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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일반인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영화 치료사'. 영화를 통해 심리상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영화치료사는 심리학 분야와 영화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모두 겸비해야 가능하다는 점에서 쉽지 않은 분야이다.우정사업본부에서 부지런하고 꾸준한 삶을 살아가는 조직원으로 정평을 얻고 있는 이승수(54) 완주우체국장이 영화치료 분야에서 상당한 경지를 이루었다.2008년 발족된 한국영상영화치료학회에서 인증하는 영화치료사 자격증은 3급부터 1급, 수련감독자(수퍼바이저)로 등급화 된다. 전문가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는 1급 이상 자격증 소지자는 전국적으로 손에 꼽을 정도로 많지 않은 실정이다.학회 발족과 함께 영화치료 분야에 몰두한 이승수 우체국장은 1급 치료사 수련중이다. 1급 치료사는 10회에 걸쳐 자신이 경험한 사례를 학술적으로 발표하고, 학회가 이를 인정해야 주어진다. 이승수 우체국장은 1급 치료사에 필요한 필기와 실기를 통과한 후 학회에서 여섯 차례 사례를 발표했다.이승수 국장은 의사로부터 정신질환을 진단 받은 환자를 치료한 현장 경험이 풍부하다. "한번은 의사가 공황장애라고 진단한 환자와 마주했어요. 무력감이 정도를 넘어 사무실에서 멍하니 앉아 있고, 일상생활조차 힘들 정도였지요." 영화치료사에겐 환자의 흐트러진 정신세계를 치유할 수 있는 영화를 선택할 수 있는 혜안이 최고의 역량이다. "자기애를 다룬 '레옹'이라는 영화가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 환자는 이 영화를 보고,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스스로 찾아냈습니다. 정신적인 원인만 찾으면 그 다음 치료는 어렵지 않아요. 원인을 찾으면 환자 자신이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어릴 적부터 영화를 좋아했던 이승수 국장은 2004년 위암 수술을 받은 후 인생관의 전환점을 맞았다. 대학원에 다니며 공부하고, 사회교육이나 심리학 분야에도 심취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만난 분야가 영화치료이다."2008년 이전엔 영화를 오락적 관점에서 바라봤지만, 이후엔 치료적 시각으로 접근했습니다." 영화치료에 관심을 쏟은 이후 공부한 영화는 무려 1000편이 넘는다. 치료의 재료로 괜찮다 싶으면 3번 정도 집중적으로 반복 감상하고, 영화 내면에 흐르는 메시지나 은유를 중점적으로 분석한다.영화치료에서 중요한 부분은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통로로 활용되는 핵심 사물인 일명'로즈버드'. '완득이'의 경우 로즈버드는 신발이고, '은교'에선 손거울이다."로즈버드를 찾아내고, 어떤 환자에게 이 영화를 제공할 것인지 분석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합니다. 치료할 영화의 폭과 깊이를 갖출수록 영화치료사의 역량도 커지니까요." 이 같은 연구작업이 쌓이면서 이승수 국장은 우석대에서 영화치료 전문강사로 활동하며, 영화치료 3급 치료사를 양성하고 있다.또 매월 마주막주 목요일엔 전주 독립영화관에서 '힐링시네마 인 전주'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영화치료를 일반인들에게 보급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 참가자들은 2시간 정도에 걸쳐 영화 한편을 보고, 1시간 정도 이를 주제로 토론을 이어간다.
대한민국 대표축제로 잘 알려진 김제지평선축제의 메인무대이자 사적 제111호인 벽골제 옆 아리랑문학관 마당에 지난 2010년 10월 세워진 국내 연예인 1호'효녀가수 현숙 효열비'.김제시 월촌동 장화마을에서 12남매 중 11번째로 태어난 현숙(본명 정현숙)은 치매를 앓던 아버지를 7년간 극진히 보살피고 중풍으로 의식이 분명치 않은 어머니를 14년간 모셔 온 국민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고 주변의 어려운 이웃 및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현숙의 효행은 전국적으로 이미 잘 알려진 사실로, 1996년 효행 연예인으로서 국민포장을 수상한 후 2001년 효령대상 효행부문상, 2007년 전북애향대상 및 김제시민의 장 효열장, 제33회 삼성효행상 특별상을 수상하는 등 내로라 하는 다수의 효(孝)부문 상을 수상했다.또한 지난 2004년부터 고향 김제를 비롯 울릉도, 경남 하동, 충남 청양, 전남 장흥 등에 혼자서 목욕 할 수 없거나 목욕탕을 갈 수 없는 노인들을 위해 이동식 목욕차량을 지원하는 등 노인들을 모시는 일에 앞장서고 있으며, 올 어버이 날에는 연평도 노인과 장애인들을 위해 이동식 목욕차량을 기증했다. 지난 2004년부터 서해 북단 연평도에 대당 4000만원 상당의 목욕차량을 벌써 10대째 기증한 것이다.이러한 현숙의 효(孝) 실천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10년 고향사람들이 현숙효열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 기금을 조성한 후 벽골제 옆 아리랑문학관 마당에 '현숙 효열비'를 건립하고 2010년 10월6일 현숙 효열비 제막식을 가졌다.현숙 효열비를 건립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전국 각지에서 적게는 만원 부터 수 천만원에 이르는 많은 성금이 답지해 평소 그녀의 효(孝) 실천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는가 가늠할 수 있었다."아마도 현숙의 목소리가 활기차고 밝은 이유는 매사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그녀의 평소 생활태도에서 나오는게 아닌가 생각되네요. 고향에 내려와도 그냥 상경하는 법이 없어요. 마을 사람들과 지인, 주변 노인들을 죄다 둘러본 후 상경한답니다. 정말로 천사예요 천사."마을 주민 A씨(65,여, 김제시 월촌동)는 현숙을 천사라고 표현하며 칭찬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는 시간이 나는대로 현숙 효열비를 찾아 닦고 청소하고 주변을 정비한다. 누가 시켜서라 아니라 자신이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다.현숙 효열비는 자신(현숙)이 마이크를 들고 노래하는 모습을 양쪽에서 어머니아버지가 지켜보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전국 어디서나 공연 할때면 사회자가 효녀가수 현숙이라고 소개 합니다. 그럴 때마다 솔직히 쑥쓰러워요. 자식이 부모를 모시는게 당연한 일이고, 저도 그일을 했을 뿐인데 효녀가수라고 불러주니. 아무튼요, 대한민국 모든 어르신들이 행복한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사랑 나눔 실천을 계속 하고 싶습니다. 지켜봐주시고 용기를 주세요."현숙은 지난 4일 서울 쉐라톤 그랜드 워키힐에서 열린 '효(孝)사랑 나눔 디너쇼'에서 1억원 기부를 약정하고 아너소사이어티 회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 남원 중앙초등학교에서는 '색소폰 늦바람'이 불고 있다. 5060대에 취미로 시작한 10여명의 섹소폰 연주는 '봉사활동(위문공연) 신바람'으로 이어지면서, 드림색소폰앙상블(단장 조운기)은 남원에서는 어느새 유명세를 타고 있다. 정진수, 이윤기, 조운기, 서기진, 강경주, 김현숙, 고재훈, 이병영, 김경숙, 김태민, 심상길, 이진식, 조형래, 안효창 씨 등 현직 교장과 교감, 농협조합장, 건축사무소장, 약사, 한의원장, 전직 군수와 구청장 등이 직업과 나이에 관계없이 떼를 지어 연습할 때부터 보통 바람이 아니었다.이들은 지난 4월17일 문화체육센터에서 개최된 '제33회 장애인의 날' 행사에서 아름다운 선율을 선사하며 장애인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또 매년 남원시와 남원교육지원청의 평생교육 우수 프로그램 발표회에 찬조 출연하고 있고, 지난해 12월15일에는 제1회 남원시민과 함께하는 송년 발표회를 갖기도 했다. 불러주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찾아간다는 것이 이들의 연주 자세로, 그동안 수십차례의 위문공연이 펼쳐졌다. 물론 무료 공연이 기본 전제다. 또 시민들에게 무료로 색소폰 지도를 진행중이며, 부녀자와 장애인 등에게는 악기를 무료로 대여해 주기도 한다.2011년 6월에 회원 12명으로 창단된 드림색소폰앙상블. 짧은 활동기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연주 실력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다. 