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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동신 작품 '누드' (1983) 예술이란 무엇인가? 하루 종일 이 질문에 기다려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질문이 잘못된 것일까? 그건 아닌데, 지금은 답이 없는 시대인 모양이다. 이런 답답한 시대를 살다보니 모든 게 헷갈린다. 얼마 전 광주 출신 수채화가 배동신에 대한 글을 썼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가 열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수채화가였지만 위대한 화가였다. 그가 그린 무등산이나 여체 그리고 과일 그림들은 조형의 본질을 열정적으로 추구한 예술 작품들이었다. 생전에 그의 작품들에 대한 평가가 높게 언급되었지만, 그는 잘 팔리는 인기 작가는 아니었다. 오로지 그림 밖에 모르고, 그림을 통해서 자신이 제일 관심이 있는 조형의 비밀을 표현했지만, 생전에 그의 진면목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조형의 비밀 속에는 곧 존재의 비밀, 너와 내가 세상을 사는 이유 같은 게 옹골지게 들어있지만,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다. 시대를 앞서 갈수록 그것을 알아보는 지인을 만나기 어렵다. 적당히 포장해서 예술적으로 사람들을 속이는 경우는 많지만 진정한 예술성을 들이대고 그것으로 승부를 거는 작가는 매우 드물다. 관객의 눈 역시 진짜를 알아보는 경우는 드물다. 예술품을 투자 대상으로 보는 심리 역시 진정한 예술계와는 먼 풍경이다. 예술 역시 예술을 아는 사람들 경계를 넘어 일반화하기 어려운 동네이다.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코로나로, 삶의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로 고민스러운 사람들에게 예술은 무엇으로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을까? 사실 삶의 고뇌에 빠진 사람들에게 예술은 그 무엇도 말을 건네기 어렵다. 그러나 삶도 하나의 그림자일진대, 예술 이외에 그 무엇이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다는 말인가? 지극한 고통 앞에서도 예술을 즐길 수 있다면 그 인생은 성공한 삶이다. 그리고 그 만한 역량을 가진 위인은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튼튼한 바탕을 형성한 것이 틀림없다. 인간은 한없이 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 연약한 틈 사이로 마음으로 느끼는 진정한 가치에 눈을 뜬 자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강한, 가치를 아는 개체가 된다. 진정한 시민은 민주적 평등성 너머로 삶의 개체적 진실에 눈을 뜬 사람이다. 그것을 덮고 단순이 평등성만을 주장하다면 저열한 바닥으로 추락한다.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기도 하다. <끝>
2020년 12월 현재 서학동사진관에서 열리고 있는 AX 그룹의 코로나-사막-AX 전시 장면 코로나 때문에 카페에 가도 앉지도 못하고 테이크아웃만 되며, 코로나 때문에 경기는 침체되어 거리를 걷노라면 곳곳에 임대, 매매 현수막이 걸려 있다. 코로나 때문에 예술계도 활기를 잃어 거래도 없고 전시도 없다. 예술회관 전시실도 들어가는 절차가 복잡할뿐더러 전시 공간도 텅 비어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 될수록 삶은 황폐한 환경에 직면한다. 사막 같은 환경에서 AX 그룹은 코로나-사막-AX 전을 개최했다. AX는 그 취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황폐해진 삶, 인내하며 버틸 수밖에 없는 생활환경, 언제나 마스크를 쓰고 보이지 않는 세균에 대하여 방어적 자세를 지키며 지내야 하는 그 간의 상황은 모든 사람들을 지치게 한다. 그러나 인간은 살지 않으면 안 되고, 아무리 힘들어도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된다./ 지난 6월 창립전을 가졌던 AX 그룹이 연말에 임하여 두 번째 전시를 갖게 되었다.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결과 이번 전시의 주제는 코로나-사막-AX로 정했다. 코로나가 몰고 온 황폐한 상황을 사막으로 규정하고, 우리가 직면한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든 극복하자는 의지를 담았다. 삶도, 예술적 환경도 좋지 않다. 그러나 예술은 얼마든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코로나 시기에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예술이 작품을 팔기 위해서 지속되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적 여건이 취약한 시기에는 예술적 생존과 관계된 싸움을 피할 길이 없다. 과거 한국전쟁 당시에도 이중섭, 박수근 등의 작업이 전개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예술가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예술적 태도를 견지하려는 사람들이다. 오히려 최악의 상황은 예술적 문제를 더 본질적인 특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중요한 예술적 태도 중의 하나는 생존을 위협하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에서도 예술가는 자신이 추스르는 예술적 문제를 그 외의 다른 조건과 쉽게 타협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려울수록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의 길을 가려는 예술가의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가에게나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가혹한 일이기도 하다. 어느 날 문득 코로나가 종식되기를 바란다. 예술적 평화가 있는 곳에 진정한 평화가 깃들고, 예술적 창의력이 빛을 발할 때 가장 행복한 기회가 열리기 때문이다.
종로 감로암에 중광 스님이 계실 때에 가끔씩 양담배 한 보루씩 사가지고 다닌 적이 있었다. 내가 가면 스님은 좋아서 활짝 웃었다. 어느 날 아침 감로암을 찾았을 때에 스님은 기분이 좋아서 법문하기를, 진정한 깨달음은 스승 없이 깨닫는 거야. 그게 진짜지! 하시는 게 아닌가. 나는 느낀 바가 있어서 그것을 글로 써달라고 했다. 그러자 스님은 망설이지 않고 무사독오(無師獨悟)라고 붓을 들어 써주셨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환생하셨다는 조선시대 진묵스님 일화를 보면 이런 게 있다. 상운암에 계실 때에 모시고 있던 스님들이 약 한달 예정으로 탁발을 나갈 때에 진묵 스님은 창가에 손을 걸치고 앉은 채 작별을 했고 곧 선정에 들었다. 한달 후 탁발을 마치고 돌아 온 스님들이 보니, 진묵 스님은 여전히 그 자세로 앉아 선정에 들어 있는데, 그 사이 바람이 세차게 불어 창가에 걸친 손은 닫히고 열리는 문틀에 망가지고 피로 얼룩져 있었다. 진묵 스님의 얼굴은 거미가 몇 겹으로 집을 지어 더럽혀져 있었다. 스님을 깨우자, 곧 눈을 뜨고, 너희들 벌써 왔느냐?고 했다는 장면이다. 선정이란 그런 것이다. 내가 지금부터 정신 차리고 선정에 들어야지 하면 그것은 선정이 아니다. 어느 순간 선정에 들어 삼매에 들 수 있어야 선정이다. 그것이 순일하고 전일한 경지이다. 그리고 정신의 가장 자연스럽고 깨어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요동치기로는 천둥번개가 번쩍일 때처럼 강렬하다가도 고요할 때에는 잔잔한 연못에 나뭇잎 하나 떨어지는 순간보다 더 고요한 것이 그 세계이다. 마음의 세계가 미묘해서 그 극단적인 모순을 지니면서도 전혀 불편하지 않게, 순간순간 미묘한 작용을 스스로 하는 것이 또한 그렇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늘 마주치는 마음의 문제는 진정한 깨달음을 추구할 때에도 똑같이 작용한다. 이러한 묘미를 터득하지 못하면 그 어떤 옷을 입었든 가짜이다. 공무원이든, 상인이건, 가정주부이건, 사기꾼이건, 스님 또는 목사이건 모두 가짜이다. 가짜가 되지 않으려면 깨달아야 한다. 공중에 걸쳐놓은 줄 위에 아슬아슬하게 발걸음을 떼는 곡예사처럼 모두를 걸고 걸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누가 알겠는가?
