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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성장을 멈추는 그때부터 쇠퇴의 위기가 찾아온다. 오래된 도시들이 안고 있는 구도심 쇠퇴의 본질적인 문제가 거기 있다. 특히 언제부터인가 이 오래된 도시들의 구도심 경계는 주민들의 삶의 질까지 획정하는 기준이 됐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도시들이 재생을 내세워 도시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이유다. 여전히 개발에 의존하며 재개발에 얽매어 있는 대한민국의 오래된 도시들이 가야할 바람직한 길은 어떤 것일까. 오래전, 인터뷰로 만났던 도시건축가 김진애씨는 그 길을 찾으려면 공공의 역할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했다. 시민들에게 언젠가는 개발될 수 있다는 헛꿈을 불어놓지 말고 살기 좋은 동네를 위해 도서관이나 커뮤니케이션과 같은 생활서비스 공간을 마련하는데 투자해야 한다는 그의 조언은 그때만 해도 멀리 있어 보였지만 지금은 도시재생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쇠퇴의 위기를 넘어 여전히 소멸위험도시의 대열에 놓여 있는 수많은 대한민국 중소도시들이 있다. 인구 늘리기나 기업 유치 등 온갖 방법을 찾아 도시의 규모를 키워 어떻게든 생존해보겠다는 그들의 고군분투는 계속되고 있지만 인구 늘리기는 공허하고 기업유치는 더 이상 지속가능한 성장의 통로가 되지 못하는 현실은 안타깝다. 그 답을 찾기 위해 20년 가깝게 주거 재생이란 다소 낯선 분야에서 도시를 연구하며 정책을 만들고 현장에서 실행해온 연구자가 있다. 스스로 현장주의자 임을 내세우는 주거재생전문가 조준배 유진 도시건축연구소 지역도시연구본부장(57)이다. 그는 2010년 경북 영주의 디자인관리단 단장을 맡아 도심재생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 공공건축 밀 공공디자인 관리시스템을 구축, 우리나라의 가장 모범적인 공공건축물의 도시로 재생시켰다. 도시를 읽고 만드는 일을 현장으로부터 이어온 결실이다. 그가 지난해 7월, 전주시의 주거재생 총괄계획가(총괄단장)로 위촉됐다. 주거재생 분야의 총괄계획가는 전국에서도 처음이다. 그만큼 낯설고 실험적이지만 그동안 그가 걸어온 궤적을 보면 지역다움을 내세워온 전주의 선택은 주목을 끈다. 지난 연말, 그를 만났다. 4개월 남짓, 그가 읽어낸 전주는 어떤 도시인지 궁금했다. 그는 쉽게 답하지 않았으나 전주를 잠재력과 가능성의 도시로 꼽는 데는 주저하지 않았다. -지난해 영주를 다녀왔습니다. 공공건축물로 대한민국의 가장 핫한 도시가 된 이유를 알겠더군요. 주민들의 삶이 많이 바뀌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007년에 제가 일했던 건축도시공간연구소(국책연구기관)가 전국 소도시를 대상으로 도심재생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만들 도시를 공모 했습니다. 10개 도시를 가려 공문을 보냈는데 영주에서만 답이 왔었어요. 영주는 2009년에 완성된 마스터플랜을 곧바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공공건축가 제도를 도입하고 이듬해에 시장 직속의 디자인관리단을 만들었지요. 그곳 단장을 맡게 되면서 공공건축과 공공디자인의 관리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전국에서는 처음으로 지역건축 디자인 기준을 마련하고 시 경관과 디자인 조례를 제정했고요. 공공건축의 관리 시스템을 정착시키기 위한 업무도 확충했는데 시스템의 변화가 가져온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작은 도시 영주의 변화가 부러웠습니다. 그만큼 전주의 변화가 기대됩니다.(웃음) 지금 하시는 일을 듣고 싶습니다. 전주시의 주거재생 사업을 총괄하는 역할입니다. 이를테면 오래된 동네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재생하는 역할이지요. 서울도시주택공사에서 일할 때 주거재생 모델을 만드는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정확하게는 주거재생사업 모델을 만드는 일이었어요. 실제 실행 가능한 모델을 만드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당시 서울은 뉴타운 사업에 이어진 정비 사업들이 잘 안 풀리는 상황이었어요. 개발시대의 방식으로는 한계가 명확했습니다. 다시 원도심으로 돌아가는, 이른바 재생사업이 부상했지요. 그때 제가 영주의 프로젝트를 막 마무리한 시점이었는데 그 인연으로 도시재생의 조직과 사업을 만드는 도시재생기획처장을 맡게 됐습니다. 그때 만든 모델이 지금의 뉴딜사업 원형이 됐습니다. 오늘의 뉴딜 주거지원형 우리 동네 사업 등이 모두 그 모델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뉴딜 사업은 전국적으로 확산됐지만 서울과 중소도시는 여건이 서로 다르지 않습니까. 그 자체를 적용하는데 한계가 적지 않을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서울시의 문제 해결을 위한 재생 모델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이니 당연히 문제는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은 사업성과 개발압력의 강도가 다르니 지방의 중소도시에서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지방도시를 위한 구체적인 모델이 절실해진 것이죠. -중소도시를 위한 다른 모델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다른 방식으로 실행하는 모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뉴딜처럼 작게 하는 것이 아니고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정비 사업인데 뉴딜 안에서의 정비 사업을 지방도시에 적용하기는 한계가 커서 집수리가 우선순위의 핵심 사업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빈집을 수리하고 그 빈집을 활용하는 다양한 방식이 실행되어 주거환경을 바꾸는 것이지요. -전주의 주거재생도 그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겠군요. 맞습니다. 주거재생은 궁극적으로 주민들의 삶과 환경을 바꾸는데 목표가 있습니다. 단순히 하드웨어만 바꾸는 것으로는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도시에서 재생을 내세운 다양한 사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주거재생 사업도 그 연장선에 있는 것이겠지요. 물론입니다. 원래 재생의 취지는 장소(공간) 중심으로 다양한 사업을 연계해 지속적으로 추진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는 사업들을 묶고 통합하는 기능을 할 수가 없습니다. 행정 안에서도 서로 다른 부서에서 각각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시스템을 통합하지 않는 한 업무 영역을 묶어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패키지 추진방식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한계는 중앙정부 차원에서도 똑같이 겪고 있는 문제입니다. -지방도시라고해서 그것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진 않겠군요. 가장 큰 어려움입니다. 전주시의 경우도 그 시스템을 먼저 고민했습니다. 다행히 주거재생 총괄의 역할을 중심에 세워 지금까지는 잘 되지 않았던 행정 부서간 사업의 통합을 묶어내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사업을 연계시키고 하나로 묶어내는 일들을 가능하게 하다 보니 업무 추진이 많이 유연해졌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겠습니다. 듣다보니 생활SOC 사업의 경우는 주거재생과 긴밀한 관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입니다. 사실 생활SOC 사업은 단순히 서비스 시설을 짓는데 에만 집중해서는 절대 안 되는 사업입니다. 생활권의 균형이 함께 이뤄져야 지속성의 가치가 보장되거든요. -그러고 보니 정권이 바뀔 때마다 도시정책이 바뀌는데 그 이유가 있습니까. 역사적으로 보면 정권마다 정책이 바뀌는데 그게 재미있습니다. 이번 정권에서 하드웨어 사업을 내세웠다면 그 다음 정권에서는 반드시 소프트 사업을 중심에 놓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두 개의 틀이 어김없이 순환된다는 겁니다. 이유가 있지요. 소프트사업을 하면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거든요. 예산은 엄청나게 들였는데, 성과는 없으니 그 다음 정권은 다시 하드웨어에 치중하게 되는 겁니다. 이를테면 이명박 정부의 하드웨어 정책에 반해 박근혜 정부에서는 도시재생을 소프트웨어 쪽에 방점을 두었습니다. 공공과 주민역량강화만 한 겁니다. 그런데 1차 선도 사업이 끝나고 나니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거든요. 우리가 5년 동안 고생해서 이룬 것이 뭐지? 주민들과 좀 친해졌고, 공동체도 만들어졌는데 그 다음은? 그것하려고 우리가 그렇게 고생을 했나?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문재인 정부에서는 다시 하드웨어가 같이 가야 한다 해서 전국적으로 확산이 되었는데, 이제 또 성과 때문에 빨리 짓고 빠져버리니 운영 문제에 부딪치게 되는 겁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같이 가야하는 이유가 분명해진 것이죠. -전주의 주거재생 방향성이 더 궁금해집니다. 전주는 행정 업무의 통합이 가능해졌으니 주거재생의 틀이 좀 더 새롭게 바뀔 수 있습니다. 핵심 축은 두 가지 입니다. 행정협의회를 만들어 연관 사업을 통합하는 것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민간 플랫폼을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이 두 개의 조직을 통합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큰 목표입니다. -사업의 다양성이 존중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같은 목표를 향한 사업의 연계는 꼭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처럼 사업의 단위가 큰 것들을 긴 시간에 추진하는 것 보다는 작은 사업을 짧은 시간에 실행해 성과를 내고 그 과정에서 주민들이 자신감을 갖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렇게 되면 수동적 자세가 아니라 내가 하는 사업에 참여한다는 주체적인 생각을 갖게 되거든요. 그 다음에는 아마 주민들 스스로가 우리 동네에 필요한 사업을 발굴하고 확장해나가는 일이 가능해지게 될 겁니다. 지금 저희가 하려고 하는 것은 작은 사업들을 확장하는 일, 또 한편으로는 확장된 사업들을 연계하고 디자인해주는 일입니다. 점적으로 유연하게 접근해서 진행하자는 것이 큰 원칙중의 하나입니다. -가장 먼저 이루어질 사업이 궁금합니다. 아마도 집수리 사업이 될 것 같은데, 계획대로라면 연말까지(2019) 집수리 조례를 만들고, 내년(2020)에는 골목길 사업을 시행해 골목길 정비사업과 집수리 사업을 함께 추진하는 것입니다. 그동안에는 그것이 각각 따로 갔지만 함께 가면 골목길과 집수리가 훨씬 효율적인 방식으로 진행돼 동네의 변화가 보다 새롭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집수리 조례는 어떤 것인가요. 핵심은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민이 집수리를 하기위해 서로 다른 행정 부서를 다니면서 신청해야 하는데 이 과정을 간편화해 행정이 바쁘게 움직이는 쪽으로 바꾸자는 겁니다. 또 하나는 사람 중심으로 되어 있던 주거복지를 집 중심으로 바꾸는 내용입니다. 지원체제를 집(공간) 중심으로 바꾸게 되면 도시는 집수리 이력 데이터베이스를 가질 수 있어 보다 체계적인 정책을 만들고 실행할 수 있게 됩니다. -방향과 방법이 좋다 해도 결국은 주민들이 동의하고 함께 가는 것이 필요할 텐데요. 사실 우리나라의 오래된 도시들이 갖고 있는 고민은 거의 같습니다. 주민들의 인식도 비슷하고요. 전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거재생은 빈집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새로운 건물이 들어오는 것도 필요하지만 비워질 곳은 비워져 숨통을 틔우고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공공의 편의시설이 많아질 때 살기 좋은 동네가 되거든요. 개발시대에는 새집이 들어와 부동산 격차로 돈을 벌게 되고 그 환경이 내 집 값을 높여 주었지만 인구가 줄어드는 시대에서는 전혀 다른 환경이 만들어집니다. 살기 좋은 동네가 부동산 가치도 높아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주민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어떤 환경을 갖고 있는 곳이 좋은 동네일까요.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동네가 아닐까요. 쉴 수 있는 동네.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힐링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자꾸 바깥으로 나가잖아요.(웃음) 동네 안에서 다양한 공공의 서비스가 이루어진다면 자연스럽게 주민들의 삶의 질은 높아지겠죠. - 지역다움은 중요한 가치입니다. 전주는 어떤 도시입니까. 그런 거대담론에는 익숙지 않아서......(웃음) 저는 다움은 한계에서 찾아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전주다움은 전주의 한계에서 오는 것이겠지요. 이를테면 전주가 갖고 있는 역량의 한계, 물리적 한계, 기술의 한계 등등 온갖 한계가 전주를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 한계가 지역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게 하는 힘이거든요. 전주는 날 것이 아직 많습니다. 그 날 것의 가치를 잘 발현했으면 좋겠어요. ■ [조준배 단장은] 현장 지키며 도시의 주거재생을 연구하고 실행해온 전문가 전남 여수가 고향이지만 중학교 3학년 이후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연세대 건축공학과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좋은(?) 건축설계가를 꿈꾸었다. 군대를 다녀오자마자 곧바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것도 그 때문이었다. 5년제 건축학교인 국립건축파리6대학 건축학과에 입학해 설계 전공으로 학위를 받았다. 학구열은 배움의 과정을 거기서 멈추지 않게 했다. 건축학교에서 공부하면서도 프랑스 국립 파리1대학 건축학과에서 건축이론과 미학을 전공했으며 예술철학전공 박사과정을 함께 거치면서 건축전문 연구학위(C.E.E.A.)를 얻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가방 끈만 길게 만든 과정이었지만 프랑스에서의 10년이 그에게 가져다준 것은 학문적 소양과 지식의 섭렵만이 아니라 도시를 읽고 이해하는 바탕이었다. 2001년에 귀국해서는 당초의 뜻대로 설계사무소에서 일했다. 그즈음 전국적으로 마을만들기가 시작되었다. 자연스럽게 몇 개의 작업에 참여하면서 도시가 무엇인지, 도시의 미래는 또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궁금해졌다. 때마침 국토연구원부설 건축도시공간연구소의 연구위원 채용공고가 났다. 박사과정 수료 자격으로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들과 겨루어(?) 합격했다. 돌이켜보면 운이 닿았던 그때의 선택이 삶의 길을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되었다. 현장과 분리되지 않은 실행 연구를 하면서 월급도 받고 본격적인 도시 공부를 할 수 있었으니 그는 일석이조, 자신에게는 더없이 좋은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정책연구가 과제였지만 그의 연구 바탕은 늘 현장에 있었다. 덕분에 그가 연구하고 만들었던 도시 정책은 현장에서 실험되고 성과가 되어 다시 보편적인 정책으로 재편되었다. 2010년부터는 영주시 디자인관리단 단장을 맡아 지금은 전국적인 모델이 된 작은 도시 영주를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일을 이끌었다. 도시 안에서도 주민들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일에 남다른 관심을 쏟아온 그는 서울주택공사 재생본부 재생사업기획처장으로 일하면서 오래된 도시의 주거지 재생 모델을 연구하고 실행했다. 짧지 않은 동안의 정책연구, 현장 실행의 경험과 지적 기반은 그를 국내 주거 재생 전문가로 우뚝 서게 했다. 크고 작은 도시의 지역재생을 돕고 이끌고 있는 그를 전주시는 지난해 7월, 주거재생 총괄계획가로 위촉했다. 지금은 유진 도시건축연구소 지역도시연구본부 본부장으로 일하면서 오래된 도시 전주의 가치 있는 주거재생을 위해 현장을 살피고 주민들을 만나며 동네에 딱 맞는 주거 정책을 만들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2004년 전주대사습대회가 내놓은 서른 번째 명창은 20대의 젊은 명창이었다. 대사습 사상 최연소에 심사위원 전원으로부터 만점을 받은 이 주인공은 장문희씨. 우리나이로는 스물아홉 살이었지만 12월에 태어나 며칠 만에 두 살을 한꺼번에 먹는 애민 살을 감안한다면 정식나이는 스물일곱 살 밖에 안 된 이 앳된 명창에 관심이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국악계가 주목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그의 스승은 이일주 명창. 서편제판소리의 대가였던 이날치의 손자 이기중이 그의 아버지이니 장문희 역시 이날치로부터 이기중을 거쳐 이일주의 맥을 잇는 소리가문의 후예였던 것이다. 일곱 살 어린나이에 소리 길에 들어서 햇수로 38년. 전통판소리를 공부하는 일에 온전히 삶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그가 새로운 의지를 모아 대중들과 만나는 길을 열었다. 15년 전 한 레코드사로부터 제안 받았지만 끝내 사양하며 자신의 과제로 돌려놓았던 음반을 스스로 제작해 내놓은 것이다. <장문희 심청가>. 다섯 시간이 넘는 심청가 완창을 5장의 CD로 엮어낸 그는 이제 판소리의 본질을 알리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장문희 명창(44,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수석단원)을 만났다. 스승이자 이모인 이일주명창의 소리를 그대로 받은 그의 판소리를 향한 애정과 신념은 단단했다. 판소리연구가 최동현교수가 그의 미덕을 왜 천부적으로 타고난 재능에 오직 한 길, 한눈팔지 않고 판소리에만 전력해온 성실함을 더했는지도 알 것 감았다. -음반이 예쁘게 나왔네요. 첫 음반인데, 기획사를 통하지 않고 개인 작업으로 음반을 냈다는 것이 의외입니다. 사실 오래 전, 음반 녹음을 제안 받았었어요. 대사습 명창부 장원이 됐을 때이니 20대였는데, 그때는 음반을 낸다는 것이 두렵더라고요. 연륜이 쌓이고 소리의 깊이를 더 채운 다음에 내고 싶었습니다. 신나라레코드사에서도 제안을 해주셨는데 완곡하게 사양했지요. 줄곧 이 작업은 제게 과제였지만 음반을 내는 일만은 제가 직접 나서서 하고 싶었어요. 여건이 될 때까지 기다리다보니 이제야 내게 되었습니다. -5시간이 넘는 완창 심청가를 녹음하는 일만으로도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쳤을 것 같습니다. 서울에 머무르면서 2-3일 동안 녹음하는 일을 여러 번 거쳤지요. 다행히 김형석 선생님이 녹음실을 제공해주셔서 좋은 환경에서 녹음을 할 수 있었어요. 마스터링도 따로 할 필요 없을 정도로 시설이 좋았는데 소리 보정을 위해 후반 작업을 하면서 마스터링은 따로 보완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자비를 들여 진행하는 일이 새로운 경험이었을 것 같습니다. 작곡가 김형석씨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습니까. "몇 해 전 케이블 음악채널 엠넷의 '더 마스터-음악의 공존'에 출연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편곡자로 참여하셨던 선생님과 인연이 되었어요." -그렇고 보니 2년 전쯤인가요. 엠넷의 더 마스터에서 장문희라는 이름은 화제였습니다. 그때 그랜드 마스터로 뽑혔죠. 다섯 번 출연했는데 두 번 그랜드마스터가 되었어요. 개인적으로 기대 이상의 결과였고 감사할 일이었지요. 그때 새삼 알게 되었어요. 대중들이 국악을 낯설게만 알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는데 판소리를 듣게 되면 확실히 끌리는 뭔가가 있다는 것이었죠. - 장문희란 이름 앞에는 최연소 명창이란 칭호가 늘 함께 합니다. 소리를 처음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습니까. 처음 소리를 만난 것은 여섯 살 때예요. 엄마가 이모(이일주 명창) 댁에 저를 보내셨는데, 며칠 지내다보니 이모가 너무 무서웠어요. 엄마를 졸라 다시 집으로 갔죠. 몇 개월 지났는데 엄마가 다시 보낸 것이 이듬해이니 일곱 살에 다시 이모 댁으로 온 거죠. -그럼 일곱 살 때부터 소리를 배웠습니까. 처음에는 그냥 이모가 소리하시는 것을 옆에서 듣고 보는 것이 전부였어요. 1-2년 그렇게 보내다가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춘향가를 배우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소리로만 살아왔으니 38년이나 되었네요. -초등학교 때 이미 심청가 완창회로 화제를 모았었죠. 이후 초등학생이 완창하는 무대가 더러 있긴 했지만 그때가 시작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밥먹고 학교 다녀오면 대부분의 시간을 소리공부로 보냈으니까요. 다른 사람보다 먼저 시작하고 또 많은 시감을 소리공부로 바쳤으니 당연히 빨리 익힐 수 있었어요. 안숙선 선생님께 받은 적벽가를 제외한 네 바탕을 일찌감치 떼었던 것도 그 덕분이고요. -사실 요즘 환경에서 판소리의 가업을 잇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그래서 장명창의 소리길이 더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명창의 후손이라는 무게가 제게 주는 부담이 가볍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나 스스로 열심히 하면 좋은 소리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런 선조들 덕분에 갖게 된 재능이 있었기에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장문희란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리게 된 것은 아무래도 대사습이었겠죠. 물론입니다. 2004년 대회에서 명창부 장원을 차지하면서 명창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으니까요. -그때가 스물여덟 살, 대사습 역사상 최연소로 명창의 반열에 올라 화제가 되었었습니다. 그것도 첫 번째 도전에 심사위언 전원 만점으로 얻은 영광이었는데 그때 어떤 심경이었을지 궁금합니다. 당황스러웠습니다. 사실 저는 10년을 바라보고 처음 도전한 것이었거든요. 그래서 상은 받았지만 제 소리의 부족함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웠어요. -그때 몇 년 더 도전을 해야 했다면 지금과 달라진 것이 있을까요. 경험해보지 않았으니 잘 모르겠지만 첫 도전으로 얻은 그 결과가 제게 좋은 역할만 한 것은 아니었어요. 정상에 일찍 올라섰다는 성취감 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으니까요. 지금도 무대에 서는 일은 늘 조심스럽고 자신이 없는데, 아마 그때부터 갖게 된 부담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만점이나 최연소에 대한 무게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죠. 무대란 것이 항상 완벽할 수만은 없잖아요. 실수도 할 수 있으니 항상 잘할 수만은 없다는, 조금은 편한 생각을 갖고 청중들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제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 아직도 무대에 서는 일이거든요. 그런 태도를 갖고 있으니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도 어렵고. 그때의 상황이 전통판소리에 대한 무거움을 저에게 안긴 것 같아요. -창작판소리에 대한 관심은 어떻습니까. 관심은 있지요. 그런데 어떤 창작판소리가 와도 기존의 전통 판소리보다 좋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선뜻 창작판소리에 나서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판소리에 대한 관심이 예전보다는 훨씬 나아졌지 않습니까. 그 바탕에는 창작판소리의 역할도 크지 않을까요. 다양한 창작판소리도 그렇고 퓨전 형식의 무대들로 청중들을 만나는 것도 필요합니다. 덕분에 판소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나 저는 판소리를 제대로 이해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음악이니까요. 그러려면 대중들이 판소리의 본질과 가치를 통해 판소리를 알게 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전통 판소리를 지켜오면서 안게 된 고민이 깊은 것 같습니다. :40년 가까이 전통판소리를 공부해오면서 가장 큰 과제가 대중들에게 갈 수 있는 길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었어요. 요즘 소리를 공부하는 20대들을 보면 긴소리를 잘 하지 못합니다. 5분까지는 아휴 목이 참 예쁘네 싶다가도 10분 정도 지나면 목이 난리가 나거든요. 여러 기회로 심사를 하게 되면 이런 환경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공부를 했고 기량이 어느 정도인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거든요. 어리지만 그 연배에 맞는 깊이 있는 소리가 있지 않겠어요. -왜 그런 환경이 만들어졌을까요. 가장 큰 원인은 대학입시제도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입시를 치를 때 부르는 시간이 3분이거든요. 아이들이 6년, 길게는 그보다 더 오랫동안 소리공부를 하고 대학을 가는데 고작 3분으로 가늠을 한다니....... 어떻게 그것으로 깊이를 가진 소리를 가릴 수 있겠어요. 게다가 요즘은 또 맑은 목과 가요나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갈 수 있는 재능이 주목받는 시대이니 전통판소리가 자칫 외면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지요. -화제를 돌려보죠. 어렸을 때부터 재능이 넘쳤는데, 소리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갔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 적 없었습니까.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저에게는 이 길이 숙명이었던 것 같아요. 제게 주어진 길. 그러니까 힘들어도 이것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전주로 내려왔습니다. 대학원은 다시 서울로 갔지요. 그리고는 다시 전주에 돌아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서울에서도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요. 그것 역시 숙명이었나 봐요.(웃음) 사실 한차례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우석대를 갔는데 졸업하고 바로 한예종 대학원에 들어갔거든요. 꼭 서울에 자리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기회가 주어졌다면 아마 그 길을 택했겠지요. 그런데 대학원 졸업 즈음에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단원 공고가 난거예요. 그때의 선택을 후회해본 적도 없거니와 오늘의 환경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전통 판소리에 마음을 두고 있는 입장에서는 창극 무대가 어떻습니까. 어린 시절부터 어르신들의 창극 무대를 많이 봐왔어요. 국립창극단은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죠. 제 기억으로는 무대의 화려함보다는 어른들의 소리를 듣고 있으면 정말 소리가 좋아서 전율을 느꼈던 것 같아요. 소리다운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는 말이겠죠. 그런데 갈수록 창극 무대가 본질보다는 포장이 앞세워지는 것 같아요. 본질이 중요한 가치가 되지 않고 주변의 것들을 더 내세워지는 무대는 그 생명력이 짧아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이 크기도 하고요. -우리 것을 찾는다면서 본질이 묻혀버린 요즈음의 풍토가 위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제가 이 시점에 전통판소리를 내놓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아직은 제가 젊은 세대잖아요. 이런 젊은 사람들도 전통을 지켜가려는 의지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저로서는 새로운 시작인 셈인데, 정작 음반을 내고 보니 해야 할 일이 더 많이 보입니다. -전통판소리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하는 일도 그중의 하나일 듯싶은데요. 맞습니다. 그러려면 제가 먼저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일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아직은 구체적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작이란 마음으로 나섰으니 길이 보이겠지요. 인터뷰를 하는 내내 젊은 명창의 의지를 이렇게 단단하게 엮어 놓은 바탕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그것이 어쩌면 한 시대를 소리로 빛냈던 명창 이날치의 후손이라는 자긍심일 수도, 아니면 20대에 명창의 반열에 우뚝 선 타고난 재능에 대한 자신감 일수도 있겠으나 그에게서 돌아온 답은 의외였다. 전통판소리만큼 좋은 것을 만나지 못했어요. 사람의 성음으로 구현할 수 있는 최고의 감동을 대신할 예술이 또 있을까요. 이 젊은 명창이 우리 판소리를 일으켜 세울 날이 그리 멀지 않았으면 좋겠다. ● 장문희 명창은 장문희 명창은 서편제소리의 대가인 이날치 명창의 후손이다. 이날치와 그의 손자인 이기중, 그리고 이모이자 스승인 이일주 명창으로 이어지는 소리의 맥을 잇고 있으니 전통적인 판소리 가계의 면모가 그 덕분에 지켜지고 있는 셈이다. 그의 어머니 또한 소리와 춤에 재능을 보였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그 길을 가지 못하고 큰딸인 그를 언니인 이일주 명창의 문하에 일찌감치 보내 소리꾼으로 대성하기를 소망했다. 소리 공부는 일곱 살 때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이모는 타고난 재능을 보이는 조카에게 선뜻 소리를 가르치지 않았다. 1-2년 동안 소리하는 것을 보거나 듣게 하는 것으로 조카의 귀를 열어주었던 이모는 그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비로소 심청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다른 제자들보다도 유난히 엄하게 그를 가르쳤던 이모는 그를 오로지 소리만을 일상의 대부분으로 삼게 했다. 그의 어린 시절은 곤궁했다. 이모는 애정으로 돌봐주셨으나 넉넉지 않은 형편을 알고 있던 그는 급식비를 타는 일도, 숙제를 할 수 있는 참고서를 사달라고 말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참고서가 없으니 늘 숙제를 하지 못했던 그는 벌로 회초리를 맞아야 했던 초등학교 시절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워낙 타고난 소리로 주목을 받았지만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변성기를 맞았던 중학교 때가 그 첫 번째인데 상청이 안 나오는 것 뿐 아니라 온몸을 써야 하는 소리 공부 자체가 힘들어 다른 길을 가고 싶었다. 그러나 이모는 그 어느 것도 허락지 않았다. 다시 마음을 다잡았지만 고등학교는 꼭 예고를 가고 싶어 엄마 이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로 갔다. 서울 외곽의 고등학교를 다니던 2학년 때 학생 대사습대회에 나가 2등상을 받았다. 그때 그의 기량을 눈여겨본 박범훈 교수가 국악예고로 편입할 것을 권했다. 전액 장학생으로 서울 국악예고를 졸업했다. 고2때 동아콩쿨에 나가 금상을 수상했지만 이듬해 대사습에 재도전해 장원이 됐다. 중앙대 국악과 입시를 치렀으나 실기시험에서 추임새까지 넣으며 그의 소리에 감탄했던 심사위원들은 그를 떨어뜨렸다. 이모의 권유로 우석대에 들어가 4년 동안 대학시절을 즐겼다. 졸업후 한예종 대학원에 들어가 석사 과정을 마친 그는 때맞춰 공고가 난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에 응시해 단원이 됐다. 이듬해 대사습 명창부에 도전했다. 명창이 되기 위해 목표한 시간은 10년이었으나 그는 단 한번 도전으로 명창이 되었다. 그해 대사습은 심사위원 전원 만점의 최연소 명창을 내는 기록을 갖게 됐다. 이일주 명창으로부터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네 바탕을, 안숙선 명창으로부터 <적벽가>를 이수한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완창회를 시작, 적벽가를 제외한 네바탕 완창회를 가졌다. 2017년에는 화제를 모았던 케이블 음악 방송 엠넷의 <더 마스터-음악의 공존>에 출연, 두 번이나 그랜드 마스터로 뽑혔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국악 관련 각종 대회를 휩쓸고 수많은 전통판소리 무대와 창극 공연에 출연하면서 이름을 알렸으나 쌓아온 경력 대신 자신의 소리로만 장문희라는 이름이 알려지기를 원한다. 이번에 내놓은 <심청가> 음반도 온전히 자비와 자기 시간을 투자해 제작했는데, 그 음반 어디에서도 이 젊은 명창의 화려한 경력을 따로 찾아 볼 수 없다. 심청가로 시작된 음반제작은 춘향가로 이어갈 계획.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수석단원으로 있다.
