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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베로나 축제 '아이다' 주역 소프라노 임세경 "세월 갈수록 더 빛나는 가수로 롱런하는 게 꿈이죠"

2015년 여름,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세계적인 오페라 축제 아레나 디 베로나에 한국인 소프라노가 주역으로 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00년이 넘는 베로나 축제 역사상 한국인 소프라노가 주역을 맡는 것은 처음. 당연히 그 주인공에 관심이 쏠렸다. 전주 출신 소프라노 임세경씨(42). 그 이전부터 유럽의 오페라 무대에서 그의 존재는 빛났었지만 베로나 축제 발탁은 놀랍고도 새로웠다. 베로나의 아레나 원형극장은 모든 오페라 가수들에게 언젠가는 꼭 서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그런 영광이 쉽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극장의 특성 상 웬만큼 성량을 갖춘 성악가라도 무대 자체가 두려움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크지 않은 키에 몸집도 작은 한국인 리릭 소프라노의 등장은 그래서 더 관심을 모았다.그해 리릭 소프라노로는 한국인 최초로 주역을 맡아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비엔나 빈 슈타츠 오퍼 극장의 나비부인 오페라 공연으로 최고의 호평을 받아 다음 시즌 초청까지 받았던 그의 노래는 1만5천석이 넘는 아레나 원형 극장에서 더 빛났다. 거대한 공간에 울려 퍼지는 아름다우면서도 전율을 느끼게 하는 압도적인 성량, 타고난 소리에 배인 서정적 감성과 탁월한 연기의 조화는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관객들에게 잊을 수 없는 오페라의 여름밤을 선사했다.유럽과 아시아 오페라 무대를 종횡무진, 타고난 소리와 노력으로 빚어낸 아름다운 노래로 그 자신의 이름 뿐 아니라 한국을 알리고 있는 그를 만났다. 전북대 개교 70주년 기념 공연에 초대된 그는 하루 전날 전주에 왔다.10여년 만에 고향을 찾았다는 그는 밝고 소탈했으며 겸손했다. 2008년부터 꾸준히 국내 무대에도 서왔지만 아쉽게도 고향 무대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었다는 그는 어느 무대보다도 더 설레고 조심스럽다고 말했다.인터뷰를 하는 동안 특별한 그의 목소리에 마음을 빼앗겼다. 타고난 목소리의 울림은 그만큼 인상적이었다. 울림을 품은 그 소리는 치열한 훈련으로 얻은 공력을 만나 그를 세계적인 성악가로 이끌었을 것이다.처절할 정도로 가난한 시절을 딛고 일어섰다는 그의 유학생활은 그래서 더 궁금했다.-전주는 오랜만에 오신건가요.10년도 넘은 것 같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동생들도 서울로 오면서 아예 이사를 했거든요. 이모들이 계시는데 아무래도 오고 가는 일이 줄어들더군요. 외국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는 더 어렵게 되었고요.-그래도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어서 남다른 그리움이 있지 않나요.물론이지요. 밀라노에 살고 있는데 늘 어릴 때 먹던 음식이 생각나요. 특히 학교 앞에 있던 베테랑 칼국수가 먹고 싶었어요. 제가 성심여중을 다녀서 학교 앞에 있던 그 분식집 단골이었거든요.(웃음)-오페라 아이다 공연이 10월 말과 12월에 있던데요.경남오페라단이 한국 출신의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들과 함께 아이다를 공연하는데 창원과 서울에서 무대를 올립니다. 이정원 이아경 손혜수 씨 등 활발한 활동을 하는 가수들과 한 무대에 서는 것도 즐겁지만 의미가 각별한 것 같아요.- 아이다는 나비부인 못지않게 인연이 깊은 것 같습니다.나비부인은 작품의 특성 상 동양인 가수를 선호하는 경향 때문에 자주 서게 되는데 아이다는 좀 다른 면이 있죠. 개인적으로는 베로나 아레나 극장에서의 아이다 역을 맡은 이후로 아이다와 더 가깝게 된 것 같아요. 이번 무대는 야외 원형극장인 아레나와는 전혀 다른 조건이어서 성량 보다는 극중 인물에 집중하고 소리도 더 섬세하게 표현하고 싶습니다.-놀라운 성량을 갖고 있다는 평을 받는데, 성량은 타고나는 것 아닌가요.아무래도 바탕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겠지만 훈련으로도 어느 정도는 갖출 수 있지 않을까요. 어쨌든 저는 어릴 때부터 목소리가 크긴 컸어요.(웃음)-어릴 때 노래 잘한다는 소리도 많이 들으셨겠네요.그것은 아닌데, 합창단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내가 노래를 좀 하는구나 알게 되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친구가 전주KBS어린이합창단 모집에 신청했는데 함께 가자는 거예요. 그래서 따라갔는데, 기다리다 잠이 들었나봐요. 선생님이 지나가시다가 너는 뭐 하러 왔냐고 물어보셔서 친구 따라 왔다고 했더니 너도 한번 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별 생각 없이 불렀는데 친구는 떨어지고 저만 된 거예요. 민망한 상황이었어요.-어린이합창단 활동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군요.4학년 초부터 시작해 졸업할 때까지 활동했는데, 당시 합창단을 지도했던 강승구 선생님이 성악의 기본을 참 잘 가르쳐주셨던 것 같아요. 그때 공연을 많이 다녔었는데 어린 마음에 참 신나는 일이었어요.-성악을 전공하게 된 것도 합창단 활동 덕분이겠습니다.당시는 예술중학교나 고등학교도 없었고, 딱히 주위에 음악을 전공하는 분도 없어 더 이상 공부를 지속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고 3때 옆집에 사는 오빠가 서울대 성악과에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방학 때마다 집에 와서 연습을 했거든요. 하루는 무작정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갔어요. 노래를 어떻게 하느냐고 가르쳐달라고 했죠. 자기도 잘 모르니까 일단 서울로 와보라고 하더라고요. 일주일에 한번 서울대로 지도를 받으러 갔었는데 그때 그 오빠가 동아리 친구들과 상의를 해서 저를 가르쳤어요. 엄마랑 고속버스 타고 올라가 2~3시간 공부하고 되짚어서 오는 생활을 6개월 정도 했죠. -여러 명이 한사람을 가르치는 특별한 개인지도였군요.지금 생각하면 그때 가르쳐준 분들이 정말 좋은 스승이었던 것 같아요. 발음이 틀리면 사전까지 찾아서 바로 잡아 주었거든요. 다행히 한양대에 합격했지만 기초 없이 대학을 간 셈이 됐죠. 그러니 다른 사람보다 더 노력했어야 했는데 아버지 사업이 잘못되면서 형편이 어려워져 서울에서 생활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어요. 게다가 아버지가 저를 보러 서울에 오시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셨는데 2년을 꼬박 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신 것이 대학 4학년 때였어요. 집안 형편이 더 어려워지니 대학원 진학이나 유학은 엄두도 나지 않았죠. 음악에 대한 열정도 없었고, 그저 아르바이트로 대학생활을 지탱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예술가로 성장해온 과정이 더 궁금해집니다.우연한 기회에 이태리 여행을 갔는데 음악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어요. 여행에서 돌아와 곧바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죠. 피아노 학원에서 한 달에 80만원을 받았는데 한 푼도 안 쓰고 천만 원을 모아 유학을 떠났습니다.-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환경이었겠습니다.경제적 부담이 가장 컸는데, 밀라노에 오자마자 어학원부터 등록했어요. 제가 가진 전 재산의 대부분을 수업료로 내야 했으니 두렵기도 했지만 언어가 우선이더라고요. 언어가 해결되지 않으면 일상이 불편해지고 누구에겐가 도움을 청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언어를 먼저 해결해 스스로 자립할 수 있을 때 레슨을 받자고 마음먹었지요. 6개월 동안 전문가 과정 9급까지 마치고 통역사 자격까지 땄습니다. 시에서 운영하는 무료 강습까지 병행해 언어를 해결하고 나니 두려울 것이 없더라고요.-선택이 탁월했던 것 같습니다.그만큼 절박한 상황이어서 가능했던 일 같아요. 유학을 오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언어부터 해결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배우는 일도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어야 제대로 자기 것이 될 수 있으니까요.-생활은 어땠습니까.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생활이었어요. 어학원에서 소개한 지하 방에서 지냈는데 난방이 안 되어 외투를 입고 자야했죠. 화장실도 밖에 있는. 노숙자가 따로 없었어요.-세계적인 소프라노의 화려한 무대 뒤에 그런 시절이 있었군요. 베르디 국립 음악원을 졸업하고 스칼라 아카데미에 들어가셨는데 그때부터는 생활이 조금 나아졌습니까.그런 셈이죠. 스칼라 아카데미가 원래는 2년 과정인데 저는 3년을 다녔어요. 학비는 무료고 장학금이 매월 한화로 250만원이 나왔는데 레슨을 받으며 충분히 생활할 수 있을 정도였죠. 그러나 정작 공부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웠어요. 지도 교수님이 워낙 인종차별이 심했거든요.-어려운 과정을 뚫고 합격했으니 실력을 인정받은 셈인데, 인종차별은 뜻밖이군요.저를 지도하는 선생님이 터키 출신의 소프라노였는데 이 분이 동양 사람에 대한 편견이 있었던 것 같아요. 성악을 레슨 받는 2년 동안 내내 너는 왜 들어왔니 이름은 뭐니를 듣고 지내야했어요. 이름조차 알고 싶지 않으셨던 거죠. 작은 콘서트 하나도 주어지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마지막 레슨 때 제가 부르는 아리아를 들으시면서 눈물을 글썽이더니 내가 니 진심을 몰랐던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내가 너를 제대로 대한 적이 한 번도 없으니 1년만 더 다니라고 하셨어요. 과정을 마치고도 장학금을 그대로 받으면서 스칼라 극장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스칼라 극장의 오페라 단역이 많은 도움이 되었겠습니다.전화위복 되었죠. 그때 단역만 열편 넘게 했는데 그것이 오늘날 제가 유럽무대에서 활동하게 된 기반이 되었어요. 선생님은 제게 상처도 주었지만 제 인생을 열어준 중요한 분이기도 합니다.-무대를 넓힌 것은 2007년 이후부터인가요.극장 도움 없이 나간 것이 그때부터인데 당시에는 용기가 필요했어요. 스칼라 무대의 단역을 거절하기 시작했거든요. 단역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안정된 기반을 가질 수 있는 여건이어서 한번 거절하면 다시는 안 불러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생활이 불안정해지게 되니 결정이 쉽지는 않았어요. 당연히 생황이 힘들어지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혼자 주역을 따내야 하는데 극장 오디션이며 에이전시 오디션을 위해 수도 없이 캐리어를 들고 극장을 돌아다녔습니다.-그 과정이 오늘을 있게 한 것 아니겠습니까. 유럽에서 임세경이란 이름이 알려진 것은 몇 년 전부터지만, 아무래도 절정은 2015년 베로나 축제의 아이다 역이 아닐까요.이전에도 좋은 극장에 서긴 했지만 그 해의 비엔나 빈 슈타츠 공연과 베로나 축제가 제 인생의 또 다른 시작이 된 무대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 셈입니다.-많은 일정이 예정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올해 초 플라시도 도밍고가 이끄는 빈 필과 나비부인을 공연했던데요.잊을 수 없는 공연이었어요. 도밍고 선생님은 팔순을 넘겼는데도 자신의 무대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국경을 넘나들면서 공연을 하면서도 리허설을 위해 늦은 밤 다시 연습실에 나오는 열정을 보며 거장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어요.-워낙 많은 오페라에 출연하셨으니 대부분의 무대가 익숙할 것 같습니다.그렇지 않아요. 하면 할수록 어려운 일이 무대에 서는 일이죠. 악보도 다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보이지 않던 악상기호가 매번 새롭게 보이거든요. 누가 써놓았는지 왜 써놓았는지 보면 볼수록 자꾸 새로운 것이 보이고 소리도 점점 달라지니 제대로 된 소리를 지키려면 연습을 게을리 할 수 없게 됩니다.-소리는 일정한 시기까지는 원숙하고 깊어지는 것 아닌가요.나이를 먹으면 나이 먹은 소리가 나기 마련인데, 훈련을 하면 가장 좋은 시절의 소리를 지킬 수 있거든요. 나이가 들면서 내공은 생기겠지만 소리 빛깔 자체가 변하게 되니 맑아지게 하는 것은 노력으로 지켜야 하는 것이죠. 적절하게 컨트롤 하면서 연륜과 내공을 관객들이 느낄 수 있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나이를 먹으면서 더 빛나는 가수로 롱런하는 것이 제 꿈이기도 합니다. 그러려면 연습만이 답이겠죠.그는 노래만 생각하고 노래로 일상을 보낸다. 노래를 하지 않았으면 뭘 하며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일상의 반경이 좁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너무 단조롭고 건조한 삶이지만, 그가 집중해 오직 한길만을 걸어온 덕분에 우리는 세계적으로 한국의 이름을 알리는 성악가를 가질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어느 무대에서건 어느 오케스트라건 꽉 찬 소리로 공간을 압도하며 서정적인 빛깔로 관객들을 만나는 그의 소리는 마음을 잡는다. 어려운 여건을 딛고 세계적 성악가로 우뚝 선 그의 삶을 듣고 보니 그의 소리가 더 빛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전주출신 소프라노 임세경은- 타고난 성량에 연기력 조화로 유럽 각국서 러브콜소프라노 임세경은 1975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자신이 음악적 재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타고난 그의 소리를 알아본 것은 방송국 어린이합창단 지휘자였다. 전주KBS 어린이합창단에서 노래 부르는 기본을 익혔다. 성악은 초등학교 시절 취미활동으로 끝이 났지만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고3때 방학을 맞아 집에 내려온 옆집 오빠의 노랫소리가 마음을 이끌었다. 서울대 성악과에 다녔던 옆집 오빠는 노래를 배우고 싶다는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본격적인 성악공부를 시작한지 6개월 만에 한양대 음대에 합격했다.대학시절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야 했던 그에게 유학은 언감생심, 안정된 직장을 찾는 것만이 목표가 되었다. 대학 4학년 때 가볍게 떠났던 이태리 여행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이태리의 언어와 도시 풍경, 음악과 극장 등 모든 것이 그의 마음을 끌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피아노 학원 아르바이트로 받는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 이태리 밀라노로 떠났다. 베르디 국립 음악원을 졸업한 직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솔리스트 전문 연주자 과정에 지원했다. 300명을 넘는 경쟁을 뚫고 합격했지만 그의 스승은 2년 과정 내내 인종차별로 그를 냉대했다. 마지막 레슨이 다시 그의 운명을 바꾸었다. 스승은 그가 부르는 나비부인의 아리아를 듣고 너의 진정성을 내가 알지 못했다며 사과했다. 스승의 권유로 1년 더 스칼라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2년 과정인 스칼라 전문 연주자 과정을 장학금까지 그대로 받으며 1년 더 다닐 수 있게 된 것도 행운이었지만 이미 과정을 마친 그에게 스칼라극장이 오페라 단역으로 그를 불렀다. 그 시절의 경험이 오늘날 유럽 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2007년 이태리 도니제티 극장에서 오페라 파리지나로 데뷔한 이후 아르침볼디, 라 스칼라 극장에서 수십 편의 오페라를 리카르도 무티를 비롯한 세계적인 지휘자들과 공연했다. 타고난 소리와 압도적인 성량, 뛰어난 연기력의 조화로 무대마다 돋보이는 그를 주목한 유럽 각국의 극장들이 그를 불렀다. 세계적인 오페라 잡지들은 전율을 느끼게 하는 성량과 혼연일치된 소리와 연기를 가진 작은 한국인 리릭 소프라노 등장을 환호하며 반겼다. 2015년엔 한국인 리릭 소프라노로는 최초로 비엔나 빈 슈타츠 오퍼 극장에서 오페라 나비부인 주역으로 공연했으며 그해 8월에는 이태리 베로나 오페라 축제의 아이다 주역으로 발탁됐다. 아레나 디 베로나 오페라 축제 102년 역사상 한국인으로는 최초였다. 올해 봄과 여름, 빈 슈타츠 오퍼 극장과 베로나 축제에 다시 섰던 그는 독일 헝가리 미국 그리스 공연을 이어왔다.2008년부터 국립오페라단의 대표작을 비롯 국내 오페라 무대도 꾸준히 지켜온 그의 한국 공연은 올해 특히 활발하다. 국립오페라단의 팔리아치와 외투에서 열연, 호평을 받은데 이어 10월과 12월, 창원과 서울에서 아이다를 공연한다. 내년에는 스페인 독일 일본 핀란드 이태리 오페라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7.10.27 23:02

전주의 출판 역사 다시 세운 신아출판사 서정환 대표 "그래도 책은 살아남는다는 믿음…그것이 희망이죠"