구 국군광주통합병원 건물에서 열린 GB 커미션 전시에서 카테르 아티아의 설치 작품. 마네킹의 다리 모양도 결국 인간의 상처와 치유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AI 시대의 예술은 무엇이 될까? 인공지능이 사회를 통제하고, 생산과 분배를 정의하며, 인간보다 훨씬 냉철하게 효율적으로 세상을 관리할 수 있다는 미래의 세계를 상상해 볼 때에 인간은 무엇을 하며 어떻게 고유의 인간 가치를 추구해 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저버릴 수 없다. 지능 로봇이 뭐든 알아서 척척 진행시킬 수 있는 세상이 온다고 해도 인간은 로봇과 달리 꿈을 꾸고, 본능적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며 사소한 권력을 두고 치열한 싸움을 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원시시대부터 인간에게 예술적 표현 욕구는 발현되고 있었다. 구석기시대의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상은 인간이 여체를 빌려 종족 번식을 풍요하게 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비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기실 그 당시에는 예술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세상을 어찌 살아야 한다는 고민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원하는 바를 형상화시켜서 주술적으로 비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의 원형을 보여준다. AI 시대에는 다시 인간의 강렬한 존재 의식이 원시시대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그동안 문명의 발전 과정에서 중요시 했던 이성적 통제와 기억 및 관리 시스템을 AI가 알아서 잘 하고 있다면, 인간은 AI가 하지 못하는 인간 고유의 영역에서 절실하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지 않을까? 기실 인간 고유의 본능과 욕구 그리고 도덕성 등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는 지극히 인간적인 영역에 한정된 것일 수도 있다. 로봇에게는 그러한 문제들이 오히려 사회적으로 혼란을 가져오는 비생산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로봇에 맞춰서 세상을 살 수는 없다. 로봇이 인간적 문제에 맞춰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AI가 끊임없이 발전하게 될 때에 언젠가 로봇이 인간을 철두철미 관리하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아마도 AI 시대에는 예술가가 인간의 문제에 대하여 절절하게 표현하는 일이 잦게 될 것이다. 끝까지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하여 처절한 투쟁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인간답게 살고 그 고유의 가치를 추구해 갈 수 있을까? 자칫 인간은 스스로 만든 함정에 빠져 외마디 소리조차 못한 채 지구상에서 종적을 감출 수도 있다. 유토피아를 추구하다가 정반대의 블랙홀로 빠져들 수 있는 것이다.
여성의 신체를 암시하는 윤곽에 촘촘히 나사 못을 거꾸로 박아 놓은 그림. 성적 긴장감 또는 이성에 대한 경계를 말하는 것일까? 차유림 작, 한그루 사과 나무를 심다. 우진문화공간의 화기애애전에서. 나는 한때 젊은 작가들의 전시 오픈에 가면 비판적인 발언을 많이 했다. 가능성이 많은 작가일수록 비판의 강도는 더 세졌다. 작가를 따로 만나 작품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드물고, 가장 조명을 받고 있는 그 순간에 가장 비판적인 문제를 짚는 것이 또 하나의 계기를 만든다는 생각이었다. 적당히 칭찬하고 적당히 포장하는 것은 결국 그 작가를 둔하게, 나락에 빠지게 한다. 작가는 예리하게 문제의식을 갖고 작품성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작가에 따라서는 문제의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또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만 방향성이 전혀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막연히 좋아서 하는 예술은 없다. 그저 사람들 보기에 좋은 예술은 예술이 아니다. 어느 전시장에서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불교에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라는 말이 있다. 진리의 길을 가려면 그런 것처럼, 젊은 작가들이 작가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스승도 죽이고 선배를 죽일 수 있어야 한다. 좀 무시무시하게 들릴지 몰라도 철저하게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죽일 수 있어야 하다. 그리고 죽인다는 것이 스승을 무시하고 선배를 배반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진정으로 죽일 수 있는 자가 스승과 선배를 계승하는 자이고 인정을 받는 자가 된다. 자신의 문제의식 자체를 모르면서 무조건 스승과 선배를 무시하는 것은 자살이 된다. 예술계의 창의력은 권력 투쟁과 같은 진흙탕 싸움이 아니라 예술적 기개를 번쩍이며 진검승부가 되어야 한다. 스승에게 진리를 물었다가 한번에 20대씩 3번에 걸쳐 60대를 얻어맞은 임제 선사는 후일 크게 깨닫고 스승 황벽의 뒤를 이어 크게 종풍을 떨쳤다. 한국의 조계종 역시 임제의 선풍을 숭상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황벽과 같은 방망이도 없고 주먹의 힘도 약하다. 전시장에 나가 쓴소리를 할 작가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좀처럼 화단에 나가지 않게 된다. 요즘처럼 무엇이건 상품화되는 시대에는 예술도 고급 상품의 일종이 되는 모양이다. 뜻이 있는 작가들은 예술의 상업적 도구화를 거부한다. 마치 팔리기 위해 치장하고 나가는 상품처럼 껍데기만 그럴듯해 보이는 가짜들. 나는 구식인지 몰라도 진짜가 좋다. 거칠고 서툴러도 좋다. 진정으로 예술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맘에 들지 않으면 부수고 다시 만들고, 하다보면 새로운 길이 나타나고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가는 작가들, 그들을 축복하고 싶다.