영화는 담담했으나 가슴이 먹먹했다. 표현하기 어려운 죄스러움과 부끄러움이 더해지니 그 먹먹함은 아픔이 되었다. 영화 <김복동>을 극장에 내걸린 지 3주쯤 지나 보았다.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는데도 의외로 객석은 가득 차지 않았다. 한국에 대한 아베총리의 경제제재로 한일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즈음이었지만, 영화 <김복동>의 예상된 흥행(?)은 민망했다. 상업영화관들의 인내는 오래가지 않았다. 대부분의 상영관에서 여러 달 전부터 내걸었던 몇 편 수입 애니메이션은 건재했으나 영화 김복동은 간판을 내렸다. 그런데 끊어질 듯 했던 영화의 생명(?)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입소문 덕분이었을까. 자치단체와 기관, 각 분야의 공동체들이 영화 상영을 요청하고 나선 것이다. 영화 <김복동>은 위안부피해자이자 인권운동가였으며 평화운동가였던 고 김복동 할머니(1926~2019)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하자면 할머니가 1992년부터 올해 1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본의 사죄를 받기 위해 싸웠던 27년 동안의 긴 여정이다. 아흔 살이 넘은 고령에도 세계의 도시들을 돌며 일본의 식민정책 만행을 고발하고 공식적인 사죄를 요구했던 할머니의 삶을 담담하게 담은 이 영화는 역사적 실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왜 대한민국 국민이 이 치욕적인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지를 묵직하게 알려준다. 이 영화를 만든 송원근 감독(43)을 만났다. 방송용 다큐를 주로 제작해온 그에게 <김복동>은 첫 다큐멘터리 영화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 중심에 있는 일본의 식민지 역사를 다루는 일이니 소명의식이 발동하지 않았을 리 없고 한일 양국 사이의 갈등이 극도로 악화된 시절이니 책임감 또한 적었을 리 없다. 그러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고 명쾌했다. 모두가 알아야 하고 알려야 하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보이고 싶었다. 또한 이 문제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영화 상영과 감독과의 대화를 함께 요청하는 덕분에 전국의 도시들을 이웃집 드나들 듯 오가고 있는 송 감독은 고단하면서도 의미 있고 즐거운 이 여정이 얼마동안이라도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의 고된 여정이 역사를 바로 보게 하는 새로운 힘을 만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영화 관객은 기대한 만큼 이루어졌습니까. 예상보다 저조했어요. 상영관들이 너무 빨리 영화를 내린 것이 아쉽긴 하지만 또 좋은 영화들이 뒤를 이어 기다리고 있으니 욕심을 부릴 일은 아니죠. 그나마 영화를 미처 보지 못한 관객들이 공동체를 통해 상영 요청을 하고 있으니 다행입니다. -김복동 할머니는 이 영화를 못 보셨지요. 영화는 언제부터 준비했습니까. 할머니께서 지난 1월 28일에 돌아가셨는데 그 3개월 전에 제안을 받았습니다. 오래전부터 현장을 함께 하며 기록해온 미디어 몽구 김정환씨가 김복동 할머니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저 또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기록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터여서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했었지요. 곧바로 제작을 시작했지만 이미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고 계실 때여서 할머니의 일상을 담기에는 여러 가지로 제약이 많았습니다. 자료에 의지할 수밖에 없어요. 미디어 몽구의 자료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방대한 자료가 동원되었겠습니다. 미디어 몽구가 촬영한 자료들이 있었지만 영화를 만들기에는 부족했어요. 정의기억연대의 자료가 중요했는데, 당시만 해도 김복동 할머니에 관한 자료가 정리되어 있지 않았어요. 정의기억연대에서 3~4주에 걸쳐 자료를 찾고 정리해주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위안부 문제를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습니까. 개인적으로 현장을 담거나 자료를 들여다본 적은 없었습니다. 한일위안부 합의 이후에 토크 프로그램을 연출했는데 기획을 하면서 내용을 들여다보고 전문가들의 이야기 들은 것이 전부였어요. 다만 작년에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아리랑>, <한강>을 이어 읽으면서 우리 근현대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누군가를 통해 역사를 들여다보는 다큐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만났어야 하는 일 같습니다.(웃음)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어떤 형식으로 어떤 이야기를 담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하지 않은 상태에서 할머니 영화를 제안 받은 것이죠. 6개월 정도 책에 빠져 있다가 그런 제안을 받으니 소설에서 만났던 장면들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일본군에 끌려가던 소녀들의 장면이 선명했어요. 자료를 찾아보니 김 숨 작가가 쓴 자서전이 있었는데 소설과 자서전의 경계가 따로 없더군요. -영화의 구성이 새로웠습니다. 할머니의 기록이면서도 할머니의 개인적 일상에 집중하지 않고 관련 상황들을 이어가면서 그 안에서 할머니의 존재를 들어나게 하는 방식이 다른 다큐와는 사뭇 달랐던 것 같습니다. 영화가 할머니의 자서전 성격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통해 역사를 보여주는 방식을 고민했습니다. 대하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의 구성에 관심이 갔어요. 김복동도 그런 대하소설 같은 구성으로 관객들이 깨닫고 감동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관객들에게 강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시간의 흐름으로 일별하면서 스스로 알게 하는 그런 힘을 원했던 것이겠군요. 이 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었던 시점이 아베의 경제제재로 막 시끄러워지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이런 시점에서 우리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감정적으로 자극하는 영화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차분하게 돌아볼 수 있게 하는 영화죠. 김복동 할머니도 많은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나설 때 오히려 화를 참고 인내하며 차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하는 분이셨어요. 영화도 그런 마음으로 만들었고 그런 의미를 녹여내려고 노력했습니다. -돌아봐야 하는 일들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요. 한일 문제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고 왜 여기까지 이 지경으로 온 것인가에 대한 것이죠. 지금 우리 사회가 왜 이런 상황에 놓이고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말하자면 그런 문제들을 돌아볼 수 있는 시발점 같은 역할을 영화가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궁금했던 것이 있습니다. 영정 사진 한 장으로 마무리 한 마지막 장면인데요.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을 한 장면도 담지 않았더군요. 특별한 이유가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의도가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어떤 걸음을 걸어왔었는지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관객들이 우리 역사를 알게 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할머니의 활동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계속 남아서 이어질 수 있도록 이어지고 떠다니며 힘을 전하는 그런 역할을 기대했어요. 굳이 장례식을 담지 않고 영정 사진 한 장으로 마무리 한 것도 그런 의도였습니다. 돌아가셨다고 해서 할머니의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 그래서 그 과제를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지요.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에 대한 메시지 같은 것이겠습니다. 맞습니다. 할머니가 억울해했던 일본의 사죄,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제가 있지 않습니까. 할머니가 끝까지 얻고 싶었던 것을 결국 못 얻고 가셨잖아요. 그런 뜻을 담고 싶었던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살아 계실 때의 냉철하고 의연했던 모습을 더 강하게 기억하게 하자는 것이 기획 단계에서부터 생각이었습니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더 많은 관객들이 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더군요. 제 입장에서는 더 그렇죠.(웃음) 사실 저는 어떤 운동성으로 이 영화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관객과의 대화를 해보면 그런 것을 원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저는 그 질문에 영화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답합니다. 이 영화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머리가 아니라 마음 속 깊이 새겼으면 좋겠거든요. 한 순간 감동하고 잊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물들어버리는 그런 과정을 공유하고 싶은 거죠. 우리가 안고 있는 한일 역사는 우선 아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해결할 수 있는 답도 얻게 되고 그것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찾게 되는 것 아닐까요. -이 영화를 보고 어느 것 하나 해결된 것이 없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감독님이 다큐를 통해 의도하신 것은 결국 그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큐의 힘은 그런 것 같아요. 방송 다큐와 극장 다큐를 구분한다면 방송다큐는 우리가 그냥 우연찮게 보다가 뜻밖의 즐거움과 뜻밖의 깨달음을 주는 것이라면 극장 다큐는 아주 깊고 넓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연히 지나가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찾아서 보는 그것만으로도 우선 출발선이 다르니까요. 그리고 극장 다큐는 사실 매우 아날로그적인 방식입니다. 이를테면 직접적으로 와 닿는 지적인 깨달음 보다는 감정적으로 사람들을 녹여내고 물들이는 염료와 같은 것이죠. 관객과의 대화를 하다보면 영화를 보고 비슷한 느낌들을 갖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떠다녔던 질문과 답을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다하더라도 더 깊이 있게 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큐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입니다. 충분히 바꿀 수 있다고 믿죠. 사실은 이 영화가 상영되기 전에는 기대가 훨씬 높았어요. 7월 중순부터 인터뷰가 이어질 정도로 관심이 높았으니까요. 그런데 현실은 달랐어요. 한일문제의 근원을 사람들이 이 영화를 통해 알 수 있겠다 싶었는데 그냥 뉴스로만 소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런데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은 영화가 갖고 있는 힘을 잘 알아주시는 것 같았어요. 단순히 슬픈 영화로서가 아니라 할머니의 희망을 제대로 보고 그 메시지를 읽어내는 관객들이 늘어날수록 그런 메시지가 널리 확산되고 있음을 느끼게 되거든요. 공동체들의 상영 요청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그것을 증명해주죠. -앞으로 계획은 어떻습니까. 다른 영화도 만들고 싶어요. 그러나 굳이 욕심을 내고 싶진 않아요. 이 영화를 만들면서 내내 내가 할 수 있을까를 되물음을 했습니다. 그 과정이 웃으면서 즐겁게 한 것이 아니라 어떤 무게감과 사명감을 갖고 해야 했어요. 그것은 어느 순간 소명의식이 되었습니다. 되돌아보면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한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 나에게 주어진 과제였어요. 어느 날 어느 순간 물이 밀려오는데 제가 그것을 피하지 못하고 이끌려가면서 한 것이었죠. 앞으로의 일도 분명히 그렇게 올 것이라는 예감이 있습니다. 그러니 준비를 하고 있어야겠죠. -어떤 이야기를 담게 될지 궁금합니다. 국가의 어떤 큰 흐름 속에서 소외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50년대 이후로 군사정권의 독재가 너무 길었습니다. 그 뿌리는 물론 일제 강점기죠. 우리의 근현대사 100년은 일본의 식민 지배로부터 어긋나고 망쳤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 과정에서 국민들은 짓밟히고 살아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죠. 개인은 늘 중요하지 않은 존재였습니다. 분명히 목소리를 내고 싶은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 목소리를 내더라도 그 진위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사회의 굳건한 시스템 속에서 묻히고 뭉개지고 왜곡되는 그런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소외되는 목소리를 듣고 담아내는 작업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 송원근 감독은 세월호친일파 등 폭 넓은 사회적 이슈 다뤄 송원근 감독은 1977년 생, 올해 나이 마흔 셋이다. 남원이 고향이지만 일찍 전주로 이사와 성장했다. 전북대 경영학과를 졸업했지만 전공보다는 방송을 만드는 일에 관심이 많아 방송반에서 활동하면서 대학시절 내내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고 만드는 일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다큐 제작의 모든 과정은 온전히 독학으로 익혔다. 섬진강댐이 건설되면서 터전을 잃은 주민들의 삶을 담은 <두꺼비강의 눈물>을 비롯해 <야학은 무엇인가>, <이제 대한민국의 반란이 시작된다> 등 당시 제작된 다큐 작품은 각종 영상 공모전에 출품되어 수상했거나 영화제에서 상영됐다. 2003년 대학 졸업과 함께 서울 MBC시사교양국에 들어가 일했다. 소속은 되어 있으나 정규직이 아닌 이른바 독립피디 신분이었다. <화제집중>, <불만제로>와 같은 고발성 시사프로그램과 같은 국제시사프로그램에 참여해 연출자로 활동했던 시절, 일은 고단했지만 그 과정 모두가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성장하는데 귀한 경험과 자산이 됐으니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1년 동안 EBS의 과학다큐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던 그는 케이블 TV 경제채널 회사에 들어가 1년 반 정도 직장생활을 했다. 처음 4대 보험 가입자가 되고 퇴직금도 받을 수 있는 직장이었다. 생활은 안정됐으나 회사의 정체성과 시스템에 적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갈등하고 있던 즈음, 뉴스타파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왔다. 2013년 2월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 뉴스타파의 프로듀서가 되어 일을 시작했다. 뉴스타파가 지향하는 가치를 공유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있었다. 세월호 참사의 실상을 알리는 다큐멘터리로부터 세월호 참사 100일 다큐, 세월호 1주기 다큐를 이어갔다. 1주기 다큐로 제작한 <참혹한 세월, 국가의 거짓말>은 한국프로듀서연합회가 주관하는 제28회 한국PD대상에서 시사다큐부문 작품상을 수상 했다. 2015년에는 친일파와 그 후손들을 추적한 <친일과 망각> 4부작 시리즈 제작에, 2016년에는 대한민국 훈장이 권력자의 통치를 위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추적한 <훈장과 권력> 4부작 시리즈 제작에 참여했다. 유튜브를 통해 관객을 만나는 한계에서도 사회적 이슈를 불러일으킨 화제작들이었다. 2019년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인권운동가인 김복동 할머니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김복동>을 연출,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지난 8월에 개봉한 다큐영화 <김복동>은 극장 상영을 마무리 했지만 전국의 자치 단체와 기관, 학교, 공동체들의 요청이 이어지고 있다. 영화 상영은 감독과의 대화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일상이 바빠졌지만 보람과 책임의식을 절감하며 기꺼이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부안군 변산면 변산로. 아름다운 해변 마을 모항에 있는 시인의 집을 찾았던 것은 10여년도 훨씬 더 지난 일이다. 두 번째 산문집 모항 막걸리 집의 안주는 사람 씹는 맛이제를 펴낸 직후였는데 그는 이 책 때문에 마음고생을 단단히 겪고 있었다. 그가 나고 자란 모항과 그곳 사람들이 살아온 그만그만한 이야기를 담은 이 산문집이 나오면서 더러는 감추어두고 싶었을 이야기 속내가 들춰지자 마을 사람들 사이에 적잖은 입담이 오고간 후유증이었다. 꽁댕잇배에 늙은 아버지와 어린 아들을 태우고 고기잡이 나섰다가 밤썰물에 밀려 삼대가 몰살한 갑열씨, 아들딸 낳고는 어쩐 일인지 3년을 폐인으로 지내다 요절한 자맥질 선수 종태씨, 어릴 때 하도 울어싸 아버지가 포대기 채로 내팽개쳐 실성해버린 고막녀, 오징개 양반이 바람피우다 들킨 사연, 남의 배를 타면서 받은 삯을 조금 때 술집에 붙어살며 술로 다 먹어조져버린 조지기, 눈을 끔쩍이는 버릇 때문에 남자를 줄포장에서부터 뒤따라오게 한 눈끔쩍이, 술 마시고 조갈증으로 오강 단지 안 오줌을 다 마시고도 사람들이 왜 웃는지 모르는 공진씨 등 더도 덜도 아닌 마을 사람들의 일상을 꼭 그대로 펼쳐놓은 산문집의 이야기는 재미와 애틋한 감동으로 수많은 독자들을 끌어 들였지만 시인은 외레 마을 사람들에게 상처를 안겼다는 것에 마음 아파했었다. 농사짓는 시인 박형진씨(61) 이야기다. 꼭 19년 만에 시인의 집을 다시 찾았다. 그동안 시집과 산문집, 어린이 책을 꾸준히 내놓았던 그는 최근 네 번째 시집 <밥값도 못 하면서 무슨 짓이람>(천년의 시작)을 펴냈다. 소설가 정도상의 표현처럼 농부이며 동시에 시인인 상태로 노동하는 시인의 삶이 궁금했다. 덧붙이자면 3년 전 자칫 도감과도 같은 성격이 될 연장에 관한 이야기를 맛깔스런 글로 버무려 내놓은 훌륭한(?) 산문집 <농사짓는 시인 박형진의 연장 부리던 이야기>(열화당)도 좀 더 듣고 싶었다. 짙푸른 나무가 빽빽하게 놓인 산길을 따라 들어간 그의 흙집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한때는 농민운동을 이끌었던 투쟁가였으나 강하지 않고 요란스럽지도 않은 그는 환갑을 넘긴 나이에 맞게 더 찬찬하고 겸손해진 듯 했다. 그가 즐겨 마시는 줄포막걸리와 방금 쪄낸 옥수수가 마당 한쪽 평상위에 놓였다. 더위가 한창인 한 낮, 한가해진 농사꾼 시인과의 인터뷰는 예상보다 길게 이어졌다. -들어오면서 보니 밭에 작물은 별로 보이지 않고 풀이 잔뜩 깔려 있던데요. 그것이 눈에 띄었군요. 올 한해 땅을 놀렸어요. 농사짓기 싫어서. -농사짓는 시인이 농사는 짓지 않고 시만 쓴다는 이야기겠습니다.(웃음) 이야기 하자면 긴데, 완전히 놀리진 않고 그저 우리 식구 먹을 만큼만 땅을 빌렸습니다. - 농사는 얼마나 짓습니까. 소규모예요. 집 앞 밭은 천 오백평정도, 일곱 마지기 조금 넘고 논은 천이백 평, 한 필지 짓습니다. -적지 않은 것 같은데 수입은 어떻습니까. 1년 수확하는 쌀이 알곡으로 2000kg 정도인데 가격으로는 형편없어요. 유기농을 하고 있는데다 농기계가 없으니 농사를 지으려면 트랙터 콤바인 이앙기 등 기계를 임대해야 하고 거름까지 모든 경비를 제하고 나면 250만 원~300만 원 정도 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 식구가 1년 먹고 살아야 하는데 유기농 쌀은 비싸니까 일반미를 다시 사서 먹어요. 우스운 일이죠. -유기농으로 열심히 지은 쌀은 내놓고 일반미를 사서 드시는 이 상황이 농촌 현실이겠네요. 밭농사는 유기농이 더 힘들거든요. 풀을 일일이 앉아서 뽑아야 하니까요. 가격이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 한 살림이나 생협 등 관련 단체와 계약재배를 해야 합니다. 이런 방식이 아니면 시중에 내기 어렵죠. 저 같은 경우는 결국 나누어 먹거나 자가소비 합니다. -유기농으로 전환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특별한 계기라기보다는 제가 농사일에 게을렀어요. 풀을 매는 것도 그다지 열심히 하는 체질이 아니어서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에는 풀매는 일로 야단을 많이 맞았죠. 결혼 전부터 농민운동에 참여하면서 농사짓는 방법에 대해 고민이 많았는데 결혼 하고 난후 정농회에 있는 친구들을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유기농 쪽으로 가게 된 것 같아요. -유기농을 한다는 것은 고단한 일이잖아요. 일상적으로 해왔던 것들 무심히 해왔던 것들을 챙겨야 하고.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달라졌어요. 지지난주 금요일에 집을 나가 엿새 동안 고창 영광 함평 무안 신안 목포까지 230km를 걸었어요. 길가의 논밭을 보니 유기농을 하는 곳은 확실히 표가 나더군요. 특히 함평 쪽으로는 유기농 땅이 많았어요. 요즘의 농촌이 어떻습니까. 인구가 줄어드니 폐가가 많고 논밭은 단정하지 않죠. 또 놀란 것은 농촌 구석구석까지 뒤범벅되어 있는 쓰레기 더미였어요. 보이는 것은 논둑이든 밭둑이든 풀 약을 친 탓에 벌겋게 타있고. 가슴 아팠습니다. 유기농 하는 사람들은 절대 풀 약을 하지 않아요. 풀이 자랄 때까지 기다려 깔끔하게 깎아주죠. 힘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풀 약으로 벌겋게 타고 메마른, 모래 먼지만 풀풀 날리는 숨도 못 쉴 것 같은 이런 땅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 같아요. 풀의 생리나 작물의 생리를 잘 알게 되면 그렇게 죽자 살자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유기농을 하면 숨통이 트여요. 이번에 돌아보니 더 확연히 알겠더라고요. -멀찌감치 떨어져 보게 된 땅이 많은 것을 다시 확인시켜준 것 같습니다. 농약을 안 한 논과 밭을 지날 때는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어요. 푸름이 살아 있고. 우렁이가 알을 낳아 놓고. 그런 것을 보니 풀과의 전쟁이나 노동의 어려움을 떠나 결국은 유기농사가 힘들기는 하지만 자연이 가져다주는 것으로 충분히 보상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 것이죠. 나를 떠나 우리 이웃을 살리고 나아가 흙과 물을 살리는 일이 되니 어렵고 힘든 일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아요. 유기농의 힘은 더 넓게 봐야 해요. -3년 전쯤 펴낸 연장 이야기 산문집은 선생님이 농사일에 어떤 가치와 의미를 두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책이더군요. 어떻게 쓰게 되었습니까. 간단합니다. 소중한 것들이 다 사라지잖아요. 사라진다는 것은 구시대 유물이 되어버린다는 것인데, 갈수록 고령화되는 농촌에서는 연장과 기계의 문제가 더 절실합니다. 옛날 부지런한 가장이 있는 집 괭이나 호미는 결코 녹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다 녹슬어버린다는 것은 수공업적인 농촌의 문화나 농촌의 생활양식이 다 없어진다는 이야기거든요. 그것이 안타까웠어요. 또 하나. 넘쳐나는 오늘의 과잉 기술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어요. 예를 들어 몇 평 되지 않은 텃밭은 괭이나 호미로 하면 되는데, 그마저도 트랙터가 들어가 한단 말이죠. 그런 과정이 일을 좀 편하게 해줄 수는 있지만 재화의 흐름으로 보면 결국은 모두 농기계회사나 거대 기업들에 돌아가는 잇속이에요. -선생님은 농사지을 때 거의 연장을 쓰십니까. 저도 형님들이 주신 경운기 한 대와 관리기가 한 대 있어서 쓰긴 합니다. 그러나 적정기술로 보자면 저 같은 소농의 경우는 이정도면 충분한데 농사일이 꼭 그렇게 되진 않거든요. -적정기술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수준인가요. 과잉 기술이 아닌, 쓸모 있는 만큼만 쓰는 것이죠. 적정기술의 뒷면에는 이런 것도 있어요. 대기업이 갖고 있는 농기계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그런 인식. 결과적으로는 석유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배경이죠. 최소한의 동력을 이용하는 것, 그것이 적정기술인데 그 지향은 지속가능함에 있습니다. -얼마 전 다녀오셨다는 도보여행은 어땠습니까. 생애 처음 몇 십 년 만에 벼르고 별러 다녀온 여행이었어요. 젊은 시절, 농민운동 할 때는 직책까지 맡았으니 날마다 나돌아 다녀야 했지만 여행이라고 할 수 없었죠. -맘먹고 가셨군요. 45년 농사일을 했는데, 이 밭이 고스란히 그 시간을 함께 해온 밭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돌아보니 해마다 같은 일이 되풀이 되는 거예요. 봄 되면 감자 심고 고추 심고, 여름 되면 고구마 참깨 콩 심고. 규모가 크면 다른 것을 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안 되고. 그렇다고 규모가 있다 해도 할 수 있는 일도 없거든요. 지금은 대부분의 작물이 단지화가 안되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오늘의 농사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저 같은 소규모 농작인 경우는 결국 재래식 농사 밖에 할 수가 없는 것이죠. 45년 농사를 지었다는 것은 해마다 똑같은 농사일을 45년 동안 되풀이 했다는 것인데 명색이 농사를 지으면서 시를 쓰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반복되는 일들이 너무 지겨워졌어요. 부끄러운 일이긴 하나. 그런 생각이 갈수록 더 큰 괴로움을 주더군요. -그렇게 생애 처음 떠난 여정에서 뭘 얻으셨습니까. 뭘 꼭 얻겠다고 떠난 길은 아니었으니 욕심은 없었어요. 시를 몇 편 써오긴 했지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자기애가 강하고 독립심이 없었어요. 가족들과도 마음의 일체감이 없어졌다 생각하면 너무 괴롭거든요. 그래서 항상 가장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이 나쁜 방식은 아닌데 자칫하면 집착이 되거든요. 이번 여행에서는 무작정 걸었어요. 조금 더 걸어 해남 땅 끝까지 갈 계획이었는데 변산공동체 학교에서 연락이 와 그날 저녁 돌아왔습니다. 엿새 동안 하루 35km나 40km를 죽자 살자 걸었어요. -잘 다녀오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까. 지금까지와는 다른 태도로 세상을 만나신 셈인데요. 다른 태도라기보다는 다른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었던 것이죠. 60년 살고 보니 모든 것이 바닥이 나버린 것 같은, 무엇인가 다시 새로 써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갈등 같은 것. 지금껏 살아오면서 경제적인 부분은 생각해 본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계속 같은 것들이 반복되는 일상은 견딜 수 없었어요. 길들여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겠죠. 고행과도 같은 여정에서도 밝게 정리되는 몇 가지가 있었어요. 여행의 끄트머리쯤이었는데 더 이상 걷기 힘들어진 거예요. 더 이상 못 걷겠다 싶어 면사무소에 들어가 농가 비닐하우스나 정자 같은 쉴 자리를 물었죠. 이슬만 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면사무소 뒤편 일하시는 분들 쉼터를 안내해줬어요. 그때 단순한 고마움이 아니라 어떤 깨우침이 확장되어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하고 너그러운 삶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했죠. 그리고 덧붙이자면 정신의 자유랄까. 농사일에 매달린 삶이라도 어떻게 하면 정신의 자유를 가져올 수 있겠는지 길이 보여요. 좀 더 자유롭게 농사를 대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시 이야기를 해보죠. 시를 쓰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농사지으면서 시를 쓴다는 것은 확실히 특별한 일인데요. 특별한 계기라면 신동엽 시인의 시를 만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저는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데, 우여곡절 끝에 열여덟 살 즈음 서울에 올라갔어요. 박정희 정권시절이었는데 날마다 데모와 시위가 이어졌죠. 아는 분을 통해 운동권 누나를 알게 되었어요. 덕분에 그 시절 여기저기서 열리는 교양강좌를 많이 듣고 다녔어요. 그 누나가 신동엽의 <금강>이라는 시집을 소개해주면서 시를 모두 베껴 가져다주더군요. 세권의 스프링노트였는데 지금도 갖고 있습니다. 금강 중에서도 6장 시작 부분에서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을 받았어요.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자 는 그런 내용인데, 우리나라의 구조적 문제와 온갖 비리를 압축적으로 담아 놓은 시였어요. 지금 읽어봐도 그 감동이 전혀 퇴색되지 않는 시죠. 그 부분만 10부를 베껴 지인들에게 나누어주었어요. 그러면서 나도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신동엽의 금강이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군요. 신동엽 시인의 시 껍데기는 가라처럼 분단의 문제를 일관되고 정서적으로 그리고 올곧게 다룬 시가 또 있을까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다운 시잖아요. 거기 비추어보면 농민의 모든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으로서 과연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말미에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굳이 가리자면 선생님은 농사꾼과 시인, 어느 쪽인가요. 어려운 질문인 것 같으면서도 간단합니다. 농사꾼이 아니었으면 시인이 못되었을 겁니다. 지금도 저를 시인으로 부르면 내 몸에 맞지 않는 옷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랫동안 농사지어온 농사꾼의 정체성으로도 걸맞지 않고 시인으로서도 자리매김 될 만큼의 좋은 시를 썼다는 생각이 들지 않거든요. 분명한 것은 농사꾼으로서 겪게 되는 괴로움이나 갈등을 그래도 의연하게 견뎌왔고, 또 그 과정에서 마음속에 북받쳐 오르는 것들이 있어 그것이 자연스럽게 노래로 나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앞으로의 시간이 그려집니다. 더 건강한 농사꾼으로 돌아온 시인을 만날 수 있겠구나 하는. 제 시집에 칠석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어딘가 떠나겠다는 이야기를 담았는데, 그렇게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내 발에 혹은 내 입속에 콩잎 깻잎 이런 것이 돋아나올 때면 내가 정말 제대로 된 농사를 다시 하고 싶다면 칠석에 내린 비 같이 돌아오겠다는 내용이에요. 그런 시간을 곧 마주하고 싶습니다. 제대로 된 농사를 지으면서 제대로 시대를 담는 그런 시를 쓸 수 있으면 좋겠어요. ● [박형진 시인은] 10여 년 농민운동고향 부안서 대안학교 교장도 맡아 박형진 시인(61)은 부안군 변산면 모항이 고향이다. 열여덟 살 즈음 잠깐 서울로 가서 지냈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고향을 떠난 적이 없다.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 집에서 15km나 떨어져 있는 읍내 중학교에 다니기 싫어 세 번 가출 끝에 목적을 이뤘지만 형들의 채근으로 서울의 피어선 공립학교를 한 달 남짓 다니다 그 마저도 작파하고 내려왔다. 7남매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난 그를 어머니는 특별한 애정으로 키웠다. 아홉 살 늦깎이 나이에 초등학교 입학한 것도 어머니가 품에서 아들은 떼놓지 못한 탓이었다. 여덟 살 때까지 엄마 등에 업혀 저녁이면 마실을 다녔던 그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온갖 재밌는 이야기를 귀에 쏙쏙 박히도록 들었는데, 그의 산문과 시가 푸진 어투와 재미를 갖게 됐다면 그 덕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에는 흥미가 없었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책읽기에는 관심이 많았다. 초등학교 졸업할 무렵부터 농사일을 거들기 시작했는데, 그즈음 문맹퇴치를 내세워 마을에 야학당이 생기고 마을문고가 문을 열었다. 덕분에 원래 서당이 있었던 그의 집에 마을문고가 들어섰다. 그때 동네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 했던 삼국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고, 다섯 권씩 20권 세트로 구성된 현대문학 100권을 거의 다 읽었다. 잊고 있었던 그 소설들은 문학을 알게 되고 시를 쓰게 되었을 때 책읽기에 빠져 있었던 어린 시절을 소환해냈다. 농사일을 배우고 있던 열여덟 살, 반란이 시작됐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중학교 강의록을 사서 공부 했지만 영어 수학이 그의 의지를 붙잡았다. 공부를 다시 하겠다며 서울로 갔다. 그즈음 서울 각 공간에서 운영하던 교양강좌를 찾아다니며 지식을 넓혔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운동권 누나 덕분에 자신을 시인으로 이끈 신동엽시인의 시 <금강>을 만났다. 그러나 서울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꾼이 된 것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몫이라고 생각했다. 20대와 30대를 거치면서 농민운동은 중요한 사명이 되었다. 기독교농민회 전라북도 총무를 맡을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던 그는 다른 방법으로 운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과감히 15년 농민운동과 결별했다. 그때부터 농사일에 전념하면서 시도 열심히 썼다. 1992년 <창작과 비평>에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이 됐다. 철학자 윤구병 교수가 주도한 변산공동체를 만드는데도 참여한 그는 세 딸과 아들을 모두 변산공동체 학교에서 교육시켰으며 지난해에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공동체 대안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첫 시집 <바구니 속 감자 싹은 시들어가고>를 비롯한 네 권의 시집과 <모항 막걸리집의 안주는 사람 씹는 맛이제> <농사짓는 시인 박형진의 연장 부리던 이야기> 등 세권의 산문집, 그리고 <갯마을 하진이>와 <벌레 먹은 상추가 최고야>등의 어린이 책을 펴냈으며 그중에서도 <연장 부리던 이야기>는 88가지 연장 이야기를 통해 사라져가는 농촌의 생활문화와 양식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오래전부터 오며 가며 마주치는 조각 작품이 있다. 문화단체 사무실에 있는 나무 조각상이다. 긴 통나무를 각 지게 깎아 기둥을 만들고 그 위에 빨간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를 세워놓은 조각. 매끄럽지 않은 투박함과 원색의 토속적 분위기가 특별한 느낌을 주는 이 작품의 작가는 조각가 강용면씨(62, 아리울조형연구소 대표)다. 아마도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전에 제작 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 작품은 그의 작업을 상징하는 연작 <역사원년>의 연상에 있다. 그런데 이 작품 참 독특하다. 단단한 어깨가 돋보이는 이 여성은 서있는 그 자세가 당당하다. 거친 세상 속에 던져졌으나 스스로 당당하게 걸어가는 여성을 표현한 작가의 메시지는 그래서 더 분명하다. 그는 한국적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자신의 작품에 들여놓은 조각가다. 늘 소재와 형식은 새로운 변화로 출렁였으나 시대와 소통하고 싶어 하는 그의 견고한 언어는 시간과 시간을 넘어서면서도 인간과 인간의 삶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았다. 나무 작업으로 시작해 모자이크와 아크릴, 피시와 에폭시 등 다양한 소재를 아우르며 한국적 정신의 근원을 추적해온 그의 조각은 그 자체로 한국적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상징적 언어가 됐다. 미술계가 중진작가의 반열에 우뚝 선 그를 여전히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역사원년> <응고> <현기증> 등 굵직한 주제의 연작으로 한국 조각에 자극을 불어넣어온 작가의 삶이 궁금했다. 때마침 완주군 소양면의 갤러리 아원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 <전통을 품다>가 감동으로 대중들을 만나고 있었다. 인터뷰는 군산시 옥산면, 너른 들판 사이로 난 길가의 오래된 창고를 개조한 그의 작업실에서 있었다. 80년대 후반, 전업 작가의 길을 택한 이후 지금까지 40년 가까운 시간을 도전과 기다림으로 이어온 그의 흔적은 작업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조각 작품들로 빛났다. -작업실이 넓습니다. 오래된 창고 같은데, 쓸모 있게 변신을 했군요. 쌀을 쌓아두던 창고였는데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예전 만경강 근처 갯벌 옆에 있던 작업실도 쌀 창고였는데 작품이 많아져 15년 전에 이쪽으로 옮겨왔습니다. -쌀 창고와 인연이 깊군요.(웃음) 모든 작업을 여기서 하십니까. 작업이 워낙 대작이다 보니 우선 큰 공간이 필요하고 천장이 높을수록 제게는 장점이어서 늘 이런 창고만 찾게 됩니다. 그래서 시간이 있을 때마다 틈틈이 군산 근방의 서천 장항 김제까지 창고가 있을만한 곳을 돌아다녔어요. 처음에는 100평 정도만 되어도 좋겠다 싶었는데, 벌써 이곳도 거의 채워졌네요. 여기서 대부분의 작업을 하지만 공공 조형물은 소재에 따라 공장에 제작을 맡기기도 합니다. -조각의 특성상 아무래도 작업 공간과 환경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다양한 소재 뿐 아니라 다양한 기법을 시도하셨지만 시간으로나 양적으로나 나무 작업이 많았던 것 같은데요. 나무 조각은 제 작업의 뿌리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나무를 택했던 것은 어려웠던 경제적 환경과도 관련이 있어요. 모교에서 조교생활을 할 때였으니 아무래도 여건이 녹록치 않았습니다. 그때 마침 학교 건물을 새로 짓고 있었는데 학교 뒤에 버려진 소나무가 많았어요. 임자가 따로 없으니 톱만 갖고 가면 다 내 것 이었죠. 좋은 재료를 쉽게 얻을 수 있었으니 다른 소재에 눈을 돌릴 필요가 없었어요. -그런 이유가 있다 해도 재료가 표현의 기법이나 주제와 맞지 않으면 한계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물론입니다. 마침 제가 작업을 시작했던 80년대 미술계의 화두는 한국 전통성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저 또한 전통을 주목하고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민화나 불상 조각, 무신도 같은 그림이 지니고 있는 전통적 요소에 마음이 갔습니다. 제가 얻은 나무 조각의 형태와 색감은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이지요. 나무에 채색을 하는 것은 그 당시 낮선 기법이어서 우려도 있었지만 한국적 전통을 현대적으로 구현해내는 방식이 제게는 매우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었어요. 제가 나아갈 길을 그 안에서 찾기도 했으니까요.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인물상 작품들은 그런 점에서 제 작업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인물상 연작인 <역사원년>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습니다. 그 작업을 10년 이상 지속하셨던 것으로 아는데요. 오래전 인터뷰에서 역사원년의 인물상이 꼭두각시 인형으로부터 영감을 얻으셨다고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맞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김제 고향마을은 한학의 전통이 깊은 곳이었어요.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풍습과 무속적 환경이 일상에 배어 있었죠. 알게 모르게 오래된 풍습과 문화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안타깝게도 전통이란 옷을 입은 대부분의 것들이 훼손되거나 단절되었지만 우리의 정신적 근원이 되었던 문화의 바탕을 찾고 싶었습니다. 꼭두각시 인형은 제가 주목했던 전통적인 요소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영감을 안겼어요. 오방색을 작업의 중심에 들여놓게 된 것도 그 덕분이지요. -어찌됐든 채색된 나무 조각은 강용면의 작업을 상징하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나무의 채색은 우리의 오랜 전통이기도한데 오히려 미술작업에서는 그러한 정체성을 외면해온 경향이 있었지요. 맞습니다. 제 작업이 관심을 모으면서도 한편에서는 우려도 있었던 이유가 그 때문이에요. 저는 여러 가지 이유로 나무를 만나게 되었지만 그중에서도 나무를 놓지 못했던 이유는 나무의 성질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꽃 새 등 자연을 소재로 하는 조각품에 채색은 매우 중요한 과정이었어요. 전통 물감을 비롯해 다양한 재료를 섭렵하면서 저만의 언어를 찾을 수 있었지요. 그 작업을 이어갔던 90년대가 작가로서 성장하는데 가장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30대 후반부터 40대에 이르는 시기가 되겠군요. 시간 강사에 더 이상 매이지 않고 전업 작가의 길에 들어선 직후부터인데, 말씀대로 선택이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제 작업에 대한 절실함이 깊어지니 그야말로 열심히 하게 되더군요. 작업에만 온전히 매달리게 되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 중에서는 가장 열심히 작업하는 작가로 꼽히기도 했어요. 지방대학에서 제 이야기가 회자 될 정도였으니까요.(웃음) -조각 분야는 특히 지역에서 활동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활동 영역을 넓히는 일도 그렇고요. 그런 어려움이야 조각뿐이겠습니까. 한국의 화단은 특정한 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잖아요. 지역적으로는 서울 경기 쪽에 집중되어 있고요. 그 한계와 경계를 뛰어넘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확고한 철학을 갖고 노력하면 길이 열립니다. 그 길은 오로지 작품으로만 열 수 있는 길이죠. 저 또한 좌고우면하지 않고 작업에만 집중해오면서 그 길을 찾고자 했습니다. 지방대 출신으로 지역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한계를 인정하는 작가들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작업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확신이 없으니 작업의 동력을 찾기 어렵고 좋은 작품도 나올 수 없죠. -예전과 달리 지금은 창작 지원 형태도 다양하게 열려있어서 의지만 있다면 작가들이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 것 아닌가요. 지원 시스템이 넓어진 것은 사실이에요. 주어지는 기회를 굳이 외면할 필요는 없죠. 그런 시스템을 활용해서 작업을 힘 있게 할 수 있는 기회도 얻고 예술세계를 넓혀 작가적 역량을 키워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다시 작업 이야기로 돌아가 보죠. 나무 이후 아크릴 작업으로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당시 개인전 뿐 아니라 초대나 기획전 등 참여하게 되는 전시회가 1년에 20개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나무 작업은 노동력도 그렇고 시간도 오래 걸렸어요. 오로지 혼자 힘으로 완성해야하는 작품의 특성상 어려움이 컸습니다. 그즈음 새로운 표현 방식에 대한 갈망이 생겼어요. 현대적인 감각을 담아 낼 수 있는 방식을 찾고 싶었죠. 구리선과 모자이크를 활용한 작업을 먼저 시도했어요. 막혀있는 공간이 아닌 열려있는 투각 공간을 형상화하는 것이었죠. 그 과정에서 매달려 움직이는 것, 키넥트적인 구조를 해보고 싶더군요. 바람에 흔들리거나 소리를 낼 수 있게 하는 작업에 마음을 두면서 공간의 확장과 조명을 들여왔어요. LED를 쓰는 대신에 피시와 아크릴을 활용하기 위해 가마까지 제작했죠. 새로운 소재와 기법을 얻으려면 그만큼 비용이 필요한데 다행히 그즈음 공공 조형물 작업이 많이 들어왔어요. 열심히 벌어 열심히 투자했지요.(웃음) -성과는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어요. 저는 40대 후반 의욕적으로 시작한 이 작업이 나의 작업 노정에 큰 변곡점이 될 것이란 기대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반응이 그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나무 작업에 대한 아쉬움을 많이 이야기 했지요. 그러나 제가 진행하는 공공 조형물 작업에 매우 유용하게 이 기법과 소재들이 활용될 수 있게 되었으니 굳이 찾자면 성과가 없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선생님은 공공 조형물과 개인적인 작품을 별개로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실 그것이 명쾌하게 정리하기 어려운 문제인데 공공성을 앞세운 조형물과 작가 개인의 작품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거든요. 가장 좋은 방식은 작가의 예술성을 온전히 반영하는 공공 조형물을 제작하는 것이겠으나 건축주와 주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담아내야 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개인적인 예술세계는 훼손되거나 묻히기 십상이지요. 저 역시 그러한 과정에서 빚어진 갈등요소 때문에 포기했던 경험이 많습니다. -미술 장르의 경계가 허물어졌다고는 하지만 공공조형물 작업은 아무래도 조각 분야와 긴밀한 관계가 있죠. 그래서인지 젊은 작가들도 공공조형물 제작에 많은 관심을 두게 되는데 선생님 말씀 듣다보니 예술관 구축이 필요한 젊은 세대들에게는 이러한 요소가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들은 경제력이 있어야 다음 작업을 할 수 있게 되니 무조건 외면 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공공조형물에만 매달리는 젊은 작가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예술적 완성도를 향한 치열한 과정이 없이 목적을 앞세운 조형물 제작에 익숙해진다면 좋은 작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은 막힐 수밖에 없거든요. 요즘 미술계에서 좋은 조각가를 찾기 어렵다는 한탄도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그런 갈등을 어떻게 극복하십니까. 다행스럽게 제가 작업을 시작했을 때는 공공조형물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높지 않았습니다. 기회도 별로 없었고요. 개인적으로는 절박하게 제 작업에 매달려야 했던 시간의 축적이 있었기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공공조형물을 제작하거나 제 작업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는 공공 조형물에 쏟는 에너지 또한 의미 있게 하기 위해 2년에 한번 개인전을 갖습니다. 경계에 탄력도 주고 스스로 중심을 잡게 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2014년에 처음 발표한 <현기증>이 떠올랐습니다. 그동안 지향해왔던 예술의 역할과 철학을 더 깊이 있는 언어로 확장시킨 작품이 아닌가 싶은데요. 재료나 형식, 특히 화려한 원색의 색이 없어진 자리에 모노톤의 색채를 들여온 것이 놀라웠습니다. 인물은 초기부터 제 작업의 중심이었습니다. 다만 형식과 내용의 폭이 크게 변화한 결실이라고 할 수 있겠죠. 처음 시작은 고은시인의 <만인보>로부터 영감을 받았습니다. 저 역시 줄곧 인물에 대해 천착해왔는데 그 시를 읽으면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인연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2000년부터 한사람씩 만들기 시작해 쌓아두었습니다. 2014년 서울 자하문 미술관 개인전에서 처음 발표를 했지요. 14년 만에 공개하는 것이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관심과 호평이 집중되었습니다. 에폭시를 활용한 모노톤 검은 인물상 부조에 왜 주목하는지 저 또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작품에 왜 현기증이란 제목을 붙였는지 궁금합니다. 살아오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이 인간관계였습니다. 그런데 60년 넘게 살아오면서 기억에 남는 것은 좋은 관계보다 섭섭했거나 대립된 관계가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게다가 현대사회에서는 의도와 관계없이도 수많은 만남이 이루어지잖아요. 갈등적 요소도 그만큼 깊어지죠. 그러나 결국 이 수많은 사람들이 이어내는 복잡한 관계가 곧 역사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 강용면 조각가는 강용면은 김제시 백산면이 고향이다. 한학자들이 많이 살고 있던 요교마을에서의 어린시절은 그의 예술적 정신을 키우는 자양분이 됐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사주신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렸다. 다른 그림을 그대로 따라 그린 것이었는데 담임선생님이 어쩌면 이렇게 똑같이 잘그렸냐고 칭찬해주셨다. 그 때의 칭찬이 그가 가고 있는 길을 만들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서울예고를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도전이 무모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무조건 말리는 대신 낙방하면 아버지가 권하는 학교에 들어간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낙방을 하고는 아버지와 약속을 지켜 이리공고를 들어갔다. 고등학교 3년 동안 학교 수업에는 관심도 취미도 없었던 그는 이 시간을 자신의 인생에서 없어진 시간으로 생각한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연거푸 떨어져 실의에 빠져있을 때 영장이 나왔다. 3년 꼬박 군대생활을 거치고 제대를 했으나 집안 형편은 더 어려워지고 입시에도 자신이 없었다. 다행히 군산대에 장학생으로 발탁되어 4년 동안 학비 없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늦게 들어간 대학은 그에게 많은 것을 안겨주었다. 작가로서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을 그때 쌓았다. 대학 시절에는 학원 강사를 겸하며 독립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을 마련했다. 졸업 직후 돌공장 한 켠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의욕적인 출발을 했지만 모든 재산을 투자한 기자재와 도구들을 도난당하고 말았다. 실의에 빠져 있는 그를 스승이 일으켜주었다. 조교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거의 주말 없이 학교에 나갔다. 학교의 공간이 그의 작업실이었다. 학교 건물을 신축중이었던 덕분에 잘려져 나간 소나무들이 몽땅 그의 재료가 되었다. 홍대 대학원을 마치고 시간 강사로 9년을 보냈다. 광주에서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김제평야 저편으로 붉은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너는 지금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더 이상 강의를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30대 후반에 전업작가가 되었다. 그때의 선택을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여긴다. 나무 조각으로 시작한 그의 작업은 한국적 전통을 바탕으로 시대 정신을 담아내는 독창적인세계로 확장되어 나갔다. 소재는 다양해지고 형식은 늘 새로운 것을 향한 도전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은 1991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가진 22회 개인전에 고스란히 담겼다.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국공립미술관과 전국 각 도시의 수많은 갤러리들이 그를 불러 이름을 알렸다.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중앙미술대전 우수상, 전북청년미술상, 한국일보청년작가초대전 대상 등 주목받는 수상으로 작가적 역량을 인정받았으며 2014년, 14년 만에 공개한 대작 현기증 으로 미술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중진조각가 반열에 우뚝 섰다. 그 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이 전시를 2014년 우수전시로 선정했다. 내년 미국 전시를 준비하고 있는 그는 지난해 외교통상부 문화외교자문위원으로 위촉돼 활동 중이다.
