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4-12-11 17:26 (Wed)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아우타르케이아 길 - 박월선

모악산 기슭, 텃밭 길을 걷는다. 숲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이 시원하다. 바람은 구름을 몰고 도시가 보이는 산 아래로 간다. 텃밭 가는 길목에 아기 흑염소 몇 마리가 풀을 뜯고 있다. 아저씨가 아직 퇴원을 안 하신 모양이다. 퇴직을 하고 흑염소 농장을 시작했다는 아저씨가 보이지 않아 얼마 전 물어본 적이 있었다. 흑염소 아저씨가 안 보이시네요? 글쎄 암에 걸렸대. 지금 병원에서 수술하고 치료 중이라네. 아들이 가끔 와서 흑염소 사료 주고 가. 퇴직 후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는 아저씨. 어서 빨리 회복하시길 바라며 길을 걷는다. 흑염소 농장 너머로 걷다 보면 다랑이 논이 보인다. 다랑이 논은 모두 4층으로 되었다. 그중 3층, 4층 다랑이 논은 농사를 짓지 않았다. 이 논은 농사를 안 짓는대요? 작년에 가뭄이 들어서 아래 논 주인과 칼부림을 했어. 왜요? 아래 논 주인이 저 위 계곡에서 먼저 물을 호스로 끌어서 아래 논에 물을 대니, 위 논 주인이 물이 부족했던 거지. 아, 가뭄. 올봄 너무 가물어서 우리도 텃밭에 물을 주기 위해 애를 썼다. 그래서 열 받은 이 씨 할아버지가 막걸리를 잔뜩 마시고 물을 끌어오는 호스를 낫으로 잘라버렸어. 그러니 아래 논 주인과 싸움이 난 거지. 다친 사람은 없나요? 낫 들고 덤벼드니 경찰서에 신고하고 경찰이 출동하고 살인 미수죄라고 난리가 났지. 그래도 사람은 안 다쳐서 조용히 끝났어. 다행이네요. 도시에서 직장 다니던 자식들이 허겁지겁 와서는 아부지, 농사지어서 얼마나 남는다고 그라요, 이제는 농사짓지 마시오, 그 논 팝시다, 그랬다지. 과수원 길에 소문이 파다해. 빈 논에는 소문만큼 풀들이 무성하다. 과수원을 지나 기슭 아래 이르면 텃밭이 있다. 텃밭으로 지나는 길에는 작은 보랏빛 자운영 꽃이 피고 잡풀 속에서 피어난 참나리 꽃도 화사하다. 그동안 몰랐던 더덕 꽃도 길을 걷다 발견한 것이다. 계절을 모르는 듯 피어난 코스모스도 나를 보고 손을 흔든다. 질경이가 가득 찬 길을 밟고 가기 미안해 사뿐히 지르밟고 지나는 텃밭 길이다. 밭고랑과 고랑 사이를 밟고 흙의 부드러움을 느끼며 계절별로 다른 햇볕의 강약도 즐긴다. 도시의 경쟁 속에서 살다가, 이곳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모악산 기슭이 나를 안아서 위로해 준다. 힘들었지? 수고했어. 풀과 꽃들이 나무가 바람이 내게 말하는 것 같다. 물론 나는 최선을 다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보다 더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누군가와 경쟁하기보다 연약하고 쓸쓸하고 외로운 영원의 소유자인 나 자신을 위로하며 살기로 마음먹는다. 그래, 너는 최선을 다한 거야. 오늘 하루는 모악산에게 위로받고 들꽃들에게 사랑도 받을 자격이 있어. 자연은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땅에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면 햇볕과 바람이 들어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최근 깨달은 게 있다. 비닐하우스 안에 레몬밤 허브 한 줌을 심었더니 아주 잘 자랐다. 일주일에 한 번씩 잘라 말려서 아들 방에, 남편 자동차 안에, 그리고 텃밭을 찾은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향기를 만끽했다. 그런데 휴가철에 2주 정도 그곳을 찾지 못하고 3주째 갔더니 그 옆에 심어 놓은 참외 덩굴이 허브 줄기를 감아 허브를 전멸시키고 있었다. 작은 땅에 욕심껏, 너무 많은 것들을 심어 놓았으니 뻗을 자리가 부족했던 것을! 텃밭으로 가는 길 아래 엉성하게 만든 평상에 누워 책 한 권을 꺼낸다. '행복의 경제학'. 쓰지 신이치 글은 내 마음을 위로해준다.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가 풍요라는 보물을 찾기 위해 너무나도 서둘러 왔기 때문에 행복이 우리를 따라잡지 못하고 뒤처져버렸다. 작가는 말한다. 행복해지기 위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요소는 자기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과 또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사이의 균형 감각이며, 자신과 세상과의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는 것. 나는 늘 많이 가질수록 행복해진다고 믿어왔다. 그리고 더 많이 갖기 위해 땀 흘리는 개미처럼 살아왔다. 그 시간과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유는 내 마음을 채워주지 못한 것 같다.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것처럼 가슴을 쓸고 가는 휑한 찬바람 소리가 자주 들린다. 그런데 이 길은 내게 가르친다. 만족하고 순응하며 소통하라고. 나는 텃밭까지 오르는 길을 아우타르케이아 길이라고 명명한다. 아우타르케이아(자기만족이라는 그리스어) 길은 헛되고 무익한 것에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정도껏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것이라는 의미다. 이 길에서 위로받고 자연이 선물해준 채소들을 가득 안고 다시 도시의 집으로 걷는다. 바람 한 줌도 가슴에 품고서. *박월선: 2007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당선. 동화 '딸꾹질 멈추게 해줘', '닥나무 숲의 비밀', '내 멋대로 부대찌개'(공저) 등.

  • 문학·출판
  • 기고
  • 2019.01.11 17:48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어머니! 당신의 몸길 위를 걸어갑니다 - 김행인

길에 대한 어느 추천사 몇 해 전 가을, 들길 하나가 내게 추천사를 써달라고 부탁해 왔다. 아! 길이 사람을 추천하면 모를까 감히 사람이 길을 추천하다니? 그럴 수는 없었다. 어쩌면 우리네 사람들을 낳았을지도 모를 길인데. 그즈음 나는 달이 바뀔 적마다 수십의 무리와 함께 이 산길, 저 들길을 밟으며 콧노래를 부르곤 했다. 꽤 많은 친구들이 언제든 내가 가자고 하면 가고, 걷자고 하면 나와서 걷던 호시절이었으니, 길이 내게 추천을 청한 게 무리가 아닐 수도 있었다. 이름 없는 들길 하나쯤 추천해 주고 소개비를 받아먹으면 어떠랴. 하지만 나는 감히 그에 대해 함부로 주절거릴 수가 없었다. 이름 없는 길도 아니었거니와, 감히 나 같은 소인배가 이러쿵저러쿵 평을 할 대상이 아니라 여겼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정도는 될 만큼, 이 들길은 내게 숭모의 대상이었다. 우리 전라북도의 이 길 저 길 곳곳을 샅샅이 헤매고 다녔고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새롭게 다가오는 길의 맛을 그래도 많이 아는 편이라 자부해왔음에도, 내가 이 들길에게서 받은 감동은 마치 아이에게 듬뿍 내려준 어머니 사랑처럼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몇 해 동안 가슴 깊이 간직했던 이야기. 더 이상은 묵힐 수 없어 사모곡(思母曲)을 부르듯이 끝내 털어놓는다. 구불구불 내 어머니 몸 같은 구불길 이름이 구불길이라고 했다. 낮은 산등성이와 논배미를 구불구불 돌아서 가는 길이라 붙여진 이름일지 몰라도 나는 그 이름만으로 어머니를 연상하게 되었다. 어쩌면 내 어머니의 구불구불한 인생 여정 탓일 수도 있겠고, 어린 시절 보았던 어머니 가슴과 배의 포근한 느낌 탓일 수도 있겠다. 옥산저수지 수변산책로는 구불길에서도 다섯 번째 구간, 구불5길이라고 했다. 나는 늦은 가을날 이 길을 처음 만났다. 공식 명칭이 옥산저수지라 하지만 호수라 하는 게 더 어울릴 듯하다. 호수 초입에서 둑방으로 올라서면 맨 먼저 눈부신 억새 숲에 경탄을 멈추지 못한다. 둑방길에 발을 딛자마자 억새의 화려한 흔들림이 나그네 발길을 그만 붙든다. 잿빛 구름이 낮게 내려와 억새풀과 한 덩어리로 춤을 춘다. 저만치서 오색 바람개비가 자연의 풍력발전처럼 빙빙빙 돌아간다. 어릴 적 추억도 함께 돌아간다. 호수 위 하늘 높이 방패연이라도 띄우면 좋을 것처럼 바람은 세차다. 이 인공 언덕 위의 풍경은, 가을 끝자락에서 탈색한 나무와 빛들의 떨림이 한가락 자연의 노래를 들려준다. 둑방길을 뒤덮은 억새 숲길을 지나 수변산책로로 들어선다. 잘 단장된 산책로는 가을 내내 떨어져 길 위에 곱게 쌓인 낙엽들 덕분에 푹신푹신하다. 주변의 온 산을 뒤덮은 마삭줄은 낙엽과 함께 포근한 이불이 되어 촉촉한 마사포길을 만들어 주었다. 걷는 내내 나그네의 발은 안식에 젖어든다. 호수 옆으로 낙엽이 온통 다 떨어져 쌓인 갈숲 흙길은 구불길의 압권이다. 숲속의 은은한 나무 향은 길이 끝나는 지점까지 내내 건강과 치유의 향을 맘껏 나눠주고, 낙엽이 쌓인 포근한 길은 편안한 촉감으로 내내 발길을 감싸 준다. 나그네의 호사다. 가만 보니 길 주변에 습지가 잘 발달된 자연생태학습장이 형성되어 있다. 곤충과 야생화, 새 들이 공생하는 체험학습장이다. 곳곳에 표시된 안내판에는 서식하는 생물 종류의 다양성에 대해 잘 설명해주고 있다. 저수지의 물빛도 아름답거니와 나뭇잎 모양의 녹색 의자며 노란색 안내판, 둥근 통나무 의자, 나이테가 선명한 널빤지 모양의 긴 의자, 녹색 화살표가 선명한 빨래판 모양의 이정표 등 세심하게 공들인 시설들도 아름답다. 자연의 경치 못지않게 사람의 손길이 많이 간, 정성스러운 길이다. 이내 하늘을 향해 시원하게 솟아오른 대나무 숲길이 반겨준다. 두어 번 깊은 호흡을 하고 보니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몸이 맑아진다. 이산화탄소를 몽땅 빨아들이고 산소를 뿜어내는 대나무 숲은 그야말로 하마 숲이라 할 수 있겠다. 호수 주변에는 물빛길, 꽃향기길, 대나무숲길, 소나무숲길, 단풍나무숲길, 왕비들나무 같은 다양한 활엽수와 침엽수가 무성하게 자라 군락을 이루고 있다. 호숫가 둑길을 걷다가 산자락으로 접어들면 위태로울 만치 바짝 좁아진 수변산책로를 걷기도 하고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위 오솔길을 걷기도 한다. 호젓한 숲길을 걷노라니 늦가을 쌀쌀한 바람을 막아 주는 소나무 숲을 뚫고 황금빛 석양이 눈부시다. 한참을 걷다가, 몸 안 어디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솟구쳐 오르는 느낌에 파르르 떨고 만다. 가만 보니 나뭇가지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결이 나뭇잎에 비치는 햇빛에 부딪혀 떨리는 것이었다. 아! 나는 순간 가슴이 쿵 울리고 말았다. 어머니 숨결 같은 햇빛, 그 안에서 아주 작은 내가 태어나고 있었다. 이름마저 빼앗긴 굴곡진 역사 호수를 에워싸고 있는 청암산은 원래 취암(翠岩)산이었다. 푸르다는 의미의 취암산이던 것을, 일제 강점기에 푸를 청(靑) 자를 써서 청암산으로 이름을 둔갑시켰다니, 남의 땅 이름을 함부로 바꿀 정도라면 그만한 저의가 있었겠다. 산 주변을 물로 가득 채워 버린 대공사가 들판을 내려다보던 바위의 색깔을 아예 바꿔 버리지 않았겠는가? 주변이 온통 논이던 해발 116.8미터짜리 낮은 산을 파헤치고 둑을 쌓아서 저수지로 바꿔 놨으니 말이다. 일제 강점기 1939년 옥산ㆍ회현 일대에 수원지로 조성한 옥산저수지가 이 호수다. 해안을 끼고 비옥한 대지를 가진 옥산, 회현, 대야, 임피, 서수 들녘에서 많은 농산물이 생산된 곡창지대 군산. 이를 수탈하기 위해 전군도로와 철도를 만든 일제가 곡물을 더 많이 가져가기 위해서는 저수지가 필요했다. 이 호수는 오늘날 군산의 제2저수지다. 주변 농경지와 군산 시민의 상수도 역할을 한다. 1963년부터는 상수도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물이 깨끗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호수 주변의 자연 생태까지 잘 보존되었다. 일제가 옥구 평야의 미곡을 퍼내가기 위해 산을 파헤치고 둑을 쌓고 논을 막아 만든 인공의 저수지가, 어언 80년이 지나는 동안 물 맑은 호수로 변모했다. 세월이 오늘날의 천연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군산 옥산저수지, 아니 옥산호수의 수변산책로는 청암산 능선을 거쳐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과 호수를 옆으로 끼고 도는 구불구불한 수변길이 나란히 그 아름다움을 뽐낸다. 14.8킬로미터에 이르는 구불 5길, 7시간은 걸려서야 다 걸을 수 있다는 군산 구불길 25킬로미터 중에서 절반을 넘는 길이다. 햇볕 창창한 가을 문턱이다. 나는 또다시 이 길을 찾아 일상의 무게를 물 위에 띄워 올리고 싶다. 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더욱 좋겠다. 둑방길 억새밭을 지나 숲의 호흡을 느끼며 타박타박 호수 둘레를 걷는 안식의 길. 굴곡진 역사를 살아온 내 어머니 구부러진 몸 같은 길. 알록달록 수풀이 우거진 호수 주변을 따라 이리저리 느릿느릿 구부러지고 싶다. *김행인(본명 김수돈): 평화동마을신문 편집인/마을미디어 운동가/시인. 2010년 월간 『문학바탕』 신인문학상.

  • 문학·출판
  • 기고
  • 2019.01.03 19:51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별 - 김성숙