먼지를 털어내지 않고 포장해 옮겨내는데만 꼬박 이틀이 걸렸다. 씨트박스로 360개, 4.5톤 화물차 두 대를 가득 채운 엄청난 양이었다. 햇빛 제대로 들지 않은 20여 평 비좁은 공간 안에서 숨죽이고 있던 조선시대의 책판 목판의 외출은 특별했다.(2004년 10월 11일자 전북일보 기사 중)전주 향교 장판각에 보관되어 있던 목판본이 정리 작업을 위해 전북대 박물관으로 옮겨지던 날의 현장을 소개한 기사다.장판각에 보관되어온 완판본은 1800년대 전라감영에서 책 출판을 위해 제작한 목판 책판이다. 조선시대 전라감영 이외의 다른 지역 감영에서도 책을 출판하기 위한 목판본이 제작되었지만 완판본처럼 대량 판본이 보존되고 있는 예가 없으니 사료적 가치로서도 완판본의 존재는 특별하다.완판본은 조선시대 출판문화를 이끌었던 전주의 역사를 일깨우는 살아 있는 기억이다. 오늘에 이르러 우리가 만나는 완판본은 전라감영에서 제작된 목판이지만, 감영본이 아니고도 전주지역 민간에서는 또 다른 목판본으로 책을 만들어냈다. 출판문화의 융성을 일궜던 전주의 풍요로운 문화사를 일깨워주는 증거다.그러나 아쉽게도 전주의 출판문화는 근대에 들어서면서 위축되거나 중단됐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혼란기를 건너는 동안 한두 개 출판사들의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 이어졌지만 현실의 무게는 지역 출판의 위기를 부추기고 짓눌렀다. 지역출판의 명맥이 단절되거나 묻히게 된 이유일 터다.그런데 놀라운 일이 있다. 이 열악한 환경을 딛고 전주의 출판 역사를 지켜온 〈신아출판사〉의 존재다. 어느 사이에 전주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은 이름이 된 〈신아〉의 존재는 반갑다. 1970년 인쇄업으로 시작해 올해까지 47년. 만만치 않았을 역경의 노정에서 끝내 살아남아 지역 출판사의 모범이 된 신아출판사 서정환 대표(77)를 만났다.돌아보면 스무 살에 시작한 신문배달이 지역출판을 부흥시키겠다는 꿈을 갖게 한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는 그의 삶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온전히 출판의 길에서만 존재한다. 〈신아〉의 존재가 곧 그의 삶이 된 셈이다.인터뷰는 전주시 진북동 신아출판사 사무실에서 있었다. 신아문예사와 신아출판사는 한해 수십억 매출을 올리는 적지 않은 기업이 되었지만 그의 공간은 건물 입구, 낡은 책상과 고객들을 맞는 몇 개 의자가 놓인 탁자가 전부다. 보여지는 것보다는 내용을 채우는 일에 마음을 써온 그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단면이다.-출판사 규모가 커진 것 같습니다. 식구들이 많이 늘었나봅니다.오히려 잘 될 때보다 줄었어요. 지금은 인쇄 출판, 전주와 서울사무실까지 30여명이 근무합니다.-출판 상황이 어려워진 탓이겠군요. 2000년대 들어서면서 많은 출판사들이 문을 닫는 사례가 많아졌지요.맞아요. 90년대는 출판 부흥기라고 할 정도로 형편이 좋았었는데 2000년대 들어서면서 출판시장이 위축되니 경영 악화로 출판사들의 부침현상이 이어졌습니다. 인터넷 환경이 확대되면서 종이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 불안과 회의가 깊었어요.-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판을 이어오셨잖습니까.시작을 해놓았는데 다른 탈출구가 없잖아요. 언젠가부터 그래도 종이책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아무리 컴퓨터가 우리 일상을 지배한다고 해도 종이책의 역할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었죠.-종이책이 필요하긴 한데 출판 환경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이 현실이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지탱해온 비결(?)이 궁금합니다.물론이죠. 그래도 책은 살아남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요. 결국은 자본주의가 융성해질수록 책을 찾게 된다는 믿음. 그것이 희망이라고 할 수 있겠죠. 비결이 있다면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바로 그 믿음일 수 있겠네요.-둘러보니 한 해 동안 발간하는 책의 규모가 엄청나더군요. 그 책이 좀 팔려나가야 할 텐데요.책을 팔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늘 고민하지만 답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전주가 출판의 중앙이 되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아주 먼 이야기죠. 현실은 예상보다도 훨씬 더 팍팍해서 출혈이 적지 않습니다.-지금 정기간행물만 11종을 발간한다고 들었습니다. 너무 많은 것 아닌가요. 질적 성장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모든 문예지나 잡지를 출혈 없이 만들어내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내는 것 중에서는 〈수필과 비평〉이 비교적 성공한 예인데, 나머지 문예지나 잡지는 돈이 되지 않아도 역할과 의미를 살려 만들어내는 것들이 대부분이지요.-〈수필과 비평〉은 신아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죠.90년 〈소년문학〉을 처음으로 문예지로 창간했고 2년 뒤 창간한 것이 〈수필과 비평〉이죠. 처음에는 격월간으로 출발했는데 월간으로 바꾸었어요. 올해로 25년을 맞았는데 그 자체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어요. 수필의 영역을 새롭게 확장시키면서 문학의 한 장르로 정착시키고 발전시키는 통로가 되었다고 자신합니다.-사실 수필과 비평이 창간한 당시만 해도 수필은 문학의 본격적인 장르로 인정받지 못했던 상황 아니었나요.맞습니다. 처음에는 수필에 대한 평론을 받기도 어려웠어요. 수필은 누구나가 쓰는 잡문쯤으로 인식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평론하는 분들도 참여를 꺼렸거든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원고를 청탁하고 문학인들을 초청해 세미나를 열어 수필에 대한 편견을 깨고 문학 장르로서의 위상을 찾는 일을 했더니 서서히 분위기가 달라졌어요.-특별히 수필에 주목하셨던 이유가 있습니까.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누구나가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시나 소설과 달리 수필은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요. 물론 수필에 대한 편협된 인식도 바로 잡고 싶었고요. 사실 수필이 근대에 와서 위축되었지, 그 이전에는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수필을 즐겨 썼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 본격적인 장르로 정착하는데 한계가 있었지만 문학적으로도 완성도 있는 수필작품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말씀을 듣고 보니 수필이란 장르가 글을 쓰고자하는 많은 분들에게 용기가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문예지 말고도 신아에서 발간하는 정기간행물이 적지 않지요.꽤 됩니다. 〈소년문학〉과 〈수필과 비평〉 이외에 〈좋은 수필〉 〈여행 작가〉 〈계간문예〉 〈인간과 문학〉 등 월간 격월간 계간으로 11종이 나옵니다. 가장 최근에 창간 한 것이 〈K스토리〉인데 이 책은 문학의 탈장르를 예상하고 기획한 것입니다. 미래 한국 스토리의 지평을 여는 신개념 문예지를 부제로 달았는데 이를테면 좋은 영화 드라마 뮤지컬을 만들어내는 콘텐츠로서의 이야기를 모아내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반응은 어떻습니까.앞으로는 괜찮을 수 있다는 판단입니다. 공모를 통해 영화와 드라마 희곡 등을 발굴하는데 반응이 꽤 괜찮거든요. 이렇게 콘텐츠를 구축해나가면 좋은 작품들이 발굴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그렇더라도 이런 간행물들은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당장 경제적 측면을 생각하면 무모한 일이죠. 사실 두려움도 있습니다. 신아의 경우, 인쇄업이 비교적 잘 되고 있는 편인데, 인쇄에서 번 돈을 출판 쪽으로 쏟고 있으니 그 과정이 정상적이진 않지요. 회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뒤죽박죽 이예요. 체계적으로 얼마가 적자 나는지 잘 파악도 안 되는.매달 월급만 제대로 주면 된다는 생각으로 이 무모한 도전을 해온 것 같아요.(웃음)-말씀하신대로 인쇄업은 괜찮습니까.인쇄업이 아니었으면 출판 쪽 사업은 엄두도 못 냈을 겁니다. 털어놓자면 인쇄업이 괜찮다해도 투자는 더 이상 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인쇄는 신아문예사, 출판은 신아출판사가 맡고 있는데 지금은 출판물이 적지 않아 나름대로 유지해나가는 수준은 됩니다.-지역에서 출판으로 살아남기 어렵다고 하는데 신아는 잘 버티어 온 셈인데요. 그것이 모두 인쇄업 덕분이었다는 이야기군요.그런 셈이죠. 수필과 비평도 처음에는 지방에서 만드는 책이어서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런데 92년부터 7년 동안을 수필가는 물론이고 이름 있는(?) 시인 작가들에게 지속적으로 보냈어요. 점점 관심을 갖는 분들이 늘어나고 또 직접 참여도 해주셔서 오늘의 수필과 비평이 있게 되었지요. 사실 수필과 비평은 다른 출판물을 이어내는 효자예요.-화제를 좀 돌리겠습니다. 신아의 역사에서 사모님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지역의 문인들 뿐 아니라 신아를 알고 있는 많은 분들 중에는 사모님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지요.집사람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신아도 없었을 겁니다. 제가 인쇄업을 시작한 뒤 10년 쯤 지났을 때 스트레스로 심장병을 얻었는데, 그것이 공황장애까지 이어졌어요. 그래서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지경이었지요. 그 틈을 집사람이 모두 해냈습니다. 2004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회사 관리와 운영은 물론 인쇄물 배달까지 다 했어요. 그래서 저보다 집사람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더 많을 겁니다.- 두 분 모두 등단하셨죠. 글에 대한 관심이 오늘의 신아를 있게 한 힘일 수도 있겠습니다.집사람은 글쓰기도 그렇지만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문화답사도 즐겼지요. 제가 심장병에 공황장애까지 얻으면서 평생 제대로 여행 한번 가지 못했습니다. 아내와 동백꽃 피면 함께 보러가자는 약속을 했었는데 그 약속도 끝내 지키지 못했어요. 지금껏 일에 파묻혀 사느라 휴가 한번 얻은 적도 없거든요.-사장님이 걸어오신 길을 돌아보니 온전히 지역 출판을 지키는 일로만 살아오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길을 고집해 오신 이유가 있습니까. 어려움을 만났을 때는 다른 길을 걷고 싶으셨을 텐데요.걸어오다 보니 돌아갈 수 없어서 인 것 같은데.(웃음) 제가 80년대 초반에 알게 된 전주의 완판본 역사가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껏 완판본의 맥을 잇는다는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거든요. 완판본은 정말 위대한 유산입니다. 자산으로도 그렇고 그 의미와 가치로도 비교할 수 없는 자랑스러운 문화지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가 위대하지만, 실제로 신분사회였던 봉건시대에 서민들을 일깨운 것은 완판본이란 생각이 들어요. 언젠가 책의 역사를 들여다보니 조선시대 조정에서 실제로는 책을 보급하지 못하게 했더군요. 역관들이 책을 사와 서점을 만들려고 했는데 그들 중 두 명을 처형을 했다는 기록을 보았어요. 먹물이 들어가면 안 되는 상황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겠죠. 그런 질서를 변화시킨 것이 완판본 아니겠습니까. 오일장에 나가면 완판본으로 제작된 책을 바닥에 펴놓고 팔았다는 것 아닙니까. 저는 그래서 완판본이 정말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완판본의 역사를 신아가 이어가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보람은 충분 할 것 같아요. 앞으로도 지역 출판을 지켜가야겠다는 힘도 생기고요.신아는 지역에서는 유례없는 출판사로 꼽힌다. 지금까지 낸 단행본만 4천여 종, 여기에 4개의 문학상과 11종의 정기간행물을 이어가고 있는 신아의 존재는 전주 출판문화의 자존심이 되었다.그가 써온 지역출판의 역사가 이제 더 빛나게 될 것 같다.● 서정환 대표는- 수천종 단행본정기간행물로 지역출판문화 선도서정환 대표는 순창 구림면에서 태어났다. 1940년생이니 올해로 일흔 일곱. 물리적(?)으로는 은퇴할 나이지만 그는 지금도 인쇄사와 출판사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현역이다.그의 아버지는 특별한 직업이 없었지만 할아버지 대에 일군 재산 덕분에 어렵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5남매 중 맏이였던 그는 스스로 알아서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다. 덕분에 부모님은 큰아들에 대한 기대가 컸다. 남아 있던 논과 밭을 팔아 온가족을 이끌고 전주로 나온 것도 큰아들을 제대로 공부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세상 물정에 밝지 못했던 아버지는 집을 사고도 등기를 하지 않아 집값만 날린 채 온 가족을 거리로 나앉게 했다. 졸지에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가족들을 지키고 먹여 살리는 일은 온전히 큰아들인 그의 몫이 되었다. 나이 스물, 청년가장이 되었다. 방한 칸 없는 형편에 거리를 전전하다 전주역 관사 옆에 땅을 파고 움막을 만들어 일곱 명 가족들이 간신히 정착했다.신문배달부터 돈이 되는 일은 가리지 않고 했다. 성실한 그를 눈여겨 본 민국일보 지사장이 그에게 총무일을 맡겼다. 그즈음 민국일보가 발행하는 사보에 글도 썼다. 1965년 신아일보가 창간되면서 총무로 스카우트 되어 직장을 옮겼다. 글 쓰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그는 신아일보의 주재기자가 됐다. 2년 정도 기자 생활을 했지만 월급 없는 기자보다는 월급 있는 총무가 그에게 우선이었다. 한국일보 지사 총무를 거쳐 다시 신아일보 지사장이 되었다. 지사 운영을 책임 짓고 보니 신문 파는 일만으로는 매월 지대를 챙겨 보내기에도 빠듯해 그만두고 기자들의 권유로 프린트를 부업으로 삼았지만 곧 작파하고 사진관을 열었다. 그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로비를 잘해야 기관이나 단체 일을 맡을 수 있는데 그런 쪽으로는 영 재주가 없었던 까닭이다. 다시 신문사 지사를 맡으면서 프린트일을 부업으로 삼았다. 내친김에 인쇄소를 본격적으로 차린 것이 1970년, 〈신아문예사〉의 시작이었다. 직접 가리방을 긁어 등사하는 원시적(?) 인쇄업이었지만 주위의 도움으로 일이 몰렸다. 워낙 맨손으로 시작한 일이라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성실함으로 탄탄히 기반을 다지면서 출판업의 꿈을 키웠다. 그즈음 조선시대 책을 제작했던 전주의 역사적 위상과 의미를 알게 됐다. 1984년 〈신아문예사〉로 출판 등록을 낸 것은 전주를 다시 출판의 중심이 될 수 있도록 하는데 역할을 하고 싶어서였다. 이후 5~6년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조금씩 나아져 90년대는 부흥기랄 수 있을 만큼 사업이 번창했다. 〈소년문학〉 〈수필과 비평〉을 비롯한 문예지를 창간하고 단행본을 내기 시작했다. 올해 25년을 맞은 〈수필과 비평〉은 문학의 본격적인 장르로 인정받지 못했던 수필을 독자적 영역으로 자리 잡게 하는 통로가 됐다. 2000년대 인터넷이 일상으로 들어오면서 출판업은 위축되기 시작했다. 지역 출판 상황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경영은 어려워졌으나 기왕 창간한 문예지에 오히려 종합문예지와 다양한 장르의 문예지 창간을 더하고 연구자들의 활동을 북돋는 학술지 출판 지원에도 앞장섰다. 지금 신아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오고 있는 정기간행물은 11종. 월간 격월간 계간까지 해마다 신아의 이름으로 나온 수십 권의 문예지와 잡지, 수백 권의 단행본이 독자를 만난다. 지역 출판 역사에 유례없는 궤적이다.47년 〈신아〉의 역사는 2004년 세상을 떠난 아내 황의순씨와 그가 한눈팔지 않고 일궈온 열정의 결실이다. 출판문화의 본고장이었던 전주의 문화사가 〈신아〉의 노정으로 다시 새로운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7.09.15 23:02

가회민화박물관 윤열수 관장 "민화는 한국인 심성에서 태어나 서민정서와 흐름 같이 해"

조선시대 그림을 가장 잘 이해한 미술사학자로 평가받는 고 오주석씨는 생전의 강연을 통해 우리 옛 그림 안에는 우리가 지금 이 땅에 사는 이유, 그리고 우리인 까닭이 들어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우리 그림 하나 대기가 힘들다고 말하곤 했었다. 옛 그림이 지닌 아름다움과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환경을 안타까워한 말일 터다. 그가 펴낸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역시 그림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 그 속의 작가와 대화를 하는 것이 진정한 그림읽기라는 것을 일러주지만 언감생심, 오늘날의 교육으로는 미술, 특히 우리의 미술을 제대로 만나고 이해할 수 있기란 여전히 요원하다.이런 환경 속에서도 급격히 불고 있는 바람이 있다. 옛 그림, 특히 민화에 대한 관심이다. 정통회화와 배치되는 민화는 생활공간이나 민속적인 관습에 따라 제작된 실용화를 이른다. 조선 후기 서민층에서 유행하여 발전한 민화는 대부분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이름 없는 화가나 떠돌이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지만 민중들의 일상 속에서 활용된 특성으로 한국적인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 민중의 심성을 가장 쉽고 솔직하게 표현했지만 정통회화에 비해 완성도나 격조가 떨어진다 하여 한국미술사 연구의 본류에서조차 소외되어 왔던 민화가 21세기를 지나면서 다시 각광받게 된 상황은 흥미롭다.가회민화박물관 윤열수 관장(70)을 만났다. 남원이 고향인 윤 관장은 오랫동안 한국미술사에서조차 소외되어왔던 민화를 주목해 그 가치와 의미를 널리 알려온 민화전문가다. 1970년대 초, 민화 전문 박물관인 에밀레박물관 학예사로 들어가면서 민화연구를 시작한 그는 40여년 세월을 온전히 민화의 밭에서 보냈다.제 1세대 민화전문가로 꼽히는 조자용 선생으로부터 지식뿐 아니라 옛것과 대화하는 즐거움과 의미를 배웠다는 그는 민화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민족화라고 단언한다.민화는 한국인의 심성 속에서 태어난 그림입니다. 서민들의 생활정서와 흐름을 같이하지요. 그런 점에서 근래 들어 민화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높아진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에요.-박물관 찾기가 어렵더군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화전문박물관이 이렇게 낡은 건물 비좁은 지하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당황스러웠습니다.부끄럽습니다. 사실 말이 안 되는 상황이죠. 공간의 크기가 중요한 것은 아지만 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지하에 전시실이 있으니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습니다.-오랫동안 가회동 한옥에 자리하고 있지 않았습니까.2002년에 그곳에서 문을 열었어요. 저기 위쪽으로 한옥 지붕이 보이지요? 저곳이 민화박물관이었습니다. 서울시가 북촌의 가회동 일대 작은 한옥을 구입해서 작은 박물관을 만들겠다 해서 들어갔는데 이후 조례가 만들어지고 사용할 수 있는 기한이 정해지면서 우여곡절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쫓겨 나온 셈인데 좋게 말하자면 양보하고 나왔다고 할 수 있어요.(웃음) 2014년의 일입니다.-작은 박물관의 전형으로 소개되면서 해외 문화전문가들의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었는데요.2004년 세계의 무형유산전문가들이 모이는 세계박물관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는데 그때 우리 박물관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어요. 당시 한국을 방문한 전문가들이 유명한 박물관 말고 작은 박물관을 가보자고 했대요. 그래서 우리 박물관을 오게 되었는데 둘러보고는 바로 이것이라고 호감을 보였어요. 덕분에 해외 전시 의뢰가 이어졌지요. 돌아보면 그동안 세계 각국에서 초청을 받아 진행한 민화 전시가 아주 많았습니다. 내년 2월에도 모스크바 국립 동양박물관 초대전이 예정되어 있고 코스타리카 전시도 이어집니다.-그럼에도 현재의 박물관은 아무리 개인 박물관이라고는 하지만 비좁고 수장고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이곳을 찾아주시는 분들께는 참으로 죄송한 마음이죠. 더 중요한 문제는 자료 보관이 한계에 이르러 조만간 공간을 마련해야할 처지입니다. 당장 해결해야하는 절박한 과제이기도 합니다.-지금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니겠군요. 개인박물관은 아무래도 운영이 어려우실 텐데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습니까.에밀레박물관이 첫 직장이었는데 박물관 운영에 경험이 있다 보니 삼성출판박물관과 인천 길병원 가천박물관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그곳에 각각 몇 년씩 근무를 했었는데, 늘 내 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 꿈을 실현한 것이죠.-한국 미술사에서 소외되어왔던 민화를 주목한 것은 언제부터일까요.사실 1960~70년대 지식인들은 민화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깊었습니다. 한국 미술의 정체성을 민화로 보는 분들이 많았죠. 한국적인 민중 서민문화는 영정조 시대, 18~19세기 들어서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은데, 민화 또한 그때 발전했습니다. 민족문화를 이야기할 때 민화를 빼놓을 수 없어요. 안타깝게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민화의 존재가 묻혀버렸지만 야나기 무네요시 같은 사람은 한국의 민화를 불가사의한 최고의 그림이라고까지 칭송했어요. 그만큼 의미나 가치가 컸다는 이야기지요. 후에 조자용 선생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한국문화의 원형을 찾자는데 의기투합을 하게 되는데 그 통로가 민화였어요. 사라져가던 민화를 그때부터 수집하기 시작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관장님은 언제부터 민화를 수집하셨습니까.1973년에 에밀레박물관에 들어갔지만 처음에는 민화를 알지 못했어요. 그럴만한 계기도 없었고 지식도 부족했죠. 민화는 조자용 선생님을 모시면서 자연스럽게 눈을 뜨게 되었어요. 선생님은 민화를 구해오시는 날이면 특별한 의식(?)을 치렀는데 막걸리통과 그림을 앞에 두고 밤새도록 대화를 나누셨어요. 민화 속에 그려진 새와 꽃, 나무와의 대화였지요. 처음에는 이해하기도 어려웠고 옆에서 빈 술잔을 채워드리는 것이 제 역할이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 시간이 귀한 배움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민화의 세계에 자연스럽게 빠질 수 있었겠습니다.감사한 일이죠. 그러면서 수집에도 마음을 두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아현동에 골동품 가게까지 열고 민화를 모았습니다. 그때 그 가게가 민학회의 아지트였어요.-민화가 해외로 알려진 것도 그즈음부터인가요.해외전시를 이끌어낸 분이 바로 조자용 선생님인데 74년부터 미국에서 전시를 시작했고, 76년에는 미국 전역에서 순회 전시를 했었어요. 당시만 해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민화가 엿장수그림으로 폄훼되었지만 외국에서는 한국문화를 읽을 수 있는 진정한 통로가 되었던 겁니다.-근래 들어 민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민화인구도 많이 늘었죠.제가 동국대 대학원에서 민화로 석사과정을 마치고 강의를 시작한 것이 81년이거든요. 50명쯤 석사과정을 마쳤는데 그중 30여명이 민화전공자들입니다. 본격적인 연구 작업이 활발해졌다는 증거지요. 민화 인구만도 15만 명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습니다.-다른 전통문화유산과 비교할 때 민화의 가치는 어떻게 보십니까.한국문화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도자기나 불상, 혹은 건축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민화는 설득력이 있어요.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온전히 담아내고 있는 것이 민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민화는 오랫동안 미술사에서 외면당해왔고, 학문 연구 대상으로서도 무시되어 왔어요. 지금은 외국에서 우리 민화를 연구해 학위를 받고 들어온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반가운 일이죠.-민화의 가치와 의미는 어떤 기준으로 평가해야 할까요. 예술적 완성도가 우선인지 생활 속에서 쓰인 실용화로서의 의미가 우선인지 궁금합니다.민화는 예술성으로도 생활예술로서도 뛰어난 회화입니다. 궁중작가와는 또 다른 예술성과 창의성이 있어요. 추상적인 민화를 보면 그 경계가 더 넓어집니다. 민화는 대부분이 일상에서 사용하기 위해 이름 없는 화가들이 그린 것들인데 그래서 그림의 내용이나 형식이 자유롭습니다. 어떤 경우는 표현의 파격이 놀랍습니다. 한국인의 심성과 한국인의 기층문화 정신이 가장 긴밀하게 담겨진 그림이랄 수 있지요.-민화도 지역에 따라 특성이 있습니까.민화는 이제 대부분이 발굴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은데, 이름 없는 작가들이 남긴 작품이 대부분이니 뚜렷하게 지역적 특성을 분류하기는 아직 어렵지만 지역에 따라 민화를 즐겼던 정도는 확실하게 차이가 납니다. 강원도나 제주도의 민화는 많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아쉽게도 전라도 민화는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제 고향이 남원이어서 전라도 민화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는데 우선 수적으로 적으니 연구에 한계가 있습니다.-전주에도 대단한 민화작가가 있었다고 하던데요.민화는 대부분 정식 미술교육을 받지 못한 화가들이 그린 그림이었지만 계보와 유파는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민화는 그 경향이 더 강했을 수도 있어요. 전주 민화작가로는 장산파라는 사람이 알려져 있는데 그 솜씨가 빼어납니다. 전라도 천재라고 불릴 정도인데 제가 보기에는 민화의 천재라고 할 만큼 수준이 뛰어나요. 그런데 아쉽게도 그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가 없습니다. 한때 연고가 있다고 전해지는 삼례 지역을 찾아다녔었는데 흔적을 얻지 못했어요. 연구자로서 꼭 찾아내고 싶은데 전라도 민화를 정리하는 일과 함께 제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았습니다.2002년 서울의 북촌 가회동 한옥을 얻어 가회민화박물관을 열어 3년 전 지금의 북촌로 낡은 건물 지하로 이사해 간신히 전시실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지금까지 민화에 바쳐온 그의 시간은 곳곳에서 빛났다.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 민화의 족적을 따라 걷다보면 그 길목에서 어김없이 그를 만나게 될 뿐 아니라 발로 뛰며 발굴하고 수집해온 2000여 점 민화가 그 통로에 놓여있다.● 윤열수 관장은 40여년 민화 수집 외길윤열수 관장은 남원 아영면이 고향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수집에 취미가 있었다. 한 때 유행처럼 번졌던 우표수집이 시작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우표집이 제법 두툼해질 정도로 모아졌는데, 2학년 때인가 우표집을 통째로 도둑 맞았다. 수집에 바친 열정만큼 허망함이 컸으니 더 이상 수집에 마음을 두지 않았을 법도 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관심 갖지 않을 물건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적 수집은 그렇게 시작됐다. 사람들이 미신으로 치부해 가치 있는 물건이라고 여기지 않은 덕분에 부적을 모으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단순한 취미로 시작했던 부적 수집은 그에게 우리 문화의 소중함과 가치에 눈을 뜨게 했다.대학(원광대 영문과)에 들어갔지만 1학년 때부터 학교 박물관에서 일하면서 전공보다는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전역한 그해 곧바로 민화를 전문으로 연구하고 전시하는 에밀레박물관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민화의 중요성을 깨달아 사라져가는 민화를 수집하고 연구해 그 의의를 널리 알리는데 앞장서온 조자용 선생과의 만남은 그의 삶을 바꾸어놓았다. 그 또한 민화의 가치와 소중함에 눈을 뜨게 되어 전통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게 된 것이다. 75년 동국대 대학원에 들어가 본격적인 민화 연구 활동을 시작했다. 에밀레박물관에서 만난 아내(최진옥 전 정신문화연구원 교수)는 인생 뿐 아니라 학문의 동반자가 되어 그가 민화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고단한 일에 늘 큰 힘이 되어 주었다.민화 수집에 열정을 쏟았던 그는 전국 각 지역을 찾아다니는 일은 물론이고, 고물상까지 열어 민화를 모았다. 삼성출판박물관과 인천 길병원 가천박물관 설립에도 큰 역할을 했던 그는 2002년 서울 북촌 가회동의 작은 한옥을 얻어 가회민화박물관을 열었다. 2004년 최초의 민화 이론 전문교육기관인 가회민화아카데미를 설립해 민화 전공자들을 배출하기 시작했으며 전국어린이민화그리기대회와 같은 행사를 만들어 민화를 대중화하는 통로를 열었다. 〈문자도〉 〈무속화〉 〈산수화〉 등 박물관의 상설기획전은 물론 국내외 박물관의 초대를 받아 〈청계천으로 돌아온 물고기전〉 〈모란꽃 그림전〉 〈오방색 눈썰미, 호랑이도 꽃도 웃는 민화〉과 같은 흥미로운 주제전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였다. 민화를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일에도 열정을 쏟아 민화의 지역적 양식과 작가에 주목한 연구 성과로 민화 연구의 지평을 열었으며 〈민화이야기〉 〈민화〉 〈산신도〉 〈용, 불멸의 신화〉를 비롯해 20여권의 저서를 냈다.2006년부터 시작된 해외전시는 해마다 이어지면서 한국의 전통문화, 특히 민화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보고가 되었다. 2008년 창립한 한국민화학회 초대 회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월간 〈민화〉 초대 발행인으로 활동했다.가회민화박물관은 2014년 우여곡절 끝에 서울시 소유였던 가회동 한옥 공간을 떠나 북촌로의 오래된 건물 지하로 옮겨졌다. 제대로 된 수장고와 전시 공간을 갖춘 박물관을 마련하는 것이 그의 절박한 과제가 됐다.