2017년 전북도립미술관의 아시아현대미술전,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에는 일본에서 피유피루가 참가했고 그녀는 자신이 성전환 수술을 하면서 생긴 몸의 변화와 감정을 갖가지 도구와 변장, 치장 등 특이한 자화상 형태로 표현한 사진 작품 수십 점을 출품했다. 그녀의 성전환 과정은 다큐멘터리 필름 피유피루 2001-8에도 여실하게 담겨 있다. 피유피루는 남자로 태어났으나 점차 그는 남자로서의 몸이 그에게 맞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특이한 치장을 하면서 그 감정을 명쾌히 표현하려고 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예술로서 주목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그는 현대미술가로 활약하게 된 것이다. 그녀의 작품에는 성 전환 과정 사이에서의 남성과 여성이 나타나며, 10대부터 익숙한 패션, 극단적인 길을 걸어간 한 개인의 미묘한 감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녀의 자화상 시리즈는 2005년도 요코하마 트리엔날레에서 조명을 받았다.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전에 중요 작가로 초빙되었지만, 그녀는 매니저 겸 남편의 만류로 거절했다. 처음에는 남편과 함께 올 수 있느냐고 묻기도 했었지만, 당시 한국의 남북 관계의 불안정성, 북한의 핵무기 개발 등을 이유로 돌아선 것이다. 최근 그녀가 하는 작업은 여신 시리즈로 죽은 자를 살리는 지옥의 여신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성 전화자로서 자랑스러운 사랑의 신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녀는 그러한 작업으로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작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성적 정체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극단적 삶을 살고 그 과정에서 변화에 따르는 감정을 리얼하게 묘사하면서 작가로 주목받은 그녀, 한 번도 미술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현대미술의 한 가운데에 서있다. 오늘의 예술은 과거에 중시되던 예술적 맥락을 떠나 아슬아슬하고 민감한 문제들에 걸쳐있다. 그것은 아름답기도 하고 신기하며, 악의 꽃처럼 어둡고 매혹적이며, 권위적이지 않고 정통적이지도 않다. 한국의 문화 코드는 아직 이러한 전개에 대하여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점차 그러한 방향으로 개방되고 확장되는 추세를 갖게 되지 않을까 예측해본다. 이번에 터진 성추행 사건도 자진을 택한 정치인에 대한 조문 형식의 애도를 넘어서 벼랑 끝에 서 있는 피해자의 아픔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은가? 작은 아픔이 큰 고목을 무너뜨린다.
장 미쉘 바스키아의 전시가 서울 롯데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다. 바스키아는 80년대 뉴욕의 거리에서 낙서화가로 등장하여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후에는 일약 세계적인 작가로 떠올랐던 인물로 아쉽게 28살의 나이로 타계했다. 거리의 반항아였고, 언더그라운드 예술을 대표하며, 흑인 특유의 강렬한 표현력을 발휘했던 그는 포스트모더니즘 초기에 신표현주의 흐름의 대표 작가이기도 했다. 동시대에 낙서화가로서 쌍벽을 이뤘던 키이쓰 해링이 백인으로서 대중 친화적인 이미지로 사랑을 받았다면 바스키아는 시종일관 반항적인 몸짓과 강렬한 색채로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번 바스키아 전시는 150여점의 본격적인 작품을 선보인다. 80년대에 뜨거웠던 언더그라운드 예술의 열기를 느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1988년 병으로 그가 죽은 후 1992년 10월 23일부터 이듬해 2월 14일까지 열렸던 휘트니미술관에서의 바스키아 회고전은 기념비적인 것이었다. 15세에 가출하여 거리를 떠돌다가 아버지에게 발견되어 집에 가던 그가 외쳤던, 아빠, 나는 어느 날 반드시 유명해질거야!라는 말은 실현되었다. 그의 사후 뉴욕지에서는 특집을 내고 평하기를, 바스키아는 불꽃처럼 살았다. 그는 진정으로 밝게 타올랐다. 그리고 그 불꽃은 사라졌다. 그러나 그 불씨는 아직도 뜨겁게 남아있다.고 썼다. 170여 인종이 모여 산다는 뉴욕의 코스모폴리턴적 문화와 함께 제도적 문화에 반발하며 자유롭고 저항적인 문화를 제기했던 언더그라운드는 도시적 삶의 인간이 어떻게 예술적으로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제도에 길들여져 안락함을 추구하기보다는 개별적 삶의 가치를 표현하면서 그 영역을 넓혀가려는 도시민들의 문화적 각성이 읽혀진다. 민주주의를 영위하는 전 세계 도시인들의 번민과 각성이 함께 담겨있다. 우리는 죽을 때가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번민하면서 살게 되는 소시민들이다. 검은 피카소로 불리는 바스키아는 분명 예술계의 이단아였고, 제도권 바깥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그는 현대미술의 문맥에서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우뚝 서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흔히 예술은 금액으로 평가되지만, 그는 시장에서도 예술적 광기에서도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있다. 우리는 정직하게 그 꺼진 불씨에서 타오르는 불씨를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백석의 시 중에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 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백석을 사랑했던 김자야의 글을 보면 그들의 청진동 시절, 모처럼 같이 외출을 하여 명동의 제일다방을 들러 백석이 문학하는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는 사이 김자야가 슬그머니 나와서 문예춘추와 여원을 사서 나오다가 문득 한 가게의 쇼윈도에 걸린 넥타이 하나가 눈에 띄어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 백석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 사서 곧바로 매어드렸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 뒤로 당신은 매일 출퇴근뿐만 아니라 바깥나들이를 할 때마다 늘 꼭 내가 선사한 그 넥타이만을 즐겨 매고 다니셨다. 지금 그 넥타이가 이렇게 당신의 시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의 한 대목에 들어가 있을 줄이야. 그들의 사랑은 짧았지만, 그 사랑에 대한 기억은 시로서 또는 회고록을 통해 영원히 남아있다. 기생 신분으로 시인을 사랑했던 그녀는 1955년부터 성북동에서 운영하던 한정식 집 대원각을 1987년 법정 스님에게 불교도량으로 만들 것을 요청하여 1997년 길상사가 창건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세워진 공덕비에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가 적혀 있는데, 연애시절 백석이 친필로 적어준 시로 알려져 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비극적으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사랑은 변함없이 감동을 준다. 뱁새가 우는 산골의 오두막이 아니어도 그리움은 눈이 푹푹 날리는 날 홀로 앉아 소주를 마시게 하지 않을까?