별이 떴어? 햇살 한 줌이 나풀나풀 얼굴을 간질이는가 싶더니 오싹한 바람이 부산하게 몸을 흔들어 깨웠다. 뭐라고? 희미하게 들리는 엄마 목소리. 눈꺼풀과 입술은 솜이불의 무게로 가라앉아 도통 엄마를 불러 세우지 못했다. 별이 떴어? 야가 뭐라고 헌디야. 안 들려! 나 지금 나강게 후딱 일어나서 학교 가잉? 애기는 할머니 집에 먼저 데려다 놓을랑게 너도 어서 가서 밥 먹고 도시락 챙겨 갈라믄, 아, 얼른 인나! 마빡은 또 어디서 깨져가지고 와서는. 아 씨, 또 김치볶음이다. 할머니가 싸주는 도시락 반찬은 언제나 묵은 김치 볶음. 군둥내 씻어낸다고 물에 한나절은 불려놨던 김치라서 에미 맛도 애비 맛도 안 나는 허연 김치볶음이 오늘 도시락 반찬이다. 눈이 번쩍 뜨였다. 썩을 것들, 또 지 반찬 숨기고 돌아앉는 꼴 좀 보겄구만. 그런데 내가 언제 집에 돌아와 잠이 들었지? 나는 그래, 할머니 집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있었다. 못 써! 아, 밥을 왜 자꾸 달구 새끼헌티 뿌려! 아가 입맛이 없냐? 근디 어찐다냐. 아칙에 계란 두 개 할아버지 부쳐주고 인자 없는디. 내가 가서 닭장 조깨 다시 들이다보고 올란다. 할머니, 나도! 할머니가 마루 아래 신발을 주섬주섬 찾을 때쯤 방남이가 불쑥 마당으로 들어섰다. 바 바 밥 시 시 식사하셔요? 응, 그려. 방냄이 왔냐? 예 예 예에. 방냄이, 밥은 먹었냐? 예 예 예에. 그럼 거기 조깨 있어잉. 나 저그 좀 갔다 오고. 예 예 예에. 방남이는 밥 먹는 우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마루 끄트머리 즈음에 엉거주춤 앉았다. 왜 거기 그러고 있어? 애 애 애기. 애기? 애기, 안 돼.내가 알지 못하는 언젠가 사고로 바보가 된 방남이는 아마도 마흔이 넘고 쉰도 넘어 보였다. 한쪽 다리를 끌고 한 손도 비틀어진 터라 영락없는 반푼이 취급을 받아서 어린아이들 곁에는 가지 못하게 어른들이 단속을 한 모양이었다. 괜찮아, 일루 와. 아 아 안 돼, 애기. 아, 안 들려! 일루 와! 방남이는 짐짓 못이기는 척 밥상 옆으로 다가왔다. 왜? 어? 뭐 뭐 뭐가? 아, 왜 왔냐고? 아 아 아니 그냥. 밥 먹는 옆에서 가만히 있기가 그랬는지 방남이는 엉덩이를 들고 토방 아래 신발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으 으 읍내 간다. 읍내? 돈 있어? 버스 태워 준대? 반푼이 방남이는 버스도 못 탄다. 돈이 있어도 태워 주지를 않는다. 왜 그러냐고 물어봐도 누구 하나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꼬치꼬치 캐묻다가 반푼이랑 어울려 다니지 말라는 말을 들은 이후로는 그나마 방남이에 대해 묻는 것도 관뒀다. 버 버스 안 타. 거 거 걸어서 간다. 야, 밥을 왜 자꾸 조물딱거려? 인 내 봐, 손! 누나, 손! 옳지! 인제 수저 쥐고. 아, 뭣이 안 되야, 수저로 이렇게 밥을 푹! 푹! 푹! 재밌지? 그려, 푹! 옳지, 잘헌다! 근디 뭐라고? 걸어서 읍내를 간다고? 거가 어디라고 걸어서 가? 가 가 가 봤다. 지랄허네. 어느 새 빈 그릇에 밥풀 몇 개 남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닭들이 제 할 일을 다 안 한 듯싶다. 남은 한 알까지 밥풀을 꼼꼼히 떼어 먹었다. 밥 남겼다고 집에서 쫓겨난 뒤 생긴 습관이다. 얼마나 걸리는디? 해 해 해 지기 전에 온다. 심심허겄네. 아 아 안 심심해. 강아지풀이 내 내 낼름거리고 구름이 발라당한다. 야, 구름은 두둥실이야. 그 그 그래, 두둥 두둥실. 뭉게뭉게라고 해도 돼. 무 무 뭉, 뭉, 뭉. 됐고! 내가 중리까지만 가줄 틴게. 아 아 아. 대신 갔다 와서 읍내 얘기 해 주는 거다. 아 아 아. 뒤안을 돌아 나오는 할머니 손에는 내 것이 아닌 계란이 들려 있었다. 요놈 하나 게우 찾았네. 상태 해 줘, 할머니. 너는 그새 밥 다 먹었냐? 어찐다냐? 난중에 저 달구 새끼 하나 잡아먹지 뭐. 저 눈탱이에 허옇게 고내기 낀 놈은 내 꺼여, 할머니. 먼저 잡아먹지 말어. 나 놀다 올게. 어디 가냐? 중리! 방냄이도 같이 가냐? 에 에 예. 아니! 방냄이는 딴 데 간대! 갔다 올게! 방남이의 신발은 언제나 흰 고무신이다. 모양이 없는 것 빼고는 참 요모조모로 쓸모가 많은 신발이었다. 학교에서 개구리밥 떠 오라는 숙제를 내줬을 때도, 벌을 잡아 벌침 빼기 놀이를 할 때도 방남이는 직접 고무신을 벗어 시범을 보였다. 운동화로는 도무지 하기 힘든 것이 고무신으로는 몇 번 만에 성공을 했다. 그래도 읍내까지는 꽤 먼 길인데 걱정이 들었다. 방냄아, 너 신발 괜찮냐? 어 허 허엉. 읍내까지 갈려면 발 아플 거 아녀. 신작로에는 돌도 엄청 많은디. 어 허 엉. 고 고 고무신. 우리 아빠 운동화 빌려줄까? 저녁 때 몰래 우리 토방 밑에 두고 가. 아 아 아니. 고 고무신 조 좋아. 너 신발 찢어져도 나 몰른다잉. 난중에 발에 피 철철 흘림서 엉엉 울어도 나 몰라잉? 어 허 어엉. 야! 근디 저 자전거에 매달려 오는 것이 뭐냐? 앞에 길을 막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쩌렁쩌렁 종소리를 울리며 달려오는 자전거에 매달린 것은 영근이였다. 자전거가 큰지 영근이가 작은지 안장에 엉덩이를 붙이지도 못하고 파이프 사이로 다리만 집어넣어 씰룩거리며 페달을 굴리고 있었다. 저렇게 비틀어진 자세를 하고도 어떻게 제 몸집보다 배는 큰 자전거를 타는지 묘기를 보는 듯했다. 동춘서커스 나가냐? 어디 가냐? 방냄이도? 넌 어디 가는디? 아 씨, 너그 철공소 간다. 동네에 있는 유일한 철공소, 우리 삼촌이 사장이자 직원인 곳이다. 말이 좋아 철공소지 늘 경운기며 탈곡기며 농기계들이 드나들었고, 자전거쯤은 일거리로 치지도 않았다. 철공소에는 늘 베어링이 굴러다녀서 다른 애들이 유리구슬로 구슬치기를 할 때 나는 쇠구슬을 절그럭거리고 다녔다. 왕구슬 열 개와도 바꾸지 않을 만큼 쇠구슬의 인기는 대단했는데 나는 그깟 왕구슬 따위와는 거래를 하지 않았다. 친한 친구들 생일에 한 세 개쯤 선물할 뿐이었다. 영근이는 그중 구슬 선물을 가장 많이 받은 녀석이었다. 왜? 짐빠가 고장 났다고 삼촌헌티 봐 달란다. 잘만 타고 오드만. 아녀, 확실히 어디가 휘었나벼. 멫 번을 자빠질 뻔했어야. 그려, 가도 욕본다. 가 봐. 너는 어디 가는디? 읍내. 읍내? 중리 가서 버스 탈라고? 방냄이는? 방냄이도 읍내. 너그 둘이 읍내 간다고? 뭐덜라고? 강아지풀이 낼름거리고 구름이 발라당허는 것 보러. 뭐? 방냄아, 야가 지금 뭐라고 허냐? 모 모 몰러. 허허허엉. 거 거 걸어서 간다. 야떨이 점점 모를 소리를 허네. 야, 쫌만 지둘려 봐. 아니 천천히 가. 내가 후딱 짐빠 맡기고 따라붙을랑게 천천히 가고 있어잉? 영근이는 또 서커스를 하며 작아져 갔다. 영근이의 덩치가 작아서 그런지 자전거는 더욱 커다랗게 보였다. 넘어지면 낑낑거리며 잘 일으켜 세우지도 못하는 무거운 자전거를, 그 위에 올라탔다고 저렇게 재주 부리듯 하는 걸 보면 신기했다. 그러고 보면 저 자전거 나이가 예닐곱 살은 되었겠다. 영근이 엄마가 산통을 겪을 때 영근이 아버지가 저 짐자전거에 싣고 읍내 병원까지 내달렸다고 했다. 산달이 가까워오자 영근이 아버지는 자전거 짐받이에 가마니를 깔고 담요를 덮고 했단다. 혹시라도 한밤중에 병원에 갈 일이 생기면 차도 안 다니는 시골 마을에서 대책이 없으니 그리 준비한다 했단다. 아니나 다를까, 영근이 동생은 개도 안 짖는 한밤중에 양수를 터뜨렸고, 영근이 아버지는 영근이 엄마를 불끈 들어, 아니지 영근이 아버지의 체구로 봐서는 불끈 들었을 것 같지 않다. 암튼 영근이 엄마를 싣고 달렸다지, 저 신작로를. 말이 신작로지 애기 머리통만 한 돌덩이들이 심심치 않게 덤벼드는 그 돌밭 길을 어찌 달렸을까. 그 덜컹거리는 가운데 영근이 엄마는 아기가 나오려는 걸 참 잘도 참았겠다. 일설로는 창북리에서 밤늦도록 막걸리를 마시고 갈지자로 경운기를 운전해 오던 영근이 삼촌을 중간에 딱 만나서 자전거와 경운기를 바꿔치기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영근이 아버지의 무용담에 부러 찬물 끼얹을 이유가 없던 탓에 다들 뻘소리려니 했다. 큰일 한 자전거는 영근이 동생이 집에 오던 날, 막걸리도 한 병이나 받아 잡쉈다. 암튼 참 기특한 자전거이니 녹이 슬고 휘었다고 내버려둘 수가 없을 것이다. 아 씨, 천천히 가랑게 벌써 중리까지 왔냐? 가 가 가. 방냄아, 정말로 해 지기 전에 올 수 있어? 어? 어 허 어엉. 진짜지? 해 지기 전에 와야 혀, 엄마 오기 전에. 해, 지기 전에. 그럼 같이 가게. 영근아, 너도 갈래? 나 돈 없는디? 버스 안 탄당게. 진짜로 걸어서 갈라고? 진짜로? 야가 뭣을 들었디야, 귓구녘에 먼지 들어갔냐? 아! 아! 아! 아이 씨! 아퍼! 근디 읍내를 뭐덜라고 가는디? 방냄이, 구경 간디야. 구경? 뭔 구경? 강아지풀 낼름거리는 것도 보고, 구름이 발라당허는 것도 보고, 시장 구경도 허고. 아, 잠깐! 시장 구경? 그럼 자전거포도 있냐? 방냄이는 혼자 벌써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 있겄지? 시장에 자전거포 없겄냐? 부안 읍내가 얼매나 큰디. 글지? 있겄지? 아 씨, 그럼 나도 같이 갈까? 자전거포는 뭣 허게? 삼촌이 느그 자전거 못 쓴디야? 다리 아래에는 늙어빠진 쪽배가 여럿 매여 있었다. 한눈에도 물일 나간 지 오래돼 보이는 버려진 듯한 배였다. 오늘 제 할 일 못 허는 것들, 여럿 보는구먼. 뭐? 아니, 자전거포는 왜? 아 씨, 자전거 좀 바꾸자고 바꾸자고 해도 쓸 만헌 자전거가 없더라고 우리 아버지가 그러잖냐. 저놈의 짐빠, 엔간치 부려먹었어야지. 우리 삼촌은 뭐라는디? 이제 그만 바꾸리야? 아니, 느그 삼촌이 뭐 그런 말이나 허는 양반이냐? 그냥 맨날 웃기만 허지. 긍게로 내가 가서 한번 보고 아버지헌티 이참에 바꾸자고 씨게 말을 히야겄어. 니가 바꾸자고 헌다고 느그 아버지가 바꾼대? 그런 거시기가 있지. 뭣인디? 뭔 쪼간이 있길래 그려? 있어, 그런 거시기가. 이히히히히. 말헐까? 저번 날에 엄마가 아버지 찾아오라고 혀서 저녁 늦게 종점상회에 갔잖냐. 거그서 딱 봐 버린 것이지. 돈을 세고 있더라고, 이만큼을. 난 그냥 그런갑다 혔는디 아버지가 엄마한테는 비밀로 하라잖냐. 음마, 뭔 돈이대? 나야 몰르지. 알 것도 없고! 글서 아버지헌티 탁 얘기했잖냐, 대신 자전거 새로 사자고. 음마, 간댕이가 부었는갑다잉. 긍게 나도 몰르겄어야, 그때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근디 아버지가 좋은 놈 나오면 그러자고 하더라고. 뭐 글고서 채일피일 미룰라고 그렸는지 몰르지만 내가 내 눈으로 좋은 놈 딱 보고 와버리면 어쩔 것이여. 자전거가 그것이 뭣이 그렇게 중허다고? 야, 저기 방냄이가 뭐라고 허는디? 앞서 가던 방남이가 주먹을 쥐고 우리를 향해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야! 너 우리헌티 주먹질허냐? 내 낼름, 낼름. 방남이 주먹 안에 든 건 강아지풀이었다. 솥뚜껑만 한 손이 쥐엄쥐엄 하니 강아지풀이 뽀록뽀록 주먹을 비집고 고개를 내밀었다. 뭐여? 이것이 낼름낼름이여? 내 낼름, 낼름. 야, 영근아! 낼름! 낼름! 에이여, 메롱이다!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아기 적에 이 강아지풀과는 천적이었다고 한다. 아기를 맡길 데가 없던 엄마는 밭일을 나갈 때 나를 데리고 가서 바구니에 넣어둔 채 일을 하고는 했는데, 어느 날 아기가 자지러지게 울더란다. 달려가서 보면 아무 일도 없고, 다시 우는 소리에 달려가 보면 아무 일도 없고. 샛거리 시간이 되어 가만히 아기 바구니를 지켜보니 바람이 불 때마다 바구니 속으로 강아지풀이 넘실거렸고, 그때마다 아기는 숨넘어갈 듯 울음을 터뜨렸단다. 대체 이 강아지풀 따위가 뭐가 무섭다고. 내가 무서워한 게 과연 강아지풀이었을까? 문득문득 엄마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일깨워줬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바 바 바다. 아이 씨, 뭐라는 거여. 야, 이 방냄아, 말 좀 똑바로 혀! 아, 바다였다고 하잖어. 이 길이 옛날에는 바다였다고. 에이, 말도 안 돼. 바다가 어떻게 땅이 되냐? 아녀, 나도 들었는디? 난 첨 듣는디? 야, 넌 전학 왔잖여. 어찌케 아냐. 난 여기서 태어나서 쭉 살었는디 내가 더 잘 알지. 여기 간척헐 때 우리 아빠도 돌 날랐디야, 총각 때. 너 태어나기 전에? 글지, 너도 태어나기 전에. 그럼 이 길은 몇 살이냐? 한 열 멫 살은 되지 않겄냐? 그려서 안직도 이렇게 길에 돌댕이들이 많은 것이냐? 글지도 모르지. 옛날에는 저어기 논들도 다 바다였당게. 그려? 논도 다? 어쩐지 밥이 좀 짜드라. 뭔 밥이 짜! 아, 우리 집 밥은 짜. 진짜여! 진짜면 느그 엄마가 밥에다가 소금을 한 주먹 집어넣는가 비지! 아이 씨, 진짜랑게. 아, 그렇다고 혀 두고. 그럼 이 흙을 어디서 다 퍼온 거여? 나사 모르지. 어디서 갖고 왔겄지. 거그는 그럼 민둥산 되었겄다잉? 산을 깎어서 갖고 왔을까? 그럼 땅을 파서 갖고 왔겄냐? 거그는 바다가 되았게? 그렸을까? 그럴지도 몰르겄다잉. 뭣이 그럴지도 몰라. 뭐 사금파리 맞추기 허냐? 바다는 땅으로 만들고 땅은 바다로 만들게? 심 팽기게 뭣 허는 짓이여? 긍가? 그나지나 이 길이 글고 봉게 너보다 형님이다잉? 형님! 하고 불러라. 예, 예, 형님! 에이여, 뽕이다! 영근이가 주먹을 날리는 시늉을 하고는 지레 저만치 도망쳐갔다. 영근이는 체구가 작은 대신에 달리기를 잘했다. 내가 운동장 한 바퀴 도는 사이에 두 바퀴를 돌고 들어와 여유롭게 웃고 있는 얄미운 녀석이었다. 아무리 쫓아가도 안 되는 줄 알면서 뒤돌아보며 약 올리는 영근이를 기어코 쫓아 달렸다. 따릉따릉! 너, 영근이 아니냐? 어, 안녕하세요? 너 잘 만났다. 안 그려도 일손은 부족헌디 나 한 사람 빠져나올랑게 어찌케나 켕기던지. 너 우리 집에 좀 갔다 와라. 예? 제가 왜요? 말꼬리가 잦아드는 걸 보니 조금만 밀어붙이면 고개 푹 숙이고 시키는 대로 갈 녀석이다. 영근이 저랑 노는데요?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방남이는 어느새 저만치 앞에 가 있었다. 그 큰 덩치가 어디 풀 몇 개에 가려진다고 나름 숨은 모양이었다. 다행히 아저씨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아, 긍게 후딱 갔다 와서 놀아도 되잖여. 우리 집에 가서 새참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좀 보고 아줌마랑 같이 갖고와잉. 제가, 어떻게요? 가지 말라고 엉덩이를 꼬집자 움찔하면서도 영근이는 아저씨의 부탁을 거절하기 힘들어했다. 이것 타고 후딱 갔다 오면 되지. 그때 난 보고야 말았다, 반짝하고 섬광을 발하는 영근이의 눈빛을. 넌 배신이야. 이 자전거요? 정말 이거 타고 갔다 와도 돼요? 그려. 너 자전거 잘 타지? 이것은 느그 집 거보다 좋은 것인게. 어찌케 뒤에 아줌마 태우고 올 수 있겄냐? 아, 예! 다녀오겠습니다! 나쁜 녀석. 하긴 자전거 때문에 눈이 멀어 아버지하고도 거래를 한 놈이 우리라고 못 버릴까? 내가 쏘아 날린 눈 화살을 정통으로 맞았더라면 이순신 장군도 전사했을 테지만 영근이는 자전거를 타고 눈 화살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미안! 담에 놀자! 잘 갔다와잉! 아저씨가 등을 돌려 논길로 저벅저벅 걸어 저만치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 방남이에게로 뛰어갔다. 방남이는 그때까지 들풀 몇 개에 몸을 가린 채 웅크려 있었다. 다 보여! 엉? 어 허어엉. 가자! 어. 여 여 영근이는? 영근이는 잊어. 그놈은 이제부터 배신자여. 내가 준 쇠구슬이 몇 갠디 지가 날 이렇게 배신해? 어쩌면 이 길에 영근이를 기어이 끌어들인 데에는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른들 얘기처럼 방남이는 위험한 존재니까 너무 가까이 지내면 안 된다는, 여럿이 놀 때는 몰라도 단둘이 있지는 말라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주워대지 않아도 어떤 무언의 규칙들은 놀랍도록 강하게 학습되었다. 방남아, 부안 읍내는 아직 멀었지? 어, 허어엉. 방남이와 나는 여전히 멀찌감치 떨어져서 걸었다. 조막만 한 녀석 하나 사라졌을 뿐인데 길에 적막이 감돌았다. 누런 돌 하나, 누런 돌 둘, 누런 돌 셋. 누런 돌들을 세다 지쳐 이번엔 큰 돌 사이를 껑충거리며 뛰었다. 다 다 다친다. 방냄이 너는 고무신이라 이런 거 못하지? 어 어, 다 다친다. 그 많고 많은 돌을 발로 차기도 하고 비석치기도 하고 논으로 던져버리기도 했지만 길은 좀처럼 끝을 보이지 않았다. 방냄아, 내가 왜 읍내에 갈라고 하는지 알어? 모 모 몰라. 있지, 내가 네 살 때 여기 계화도에 와서 1년을 살았다. 그때 우리 집에 무슨 일이 있어 가지고 우리 엄마랑 아빠랑 나랑 뿔뿔이 다 흩어졌단다. 그려서 우리 삼촌이 서울로 와서 나를 데리고 내려왔는디, 내려오는 기차에서 시종 어찌나 서럽게 울어대든가 처음엔 시끄럽다고 뭐라고 허던 사람들도 난중에는 같이 울었단다. 가시내 울음에 한이 서렸었다냐 뭐라냐. 결국 지 풀에 못 이겨서 잠이 들었는디 부안 읍내에 딱 도착했을 때 내가 뭐라고 헌 줄 아냐? 삼촌, 나 배고파. 어 어, 배 배고파. 아니, 나는 기억이 안 나는디, 삼촌이 그러는 거여. 내가 그렸다고, 삼촌 배고파, 그렸다고. 말이 되냐? 어찌케 그렇게 엄마 떨어지기 싫어서 울던 애기가 여그 왔다고 눈물을 딱 그치고 배고프다고 한다냐. 근디 내가 짜장면 한 그릇을 다 먹어치웠다는 거여. 읍내 중국집에서. 야, 거시기 말이지. 네 살짜리 애기가 어찌케 짜장면 한 그릇을 다 먹냐, 안 그러냐? 아까 내 동생 봤지? 가가 네 살인디 안적도 밥 가지고 장난치고 시 숟가락이나 겨우 먹는디, 어찌케 내가 짜장면 한 그릇을 다 먹냐고. 내가 절대 아니라고 한게로 삼촌이 절대 맞다고, 니가 그맀다고. 그려서 내가 한번 확인해 볼라고 허는 거여. 터미널 근처에 중국집이 열 개가 되겄냐, 백 개가 되겄냐? 옛날에 이런 애기가 있었냐고 물어봐야지. 어 어 어. 그도 그렇게 생각허냐? 내가 짜장면 한 그릇 다 먹었다고? 아 아 아니. 그려, 나는 안 먹었다고. 내가 기억나는 건 기차 안에서 울던 거시기, 딱 거기 한 부분이란 말여. 다도 아니여. 그냥 내가 우는디 내 앞에서 삼촌이 같이 울던 그 모습만 기억이 난단 말여. 근디 내가 아무리 기억을 못 헌다고 나헌티 없던 일을 뒤집어씌우면 안 되지. 이것은 쇠구슬 백 개하고 바꾸자고 해도 안 되는 일이란 말여. 아 안 돼, 안 돼. 애꿎은 돌멩이에 울분을 실어 발길질을 해댔다. 그러자 저 멀리에서 흙먼지 바람이 일었다. 뿌연 바람은 점점 커지고 커져 이내 짐승 같은 소리마저 질러대기 시작했다. 버 버 버스다, 비 비 비켜! 쿠르르릉 쿠르르릉 쿠당탕탕 탕 탕 탕. 바퀴 사이로 돌들이 튀어 날아올랐다. 쿠쿠 탕탕 투다다당 탕 탕. 버스를 피해 옆으로 비켜선다는 것이 그만 발을 헛디디며 나는 길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발목이 접질렸다 싶을 때 날아온 돌덩이는 이마를 내리찍었다. 쿠다당 투당탕 탕탕 쿠다다당 쿠르르르릉. 으아아앙! 피 피 피다, 머리, 피 피. 그 순간 떠올랐다. 덜컹거리는 버스에서 멀미에 시달려 급히 내린 나는 길바닥에 시커먼 가락들을 쏟아 놓았었다. 채 소화되지 못한 짜장면 면발이 목구멍에서 걸려 대롱거렸고, 삼촌은 손으로 그걸 잡아 빼내고 등을 연신 두들겨댔다. 아이고, 불쌍한 것, 아이고 불쌍한 것. 그리고 그날 나는 삼촌 등에 업혀 계화도로 들어온 것이었다. 방냄아, 달이 보여? 어 어 보인다, 달. 별은 떴어? 응, 벼 벼 별. 별 많이. *김성숙: 1995년 전주MBC 방송작가 공채. <판소리에 숨어있는 우리의 랩>(1999, 한국방송대상 최우수작품상), <그냥 버리기 아까운 전라도 사투리>(2001, 방송대상 작품상), <다큐멘터리 문자예술 서예>(2007, 한국방송대상 작품상), <다큐멘터리 산조>(2003, 한국방송대상 작품상), 독립다큐멘터리영화 <메콩강에는 악어가 산다(2017) 등 집필.

  • 문학·출판
  • 기고
  • 2018.12.13 18:53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옹골진 전주의 길맛 - 최기우

전주는 길에도 맛이 있다. 거리마다 늘어선 맛집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쭉 뻗은 길이든, 갈림길이든, 구부러지거나 꺾어져 돌아간 길이든, 전주에서의 걸음과 걸음은 곁에 있는 것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소살소살 물소리 한가한 전주천과 삼천의 산책길, 온갖 나무가 넉넉한 황방산과 건지산 숲길, 지금은 폐선이 돼 버린 아중역과 팔복동의 기찻길, 굽이굽이 이어진 완산동과 노송동의 골목길, 젊은 기운이 넘치는 객리단길, 취객들의 발길이 흥성거리는 삼천동 막걸리골목과 신시가지의 맛집 거리, 때깔 좋은 한복의 행렬이 화사한 한옥마을 태조로. 낯설면 낯선 만큼, 낯익으면 또 낯익은 그만큼 설레고 다정한 전주의 길들. 우리가 손잡고 내딛는 걸음마다 소중한 인연과 사연들이 향기로 번진다. 곡선으로 흐르는 전주의 길 전주의 골목과 거리에선 꼭 해찰해야 한다. 전주의 길은 그 자리마다 금세 마주칠 것 같은 얼굴들을 감춰놓았기 때문이다. 기웃기웃, 두리번두리번, 딴 길로 새면 또 다른 마음과 마음이 만난다. 그 길은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처럼 정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처럼 포근하다. 북적이든, 한적하든, 멀든, 가깝든, 고단하든, 즐겁든 전주의 길에는 이 길로 다니던 사람들의 삶이 자연스레 녹아 있다. 발자국에 발자국이 쌓이고, 그 위에 또 발자국이 쌓이며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도 구불구불 이야기를 담은 길을 낸다. 길과 길이 잇는 선에 우리가 있다. 전주는 직선보다 곡선을 선택했다. 곡선은 사람의 길이다. 전주는 더 많은 사람이 편하게 걸을 수 있도록 길을 넓히고, 전봇대와 가로등을 옮기며 인도를 비우고 있다. 전주역 앞 첫마중길이 한 예다. 직선을 버리고 곡선을 되살려, 자신을 굽히니 마음이 보이고, 모든 것이 평화롭다. 전주가 매달 두 차례 차의 길을 시민에게 내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차를 잠시 밀쳐두고 사람과 생태, 문화로 채우는 차 없는 사람의 거리에 시민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왁자지껄한 웃음으로 채워졌다. 서두름 없는 전주의 길. 그곳에 우리의 자화상이 있다. 생동하는 사람들에게서 자연스레 묻어나오는 소리와 냄새, 그리고 마음과 몸짓. 굽이굽이 인생사, 시름 안고 길에 서면 어느새 길은 우리를 보듬고 다독인다. 질기지만 고운 인연과 일상의 소박한 풍경이 자분자분 말을 걸어온다. 이 길은 결코 그 끝을 보이지 않는다.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새로운 곳을 향해 길이 열린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길은 나서는 이에게 언제나 열려 있고, 그 길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 어떤 의미를 담을 것인지는 나서는 이의 몫이다. 그래서 그 길을 따라 사람들의 꿈도 성장한다. 그 길은 우리가 함께 걷는 길이며, 휘파람 불며 가는 길이다. 바른 마음으로 걷는 길이며, 새로운 도전으로 다시 시작하는 길이다. 사연도 깊은 전주의 골목골목 전주한옥마을에는 처마 낮은 골목들이 누군가의 발길을 오래전부터 기다렸다는 듯 서 있다. 골목들은 또 다른 골목으로 접어들며 낱낱이 흩어진다. 골목쟁이에 이르렀는가 싶다가도 다시 모퉁이를 돌아야 하는 전주한옥마을의 골목과 골목들. 어디로 접어들던지 이름도 모를 골목길들은 사연이 깊다. 그리고 끝없는 좌절과 소망의 회오리 숨결들이 점점이 고을고을 새겨진 골목길들을 결코 놓치지 말라. 붙잡으라. 그 이야기와 삶의 흔적들을 지금 우리가 놓치면, 이제는 아무도 못 찾는다. 끝내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국토와 마을과 집안마다 흘러내리는 이 숨결과 이야기를, 갈피마다 주워 담아 품고 길러서,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마지막 세대인지도 모른다.(최명희 『혼불』 제3권) 향교길은 검푸른 대나무 숲에서 나온 바람 소리가 마중을 나와 있다. 맑은 소리는 걸음을 떼는 길 위로 푸르게 깔린다. 쌍샘길 골목을 누비면 울울창창 숲을 이룬 오목대 오르는 계단이 나온다. 최명희길은 길 한복판에 서 있는 배롱꽃 그늘에 앉아 책장을 넘기기에 그만이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봉안된 경기전 옆 태조길에 서면 경기전 담 위로 전동성당이 꿋꿋하다. 전동성당에서 풍남문을 지나 남부시장으로 들어서면 시장의 골목골목이 나뭇가지들처럼 서리서리 얽혀 있다. 콩나물국밥이나 순대국밥으로 허기를 채워도 좋고 싱싱한 푸성귀나 어물, 과일 한 바구니를 왁자지껄 흥정해 들고나와도 유쾌하리라. 골목 곳곳에 숨어 있는 오래된 집들의 무너진 담과 이끼 서린 기왓장에도 깊은 사연이 깃들어 있다. 소설가 최명희(1947-1998)도 단편소설 「쓰러지는 빛」에 자신이 어린 시절 살던 전주 완산동 골목길에 대한 추억을 남겼다. 삶의 현장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작가의 풍부한 언어 구사 능력은 고향 전주의 미궁과 같았던 이 골목 저 골목의 깊숙한 골목쟁이까지 빠짐없이 담아 놓았다. 대문을 밀고 나서면 오른쪽으로 집 울타리를 낀 골목 끝이 바로 천변이다. 골목 길이는, 천변 쪽으로는 그저 몇 걸음 되지 않았으나, 동네 안쪽으로 가면서 세 갈래로 나뉘고, 그것들이 가다가 새끼를 쳐서 다시 몇몇 갈래가 되어, 그 골목은 들어서기만 하면 미궁처럼 헤매기 쉬웠다. 그래서 우리들의 어린 날은 얼마나 즐거웠던가. 그의 말처럼 골목골목에서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날만 밝으면 눈을 비비고 튀어나와 밥때를 넘기고도 배고픈 줄 모르고 뛰어놀았다. 시멘트 블록 담을 치지 않았던 예전에 담을 대신했던 탱자나무 울타리는 무척이나 정겨웠다. 휘황하게 피던 하얀 탱자꽃. 달빛 좋은 봄날에는 검은 생나무 울타리가 꽃 너울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리. 아이들이 있는 집의 추녀 끝에서 낭랑한 웃음소리도 터져 나왔다. 그게 전주의 골목길이다. 다양한 빛깔과 무늬를 품은 전주의 길 전주는 길의 이름만으로도 그 길에 켜켜이 쌓인 시간과 온갖 사연을 만나게 한다. 정여립로, 최명희길, 귄삼득로, 운암로, 영경길, 호성로, 춘향로, 콩쥐팥쥐로와 같이 위인의 이름(호)이나 문학작품을 빗댔기 때문이다. 전주가 오래전부터 거리의 특성을 살려 이름 붙인 테마가 있는 거리도 마찬가지다. 루미나리가 설치된 걷고 싶은 거리와 비보이의 상징물로 꾸민 청소년거리,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영화의 거리, 공구상점이 늘어선 공구거리, 금은방과 한복집이 모여 있는 웨딩거리, 한글을 주제로 다양한 조형물이 있는 한글테마거리 등 온갖 빛깔과 소리가 거리를 채운다. 아기자기한 벽화들이 반기는 자만마을과 산성마을은 시골길을 거니는 것처럼 친근하다. 그러나 이 거리는 무작정 한 가지 이름만을 품거나 그것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동문예술거리는 예나 지금이나 시인화가소리꾼배우들이 숱하지만, 한때는 헌책거리, 콩나물국밥집거리, 소극장거리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이처럼 전주의 길은 그 무늬가 한결같지 않아서 더 매력적이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내일은 다른 무늬를 띨 것이다. 그러니 늘 새 길 가는 것과 같다. 길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자신을 딛고 서 있던 사람이 누구인지,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길은 다 안다. 엉거주춤인지 제자리걸음인지 뒷걸음인지도 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주위 환경이 바뀌어도 길은 아득하게 그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길을 걸으면 옛 정신이 스며든다. 우리가 걸음걸음을 더 똑바로 해야 하는 이유다. *최기우: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소설)로 등단. 희곡집 『상봉』, 창극집 『춘향꽃이 피었습니다』, 인문서 『전주, 느리게 걷기』, 『꽃심 전주』, 『전북의 재발견』 등을 냈다. 전국연극제 희곡상(2회), 전북연극제 희곡상(3회), 불꽃문학상, 천인갈채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최명희문학관 학예연구실장, 전주대학교 겸임교수로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12.07 12:10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혼자 걷는 소설 ‘탁류’ 길 - 채명룡