지난해 연말에 만났던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90세의 일본인 건축가 츠바타교수 부부의 이야기를 담은 <인생 후르츠>다. 건축가인 츠바타 슈이치 교수는 고베 근처의 신도시 고조지 뉴타운 의 도시계획에 참여하지만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지향해온 그의 신념은 실현되지 못한다. 영화는 그럼에도 뉴타운을 떠나지 않고 도시 한가운데에 300평 땅을 사들여 숲을 만들고 일구어 그 땅에서 자란 나무와 식물과 더불어 살며 행복을 지켜가는 노부부의 일상을 그렸다. 300평 땅에 들여놓은 노부부의 주택은 고작 15평. 남은 땅은 모두 나무와 식물에게 넘겨준 노부부의 선택이 가져온 결실은 놀랍다. 감동은 또 있다. 츠바타 교수의 나무심기다. 한 사람의 가치 있는 신념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태도를 바꿀 수 있는지를 일깨우는 츠바타 교수의 삶이 전해준 울림은 깊었다. 최신현 전주시 총괄조경건축가(61)를 만났다. 총괄조경건축가란 직함은 낯설다. 건축이나 디자인의 경우 한 도시의 관련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데 총괄책임자로 참여하고 있는 선례가 있지만 조경 분야는 전주가 처음이니 그럴만하다. 그는 조경이 단순히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모든 경관을 디자인하는 일이라는 것을 자신이 디자인한 공간의 힘으로 일깨워준 조경건축가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간 중에는 그의 손을 거친 곳이 적지 않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공원으로 손꼽히는 서서울 호수공원이나 북서울 꿈의 숲, 서울 종로 걷고 싶은 거리를 비롯한 각 도시의 의미 있는(?) 공원이나 조형물의 거개가 그의 생각과 손을 거쳤다. 전주가 도시경관 디자인을 주목하면서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 배경도 여기에 있을 터다. 그럼에도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그가 연고도 없는 전주라는 낯선 도시의 경관을 총괄하는 만만치 않은 일을 맡게 된 이유다. 돌아온 답은 명쾌했다.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예요. 전주라는 도시의 규모나 인구, 주변 환경은 대단히 매력적입니다. 아직 건강함이 살아있다는 가능성을 보았어요. 시장님의 의지와 철학도 제 마음을 끌었죠. 전주를 오간지 10여회. 그는 이미 전주라는 도시의 매력에 빠졌다고 했다. 소풍가는 것처럼 전주행 새벽 기차를 타면서 늘 마음이 설렌다는 그가 들려주는 조경이야기는 특별했다. -총괄조경건축가란 역할이 다른 도시에도 있을까요. 아마 처음일겁니다. 서울시가 건축과 디자인 분야에 총괄책임자 제도를 두고 있지만 도시 전체에 대한 총괄조경 역할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만큼 책임이 무겁습니다. -직함에 대한 낯설음도 있지만 조경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아직은 단편적이어서 그 역할에 대한 궁금증이 큰 것 같습니다. 조경은 단순히 나무를 심은 일만이 아닙니다. 햇빛 바람 물 땅 등 눈에 보이는 그 모든 것이 대상입니다. 처음 총괄조경가라는 역할을 제안 받았을 때 많은 여건을 생각했습니다. 제게는 도시 규모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어요. 길지 않은 시간에 제가 도시를 바라볼 수 있는 규모라는 것이 한계가 있지 않겠어요. 서울도 많은 자문을 하고 있지만 서울 같은 거대도시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사실 미미하거든요. 그러나 전주 같은 규모나 인구, 주변 환경을 갖고 있는 도시는 그런 면에서 아주 매력적이었어요. 도시의 규모가 크지 않은데다 내부에 산이나 하천이 잘 발달되어 있고 특히 전주천 삼천의 경우는 도시의 규모에 비해 생태적 양호함이나 건강함이 돋보였어요. 장점이 많은 도시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전주 같은 오래된 도시들은 도시 경관의 재편이 매우 절실한 때인 것 같습니다. 그동안 개발 중심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소중한 것들의 가치를 많이 잃어버린 상황에서 다시 재생의 화두는 잃어버렸던 가치를 회복하는 일이 되고 있더군요. 조경도 그 연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맞습니다. 도시는 살아 있는 생명인 사람부터 시작 되어 사람이 살기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기본적으로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도시들은 사람이 중심이 되지 못하고 생명이 없는 건축이나 공간이 사람을 압도하는 공간이 되어버렸어요. 조경은 그 도시가 안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고 생명력을 회복하는 통로입니다. 전주가 갖고 있는 하늘, 빛, 물, 땅의 생명력을 회복시켜 공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과제지요. -전주가 갖고 있는 생태적 건강성을 말씀하셨는데 둘러보면 도심 안에 나무도 많지 않고 여느 도시와 차별성이 크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외향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도시의 경관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보고 느낄 수 있는 녹시량이 얼마나 되느냐는 겁니다. 도시의 경관은 평면적으로 보이는 녹지의 면적이 얼마나 되느냐보다 사람들이 걸어 다니거나 차를 타고 다닐 때 보이는 녹시량이 훨씬 더 중요한 가치를 갖습니다. 전주는 그러한 녹시량을 늘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도시입니다. -전주가 천만그루 정원도시를 목표로 내세웠습니다. 선언적인 의미이기도 하지만 우선은 나무를 많이 심는 것이 목표 아닐까요. 물론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환경에서 면적을 의도적으로 넓혀가는 것보다는 한정된 공간에서 녹시량을 확장해나갈 수 있는 방법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전주를 걷거나 차를 타거나 어디를 가도 녹시량이 충만한 도시로 그릴 수 있다고 봅니다. 전주만의 문화와 역사가 있듯이 전주만이 가질 수 있는 도시의 풍경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지요. -현재의 전주 경관은 어떻습니까. 지금의 녹지는 단순화 되어 있어요. 그것을 다양화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진짜 전주의 모습이 보이게 하는 것이 과제지요. 저는 전주가 다양하면서도 통일성을 가진 도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생명의 가치를 높여 주는 것입니다. -전주의 경관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시민들의 참여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시에서 아무리 천만그루 정원도시 만든다 해도 시민들이 호응하지 않으면 효과도 의미도 없습니다. 시의 정책도 중요하지만 시민들이 녹시량에 대한 가치를 알게 되고 함께 갈 수 있게 되었을 때 의미가 있겠지요. -결국은 시민들의 인식의 변화가 중요할 것 같은데 쉽고 빠르고 편한 것에 익숙해진 환경에서 쉽지만은 않은 일일 것 같습니다. 나무나 숲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으나 아직은 그 가치나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는 부족하니까요.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은 소통할 수 있는 대상이어서 사랑을 주면 그만큼 답을 해줍니다. 나무를 심고 정원을 가꾸는 기쁨을 보다 많은 시민들이 알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는 정원도시 전주를 만들 수 있습니다. -대표님이 생각하시는 정원도시 전주는 어떤 도시입니까. 시민들이 나무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기쁨으로 동참해 만들어지는 도시를 꿈꿉니다. 그러려면 시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경제적 가치도 올라가는 도시가 되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저는 전주가 경관으로서만이 아니라 정원 산업이 중심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정원이 만들어지는, 그래서 진정한 정원도시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정원산업은 아직 생소한데요. 다양한 식물들을 재배해 산지나 유통의 중심이 되고, 정원을 가꾸는 일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도구가 집결되어 시장이 형성되는 환경을 만드는 일입니다. 정원과 관련된 모든 것을 산업화하는 일인데 이미 많은 도시들이 정원산업을 주목하고 있지만 전주가 먼저 나선다면 성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결국 정원산업의 기반을 마련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데 경제적 가치가 높아지면 자연적으로 정원이 만들어지게 되고 이러한 샘플 정원들이 계속 만들어지면서 정원도시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시에 제안한 것이 있는데 전주에 가든센터를 만들자는 겁니다. 정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구할 수 있는 전문적인 마켓이죠. 산업이 토대가 되면 시민들이 함께 할 수 있는 통로도 넓어질 수 있겠지요. -정원도시 전주가 어떤 방식과 과정으로 이루어질지 궁금합니다. 저는 천천히 가는 디자인을 하고 싶습니다. 사실 교통이 편리하다고해서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지금은 모든 길들이 그냥 걸어가기 바쁜 형태로 되어 있잖아요. 걷다가 쉬기도 하고, 잠깐 어딘가 바라보고 싶기도 하는 도시의 거리가 만들어지면 얼마나 좋겠어요. -현재의 여건에서 그런 재편이 가능할까요. 곳곳에 작은 공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면 가능한 일입니다. 큰 예산을 들이지 않고도 사람들이 걷고 싶은 길, 쉬고 싶은 공간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 거리와 공간이 하나의 점이라면 그런 점들이 선으로 연결되고 다시 이어져 면이 되는 그런 도시가 되면 사람과 사람들의 관계가 달라지고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지게 됩니다. 도시 환경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생각해보면 여행을 갈 때 우리가 찾아가는 곳이 어디일까요. 바다나 산 숲,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곳을 찾아가지 않습니까. 그것은 아까 이야기한 녹시량과도 관계가 있는데 녹시량이 많아지면 사람들의 내면이 바뀌게 되어있습니다. 서로 돕고 배려하는 삶이 자연스럽게 배이게 되지요. -전주에 식재할 나무도 고민이겠습니다. 처음에 전주를 찾았을 때 시내 거리에 유독 남천이 많이 심어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나무가 좋다 나쁘다를 따지는 것은 기준이 옳지 않습니다. 나무는 각자 갖고 있는 특성이 달라서 그 다름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다름과 다름을 모아 좋은 경관을 만들어내는 것이 디자인의 역할이지요. 남천은 가을에는 열매나 단풍이 좋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계절은 별 특색이 없지요. 계절마다 특색 있는 나무를 고루 심어 계절별로 모습이 달라지는 도시를 만든다면 좋겠지요. 전주는 도시의 전통성에 맞는 수종을 특성화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영국의 정원이 발전된 도시에 가면 몇 백종 수종이 같이 어우러져서 너무도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주시민들이 살아 있는 생명의 다양성을 보고 즐기고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그런 경관을 만들어내는 것이겠지요. -말씀 들으면서 조경과 건축이 따로 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전주의 건축물들은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오간 것이 10여회 되는 것 같습니다. 건축물 하나하나에 대해서는 평가하기 어려운데 공공건축물은 질적으로 조금 더 좋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공공건축이 앞서가면 일반건축물들도 따라 올 수 있으니까요. 앞으로 공공건축의 질을 높이는 방안을 같이 고민하고 모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다른 도시보다는 건축물의 층고가 낮고 특히 구도심 쪽은 경관을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래된 도시마다 활력을 잃었던 구도심 재생이 한창입니다. 그런데 들여다보면 사업의 대부분이 하드웨어에만 치중되어 있더군요. 조경 경관이 고려되지 않는다면 결국 도시 경관을 재편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 같은데요. 건축이 중심이 되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조경은 여전히 아웃사이더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도시들은 조경과 건축이 같은 위치에서 협의하고 같이 땅을 만지면서 건축 배치를 합니다. 저는 도시가 생명력을 가지려면 살아 있는 생명이 먼저 존중받고 그 다음에 죽어 있는 건축물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환경은 늘 건축이 앞서 갑니다. 그러니 도시의 맥락이 살기 좋고 아름다운 도시로 가기 보다는 삭막한 도시로 갈 수 밖에 없게 되지요. -정원도시 전주의 미래가 궁금해집니다. 저는 전주를 하나의 숲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주가 갖고 있는 잠재력을 지키고 살려 어떻게 하면 가치 있는 도시로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제가 제안하는 일만으로 도시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나하나 제안하고 만들어가려고 합니다. 저의 제안이 몇 사람의 인식을 바꾸고 그 몇 사람이 다시 몇 사람의 생각을 바꾸면서 서서히 변화하는 것, 그것을 저는 가장 가치 있는 전주의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 [최신현 대표는] 지자체 첫 총괄조경가, 대표작 '서서울 호수공원' 최신현 대표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조경과 건축을 아우르는 공간 디자이너다. 그의 이름 앞에 조경가나 건축가가 아닌 조경건축가란 직함이 더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경북 경산에서 태어난 그는 대구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어린 시절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건축 디자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대학에서도 건축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지망했던 학교를 떨어지고 난 후 조경 분야로 진로를 바꾸었다. 조경과의 만남은 그의 표현대로라면 운명과도 같았다. 입시 준비를 하고 있던 그를 조경의 가치에 눈뜨게 해준 사람은 미국에 살고 있던 아버지의 친구였는데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의 조경은 전공한 연구자도 거의 없었던 미개척분야여서 조경학과를 개설한 대학이 드물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조경학과를 개설한 영남대에 입학했다. 알수록 빠져드는 조경 분야는 그에게 공부하고 연구하는 기쁨의 대상이었다. 대학원(홍익대)에 들어가 환경설계학을 공부하면서 조경에 대한 그의 철학은 훨씬 더 폭넓고 깊어졌다. 조경회사와 엔지니어링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공간 디자인의 영역은 그의 삶에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실천하는 통로로 자리 잡았다. 조경은 알수록 깊어지는 분야였다. 조경을 제대로 하려면 건축과 토목, 시공까지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론으로도 전문성을 갖추고(서울 시립대 대학원 박사과정), 조경기술사 자격증까지 갖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 현장을 지키면서 학업을 병행했던 그는 주경야독의 결실을 같은 길을 가고자하는 후배들과 나누고 싶어 대학 강의를 즐기면서도 도시의 환경을 바꾸는 크고 작은 현장을 지키는 일 또한 열정과 신념으로 이어냈다. 2002년, 이상향을 뜻하는 유토피아처럼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곳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은 회사 씨토포스 를 설립한 이후 그가 참여한 사업의 결실은 곳곳에서 빛났다. 대전 서구 탄방근린공원조성계획, 광주 5.18묘역 조성사업 기본계획, 인천대공원 조성, 서울 종로 걷고 싶은거리 기본계획, 행당도 복합휴게시설 기본계획제안, 대가야 역사 테마 관광지 조성 기본계획, 월드컵 공원조성 기본설계, 서울시 서서울 호수공원, 북서울 꿈의 숲, 제주 라이프 가든을 비롯해 전국 각 지역의 수많은 공모사업 현상설계에서 대상을 수상하거나 당선됐다. 이중에서도 서서울호수공원은 경관디자인의 중요성을 널리 알린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공간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일상 속에 들어온 숲과 공원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으며 생명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삶의 태도를 공유하게 되었다. 영남대 교수를 거쳐 지금은 서울시 건축정책위원과 도시공원위원, 인천공항공사 조경 자문위원을 맡고 있으며 매력만점 삼양동 마을 만들기 총괄계획가와 전주시 총괄조경건축가로 활동하면서 도시의 환경을 바꾸는 가치 있는 일을 실현하고 있다.
2010년대 중반 즈음이다. 국내외 미술계의 뜨거운 관심을 그야말로 격렬하게 받기 시작한 작가가 있다. 언뜻 생각하면 어느 날 새롭게 등장한 청년작가인가 싶겠지만 그는 청년도 중견도 아닌, 원로의 반열에 선 70대 작가다. 전위예술가 이건용 전 군산대교수(77).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현대미술작가시리즈로 기획된 개인전 달팽이 걸음전 이후 불붙은 그의 활동은 국내외 갤러리를 이어가며 더 열정적이고 새롭게 미술 언어의 역사를 쌓아가고 있다. 초등학교시절부터 중고등학교까지 줄곧 미술반에 들어가 그림을 그렸고, 대학에서도 미술을 전공했으며 60년대부터 한국현대미술의 전위적 흐름을 줄곧 주도해온 그가 마치 어느 날 혜성처럼 나타난 존재인양 국제적인 미술평론가들의 주목을 받으며 해외 갤러리들을 열광케 하는 이 새삼스러운 흐름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를 만났다. 4~5년째 이어지는 이 특별한 환경이 어디서 온 것인지 궁금했다. 작업이 더 새롭게 변했을까. 그럴 일은 없어요.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거의 모든 작업은 70년대 초반부터 줄곧 해온 것들이어서 새삼스러울 것이 없거든요. 다만 이런 이유가 있을 것 같긴 합니다. 이를테면, 내 작업이 지향하는 개념적인 선명성인데, 미술을 어떤 분위기나 또 다른 무엇이나 잘 알 수 없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방법론, 그것도 복잡하지 않고 선명한 시스템으로 보여준다는 것이죠. 그래서 시점과 관계없이 소통이 가능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고 보니 개념의 선명성은 작업에서 뿐 아니라 그의 일상과 삶의 태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늘 그랬듯이 그는 인간적인 면모와 유머 넘치는 대화로 인터뷰 내내 웃음을 안겼다. 따뜻하면서도 유쾌한 그의 화법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유로움과 견고한 자기 확신의 경계 사이에서 더 빛나는 듯 했다. 인터뷰는 군산시 개정면 아산리에 있는 작업실에서 있었다. 그 작업실 문에는 직접 써놓은 글귀가 있다. 상황은 해석하라는 신호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견고한 규범과 제도적 장치에 맞서 자기만의 해석으로 시대를 읽고 문제를 제기해온 그의 언어가 무디어지지 않고 살아 숨 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작업실 공간이 큽니다. 천정도 꽤 높은데요. 이곳에서 줄곧 작업을 해오셨나요. 91년엔가 학교에 있을 때 마련했어요. 마땅한 작업실이 없어 큰 작품을 할 때는 학교 복도를 이용했거든요. 언젠가 친분이 있던 갤러리 대표가 왔었는데 복도에 놓인 작품을 보고 놀라는 거예요. 그때 작업실을 들일만한 공간을 구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때 만난 공간이 양어양식장이었던 이 작업실입니다. -그동안의 작업이 다 이곳에 와있습니까. 그렇죠. 화랑에 나가 있는 작품을 제외하고는 다 있어요. 화랑에 나가 있는 작품도 100여점 되는데 여기도 꽉 찼어요. 그만큼 작품이 안 팔렸다는 증거겠죠.(웃음) -요즘은 미술시장에서 교수님 작품을 주목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사실은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하고 난 이후 작품이 꽤 팔려나갑니다. 물론 지금 여러 곳의 화랑에 나가 있는 작품은 위탁한 작품이지만, 근래 들어 제 작업에 쏟아지는 국내외 화랑들의 관심이 저 또한 새롭습니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마디 하자면 사실 우리나라 화랑은 역할이 애매합니다. 미술시장에서 화랑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지요. 외국의 화랑들은 대개 주목하는 작가를 먼저 키웁니다. 투자를 하면서 그 작가를 성장시킨 다음에 결실(?)을 거두는 형식이죠.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런 풍토를 아직 갖고 있지 않습니다. 어느 날 눈에 띄는 작가를 끌어들이는 식이죠. 현실을 보자면 작가와 화랑의 작품 값 배분도 매우 불균형합니다. -어찌됐든 교수님 작품이 활발하게 판매된다는 사실이 반갑습니다. 살다보면 삶의 환경을 바꾸게 되는 계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가 바로 그 계기인 것 같아요. -그 전시는 교수님의 작업을 총정리 하는 의미가 있었죠. 그렇죠. 1979년 처음 발표한 이후 대표작이 된 <달팽이 걸음>이 전시 주제였어요. 달팽이 걸음은 빨리 빨리를 내세우는 현대문명의 속도에 맞서는 언어예요. 느리지만 그렇게 살아남는 생명력을 표현하는 퍼포먼스지요. 메시지가 강해서 아마도 많은 관객들이 더 호감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설치작품과 드로잉 작품의 거개가 다 보였던 그 전시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때 매체들의 보도도 폭발적이었어요. 한국의 현대미술사를 정리하는 기획전이었는데 제 전시는 시대의 주류와 관계없이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경향을 이끌었던 작업을 한곳에서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관심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감사한 일이지요. -작업을 정리하는 의미의 전시지만 새롭게 보인 작업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 점에서는 아쉬움이 있어요. 사실 저는 미술사적으로 회고하고 정리하는 전시의 취지를 제대로 살려내고 싶었습니다. 공간도 미술관 전관을 활용하고 싶었고, 기간도 1년은 할 수 있기를 바랐고요. 그런데 미술관측에서 공간을 어떻게 채우려고 하느냐에 대한 우려가 컸어요. 당초 구상했던 의자프로젝트가 그러한 우려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퍼포먼스였는데 결국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의자프로젝트는 그 후 대구 전시에서 보였던 프로젝트 아닌가요. 퍼포먼스의 취지가 궁금합니다. 맞습니다. 2015년 대구 전시에서 화제를 모았던 그 작품이죠. 의자프로젝트는 관객들과의 예술적 커뮤니케이션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내고자 하는 작업입니다. 의자는 매우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대상이잖아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쓰고 있는 의자를 전시장으로 들여오고 설치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관객들이 그 의자에 앉아 영상을 감상하는 퍼포먼스가 기본 골격인데,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기획은 그 의자를 일정한 시간에 한꺼번에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의자를 더해지게 하는 방식이었어요. -관객과의 예술적 커뮤니케이션 성과는 어땠습니까. 대구 초대전이 있었던 미술관은 구청에서 운영하는 곳이었어요. 전시장 시설은 괜찮았는데, 큐레이터에게 전시장에 관객들이 많이 찾아 오냐고 물었더니 아주 적다는 거예요. 그때 의자프로젝트를 여기서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공간에서는 관객과의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절실하니까요. 근처에 있는 음식점, 가게, 사무실 등을 찾아다니며 취지를 설명하고 의자를 빌렸어요. 처음에는 반응이 좋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의자를 주겠다는 분들이 너무 많아져 전시장을 가득 채웠지요. 오프닝 때는 관객들이 몰려 퍼포먼스 공간이 비좁을 정도였어요. -예술적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통로로 왜 굳이 의자를 선택하셨습니까. 의자는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도구입니다. 한편으로는 권력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저는 의자가 지닌 다층적인 의미 중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의 지점을 보았습니다. 내 의자를 너에게 빌려주겠다는 것의 의미는 특별합니다. 내 권한과 권리를 빌려주겠다는 것도 되고 내 편리함을 빌려주겠다는 것도 되고. -교수님 작업의 근간은 행위예술로 대변되는데 행위예술은 유형으로 남아 있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교수님의 대부분 전시는 행위예술로만 끝나지 않고 유형의 작품들로 오랜 시간 동안 관객과 소통합니다. 행위예술이 본류에 있지만 설치작품 종류가 워낙 많습니다. 드로잉 등 회화 작품도 많고요. 신체드로잉 처럼 퍼포먼스로 드로잉 작품을 이어내는 작업도 있지요. 행위예술로만 그치지 않는 다양한 작업이 가져온 결과일겁니다. -화제를 바꾸겠습니다. 행위예술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일찍부터 몸에 대한 관심이 깊었습니다. 그래서 신체에 대해 철학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다행히 내가 다닌 배재고등학교는 1학년 때부터 필수로 들어야 하는 논리학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철학 이론에 취미를 갖게 되었어요. 마침 고 1때 논리학 선생님이 독일에서 철학을 전공했던 분인데 수업 시간 짬짬이 2차 대전 이후의 현대철학에 대해서 강의를 했어요. 다른 친구들은 골치아파했는데 나는 정말 좋았어요. 그때 언어분석 철학 같은 이론도 공부하고 비트겐슈타인이나 촘스키 같은 학자들도 알게 되었어요. -교수님의 예술적 언어가 논리적인 선명성을 갖게 된 바탕을 알겠습니다. 그런 학문적 관심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요. 아마도 아버님 영향이 아닐까 싶습니다. 목회자이자 교육자였던 아버님은 조금만 여력이 생겨도 책을 먼저 사셨어요. 어린 시절 집에 쌓아놓은 책이 만권 정도 되었는데 방 네 개 중 두 개가 책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늘 책을 옆에 끼고 살았던 아버님 덕분에 우리 형제들도 책을 많이 읽었죠. -미술은 취미가 있었습니까. 외삼촌이 그림을 그렸어요. 그렇다고 직접 배운 것은 아니고, 인간 활동 중에 그림 그리는 일이 있다는 것을 삼촌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미술반에서 활동했으니 스스로 즐기는 취미도 있었던 모양이에요. 중학교 때는 미술교과서로만 충족되지 않는 정보에 대한 욕구가 생겼습니다. 광화문 근처에 있는 미국 문화원을 드나들기 시작했고,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을 다니면서 그 욕구를 채웠죠. 팝아트도 그 시절에 만났는데 당시에는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부모님도 아들의 재능을 눈여겨보셨던 모양이군요. 초등학교 때부터 여기저기 미술대회를 많이 나갔었는데 제법 많은 상을 탔어요. 월요일은 부모님께 상장 가져다 드리는 날이었죠. 그러나 직업을 그림 그리는 일로 삼는 것은 반대하셨어요. 중학교 3학년 때 예술고를 가고 싶다고 말씀 드렸더니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야 가난한 사람도 돕고 아픈 사람도 치료해 줄 수 있다고. 그러나 결국 아들의 고집을 꺾진 않으셨어요. -본격적으로는 언제부터 작품 발표활동을 하신 겁니까. 70년대 초반입니다. 그때 ST(Space and Time 미술학회)를 창립하고 AG(한국아방가르드협회)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신체향을 처음으로 발표한 것도 그 즈음이에요. -ST나 AG는 당대의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흐름을 주도했던 그룹인데 이러한 작업이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는 무관했었나요. 그럴리 없지요. 현대미술의 실존적인 조건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 작업은 결국 주류에 대한 반항, 기존 질서를 거스르는 도발적 행위나 설치로 이어지거든요. 71년 경복궁에서 열린 한국미술협회전에 신체향도 설치미술에 대한 이해가 워낙 부족했던 때이기도 했지만 수도경비사에서 나와 철수를 강요할 정도로 이슈가 됐었어요. 예술가로서 자신이 살고 있는 현 상황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그것을 예술로서 이해받지 못하는 불행한 시대였죠. -전위예술의 시작이랄 수 있는 신체향은 어떤 작품인가요. 나무를 뿌리째 상자에 넣어 옮겨 놓는 작품인데 기존의 전시장에 대한 문제 제기로 시작된 작업입니다. 무엇인가를 만든다는 것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관계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관객들은 작가가 직접 만들지 않은 자연의 일부를 전시장에 옮겨놓는 행위를 통해 전시장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 작품이란 무엇인가,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묻게 되는 것이죠. -작업에 따라서는 정치적 발언으로도 읽혀질 수밖에 없겠습니다. 물론이죠. 예술은 시대를 외면할 수 없고, 외면해서도 안 됩니다. 작년 북경 전시 때도 저지당해 못 가져간 대작이 몇 점 있습니다. 정치성을 반영한 작품들이죠. 표현방식에 있어서도 시대적 환경을 끊임없이 고민하는데 요즈음은 포장박스나 한번 사용되고 나면 폐기되는 공공기관의 공문이나 엽서 봉투 등을 활용해 작은 드로잉을 남깁니다. 한 시대를 남기는 가장 선명한 흔적이 아닐까 싶어요. -교수님이 궁극적으로 찾고자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궁금해집니다. 나의 행위는 예술가로서 당대를 절실하게 사는 한 방식이에요. 인간은 더불어 사는 존재죠. 삶의 과정은 당대를 함께 호흡하면서 그 안에서 절실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예술 작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행히 내 작업을 뒤돌아보면 모두 시대적으로 호흡하고 있습니다. 결국 내 작업은 시대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욕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웃음 터지게 하는 화법으로 상대방을 무장해제(?)시켰다. 기존의 질서를 비틀고 뒤집어 새로운 질서를 제시해온 그의 50년 예술 행위의 양적 생산은 잠시 들여다본 것만으로도 놀라웠으나 더 놀라웠던 것은 그 바탕에 숨 쉬고 있는 개념의 선명성과 논리적 근거였다. 철학적 논리와 개념을 동반한 예술 행위로 관객들과 소통해온 그의 언어는 한국 현대미술사에 선명한 궤적을 남기며 시대를 건너왔다. 그 흔적이 새삼 더 빛나게 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다시 들여다보니 거기, 그의 충만한 지적 사유의 결실이 있었다. ■ 이건용 교수는 - 캔버스 벗어난 행위예술, 해외서도 '주목' 한국 전위예술의 문을 열고 이끌며 발전시켜온 이건용 교수는 1942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났다. 남한으로 온 것은 해방 직전. 목회자이자 교육자였던 아버지와 간호사였던 어머니는 6남매 중 장남이었던 그에게 언제나 바른 생활 할 것을 가르쳤다. 가난했으나 청빈했던 아버지는 책읽기를 즐겼다. 그 덕분에 책속에 파묻혀 지냈으나 가뜩이나 비좁았던 집은 늘어나는 책으로 더 비좁아졌다. 초등학교 때부터 미술반에 들어가 그림을 그렸던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 방학이 되면 경직된 집안 분위기를 견디기 어려워 가출을 했다. 휴지를 줍는 넝마주이들과 함께 지내다 개학을 앞두고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그의 옷을 벗기고 소독약부터 뿌렸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철학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분석철학 현상학 등 같은 또래들이 눈을 돌리지 않는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는 관련된 학회를 쫓아다니며 강의를 듣고 토론에 참여했다. 그때 쌓은 공력은 그의 예술세계 기저를 형성하는 바탕이 됐다. 부모님은 의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어머니를 설득해 홍익대 미대에 입학했다. 대학시절 국전에 출품, 입선을 하기도 했지만 공모전 출품은 그것으로 그쳤다. 기존의 질서 대신 새롭고 도발적인 방법으로 예술 언어를 표현하기 시작한 그는 ST(Space and Time 미술학회)를 창립하고 AG(한국아방가르드협회) 그룹에 참여하면서 캔버스를 벗어난 행위예술로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문을 열었다. 한국 전위예술의 기수가 된 그는 신체를 활용한 다양한 퍼포먼스를 발표하기 시작, <건빵 먹기> <장소의 논리> <신체드로잉> <달팽이 걸음>등 시대를 해석하고 소통하는 언어로 관객들과 만났다. 1973년 파리비엔날레에 초대된 그는 설치미술 작품 <신체항>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79년에는 지명공모로 참여했던 리스본국제미술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현대미술사의 새로운 지평을 연 그를 2014년 한국현대미술작가시리즈>에 초대해 개인전을 열었다. 그 전시를 보게 된 해외의 미술평론가나 큐레이터들이 한국의 이건용을 주목하기 시작했으며 국내에서도 그의 작업과 작품에 더 새롭고 특별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화제를 모았던 지난해 북경의 화랑 페이스 초대전도 그 연상에서 이뤄진 것이다. 예술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으로 출발한 그의 작업은 50여 년 동안 신체와 다양한 매체의 조화를 통해 특별한 회화 언어를 만들어내면서 한국현대미술의 지평을 넓혔다. 퇴직 이후 더욱 왕성한 활동으로 주목받고 있는 그는 올해도 부산시립미술관과 서울 페이스, 대구 리안미술관 초대전이 예정되어 있다. 목원대를 거쳐 81년 군산대 교수로 직장을 옮기면서 군산 사람이 된 그는 퇴직 후 전업 작가로 살면서 더 활발한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김은정 선임기자
스무 살 어느 날, 건물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척추 신경이 끊어졌으나 다시 걸을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1년여 동안 세 번 수술에 고통스런 재활 치료를 받았으나 목발과 휠체어에 의지하지 않고는 일어설 수도 걸을 수도 없게 됐다. 장애인이 된 삶은 180도 달라졌다. 퇴원해보니 세상에 나 혼자 서있었다. 모든 불행이 내 앞으로 몰려오는 것 같았다. 10여 년 동안 스스로 움츠려 세상을 향한 원망으로 살았다. 그러다 문득 돌아보니 그의 앞에 예쁘게 커가는 딸들이 있었다.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인생을 기꺼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자고 마음먹었다. 지난해 겨울, 평창 장애인 올림픽에서 노르딕스키 7개 종목에 출전, 역경을 딛고 완주해낸 이도연 선수(47) 이야기다. 그의 평창올림픽 성적은 중하위권. 그래도 그는 더없이 행복해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잖아요. 나이도 많고. 제 목표가 꼴찌는 하지 말자 어떤 상황에서든 완주는 하자는 것이었어요. 최선을 다했고, 목표도 이루었으니 더 이상 바랄게 없었죠. 여름에는 핸드사이클로, 겨울에는 노르딕스키로 세상과 맞서는 그의 삶은 경이롭다. 1년의 대부분을 길 위에서, 혹은 설원에서 보내는 그의 도전 정신은 어디까지 닿아 있을까 궁금했다. 지난 연말 전화를 했으나 그는 해외 전지훈련 중이었다. 연초에 다시 연락을 했다. 주말에 다시 합숙훈련에 들어간다는 그는 기꺼이 시간을 내주었다. 인터뷰가 있던 날, 늦깎이 대학생인 그는 해외훈련으로 놓친 기말고사를 따로 치르고 오는 중이었다. 그는 평택에 있는 한국복지대학교 장애인 레저스포츠학과 1학년이다. 부족함이 너무 많아 대학을 들어갔다는 그는 걱정했던 것보다 시험을 잘 본 것 같다며 활짝 웃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일이 어려워 인터뷰를 하기 전 그의 집 근처 놀이터에서 사진부터 찍었다. 번거로울까 걱정했더니 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고생스럽지 않아요. 조금 불편할 뿐이죠. -훈련은 어디서 하셨습니까. 핀란드에서 했어요. 11월 6일에 출발해 12월 28일에 돌아왔습니다. -짧지 않았군요. 해외 전지훈련은 처음인가요. 동계 올림픽을 위해 2017년부터 다녔어요. 2016년에 스키를 시작했는데 이듬해 1월부터 경기에 참여했었거든요. -겨울 종목은 더 힘든 운동일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힘들지 않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힘든 과정을 즐기자고 마음먹으니 고통이 좀 덜어지더군요. 힘들다고 생각하면 더 힘들어지더라고요. -주말에 다시 훈련 들어가신다면서요. 겨울에는 평창 훈련이 계속되거든요. 1월 훈련이 끝나면 나왔다가 2월에 다시 들어가죠. -지금 활동하시는 주 종목이 핸드 사이클 아닌가요. 맞아요. 겨울에는 노르딕스키를, 봄부터는 핸드 사이클 훈련을 합니다. 내년에는 도쿄 장애인올림픽이 있어서 올해는 그 준비에 전념해야 할 것 같아요. -내년 8월이던가요. 도쿄 올림픽까지 1년 반 정도 남았군요. 제 주 종목이 핸드사이클이잖아요. 사실 내년 도쿄올림픽은 제 최종 목표이기도해요. 꼭 금메달을 따고 싶거든요. 그래서 동계훈련을 하면서도 사이클에 필요한 훈련을 틈틈이 하고 있어요. -국가대표 선수인데 사이클은 개인적으로 훈련을 하십니까. 소속된 실업팀이 없으니까요. 국가대표 훈련은 참여하지만 1년 내내 훈련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실업팀에 소속되어 직업적으로 선수가 되면 1년 내내 훈련을 할 수 있지만 국가대표훈련이 없는 시간은 개인적으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운동은 특히 지속적인 훈련이 중요한 것 아닌가요. 그렇죠. 모든 종목이 그렇습니다. 특히 제가 하는 핸드사이클은 두 팔로 사이클 바퀴를 돌려 달리는 운동인데 훈련을 쉬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 십상이거든요. 개인적으로라도 훈련을 이어가려고 노력하지만 여러 가지 여건상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핸드사이클 실업팀이 없습니까. 아직 없어요. 전라북도는 장애인 종목 실업팀 자체가 아예 없고요. 대신 우수선수 지원 제도가 있어요. 바람으로는 실업팀이 있으면 좋겠는데 더 많은 선수들에게 지원이 돌아가게 한다는 취지도 좋은 점이 있으니 개인적인 욕심만 내세울 수도 없는 일이예요. 작년쯤 다른 지역에서 실업팀 제의를 했는데 여건도 그렇고, 이전에 경기도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고향을 떠나 있었는데 또 타지 소속이 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아 거절했어요. 없던 일이 되었죠. -지금 바람은 실업팀 소속이 되는 것이겠군요. 더도 말고 도쿄 올림픽까지라도 본격적인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주어졌으면 좋겠어요. 좋은 지도자를 만나 제대로 훈련하고 싶은 것이죠. 그렇게만 된다면 금메달을 걸 수 있을 것 같아요.(웃음) -그 바람이 꼭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핸드 사이클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처음에는 탁구로 운동을 시작했어요. 아이들이 있으니 희망을 버리지 말자고 마음먹어도 온종일 앉아서 지내야 하는 일상이 고통스러웠습니다. 생활이 곤궁하니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받아 했어요. 그러니 신경은 예민해지고 가슴에 화만 쌓이는 것 같았어요. 주위의 권유로 탁구를 시작했지요. 처음에는 몸을 움직이니 스트레스도 풀리고 날아갈 것 같았어요. 운동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한 통로였어요. -육상선수로도 활동하셨죠. 한국 신기록을 세운 종목이 어떤 것입니까. 투포환 종목이에요. 원반던지기 창던지기 포환던지기. 모두 한국 신기록을 바꾸었지요. -그런데 왜 종목을 다시 바꾸셨습니까. 운동을 시작한 이유를 다시 돌아보면서부터였어요. 운동을 통해 나를 극복하고 싶었거든요. 나와의 싸움. 그래서 탁구에서 육상으로 바꾸고 다시 핸드 사이클로 바꾸게 된 것 같아요. 노르딕스키에 도전한 것도 그 때문이고요. -핸드사이클과 노르딕스키를 병행하는 일은 어떻습니까. 경기 형식과 성격이 전혀 다르니 정말 힘든 과정일 것 같은데요. 우리나라에서는 흔치 않지만 외국 선수들은 복수의 종목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수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선수들을 보면서 저도 도전하고 싶었어요. 결국은 이러한 과정 자체가 나 자신과의 싸움이고 장애를 극복하는 일이니까요. -화제를 좀 바꾸겠습니다. 장애를 갖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고를 당해 다시는 혼자 설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때는 세상이 다 끝난 것 같이 힘들었지만 지금은 또 다른 나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세상을 두 번 살고 있다고 할까요. 이전의 삶이 아닌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죠. 인생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갖게 되었으니 열심히 살아야한다는 것. 늘 마음속으로 다지는 생각입니다. -살아오면서 가장 절망스러웠을 때는 언제였습니까. 절망을 어떻게 극복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사고를 당해 장애인이 되었던 그 당시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돌아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육체적인 한계를 절감해야 하는 그 모든 순간들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장애가 나에게 주는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다시 또 용기를 내고 힘을 내어 한걸음 나가고 또 다시 절망과 맞닥뜨리면 또 힘을 내어 한걸음 나가는 그 과정들이 정말 소중하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운동도 모든 과정이 그렇잖아요. 지금 힘들더라도 조금만 더 가면 쉽고 편한 시간과 공간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 그 희망으로 절망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인생도 똑같지요. -말씀을 듣다보니 목표를 이루기 위해 도전하고 그 목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운동이 길었던 절망의 시간을 극복하게 해준 계기였겠습니다. 