전주에는 명물 급 음식점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콩나물 국밥으로 유명한 삼백집이다. 1945년 개업했다는 삼백집은 테이블 4개밖에 안 되는 5평 남짓한 작은 곳이었다. 간판도 없이 시작했지만, 일반적인 연탄아궁이가 아니라 솔가지에 숯불로 음식을 장만했고, 하루 삼백 그릇 이상 팔지 않아 자연스레 삼백집으로 불리었다. 키가 크고 밉상이 아니었다는 1대 대표 이봉순씨(작고)는 욕쟁이 할머니로도 알려졌는데, 이따금씩 손님들에게 내뱉는 구수하고 걸걸한 욕이 관심을 끌었다. 이 욕을 듣고 싶어 새벽 4시 문 열기 전에 찾아와 일부러 요란하게 발로 문을 차고 소동을 피우는 손님도 있었다. 새벽에 욕을 먹으면 재수가 좋다는 통념 때문이었다. 아마도 욕쟁이 할머니 욕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일화가 박정희 전 대통령 이야기일 것이다. 1970년 초(?)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호원 없이 콩나물 국밥을 먹기 위해 삼백집을 방문했다. 그때 박 대통령을 보고 이봉순 할머니가 누가 보면 영락없이 대통령인줄 알겠다, 이놈아. 옛다 달걀하나 더 처먹어라.고 욕을 했다. 아마 지금 시각으로 보면 국가원수모독죄 정도의 처벌을 감수할 만한 사건이었지만, 아무 일이 없이 끝났고, 이후 욕쟁이 할머니가 운영하는 삼백집은 더 유명세를 탔다. 전주처럼 깊은 전통 음식의 전통을 갖고 있는 도시에 이 만한 일화가 있는 명소가 존재한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만 하지만, 당시 최고의 권력자와 욕쟁이 할머니의 대비는 통쾌하고 자연스럽다. 그 권력자는 욕을 먹으면서도 받아들였고 특별한 티를 내지 않았다. 욕쟁이 할머니는 끝내 자신이 욕한 대상이 대통령이 아니라고 믿었다고도 한다. 보이지 않는 관용과 여유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유 있는 사회가 행복감을 증대시킨다. 막걸리 한잔하기 위해 화가들이 즐겨 찾는 술집이 몇 군데 있다. 관광객들은 잘 모르는, 예전처럼 소박하고 푸짐한 안주와 예술인들을 반겨하는 분위기의 허름한 술집. 기초 생활비도 부족하게 산다는 예술인들이지만, 술 한 잔 앞에 두고 지인들과 정담을 나누며 한 세상을 사는 예술인들은 사실 명소가 된 삼백집 같은 곳에 해장하러 가지 않는다. 아직도 테이블 몇 개가 고작인 허름한 술집에서 예술을 논하고 인생을 살아낸다. 위대한 예술이 탄생하는 요람은 따뜻하고 정겨운 곳이었다. 초라하지만 마음이 끌리는 그곳에서 예술가의 마음이 지평선 끝까지 가서 노닌다. 다시, 명소가 되어버린 삼백집이 아닌, 구수하고 걸걸한 욕을 먹더라도 예술가들을 환대하는 또 다른 해장국집이 열리기를 기대한다.
인간의 운명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일까? 문학평론가 임헌영이 운명론에 대하여 쓴 글을 보면, 광주교도소에서 만난 최평숙 도사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는 한국일보 창업주 장기영씨의 서거를 맞힌 것을 비롯해서 임헌영이 언제 출소할지를 대략 맞췄다고 한다. 그들을 혹독하게 고문했던 남영동 대공 분실 사람들도 번번이 그를 불러 운명을 상담해 만세력 한권만 들고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사주로 정해진 운명과 그 기운이 인생을 결정짓는다는 운명론, 감옥 안에서 친해진 도사의 말을 빌려 피력한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무렵 아버지께서 서울 출장 중 대전의 유명한 사주 도사를 방문해 식구대로 사주를 받아온 것이 있었다. 신통하게도 사주에서 말하는 해에 나는 취직하게 되었고 그것이 정한대로 대체적인 생의 사회적 굴곡이 가는 것을 보고 신기해 한 일이 있었다. 기실 인생은 마음먹은 대로 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자신이 원하는 그 무엇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과 희생을 다하지 않으면 이루기 어렵다. 각고의 노력 끝에 뜻을 이루게 되면 그나마 다행이다. 대부분 그 과정에서 추락하거나 방향 전환이 불가피한 경우를 겪기 때문이다. 경허 선사의 얘기를 쫓다보면, 문둥병 걸린 한 여인을 대웅전에 모셔놓고 목욕도 시키고 극진히 대접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 여성은 과거에 왕비였고 당시 온갖 영화를 누렸기에 지금 문둥병으로 고생하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렇다. 인생은 돌고 도는 것이다. 지금 누리는 부귀영화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후세에 반드시 갚아야 할 빚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운명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공짜가 없다는 것, 사주가 잘 나서 호의호식을 누린 사람은 내세에 빈천하게 태어나서 온 몸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 우주의 돌고 도는 기운은 거짓 없이 정확하게 그 반환을 요구한다. 운명의 고리를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차원을 달리해서 공부하는 것이다. 용서하고 집착을 끊으며 더 나은 정신성, 온 몸으로 헌신할 수 있는 봉사, 희생 등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쉽지 않은 길이다. 제대로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천 길 낭떠러지를 몇 번이고 굴러야 한다. 그것이 쉽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인간으로 사는 한, 그 운명론을 넘어서 우뚝 서는 길은 그것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대도예가 한봉림 선생이 완주 소양에서 전주로 나와 이승우 개인전을 가보자고 보챈다. 태평동 신아출판사에 딸린 갤러리에서 그는 현장 작업과 함께 빼곡히 작품을 걸고 있었다. 예의 추상적 패턴의 구조에 자잘한 꽃들을 많이 그려 넣은 그의 그림들을 오랜만에 보면서, 왜 과거에는 꽃 대신 숫자를 써넣었는데 달라졌냐고 물으려 했다. 그 찰나 스스로 변명하기를, 사람들이 꽃을 그리면 팔린다고 해서 그렸는데 한 점도 안 팔린다고 그가 계면쩍어 한다. 그는 입담이 좋다. 마침 <수필과 비평> 유인실 주간이 합석하고 서정환 신아출판사 사장도 합류, 이야기판이 벌어졌다. 작업실에서의 이승우. 이승우는 군대시절 정신병원에서 근무할 때 간질환자로 위장해 군대를 면제받으려던 환자 이야기 등 다양한 이야기들을 펼치면서 좌중을 웃겼다. 그는 젊은 시절 광주 에뽀끄 그룹에도 참여하면서 추상 운동을 펼치곤 했는데, 그렇게 사명감을 느끼게 하던 기색이 사라져서 여기저기 좌판을 펼치듯 현장 작업을 하면서 그림을 걸기도 하고 바꾸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술을 좋아해서 익산에서는 김성민 같은 후배와 어우러져 낮술을 들기도 하고 전주에 나오면 이종만, 오무균 등 화가와 어우러지기도 한다. 