강 한쪽 귀퉁이가 움푹 파인 모양을 두고 입술이 째진 것 같대서 째보라고 불렀다고도 하고, 이 포구에서 객줏집을 했던 힘센 사내의 별명이 째보였는데 이로 인해 째보라고 이름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선창에 섰다. 군산 하면 떠올리는 소설가 백릉 채만식의 『탁류』에도 이 째보선창에 대해 자세한 묘사가 곁들여져 있다. 일제강점기의 혼란한 시대 상황을 초봉이라는 한 여인의 비극적인 삶을 통해 역설적으로 풀어낸 그 소설. 채만식은 첫 장에 이 강은 지도를 펴 놓고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물줄기가 중동에서 남북으로 납작하니 째져가지고는 그것이 아주 재미있게 벌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라고 썼다. 언청이라고도 낮춰 부르곤 했던 입술이 째진 이들을 본 적이 있는가. 지금은 얼굴의 장애를 그대로 놔두는 경우가 흔치 않지만 예전엔 입술 위쪽이 갈라진 상태로 질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흔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째보선창이 있었던 포구에 섰다. 이름과 기억, 그리고 아련한 추억으로만 떠도는 그 포구는 없고, 낮고 쓸쓸한 공영 주차장만 남아 있다. 그 곁에는 째보선창을 알리는 표지석과 안내판이 외롭다. 일제강점기엔 군산의 팔마재, 구시장 근처까지 물길이 닿았고 이 물길을 따라 질펀한 삶이 이어졌던 게 바로 째보선창이었다. 소설 『탁류』의 주인공인 정주사가 충남 서천의 전답을 팔아 초봉이 계봉이와 가족들을 이끌고 군산 땅에 처음 닿은 곳 또한 이 선창이며, 고은 시인의 어머니가 서천 친정을 떠나 미룡 용둔리로 시집올 때 군산에 첫발을 내디뎠던 자리 또한 여기이다. 흥망성쇠가 언제였던가. 그 사연 많은 사람들과 시간들은 간 곳 없고 물 빠진 선창에 잿빛 뻘만 남아 아스라한 그때를 굽어보고 있다. 오늘의 째보선창은 간데없는데 떠나지 못하는 갈매기만 남아 강기슭을 굽어보고 있다. 째보선창은 한때 군산의 다른 이름이었으며, 천 원짜리 지폐는 개도 안 물어 간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흥청망청의 상징이었다. 어판장 한쪽에서는 매년 군산이 시끄러울 정도로 성대한 규모로 풍어제가 열렸다. 어선들의 안녕과 만선으로 돌아오라는 염원을 용왕님께 비는 풍어제는 지금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랬던 어판장이다. 하지만 어깨를 부딪쳤던 고깃배들이 어선 감축 사업으로 썰물 빠지듯 나가 버리자 지금은 폐허처럼 적막해졌다. 고려의 충신 야은 길재가 회고가에서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곳 없다고 읊었듯이 선창은 그대로인데 사람의 흔적은 끊겨 버렸다. 참 허전하다. 포구나 선창에 서면 길 잃은 나그네의 마음처럼 여러 생각이 겹쳐서 온다. 채만식은 탁류에서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어진다.라고 표현했다. 그 말처럼 눈앞은 온갖 군상들을 휩쓸고 내려가는 금강이다. 바로 뒤는 군산 수산업의 흥망성쇠를 함께 굽어보았던 동부어판장 건물이다. 벗겨진 외벽에 대낮에도 컴컴한 안쪽, 마치 귀신놀이 하기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제 강점기엔 전북어업조합 판매소가 있었던 장소이다. 바라던 째보의 얼굴은 간 곳 없고 무상한 세월을 굽어보는 무표정한 시멘트 덧칠만이 덩그렇다. 바닷물을 잔뜩 머금었던 시멘트 길이어서일까. 약간 색이 바랜 듯하고 굵은 동아줄을 맸던 자리는 생채기가 나 있다. 순탄치 않은 인생길을 보는 듯 아리다. 눈앞은 시간이 게으르게 내려앉은 시멘트 길. 드문드문 펼쳐진 그 위의 인생살이들이 외롭고 쓸쓸하다. 언제나 흐드러진 웃음꽃이 필까 생각하다가 고개를 내밀고 찬찬히 살펴본다. 실개천을 따라 선창까지 흘러왔던 그 물길은 지금도 내항과 연결하는 수문을 거쳐 아귀와 같은 입을 벌리고 있다는 걸 발견한다. 탁류의 군상들을 이 강물이 쓸어 담아 줄 것을 작가 채만식이 바랐듯이 남겨진 이 선창은 낡은 모습으로 아스라한 추억을 사람들의 가슴에 남겨 주었다. 지난 세월을 지키고 간직하면서 산다는 건 어려운 선택. 그러나 선창은 그 험한 날들을 온몸으로 견뎌왔다. 사람의 일도 마찬가지이다. 드러난 상처는 시간이 아물게 하지만 가슴에 새겨진 흔적은 지우지 못하는 일과 비슷하지 않을까. 탁류와 함께 낡아져 갔던 것들이 눈에 밟혔다. 고기잡이배를 댔던 자리와 밧줄을 동여맸던 고리, 고기를 담던 나무 상자, 대나무 깃발, 스티로폼 부이 등등. 그들은 늘어졌고 숨은 깔딱이지만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렇지만 낡고 늘어졌다고 해서 사람마저 그런 건 아니라는 걸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고깃배들은 사라졌지만 이곳은 수리할 게 있는 어선들에겐 엄마의 품과 같다. 뱃사람들은 지금도 이들의 인정과 기술과 선창 사나이들의 뜨거운 가슴을 그리워한다. 그래서 물고기가 회유하듯 그리운 뱃사람들의 귀향이 계속되고 있다. 강물을 바라보면 하염없고 어지럽다. 물이 들면 할 말 많았던 밑바닥 사연들까지 품 안에 거두어 주지만, 썰물이 되어 허연 속살을 드러내면 상황은 달라진다. 호시절이었을 때 끼룩끼룩 손에 잡힐 듯 날아들었던 그 수많던 갈매기들 또한 제 살길 찾아 떠나갔다. 강 안쪽에는 몇 마리 남은 갈매기들이 마치 텃새처럼 오가는 사람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채만식은 그래서 항구래서 하룻밤 맺은 정을 떼치고 간다는 마도로스의 정담이나, 정든 사람을 태우고 멀리 떠나는 배 꽁무니에 물결만 남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갈매기로 더불어 운다는 여인네의 그런 슬퍼도 달코롬한 이야기는 못 된다.고 표현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돌아오는 이들을 반기는 건 오래된 선박과 엔진 수리 업체들이다. 사람으로 치자면 심장과 같은 기계 부품을 고치고 갈아주는 일은 째보선창의 큰 일거리로 남겨졌다. 허술한 철문을 밀치고 들어서면 어두컴컴한 건물 안에서 그라인더로 갈아내는 소리와 오색 빛으로 날아가는 쇳가루가 눈을 부시게 한다. 기름 냄새에 절어 있지만, 이 소리와 빛과 냄새와 외침이 이 안에서 사람이 살아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낡고 녹슬고 지쳐 쓰러져 있는 길 위의 닻과 폐 부품들을 보면서 동강난 째보선창의 이력을 떠올린다. 그리고 고은 시인과 함께 이곳을 찾았던 몇 년 전 어느 눈 내리는 날을 기억했다. 고은 선생은 먼눈으로 장항 쪽을 바라보았고, 그의 귀향을 감싸 안아주는 듯이 눈발은 하염없었다. 휘휘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서 몇 걸음 더 가본다. 조개와 해삼, 그리고 갖가지 수산물을 가공하는 오막살이 포장마차 집이 난간에 위태롭다. 수협 중매인이 운영한다는 간판도 눈에 띈다. 이래 허접한 간판인데 장사는 얼마나 될까. 그러나 걱정 붙들어 매시라. 겉은 허접하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속은 꽃게가 알을 품었듯이 알차기가 그만이니 말이다. 허술한 간판을 달았거나, 허접한 출입구를 보고 돈 벌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겉만 보고 속까지 판단하는 격이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딴 세상이기 일쑤이다. 들어가 보면 우선 길게 쭉쭉 이어진 작업장에 건조장, 수족관, 세척장과 일하는 아줌마 등등 눈이 동그랗게 떠질 터이니 걱정 뚝이다. 채만식은 선창의 풍경을 날이 한가한 것과는 딴판으로 선창은 분주하다. 크고 작은 목선들이 저마다 높고 낮은 돛대를 웅긋중긋 떠받고 물이 안보이게 선창가로 빽빽이 들이 밀렸다. 칠산 바다에서 잡아 가지고 들어온 첫조기(젓조기)가 한창이다. 은빛인 듯 싱싱하게 번쩍이는 준치도 푼다. 배마다 셈 세는 소리가 아니면, 닻 감는 소리로 사공들이 아우성을 친다. 지게 진 짐꾼들과 광주리를 인 아낙들이 장 속같이 분주하다.라고 묘사했다. 딱 맞는 말이다. 1970년대와 80년대, 그리고 90년대 초반까지의 영화를 간직했던 군산 동부어판장과 째보선창은 그렇게 쇠락해갔다. 그러나 떠나고 돌아오는 고동 소리와 왁자한 아귀다툼이 없어졌다고 해서 오늘의 선창이 사라진 건 아니다. 생선을 다뤄주는 해산물 사업장과 선박들의 부품을 만들고 가공해주는 공업사와 수리점과 음식점 등 선창의 삶은 벗기고 벗겨도 속살을 한 번씩 더 내놓는 양파와 같다.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걸 역설로 보여준다. 채만식의 『탁류』처럼 말이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주인공 정 주사가 서천의 논밭을 팔아 당도했던 째보선창, 그 선창을 따라 흔들흔들 걷노라니 기분이 착 가라앉는다. 풀죽 같은 갯벌처럼 흐느적거리고, 아련하고 아스라한 마음까지 들게 만든다. 강 하구의 안쪽, 커다란 수문을 바라본다. 쑥 내려간 난간 쪽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면 온갖 허드렛물을 쓸어 담고 내려왔던 복개천이 문을 열어두고 있다. 뻘밭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조심이다. 오래된 흔적은 시멘트 색깔에서도 나타난다. 말끔하게 분칠한 얼굴이 아니라 어두침침하고 어딘지 칙칙한 표정이다. 그 시멘트 선창길 바닥에 꽂아 놓은 묵직한 철 고리를 발끝으로 슬쩍 차본다. 아픈 건 내 발끝이지만 아련하고 쓸쓸하고 허전한 게 아픔을 타고 밀려들었다. 새까맣게 몰려들던 어선들을 고리에 걸어 두었던 굵은 밧줄은 먼 옛날이야기이다. 시멘트 부스러기를 툭툭 건드린다. 심심풀이 오징어 한 마리를 씹으며 걸어가는 째보선창, 바람도 오늘은 한가롭다. 그렇다고 속까지 한가로운 건 아니다. 아픔과 시련은 겹쳐 오듯이 이 선창의 깜깜한 앞날 또한 그렇다. 먼발치로 일제강점기 쌀 반출의 항구였던 군산내항이 눈에 들어왔다. 뜬다리 부두 근처에 언제인가 퇴역한 군함을 가져다 놓았다. 일제강점기 쌀 반출 항구에 안보 전시용 군함이라니. 올려다보는 햇살이 참 눈부시다. 여기서부터는 선박의 엔진과 스크루, 철제 구조물, 닻 등을 만들어주는 공업사들과 선외기 수리점이 즐비하다. 철제로 된 문을 내린 현대디젤 바로 옆엔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켜왔던 하꼬방만 한 가게가 아직도 문을 열고 있다. 시큼한 냄새를 어깨 뒤로 넘기면서 걸어가 보면 여수스크루, 현대 선외기 엔진, 동부공업사, 문일공업사, 광일스크루, 커민스, 대진고속 등이 세월을 비껴 선 채 나름 영역을 지키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아직도 수산업의 뒤꼍에서 먹고사는 게 일이다. 오른쪽으로는 스산한 표정의 썰물 든 밑바닥이 허연 속살을 드러내 놓고 있다. 갈매기 몇이 개펄을 걸어 다니면서 먹이를 찾고, 그 옆을 긴 다리 백로가 눈을 끔벅거리고 있다. 배 떠난 선창의 오후는 늘 게으르다. 저 담벼락을 돌아 나가면 내항. 긴 이야기는 놔두고 소설 『탁류』와 함께 생겨난 길을 천천히 따라 가본다. 길은 길로 연결된다. 선창의 바닥은 울퉁불퉁이다. 숱한 세월 동안 이 선창으로 들어오는 어선들을 묶어 놓았던 철제 고리만 꼿꼿하다. 지난 시절, 그 자세를 지키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돌아보고 있자니 망가진 어선들이 눈에 밟힌다. 썰물 땐 그렁그렁하니 괜찮았었다. 그런데 물이 들어오자 반쯤은 물에 잠긴 채, 또 반쯤은 세상 시름 엎어놓은 듯 허벌렁하다. 애써 외면하며 한 걸음씩 천천히 걷는다. 수산물 가공을 해주는 경원수산 사거리, 어디선가 트로트 노랫가락 소리 유창하다. 들려오는 쪽으로 따라가 보니 ○○성인콜라텍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예전엔 춤바람의 온상지로 지목되었던 무슨 카바레가 있던 자리이다. 카바레는 언뜻 좋은 이미지로 들리지 않는다. 마도로스 사나이들의 험난한 바다 생활을 잊은 여자들의 일탈의 장소로 불리기도 했던 때문이리라. 이런 선입견을 애써 누르면서 왼쪽으로 굽어져 돌아갔다. 서강기계 앞엔 길 가장자리에 거대한 철 구조물, 아니 쇳덩이로 만든 기계 장치가 놓여 있다. 웬만한 기중기로는 들기도 어려워 보이는 크기와 눈짐작되는 무게에 압도당한다. 들기도 어려웠을 텐데 어떻게 그걸 이 자리로 옮겨 왔을까. 공장 안에서는 쇳덩이를 갈아내고 용접해 붙이는 철공소 일이 한창이다. 씨앙 날카롭게 돌아가는 쇳덩이 갈아내는 소리 따라 불똥이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사람의 삶이란 이런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잘 자라난다. 언뜻 형님! 하고 작업복 입은 남자가 부르자 소리도 들리지 않았을 텐데 부르는 쪽을 바라본다. 무슨 텔레파시가 통하고 있나? 서강기계에서 바로 가지 않고 왼쪽으로 돌아가면 중앙식당, 유락식당, 해성식당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길 가장자리에 생선을 담아 두었던 나무 상자들이 창고 옆에 그득하다. 식당들은 대부분 어장을 하거나 어업이나 도소매업을 같이 한다. 맛의 구 할이 결정된다는 좋은 생선을 쓰고 있으니 자연스레 맛집으로 소문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식당들은 대부분 주인네 인생과 함께 나이를 먹어 왔다. 그래서 이 골목의 식당들은 줄잡아 20~30년은 기본이다. 그것도 세대를 이어가고 있다. 면면히 이어 온 탁류 길처럼. *채명룡: 1990년 시문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 시집 봄봄, 시장 소식 등.

  • 문화일반
  • 기고
  • 2018.12.03 10:44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자연과 감응하는 ‘정기용 공공의 길’ - 정기석

최근 무주를 떠나 순천으로 이사했다. 행정적으로는 이제 전북 도민에서 전남 도민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의 절반 이상은 무주에, 전북에 체류하고 있다. 중요한 숙제 하나를 미제로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미련 또는 사회적 책무로 따로 이삿짐을 꾸려 챙겨왔다. 바로 정기용의 길이다. 한마디로 정기용 건축가가 무주에 지어 놓은 30여 곳의 공공건축물을 복원재생하겠다는 계획이다. 무주의 산을 넘어, 강을 건너, 들을 헤치고 자연과 인간이 서로 감응하는 정기용의 공공의 길을 이어보려는 욕심이다. 무주군에는 말하는 건축가, 자연과 인간을 감응시키는 건축가 정기용이 설계하고 건축한 공공건축물들이 마을 곳곳에 산재해 있다. 사실상 국내에서는 전무후무한 공공건축 명소라 부를만하다. 건축을 공부하거나 직업으로 삼은 건축인들 말고도 일반인들도 찾아오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건축물들로 이끌고 안내하는 길도, 길잡이가 없다. 심지어 변형, 훼손된 곳도 있어 사실상 방치된 상태가 아닌가 오인된다. 심지어 무주군에서 나서 살고 있는 무주 원주민조차 존재조차 제대로 모르는 이가 허다하다. 하물며 정기용의 공공건축물이야말로 무주군의 품격과 무주 군민의 자긍심을 높여주고 지역 경제 활성화를 촉발할 소중한 지역 공유 자산이라는 가치는 동의받기도, 설명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최근 그 가치를 충분히 공감, 통찰하고 있는 한국농촌건축학회가 나섰다. 이른바 정기용 무주군 공공건축물 재생프로젝트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무주군을 관류하는 남대천을 중심으로 산과 강과 들을 따라 정기용 공공건축물을 씨줄과 날줄로 잇는 산책로, 탐방로 등을 새로 조성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정기용의 공공건축물을 재조명․복원함으로써 공공이 공유하는 건축 자산으로서는 물론, 자연과 인간이 감응하는 농촌 공간 디자인의 혁신적인 사례로서 학술적 의미와 지역 브랜드 가치를 높이려는 목표다. 농촌다운 건축, 마을을 잇는 정기용 길 구체적인 재생 전략으로는 남대천을 따라 형성된 마을과, 그 마을마다 자리 잡은 공공건축물을 길로 엮고 잇는다는 그림이다. 남대천을 따라 물가에 자리 잡은 등나무 운동장, 무주군청, 농민의 집, 추모의 집 등은 하천에 가로놓인 다리를 산책로로 연결하면 모두 만날 수 있다. 기존의 무주 마실길과 연계하면 남대천이라는 수자원의 접근성과 활용도를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오지 산골 지역으로 척박한 무주군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최고의 지역 자산이다. 그 자연과 더불어 무주의 지역 정체성을 완성하는 건 산골 마을이다. 정기용은 바로 이 무주의 천혜의 자연경관, 그리고 인간이 모여 사는 마을들이 서로 조화롭게 감응하도록 공공건축물을 설계, 배치했다. 이러한 정기용의 공공건축물들은 그 자체로 사람들을 아름다운 무주의 산골 마을로 호객하는 최고의 스토리텔링 마케팅 자원이라 평가할만하다. 무주군과 업무 협약을 맺은 한국농촌건축학회는 한마디로 정기용 공공건축을 통해 농촌다운 건축, 농촌다운 마을의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주겠다는 포부다. 정기용 공공건축의 철학과 기법이야말로 농촌 건축과 농촌 마을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최적의 사례지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 원형을 복원하거나 발전적으로 리모델링함으로써 농촌다운 건축과 농촌다운 마을을 구현해보겠다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이 감응하는 공공성의 길 정기용은 남다른 건축가임에 틀림없다. 당장 겉으로 드러난 주요 이력만 몇 줄 훑어봐도 특별한 사람이라는 걸 금방 눈치챌 수 있다. 그는 애초 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게 아니다. 학부에서는 미술을, 대학원에서는 공예를 공부했다. 당시 김수근 건축가에게 1년여 강의를 들은 게 건축에 입문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1972년 프랑스로 유학해 실내건축, 건축, 도시계획 등을 본격 수학하고 프랑스 정부 공인 건축사 자격을 취득했다. 귀국한 그는 잠시 절망했다. 새마을운동으로 농촌의 초가지붕을 뜯어내고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새마을운동은 삶과 역사를 부정하게 만든 문화적 학살"이라고 그는 비판한다. 이후 아예 몸소 농촌 경제와 농촌 문화를 공부하고 흙집 기술까지 익혔다. 이후 평생 "건축은 삶을 조직화하는 것"이라며 자연 환경과 주민의 본래 삶을 거스르지 않는 흙의 철학을 실천했다. 이 같은 정기용 건축 철학과 실천의 정점에 무주군 공공건축 프로젝트가 놓인다. 당시 무주군수와 정기용 건축가가 무주 진도리 흙토담 마을회관 일을 계기로 의기투합한 것이다. 1996년부터 2008년까지 10년 넘게 온갖 난관과 우여곡절에 굴하지 않고 프로젝트를 밀고 나갔다. 등나무로 스탠드에 그늘을 드리운 '무주 공설운동장', 천문대를 설치한 '부남면사무소', 면장실을 없앤 자리에 공중목욕탕을 새로 들인 '안성면사무소' , 세상에서 가장 밝은 납골당 추모의 집, 무주군 중심지를 한눈에 조망하도록 전망대를 갖춘 농민의 집, 서로 마주보며 기다리는 버스 정류장 등이 대표작이다. 오래된 풍경을 저장하는 시간의 길 순천, 진해, 제주, 서귀포, 정읍, 김해 등의 기적의 도서관도 정기용의 작품이다. "건축가가 한 일은 원래 거기 있었던 사람들의 요구를 공간으로 번역한 것이지 그 땅에 없던 뭔가를 새로 창조한 것이 아니다."라는 신념으로 도서관을 지었다. 2011년 3월,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정기용의 삶의 철학과 마지막 여정은 다큐멘터리 영화 <말하는 건축가>로, 그리고 『감응의 건축』 등 글 잘 쓰는 건축가로 세상에 이렇게 울림을 주고 있다. 건축가가 하는 일은 궁극적으로는, 공간이 아닌 시간을 설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공간은 수단에 불과하고, 시간은 건축의 목적이 된다. 세월이 지나면서 건축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시간이다. 무주에서 정기용의 공공건축을 잇는 공공의 길이 새로 만들어진다면 무주를 걷는 답사자, 산책자들은 뜻밖의 행운과 행복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정기용의 공공건축물을 잇는 공공의 길 위에서 그동안 각자 잃어버렸던 시간 또는 시간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기용의 길은 이런 속성과 효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길은 풍경을 저장하고 있다. 홈 파인 레코드판이 소리를 저장하듯. 그래서 사회학자, 인류학자들은 이렇게 오래된 길들을 그림일기(figure journal)라고 부르는 것이다. 길은 반복적 몸짓으로 탄생하며, 반복된 몸짓은 생존에 요긴했던 '가까운 것', '친근한 것' 들을 엮어주면서 생겨난다. 부끄러운 자작시 정기용 씨를 기억하는 무주군민의 일상 및 일생에서 나는 이미 정기용의 길을 갈구하고 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지붕이 있는 버스정류장부터 공설납골당까지 / 이 모든 게 다 정기용 건축가가 지은 생사초월의 감응 건축인 걸 감사하리라 / 죽어도 산 유령처럼 무주의 일상을 영원히 즐길 수 있으리라 / 살아있는 무주군민들만 놀라지 않는다면 큰 문제는 없으리라고. 정기용은 여러분 감사합니다. 바람, 나무, 햇살, 모두 감사합니다.를 유언으로 남겼다. 나도 정기용 건축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 감사합니다. 바람, 나무, 햇살만큼. *정기석: 2016년 『詩와 경계』 신인문학상 등단. 저서로 『농부의 나라』, 『마을을 먹여 살리는 마을 기업』, 『귀농의 대전환』 등. <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 문학·출판
  • 기고
  • 2018.11.23 17:52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천장 - 장용수