그렇죠. 운동은 제게 새로운 인생을 안겨 주었으니까요. 그리고 또 하나의 계기는 종교를 만나게 된 것이에요. 딸아이와 가장 힘들었을 때 찾아간 원불교에서 위안을 받고 삶의 힘을 얻었거든요. 그때부터 세상을 향한 원망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꿀 수 있었어요. -그렇게 행복을 안겨준 운동은 언제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지금 생각으로는 쉰 살이 넘어서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앞일을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아직은 체력적으로도 젊은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거든요.(웃음) 체력은 타고난 것 같아요. 부모님이 주신 선물이겠죠. 노르딕스키 종목에서는 제가 나이 많은 순서로 치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지만 그렇다고 경기에 뒤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바람으로는 할 수 있는 나이까지 현장에서 뛰고 싶죠. -그렇게 힘든 과정을 겪어내며 운동을 하는 이유가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는 것 말고 또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제 꿈은 좀 더 나이가 들면 저와 같은 처지의 장애인들이나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겪어보니 어려운 상황에서도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찾으면 희망이 보이거든요. 내 안에 있는 능력, 재능, 해보려는 의지를 찾으려하지 않고 내가 갖지 못한 여건만을 바라보고 있으면 절망과 불행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더라고요. 기회가 되면 내가 겪었던 절망의 시간과 그 절망을 극복해낸 경험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일으키고 용기를 주는 일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운동을 시작하면서 만난 세상은 정말 새로웠어요. 삶의 의지를 갖는다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거든요. 저는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어요. 그래서 지나온 시간이 너무 아깝더라고요. -좀 더 일찍 깨달았으면 더 좋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더 훌륭한 선수를 일찍 가질 수 있었을 텐데요.(웃음) 그렇긴 하지만 그것 역시 욕심일거예요. 그래서 저는 지금이라도 이것을 깨우쳤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합니다. 장애는 내가 살아가는데 조금 불편할 것일 뿐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의 시간 또한 저에게는 소중합니다.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휴대폰 벨이 울렸다. 요리공부를 하고 있다는 둘째 딸이었다. 그의 얼굴에 금세 웃음이 번졌다. 대화 또한 남달랐다. 훈련하느라 대회 출전하느라 1년에 두세 번 만나게 되는 세 딸의 존재는 그에게 각별하다. 그 스스로 나에게 아이들이 생명줄이었다고 했듯이 그의 삶을 일으켜 세운 것은 아이들이었다. 큰딸은 검찰공무원이 됐고, 대학 재학 중인 막내딸은 공무원시험에 이미 합격했단다. 그는 엄마의 도움 없이도 잘 커준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은 그 또한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제게 스승이에요. 늘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주죠. 어려움 시간 속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왔는지 궁금했다. 아이들의 생각을 존중해주었어요. 무엇이든 자신들이 선택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그 또한 배움의 과정이라고 생각했어요. 아이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거든요. 하반신 장애 딛고 사이클과 노르딕스키 국가대표로 우뚝 선 철인 장애인 노르딕스키 국가대표 이도연 선수 이도연 선수는 정읍이 고향이다. 1972년생. 맏딸에 남동생만 셋인 그는 넉넉하지는 않았으나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체격이 좋고 달리기나 배구 등 운동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언제부턴가 제복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됐다. 그래서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군인이 되고 싶다고 답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나 익산으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일용직 노동으로, 어머니는 식당일로 번 돈으로 근근이 4남매를 키우면서도 자식들 뒷바라지를 가장 큰 기쁨으로 삼았다. 군인이 되는 대신 간호사가 되어 부모님의 고생을 덜어드리고 싶었다. 대학을 가고 싶었으나 실패하고 간호학원에 등록했다. 학원에 다니기 시작한지 일주일 만에 사고가 났다. 건물 옥상에서 실수로 떨어진 그에게 안겨진 것은 척추장애. 그 후유증으로 하반신이 마비됐다. 1년 반 동안 세 번의 수술과 고통스런 치료 과정을 거치면서 재활을 위해 노력했으나 그는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됐다.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세상과 담을 쌓았다. 자포자기 한 상태에서 마음을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이듬해 운명처럼 남편을 만나 세 딸을 낳았으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남편과 헤어지면서 어린 세 딸을 모두 껴안았다. 자신의 몸 하나 건사하기도 어려운 처지에 아이들을 키우는 일은 엄청난 고난이었다. 포장, 전자제품 부품 조립, 양말 뜨기 등 앉아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이 그의 생업이 됐다. 줄곧 함께 살아온 친정 부모님이 고통을 덜어주었지만 시시때때로 밀려오는 고통을 감당하기 어려워 희망을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은 오랜 시간 그를 괴롭혔다. 그때마다 이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마음을 다잡게 해주었던 것은 예쁘게 커가는 세 딸이었다. 일찍 철이 든 아이들은 장애를 가진 엄마를 부끄러워하는 대신 자랑스럽게 여겼다. 검찰공무원이 된 큰딸은 엄마의 삶을 언젠가는 글로 써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30대 초반, 원불교를 만나면서 세상을 더 새롭게 보게 됐다. 설법을 듣고 마음을 다스리면서 세상에 대한 원망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그즈음 운동을 시작했다. 2006년 굳었던 몸을 일으켜낸 것은 탁구였다. 국내외 원정경기까지 나다녔을 정도로 재미를 붙여 몰두했지만 나 자신과 싸울 수 있는 운동에 더 마음이 갔다. 육상종목으로 바꾼 것은 그 때문이었다. 당초 휠체어 육상 달리기를 하고 싶었으나 투포환을 권유받고 선수가 됐다. 마흔 살 늦은 나이에 시작한 이 종목에서도 그는 타고난 재능을 보여 투척 세 종목 모두 한국 신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좀 더 역동적인 운동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찾은 것이 핸드 사이클이다. 어머니는 딸의 꿈을 위해 거금 천오백만원을 들여 사이클을 사주었다. 그러면서도 당부한 말은 비싸게 샀으니 힘들어도 꼭 타야한다는 생각은 하지 마라. 언제든 정말 힘들면 그만두어도 괜찮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달리고 또 달렸다. 2014년 인천장애인아시안게임 금메달 2관왕, 2016 리우여름패럴림픽 은메달, 그리고 지난해 인도네시아 아시안 패러게임의 금메달은 모두 그 결실이었다. 2016년에는 사이클을 함께 탔던 신의현선수의 권유로 노르딕스키에 도전, 1년 여 만에 지난해 평창에서 열린 패럴림픽에 출전했다. 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7개 종목을 모두 완주해낸 그의 경기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다. 장애인 여자 사이클과 노르딕스키 국가대표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살아갈 의지를 잃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길잡이가 되고 싶어한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고왔다. 순간 혹시 전화번호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제가 강칼라 수녀인데요. 일흔 여섯 살, 외국인 수녀님은 정확한 한국말과 고운 목소리로 선입견(?)을 깼다. 호암마을은 고창 읍내에서 자동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다. 이정표가 알려주는 대로 따라간 길에서 살짝 들어가 만나는 호암마을은 낮은 산을 뒤로 편안하게 앉아 있는 풍경이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몇 년 전만 해도 동혜원이라 불렸던 이 마을은 1940년대 전국적으로 들어섰던 한센인 마을 중 하나다. 환자들이 하나둘 들어와 정착한 1952년, 마을에 공소가 문을 열렸다. 공소는 조선말기 천주교 박해 이후 100여 년의 시간 속에서 교우촌 공동체의 중심이 됐던 공간이다. 그중에서도 동혜원 공소는 차별과 편견으로 세상 가장 낮은 곳에 놓여있던 한센인들의 신앙공동체를 지키는 특별한 공간이었다.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건재하며 다시 또 수많은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는 이곳 공소를 지키며 한센인들과 더불어 평생을 헌신해온 사람. 이탈리아 출신의 강칼라 수녀를 만났다. 1968년에 들어와 50년을 이곳에서 살아온 그의 삶은 경이롭다. 한해를 마무리 하는 자리. 길고 험난했을 세월의 고난을 기꺼이 안아 세상의 빛으로 돌려놓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으나 그는 완곡하게 인터뷰를 사양했다. 너무 많은 매체들과의 인터뷰로 할 이야기를 다 한 처지라는 수녀님은 그러나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시간을 내주었다. 수녀님의 거처는 좁고 오래된 집. 노트북 하나 놓이면 그만일 책상과 의자가 있는 거실(?), 입구 쪽의 좁디좁은 기도실과 안쪽의 방 두 개, 그리고 간소한 주방 하나. 군더더기 없는 단출한 삶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집이 아주 작습니다. 두 분 수녀님이 생활하시기 불편하지 않으신가요. 불편함은 전혀 없습니다. 두 명 함께 앉을 수 있는 기도실이 있으니 기도할 수 있고, 각자 한 몸 뉘일 방이 있으니 그것으로 족하지요. 딱 좋습니다.(웃음) -처음부터 여기서 생활하셨나요. 한국에 온 것이 68년인데 그때부터 여기 살았어요. 이 집은 제가 오기 1년 전에 우리 자매들이 처음 들어왔는데 그때 지어진 집이예요. 저보다 먼저 들어와 살았던 수녀님은 30년을 이곳에서 살다가 알바니아로 가셨는데 그곳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슬픔이 크고 아쉬워 공소 앞에 작은 공간을 만들었어요. 그 분의 삶과 정신을 기억했으면 하는 마음에서지요. -이 공간이 수녀님의 삶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겠습니다. 그렇지요. 한국에서 보낸 50년 시간이 모두 여기 담겨 있으니까요. 감사해야할 공간이죠. -호암마을에 들어오신 것이 1968년이면 꼭 50년이 되었군요. 제가 한국 나이로 스물여섯, 만으로 스물다섯 살에 이곳에 왔어요. 참 오래되었군요. -고국을 떠나 언어도 그렇고 모든 것이 낮선 한국으로 오실 때는 큰 용기가 필요했겠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수녀원)에서는 언제든 어디든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가게 됩니다. 저는 당초 브라질에 가게 되어 있었는데 한국으로 파견 갔던 수녀님 중 한분이 몸이 아파 귀국해야만 하는 상황이 됐어요. 수녀님들의 자원을 받았는데 그때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어요. 사실 언어가 가장 큰 문제였지만 망설이지 않고 자원했지요. 한 달 만에 한국 파견이 결정되어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용기는 많이 필요 없었죠.(웃음) -50년 전이니 한센인 정착촌이었던 호암마을도 환자들이 대부분이었을 텐데요. 지금은 환자들이 많이 줄었지요. 너무 오래된 일이라 확실치는 않지만 처음에는 그다지 많지 않았는데 어느 시기까지는 계속 늘어나 200명 가까이까지 함께 지냈던 것 같아요. 가족들이 함께 들어오니까요. 그러나 한센병을 앓고 있는 부모들을 따라 들어온 아이들이 크고 성장해 이곳을 나가 살게 되면서 주민들은 많이 줄었습니다. 그 사이 건강이 나빠진 환자들은 세상을 뜨고 더러는 치료가 되어 지금 한센병 환자들은 10여명 남았어요. -초창기에는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일이 일상이었을 텐데요. 정말 힘든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기꺼이 선택했으니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언어 소통이 어려워 고생을 했지만 밤낮으로 배워 2년 정도 지난 후에는 한국어를 말하고 쓸 수 있게 되었어요. 환자들을 보살피기 위해 스페인의 병원에서 한센병을 공부하고 돌아와 간호보호사 자격을 얻었는데 덕분에 환자들을 치료하고 돌볼 수 있게 되었죠. 그때는 의료 수준도 그렇고 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이어서 웬만한 치료는 자체적으로 해결 해야 했거든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환자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제게는 모두 의미 있었어요. -지금은 환자가 많이 줄었기도 했지만 한센인이 아닌 분들도 마을에 들어와 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지금은 그런 연고가 없는 분들도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여느 농촌 마을처럼 노인들이 많은 것도 그렇고 큰 차이가 없습니다. -처음 한센인 마을로 시작했을 때는 마을 이름이 동혜원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지금은 호암마을로 바뀌어 부르고 있더군요. 이름이 바뀐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죽림리라는 행정구역만 있었고 동혜원 공소가 있어 동혜원이란 이름이 더 알려졌었죠. 초창기부터 여기에서 생활하시는 분들이 고생을 참 많이 했어요. 환자들을 경계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센병 환자가 아닌 아이들이 일반 학교에 다니는 것도 어려웠으니까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차별을 겪어야했지요. 지금은 한센병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편견과 오해가 남아 있어서 한센인 정착촌을 떠올리게 하는 동혜원대신 호암마을로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 이름에는 물론 뜻이 있죠. 마을 뒤쪽으로 나지막한 산이 이어지는데 그 위쪽에 호랑이를 닮은 바위가 있거든요. 몸이 아주 편하게 놓여 있는데 그 광경이 아주 좋아요. -한센인 마을로 시작했으니 공동체적 성격이 강할 수밖에 없는데 생활환경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풍족하지는 못해도 함께 살 수 있는 여건을 스스로 만들어야 했어요. 초창기부터 닭이나 돼지를 키우고 한때는 정부에서 권장하는 엽연초 농사로 생업을 해결했죠.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남았을 때는 일을 많이 할 수 있었으니 풍족하진 않아도 자급자족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문제가 있었죠. 축사에서 나오는 오폐수나 악취 문제가 심각했거든요. 마을 전체의 고민일 수밖에 없었는데 10여 년 전쯤 고창에 눈이 엄청 많이 내렸어요. 지붕이 무너지고 축사 대부분이 피해를 입었죠. 그때 마을 이장님이 이번 기회에 축사를 아예 없애자고 제안했어요. 자연스럽게 축사를 없애게 되었는데 덕분에 악취도 없어지고 마을의 환경이 달라졌죠. -대신 경제적인 여건은 어려워지게 되었겠습니다. 실상은 그렇죠. 그래도 마을 주민 대부분이 노인들이어서 기초수급 대상자들이예요. 더러는 얼마간의 농사를 지어 생활을 해결하기도 하고요. 마을 단위로 함께 할 수 있는 사업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하고요. -예를 들면 어떤 일들인가요. 마을 주민들이 함께 하는 공동체 사업으로 도자기 만드는 일도 그 중 하나예요. 국회에서 전시회도 했는데, 호암마을 도자기는 꽤 알려져 있어요. 지금은 겨울철이 되어 잠시 중단하고 있지만 봄이 되면 다시 이어질 사업입니다. 가톨릭신자들의 피정도 좋은 사업이지요. 우리 마을이 잘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최근에는 이장님이 앞장서서 추진하는 일이 있는데 외지 사람들이 찾아와 체험이나 생태관광을 할 수 있는 마을만들기사업이예요. 우리 마을이 운곡습지와 가까운 곳에 있거든요. 외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호암마을의 이미지도 바꾸고 좋은 환경을 만들겠다는 뜻인 것 같아요. -마을 주민들과 모든 일상을 함께 하는 공동체 생활이 불편하진 않습니까. 불편함은 없어요. 다만 나이가 드니 일상이 조금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 개인보다 마을을 위해 필요한 것이 많거든요. 겨울이 되면 동네 분들이 경로당에서 하루를 함께 나는데 아무래도 점심과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일도 그렇고 일상의 어려움이 더 많아집니다. -노인분들이 대부분이니 그런 어려움이 더 크겠습니다. 수녀님도 경로당에서 식사를 모두 해결하십니까. 물론이지요. 먹을거리를 준비하는 것도 저희들 몫인걸요. 오늘도 장을 보러 시내에 가야해요. 환자들과 노인들이 마음대로 나다닐 수 없는 형편이니 아직은 여력이 있는 우리들이 그 일을 대신해줘야 하거든요. 사실 겨울철 경로당 공동체 생활이 시작되면 봉사자들의 손길이 가장 절실해집니다. 주민들이 함께 나서기는 하지만 모두 70-80대 노인들이니 식사 한끼 준비하는 것도 쉽지 않거든요. 몸이 불편한 노인도 적지 않고요. -봉사자들이 많이 찾아오지 않나요. 찾아오시는 분들이 있지만 정작 우리가 필요한 일에는 맞추기가 어려워요. 가장 좋은 것은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인데, 그게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마을에 빈집이 많이 있으니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보람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요. -수녀님께서는 그리 힘든 길이 아니었다고 하시지만 그동안 겪어내신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있었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일도 지나가기 마련이잖아요. 지나간 일은 기억하지 않으면 되고요.(웃음) -아무리 신앙의 힘으로 어려움을 극복하신다해도 늘 보람과 기쁨만 마주하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것을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사실 늘 아쉽고 안타까운 일은 있어요. 누군가가 사랑을 받거나 누군가에게서 도움을 받으면 자신도 응답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될 텐데 그렇지 못한 상황을 만나게 되거든요. 그동안 환자들과 함께 살아오면서 저 자신은 감사하게도 그런 응답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정작 자신들과 가까운 사람, 이를테면 가족들이나 이웃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도움을 준다거나 아픔을 함께 나누는 데는 인색하더라고요. 내가 받았으면 그만큼 베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많이 보아왔거든요. 그럴 때는 마음이 아프죠. -그런 상황들로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그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꾸준히 노력했어요. 사실 한센병에 대한 인식을 깨는 것도 그 중 하나였는데 오히려 편견을 갖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더 경계하고 차별하는 상황이 많았거든요. 돌아보면 살아가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편견이 아닌가 싶어요. -아까 응답하는 삶을 말씀하셨는데 수녀님처럼 신앙을 갖고 있지 않아도 좀 더 가치 있게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뭘까요. 신앙을 갖고 있으면 아무래도 응답할 수 있는 길을 갖게 되니 좋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있어요. 쉽지는 않겠지만 중요한 것은 나를 위해 사는가, 아니면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사는가를 돌아보면서 사는 일이예요. 내 가족 내 이웃을 생각하는 열린 마음으로 살게 되면 상대방의 존재를 보게 되고 응답하게 되면 자기 자신이 기쁨을 얻게 되거든요. 사실 모든 인간은 그런 존재로 만들어졌어요. 사랑하게 되면 그 만큼 채워지는 삶을 갖게 된다는 이야기예요. 자기 안에서 자기만을 위해 살게 되면 기쁨도 행복도 그만큼 좁아지고 적어지지요.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게 되면 삶이 달라집니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일이 결국 나를 위한 일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죠. 내 앞에 온유한 사람이 있으면 나도 온유한 사람이 되거든요. -신자들에게도 그런 마음을 전달하려고 노력하시겠군요. 말로써 강조하기 보다는 그런 생활을 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되지 않을까요. 나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면 자연스럽게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전달됩니다. -수녀님께서 50년 시간을 실천의 삶으로 이어오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뒤돌아보니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지만 지금도 부족함이 많아요. 그러나 마음을 급하게 갖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빨리 결과를 보려고 하는 조급한 마음이 있어요. 그것을 경계해야하죠. 꽃씨를 심어도 봄이 되어야 생명이 올라오잖아요. 욕심을 버리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건강은 어떻십니까. 나이가 드니 아무래도 예전만 못하죠. 양쪽 무릎에 인공관절 시술을 했는데 불편하긴 하지만 움직일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아직은 운전도 할 수 있으니 오가는데 큰 불편은 없어요. -수녀님의 일상이 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혹시 다른 계획이 있으신가요. 삶을 하나님께 맡겼으니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순리지요. 저희야 선교회의 결정에 따라 움직이게 되지만 생각 같아서는 이곳에서 살고 싶습니다. 아직은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이 많기도 하고 저 또한 이 안에서 응답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상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지요. 강칼라수녀가 기거하는 낮은 집 바로 옆에는 동혜원 공소가 있다. 일요일이면 마을 주민들 뿐 아니라 인근 마을의 신자들이 찾아와 예배를 드리는 성당이다. 인터뷰 말미, 자리를 함께 했던 호암마을 방부혁 이장이 수녀님 건강하시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가장 큰 바람이고 기쁨이라고 전하니 그는 그것도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건강을 주시면 그만큼 더 응답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그 또한 기쁨이라고 말했다. 수녀님의 건강이 어디 마을 주민들만의 바람이겠는가. 차별을 극복하며 편견의 벽을 깨기 위해 그가 실천해온 귀한 자취가 깊고 길다. 우리에게는 더없이 아름다운 선물이다. ■ 강칼라 수녀는 강칼라 수녀 강칼라수녀는 1943년 이탈리아의 북부에 있는 마을 쿠네오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탈로네 리디아, 세례명은 카를라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부모님은 어렸을 때부터 4남매를 바르게 사는 삶, 나누는 삶, 사랑하는 삶을 살라고 가르쳤다. 자연스럽게 종교적인 삶에 마음을 두었던 그는 열아홉 살에 작은 자매 관상 선교회에 들어가 수녀가 됐다. 그의 언니 역시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신학공부를 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던 그는 1968년 한국에 왔다. 한국전쟁으로 고아도 많았고, 한센병 환자들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는 길을 가고자 했던 그가 기꺼이 헌신의 삶을 바치고자 했던 곳은 고창군 죽림리에 있던 동혜원. 한센인 정착촌이었다. 강칼라란 이름은 세례명인 카를라를 마을 사람들이 편하게 부르다가 한국식으로 칼라가 됐고, 성은 아이를 갖지 못한 한 환자가 자기 성을 받아달라고 부탁해 강씨가 됐다. 2년 동안 밤낮으로 공부해 한국어를 배우고 익혔으며 한센병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스페인으로 건너가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방법을 배웠다. 다시 돌아와서는 정부로부터 마을 간호보조사 자격을 얻어 환자들을 본격적으로 치료하고 보살피는 일에 전념했다. 스물여섯 살에 한국에 온 이후 50년. 동혜원 공소를 지키며 한센인들과 함께 지내면서도 서울 진주 등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기꺼이 도시빈민과 노약자들을 돌봐온 그는 마을 사람들의 손발이 되었다. 한국에 왔던 초창기, 동혜원에서 고창읍내까지 먼 길을 걸어 다니며 환자들이 필요한 물건을 가져오고 필요한 일을 해결했던 덕분에 아직도 근처 마을 사람들은 고무신을 신고 먼지 나는 흙길을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수녀님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6년 전 호암마을에 들어와 생활하고 있는 우을리 피에라수녀(66)는 보람과 고난을 나누는 동반자. 올해도 마을사람들과 겨울을 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함께 살림살이를 준비하고 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봉사와 기도로 평생을 살아온 그는 2016년 국민훈장모란장을 받았으며 올해 호암상을 수상했다.
익산의 원불교 중앙총부를 찾아간 날, 늦가을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중앙총부 정문을 지나 오른쪽에 있는 종법원에 이르는 동안 몇 채의 오래된 한옥과 낮게 엎드린 건물들은 서로 겨루지 않고 서로를 보듬듯이 놓여 있다. 몇몇 교무님들이 지나치며 목례를 했다. 성지 안에 온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지난 11월 4일 취임한 전산(田山) 김주원(金主圓) 종법사(70)를 만났다. 물질이 정신을 앞선 지 이미 오래, 생활은 편리해졌으나 삶의 가치는 여전히 부유한다. 생명은 파괴되고 갈등과 반목이 세상의 모든 경계를 가로 지르는 시대에서 좋은 삶, 좋은 사회는 아직 낯설고 아득하다. 50여년 삶의 길에 수행의 시간이 온전히 놓여 있는 전산 종법사로부터 답을 구하고 싶었다. 전산은 종법사로 취임하는 대사식을 앞두고 삭발했다. 종법사는 원불교의 최고 지도자다. 삭발이 결기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 궁금했으나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특별한 큰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허투루 쓰이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단골 이발소에서 깎았습니다. 혼자서도 짧은 시간에 머리를 다룰 수 있으니 그만큼 간편해졌지요. 큰 뜻이 없다고는 하나 의미 없이 쓰이는 시간을 줄이기 위한 삭발이 예삿일은 아니다. 그의 취임 법문이 생각났다. 나를 새롭게, 교단을 새롭게, 세상을 새롭게. 교단을 새롭게 이끌 그의 철학과 소신이 더 궁금해졌다. 인터뷰는 종법사가 거처하고 근무하는 종법원 1층에서 있었다. -지난 주말에 대사식이 있었지요. 기존과는 달리 간소하게 대사식을 치렀다고 들었습니다. 작은 것에서부터의 변화가 눈에 띕니다. 식의 형식은 같습니다. 다만 실외에서 실내로 바꾼 것뿐이죠. 대사식은 교단의 큰 잔치지만 규모로 그 의미를 더 잘 세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중이 많이 모였다고 해서 꼭 좋은 것도 아니고요. 지금은 미디어가 발달해 영상으로도 모든 과정을 다 볼 수 있으니 행사의 규모를 줄이는 것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종법사님 말씀에도 불구하고 이 작은 변화로부터 시작되는 교단의 변화가 기대됩니다. 취임 기자회견에서 무아봉공을 강조하셨더군요. 원불교 창립정신이기도 한 무아봉공 정신이 궁금합니다. 원불교 정신은 일원상의 둥근 원 속에 담겨 있습니다. 세상은 다 차별로 나뉘어 있지 않습니까. 내나라 네나라, 동쪽 서쪽, 온갖 차별로 나뉘어 있는데 둥근 하나의 진리로 보면 이 모두가 하나라는 뜻이지요. 결국 모든 것이 하나라는 이치를 깨쳐 차별사회를 넘어서자는 것이 원불교 교조이신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원불교를 세우신 뜻입니다. 무아봉공(無我奉公)은 나와 남, 나와 세상을 나누어 보지 않고 상생의 길을 여는 정신입니다. 원불교에서 바라보는 최고의 인격 표준이 무아봉공인데, 사실 그 이치를 깨쳐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아요. 훈련을 해야만 얻어지는 정신입니다.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겠습니다. 그렇죠. 대종사님께서는 그것을 사은으로 전해주셨는데, 네가 있게 된 것은 천지가 있어서 가능하다는 것이예요. 천지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지요. 결국 나를 있게 하는 그 모든 것이 은혜인데 우리는 그 은혜를 잊고 살거든요. 그런데 그 은혜를 알게 되면 작은 나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관계성을 넓혀갈 수 있게 됩니다. -취임사에 담았던 말씀도 이런 취지였겠습니다. 대종사께서는 막연하게 진리의 경지를 설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삶을 구체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누구나 생활 속에서 진리를 신앙하고 수행하여 성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지요. 일정 기간을 정해 마음공부에 전념하는 정기훈련법이나 이를 실제 생활에 적용하여 연마하는 상시훈련법 등이 그것입니다. 저는 취임사를 통해 우리가 진리와 교단과 법과 스승에 대한 믿음으로 하루하루 꾸준히 공을 들인다면 과거의 내가 새로운 나로, 나아가 새로운 교단, 새로운 세상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대종사님께서도 앞으로 오는 시대는 크게 열리고 밝아지고 활동하는 시대가 된다고 내다보셨지요. 저는 그런 시대를 우리 힘으로 열 수 있다고 믿습니다. 물론 그 힘은 마음공부, 훈련으로 얻을 수 있겠지요. - 마음공부나 훈련이란 표현이 새롭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교법을 쉽게 풀어 내놓으시면서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셨어요. 무엇을 안다는 것은 진리를 깨쳤다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실천하는데 있다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실천은 더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대종사님은 훈련을 반복해야만 완전히 익숙해진다고 강조하셨어요. 사실 수행은 내가 아직 깨치지 못했어도 닦아 가면 이를 수 있는 것이지만 훈련은 원리를 모르면 안 되는 일이죠. 대종사님은 마음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든지 알 수 있게 정리해놓으셨지만 그것을 실천으로 이어내려면 지속적인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신 거예요. -원불교가 문을 연지 100년이 지났는데 오늘날 교단의 위상은 어떻게 보십니까. 대종사님은 5만년 운수를 말씀하셨습니다. 그에 견주면 100년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걸음마를 뗀 수준이지요. 백주년 지나면서 교단 2세기를 맞았다하여 큰 변화가 올 것이란 기대들을 하지만 종교 역사 속에서는 일천합니다. 더 겸손하게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원불교의 오늘을 보자면 그런 짧은 역사로 이루어낸 양적 질적 성장이 놀라운 것 아닌가요. 물론입니다. 원불교는 한국의 4대종교이자 모든 대륙에 교화 거점을 가지고 있는 세계종교로 성장했습니다. 100년의 짧은 역사로 본다면 대체로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물질문명은 급진적으로 발전했지만 현대는 불안과 혼돈의 시대입니다. 기존의 가치들은 부정당하면서도 그것을 대체할 윤리는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요. 원불교가 새 시대 새 종교를 자처하고 있지만 과연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면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교단 2세기를 여는 시점에서 원불교의 새로운 100년이 궁금합니다. 그 동안은 인적, 물적, 사회적 성장에 주력한 결실의 시기였다면, 앞으로는 그에 더하여 질적인 성숙과 주세교단으로서 역량을 확충하는 결복(結福)의 시기가 될 것입니다. 원불교에서는 바른 신앙과 수행을 증득한 공부인, 언제 어디서나 은혜를 깨닫고 감사를 전하는 교화인, 작은 나에서 벗어나 큰 나를 성취한 봉공인으로 면모를 일신하고 새 시대의 주인이 되기 위한 자격을 갖추는 변화를 정신개벽이라고 표현합니다. 정신개벽은 물질의 노예가 된 현대인들을 다시 주체적 삶으로 돌려놓는 계기가 되고, 원망과 적대의 세상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이끄는 근원적 힘이 될 것입니다. -화제를 바꾸겠습니다. 한국사회는 지금 매우 중요한 기점을 맞았습니다. 오늘의 상황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되돌아보면 한국사회는 늘 어렵지 않은 시절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사회를 보세요 얼마나 크게 성장했습니까. 남북관계도 큰 변화를 맞고 있고요. 특히 우리나라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다른 어떤 사회보다도 큰 것 같습니다. 민심이 천심임을 그대로 증명한 사회지요. 다만 민주주의는 권리와 함께 책임을 중시 여기는 제도이자 이념입니다. 유례없는 사회적 진통을 생산적인 에너지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권리의 주장에 걸맞은 공동체에 대한 배려와 헌신이 뒤따라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지요. -남북 관계를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진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시는지요. 원불교는 그동안 남북관계를 진보적인 입장에서 지지해오지 않았습니까. 지난 반세기 우리 민족은 분단의 고통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평화의 소중함을 절절히 깨달았지요. 현재 이뤄지고 있는 남북관계를 보면 70% 정도는 통일 됐다는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더 진전이 되겠지요. 우리 교단에서는 통일을 늘 긍정적으로 기대해왔습니다. 선진들은 남북 간에 서로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야 통일이 된다고 하셨어요. 관계는 항상 상대적인 것입니다. 상대를 적으로 보면 상대도 나를 적으로 봅니다. 저는 지금 통일의 기운이 거의 와 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더 노력해야하겠지요. -취임 기자회견에서 현 정부의 적폐청산에 대해 말씀을 하셨던데요. 제가 말한 것은 정치적인 관점에서가 아닌 종교적 관점에서의 입장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정의와 불의를 이야기하죠. 우리가 재단한 정의와 불의는 대립적입니다. 여기에 정치적 입장이 더해지면 자칫 권모술수적인 것이 되어버리죠. 이를테면 자기가 필요한 정의를 가져다 쓰고 자기가 필요한 불의로 쳐버리는........ 그런데 종교에서 말하는 정의 불의는 조금 다릅니다. 불의를 그저 쳐버리는 정의는 종교적 정의가 아니에요. 저는 세상이 정말 잘되려면 종교적 정의가 퍼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불의도 건져줘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죠. 불교적 진리로 보면 없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결국은 세상을 좋게 하려면 안 좋은 것일수록 보듬고 다듬어서 스스로 좋아지도록 하는 일이 필요해요. -오늘의 한국사회 현실은 종교적 정의만으로는 길을 찾을 수 없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러한 현실이니 적폐청산이 부상했겠지요. 물론 우리 사회의 잘못된 점들은 고쳐 나가야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이 설득력을 지닐 수 있으려면 자신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 해선 안 됩니다. 불의를 쳐서 세우는 정의는 오래가지 못하거든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건 쉽지만 자신이 바로 서는 것은 어려운 일이예요. 정의는 죽기로써 부당한 일을 하지 않으려는 각고의 노력입니다. 불의까지도 안고 펼치는 정의라야 생명력이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참다운 적폐청산은 지금 우리 사회를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적폐를 공유하지 않는 것, 과감히 그러한 적폐를 떨쳐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때보다도 화합이 필요한데 다양한 계층에서 갈등과 대립이 깊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종교도 예외가 아닌데요. 욕심이 앞서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무아봉공 정신은 한 개인만이 아니라 한 사회 국가에도 필요한 정신입니다. 종교간 갈등은 외적인 것이니 제가 쉽게 이야기할 내용이 아니지만 적어도 원불교는 교단 내 갈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본정신이 너와 나, 나와 전체를 나누지 않는 정신이니 갈등이 있을 리 없습니다. -경제가 어렵습니다. 청년실업이 특히 심각한데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마땅한 답을 쉽게 줄 수 없으니 더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어른들로부터 들어온 말이 있습니다. 봄은 큰 추위가 지나고서야 온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그것이 지속되진 않습니다. 그러니 청년들도 희망의 끈을 놓지 말고 시대와 마주하면 좋겠어요. 내적으로는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자력을 기르고, 외적으로는 인간성을 파괴하는 관습과 제도에 단호하게 맞설 수 있는 정의심을 발휘해야 합니다.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청년들도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는 결국 자신이 풀어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를 원망하면서 누군가 문제를 해결해주기 바라는 태도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요. 어떤 경우에도 자기를 버리지 말고 바른 마음으로 노력하면 반드시 길이 열립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그 마음이 공심(公心)이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을 위하는 마음이죠. 자기만 생각하거나 한 가지 노력하고 열 가지를 바란다면 길은 더 막힐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둘 법문을 주신다면요. 원불교 교도가 아니라도 실천하면 좋은 말씀이 있습니다.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자는 것이에요. 마음에 두고 실천해보면 삶이 달라질 거예요. 어른들이 선신 악신을 말씀하셨어요. 내가 착하게 살면 선신이 돕고 내가 마음을 나쁘게 쓰면 악신이 방해한다고. 저는 그것을 기운으로 표현합니다. 내가 어떤 마음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세상의 기운이 답합니다. 내가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 주위의 기운을 얻게 되죠. 감사하는 기운을 갖고 있으면 묘하게 그런 기운이 나에게 모여 길이 열립니다. ● 전산 김주원 종법사는 원불교 제15대 전산 김주원 종법사 전산 김주원 종법사는 1948년 전주 교동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삶이었지만 남에게 베풀기 좋아했던 부모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식의 의지를 꺾는 말씀을 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자립심이 강했던 전산 종법사는 중고등학교(북중 전주고) 시절 수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성적이 우수했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 입교한 원불교의 정신을 마음의 지주로 삼아 일반대학에 가지 않고 원불교학과가 있는 원광대에 들어갔다. 돌아보면 원불교 입교는 그에게 마치 정해져 있었던 삶의 과정과도 같았다. 그가 어린 시절 살았던 전주 교동 집 옆에는 원불교 교동교당이 있었다. 정갈한 분위기의 교당이나 들고 나는 교도들의 맑은 얼굴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종교를 갖는다면 원불교를 갖겠다고 그때 마음먹었다. 고 2때 친구로부터 입교를 권유받았을 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응한 것도 오래전부터 갖고 있던 마음 덕분이었다. 이미 고 3때 출가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된 그는 스스로 부족함이 많은 성정을 고쳐보겠다(?)는 마음으로 1967년 출가했다. 출가 이후에는 줄곧 수학에만 힘을 썼다. 20대부터 시작된 수학의 과정이 평탄치 많은 않았으나 대학 2학년 때 대산종사를 모시면서 접하게 된 수필법문을 시작으로 참다운 믿음은 싹을 틔워 깊어졌다. 가장 큰 신심의 변화는 군대를 제대한 직후 대산종사의 기도생활에 대한 법문을 직접 받들고 난 이후다. 1976년 원불교 중앙총부 기획실에 들어간 이후 10여년 총부에서 재직했으며 동전주교당 교무로 발령이 나면서 현장교화를 시작했다. 이후 종로교당과 중앙중도훈련원 교무, 법무실 법감, 교정원 교화부원장을 거쳐 경기 인천교구장, 중앙중도훈련원장, 교정원장을 지냈으며 최근까지 영산선학대학교 총장으로 일했다. 교직자로서의 활동은 교헌개정을 비롯한 교단의 실질적인 체계를 정비해낸 성과로 더 빛난다. 교정원 총무부장으로 일할 때는 법규를 정비하는 일과 함께 사장되어 있던 법규를 실행하는 일에 전념했으며 경기인천교구장으로 있으면서는 교구의 행정체계를 세우고 교화후원재단을 설립했다. 덕분에 원불교는 교구 내 개척 교당 지원, 청소년교화와 군종교화, 사회복지와 일반 교화 후원을 위한 재정적인 기반을 갖출 수 있게 됐다. <대산종사법어> 편찬에도 그의 역할이 컸다. 법어 편찬은 대산종사법어 편수위원회 편수위원장을 맡았던 5년 동안 이어낸 결실이었다. 교단의 모든 기관을 통괄하는 수위단회는 전산의 삶과 수행의 공덕을 기려 2006년 종사의 법훈을 서훈했으며, 지난 9월 18일 원불교 최고지도자인 제 15대 원불교 종법사로 그를 선출했다.