관악부 교사로 40년간 근무한 정진수(69) 씨가 이들을 지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감 있는 연주가 이들의 꿈을 모락모락 키우고 있고, 이들의 간절한 소망은 회원 수를 50명까지 확대해 '색소폰 오케스트라'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오케스트라단을 남원시에 기증하고 싶은 마음이다. 고령화와 지방화 시대에 색소폰이라는 취미로 뭉친 이들의 목표가 바로 시민들을 위한 아름다운 공연이기 때문이다.조운기(66) 단장은 "색소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드림색소폰앙상블을 만들고, 단원들이 봉사활동으로 공연을 펼칠 수 있어 신바람이 난다"면서 "남원시민들에게 수준높은 공연을 선보이기 위해 열심히 연습하는 단원들이 자랑스럽다. '멋진 인생, 멋진 만남'이라는 목표에 걸맞게 행복을 연주하는 드림색소폰앙상블을 기대해달라"고 밝혔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 대랄 드대욜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 가논 대 졈그랄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정읍에서 천년이 넘게 불린 백제가요 정읍사(井邑詞)는 천년세월을 건너 남편을 그리워하던 백제여인의 염원을 표현하고 있다.남편이 먼길 행상을 떠났던지, 위급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쟁터에 출정했던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그리워하는 간절한 애달음이 드러난다.정읍시 신정동 정해(井海) 마을은 백제가요 정읍사의 발원지다. 백제시대 정읍의 지명은 정촌현(井村縣)이었고 이곳에 정해마을이 있었다. 1789년(정조13년)에 발간된것으로 추정되는 호구총수(戶口總數조선시대 한성과 각 도의 호수와 인구수를 기록한 호구통계 기록)에는 정읍현 남일면 정해리로 기록되어 있다. 정해는 일명 샘바다라고 하며 이곳에 정자형 우물의 큰 새암이 있었다고 한다. 이 우물은 정읍시 남쪽 신정동 정해마을에 옛부터 있어왔던 정자(井字)우물로서 큰 새암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왔다.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마을의 지형이 배(船)의 형국으로 가정에 우물을 파면 배의 밑바닥에 구멍이 뚫리는 형태이고 배의 밑바닥에 구멍이 뚫리면 배가 침몰된다는 논리에 따라 근래까지 가정에 우물이 없었으며 100여가구 대촌(大村)에서 생활용수를 이 우물에 의존해 왔기 때문에 큰 새암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바로 이 우물에서 정촌이 시작되었고 정읍이라는 도시의 이름이 시작되었다.백제가요 정읍사의 발원지인 정촌현의 옛터인 정해마을에 400여년동안 가정과 마을의 번영을 기원하며 마을을 바라보고 있는 나무가 있는데 마을사람들은 '부부나무'라고 부르며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여겨 오고 있다.부부나무라 불리는 것은 두그루의 나무가 붙어 하나가 되어 400여년을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조선 숙종2년(1676년)에 이 고을에 사는 안윤형이라는 사람이 아들4형제가 병과에 급제하자 잔치를 열고 우물가(정읍시 용산동 606-2)에 물버드나무와 팽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고 전해진다.부드럽고 자애로운 여성을 상징하는 버드나무와 강인하고 용맹스러운 남성을 상징하는 팽나무가 자라면서 서로 끌어 안고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마을사람들은 이 부부나무의 형상이 행상을 나간 남편의 무사귀가를 기다라는 백제가요 정읍사 여인(망부석)의 애절한 사랑의 기운이 깃들어 있다고 믿고 있다.정해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이후로 정해마을에서는 결혼한 부부가 백년해로하고 금실이 아주 좋아 아직까지 헤어진 부부가 없다.또한 부부나무 주변에는 그때 같이 심었다는 악수나무(팽나무새나무)와 형제나무(팽나무)가 있어 이웃끼리 화목하고 형제간 우애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마을의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다.이에 따라 400년의 세월을 함께한 부부나무는 지난2001년 8월16일 보호수로 지정되었으며 수고 15m에 나무둘레 1.3m를 자랑한다.정읍시와 (사)정읍사문화제전위원회는 매년 10월개최하는 내장산단풍축제 시작을 이곳 우물에서 채수의례로 시작해 정읍사와 부부사랑을 테마로 전통혼례 재현행사도 개최하고 있다.정읍역은 KTX열차를 활용한 부부사랑 행복열차를 운영해 정해마을과 부부나무의 스토리텔링으로 신혼여행 기분을 느낄수 있는 프로그램을 계획중이며 (사)사랑나눔 행복만들기운동본부에서도 4월21일 부부의날과 5월 가정의 달에 부부나무와 연계하는 방안을 추진중이다.이처럼 부부나무가 알려지면서 나무의 좋은 기운을 받아 화목한 가정과 부부의 금실을 위해 부부나무을 탐방하는 사람들도 점차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브라운관 흑백 TV, 풍금, 타자기, 유성기에서 두레박, 달구지, 요강 등 언제부터인가 곁에서 사라져 간 물건들.색 바랜 흑백사진 속 촬영 날짜와 촬영 동기 등을 기록한 어색한 글씨체와 1950~60년대 행사 팜플릿, 그리고 빛바랜 초등학교 졸업앨범 등은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다.세상에 나와 제 할 일을 다 하며 사람들의 손때를 타던 물건들이 단지 빠르고 편리함만 좇는 세파에 밀려 추억 속으로 사라져 갔다."사람과 물건 모두가 서로 존중할 줄 아는 세상이 조화로운 세상이다"며 한때 유용하게 사용되다 사라져 간 물건들이 안타까워 수집하기 시작한 이황세 군산향토민속박물관장(65).지난 2010년 군산 동초등학교 평교사로 퇴직한 이 씨는 지난 30여년간 군산지역에서 낡고 버려지는 물건들을 수집해 왔다. 수집된 각종 물건이 차고 넘치면서 2002년 군산 개정면 운회리 정수마을 2145㎡의 부지를 구입해 사설 박물관 '군산향토민속박물관'을 개설해 박물관장 겸 향토역사를 이야기해 주는 스토리텔러가 됐다.이 관장은 '거체전진(擧體全眞)' 즉, 모든 존재는 그 나름대로 온 힘을 다해 존재한다는 화엄경의 경전 구절을 바탕으로 물건들도 사람들을 위해 진실을 다해 존재했다는 마음으로 대하다 보니 어느새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가 돼 수만점은 족히 될 것이라고 추측했다. 1980년대는 군산에서 아파트 건축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아파트가 하나 둘 들어서면서 기존 단독주택 형식의 주거형태와 생활 습관이 급격히 바뀌면서 살림살이들도 아파트에 맞는 물건들에 밀려 버려지기 시작했다.이 관장은 "80년대 아파트로 이사가면서 골목마다 버리고 가는 세간살이들이 가득했다"며 "멀쩡한 물건들이 단지 유행에 뒤떨어진다는 이유만으로 버려지는 것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돈을 들여 구입하지 않고 오직 발품을 팔며 모은 것들이지만, 이곳에 소장 중인 물건들은 모두 군산에서 사용됐던 물건과 자료들로써 귀중한 향토자료로 평가받고 있다.이 관장의 시대와 장소를 넘어선 수집 열기는 대단하다. 한번은 모두 떠난 빈집에 들어가 혹시 버려진 물건이 있나 살피러 다락방에 올라갔다 떨어져 팔이 부러지는 바람에 보름 이상 병원신세를 졌다.또 1996년 산림관리 도로를 개설하던 대야면 산월리 현장 절단부에서 옹관의 작은 파편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예사롭지 않아 군산대학교 박물관에 알리면서 이곳이 '산월리 고분지역'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현재 군산향토민속박물관은 시가 운영하는 근대역사박물관에서 기획전시 의사를 타진해 올 정도의 규모를 소장하고 있다.이 관장은 당초 박물관 조성을 2012년까지 마칠 계획이었지만, 최근 차질이 생겼다. 소장품들을 제대로 전시하려면 전시공간 등 규모가 최소 6600㎡는 돼야 하지만 초등학생 견학의 경우, 최대수용인원이 60명에 그치는 등 협소하기 때문이다.이 관장은 "이곳의 소장품들과 유사한 물건들로 꾸며 놓은 제주도의 사설 박물관은 관광명소가 됐다"며 "소장물품이나 종류 면에서 훨씬 우위에 있음에도 장소가 협소해 제대로 전시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그는 "새만금이나 금강 하굿둑 인근에 더 넒은 부지가 마련된다면 노천박물관이나 다름없는 군산의 역사를 제대로 전시할 계획이다"며 "개인이 하는 문화사업에 대해 지역에서 제대로 평가하고 힘을 북돋워 준다면 결국 모두의 자산이 될 것이다"고 강조했다.