우리 그만해요, 이제!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하면서 말했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붉게 노을이 타고 있었다. 나는 6개월째 무직자였다. 그녀는 내가 앞으로도 무직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녀는 직감 능력이 뛰어난 여자였다. 당시 나는 굶어 죽지만 않는다면 한동안 일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뭐라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물론 직장이라는 곳에 들어가 보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가 열심히 일을 하는 사무실 안에 앉아 있으면 서서히 어디선가 생고무 태우는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간신히 오전을 넘기면 생고무 탄 냄새 때문에 점심식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속이 뒤집어졌다. 그 냄새 때문에 머릿속 뇌수들이 모두 회반죽처럼 걸쭉하게 변해 버려 이것과 저것을 가지런하게 구분할 수 있는 판단력도 사라져 버리곤 했다. 그쯤 되면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유일한 해결책은 응급조치를 하듯이 소주를 반병 정도 마시는 방법밖엔 없었다. 참, 어지간허다. 그런데 술 마시는 변명치고는 좀 시적이다. 이걸 글로 한번 써 보는 건 어때? 문청이었던 술친구의 제안. 그 친구의 제안 때문이라기보다는, 술을 좀 줄일 수 있는 대책이 필요했다. 불면에 시달리던 어느 날 친구의 말이 떠올라 뭔가를 쓰기 시작하기는 했다. 그 뭔가는 처음에는 넋두리로 시작되어 그녀에게 나의 상황을 설명하고 나를 이해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변질되었다가 청혼을 위한 로맨스가 되었다가 다시 신세 한탄이 되었다가 급기야는 신을 저주하는 울분이 되었다가 다시 자조적인 신세 한탄으로 추락하곤 했다. 그러나 글을 쓰고 정리하는 것에는 일정한 관점과 의도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곁가지를 쳐내고 그녀에게 나의 상항을 설명하고 청혼을 하는 형식으로 글을 정리하고 있었다. 글의 마무리를 유예하고 있었던 것은 불면의 밤이 짧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조차 내가 원하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결혼이라는 실제적인 생활은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포기할 만큼의 용기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를 이제 그만 좀 놔줘요. 난 그냥 평범한 남자 만나서 평범하게 결혼해서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난 입안이 써 술잔을 거푸 마셨다. 그리고 결국 취해 버려서 그녀에게 추접스러운 간청을 하다가 화를 내보기도 했지만 그녀를 다시 만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마침내 일어났다. 그녀 어깨 너머로 바라다 보이던 흐릿한 세상이 깜깜해졌다. 블랙아웃! 맹렬한 추위에 눈을 떴다. 전주 덕진공원 벤치 위였다. 누가 덮어 주었는지 신문지 몇 장이 덮여 있었고, 어디선가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순간 울렁증이 일어 급하게 토하고 나자 벌떼 같은 추위가 엄습했다. 얼마나 웅크리고 잤는지 목과 허리는 굳어 버린 것 같았다. 돌덩이처럼 차가운 몸. 가을이 끝나가고 있었다. 다시 술이 생각났다. 그녀를 생각하자 다시 무딘 칼로 연한 살을 서서히 긁어내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집으로 돌아와 그녀에게 쓰던 편지를 찢어 버렸다. 그리고 오랫동안 계획했던 여행을 실행하기로 했다. 곧바로 비행기 티켓을 샀다. 중국으로 들어가 티베트를 거쳐 인도까지 갈 작정이었다. 다시 되돌아오는 여정까지는 생각지도 않았다. 중국의 거얼무에서 티베트로 넘어가는 천장공로는 아득했다. 그곳을 몇몇 일행과 함께 나는 랜드크루저를 타고 넘었다. 삼천과 사천오백의 고도를 넘나드는 산악의 길엔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았다. 나는 호흡을 고르게 하려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으나 날숨의 뒤끝은 간신간신했다. 고산증에 시달리느라 머릿속은 몽롱했고 문득문득 해독할 수 없는 이명이 들렸다. 문득 유년 시절의 고통이 너무 생생하게 되살아나 아이처럼 울고 싶어지기도 했다. 엄마, 도대체 왜 날 낳았어? 티벳은 이미 겨울이었다. 그리고 산악의 길들은 끝이 없었다. 벼랑을 돌아서고 계곡을 가로지르며 길은 끝없이 몸을 뒤틀었다. 정수리를 가르는 칼바람은 코끝에서 맵싸했다. 계곡을 훑으며 내려오고 올라가는, 아찔한 바람들은 문득 한 덩어리로 뭉쳐 산악을 후리치며 흩어졌다. 그 막막한 산악의 길을 몸으로 열어가는 수행자가 있었다. 수행자의 모습은 초라했다. 수행자는 오 척 단신의 몸에 누더기 같은 붉은 가사를 입은 채로 빙판길 위에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번에는 길바닥에 배를 붙이고, 손으론 언 땅을 쓸어안으며 이마를 얼음이 뒤덮인 길 위에 밀착시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용해야만 가능한, 파충류의 그것과 유사한, 가장 더디고 정직한 길 읽기, 오체투지였다. 강렬한 자외선에 노출된 그의 피부는 그가 입은 붉은 가사보다 더 붉게 타들어가고 있었고, 그의 눈썹과 수염에는 땀방울 같은 고드름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의 오체투지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기 위함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비효율적인 방식이었다. 그의 오체투지는 진화의 시간을 거슬러 가는 듯했다. 차창 밖의 산들은 만년설에 뒤덮여 있었다. 눈 덮인 산악의 길들이 이어지다가 믿을 수 없이 황량한 사막이 펼쳐져서 낯선 행성 같은 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 압도적인 풍경 속을 붉은 가사를 입은 티베트인 수행자들이 전설처럼 오체투지로 길을 열어 나갔다. 수행자들이 오체투지로 도달할 간절함의 끝이 어디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의 길은 그를 중심으로 순간 태어나고 순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산악의 까마득한 산등성이 위에서 야크들은 칼바람을 맞으며 수행자를 묵연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가 탄 지프는 눈길 위에 타이어 자국을 남기며 수행자들을 앞질러 나갔다. 그렇게 산악의 길을 넘어 라사에 도착했다. 티베트 사람들은 늘 마니차를 돌렸다. 라사에서 티베트 사람들이 뱅, 뱅, 뱅, 돌리는 마니차를 볼 때마다 나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마니차를 돌리기만 해도 불경을 읽는 효과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 그러나 마니차를 돌리는 두루뭉술한 대승불교의 원리가, 라사의 사원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오체투지를 하며 밀어 올리는 열망이, 그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무참한 중국의 총칼을 막아내진 못했다. 티베트 수도인 라사도 상권을 장악한 중국인들에 의해 허물어져가고 있었다. 영혼의 고향이라 일컬어지던 포탈라 궁 앞에는 중국인 혁명 기념탑이 서 있었고, 그 주변은 이미 중국의 환락가로 변해가고 있었다. 며칠 전에도 티베트의 자유를 외치며 승려 하나가 분신했다고 들었다. 벌써 100명째라고 했다. 문득 오체투지로 라사를 향해 간다던 수행자가 떠올랐다. 그가 길 위에서 얼어 죽지 않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되었다. 티베트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천창을 한다고 했다. 천장? 가이드가 그 단어를 처음 설명해주었을 때 그 단어에 매혹이 되어 버렸다. 무언가 숭고하고 아름다운 장례의 모습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천장터는 사천고지에 자리한 사원의 뒤편에 있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가파른 천장터까지 시신은 가족에 의해 옮겨졌다.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사천고지의 산 위까진 구름도 감히 오르지 못했다. 멀리 히말라야 산맥의 주봉인 신성한 초롱라마가 만년설에 뒤덮여 있었다. 가족들이 망자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그러자 라마 승려가 집착할 것 없는 짧은 생의 덧없음을, 그리고 모든 존재들이 돌아갈 근원의 자리인 공(空)의 세계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진언 소리는 날 선 바람이 토막을 내었다. 승려가 물러나자 천장사가 나섰다. 그는 도끼날로 두어 번 시신의 머리를 두드리며 곧 쇠 하나가 흙과 물, 불, 바람 사이를 가르며 지나갈 것임을 예고했다. 그리고 천장사는 고원지대의 희박한 공기층을 가르며 도끼를 날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머리와 팔, 다리가 몸에서 분리되었다. 관절을 제대로 파고든 도끼날에 팔은 한 번에 떨어졌지만 목과 다리는 몇 번의 수고가 더해졌다. 몸에서 떨어져나간 머리와 팔, 다리는 분해된 인형 그것처럼 느껴졌다. 천장사가 이번에는 칼을 질러 몸속의 장기를 하나씩 꺼내 놓았다. 묵직한 비린내와 함께 한 번도 개봉된 적 없는 순결한 속살들이 햇살 아래 꽃처럼 피어났다. 푸른 하늘가에는 피 냄새를 맡은 검은 새들이 모여들어 허공을 맴돌았다. 사신들이었다. 머리와 팔, 다리, 그리고 햇살 아래 드러난 장기들은 망자가 살아 있음을 유지하기 위해 씹어 먹던 야크나 산양의 그것과 다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천장사가 언덕을 내려오자 검은 새들이 흐벅지게 붉은 꽃들이 피어난 자리에 엉겨 붙었다. 지상의 것들을 먹고 키운 몸은 그렇게 검은 새를 따라 하늘로 올라갔다. 망자의 가족이나 승려들은 모두 돌아갔다. 시신의 살을 다 발라 먹은 검은 독수리들도 떠났다. 그리고 까마귀들 몇 마리만 망자의 부서진 뼈마디 사이를 쪼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육신도 결국 이렇게 분해되어버릴 수밖에 없으리라. 그녀의 연꽃 같은 가슴도 저와 같이 분해되어 결국 흙과 물과 바람으로 흩어지고 말 것이었다. 가이드가 재촉하는 바람에 더는 천장터에 머물 수가 없었다. 티베트에는 나무가 없어 화장을 할 수도 없고, 시체를 묻어도 얼어서 썩지 않아서 천장을 합니다. 라사 맥주는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시원한 맛이었다. 천장을 안내해준 가이드, 그리고 같이 천장을 참관했던 노년의 영국 여인과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중국식당에 들었다. 술을 마시지 않는 가이드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노년의 영국 여인과 나는 본격적으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입안에서 알 수 없는 비린 맛이 느껴져서 맥주를 계속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비가 걱정이 되어서 그녀에게 서툰 영어로 양해를 구했다. 당신은 오늘 내 술값을 지불해 줄 수 있어요? 왜? 나는 배낭 여행자이고 인도까지 여행을 할 생각인데, 여유가 거의 없어요. 그건 네 사정이고, 왜 내가 너에게 한턱을 내야 하는지 설명을 해봐. 혹시 나에게 원하는 게 있습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 너와 난 만난 지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그녀는 말은 그렇게 해도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러니까 돈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럼, 내 손가락을 하나 팔게요. 별로 맛은 없을 것 같은데. 그녀는 웃었다. 시간의 건너편에서 그녀는 물질적으로는 부유했지만 시간 속에서 고독하게 사위어온 여자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 속에서 문득 그 사람의 일생이 보이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는데 그때도 그랬다. 눈가에서 곱게 흘러내린 주름살과 다르게 그녀의 눈빛은 깊고 어둡고 축축했다. 그녀는 내 주순에 맞게 쉬운 단어와 짧은 문장을 사용했다. 그리고 내가 이해를 하지 못하면 몸동작을 사용해서 요령 있게 자신의 의도를 전달해 주었다. 누군가를 가르쳐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70% 정도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 정도면 대단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녀는 같은 영국인과 이야기해도 50% 미만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30% 미만으로밖에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지 못하고 산다고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도 한국에서 비슷한 상황이었던 것 같았다. 티베트에서는 남자 두 명이 한 여자와 결혼하는 풍속이 있는 거 알아? 그녀의 말에 의하면 티베트의 기후 환경 때문이라고 해다. 티베트는 긴 겨울과 짧은 여름 때문에 밀이나 보리 같은 작물밖에 재배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시골에서 농사만으로는 가족을 부양하기 어렵다는 것. 해서 남자 한 명은 식구들의 식량을 해결할 수 있는 농사를 짓고, 다른 한 명은 도시로 나가 장사나 다른 돈사는 일을 해서 아이들의 학비와 살림살이를 할 수 있는 돈을 번다는 것. 그리고 도시로 나간 남자가 일 년에 두어 번 집으로 돌아오면 나머지 하나는 잠자리를 양보하고 잠시 자리를 비켜준다는 것이다. 슬픈 이야기네요! 한국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네요. 아름다운 이야기지! 욕심 때문이지! 어쨌든 이기적인 인간들은 가족을 만들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해. 그럼, 나 같은 사람은 결혼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가족을 만들면 그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남자들은 무슨 짓이든 다 하잖아. 그게 미덕처럼 여겨지는데 그게 세상을 망치는 거야. 자기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아비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거야. 그럼, 남자들은 뭘 위해서 살아야 하죠? 바보같이 그걸 왜 나에게 물어? 2017년 여름, 덕진공원에 갔다. 그리고 20대 후반, 술에 취해 잠들었던 그 벤치에 앉아 보았다. 흔히 공원에서 볼 수 있는 나무 벤치였다. 여기 저기 칠이 벗겨진 자리가 까맣게 변색된 채 사위어 가는 벤치. 20년 전 그 벤치였는지 모르겠다. 아무려나, 오늘 밤 추억에 젖어 여기서 잠들면 모기들이 벌떼처럼 달려들 것이다. 이곳의 풍경은 언제나 주말 오후처럼 한가롭다. 연못 주변의 산책로를 따라 오래된 포플러 나무들과 아이스크림 판매대, 놀이터, 화장실, 기념비들이 늘어서 있어서인지 모르겠다. 난 중고등학교 때 이곳으로 소풍 나온 여공들을 꼬시러 오곤 했었다. 연못에는 연꽃이 피어 있었다. 그녀의 붉은 가슴 같은 연꽃. 그녀가 원하는 대로 성실하고 다정한 남자를 만나서 아이들 낳고 잘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그녀가 원하는 삶일지, 아니면 이십 대의 초조함을 이기지 못해 결국 남들처럼 결혼으로 도피하고 싶어 했던 건지, 그도 아니면 단지 나를 피하고 싶어 했던 건지 알 길이 없다. 이제 나는 그녀가 세속에 환멸을 느껴 머리를 깎고 수도를 하다가 환속해서 술집 주모가 되었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나이가 되어 버렸다. 젊은 친구, 길을 갈 때는 바닥을 보지 마. 그렇게 걸으면 시간이 반대로 흐르거든. 가장 좋은 것은 그저 눈앞의 풍경을 즐기는 거야! 티베트에서 만난 영국인 할매가 헤어지면서 한 말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백 달러짜리 석 장을 주었다. 그때로서는 거절할 엄두가 나지 않아 덥석 그 돈을 받았다. 그리고 티베트의 라싸에서 장무를 거처 네팔의 카트만두, 포카라를 찍고 인도를 갔다. 빳빳이 고개를 들고 걸어서. 그리고 마침내 인도의 바라나시에 도착했었다. 돌아올 계획이 없는 여행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가 다시 떠나기를 반복하는 삶이 되어 버렸다. 지금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골목길을 떠돌고 있다. 밥벌이는 하고 있지만 아직 생고무 타는 냄새를 완벽하게 극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간섭과 경쟁이 덜한 일을 찾아서 그럭저럭 견딜 만해졌다. 그래도 견딜 수 없는 날들은 있기 마련인데, 그런 날이면 티베트의 고지대에서 만국기같이 나부끼던 타르초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내 코끝을 간지럽히는 바람이 설산의 타르초를 읽고 온 바람이라는 느낌이 확연한 날은, 술을 마시지 않아도 기껍다. *장용수: 2001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소설필명 장용석) 당선. 현재 말레이시아 말라야대학교 아시아유럽어학과에서 한국어 교수로 재직 중.

  • 문학·출판
  • 기고
  • 2018.11.16 16:57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걷다, 생각하다, 쓰다 - 이준호

1983년에 군산에 정착했으니 햇수로 34년째다. 군산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계획도시다. 높은 곳에서 조망하면 시가지가 바둑판처럼 구획돼 있다. 80년대엔 영화동과 월명동에 일본식 건축물이 즐비했지만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다. 월명산은 군산 도심에 자리한다. 명월이 아니라 월명인 건 일본식 어순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제망매가」의 지은이가 월명사인 걸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월명산의 벚꽃은 일제강점기엔 경성에서 특별열차를 편성할 정도로 장관이었다고 한다. 월명공원은 문학이나 문학사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탁류의 악한 고태수가 산책하려다 몸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그만둔 곳이자 어린 고은이 신사참배를 하던 곳이다. 광기 어린 좌우의 살상으로 정신이 피폐해져 방황하던 고은이 노숙하던 곳이자 부산 출신의 소설가 김정한이 소주에 독을 타서 자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곳이다. 고은이 장항제련소 굴뚝을 건너다보며 영원성을 생각한 곳이자 채만식 문학비가 있는 곳이며, 고은이 출가한 동국사가 있는 곳이다. 일본인들이 뚫은 해망굴은 탁류에서 고태수와 장형보, 행화가 은적사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타고 통과한 곳이자 고은이 미군비행장으로 가기 위해 지나친 곳이다. 그중에서도 수원지와 그 주변의 산책길은 나에게 각별하다. 하루에 한 번, 시간을 정하지 않고 월명공원 수원지 둘레를 걷는다. 체육공원에 설치된 운동기구까지 이용하면 한 시간 남짓한 코스다. 시간을 늘리고 싶으면 주변의 해발 100미터 내외인 산을 슬쩍 끼워 넣는다. 그러면 금세 두세 시간짜리 코스가 된다. 월명산 내에 있는 수원지 역시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다. 수원지와 산책길의 인연은 고3 때로 거슬러간다. 그땐 상수원 보호를 위해 수원지 둘레에 철망이 쳐두었고, 주변의 길은 비포장이었다. 고등학교 선배와 낚시를 하다 감시원에게 낚싯대를 빼앗긴 기억이 새롭다. 지금은 시멘트 포장에 우레탄까지 깔아 비가 와도 흙탕물 튈 걱정 없고, 오래 걸어도 무릎 상할 염려가 없다. 흙길 그대로 보전했으면 좋았겠지만 그건 내 욕심일 뿐이다. 오히려 이런저런 부속시설과 편의시설이 설치돼 이용이 편리하다. 지금은 수원지를 월명호수라는 낭만적인 이름으로 바꿔 부른다. 그렇지만 수원지를 뭐라 부르건 나와는 상관없다. 나에겐 어디까지나 수원지일 뿐이다. 일반명사를 고유명사화한다는 건 사유화하고 구속한다는 거니까. 명명자의 주관이 개입되는 순간 명명된 사물의 본질과 정체성은 훼손돼 버리니까. 어느 지역의 집필실에 가건 맨 먼저 산책길을 만든다. 하지만 그 어느 산책길에도 이름을 붙인 적은 없다. 단지 식수공급원의 용도로 만들었기 때문에 수원지라고 고집하는 건 아니다. 수원지와 산책길은 내 글의 원천이자 자산이다. 수원지의 물빛이나 냄새는 계절이나 시간대에 따라 달라진다. 비 오는 날이면 머리를 꼿꼿이 쳐든 괴생물체를 발견한다. 어스름 저녁이면 외래종인 황소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린다. 한때 숲을 지배하던 청설모는 다 어디로 간 걸까? 공도교에서 쌀 튀밥을 주면 몰려드는 잉어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안개가 심한 어느 겨울밤, 흰 체육복을 입은 커플을 유령으로 착각해 머리칼(?)이 쭈뼛 섰던 적도 있다. 가로등 불빛이 미치지 않는 벤치에서 인기척에 남녀가 후다닥 떨어지는 광경을 목격하면 괜히 미안해진다. 산책길에 떨어진 야구 모자나 장갑 한 짝을 발견하면 그 물건들의 주인들을 상상하게 된다. 며칠 전엔 오후 열한 시쯤에 갔더니 예닐곱 마리가 무리를 이룬 개떼를 만났다. 무슨 모의라도 하는지 산책로 한가운데서 모여선 녀석들은 사람들이 지나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재작년엔 집필실에서 돌아와 몇 달 만에 갔더니 민둥산이 되다시피 했다. 소나무 에이즈라 불리는 재선충 때문이었다. 겨울 산의 황량함과 스산함은 신록이 우거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내 머릿속에서 나오는 모든 글들이 수원지와 산책길에서 구상되고 숙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범하고 소박하기 그지없는 산책길이지만 나에겐 사색과 모색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편백나무 숲에 누워 장르를 구분 않고 다운받은 음악을 듣노라면 상상력은 무한대로 확장된다. 풀벌레 소리에 볼을 간질이는 미풍까지 더하면 더할 나위가 없다. 걷기 좋아하는 글쟁이들이 군산에 놀러오면 꼭 안내하는 곳이기도 하다. 물론 아름다운 길은 많다. 가본 곳을 잠깐만 떠올려도 동해안 자전거길, 지리산 둘레길, 제주도 올레길, 부안 마실길 등등이다. 하지만 산책길처럼 마음이 한갓지고 여유로워지는 공간은 어디에도 없다. 산책길이 끼니때마다 먹는 집밥이라면, 다른 길들은 돈가스나 짜장면쯤 될까. 이따금씩 정해진 코스를 이탈해 채만식 소설 탁류의 배경이 된 장소를 찾는다.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군산의 원도심은 탁류 속에 그대로 재현돼있다. 군산시는 관광객들을 위해 탁류의 배경지와 일제강점기의 흔적들을 중심으로 탁류길을 조성해두었다. 탁류의 등장인물들이 걸었던 동선을 따라가며 만나는 녹슨 못 하나, 비바람에 퇴색한 판자 한 쪽이 모두 정겹고 애틋하다. 채만식의 발자취를 따라 고즈넉한 밤거리를 걷노라면 일제강점기로 타임슬립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영화 <밀정>에서 경성 밤거리를 밝히던 가로등이 현재 군산에 설치된 가로등과 모양이 같다는 걸 안 뒤론 그런 느낌은 더욱 강렬하다. 어느 시인은 채만식을 친일 작가라고 단정한다. 채만식의 친일 작품이 서른 편이 넘는다고 박박 우기는 데엔 난감하기 짝이 없다. 그야말로 반성적 사유의 결여에서 오는 오만과 자만의 산물이다.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권력지향적인 그 시인이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으면, 하는 가정 뒤엔 으레 당꼬바지에 도리우치를 쓴 고등계 형사의 모습이 떠올라 쓴웃음을 짓게 된다. 나는 김훈 작가를 좋아한다. 그가 밀리언셀러 작가여서도, 미문을 구사해서도, 지면 곳곳에 깊은 사유의 흔적이 스며 있어서도 아니다. 그가 「치욕」에서 나는 내가 체험하지 못한 시대의 고통에 대해 말해야 하는 일이 두렵다.라고 심경을 밝힌 다음부터다. 시대가 처한 특수한 상황을 이해하려는 그의 균형 잡힌 사고가 믿음이 가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나 또한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살았을지 자신할 수 없다. 채만식은 매문으로만 생계를 유지했다. 한땐 그의 식솔뿐 아니라 형의 가족들까지 부양해야 했다. 머리맡에 원고지를 쌓아두고 글을 쓰는 게 그의 평생소원이었다. 한 번 정착된 문자는 오래 전해진다. 구술과 문자의 차이이다. 채만식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덮어놓고 친일 작가 운운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어느 평론가는 채만식이 친일을 내면화해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는 논리를 펼치기도 한다. 때론 채만식이 원망스럽다. 항일이나 반일의 길은 가지 못할망정 왜 손가락질당하는 길을 가셨습니까. 오늘도 산책길을 걷는다. 공도교 입구가 막혀 있다. 그제야 깨닫는다. 언젠가부터 확장 공사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눈으로만 읽고 머리엔 입력하지 않은 탓이다. 당분간은 다른 코스를 걸어야 할 것 같다. 어떤 코스가 좋을까. 길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 시공간은 다르지만 내가 걷는 산책길과 채만식이 걸어간 탁류길은 어느 지점에선가 이어져 있기도, 끊어져 있기도 하다. 연결됐나 하면 단절됐고, 단절됐나 하면 연결됐다. 그걸 알면서도, 모르면서도 걷는다. 그게 인생 아니던가. *이준호: 1994년 작가세계 소설 당선, 2001년 MBC 창작동화대상 장편동화 당선, 할아버지의 뒤주, 그해 여름, 닷새 등.