사회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있지만 돈이 성공의 목표인 우리 사회에서 나누고 공유하는 삶의 방식은 여전히 낯설고 인색(?)하다. 시민이 주체가 되어 사회를 변화시킨 촛불의 위대한 힘을 경험했지만 사회적 불평등의 간극이 여전히 좁혀지지 않는 사회적 현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송경용 성공회 신부(57 나눔과 미래 이사장)를 만났다. 그는 40년 가깝게 나눔을 실천하며 진정한 사회적 가치를 우리 사회에 일깨워온 종교인이자 사회운동가다. 빈민운동으로 시작해 사회적 경제 운동까지, 대한민국 사회의 건강한 변화를 위한 그의 활동은 온전히 현장성을 기반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덕분에 그는 학문과 이론의 틀 안에서 탐색되는 사회적 가치의 한계를 현장의 힘으로 극복해 현실적 대안으로 만들어 내고 발전시켰다. 오늘에 이르러 우리 사회 곳곳에서 빛을 내는 사회적 경제의 다양한 통로들이 그 결실이다. 인터뷰는 어렵게 이루어졌다. 하루를 시간 단위로 잘게 쪼개어도 부족한 그의 바쁜 일상에서 두세 시간 얻어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이루어진 인터뷰는 그가 공동의장을 맡고 있는 서울 불광동 서울혁신센터의 국제사회적경제협의체 사무국에서 있었다. 인터뷰 직전까지 공덕동 생명안전시민네트워크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고 달려온 그는 직함이 어색할 정도로 젊고 열정적이었다. 덕분에 그 앞에 놓인 수많은 단체와 그 활동을 어떻게 그렇게 지치지 않고 해내는지 알게 됐다. -오랫동안 같은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노동자들과 함께 한 빈민운동부터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된 사회적 경제 운동까지 신부님을 줄곧 이끌어온 동력은 무엇이었습니까. 처음부터 대단한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나눔을 공유하다보니 여기까지 왔지요. 그 시작은 야학이었고요. 상계동에 들어간 것이 79년 9월 28일이니 올해 39년째군요. 동력을 꼽자면 나눔의 가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작이 상계동에 있는 야학이었죠. 맞습니다. 적십자회관에 개설한 상계적십자 청소년 학교였어요. 그때 제가 다녔던 연세대 학생들이 돌멩이 반이라고 독서 모임을 따로 만들어 운영했는데 거기서 만난 친구들이 모두 제 인생의 스승이 됐어요. - 그 친구들이란 누굽니까. 상계동 일대에서 일했던 친구들이죠. 하루 12시간 13시간씩 일하면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던 열서너 살 청소년들인데 저보다 삶의 폭이 훨씬 넓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때 그곳을 제 인생의 시원 같은 곳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종교인이 되겠다는 생각도 그때 갖게 된 것인가요. 그렇진 않아요. 그즈음은 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사회운동의 현장에서 반복해 만나게 되는 종교인들을 보면서 온몸으로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어요. 80년대 초는 이념으로 세상을 판단했던 때였는데 그 분들은 온몸으로 영성을 실천하는 분들이었거든요. 종교적 영성이 갖는 힘과 헌신성을 보았죠. 도대체 교회는 어떤 곳인가, 예수는 누구인가 알고 싶어지더군요. 야학에 나오는 친구들과 성경공부를 시작한 것도 그 물음 때문이었어요. -늦게 신학교를 다시 들어간 것도 그런 물음이 바탕이었겠습니다. 대학에서 전공했던 건축으로는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건축가는 예술적 재능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저에게 힘쓰는 재능 밖에 안주셔서...... -야학은 계속하셨습니까. 제가 상계동에 처음 들어간 것이 79년 9월 28일인데 상계동에 나눔의 집을 연 날도 86년 9월 28일이예요. 저는 이 사람들과 어떻게 하면 함께 살 수 있을까를 계속 고민하고 있었는데, 84년에 군대 제대를 하고 상계동에 갔더니 노동자들이 살고 있던 오래된 주거공간들이 철거되고 있었어요. 깡패를 동원한 철거반 폭력에 여학생 반 아이들이 두려움에 떨면서 우는 모습을 보고 몸이 얼어붙더군요. 나도 모르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다시는 이 자리를 떠나지 않게 해주시라고. 그 기도를 안했으면 제가 오늘날 이 자리에 있지 않아도 됐을 텐데요. 그래서 제가 후배들에게 기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웃음) -나눔의 집은 지금 여러 곳에서 운영되고 있지요. 상계동이 가장 먼저 문을 열었고 그 후에 봉천동 등 몇 군데에 생겨났어요. 저에게 보람이 있다면 나눔이란 말을 널리 나눈 것인데, 그때만 해도 보수 진보 진영 양쪽에서 비난을 받았어요. 한쪽에서는 혁명해야 하는 판에 무슨 나눔이냐, 또 한쪽에서는 부자들 것 뺏어가는 일 아니냐고. 온갖 오해와 억측을 다 했죠. -지금은 친숙하지만 그 당시는 낯설었던 말이군요. 제가 나눔을 앞세웠던 것은 이유가 있었어요. 저는 항상 삶의 현장에 있었는데 우리 현실과 관련된 다양한 사회운동에 참여하면서도 뭔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더군요. 이념이 중시되던 때였지만 지금 당장 가장 약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여기저기에서 일을 하면서 사회의 어둡고 이중적인 이면과 맞닥뜨려야 했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어떤 잘못이 있을 때 서로를 향해 네 탓이라고 손가락질만 하지 막상 내 탓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는 현실을 보면서 이념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그 무엇에 대한 궁금증이 깊어졌어요. 동료나 선후배들과 토론을 하면서도 삶이 밑받침 되지 않은 공허한 이론과 이념, 생활에 밀착되지 않는 그런 숱한 구호들이 공중에 붕붕 떠다닌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현실의 절박함에 대한 자각 이었겠습니다. 일상을 살면서 늘 현장의 삶이 얼마나 긴박하고 절실한가, 삶의 정황을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게 되었거든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의 구체적이고 긴박한 현실 같은 것이었죠. 가난이나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늘 긴박한 것이거든요. 그런데 혁명이나 사회변화를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긴박성을 모르는 탁상 담론들이 넘쳐나는 것에 화가 났어요. 삶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밀착되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됐죠. -종교인으로서의 고민도 같은 것이었습니까. 예수의 삶을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답을 찾고 싶었어요. 당시 오염된 교회가 너무 많았어요. 가난한 사람들에게 너무나 먼 당신 같은 존재가 교회라면 나는 그런 간판을 달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죠. 나는 진정한 삶을 이야기 하고 싶은데 교회라는 간판이 그것을 가로 막을 수도 있고, 또 이 공간이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 되어야 하는데 정작 그렇게 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교회를 갖지 않고 걷는 교회를 이어온 것이군요. 어느 날 미사를 드리고 있었는데 신부님이 성체를 쪼개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리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더 신비한 일은 신부님이 포도주를 잔을 들어 올리는데 성당 구석에 있던 제게 피 냄새가 몰려왔어요. 식은땀이 나더군요. 그때 깨달았어요. 예수님의 삶의 정수는 나눔이라는 것. 그래서 나눔의 집이란 이름을 붙였어요. -그 곳을 통해서 하신 일이 참 많더군요. 400만 원짜리 임대 사무실이었어요. 불도 잘 안 들어오는 허름한 공간이었죠. 그래도 밤이 되면 상계동 친구들이 모이죠. 어린 시절 성경을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이고 저 역시 신학생 신분이니 기도도 하고, 성경구절을 주제로 토론도 하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고 일을 만들었습니다. 상계동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을 해야 한다는데 마음을 모아 설문지를 돌려 일을 찾았어요. 아이들 공부방, 야학, 다양한 계층을 위한 모임까지 많은 일이 생겨났어요. -모두 그들에게 절실한 것들이지만 꼭 돈이 있어서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군요. 돈이 아니어도 나눌 수 있는 것들이었네요. 그렇죠. 그래서 네 가지 원칙을 세웠어요. 하나는 이곳은 가난한 사람이 주인이 되는 교회, 단순히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주인이 되는 그런 교회죠. 두 번째는 실질적으로 삶에 도움이 되는 민중복지를 지향했어요. 세 번째가 지역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지역주민들의 센터가 된다는 것. 그 다음은 종교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경계가 없는 집, 누구나 올 수 있는 그런 집이었죠. -경제적으로는 어땠습니까.시작도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늘 어려웠어요. 그래서 나눔의 집 후원회를 만들었는데 많은 분들이 나눔의 집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럴 때 나눔의 집은 산동네의 산복도로 같은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산복도로는 산동네 가기 위해 오르거나 내려오는, 산동네를 가로지르는 길이예요. 밑에 있는 사람들이 올라가고 위에 있는 사람들이 내려와 함께 어깨 걸고 걸어갈 수 있는 길이죠. 그 길 같은 것이 곧 나눔이에요. 나눔의 집 후원회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애정과 사회적 책임을 지려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기적처럼 해결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분들의 힘이었죠. -팍팍한 사회인 것 같은데 신부님 말씀 들으면서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벽 때문에 가로막혀있을 뿐 서로 조금만 더 존중하고 이해하고 배려하면 서로가 서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애정을 갖고 건강한 가치관과 새로운 세상을 위한 비전을 공유한다면 서로가 가진 작은 차이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거든요. -지금까지 함께 해온 분들이 많이 있지요. 후원해주시는 분들이 수천 명, 수만 명이고요. 가장 고마운 분들은 저와 함께 했던 활동가들입니다. 제 꾐에 빠져서(?) 이 길에 들어선 사람들에 대한 빚이 큽니다. -대한민국에서 사회적 가치를 위해 일하는 활동가들의 삶은 정말 고단하지요. 구체적 현실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막막하죠. 경제적 여건도 그렇지만 사회적 보장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외국에 있을 때 가장 부러웠던 것이 활동가들이 번듯한 직업으로 분류되고 있는 환경이었어요. 우리는 아직도 직업의 영역에서 기타 등등으로 분류되거든요. 몇 년 전에 공익활동가 사회적 협동조합 동행을 만든 것도 이러한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은 1000명 정도의 활동가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사회적 복지 지원과 공공의 선을 위한 활동가들의 연대를 이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나눔과 미래는 언제 설립되었습니까. 1998년 노숙인 무료급식소로 일이 시작되었는데 2004년 법인체로 설립된 이후 지금은 주거 복지 등 사회적 경제 활동을 확산하는 사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우리나라의 사회적 경제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근래 들어서죠. 맞습니다. 사실 나눔의 집을 통해서 해온 일들이 결국은 사회적 경제의 연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협동조합은 그동안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에 다시 살아나고 있는 분위기죠. -사회적 경제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환경을 어떻게 보십니까. 처음에는 사회적 경제라는 것이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운용되었어요. 지금은 사회혁신이라는 가치가 더해졌죠. 사회적 경제는 사실 민주주의의 도장이기도 하고 자본주의의 대안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사회적 경제가 국가의 아젠더가 되고 주요 정책이 되었으니 격세지감이지요. -사회적 경제의 가치는 지속적으로 확산될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확산되는 것이 당연하고요. 사회적 경제는 150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지속되어온 가치입니다. 지속해온 힘의 근간은 이것이 풀뿌리 운동이라는데 있어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서로 협력해서 살고자 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인간을 경쟁적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인간은 관계적 존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지요. 경제활동도 마찬가지예요. 사회적 경제는 경제적 대안일 뿐 아니라 사회적 대안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존재해야하는가 어떻게 관계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을 때 구체적인 이론이나 관념적 철학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에서 그것을 증명해온 운동이 사회적 경제 운동입니다. 사회적 경제는 앞으로도 지속되어야 하는 우리 사회의 미래 가치예요. -사회적 가치를 공유하는 수많은 통로를 열고 확산시켜오셨는데, 나눔은 어떤 의미입니까. 나눔은 자기 자신에게 드리는 가장 거룩한 제사 같은 것입니다. 삶은 살아갈수록 참 어렵거든요. 삶은 살수록 비루해지고 작아집니다. 처음에는 내가 거룩한 사람도 될 수 있을 것 같지만 갈수록 존재가 작아지고 불안해지잖아요. 때로는 비루해지기도 하고. 그럴 때 남을 돕는 일은 결국 나를 이롭게 하는 일이 됩니다. 누군가와 관계하고 누군가와 접속한다는 것, 그래서 내가 거룩해지는 것이 나눔이지요. 나눔이 곧 자신에게 주는 또 하나의 선물임을 알게 되는 이야말로 더없이 행복한 일입니다. ■ 송경용 신부는 송경용 신부는 전주가 고향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족들은 서울로 이사를 갔으나 할머니와 전주에 남아 초등학교와 중학교(완산중)를 어렵게 마쳤다.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기 어려웠던 어린 시절의 가난은 그를 성장시킨 힘이 됐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온 이후부터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먹고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직업으로 삼았다. 일을 한다는 것은 곧 생존의 문제였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 져야 할 짐은 그만큼 무거웠다. 대학은 사치다 싶어 취직시험을 봤다. 삼성 대림 한전 등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는 직장에 모두 합격했다. 그러나 대학입시의 유혹을 떨치지 못했다. 시험이나 한번 보자고 생각해 연세대 건축과를 지망했다. 면접날이 되자 갈등이 생겼으나 고생하시는 어머니께 합격증이라도 보여드리고 싶었다. 운 좋게 합격을 했다. 등록금을 내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강남의 룸살롱까지도 일터가 되었다. 대학시절 선배의 권유로 야학을 알게 됐다. 민주화의 열망이 끓어오르던 시기, 상계동 노동자들을 만났다. 세상의 변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보였다. 대학 4학년 한 학기를 남겨놓고 신학교를 다시 들어갔다. 건축가보다 종교인으로서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찾은 것은 나눔을 실천하는 삶을 위한 선택이었다. 1993년 서품을 받고 성공회 신부가 된 이후 나눔을 실천하는 그의 삶은 더 깊어지고 넓어졌다. 빈민운동과 노동운동으로 시작된 그의 사회운동은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고 확산하는 다양한 분야로 확대됐다. 나눔의 집을 열고 청소년 쉼터, 노숙 가정 쉼터, 자활후견기관, 푸드뱅크, 장애인 센터 등 사회적 가치를 나누고 실천하는 다양한 공간과 기구를 설립하고 발전시켰다.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영국 런던에서 생활하면서 사회적 경제 분야에 대한 폭을 넓힌 그는 귀국한 이후 한국의 사회적 경제 운동을 확산시키고 발전시키는 일에 더 열정적으로 뛰어 들었다. 지금은 나눔과 미래 이사장, 국제사회적경제협의체(GSEF) 공동의장, 도시재생협치포럼 상임대표 등을 맡아 사회적 가치를 공유하고 확산시키는 일을 주도적으로 꾸리고 있으며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의 복지를 위한 사회적 장치와 기구를 만들고 운영하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 교회란 이름을 달지 않고도 기도를 필요로 하는 모든 곳이 교회라고 생각하는 그는 걷는 교회라고 스스로 이름 붙인 이 교회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최근 새로운 사회적 금융 생태를 만드는 사회적 금융 추진단 단장을 맡게 돼 더 새로운 의지를 다지고 있다.
우리나라 환경운동의 역사를 만들어온 1세대 환경운동가 최열 환경재단 이사장의 인터뷰를 읽었다. 이런 대목이 있었다. 환경운동을 하겠다고 들어온 똘똘한 젊은이가 3년이 지나면 머리가 빈다. 5년이 지나면 파김치가 된다. 7년이 지나면 무감각해진다. 그렇게 지쳐서 나가고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활동가들이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기 위해 창립한 환경재단의 취지를 설명하는 인터뷰였다. 한 사람이 떠올랐다. 3년이 지나면 머리가 비고 5년이 지나면 파김치가 되고 7년이 지나면 무감각해져 조금 거칠게 표현하자면 지쳐 나가떨어진다는데, 50대를 눈앞에 둔 지금도 여전히 똘똘한 젊은이로 현장을 누비고 다니는 활동가. 전북환경운동연합 이정현 사무처장(49)이다. 20대 후반, 환경운동을 돕다가 아예 직업으로 환경운동 활동가를 선택해 20년 한길을 걸어온 그의 도무지 지치지 않는 열정이 궁금했다. 예상대로 일주일 내내 환경 관련 행사와 세미나와 민원현장과 출장까지 촘촘히 엮어져 있는 그의 일상을 비집고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오후 한나절 시간을 얻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이 올 여름도 만만치 않았을 민원 현장의 면면을 짐작하게 했지만 그는 지치지도 무감각해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환경운동의 생명은 현장성에 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열정이 더 새로웠다. -어제까지 에너지의 날 행사가 있었죠. 태풍 솔릭 때문에 준비과정에 어려움이 있었겠습니다. 해마다 해오는 일이어서 특별히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는데 아무래도 태풍으로 행사장이 야외에서 실내로 바뀌면서 역동성이 떨어지긴 했습니다. 어제는 환경 다큐영화 알바트로스 상영회가 있었는데, 눈물겨운 영화였어요. 과소비사회의 이면을 그대로 고발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은 분들이 생태위기 상황의 심각성을 절감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알바트로스라면 전설의 새로 불리죠. 해양 생태계 문제가 워낙 심각한 때여서 관객들의 관심이 컸을 것 같습니다. 바다 위를 날면서 3~5년 동안 땅을 딛지 않는다는 새죠. 영화는 새들의 천국이라고 알려진 태평양의 미드웨이 섬에 서식하고 있는 알바트로스가 주인공입니다. 이 섬은 알바트로스의 최대 번식지이기도 하죠. 영상을 찍은 크리스 조던은 논리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하는 환경운동의 과제를 다른 관점으로 제시하더군요. 보여지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워낙 컸습니다. -환경운동을 오랫동안 해오셨죠. 저보다 오래 활동해 오신 분들이 더 많습니다. 제가 전북환경운동연합 운영위원으로 참여한 것이 99년이고, 상근한 것이 2002년부터니까 20년이 채 안됩니다. -20년도 짧지는 않지만 그보다 훨씬 더 길게 일해오신 것처럼 느껴지는데요. 제가 1년차 되었을 때 주위에서 10년은 된 줄 알았다고 했어요. 멋모르고 뛰어다니니 그렇게 보였나봐요.(웃음) 그때가 사실 지역의 민감한 환경 이슈가 불거질 때였거든요. 새만금, 부안 핵폐기장 등 굵직한 현안들이 몰려오니 저도 그때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현장에서 일했던 것 같아요. - 똘똘한 젊은이의 열정이 때를 만났던 것이군요. 운영위원 시절에도 거의 활동가처럼 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초 환경운동에 뜻이 있었습니까. 그렇진 않습니다. 환경운동가가 되어야겠다는 것보다 학생운동으로 보낸 대학시절의 경험과 인식이 자연스럽게 시민운동으로 이어졌어요. 사실 저는 군대 다녀온 직후 취직을 해서 어느 정도 생활 기반을 다져놓고 싶었어요. 그때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친구들 중 시민운동, 노동운동에 투신하는 친구들이 꽤 많았는데 오래 버티지 못하더라고요. 아무래도 경제적 문제나 결혼 등 맞부딪쳐야 하는 현실적 문제 때문이었겠죠. 그것을 보면서 저는 어느 정도 사회경험도 쌓고 경제적으로 좀 자유로워진 이후 그 친구들이 그만둔 빈자리를 채우는 역할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결과는 달라졌지만요. -2002년이던가요. 지방선거에 환경연합 녹색 후보로 출마 했었지요. 그때 환경운동 쪽에서 녹색정치 실현을 내세웠을 때인데 전국적으로 33명이 출마했어요. 15명이 당선되었는데 주로 수도권이었죠. 녹색운동의 성과가 컸습니다. 저는 서신동 시의원에 도전했다가 꼴찌로 낙선했지만 두 달 채 안 되는 선거운동으로 2000표 가깝게 얻었습니다. 비록 떨어졌지만 녹색운동의 희망을 그때 만났어요. -정치 쪽에 뜻이 있었습니까. 대학시절 민중당 청년학생위원회 활동을 했었어요. 돌아가신 노회찬의원이 중심이 됐던 진보정당 추진위원회 학생 대의원으로도 활동했고요. 진보정당 출신이니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죠. 그런 경험이 2002년 지방선거에 나서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늘 뭔가 바꿔볼 생각도 있었지만 제 역량은 아니라는 판단을 했습니다. 정치선거는 아니지만 이런 저런 선거 경험이 있고, 선거도 재미있게 경험하는 편이긴 한데 쓰이는 역량이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가끔 주위에서 출마 권유를 받기도 하지만 이 길은 제가 갈 길은 아닌 것 같아요. -시점으로 보자면 활동가가 된 직후부터 지역의 환경이슈가 부상했습니다. 아까 말씀하신대로 제대로 시기를 만난 셈이었겠습니다. 당시 여건은 어땠습니까. 외부적으로는 환경운동 영향력이 커 보였었어요. 환경연합이 꽤 일찍 만들어졌는데 그만큼 역할과 의미가 컸었죠. 전교조 해직교사와 인권변호사, 시민운동 활동가들이 탄탄하게 조직을 다지고 있어서 영향력은 지금 못지않았는데 막상 상근 활동가로 들어가 보니 회원이 너무 적은 거예요. 총선 시민연대 등을 꾸려 능동적인 시민운동을 보여주기도 했었지만 시민 없는 시민운동 이라는 이야기가 그래서 나왔구나 싶더군요. -과제가 생겼겠군요. 그래서 우선 과제로 삼은 것이 시민들과 소통을 넓히는 일이었어요. 회원도 늘려야했고요. 소식지부터 만들었죠. 정기 간행물을 만들어 우리 활동을 알리기 시작했어요. 저도 지역사회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일이 필요했고, 환경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그즈음 고창 핵폐기장 문제가 불거졌어요. 부안 핵폐기장 문제 이전에 2003년 2월 4일, 핵폐기장 예비후보 4개 부지 발표를 했거든요. 초짜 활동가였지만 학생운동 시절부터 연대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경험으로 시민사회네트워크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그 일을 맡게 되었는데 환경운동연합이라는 단체의 연관성과 비중이 있어서인지 도 단위 연대기구 집행위원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새만금, 핵폐기장 문제는 지금 돌아봐도 정말 뜨거운 이슈였습니다. 그때 중심에서 반대를 주도했던 입장으로 후회 없는 선택이었습니까. 2006년, 핵폐기장이 경주로 가면서 일단락이 되었지만, 고창에서 시작해 부안 그리고 군산까지 이어진 핵폐기장 유치 갈등은 우리 지역의 긍정적 에너지를 엄청나게 소진시켰습니다. 마치 그것이 지역경제 낙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의 모든 것인 것처럼 개발담론을 확산시고 언론도 그것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여론에서 우위에 설 수 있도록 이끌었던 분위기는 지역사회의 발전을 후퇴시키는 계기가 되었죠. -현재의 여건으로 보더라도 그런 판단이 옳았다고 보시는 거죠. 이번에 발표된 통계청 자료를 보니 핵폐기장을 유치한 경주도 지방소멸도시군에 들어가 있더군요. 그때 정부가 3000억 원을 지원하고 한수원 본사 이전 같은 혜택이 주어졌지만 실제 경주 주민들에게 경제적 이익이나 효과가 얼마나 있었는지 밝혀지거나 확인된 것은 없지 않습니까. 여전히 방폐장 문제는 지속되고 있고, 그래서 주민들의 불안은 커지고. 게다가 국민들의 환경의식이 지금은 얼마나 높아졌습니까. -이미 지난 일이지만 당시 정부나 자치단체에 맞설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지역 주민들이었죠. 지역 주민들이 동의하지 않았는데 그 결정권을 무시하고 자치단제장이나 의회 의원들의 일방적 결정으로 주민들의 의사가 무시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잖아요. 우리가 정부의 원자력 정책을 반대하는 것은 핵폐기물의 안전한 처리를 위해서는 안전한 지점에 설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한다던지 어떤 정당한 절차 없이 선호도 투표로만 결정할 사안이 아니기 때문에 반대한 것이지 대한민국 어디에도 핵폐기장 시설을 설치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편 것은 아니거든요. -화제를 좀 바꾸겠습니다. 말씀하셨던 것처럼 국민들의 환경의식이 높아졌습니다. 과잉소비사회에 살면서 저희가 맞닥뜨리게 되는 환경문제가 생존을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그만큼 운동의 영역도 넓어지고 있겠죠. 일이 너무 많아집니다. 저희에게 들어오는 민원은 가능한 해결해보려고 노력하는데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은 영역에서 많은 문제들이 불거집니다. 사실 저희는 수달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이라든지 숲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 같은 전통적인 자연생태계 보존운동이 중심이고 본령입니다. 가장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일이기도 하죠. 그러나 최근에는 환경보건분야 영역이 급속도로 넓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세먼지나 생활화학제품 문제 같은 것들이죠. -듣다보니 환경문제의 심각성과 구조적 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도시계획의 영역도 무관하지 않을 듯싶은데요. 도시계획 영역도 중요해졌지요. 개발과 건설은 여전한 환경파괴의 대척점에 있으니까요. 도시환경 영역에서 천변의 바람 길을 막는 고층건축물 같은 것도 저희가 일정한 역할을 해야 하는 거죠. -영역이 넓어지면 그 못지않게 지식과 전문성도 요구될 텐데요. 그것이 늘 과제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전문가들과의 네트워크 구축이예요. 전문가들의 의견을 구하고 그 내용을 정리해 합당한 논리를 만들어 설득하고 해결하는 역할, 이를테면 건강한 코디네이터가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선은 활동가 스스로가 전문성을 쌓아야하는 것이 필요하고요. -돌아보니 지난 20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환경운동연합도 많이 변화했겠습니다. 회원도 많이 늘었죠. 처음 1-2년은 주어진 일을 정신없이 했어요. 핵폐기장이나 새만금이나 결국은 시민들을 설득해야하는 문제이고, 시민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문제거든요. 시민들의 인식이 변하지 않으면 지역 정치권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막상 시민들을 우리가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 들여다보니 통로도 별로 없고 시민들은 시민운동에 대한 편견이 있었어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할 방법으로 생각해낸 것이 회원확대였어요. 환경과 관련한 행사를 늘려 회원들을 직접 만나는 통로를 넓혔습니다. 회원 확보를 위한 릴레이 운동도 했고요. 환경 분야 뿐 아니라 인문학까지 아우르는 초록시민강좌 개설도 그 연상이었어요. -성과는 있었습니까. 54개 환경연합 지역조직 중에서는 저희 회원 수가 가장 많습니다. 전북의 사례가 전국으로 확장되었어요. -환경운동연합의 이슈가 궁금합니다. 전국적으로는 사대강 문제예요. 자연성을 회복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실천하는 일이고 최근에는 탈핵 원자력발전소 문제가 부상하면서 에너지 전환문제도 집중하고 있습니다. 지역에서는 마이산케이블카 문제가 있고, 곧 창립되는 새만금도민회의를 통해 새만금 해수유통을 통한 부분 조기 집중개발을 이뤄내는 일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지치지 않고 일 해온 동력이 놀랍습니다. 늘 즐겁게 일하지만 갈등이나 고민도 물론 있겠지요. 성실한 직업인으로서 정년퇴임하는 활동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어떻게 실현할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노동안식년을 얻어 공부도 하고 싶고요. 제 장점이 넓고 얕은 지식이었는데(웃음) 이제 그것마저도 잘 충전이 안 되거든요. 현장 경험을 통해 축적된 지식으로 버텨 왔는데 한계가 분명하니까요. 그동안 절집으로 이야기 하자면 행정스님처럼 조직을 운영하는 것에 방점을 두어왔다면 이제는 오래 제대로 집중해 성과를 내는 일에 전념하고 싶습니다. /김은정 선임기자 ■ 전북환경운동연합 이정현 사무처장은 전북환경운동연합 이정현 사무처장 정읍 태인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때부터 신문읽기와 책읽기를 즐겨해 성장과정에서 현실정치나 사회문제에 관심이 컸다. 고등학교 때 이미 진보학자들의 저서를 섭렵했고 한국사회의 민주화 여정에 남다른 인식을 갖게 됐다. 삼수에 전기 후기 대학 시험을 다섯 번이나 실패하고 전주대 국문과를 들어갔으나 학생운동 현장에서 대학시절을 보냈다. 학생운동의 동력을 준 사람은 사촌누나였다.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는 인식은 그를 투사로 만들었다. 민중당 청년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전국적인 조직체를 만들어 활동했던 진보정당 추진위원회 학생대의원에 참여했다. 주변의 조력까지 받고서야 5년 만에 계절 학기까지 거쳐 겨우 졸업장을 땄다. 군대에 다녀와서는 시민운동이나 노동운동에 투신하는 대신 취업을 했다. 사회 경험도 쌓고 경제적으로도 기반을 닦은 다음 사회운동 현장으로 돌아가겠다는 계획이 있었다. 첫 직장은 마을금고, 두 번째 직장은 골프장이었다. 전북환경운동연합에 운영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삶의 길이 바뀌었다. 그즈음 시민운동가로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는 의지가 더 확고해졌다. 한때는 영화에 관심을 두어 전주시민영화제 사무국장을 맡아 두 번의 영화제를 치루기도 했다. 2002년,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환경운동연합 상근직 활동가로 자리를 옮겼다. 그해 환경운동연합의 녹색운동에 참여, 시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환경운동의 실질적인 활동을 엮고 실천하는 일에 나섰다. 운동의 대중화를 가장 큰 과제로 안고 있었던 그는 회원을 늘리고 소통하는 일에 역량을 몰두했다. 소식지를 만들고 지역사회를 읽어내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썼다. 활동가로 현장에 섰던 초반, 핵폐기장 유치와 새만금 개발이 지역사회의 최대 이슈로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핵폐기장 반대 도 단위 연대기구 집행위원장(부안방사성폐기물처리장 백지화 및 에너지전환운동)을 맡게 됐다. 2~3년 지속됐던 핵폐기장 문제가 일단락되는 즈음 환경운동연합의 역할은 더 커지기 시작했다. 환경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쏟아지는 민원과 곳곳에서 터지는 환경문제가 그를 현장으로 이끌었다. 책과 전문가들의 자문에만 의지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늘어났다. 대학원에 들어가 도시계획을 전공한 것도 지식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다. 환경운동의 지평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으로는 회원 참여 사업을 늘려나가면서 만경강생태하천가꾸기민관학협의회, 전북지속가능발전협의회 전라북도강살리기추진단, 전북환경교육네트워크 등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일을 꾸렸다. 덕분에 전북 지역 환경운동의 지형은 새롭게 바뀌었다. 도심의 생태복원운동을 주도해 멸종위기종인 맹꽁이 서식지 복원에 성공했고 환경관련 전문성을 살려 지역의 환경이슈나 생태자원을 소개하는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만경강과 동진강을 비롯해 전북의 생태보고 현장을 탐사해 널리 알리는 기고 활동에도 남다른 역량을 쏟았다. 20여년 전북지역의 환경운동을 주도해온 그는 현재 전북시민사회연대회의 운영위원장, 전북환경교육네트워크 운영위원장을 거쳐 에너지시민연대 운영위원과 환경운동연합사무부총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우연히 표지 디자인이 특별한 책 한권을 만났다. 책 제목은 <기억하겠습니다>. 일본군 위안부가 된 남한과 북한의 여성들이란 부제가 붙었다. 그리고 함께 새겨진 20명의 이름. 노청자 이귀분 김영실 리상옥 심미자 김대일 강순애 황금주 곽금녀 문옥주 리계월 강덕경 리복녀 김학순 심달연 리경생 유선옥 정옥순 김영숙 박영심. 자세히 보니 그 이름 밑에 작게 생몰연대가 쓰여 있었다. 모두 세상을 떠난 위안부 할머니들이다. 저자는 일본인 포토저널리스트 이토 다카시. 1991년 10월, 지금은 고인이 된 김학순 할머니와 처음 만난 이후 남북한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취재해왔던 그는 2014년 20명 남북한 위안부 할머니 20명의 생생한 증언을 정리한 사진기록집을 펴냈다. 그리고 3년 후 이 책은 다시 한국어로 번역되어 우리 앞에 놓였다. 사진가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역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기록해온 안해룡 감독(57)과 번역자인 이은씨의 공동 작업 결실이었다. 한국어판을 기획하고 번역한 안해룡 감독을 만났다. 책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었거니와 이즈음 제작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분노>의 진행도 궁금했다. 지난 7월 중순. 서울 도심 거리의 아스팔트가 끓어오르는 한낮, 흑석골 중앙대 앞 카페에서 만난 그는 하얀색 종이에 검정 글자가 새겨진 표지의 이 책을 먼저 꺼내놓았다. 4년 전 이토 다카시가 선물이라며 건네준 사진기록집을 받았을 때 반가움과 부끄러움이 교차했습니다. 그의 작업은 전쟁 책임을 호도하고 있는 일본 정치가들에 대한 분노이자 저항의 기록이었어요. 우리가 하지 못했다면 소개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역사에서 배우지 않는다면 미래는 없다는 명제는 항상 분명하지만 교과서를 통해서 배운 식민지 피해의 역사를 우리가 과연 제대로 기록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는 그는 기록자로서 저널리스트로서 식민지 피해의 체험을 얼마나 성실하고 진지하게 귀담아 듣고 기록해왔는가를 반성하는 마음으로 번역한 것이 이 책이라고 말했다. 20여 년 동안 일본군 피해자의 증언은 물론, 식민지 지배하에서 권력을 갖지 못하고 배우지 못했던 가난한 민중들의 피해의 역사를 추적해온 그의 역사인식은 남달랐다. 부끄러움과 반성으로 늘 자신의 작업을 뒤돌아보는 것. 쉬이 지치지 않고 늘 치열한 정신으로 기록해나가는 작업의 힘이 거기 있었다. -예년에 없던 폭염입니다. 작업하시는데 어려움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이즈음 작업에만 전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병간호로 작업은 거의 손을 놓고 있는 형편이에요. 내년 발표할 다큐멘터리 영화 <분노> 작업이 밀려 마음이 바쁩니다. -<분노>의 펀딩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실적은 어떻습니까. 이 영화의 경우는 단순히 펀딩에 참여하는 수준이 아니라 일종의 조합 같은 형태로 공동제작자를 찾고 있습니다. 영화제작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형태지요. -내용은 역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기록이겠지요. 맞습니다. 지금까지 다큐나 사진으로 기록해온 대부분이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할머니들인데 <분노>는 그중에서도 북한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은 것이에요. 작년 말에 내놓은 책 <기억하겠습니다>가 바탕입니다. 공동 연출자로 이름을 올린 일본인 포토저널리스트 이토 다카시의 기록이 영화의 축을 이룹니다. -작년 가을쯤 인천다큐멘터리포트 2017에서도 소개되었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습니다. 과거 일본의 만행을 보여주는 작품인데도 일본 내 배급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긍정적 반응을 얻었다고 하던데 진전되고 있습니까. 잘 진행되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이 영화를 제대로 잘 만드는 것이 제게는 더 중요한 과제입니다. -제작 중인 <분노>의 바탕이 된 사진기록집 <기억하겠습니다>는 모두 돌아가신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담은 책이던데요. 대부분이 1920년대에 태어나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살아온 분들이지요. 그동안 남한의 할머니들은 여러 민간단체가 주도해 상당부분 알려지고 증언도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쪽은 전혀 다릅니다. 북한 자체가 폐쇄된 사회여서 개인적인 증언이 나올 수 없는 환경인데다 민간단체의 활동도 활발하지 않으니 그분들의 소리는 묻혀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북한의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담아온 이토 다카시의 작업은 정말 놀라울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하지 못한 일을 가해자 나라의 사진가가 해냈으니 부끄럽기도 하고요. -영화의 구체적인 내용을 듣고 싶습니다. 인터뷰 대상인 된 14명 북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이 중심입니다. 모두가 이토 다카시의 취재로 얻은 기록입니다. 아마도 할머니들은 이 작업으로 큰 위안을 받았을 겁니다. 그동안 그들의 소리에 누가 귀기울여주었겠어요. 할머니들의 고통을 누군가 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치유가 어느 정도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북한 할머니들의 증언이 새로운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죠. 50-60년 동안 말 못했던 내용들이지만 새로운 사실은 아니에요. 그러나 그들의 소리를 드러내고 들어준다는 것, 고통을 이제라도 함께 나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죠.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북한의 할머니들을 이제라도 우리 속으로 들여온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분노> 작업을 서두르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남북대화가 이루어지고 북미회담이 진행되고. 남북관계가 급속도로 진전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 과정에 여러 가지 과제가 있지만 아직 해결되지 못한 식민지 역사의 피해에 대한 공동 인식 역시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한국사회도 그렇지만 같은 피해를 안고 있는 공간으로서 북한을 알릴 필요가 있어요. 사실 프로젝트는 2년 전부터 시작했습니다. 자료도 어느 정도 가져온 터여서 스토리를 어떻게 만드느냐는 것이 고민이지요. 25년 동안 취재해온 덕분에 자료는 충분합니다. 귀한 자료들이 많아요. -언제까지 예정되어 있나요. 올해 9월까지는 제작을 마치려고 합니다. 완성이 되어도 마무리해야 하는 과정이 또 있으니까요. 내년 전주영화제에서 관객들과 만날 수 있다면 더 좋겠어요.(웃음) -<분노>가 지금까지의 작업 연상에서 본다면 개인적으로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분노>는 기본적으로 한반도 문제가 집합된 이슈를 제시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식민지 경험에 있어서의 피해, 한국 분단 상황에 대한 관련된 부분들, 또 한편으로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남북 교류 문제까지. 그 모든 것들이 영화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구조거든요. 그런 점에서 지금껏 해온 그 어느 작품보다도 한반도 문제가 확장되는 의미가 있습니다. - 위안부 피해자들의 교류라는 표현이 특별히 다가옵니다. 피해자들의 교류는 매우 중요합니다. 역사적 진실을 알리는 것 뿐 아니라 연대하고 공유하는 힘이야말로 가치 있는 일이거든요. -그런 힘을 직접 경험해보셨습니까. 94년에 일본에서 전후 보상에 대한 국제공청회가 열렸습니다. 그때 북한에서 위안부 피해자 두 명이 참석하고 남쪽에서도 참석했습니다. 북한의 김영실 할머니가 피해를 증언한 뒤 남한의 김학순 할머니가 단상에 올라가셨어요. 그때 나도 같은 위안소에 있었다고 증언하시거든요. 그 순간, 우리가 마주하게 된 역사적 진실의 증언의 힘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어요. 그 현장을 기록한 사진이 있습니다. 남북의 피해자가 가해자인 일본이라는 가해국에서 남북분단의 일종의 상징들이 만나는 사진. 두 분 할머니가 치마저고리를 입고 만나는 그 순간의 장면은 식민지의 피해, 남북분단의 상처를 모두 다 드러내는 과정이죠. -북한 할머니들의 증언은 지금껏 공개된 적이 거의 없지 않습니까. 우리의 위안부 운동이 남한의 할머니 중심으로 이루어져왔기 때문이에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우리 할머니들에서 북한의 할머니들은 빠져 있었던거죠. 그래서 저는 이 영화가 아 우리가 중요한 부분을 잊고 있었구나하는 자각과 그런 자각들이 모여 분단체제를 극복하거나 편협된 인식을 부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북한 위안부 피해자를 이야기 하면서 식민지와 분단을 이야기 하고, 한반도 현대사를 이야기하는 그런 과정이 이어지게 되는 그런 그림을 상상합니다. -<분노>에 이어지는 또 다른 계획이 있습니까. <분노>는 영화 작업만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프로젝트입니다. 영화에 담아지는 부분은 90분 분량 밖에 안 되거든요. 북한 할머니 열 네 분의 인터뷰와 증언은 매우 소중한 자료예요. 그래서 자료집으로 내는 방식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확장한다면 아시아의 사진가들이 찍은 아시아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증언집도 만들고 싶고요. -위안부 피해자 작업 말고도 일본의 전쟁과 관련된 흔적을 지속적으로 추적해오셨는데 한국현대사를 기록하는 일의 고단함(?)은 없는지 궁금합니다. 강제동원이나 일본에 있는 조선인과 관련된 유적과 유골을 계속 찍고 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홋카이도까지 지속적으로 돌아다니는 것도 이 때문이에요. 어려움이 없지 않지만 이제는 귀한 정보나 네트워크가 있어서 누구보다도 내게 주어진 과제라는 책임감이 생겼습니다. 고단함보다는 부끄럽지 않은 작업을 해나가면 좋겠다는 바람이 더 큽니다. -다큐는 우리의 일상에서도 머무를 수 있는 영역이지 않습니까. 혹시 주제면에서 가벼워지고 싶을 때는 없습니까. 가벼운 것을 다루고 싶었다면 진즉 전환했을 겁니다.(웃음) 그런 갈등은 없고요. 오히려 제가 하고 있는 작업을 진중하게 하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진중함과 깊이가 없는 형태의 생산은 정말 피하고 싶거든요. 안 감독은 20여 년 전, 도쿄의 한 사진갤러리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강제 동원되어야 했던 조선인을 담은 사진 전시회를 만났다. 일본어를 못해 전시장 안에 있던 일본인 작가와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고 나온 그는 자신을 돌이켜 보았다. 이후 만난 이토 다카시의 작업은 그를 더 새롭게 일으켜 세웠다. 왜 일본인이 조선인 문제에 천착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부끄러움으로 바뀌었다. 한국현대사에서 잊혀지거나 소외되었던 역사의 현장을 추적해온 그의 오랜 작업은 고단해보이지만 그 결실은 스스로 빛나는 보물과 같은 기록으로 이어져있다. 그 노정에서 그가 놓지 않는 화두가 있다. 우리는 얼마나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고단한 작업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안해룡 감독은 - 강제동원 등 식민지 시대의 흔적 기록세월호 '다이빙 벨' 연출 안해룡 감독은 정읍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은 전주에서 보냈지만 서울로 이사와 성장했다. 서강대 사학과에 입학했지만 전공과는 무관한 학생운동으로 대부분 대학시절을 보냈다. 졸업한 직후 출판사를 거쳐 무역회사와 광고기획사에서 일했지만 취미로 시작한 사진이 그를 자유인(?)으로 만들었다. 민주화운동의 바람에 거셌던 80년대부터 주말이면 카메라를 들고 시위현장에 나갔던 그는 90년대, 본격적으로 독재의 억압에 대항하며 분노를 분출하던 시위현장을 찾아다니며 기록하는 일을 본업으로 삼았다. 좀 더 본격적으로 일하고 싶어 외신기자직을 몇 번 두드렸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다 일본의 프리랜서들과 교류하게 되면서 조선인의 강제동원, 조선인 원폭피해자, 일본군 위안부 등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즈음 공중파 방송과 케이블 방송으로부터 프로그램 제작 의뢰를 받아 기획과 취재 촬영 편집까지 혼자 해내는 비디오 저널리스트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낯설었던 VJ는 이후 방송사들의 프로그램 제작이 활발해지면서 독자적인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조선인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 조선족, 입양아 등 식민지시대 역사와 소외된 계층의 삶을 주목해온 그의 작업은 시간을 더하면서 더욱 확장되고 깊어졌다. 미디어 매체에 대한 새로운 형식을 탐색하는 작업에도 관심을 가져온 그는 2002년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의 육성 증언과 영상을 새롭게 구성한 침묵의 외침을 내놓아 주목을 받았다. 영상과 소리를 분리해 다시 평면으로 구성해낸 이 작업은 이미지를 생산하는 매체에 대한 고정된 관념과 관습에 도전한 실험적인 기법으로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다. 일본에 생존해있는 유일한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 송신도 할머니의 10년 동안의 법적투쟁기를 다큐영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를 비롯 <우리 함께-나고야조선초급학교 60주년 기념 기록> <자이니치의 달은 어디에 뜨는가> <빼앗긴 날들의 기억> 등 일본 속 조선인들의 삶을 추적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으며 <눈 밖에 나다> <북녘 일상의 풍경> <어디 핀들 꽃이 아니랴> <분단의 경계를 허무는 두 자이니치의 망향가> <공습> <가부기초> <기억하겠습니다> 등의 사진집과 책을 짓거나 번역해 출간했다. 2014년 부산영화제에서 상영을 둘러싸고 정치적 파장을 불러온 세월호 구조 현장의 기록 <다이빙 벨>을 공동으로 연출하기도 한 그는 2001년에는 프로그래밍 어드바이저로, 2002년에는 콘텐츠 디렉터 겸 홍보팀장을 맡아 전주국제영화제와도 인연을 맺었다. 아시아 프레스 인터내셔널 서울 사무소 대표를 맡고 있으며 일본의 전쟁이 남긴 상흔의 역사를 추적하고 기록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북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분노>를 올해 안에 제작해 세상에 내놓을 계획이다.