  • 기획
  • 김은정
  • 2017.08.11 23:02

〈조선후기 실학자의 풍수사상〉 펴낸 유기상 전 전북도 기획실장 "풍수는 동양 전통사상…하늘·땅·사람이 소통하는 이치"

고령화와 저출산 시대, 인구가 감소하거나 정체되면서 지방 도시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사실 인구가 늘지 않고 감소하거나 정체된 상황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주목되는 것은 그 정도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30년 안에 적지 않은 지방도시가 아예 사라질 수도 있다는 전문가들의 분석까지 나오고 있으니 지방도시, 특히 작은 도시들이 처한 현실은 절박한 것임에 틀림없다.얼마 전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지방 침체의 위기를 우리보다 먼저 겪은 일본 지방 도시의 사례를 다룬 기사를 읽었다. 도시는 도시대로, 농촌은 농촌대로 다움의 가치를 살려 위기를 극복하고 지역을 살려낸 지혜가 돋보였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었다. 그 성공의 과정과 결실의 뒤에는 반드시 건강한 리더와 활동가들과 지역 주민들이 있었다는 것이다.오래전 실전으로 체험하고 연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 발 지방자치 정책실험〉을 펴낸 유기상 박사(61전 전라북도 기획실장)가 떠올랐다. 지방자치제도가 부활하던 90년대 초, 전북도청 사무관으로 일했던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가고시마대학원에서 지방자치행정을 전공했다. 그의 학업은 남달랐다.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연구에만 집중하는 것과는 달리 가고시마현청의 공무원 서클에 들어가 공부하고 주말에는 일본 농가들의 홈스테이를 경험하면서 문화적 정서를 공유했다. 그 결실은 빛났다. 고령화시대를 대비하는 실버산업이나 지방자치와 지역 경영, 문화산업 육성, 문화거버넌스 구축 등을 주제로 한 논문과 책으로 엮어졌다. 더러는 대학의 관련학과의 부교재가 되거나 더러는 담당공무원들의 교과서가 되었다.37년 공직생활을 끝내고도 여전히 배우고 공부하는 일을 일상으로 삼고 있는 유기상 전 전라북도 기획실장을 만났다. 지난해 전북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을 마친 그는 최근 박사논문을 새롭게 구성한 〈조선후기 실학자의 풍수사상〉을 책으로 펴냈다.논문의 주제도 의외였지만 지역과 지역의 자산을 남다른 시각으로 주목하며 자치단체의 정책으로 그 가치를 살리고 지켜내는데 앞장섰던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박사학위 논문 주제가 의외였습니다.제가 문화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하다보니 우리의 문화유산, 전통문화, 역사 쪽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어요. 유불선 모든 사상에 공통 코드가 있더군요. 풍수에 담긴 전통사상이었어요. 한국문화를 제대로 알려면 풍수에 대한 이해가 꼭 필요하겠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전주시에 근무할 때 고전번역원이 문을 열었어요. 제가 담당부서를 맡고 있었죠. 어린 시절 서당을 다녔던 경험이 있었는데 기회가 되니 공부를 다시 하고 싶더군요. 3기 수강생으로 들어갔죠. 3년 과정이었는데 충실히 공부하지는 못했으나 수료는 했습니다. 그때 공부한 것이 박사과정을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최근 펴낸 책이 〈조선 후기 실학자의 풍수사상〉입니다. 책을 보니 호남 실학자들을 주목하셨던데요.박사논문을 준비할 때 이재 황윤석 선생의 〈이재난고〉에 완전히 빠졌어요. 깊은 학식도 그렇지만 모든 방면에 걸친 풍부한 지식이 정말 놀라웠거든요. 오늘날 우리가 앞세우는 문화콘텐츠가 다 거기 담겨 있었습니다. 원소스 멀티유스라고 하는데 다양성 면에서 보면 일상 생활문화는 물론이고 영화 연극, 심지어 디자인까지도 활용할 수 있는 콘텐츠의 보고라 할 만하죠. 이재난고를 들여다보면서 고창 사람인데도 이렇게 대단한 학자를 모르고 살았다는 부끄러움이 컸습니다. 후학으로서 제대로 조명하고 싶었어요. 그것이 출발이었습니다.-이재의 학식이 그렇게 깊었습니까.이분은 어문과 역사 예술 천문지리까지 모든 분야를 다 통달하신 분 같아요. 심지어는 어원을 비교하는 책 까지도 있습니다. 오늘날 음운학 하는 사람들까지 이재를 연구하는 정도니까요. 제 생각에는 개인저술로 치자면 아마도 가장 방대한 저술을 한 분이 아닐까 싶습니다.-그중에서도 풍수에 집중하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워낙 이재의 저술이 방대하고 자료 또한 풍부하니 다양한 분야에서 주목해 수십 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상하게 잡학으로 분류되는 부분은 손을 대지 않았더라고요. 저는 애초 전통문화 분야를 주목했었는데, 그 뿌리를 좇다보니 풍수라는 전통사상에 이르게 된 것이죠.-실학은 경기도 쪽의 학자들이 주도했던 분야라고 생각이 되는데 호남의 실학은 그동안 왜 조명 받지 못했을까요.연구 자체가 그만큼 미진했다는 증거겠지요. 사실 호남학파는 용어도 없어요. 각광을 받은 사람들은 근기학파 실학자들인데 들여다보면 호남의 실학자들의 학문적 성과도 그렇게 만만하지 않거든요.-실학의 비조라 할 수 있는 반계 유형원이 부안에서 말년을 보내면서 〈반계수록〉 같은 명저를 남겼는데도 호남의 실학자들에 대한 조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물론이죠. 조선 후기 3대 호남 실학자로 황윤석 신경준 위백규로 꼽는데 연구 작업은 한결같이 미진합니다. 조명을 제대로 안했으니 그분들의 업적도 당연히 평가절하되고 있었던 것이죠.-지금이라도 호남실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조명작업이 절실하겠군요.아마도 호남 학자들이 제대로 조명이 안 된 이유는 오늘까지도 학문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기관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근기학파가 스타학자들을 여럿 배출해낸 것에 비교하면 호남 학자들은 너무 많은 부분이 묻혀있어요.-풍수 이야기를 좀 들어보죠. 정통 학자들이 풍수를 사상으로 받아들이고 삶속에 그러한 사상을 실천하고 구현했다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호남쪽 학자들만의 특성인가요.그렇진 않습니다. 풍수는 고려시대부터 천년동안 관학이었습니다. 국가공무원이 연구하고 실행했던 학문이었다는 이야기지요. 풍수를 미신으로 취급해 전통사상의 개념까지 덮어버린 것은 일제강점기예요. 일제의 식민 정책으로 우리의 전통사상까지도 식민화 시켰잖아요. 그 가운데 하나가 풍수예요. 풍수는 조선의 탄탄한 기층문화였거든요.-정식 학문의 영역이었다는 게 흥미롭습니다.잡과로 학과에 들어가 있었고. 경국대전에도 고시과목으로 분류되어 있었어요. 기술학 과목으로 음양과가 있었잖아요. 풍수 10개 과목을 봐서 정식으로 채용을 하는데 채용된 사람을 지관이라 했죠. 6품이 책임자였는데, 정인지 같은 사람이 풍수학을 강의했습니다. 풍수가 공식 학문과 공식 관청에서 사라진 것이 일제 강점기인데 해방이 되고도 제자리를 찾지 못했던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풍수를 학문의 반열에 올린 분이 최창조 교수고 그 뒤를 잇는 분이 김두규 교수예요.-그동안 풍수 연구를 하는데 자료도 한계가 있었겠군요.그런 셈이죠. 풍수 연구의 기본 원전을 〈경국대전〉이나 〈조선왕조실록〉 같은 공식 관찰 사료에 의존해야 했었으니까요. 간혹 있다고 하는 것이 유학자 문집인데, 그 문집에는 풍수 분야가 들어있지 않았을 겁니다. 풍수를 철저하게 일상에서 활용하면서도 잡학으로 치부하고 부끄럽게 여겨 후손들이 없애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이번에 연구하면서 보니 유성용의 형님인 유운용은 풍수 역학의 대가인데 유언으로 반드시 풍수 등을 공부하라고 일렀더군요. 가학으로 효도를 하기 위해서라도 풍수를 꼭 하라고. 이번에 연구하면서 이재난고의 내용과 비교하면서보니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조선시대 유명한 풍수사 지관 20-30명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알 수 있겠더라고요. 덕분에 조선시대 풍수사의 공백을 거의 복원할 수 있었어요. 그만큼 이재난고가 대단한 저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민간 기록이 지닌 가치가 참 큰 것 같아요. 관찰 사료가 갖지 못한 내용까지도 다 담아 놓은 기록들이 많지 않습니까.물론입니다. 이재난고가 그 대표적인 자료인데 안타깝게도 아직 한글로 번역되어 있지 않거든요. 이재난고는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초서를 정서로 만드는데 만 열 일곱 권, 10년 걸린 작업입니다. 현재 번역 사업을 진행 중이긴 한데 그 과정이 너무 더뎌 국가차원의 적극적인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지요. 이재난고는 민속 생활사를 비롯해 모든 전통문화 콘텐츠의 보고라 할 만 합니다.-이제 화제를 좀 돌리겠습니다. 그동안 저술하신 논문이나 책을 보면 지방자치, 지역, 역사문화유산, 지역의 자원 이런 것들에 관심이 많으신데요. 계기가 있었습니까.개인적으로는 일본 유학이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본 유학은 93년부터 2년 6개월 동안 석사과정으로 거쳤는데 그때 우리나라가 지방자치를 앞두고 있던 시점이어서 일본 지방자치정책을 공부했습니다. 당시는 국제교류 업무가 없어 전라북도와 가고시마 국제교류의 창구 역할도 했어요. 개인적으로는 가고시마현청의 공무원 서클에 들어가 정책 연구 활동도 함께 하고, 주말에는 일본 농가들의 홈스테이를 경험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어요. 지역의 가치를 알게 되었죠.-우리나라와 일본은 기본적으로 다른 점이 많은데 정책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습니까.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우리 실정에 맞게 적용하거나 활용할 수 있는 점들이 많았어요. 그때 강하게 와 닿았던 일본 정책을 돌아보며 〈일본발 지방자치 정책실험〉이란 책을 냈는데, 당시 고령화 사회를 앞두고 지방자치단체의 과제가 노인복지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노인복지를 분석한 책을 냈지요.-공직에 계실 때는 문화 분야 정책과 사업에 남다른 관심을 쏟으셨습니다. 성과도 컸고요.돌아보니 업무의 대부분이 문화 분야에서 이뤄졌더군요. 좋은 체험이었죠. 전주한옥마을 조성, 전주영화제, 전주세계소리축제, 월드컵경기장, 자연하천형 전주천 조성,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등재 등 우리 지역의 빛나는 문화 자원을 만드는데 참여했으니 감사한 일입니다.-고창은 어떻습니까. 역사문화자원이 어느 지역보다 좋은 곳아 인구 감소나 정체 위기에도 자생력과 성장 가능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고창은 제 고향이어서가 아니라 역사문화자원이나 농업자원이 워낙 탄탄하고 뛰어납니다. 예전부터 이런 자원을 하나로 묶는 10차 산업을 실험하기 가장 좋은 지역이 고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죠. 인구 6만 명에 역사문화자원이 산재해있고, 좋은 농업자원이 있으니 이것을 잘 엮으면 10차 산업의 메카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과 희망이 있습니다.-풍수로 보자면 고창은 어떤 지역입니까.최고죠. 결국은 땅의 기운인데, 저는 풍수사상을 하늘 땅 사람이 함께 어울려서 살아가는 지의 틀이라고 정리합니다. 천지인 합일사상이지요. 결국 하늘과 땅이 소통하는 기운이 풍과 수거든요. 고창은 산과 들 강 바다, 자연 환경이 다 갖춰져 있습니다. 고인돌이 있던 자리만 봐도 정확하게 풍수상 명당이거든요. 그 시대의 조상들은 하늘과 자연과 소통하는 교감 능력이 뛰어났던 것 같아요. 고창은 또 한편으로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땅입니다. 유형유산인 거석문화의 고인돌이 있고, 무형유산으로는 판소리와 농악이 있습니다. 곰소만 갯벌은 람사르 습지 갯벌 중에서도 세계 최고로 종의 다양성이 많습니다. 생물 다양성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건강하고 사람 살기 좋은 땅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아니겠습니까.-하실 일이 많은데 너무 고향에 빠져 지내시는 것 같습니다.(웃음)공직에서 물러나면 고향으로 돌아가 고향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바람을 오랫동안 가져왔습니다. 일하는 것도 때가 있으니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서두르지 않고 준비하고 있습니다.고향에 돌아와 둘러보니 할 일이 적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지역을 성장시켜나갈 사람을 키워내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기회가 된다면 고창을 인양(人養) 고창으로 만드는 일에 역량을 쏟고 싶습니다.● [유기상 박사는] 9급으로 공직 시작, 1급으로 은퇴유기상씨는 1956년 고창군 월산리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3남 2녀를 둔 부모님은 먹고 살기도 빠듯한 어려운 살림에서도 남들보다 더 가르치겠다는 교육열이 높았다. 특히 어머니는 생활력이 강해 나무를 지고 장에 나가 팔기도 하고, 나물 장사도 하면서 자식들의 학업을 도왔다. 큰 굴곡 없이 고창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애초 학비 안드는 육군사관학교를 가고 싶었다. 돈 들지 않고 노력으로 하는 일이라면 자신 있었으나 번번이 2차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돈부터 벌어야겠다 싶어 서울로 갔다.20대 초반, 그의 삶은 지난했다. 팔리겠다 싶은 물건은 가리지 않고 떼어다 파는 행상부터 술집 웨이터와 기도까지 가리지 않고 일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유도선수였던 덕분에 마음만 먹으면 할일은 널려 있었지만 그대로 가다가는 하루살이 인생이 되겠다 싶었다. 총무처가 공모한 9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한 것은 안정된 직업을 갖고 싶어서였다. 공무원 생활은 서울 불광동 우체국에서 시작했다. 군대에 다녀와 복직을 한 즈음 방송통신대가 문을 열었다. 행정학과에 들어가 학사과정을 마쳤다. 경력에 따라 승급이 되었지만 7급 공채 시험에 응시해 노동부로 옮겼다. 기왕에 공무원을 하려면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자 전주사무소를 지원해 내려왔다. 내친김에(?) 행정고시에 도전했지만 뜻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합격한 것은 서른 세살, 35세 나이제한으로 보면 거의 막차를 탄 셈이었다. 내무부를 지원해 서울로 올라갔으나 얼마되지 않아 다시 고향으로 왔다. 이후 전주시 문화과장과 문화영상산업국장, 전라북도 문화관광체육국장, 익산시 부시장을 등을 두루 거쳤으며 전라북도 기획실장을 끝으로 37년 공직생활을 마쳤다.인생의 전성기를 공무원으로 보내는 동안 그는 전주와 익산, 전라북도의 문화 분야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는데 각별한 공력을 쏟았다. 전주한옥마을 조성, 전주국제영화제와 전주세계소리축제,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등재 등 의미있는 문화적 성과들이 직간접적으로 그의 손을 거쳤다.오랫동안 주경야독의 일상을 지켜온 그는 일본 가고시마대학원에서 지방자치행정으로 석사를, 전북대 대학원 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쳤으며 〈일본 발 지방자치 정책실험〉 〈실버산업을 잡아라〉 〈일본의 지방자치와 지역경영〉 〈고창사람 유기상의 꿈〉 〈조선후기 실학자의 풍수사상〉 등의 저서를 냈다. 공직에서 은퇴한 직후 귀향, 고향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도모하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7.07.07 23:02

전주국제영화제 특별전 주인공 송길한 시나리오 작가 "내가 생각하는 좋은 영화는, 발과 가슴으로 쓰고 만드는 것"