원광대 강의를 나갈 때는 한봉림 교수의 연구실을 빌려 10여 년 간 지내기도 했다. 당시 그는 당뇨로 인해 한쪽 다리를 의족으로 대체했는데, 그가 화장실 다니는 일이 불편해 보여 나무 의자에 구멍을 뚫어 실내에 좌변식 변기를 한봉림 교수가 만들어주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렇게 살았다. 예술가들 사이에는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일들이 흔히 일어난다. 젊은 시절 익산의 이광웅 시인, 김문자 화가와 얽힌 추억을 공유하는 대목이 있는 우리는 이따금씩 과거의 정감 있었던 추억을 이야기 한다. 그가 말했다. 광웅 형이 감옥에서 나와 익산에 살 때에 사람들 만나기를 기피해서, 카페에 가도 사람들이 발견하기 힘든 문 뒤 자리에 앉아 숨어서 차를 마시곤 했지. 이광웅 시인이 가고 나서 김문자 선생이 정읍으로 거처를 옮겨 남편인 이광웅 시인과 마주보는 구도로 사진을 걸고 홀로 소주를 마시며 세월을 보냈던 시기를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의 최근 작업들은 시덥지 않아서 외면하다가 한봉림 선생의 권유로 그의 전시를 보면서 다시 예술과 삶에 관한 폭 넓은 가치를 생각한다. 예술은 그 무엇을 위한 도구도 아니고, 예술가는 지원금이나 기대하면서 지내는 존재가 아니다. 갈수록 상업화, 정치화되어가는 풍토에 그렇게 갈 수 없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고 싶다.
익산에는 멋진 예술가가 있다. 그는 키도 크고 나이 50대 중반이 되도록 예술 하나만 생각하고 산다. 남자 나체를 그려 유명해지기도 했고, 푸줏간의 고기를 소재로 삼기도 했으며, 평면에 흑연가루를 두텁게 바르고 광택을 내어 인간을 묘사하기도 했다. 근래에는 부안 곰소가 군산의 영산강 하구 둑을 찾아 서해 바다의 황량한 갯벌을 그린다. 얼마 전 나는 그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같이 AX 그룹 운동을 펼치기도 하지만, 갯벌 그림에 대하여 논의를 하고 싶어서였다. 갯벌 그림이 사진처럼 사실성에 귀착되고 마는 부분에 대하여 아쉬움을 느꼈고, 사실적 디테일을 존중하되 그와 상반된 추상성, 상징성을 강하게 드러내면 좋을 듯하였다. 눈에 보이는 갯벌 모습 보다는 마음으로 느끼는 그 황량한 공간에 대한 감정, 느낌이 생생하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작업실 주변 막걸리 집에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결국 예술에 대한 고민, 무엇 때문에 예술을 하고, 그 예술로서 무엇을 표현하고 싶어 하느냐가 관건이다. 나는 그에게 홀로 갯벌을 찾아가서 갯벌을 친구삼아 막걸리를 마시며 바라보라고 권했다. 그렇게 말없는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 갯벌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 갯벌을 대상으로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를 알게 될 거라고 말했다. 그 부분이 가슴에 와 닿기 전에는 감각적으로 명쾌한 작업을 펼치기 어렵다. 작업실에서 그는 폭이 3.66m 정도 되는, 얼핏 봐도 1000호 정도 되는 대작으로 갯벌을 그리면서 씨름하고 있었다. 당장 전시 스케줄이 잡혀 있는 것도 아닌데, 홀로 작품성과 대결하듯이 마주 서있는 것이다. 충분히 마음에 드는 작품이 축적되었을 때에 전시를 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욕심 때문에 완성을 서두를수록 근사치에 도달하기 어려워진다. 그는 말했다. 예술가에게 주어진 틀에 대하여 저항하고 싶다고, 힘들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작가 정신이라고 생각한다고. 모든 작가들이 저항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저항은 작가적 태도의 중요한 일면을 갖고 있다. 예술가로서 30여년 살아오는 동안, 그는 갖가지 어려움을 겪었지만, 홀로 살면서 버텼기 때문에 예술만이 자신이 몸담을 수 있는 유일한 의미라고 말한다. 자신이 죽게 되면 그동안 해온 작품들을 모두 태워버리거나 쓰레기로 처분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가 혹 가더라도 우리 미술사에 오래 남을 작품들을 없앤다고? 그가 가더라도 물질적으로 남는 그 작품들은 남아서 그를 증언하게 될 것이다.
얼마 전 어느 작가의 전시장에 갔을 때에 나는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작품은 일반인들의 눈을 의식한 프레임과 작가 자신이 추구하는 자유로움이 절충 된 양면성을 갖고 있었다. 일반인들의 눈에 맞추었다는 것은 곧 사실적이고 장식적이며 완성도를 갖는 것이고, 작가 자신이 추구하는 자유로움이란 추상적이고 즉흥적 충동이 가미되었다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길을 가고 싶지만 주변의 시선과 동 떨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 그래서 절충하게 된다. 그러기에 멀리 가지 못하고 그 자리를 계속 맴돌게 되곤 한다. 그래서 나는 주문했다. 주변의 시선에 맞추려 하지 말고 가고 싶은 방향으로 힘껏, 지속적으로 가보라. 결과를 의식하지 말고, 자신의 내면에 예민하게 귀를 기울이고, 한발 한발 가다보면 어느 덧 스스로 예상하지 못했던 고지에 오르게 될 것이다. 일단 거기까지 목표를 삼아 나아가라. 아마도 그 작가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작가는 주변의 지지를 받아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주변의 시선을 훌쩍 떠나 독보적인 길을 갈 수 밖에 없다. 주변의 시선을 어쩌지 못하는 고리에 잡히는 순간 그는 자유롭지 못하다. 마치 볼모가 된 삐에로처럼. 시간이 없다. 나는 그런 말을 했다. 우리가 매일 만나도 매일 만나는 것은 아니다. 그 한 순간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이렇게 얽혀 살 것 같지만, 홀로 되어 멀리 가게 되는 것은 멀지 않다. 시간이 없다. 언젠가 강의 중 한 한국화가가 금생에는 이렇게 하고 내세(來世)에나 하고 싶은 대로 작품을 하겠습니다. 하는 말을 듣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시간이 없다. 내세까지 어떻게 기다리겠는가? 그것이 중요하고 긴급하다는 생각이 들면 지금 당장 실천에 옮겨라. 그렇게 해도 갈 길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봐야 내세도 있는 것이다. 우리들 삶도 마찬가지이다. 마음먹은 대로 살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삶의 물결에 흔들리다보면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스스로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인 것이다. 그 길을 갈 때에만 보람을 느낀다. 그것이 길이다.