2001년, 전주한옥마을에 온고을소리청이란 이름을 내건 작은 공간이 문을 열었다. 명창 부부가 제자들을 가르치고 가끔씩은 판도 여는 곳이었다. 드러내놓고 공개된 곳은 아니었지만 골목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담장 안에서 들려오는 판소리와 북장단, 아쟁과 가야금 소리에 마음을 앗겨 슬쩍 슬쩍 기웃거리기도 하고, 담장에 기대어 한숨 쉬어가기도 했다. 10년 남짓 시간이 더해지면서 온고을소리청은 자연스럽게 한옥마을의 명소가 되었다. 그즈음 한옥마을이 변하기 시작했다. 관광지로 이름을 알린 한옥마을에 관광객들이 물밀듯 몰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골목길은 번잡해지고 길거리음식과 온갖 오락기구로 채워진 가게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온고을소리청도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명창 부부는 담장을 넘어가 오가는 사람들을 즐겁게 했던 우리 음악이 이곳에서는 더 이상 제 빛깔을 찾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다잡기 어려웠던 부부가 한옥마을의 온고을소리청 문패를 내리고 떠난 것은 2012년이었다. 김일구 명창과 김영자 명창 부부의 이야기다. 그 뒤 햇수로 6년, 소리청이 있던 곳에 문을 열었던 카메라박물관이 떠난 자리에 예쁜 정원을 품은 한옥이 들어왔다. 다시 문을 연 온고을소리청이다. 지난 4월부터 박물관으로 변신했던 한옥의 제 모습을 다시 찾느라 고된 노동에 매달렸던 김일구 명창(78)과 김영자 명창(69) 부부를 만났다. 6년 만에 돌아온 한옥마을이 아직은 낯설지만 다시 출발하는 기대로 설렌다는 부부는 마지막 삶의 터가 될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관객들을 만나며 우리 음악의 가치를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예전의 한옥과 좀 달라진 모습입니다. 일이 많았겠습니다. 두 달 정도 걸린 것 같아요. 우리가 이사를 하고 카메라 박물관이 들어왔잖아요. 그래서 공간이 아주 많이 변했었어요. 전시가 중심이었던 공간을 다시 원상복구하려니 일이 많았어요. 기왕에 원형을 다시 잡으면서 교육공간을 조금 넓혔는데 건축법상 문제가 있다고 하네요. 한옥의 모습을 제대로 찾아야겠다 싶어 나선 일이 너무 복잡해져서 아주 힘들었어요. 괜히 시작했다 싶기도 했고, 좋은 취지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행정도 야속했어요. 그래도 그럭저럭 정리되어가니 다행이지요. -다시 돌아오실 계획이 있었습니까. 떠날 때는 이런 저런 생각을 깊게 하지 못했지만 다시는 안돌아오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나는 이사 가고 싶지 않았는데 집사람이 서둘렀던 일이거든요. -그럼 사모님 결정이었군요. 이 양반은 이사하지 말자고 했었는데 제가 옮기자고 했어요. 가장 큰 이유는 이 양반이 일을 너무 많이 하는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면 우리 집 마당에서부터 오목대 올라가는 입구 밑에까지 쓸고 물청소를 합니다. 날이면 날마다 하루 두 번씩이나 했어요. 오죽했으면 우리가 이사를 가고 나니 청소하는 아저씨가 김일구 선생님이 안계시니까 너무 힘들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안 되겠다 싶더군요. 건강관리도 해야 하는 나이인데. 게다가 동네가 너무 이상하게 변하는 거예요. -선생님은 이사를 반대하셨는데 어떻게 설득하셨나요. 기회가 좋았어요. 우리가 그런 고민을 갖고 있다고 하니 카메라를 수집해온 제자가 여기에 박물관을 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나서서 강권했지요. 소리청과는 다르지만 카메라박물관도 한옥마을에 좋은 공간이 되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2012년에 떠나셨으니 6년 만에 오신 셈인데, 그때에 비해 환경이 더 나아진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더 번잡해진 경향도 있고요. 그래서 망설이기도 했어요. 지금이 다시 돌아오기 적절한가 싶기도 했는데 이때를 놓치면 더 어려워지겠더라고요. -두 분 다 고향도 아닌 전주로 어떻게 오시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전남 화순, 저 사람은 대구가 고향이에요. 결혼하고 나서는 줄곧 서울에 살았습니다. 그래도 공연 때문에 왔다 갔다 하는 전주는 늘 마음이 가닿는 곳이었어요. 아내는 국립창극단에 있었고, 나는 국립국악원에 있었는데 정년퇴임을 하고나니 서울을 떠나고 싶더라고요. 어디로 갈까 고민이 별로 필요 없었는데 아내를 설득하는 일이 어려웠죠. -그럼에도 내려오신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까. 친분이 깊은 전주 분들이 내려와 살라고 권하셨어요. 옛 속담에 권하는 장사는 밑지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이렇게 권하는 분들이 있으니 가도 밥은 굶지 않겠다 싶었죠. 그리고 더 큰 이유는 내 기술로 제자양성을 한다면 묻히지는 않을 텐데, 그런 일을 하기에 전주가 가장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한번 해보자해서 이 집을 그때 산 것이죠. -그때만 해도 한옥마을에 빈집이 많았지만 이사를 오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었을 때인데요. 선견지명이 탁월하셨던 것 같습니다.(웃음) 그래도 그때가 참 좋았어요. 고즈넉하고 공기 좋고 사람 살기 참 좋은 동네였잖아요. 세상사가 그런 것 같아요. 넘치면 부족한 것만 못하다고, 한옥마을이 좋은 관광지가 되는 것은 좋은데 역사성이나 특성을 간직할 수 있는 환경을 조금이라도 회복했으면 좋겠어요. -화제를 좀 돌려보겠습니다. 선생님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준보유자이면서 아쟁과 가야금 연주에도 독보적인 위치를 지키고 계신데 여러 갈래 길을 걸어오신 시간이 궁금합니다. 어느 것 하나 놓는 일이 참 어려웠어요. 때로는 한 길만 제대로 가는 것도 어려운 마당에 내가 잘하고 있는 일인가 생각도 하지만 소리나 연주나 모두 제게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거든요. 돌아보면 부질없는 욕심인데 -단순히 욕심으로만 치부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선생님의 분야를 명창이냐 아쟁과 가야금 명인이냐로 가른다면 정말 어려운 일일 것 같거든요. 더구나 아쟁산조 같은 경우는 김일구류란 갈래를 정립하셨지 않습니까. 그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소리나 기악이나 모두 내 존재 자체가 스승 덕분인데 아쟁은 스승님의 반열에 머무르지 않고 김일구류를 새로 만들 수밖에 없었어요. 제 스승이 장월중선 선생님인데 당시 공부를 할 때 받은 산조가 10분 남짓한 길이거든요. 제가 그 뒤로 공부를 하면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가락을 더해 하나의 판을 짜게 되었는데 그 분량이 36분 정도 되었어요. 그러다보니 산조의 바탕도 전혀 새로워졌는데, 돌아가신 최종민교수님은 김일구가 아쟁을 하는 것은 말을 하는 것 같다고 하셨어요. 김일구류 산조를 세워놓은데 큰 힘이 되었죠. -어떻게 이 세 갈래 길을 함께 걷게 되셨는지요. 소리길에 들어선 것은 아버님 덕분인데, 본격적인 소리는 공대일 선생님께 배웠어요. 그러다가 변성기를 맞으면서 아쟁을 배우게 되었지요. 목포에 계셨던 장월중선 선생님을 그래서 찾아갔는데 당시 여성국극단 활동이 아주 활발했습니다. 2-3년 아쟁을 배우다가 여성국극단 반주로 따라 다니게 되었죠. 흥행이 잘되면 돈을 주는데, 그것도 야참비 정도였어요. 그마저도 나중에는 수입이 안나니 받을 수 없게 됐어요. 그때 마침 부산공연을 갔었는데 부산에는 가야금 연주로 이름난 원옥화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이 좋은 음악꾼들이 있는 단체가 왔다고 하니까 저녁에 초대를 했어요. 큰 온천장에서 판을 벌였는데 그때 주인 없는 공사는 없다시며 먼저 연주를 하시는데, 내 아쟁은 감히 내놓을 수도 없는 경지였어요. 강태홍 류 가야금 산조였죠. 그 길로 단체를 그만두고 부산에 남아 가야금을 배웠어요. -그럼 서울은 이후에 올라가셨군요. 거기서 바로 서울로 갔어요. 70년대 초반이었죠. 그때부터 국립창극단, 국립국악원 등에서 활동했고, 독립적으로 창극 작품을 제작해 올리기도 했어요. KBS 우리가락 우리마당이라는 프로그램도 만드는데 힘을 보탰고요. 그즈음에 방송프로그램으로 창극을 내보내기도 했는데 개인적으로도 그때가 가장 활동을 활발하게 했던 시기였을 거예요. -활동하신 영역을 보면 판소리에 아쟁 가야금 연주, 작창에 작곡, 연출까지 다양한 분야를 두루 섭렵해오셨는데요. 언젠가 고수로도 무대에서 뵈었던 것 같습니다. 맞아요. 한동안 주위의 권유로 북도 쳤어요. 돌아가신 오정숙 선생님은 제자들의 북을 여러 번 부탁하셨는데 거절 할 수 없어서 몇 번 맞췄었지요. 그런데 언젠가 항의를 받았어요. 왜 남의 밥그릇까지 뺏어 가냐고. 그때 알았어요.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하는 일이라 해도 누군가에게는 뺏기는 일이 된다는 것을. -사모님과 함께 선 무대도 많았었지요. 국립창극단에서는 함께 주역을 많이 했어요. 시새움을 많이 받았죠. 그래서 한때 창극단에 사표 쓰고 나와서 뺑파전을 만들어 공연했어요. 일본 공연까지 갔었는데 관객들의 인기가 높았어요. 전통의 원형과 현대적 변형을 잘 구성한 작품이었죠. 처음에는 우려했던 원로 선생님들도 전통은 저렇게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올해 큰 무대를 준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소리길에 들어선 시점으로부터 올해가 70년이 되었더라고요. 그래서 70주년 무대를 기획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서는 무대인데, 저는 판소리와 아쟁 가야금에 이번에는 거문고 연주도 해보려고 합니다. 거문고는 70년대 초반 서울에 올라갔을 때 한갑득 선생님을 찾아다니며 공부했었어요. 여러 가지 이유로 작파했었는데 나이 들어가면서 자꾸 아쉬움이 들어요. 그래서 지금 혼자 연습하며 가락을 익히고 있습니다. 가을 소리축제에 제 70주년 무대가 구성되었는데, 서울 부산 광주에서도 공연을 합니다. 이런 공연은 마지막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금도 열정이 식지 않으신 것을 보니 한옥마을 온고을소리청의 역할이 더 기대됩니다. 개인 공간이긴 하지만 우리음악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게 되는 통로가 되고 또 한편으로는 전주한옥마을의 환경을 참하게 만드는데도 역할을 했으면 좋겠어요. 나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을 챙겨서 국악공연에 대한 인식도 변화시키고 싶습니다. 다 도와주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전주여서 할 수 있는 일들이기도 하고요. 올해 일흔 여덟의 김일구 명창과 일흔을 바라보는 김영자 명창은 부화뇌동하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을 고집스럽게 지켜온 국악인으로 꼽힌다. 작은 이해타산에 마음 쓰지 않고 요란스러운 세태에도 휩쓸리지 않고 부부가 걸어온 길을 들여다보니 그만큼 쌓아진 궤적이 높고 단단하다. 전주한옥마을에 다시 문을 연 온고을소리청. 명창부부의 귀환이 그저 반갑다. ●김영자 명창은 - 김일구 명창과 판소리 대중화 열정 김영자 명창은 대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즐겨듣는 축음기에서 나오는 판소리가 좋아 국악의 길에 들어섰다. 아버지는 소리를 하려거든 정권진 선생을 찾아가라는 유언으로 소리길을 열어주었다. 잠시 대구에 와있던 정권진 명창 문하에서 소리를 시작했지만 곧 스승이 떠나 차승호 선생으로부터 소리를 배웠다. 국극단을 따라다니며 무대에 섰던 그는 김준섭 임준옥 강종철 정응민 등 여러 선생의 문하를 거쳤으며 김소희 성우향 정광수 명창으로부터 다섯 바탕을 익혔다. 20대 중반, 박동진 명창의 권유로 국립창극단에 들어간 이후 창극 무대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타고난 목과 탄탄한 성음으로 실력을 인정받아온 그는 30대 중반, 남원춘향제 전국명창대회 장원과 이듬해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 명창부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명창의 반열에 섰다. 남편 김일구 명창과 함께 창극 대중화에 특별한 열정을 쏟아왔으며 전북도립창극단 단장을 맡아 7년 동안 재직했다. 송흥록-송광록-송우룡-유성준-정광수로 이어지는 수궁가 로 중요무형문화재 준보유자가 됐다. ●김일구 명창은 - 판소리연주작창 능한 타고난 예인 김일구 명창은 화순이 고향이다. 여관업을 했던 아버지(김동문)는 국악단체를 인수해 운영할 정도로 예능을 좋아했는데 그 덕분에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판소리를 배웠다. 본격적인 소리 공부는 공대일 선생 밑에서 시작했지만 변성기를 지나면서 길을 바꾸어볼 요량으로 장월중선 선생을 찾아가 아쟁산조를 배웠다. 그러나 소리에 대한 일념은 변하지 않아 후에 김상룡, 장영찬, 박봉술, 정권진, 성우향 명창 문하를 거치면서 소리를 익혔고, 특히 박봉술선생으로부터는 적벽가가 한바탕을 제대로 받아 송흥록-송광록-송우룡-송만갑-박봉술로 이어지는 적벽가 계보의 적자가 되었다. 30대에는 부산에서 활동한 가야금명인 원옥화로부터 가야금산조를 배웠으며 한갑득으로부터 짧은 기간 거문고를 배우기도 했다. 여성국극단 반주자와 여러 곳의 국악원 강사를 거쳐 국립창극단에 입단, 여러 편의 창극 무대에 서거나 작품을 각색하고 연출하는 등 여러 분야에서 재능을 펼쳤다. 마흔네 살에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 명창 부문 장원으로 명창의 반열에 올랐으며 2년 뒤 신라문화제 기악부문 대통령상을 수상해 아쟁 명인으로도 자리를 굳혔다. 국립창극단을 거쳐 국립국악원에서 활동한 그는 판소리는 물론 아쟁과 가야금 연주에 작창과 연출까지 두루 능해 타고난 예인으로 꼽힌다. 남성 판소리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호방함과 잘 다듬어진 성음의 조화가 일품인 그의 소리는 귀명창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준보유자로 아내 김영자명창과 함께 전주한옥마을에서 온고을소리청을 열고 국악교육에 열정을 쏟고 있다. 아들 경호 도연씨도 그의 뒤를 이어 판소리와 아쟁 연주로 주목받고 있다.
공후는 우리나라 고대 현악기 중 하나다. 지금은 묻혀버렸지만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공후가 모두 문헌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오랜 세월 활발하게 사용되었던 우리 악기임에 틀림없다. 공후 연주가로는 고조선의 음악가 여옥이 이름을 알렸는데, 그가 남편으로부터 들은 백수광부와 그의 아내 이야기를 듣고 작곡했다는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를 연주한 공후가 문헌상으로는 가장 오래된 현악기로 꼽힌다. 그러나 공후는 오늘에 이르러 살아남지 못했으니 잊혀진 악기다.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에 편찬된 음악서적 악학궤범에도 더 이상 그 이름은 없다. 미루어 짐작컨대 공후는 조선시대부터 연주에 사용되지 않은 악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시대를 함께 건너지 못하고 잊혀진 악기 공후를 현대에 복원하겠다고 나섰던 악기장이 있다. 실제로 그는 문헌과 국립국악원에 전시된 공후를 연구해 그 실체를 살려내는데 성공했었다. 덕분에 잊혀진 악기 공후 복원에 국악계의 관심이 모아졌다. 당시 공후 제작으로 특허까지 냈던 악기장은 공후를 오늘의 무대에 살려내는 악기로 완성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의 표현대로라면 10% 부족한 악기로 다시 묻히고 말았다. 악기장 고수환 명장(69)의 이야기다. 열여섯 살에 악기를 만들기 시작해 50년 넘는 세월을 현악기 제작으로만 살아온 그를 만났다. 갈수록 자리가 좁아지는 국악기 제작의 현장을 지키며 다음세대에까지 남을 수 있는 악기를 만드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아온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연주자가 내고자 하는 음색을 제대로 내주는 악기가 좋은 악기입니다. 악기장은 어떤 음색이라도 그 빛깔을 연주자가 쉽게 낼 수 있도록 악기를 만들어야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아요. 좋은 악기를 만들기 위해 가야금을 배우기도 했는데 50년이 지난 지금도 부족함이 많습니다. 나무를 고르는 일부터 시작해 악기를 만드는 모든 과정을 직접 해내는 그는 전주시 덕진구 호성동, 온전히 작업만을 위해 마련한 공간에서 하루 여덟 시간 이상 나무를 깎고 줄을 꼬고 걸어내는 악기 제작으로 수십 년을 보내왔지만 아직도 이것이라고 스스로 만족할만한 악기를 갖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의 악기는 음색이 맑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특성으로 연주자들에게 명기로 꼽힌다. 악기 제작 방식의 원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음색이 빗겨가는 일을 절대 놓치지 않는 그의 철저한 태도가 바탕이 된 덕분이다. 많은 악기를 만들어내는 일보다 생명력 긴 악기를 만들어내고 싶다는 그의 소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연주자들이 고수환 가야금 고수환 거문고를 찾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쉬운 길 보다는 어려운 길을 스스로 택한 이 악기장의 선택이 빛나보였다. -작업실에는 날마다 출근하십니까. 직장이니까요.(웃음) 지켜보는 사람은 없어도 아침 9시쯤 나와 오후 6시쯤 퇴근합니다. -전수자는 없나요. 이수자도 있고 전수조교도 있는데 덕진동에 있는 작업장에서 일합니다. 전시공간이 함께 있거든요. 여기에서는 주로 저 혼자 작업합니다. 전수자 중에는 제 둘째 아들도 있습니다. -아드님이 같은 길을 가고 있으니 든든하시겠습니다. 저는 사실 왈칵 반갑지 않았어요. 공부를 웬만큼 하는 편이어서 새로운 분야로 나갔으면 했습니다. 그런데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대학을 그만두더니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이 일을 시작하더라고요. 예전에 애 엄마가 결혼하기 전에 사주를 봤는데 둘째아들이 가야금을 들고 나오더래요. 타고난 운이구나 싶어서 받아들였습니다. 제법 잘 따라주고 있어서 지금은 마음이 편합니다. -악기 제작은 어떻게 시작하셨습니까. 대를 물려온 일인가요. 저의 집안은 대대로 농사를 지었어요. 형제가 5남 3녀인데 먹고 살만큼은 되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환갑에 낳은 늦둥이여서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어요. 그런데 초등학교 졸업할 무렵에 형들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집안이 몰락했죠. 중학교 가는 것을 포기하고 서당에 다니면서 한문공부를 했어요. 어릴 때는 총명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천자문이나 사자소학 등을 남들보다 빨리 뗐어요. 그럭저럭 지내다가 누나가 전주에 일할 자리를 소개했는데 가야금 거문고를 만드는 곳이었어요. 남갑진 조정삼씨라고 악기장들이 함께 일하는 곳에서 심부름을 하기 시작했죠. -첫 스승들이군요. 그렇죠. 그런데 당시 참 어렵게 살았어요. 그때 저까지 세 사람이 일하면 한 달 내내 일해도 다섯 대 정도 만들었거든요. 구멍 하나까지도 손바닥으로 뚫어야 했으니 참 고단한 일이었어요. 지금은 드릴이라도 있지만 60년대에는 대패 칼 끌 조선톱, 이런 것이 전부였으니까요. 악기가 팔려나가기는 했지만 주문을 해놓고 악기만 갖고 도망가는 사람도 있고, 고정적인 주문이 이어지지 않으니 먹고 살기도 빠듯했던 시절이죠. -그래도 악기 만드는 일만은 탄탄하게 배우셨던 것 같습니다. 그랬던 것 같아요. 제 위로 한두 명 더 있었는데 일단은 악기를 만드는 사람 숫자가 적었어요. 제게 일을 가르쳐주신 분들은 20대였고, 저는 10대였는데, 제가 일을 그만둘까봐 군대 가면 제게 공장을 인계해주겠다는 약속을 했었지요. 월급이랄 것도 없이 명절 때면 약주 한 병 들고 부모님 찾아뵌 것이 전부였지만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몇 년 동안 일하셨습니까. 열아홉 살까지 3년을 배웠어요. 손재주가 있었던지 금세 기술을 익힐 수 있었죠. 그즈음 형편이 좀 나아져 전주 시내로 나오게 되었는데 그때 기술이 쑥쑥 늘었던 것 같아요. 70년대 들어서면서 박정희대통령이 국민교육헌장을 발표했잖아요. 거기에 조상의 얼을 오늘에 되살려라는 부분이 있죠. 그때부터 갑작스럽게 우리 것을 찾기 시작했어요. 우리 악기 만드는 일도 덩달아 바빠지게 되었죠. -좋은 시절이었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죠. 그때가 70년대 초반이었는데, 5급 공무원 월급이 2만 5천원, 그런데 저는 4만 5천원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부자가 된 겁니다.(웃음) 게다가 여기저기서 저를 빼가려는(?) 사람들이 월급을 배로 주겠다고 꼬셨어요. -어떻게 하셨습니까. 제가 그래도 서당 공부를 했잖아요. 공자 말씀을 새기며 살아왔는데 배신은 못하겠더라고요. 제가 나가면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래서 제 밑에 기술자를 붙여 일하면서 가르치고 저는 세 곳을 다니며 일을 했어요. 한 곳에서 4만 5천 원씩 받았으니 벌이가 컸죠. 그 시절 투자란 것을 알았으면 변두리 땅이라도 사놓아서 지금쯤 갑부가 되지 않았을까요.(웃음) -결국은 그렇게 벌었어도 부자가 되지 못했다는 말씀이군요. 집안이 워낙 어려워서 제가 식구들을 건사해야 했거든요. 공자님 말씀에 충효가 들어가 있잖아요. 공자님 말씀이 제 인생을 이렇게 만들었어요.(웃음) 많이 벌었지만 가족이 워낙 많은데다 형들도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조카들까지 껴안게 되었죠. 형편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어려움에 처해있는 가족들을 외면할 수 없더라고요. 어차피 콩나물시루인데 콩하나 더 넣어 같이 물주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덕분에 평생 큰 짐을 지고 살아왔지만 지금 생각하면 좋은 일을 한 것 같아요. -서울에서도 일하셨지 않습니까. 군대 제대하고 전주에 와보니 제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웬만큼 일을 하고 있었어요. 그렇다보니 제가 오히려 부담이 되겠더라고요. 그때 중요무형문화재였던 이영수선생님이 올라오라고 권유하셨어요. 지금 생각하면 악기장 기능의 계보가 이어지는 좋은 기회였죠. 이 선생님 밑에서 일하면서 기술을 거의 완벽하게 익혔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서울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내 고향을 빛내고 싶다는. 좋은 악기를 만드는 명장이 되겠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한 것 같아요. -서울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훨씬 많았을 텐데요. 물론 그랬죠. 그런데 이상하게 전주로 돌아오고 싶었어요. 스물일곱 살에 다시 왔는데, 그때부터 제 악기를 찾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어요. 고수환이 만든 악기를 가지려고 전국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고마웠어요. 자긍심을 갖게 되었죠. -그때의 선택에 후회가 없으신 건가요. 솔직히 말하면 약간의 회한은 있습니다. 지금 상황이 워낙 열악하니 그런 생각이 더 드는 것 같아요. 제 뒤로 일을 배웠던 후배들은 서울에 살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거든요. 그래도 제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제가 하는 일로 전주라는 도시가 조금 더 빛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이 클 뿐이죠. -아무래도 서울과 지방은 물량으로도 비교가 되지 않겠네요. 사실 악기 제작 같은 분야는 전주 같은 지방에서 전통을 갖고 이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악기로 이름을 알리는 도시가 되면 더 좋겠죠.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좋은 악기를 제작해도 시장성에 제약이 있으니 환경이 갈수록 나빠집니다. 모든 것이 서울로 몰리고 있지만 악기 같은 경우는 시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굳이 서울에서 악기를 구하는 환경이 안타깝습니다. -유통의 문제도 있겠습니다. 물론이죠. 좋은 악기를 제 값 주고 살 수 있는 통로가 얼마든지 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유통과정 때문에 좋은 악기가 양산되지 못하는 환경을 만들기도 하지요. 그렇다고 악기를 만드는 사람이 영업에 매달리는 일도 바람직하지 않고요. -연주자들은 좋은 악기가 생명일 텐데 유통과정이 잘못되어 있으면 가격 면에서도 그렇고 좋은 악기를 갖는 일도 한계가 있겠군요. 국악계를 들여다보면 웃지 못 할 일이 참 많습니다. 악기는 연주자마다 잘 맞는 악기가 있기 마련이지요. 각자 연주의 특성이 있으니까요. 특히 공부하는 과정에 있는 학생들에게는 악기가 중요해요. 그런데 국악 관련 학교의 경우 악기를 단체로 구입하는 경우가 많아요. 예전부터 행해져 온 관행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런 관행에서 오는 문제점은 그동안 수없이 불거졌었죠. -화제를 좀 돌려보겠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조금은 쉽게 악기를 제작하는 방법이 있을 텐데요. 이를테면 분업이라든가 기계를 활용한다던가. 그렇게는 할 수 없지요. 저는 악기를 만들 때 지금 당장이 아니라 얼마나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처음의 음색을 유지하느냐를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악기 제작의 과정을 원형으로 지켜내야 해요. 요즘은 분업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제가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자존심이죠. 우리는 실도 사다가 직접 꼬아 씁니다. 오동나무와 밤나무도 직접 사다가 건조과정과 숙성과정을 모두 거치지요. 시작부터 완성까지를 내 손으로 직접 하지 않으면 그것은 내가 만든 악기라고 볼 수 없습니다. -선생님 말씀 들으면서 악기장이 앞으로 살아남는 직업이 될 수 있을까 걱정이 됩니다. 특히 음악이 변하는 시대에서 개량악기나 새로운 악기가 계속 만들어지다 보면 손으로만이 아니라 기계가 악기를 만드는 시기가 올 것도 같은데요. 실제로 서울 쪽에서는 기계가 악기를 만듭니다. 악기는 원판을 깎아 만들어야 하는데 프레스로 눌러서 대량 양산을 하지요. 그런 악기는 소리부터 다릅니다. 금세 변하죠. 처음에는 모르지만 1년을 못갑니다. 값이 싼 악기를 선호하니 이제는 중국에서 만들어온다고 하더군요. 전통악기만큼은 이런 상황을 막아줬으면 좋겠어요. -개량악기 쪽은 관심이 없나요. 국악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악기의 변화가 요구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전통악기로는 연주가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도 시대에 따라 악기가 변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매력을 갖지 못하는 악기는 창고에 묻히게 될 테니까요. 그러나 그런 새로운 악기에 대한 요구가 높아질수록 전통악기의 원형을 지키는 일은 더 절실해집니다. 변화는 기본이 제대로 되어 있어야 의미와 가치가 있으니까요. 인터뷰는 예상보다 길었다. 갈수록 인간의 손을 대체할 수 있는 기계와 첨단 과학의 기능이 앞세워지고 있는 시대. 우리 음악의 온전한 음의 빛깔을 지키는 악기를 만들기 위해 아직도 어느 한 부분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손으로 모든 공정으로 수행해내는 그의 철학은 변하지 않았다. 손의 가치를 다시 깨닫게 하는 명장의 삶이 반갑다. ● 고수환 명장은 - 분업기계 힘 빌리지 않고 전 과정 스스로 만드는 원칙 고수 악기장 고수환 명장은 정읍이 고향이다. 5남 3녀 중 늦둥이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 대신 서당을 다니며 학문을 익혔다. 어린 시절, 총명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그는 천자문과 사자소학, 동문선습, 격몽요결 등을 떼면서 자연 이치에 눈을 떴다. 그때 익힌 고전은 그의 반듯한 삶을 지키는 결이 되었다. 갑자기 몰락한 집안형편으로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전주로 나와 악기 제작을 하는 공방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전주가 제 2의 고향이 된 것은 그 덕분이다. 그때부터 군대 입대로 떠나있던 시절을 빼고는 온전히 악기 제작하는 일로만 살아왔다.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에 이르는 동안 그의 이름은 악기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악기를 만드는 사람들의 숫자가 적어서이기도 했지만 그의 손재주가 남달랐던 덕분이다. 전주에서 활동했던 남갑진 조정삼씨가 그의 첫 스승들이라면 기술을 완성하고 기능의 계보를 잇게 해준 스승은 중요무형문화재인 이영수 명장이다. 이영수 명장은 그를 서울로 불러 올려 현악기 제작 기능을 완성하게 해주었다. 스물아홉 살 되던 해, 그는 전주로 다시 돌아왔다. 같은 일을 해도 전주를 빛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 시대를 건너는 명기를 만드는 명장이 되겠다는 꿈이 귀향을 부추겼다.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를 건너 90년대까지 그의 삶은 남부럽지 않았다. 이른바 전성기였다.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전국 각지에서 고수환의 악기를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던 까닭이다. 그때 안았던 경제적 풍요로움은 그 이후 이어진 재정적 결핍을 메워주는 기반이 되었다. 일을 배우기 시작해 지금까지 그는 악기 만드는 전 과정을 자신의 손안에서 해낸다. 분업이나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그 원칙을 지켜온 덕분에 그의 악기는 좋은 음색과 쉽게 변하지 않는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 내로라하는 연주자들이 고수환의 악기를 하나쯤은 꼭 갖고 있는 이유다. 90년대 말, 가장 오래된 우리의 현악기인 공후복원으로 화제를 모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완성시키지 못한 공후 복원은 그에게 상처로 남았다. 마흔 일곱 살에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야금 악기장)로 지정되었으며 전승공예연구회를 만들어 전통 기능 분야에 몸담고 있는 장인들의 기능을 잇기 위한 활동을 주도해왔다. 전라북도무형문화재기능보존협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전주국악기전수관을 운영, 후대에도 남을 수 있는 악기 제작을 위해 연구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이 휩쓸고 지나간 유럽에서 한창 부상하고 있던 미술운동이 있었다. 엥포르멜(Informel). 미술가의 즉흥적이고 격정적인 표현을 중시하는 비정형의 추상미술을 지향하는 운동이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됐던 우리나라의 추상주의 미술운동도 이러한 흐름에 힘입어 동력을 얻었다. 60년대 초반, 한국미술의 진보적 세대들이 주도했던 모던아트협회, 현대미술가협회, 60년 미술가협회, 악튀엘(Actuel) 등 젊은 작가들이 의기투합했던 그룹들이 주도하는 도도한 물결은 한국화단에 변혁의 시대를 열었다. 그 중심에서 활동하면서 한국화단의 불필요한 권위를 없애고 미술의 본질에 천착하며 추상미술과 판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오늘에 이르게 한 작가가 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인 윤명로 서울대 명예교수(82)다. 정읍에서 태어나 전주시 동산동에서 성장기를 보낸 윤 교수는 팔십이 넘은 지금도 새로움을 향한 창작정신으로 자신의 독창적인 세계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구축해나가는 화가다.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가장 한국적인 정신, 전통적인 정서를 독창성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에 몰두해온 그를 만났다. 융합의 시대, 디지털과 미디어가 홍수를 이루고 온갖 언어와 다양한 소재들이 예술의 옷을 입고 쏟아지는 이 시대에 여전히 미술의 본질에 천착하며 추상화 한길로 60년을 걸어온 그의 작업과 삶이 궁금했다. 작업실이 함께 있는 그의 자택은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에 있다. 1976년, 오직 아름다운 전경에 마음을 빼앗겨 지었다는 이 집은 200년쯤 된 소나무 한그루를 중심에 두고 ㅁ자 형식으로 자리 잡은 주택이다. 덕분에 이 집에 들어서면 회랑 형식의 마루를 따라 걷는 어느 공간에서나 이 오래된 소나무를 바라볼 수 있는데, 그 장중함과 아름다움이 묘한 조화를 이루어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소나무와 벗해온 까닭일까. 굽은 선까지도 도도한 소나무처럼 윤 교수가 걸어온 길 또한 도도하고 아름다웠다. -집이 참 아름답습니다. 평창동에서도 꽤 위쪽에 자리 잡은 이유가 있겠지요. 그때는 평창동이 주거단지로 막 개발되기 시작한 때였어요. 오가는 것조차 불편하기 짝이 없을 때였는데, 소나무며 아름다운 산경이 마음을 붙잡았어요. 벌써 40년이 넘었습니다. -정읍에서 태어나셨지만, 전주에서 성장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사업을 하셨는데 이사를 참 많이 다녔어요. 오형제 모두 태어난 곳이 다를 정도였으니까요. 함경도와 평안도 쪽에 살다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다시 전주로 이사를 와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살았어요. 고향인 셈이죠. -동산동에 대한 기억이 많으시겠군요. 좋은 기억도 많지만 격변기에 겪었던 이념의 갈등이 제게는 아주 깊은 상처로 남아 있어요.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었을 만큼. -교수님의 정신에 깊은 흔적으로 남아 있는 대상이 궁금합니다. 초등학교 5학년으로 기억하는데, 마을에 있던 밤나무 옆 분뇨통에 빠져 있는 죽은 사람을 보았어요. 인민군이 몰려오자 동네 청년 몇몇이 완장을 차고 돌아다녔는데 사람을 죽인 것도 그들이 한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됐죠.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뒤 수복이 되어 유엔군이 들어오자 완장 찬 사람들이 반대로 바뀌더라고요. 이념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내 그림에는 절대 이념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화가의 길을 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어린 시절부터 그림 잘 그린다는 칭찬을 받았어요. 사범학교를 다녔는데 미술선생님이 미술대를 가라고 권하셨죠. 부모님이 반대하셨지만 서울로 올라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서울대 시험을 봤어요. -대학시절에 국전에 특선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는 국전이 화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등단 통로였지요. 맞아요. 그래서 기성작가들이 몰렸어요. 대학생은 출품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학 3학년 되던 해에 자격이 확대되어 출품했는데 특선을 한거예요. 갑자기 유명해졌지요.(웃음) -국전 특선으로 화단의 주목을 받게 되셨는데, 그즈음 왜 반국전 운동을 시작하셨습니까. 교수님도 특선에 머물면 안 된다며 계속 출품하라고 강권하셨는데, 국전의 권위와 잘못된 질서가 저함심을 갖게 했어요. 당시 홍익대 미대가 막 문을 열었었는데 그 덕분에(?) 미술계에 두 개의 파벌이 생겼어요. 심사를 어느 쪽이 맡느냐에 따라 심사결과도 한쪽으로 쏠리는 겁니다. 수상의 등급에 따라 그림과 작가의 서열이 정해진다는 것도 너무 싫었고요. 그래서 만든 것이 60년 미술가협회입니다. 홍익대와 서울대 졸업생들을 규합해서 반국전 운동에 나선 것이죠. 시청 앞 돌 다방에 모여 선언서를 만들고 덕수궁 담에 전시를 했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야외전시였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때 국전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던 선생님들이 대부분 오신 거예요. 어찌 보면 자신들을 향한 반발과 저항이었는데 오히려 격려하고 새로운 흐름을 지지해주신겁니다. -힘이 낫겠습니다. 화단의 주목을 받게 되면서 우리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자성이 일었어요. 정작 그림이 퇴행하고 있다는 반성이었죠. 그래서 스스로 해산하자 했어요. 당시 현대미협이란 단체가 있었는데 우리 윗세대 화가들이 참여하는 진보적인 그룹이었어요. 세계적인 현대미술 흐름을 들여다보면서 앞서가는 작업을 하던 분들이었는데, 저희와 지향이 맞아 악튀엘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국전 특선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어떻게 보면 화가로서의 본격적인 등단은 벽전이나 악튀엘전이라고 봐야할 것 같군요. 맞습니다. 한국 추상미술을 일으키는데 이 두 단체의 역할이 적지 않았거든요. 우리 미술사에서도 꽤 의미 있는 운동이었습니다. -교수님의 판화 작업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60년대 중반 즈음입니다. 63년 5인 판화전을 처음 가진 이후 국제비엔날레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국제성을 깨닫게 된 것도 그즈음인데 당시 한국에서는 판화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던 때예요. 인구도 아주 미미했고요. 다양한 기법을 섭렵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죠. -판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하실 기회가 있었습니까. 이화여고에 있을 때 판화가협회를 만들었어요. 68년이죠. 당시 해외 명작을 볼 수 있는 기회가 거의 판화를 통해 이루어졌어요. 그래서 판화를 시작했는데, 기법이 실크스크린에만 거의 의존할 수 밖에 없었죠. 자연히 다양한 기법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는 욕심을 갖고 있었는데 기회가 찾아왔어요. 록펠러 재단 지원으로 뉴욕 프랫 그래픽센터에서 판화를 공부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에칭(동판화) 리도(석판화) 기법을 모두 섭렵해 한국에 돌아와서는 판화를 대중화하는데 나설 수 있었어요. -대학에 판화과가 생기고 국제공모전도 만들어진 것도 교수님의 판화운동이 큰 역할을 했겠습니다. 69년에 이화여고를 그만두고 서울대 판화교수로 자리를 옮기면서 더 열심히 판화운동을 했어요. 돌아보면 그즈음 판화가 전성기를 맞았던 것 같아요. 70년 국제동아판화비엔날레를 만든 것도 판화 발전에 큰 힘이 되었고요. 아쉽게도 중간에 문을 닫았지만 동아판화비엔날레 덕분에 중국이나 일본의 판화가들과 교류하면서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갖게 되었죠. -국제공모전은 그 뒤 이어지지 않았습니까. 동아는 그렇게 끝나버리고 그 뒤에 공간사를 운영하던 건축가 김수근씨에게 미니어처 판화비엔날레를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캐치플레이스를 내세웠죠. 10센티의 소품이 중심이 되는 형식이었는데 텐바이텐의 판화를 공모한 겁니다. 그렇게 시작을 했는데 세계 각국에서 응모작이 몰려왔어요. 