전주시 고사동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 1층 전시실에서는 흥미로운 전시가 열리고 있다. 지난 5월 6일 막을 내린 제 18회 전주국제영화제가 마련한 작가 송길한 특별전이다. 작가 송길한, 영화의 영혼을 쓰다란 부제가 붙은 이 전시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원로작가의 손끝에서 태어난 수십 편의 영화가 한국영화사의 기록이 되어 관객들을 만난다.전시실 입구, 기획자는 그를 이렇게 소개한다. 한편의 영화가 이룬 성취가 감독의 전유물로 인식되는 가치의 장안에서 작가 송길한은 맹렬한 창작의지와 일관된 세계관으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어냈다.70년대 초반, 한국영화의 암흑기로 분류되는 이 시기에 영화판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70여 편의 영화로 그 자신 한국영화사의 굵은 궤적이 된 시나리오 작가 송길한씨(77)를 만났다.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당선작이자 첫 영화 작품인 〈흑조〉로부터 반공영화의 상징적 이름이 된 〈짝코〉,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해 주목받았던 〈만다라〉와 〈씨받이〉를 비롯해 시간을 뛰어넘는 수십 편 역작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였던 그의 삶과 영화 인생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인터뷰의 의도는 빗나갔다. 영화 이야기는 순조로웠으나 정작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어놓은 가족사나 사적 공간의 이야기는 완곡하거나 단호하게 비껴가는 그의 화법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인터뷰는 편하고 즐거웠다. 늘 상대방을 살짝 긴장시키는 직설적인 화법이 그의 진정성을 온전히 전해주는 덕분이었다.-올해 전주영화제에서 작가 송길한 특별전시를 기획했습니다. 전시를 둘러보니 시나리오 작가 40여년 세월의 무게감이 크게 와닿았습니다.73년 첫 작품부터 근작까지 모아놓고 보니 적지 않은 작품을 썼더군요. 돌아보니 분단과 독재와 치열했던 민주화 과정의 시간을 체험한 세대로서 영광이나 자긍심보다는 부끄러운 작업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나의 역사이니 감출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많은 작품을 임권택 감독님과 함께 하셨더군요. 원로배우 김지미씨 역시 80년대 대표작 대부분에 출연했었던데요.가족 같은 관계가 되었어요. 김지미씨와 내가 동갑이거든요. 임감독님은 그 이전에 만났지만 김지미씨와 나는 마흔다섯 살 이후 영화인생을 함께 걸어왔습니다. 서로 개성을 존중해주면서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마음을 모았고, 지금까지 큰 갈등 없이 같이 늙어 간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큰 축복이고 즐거움이고 행복입니다.-시나리오는 어떻게 시작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원래 문학도이셨습니까.중고등학교 시절 영화는 많이 보았지만 시나리오를 쓰겠다거나 문학을 하겠다거나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가려고 했던 길은 사실 이 길이 아니었어요. 내 삶의 반경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가족사가 길을 바꾸어 놓았죠. 그저 앞만 바라보고 살아오다 나이 60이 될 즈음 돌이켜보니 내가 가고자 했던 길은 초장부터 가로막히고 궁극적으로 내가 하려고 했던 모든 것은 제어 당했는데, 결국 여기까지 왔으니 이 길이 숙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70년대, 시나리오 작가로 등단한 직후부터 놀라울 정도로 다작을 하셨더군요. 그만큼 글쓰기가 자유로우셨습니까.젊은 시절에는 무엇을 절제한다는 것에 익숙지 않았어요. 다만 분단민족으로서 안아야했던 사상 검열의 문제가 늘 무거운 과제였죠. 나의 30대와 40대 한국 영화의 생태 현장은 군부가 거의 장악하고 있었어요. 영화도 철저하게 사전 검열하던 엄혹한 시절이었죠. 참으로 어려웠어요. 예술은 자유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늘 감시당하고 있다는 강박 속에서 창작정신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었겠습니까.-작가로서 겪어야 했던 내적 갈등을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이런 상황을 어떻게 피해나가느냐는 것도 또 하나의 예술이라고 생각했어요. 멋모르고(?) 읽히게 하되 그 안의 뜻은 잃지 말자는 의도가 은연중에 담겨 있었고, 숨겨진 메시지를 담고자 했어요. 워낙 반골 기질이 있었는데 엄혹한 시대 상황 속에서 그것을 들키지 않아야 하니 괴로운 시절이었습니다.-70년대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는데도 엄청난 양을 쓰셨습니다.생계를 위한 일이었으니까요. 거의 주문 생산하는 글쓰기로 작품을 냈다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공장과도 같았죠. 그런 싸구려 글쓰기로 70년대를 보냈어요. 그러면서 문득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차라리 길거리에서 생선장사를 하던 튀밥장사를 하던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양심적이고 나답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는 작가로서의 자존심이나 명예로움 이런 것은 아예 잊고 살았던 시절이었습니다.-그런 시절을 겪으셨으니 영화다운 영화에 대한 갈증이 더 컸겠습니다.그랬던 것 같아요. 임권택 감독님을 만난 이후 우리만의 고유한 작품, 세계적으로도 우리가 보여줄 만한 작품을 만들자는데 마음을 모았어요. 그런 과정에서 나온 영화가 〈길소뜸〉입니다. 분단국 영화로서 각광받았던 영화죠. 이어진 〈만다라〉도 그렇고요. 아쉬운 것은 우리가 당시 해외영화제에 대한 정보도 없고, 스킬도 부족해 우리 영화를 돋보이게 할 만한 전략이 없었다는 것인데, 어느 해인가 베를린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한국에 왔을 때 그때 그랑프리는 〈만다라〉였어라고 하더군요.-〈길소뜸〉이나 〈만다라〉는 한국영화사의 굵은 족적이기도 하지만 한참 지난 세대들에게도 주목받는 역작이지요. 80년대 사회적 이슈가 됐던 〈비구니〉는 어땠습니까. 김지미씨가 왕성하게 활동을 하다가 한동안 영화계에서 물러나있던 시기가 있습니다. 〈비구니〉는 김지미씨가 그 휴지기를 딛고 재기하려는 강력한 의지의 통로였고, 임감독님이나 내게도 의미가 큰 영화였어요. 당시 문을 연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에게도 창립 영화라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지요. 사실 〈비구니〉는 김지미씨가 제안했던 영화였습니다. 원기획자라고 할 수 있죠. 어쨌든 이 영화에 대한 기대나 열망은 컸습니다. 나와 임권택 정일성 감독은 전국의 사찰을 찾아다니며 취재했어요. 동국대 승가대 학생들의 관심도 컸는데 그들이 제공해준 책과 자료로 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이 사람들을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강박감을 안게 되었지만 그만큼 제대로 해볼 만한 소재라는 자신감이 생겼어요.-사회적으로도 큰 이슈가 되었었죠.당시 촬영이 5분의 1 정도 되었었는데 비구니들이 거리 시위에 나섰어요. 제작을 중단하라는 것이었죠. 여기에 맞서고 영화인들은 창작의 자유를 들고 나서고. 그러다 법정까지 갔어요. 엄청난 사건이었죠. 결국은 영화사측이 제작을 포기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는데 안타까운 것은 영화의 본질이 왜곡되었다는 것이에요.-화제를 좀 바꾸겠습니다. 고향을 떠나신 지는 오래되었죠.대학에 가면서 떠났으니 50년대 후반인데 그래도 어머님이 계셨으니 자주 오갔습니다. 나는 고향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냉담해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더구나 전주영화제가 만들어지면서 전주에 대한 애정이 더 뜨거워졌지요.-아직은 말할 때가 아니라고 하시지만 선생님의 삶을 결정짓게 한 가족사를 짐작하게 됩니다.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던 청년기의 좌절감이 오히려 글을 쓰는데 는 단단한 동력이 되지 않았을까요. 시나리오를 쓰게 된 특별한 계기가 궁금합니다.한심한 시절이었어요. 조선일보사 옆에 동시상영을 하는 극장이 있었는데 빵값만 있으면 하루 종일 극장에서 영화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요. 어느 날부터인가 영화 대사를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어요. 그 무렵 동아일보 신춘문예 공모가 났죠.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써서 응모했습니다. 당시 오영진 김정옥 선생이 심사위원이었어요. 신선했는지 습작도 안 해본 초짜의 글을 당선시킨 겁니다. 신춘문예에 당선되면 삶이 달라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1년이 지나도록 찾아오는 사람 한명 없는 거예요.(웃음) 어느 날 찾아 오긴 했는데 〈흑조〉(신춘문예 당선작) 수준을(?) 좀 낮춰 영화로 만들자고 하는 거예요. 못한다고 했죠. 또다시 1년 정도 잠잠했는데 이번에는 제작자가 원작 그대로를 영화로 만들자고 왔어요.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첫 영화 〈흑조〉예요.-신춘문예 작품이 영화화 되는 예는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겠습니다.그렇죠. 신춘문예는 우선 상업성과는 거리가 멀어야 하는데 그 당선작이 영화화 되었으니까요. 그 뒤로는 의뢰가 오면 무조건 썼어요. 주문 받아 원고를 써주는 소규모 공장을 차린 셈이었죠.-갈등은 없었습니까.왜 없었겠어요. 정신없이 10여년 지나고 보니 뭐하는 짓인지 싶었어요.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는 깨달음이 있었는데 80년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그런 작업을 하고 있는 내 삶이 비루하게 느껴졌어요.-그즈음 임감독님을 만나신거군요.영화제작사에 한동안 몸담았다가 그만두고 임감독님을 만나 10년 동안 10개 작품을 스트레이트로 만들었죠. 그 첫 작품이 〈짝코〉였습니다. 반공영화로 잘 만들었다하여 두 번씩이나 상을 받았으니 대표작이라 할 만하죠. 그런데 사실 그 영화는 단순한 반공물이 아니었어요. 소설 원작을 각색한 것인데 남북분단의 상황을 휴머니즘의 가치로 조명한 작품이에요. 당시에는 발상자체가 조심스러웠죠. 다행히 검열 과정에서 중요한 부분 5분 정도 잘려나간 것이 전부였어요.-한국영화의 오늘을 어떻게 보십니까.머리로 쓰고 머리로 만드는 이야기들, 상업적 테크놀로지를 바탕으로 보면 상당한 수준이랄 수 있지요.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좋은 영화란 발과 가슴으로 쓰고 만드는 영화예요. 요즈음 영화를 보면 그래 저렇게 만들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다만 내 경우도 기교나 내러티브 같은 부문이 좀 더 젊고 싱싱해질 필요는 있겠다는 생각은 합니다.-영화 제작 환경과 관련이 있겠지요.물론입니다. 시스템 자체를 요지부동한 자본력이 뒷받침하고 있으니 모두가 각자 도생으로 그 그늘로 못 들어가 안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요. 영화 정신보다는 자본이 우선이 되는 환경은 씁쓸합니다.-독립영화 정신을 지켜가는 영화인들도 적지 않은데요.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 아닐까요.독립영화 저예산영화를 지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습니다. 나는 앞으로 독립영화가 건강성을 지켜간다면 분명히 독립영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타 시스템에만 얽매여 큰 자본을 들이지 않고 저예산으로 제작한 영화라도 이야기의 질이 어떤 것이냐에 관객들이 따라와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요.세계 어느 영화사를 보나 소위 뉴웨이브라고 하는 것은 자본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신과 가치로 이어져 왔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는 그런 면들이 확고하지 못하죠. 그런 점에서 보면 전주국제영화제가 독립영화를 주목하고 지지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제자나 후배들에게도 그런 정신을 강조하십니까.물론입니다. 그러나 경계를 두고 예술영화만 하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상업영화도 알아야죠. 중요한 것은 어떤 정신으로 영화를 만드느냐는 것이니까요. 자신의 가치관, 지향점을 찾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입니다.영화는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삶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함께 고민하고 치유하고 북돋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그에게는 아직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시대정신을 담은 깊고 탄탄한 시나리오와 독립영화 정신을 가진 감독이 만나 좋은 영화 한편 만드는 일이다. 뚜렷한 작가정신으로 구축한 세계로 한 시대를 지켜온 원로 작가를 작품으로 다시 만나게 되는 일,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송길한 작가는] 만다라우상의 눈물씨받이 등 80년대 한국영화 대표 거장시나리오 작가 송길한씨는 1940년 전주 교동에서 태어났다. 북중을 거쳐 전주고를 졸업한 그는 대학을 위해 서울로 갔지만 아직은 밝힐 수 없는 가족사의 굴레 때문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10대와 20대를 건너던 시절, 그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차라리 잘했다는 어머니의 위로가 힘이 됐다. 대한석탄공사 시험에 합격하자 노무 행정직이 아닌 현장직을 선택했다. 강원도 도계에 탄광에서 채탄부로 일하다 광업소장의 권유로 행정직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서울로 다시 왔다. 특별한 직장을 얻지 못해 막노동부터 시장 공판장에서 지방에서 올라온 쌀을 내리고 올리는 일까지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서러운 시절이었다.조선일보사 옆에 있던 코리아시네마 극장을 알게 됐다. 하루 두 번 동시 상영을 하는 영화를 보며 시간을 때웠다. 어느 날부터인가 영화 속 대사를 외워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다.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흑조〉를 응모해 당선했다. 2년만에 이 작품을 영화화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73년 발표한 〈흑조〉는 신춘문예 당선작이자 그의 첫 영화작품이 됐다. 이후 10여년 동안 시나리오 주문이 밀어닥쳤다. 무엇을 쓰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는 글쓰는 기계처럼 주문을 받고 생산하는 글쟁이가 됐다. 자성의 시간이 찾아왔다. 이대로 간다면 내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혹했던 80년대 초반, 임권택 감독을 만났다. 반공영화 〈짝코〉를 시작으로 의기투합, 시대정신을 함께 한 임 감독과 파트너가 되어 지금까지 가장 많은 영화를 함께 만들었다.〈만다라〉 〈우상의 눈물〉 〈안개마을〉 〈길소뜸〉 〈티켓〉 〈씨받이〉 등을 발표했던 80년대 그는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우뚝 섰다. 백상예술상과 대종상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영화상이 그의 작품을 불러들였고, 주목받는 신인감독들에게도 그의 작품은 시대적 영감을 불어넣었다. 2000년 전주국제영화제를 만드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그는 부집행위원장을 거쳐 지금은 고문을 맡고 있다.2010년 임권택 감독의 〈달빛 길어 올리기〉를 끝으로 각색 작업은 중단되었으나 여전히 시나리오 쓰는 일에 마음을 두고 있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는 한국영화사에 굵은 족적을 남긴 그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특별전을 개최했다.

  • 기획
  • 김은정
  • 2017.06.02 23:02

역사·고전 중점 출판하는 서해문집 김흥식 대표 "문명 흔적 담은 백과사전 발간 평생의 과제"

종이책이 외면 받는 시대다. 출판유통시장 매출 규모는 해마다 줄어들거나 정체된 상태고, 신간 발행종수 역시 감소하고 있으니 이미 종이책은 그 존립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실 종이책의 위기는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거니와 우리나라만이 처한 현실이 아니다.그렇다면 이제 종이는 더 이상 책의 유효한 그릇이 될 수 없는 것일까. 출판의 형식과 유통방식이 달라지면서 종이책의 존재가 위협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아직 종이책의 존립은 건재(?)하다. 국민 독서율이 높은 영국의 경우, 2018년에는 전자책 매출이 종이책의 매출을 추월할 것이라는 예고가 있었다. 태블릿 기기 이용으로 영국인들의 독서 습관이 변화하고 있는 추세에 따른 변화다. 그러나 최근 영국인들이 전자책을 멀리하고 종이책으로 회귀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흥미로운 보도가 있다. 예상과는 달리 전자책의 약세는 미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그럼에도 책을 읽는 인구가 갈수록 줄어드는 현실로 보자면 종이책의 미래를 기대하는 일은 무모하다. 게다가 경제 논법으로 따지자면 출판 산업은 미래 산업이 되지 못한다. 한해에도 적지 않은 출판사가 들고 나는 현실이 그것을 증명한다.30년 가깝게 출판사를 운영해오면서 그 자신 책의 저자이자 번역자이자 출판기획자로 살아온 도서출판 서해문집 김흥식 대표(60)를 만났다. 인문과 역사와 고전을 주목하면서 특히 역사와 고전을 독자들과 가깝게 만드는 작업을 신념으로 지켜온 그를 만나면 종이책의 유효함, 책읽기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1989년 서해문집을 세워 이듬해부터 책을 내오기 시작한 그는 다른 출판사들이 주목하기를 꺼리는 역사와 고전을 일찌감치 부터 출판사의 중심에 세워놓았다. 서해문집의 대표시리즈인 〈오래된 책방〉이 그 기둥이다. 그중에서도 직접 번역해 출간한 〈징비록〉은 그의 신념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대표적 결실이다. 출판사 직원들조차도 출판을 만류했었다는 이 〈징비록〉은 어느 날부터인가 슬슬 팔려나가기 시작하더니 드라마로 제작되면서 베스트셀러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으며 이 흐름을 타고 20여개의 출판사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징비록〉 짝퉁(?)을 펴내면서 고전 출판의 물꼬를 열었다.초기에 냈던 책들은 사실 제가 내고 싶은 책들이 아니었어요. 팔릴 것을 생각하며 낸 책들이었죠. 그런데 생각만큼 팔리지도 않았어요. 어느 날 문득 평생 출판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으니 내가 내고 싶은 책만 내다 그것도 안 되면 우동집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 각오로 처음 기획한 것이 〈오래된 책방〉시리즈예요. 어떻게 하면 고전에 독자들을 쉽게 다가가게하고 읽히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끝의 결정이었지요.인터뷰는 예상보다 길어졌다. 그의 소문난 독서편력은 풍부한 지식이 되어 전해지는 책이야기와 시대를 바라보는 명쾌한 관점과 분석으로 담겨져 시간을 잊게 했다.책 읽는 사회와 좋은 책을 만드는 나라를 꿈꾸는 김 대표와의 인터뷰는 덕분에 즐겁고 유쾌했으며 책읽기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깨닫게 하는 통로가 되었다.-서해문집은 언제 시작하셨습니까.등록은 89년에 했는데 책은 그 이듬해부터 냈습니다. 그때는 직장을 다니면서 출판사를 운영했어요. 대학 3학년 때 출판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거든요. 그러나 출판사를 운영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아 돈을 벌어야 했어요. 10년 동안 직장 생활을 했지요. 출판사는 그때까지만 해도 허가제여서 마음대로 등록을 못했어요. 허가제가 풀리면서 일단 등록을 한 것인데, 직장 생활을 하고 있으니 1년 정도는 이름만 갖고 있었던 거죠.-1990년부터는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출판에 뛰어드셨나요.곧바로 전념한 것은 아니었어요. 개인적으로는 제 인생에 의미 있는 일로 꼽고 있는데 직장을 그만두자마자 〈영화저널〉이라는 주간지를 창간했어요. 영화비평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주간지입니다.-쉽지 않는 일이었을 것 같은데요.당시 영화나 연예 관련 주간지는 〈선데이서울〉 등 선정적인 잡지가 대부분이었어요. 그런데 영화전문 비평을 내세웠으니 대중적인 관심을 기대할 수 없었죠. 다행히 영화계에서 아주 반가워했어요.-운영 자체가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처음에는 무가지로 나왔는데. 나중에는 자금이 없어서 유가지로 돌렸죠. 지하철에서 팔려야 하는데 그 통로를 뚫기도 쉽지 않았어요. 판매하는 곳에서는 이런 신문을 누가 보냐는 식이었죠. 그래도 몇 군데서 받아주어 팔기 시작했는데, 저희도 놀랄 정도로 팔려나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1위가 일요신문, 2위가 영화저널이었죠. 파는 사람들도 깜짝 놀라더군요. 글자밖에 없는 영화지가 그렇게 팔려나가니. 그러나 신문은 사실 광고가 뒷받침되어야 운영이 되는 것이잖아요. 우리는 그런 능력이 없었어요. 영화전문가들까지 힘을 보태며 노력했지만 결국은 손을 들었는데, 그 시점에 그냥 접기가 너무 아쉬웠어요. 한겨레신문사를 찾아가 영화전문주간지를 만들어보라고 제안했어요. 〈씨네 21〉이 그래서 탄생하게 되었죠.-영화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습니까.영화를 좋아한 이유죠. 그 당시 정보를 다루는 무가지들이 나오기 시작할 때였는데, 자본주의적인 것 말고 영화를 제대로 알리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다가 후배와 의기투합한 것이 〈영화저널〉이었어요. 30대 초반이었는데 그나마 모았던 돈 다 없애고 다시 저는 거지가 됐죠.(웃음) 그래도 우리나라에 영화비평 저널을 뿌리내리게 했다는 보람이 있습니다.-그리고 나서 서해문집으로 돌아오셨군요.서해문집으로 돌아와 출판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그러나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어요. 출판사를 운영하려면 자금이 필요했죠. 직장을 다시 얻어 일을 했어요. 5년 정도 일하면서 돈을 다시 모았어요. 자연히 그 시기 서해문집은 유명무실했죠. 몇 권 낸 책도 좋은 책은 아니었어요. 2000년 4월 직장에 사표를 내고 이제는 내고 싶은 책을 내자 마음먹었습니다. 그런 각오로 처음 기획한 것이 〈오래된 책방〉 시리즈예요.-〈오래된 책방〉의 기둥이 된 〈징비록〉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직접 번역까지 하셨죠.조그만 출판사이다 보니 처음에는 번역자를 만나기도 어려웠어요. 나서는 사람이 없어 제가 할 수 없이 하게 된 것입니다. 징비록은 제가 좋아하는 책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그 책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직원들이 누가 읽겠느냐며 출간을 반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지요.-그런데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하셨잖아요.내심으로는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가치 있는 책이니 내야한다고 고집했어요. 조금씩 팔리기 시작했는데 1년쯤 지나고 〈불멸의 이순신〉이 드라마로 제작되면서 갑자기 〈징비록〉을 찾는 독자가 급속히 늘어나는 거예요. 드라마에서 유성룡 선생이 긍정적으로 그려졌거든요. 그 후에 오래된 책방 시리즈로 〈난중일기〉도 나왔는데 역시 잘 팔렸어요. 〈오래된 책방〉 시리즈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죠. 번역자를 구하는 일도 쉬워졌고요. 물론 직원들에게 체면도 서게 됐죠.(웃음)-당시 〈징비록〉은 여러 출판사에서도 발간되었었죠.맞아요. 그 전까지는 징비록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책이 팔리기 시작하니까 20종 정도가 나왔어요. 대한민국 출판계의 잘못된 풍토이기도 한데, 그것이 결국은 베껴먹기거든요. 그러나 어쨌든 우리 고전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게기가 되었으니 그것으로 의미는 찾았다고 생각합니다.-그즈음부터 고전 출판이 활발해졌나요.그렇다고 봐야합니다. 그러나 고전을 출판하려는 많은 출판사들이 서해문집 때문에 고전 시리즈를 기획했지만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많았어요. 저희는 텍스트에만 주목하지 않고 사진 그림 일러스트 자료의 비중을 높였거든요. 일단 예산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었죠. 이전까지의 고전은 원문과 해설, 번역 등으로만 구성되는 것이 다반사였어요. 그런데 저희는 원문 대신 본문을 쉽게 읽히게 하고 사진 등의 자료를 많이 넣어 우선 독자들이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구성했어요.-서해문집의 효자가 된 〈징비록〉의 번역자이시니 인세도 꽤 받으셨겠습니다.한 푼도 받지 못했어요.(웃음) 2만부는 족히 넘었는데, 제가 출판을 시작하고 난후 처음으로 베스트셀러 10위에 올라간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어요.-내고자 하는 고전은 아직도 많습니까.우리가 모르는 훌륭한 고전이 많으니까요. 그런 책들을 알려야하니 과제가 많습니다.-고전은 결국 전통과 맞닿아 있는 것인데, 전통을 고루한 것이라는 인식이 크잖아요. 그런데 말씀을 들으면서 징비록 같은 고전이 책으로서 성공한 요소를 보면 전통을 고스란히 고수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책이 지닌 의미가 무엇이냐를 생각해보면 그렇죠. 자기계발서나 경제경영서라고 하는 것들을 저는 방울도마토나 벼를 심는 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봄에 심어서 가을에 추수를 하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쌀만 먹고 살수는 없다는 것이에요. 예를 들면 사과는 나무를 심고 최소한 3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배는 5년을 기다려야 하죠. 숙성해서 우리에게 자양이 되는 시간이 되기까지 걸리는 기본적인 시간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책을 지나치게 조급하게 읽으려고 합니다. 경제경영서나 자기계발서류의 책들은 정보나 기술은 전할 수 있겠지만 내가 생각했던 모든 사고의 틀, 이를테면 작은 우주라고 하는 공간이 폭발해서 더 커진다는 느낌, 아니면 다른 우주로 나아간다는 느낌은 절대로 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고전이나 인문 분야처럼 본질을 다루는 책들을 읽다보면 그것이 어느 날 탁 터지는 때가 있거든요. 갑자기 내가 상상하는 세계가 커져버리는. 그랬을 때 만나는 즐거움이 얼마나 황홀한 것인지. 독서의 그 즐거움을 알려주어야 하는데 우리는 독서를 현실적으로 무슨 이익을 주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죠.-평생의 과제로 삼고 있는 책이 있습니까.물론입니다. 백과사전에 관한 책을 쓰고 싶어요.-백과사전을 주목하는 이유가 있겠습니다.백과사전은 한 나라 문명의 집합입니다. 우리나라는 백과사전의 의미를 너무 소홀하게 취급하죠. 지금 우리나라에는 백과사전이 없습니다. 다 인터넷 백과사전이죠. 출간이 안 되니 헌책방에 가야만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백과사전이란 모든 것을 종합하는 백과사전이예요. 책의 역사를 보면 극히 소수의 지배계층이 독점하고 있던 지식이 시민들에게 확장된 것이 백과사전으로 시작하거든요. 백과사전은 16세기부터 태동 합니다. 르네상스 지나고 소위 시민계급이 형성되면서 백과사전이 나오게 되죠. 일본도 백과사전을 처음 접한 것이 서양백과사전 번역을 통해서인데 당시 일본 사람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우리가 너무 문명에 뒤떨어져 있었구나하는 자각이죠. 그래서 일본은 백과사전을 매우 중시합니다. 지금도 일본은 종이 백과사전이 팔리고 있고, 덕분에 개정판이 계속 나오고 있어요. 부러운 일이죠.-우리나라도 백과사전이 있지 않습니까.우리는 1980년 동아백과사전이 처음으로 나왔어요. 그 다음 나온 것이 번역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인데 그것은 우리나라 백과사전이라고 볼 수 없죠. 극단적으로 말하면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의 모든 문명을 기록한 백과사전을 낸 적이 없어요.-인터넷을 통해 사전의 기능을 활용할 수 있는 것도 종이 백과사전의 출간을 막는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맞아요. 그런데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인터넷 사전과 종이사전의 차이가 있는데, 우리가 백과사전을 찾는 것은 모르는 것을 알고자 찾는 것이거든요.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 찾는 것인데, 인터넷으로 모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나요. 제목이나 이름이라도 알아야 검색이 가능하죠. 종이 백과사전은 그렇지 않습니다. 펼치면 몰랐던 사람, 몰랐던 사건도 알게 됩니다. 결정적 차이는 종이사전은 모르는 것을 내가 습득하는 것이고 인터넷 백과사전은 내가 아는 것을 더 많이 아는 것이에요.백과사전에 대한 중요성은 인터뷰 말미까지 이어졌다.인문학도 중요하지만 백과사전을 만드는 일은 정말 중요한 과제예요. 백과사전을 집필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는 그는 개인의 힘으로 이루어내기에는 한계가 너무 큰 백과사전 출간을 위해 우선 백과사전의 의미에 관한 책을 낼 계획이다. 이를테면 왜 우리가 백과사전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제기이자 답이다.많은 분들이 백과사전을 객관적 지식을 전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백과사전은 사실 그것이 아니에요. 문명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담는 것이 백과사전이죠. 그렇다면 대한민국도 우리만의 백과사전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김 대표가 일본인이 백과사전에 대해 쓴 글이라며 덧붙인 이야기가 있다.백과사전은 지나간 것들이라고 하지만 지나간 것들이 옳은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 자체가 문명의 흔적이라는 사실이다.그의 열정으로 우리가 썩 괜찮은 백과사전을 우리 시대에 가질 수 있으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 [김흥식 대표는] '팔릴 수 있는 책'보다 '내고 싶은 책' 기획김흥식 서해문집 대표는 군산이 고향이다. 초등학교 때 서울로 이사와 서울사람이 되었지만 어린 시절의 경험과 기억이 삶을 가장 풍요롭게 하는 바탕이 되었음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집안의 장손이었지만 가난 때문에 쫓겨나다시피 고향을 떠나 순창에서 터를 잡았다. 일제 때 군산으로 와 직장을 잡은 아버지는 배움의 부족함을 혼자 공부하는 노력으로 극복했다. 늘 글을 가까이 했던 아버지 덕분에 그와 형제들은 자연스럽게 책을 가까이 하는 습관을 갖게 됐다.책 읽는 즐거움을 열어준 것은 어린 시절, 집에 배달되었던 6종의 일간지였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신문 읽기 보다 소중한 읽기는 없다고 생각한다.중학교에 들어가서는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많은 책을 읽었지만 고등학교 시절에는 노느라 바빠(?) 책과 떨어져 지냈다. 대학은 문과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형과 누나가 모두 문과를 지망하자 다들 문과를 가면 집안은 누가 먹여살리냐는 아버지의 강권에 상대(서강대)를 택했다. 억지로 선택한 전공에 마음이 갈 리 없었다. 4년 동안 거의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책과 함께 지낸 것은 그 때문이었다. 출판을 평생의 업으로 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즈음이었다. 출판사를 차리기 위해 우선 취직을 했다. 전공을 살려 은행에 들어갔으나 아무래도 내가 갈 길이 아니다는 생각을 했다. 한두 차례 이직을 거쳐 광고회사 코레드에서 근무하면서 89년 출판사 〈서해문집〉을 등록하고 90년부터 책을 내기 시작했다. 직장을 그만둔 후 출판사 일과는 별개로 영화평론 주간지 〈영화저널〉을 창간했다. 〈영화저널〉은 우리나라의 영화 비평 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리고 전문 저널지 창간을 이끌어내는 바탕이 됐다. 그 역시 인생에서 의미 있는 일을 꼽으라 하면 〈영화저널〉 창간을 내놓는다.출판사 일에 전념한 후에는 팔릴 수 있는 책보다 내고 싶은 책을 기획했다. 자연스럽게 인문과 역사와 고전 분야의 책들이 중심에 섰다.어릴 때부터 축적해온 독서편력으로 그는 여러 권 책의 저자이자 번역가가 됐다. 서해문집의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징비록〉은 그가 직접 번역한 책이기도 한데, 우리 출판계가 고전 출간에 눈을 돌리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행복한 1등, 독서의 기적〉 〈다르다고 틀린 건 아니야〉 〈백번 읽어야 아는 바보〉 〈한글전쟁〉등 형식도 다양한 책들이 그의 글쓰기로 책이 됐으며, 〈안중근재판정 참관기〉나 〈전봉준재판정 참관기〉 같은 역사적 자료들이 번역돼 책으로 나왔다.2007년에 펴낸 〈세상의 모든 지식〉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책으로 꼽힌다. 책으로부터 얻은 지식을 모아 낸 이 책은 인류가 이루어온 모든 지식과 지성의 흔적을 독자들에게 쉽고 흥미롭게 전해주는, 독자들에게는 더없이 귀한 선물이 됐다.제대로 된 백과사전을 만드는 것을 출판인으로서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있는 그는 서울국제도서전 기획단장과 파주 북소리 기획단장으로 일했으며 지금은 책읽기와 강연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최근 파주출판도시 입주기업협의회가 운영하는 출판산업체험센터 활성화 책임(?)을 맡아 새로운 고민을 하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7.05.05 23:02

