그는 세대제지 부사장 시절에 이미 제지업계 2세 경영자 중 가장 먼저 입지를 다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생산능력 증대에 결정적 역할을 한 N-1호 초지기 도입과 관련 일각에서 제기한 비판에 대해서도 적극 나서며 신문용지업체 1위의 자부심을 내비쳤다. 그는 세대제지가 최신예기라고 자랑한 N-1호 초지기는 이미 컴퓨터 제어방식을 채택하는 추세였기 때문에 그리 자랑할만한 것이 아니고 연간생산능력을 9만톤이라도 내세운 것 역시 지나친 과장이라는 동종업계의 시각에 대해 "N-1호 초지기는 분당 900m까지 속도를 올릴 수 있는 새로운 기계이기 때문에 지류수요가 늘어날 경우 하루 300톤 이상까지 끌어 올릴 수 있다"고 반박한 것. 하루 250톤 규모의 생산능력을 갖춘 N-1호 초지기가 지류 수요가 증가할 경우 300톤까지 증대할 수 있다는 그의 설명은 당시 주간 매경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해 1980년 4월 11일 기사를 통해'이번에 증설을 마친 세대제지 군산공장의 초지기는 분당 900m까지 속도를 올릴 수 있는 신형 기계로 앞으로 국내 용지 수요 증대를 예상해 스피드업이 가능한 최신예 초지기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처럼 탁월한 경영능력을 보인 고병옥씨가 사장으로 취임한 것은 제2차 유가 파동과 재정 긴축정책 실시, 10.26사건과 정국의 혼미, 사회 불안 등으로 내수경기가 극도록 위축되면서 참신한 경영인의 등장이 요구되었던 시절, 이미 예견된 일이나 다름 없었다.
장기적 관점에서 대량생산으로 원가를 절감하고 지류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서는 대규모 생산시설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국내 신문용지생산업체들은 앞다퉈 생산시설 증설에 나섰다. 세대제지가 1974년 제3호 초지기를 준공해 본격 가동에 들어가면서 전주제지도 국내 최대인 하루 생산 200톤 규모의 초지기 증설을 추진했다. 1974년 10월 당시 서독 에셔뷔스사와 초지기 도입 계약을 체결한 전주제지는 이듬해 5월부터 시설을 도입해 1977년 2월중순부터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갔다. 이로써 전주제지는 연간 생산능력이 연간 6만톤에서 13만톤으로 증가하며 세대제지의 생산능력을 뛰어넘었다. 또 그 사이 다른 업체들도 보강공사를 통한 증설 노력으로 1977년 당시 국내 신문옹지 생산능력은 26만6000톤으로 급증했다. 전년도 16만7000톤과 비교하면 불과 1년만에 59.3%나 증가한 셈이다. 한국합판이란 든든한 자금줄을 갖고 있는 세대제지도 전주제지 제3호 초지기 가동에 자극받아 시설 증설을 추진했다. 세대제지는 138억원을 투입해 연간 생산용량이 6만6000톤인 'N-1호 초지기'를 1978년부터 설치작업을 진행, 마침내 1980년 1월부터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 특히 이 초지기는 전 공정이 컴퓨터 제어방식에 의해 자동 조절되는 최신시설로 조업률 향상과 품질 개선 등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더욱이 자체 기술진에 의해 증속 등 부분적으로 보완 개선작업이 이뤄지면서 연간 생산량이 9만톤으로 증가해 세대제지의 연간 생산능력은 16만2000톤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이에 전주제지도 1979년 40억원을 투자해 현재의 시설용량을 16만5000톤으로 증가시키는 등 신문용지업체간 증설 경쟁이 심화됐다.