"영험있는 마이산 탑사가 현대인의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세계 제일의 '힐링 템플스테이'로 거듭날 날도 머지 않았습니다."108기의 돌탑군이 자리한 진안 마이산 탑사에서 4대째 주지직을 맡고 있는 청파진성(靑波眞聖법납 28) 스님.숱한 신화적 이적을 남긴 증조부 이갑용 처사의 유지를 계승하고 있는 진성스님은 탑사를 '명상 음이온 치료의 도량'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드러내며 이같이 말했다.그 첫 걸음으로, 200억 규모의 '탑박물관' 건립을 계획하고 있는 진성스님은 "명상하며 음과 양의 기운을 느끼고 탑을 쌓는 체험을 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힐링도량의 모태가 될 탑박물관 건립을 위해 현재 그 필요성을 몸소 알리고 있는 진성스님은 10년 뒤면 그 꿈이 현실화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이같은 청사진이 관심을 끄는 건 비단 사찰 자체의 정화사업에 그치지 않고, '관광 한국'의 일익을 담당케할 복안이 잠재되어 있어서다.한국을 찾을 외국 관광객들이 탑사에 꼭 한번은 들르도록 해 탑쌓기 체험과 함께 명상치료를 할 시스템을 만들 계획이라는 진성스님.이를 위해 소원바위인 천지탑 주변 바닥에 방부목을 깔아 최적의 물리적 (명상)기반을 마련키로 한 진성스님은 "마이산 일대(바위)에서 음이온이 방출되고 땅 속에서 기가 센 알카리수가 나온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다면 세계 제일의 '힐링도량'으로 우뚝서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자신했다.세계 명상의 중심지로 키워나갈 야심찬 계획과 함께 진성스님은 국내에 국한되지 않은 봉사활동을 통한 국위 선양에도 열의를 보이고 있다.2010년에 결성된 (사)나누우리를 통해 동남아를 중심으로 (초등)학교 설립에까지 나서고 있는 것.조건없는 나눔은 소속된 한국불교태고종 종단 스님 20여명과 함께 우연잖게 라오스를 다녀온 게 계기가 됐다.현재 (사)나누우리 운영재정이사를 맡고 있는 진성스님은 "당시, 라오스 현지를 가보니 제대로 된 학교하나 없어 가슴이 아팠다"면서 "그래서 힘이 될 일을 찾다가 현지에 학교를 지어주기로 마음 먹었다"고 했다.이에, 진성스님의 발품에 의해 이듬해(2011) 라오스 루앙프라망주 씨앙은시에 3개교실 1개동의'밴마우스 나누우리 초등학교'를 설립하게 됐다고 한다.진성스님은 "학교 설립과 함께 이 현지에 한글 학교명과 태극기가 내걸렸다"면서 "이전만해도 구호활동은 일본의 전유물로만 알고 있던 현지인들에게 한국을 가슴으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고 뿌듯해했다.이를 필두로 그는 올해 말 캄보디아 씨엠림 5개 초교에 2000만원 상당의 교과서를 전달하기로 한데 이어, 동남아 모든 국가에 한국어로 된 교명이 들어간 학교를 하나씩 세울 계획까지 세워뒀다.탑사가 본거지인 (사)나누우리 전북지부가 주축이 된 (사)나누우리의 봉사영역은 국외뿐 아니라 국내에도 뻗치고 있다. 아이티 지진때 500만원의 성금을 쾌척했는가 하면, 천안함 사태때 침몰한 금양호 선원 가족들에게 위로금을 전달하기도 했다.진성스님은 이 외에도 선친의 존명을 딴 '갑룡장학회'를 통해 1993년부터 지역 불우학생들을 위해 매년 2000만원가량의 장학금을 내놓고 있다.
"맹자 왈~~ 사숙위대요~ 사친위대하니라."(맹자 말씀하시길, 무엇을 섬김이 큼이 됨이요? 어버이를 섬김이 큼이 됩니다)"하서선생은 태양과 별처럼 빛나는 위대한 분이시지만 저는 칠야삼경(漆夜三更, 캄캄하게 어두운 한밤중)의 반딧불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순창의 역사적 가치를 알리고 인재양성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순창군 복흥면에 위치한 훈몽재에서 지난 2011년부터 후학을 가르치고 있는 김충호 산장(66).김 산장은"내가 단국대학교에서 24년동안 근무하고 정년한 뒤에 강원도 산중에서 산동서당을 지어놓고 강학을 하고 있었어. 그런데 훈몽재를 복원하기 시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지. 하서선생은 우리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배양이 되신 훌륭한 분이어서 평소에 존경하는 인물이었다"며 말을 이었다.그는"그러던 차에 순창군에서 네차례나 강원도까지 올라와 후학을 키우는 일을 맡아달라고 하는데 그런 훌륭한 강당에서 인재를 키워내는 것도 말년에 큰 보람이 있는 일이라 느껴서 흔쾌히 결정하게 됐다"며 순창 훈몽재와의 인연을 설명했다.김 산장은 특히 "방학이면 유학관련학과 대학생들이 훈몽재를 찾아 단기반이나 장기반 등의 수학을 하고 있다"며"이렇게 시작된 훈몽재 산장 역할은 매우 보람된 일이다"고 말했다.김 산장은 또 "학생들이 배운대로 잘 외우고 실천하고 공부 진도가 날마다 일취월장하면 내가 매우 기쁘다"며 "특히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이 박사가 되어서 교수를 발령받아 나간다든지, 감사하다고 인사를 오게 되면 내가 더 한없이 고맙고 즐거운 마음이다"고 말했다. 김 산장의 유학과의 처음 인연은 어린 시절 가정에서부터 시작됐다. 광주광역시 출생인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가야 되는데 유학을 공부하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중학교를 가지 말고 유학공부를 해서 문중 조상들의 유업을 계승해야 된다는 엄명을 내렸다.장남이었던 김 산장은 뜻을 어기지 않고 서당에 가서 유학공부를 시작한 것이 인연이 돼 한평생을 유학공부에만 전념했다.김 산장은"반듯한 마음으로 반듯하게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곧을 직이이다"며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유학의 기본 정신이며 그런 사람이라야 훌륭한 인재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김 산장은 "요즘은 그런 교육을 안받으니까 도덕이 땅에 떨어져 세상이 어수선해지는 거고 논어 맹자를 배워야 큰 사람이 돼. 훈몽재에 와서 공부하면 하서선생의 깨끗하고 맑은 정신을 배우는 거지. 그런 정신을 배우면 훌륭한 인물이 쏟아져 나올 거라 확신한다"고 거듭 강조했다.조선최고의 명문학당인 훈몽재 옛터에 오랜 시간과 염원이 함께 모여 복원된 훈몽재에서 하서선생의 뜻을 기리고 그분의 정신을 이어가고자 하는 김충호 산장은 순창관내 사람을 비롯해 많은 현대인들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고 깨달음의 시간을 갖기를 원하고 있다.한편 훈몽재는 하서 김인후 선생이 명종 3년(1548년)에 순창 쌍치 점암촌으로 이주해 초당을 지어 훈몽재라 이름을 짓고 후학을 양성한 곳으로 지난 2009년 11월 쌍치면 둔전리에 훈몽재, 자연당, 양정관, 삼연정 등 4동이 중건됐다.