  • 문학·출판
  • 기고
  • 2018.11.08 21:35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동행

산다는 건 그 무엇으로부터 가벼워지는 일이다. 그 무엇으로부터 점점 벗어나는 일이다. 이것은 은파 호수가 사계절을 동원해, 자신의 온몸으로 내게 준 가르침이다. 요즘 이것저것 생각할 일들이 많아졌다. 적잖이 나이 들면서 그만큼 잡다한 생각들이 몸무게를 늘려가는 탓이리라. 한때는 사는 일에 있어서 어떤 어려움이나 두려움이 온다 해도 견뎌낼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생로병사라는 질서조차도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극복 가능하다고 믿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어느 날부턴가 이 모든 믿음이 하나둘씩 균열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날이 갈수록 사정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무기력감! 자신에 대한 믿음이 무너졌을 경우 찾아오는 이 무기력감은 마치 꿈속의 무의식적 행동을 제어하지 못해 어쩌지 못하는 상황처럼 스스로를 한없이 나락으로 가라앉게 하는 것이었다. 멈춰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너진 마음의 조각들을 치우는 일이 선행되어야 했다. 하지만 무기력 상태에서 그 파편들을 홀로 걷어내는 것이란 안개에게 길을 묻는 것처럼 참으로 암담한 일이었다. 무작정 집을 나섰다. 소위 길치라 불리는 내가 어렴풋이 은파 호수가 있는 곳을 짐작하며 걸었다. 걸으면서도 만약 길을 잃으면 콜택시를 부르면 될 일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걸었다. 얼마쯤 가다 보니 은파 호수가 나왔다. 은파(銀波), 햇빛에 반사된 은빛 물결은 나를 마중하듯 굼실굼실 미세한 움직임을 보이며 반짝였다. 바람이 꽃을 불러왔고, 비가 억수로 왔다, 햇볕이 너무 뜨거웠다, 태풍도 몰아쳤다, 나뭇잎이 지고, 눈이 왔으며, 목청 고운 새가 다시 그렇다. 여러 사계절을 건너면서 나는 조각난 많은 생각들을, 마음들을 은파 호수에 퐁당퐁당 버렸다. 기뻤던 일도 고통스러웠던 일도 힘겨웠던 일도 무수히 버릴 수 있었다. 순전히 맑고 넓은 은파 호수의 품 덕분이었다. 은파 호수는 내 고통의 농도에 따라 어느 날은 잔물결로 쓰다듬어 주었고, 거친 생각은 큰 물결로 덮어 주었으며 늘 괜찮다, 괜찮다 달래 주었다. 어느 때는 더 버릴 게 없느냐는 눈빛으로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벤치에 앉아, 호수 밑바닥에 버려진 내 생각들이 자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은파 호수를 걱정했다. 그 생각도 잠시, 정화작용에 의해 그 생각들을 먹어 치운 물고기의 옆구리 살이 도톰하게 올라 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나직이 속삭이면, 은파 호수는 대답 대신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은파 호수는 게으름 피우기 시작하는 나를 역으로 초대하기 시작했다. 봄이 오면 오는 대로 주변에 온갖 꽃들을 피워내곤 나를 불렀다. 숲속 뻐꾸기가 울 때쯤이면 아카시아꽃, 밤꽃 향기를 후르르륵 뿌려놓고, 가는 봄을 환송하자고 또 나를 불렀다. 7, 8월이면 백련홍련을 띄워놓고, 바람에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수줍어하는 연잎의 모습도 연출해 주었다. 그때마다 수변산책로 개망초꽃은 고개를 쭈욱 내밀곤, 나와 호수와 연꽃의 모습을 번갈아보며 스케치했다. 어디 그뿐인가. 가을이면 숲과 호수는 손을 마주 잡고 화려한 데칼코마니를 이루어냈고, 밤에는 음악분수와 물빛다리에게 짝을 이루게 하여 탱고를 추게도 했다. 물살도 따라 춤을 추었지만 가끔 스텝이 엉켜 저희끼리 부딪치기도 했다. 그때마다 은파 호수는 흐트러진 융단을 바로잡아 펼쳐주듯 물결을 조심스레 당기곤 했다. 함박눈 내리는 날 은파 호수의 초대는 그중 으뜸이었다. 적갈색 흑룡(黑龍)같은 물빛다리는 마치 하늘의 모든 눈을 불러올 듯 등 비늘을 치켜세운 채 꿈틀꿈틀 비상을 꿈꾸었다. 나도 따라 비상을 꿈꾸었다. 어느 하늘 중간쯤에 이르게 된다면 나, 함박눈이 되어 가장 아름다운 연인, 속눈썹 긴 여인의 눈썹 위에 앉아 그네를 타고 싶었다. 결국 이런 유형의 은파 호수 초대는 단순한 초대가 아니었다. 내가 좀 더, 나날이 더 가벼워지도록 훈련의 훈련을 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은파 호수는 나 스스로, 지난 기억, 그러니까 희로애락의 표상을 지닌 모든 것들을 일부러 흔들어 깨워 스스로를 힘들게 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수시로 나를 찾아 흔드는 삶의 고뇌로부터 나는 아직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은파 호수 또한 그런 나를 익히 알고 있어 넓은 칠판 가득 구불구불 수많은 글씨를 쓰며 다시 강의를 시작한다. 그래도 깨닫지 못하면 나를 불러 일으켜 세운다. 손을 내민다. 함께 걷자고 손을 내민다. 함께 손잡고 걷는 날, 세찬 바람이라도 불어주는 날에는 내게 흥얼흥얼 노래도 불러준다. 바다에 사는 파도처럼 세련되고 우렁찬 음성은 아니다. 높낮이가 거의 일정한 음치 수준이다. 그런들 어떠랴. 서로가 서로에게 스미는 아름다운 순간인 것을, 혼자였으나 결코 혼자가 아닌 동행인 것을! 은파 호수를 위해 노란색보다 주황색이 조금 더 많은, 그래서 더욱 곱디고운 노을 멍석을 펼쳐 놓아야겠다. 퇴근하고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는 아빠 오리도 풀어놓아야겠다. 밤이면 보름달을 대롱, 매달아 놓고 별들에게 거문고라도 울려 보라 해야겠다, 오늘밤 은파 호수가 외롭지 않게! *은파 호수는 전북 군산시 은파 순환길 9에 위치하고 있다. 약 53만 평의 규모로 수변산책로는 약 6.5km에 이른다. 전국 100대 관광 명소로 선정되었으며, 은파 호수 위의 물빛다리는 370m이다. 국내 유일의 보도현수교로 알려져 있다. * 이소암: 군산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0년 『자유문학』 등단. 시집 『내 몸에 푸른 잎』, 『눈.부.시.다.그.꽃!』, 논문 『이상 시 연구』가 있으며, 군산대학교 평생교육원 글쓰기 전담교수로 활동 중.

  • 문화
  • 기고
  • 2018.10.26 10:10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길은 길을 만든다

적상산을 넘어 날아가는 새무리들이 구름바다를 가로질러 날아간다. 바람이 내어 놓은 길을 따라가고 있다. 그랬다. 저 새들처럼 내가 이곳 포내리로 날아와 둥지를 틀고 자녀들과 남편과 함께 벌써 40년이란 길을 걸어왔다. 아스라이 먼 것 같아 보이던 길은 내 앞 가까이 있었다. 처음 이곳 포내리에 올 때만 해도 버스는 먼지 자욱하게 일으키며 비포장도로를 30분 넘게 달려야만 도착하는 마을이었다. 아버님 생신날에 맞추어 왔던 날. 버스는 그렇게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투덜거리고 왔다. 아스라이 멀어지는 듯 가까운 산길을, 아니다, 굽이굽이 돌아서는 산들이 나에게 왔다가 멀어지고 멀어졌던 길은 또 내 앞에 가르마를 가르듯 나타났다. 어느 곳이든 시골은 내 유년 시절 마을과 잇닿아 있고 닮아 있었다. 사람 살아가는 곳이 다 닮아 있는 것일까. 유년 시절 오르던 야트막한 산등성이도 당산나무도 어쩜 이리도 닮아 있는지 고물고물 몰려 있는 초가집과 싸리대문과 싸리 울타리 돌담들. 고샅길에 맨발로 뛰어나오신 어머님의 환한 웃음과 동네 어르신들의 웅성거림이 내 귀에 여울지게 들리던 그리운 음성들. 자작거리며 매운 연기를 내뿜던 부엌 아궁이 속을 한없이 바라만 보던 그 그리운 불꽃들. 그렇게 느리게만 흘러가던 시간들이 길을 내고 그 길 위에 내가 아프게 서 있다. 살아온 날들의 아픔이다. 행복하게 살아온 날도 아프게 앓아야 했던 흔적들이다. 몸부림치며 살아온 날도 아프게 앓아온 면역들이다. 지금 적상산이 바라보이는 곳 마을 포내리에서 그리운 것들이 바람을 일으키며 다가온다. 어린 신부로 견딘 날들이 참으로 아름다웠다고 나에게 듣고 싶다. 세상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기 위하여 조금씩 마음의 길을 내고 누군가 나에게로 오는 소리를 듣고 싶다. 그 남자와 함께 작은 텃밭에서 과일나무를 심고 채소를 가꾸고 마음에 묻어두었던 것들을 땅에 심는 날은 참으로 힘들었다. 40년 동안 적상산 자락에 발을 뻗고 뿌리를 내리는 동안 작은 바람으로 기다려온 희망이 조금씩 우리에게 길을 내고 왔으면 좋겠다. 느리지만 아프지 않게 산골에서 살아내는 일이 어느 것 하나 만만한 일은 없었지만 지금 산등성이를 넘어 천천히 걸어 내려오고 있는 길이다. 10년 전 사업으로 조금 기우뚱했지만 서로가 의지하며 잘 견디어 왔음은 보이지 않게 도우시는 그분의 사랑임을 안다. 우리는 또 이렇게 슬픔의 길을 지우며 걸어가고 있다. 길은 우리가 닦아 놓은 나의 앞을 먼저 만들어 가는 과정이 된다고 믿는다. 길을 걸어왔으므로, 가는 길도 내가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은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먼지 자욱하게 달려왔던 길에서 이제는 잘 닦여진 아스팔트길을 달려 나가게 되는 것, 그 길에서 나는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이선옥: 『창조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아직도 사랑은 가장 눈부신 것』을 냈다. 글벗회원, 무주작가회의 회원.

  • 문학·출판
  • 기고
  • 2018.10.25 13:59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내 그림자

1 또래들보다 정신연령이 한참 모자랐던 나는 지금도 못난이 축에 낀다. 남이 하는 얘기를 제대로 못 알아듣고 남들이 다 웃고 난 뒤에야 폭소를 터뜨리는 경우가 심심찮았다. 길이란 단어도 마찬가지다.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여러 의미를 짚어보는 데도 힘이 부친다. 나는 지금 등하굣길을 쓰려고 한다. 이 길을 오가면서 나도 뭔가를 생각했을 것이고 뭔가를 확신했을 것이며 고개를 숙인 채 걷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행위와 길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편집 의도와 다르게 글이 쓰일지라도 기억 중의 한 토막을 적어봄으로써 이제라도 내 행위를 낮게 내려놓고자 한다. 2 학교 가는 게 싫었다. 숙제하기도 싫었고 선생님께 매 맞는 것도 지겨웠다. 멍청하면 꾀라도 있어야 한다는 말부터 가난한 집 아이는 영리하다는데 너는 도대체 왜 이러냐는 말까지 무밥처럼 싫었다. 멍청한데 어떻게 꾀가 생길 수 있으며, 가난한 것하고 영리한 것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지 선생님은 말해 주지 않았다. 4학년 때부턴가 목요일엔 특별활동반이란 게 있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각자의 특기를 살리는 수업이었다. 그림그리기반 붓글씨반 베드민턴반 등등이 있었는데 그 속에 보이스카웃반도 있었다. 나는 저학년 때부터 이들을 유심히 봐왔다.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긴 양말을 신었고 그 위에 반바지를 입었다. 그들만 신을 수 있는 운동화며 그들만이 입을 수 있는 감청색 유니폼은 가히 내 눈알을 잡아 뺄 듯이 유혹적이었다. 그들 옆에서 생글거리던 걸스카웃들은 또 어떤가. 치마 입은 유니폼도 예쁜데 얼굴 생김이며 몸매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보이스카웃반에 들어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방학 땐 캠핑도 간다는데 거기서 걸스카웃반 지지배들과 폼 나게 놀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김칫국부터 마신 꼴이었다. 그 반에 들어가려면 유니폼을 살 만한 경제력을 갖춘 집 자식이어야 했고 공부도 잘 해야 했다. 공부는 좀 못하더라도 경제력은 갖춘 집 자식이어야 한다. 나는 씨름반이 되었다. 왜 내가 씨름반이냐고 선생님께 여쭐 계제가 나는 못 되었다. 선생님 뜻이 곧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공부는 그만두고 유니폼을 살 만한 돈이 없어 보이는 집 자식이기 때문에 씨름반에 들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공부를 잘하는 부잣집 아들놈은 씨름반에 들 수 없나요? 이렇게 묻지도 못하고 학교 운동장 구석에 박혀 있는 씨름장에 갔다. 보이스카웃반에 든 애들은 특별한 사람들 같았고 나는 평생 샅바나 맬 수밖에 없는 사람일 것 같았다. 그때 마침 가방 손잡이가 떨어져나갔다. 잘되었다. 어머니가 논에서 돌아오기가 무섭게 새 가방 사내라고 떼를 썼다. 모레까지 가방을 안 사주면 학교에 안 가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하지만 대답은 이랬다. 지금은 모내기철이니 장에 갈 수 없다, 며칠만 책보에 책을 싸가지고 다녀라, 가방은 꼭 사주마, 옛날엔 모두 책보를 들고 다녔다, 뭐 이런 것이었다. 미안하지만 이런 대답을 듣고 학교에 갈 수는 없었다. 검정 고무신은 신었을망정 책보 들고 학교에 가는 학생은 전교생 중에 나 혼자일 것이었다. 그 이틀 뒤 아침 학교에 안 가겠다고, 못줄이나 잡겠다고 떼를 썼다. 보이스카웃반에 못 든 것 때문에 학교에 안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가방 때문에 학교에 안 가겠다는 것으로 알고 아버지의 회초리가 사정없이 종아리에 감겼다. 그래도 버텼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작대기를 들고 오는 게 아니냐. 별수 없다. 매에는 장사가 있을지 몰라도 작대기질에는 장사가 없을 거니까. 회초리에 감겨 따끔따끔한 종아리를 끌고 손잡이 떨어진 책가방을 안고 등굣길에 나섰다. 그런데 책가방을 보퉁이처럼 안고 가야 한다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학교에 가는 애들이 모두 나만 바라보는 것 같았다. 가방 살 돈도 없냐, 이러면서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가방은 아무 짬도 모르고 어미 품에 안긴 돌배기처럼 내 가슴에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몸체에서 떨어져 덜렁거리는 끈은 아이 다리 같았고 반원으로 온전한 끈은 아이 머리 같았다. 젖 달라고 보채는 이것을 팽개쳐버리지 못하고 낑낑대는데 내 속내를 짐작한다는 듯 눈에 확 띄는 것이 있었다. 땅바닥에 나뒹구는 세 발 가웃은 너끈한 새끼줄이었다. 지체 없이 새끼줄로 책가방을 통째로 묶고 끈을 내어 어깨에 걸쳤다. 가방을 땅바닥에 내던져 질질 끌고 앞을 향했다. 자, 볼 테면 봐라, 학교는 이렇게 다니는 거다. 가방을 땅바닥에 질질 끌고 등굣길을 휘저었다. 건너물을 지나 닭똥 냄새가 지독한 내리배기를 얼른 지나 옥남 이용원, 이쁜네 술집, 꺼먹둥이 술집, 방앗간을 지나서 한참을 더 걸으면 노락쟁이가 나왔고, 공장에 다니는 형들 누나들이 자꾸 튀어나온다는 뽕밭이 나왔고, 아침밥 먹은 게 다 꺼진 학산을 지나면 팔복초등학교 후문이었다. 십 리가 넘는 자갈길, 논밭이 나를 응원한 길을 나는 가방을 질질 끌었고 학교가 파하면 그 역순으로 집에 돌아왔다. 또래들은 내 행동에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주 자랑스럽게 가방을 질질 끌면서 누구든 만나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학교를 좀 쉽게 다니자고 가방을 질질 끌었다. 또래들은 나를 똥 씹은 듯 바라봤다. 정말로 너 왜 이러냐고, 죽으려고 환장한 것 아니냐고, 사람 되기 벌써 글렀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일주일이 넘도록 이렇게 등하굣길을 휘저었다. 토요일이었다. 선생님이 나를 부르더니 아주 부드럽게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직감했다. 어떤 놈이 내 행동을 선생님께 꼰지른 것이다. 매품 팔러 온 흥부처럼 나는 기가 팍 죽었다. 몸으로 받아내야 할 것은 매가 아닐 것이다. 몽둥이찜질일 것이다. 선생님은 청소함 속의 몽둥이를 꺼내어 닥치는 대로 휘둘러댈 것이다. 자기 분을 못 이기고 슬리퍼를 벗어서 싸대기를 후려칠 수도 있다. 나를 들어서 창문 밖에 메다꽂을 수도 있다. 이렇게 조용히, 부드럽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부를 때는 곡(哭)소리가 나야 매타작이 끝났으니까. 그게 아니었다. 선생님은 가방을 왜 땅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는지를 묻지 않았다. 어디 아픈 데는 없냐고 내 이마에 손을 갖다가 댔다. 이거 뭐가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이 느낌이 드는 순간 선생님은 아주 다정스러운 목소리로 철둑 너머에 있는 호성초등학교로 전학을 가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어차피 걸어다는 거 뭐 이 학교나 그 학교나 다를 게 없다고, 조금 더 걸을 뿐이라고, 네가 학교 다니기에는 그 학교가 여기보다 백번 나을 거라고 했다. 아아, 호성초등학교. 나는, 전학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쫓겨나고 싶지 않았다. 팔복초등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친구 한 명도 없이 어쩌란 말이냐. 무작정 무릎을 꿇고 다시는 가방을 땅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지 않겠다고,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요지부동이었다. 내 속이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선생님은 이젠 그럴 필요 없다고, 너는 왜 편하게 다닐 학교를 어렵게 다니려고 하냐고, 일이 다 끝난 듯 오히려 나를 달랬다. 그날 밤 종아리에 구렁이가 감긴 것처럼 아버지께 회초리를 맞았다. 어떤 놈이 또 꼰지른 것이다. 회초리가 부러지면 동생에게 다시 쪄오라고 하시면서 인정사정을 두지 않고 종아리를 불나게 했다. 회초리가 차악착 소리를 내며 종아리에 감겨도 나는 끝끝내 보이스카웃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일주일 넘도록 가방을 자갈길에 질질 끌었어도 나는 보이스카웃반에 들 수 없었고 새 가방도 생기지 않았다. 또래들은 내가 가방을 질질 끌고 다녔다는 행위만 중요했지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내가 보이스카웃을 뽀이스카웃이라고 부르는지를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나도 보이스카웃반 얘기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나는 다시 호라발해져서 어떤 껀수를 잡을까, 골몰했다. 3 보이스카웃 핑계 대고 남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싶어서 가방을 질질 끌었던 길은 이제 없다. 논밭에 둘러싸여 어린 치기를 응원해주었던 꼬불꼬불한 길은 없다. 자갈길엔 아스팔트가 깔렸고 주위는 오죽잖은 공장 건물로 가득 찼다. 우두커니 서서 내 그림자를 바라본다. 욕망이 때로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버린다는 것을 알았어도 내 몸은 아직도 욕망의 집이 되어 있고, 잊을 것을 잊지 못하고 산다. 그래서 반편이 머리가 자주 무거운가 보다. *이병초: 1998년 『시안』으로 등단. 시집으로 『밤비』, 『살구꽃 피고』, 『까치독사』 등.