전주 근교 소양의 송광사, 병자호란 때 청으로 끌려간 소현 세자의 무사 귀국을 비는 발원문이 나왔다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부처님이 매우 인상적이다. 대웅전 공간을 곽 채운 듯한 크기에 정교하고 기품 있는 모습이 좋았다. 언젠가 여기서 3000배를 하리라 마음먹었다. 여름 장마가 지루하게 이어지던 어느 날, 나는 가벼운 차림으로 다시 송광사를 찾았다. 기대와는 달리 대웅전에서는 수십 명의 대중과 함께 제례 행사가 거행 중이었다. 마이크 소리로 확대되어 염불, 목탁, 법문 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다가 뒷 편에 한적해 보이는 삼성각으로 발길을 돌렸다. 거기에는 호랑이를 타고 앉은 산신이 모셔져 있었다. 대웅전에서 들려오는 독경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산신 앞에 큰 방석을 깔고 절을 드리고 있었다. 눈을 감고 연속해서 절을 드리면서 대웅전도, 삼성각도 잊은 채 절을 드렸다. 300배쯤 되었을 때 나는 절을 마치고 한동안 서있었다. 온 몸에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 사이에 누군가 와서 선풍기도 돌려주었고, 처음 산신을 향해 절을 하던 각도는 틀어져 거의 벽면을 쪽으로 이동해 있었다. 어던 이유로든 3000배를 하겠다는 의지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간절한 소망도 없었다. 그러나 온몸의 기력이 소진된 것 같은 느낌으로 서있는 동안 나는 내 몸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양을 한 기분이었다. 내 몸이 허락하는 최선의 일을 하는 것이 오늘의 일과라는 생각을 하면서, 또 그것이 부처님과 산신의 뜻이라는 생각도 하면서 나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하산하였다. 마침 소양에는 현대도예가 한봉림 선생이 계신다. 불현 듯 한 나의 방문에도 선생은 반갑게 맞으며, 앞으로 벌일 레지던시 사업 공간을 보여 주시고, 근처의 쭈꾸미 백반 집으로 안내하신다. 우리는 가볍게 생막걸리 한잔을 했다.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는가? 죽기 전에 후배들에게 용기를 주는 일을 하고싶어! 그가 말하는 레지던시 사업의 취지이다. 작가들에게 거주 공간과 작업 공간을 주고, 재료비도 지원하고, 경내의 전시 공간에서 기획전도 열어 예술인들끼리의 교류를 추진하고 싶어 한다. 예술은 사막 같은 삶의 단비 같은 것이다. 그것은 생명수 같은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진정한 예술 활동은 단비 이상의 감로수이다.
AX 그룹 창립전 오픈 때 교토에서 했던 퍼포먼스, I LOVE YOU, I HATE YOU!를 재현하려 했던 것은 AX 그룹이 갖는 실험적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교토에서와 같이 여성 파트너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었다. 전통적 도시 전주에서는 전위적 성향의 파트너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만나는 여성 작가들에게 넌지시 의향을 물으면 옷을 벗는 대목에서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여성 파트너가 먼저 나와 관객을 마주보고 옷을 천천히, 하나씩 벗어서 나체가 되면 관객을 응시하다가 벽 쪽으로 돌아서는 것이고, 그때 내가 나가서 등에 글씨를 쓰는 것이었다. 한 작가의 소개로 알게 된 김진영은 흔쾌히 참여 의사를 밝혔다. 그녀는 미술과 사진 분야에서 모델로 활동해왔고, 퍼포먼스 작업에도 높은 관심을 보였다. 한동안의 생각 기간을 갖더니 그녀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옷을 차례차례 벗으라는데, 옷을 찢으면서 벗으면 안되냐는 것이다. 순간 나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좋다고 대답했다. 두 번째 질문은 옷을 다 벗고 관객을 응시하다가 뒤 돌아 서는 대목이 있는데, 자신은 계속 관객을 마주보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관객을 당당히 바라보는 그 모습을 얼굴로 표현하고 싶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도 좋은데 신체 전면에 글씨나 페인팅을 해도 좋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녀는 또 흔쾌히 좋다고 말했다. 그래서 교토에서와 다른 뉴앙스의 행위가 펼쳐지게 되었다. 코로나 여파에도 불구하고 오프닝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김진영은 예정대로 옷을 찢으면서 벗었다. 사람들이 조용해지고 주목하기 시작했다. 팬티까지 찢어 바닥에 버리고 관객을 응시할 무렵 전시장 안은 숨 막히게 조용해졌다. 나는 천천히 그녀 앞으로 나아가 비닐봉지 안에 담긴 검정 펜을 꺼내 AX라는 글씨를 그녀의 몸 위에 선명하게 썼다. AX 창립전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빨간색 물감을 손가락으로 찍어 I LOVE YOU!를, 검정색 물감을 찍어 I HATE YOU!를 썼다. 그리고 그녀의 몸 위에 여러 가지 페인팅이 가해졌다. 몸은 일종의 표현의 장, 캔버스로 변모하고 있었다. 인간의 드라마틱한 감정이 사랑과 미움 사이에 있다면, 몸은 그 드라마가 펼쳐지는 전장이기도 하다. 인간은 누구나 운명처럼 자신의 신체성과 더불어 살아간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그 신체성이 자신을 담보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 모조리 벗어도 부끄럽지 않다는 것 그리고 모두 다 벗고 우리는 동등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한 순간 깨달을 수 있다.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공감대는 이어지는 뒷풀이 장에서도 지속되었다. 그래,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인가?