장수군 번암면 죽산리 대성방마을에서 판소리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후진양성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국악인이 있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심청가' 예능보유자 유영애 명창(65·여)이 주인공. 번암면 동화댐 근처에서 소리공부를 하다 장수의 풍경에 빠져 지난 2002년 대성방마을에 터를 잡았다. 유영애 명창은 이곳에 '유영애 판소리 전수관'을 짓고 11년째 운영하고 있다. 전라남도 장흥에서 태어난 그는 13세때 우연히 여성국극을 구경한 뒤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목포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상룡 선생에게 판소리를 사사했다. 이후 성우향 선생에게 '춘향가'를, 한농선 선생에게는 '흥보가'를, 조상현 선생에게 '심청가'를 사사했다. 그의 소리는 목이 실하고 소리가 구성지며 여성이 감당하기 어렵다는 하성, 특히 하성의 배음인 중화성에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지난 1984년부터 (사)판소리보존회 이사로 활동하며 독일 퀼른대·뮌헨대 초청 유럽 순회공연, 국악선교회 주관 미주 순회공연, 스위스·벨기에·프랑스·이탈리아·일본·홍콩·헝가리·중국·호주공연 등을 통해 우리 음악의 세계화에 공헌했다. 판소리 완창 발표회만 무려 40여회를 넘게 가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난 2002년부터는 유영애 판소리 전수관에서 '산자락 국악한마당 공연'을 8회째 개최하고 있으며, 2010년부터 '논개판소리 전국경연대회'를 주관하고 있다. 전남대 국악과와 영남대 대학원, 남원정보국악고 등에 출강하며 후진양성에 힘써왔던 그는 현재 남원국립민속국악원의 90여명의 단원들을 이끄는 총예술감독으로, 우석대 대학원 강사로, 전국의 각종 국악경연대회 심사위원과 심사위원장은 물론 공연까지 펼치며 국악 발전을 위해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의 전수관에는 국악인과 전수생뿐만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연간 수천명이 드나들고 있어 장수군의 홍보대사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하지만 그가 명창이 되기까지 순탄치만은 않았다. 갓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인 8세에 학교도 빼먹을 정도로 판소리에 빠져들었고, 대쪽같던 부친으로부터 불호령을 들어야 했다. 자나깨나 판소리를 잊지 못하던 그는 마침내 가출을 결정했다. 당시 나이 13세였다. 언니가 살고 있는 광주를 거쳐, 외삼촌이 계시는 서울로 향했다. 서울역에서 3일을 방황하다가 신촌에서 병원을 하시는 외삼촌 집을 찾아가 병원 일을 돕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 부친에게 붙들려 장흥으로 내려갔다. 그는 울며불며 가족들을 설득하기에 나섰고, 소리공부만 하게해 달라는 그의 간곡한 부탁에 부친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 그는 "제2의 고향인 장수에서 남은 여생을 봉사하며 살고 싶다"면서 "전통음악을 통해 소외계층에게 꿈과 희망을 전하고, 재능기부를 통한 나눔을 실천해 더불어 살아가는 따뜻한 사회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장수에 정착한 게 아니다"며 "장수를 국악의 성지로 만들어 보람을 느끼는 일을 하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기력이 남아 있는 한 '산자락 국악한마당 공연'을 개최하고 싶다"는 그는 "전수관 앞 대나무 숲에 공연을 할 수 있는 작은 무대를 설치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철부지 어린 소년의 나이는 아홉살, 남들은 한창 어리광을 부릴 나이에 그는 어른들이 노는 굿판에 어울려 꽹과리를 잡았다.흥겨운 춤사위와 농악소리에 소년의 심장은 마냥 뛰었고 성인이 된 후에는 국내 최고의 명인이라는 인간문화재로 성장했다.지금은 필봉농악을 짊어지고 세계 곳곳을 누비는 예술인으로써 후학양성과 고향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는 양진성(48) 회장이 주인공이다.전주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인 전북 임실군 강진면 필봉마을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국내 최초의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인물들이 있다.지금은 작고했지만, 지난 87년 호남좌도농악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도상쇠 양순용씨가 그의 부친이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일찌기 농악에 눈을 뜬 양회장은 초등학교부터 전국 어린이 농악대회에 출전, 3년 연속 개인연기상을 휩쓸었다.80년 섬진중 시절에는 국내 사물놀이 창시자로 알려진 김용배씨와 김덕수씨로부터 기능을 전수받아 농악에 본격적으로 눈을 떴다.더 많은 실력을 쌓기 위해 고교는 서울국악고와 남해고, 임실서고 등을 전전했고 우석대가 국악과를 신설하면서 전문교육의 기틀도 다졌다.이를 계기로 그는 국내 각종 행사에 농악대표단으로 활동했고 러시아와 미국, 캐나다 및 유럽 등지를 돌며 한국농악의 우수성을 알렸다.하지만 95년에 이르러 어버지의 임종 소식을 듣고 고향에 돌아온 양회장은 고향인 필봉마을에 정착, 현재의 필봉문화촌을 세웠다.지금은 6만여㎡의 부지에 연습실과 공연장을 비롯 강연장 및 숙박시설을 두루 갖추고 농악을 전수했지만 당시로서는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초대 단체장인 이형로 전 군수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문을 연 문화촌은 현재까지 전국 각지에서 10만여명의 전수생이 필봉농악을 익혔다.필봉굿의 정수는 해마다 정월대보름에 열리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서, 도내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체험객들이 몰려들고 있다.또 필봉전통문화체험학교도 연중 상시적으로 운영하고 풍물과 난타, 탈춤 등 다양한 배울거리와 만들거리를 비롯 즐길거리 등도 제공하고 있다.한켠에 마련된 필봉한옥촌에는 가족과 계절, 모임프로그램을 통해 다도와 먹거리 등 다양한 한옥체험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이즈음에 그는 대학원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2008년에는 인간문화재 국내 최연소라는 기록도 갈아치워 부친의 유고를 받들었다. 양회장의 직접 참여를 통해 필봉문화촌에서는 5월에서 9월까지 필봉굿과 마을굿, 퓨전국악 등을 상설해 공연하고 있다.더불어 한옥의 자원활동을 위해 야간상설공연으로'웰컴 투 중벵이골'을 운영중에 있고 필봉농악 전수교육은 연중 신청을 받고 있다.특히 그는 고향사랑과 지역발전을 위해 강진장날이면 필봉농악 무료공연을 실시, 방문객 유치에도 기여하고 있다.지금도 전국 유명단체와 기업, 공공기관 등에서 거액의 수강료를 제시, 강연과 교육 등의 주문이 쇄도하고 있지만 그는 필봉문화촌을 굳게 지키고 있다. 양회장은"돈을 벌려고 작정했으면 서울 거주나 해외공연에 전념했을 것"이라며"필봉문화촌이 자랑스런 관광자원으로 자리할 수 있도록 혼신을 바치겠다"고 강조했다.
"병풍을 쳐놓은 듯 아름답게 펼쳐진 산을 벗 삼아, 세상 시름 잊게 해주는 바람을 맞는 기분, 태권도원에 울려 퍼질 세계인들의 함성을 상상해 보는 일, 이곳에 있어 제가 행복한 이유입니다."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고르며 태권도원 전망대에 오르는 길.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음을 알리듯 길목을 막아선 작은 컨테이너 앞에서 태권도원 전망대 지킴이 배재숙(84) 할아버지를 만났다. 태권도원 전망대에 올라보고 싶어 왔다는 낯선 길손의 말에 "태권도원 전망대가 지금 공사 중이예요. 9월 정도면 전망대에 올라 태권도원의 장관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바람이 아직은 찬데 들어와서 차나 한 잔 하고 가요"헛걸음한 길손에게 미안한 듯 따뜻한 마음을 먼저 건네는 할아버지는 팔순이 넘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정한 모습이었다. 하얗게 샌 머리와 덥수룩한 흰 수염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배재숙 할아버지는 깊은 산 속에서 무술을 연마하는 도인의 형상으로 태권도성지의 신비감을 더해주고 있었다. "태권도원 유치에 나서고, 전망대를 지키며 홍보하고, 성공적 조성을 기원하는 일까지…. 개인적으로도 태권도공원과는 아주 인연이 깊습니다. 그래서 더 애착이 가고 또 기쁘게 일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설천면에서 태어나 평생을 이곳에서 살고 있는 배재숙 할아버지는 태권도원 유치전에서도 선두에 섰었다. 태권도원 홍보책자에는 굴지의 단골모델로 등장해 전국을 무대로 무주에 태권도원이 조성돼야 하는 당위성을 설명하며 다녔고 유치 후에는 태권도원 조성 추진위원회에서, 그리고 지난해까지는 태권도공원 전망대에서 지킴이로서 책임을 다했다. 지금은 공사 중인 전망대 대신 길목을 지키며 이곳을 찾아오는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태권도원을 홍보하고 있다. 공사 중인 것을 모르고 전망대를 찾는 방문객은 하루 열 명 내외. 이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전하기 위해 날마다 태권도와 태권도원에 대한 신문기사와 자료들을 스크랩하며 공부를 한다고 했다."