지역사 찾기 나선 이인철 전북체육발전연구원장 "기록 수집·과거 돌아보는 일 게을리 한 대가 크다"

3월 초, 전주시청 로비에서 흥미로운 전시회가 열렸다. 전주의 기억을 내세운 이 전시회는 시민들이 소장했던 다양한 기록물과 근현대 전주의 사료들로 관객들을 불러 들였다. 역사가 단지 과거가 아니라면, 그 지나간 역사가 오늘을 있게 하고 또한 우리의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면 그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알아내려고 하는 노력은 치열해질수록 의미 있는 일이다. 지나간 시대의 기록은 오늘의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바로 그 통로다.이 전시회에서 눈길을 모았던 자료가 있었다. 원로 체육인 이인철 전북체육발전연구원 원장이 소장한 자료로 엮여진 특별전시회였다. 지역의 근현대 역사와 체육의 역사가 관객들을 만난 자리, 이 귀한 기록물을 소장하고 있는 그에게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사실 이 원장은 그동안에도 여러 차례 전시회를 통해 지역 근현대사의 증거(?)를 우리 앞에 내놓았었다. 오래전부터 지역사를 연구하는 전문가도 아닌 그가 지역의 역사와 지나간 시대의 기록과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된 배경이 궁금했다.이인철 원장(88)을 만났다. 올해 미수를 맞았지만 그는 여전히 젊다. 꼿꼿한 자세에 정갈한 수트를 차려입은 그로부터 물리적 나이를 짐작하는 일은 어렵다. 그 뿐인가. 놀라울 정도의 기억력과 막힘없는 언변은 그의 일상이 얼마나 큰 활력으로 차있겠는가를 짐작케하고도 남는다.그는 25년 전, 전주종합경기장 안에 전북체육발전연구원을 개설했다. 체육 분야는 물론, 지역의 역사부터 생활문화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록과 자료를 주목해 수집하고 정리해온 그의 삶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곳이다.인터뷰는 온갖 자료들이 빼곡히 들어차있는 연구원에서 있었다. 여기 저기 쌓여있는 자료들은 나름대로 질서를 갖고 있는 듯 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이 원장은 끊임없이 자료를 가져와 소개했다.역사는 기록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랫동안 기록의 소중함을 잊고 살았어요. 안타까운 일이지요. 전공자도 아니고 지식도 깊지 않은 내가 해온 일은 사실 단순합니다. 뒤돌아보면 순전히 개인적 취미로 해온 일인데 그래도 그 결실이 지역사를 바로 찾는데 도움이 될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한 일이죠. 후학들을 위해 무엇인가 기여하고 싶다는 바람이 작게라도 이루어질 수 있게 된 것, 그것만으로도 보람 있습니다.그의 공간에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기억의 증거들은 이제 곧 역사가 될 것이다.-자료가 많습니다. 직접 정리하시나요.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모았던 것들인데 어느 때부터인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쌓이게 되었어요. 그냥 방치하면 정리하기 더 어려워지니 나름대로 분류를 해놓는 정도입니다.-체육발전연구원이란 문패가 무색할 정도로 얼핏 보기로도 역사적 자료가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시작하시게 되었습니까.젊은 시절에 운동을 했었어요. 52년도니 꽤 오래전 일인데 사격을 했었죠. 제가 전북사격선수 1호입니다. 체육 분야에서 활동하다보니 문학이나 미술 등 문화 쪽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과 교류가 있었어요. 자연히 취미가 생기더군요. 지역의 문화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여러 통로로 만나는 역사적인 자료를 보며 나중에 후진들에게 좋은 양식이 되지 않겠는가 싶었어요.-개인적인 취미로 시작하신 일이겠습니다.그렇긴 한데, 한편으로는 이제 고향이 되어버린 이 지역에 봉사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늘 생각하면서 얻은 일이기도 합니다. 언젠가는 이런 자료들이 기여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자료 수집은 언제부터 시작하셨습니까.1955년 즈음이었던 것 같아요. 50년 전후로 험한 상황이었었잖아요. 그때 시대정신이나 역사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1957년에 야화지 사건이라는 필화 사건이 일어났어요. 〈야담과 실화〉란 월간지에 조영암이란 작가가 이 지역 사람들과 특성을 매우 악랄하게 폄훼해 글을 썼습니다. 그대로 둘 수 없어 잘 아는 신문기자에게 이야기하고 언론을 통해 보도 될 수 있게 했어요. 도민 궐기대회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일이 아주 커졌지요. 그런 일을 겪으면서 지역의 역사를 바로 알려줄 증거들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료 수집은 그래서 시작했어요.-역사의식이 투철하셨군요.(웃음)당시에는 경찰에 몸담고 있었는데, 역사적 소용돌이에 놓인 국가를 위해 젊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고했었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자료 수집을 하기 시작했고, 공적으로는 당시 신문기자였던 전영래씨와 도모해 청년회의소를 만들었어요. 지금은 사업가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고 있는 JC 전신이지요. 이를테면 청년운동의 씨앗을 만든 겁니다.-자료가 다양한 것 같은데, 아무래도 역사 분야 사료가 많은 것 같습니다.역사 분야가 많아요. 특히 일제 강점기에 관한 기록이 집중적으로 많죠. 일제 때 빼앗기거나 묻혀버린 사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리 멀지 않은, 아직은 그 역사를 경험한 세대들이 생존해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시대 역사의 많은 부분이 왜곡되거나 폄훼되어있습니다.-전주부사 완역을 주도하셨던데요.전주부사 번역은 일제강점기 역사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 또 다른 왜곡을 가져오는 상황을 알게 된 후에 가장 큰 과제로 안고 있었던 작업이었습니다. 전주의 역사와 문화 자산은 조선시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유산의 대부분이 일제 강점기에 파괴되었죠. 전주부사는 비록 일본인들에 의해 쓰인 것이지만 전주의 역사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번역의 의미는 거기 있습니다.-전통문화도시로서의 정체성을 미래의 가장 큰 유산으로 삼고 있는 전주로서는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바로 찾는 일이 절실하다는 말씀이군요.물론입니다. 그런 점에서 전주부사 번역 말고도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일본에 구성되어 있는 전주회를 통해 그 당시의 기록과 기억을 찾는 일입니다.-전주회는 전주 출신 모임인가요.맞습니다. 전주회는 전주에 연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에요. 처음에는 전주에서 태어났거나 살았던 사람들이 모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후손들에게로 이어졌습니다. 오래전부터 여러 통로를 통해 642명 회원 명단을 알아내 모든 회원에게 편지를 썼었어요. 6~7년 전의 일인데, 그중 420통이 되돌아왔어요. 그렇다면 나머지는 전달되었다는 것 아니겠어요. 기대를 갖고 몇몇 사람들과는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는데 개인의 힘으로는 지속하기 어려운 일이었어요. 끝내 중단되고 말았는데, 언젠가는 누군가 꼭 해야 할 일입니다.-그래도 성과는 있었습니까.많지는 않지만 일본 지역에 살고 있는 전주 출신들을 확인한 것도 성과랄 수 있겠지요. 후속작업이 이어진다면 좋은 자료가 될 겁니다.-전주부사 번역 이후로도 많은 일을 하셨지요.요즈음 K스포츠재단이 화제인데, 얼마 전에 그 전신인 〈체육육성기금〉에서 제가 갖고 있던 자료를 모아 체육사 책을 만들었어요. 20만권을 제작해 전국적으로 배포했는데 귀한 사진 자료나 기록을 거의 망라했지요. 체육사의 한편을 정리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전주부사 번역 이후 전주부사에 실린 사진만으로 재밌는 이야기책을 만드셨던데요.도시의 기억을 찾는 일의 중요한 통로가 된 작업입니다. 단순한 사료만으로 설명되어지던 수많은 역사적 유산들이 새롭게 가치를 더하거나 제대로 확인되는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사진이 갖는 힘은 증거의 가치를 더하는데 있는 것 같아요.-지금 진행하시는 작업이 궁금합니다.남북분단의 불행한 민족사를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625 민간인 학살조사연구회 사업인데요. 1950년 9월 26일, 전주를 점령한 인민군이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수감자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사건이 있었어요. 그들 중 300여명은 가족들에게로 돌아갔는데 175명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습니다. 전주 효자공원묘지에 합동 안장되어 있어요. 당시 보도연맹 사건 등 인민군들이 남한에 들어와 반동분자라고 내세워 학살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알려진 것만으로도 5900명이 넘지 않습니까. 그중 80% 정도가 전라남북도 사람들일 겁니다. 통탄할 일이지요. 그렇다고 좌익들은 안 당했나요. 11사단의 양민 학살도 대단했지요. 통일을 이야기하면서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에 대한 추모제나 그 진상을 밝히는 일을 묻어둔다면 그것은 또 다른 역사적 죄를 짓는 일이예요. 비극적인 이 역사를 정리하는 일을 전라북도에서 먼저 시작하자는 겁니다. 〈6.25 피살자 묘역 사업〉은 그 첫걸음이죠.-특별히 이 문제에 주목한 이유가 있습니까.북한에서 넘어와 경찰공무원이 되었는데 첫 부임지가 전주였어요. 당시 전주형무소에 쌓여있던 시체를 보았었는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큰 충격으로 안겨 있습니다. 전주형무소 민간인 학살사건 규명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지요.-지난해에 희생자 추모비가 제막됐죠.추모비는 전주형무소 민간인 학살사건을 규명하는 사회적 공론을 시작하는 자리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기록을 찾는 일이나 학살현장 발굴 사업 등 해나가야 할 일이 많지만 이제 본격적인 걸음을 뗐으니 정부와 자치단체의 관심이 더해진다면 잘 진행되리라고 믿습니다.-자료 수집 뿐 아니라 실제로 역사를 규명하는 일에까지 나서는 일이 쉽지는 않겠습니다.그렇긴 한데 이런 세월을 보내다보니 이제는 일상이 되었어요. 지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 막힌 곳의 물꼬를 찾아내는 일은 우선 자료가 바탕이 되죠. 다행히 50년대부터 별 의무감 없이 수집해온 자료들이 연구자들에게도 좋은 사료가 된다니 즐거운 일입니다.-이즈음 각 자치단체들마다 도시의 역사를 찾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록의 중요성을 이제 새롭게 깨닫는 것이겠죠.실제 제가 갖고 있는 자료 전시로 여러 도시들을 갈 기회가 있는데, 그 관심이 놀라울 정도로 높습니다. 기록하는 일, 그리고 그 기록을 수집하는 일을 일상적으로 해왔으면 아마도 우리사회가 이런 상황에 처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기록하지 않고 쉽게 잊어버리고, 과거를 돌아보는 일에 게을리 했던 대가가 참으로 큽니다.-그런데 이런 자료들은 어떻게 수집하시는지 궁금합니다.자료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 이후에는 사진 한 장이라도 그것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합니다. 여러 해를 걸려 사진 한 장 구한 경험도 있어요. 그러다보니 이 사람이 자료를 많이 갖고 있다더라, 혹은 찾는다더라 하는 소문이 퍼져 먼저 제공해오는 고마운 분들도 있습니다.-건강은 어떻습니까.아주 좋습니다. 아침 9시면 출근해 6시에 퇴근합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빠짐없이 주 5일 정상 출퇴근하며 지냅니다. 주말에는 책을 보죠. 아직도 여러 가지 할일이 있다고 생각하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습니다.-이즈음은 어떤 책을 읽으십니까.역사책을 많이 읽는 편이예요. 지금은 조선왕조실록을 다시 보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문제가 되니 잊지 않으려면 스스로 책을 읽는 수밖에 없어요.그는 전직 경찰출신이다. 수많은 직업을 거쳤지만 그에게는 20대, 딱 10년 몸담았던 경찰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남북전쟁으로 어수선했던 시절, 사찰을 주로 다루는 부서에 근무했던 때문일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투철한 반공주의자이면서도 이념에 대해 뚜렷한 철학을 갖고 있다.제가 아는 분 중에 사회주의자였던 김철수 선생이 있습니다. 그 어른은 오염되어 가는 사회주의를 지키려했던 분이예요. 사회주의를 단순한 빨갱이라는 개념과 혼돈하면 안 됩니다. 나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답게 살아야 하는가를 연구하는 것이 사회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답게 사는 것에 대한 관점이 다를 뿐이지요.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 그가 수집한 기록이 가치를 더하는 이유도 거기 있겠다 싶었다.● [이인철 원장은] 북한서 넘어와 '전북체육 역사 산증인'으로이인철 원장은 1929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정미소를 운영했던 부모님은 기독교를 신앙으로 삼았다.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북한에서 그의 집안은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 역시 철원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민주청년동맹에서 활동했으나 숙청 대상으로 감시 받는 삶을 견디지 못해 목숨 걸고 삼팔선을 넘었다. 오갈 데 없이 혈혈단신이었던 그는 명동성당 옆에 움막에서 살면서 배추장사, 미군부대의 깡통장사, 군밤장사 등 온갖 잡일로 생계를 꾸렸다.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현실은 막막했다. 탈출해온 이듬해 625전쟁이 났다. 남아 있는 가족들이 피난을 왔지만 아버지는 오지 못했다. 철원노동당사 폭파 계획에 연루되어 총살을 당했다는 것을 가족들로부터 들었다.전쟁이 났으니 무조건 도망쳐야했다. 군대에 가려했으나 피난 가는 길에 트럭에 실려 학도병으로 끌려가는 학생들을 보고 마음을 바꾸었다. 우연히 〈북한 진주 경찰관 모집〉에 응시해 합격했다. 대구에서 경찰관이 되었지만 전라북도 경찰국으로 배속됐다. 1950년 가을, 전주로 오면서 그는 전주사람이 됐다.무주경찰서와 전주경찰서에서 근무했던 그는 정치문화반장, 사찰반장 등을 거쳤다. 사찰 업무를 주로 했지만 원칙과 상식으로 일하고 싶었다. 엄혹한 시절, 정부에서 부역자를 처리하는 법률을 만들었다. 인민군 치하에서 부역했던 사람들의 명단을 만들어 관리하는 업무가 맡겨졌다. 그의 관리대상이던 부역자 명단을 갖고 사찰(?)을 하다 보니 이 명단이 억지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저 밥 먹고 살기 위해 잠시 동원되었던 억울한 사람들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단을 없애 더 이상 사찰을 할 수 없게 만든 것은 그 때문이었다. 경찰로는 꼭 10년을 일했다. 3.15부정선거 사태로 책임자를 정하면서 이유도 없이 직분 때문에 엮여 옷을 벗었다. 퇴직금 한 푼 없이 쫓겨난 뒤 살길이 막막했다. 그때 그를 먹여 살린 사람들은 그의 사찰 대상이었던 남부시장 상인들이었다. 여러 해 남부시장에서 장사꾼으로 살았던 그는 전주의 한 산소 제조공장 상무로 취직이 되었다. 그의 경영 능력을 주위 사람들이 눈여겨보았다. 경영자로서 삶이 시작되었다. 전북연탄의 전신인 일자표 연탄 사장을 거쳐 부산과 인천 등지의 규모 있는 회사 임원으로 발탁돼 근무했다. 80년 광주항쟁이 나자 광주 출신들이 운영했던 그의 회사는 부도가 났다. 그 책임을 그가 져야 했다. 전주로 돌아왔을 때 집도 경매로 넘어가고 거처할 집한칸 마련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비닐하우스를 짓고 아내와 꽃가게를 차렸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92년 전북체육발전연구원을 설립했다. 지역을 위한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결과였다. 그 뒤 25년, 그는 지역사를 바로 찾는 일에 나섰다. 50년대부터 이어온 자료 수집이 큰 힘이 되었다. 〈실록전북체육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체육사〉를 발간했으며 〈전주부사〉를 번역해 일제강점기 전주의 역사를 기억해내는 통로를 만들었다.전라북도 체육회 상임고문, 전주시 통합체육회 상임고문 등을 맡고 있는 그는 전북체육사의 산증인이다. 크고 작은 지역사 연구에 발 벗고 나선 지금은 지인들이 이 박사라고 부른다.