파르자나 우르미는 방글라데시 여성작가이다. 전북도립미술관의 두 번째 아시아현대미술전(2016) 때 초청되어 전주에 왔다. 그녀의 작품은 종이에 아크릴로 사람의 얼굴을 그리는 것인데, 비가 오는 듯 줄줄이 흘러내리는 붓질 사이로 드러나는 얼굴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녀 자신의 얼굴이기도 하고 주변의 얼굴이기도 하며 그것에 공감을 느끼는 모든 사람의 얼굴이기도 했다. 슬픔과 공허, 아픔과 고독을 표현하면서도 삶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드러내는 작품이었다. 이때 나는 감동을 받아 이전시의 첫 방 첫 순서에 그녀의 그림 몇 장을 걸었다. 한옥마을에서 아시아 청년 국제교류 워크숍을 하는 동안 미얀마 뉴 제로 아트 스페이스 경영 디렉터의 미얀마의 검열과 화가들 이야기도 듣고, 인도네시아 독립 큐레이터 시타 막피라의 족자카르타 비엔날레 및 인도네시아의 현대 회화 등을 듣는 동안 말레이시아 작가 저스틴 림은 전주비빔밥을 즐겁게 시연한다. 음식 교환 시연 행사였다. 저스틴 림은 그림도 좋지만, 기타도 잘치고 노래도 잘 한다. 필리핀의 에이즈 옹은 뜨개질로 장식적인 구조물을 만드는 작가이다. 그녀는 귀뜸으로 파르자나가 도립미술관 레지던시에 체류하고 싶어 한다고 알려준다. 그렇게 해서 파르자나는 6개월여의 기간 창작스튜디오에 머물렀다. 한국문화에 적응하지 못해 문제도 있었다. 방장으로 있던 K와 마찰 때문에 갑자기 귀국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때 한국 문화에 대하여 설명하고 달랬던 기억이 난다. 휴일에 모두 다 집으로 가고 홀로 남은 그녀가 힘들다고 해서 가족과 함께 그녀를 픽업해서 객사 주변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귀국 후 그녀는 전주에서의 기억이 오래 남는다며 다시 한국에 오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미술관을 떠나 자유롭게 지내던 터여서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창원의 리좀 레지던시에서 작가들과 비평 워크숍을 할 때 나는 넌지시 파르자나의 레지던시 참여를 권유할 수 있었다. 그래서 파르자나는 6개월 프로그램으로 다시 한국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는 전주가 아니고 창원이다. 그러나 그녀는 전주를 방문하게 될 것이다. 한옥마을 주변의 기억과 상관면 창작스튜디오를 떠올리며. 그녀는 이미 전주에 젊은 예술가들을 알고 있다. 젊은 예술가들은 교류를 통하여 성장한다. 전주는 항아리 속처럼 닫혀 있다. 국제적인 방향을 향한 디딤돌이 필요하고 정책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이들을 내보내야 한다. 지역의 문화정책은 국제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문화적 결실은 쉽게 오지 않는다. 문을 열고 교류를 통해 의미 있는 결속을 다지면서 서서히 열매를 맺는 것이다. 전주처럼 외부에서 접촉하기 어려운 핸디캡을 벗기 위해 전략적 정책을 구사해야 한다고 본다.
십여 년 전쯤, 아직 전남대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점심 무렵 졸업한지 오래인 제자가 찾아와 인근에서 김치찌개를 먹고 카페에 앉아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때 그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교수님, 사랑이 뭡니까? 그 순간 나는 그가 학창시절 유난히 재주가 비상했던 그의 기질, 판화공방에 찾아온 여성을 만나 도피 끝에 결혼했던 장면, 여성의 부모가 나를 찾아와 없어진 딸 걱정을 했던 일.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고 그는 결혼 생활 10여년에 아이가 둘이건만 나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나는 그에게 반문했다. 어느 날 너의 아내에게 남자가 생겨 헤어지자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는 단숨에 말하기를 도끼로 때려죽이겠습니다. 순간 나는 그의 단호한 난폭성에 당황했지만 이렇게 응수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인생에 사랑의 기회가 몇 번이나 되겠느냐? 만일 아내에게 사랑하는 남자가 생긴 것을 축하하고 편안하게 헤어질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그는 침묵 끝에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 기실 남녀 사이에 이런 종류의 사랑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남녀의 정이 깊을수록 소유 개념으로 돌아가 서로가 서로를 꽁꽁 묶을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구속이고, 학대이다. 진정한 사랑은 받아들이기 어려워도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성과 사랑이라는 것도 구분해야 할 것이다. 성이 곧 사랑이라고 믿는 순진한 생각은 오히려 무지에 가깝다. 성은 성일 뿐이고 사랑은 사랑일 뿐이다. 그것이 겹칠 때도 있지만, 그 기간은 길지 않다. 다시 그 제자가 찾아와 나에게 사랑이 뭐냐고 물으면 뭐라 할까? 이번에는 더 강경하게, 사랑하는 아내를 도끼로 때려죽이고 오라 할까?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때려 죽일 수 있을까? 아마 그러지 못할 것이다. 나도 그렇게 과격한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그런 질문을 던져준 그가 고맙다. 그렇지 않았으면 사랑에 대한 성찰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랑할수록 소유의 개념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사랑할수록 소유를 벗어날 수 있느냐가 그 문제에 부여되는 최고의 물음이 된다.
서양화가 윤경희 씨가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어안이 벙벙했다. 3년 간 암 투병을 하면서도 주위에 전연 알리지 않은 본인의 깔끔한(?) 성격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여류화가로서 70년대 중반부터 추상적인 화풍으로 주목을 받아온 그녀는 초기에는 전주에서, 그 후에는 서울에 거주하면서 꾸준히 활동을 전개해왔다. 초기의 화풍은 추상을 추구하면서도 구상이 갖는 폭넓은 환상과 암시를 포용하는 경향을 띠었는데, 이후 추상적 구조 위에 꽃과 나비가 등장하는 고유한 화풍을 추구하였다. 그것은 현대적 감성과 전통이 만나는 장면이기도 하고, 삶의 금쪽 같은 기억과 조형이 예술로서 얽히는 현장이기도 했다. 70년대 중반 동문 네거리에 있던 그녀의 화실에 조영철 후배와 방문했을 때 좋아하는 커피를 대접하면서 예이츠의 싯귀에 나오는 하늘의 융단을 화포 위에 깔고 싶다고 하던 말이 생각난다. 2000년대 초에는 전남대에 강의를 내려오면서 선암사, 송광사, 화엄사 등을 전전하면서 문창살에 조각된 꽃문양 등에 탄복하면서 전통적인 것을 어떻게 형상화할까를 고민하던 기억도 난다. 인생의 만년은 전주에 내려와 작업을 하면서 조용히 살고 싶다고 하던 그녀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기실 주어진 인생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는 않다. 그리고 그 뜻을 성취했다는 일이 그리 의미가 있는지 쉽게 단정 짓기도 어렵다. 그러나 인생이 꿈일망정, 그것은 혼돈 속에서도 명백히 깨어 있던 시간이었으며, 자아가 주체적으로 의미 있는 방향으로 한걸음씩 나아가던 과정이었다. 인생은 허망하지만, 그 인생이 의도하던 의미는 오랫동안 여운으로 남는다. 윤경희가 남긴 작품들을 보면서 새삼, 이렇게 고매하고 독립적인 정신을 가진 여성 화가가 저 세상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본다. 그곳에서도 그녀는 좋아하는 예술적 행위를 하기 위하여 남모르는 열정을 불태우고 있을 것이다. 꽃이 피고 나비가 나는 세계에서 그녀는 그윽한 차향에 취해 있을까? 큰 붓으로 휘적휘적 추상적 화면을 만드는데 골몰해 있을까? 자취 없이 사라진 한 여성 화가를 기억하며, 이름 없는 묘비를 하나 세워본다.