앞으로 바람이 있다면 민자 유치가 잘 되고 태권도원을 조성할 수 있는 예산이 좀 더 풍족해지는 것, 또 무주-설천 간 도로 확포장 공사 등 현안들이 말끔히 해결돼 예정대로 태권도원이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이 허락을 하는 한 하얀 도복을 입고 태권도원 지킴이를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뭐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바로 저죠" 태권도원은 배재숙 할아버지가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을 뿜어낼 수 있는 비결인 듯 보였다. 공사 중임에도 매일 아침 8시 30분이면 어김없이 태권도원을 향하는 배재숙 할아버지는 태권도원 조성사업이 예산 등 여러 가지 현안에 부딪히며 주춤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국익을 위해 국민 모두가 마음을 모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덧붙이는 배재숙 할아버지. 하루 종일 손님들을 대하다보면 목이 쉬기 일쑤지만 전국 각지에서 찾아와 태권도원의 성공적 조성을 기원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을 만나면 피로는 느낄 겨를이 없다며 '허허' 웃음을 웃어보였다. 세계 태권도인의 요람이 될 태권도원에서 배재숙 할아버지를 다시 만날 그날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남원시 도통동에 위치한 선원사(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 말사)의 운천 주지스님은 '짜장 스님'으로 통한다. 짜장면을 만드는 스님, 다소 생소하게 들릴 것이다. 그렇다면 운천 스님은 왜 짜장면을 만들까? 팔기 위한 짜장면이 아니다. 어려운 환경의 이웃 등을 공양하기 위한 사랑의 짜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스님은 노숙자, 가난한 노인, 군인, 재난지역, 복지시설 등 짜장면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고 있다. 2009년 11월부터 최근까지 이뤄진 짜장 봉사활동은 180여회에 이르고, 대략 8만3000그릇이 이웃들에게 제공됐다. 물론 일체 무료다. '왜 이렇게 열심히 짜장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느냐'는 질문에, 스님은 "세상을 살면서 함께 나누는 것 보다 좋은 공덕은 없다. 헐벗고 외로운 이들을 찾아가 따뜻한 음식을 제공하는 것, 그것이 부처님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답했다.짜장과 스님의 인연은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운천 스님은 지난 2009년 태안 앞바다 기름유출사고 때 짜장면 봉사활동을 펼쳤다는 한 처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무릎을 쳤다고 한다.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많은 분들이 작은 행복을 맛볼 수 있다면 '찾아가는 불교'를 실천하는 것이라 판단했던 것.처음에는 "남원지역에서나 봉사활동을 하지, 왜 타지역에까지 나가느냐"며 적잖은 오해를 받기도 했다. 스님은 기존 관념과 영역을 탈피하고 싶었다고 한다. 천주교, 원불교, 기독교 등 종교를 가리지 않고 짜장 봉사활동을 고집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스님의 짜장 재료도 관심사다. 과연 고기가 들어가느냐? 스님은 짜장면에 고기를 넣어달라는 요청이 있을 경우, 돼지고기를 사용한다고 솔직하게 답변했다. "이왕 마음을 주려면 정성을 다해 줘야한다"는 게 스님의 판단이다. 또 짜장면에는 양파, 표고버섯, 감자, 당근 등 20가지의 재료가 사용된다. 모두 건강식이다. 스님과 신도들이 직접 가꾼 채소를 주재료로 해서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도 수원, 위도 등 전국각지를 돌며 봉사활동을 펼치다보니 차량 유지비와 재료조달(밀가루 등)에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 스님은 이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지리산에서 야생하는 돼지감자를 수확해 당뇨와 다이어트에 좋다는 국우차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지만, 여전히 자금난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 처지다.최근 짜장면 빼는 기계에 손까지 크게 다쳤는데도 스님은 봉사활동을 중단할 생각이 없다. 운천 스님은 "봉사활동을 즐기면서 하다보니 너무 재미가 있다. 작은 것에 만족하고, 노력하면 길이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면서 "앞으로도 짜장이 필요한 곳은 언제든지 달려갈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운천 스님은 지난해 지구촌공생회가 건립한 네팔의 한 초등학교에 2000만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고창은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천년의 세월 동안 도자기 문화가 활짝 핀 곳이다. 이곳에서 나는 고창자기는 고려조의 고려청자로 부터 조선조 말의 술병, 사발에 이르기 까지 천여년의 우리나라 도자기 기술을 전승하는 자기다. 고창군 아산면 선운산 자락에서 '선운자기'란 이름으로 묵묵히 고창자기의 맥을 잇고 있는 도공, 청사 김종한씨(56·한국미술협회 고창지부장). 그는 1973년 청자의 대가인 동곡 류하상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도예의 첫발을 내디딘 이래 고려청자의 상감류, 분청사기의 이조자기를 재현하며 41년째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대부분의 도공들이 힘든 전통방식의 장작가마를 포기한지 오랩니다. 장작가마는 이젠 전시용으로 전락해 버렸고 손쉬운 전기나 가스가마가 그자리를 대신 차지해 버렸습니다."도예계에선 김종한씨의 작품이 전통도자기의 세계를 섭렵하며 이미 경지에 달했다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선운자기 가마터 옆으로 마련된 김종한 대표의 작품 전시실에는 물레질하는 도공의 숨결과 밤세워 가마불을 응시하며 흘린 도공의 땀방울, 사위어 가는 불길에 도공의 가슴뛰는 설렘이 스민 소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김 대표의 작품 가운데 '청자 2중 투각 목당초문항아리'는 작품이 2중으로 되어 있고 표면을 당초문항으로 투각하였으며, 선대부터 자연유약을 고집한 작품으로 난이도가 높은 수작이다. 두개의 항아리가 완벽한 조화를 이뤄 하나의 짝으로 완성되므로 아주 작은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다.전통자기의 색깔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는 불과 흙과 유약이라고 한다. 김대표는 "그중에서도 '불'은 돈을 주고도 얻을 수 없는 비법으로, 불 조절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질이 달라지며, 불길을 조절하는 능력은 기나긴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한 힘든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또 "대개 백자와 청자의 경우, 가마 안에서 밖으로 불길이 나올 정도의 '환한 불'을 유지해야 하는 반면, 분청사기는 가마안에 불이 꽉 차지 않는 '산화 불'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말로는 쉽지만 장작가마가 사라지면서 불 조절법을 아는 도공이 이제는 거의 없다."고 씁쓰레 했다. 선인들의 애환과 인내를 배우기 위해 전통가마를 고집하는 김 대표는 1990년 선운사 근동에 선운자기를 설립하고, 전통방식으로 도자기를 굽기위해 경사진 언덕에 여러개의 조그만 산봉우리 모양의 '봉우리 가마'를 만들어 지금까지 불을 지피고 있다. 봉우리 가마는 조선시대 백자를 굽는 가마로 개발됐다. 많은 시행착오와 각고의 노력으로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이 분야의 최고가 되었다. 그의 선운자기는 설립된지 8년만에 전라북도 최고 명품업체로 지정되었으며, 그의 작품들을 통해 신미술대전 특선, 신미술대전 추천·초대작가, 전통공예 전국 공모전 심사위원, 전북도 전통공예인협회 회장, 한국미술협회 고창지부장(현) 등의 결실을 거두었다. 김 대표는 "지금은 기술의 발달로 장작대신 편리한 가스가마를 사용하지만, 전통적인 우리 도자기의 깊이를 재현할 수 없기에 굳이 어렵고 실패 확률이 높은 전통가마를 고집한다"고 말한다.전통자기는 우선 배우기도 쉽지 않지만, 현실적으로 생활을 보장해 주지 못해 힘들다. 그러다 보니 뒤를 이으려는 사람도 없다. 김 대표는 또 "지금까지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전통자기를 고집하고 있지만, 아들한테 이 일을 물려주어야 할지 고민"이라며 "아들한테 곤궁한 도예의 길을 강요할 순 없잖습니까"라고 되물었다.김종환씨는 호구지책으로 고창군으로부터 선운산 집단시설지구 상가를 임대하여 특산물판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도자기 옆에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는 김종환씨가 한눈팔지 않고 고창자기의 전통을 보존하고 계승할 수 있도록, 평생을 바쳐 온 도공의 길을 마음놓고 걸을 수 있도록 그의 여건이 나아지기를 기대해 본다.