  • 문학·출판
  • 기고
  • 2018.08.30 18:48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 13. 날이 흐리면 흐린 대로 좋아서 떠나는 여행 - 유수경

오전 내 비구름이 오락가락했다. 아라비카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리는 동안 빗방울이 떨어졌다. 입안 가득 깊은 우울처럼 머물던 커피의 신맛이 사라지자 후드득 요란을 떨던 빗소리가 잦아들었다. 길을 떠날 요량이었고, 다행히 비도 멈춘지라 적당히 흐려 좋은 날이었다. 전주에서 26번 국도를 탔다. 이제 막 노란 물이 들기 시작한 은행나무가 시속 80km로 뒷걸음을 쳤다. 물안개가 걷히는 길을 따라 한 4km를 달리니 모래재가 나온다. 완주군 소양면과 진안군 부귀면을 잇는 해발 530미터 굽이굽이 험한 이 길은 1972년 개통되었다. 이미 오래전 보부상들이 넘나들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모래재는 무진장(무주진안장수) 사람들이 농산물을 싣고 전주로 넘어오는 생의 길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생의 마디마디가 관절통처럼 쑤셔 왔을 산길을 따라 진안의 석기와 표고버섯, 인삼 등이 외지로 나왔다. 그러나 이 고갯길을 넘다 수많은 생명이 산 아래 무덤이 되었다. 1997년 새 길이 놓이면서 모래재는 이제 시계추를 멈추고 묵언수행 중이다. 세상사 번잡스러운 날들 위에 천 년의 침묵을 새기고 있는 것이다. 먼 산 잡목이 갈색빛으로 물드는 모래재를 지나자 지상의 하루가 이처럼 쓸쓸하고 아름다운 길이었나 싶은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이 나온다. 원세동에서 웅치골까지 1.5㎞ 남짓한 이 길은 100여 년의 비포장 길에 새겨진 역사를 기억하라는 듯 장엄하게 세상을 굽어보고 있다. 가끔 이 길을 무심하게 지나치는 차량들이 백 년의 고독을 흔들어 깨우지만 이내 다시 바람이 깃드는 곳으로 나뭇잎이 흔들릴 뿐이다. 사람의 길과 자연의 길이 서로 다름을 1.5㎞ 메타세쿼이아 길에서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우주의 시간을 거스르지 않고 스스로를 내려놓는 가을날이 숭고해지는 까닭은 생의 무게만큼 자연도 버겁게 삶을 버티기 때문이다. 한적하고 고혹하여 숨이 막힐 지경인 오지 마을 날이 흐리면 흐린 대로 좋아서 떠나는 여행은 우울을 덧씌우기 십상이다. 더 우울해지려는 내 불손한 의도를 알아차린 듯 오후 들어 날이 개었다. 비구름이 걷히는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 제법 높은 재를 넘으니 저 아래 금강 상류가 보인다. 여기서 4km를 더 오르니 가막골이 나온다. 가도 가도 까마득한 첩첩산중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625 전쟁 전후로 빨치산이 숨어들 정도로 외부와 차단이 된 오지 마을이다. 이곳에 마을이 있고 길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한적하고 고혹하여 숨이 막힐 지경이다. 비무장지대의 생태를 간직한 가막골은 고라니, 오소리, 너구리가 제 집 마당인 양 노닐고, 은하수가 쏟아지는 밤이면 반딧불이가 너울춤을 춘다. 전북에서 손꼽히는 청정 지역이어서 혼자 꺼내 보는 비밀일기처럼 숨겨두고 싶은 곳이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족히 200미터는 될 법한 돌담이 죽 늘어서 있다. 돌담길을 따라 가을꽃이 한창이다. 발길에 채일 정도로 지천이던 돌덩이로 담을 쌓자 바람이 들고 나는 숨길이 생겼다. 그 숨길에 지난봄 가막골을 지나던 풀씨들이 날아들었다. 혼자 가는 먼 길은 외롭다고 적적한 생의 하루, 말벗이나 하자고 무수한 생명들이 머물다 갔다. 참회인 듯, 위로인 듯 무심하게 한참을 걷다 보니 마을 안이다. 산 빛이 내려앉은 마을회관 입구 하늘정원 바위에 턱을 고이고 앉았다. 진안고원을 설명하기 딱 좋은 고지대에 서 있으니 머리가 하늘에 닿을 듯하다. 흐린 아침과는 사뭇 다른 이 풍경이 당혹스럽지만 구덕구덕 잘 말린 햇볕을 쬐는 느낌이 몸에 감긴다. 생각해 보니 생은 볕을 품었던 날들조차 사치였던 것, 풀씨처럼 가벼운 존재로 살다 보면 막다른 길에 서게 된다고, 그래서 생은 무거워야 한다고 습관처럼 진지했던 날들이었다. 진지함 끝에 매달린 지루한 일상이 아우성칠 때도 풀씨처럼 날아갈 수 없었다. 우울은 마을 안으로 밀려오는 산 그림자처럼 처음엔 담장 밑 그늘이었다가, 이내 담장을 훌쩍 넘는 어둠이 되곤 했다. 짓무르게 보아온 그 풍경들이 시가 되고 감투봉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을 둘러싸고 있는 산 그림자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허공을 우왕좌왕 날아다니던 날것들의 파닥임이 풀숲으로 사라졌다. 산비둘기 울음이 마을 가까이 다가올 즈음 골목 안으로 바람이 몰려왔다. 걸음을 재촉해 느티나무 정자길로 들어섰다. 마을회관 길에서 만난 동네 어르신들의 벽화가 이 길에도 있다. 20가구가 채 안 되는 마을이지만 시인과 화가들이 살고 있다. 담길에 새긴 시도, 풍경도 도시 때를 타지 않은 순박한 것들이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길을 내고 그 길을 짓무르게 보아온 풍경을 담았으니 수작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 마을에 살면 시인이 되고 화가가 된다. 벽화가 그려진 골목을 지나다 보니 디딜방앗간이 보인다. 마을 농기구 전시관이다. 상가막마을은 족히 400여 년 이전에 생겼을 거라고 추정을 한다. 그 수많은 세월 동안 이곳에서 태어나 자라고 생을 마감했을 사람들의 흔적과 손때 묻은 농기구를 유물로 남겨 놓았다. 선조들의 삶이 후대에겐 문화유산이 되기 때문이다. 농기구 전시관을 지나 마을 막바지에 다다르니 황토 흙을 발라 지은 흙집이 보인다. 지난 3월 한국인의 밥상을 촬영한 집이다. 100년이 넘은 이 집의 풍경은 소를 귀히 여기던 풍습대로 방문 앞에 외양간이 있다. 여물을 쑤던 가마솥도 그대로다. 먹을 것이 귀한 그 옛날 식구들의 유일한 몸보신이었던 염소 고기가 소개되었다고 한다. 천반산 정여립이 못다 이룬 대동의 꿈 길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눈앞에 알알이 여문 율무 밭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용담댐 상류의 넉넉한 품으로 키워낸 유기농 율무 밭이 5만 평이다. 찰진 바람과 맑은 햇살이 쏟아지는 고원 마을에서 볼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유기농 율무 밭이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산과 바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마을 길을 한 바퀴 돌아 가장 높은 지대에 오르니 천반산과 덕유산이 보인다. 조선 선조 때 정여립이 피신하여 자결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천반산은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율곡 문하에서 수학한 개혁파 정여립은 보수파에 몰려 낙향한 뒤 대동계를 조직하고 민중을 규합해서 장차 있을지도 모를 외침에 대비하고자 천반산에 들어가 군사훈련을 했다 한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정여립이 우매한 백성을 현혹하여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상소문이 빗발쳤다. 모함을 받은 정여립은 정공을 모시러 왔다는 진안 군수의 전갈을 받고 포박되었다. 그 후 1589년 임진왜란이 나기 3년 전에 한 많은 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밤으로 반딧불이 휘영휘영 포물선을 그리고 은하수가 빗살처럼 쏟아지는 상가막마을 돌담길을 더디게 걸어 나왔다. 마을 입구에 핀 빨간 봉선화 몇 잎 따서 손톱에 올려놓고 다시 모래재를 넘어 전주로 돌아왔다. 생의 무게를 덜어낸 하루였다. *유수경: 1992년 『현대시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갈꽃 스러지는 우리의 이별은』, 동화 『한나의 방울토마토』, 『못 찾겠다 꾀꼬리』, 『봉남이의 봄』, 『소낙비 내리던 날』 등.

  • 문학·출판
  • 기고
  • 2018.08.23 18:01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 12. 부안 ‘속살길’, 600년간의 ‘동행’ - 김형미

같이, 동행할까요? 동행이라는 그녀의 말 때문이었을 게다. 오래전부터, 아니 그녀와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우리가 벌써 같은 길을 가는 사람처럼 느껴진 것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그녀의 머리카락 길이만큼의 단정한 마음의 무게까지도. 길은 어디로든 나 있다. 집 없는 수행자의 삶처럼. 그리고 무한을 꿰뚫어보는 힘을 가진 고타마 붓다처럼. 그 길 어딘가에서 이즈음 언뜻언뜻 스쳐오는 자귀꽃 향기. 달빛인가 싶기도 하고, 달에서 나는 향 같기도, 어느 귀한 별을 타고 난 사람의 인기척 같기도 해서 자꾸만 들여다보게 만드는. 내 고향 부안이었다. 비 오지 않고 바람 불지 않는 조용한 날, 그 몸서리쳐지는 꽃향기 속을, 향기 가득한 길을 가만 열어보고 싶은 곳. 언제라도 많은 정겨운 것들이, 생이, 끔찍이 사랑하길 갈망했던 것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 아아, 금방이라도 몸이 포개지면 마음이 따라와 눕는 꽃가지 하나 생길 것만 같은, 부안! 부안군청 해설사로 있는 그녀와 함께 부안의 속살길을 더듬어보기로 한 것은 참 잘한 일이다. 어차피 떠나지 않는 길은 한낱 허상일 뿐이었으므로. 청림 지나 사자동으로 해서 내소사로 넘어가거나, 반계 유형원 사당 지나 굴바위를 끼고 병풍바위가 있는 내변산길로 돌아 나오거나, 혹은 하섬 지나 적벽강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를 타는 외변산길도 좋지만, 정작 부안 속의 부안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무엇인가 죽지 않는 것을 찾아 떠나기엔 우리는 몸속에 너무 많은 뼈를 지니고 있어서였는지도 모른다. 해서 이름 붙여진 것이 속살길이라 했다. 600년 동안 지켜온 부안의 속살을 드러내는 것이라니. 그러나 속살에서 풍겨지는 느낌처럼 전혀 속되지 않음이 서운하기보다는 몇백 년을 들어도 다 못 들을 부안의 정한이 느껴지는 길. 목가시인 신석정에서 조선시대 예인 이매창에 이르는 품격 있는 인문학의 거리. 수로를 만드는 사람은 물을 끌어들이고, 화살을 만드는 사람은 정성을 다해 살을 다듬는다고 했던가. 목수는 나무를 심고, 분노가 깊은 사람은 자신을 가지런히 한다고. 그리고 길을 걷는 사람은 스스로 길을 낸다고 말이다. 어쩌면 사람은 길을 만들고, 길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서림공원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는, 부안의 주산(主山)인 성황산. 이 산의 초입에 매창이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었던 금대(琴臺)가 있다. 매창의 서늘한 눈매가 이 산에 많은 서어나무 그늘만큼이나 선선하게 와닿는 듯한. 결이 고르지 않고 울룩불룩 근육질로 못생긴 것이 서어나무라고 했다. 한자말로는 서목이라고 해서 서쪽에 있는 나무를 뜻하는데, 서어나무가 서림공원에 유달리 많이 번성한 것도 다 그 뜻이 있을 법하다. 활쏘기를 하면서 재주를 겨루던 활터 심고정(審固亭)이 내려다보이는 이 금대에 적힌 시구들. 시인 묵객들이 시회를 열고 혜천(惠泉)의 물을 마시며 풍류를 즐긴 흔적이다. 부안에 머물렀던 현감들을 기리는 비들을 새겨보며 부안읍 성터길 따라 성황산을 한 바퀴 에돌아본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지만 일부 남아 있는 성황산 자락 토성으로 된 성터길. 그 길을 따라 도는 동안,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매창인지, 그 옛날 풍류객들인지, 혹은 곧 쏟아질 것만 같은 장맛비를 몰아오는 바람인지 힘 있게 술대를 내려치는 거문고 소리가 들린다. 거문고 괘를 짚듯 과거와 현재를 따악따악 짚어나가는 소리. 그리고 미래로 끌어올려질 소리. 한동안 줄곧 곧게 뻗어 있는 메타세쿼이아길까지 따라오는 그 거문고 소리를 내려놓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독성이 강해 양이 먹기를 머뭇거리거나, 먹고 나서 서성이다 죽는다 해서 척촉화(躑躅花)라 하는 철쭉. 그 철쭉이 메타세쿼이아 이쪽과 저쪽의 간격을 가득 메우고 있는 모양의 특이한 길 중간쯤, 장사꾼들이 넘나들던 상술재길이 있다. 그쯤해서 바로 밑의 향교를 비롯하여 부안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 걸터앉아 잠시 더위를 살폈던가. 작은 다람쥐가 턱 안에 고슬고슬한 알밤을 그득 물고 있는 것처럼, 작은 덩치 속에 무궁무진한 역사와 문화가 참 알차게도 쟁여져 있는 성황산. 변화와 변화를 거듭해온 600년 부안의 역사가 함께 땀을 닦아내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스스로 헛된 괴로움을 키우지 않기에, 평안으로부터 가까이 있게 된 부안. 최상의 고요에 도달해 있는 느낌이랄까. 때문에 다소곳하며, 쾌(快)도 불쾌(不快)도 존재하지 않으며 세속의 집착을 여읜 채 세상 속에 놓여 있을 수 있는. 그녀도, 나도,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서. 부안 사람들의 재력을 보여주는 돌 문화도 빼놓을 수 없이 근사한 속살을 지니고 있다. 부안읍성의 동문 안, 서문 안, 남문 안을 지키는 석당산들. 짐대라고도 하는 이 당산들 중, 동문 안 당산은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조선 숙종 15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현재 부안읍 서외리에 자리한 서문 안 당산. 이 오리짐대에는 정확히 숙종 15년에 건립되었다는 명문이 남아 있는데, 우리나라 오리짐대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역사 기록으로 그 가치성이 무척 뛰어나다. 네 마리 거북이가 오르내리는 모습이 양각된 남문 안 당산은 서문 안 당산과 달리 오리는 없지만, 행주형지세의 마을에 순항을 바라는 비보적인 짐대로 꼽힌다. 특히나 큰 거북이 한 마리가 받침돌로써 남문 안 당산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은 참 인상적이다. 세 당산과 더불어 서문 밖에 자리하고 있는 석당간도 있다. 안과태평과 풍농을 기원하는 수호신으로 짐대할머니라 부르는 서외리 석당간지주. 용이 기둥을 감고 오르는 모양과 거북이가 양각되어 독특한 장식성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눈이 열린 사람은 결코 자신의 완성을 위한 곳이 아니면 머무르지 않는다. 눈은 마음의 통로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자리를 옮겨 앉혔지만, 어쩌면 이 짐대들도 자신을 완성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놓여 있지 않았을까. 때문에 그 덕상(德相)을 보고 있으면, 우리의 두 눈은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올 수 있을 것만 같은 것이다. 결코 허망한 것을 향해 달려가지 않는 모습으로. 지금의 군청 청사 자리에 있었던 부안의 관아터도 눈여겨볼 만하다. 1810년 현감을 지냈던 박시수의 봉래동천(蓬萊洞天), 주림(珠林), 옥천(玉泉)이라는 글씨만 널따란 화강암 바위에 또렷이 남아 있는 관아터. 국내에서 가장 큰 초대형 초서체로 쓰인 암각서 봉래동천(蓬萊洞天)은, 신선이 살 만큼 경치가 아름답다는 뜻이라 하니, 결코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는 곳이기도 하다. 군청 아래쪽 가장 번화했던 본정통 거리에 거대한 붓 한 자루가 조형물로 세워져 의아했던 적이 있다. 옛 관아 터 자리에 있는 옥천의 우물을 붓으로 찍어 내려와 우리 사는 이야기와 찰나의 순간들을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을 수 있도록 기록하기 위함이라 했던가. 붓이란, 예나 지금이나 앉은 채로 기대어 눕지 않는 꿋꿋하고 강인함이 느껴지게 한다. 보다 현대적인 거리라 할 수 있는, 군청 앞 에너지 테마 거리로 이어지는 젊음의 거리 아래쪽에는 매산리고개가 있다. 매화가 땅에 떨어진 형상의 터 매화낙지혈.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 즉 일생을 추운 데서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지조 있고 고결한 꽃이 매화다. 많은 씨를 퍼뜨려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기도 하는 매화가 떨어지면, 향기가 사방에 퍼지기 때문에 자손의 발복이 크고 오래도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혈터. 그런 혈터가 한동안은 여인숙이 즐비하여 청소년들의 발길을 돌려세우기도 했다. 지금은 손으로 꼽히는 여인숙 몇 채가 그간의 속사정을 털어놓듯 한껏 낮은 지붕을 받치고 있는 매산리고개. 그러나 그 또한 가장 고귀했던 터에서 가장 낮은 자리가 된 터의 역할과 기능을 돌아볼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리라. 매산리고개를 넘어와 부안 상설시장에서 팥칼국수 한 그릇 먹는 맛은, 또 하나 부안의 속살 맛을 즐기는 일. 이유는 모르겠지만, 부안시장은 유난히 보리밥을 겸한 팥죽집이 즐비하다. 양이 많아 한 그릇으로 두세 명이 나눠 먹던 시절도 있었다. 시장 한복판에 쉼터처럼 놓여 있는 찻집에 들러 시원한 냉커피 한 잔 마시는 것도 맛을 아는 또 다른 묘미일 터. 그러다 보면 어느덧 긴 여름날의 해가 지고 밤이 된다. 선선한 밤공기를 쐬며 초대형 물고기 분수대에서 발하는 오색 조명이 아름다운 롱롱피쉬길을 경유해 첼시정원박람회 수상 경력이 있는 황지해 작가의 작품이 있는 너에게로길, 청춘싸롱이나 사께와 같은 이름의 각색의 술집들이 즐비한 청춘의 거리까지 거닐어볼 수 있는 부안의 야(夜)한 밤거리. 듬직한 재미를 느껴볼 수 있는 이 길들도, 길의 문화도, 언젠가는 역사가 되고 역사의 숨은 이야기가 되겠지. 그리고 또 그 훗날의 시대가 지금의 이야기들을 꺼내어 놓기도 하겠지. 무상한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장님 같아서 더욱 흥미진진한 거리들의 이야기. 그녀와 함께 꼬박 이틀 동안 600년간의 동행을 한 속살길 끝, 칠월 장맛비를 만났던가. 그동안 하고 싶었던 얘기를 다 쏟아내 버리기라도 했다는 듯 시원하고 우렁찬 비. 저 맹렬한 속도로 쏟아지는 장맛비처럼 매순간 우리는, 얼마나 생을 격렬하게 살고 싶었던가. 그 무엇에게든 또한 얼마나 흠뻑 젖어보고 싶었던가. 그 속에서 살고, 사랑하고, 발견하고 싶었던가. 그렇게 한참을 욱신거리고 나면, 막잠 자고 난 누에처럼 말갛게 눈 뜨는 부안. 전체가 거대한 정원도시가 되어가고 있는, 부안읍 거리 곳곳에 숨어 있는 이야기들이 막무가내로 빗소리에 지워졌다 다시 꺼내어지곤 하는. 각자의 시계를 가지고 부안이라는 큰 하나의 시계 안에서 거침없이 살아가고 있는 부안인들의 삶의 모습도. 전북의 숱한 길 중에서 그 부안의 길이 지금 우리 앞에 오롯이 속살을 드리우며 쏟아들고 있는 것이다. 자귀꽃 향기를 실은 여름 무더위 속에 제대로 한참 깊어 있는 맛깔을 내면서. 우리의 동행은, 여기서 다시 이어질 거예요. 어디로든 나 있는 것이 길이지만, 모든 길은 결국엔 하나로 귀결된다. 사람 목숨처럼 짧고 무상하며, 변하며 이지러지지 않는 곳으로. 그래, 마음이 머무는 그토록 안온한 곳으로. *김형미: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와 <진주신문> 가을문예공모, 2003년 『문학사상』 시 부문 신인상. 시집 『산 밖의 산으로 가는 길』, 『오동꽃 피기 전』, 그림에세이 『누에』 등. 불꽃문학상서울문학상목정청년예술상 수상, 2018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 문학·출판
  • 기고
  • 2018.08.16 21:54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앉으면 글, 서면 길 - 김병용