할 말을 잃다. 삼가 창암 선생 앞에 명주를 바치고 삼배를 올리고 싶다. 전주역사박물관에서는 창암 이삼만 특별전 행운유수전이 열리고 있다. 거기 출품된 신독은 창암 말기의 작품으로 기교와 욕심을 훌훌 털어버린 명작으로 꼽을 수 있다. 추사 김정희의 말기 작품 판전 현판 글씨에 비유되기도 하지만, 추사의 판전 글씨가 모든 기교를 놓아버린 어린아이 글씨 같다면, 창암의 그것은 한 획 한 획 온힘을 다해 쓴, 창암 특유의 기운이 느껴지는 명품이다. 추사가 국제적 안목에서 공감할 만한 매우 세련되고 독자적인 서체를 완성해 내었다면, 창암은 전주라는 지역에 머물면서 조선적 서체인 동국서체의 영향을 크게 받아 이를 최고의 경지로 구현해 낸 서예가라고 할 수 있다. 서예는 중국으로부터 전해 내려 왔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조선적인 것을 형성하려는 기운이 강하게 일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제성이냐, 지역성이냐 하는 문제는 예술에 관한 중요한 질문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추사처럼 중국을 방문해 명사들과 교류를 할 수 있었던 인사는 당연히 국제적 맥락에서 자신의 예술성을 읽고 가다듬었을 것이다. 그러나 평생 전주 언저리를 떠나지 못한 창암의 경우는 피부로 공감이 가는 조선적 서체에 대한 사랑을 거두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최고의 경지로 추구해 가는 길을 사명으로 느끼지 않았을까 반문해본다. 전주가 낳은, 조선과 현대를 통 털어 최고의 예술가를 꼽으라 하면 나는 당연히 창암 한 사람이다. 그 만한 인품과 생애 그리고 작품성은 그 누구와도 견줘보기 어렵다. 전일하게 평생 갈고 닦는 서예가로서의 인생, 그가 이뤄낸 독자적 예술성은 그 누구도 답지하지 못한 경계였다. 단언컨대 가정 조선적인 의미에서 최고의 서예가는 창암이라고 말할 수 있다. 행운유수라는, 구름이 흐르듯, 물이 흐르는 자연스럽고 생동감이 넘치는 그 서체는 아무리 중국 글씨에 통달해도 흉내 낼 수 없는 우리 글씨라고 정의할 수 있다. 오랜 만에 창암 특별전을 전주에서 본다. 창암 글씨를 늘 볼 수 있는 창암 서예관이 생겼으면 한다. 창암 정도의 예술가는 전주의 정신적 상징이랄 수 있는데, 정적 그 본향에서 너무 홀대한다는 생각이 든다.
2020년 6월 효봉 여태명 교수의 정년 기념전이 전주에서 열렸다. 효봉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서예가이고, 정치적 사안에 자신의 색깔을 나타내고, 하루에 소주 5병 정도를 매일 마시는 것으로 알려진 애주가이다. 그 전시를 보고 나는 효봉이 술만 먹지 않고 1년여 치열하게 준비해 왔음을 느꼈다. 좌충우돌, 자신이 원하는 시도를 가리지 않고 펼쳐 보이는 작가 정신이 살아있다. 그러나 그는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 술기가 없는 얼굴을 거의 본 일이 없을 정도이다. 2019년 6월, 전주고 개교 100주년 기념전이 열리고 종로회관에서 뒷 풀이가 있을 때에, 흥이 난 효봉은 허리띠를 풀어 마이크처럼 거머쥐고 뱀 장사 흉내를 내 좌중을 웃겼다. 그는 늘 대중적 소통을 좋아하면서 동시에 실험성을 추구해왔다. 그 실험성 때문에 그의 작품은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 최초의 서예 기획전 미술관에 書 : 한국 근현대 서예전에 출품되기도 했으며, 조선시대 민체에 바탕을 둔 그의 한글 서체는 전주 톨게이트 간판에서부터 시내 각종의 간판에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전통 서단에서 봤을 때에 그의 작품은 천박하고, 비(非)서예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천방지축해대기 때문에 마침내 효봉다운 영역을 만들어 내었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는 하드보드지에 칼질을 해서 만든 작품부터 흙을 빚어 상형을 하거나 각자를 해서 구운 작품, 길이 10m 크기에 캔버스에 마음대로 휘젓듯 쓰고 그린 천지인, 누군가의 요청으로 그린 효봉 풍의 사군자까지 다양하다. 술만 마시고 놀기만 하는 줄 알고 만날 때마다 술 좀 끊어라 하고 말해왔다. 술만 마시니 작품다운 것이 안 나온다고 잔소리도 해왔다. 실제 그는 백두산 정상에서 소주병 채 들고 마시는 장면을 페이스 북에 올린 탓에 매년 소주 회사로부터 한 트럭분의 소주를 제공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정년 기념전에서 자신이 서예가로서 녹록치 않은 존재임을 입증해 보여 주었다. 그가 현대 예술의 흐름을 더 정교하게 이해하고, 전통과 더 긴요하게 결부 지었더라면 그는 지금보다 훨씬 더 큰 존재로 부각되어 존중을 받았을 것이다. 대중적인 것도 좋고, 정치적 식견도 좋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작품으로 무엇을 말하고 가치를 발하느냐 하는 것이다. 효봉 만큼 눈에 띄는 작가도 드물지만, 진정한 예술성은 돌이나 나무에 견고하게 새긴 것에 남기보다는 마음속에 새겨 감동을 주는 것이라는 점을 상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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