결혼식 주례를 1500여차례나 보면서 주례의 명인으로까지 인정을 받는 강대양(73) 전 정읍수성초등학교 교장이 세간의 화제다.명인으로 불리는 것은 그만큼 주례로서 혼주와 신랑신부는 물론 하객들에게서까지 호응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강 전교장의 주례사는 3분 ~ 3분30초정도에 집약되며 신랑신부와 하객들의 집중을 이끌어내는것으로 유명하다. "오랜 기간 주례를 서다보니 주례사가 길어서 좋은 것도 아니고 신랑신부는 긴장해서 듣는 것 같지도 않고 해서 노하우로 연구한 시간이 이정도인데 다들 좋아합니다. 또 예식장에서 주례사 짧게 해달라고 은근히 요청하기도 하고요."강 전교장은 주례사에서 감사와 사랑, 예절, 믿음 4가지를 강조한다. 특히 2010년부터는 신랑신부와 대화식 주례사를 진행하며 긴장감을 최대한 풀어주기 위해 노력한다.그는 먼저 부모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사랑과 정성으로 기르고 성장시켜서 결혼까지 부모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이다.또 부부간에 희생과 봉사의 아가페적인 사랑을 강조하며 신랑신부에게 사랑을 받고싶으냐 또는 주고싶으냐고 질문한다."대개 신랑들의 답은 받고싶다. 신부는 받고도싶고 주고도 싶다고 답하면서 주목을 하게되는데 곧바로 상대방을 섬기고 존경하는 예절을 갖춰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입니다."강 전교장이 처음 주례를 선것은 1976년 당시 정읍농고(현 제일고)앞에 개장한 목화예식장에서 였다. 북면 보성초에서 시내권 서초등학교로 부임했는데 경찰서에 근무하던 친구가 조카 주례를 부탁하면서다."나이도 젊은데 무슨 주례냐며 완강하게 거절했는데 친구의 품격과 인성을 인정하니까 부탁하는 거라며 좋은 말 해주라고 해서 맡게 된 것이 그동안 1500여 차례나 서게 됐습니다."첫 주례사를 어떻게 했는지도 모를정도로 긴장했는데 차츰 여유도 갖게 되었다는 그는 주례를 서고 나면 바를정(正)자로 횟수를 표시했다. 이후 휴대전화가 보급되면서는 신랑 핸드폰번호를 저장해 두고 결혼기념일에 먼저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다."기간이 좀 지난 신랑들은 전화를 걸면 모르는 경우도 있는데 결혼식 일시와 장소를 말하며 주례를 섰었다면 깜짝 놀라면서 좋아하는데 이들에게 잘 살아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꼭 합니다."주례 부탁은 제자들과 주위의 지인들도 하지만 다문화가정의 합동결혼식은 물론 장애인 결혼식에서 주례도 가끔 서게 된다.다문화가정 합동결혼식은 시청이나 결혼식을 지원하는 미용협회등에서 들어온다. 또 1978년 특수교육자격증을 따서 가르치게 된 장애인 제자들의 주례를 서기도 했는데 장애인들끼리 소문이 나면서 주례부탁 연락이 오면 봉사의 자세로 거절치 않는다. 강 전교장은 주례를 서면서 많은 손수건을 전달했다. 새 손수건을 가져가 긴장한 신랑들이 땀을 흘리면 주례사 도중에 신부에게 전해주며 땀을 닦아 주도록 배려한다. 그는 결혼식 전날 친구들과 과음한 신랑들도 숙취로 많은 땀을 흘리더라고 회고했다. 몇년 전에는 전남 곡성까지 초빙되어 주례를 섰는데 앞선 예식과 하객들은 중복된 상황에서 주례사를 마친후 하객들의 기립박수를 받기도 했다.강 전교장은 주말이면 주례 부탁으로 다른 일정은 뒤로 미룬다. 자신도 목욕을 하고 마음부터 외모까지 정갈한 자세를 유지하기위해 노력한다.앞으로도 주례 봉사활동을 지속하겠다는 그가 강조하는 주례사 네번째는 '부부간 신뢰를 가져라. 믿으면 행복해진다'이다.
"훌륭한 제자들이 익산을 넘어 전국에서 많은 활동을 하며 국악이 널리 퍼졌으면 하는 게 가장 큰 바람입니다."꺼져가는 국악의 등불을 환히 밝혀가고 있는 '작은 체구의 국악 거인' 익산국악원장 임화영 명창(52).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된 뒤 힘겹던 생활고를 무릅쓰고 시작한 그의 국악인생이 지금의 익산지역 국악의 등불을 밝혀가면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고 있다.지금까지 길러낸 제자들이 수백 명. 국립국악원이나 도립국악원, 시립국악원 등 전문적으로 활동하는 제자들도 상당수 된다.SBS스타킹에 나와 구성진 판소리를 선보였던 박성렬 군(15)도 임 명창이 지도하고 있다.사실 임 명창은 20대 후반 뒤늦게 국악을 시작했다.당시만 하더라도 너무 어렵게 살던 생활고로 한 달 1만5000원하던 수강료가 부담되어서 그만두기도 했다. 이후 건강이 악화됐고, 국악과 떨어지지 못했던 계기가 됐다.이처럼 국악을 너무나 사랑해 지금도 열정적인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는 그의 국악인생 30년을 뒤돌아보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하지만 그는 집념 하나로 전북도지방무형문화재 최란수 선생과 오정숙 명창, 남해성 선생 등으로부터 각종 소리를 사사하고 모든 소리를 두루 섭렵하면서 지난 2007년 소리꾼들의 꿈인 춘향국악대전에서 대통령상을 거머쥐며 명창대열에 이름을 올렸다.작은 키에 몸집도 작아 소리가 어디에서 나올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소리 하나는 타고 났다는 스승님들의 평가 속에 그의 열정이 보태졌다.임 명창은 "정말 수없이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셔서 부족하지만 명창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면서 "받은 만큼은 안 되겠지만 가진 모든 것을 후배들을 위해 쏟아내려는 생각이다"며, 4번의 전북교육감상과 전북도지사 상 등 9번의 지도자상을 가장 자랑스러워했다.후진 양성을 누구보다 중시하는 임 명창은 전국의 판소리경연대회에서 빼놓지 않고 섭외하는 1순위 심사위원으로도 유명하다.어떤 입김에도 흔들리지 않고, 명확한 심사를 하기 때문에 임 명창이 심사한 대회는 이견을 보이지 않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 되어가고 있다.특히 누구보다 힘든 가난을 겪어봤기에 보이지 않게 주변을 돕는 따뜻함을 갖춘 지도자이기도 하다.'늦게 시작한 만큼 아직 힘이 충만하다'는 그는 "정정렬 국창이 살아계셨던 익산에서 이런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며 "국악이 시민들에게 한걸음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많은 제자들이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후원해 나갈 계획이다"고 말했다.임 명창은 "머리를 뽑아 신을 삼아드려도 다 못 갚을 은혜를 스승님들께 입었다"면서 "스승님들께 받은 은혜를 후진 양성에 쏟아낼 계획이다"고 거듭 강조했다.
장수지역은 물론 전국을 누비며 쓰레기를 줍는 권호석씨(76장수군 천천면 연평리)의 별명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쓰레기통 할아버지', '전국구 미화원', '거리의 천사', '김삿갓' 등이 권씨가 보여준 그동안의 행적을 말해준다. 올해로 벌써 40년 넘게 거리청결에 여념이 없는 권씨는 1년 365일 거의 매일 같이 하루도 쉬지 않고 인파가 몰리는 전국의 축제장과 행사장은 물론 재래시장과 길거리를 누비며 환경보호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지난 8월 폐막한 여수엑스포에서도 권씨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여수엑스포에서 권씨는 당시 20일 동안 찜질방에 기거를 하며 쓰레기줍기에 나섰다. 예전에는 쓰레기더미 옆에서 스치로폼을 깔고 종이박스를 덮고 노숙을 하며 끼니를 거른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요즘은 주위 분들이 도와주고 자식들이 장성해 용돈까지 줘 한결 봉사활동에 나서기가 나아졌다. 지난 8일 5일장이 열리는 장수 장계시장에서도 그는 '서로서로 양보하고 기초질서 잘 지켜서 문화국민 됩시다. 내가 지킨 기초질서 아들딸이 본받아요. 내가 머물던 자리를 깨끗이 치우고 갑시다. 담배꽁초 휴지는 휴지통에 버려 주세요'라는 문구가 적힌 조끼와 비닐봉지, 집게를 들고 거리를 누볐다. 그는 이미 전국의 행사장과 축제장의 마스코트로, 거리의 환경 전령사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그의 쓰레기줍기는 43년전인 지난 1969년부터 시작됐다. 지금은 그의 작업에 대해 모두가 격려하고 박수를 보내지만, 초기에는 색안경을 끼고 쳐다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자기 일을 뒷전으로 미룬 채 축제장만 쫓아다닌다'라거나 '미친X'이라는 험한 소리도 들었다. '자기가 무슨 환경운동가냐'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온갖 비난의 소리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거리 청소를 실천해 온 그의 한결같은 모습에 차츰 많은 사람들이 감화하고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있다. 이제는 어른들 뿐 아니라 꼬마들도 그를 반갑게 알아보고 있다. 그가 43년동안 '쓰레기줍기' 외길인생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전폭적인 지원과 지지를 아끼지 않는 가족들의 든든한 후원에서 비롯됐다. 33살이었던 그는 11살 연하의 부인 김정숙씨와 결혼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청소봉사'라는 사명감을 앞세워 쓰레기줍기에 나섰다. 당시 부인 김씨는 말없이 그를 지켜봐주며 소리없는 응원에 나섰다. 그는 "무엇보다 5남매가 아버지의 행동에 한마디 불평 없이 사춘기를 보내고 모두가 장학생으로 대학까지 마치는 등 올곧게 성장해줘 고맙다"고 말했다. "14살에 625전쟁이 터졌어요. 군대에 들어가 조국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싸우고 싶었는데,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3번이나 입대를 퇴짜 맞았죠. '가진 것은 없지만 이 한 몸 바쳐 조국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라고 다짐했던 게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집에는 방마다 태극기가 걸려있고, 주머니에는 1년 365일 태극기가 들어있다. 아침에 일어나 국기에 대한 경례와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과 함께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기도를 드리고 하루를 시작한다는 그는 "최근 독도 문제를 보면 울화통이 터진다"며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국가에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자기가 손해를 보고 희생을 하더라도 해야 된다"고 말했다. 권씨의 선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일제시대 일본식 이름이 불려지는 게 싫어 선생님께 반항을 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던 그는 각종 행사장에서 주는 사례비와 자녀들이 준 용돈을 모아 매년 장수지역 중고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또 '제3회 초아의 봉사대상' 사회봉사부문 수상자로 선정돼 상금으로 받은 1000만원을 전액 장학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권씨는 "후세에 백 마디의 말보다 한 가지라도 실천하라는 교훈을 남기고 싶다"며 "우리나라 국민이 세계에서 부끄럼 없는 일등 문화국민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권씨는 또 "오라는 곳은 없어도 못 다한 아쉬움이 많아 또 다시 길을 나선다"면서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시간이 없어서 아쉽다"고 말했다. "기력이 남아 있는 한 쓰레기 줍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권씨는 지금도 쓰레기를 찾아 거리청소에 여념이 없다.