국내 신문용지 생산 1위 업체 자리를 전주제지에 빼앗긴 세대제지는 옛 고려제지 군산공장의 대대적인 시설 보수를 통해 기존의 연간 생산능력 2만톤을 회복했지만 군산공장이 문을 닫은 사이 연간 생산능력을 6만톤으로 증대한 전주제지를 따라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세대제지는 고려제지 시절 도입해 공장 구내에 야적돼 있던 새 초지기의 조립작업에 주력, 마침내 1974년 12월부터 정상가동에 들어갔다. 이 제3호 초지기는 고려제지가 1968년 2월 대일청구자금 220만불을 획득해 일본 I.H.I에서 제작해 온 것으로 지폭은 5130㎜ 였다. 그러나 제3호 초지기가 준공되는 과정에서 우려곡절도 많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제3호 초지기에 큰 기대감을 갖고 있던 고판남 대표가 제작사인 일본 I.H.I에서 기술자를 초청해 조립공사를 하려고 한 반면 현장 기술진들(고려제지 시절)은 자신들의 축적된 기술과 경험을 자신해 자체 조립공사를 함으로써 새 경영진에게 자신들의 실력을 과시할 절호의 기회로 여긴 것. 그렇지만 매사가 뜻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초지기를 자체 조립했으나 막상 시운전을 해보니 기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전기계통의 조립이 완전하지 않아 속도 조절 등 계기류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은 것. 결국 고판남 대표는 일본 I.H.I에 부탁해 전기 기술자와 조립 기술자를 초청해 초지기 조립을 마칠 수 있었다. 하루 120톤의 생산능력을 갖춘 제3호 초지기 준공으로 2만톤에 그쳤던 세대제지의 연간 생산능력은 단번에 그 3배인 6만톤으로 중가해 전주제지와 동일한 생산능력을 보유하게 됐다. 이에 따라 세대제지는 연간 생산능력이 우리나라 신문용지 생산 업체에서 36.0%로 차지하며 전주제지와 함께 공동 1위에 오르며 고려제지 시절의 위상을 되찾았다. 실제 1976년 3월 기준 국내 신문용지 생산업체별 연간 생산능력은 세대제지와 전주제지가 6만톤으로 가장 컸고 그 뒤를 이어 대한제지와 삼풍제지가 각각 1만9800톤, 삼진제지가 6600톤의 순을 보였다. 당초 제3호 초지기는 1970년부터 본격 가동에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관계당국이 초지기를 설치할 공장 건물의 신축자금만 융자해주고 이 밖에 소요될 일체의 자금 융자를 해주지 않아 조립공사에 착수하지 못하고 방치돼 있던 것을 세대제지가 고려제지를 인수한 후에야 비로소 빛을 보게 됐다. 이때문에 만일 고려제지 시절 이 초지기가 조립 준공돼 계획대로 1970년부터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면 고려제지가 계속 건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적지않다. 제3호기의 본격 가동은 국내 신문용지 생산시설 용량을 37.5%나 증가시켜 국내 신문용지의 만성적인 부족상테를 자급자족이란 오랜 숙원을 해결하는 결실을 맺게 했다. 세대제지는 또한 국내 최초로 신형 박피기를 설치하며 신문용지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세대제지는 고려제지 군산공장이 원래 일본 왕자제지 계열의 분공장격이었던 관계로 고려제지 인수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왕자제지와의 관계를 유지했다. 이때문에 업무협의차 일본을 왕래했던 세대제지의 한 간부가 1976년 우연한 기회에 북해도에 있는 왕자제지의 도마꼬마이공장에서 1개월동안 선진제지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이때 도마꼬마이공장에서 신형 박피기인 드럼바커(Drumbarker)에 주목한 세대제지 간부는 공장측에 간청해 설계도면을 얻어 국내 최초로 드럼바커를 군산공장에 설치했다. 기존의 박피기는 처리시간이 오래 걸리고 전력소비 및 소음이 큰 반면 이 신형 박피기는 이같은 문제를 해결해 효용성이 매우 컸다. 지금 생각하면 결코 대단한 장치라 할 수 없지만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기계로 평가받았다. 그후 전주제지도 이를 본떠서 드럼바커를 만들었다고 한다. 1978년 12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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