길을 찾는다는 것 자연이 인간에게 최초로 허락한 길은 지구의 생김새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산길과 물길의 가장자리를 따라 흐르는 좁고 울퉁불퉁하고 꼬불꼬불 가파른 옛길들은 자연과 인간 사이에 최초로 맺어진 역학 관계를 잘 보여준다. 이 관계를 때로는 거스르고 때로는 협상하며 인간은 길을 개척해왔다. 다리를 놓아 차안(此岸)과 피안(彼岸) 사이의 격절감을 무화시켰고, 굽은 길을 반듯하게 펴기 위해 앞을 가로막는 산 한가운데에 터널을 뚫었다. 물길의 흐름도 돌리고 운하를 굴착했는가 하면 난바다 한가운데 뱃길을 내더니 마침내 하늘길까지 열었다. 왜 이와 같이 사람들은 집을 나서 길을 열었을까? 우선, 한무제 때 서역로를 열었던 장건의 경우나 실크로드, 차마고도와 같은 교역로 혹은 마르코 폴로의 모험담이나 콜럼버스의 항해 등에서 볼 수 있듯 인간들은 전쟁과 동맹, 무역과 교류 등 직접적이고 실용적인 목적하에서 길을 나섰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을 찾아 천하를 주유했던 예수, 석가, 공자의 경우나 구도를 위해 구역(九譯)의 역경을 넘나들었던 현장, 혜초, 엔닌과 같은 구법승들처럼 추상적인 가치를 찾아 길을 떠난 이들도 인류사에는 수두룩하다. 또, 아문센이나 피어리, 텐징 노르가이나 라인홀트 메스너와 같은 극지 탐험가들은 인간의 질서 안에 들어와 있지 않던 야생의 땅에 기어이 발길을 들이밀었다. 이러고 보면 길을 나서고, 낯선 곳에서 난생처음 만나는 사건을 겪는 일이란 게 결국은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던져 남들을 위해 길을 닦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길을 찾는다는 말이 수단과 방법을 강구한다는 뜻 이상, 비밀의 탐구나 진리의 추구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이유가 또한 이로부터 말미암는다. 나 아닌 다른 이를 위해 몸을 던져 다리가 되고 길을 닦는 일, 보이지 않는 두려움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일이라니! 이런 면에서, 세상의 모든 길은 인간들이 흘린 피와 눈물과 땀의 결정이 빚은 소금길이라고 할 수 있으며, 각 시대별로 당대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한 자연지리, 인문, 경제, 국방, 정치 지리적 인식의 총합이 실제의 지표에 그려낸 거대한 지도라고 할 수 있다. 즉, 현재 우리가 이용하는 세상의 모든 길은 인간들의 호기심과 필요, 욕망이 뻗어 나와 다져진 길이다. 이 길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거기 누가 사는가? 나는 그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가? 이 길은 또 어느 길과 이어지는가? 길 들이다라는 말 문학이란 사람들의 삶이 그려내는 무늬를 말과 글로 붙들어두는 인간들의 행위, 사람이 남긴 모든 자취마다 문학은 깃든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로 알려져 있는 길가메시 서사시나 유럽 문학의 출발점으로 여겨지는 오디세이아가 길 위의 문학, 길을 찾기 위한 장쾌한 모험과 도전의 기록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길 찾기란 이처럼 현실적인 동시에 추상적인 인간의 행위로 우리들에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글과 길의 친연성의 출발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경우는 호주 원주민인 애버리지니의 송 라인(Song lines)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본 산과 호수, 나무와 바위에 대한 기억을 길고 긴 노래로 엮어 흥얼거리고 또 그걸 후손들에게 암송하게 하였다. 이 노래를 배우는 어린이들은 아마도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의 풍경에 대한 상상을, 자신의 입이 부르는 노래를 자신의 귀로 들으며 머릿속으로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키워나갔을 것이다. 부른다, 노래를 부른다, 길을 부른다, 풍경을 부른다, 기억을 부른다. 그 노랫가락만큼이나 길고 긴 가락 속에는 아직 당도하지 않은 미래도 담겨 있으리라! 이처럼, 그들의 노랫가락 안에는 공간이 담겨 있고, 풍경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으며, 그 길을 먼저 걸었을 선조들의 여정이 또한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풍경을 받아들이고 이해한 선인들의 감성을 이해하면서 자신들의 공간감과 공간에 대한 친연성을 자신들의 마음 깊은 곳에 받아들였다. 내가 어디 살고 있는가를 안다는 것은 곧 내가 누구인가를 자각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노래로 길게 이어진 길을 자신의 마음에 들이면서, 끊이지 않고 이어진 그 길을 걸어온 선조들과 나 사이의 연계선을 찾는 것. 송 라인은 노래로 엮여진 풍경에 관한 기억이기도 하며, 그 기억이 전승되어온 길에 관한 노래이기도 하다. 애버리지니의 송라인은 구술문학의 전통이 갖는 아름다움과 유장함 그리고 그 전승 과정에 존재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상상력의 전승에 대해 숙고하게 만든다. 왜 우리 선조들은 이 바위를 곰과 같다고 노래했을까, 저 강을 왜 은빛 강이라고 했을까, 라고 물으며 후손들의 상상력은 무한 증폭된다. 아마도 우리가 글이라고 하는 문학적 상상력의 출발은 이와 같이 길 위에서 또는 길을 상상하며 시작된 인간의 지적 행위였을 것이다. 동양 최초의 문학이론서라고 할 유협의 『문심조룡(文心雕龍)』에도 이와 흡사한 최초의 문명화된 인식이 드러난다. 하늘에도 무늬가 있고, 땅에도 꿈틀거리는 자취가 서려 있는데 어찌 인간의 마음에 무늬가 없겠는가! 글이 마음이 그려낸 무늬를 구체적으로 외화(外化)하는 것이라면,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최초의 자극은 어디서 어떻게 발생하는가? 우리말 길들이다라는 말은 묘한 말이다. 길들이다라는 말은 내가 무엇인가를 복종케 하고 나를 이해하게끔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 반대로 내가 나를 둘러싼 환경을 이해하고 환경과 나와의 관계에 대한 자기 수긍을 표현하는 말일 수도 있다. 내 마음 안에 이제껏 존재하는 세상의 모든 길을 들여놓는 것, 너에게 가는 길, 세상을 이해하는 길을 들이는 것. 한 사람의 마음에, 생애 깊은 곳에 길을 들여놓으려면 당연히 길을 만나야 한다. 즉, 길에 나서야 한다. 길에 나선다는 것은 길을 향해 나가는 것, 길 속으로 들어가는 것. 길은 목적이며 동시에 과정이라는 양면성을 지닌다. 그리고, 이 복잡한 길과 길 위의 풍경들이 길에 나선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와 파동을 일으키고 그 파동이 아로새겨진 인간의 마음이 결국 글을 쓴다. 서면 길, 앉으면 글 글이란 결국 길 위에 선 인간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책상 앞에 앉아 찬찬히 자신의 마음결을 살펴 더듬더듬 그려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선후나 공간적 차이 등은 있을 수 있지만 이런 면에서 길과 글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글이란 결국 문자로 그려내는, 또 다른 세계 인식의 지도. 길은 곧 글이 되고, 그렇게 그려진 몇 편의 글은 오래 사랑을 받으며 후학들의 길이 되어 계속해 뻗어나간다. 길을 걷는 것은 무엇보다 몸, 발바닥부터 손끝까지 사람들은 온몸의 움직임을 길의 흐름에 일치시킨다. 이렇게 온몸으로 길을 밀고 나가며 세계 인식의 밑그림을 획득한다. 이 경지를 나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단계라고 말하고 싶다. 길에서 돌아와 서탁에 앉아 글을 쓰는 일은 백지 위에 길을 그렸다 지우며 자신이 걸어온 길과 그때 가지 못한 길을 찾아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원고지에 쓰든 자판을 두들기든 혹은 머릿속에 그리든 쓰기(writing)의 과정이며, 연상(imaging)과 심리적 투사(projection)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차츰차츰 길 위에서 주운 말, 숲을 헤치며 체득하게 된 경난(經難)의 깨달음을 통해 자기 나름의 정명(正名), 맥락(脈絡)을 취득하게 된다. 말하자면, 스스로 문리(文理)를 열어 나가는 것이다. 문리란 곧 울창한 언어의 숲에 자신만의 작은 오솔길을 내는 일. 작가는 그 스스로 길잡이가 되어 숲을 헤치고 나가야만 길을 낼 수 있다. 초입에 들어서는 일부터 종점에 도착하기까지 그 험난한 여정의 순간들이 모여 마침내 길이 되는 것과 발단에서 결말에 이르는 스토리텔링의 과정은 놀라울 만큼 흡사하다. 이런 면에서 작가란 곧 여행자다. 앉으면 글, 서면 길로 살아가는 방랑자! 길 위에서 글을 구상하고, 글을 쓰면서는 걸어온 길을 바탕으로 새로운 길을 찾는 이들이 글쟁이인 터, 글쟁이는 곧 길라잡이기도 하다. 좋은 글은 작가의 긴 여행, 그의 몸과 마음이 걸어온 길을 통해 그려진다. 오늘 우리는 어느 길 위에 서 있는가, 어떤 글을 그려내고 있는가? 작가의 행로를 따라 함께 걷다 보면 필연, 우리는 어느 곳엔가 당도하게 마련이다. 그것은 풍경일 수도 있고, 사람의 마음일 수도 있으며, 사람들이 사는 마을일 수도 있다. 그렇게 글을 따라 길은 우리 마음 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길이 드는 것, 길이 나는 것이다. /김병용(소설가) * 1990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중편소설 당선. 장편소설 『그들의 총』, 소설집 『개는 어떻게 웃는가』, 여행기록서 『길 위의 풍경』, 연구서 『최명희 소설의 근원과 유역』 등을 냈으며, 『길은 길을 묻는다』, 『전북의 재발견-길』, 『아름다운 순례길』, 『이순신 백의종군로』 등의 책임 집필.

  • 문학·출판
  • 기고
  • 2018.08.03 15:25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그 여름 숲길 - 한지선

숲길을 걷는 것은 마약과 같다. 어느 순간 숲에 들지 않으면 목마른 것처럼 갈증이 난다. 섬세한 활엽수들로 꽉 찬 숲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난다. 여름엔 태풍이 있고, 폭우가 쏟아지면 드센 물살이 넘어지고 뒤집어지며 아래로 아래로 내달리는 풍경. 숲도 태풍을 겪으면 아프고 상처받은 후에야 다시 고요해진다. 고요한 숲엔 깊은 자정의 한숨 같은 체취가 배어 있다. 그것들이 머금은 그리고 내뿜는 공기 속에 푹 젖으면 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마치 파도치는 바다를 앞에 두고 앉아 있으면 속이 뻥 뚫리는 것처럼. ― 녹음이 짙은 숲속에서는 나무 숲속에서 뿜어내는 방향성 물질이 있는데 이 물질을 피톤치드라 하며, 나무가 자라는 과정에서 자신을 보호하려고 내뿜는 물질로 자체에 살균, 살충, 성분이 포함되어 있으며, 나무가 왕성하게 잘 자라는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많이 발산하며, 사람이 피톤치드를 호흡하면 피부와 마음이 맑아져 안정을 가져오며. 백과사전엔 그 공기에 대하여 그렇게 쓰여 있었다. 숲, 피톤치드. 나는 도시와 시골집을 오가며 살고 있다. 내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마당을 가꾸며, 일주일의 반을 지내는 시골집 작업실은 내장산이 눈앞에 버티고 있다. 그래서 일주일의 반 중 하루를 내장산 숲길을 걷는다. 유월 어느 오후, 씩씩하게 숲길을 걷고 있는데 누군가 내게 인사를 했다. 늘 꿈꾸기는 했다. 이 숲길에서 누군가 아는 사람을 만났으면, 하는 그런 생각. 그러나 걸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스치는 누구도 바라보지 않는다. 숲을 향유하기 위해서 숲의 소리와 냄새와 바람에 몸을 맡기고 그저 걷는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걷고 있는데 약간 먼 거리에 있던 나무 아래 벤치에서 누군가 선생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해서 깜짝 놀라 그 와중에 안경을 꺼내 쓰고 그에게 가까이 갔다. 가까이 가보니 아는 얼굴이었다. 바퀴가 초록색인 근사한 자전거를 손으로 잡고 서서 싱긋 웃고 있는 키가 훤칠한 꽃미남. 잘 아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친근한 사람에 속하는 젊은 성직자이며, 언니의 제자인 그를 숲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는 예쁜 초록색 베네통 자전거를 끌고 내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오후가 저무는 시각이었다. 나의 코스 나머지를 자전거를 끌며 같이 걷고 되돌아서 숲길을 걸어 내려왔다. 숲길을 걷는 내내 무언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어폰을 꽂고 있던 나는 이어폰을 내렸고, 끝없이 단풍나무로 이어진 내장산 숲길을 걸었다. 왠지 우리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는데 숲길 어딘가에 주차해 놓은 내 차 가까이 가서는 끊이지 않는 이야기로 어두워질 때까지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는 아직 대학원에 재학 중이었고, 방학이 되어 내 작업실 가까운 정읍시의 집으로 와 있던 참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숲으로 와 책을 읽다가 나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별로 말을 나눠본 사이는 아니었다. 식구들하고 언니와 만났을 때 언제부턴가 그 옆에 그가 있었고, 몇 번 인사를 나눈 게 다였다. 그런데 무척 친근했다. 그리고 무슨 이야기라도 할 수 있을 듯싶었다. 우리는 외로움과 그리움과 슬픔 같은 감정에 대해 얘기를 나눴고, 외로울 때 하는 행동에 대한 윤리적 잣대와 어쩌면 윤리와 상관없는 그들 감정에 대해 격론을 벌였다. 숨 쉬고 살아야 하는데 자꾸 숨을 참으라고 하는 것 같은 그 잣대라는 것의 잔인함에 대하여, 혹은 인간의 도덕이나 윤리적 지표에 의한 행동양식은 진정한 것인가, 혹은 그냥 원하는 대로 하면 나쁜 것인가, 등등 여기서 표현하기는 어려우나 그날 나눈 격론은 매우 현실적인 세태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 스스로도 다 겪고 있는,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삶의 굴레에 대한 얘기였다. 지나고 보니 그날 나눈 대화들은 불쑥 꺼낸 내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리를 변하게 하는 것, 그것은 오직 사랑뿐이다라고 나는 말했다. 코엘료의 책 <불륜> 뒤표지에 적혀 있는 말이었다. 그렇게 사랑이라는 것의 언저리를 형성하고 있는 많은 감정들과 거미줄같이 얽혀 있는 줄과 그 거미줄에 걸려 헐떡이거나 죽거나 숨죽이고 있는 것들에 대하여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훌쩍 지났고, 이윽고 어두워져서 그는 자전거를 타고 내려갔고 나는 내 차에 올랐다. 그리고 저녁에 아쉬운 이야기를 다시 나눠야 한다고 해서 저녁에 다시 만나 이야기를 계속했다. 결론은 없었다. 우리는 그냥 살아봐야 하고, 사는 것을 보면서 깨닫고 느끼고 고개를 저을 것이다. 우리는 빙수를 먹으면서 그렇게 서로에게 위로하듯 말했다. 아무튼 결론은 필요 없었다. 숲이 있었으므로. 어쨌든 살아봐야만 아는 것들이므로. 인간의 이야기들은 복잡하나 숲은 고요하다. 우리는 그런 격론은 아무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더워지기 전에 사랑의 다리가 있는 원적암 코스를 오르기로 했다. 숲이나 걷자고.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나는 더위를 심히 타는 사람이므로 입을 열면 안 되었고, 그저 묵묵히, 천천히 산을 올랐다. 여름에는 죽어도 산을 못 오르는 사람인데 중간쯤 가서야 그것이 생각났고, 그냥 내려가기에는 너무 늦어 있었다. 더워지기 시작하면 숲길도 걷기 힘들다. 그날이 그 여름의 숲길 걷기 마지막이었다. 장마가 시작되면서 폭우가 내린 후 거친 물살을 보기 위해 달려갔고, 장마가 끝나면 숲에 들기 어려울 만큼 더웠으므로 가지 못했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될 무렵, 그는 오후가 되면 나의 작업실로 와서 노을을 보러 다녔다. 우리는 오래된 북면천의 둑길을 걸으면서 날마다 노을을 마중하러 나갔다. 칠월부터 팔월의 반을 넘기면서 노을을 실컷 보러 다녔다고 할까. 때론 모항의 언덕 위에서, 적벽까지 노을을 보기 위해 차를 몰고 다녔다. 그해 여름이 그렇게 끝났다. 구월은 다시 숲이 소곤거리기 시작하는 계절이었다. 숲은 고요하지만 늘 속삭임이 있었다. 여름의 뜨거운 양광을 담뿍 받은 단풍나무들은 조용히 여러 가지 감정처럼 각기 다른 색들을 띠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감정이 미묘하듯 숲은 미묘하고, 숲길을 걷는 것은 뭔가 평화롭다. 내적인 평화가 무엇인지는 표현하기 어렵지만 고요한 아름다움이라고 느낀다. 숲이 그렇다. 학기가 시작되어 학교로 돌아갔던 그는 가을에 어쩌다 자전거를 갖고 숲길에 나타났다. 집에 올 때면 그도 늘 숲길을 걷거나 자전거를 탔으므로. 우리는 몇 번 더 같이 걷던 그 숲길에서 코엘료의 그 말에 대해 언급하였고, 그는 남녀 간의 사랑 말고, 더 큰 사랑에 대해 논하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사랑에 대하여 얘기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부딪쳤고, 격론을 벌이곤 했으나 결론은 없었다. 우리의 삶이 그렇듯. 그것이 결론이었다. 혹은 결론은 필요 없었다. 우리는 숲길을 걸었고, 그것으로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숲속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나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나 향긋한 나무 향기나 바람에 날리는 풀덤불처럼 우리의 이야기들은 스쳐 지나갔고, 또 언젠가 스쳐 올 것이었다. 숲을 스쳐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한지선(소설가) * 장편소설 『그녀는 강을 따라갔다』, 『여름비 지나간 후』, 소설집 『그때 깊은 밤에』, 『여섯 달의, 붉은』이 있다. 9인테마소설집 『두 번 결혼할 법』과 『마지막 식사』를 냈다. 제1회 전북소설문학상과 제2회 작가의눈작품상을 수상하였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7.27 14:45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꿈으로 가는 기차 - 장은영

나는 지금 플랫폼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기찻길 옆에 붉게 피어 있는 칸나가 내 마음처럼 화사하다. 오늘만큼은 잡다한 일상을 벗고 새로운 나를 찾아 떠난다. 오래 미뤄둔 숙제와 같았던 내 꿈을 키우기 위해 나는 기차를 탈 것이다. 어제 밤새도록 고민하며 쓴 원고를 떠올린다.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이 오늘은 얼마나 쓴소리를 쏟아낼지 걱정 반 기대 반이다. 기차가 곧 도착할 거라는 안내 방송이 들린다. 가슴이 뛴다. 빛나던 젊음이 하나둘 사라져가고 세월의 무게에 치인 내 마음에도 열정의 불꽃이 피어남을 느낀다. 멀리서 기찻길을 따라 기차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기적 소리가 들린다. 군데군데 섬처럼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홈으로 모여든다. 바람이 분다. 빠르게 달려오는 기차가 내 앞을 스쳐 지나자 내 몸이 바람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순간 잊고 있던 기억들이 바람 속에서 튀어나오는 것처럼 떠오른다. 단발머리를 하고 흰 칼라를 달던 여고 시절, 나는 기차를 타고 통학을 했다. 하루에 세 번 왕래하는 완행열차는 아직도 별빛이 총총거리는 새벽에 출발했다가, 땅거미가 어둑어둑 그림자 닻을 내리고 저녁 별이 총총 박히는 밤까지, 덜컹거리며 기찻길 위를 달리곤 했다. 시골 중학교에서 낯선 도시의 고등학교로 진학한 나는 정든 친구들을 떠나왔다는 것 때문에 늘 외로웠다. 두고 온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점차 말수도 적어졌다. 이런 나를 달래주는 유일한 친구가 이 기차였다. 정읍에서 익산까지 운행되고, 주 고객이 학생인 이 기차에는,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를 전통이 하나 있었다. 익산에는 남학교가 다섯 개, 여학교가 네 개였다. 기차를 타고 다니는 학생들이 많다 보니 각 학교별로 열차 객실 한 칸씩을 차지했다. 수가 적은 여학생들은 여학생 칸에 탔는데, 등교할 때는 맨 앞 칸, 하교할 때는 맨 뒤 칸으로 정해져 있었다. 남학생 객실은 각 칸마다 통학반장이라는 게 있어 규율도 엄했다. 입시철엔 돈을 걷어 후배에게 엿을 사주고 선배의 졸업식 인사치레도 했다. 그러나 여러 학교가 모여서 함께 가는 여학생 칸에서는 통학반장을 뽑을 수가 없었다. 이 기차를 놓치면 학교에 결석하고 하루를 쉬는 수밖에 없는데도 난 언제나 늑장을 부리다가 겨우겨우 기차에 오르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 늦게 집에서 나오는 바람에 맨 앞 칸인 여학생 칸에 미처 탈 수 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기차가 출발하기 직전이라 할 수 없이 아무 칸이나 올라탔는데 온통 새카만 남학생들의 교복과 상고머리가 보였다. 나는 눈을 어디다 둘 줄 몰라 얼굴만 빨개졌다. 가슴은 쉴 새 없이 콩닥콩닥 뛰었다. 1분 정도 정차하는 김제역이 어서 오기를 절박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드디어 기차가 김제역에 서자마자 뛰어내려 여학생 칸으로 달려 나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아이들 앞에서 얘기했지만 부끄러움 때문에 한동안 혼자서 끙끙거렸다. 사춘기 소녀 때여서 그런지 여학생 칸은 언제나 왁자하고 시끄러웠다. 빙 둘러앉아 듣는 각 학교 선생님들의 흉과 남학생에 대한 은밀한 이야기는 웃음소리와 함께 섞여 길게 이어지곤 했다.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는 날이면 흰 운동화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옷매무새를 고쳤다. 머리까지 빗어 내리면서 칼라를 고쳐 다느라고 부산을 떨었다. 겨울이면 나는 새벽 여섯 시 사십오 분에 출발하는 첫 기차를 타기 위해 발목까지 차오르는 눈길을 헤치고 동동걸음을 쳤다. 새벽에 감아서 미처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은 역까지 걸어오는 동안 빳빳하게 얼었다. 곱은 손을 불며 기차에 오르면 따뜻한 온기에 몸이 녹아 나른해지곤 했다. 흔들거리는 기차에 앉아 어두웠던 세상이 서서히 밝아오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시간이 손에 잡힐 듯했다. 가로수가 빼어난 들길을 배경으로 떠오르던 해돋이는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온통 하얗게 덮여 있던 겨울 산과 벌판, 그 부드러움과 고요함은 아직도 내 가슴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시린 발을 기차의 히터로 녹이던 내 십 대의 마지막 시간들이 완행열차의 기적 소리와 칙칙폭폭 기차 바퀴 소리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기차에서 내리면 도시는 온통 회색빛으로 내게 다가왔다. 을씨년스럽고 춥기만 했던 역 광장에 서면 낯선 건물들에 주눅이 들었다. 이방인 같은 내 모습에 혼자 외로웠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향할 때면 차창 밖으로 보이는 먼 산 위로 불그스름하게 노을이 물들었다. 주황빛 해가 지고 어둠이 밀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쉽게 정들 수 없는 도시와 기차에서 바라보는 풍경 그리고 그 속에서 숨 쉬는 내 모습을 떠올리며 노트를 샀다. 그리고 표지에 꿈으로 가는 기차라고 썼다. 그날 이후 내 마음에 고이는 수많은 생각들이 종이 위에서 살아났다. 기차가 멈추자 나는 서둘러 기차에 오른다. 서서히 기차가 출발한다. 가방 속에 들어있던 원고를 꺼내 들고 작품 속 인물이 되어 사건 속에 빠져 본다. 하지만 쉽게 풀리지가 않는다. 깊은 숨을 내쉬다 창밖을 보니 풍경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찬란한 햇빛 사이로 초록이 짙은 나뭇잎이 아름답다. 찌푸렸던 내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그래, 조급해하지 말자. 나는 지금 내 꿈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를 타고 있지 않은가.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언젠가 나는 멋지게 종착역에 도착할 것이다. /장은영(동화작가) * 200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장편동화 <마음을 배달하는 아이>.

  • 문학·출판
  • 기고
  • 2018.07.20 12:35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평온한 버스, 쿵쾅거렸던 날들 - 임주아