  • 기획
  • 김은정
  • 2017.03.31 23:02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모필장 곽종찬 씨 "서예는 붓이 먼저…필력은 붓에서 나오는 것"

지난해 가을, 귀한 전시를 만났다. 전주의 전통공예 부문 기능 보유자 열 일곱 명 명장이 빚어낸 공예품들이 한자리에 모인 전시였다. 침선과 소목, 단청 유기 지우산 나전 낙죽 악기 유기와 모필, 옻칠에 부채와 한지발까지 명장의 손길로 만들어진 전통 공예품들은 아름다웠다.그중에서도 새롭게 눈에 띈 작품, 사동고리라 이름 붙여진 액자 속에 크고 작은 붓들이 줄지어 있었다.마치 자연스럽게 얻어진 얼룩처럼 선명하지 않은 무늬를 몸체에 얹은 이 붓들의 정체(?)가 궁금했다. 붓 하나에 여러 개의 붓이 들어가, 붓 한 자루만으로 다양한 글씨를 쓸 수 있게 제작했다는 설명이 있었다.자료를 찾아보니 이전에도 세필 중필 대필이 하나로 된 삼동필이 있었다. 선비들이 휴대용으로 지니고 다녔던 삼동필은 전통 붓의 백미로 꼽혔지만 제작자의 수가 워낙 적어 오늘에 이르러서는 좀체 마주하기 어려운 유물이 되었다.그러나 이미 40여 년 전에 전통붓 삼동필의 형식을 다시 살려 현대적 미감으로 온전히 복원해낸 모필장이 있다. 2015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된 곽종찬 명장(66, 전주시 중노송동) 이다.사실 서예의 전통이 뿌리 깊은 전북에서 모필장의 역사와 존재는 빛나야 옳다.그러나 붓을 만드는 사람과 그 기술을 이르는 모필장은 안타깝게도 전통문화의 영역에서 오랫동안 부각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록의 방식이 바뀌어 붓의 쓰임이 소멸된 것이 가장 큰 이유일터다. 사실 쓰임의 기능을 잃은 전통 공예품이 전통붓 뿐이겠는가. 옛사람들의 일상에서 숨 쉬었던 수많은 공예품들은 기계에 의해 대량 생산되는 상품들에 그 자리를 내주고 쓰임의 영역에서 도태된 지 오래다.재작년 전북에서는 유일하게 모필장 기능보유자가 된 남파 곽종찬 명장을 만났다.모바일 기기와 컴퓨터 자판이 기록의 수단이 되어버린 현실에서도 전통붓의 존재를 꼭 되살려내고 싶다는 그의 의지가 궁금했다.-붓을 판매하고 직접 만드는 공간인데도 가게 안이 깨끗합니다.일을 제대로 할 때는 몇날 며칠 치우지 못하니 지저분하죠. 깨끗하다는 것은 그만큼 작업 시간이 적다는, 이를테면 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웃음)-2월이 가장 바쁘시다는데 이 시간에 찾아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대나무를 구하러 다니신다고 하셨죠. 지금이 대나무 채집시기인가요.조금 늦었어요. 설 쇠고 나면 바로 시작해야 좋은데. 설 지나고 보름 사이가 적기지요. 어제 가보니 벌써 물이 많이 올랐더라고요.-어디로 다녀오셨습니까.김제에 있는 대나무 숲인데, 오후에 가서 베어놓고 밤에 실어 날랐어요. 옮기는 일만 자정 넘어 끝났습니다.-대나무 채집은 미리 예정해놓으십니까.오랫동안 하다 보니 어디에 좋은 대나무가 있는지 대충은 알죠. 그런데 갈수록 쓸 만한 대나무 밭을 찾기 어려워져요. 가봐야만 쓸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어요. 한 군데를 두세 번 걸음하게 되죠.-대나무 베어오는 일도 직접 하십니까.물론이죠. 모든 과정을 내 스스로 알아야 제대로 된 붓을 만들 수 있어요. 대나무를 자를 때 그 특성도 알게 되거든요. 대나무를 베어 옮기는 일은 만만치 않아요. 대나무는 깍지에 명치털 같은 가시가 있는데 아주 사나워서 일하고 며칠만 지나면 손등이 새까맣게 됩니다. 긁힌 자리에 딱지가 앉아서죠. 우리같이 붓 일하는 사람들은 연례행사처럼 겪는 일이에요.-쌓아놓은 대나무 양이 엄청난데요. 저 정도면 1년 작업할 수 있는 양인가요.어림도 없어요. 저 대나무는 아주 좋은 것들이지만 다듬어 붓의 몸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또 한계가 있어요. 더 구해야죠.-꼭 이시기에 다 해놓아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대나무 재료는 반드시 겨울에 다 준비를 해야 해요. 대나무는 물이 내렸을 때 베어야 합니다. 물이 오르면 마르면서 병충해가 들어 못 쓰게 되거든요.-뭐 한 가지 순조로운 과정이 없군요.공력이 대단하죠. 사서 쓰는 사람은 비싸네 싸네 하지만 준비하는 과정만도 아주 복잡합니다. 잘라놓은 대나무를 햇빛에 말려 깍지를 지그재그로 돌리면서 벗겨냅니다. 그런 다음 황토와 모래를 섞어 문지르죠. 황토는 대나무의 진액을 빨아냅니다. 그것이 보름쯤 지나면 뿌옇게 마르기 시작하는데 20일 정도 지난 후에 개울에 가서 씻어 말립니다. 대나무 한대에 10개 정도의 도막이 나오는데 골라내면 두 마디쯤 쓰게 됩니다.-모든 붓이 그런 공정을 거치나요.그렇지는 않아요. 제가 쓰는 대나무는 흙을 바르니 깨끗해지거든요. 그런데 과수에 하루 정도 담가 말리면 더 하얀 색을 얻을 수 있습니다. 색은 좋은데 그렇게 하면 대가 삭게 돼요. 그래서 저는 좀 힘들더라도 대나무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방식을 사용합니다.-털 작업도 시간이 많이 걸리지요.150번 정도 손길이 가는 일이죠. 하루 종일 붙잡고 있어도 안 끝나는 경우가 많아요. 맘에 들지 않으면 마무리할 수가 없으니까요. 제 마음에 맞게 한 번에 모양이 나오는 일은 거의 없어요. 그것이 다 세상의 이치라고 생각합니다.-좋은 털을 고르는 것도 중요하겠습니다.물론이죠. 저는 다행히 아버지 덕분에 털 고르는 일도 배웠어요. 아버지는 동물 가죽을 통째로 구해서 털을 잘라 사용하셨거든요. 암놈 수놈 부위별로 질감이나 길이, 색깔까지 골라낼 수 있게 되었지요.-붓도 쓰임에 따라 종류가 다양할 텐데 공통적으로 좋은 붓은 어떻게 고릅니까.붓은 털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선 붓털의 끝이 뾰족하고 가지런해야 합니다. 털의 모둠은 원형을 이루어야 하고 획을 긋고 난 다음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짐승의 모든 털은 붓의 재료가 될 수 있는데, 겨울에 잡은 짐승의 털이 윤기가 있어요.-붓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대표작품이 사동고리라고 알고 있는데 그 형식이 흥미롭더군요.붓 한자루에 작은 붓들을 차례로 넣어 만드는 것인데, 동그랗게 깎아내기 때문에 동고리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붓이 네 개 들어가면 사동고리, 다섯 개 들어가면 오동고리가 되겠죠. 지난번 서울 문화재청 전시 때 여섯 개까지 들어가는 붓을 만들었어요. 속을 파내는 일만 해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그런 새로운 일을 도전하면 일이 재미있어지더라고요.-대나무 자루 위에 무늬를 넣는 것도 독특합니다.일종의 낙죽기법인데 만들어지는 물방울처럼 보이는 무늬는 저만이 낼 수 있어요. 비법이 따로 있는데 아직 아무한테도 전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광주에서 붓을 만드는 부부가 와서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더군요. 아직 넘겨줄 일이 아니라고 했더니 그럼 돌아가실 때 가르쳐주고 가세요 하더라고요. 빨리 죽으라는 이야기로 들리던데.(웃음)-넘기지 않으시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저 무늬가 있는 것이어야 곽종찬 붓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제 이름으로 내는 모든 붓은 저 무늬를 넣습니다. 그러니 아직은 그 무늬를 함부로 내놓을 수 없어요.-사동고리는 언제부터 만드셨습니까.군대 가기 직전이에요. 그냥 재미삼아 만들어서 전주에서 유명한 필방에 몇 자루 내놓았는데 금세 팔린 거예요. 몇 개 더 만들어달라고 사정을 했는데 그 다음날 군대에 가야 했어요. 1972년이었을 겁니다.-아무래도 붓을 찾는 사람들이 적어졌을 텐데요. 어떻게 유지하십니까.어려움은 말할 수 없죠. 붓을 쓰는 사람이 아예 없잖아요. 서예 하는 사람들 말고는 붓글씨 쓰는 사람도 없을 뿐 아니라 붓마저도 중국산이 많거든요. 실제로 팔리는 갯수는 한 달에 다섯 손가락 안의 숫자만큼으로 보면 됩니다. 이런 상황이 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것이니 20년 사이 붓은 우리 생활에서 완전히 잊혔다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그런데도 왜 붓 만드는 일을 놓지 않으셨습니까.배운 기술이 이것뿐이니까요.(웃음) 사실 70년대 80년대를 거쳐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살만했습니다. 70~80년대에는 돈도 많이 벌었어요. 다 까먹어서 그렇지. 아내가 10년 정도 병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났어요. 젊어서 번 돈을 그때 다 썼죠. 그러고 나니 설상가상 붓이 쓸모없는 용품이 되어버리더라고요. 먹고 살 방법이 없어서 오랫동안 가게는 열어놓고 공사장 일을 다녔어요. 안 해본 일이 거의 없지요. 그래도 저녁에 집에 와서는 붓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과정이 있으니 오늘까지 그래도 기능을 지킬 수 있었던 것 같아요.-찾는 사람도 적고 특별히 팔려나가는 수량도 많지 않은데 그렇게 계속 만드시면 다 어떻게 처리하시려고.붓 만드는 사람이 안 팔린다고 손을 놓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예전에도 같은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더구나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니 그에 대한 보답으로라도 더 열심히 만들어내야죠.-사실 전북은 서예의 전통이 깊은 지역인데 붓을 만드는 장인들이 잊혀 있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그렇죠. 서예는 붓이 먼저입니다. 필력은 붓에서 나오는 것이니까요. 붓의 성질을 알아야 좋은 글씨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서예하는 사람들은 붓이 저절로 써주는 것인 줄 아는 것 같아요. 그러니 좋은 붓을 구하려는 성의도 없고, 값싼 붓만 찾게 되죠. 어느 분야든 기본을 갖추는 것이 먼저인데, 글씨를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붓의 성질을 연구하는 일에는 왜 그렇게 무관심한지 참 마뜩치 않아요.-열세 살부터 지금까지 붓 만드는 일로만 지켜온 삶이 후회되지는 않으십니까.후회할 일은 없어요. 돌아보면 좋은 시절도 있었고 어려운 시절도 있었지만 붓 만드는 일이 내게 주어져서 그래도 큰 허물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아쉬움이 있다면 그동안 몇 명 함께 일했던 제자들이 있는데 더 이상 생활이 되지 않으니 붓 만드는 일을 지켜가지 못하고 중도에 길을 바꿀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붓 만드는 기술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습니까.근래 들어서는 거의 없죠. 다행히 재작년에 새로운 제자를 얻었어요. 배우려는 의지가 높아 기능을 이어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게는 큰 힘이지요.-붓의 쓰임이 없어진 상황에서 전통붓을 살려내는 일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그렇겠죠. 붓이 제 기능을 하기에는 환경이 너무 많이 바뀌었으니까요. 그래도 붓 만드는 일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2000년대 초반, 경제적 어려움이 커졌을 때 이러다 붓 만드는 일도 할 수 없겠다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생각났어요. 516이 일어난 직후인데, 지펜이 나오면서 붓이 안 팔렸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일하는 사람들을 그대로 일하게 했어요. 월급도 못 주어서 계속 빚이 쌓였었는데, 정말 거짓말처럼 지펜이 서서히 들어가고 붓이 다시 일어나더라고요.그는 더 이상 붓의 기능이 현대에 되살아날 수 있다는 기대는 하지 않게 됐다고 했다. 그런데도 붓 만드는 일에 희망을 잃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이 붓을 보세요. 이렇게 액자 안에 넣어 놓으면 훌륭한 장식품이 되죠. 훌륭한 공예품으로서 쓰임을 겸비하면 좋겠지만 예술성만으로도 전통붓의 존재를 지켜가는 방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봅니다. 좀 더 새로운 형식으로 붓을 살려내고 싶어요.전주 붓의 옛 명성을 다시 찾고 싶다는 그에게 과제가 생겼다. 전통에 현대적 삶의 문화를 입히는 일, 붓의 쓰임을 새롭게 찾아내는 일이다. 머지않아 전주 붓의 이름이 우리에게 올 것 같다.● [곽종찬 명장은] 아버지로부터 '붓일' 배워독창적 '사동고리' 만들어내남파 곽종찬 명장의 고향은 완주다. 아버지가 한때 천안으로 가 살면서 천안에서 태어났지만 완주로 다시 돌아와 줄곧 이곳에서 성장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붓 만드는 일을 즐겼다. 할아버지 대부터 붓만드는 일을 가업으로 삼아온 덕분에 그의 아버지(곽준팔) 또한 붓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당시만 해도 붓은 없어서는 안 되는 생활도구였다. 상관에 터를 잡고 살았던 그의 집은 붓을 만들어 파는 일만으로 부를 쌓아 일대의 땅을 거의 사들일 정도로 부자 소리를 들었다. 어린 시절은 그만큼 유복했으나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는 공부와 담을 쌓았다. 4남 1녀 중 유난히 노래 부르기 좋아하고 놀러만 다니는 셋째 아들을 아버지는 아예 소리꾼으로 키우겠다며 남원의 국악학원으로 보냈지만 밤중에 도망쳐 걸어서 상관 집으로 돌아왔다.그는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좋았다. 집에서 붓일을 거들던 할아버지가 하루는 그에게 붓을 만들어보라고 권했다. 잘 만든다는 칭찬이 좋아 학교에서 오면 아예 붓일하는 일에 매달렸다. 야간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며칠 되지 않아 그만두고 아예 붓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다.붓만 잘 만들면 먹고 사는 일은 걱정 없을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가 며칠씩 붓을 팔러 나갔다 들어오시면 물건이 들었던 박스가 돈으로 채워져 왔다.아버지로부터 배운 대로 전통붓을 만들면서도 뭔가 창의적인 붓을 만들고 싶었다. 군대 가기직전 만들어 인기를 끌었던 사동고리는 그 결실이었다.군대 제대 후에는 내 장사를 하고 싶어 독립을 했다. 자신이 만든 붓을 갖고 문방구와 필방을 돌면서 몇 자루씩 써보라고 권했다. 지금 들여놓지 말고 쓸 만하면 그때 주문해 달라는 방식을 썼다. 기대 이상으로 주문이 많이 들어왔다. 전주 뿐 아니라 익산 군산 서천까지 건너가 붓을 팔았다. 돈은 두둑한데 물건은 물건대로 남아 있는 상황이 신기했다. 장사는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고 깨달았다. 장사의 재미를 알아가고 있을 무렵, 한복 짓는 솜씨가 좋은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아내는 그 못지않게 손재주가 좋았다. 나중에는 그보다 부인이 붓을 더 잘 만든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80년대 초반, 건물을 사서 이조필방을 냈다. 한참 잘나가던 시기, 아내가 병을 얻었다. 10여년 동안 고생하다 세상을 떠났다. 모아 놓았던 재산도 바닥이 났다. 그즈음 붓의 수요가 줄기 시작했다. 당장 생활이 곤궁해지자 막노동이라도 나가야 했다. 철쭉 캐내는 일, 축대 쌓는 일 등 가리지 않고 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면 밤에는 붓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덕분에 전통 기법과 기능을 온전히 지키면서 사동고리 같은 그만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힘을 얻게 됐다.그는 붓만드는 일 뿐 아니라 붓과 관련된 기물 만드는 일을 즐긴다. 대나무 뿌리를 활용한 붓걸이 장식품은 그의 빼어난 손재주를 그대로 담아낸 걸작이다.전주전통공예대전에서 동상과 특별상을 수상하면서 대중들에게 모필장의 존재를 알렸던 그는 2015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됐다. 자신의 기능을 인정해준 자치단체에 답을 하고 싶다는 그는 올해 개인전을 계획하고 있다. 전주붓의 이름을 다시 알리고 싶다는 바람이 거기 담겨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7.03.10 23:02

평생 석정 문학 연구한 원로시인 허소라 교수 "석정의 문학사적 위치 저평가 바로잡고 싶어"