무주군 무주읍 오산리 왕정마을에 가면 신기한 변성암을 볼 수 있다. 1928년 영국의 지질학자 홀머스(A.Holmas)에 의해 발견된 세계적인 희귀석 구상화강편마암으로 1974년에 천연기념물 제249호로 지정됐다.구상화강편마암은 주로 무주읍 오산리 왕정마을 뒤 작은 계곡 일대에서 볼 수 있으며 모양과 크기가 다양하고 아름답다. 특별히 바위 전면이 백륜(白輪)으로 둘러싸여 있어 호랑이 바위라고도 불린다. 구상화강편마암의 특이한 생김새와 희귀성이 세상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불법으로 채취하려는 사람들의 발길도 많아져 문화재관리국이 바위 주변에 울타리를 만들어 직접 보호하고 있다.암체 내에서 어떤 광물을 중심으로 그 둘레에 동심원상의 각이 발달하는 구상구조의 암석은 지질학적으로도 매우 희귀한 암석이어서 암석의 생성 원인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무주군 무주읍 오산리 왕정리의 '왕정(旺亭)'이란 지명은 마을의 용 고갯마루를 지나던 고승이 '마을의 지세를 보고 부자가 많을 동네'라며 지어주었다고 한다. 구상화강편마암에 대한 전설에서도 바위의 영험함을 엿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철종 때 전국에 역병이 돌았고 호랑이 무늬를 한 돌을 만지거나 가까이 있으면 병이 나았다고 한다. 지금도 왕정마을 사람들은 호랑이 바위 주변을 지날 때면 두 손을 모아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는 풍습이 전해지는 등 마을사람들에게 호랑이 바위는 영험함의 대상이 되고 있다.무주군 관계자는 "구상화강편마암은 호랑이 무늬의 독특함과 세계적인 희귀석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며 "하지만 일부에서 수석을 수집한다는 이유로 바위를 가져간다던지 정을 이용해 구멍을 뚫어 훼손을 하는 사례들이 늘고 있어 지금은 외부인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고 밝혔다.그는 이어 "하지만 무주군청 후정과 반디랜드(무주군 설천면 무설로 1324, 월요일 휴관㎜에 가면 전시해 놓은 구상화강편마암을 볼 수 있다"며 "무주에 오시면 꼭 한 번 봐주길 바라며 세계적으로 희귀한 자원을 보존하고 천연기념물을 보호하는데도 마음을 써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저 천지탑이 끝으로 올라갈수록 왜 저리 뾰족하나"(이각). "밑이 뾰족할 수는 없지 않냐"(박하).얼마전 종영된 SBS 수목드라마 '옥탑방 왕세자'에서 주연배우인 박유천과 한지민이 진안 마이산 탑사(주지 청파진성 스님)를 배경으로 한 촬영분에서 나눈 한 대화 내용이다.인기리에 방영중인 드라마 '서영이'를 비롯해 숱한 화제작들이 앞다퉈 배경으로 삼고 있는 마이산 탑사의 돌탑. (카메라)앵글에 담겨진 기묘한 매력 때문인지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다. 드라마, 영화 배경 섭외 0순위로 떠오를 정도다.그런 맥락으로 볼때 일본 NHK 등 유수 해외 다큐멘터리 팀까지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도립공원 속에 지역의 작은 문화유산이 세계적인 명물로 거듭나고 있음을 방증하고 있는 대목이다.그렇다면 탑사의 돌탑이 왜 유명할까. 그 물음에 답은 그동안 탑사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말해주고 있다.그 신비의 빗장은 겨울철, 탑사 단 위에 정화수를 떠 놓고 기도를 올리면 고드름이 꺼꾸로 열리는 '역고드름 현상'이 열었다.기이한 현상에 한 방송사 다큐멘터리팀이 10여년전 그 수수께끼를 풀려했으나 결국, 답을 내리지 못했다. 미스테리로 남겨진 것이다.그런 가운데 최근 채널A 이영돈의 논리로 푼다 '소원바위'편에 탑사 천지탑이 방영되면서 영험한 도량임이 또 한번 입증됐다.솟대역할을 하는 천지탑에서 성심을 다해 기도를 올리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사실이 논리에 입각, 밝혀지면서다.실제, 시험관 시술마저 번번이 실패했던 김모씨가 탑사에서 간절히 빈 어머니의 기도 덕분에 6년 만에 첫 아들을 낳았고, 카페를 운영하는 노모(여)씨도 이 곳 탑사를 찾아 기도를 올린 덕에 카페 매출이 올랐다고 한다.뿐만 아니라 태어날때부터 휘어있던 아들의 한쪽 다리가 곧게 펴졌다는 팔순 노파의 사연 등 말로 형용하기 힘든 기적들이 실제 일어난 것이다.탑사 천지탑에 깃든 그 영험함은 지난 여름 괴풍을 몰고온 태풍 '볼라벤'을 통해 극명히 입증됐다. 당시 탑사에는 사람이 날라갈 정도의 초속 40m 안팎의 강풍이 불어닥쳤지만, 80여기의 돌탑은 흔들릴 뿐 한 개도 무너지지 않았다.그 영험함이 알려진 이 돌탑을 스토리텔링화해 지역의 대표 문화상품으로 승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여론이 일고 있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탑사 주지 청파진성 스님은 "몸체에 해당하는 탑신의 돌멩이가 밑에는 '음돌'로, 위에는 '양돌'로 이뤄져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고, 그 사이에 박아둔 '샛돌'은 탑신이 움직일때 같이 이동하면서 탑신을 잡아준다"는 말로, 100여년 동안 탑이 풍파를 이겨낸 배경을 나름대로 풀이해 냈다.그 신비의 돌탑은 임실 둔덕 출신인 고 이갑용 처사(1860~1957년)가 구한말인 1885년 현재의 탑사로 들어와 생식(솔잎)으로 연명하며 1927년까지 30여년간 기도와 정성으로 쌓아올린 신념의 탑으로 알려지고 있다.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 공기마을 일대(산214-1번지 일원)에 조성된 편백나무숲. 건강과 힐링에 대한 현대인들의 관심이 부쩍 높아지면서 이곳의 명성이 알음알음으로 전해지고 있다.공기마을 편백숲이 조성된 시점은 1976년경. 이젠 30년이란 세월을 훌쩍 넘긴 아름드리 성목이 200만㎡에 이르는 숲을 빼곡히 채우면서 장관을 이루고 있다. 상관면 박영배 부면장은 "공기마을 일대 조림지에 심어진 수종은 편백나무 10만주를 비롯 잣나무 6000주 정도로 파악된다"며 "이밖에 삼나무낙엽송오동나무도 소규모 군락을 이루고 있다"고 말했다.편백나무가 건강과 치유의 숲이라는 사실이 전해지며 이곳을 찾는 내방객이 꾸준히 늘고 있다. 상관면사무소는 "평일엔 500여명, 주말엔 2000여명 정도가 공기마을 편백숲을 찾고 있다"고 전했다. 주말엔 주차난이 자주 발생한다.이곳의 장점은 전주시민들에게 접근성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17번 국도를 따라 전주-완주 경계를 막 벗어나면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이룬 편백숲이 언제나 반긴다. 전주 시민들은 아낌없이 건강을 나눠주는 자연의 보고를 지척에 두고 있는 셈이다. 또 자연분출 되는 유황수도 내방객들에겐 크나큰 선물이다. 공기마을과 접한 죽림온천이 이곳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판단된다. 상관면사무소는 내방객들의 편의를 위해 소규모 유황족욕탕과 편백탕을 조성, 삶의 무게에 짓눌린 도시인들의 피곤을 내려놓도록 돕고 있다.편백숲에 가장 어울리는 것은 가벼운 산책. 이곳엔 산책로나 등산로로 분류할 수 있는 길이 7㎞ 정도이고, 오솔길에 가까운 길도 2㎞ 가량 조성되어 있다. 굽이굽이 소박하게 이어지는 산책로를 걷다 보면, 가을 바람이 실려오는 편백향기와 함께 온몸이 자연 속으로 빠져들어 버린다. 걷다 지치면 언제든 늘씬늘씬 하늘을 향해 빼곡이 내달리는 편백숲 아무 곳이나 자리를 잡으면 그만이다. 내방객들이 숲에 더욱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배려한 숲체험장과 삼림욕장도 마련되어 있다.내방객들이 자주 던지는 질문은 '공기마을 편백숲과 유황수를 왜 체계적으로 개발하지 않느냐'는데 모아진다. 상관면사무소는 이에 대해 "이곳 면적의 절반 가량이 사유림"이라고 설명했다. 공기마을 편백숲은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을 때 더욱 아름다운 모습일 수 있다.