간편하게 참여할 수 있었으니까요. 공간사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도 그 덕분이었습니다.(웃음) 작은 것에 주목했던 80년대였어요. 그 이후 미니어처 판화전이 열리기 시작하더군요. 지금 판화의 위상을 들여다보면 오랜 시간을 낭비한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우리 화단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 우리 화단이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었다는 자긍심도 갖게 됩니다. -화제를 좀 바꾸겠습니다. 교수님은 전통을 작가들이 외면해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꼽으시던데요. 이즈음의 환경은 어떻게 보십니까. 안타까운 현실이지요. 창작의 영역에서 전통적인 방법은 귀하게 지켜져야 할 대상입니다. 지나치게 기술적 재료들이나 방식에 의존하면서 전통적인 것의 가치들이 소홀히 다뤄지는 경향이 있어요. 저는 지금도 캔버스에 작업을 합니다. 물론 한지나 다른 재료도 활용하지만 기본은 늘 캔버스예요. 그런데 그 캔버스를 구하기 쉽지 않습니다. 요즘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지 않기 때문이에요. -작년 가나아트에서 열린 회고전도 그렇고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에 소개됐던 작품들이 화단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전통적인 방식을 외면했던 젊은 세대들에게도 자극이 되지 않았을까요. 디지털과 미디어에 지나치게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 그림을 그리는 것의 의미, 그 과정의 가치를 전할 수 있었다면 좋겠어요. 시간이 나면 여행을 떠나는데 세계의 변화하는 환경을 보고 오면 우리만의 독창성에 대해 더 강한 의지를 갖게 됩니다. 요즈음은 그림을 너무 손쉽게 그리는 것 같아요. 이른바 현대를 디지털 노마드 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 해도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몽고의 유목민들이 사막을 헤치고 남쪽으로 내려온 것은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서였거든요. 현대의 디지털 노마드도 그런 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은 전통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요즈음 새롭게 시작하신 작업에 빗자루가 등장했던데요. 아주 재미있는 작업이에요.(웃음) 쓸림의 형태가 매우 흥미롭지요. 화폭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표현해나가는 과정이 새로운 즐거움을 줍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나고 발견하시는군요. 그러한 형식에 궁극적으로 무엇을 담고 싶으신지요. 나는 전부터 구체적인 형상이 아닌 추상의 세계를 담아 왔어요. 산속에 부는 바람소리를 그리고 싶고 바람을 타고 흐르는 향기를 그리고 싶었죠. 자연의 본질을 탐구하는 과정이랄 수 있습니다. -사고의 폭을 넓혀야만 그런 대상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젊은 세대들에게는 쉽지 않은 과제일 것 같습니다. 미술 환경의 변화도 그렇고요. 지금은 비엔날레가 아니고 옥션과 아트페어의 시대죠. 미술시장의 경계가 정해져 있긴 하지만 지나치게 돈을 목적으로 하는 것들이죠. 민낯으로 드러나는 것만이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저는 이런 환경을 현대미술의 정점이자 최고의 약점으로 봅니다. 그래서 크리에이티브란 것은 무엇인가를 더 고민하게 됩니다. -교수님에게 그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림은 예나 지금이나 내 정신의 흔적이에요. 실재하거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것이 삶과 자연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양인들은 장점이 있어요. 서양 사람은 개구리를 보면 잡아다가 해부부터 하지만 우리는 연잎을 생각하거든요. 단순한 비교지만 그런 정신성이 우리가 지켜야할 가치입니다. 윤 교수가 인터뷰 말미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얼마 전 그의 작업실을 찾은 시카고 대학의 큐레이터가 그가 새롭게 만난 작업 도구인 빗자루를 가져가겠다고 했단다. 그가 관심을 보인 이유를 생각해보니 빗자루가 그들에게는 특별한, 우리만의 도구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우리가 생각하고 지향해야 할 것은 독창성입니다.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물론 그것을 지키고 또한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떤 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신성으로 지킬 수 있어요. 예술은 방법론에 빠지면 끝납니다. 원로화가가 젊은 세대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다는 이야기다. ● 윤명로 교수는 - 한국 판화 성장시키고 대중화한 추상미술의 대가 윤명로 교수는 1936년 정읍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함경북도 길주로 이사를 갔지만 해방이 되어 남북이 갈라지자 아버지는 가족들을 이끌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전주의 동산동(당시는 완주군 조촌면)에 정착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조촌초등학교와 전주사범병설중학교를 거쳐 전주사범을 졸업할 때까지 살았던 동산동은 그에게 고향이 되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 6.25가 터졌다. 이웃끼리 적이 되어 죽이고 죽음을 당했던 동족상잔의 비극 현장은 그의 삶과 정신을 큰 힘으로 지배하며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그림 잘 그리는 그를 자랑으로 여겼던 담임선생님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담임선생님의 칭찬덕분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줄곧 미술반장을 도맡아 할 정도로 그림에 빠져있었던 그는 취직이 보장되어 있던 사범학교를 졸업했지만 취업 대신 미술대 진학으로 길을 바꾸었다. 서울대 회화과에 입학한 그는 대학 3학년 때 서양화를 전공으로 택했다. 같은 해 국전에서 특선을 수상하면서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스승은 당시 화가들의 유일한 등용문이었던 국전에 지속적으로 출품할 것을 권했으나 국전의 수상 등급에 따라 작품과 작가를 서열화하는 화단 풍토에 저항심이 생겼다. 1960년 같은 생각을 가진 동료들과 반국전운동을 내세운 미술가협회를 만들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해 덕수궁 담벼락에 작품을 걸어 전시했던 60년미술가협회 창립전은 화단의 굳건한 권위와 질서에 문제를 제기하는 젊은 세대의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우리의 전통적인 정신을 담아내는 형식을 고민해온 그는 그즈음 판화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국제전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도 판화비엔날레가 계기가 되었다. 63년 제 3회 파리비엔날레에 참여하면서 국제성에 눈을 뜨게 됐다. 올해 50주년을 맞는 한국현대판화가협회를 68년에 창립했다. 1970년 미국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아 유학을 떠났다. 1년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판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뉴욕 프랫 그래픽센터에서 판화를 전공한 그는 한국 판화의 오늘을 있게 한 선구자가 되었다. 회화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며 늘 새롭고 다양한 형식을 만나온 그는 여백으로부터 형태와 색을 찾아내는 자신만의 독창적 세계로 국제 화단이 주목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가 됐다. 장욱진 김환기 백남준 유영국 등 당대의 화가들과 교류하며 한국 미술의 오늘을 이끌어온 그는 제 7회 서울 국제판화비엔날레 대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보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으며 2000년대 이후부터는 거의 한해도 거르지 않고 개인전을 열어왔다.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 <정신의 흔적>과 2017년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회고전 <그때와 지금>은 개인적 삶의 궤적으로서 뿐 아니라 한국 현대추상화의 단면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전시로 화제를 모았다. 국립현대미술관, 런던 대영박물관, 덴마크 헤어닝 현대미술관, 미국 오하이오 신시네티미술관, 일본 도쿄예술대학, 베이징 중국미술관, 리움 삼성미술관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서울대 미대학장을 역임했으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지난 1월 30일 제 4기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출범했다. 위원회의 공식적인 심의활동이 중단된 지 8개월만이다. 심의위원회는 방송과 인터넷의 내용 규제 전반을 담당하는 공정성 규제 기구다. 방송 내용의 공공성과 공정성을 유지하고 보장하는 활동이 목적이니 실질적으로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그럼에도 이 위원회는 짧지 않은 기간 활동을 멈춰야했다. 대통령이 추천한 3명, 국회의장이 국회 각 교섭단체 대표위원과 협의해 추천한 3명, 국회 방송통신특별위원회가 추천한 3명 등 9명으로 구성되는 심의위원회 구성이 늦어졌기 때문이다. 방송심의 활동이 중단되면서 심의 안건은 눈덩이 불어나듯이 누적되었다. 4기 위원회가 위촉식 직후 곧바로 누적된 방송 심의 업무 처리에 들어간 것도 이 때문이다. 4기 위원회는 이전 구성과 달리 나이와 성별 폭이 넓어졌다. 아홉 명 모두 50대 이상의 남성위원으로 구성되었던 3기에 비하면 큰 변화다. 눈길을 끄는 변화가 또 있다. 부위원장으로 선임된 허미숙 위원(65)이다. 김제가 고향인 허부위원장은 80년대 CBS 언론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 지켜온 주역이다. PD로 시작해 기자, 편성국장, TV본부장을 두루 거치면서 시대를 읽고 호흡하는 방송의 역할을 지켜온 그의 삶은 굴곡진 CBS방송의 역사와 온전히 함께 있다. 상임직 부위원장인 그의 역할이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를 만났다. 새로운 일을 만나 변화된 일상도 궁금했거니와 대한민국 방송 현실을 통해 저널리즘이 지켜야할 가치를 듣고 싶어서였다. 서울시 양천구 목동 방송타운 빌딩에 있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그의 사무실 책상위에는 심의를 기다리는 문서들이 쌓여있었다. 그 분량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위원회 활동이 너무 오랫동안 멈춰있었던 것 같습니다. 방송과 광고소위에 상정된 것만도 461건이나 된다고 들었습니다. 작년 6월 12일에 3기위원회가 이임식을 했어요. 공백이 없으려면 6월 13일에 취임식이 있었어야죠. 그런데 해를 넘겨 1월 30일 취임을 했으니 8개월이나 중단되었던 셈이예요. 심의가 시급한 안건이 너무 많아 위촉식 마치고 한 시간 후에 첫 번째 심의를 시작했어요. 원래는 일주일에 한번 심의를 하게 되는데 지금은 두 번으로 늘려 심의하고 있습니다. 심의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은데, 듣기로는 직원들이 4기 취임 이후 저녁약속을 다 취소했다고 하더군요. 어쨌든 누적 안건을 조금이라도 앞당겨 처리하는 것이 당장 해결해야할 과제입니다. -심의할 안건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공공공정성이 제기되는 방송 광고물이 많다는 것일 텐데요. 방송이 지나치게 상업화되면서 지금은 우려되는 수준 그 이상이 아닌가 싶어요. 심의위의 역할은 방송의 공정성과 공공성을 지켜내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일인데, 그 기준을 벗어나는 대상이 늘고 있다는 것은 방송환경이 그만큼 위기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 아니겠어요. -이러한 위기를 심의위의 규제만으로 극복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물론이지요. 저는 그 힘을 시청자들이 갖고 있다고 봅니다. 이탈리아의 굴리엘모 마르코니가 라디오송출을 처음으로 성공한 것이 1895년, 서울 경성방송이 개국한 것이 1927년입니다. 90년이나 지났죠. 그때는 라디오로 새로운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겠지만 지금은 환경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방송을 송출하는 사람과 이용하는 사람들 사이가 더 이상 일방적이지 않지요. 언제든 비판받고 반론을 들어야 합니다. 정보를 독점한 사람도 없고요. 누구나 스마트폰을 이용해 손쉽게 영상을 만들고 소비하고 비판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일방적인 소통이 아니라 상호 이해에 바탕을 둔 관계가 중요해진 것이죠. 저는 이미 시청자주권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산업으로서의 방송 환경 변화는 어떻게 보십니까. TV에 인터넷이 연결되면서 시청자들은 더 이상 방송 채널에 얽매일 필요가 없게 됐고, 아무 때나 원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콘텐트 업체가 각광 받고 있습니다. 음악이 더 이상 LP레코드나 CD를 거치지 않고 온라인으로 소비되듯이, TV 콘텐츠도 방송국 없이 소비자에게 직접 전달되는 시대예요. 미디어 종사자들의 품격과 수준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진 시점이지요. -공영방송의 역할과 기능도 그만큼 더 절박해진 셈인데요. 물서구의 공영방송은 공정성 문제에서 벗어나 무한미디어 경쟁 상황에서의 공영방송 역할을 고민 중입니다. 그런데 우리 공영방송들은 지난 10년 동안 공정성과 공공성이 참혹하게 무너지는 역주행을 겪었어요. 촛불혁명을 기점으로 높아진 방송환경의 변화 욕구가 그 상황을 반증합니다. 공영방송들의 리더십 교체가 숨 가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망가진 방송환경의 복원이 이미 변화한 미디어 환경에 맞게 보다 발전된 형태로 이뤄질 것인지는 지켜보아야할 것 같습니다. -아까 시청자의 힘을 주목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방송환경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시청자들이니까요. 이번 KBS의 사장 선출에 40%의 선택권을 행사하는 시민자문단도 사실은 시청자의 다른 이름이지요. 이런 저런 변화를 보면 지금 우리는 미디어 소통방식의 대 변혁기를 통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역할이 더 중요해질 것 같습니다. 물론이죠. 방송통신심의위는 정기적으로 허가 또는 승인을 받는 전국의 340개 방송사의 프로그램과 광고가 적법하게 송출되었는지를 사후심의 합니다. 방송법 준수 여부와 사회질서 유지, 개인의 기본권 보호가 심의기준이지요. 특히 이번 4기 위원회의 경우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의 기본권에 시선을 맞추고 언론의 인권감수성을 높이도록 촉구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통신에서는 마약판매와 사행성 오락, 불법정보, 국가전복을 목적으로 한 통신회합 그런 내용을 담은 사이트를 찾아서 차단합니다. 청소년에게 해로운 선정적이고 잔혹한 영상을 삭제하고, 청소년유해정보를 목록화하는 작업도 담당하고요. 최근에는 이용자 권익보호와 관련해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사건에 대한 분쟁조정업무도 시작했습니다. 심의위 조직도 시청자중심이용자중심 조직으로 대규모 개편을 준비 중이예요. -오랫동안 방송제작 현장을 지켜오셨는데, 이제는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방송 심의에 걸려 불려온 적도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정치가 언론을 폭압하던 80년대에는 저도 의견진술자 자리에 여러 번 앉았습니다. 30년이 지나 진술을 듣는 방송심의소위원회 위원장 자리에 앉으니 여러 가지 마음이 교차하더군요.(웃음) 입장은 서로 바뀌었지만 방송의 공정성 심의에 있어서의 불편부당과 사회적 약자에 주목하는 시선은 맥락이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심의위원이 갖춰야 할 방송의 가치관이 매우 중요할 것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덕목은 정파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방통심의위 위원 9인은 대통령이 위촉하는 자리로 법적 지위와 역할이 정해져 있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집니다. 문제는 여당 몫, 야당 몫의 위원자리가 6대 3의 구조로 대통령과 국회의장, 국회 과학기술방송위원회에서 각 3인을 추천하고 대통령이 위촉하는 제도로부터 오는 정파성이예요. 이런 구성은 정부로부터의 직접적인 간섭을 최소화 하라는 사회적 합의가 법제화된 결과지만, 지난 10년 동안 청와대를 필두로 여당과 야당이 첨예하게 대치한 채 갈등을 빚어온 게 사실입니다. -4기 위원회가 8개월 동안 표류한 것도 실제로는 정치권의 갈등 때문이었죠. 태생적 한계가 있으니 쉽지는 않겠으나 정파성을 벗어나는 일이 무엇보다도 절실하겠습니다. 그래서 4기 심의위원들은 그 어느 때보다 공정성, 객관성, 독립성을 바탕으로 한 합의제 정신을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위원회 출범 이후 방송소위에 상정된 모든 안건이 프로그램에 대한 법정제재까지도 매 회 전원합의로 의결되는 기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방심위의 궁극적인 목표가 궁금해집니다. 명실상부한 표현의 자유 보호기관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입니다. 방송의 공정성 훼손에는 제재를 가하지만, 제작과 취재의 자율성은 훼손되지 않도록 보장돼야 하고요, 더불어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를 포함한 시청자 권익보호를 위해서도 노력해야죠. -그 목표를 위해 심의위원들이 지켜야할 가치는 무엇일까요.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합의제 정신입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헌법재판소와 유사한 합의제 기구입니다. 심의위원은 공정하고 객관적이며 독립적으로 모든 사안을 판단해서 결정해야 합니다. 심의위원이 정파적이거나 특정한 이익에 좌우되면 그때부터 우리사회는 정의로울 수 없게 되죠. -화제를 잠깐 돌려보겠습니다. 부위원장님은 현업에서 일할 때 방송 민주화를 가장 큰 과제로 삼았었는데요. 인생의 변곡점이 그만큼 적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고난과 맞닥뜨렸을 때 스스로를 지켰던 가치가 궁금합니다. 시간의 질량에 대한 인식과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관계에서 형성되는 에너지와 기쁨은 평생 놓치고 싶지 않은 선물 같은 것이니까요. -방송에 오랫동안 몸담았던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겠지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가장 바람직한 방향이 무엇일지 끊임없이 고민하자는 것입니다. 가치도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니까요. 변화하는 가치에 맞는 새 규칙과 삶의 스타일을 만들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잊지 말아야할 것은 방향입니다. 가령 낡은 전통을 단절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속도를 낸다고 해서 그 시대가 빨리 다가오지는 않죠. 오히려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와 그 방향을 향하기 위해서 필요한 가장 적절한 속도를 찾자는 것입니다. 두 시간 남짓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는 오랫동안 고민해온 심의위원회의 역할을 명쾌하게 정리했다. 심의위원은 미디어가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서 전통과 윤리를 지키는 마지막 문지기 같은 존재들입니다. 심의위원을 하수종말처리를 담당하는 청소부에 비유하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심의위원들은 하수라도 청정해역에 내보낼 수 있도록 수질을 향상시키는 일을 담당해야한다는 그가 여러 번 강조한 대목이 있다. 정파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 그것은 곧 부위원장으로서 그가 경계하고 지켜내야 할 의무 같은 것이다. 인터뷰 말미 그가 말했다. 만일 마지막 문지기가 정파적이고 편향적이며 특정 정치세력의 대리인 노릇만 한다면 우리의 방송 환경은 어떤 지경에 처할까요. 아마 쓰레기와 오폐수가 넘쳐나는 최악의 방송 상황을 맞겠지요. ● 허미숙 부위원장은 - 독재정권 하 검열의 시절, CBS 민주화 지켜온 산증인 허미숙 부위원장은 1952년 김제시 금산면 용산리에서 태어났다. 종가의 장손으로 중국문학에 심취했던 아버지(허 환)는 한학자였다. 평생 직업을 갖지 않았지만 물려받은 재산으로 1남 4녀를 키웠던 아버지는 늦둥이로 낳은 딸을 엄하게 가르쳤다. 덕분에 종아리 맞으며 한문을 배웠던 시절이 아직도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삶의 변곡점마다 중요한 깨달음과 지혜의 길을 찾게 해주었던 통로가 어린 시절 배웠던 한학 덕분이었으니, 인생의 가장 귀한 선물을 남겨준 아버지의 엄한 가르침을 그는 감사해한다. 언니들과 오빠는 그가 성장하는 동안 실질적인 보호자가 되어 주었지만 일찍부터 독립적인 삶을 받아들여야했다. 원평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전주로 나와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환경은 그의 의지와 관계없이 수시로 바뀌었다. 특별한 의지 없이 중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입학 자격을 얻고, 기전여고에 문예장학생으로 들어가 전주대 국문과를 입학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작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원하던 대학에 가지 못한 상실감을 이겨내고 싶었다. 대학 3학년 때 시내버스 안에서 우연히 보게 된 CBS(이리방송)의 PD 채용 공고가 그의 삶을 바꾸었다. 중고등학교시절부터 문학적 재질을 인정받았던 그의 답안지는 당시 채점위원이었던 소설가 홍석영씨(원광대 교수)가 그의 글 실력을 두고두고 칭찬할 정도로 빼어났다. 1975년 방송 PD가 됐다. 가벼운 음악방송으로 시작한 그의 프로그램은 점차 저널리즘의 특성을 담아내는 시사성 프로그램으로 확장되었다. 78년부터 80년까지 직접 제작하고 진행까지 도맡아 했던 <안녕하세요 허미숙입니다>가 그 시작이었다. 독재정권의 탄압이 엄혹했던 검열의 시대, 80년 언론통폐합으로 CBS는 뉴스 보도 기능을 빼앗겼다. 시대를 읽지 못하고 함께 호흡하지 못하는 현실은 자존감을 무너뜨렸다. 83년, CBS는 뉴스를 뺏겼다는 1분짜리 스파트를 시작으로 <방송사설> 등 뉴스의 기능을 대신 할 수 있는 논평프로그램 등을 만들어냈다. 익산(당시 이리방송)에서 뉴스 회복 운동이 시작되자 서울 본사도 나섰다. 방송위원회에 불려 다니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부터였다. 뉴스 기능을 회복시키는 일은 방송 PD로서 그가 해내야하는 가장 절실한 의무였다. 본사 편성국 차장으로 자리를 옮긴 87년, 동료들과 의기투합해 다섯 시간짜리 생방송 우리는 CBS 뉴스를 듣고 싶습니다를 만들었다. 그 직후 CBS는 뉴스 기능을 회복했다. 그러나 후유증이 컸다. 당시 CBS 뉴스 기능 정상화 운동에 나섰던 주동자(?)들을 해고하라는 압력을 받은 경영진이 중심에 섰던 사람들을 지방으로 뿔뿔이 헤쳐 놓으면서 그는 다시 이리방송으로 돌아왔다. 이후 광주방송 보도국장과 뉴욕특파원을 거쳐 92년 대선을 앞두고 본사로 복귀한 그는 제작 1부장으로 있으면서 시사토론의 절정을 달리는(?) 프로그램들을 제작해냈다. <월요특집> <시사자키> <통일로 가는 길>등이 그가 만들어낸 CBS의 대표적인 시사프로그램이다. CBS의 민주화를 이끌어내고 지켜온 방송인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그는 그 덕분에 험지로 내몰리는 상황에 번번이 처했지만 경남방송(마산)과 전남방송(순천)을 설립해내는 강단(?)을 발휘했다. 본사 편성국장과 TV본부장을 거쳐 2009년, CBS전북방송 본부장을 끝으로 CBS를 퇴직했으며 2012년 C채널 대표이사 사장으로 자리를 옮겨 IP TV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내고 싶었으나 희망이 보이지 않는 구조적 한계를 절감하고 자유인이 됐다. 3년 동안 스스로에게 준 안식년을 마치고 2018년 1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부위원장에 위촉되면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차고 넘치는 재담과 타고난 목, 지칠 줄 모르는 소리 공력으로 우리시대의 판소리를 이끌었던 소리꾼, 자신만의 독특한 소리를 만들어냈던 명창이 있었다. 70여년 공력을 소리에만 들이고도 정작 득음은 언감생심이라며 하루도 소리를 입에 붙이지 않고는 살 수 없고 다시 태어나도 소리를 하겠다고 했던 명창. 2003년 작고한 박동진 명창이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15년, 아직 소리판은 그를 그리워하지만 그 뒤를 잇고 있는 소리꾼들의 대열이 그리 미약하지는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판소리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한국의 오래된 유산 판소리는 세계가 주목하는 유산이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판소리는 어디쯤 와있을까.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전통판소리와 판소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형식의 무대들은 대중들과 가까워졌을까. 오늘의 판소리 무대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왕기석 명창(55, 정읍시립국악단 단장)을 만났다. 크고 작은 창극 무대를 아우르며 자신의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청중들을 기꺼이 찾아가는 우리 시대의 광대. 다른 사람보다 늦게 시작한 소리공부의 부족함을 타고난 재능에만 기대지 않고 노력으로 채워 끝내 오늘의 소리판을 대표하는 명창으로 우뚝 선 그의 길을 들여다보면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열여덟 살에 연수단원으로 들어가 30여 년 동안 몸담았던 국립창극단을 떠나온 것이 2013년. 그는 이제 고향인 정읍과 전주를 중심으로 판소리 대중화를 이어내는 통로를 다양한 형식으로 실현해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판소리가 여전히 공간에 갇혀 있고 대중들의 일상에 놓이는 음악이 되기에는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판소리를 우리 시대의 음악으로 들여놓기 위해 누구보다도 깊게 고민하고 있는 그는 3시간 가깝게 이어진 인터뷰 동안 현실적 한계에 때로 좌절하고 때로 울분을 터뜨렸으나 결국 들려준 이야기는 판소리가 지닌 가치와 힘, 그래서 포기할 수 없다는 희망과 가능성이었다. -지난 연말 바쁘셨더군요. 왕기철 명창과 창극퍼레이드까지 진행하셨던데요. 해마다 연말이면 공연이 이어지는데 작년에는 특별히 기획된 공연도 많았고 개인적인 일까지 더해져 분주했었습니다. -정읍시립국악단에 오신 후로 자체 제작 무대도 그렇지만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창극 작품 출연도 눈에 띄게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에너지 넘치는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소리꾼으로 무대에 서는 일 못지않게 창작과 제작에까지 나서는 상황이니 앞으로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웃음) 개인적으로 버거운 일정이 되기도 하지만 내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자리는 가능하면 가려고 합니다. 그렇다보니 아무래도 바빠질 수 없게 되지요. -소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집안 내력이 있나요. 부모님은 예술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다만 아버님이 농한기에 사람들이 사랑방에 모여 있으면 책을 읽으며 들려주시고 소리도 한 대목씩 하셨는데 그 소리가 구수했답니다. 그리고 작은 아버지는 상여소리를 아주 잘하셔서 동네에서 선소리꾼을 도맡아 하셨답니다. -재능은 유전적으로 타고 나셨군요. 소리는 셋째 형님(왕기창)이 먼저 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형님 덕분에 저와 바로 윗 형인 왕기철 명창이 그 길을 가게 되었어요. 기창 형님이 가족들보다 먼저 서울로 갔는데 박초월 선생님 밑에서 공부를 했거든요. 먹고 살기 힘든 시절에 형님은 라면 하나를 쪼개어 끼니를 떼우며 소리를 배우러 다니셨어요. -그렇게 지난한 길을 어쩌다가 함께 가시게 되었습니까. 가족이 모두 서울로 이사를 갔는데 생계가 막막했어요. 열네 살 즈음부터 온갖 일을 다 했지요. 그러다 국립창극단 단원이 된 형님을 만나러 갔는데 거기서 남해성 선생님 권유로 소리를 하게 되었어요. 단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는데 종종 들었던 형님 소리를 흉내 내 불렀지요. 선생님이 형님께 목이 좋으니 소리를 시켜보라고 하셔서 바로 연수단원이 되었습니다. 그때가 열여덟 살, 소리길이 제 운명이 되었지요. -형님이 국립창극단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가족들의 생계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형제가 그 길을 가는 것에 반대하지 않으셨나요. 아주 심하게 반대하셨어요. 바로 윗 형이 왕기철 명창인데 그 형을 기창형님이 먼저 서울로 끌어들여 박귀희 선생님 제자로 넣었거든요. 이미 두 형제가 소리를 하는 판에 저까지 나섰으니...... -늦게 소리길에 들어섰으나 국립창극단 창극 작품에 대부분 주역을 맡으셨던데요. 타고난 재능도 그렇지만 대단한 노력이 더해졌을 것 같습니다. 첫 작품은 어땠습니까. 당시 남자 단원들이 부족했어요. 덕분에 제가 일찍부터 주역을 맡을 수 있었죠.(웃음) 첫 주역으로 선 작품이 86 아시안게임문화예술축전 작품으로 제작했던 용마골 장사 인데 저로서는 잊을 수 없는 작품입니다. -첫 작품 말고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천명도 그렇고 좋은 작품이 많죠. 그러나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작품은 첫 작품입니다. 허규 극장장님이 연출 하셨는데 본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재공연할 때 제가 연습시간에 늦었어요. 하루아침에 역할을 박탈당하고 무대 뒤에서 심부름을 해야 했어요. 며칠 지켜보시던 허규 선생님께서 내가 당장 자를 수도 있지만 네 장래를 봐서 자르지는 않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부끄럽고 자괴감이 들어 사표를 써서 일주일 이상 가지고 다녔습니다. -어찌됐건 복귀는 했겠군요. 저 때문에 속상해하시는 선생님들이 많았어요. 선생님들이 저렇게 가슴 아파하시는데 덜컥 그만둔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열심히 심부름을 했죠. 다행히 88년 서울 올림픽 문화예술 축전 때 춘향전을 공연했는데 그때 허규 선생님이 다시 기회를 주셨어요. 돌이켜보면 정말 감사한 일이죠. 늦게 소리를 시작했지만 어린나이에 주인공을 맡아 혹시 건방져질까 싶으니 한번 꺾어주신 것이 아닌가 싶었어요. 그 이후부터는 비교적 순탄하게 길을 걸어 왔습니다. -창극단에서 형님과 함께 활동했다는 것도 특별한 경우 아닌가요. 좋은 일이지만 제게는 큰 아픔이기도 했습니다. 가장 먼저 소리를 시작한 형님이 아픔을 겪게 되었거든요. 당시 창극단 오디션은 대단했습니다. 열 몇 명씩 탈락하는 일도 있었는데 어느 해인가 형님이 오디션에서 탈락하신 거예요. 통보를 받고 제가 형님을 모시고 가는데 버스 정류장에서 털썩 주저앉으시더라고요. 그때 나는 형님 덕분에 소리를 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보면 동생들에게 치어 빛도 못보고 이런 일을 당하는가 싶어 죄송하고 만감이 교차했어요. 형님은 이후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먹고 살아야 하니 도배일 미장일까지 했지요. 다시 복귀는 했지만 또 시련을 겪으셨는데, 이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50대 초반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나셨죠. -듣다보니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소리를 늦게 시작하셨고 정통 판소리가 아닌 창극 소리를 먼저 시작한 셈인데, 그 과정에서 혹시 갈등이나 개인적인 고민을 없었습니까. 왜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창극단에 먼저 들어갔으니 창극을 위주로 하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정통 소리를 공부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주위에서는 왕기석 소리는 정통 소리가 아니라 창극 소리라는 얘기가 있었어요. 그 편견을 벗고 싶어 더 열심히 소리 공부를 했어요.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 당시 허규 극장장님이 당대의 명창들인 정권진 박봉술 정광수 강도근 성우향 오정숙 선생님을 모셔다 단원들을 대상으로 판소리 다섯 바탕을 가르쳤어요. 그런데 단원들 중에는 스승의 유파가 아니라는 이유로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요. 다행히 저희 선생님은 여러 계보의 소리를 배우라고 권하셔서 다양한 소리를 섭렵할 수 있었어요. 저에게는 엄청난 소리가 되었죠. 돌이켜보면 제가 그나마 지금 이 소리로 버틸 수 있는 것은 그때 그 선생님들에게 배웠던 소리 덕분이에요. -전주대사습 도전도 창극소리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습니까. 그 이유가 컸습니다. 창극소리만 잘하는 소리꾼이란 편견도 벗고 싶었지만 정통 판소리는 궁극적으로 제가 온전히 감당해야할 과제였으니까요. -완창은 언제부터 시작하셨습니까. 거의 2년에 한번 꼴로 완창회를 갖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1994년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수궁가완창을 처음 했어요. 지금까지 적벽가와 심청가까지 세 바탕을 완창했습니다. 세 바탕의 제가 다 다르죠. 사실 다섯 바탕을 다 배우긴 했는데 아직 완창에는 자신이 없습니다. 기회가 되면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완창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완창은 판소리가 사라져가는 시점에서 박동진 선생님이 시도하셨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판소리사가 새롭게 쓰인 셈이죠. 완창은 엄청난 시간을 쏟아야만 가능한 대상이지만 꼭 해내야 하는 과정이기도 해서 소리하는 사람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제가 생각하는 완창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완창을 위한 완창이라면 그 굴레에 매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죠. 결국 중요한 것은 완창을 할 수 있는 능력이거든요. 그 능력을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와 싸우고 어려움을 극복해내는 노력과 그 노력이 이어내는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소리의 공력을 갖추지 못했는데도 완창 그 자체에 의미를 두는 풍토는 바뀌어야겠군요. 소리는 평생을 해야 하는 길입니다. 죽을 때까지 공부해도 소리다운 소리를 못하고 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득음? 그것은 정말 함부로 불러서도 안 될 신성한 영역입니다. 득음은 신이 소리꾼에게 주는 가장 값진 선물이에요. 소리는 어떤 자세 어느 만큼의 노력으로 공부하느냐는 과정이 훨씬 중요합니다. 완창, 그 자체에만 의미를 두는 것은 잘못된 일이지요. -판소리가 대중화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하셨는데 가장 큰 과제가 무엇인가요. 현실적으로 벽이 너무 높습니다. 국악의 많은 부분이 시대와 소통하면서 동시대의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유독 판소리는 과거의 전통을 앞세워 다섯 바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거든요. 제가 생각하는 모든 음악은 그 시대에 맞는 음악이 되어야 합니다. 옛것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법고 창신, 옛것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음악도 필요합니다. 기악만 해도 그 굴레를 많이 벗었는데 판소리는 여전히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시대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판소리의 문제점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창작판소리가 많이 만들어지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창작판소리는 판소리의 본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가치를 살려내는 그릇입니다. 전통 판소리 다섯 바탕도 따지고 보면 그 시대를 담은 것이거든요. 그렇다면 우리시대에는 우리시대의 이야기를 담는 음악이 만들어져야 당연하죠. 형식도 그렇고요. 판소리가 누구나 불러보고 싶고 감동하는 그런 음악이 된다면 대중화는 자연스럽게 이루지지 않겠습니까. 우리 시대의 광대는 우리시대의 이야기를 담아야지요. 그가 지난 연말 대한민국예술원상 시상식 이야기를 들려줬다. 소설가 조정래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노력을 이기는 재능은 없다 고. 제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타고 났어도 노력을 이길 수는 없다는 말씀인데, 저에게는 그러니 죽을 때까지 소리다운 소리를 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인터뷰 말미, 그에게 판소리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나에게 판소리는 즐겁게 노는 일이다. 나의 판소리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잘 놀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광대로서의 목표이고 꿈이라고 했다. 