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한 시인의 문학과 삶을 조명하는 연구로만 바쳐온 시인. 그 덕분에 한국문학사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목가적 서정시인으로만 알려져 온 신석정 시인은 문학사의 새로운 노정, 그 주인공이 되었다.고등학교 시절부터 존경해온 시인을 스승으로 만난 것이 20대 초반, 시인을 꿈꾸던 젊은 문학도는 스승과 사제의 인연을 생애의 축복으로 알고 스승의 시정신과 청빈했던 삶의 태도를 온전히 자신의 귀감으로 삼았다.서정시와 저항시의 두 세계를 치열한 시정신으로 지향했던 스승의 문학을 그대로 안아 자신 또한 시대를 투영하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는 제자. 원로시인 허소라 교수(80)의 이야기다.시인으로 문학연구자로 문학도들을 가르치는 교수로 살아온 그의 삶은 온전히 석정 시인의 문학만을 지평으로 삼았다. 군산대에서 정년퇴임을 한 이후에도 시쓰기와 석정 문학연구로만 시간을 보내온 그를 만났다.-지난 연말, 유난히 활동이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석정문학상 수상도 축하드립니다.어떻게 하다 보니 그리 되었어요. 석정문학상도 그렇고 전주문학상도 그렇고 상을 받는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예요. 더구나 이 나이에 상을 받는다는 것은 미안한 일이기도 하고요.-근래 활동이 뜸하셨는데 연말에 이어진 수상소식에 인문학콘서트 초대까지 반가워하실 분들이 많았을 겁니다. 어떻게 지내셨습니까.내 나이 여든을 맞고 보니 아무래도 외부 활동보다는 안에서 지내는 일이 많았어요. 책도 읽고 밀린 자료 정리도 하고, 더러 시도 쓰면서 지냈지요.-늘 문학소년 같은 이미지의 교수님이 벌써 여든이 되셨다니 믿겨지지 않습니다.(웃음) 건강은 괜찮으시지요.특별히 앓고 있는 병은 없지만 공연히 온몸이 줄어들고 있는 듯 한 느낌을 갖습니다. 나이병이지요. 건강은 그런대로 괜찮습니다.-국정농단 사태로 온 나라가 어수선합니다. 매주 토요일, 광장의 촛불 집회를 보면서 석정 시인의 시집 〈촛불〉의 시어들이 떠올랐습니다. 현실의 암담함을 치열한 자각으로 인식해 시로 구현해냈던 석정 시인은 오늘의 상황을 어떤 시어로 담아냈을까 궁금했습니다.너무 유연하다고 나무라셨을 것 같아요. 일제강점기, 그 엄혹한 시대에서도 현실을 직시하며 정치적 저항시를 발표했던 분이니까요.-석정 문학 연구에 오랜 시간을 쏟아오셨습니다. 석정에 대한 재조명 작업은 교수님의 연구로 물꼬가 트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언제부터 연구를 시작하셨습니까.학문의 길에 들어선 이후 지금까지 석정 문학연구에만 온전히 매달려왔으니 40년도 훨씬 넘은 것 같습니다. 석사 박사 논문도 모두 석정 선생님의 문학세계가 주제였어요.-한 문학인의 삶과 문학세계에 그 오랜 시간을 천착하는 일이 놀랍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석정 문학에 대한 왜곡된 시각, 편향된 평가를 바로 잡고 싶어서였습니다. 석정은 우리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놓여야 마땅한데도 지방에서 활동했던 향토시인 정도로 평가되는 일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그것을 문단적 야맹 현상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그런 현상을 꼭 바로 잡고 싶었습니다.-석정 시인과는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었나요.물론입니다. 스승과 제자 관계로 뿐 아니라 부모와도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만큼 제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제게는 늘 미치지 못하는 거목 같은 존재였습니다.-어떻게 스승과 제자가 되었습니까.전북대 국문과 2학년 때 선생님이 한 학기 강의를 하셨어요. 가람 이병기 선생님이 석정을 굉장히 아끼셨거든요. 그때 시론 강의를 맡겼는데 그 강의를 듣게 된 거예요. 고등학교 때부터 〈촛불〉이나 〈슬픈목가〉등을 구해 읽으면서 존경하게 되었던 석정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 이듬해에는 교내 대학생 작품 응모에서 제 시가 장원에 뽑혔는데 그때 심사를 석정선생님이 맡으셨어요. 이후부터 선생님이 찾으시면 댁에도 드나드는 관계가 되었습니다.-특별히 아끼는 제자셨군요.많이 챙겨주셨지요. 그때는 전화가 없을 때여서 손자를 시켜 메모를 전하셨어요. 시 한편 갖고 빨리 오라는 내용이 많았는데 가보면 서울에서 신문사 기자가 와있었어요. 선생님 원고를 청탁하러 온 기자에게 제 시도 꼭 챙겨주셨어요.-등단도 석정 선생님 추천으로 하셨죠.석정 선생님이 당시 〈자유문학〉 심사위원이셨는데 3회 추천을 받아야만 등단의 절차를 끝낼 수 있었어요. 1년여 만에 3회 추천 모두를 석정선생님이 해주셨죠.-인연이 아주 깊었군요. 석정 문학에 대한 연구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었겠습니다.그렇죠. 지방에서 활동하신다는 이유만으로 변방의 시인으로 평가받는 것은 온당하지 않는 일이거든요. 더구나 선생님의 다양한 문학세계가 편향되게 평가 받는 일을 그대로 둘 수 없었습니다.-사실 석정의 시세계는 오랫동안 목가적 전원시, 혹은 서정시로만 분류되어 왔습니다. 그러니 현실참여의 저항시를 써온 시인으로 재조명 받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예요.물론 선생님은 목가적 서정시도 많이 쓰셨지만 아주 강한 어조로 써낸 현실 참여시가 적지 않습니다. 한국시의 자연서정과 현실참여라는 이원적 경험을 온몸으로 흡수하고 통합하려는 시도를 줄기차게 해오셨죠. 그런 점에서 석정은 한국시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시인으로 평가 받아야 마땅합니다.-교수님도 많은 영향을 받았겠습니다.선생님의 시정신을 이어받고 싶었지만 그 세계에 늘 미치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선생님은 민족의식이 투철했을 뿐 아니라 시대를 직시하는 감각이 워낙 탁월하셨어요. 한국군이 월남전에 파병될 때는 누구보다 안타까워하셨는데 어느 날인가 신문을 읽으시면서 달러하고 목숨을 바꾸는 짓이라며 분노하셨어요. 월남전에서 희생당한 한국군이 4300명. 선생님은 다가올 상황을 그렇게 짚어내셨던 것이죠.-기억에 남는 일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일화가 많지요. 이런 일도 있었어요. 5.16이 났을 때 교사들이 자율권 보장하라고 국회 앞에 가서 데모를 했는데 그 사태와 관련해 석정 선생님이 경찰서에 끌려가셨어요. 소식을 듣자마자 쫓아갔더니 의자에 혼자 앉자계시더군요. 취조관이 자리를 비웠었는데 선생님이 하시는 이야기가 그 취조관이 선생님이 쓴 시한편이 인민군 1개 사단과 맞먹는 위력이 있는 것을 아느냐고 하더래요. 그 사람이 시의 힘을 알았던 것이죠. 깜짝 놀랐습니다.-어떤 시였습니까.당시 교사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데모를 했어요. 선생님은 전주고에 근무하고 계셨는데 그때 〈단식의 노래〉란 시를 쓰셨거든요. 이 시가 데모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죠. 그 사건으로 여러 선생님들이 다른 학교로 전출되고 붙들려가서 취조를 받는 고통을 겪었어요. 이후에도 남산기관에 끌려가시기도 했고, 여러 번 어려움을 겪으셨지요.-화제를 좀 바꿔보겠습니다. 석정 선생님과 가까워지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특별한 계기는 아닌데,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던 시가 있었어요. 속으로는 따뜻하지만 겉으로 그런 마음을 잘 표현하시지 않는 분인데, 제가 발표한 〈목종〉이라는 시를 과분하게 칭찬하셨어요. 1964년에 경기도 운천리 미군부대에서 캔 하나를 훔치러 들어간 소년이 사살되는 사건이 있었어요. 그런데 일간지에 이 엄청난 사건이 고작 네줄 다섯줄짜리 기사로 나왔더라고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때 전북일보에 〈목종〉이라는 시를 써서 발표했지요. 나무종은 아무리 때려도 소리가 나지 않잖아요. 그것을 읽으시고 선생님께서 소라 시가 참 좋더라고 말씀하셨어요. 어떤 분의 평가보다도 감사하고 좋았습니다.-교수님이 펴낸 〈흐느끼는 목마〉는 당시 베스트셀러로 화제가 되었던 산문집인데요.그랬었죠. 30쇄가 넘게 인쇄를 했으니까요. 당시 여고생들에게 인기가 있었어요.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만한 감정으로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엮은 책이거든요. 그러니 사춘기 여고생들이 가슴 두근거리며 읽었겠죠.(웃음)-그 책을 내게 된 뒷이야기가 더 흥미롭던데요.제가 대학신문에 시를 발표했던 적이 있어요. 그 신문이 전국의 고등학교 도서관에 보내졌던 모양이에요. 제 필명이 허소라잖아요. 그 시를 읽은 포항의 여고생이 제게 편지를 보낸 거예요. 제목이 〈미지의 언니에게〉였어요. 저를 여자로 알았던 겁니다. 친구들이 그냥 여자인척 답장을 해주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몇 차례 주고받았는데 사람이 언젠가는 막다른 골목에서 마주치는 법이라고 그런 상황이 온 겁니다. 그래서 고백하는 글로 용서를 빌었지요.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교제가 시작된 겁니다. 결국은 헤어지게 되었지만(웃음) 그 과정에서 주고받은 편지가 〈흐느끼는 목마〉로 엮인 거죠.-부안에 석정문학관이 문을 연 것이 2012년이었던가요. 문학관이 문을 열기까지는 교수님의 열정이 바탕이 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문학세계를 학문적으로 조명하고 정리하는 일도 그렇지만 대표작이나 유작 등 관련 자료를 모아내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다행스럽게도 제가 선생님의 작품을 발굴하기 시작한 것이 거의 40년 전의 일인데 웬만한 발표작은 거의 다 찾아냈고, 미발표작도 거의 발굴했습니다. 그 자료들이 큰 힘이 되었지요. 어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제 생애에 가장 큰 보람과 의미를 얻은 시간이기도 합니다.-그 많은 작품은 어떻게 수집하셨습니까.일일이 찾아다녀야만 가능한 일이었어요. 60년대부터 찾아다녔는데 아무래도 신문에 발표된 시가 많아서 서울의 신문사 자료실을 찾아다녔습니다. 처음 찾아낸 것이 선생님 첫 작품인 조선일보에 실렸던 〈기우는 해〉였는데 그게 언제 실렸는지가 정확하지 않았어요. 당시 조선일보에 석정선생님 자형뻘 되는 분이 문예부장으로 계셨는데, 그래서 본명이 아닌 필명으로 실렸던가 봐요. 신문사 담당자에게 부탁을 해서 필름을 돌리다보니까 그 작품이 나오는 거예요. 그 순간, 신경이 곤두서더라고요. 날짜를 보니 1924년 4월 19일자였어요. 그것을 가져오면서도 얼마나 소중한지 가방에 넣으면 잃어버릴 것 같아서 등에 끼워서 가져왔지요.(웃음) 그때 선생님 필명이 소적으로 되어 있었어요.-이후에도 수많은 작품을 원본으로 확인하고 수집하셨겠습니다.조선일보에 실린 작품만 스크랩북으로 네 권 분량이고 전북일보에 실렸던 작품도 두 권이나 됩니다. 이 작품들이 모두 제 연구의 바탕이 되었고 문학관 자료가 되었지요.-2009년엔가 석정의 미발표작이 교수님의 노력으로 발굴되어 빛을 보게 되었었는데요.현실참여 성향이 강했으나 발표되지 않았던 시 11편을 그때 공개했었지요. 혁신이란 단어만 입에 올려도 공산당으로 몰렸던 1960년대 엄혹한 상황에서도 저항성이 짙은 시를 기고할 정도로 선생님은 저항시를 많이 썼습니다. 미발표작 시들은 그럼에도 발표하지 못했던 시들인데 선생님의 육필원고에서 찾아낸 것들이었어요. 덕분에 기존의 평가로부터 석정의 시세계가 재평가되어야 하는 이유가 더 분명해졌습니다.-당시 그렇게 왕성한 발표활동을 하셨던 것을 보면 석정 선생님의 문학이 그만큼 평가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아니겠습니까.물론입니다. 선생님은 정지용 김기림 박목월 박두진 선생님 등 당대를 대표하는 문학인들과 교류가 깊었어요. 김기림 시인은 특히 석정 선생님의 시세계를 높이 평가 했는데 한해를 돌아보는 연평에 선생님을 늘 거론할 정도였죠.-40년이 훨씬 넘는 동안 석정 선생님의 시세계만을 천착해 연구해오신 교수님의 작업으로 자칫 문학사의 한편에 겨우 이름을 올리고 있었을지도 모를 석정의 문학이 재조명을 받아 온전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더 폭넓은 연구 작업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없습니까.오히려 제 연구가 아직도 미진하다는 것에 한계를 느낍니다. 석정은 한국시사의 모범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문학사속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후배들이 풀어야할 과제입니다.허 교수와의 인터뷰는 처음부터 끝까지 석정의 문학과 삶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만큼 그의 모든 문학 연구 작업의 시간과 정신은 석정의 문학위에 놓여 있었다. 넓지 않은 그의 서재를 채우고 있는 여러 권의 스크랩북과 빛바랜 자료들까지도 석정의 문학에 닿아 있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은 놀라웠다. 한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게 하기위해 달려온 수십 년 세월의 고투가 그의 삶으로부터 더 빛나 보였다.● [허소라 교수는] 석박사과정 모두 석정문학 주제 논문으로 마쳐허소라 교수는 진안이 고향이다. 본명은 형석이지만 필명인 소라가 더 널리 알려졌다. 군청에서 근무하셨던 아버님을 따라 초등학교 시절, 전주로 나왔지만 중고등학교는 금산에서 다녔다. 어렸을 때부터 교사가 되기를 희망했던 그는 전북대 국문과에 들어가 석정시인을 만나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었다. 59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자유문학〉에 시 지열(地熱) 피를 말리는, 도정(道程) 등 세편의 시를 추천받으면서 등단했다. 당시 시 추천을 해준 사람도 석정시인이었다. 전주신흥고등학교 교사로 시작해 군산 수산고등전문학교와 수산전문대학을 거쳐 군산대 교수로 정년퇴임할 때까지 재직했다.석정 시인의 시세계를 고등학교 시절부터 동경해왔던 그는 스승의 문학이 한국문학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워 석정 문학 연구를 평생의 과제로 삼았다. 석정 연구를 시작한 20대 이후부터 그의 작업은 오로지 석정의 문학과 생애 위에 놓여있었다. 고려대 석사과정과 경희대 박사과정을 모두 석정문학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마쳤다.2012년 개관한 부안의 석정문학관 조성작업에 참여했으며 많은 부분이 그의 손을 거쳐 기획되고 완성됐다. 신석정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문학제 제전위원장과 석정문학관 초대관장을 역임했으며 중국연변대 객좌교수를 지냈다.1964년 첫 시집 〈木鐘목종〉을 낸 이후 〈풍장〉 〈아침 시작〉 〈겨울밤 전라도〉을 비롯한 시집과 60년대 중반 베스트셀러로 전국적인 관심을 모은 산문집 〈흐느끼는 목마〉, 평론집 〈못다 부른 목가〉 등 15권의 저서를 냈다.전라북도 문화상전북대상백양촌문학상모악문학상윤동주문학상과 석정 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다양한 관점으로 석정의 문학세계를 조명한 논문 50여 편을 발표했다.석정의 수많은 시를 발굴하고 수집했으며 지난 2009년에는 미발표 저항시 11편을 공개해 석정 문학을 새롭게 연구하는 전환점을 마련하기도 했다.

  • 기획
  • 김은정
  • 2017.02.03 23:02

'첼리스트로, 생물학 박사로' 두 길 가는 고봉인 씨 "과학자로서, 음악가로서 몸과 마음 치유하고파"

나의 음악은 악을 배척하고 삶의 승리를 구가하고 슬픈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하고 인류사회에 희망을 주고자 하는 의욕이 담겨 있습니다. 나의 고국과 형제자매 여러분 부디 나의 음악을 통하여 위로와 용기를 얻으시고 내가 절실히 염원하는 민족의 평화적 사회와 민족끼리의 화해가 하루 빨리 실현되기를 바라고 또 다 같이 노력합시다.여러해 전 통영의 윤이상 기념관에서 만난 작곡가 윤이상의 글이다. 그 때 이 글을 보면서 전주 출신의 젊은 첼리스트 고봉인을 떠올렸다. 고봉인은 2008년 평양에서 열린 윤이상 연주회에 초청돼 우리나라 연주자로는 처음으로 북한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해 화제를 모았던 첼리스트다.그는 음악공부를 위해 독일로 유학을 떠났지만 하버드대와 프린스턴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과학자가 되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바이오융합연구소 전문연구원으로 유방암 줄기세포를 연구하고 있는 젊은 과학자이자 첼리스트. 과학과 음악, 두개의 길을 동시에 걷고 있는 그의 삶은 아직 낯설다.지난 해 말, 첼리스트이자 생물학 박사인 고봉인씨(32)를 그의 연구실이 있는 한국과학기술원에서 만났다. 연구에 전념해야 하는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 연습을 하고 연주활동을 해나가는 그의 일상이 고단하지 않을까 궁금했다. 지난해만도 협연과 두 차례의 독주무대까지 치러냈던 그는 머뭇거림 없이 답했다.쉽지는 않지만 두 길을 함께 갈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합니다. 과학과 음악, 어느 한쪽도 포기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사실 저에게는 생물학 연구나 첼로 연주가 잘 맞는 일이에요. 이루고자 하는 바람도 같고요. 신약 개발로 질병을 치료하는데 기여하고 좋은 연주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힘이 되는 것, 서로 맞닿아 있지요.과학자의 길에서 인류의 건강을, 음악가의 길에서 인류의 정신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그의 바람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선물인가. 겸손함과 따뜻함을 갖춘 올해 서른두 살의 청년 고봉인을 인터뷰하는 일은 그래서 더 즐거웠다.-첼리스트 고봉인을 연습실이나 공연장이 아닌 연구실에서 만나는 일이 조금은 낯설군요. 지난 가을에 독주회를 가졌죠. 어땠습니까. 독주회로는 꽤 오랜만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많이 설레었어요. 협연은 더러 했었는데 독주는 꽤 오랜만이었거든요. 그래서 욕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대중들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친숙한 곡보다는 제가 연주하고 싶은 곡을 선곡했었거든요. 윤이상, 브리튼, 코다이 등의 곡들이었는데 아무래도 대중들에게는 좀 어려운 곡들이었던 것 같아요.-첼로 무반주곡들로만 구성되어 있었으니 음악에 조예가 깊은 청중들이 아니고서는 어렵다고 느낄 법 했겠습니다.이번 무대는 금호의 독주회 시리즈였는데, 선곡하면서 많이 흔들렸던 것이 사실이에요. 한국에서는 프로그램을 대중적인 곡으로 구성하는 것이 좋다고 주위에서 조언을 하셨거든요. 사실 선곡은 매우 중요하죠. 선곡에 따라 연주회의 성공이 가름되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연주회의 성공을 그런 기준으로만 얻고 싶지 않았어요. 제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짜고 싶었죠. 윤이상 선생님 곡을 두 차례 무대 모두 첫 곡으로 올린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윤이상 선생님 곡은 연주하기도 어렵고 듣기도 쉽지 않지만 제 목소리를 가장 깊게 들려줄 수 있다고 여겨온 까닭에 청중들이 낯설어 해도 들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컸어요. 좀 어려워도 한번 들어보세요라고 이야기 하고 싶었죠.-그런 마음이 청중들에게 가 닿았을까요.꼭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우선 객석이 많이 차지 않았거든요. 프로그램을 보고 미리 포기하는 청중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웃음)-대중적인 곡들로 선곡했으면 객석을 꽉 채웠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겠군요.아쉬움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선곡을 후회하진 않아요. 그런 방향은 제 목소리를 제대로 들려주는 무대가 아니니까요. 음악을 접하는 태도의 차이일 터인데 청중들의 태도에만 연주가 맞추어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윤이상 선생님에 대해 각별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윤 선생님은 독일에 가서 처음 알았어요. 연주회마다 프로그램에 어김없이 윤이상 곡이 있었어요. 이분이 누굴까 싶었습니다. 알고 보니 우리 시대의 아주 중요한 작곡가셨죠. 그 분의 존재가 자랑스러웠습니다.-윤이상 곡은 연주자들도 어려워하는 곡이라고 들었습니다.적잖은 연주자들이 피하는 곡들이 많죠. 그러나 한국인 연주자들은 많이 연주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한국인 첼리스트로서 윤이상 선생님 곡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다른 천재 작곡가의 곡보다 더 어려운 것은 아니에요. 한국 사람이 연주하기에는 아주 좋은 곡이죠. 동질적인 감정이 있거든요. 제가 아무리 브람스나 베토벤을 잘 한다고 해도 유럽의 연주자들처럼 그들의 감성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보다는 부족한 것이나 마찬가지죠.-화제를 돌려보죠. 과학과 음악 두개의 길을 동시에 간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일 텐데요. 더구나 한국에서는 낯선 문화이기도 하고요.저는 처음부터 병행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어요. 어려서부터 아버지처럼 과학자가 되고 싶었는데 음악 또한 마음을 접기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음악을 먼저 시작하게 되었는데 대학 다닐때까지만 해도 어머니께서는 반대하셨어요. 연주자의 생활이 워낙 외롭고 성공하기 힘들다는 것을 아시니까.-과학자는 아버지 영향이 컸겠군요.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는 참 행복하게 일을 하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자연스럽게 나도 과학자가 되면 행복하게 살 수 있겠다 싶었죠. 그래도 음악의 길을 먼저 갔는데 선배들이 대학은 일반 대학을 가서 다른 것을 제대로 공부를 해보라고 권했어요. 자신들은 그렇게 하지 못해 후회가 된다고 했어요. 저도 40-50대가 되어 후회하지 않으려면 마음에 품고 있는 과학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정했죠.-두가지 다 해보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나요.결국은 내 삶에서 밸런스를 이루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이 보기 나름인 것 같더군요. 저는 음악에서 배운 점을 과학에 유입할 수 있고 반대로 과학에서 배운 것이 음악에 적용된다고 생각했어요.-그러고 보면 환경이 중요한 것 같아요. 부모님의 영향도 그렇고 외부적인 요인도 그렇고요.제 생각에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패션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을 해요. 저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데, 무엇인가 선택을 하면 인생을 걸고 하는 일이 다반사인 한국에서는 그 기준이 다르겠죠. 저는 다행스럽게 좋은 환경을 얻어 제 의지를 실현할 수 있었어요.-꽤 일찍 유학을 떠났었죠.중학교 3학년 때인데, 처음에는 게링가스 교수님이 계신 독일의 뤼벡으로 갔었어요. 1년 뒤에 교수님을 따라 베를린으로 옮겼는데 그곳에서 미국계 공립고등학교에 들어가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죠.-우리시대의 현존하는 첼로 거장으로 불리는 게링가스 교수님은 어떤 인연으로 만났습니까.99년 오디션에서 뵈었어요. 운이 좋았죠.-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대학 진학을 위해서였습니까.그런 셈이죠. 하버드대에 들어가면서 옮겼으니까요.-학과 공부도 아주 잘했던 모양입니다. 음악과 병행하면서 원하는 대학을 들어갔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대학에서도 복수전공으로 음악 석사과정을 마쳤던데요.사실은 학부 때 많이 힘들었어요. 그런데 제 주변에 전공이 아닌 다른 패션을 갖고 있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위로를 많이 받았죠. 그럼에도 결국에는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가 싶기도 했는데 그 순간을 생각하면 어느 한쪽도 포기할 수 없었어요. 연구하는 것도 음악도 정말 재미있는 일이거든요.(웃음)-포기를 안하면 그만큼 고단하잖아요. 두 개를 거의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부담도 있겠고요.부담보다는 탐이 날 때가 있어요. 예를 들어 독일에서 공부했던 선배들 중에는 정말 훌륭한 연주활동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 선배들이 좋은 오케스트라나 훌륭한 음악가들과 협연하는 무대를 보면 내가 음악가의 길로만 갔다면 나도 저들처럼 되지 않았을까하는 그런 생각이 들죠.-그럴 때면 무엇으로 위안을 받나요.욕심을 버리는 일이죠. 늘 리마인드하는 것이 있는데, 정명화 선생님이 저게 주신 말씀이에요. 음악은 마라톤이다. 지금 아무리 잘해도 나중에 잘 못하면 쓸모없게 된다고 하셨죠.계속 성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그 말씀을 생각하면서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한 단계씩 올라가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다지게 됩니다.-연구 분야가 궁금합니다.혈관 쪽입니다. 지금까지는 유방 암 줄기세포 연구를 집중적으로 해왔는데, 최근에는 뇌졸중 연구로 넓혔습니다.-의사가 아닌 연구 분야를 선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까.아버지의 영향이 컸어요. 새로운 약을 개발해 치료에 쓰이게 하는 것,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하려면 연구 쪽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이야기를 들으면서 연구와 첼로 연습, 연주활동까지 어느 것 하나도 소홀하지 않게 일상을 꾸려간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일상을 지켜가는 것이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우선 시간이 부족할 텐데요.남들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자기 고집이 있으면 시간은 찾아집니다. 예를 들어 제가 지키고 있는 하루 두 시간의 연습시간은 사실 프로연주자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거든요. 그러나 연구에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하는 저에게는 두 시간을 빼내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보통 저녁 먹고 연습을 하는데, 상황이 그러하니 타이밍을 잘 해서 인큐베이션 등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활용합니다.-치열한 계산법이 동원되는군요.(웃음) 책은 많이 읽습니까.많이 읽으려고 노력합니다. 어렸을 때는 공상과학소설 같은 류에 마음이 있었는데 대학교 때 교양과목을 들으면서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음식에도 관심이 있어 관련된 책을 많이 읽는 편입니다. 요리도 즐겨해서 가끔 지인들을 초대해 콩나물국을 대접하기도 합니다.-이제 곧 전문연구원 과정이 끝나는데 앞으로의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미국으로 돌아가 연구를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대학에서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좋은 연구자들과 의미 있는 실험을 통해 인류의 건강에 기여하는 신약을 개발하는 것이 꿈이기도 합니다.-과학자인 아버지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지금도 많은 것을 배웁니다. 특히 아버지가 쌓아 오신 인간관계는 놀랍습니다. 아버지는 연구 성과를 곧바로 열어놓습니다. 연구는 공유해야 발전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계시는 것 같아요. 특히 생물학은 혼자서는 절대 멀리 갈 수 없는 영역인데, 저는 아버지의 그런 자세가 혈관 분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그 길은 제가 가고 싶은 길이기도 합니다.두 시간 남짓한 인터뷰로 첼리스트 고봉인이 과학과 음악의 길을 동시에 걸어가는 이유를 분명하게 알게 됐다.아버지의 연구가 혈관연구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새롭게 개발된 약들이 인류를 어떻게 구해내는지를 과학의 길에서 알게 되었다는 그는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일 또한 수많은 청중들과 감정을 교류하면서 위안과 힘을 건네는 일이라는 것을 더 깊게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권력이나 파워가 아니어도 내가 가진 것을 공유하고 나누면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기꺼이 그 길을 가야 하는 것 아닐까요. 아무리 힘들어도 이 길을 가야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요.그가 고단해도 이 길을 가고자하는 명쾌한 이유다.● 고봉인씨는 2008년 평양 윤이상 연주회서 남한 연주자 최초 북한 오케스트라와 협연첼리스트 고봉인은 1985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돋보였던 음악에 대한 재질과 과학에 관심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백승희)와 생물과학자인 아버지(카이스트 의과대학원 고규영 특훈교수) 자질을 그대로 이어받은 덕분이었다.첼로를 시작한 것은 여덟살 때.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그대로 안은 채 음악가의 길을 먼저 걷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반겼으나 어머니는 과학자의 길을 권했다. 그의 재능을 주목한 사람은 첼리스트 정명화씨였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예비학교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연주자의 꿈을 키웠다. 1997년 차이코프스키 국제청소년 콩쿠르 첼로부문 1위를 수상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전주 신흥중 3학년 때 독일로 유학을 가 첼로거장 다비드 게링가스의 제자가 되었다.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음대생이었던 그는 미국계 일반 고등학교인 존 F 케네디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과학자의 길을 동시에 걸을 수는 없을까 고민했다. 두가지 길을 다 갈 수 있다고 용기를 준 것은 유럽에서 만난 선배 연주자들이었다.하버드대에 진학, 생물학을 전공하면서 뉴잉글랜드 음악원의 복수학위 과정을 동시에 거쳤다. 2005년에는 독일 첼로 마스터클라스 란드그라프 폰 헷센상을 수상하면서 유럽 음악계에 이름을 알렸다.예술가와 과학자의 길을 함께 가는 일은 쉽지 않았으나 그 과정 자체가 그에게는 삶의 의미이자 행복이었다. 어느 것 하나도 소홀하지 않는 열정으로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분자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유럽과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에도 러시아 심포니오케스트라,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비롯, 국내외 오케스트라와의 협연과 유럽 미국 일본 중국 한국을 오가며 여러 차례 독주회와 협연을 가졌다. 2008년 10월에는 평양에서 열린 윤이상 연주회에 초청돼 남한 연주자로서는 처음으로 북한 오케스트라와 윤이상 첼로협주곡을 협연했는데 그 스스로 내 인생의 가장 의미 있는 연주회가 아닐까 싶다고 말할 정도로 큰 의미를 두고 있다.3년 전부터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문연구원이 되어 유방암 줄기세포를 연구하고 있는 그는 연구에 집중하느라 다소 거리를 두었던 연주무대에 다시 서기 시작, 첼리스트 고봉인을 다시 주목하게 했다. 특히 지난해에는 이어진 협연과 7년 만에 가진 10월의 두차례 독주회로 진지하면서도 따뜻한 음악세계를 전해 호평을 받았다.올 하반기 3년 동안의 연구 과정이 끝나면 미국으로 돌아가 과학자로서의 길을 더 단단히 다질 계획. 물론 첼리스트로서의 길도 더 넓게 이어갈 생각이다.