검표를 끝낸 직원이 고속버스 기사에게 안전운행 하십쇼! 하고 외치며 퇴장하는 짧은 순간, 나는 일인용 좌석에 앉아 얕게 심호흡을 한다. 언제 세 시간을 버티나 하는 막막함과 동시에 마음 편한 내 공간으로 간다는 안도감을 안고 스스로 조용한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버스가 서서히 출발하고 안내 음성이 깔리기 시작하면 얼룩진 창밖으로 대구 풍경을 훑어본다. 하지만 퇴근 시간 도로로 끝없이 밀려드는 저 긴 행렬들이 내 머릿속을 메우는 듯해 조금만 보다가 고개를 돌려 버린다. 될 수 있으면 빨리 고속도로로 진입해 마음이 차분해지기를 바라면서, 중간에 정차하는 서부정류장에서는 몇 명이 타던지 눈을 꾹 감고 있다. 2007년부터 2017년 지금까지 십 년 동안 대구와 전주를 오가며 살고 있다. 대구는 본가가 있는 곳이고, 전주는 대학을 갈 때 거쳐야 했던 도시지만 지금은 내가 살고 있는 곳이다. 기차를 타고 다니면 좋겠지만 환승 시간을 합하면 오히려 비효율적인 탓에 나는 늘 고속버스만 타고 다니고, 지금은 편해져서 기차가 오히려 불편하다. 졸업한 지 꽤 지난 지금은 명절과 제사 때만 가까스로 본가로 내려가는데, 막 입학했을 땐 한 주를 빼먹으면 무슨 일이라도 날 것처럼 급히 대구로 출동하곤 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친한 동기들도 금요일만 되면 집으로 내려가 버려서 놀 사람이 없다는 게 심각한 이유 중 하나였다. 금요일 수업이 없었던 나는 망설일 필요 없이 목요일 수업이 끝나자마자 기숙사 짐을 싸들고 나와 시내버스를 타고 금암동 고속터미널로 쫓아갔다. 그렇게 하도 자주 타니 이젠 검표원과 기사 얼굴도 외우고, 거창휴게소와 함양휴게소 두 곳은 정말 익숙한 곳이 되었다. 다시 출발하는 고속버스 안에서는 온갖 풍경을 다 보았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자주 했다.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지난주까지 멀쩡했던 저 산이 왜 무너졌지? 어라, 골프장을 짓고 있네? 오늘은 왜 나 혼자 버스에 있지? 저 기사분은 도대체 언제 쉬어? 하는 그 다른 느낌 속에서 나는 살았다. 죽음의 88고속도로 위를 달리며 평일이든 주말이든 명절이든. 그런 고속버스 안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간은 장수군으로 들어가는 터널 속이었다. 그 터널만 지나면 높은 산이 끝없이 나왔고, 작은 마을들이 모여 지붕으로 띠를 잇고 있었다. 오랫동안 그 길을 오갔지만 표지판을 눈여겨보지 않은 탓에 그곳이 장수라는 사실을 학과 문학기행 때 동기들의 말을 듣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때 친구들은 남원, 김제, 오수, 부안, 고창 등 다양한 지역에서 나고 자랐는데 나는 친구들이 사는 지명이나 동네 이름을 듣는 것이 신기했다. 특히 오수면에서 대규모로 닭을 키우는 행근이는 월요일만 되면 닭이 몇 마리 알을 낳았네, 걔들이 얼마나 컸네, 하며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친구들이 내게 대놓고 야! 대구 사투리 좀 써 봐. 하면 나는 니가 뭔데 써라 마라 시키고 있느냐며 버럭버럭 화를 냈지만, 내가 잘 모르는 말씨를 들을 때면 그 뜻과 리듬을 정확하게 알고 싶어서 대놓고 머여, 어찌라고! 하며 따라하며 놀곤 했다. 그런 일화들을 모아 재밌지 않느냐고 대구 집에 가서 한바탕 풀어놓으면 가족들은 너무 물들지 말라는 듯한 우려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런 눈빛과 말들이 싫어서 대구에 가면 집에는 잘 안 들르고 동성로나 수성못으로 직행했다. 어느 날 밤늦게 귀가하다 오빠를 마주치면 넌 그냥 집 옆 산업대에 들어갔어야 했다는 말과 덤으로 핵꿀밤을 쥐어 박히곤 했다. 그때 나는 다시 한번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대구에서 학교를 다니면 아무것도 소중해지지 않을 테니까. 어찌 되었든 일요일 막차 시간 전까지 대구에서 꾹꾹 밟아 놀고 나서야 내 육신은 다시 버스 좌석에 앉을 수 있었고, 자동 세 시간이 지나면 멀쩡히 전주에 도착해 머쓱한 기분으로 짧은 터널 같은 버스를 빠져나오도록 설정돼 있었다. 좋아서 하는 일은 지치는 것도 좋았다. 그나저나 고속버스에서 내리면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학교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 관문이 내겐 큰 난관이었다. 밤늦게 전주고속터미널에 도착하면 굴러가는 비닐봉지조차 두려운 이방인의 얼굴이 되어서 전북일보 건물 앞에서 꼭 380번대 버스를 타야 한다는 동기들의 깨알 같은 조언을 잊은 채 교도소나 장례식장 앞에 내려 사색이 되곤 했으니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시내버스 안에서는 갑자기 서럽고 우울해진 마음을 붙잡고 슬픈 노래를 마구 듣고 있었는데, 그런 나를 태평히 바라보는 가게 간판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다. 볼 때마다 정신적 피해를 따지고 싶었던 그곳, 동산동 우체국 못 가서 보이는 거시기상회였다. 컬쳐쇼크, 그냥 그런 말로밖에 설명이 안 되는 기분이었다. 경상도에서 거시기란 말은 특정 무엇을 칭하는 데만 쓰는 터라, 그 간판을 볼 때마다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 길을 지날 때면 미안한 마음만 든다. 이제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일주일의 반은 삼례에, 반은 대구에서 보내며 아쉬울 것 없는 이중생활을 하던 1학년 1학기. 그로부터 십 년이 흘렀다. 나는 멀리 있는 내 학교가 좋았고, 나 같은 애도 시 같은 걸 쓸 수 있어 기뻤다. 대학인데 대학로랄 게 하나도 없고 비 오기 전날 똥 냄새가 많이 난다는 것이 정말 힘들었지만. 난생처음 높은 철길을 지나는 기차를 보고, 가만히 소리를 듣고, 미친 듯이 붉은 노을에 입을 다물 수 없었던 비비정 풍경들, 친구들이 전주 놀러오면 자랑하며 데려갔던 전동성당, 경기전, 그리고 갈대가 아름다운 천변 길들, 남원 김제 오수 삼인방 친구들이 들려주는 듣도 보도 못한 극한 농사 체험들이 나는 즐거웠다. 고속버스 안에서, 수많은 터널을 지나서, 익숙하고도 낯선 길들 위에서 느낀 평온한 시간들이 안겨준 선물들을 나는 이렇게 글로 풀어놓고 있다. 대구에 가면 언제든 받아주던 친구들도, 삼례에 가면 뭐든 도와주려 했던 동기들도 이제 어떤 길에서든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힘이 된다. 그렇게 한 주를 보내야 마음 한구석 충만한 기분이 들던, 다시 학교로 돌아와 동기들과 낄낄거리며 돌아다닐 수 있던 시간들. 그 이후로도 가장 아름다운 날들을 전라북도에서 보냈다는 것이 묵직한 자산이다. 며칠 전, 내가 사는 동네 하늘 위에 북두칠성이 쏟아질 듯 떠 있었다. 얼마 뒤면 달도 크게 뜨는 추석이 다가온다. 이젠 자주 소식 듣고 싶은 식구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도 하고, 대구 친구들도 만나 한바탕 수다 떨고,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평온한 마음으로 휴게소에 들러 숨을 트고 싶다. 그 전에 고창, 부안 여자 동기들과 내가 사는 인후동에서 하룻밤 자기로 했는데, 무슨 썰들을 들려줄지 기대된다. 떠나야만 돌아올 수 있고 다시 디뎌야 나아갈 수 있는 길, 조금 평온하게 조금 쿵쾅거리며 나는 살아가고 있다. 쿵쾅 하나 더. 88고속도로명이 광주-대구 고속도로에서 달빛고속도로로 바뀐다고 한다. 달구벌과 빛고을에서 한 글자씩 따서 만든 그 이름, 정말 마음에 든다. /임주아(시인) * 2015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 문화
  • 기고
  • 2018.07.13 13:50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이잉1길 - 이영종

이잉1길은 먼 나라에 있는 길이다. 떠들썩하게 글지 이잉이라 말하며 매운탕 시래기를 밥에 척척 걸쳐먹던 아재와 아짐들이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잉잉 하고 울던 뒷집 아이도 오래전 서울로 가더니 소식 한 점 없어서고, 손바닥만 한 잉어를 알려줄 투박하고 커다란 손바닥들이 늙은 탓이다. 실제 먼 나라에서는 잉원이 총통이 되었다는 소식이 가물가물 들려오기도 한다. 소리를 만드는 작은 돌을 들추면 가재가 뒷걸음치듯 이잉1길은 숨어 있다. 누구나 아는 길이기에 아무도 모르는 이 길은 정읍 내장사 매표소 옆 단풍나무 그늘에서 시작해서 정혜루 마룻바닥에서 끝난다. 단풍나무 씨앗을 가지고 더 이상 놀이를 하지 않아 씨앗이 차창까지 내려와 놀아 달라고 보챈다. 한 녀석을 집어 들고 가는 길을 물으면 길은 시작된다. 물 너머를 그리워하던 길이 만들어낸 다리를 건넌다. 다리를 만들고 건너느라 애쓴 것은 길인데 왼쪽에 펼쳐 놓은 갈대의 춤은 내 것이라 해도 죄로 갈 일 아니다. 난 노래를 흥얼거린다. 세노야, 세노야, 기쁜 일이면 저 산에 주고 슬픈 일이면 님에게 주네. 슬픈 일을 님에게 준다는 고은 시인에게 할 말이 가득하던 날도 있었지만, 이제 슬픔이 슬픔에게 어깨를 빌려주는 것도 좀 알게 되었다. 비 오는 날 애인에게 우산을 받쳐주지 말고 같이 비를 맞으라는 말도 들을 줄 안다. 이 길은 끝까지 물과 함께한다. 물은 내려오고 나는 올라가니 우린 계속 얼굴을 부딪친다. 봄과 여름 얼굴은 시원하고, 가을과 겨울 얼굴은 춥다. 시원해서 좋고 추워서 좋다. 잡고 있던 님의 손이 점점 뜨거워지는 게 시원함의 매력이다. 나무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물을 버리기 때문에 물이 이별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 물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고 싶어지니 추워서 좋다. 로마에 갔더니 로마 그늘 전문가가 있었다. 무더운 콜로세움 앞에 우릴 세워두고 가이드는 그늘처럼 말했다. 로마의 그늘은 모조리 자기 수하에 있으니 걱정 말고 보고 즐기는 일에 몰두하라고. 이잉1길! 정읍의 그늘 전문가가 추천하는 길이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늘이다. 무릇 존재가 있어야 생기는 존재, 그늘은 그곳에 늘 살아 있다. 물론 그날만은 당신 그늘 지워져도 좋으리라. 더욱이 해가 갈수록 그늘이 스스로 학습하는 능력을 얻어 나날이 발달하고 있으니 얼굴 타기를 원하지 않는 이쁜 사람들은 시방 가도 좋고 나중에 가도 좋다. 경사(慶事)에 경사(傾斜)를 내지 마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걷기 편한 길은 깔꾸막이 없다. 나아가고 올라가는 일이 전부인 날도 있었다. 돌아가고 내려가는 길은 평탄한 게 좋다. 오르는 일에 불편해진 관절을 치유하고 싶다면 이 길로 오라. 어린 전나무를 여섯 그루의 듬직한 어른들이 둘러싸고 있는 곳을 놓치면 안 된다. 그런 풍경을 연출해낸 사람은 아기단풍과 같은 심성을 지녔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혼밥과 혼술이 대세지만 옛날 집엔 식구들이 무던히도 많았다. 그 앞에 가만히 서서 흘러간 식구들을 뒤돌아보면 아련히 아름다울 것이다. 물가에 핀 흰 찔레꽃 향기를 맡으려면 코 평수를 넓히는 수고를 아끼지 마시라. 아파트 평수를 넓히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 코 평수를 넓히긴 쉽지 않겠지만, 우리 미학을 완성하는 재료는 냄새이니 후각 학원이라도 다니면서 인간의 근원적 냄새를 맡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강사가 바로 물가에 핀 흰 찔레꽃이다. 어린 굴거리 잎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때까지 뒤를 보살펴준다는 지난해의 굴거리 잎을 만나거든 짧게 세 번 박수라도 쳐주어라. 꽃과 잎이 서로 볼 수 없는 내장상사화(백양화)와 누가 더 생존에 유리할지를 놓고 실제적 지능을 겨루면 용호상박일 것이다. 다람쥐는 보고, 새들은 들어라. 다람쥐가 그대를 보러 올 것이기 때문에 일부러 보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사이좋게 아래와 위를 나누어 사는 소리가 어떻게 다른지 귀 기울여 보라. 아래에선 오목눈이, 노랑할미새, 숲새가 위에선 오색딱다구리, 소쩍새, 올빼미가 보이지 않는 경계를 잘 지키며 살아간다. 너럭바위 위에서 오카리나를 부르던 처녀를 부르며 자신을 늘 비출 줄 아는 우화정에 이르면 그대도 깃털로 화해 서래봉을 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에겐 발이 더 귀하니 넘어가지 말고 갈매나무가 있는 숲길로 들어서라. 샘물이 솟는다 퐁퐁퐁 낮이나 밤이나 퐁퐁퐁 길가는 나그네들 목 축여 가라고 산비탈 돌 틈에서 퐁퐁퐁 이 노래가 생각나는 샘을 만나거든 애인과 고무줄놀이를 해도 좋을 것이다. 돌다리 앞을 지키는 연리지에게 사진 찍자고 말해보라. 그렇지 않으면 수줍음을 잘 타는 연리지는 고개를 나무둥치에 묻어버릴지도 모른다. 이 나무와 저 나무가 합쳐져 하나가 되듯 우리도 하나 되지 못할 리 없다고 생각하며 연리지의 볼에 얼굴을 대고(커다란 까치발이 필요하겠지만) 한 방 찰칵하시라. 정혜루 마루에 올라서기 전에 샘물 마시는 걸 잊지 마라. 거기 기와의 下心을 놓치지 마라. 그 글씨를 쓴 이후로 물의 숫자가 108에서 100으로 줄었다는 이야기를 어느 스님이 하거든 그냥 웃어버려라. 정혜루에서 차와 고구마 보시를 받았다면 당신은 길의 끝자락을 본 셈이다. 이잉1길은 만리장성을 걷다 붙여준 애인의 별칭이었다. 하도 글지 이잉 하길래 아예 이잉이라는 별난 맛을 지닌 이름으로 불러 주기로 했다. 지금도 그녀의 이름은 이잉이고 이잉4길까지 이름 지은 길들이 우릴 부르고 있다. 애인과 길을 걸어라. 마음에 드는 길을 만나면 애인의 이름을 따 둘만의 길을 만들어라. 이름 붙여준 길은 둘에게 와 김춘수의 꽃이 될 것이다. /이영종(시인)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2012 박재삼문학제 신인문학상 백일장 대상.

  • 문화
  • 기고
  • 2018.07.06 15:38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건지산, 애기나리 꽃길 - 유강희

요즘 딴은 내 마음에 꽂혀서 자주 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은 집 근처 건지산에 있다. 대개 나는 호성동에서 대지 마을을 지나 편백나무 숲을 통과하는 길을 걷곤 한다. 그런데 올봄부터는 곧바로 대지 마을 입구에서 오른쪽 산비탈 길을 낚아채듯 뛰어오른다. 한 마리 야생 어린 고라니가 되는 순간이다. 그 오솔길엔 아름드리 참나무가 있고 밤나무가 있고 진달래와 등골나물 그리고 덜꿩나무도 있다. 나는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그 길을 좋아한다. 약간의 비탈을 조금 오르면 단단한 수피를 자랑하는 참나무가 길가에 서 있다. 이 나무는 언제나 푸른 하늘을 떠받드는 결의에 차 있다. 내가 몇 번이나 몰래 껴안아본 나무다. 그 참나무를 지나 두 갈래 길에서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잘 가꾸어진 무덤들이 보인다. 이 무덤들 사이로 난 길에서 가끔 청설모가 먹다 떨어뜨린 풋 잣송이에 놀랄 때가 있다. 청설모는 떨어진 잣송이를 줍기 위해 다다다다 내려온다. 내가 옆에서 지켜보는 줄도 모르고 다시 그걸 천진스럽게 끌안고 나무에 오른다. 나는 또 진달래꽃이 한창 피어나던 4월 어느 날, 이 길에서 무덤 상석에 앉아 하모니카로 동요를 부는 어떤 노인을 만났다. 동요는 윤극영이 짓고 곡을 붙인 반달이었다. 저녁 무렵에 듣는 그 곡은 처연하고 아름다웠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 할아버지에게 묻지 못했다. 이즘엔 그 상석에 꽃 한 다발과 막걸리 한 병이 놓여 있는 걸 보았다. 푸르스름한 막걸리 병은 뚜껑이 닫힌 채였다. 반이 좀 못 남아 있었다. 그 길에 요즘 싸리 꽃이 피어 있다. 싸리 꽃 향에서 보랏빛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는 지금 오른손에 나무 지팡이 하나 들고 걷고 있다. 사실 나에겐 몇 개의 지팡이가 있다. 이 지팡이는 그중 하나다. 산책길에 하나씩 모은 게 벌써 대여섯 개는 된다. 나에겐 지팡이를 보관하는 수장고도 따로 있다. 바로 산 입구에 있는 조팝나무 수장고다. 여느 박물관 수장고가 부럽지 않다. 옆에 아카시아 나무도 있어 안성맞춤이다. 여간해선 비에 젖지도 않는다. 나만 아는 이곳에 지팡이를 꽂아놓는다.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가는 게 나는 즐겁다. 오래 사귄 동무 같은 느낌이다. 아직 지팡이가 필요한 나이는 아니지만, 내가 지팡이를 들고 산에 오르는 건 안데르센이 가방 속에 늘 밧줄을 넣어가지고 다닌 것과 어떤 면에선 비슷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가끔 해본다. 나는 관목 덤불 사이 길을 오르락내리락 걷는다. 이내 나의 목적지에 이른다. 산의 규모에 비해서 이곳은 가파른 편이다.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비탈길 위에 나의 산방(山房)이 있다. 지상으로 구불퉁 뻗어 나온 소나무 뿌리를 테두리 삼아 그 안에 손바닥만 한 돌을 끼워 놓은 것이다. 그 위에 앉으면 금방이라도 앞으로 고꾸라질 듯 위태위태하다. 나는 하필 호젓함과는 거리가 먼 그곳을 나의 산방으로 정했는지 나 스스로 의아스러울 때가 많다. 하지만 불편하기 짝이 없는 그곳이 나는 좋다. 집에서 한 시간 안에 올 수 있는 데다 오가는 사람들이 뜸해서 혼자 있기에 방해받지 않아서 좋다. 나는 그곳에 엉거주춤 앉아 책을 보거나 짧은 글을 쓴다. 주위엔 소나무, 잣나무, 참나무가 많다. 그래서 청설모와 어치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5월 초에는 운 좋게 꾀꼬리를 보기도 했다. 더구나 그 비탈 아래엔 애기나리 꽃밭이 있다. 이 애기나리 꽃밭을 처음 발견한 것은 4월 말이다. 우연히 이 길을 지나다 아주 작은 연녹색의 꽃이 내 눈에 번쩍 띈 것이다. 자세히 눈여겨보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칠 뻔한 꽃이었다. 나는 이 앙증맞은 꽃에 금방 매료되었다. 이 야생 꽃밭은 이십여 평 정도 될까. 하지만 내 눈에 이십만 평 정도 되어 보인다. 나는 이곳에 오면 제일 먼저 이 애기나리 꽃밭에 가서 인사를 한다. 새침한 듯 보이는 주름진 잘록한 잎에 마음이 간다. 마음이 가니 몸이 가서 한참을 들여다본다. 이미 꽃은 졌지만 순순한 기운에 절로 마음도 평온해진다. 나는 본격(?)적인 작업에 들기에 앞서 무슨 신성한 의식처럼 애기나리 꽃밭 옆 참나무에게 가서 고독한 곰처럼 등을 쳐댄다. 처음엔 그 횟수를 셌으나 이젠 개의치 않고 등을 쳐댄다. 전신에 퍼지는 찌르르한 쾌감 속에서 나는 참나무와의 일체를 꿈꾼다. 하기사 참나무가 나 같은 인간을 거들떠나 볼 것인가. 그래도 등을 빨래처럼 쳐대고 나면 뭔가 시원하게 정화되는 느낌이다. 그러고 나서 나는 예의 그 자리에 앉는다. 특히 저녁 무렵엔 이 길을 지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 사람도 보이지 않을 때도 많다. 사람들은 이 길 말고 정상의 능선을 더 좋아한다. 그곳엔 산불 감시초소가 오두막처럼 단출하게 서 있다. 간혹 혼자 산책하는 아주머니가 비탈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지레 겁을 먹고 옆길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조금은 쓸쓸한 풍경이다. 나는 돌 위에 엉덩이를 바짝 비집고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고 꿈꾸는 게 좋다. 책을 읽고 욕심 없이 끄적거리는 게 좋다. 그 돌 의자에 앉으면 익히 내가 보아온 사물도 전혀 다른 새로운 존재가 된다. 그 공간은 내게 사물을 보는 새로운 각도를 제공해 주는 장소로서 의미를 갖는다. 사선의 난간에서 바라보는 나무와 돌과 하늘은 비트겐슈타인의 코 위에 걸린 안경을 벗어던지는 것만큼이나 내겐 하나하나 새로 눈뜨는 존재다. 그러니 이곳은 나만이 아는 근사한 산방이고 도서관이고 작업실이다. 얼마 전, 이 길에 내 나름의 이름을 붙였다. 내겐 오래전부터 주거지를 옮기면 제일 먼저 그 동네 산책길부터 찾아보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그 길에 나의 마음을 담은 이름을 붙인다. 서울에 살 때도 시골 밤골에 살 때도 나는 산책길을 정해 이름을 붙였다. 이번에 나는 이 길을 천추(天樞)의 길이라고 이름 지었다. 내가 이름 붙인 길 중 네 번째이다. 장자에 나오는 천균(天鈞)과 도추(道樞)에서 한 자씩 따온 이름이다. 막상 이렇게 짓고 보니 너무 거창하고 한편 그럴싸하기도 하다. 이곳이 바로 중심의 고요가 아니겠나 싶다. 오랜 숙제를 끝낸 것만 같아 가뿟한 마음까지 든다. 그러니 애기나리 꽃길은 나의 별칭인 셈이다. 오늘은 좀 더 오래 이곳에 머물다 가고 싶지만 모기는 극성이고 언제나 어둠은 내 생각을 앞질러 도착한다. 비둘기는 아직도 구구구 울고 어디선가 싸리 꽃 희미한 향이 가느다란 길에 향불처럼 번지고 있다. /유강희(시인) * 198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불태운 시집>, <오리막>, 동시집 <오리 발에 불났다>, <지렁이 일기 예보>, <뒤로 가는 개미> 등.

  • 문화
  • 기고
  • 2018.06.29 15:48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선유도를 바라보며 - 오유정

우리는 모래사장을 천천히 걸었다. 군산 앞바다에서 로프를 타는 사람들이 아름답게 지나갔다. 즐거워 보였다. 바위에 아낙네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고 저 멀리에서는 한 아낙이 굴을 캐고 있다. 사람들이 새겨놓고 간 이야기들이 모래들과 섞여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쓰다듬었다. 그들의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살아나는 것 같았다. 나는 오랫동안 그들과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들었다. 좀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을 것 같은 섬 주변을 바라보며 아낙의 바구니가 문득문득 궁금했다. 아낙이 살짝 자세를 틀어 한동안 한곳에 집중했다. 더 이상 바라보다 보면 그녀 앞으로 다가가 살며시 앉아 담소가 시작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고개를 돌려 교각에 눈길이 멈추었다. 따개비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밀물일 때 바닷물이 차는 곳까지 파랗게 이끼가 끼어 있었다. 따개비 사이에는 간간이 굴의 빈집이 보였다. 빈집은 언제나 쓸쓸했다. 나는 다시 굴의 빈집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바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바다는 언제나 넉넉한 가슴을 열고 우리들의 아픔과 기쁨과 두려움을 품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의 가슴이 어디에 있는지 두리번거리며 집을 버리고 떠나버린 굴을 잠시 생각하다가, 로프를 타는 사람들의 즐거운 환호 소리를 들으며 다시 모래사장을 걸었다. 고운 모래사장 끝자락에 미나리와 방풍나물이 자라고 있었다. 나는 작은 그것들을 보면서 육지에서 볼 수 없었던 생동감을 느꼈다. 고운 모래 위에 앉아 그들과 함께 오랫동안 바다를 바라보았다. 선유도 해수욕장 백사장에 파라솔 대신 원두막이 군데군데 지어져 있었다. 잠시 한여름의 노란 참외와 빨간 수박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 원두막에는 봄의 기운만 맴돌고 있었다. 선유도에는 선유도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8경이 있다. 선유도 8경은 선유낙조, 명사십리, 망주폭포, 평사낙안, 삼도귀범, 장자어화, 월영단풍, 무산십이봉을 말한다. 수평선을 넘어가는 붉은 태양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선유낙조. 유리알처럼 고운 모래가 펼쳐진 명사십리. 여름철에 큰비가 내리면 여러 개의 물줄기가 폭포처럼 쏟아져 장관을 이룬다고 하는 망주폭포. 기러기의 형상과 같다는 평사낙안. 돛배가 만선이 되어 돌아오는 모습과 같아 붙여진 이름 삼도귀범. 조기잡이 배가 장관을 이루었던 장자어화. 월영봉의 단풍이 아름답다 하여 붙여진 이름 월영단풍. 12개 섬의 산봉우리가 투구를 쓴 병사들 모습으로 보여 붙여진 이름, 무산십이봉. 선유도 8경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나의 눈은 8경의 전설에 대하여 깊이 빠진 듯 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선유도는 신선이 거닐며 놀던 곳이라 선유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전북 군산의 앞바다에 무리지어 떠 있는 고군산도의 섬은 모두 예순셋이나 되지만, 그중에서 가장 압도적인 명성을 누리는 곳은 선유도라고 한다. 모래사장에 찍힌 내 발자국은 신선이 남기고 간 발자국과 닮아 있을까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비춰보며 일행과 함께 차에 올랐다. 선유도가 그곳을 떠나는 나에게 서운함을 표현하는 듯 때아닌 소나기가 한바탕 내렸다. 창밖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유정(시인) * 2004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등단. 시집 『푸른집에 머물다』, 에세이집 『소리를 삼킨 그림자처럼』 등. 2003년 혜산 박두진 문학작품상 수상.

  • 문화
  • 기고
  • 2018.06.22 14:02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