"어르신들이 좋아한다고 옛날 노래만 부르면 새로운 맛도 없고, 흥미를 갖기도 쉽지 않아요. 그래서 대부분 최신곡으로 노래교실을 운영하는데, 의외로 어르신들이 정말 좋아들 하세요."노래교실 12년차 강사, 익산의 '꾀꼬리 명인' 김유미 씨(53)는 어르신들에게 쉽게 찾아오는 치매에 노래가 가장 좋은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새로운 노래를 외우고, 배우는 과정은 두뇌 운동을 활발히 해 치매는 물론 생활 속 스트레스까지 해소시키는 특효약이라며 어르신들에게 흥겨운 노래를 가르친다."어르신들이 처음엔 새로운 노래를 어렵게 생각했지만 이젠 분기별로 새롭게 소개되는 최신곡을 기다리며, 악보만 보고도 노래를 곧잘 하기까지 해요. 두뇌운동이 활발히 되는 것이지요. 이럴 땐 정말 가르치는 기쁨을 느껴요."어르신들에게 새로운 노래를 가르치며 보람을 느끼고 있는 김씨의 하루 일정은 이른 아침에 시작해 밤까지 계속된다. 어느 노래교실에선 중년층부터 장년층에 이르기까지 즐거움을 전해주는 김씨를 손꼽아 기다리지만 이들과의 만남은 일주일에 단 한차례에 불과하다.김씨를 기다리는 학생들은 13곳에서 펼쳐지면서 그를 기다리는 학생수만 해도 수백명에 이른다.노래강사 김유미 씨가 이렇게 인기를 끄는 것은 단순히 흥겹기만 한 노래교실도, 그렇다고 딱딱한 교육적인 노래교실도 아닌, 즐거움과 보람이 함께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특히 무엇보다 노력하는 김유미 씨의 모습은 많은 학생들을 감동으로 몰아넣으며, 노력을 부추긴다."처음엔 그냥 노래만 부르며 흥겹게 가르치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배우는 분들을 위해선 최소한 악보정도는 봐야한다는 생각에 제가 먼저 대학에 들어가기로 했지요. 그래서 제가 06학번이라니까요."노래의 기본적인 것만은 노래교실에서 배워야 한다는 김씨의 생각 때문인지, 그의 학생들은 웬만한 곡은 악보를 보고 부를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다. 최신곡을 꺼내놔도 악보를 보며 노래를 곧잘 부르는 학생들을 보며 김씨는 가르치는 기쁨을 느끼고 있다.노래를 소중히 생각하며, 노래로 인해 행복과 보람을 느끼고 있는 김씨는 사실 공식 앨범까지 낸 가수다. 그것도 36살의 나이에 가수라는 칭호를 들으며 노래를 부른지 18년차인 중년 가수다. '천년의 약속'이란 김씨의 1집 타이틀곡은 노래방에서도 부를 수 있다. "동네 노래자랑에 가면 항상 수상을 했지요. 그러다 나도 모르게 가수가 되어 있는 걸 느꼈고, 이젠 노래를 가르치며 행복을 느끼고 있어요."노래와 함께 즐거운 인생을 즐기기까지는 김씨 남편의 협조가 가장 중요했다. 늦게 들어가 밥을 못할 때도, 빨래가 밀려도 싫은 내색한번 하지 않으며 편안히 대해준 덕분에 이렇게 많은 제자들에게 흥겨움을 전할 수 있다고 한다.이런 김씨가 이젠 익산에서 활동하며, 지역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백제 왕궁성'이란 노래를 시민들에게 알리고자 분주한 활동을 또다시 시작하고 나섰다.이 노래는 김씨가 익산을 생각하며 '서동 선화의 사랑'의 노랫말을 넣은 '익산 사랑의 메아리'이기도 하다."개인적으론 가장 아끼며, 소중히 생각하는 노래예요. 서동 선화의 사랑과 익산을 담았고요. 다른 지역에서는 그렇지만 익산에서만큼은 정말 많이 부르고 싶은, 부를 수 있는 노래인 것 같아요."노래와 익산을 사랑하며 요양원과 한센인 정착촌 등을 돌며 노래봉사활동을 펼치는 '시민음악회' 회장으로도 활약하고 있는 김씨는 앞으로 "익산에서 많은 분들과 행복한 노래를 함께 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전했다.
"옷을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이 보입니다. 특히 나이 들어서도 옷을 잘 입는 분들은 자기관리를 충실히 해 온 성공한 인생임을 반증하는 것이지요"55년째 수제 양복 제작 외길을 걸어온 장영문(70) 씨.반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옷을 만들어 온 그는 옷을 통해 그 사람의 성격과 성품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고 자신만의 '옷에 대한 철학'을 이야기했다.전주 평화동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에 진학하던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배움의 기회를 놓쳐버린 장 씨는 13세가 되던 해 인근 교회에서 운영하는 야학에서 한글과 수학을 깨쳤다.이후 친척의 권유로 15세부터 양복 기술을 배우기 시작해 성실함과 실력을 갖춘 기술자로 소문이 나면서 1973년 군산의 한 양복점으로부터 재단사 직을 권유받으며 군산과 인연을 맺었다.고객의 취향을 우선시하는 그의 실력이 군산에 소문나면서 1981년 군산의 패션 1번지로 불리던 영동에 시온테라를 개업해 현재까지 32년째 운영하고 있다. 개업 후 10년 동안 해마다 300여벌의 양복을 제작하며 호황을 누리기도 했지만 1990년대부터 기성복이 양복시장을 잠식해 가며 위기에 봉착했다. 하지만 장 씨는 옷은 고객 각자의 체형과 취향에 맞아야 입는 사람을 편하게 해줄 수 있다는 신념으로 수제 신사복 제작을 고수하고 있다.그는 "최근 사회적으로 다양성이 중시되고 있지만 오히려 옷 만큼은 표준형을 기준으로 일률적으로 재단된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습니다"며 "세상에 단 하나 자신만을 위해 디자인 된 수제품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풍토가 조성돼야 젊은이들도 기술을 배우려 할 것입니다"고 안타까워 했다.장 씨는 아무리 뛰어난 재주도 신뢰와 성실을 바탕으로 쌓아져야 비로소 기술로 인정받을 수 있음을 강조햇다.견습생 시절 동료 중 한사람이 뛰어난 바느질 실력을 가지고도 게으름을 피우며 매번 손님들과 약속한 납품기일을 어기는 모습을 지켜보며 재주에 신뢰가 더해져야 세상을 이롭게 하는 기술이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뛰어난 재주도 성실을 바탕으로 할 때 진정한 기술로 인정받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낱 요령에 불과할 뿐입니다"고 말하는 장 씨는 양복 일 덕분에 다양한 지위의 사람들을 만나 세상사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즐겁다.또한 양복 만드는 기술이 있어 삼남매를 약사, 한의사, 학원장으로 어엿하게 성장시킬 수 있었음에 항상 감사하며 즐겁게 생활한다.그래서인지 70세의 나이에도 현재까지 혈압, 당뇨 등 성인병은 모르고 살아왔으며, 시력도 1.2로 아지까지 손수 바느질을 하고 있다.장영문 씨는 "옷은 사람을 감싸주고 보호하는 역할 뿐 아니라 인격과 인품을 보여주는 척도이고 옷과 사람의 균형미는 사람을 더욱 아름답게 합니다"며 "고객을 위한 작품활동을 한다는 마음으로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바늘과 실을 놓지 않을 생각입니다"고 말했다.
곽영길 회장 "전북과 동반자적 협력 관계...실질적 협력 모델 만들어 나갈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