그의 노력으로 빚어지는 새로운 판소리가 우리를 잘 놀 수 있게 하는 판으로 불러낼 날이 머지않았다. ●왕기석 명창은 - 완창만 30회 돌파창작 창극판소리 제작 등 영역 확대도 왕기석 명창은 정읍 옹동이 고향이다. 6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세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병으로 잃은 큰 딸을 늘 가슴에 안고 살았던 그의 어머니는 여덟 남매를 키우느라 생계에 쪼들리면서도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교육시키고 싶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열심히 공부해 성공하면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 역시 정규 교육으로는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다. 그가 다니던 초등학교 졸업생 60명 중 두 명이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했는데 그 중 한명이 그였다. 그즈음 그의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했다. 중학교를 가고 싶었지만 당장 먹고사는 일이 힘들었던 가족들 사이에서 그는 어린나이로 노동판에 뛰어 들어야 했다. 열여덟 살 되던 해 소리를 만났다. 가족보다 먼저 서울로 가 국립창극단 단원이 된 셋째 형 기창씨 덕분이었다. 형을 만나러 창극단을 찾아온 그에게 남해성 명창이 너도 소리 한번 해보라고 권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형의 소리를 흉내내보는 것이 전부였는데, 안목 있는 명창은 목이 좋은 그를 창극단 연수단원으로 끌어 들였다. 남해성 명창의 제자가 된 그는 창극단 연수 단원을 거쳐 1983년 창극단 정단원이 되었다. 다른 사람보다 늦게 들어섰지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좋은 소리꾼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된 그는 남자 소리꾼이 부족했던 창극 무대에서 돋보이는 재목으로 성장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문화예술축전 참가작인 용마골 장사를 시작으로 춘향전 심청가 천명 우루왕 서편제 등 150여 편의 창극무대가 그를 주역으로 불렀다. 덕분에 우리 창극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배우가 되었지만 그의 이름은 언제나 창극소리 잘하는 소리꾼으로만 분류되었다. 전주대사습놀이에 도전한 것도 그 때문이었는데 그는 결국 31회 전주대사습이 배출한 명창이 되었다. 창극무대에서만 빛나지 않고 판소리 명창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도 그 이후부터였다. 한해씩 건너가며 이어온 수궁가 적벽가 심청가 완창 무대는 30회를 넘었으며 2004년 독일 함부르크와 베를린에서 가진 다섯 시간 동안의 심청가를 시작으로 이어진 여러 차례의 해외 완창 무대는 한국의 판소리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추계예술대와 중앙대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창작과 제작에도 열정을 쏟아 <어린이창극>의 영역을 확산하고 전통 판소리 다섯 바탕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해내는 작업에 참여해왔으며 논개 백범 김구를 비롯한 창작 창극작품과 전주사투리 녹두장군 비빔밥전을 비롯한 여러 편의 창작판소리를 만들었다. 2014년 전라북도무형문화재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KBS국악대상(2014), 대한민국문화예술상(2017) 등을 수상했다. 2013년 국립창극단을 그만 둔 뒤 고향에 내려와 정읍시립국악단 단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가족창극> <마당창극> 등 다양한 형식의 창극 작품을 개발해 관객들과 만나는 판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직지심체요절은 금속 활자로 인쇄된 책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다. 청주의 흥덕사에서 직지가 인쇄된 것은 1377년, 구텐베르크가 주조 활자에 의한 활판 인쇄에 성공한 것이 1450년이니 금속활자의 발명은 우리나라가 구텐베르크를 훨씬 앞선다. 그러나 인류의 기록문화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을 통해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가 유럽 전역으로 퍼지면서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를 꽃피우는 역사의 대전환을 가져왔던 덕분이다. 인쇄의 역사가 곧 인류 문명의 역사를 만든 셈인데, 안타깝게도 시대는 다시 변했다. 종이와 인쇄술의 발명은 인류 문명을 바꾸어놓았지만 이제는 인터넷의 발달이 종이책의 운명을 위협하고 있다. 책의 존재가 위태로워진 시대, 종이책도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란 예견이 더해졌지만 종이책은 아직 유효한 존재다. 그 위태로운 시간의 끈을 붙잡아 우리에게 사라지거나 잊혀져가는 문명의 흔적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를 일깨워주는 공간이 있다. 완주군 삼례읍 삼례예술문화촌 옛 농협창고를 개조한 공간에 문을 연 책공방북아트센터다. 오래전에 생명을 다한 인쇄기계와 온갖 도구들이 놓인 이 공간은 2001년 책공방공책이란 낯선 이름을 걸고 책 만드는 일을 새로운 삶으로 선택해 달려온 김진섭대표(51)의 꿈과 열정이 이어낸 결실이다. 겨울 한파가 몰려온 지난 주말, 공방에서 김 대표를 만났다. 책공방 안쪽, 공식 사무실이자 그의 작업실은 온갖 책과 물건들이 높낮이를 달리하며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돌아보니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지나칠 수 없게 하는 오래된 물건들이다. 문득 쓸모없게 되어 버렸던 물건들이 그리워졌다. 마음을 읽었을까. 김 대표가 말했다. 여기 있는 대부분의 기계와 도구들은 버려지거나 버려질 뻔했던 것들이에요.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습니다. 물건도 마찬가지예요. 어느 사람에게는 쓸모없는 것도 어느 사람에게는 중요한 물건이 되거든요. 어느 날 그의 마음을 빼앗은 인쇄기계와 도구들도 그랬을 것이다. 책공방을 시작한지 17년째, 우연히 인연이 닿은 이곳 삼례에서 그는 꿈을 이루고 있을까 궁금했다. 이곳에 오면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습니다. 책공방의 일상을 기록하는 일과 책기획자를 양성하는 것이었어요. 5년 동안 무리 없이 잘 진행되고 있는데 덕분에 제 꿈이 더 커졌습니다. 기록의 힘과 가치를 공유하고 확산하는 일을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어요. 다시 시작인 셈이지요. 두 시간 남짓한 인터뷰동안 귀한 인쇄 기계들과 온갖 도구들을 만나면서 그의 외로운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었을까를 짐작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삼례에 책공방 문을 연 것이 2013년이었던가요. 6월에 오픈했으니 5년, 올 연말에 계약기간이 끝나고 다시 재계약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특별한 상황이 없다면 연장되겠죠. -이 곳에 와서 보면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기계들은 어떻게 구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여기 놓인 인쇄 기계들은 우리 선배들이 기름을 쳐가며 지식을 찍어냈던 기계와 도구들입니다. 기술자만 있으면 지금도 모두 작동되는 것들인데, 더 이상 쓰임이 없어져 버려지거나 버려질 뻔 했던 것들이지요. -김 대표님 덕분에 이런 기계들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군요. 우리나라에서 이런 종류의 기계를 모아놓은 곳이 또 있을까요. 개인이 이만큼의 규모로 수집해놓은 예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 분야에 관심을 갖는 분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이런 기계들이 이제는 함부로 사라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죠.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되셨습니까. 제가 첫 책을 낸 것이 1998년인데 계기가 있었어요. 잡지사에 근무할 때 유럽 출장을 갔다가 책 공방을 만나게 됐습니다. 손으로 책을 만드는 장인을 보며 아날로그적인 방식의 가치를 알게 되었어요. 책 만드는 사람들을 장인으로 존중하는 그들의 문화를 접하며 당시 큰 충격을 받았죠. 자신들의 고유한 아이덴티티를 지켜온 전통이 문화의 격을 달리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인쇄업이 사양길에 들어섰을 때였겠군요. 사식이나 청타, 이런 것은 다 지나가고 컴퓨터가 들어오고 매킨토시 초창기 버전이 나와 조판을 시작한 즈음이었죠. 그런 환경이 되니 아날로그적인 기계는 다 사라지는 상황이었어요. 그때 기계를 없애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처음에는 작은 도구들을 수집하는 수준이었는데 2000년 넘어 오면서 큰 기계가 마구 버려지는 현장을 보게 되면서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런데 무작정 수집할 수도 없었던 것이 워낙 기계들이 크잖아요. 기계를 거저 준다고 해도 옮기는 물류비용이나 보관할 공간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분들이 없었습니까. 인식이 부족할 때였으니까요. 기계는 그 기계를 아는 기술자들이 해체를 하거나 조립해야 제대로 옮겨지잖아요. 이런 저런 한계가 많았는데 어떻게든 해보자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방황을 하다 100평 크기의 창고를 얻었어요. 그나마 인쇄 기계들을 모아놓을 수 있게 되었죠. -만약 그때 김 대표님이 나서지 않았다면 지금 세상에 없을 기계가 적지 않겠습니다. 제가 이일을 하면서 확인한 것이 있습니다. 수집을 하다보면 대부분 개발되지 않은 곳에 아직 물건이 있다는 것이에요. 얼마 전에도 뒤쪽 마을에 인쇄소가 있다고 해서 가보았는데 그곳에서만 수십 년 넘게 인쇄업을 하셨더라고요. 사장님이 10대부터 견습공으로 시작해서 일을 해 오셨다는데 개발이 안 되니 그나마 유지하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개발이 되면 당장 오래된 가게나 업종들이 하나같이 문을 닫거나 없어지죠. 개발이 된다해도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상존할 수 있는 환경이 아쉽습니다. -유럽이나 일본 같은 곳은 100년 된 가게들이 적지 않은데, 대를 물려 가업을 잇거나 오래된 것에 대한 가치를 높이 사는 인식 덕분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그들에게는 손으로 하는 일에 대한 경외와 존중이 기본적으로 있는 것 같아요. 직업에 대한 편견의 경계도 거의 없고요. 장인이나 예술가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 요소들이 문화의 격을 지키는 것이겠지요. -전주는 조선시대 출판의 중심지였습니다. 오늘에까지 전해지는 목판본 완판본의 존재가 그것을 증명하지요. 다행히 완판본의 가치를 살려 현대에도 활용할 수 있는 콘텐츠 개발이 이어지고 있지만 출판도시로서의 위상을 찾기에는 아직 한계가 많습니다. 이제라도 옛것의 가치에 눈을 뜬 것은 잘된 일입니다. 문제는 지속적이고 진정성 있는 관심과 투자가 이어져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전주의 완판본은 정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자산입니다. 다만 역사적 자긍심만 내세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재해석하고 그것의 본질적 의미가 무엇일까를 고민하면서 오늘에도 그 가치를 살릴 수 있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완판본은 출판이자 인쇄입니다. 한지와도 결이 맞닿아 있으니 한지와 출판을 산업적으로 살리는 일이야말로 완판본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 아닐까요. -그렇고 보니 우리는 근대의 인쇄사에 큰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한 시대의 자산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이어져왔는지에 대한 연구와 해석이 중요할 것 같은데요. 대한민국 역사에서는 근대의 기억이 아주 희미합니다. 기록이 부실하기 때문이죠. 일본강점기를 거친 탓도 있지만 근대화를 지나 현대화라는 미명 아래 없애고 잊어버린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근대의 인쇄사도 예외가 아닙니다. -인쇄의 역사, 특히 그중에서도 인쇄 기술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자료도 당연히 미흡하겠습니다. 특히 인쇄 기술은 인쇄의 역사에서도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인쇄술을 단순한 인쇄술로만 보면 안됩니다. 인쇄 기계나 도구는 단순한 기계와 부품이 아니라 지식을 찍어내는 하나의 도구예요. 대단히 위대한 도구죠. 그런데도 우리는 그 위대한 도구에 별로 관심을 쏟지 않았어요. 사실 우리를 근대화시킨 최고의 요소는 역시 인쇄술이거든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신식 인쇄술은 일본에 의해 들어왔고 한편으로는 선교사들에 의해 한글이 활자로 만들어지고 발전했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사실들을 연구자들조차 관심을 두지 않고 연구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근대의 인쇄사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고요. -그런 점에서도 대표님이 일찍부터 인쇄 기계와 도구를 수집해 오신 것은 참 다행이다 싶습니다. 수집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하십니까. 몇 가지 원칙이 있는데, 인쇄와 관련해서는 인쇄 기계, 제책 기계, 책을 만들었던 도구, 인쇄 기계를 운용하기 위한 소품까지 다 모읍니다. 소품들은 도구라고 부르는데 이번에 책으로 낸 레터 프레스 툴즈가 그런 소품들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책도 수집을 합니다. 그런데 수집하고자 하는 책이 좀 특별합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고급 책이 아니라 매우 특수한 책들이죠. 형식적으로는 장정이 특별하거나 인쇄 방식이 독특한 것들이고요. 또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에게는 직접적인 의미가 없는 책들입니다. 예를 들면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썼던 일기를 모아 놓은 어머니가 책으로 펴낸 것이거나 한글을 몰랐던 할머니가 성경책을 필사하며 자연스럽게 깨친 한글 실력으로 써낸 책 같은 것들이지요. -수집의 관점, 특히 책에 대한 관점이 매우 특별하시군요. 통념을 좀 바꾸면 세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기존의 방식에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면 가치 있는 물건은 많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고급 최고를 내세우면서 하찮게 보이는 것들에는 관심을 두지 않죠. 그러다보면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갖는 가치는 다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의 역사도 보세요. 지배자와 승자들의 입장에서만 기록되고 보존되면서 정말 의미 있는 한 시대의 역사를 그려내는데 실패했지요. 이제부터라도 일상성을 찾는 일이 필요합니다. 유물도 마찬가지예요. 지나간 것은 모두 역사가 됩니다. 저마다의 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느냐가 중요하겠군요. 그렇죠. 결국은 관점의 문제인데, 내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무엇을 볼 수도, 보지 못할 수도, 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눈을 키우는 일이 저는 기록의 첫 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책공방에서 삼례 주민들을 대상으로 운영한 자서전 학교도 그런 연상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맞습니다. 삼례에 내려오면서 완주를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어요. 이곳이 책마을과 박물관의 역할을 하는 곳이라면 책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책은 엄밀히 따지면 기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공방에서는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를 고민했어요. 완주에 대한 기록을 답으로 찾았지요. 책이 들어오고 문화가 들어왔으니 이제 기록을 해야겠다 싶었죠. -자서전 학교가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삶에 그치지 않고 완주를 기록하는 프로젝트였군요. 이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어른들의 삶을 기록하는 것이 곧 완주의 가치있는 기록이니까요. -성과는 있었습니까. 3회까지 진행했는데 삼례를 중심으로 26명 주민이 참여해 26권의 자서전을 만들었습니다. 자치단체의 지원을 받아 운영했는데 평가가 엇갈려 지금은 중단된 상태입니다. 아직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기록하고 그것을 자서전으로 만들어내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 같아요. 계획으로는 10년 정도 이 작업을 해나가면 완주의 역사가 제대로 드러날 수 있겠다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좋은 기록은 곧 의미 있는 기록일 텐데, 좋은 기록과 의미 있는 기록의 기준은 어떤 것입니까. 귀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다르겠지요.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귀하게 여기는 것들의 본질을 알아야 좋은 기록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에요. 아무리 많은 기록을 남긴 다해도 그것의 본질을 알지 못하면 애써 남긴 기록이 모두 쓸모없는 종잇장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삼례에서 5년이 지났는데 무엇을 얻으셨습니까. 즐거움을 얻었다면 안타까움도 있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지역을 떠나고 있는 현실이에요. 꿈을 잃고 방황하는 청년들을 보며 책공방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경험과 작은 지식을 통해 그들이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어요. 다양한 사업들이 떠오르는데 궁극적으로는 책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일구어가는 책 학교를 설립하고 싶습니다. ● 김진섭 대표는 - 독일 작은 책공방이 인생 바꿔책 만드는 즐거움 확산 기여 김진섭 대표가 완주군 삼례읍 삼례역로에 조성된 삼례문화예술촌에 책공방을 연 것은 2013년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한 그의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은 잡지사. 기획 운영 파트에서 일했던 그는 90년대 말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책의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그 세계는 책의 물성인데, 덕분에 그는 매체로서의 책이 아닌 추억을 간직하는 보물로서의 책을 만드는 일에 눈을 뜨게 되었다. 독일의 작은 공방에서 장인이 손으로 책을 만드는 풍경은 그가 오래전부터 가슴에 품어왔던 꿈을 다시 불러냈다. 누구나 책을 만들 수 있게 하는 일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인 것은 그 덕분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첫 번째 책(책잘만드는 책)은 기대 이상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용기가 생겼다. 직장에서 나와 책의 특성을 살려내는 다양한 형태의 책을 개발하거나 작은 출판사를 대상으로 출판컨설팅을 해주는 사업을 시작했다. 2001년, 책공방공책으로 시작한 사업은 얼마 되지 않아 자리를 잡았다. 독립된 공간을 얻게 되자 작업 공간 이름도 책공방으로 바꾸었다. 인쇄 출판 기계와 온갖 도구들을 주목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내친김에(?) 출판사 성격을 바꾸어 일반 대중들에게 책 만드는 일을 전파할 수 있는 책공방북아트센터를 열었다. 책공방에 북아트를 더하는 변신이었다. 북아트가 새롭게 부상하면서 그의 사업은 날개를 달았다. 꿈이 현실이 되는 과정을 만나며 그에게는 더 새로운 꿈이 생겼다. 아이들이 책 만드는 즐거움을 갖게 해주기 위한 책만드는버스는 그 연상의 작업이었다. 즐거움과 보람을 함께 누리는 시간이 이어졌으나 모든 일에는 부침이 있듯이 그에게도 고난이 찾아왔다. 즐겁게 오래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게 되었다. 서울이 아닌 또 다른 지역에서 그 길을 찾고 싶었다. 그즈음 책마을 조성을 추진하고 있는 삼례와 인연이 닿았다. 2013년, 책공방북아트센터를 삼례로 이전했다. 올해로 5년, 지역출판전문가를 양성하고 주민들의 자서전을 엮어내며 크고 작은 다양한 책을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그의 시간 대부분은 삼례의 책공방에 놓여있다. <책잘만드는 책> <디자이너를 완성하는 포트폴리오> <책만드는 버스> 등을 펴냈으며 삼례로 내려온 이후에도 <책잘만드는 제책> <한국 레터 프레스 100년 인쇄 도감> <책공방 15년, 삼례의 기록> 등 출판사의 보물 같은 책들을 엮어냈다. 지금은 삼례 책공방에서 만나 그의 제자가 된 이승희와 생각과 가치를 소통하고 공유하며 새로운 책문화 운동을 확산해가고 있다. 올 연말 한국출판연구소는 제 23회 한국출판평론상 우수상에 그가 펴낸 책공방, 삼례의 기록과 북 툴즈를 선정했다.
서울의 인사동은 한때 대한민국의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골동품과 화랑과 표구점과 필방, 전통공예품 전통찻집 전통음식점 등이 집중되어 있었던 덕분이다.1990년대 들어서면서 인사동은 변하기 시작했다. 1988년 전통문화의 거리로 인사동이 지정되면서 관광객들이 몰리기 시작한 탓이다. 인사동을 지키고 있던 고서점, 필방 표구점 등 전통문화 상품을 다루던 가게들이 하나둘씩 밀려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이후 20여년, 오늘의 인사동은 값싼 기념품과 온갖 먹거리와 프랜차이즈 업종 가게들이 뒤섞인 정체불명의 거리가 됐다.그러나 인사동은 여전히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공간의 명맥을 지키고 있다. 자본의 힘에 밀리면서도 끝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토박이(?) 가게들이 아직 적지 않기 때문이다.동양한지도 그 중 하나다.1974년에 문을 열었으니 올해로 43년째. 동양한지는 인사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지업사, 그것도 한지만을 다룬다.이 가게를 열고 오늘까지 지키고 있는 박성만 사장(68)은 전주가 고향. 아버지 대부터 전주 한지로 인연을 맺은 이후, 지금까지 한눈 한번 팔지 않고 오로지 한지 판매로만 살아왔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지 전문가다. 수십 년 한지를 보고 만지고 느끼는 경험의 시간이 가져다준 선물이다.여주 연구소로 가는 첫째 주와 셋째 주 주말만 빼고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가게에 나오는 박 사장을 그의 오래된 가게에서 만났다. 깊어가는 가을, 평일이었지만 인사동은 젊은이들과 관광객들로 붐볐다. 종로 쪽에서 인사동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있는 그의 가게는 마음먹고 둘러보아야만 찾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이다. 인사동에서 밀려나고 있는 토박이 가게들의 현실이 보였다. 그런 마음을 읽었을까. 그가 말했다. 가게는 좁지만 이 안에 대한민국 각지에서 만들어지는 한지는 다 모여 있어요. 그럼 됐지 뭐.인터뷰를 하는 동안 서너 명 손님들이 들고 났다. 가게를 함께 운영해온 그의 아내는 일일이 용도를 묻고 짧은 설명을 더한 후에야 종이를 건넸다. 진귀한 풍경이었다.-가게가 꽤 오래되었나봅니다. 여기서 창업을 하신건가요.건물이 낡았지만 장사하는데 특별히 불편함은 없어요. 종이 사고파는데 특별한 시설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요.-아버님께서 한지 도매상을 하셨다면 한지를 취급하는 지물포가 꽤 많았다는 이야기겠습니다.그렇죠. 당시는 벽지도 그렇고 한지를 많이 썼잖아요. 더구나 전주한지는 이름이 높아 인기가 있었으니 아마 전국적으로도 많이 찾았을 겁니다. 1960~70년대에는 서울의 중앙시장이나 영등포시장에 지물포가 몰려 있었어요. 전주 한지가 많이 올라갔죠.-판매는 어땠습니까.그때 전주한지라고 하면 화선지 보다는 창호지라고 불렀던 초배지를 알아주었어요. 전주 쪽에서는 포지라고 해서 면 메리야스를 갈아서 만든 초배지를 만들었거든요. 전주에 가면 교동에 천이 있었죠. 옛날에는 그 곳에서 빨래를 많이 했는데, 많이 헤진 것은 버리잖아요. 그것을 넝마주이들이 주워서 종이를 만드는 공장으로 가져갔어요. 그것을 갈아서 초배지를 만들었죠. 당시는 흙으로 집을 많이 지었는데 그 종이로 초배를 해야 벽지가 뜨지 않았어요.-지역별로 만들어진 종이의 특성이 달랐군요.초배지로는 전라도는 포지, 경상도는 영덕지를 알아주었고, 일반적으로 쓰이는 초지도 전라도는 소지, 경상도는 살래지, 장판도 전주에서는 전주장판, 경상도에서는 경각장판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져 올라왔어요.-이런 종이들을 모두 취급하셨나요.그때만 해도 초배지나 장판지가 많이 팔렸어요. 그러던 것이 70년대 중반부터 서예 붐이 서서히 일기 시작하더니 화선지를 찾는 사람이 늘더군요. 전주에서 한지를 만드는 장인들의 화선지가 올라온 것도 그즈음입니다.-70년대 중반, 한지 생산이 번성한 것도 그러한 분위기와 연관이 있군요.인사동에 지업사가 문을 본격적으로 열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니까요. 서울에서도 70년대 초반까지 지물포는 왕십리에 있는 중앙시장이 거점이었어요. 그곳에서 한지 상권도 이루어졌죠. 그러던 것이 70년대 중반부터 인사동으로 한지가 들어오기 시작한 겁니다. 서예, 동양화 붐이 일어나면서 표구사도 성업을 맞았잖아요. 인사동에 표구사가 들어오니 자연히 한지를 다루는 지물포도 들어오게 된 것이죠.-동양한지도 그때 문을 열었습니까.1974년에 열었는데, 그때는 가게 이름이 동양지업사였어요. 80년대 들어와 동양한지로 이름을 바꾸었지요.-한지로 특정하게 된 이유가 있었습니까.이전에는 아무래도 장판이 많이 팔려나가니 장판 위주였어요. 그런데 아파트 문화로 바뀌면서 장판의 수요가 줄고 서예 서화 붐이 일면서 화선지 수요가 급증했거든요. 게다가 한지를 인테리어 용도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아예 한지 쪽으로만 특성화해보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죠.-지업사에서 한지로 특화시킨 것은 잘된 선택이었습니까.그때 생각으로는 잘한 일이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죠.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아요. 한지를 특화한 덕분에 한지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고, 그것이 제 삶의 즐거움이 되었으니까요.-한지 수요도 부침이 심할 것 같습니다.물론이에요. 70년대와 80년대까지는 전주에도 한옥이 많이 남아 있었잖아요. 그때 당연히 전주에 한지공장이 많았었고, 서예 붐이 일어나 서예학원과 표구사가 성업을 누릴 때 또한 전주의 한지 공장도 전성기를 맞았었죠. 그런데 지금은 서예인구도 줄고 아파트 문화로 한옥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니 한지의 수요가 그만큼 줄어든 것이죠.-그런데도 한지로만 가게를 지속 운영해오셨는데요.사실 어려운 시기가 있었어요. 학교에서조차 서예 교육이 없어지면서 화선지는 아예 수요가 거의 없어졌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90년대부터 한지로 만드는 공예가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했어요. 2000년대까지는 거의 한지공예로 연명했다 고해도 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역시 한계가 왔어요. 지금은 민화 분야에서 한지 수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5~6년 정도 된 것 같은데, 앞으로도 민화에 대한 관심은 10년 정도 더 이어질 것 같아요.-그런 흐름이 이제는 다 보이시나 봐요.(웃음)50년 가깝게 이 분야에서 놀다보니까 그럴 수밖에요. 더구나 내가 하는 일이란 것이 판매잖아요. 그 흐름이 훤히 보일 수밖에 없어요.-여주에 한지공장을 만드신 것도 이러한 흐름을 예견한 결과겠습니다.그렇죠. 지금 제 눈에는 앞으로 한지가 어디로 갈 것인가가 보여요. 그러다보니 내가 직접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만들고 싶은 종이를 만들려면 연구소부터 내자고 생각했지요.-사장님의 말씀을 들으니 한지 수요의 흐름이 그려집니다.70~80년대는 서예, 90년대~2000년대는 한지공예, 2000년도가 넘어 가면서 민화, 그 다음은 어떤 것이 올까 생각해보니 한지가 미술의 영역에서 매우 좋은 재료로 활용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어요. 여주연구소에서도 그런 바탕으로 종이를 연구하고 있죠. 최근의 한지 수요, 특히 작가들의 소비성을 보면 그런 예상이 맞는 것 같거든요.-회화 등의 미술 재료로 한지 수요가 확대될 것이란 예상은 흥미롭습니다.실제로 국내작가들의 한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소비면에서 보면 유럽이나 미국 등 외국의 작가들이 한지를 더 선호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미술 분야의 경계도 그렇지만 재료의 개념도 없어졌잖아요. 한지는 이러한 과정에서 매우 좋은 재료로 주목받고 있어요. 지금 저희가 연구하고 개발하는 것은 외국의 작가들이 필요로 하는 재료로서의 한지예요.-주문이 들어옵니까.얼마 전에도 프랑스 작가가 찾아왔어요. 종이 일곱 장을 사러 왔더군요. 원하는 종이가 특수한 것이어서 주문에 맞추어 제작해야하는 것이었어요. 일주일 정도 걸리겠다고 했더니 기다려서 일곱 장을 만들어 가겨갔어요.-특별한 주문, 이를테면 맞춤형식의 한지인 셈인데 작가와 장인의 협업으로 종이 한 장이 만들어지는 것이니 그 자체로 작품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물론입니다. 우리나라의 작가들에 비해 그들은 일반 한지가 아니라 비구상적인 조형성을 갖춘 종이를 원합니다. 우리의 닥으로 만든 종이를 원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겠지요.-대량생산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한지의 발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계기로는 충분할 것 같습니다.문제는 이런 종이를 우리 기술자들이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대부분의 기술자들은 거의 60세를 넘은 노인들입니다. 전주의 공장들도 예외가 아닐 것 같은데 이 분들이 대개 종이를 하루에 몇 장 뜨느냐에 따라 임금을 받거든요. 월급이 보장되어 있지 않으니 연구는 그만두고 종이만 떠내는 통꾼이 되는 겁니다.-지금 처한 현실로 보자면 숙련된 기술 경험 노하우를 전수하는 일이 중요하겠군요. 여주연구소에서는 종이 장인들이 어떻게 일합니까.자기만이 갖고 있는 장점을 살려낼 수 있는 종이를 만들 수 있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공장에서는 일반 한지는 생산하지 않고 고급지 특수지 같은 것을 만듭니다.-어떤 종이들인가요.일단 맞춤형 종이가 그렇고요. 지금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주 얇은 특수지 제작입니다. 우리의 귀한 유물을 보존하는데 꼭 필요한 종이가 있어요. 예를 들면 옛 그림을 잘 보존하고 싶은데 그것이 오래되어 바스러진단 말이죠. 찢어지기도 하고요. 표구 작품이라도 그것을 다시 표구 기술만으로 복원하고 보존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런데 원화가 그대로 드러나 보일 정도로 얇은 한지가 있다면 그 위에 배접을 할 수 있으니 보존성이 높아지겠지요. 이런 한지를 기록이나 문서 보존에 활용한다면 몇 백 년 지나도 훼손될 염려가 없을 겁니다.-한지의 값도 수요를 늘리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까. 특히 수입지가 아닌 국산한지는 가격이 높은데요.우선 닥의 가격이 천지차이거든요. 놀라시겠지만 국내산 닥은 톤당 1억 원이 넘습니다. 지구상에 종이를 만드는 원료가 이렇게 비싼 경우는 없을 겁니다. 모조지나 이런 것은 펄프가 100만원도 안 될 거예요.-그럼에도 국산 닥으로 만든 종이를 찾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 아닌가요.물론입니다. 그만큼 종이의 품질이 좋다는 것이죠. 사실 국내산 닥으로 만든 한지는 보존성, 광택성, 강도와 미세함 등 모든 면에서 현저하게 다릅니다. 토질과 기후가 다르니 조건이 다른 곳에서 자란 닥나무의 성질도 다를 수밖에 없는데, 이런 특성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겠느냐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기후의 온난화를 말씀하시는 것인가요.실제로 우리나라도 기후 온난화로 닥섬유질의 특성이 북상하고 있거든요. 섬유질이 굵어진다는 이야기인데 이제는 경기도 양주 포천 쪽으로 닥나무 재배가 옮겨져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이런 문제들에 대한 연구가 좀 더 긴밀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겠습니다.사실 한지 산업을 살리기 위해서는 정책적으로 이런 기본적인 문제들이 연구되고 대안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한지 생산은 결국 닥의 문제인데 한지 관련 정책 대부분이 근본적인 문제보다는 피상적인 문제에만 머물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연구자들도 자료에 의존해 연구하다보니 현실과는 동떨어진 결과를 내놓기도 하고. 안타까운 일들이 참 많습니다.-전주한지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전주한지의 우수성은 다들 인정하는데 산업으로 발전시키는데는 아직 한계가 적지 않은 것 같은데요.전주한지의 우수성을 지키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수성을 내세우는 것만으로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전주 한지의 환경과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주에는 아직도 한지를 만드는 공장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공장들이 대부분 비슷한 종이를 뜹니다. 고급지나 특수지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이죠. 같은 종이로 경쟁하는 일은 가격 경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어려운 환경에 처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지금 닥나무 원료는 물론이고 한지까지도 태국이나 중국에서 어마어마한 물동량이 한국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한지는 한통을 떠도 팔 곳이 없다는데 이러한 현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결국은 차별화를 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그렇죠. 소비자는 다른 곳에 있는데 아직도 일반적인 한지 생산에 몰두하고 있다면 그 끝은 뻔 한 것 아니겠어요.전주한지 이야기가 나오자 박 사장의 얼굴은 굳어졌다. 그는 전주한지의 브랜드를 살리려면 해결해야할 과제가 적지 않다고 지적하면서도 끝내 말을 아꼈다. 50년 가까운 세월, 한지 수요의 최전선 현장을 지켜온 그의 눈에 비친 전주한지의 현실이 더 궁금해졌으나 여전히 일상에서 멀어져 있는 한지의 현실을 보면 답이 따로 없겠다 싶었다.누구나가 한지를 만들 수 있는 체험공간을 늘리고 맞춤형 한지를 만드는 일에 나선 그의 작업은 그래서 더 기대가 된다.● 박성만 사장은- 종이 장인들과 옛 기록 보존할 탁월한 한지 개발 시작박성만 사장은 전주가 고향이다. 완산동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전주에서 살았다. 위로 형이 있었지만 6.25때 세상을 떠나 장남이 됐다. 한지 위탁 판매를 업으로 삼았던 그의 아버지는 전주한지를 비롯해 전라도의 종이를 생산자로부터 가져다 지물포에 넘겨주는 이른바 도매상이었다. 별도의 가게를 열지 않고도 서울의 중앙시장과 영등포시장에 한지를 넘겨주는 아버지의 사업 덕분에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한지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군대를 다녀온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사업을 이어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한지는 유행을 타지 않는다. 혹시 한지가 제때 팔리지 않아 오래 묵혀둔다 해도 도침의 효과가 있으니 더 좋은 종이가 된다며 재고가 없는 한지 판매업을 권했다. 당시 아버지의 사업은 순조로웠다. 아버지의 거래처를 파악하고 인수하는 일부터 나섰다. 정작 거래처를 돌아다녀보니 아버지가 남겨놓은 빚이 적지 않았다. 그 빚을 정리하는 데만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처음에는 혼자서 서울을 오르내리다가 자리가 잡힐 즈음 가족들을 모두 서울로 올라오게 했다. 아버지의 영향이 컸지만 짧은 시간에 적지 않은 지물포와 신뢰를 쌓게 됐다. 1974년 인사동에 동양지업사란 이름으로 가게를 냈다. 당시 골동품상 화랑 표구사 지업사 등이 물려있던 인사동은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가게 운영은 금세 자리를 잡았다. 80년대에는 아예 가게 이름을 동양한지로 바꾸었다. 한지만 판매하는 가게로 특화시키고 싶었다. 서예 대중화로 전주의 한지 공장들이 번성기를 맞았을 때였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서예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자연히 판매 규모가 위축됐다.한지의 앞날이 훤히 보였다. 생활환경이 바뀐 다해도 한지의 쓰임은 건재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한지를 만드는 일에 나선 것은 그 때문이었다. 여주에 공간을 마련해 연구소를 열었다. 한지를 만드는 장인들을 불러 종이를 연구하는 일이 시작됐다. 사라져가는 진짜 장인들의 기술을 살려 그들의 기술로 좋은 종이를 만들어내는 일이 그의 목표가 됐다. 그중에서도 그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에 나선 종이가 있다. 옛 기록들을 보존할 수 있는 얇고 탁월한 한지다. 이제 시작단계지만 그는 충분한 가능성을 확신한다.한지를 판매하는 일로만 45년, 온갖 종이를 다뤄온 그는 굳이 만져보지 않아도 한눈에 좋고 나쁜 종이를 가려내고 누가 어떻게 만든 종이인가를 분별해낸다.맞춤형 한지의 미래를 기대하고 있는 그는 첫째 주와 셋째 주 주말이면 여주의 공장을 찾아 직접 특수지를 실험하고 제작도 한다.큰아들이 기꺼이 동행에 나선 덕분에 그의 한지업은 3대로 이어지는 가업이 됐다.
곽영길 회장 "전북과 동반자적 협력 관계...실질적 협력 모델 만들어 나갈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