  • 기획
  • 김은정
  • 2017.01.06 23:02

고향서 농사 지으며 악기 만드는 현악기장 박경호 씨 "악기 만드는 건 새로운 소리 찾아가는 과정"

인터뷰 약속이 있던 날 아침, 도착하는 시간을 알리느라 문자를 보냈다. 곧바로 답이 왔다. 그 시간에는 고구마를 캐야 하니 오전에 도착하면 좋겠습니다.부안에서 악기를 만드는 박경호씨(47)의 삶이 더 궁금해졌다. 그는 이탈리아의 악기제작학교 굽비오에서 악기제작을 제대로 공부한 현악기장이다. 한국에서 서양악기를 만드는 사람, 그것도 고향 부안에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자기만의 현악기를 만드는 그의 존재는 특별하다. 1990년대 말 이탈리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2002년부터 지금까지 그는 바이올린을 만드는 일에만 매달렸다. 서울에서 10여년을 보내면서 그는 적지 않은 악기장들이 걷는 평탄한 길 대신 외로운 자기만의 길을 선택했다. 새로운 소리를 찾아가는 고난의 길이었다. 유학에서 돌아와 주목받았던 그를 새악기에는 관심 없는 한국 연주자들은 금세 외면했다. 악기가 팔리지 않았지만 악기를 수리하는 일만으로도 먹고 사는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여건. 그러나 기존 악기의 소리를 복원하는 일에 자신의 열정을 쏟고 싶지 않았다.작업실 임대료도 내기 어려울 정도의 궁핍했던 시간이 찾아왔다. 악기를 만드는 일에 회의감이 들었지만 그럴수록 새로운 소리를 내는 나만의 악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2012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에 집을 짓고 정착했다. 더 외로운 싸움이 시작됐다. 새로운 모형과 새로운 소리를 지닌 바이올린이 두 평 남짓한 그의 작업실에서 태어났다. 지난해 여름 오스트리아 카린시안 국립음악원 교수가 작업실을 찾아왔다. 기존의 질서를 완전히 깨트린 파격의 바이올린과 현악기들을 주목한 그는 오스트리아 전시를 제안했다. 지난 5월 그의 악기들이 유럽의 연주자들을 만났다.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박씨의 바이올린이 생명을 얻는 시간이었다.자신이 만든 악기가 특정한 공연장에서만 연주되지 않고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광장에서 연주되는 악기가 되기를 바라는 그는 용기와 힘을 얻었다.인터뷰는 흥미로웠다. 한국에서 서양악기를 만든다는 것, 그것도 부안의 한 시골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악기를 만드는 그의 삶은 가난했으나 풍요로웠다.-농사를 많이 짓습니까.고구마 농사 400평 정도 짓는데 그것도 쉽지 않네요. 고구마를 캐야하는데 비가 많이 와서 기계로는 추진 흙을 털어내지 못하거든요. 사람 손으로 캐야하는 상황이어서 친구들이 날 잡아 도와주러 왔어요. 오후에는 고구마를 캐야 합니다.-농사일과 악기를 만드는 일을 함께 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나쁘지 않습니다. 악기 만드는 일에만 전념할 수 없지만 필요한 만큼 노동을 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으니 좋아요.-흙집의 구조가 독특하면서도 편안합니다. 직접 지으셨다고 하던데요.사실 집 짓는 것을 구경조차 한 적이 없었는데 그냥 할 수 있겠다싶더라고요. 눈으로 익히고 책으로 배우면서 했습니다. 마무리하면서 손을 좀 빌렸을 뿐 아주 천천히 제 손으로 지은 집이지요. 덕분에 대단한 시설을 하는 것도 아닌데 2년이나 걸렸습니다.(웃음)-경험에 기대지 않고 새로운 일을 하는 것에 대한 의욕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할 수 있겠다 싶으면 무조건 달려드는 습성이 있습니다. 무모하다 싶은데도 또 그렇게 나서면 일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고생은 하지만요.-악기 만드는 일도 그런 열정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여기 있는 바이올린은 기존 악기와 모양이 전혀 다르군요. 다 연주가 가능한 것들입니까.물론입니다. 제가 새로운 악기 만드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새로운 모형과 새로운 소리를 찾는 일이죠. 악기마다 담고 있는 사연이 다르니 소리도 각각 다른 소리를 갖게 되는데, 기존 악기와 달라서 선뜻 연주하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연주자에게도 새로운 시도가 되겠죠.-악기가 꽤 많은데 소장하고 있는 악기가 많은 것은 그만큼 판매가 잘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 아닌가요.그렇죠. 악기가 판매 되는 환경을 생각하면 새 악기를 제작할 명분이 없습니다. 그러나 악기가 팔리지 않는다고해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지요. 작업을 꾸려 가는데 어려움이 많지만 팔리는 만큼만 만든다면 좋은 악기를 만들 수 있을까요. 마음을 비운지 오랩니다.-연주자 수적 규모로 보면 악기가 팔리지 않는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우선 연주자들이 새악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올드나 모던악기를 선호하죠. 그런데 연주자들이 잘 모르는 부분이 있습니다. 100년 이상 된 올드 악기나 100년 미만인 모던 악기가 모두 수제작은 아니거든요. 연주자들이 갖고 있는 악기 중에서 수제작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검증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85프로 정도는 공장제일겁니다. 수제작이라해도 한사람이 전 과정을 도맡아 제작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만들어서 조립하는 형식이지요. 18세기 19세기의 악기들 거개가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런 악기들이 지금 전 세계를 올드나 모던이란 이름으로 휩쓸고 있거든요. 모두 수제로 둔갑해서요.-언뜻 생각하기에는 연주자들이 자기만의 악기로 자기만의 소리를 만들어가는 것을 지향할 것 같은데 의외입니다.새악기의 장점이 바로 거기 있죠. 연주자가 자기만의 소리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 올드나 모던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소리잖아요. 물론 장단점은 있겠죠.-연주자들에게는 새악기가 부담스러운 대상일 수도 있겠습니다.그렇겠죠. 새악기는 길들여지지 않는 그 자체의 소리를 갖고 있으니까요. 바이올린을 제대로 만들려면 나무를 10년 정도는 말려서 악기를 깎습니다. 그 과정이 또 2년 걸립니다. 제 경우는 그렇습니다. 좋은 연주자라면 악기장이 만들어가는 2년 동안의 과정의 의미와 가치를 잘들여다보아야 합니다.-나무를 깎고 줄을 걸고 색을 칠하는 과정이 2년이나 걸린다니 악기 하나를 만들어내는데 대단한 공력이 필요하군요.저는 악기를 만드는 과정을 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생각합니다. 소리를 찾다보면 계속 새로운 소리가 나오거든요. 연주자가 원하는 소리가 있다면 그런 소리를 찾아 악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예를 들면 강한 소리나 부드러운 소리가 똑같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좋은 소리가 따로 있습니까.좋은 소리는 듣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개인마다 좋아하는 소리가 다른데 어떤 소리가 좋은 소리인가를 규정하는 일은 옳지 않아요. 그런점에서 보면 아마티나 스트라디바리, 과르네리 등 세계적인 3대 바이올린 명장의 악기가 꼭 좋은 소리를 낸다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좋은 소리와 좋은 악기의 경계가 궁금해지는군요.누군가 좋아하는 소리를 내는 악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거기 있어요. 왜 꼭 기존 악기소리를 닮은 악기를 만들어야하는가를 고민해봤는데 만들어진 소리를 따라다니면서 악기를 복원하는 일은 의미가 없더라고요. 그런 과정에서 새로운 소리를 가진 악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가 되었지요.-바이올린의 새로운 모형을 개발하신 이유겠습니다.새로운 소리에 관심을 갖게 되니 자연히 모형을 바꾸어보고 현도 바꾸어보면서 다양한 바이올린을 제작하게 되었죠. 개량악기가 된 셈인데, 따지고 보면 바이올린의 역사도 불과 400년이거든요. 그 과정에서 계속 발전해온 것인데, 지금까지의 바이올린은 오늘의 극장 조건에서는 수명을 다했다고봐요. 공간이 너무 크거든요. 바이올린의 역사를 돌아보면 극장 악기가 아니라 거실이나 살롱 같은 작은 공간용이었거든요. 지금 우리가 듣는 연주는 악기의 제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장치(스피커)를 거친 소리를 듣는 셈이지요.-바이올린 3대 명장 이후 새로운 소리로 독보적인 반열에 이른 악기장은 없었습니까.제작자는 많아요. 그 대부분이 기왕의 소리를 재현해내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악기 모양을 바꾸어 새로운 소리를 찾으려했던 제작자들도 있지만 빛을 못 봤어요.-팔리지 않는 악기를 만든다는 것, 외롭고 힘든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굳이 이 길을 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그동안 판매된 악기도 있지만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15년 동안 한결같은 상황이니 좌절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이겠죠.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와서는 자신감이 있었거든요. 내가 만들면 연주자들이 찾겠지 하는. 그런데 정직하게 만들어낸다고 팔리는 것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정직하게 하면 악기가 더 팔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죠. 안타까운 현실입니다.-현재 유통되는 바이올린 상당수가 수제작이 아니라고 말씀 하셨는데 기계로 만든 것과 수제작은 많은 차이가 있지 않을까요.소리의 오묘함, 그 차이가 크죠. 소리는 만들어지는 것인데 제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밀가루 반죽을 오래하면 쫄깃쫄깃해지듯 손으로 소리를 생각하며 만들어낸 악기의 소리는 쫄깃쫄깃해지는 특성이 있어요. 그런데 공장제는 한계가 있거든요. 더 이상의 발전이 없는 것이죠.-찍어내는 것의 한계일 것 같습니다. 그래도 공장제를 찾는 연주자들도 있을 것 같은데요. 가격의 차이 때문이겠지요.보급형 바이올린은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것이 맞습니다.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은 공장제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공장제가 수제작으로 바뀌어 판매되는 유통 현실이에요. 올드니 모던이니하며 연주자들이 가지고 다니는 악기만 해도 공장제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수제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지요.-이런 환경에서 고집스럽게 이어오는 박경호식 바이올린의 특성이 궁금해집니다. 바이올린은 나무도 중요하겠죠.나무가 50%를 좌우한다고 봐요. 어느 환경에서 자라고 어떤 과정으로 거쳐 재목이 되었는가가 중요하죠. 나머지 50%가 목공(제작)을 하는 사람의 기술력입니다.-어떤 나무를 사용합니까.저는 알프스나 발칸반도 나무를 사용합니다. 기온의 차가 심하지 않은 지역이죠. 그런 환경에서 자란 나무는 순하고 온화(?)합니다. 겨울에도 영상 2-3도 정도에 머무르는 지역에서 자란 나무를 선호하죠.-소리도 그런 소리를 좋아하시는군요.강한 소리보다는 부드러운 소리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젊었을 때는 힘 있고 강한소리를 좋아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달라지더라고요.(웃음)-만들어놓은 바이올린의 색상도 다 다른데 칠도 직접 하십니까.줄을 걸고 칠을 해 완성하기까지 모든 과정이 제 손에서 이루어집니다. 안료를 사다 색깔도 제가 내는데, 그 안료들이 대개 인도나 아프리카에서 생산되는 것들이에요. 그래서 저는 칠 자체가 동양으로부터 온 것이 아닌가 추정합니다.-그런 과정을 거쳐 색상도 다양하고 모양도 독특한 박경호 바이올린이 탄생하는 것이군요. 새로운 악기에 대한 도전 정신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개인적인 성격도 있고, 유학시절 스승의 영향이 컸습니다. 늘 정해진 길로만 가지말라며 네 것을 만들라고 하셨거든요. 한국에 돌아와 변형악기를 만들기 시작했던 것도 창의력을 살리라고 했던 스승의 가르침 때문이었을 겁니다.-모형도 독특하지만 바이올린이 모두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이 흥미롭습니다.악기마다 사연을 갖고 있으니까요. 한반도 아리랑으로 이름을 단 악기는 모든 악기의 중심인 밸런스를 깬 악기예요. 밸런스 자체를 깨면 소리가 달라지는데 새로운 소리를 추구해보고 싶은 욕망으로 제작한 것입니다. 일부러 좌우 밸런스를 깨버렸는데, 나름대로의 심오한 의미가 있어요. 아리랑 1,2호로 이름 붙인 바이올린은 하나는 북쪽지형을 하나는 남쪽 지형을 형상화해서 각각 고음과 저음을 갖게 된 두 녀석이 만나 연주를 했을 때 음의 조화를 융화의 소리로 만들어보고 싶었어요.-연주자들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대상일 것 같습니다.맞아요. 우리나라 연주자들은 거부감을 보입니다. 물론 연주를 해보려고 하지도 않죠. 그런데 지난 5월 오스트리아 전시회에서 유럽 연주자들은 큰 관심을 갖더라고요. 서로 연주를 해보기도 하고.-지금까지 만든 바이올린도 그렇거니와 앞으로도 판매는 한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악기는 연주자를 만나야 생명을 얻는 것일 텐데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악기 제작과 관련해 찾아오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악기제작 학교를 만들자는 제안도 있습니다. 때가 아니라고 답하죠. 지금은 열심히 내 악기를 만드는 일에만 전념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악기는 힘이 있을 때 만드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힘이 떨어지면 소리도 떨어지거든요.-오히려 나이가 들면 악기 제작에 노련함을 더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스트라디바리나 과르넬리도 전성기 5~6년 동안 만든 악기소리가 좋습니다. 노련미도 그렇고 힘이 어느 정도 붙었을 때였겠죠. 제게는 지금이 그 시기가 아닌가 싶어요.-이야기를 듣다보니 고단한 삶에서도 악기를 만드는 일을 생업으로 삼지 않는 것이 박경호 바이올린을 만들어내는 힘인 것 같은 아닌가 싶습니다.주위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도 좋겠다 하지만 사실 고뇌가 큽니다. 악기를 만드는데도 경제력이 우선이니까요. 제가 시간나는대로 벌이를 위해 노동을 나가는 것도 그 이유에서입니다. 그렇게 일하고 벌어오는 돈으로 줄을 사고 나무를 사 악기 하나를 만드는 과정, 그 자체가 제게는 의미 있는 과정이고 삶의 의미입니다.● 악기장 박경호씨는 패션 디자이너 꿈꾸다 이탈리아서 만난 새 인생악기장 박경호씨는 부안군 동진면 봉황리가 고향이다. 9대째 살아온 집터에서 태어나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살았다.농사꾼이었던 아버지는 짚공예와 목공예에 조예가 깊었는데, 그는 지금도 아버지가 엮어냈던 다양한 짚공예 물건들의 맵시와 아름다움을 기억하고 있다.어린 시절 동네에 목수아재가 살았다. 나무 냄새를 좋아했던 그는 나무로 만드는 온갖 물건들이 흥미로웠다. 그는 어린 시절을 돌이켜 자신이 악기장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김제로 고등학교를 갔지만 공부와는 담을 쌓고 기타와 여행을 즐겼다. 대학은 당초부터 관심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고가 없는 서울로 올라갔다. 어머니가 쥐어준 3만원이 전 재산이었다.신설동에 있는 복장학원에서 2년 동안 양장일을 배워 패션디자인회사에 취직했지만 안겨진 것은 디자인이 아닌 백화점 영업직이었다. 4년 동안 영업일을 하다 보니 디자인에 대한 욕망이 더 커졌다. 마침 디자인실에 자리가 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바꾸었다. 4년 만에 디자인실장을 넘볼 수 있는 직책까지 올라섰다.안정되었다 싶으니 개인 사업에 마음이 갔다. 어느 정도 성공궤도에 올라섰지만 아이엠에프 바람으로 부도가 났다.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유럽 여행을 떠났다. 1999년,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무작정 떠나온 여행이었지만 미래를 위해 돌파구를 찾아야했다. 이태리 패션학교 유학을 고민하고 있던 그는 페루지아를 여행하던 중 악기 제작하는 곳을 들르게 됐다. 굽비오 현악기제작학교였다.마침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던 굽비오에 원서를 냈다. 영어도 이탈리어도 못했던 그의 무모한 도전이었다. 뜻밖에도 굽비오는 그를 합격시켰다.한국인으로는 굽비오 1호 유학생이 되었다.아내에게는 패션학교에 합격했다고 숨기고 유학을 떠났다.후에 꼴찌로 합격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3년 수학과정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았다.교수들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 동양인 제자를 위해 그림까지 그려가며 가르쳤다.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언어를 공부하고 악기를 만드는 일로만 보낸 3년은 삶을 바꾸어놓았다.2002년 굽비오를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서울 방배동에 경호 Park 현악연구소를 열었다.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돈도 벌 수 있는 여건이었지만 부와 명성을 쫒는 대신 고행과 인내가 따르는 악기장의 길을 택했다.악기 수리에 눈을 돌리지 않으니 작업실 임대료도 못내는 처지가 되었다.새악기, 더구나 한국인이 만든 악기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환경에서 그의 악기는 주인을 만나지 못한 채 소장품(?)으로 쌓여갔다.2007년 고향 부안에 내려가 흙집을 짓고 지내다 다시 올라왔으나 악기제작에만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은 더 어려워졌다.2012년 어머니가 작고하시자 아예 악기들을 챙겨 고향집으로 내려와 작업실을 열었다.2014년 서울숲 커뮤니티에서 그를 초대했다.오로지 자신의 손으로만 모든 과정을 거쳐 완성해내는 그의 악기들이 비로소 대중들과 만난 시간이었다.지난 여름, 그는 오스트리아 카린시안 콘서바토리에서 두번째 전시회를 가졌다. 악기마다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의 악기들을 유럽의 연주자들은 주목했다. 앞으로 5~6년 악기제작에만 전념하겠다는 의지가 더 단단해졌다.

  • 기획
  • 김은정
  • 2016.11.11 23:02

출판인에서 정치인으로 소병훈 국회의원 "남북문제 해결에 앞장, 꺼진 대화 불씨 살려내고파"

다른 사람보다 일찍 사회현실에 눈을 떴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위한 10월 유신을 선언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엄혹한 시절, 그해 11월 21일 유신헌법이 통과됐다. 이튿날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데모에 나섰다. 친구들을 독려해 거리로 나갔던 그때, 그는 대학입시를 코앞에 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일주일 후 학교는 그를 제적시켰다. 그는 10월 유신을 반대한 최초 데모 주동자이자 최초 제적생이 되었다.남북분단의 암울한 역사와 반민주적인 사회현실은 그의 삶을 저항적 사회운동의 길로 이끌었다. 80년대 초반, 사회변혁의 의지는 출판운동으로 이어졌다. 반쪽짜리 역사관을 온전한 역사관으로 확장시키고 건강한 아동도서 문화를 이끌어내는 출판운동의 중심에서 보냈던 30여년 세월은 부침의 굴곡이 심했으나 우리나라 출판사를 새롭게 쓰는 물꼬를 열고 발전시켰다. 어찌하다보니 정치의 길에 서게 됐다. 확고한 의지로 선택한 길은 아니었지만 기왕에 들어선 이 길에서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성공시키고 싶었다.더불어민주당 소병훈 의원(62, 경기 광주시 갑)을 만났다. 30여년 출판인으로 살아온 그의 정치인으로의 변신과 10대부터 저항적 사회운동의 중심에 서온 그가 새롭게 펼쳐갈 정치 지형도가 궁금했다. 그는 출판사 산하 대표로 일찌감치 이름을 알렸다. 산하는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낸 출판사로도 그렇지만, 80년대 후반부터 시작해온 단행본 어린이책 산하어린이 시리즈로 신뢰를 쌓아오면서 명성을 얻은 출판사다. 1990년부터 국내 창작동화의 시대를 연 산하시리즈로 세상에 나온 책은 150여권. 창작동화와 지식정보의 지평을 넓힌 어린이책으로 평가받는 산하어린이는 살만한 세상을 꿈꾸어온 그가 지켜 이루어낸 결실이다.국회 그의 사무실에서 있었던 인터뷰 약속시간은 1시간 가깝게 늦어졌다. 그가 공동주최한 특별지방행정기관 지방이양 정책토론이 예상보다 길어졌기 때문인데, 덕분에 그가 자신이 주최하는 토론회가 아니어도 국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주제의 토론회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가능하면 시간을 쪼개어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국회의원이 되니 좋은 것을 꼽으라면 좋은 토론회에 언제든지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에요. 다양한 주제를 수준 있는 전문가 발제와 토론으로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은 망외의 소득이죠.출판인이 아닌 정치인으로 그를 만나는 일은 기대보다도 더 흥미로웠다. 사회현실에 눈을 떴던 10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가 서 있었던 저항적 사회운동의 길은 더 활짝 열려 있는 듯 했다. 그만큼 정치인이 된 그의 의지는 단단해 보였다.-출판운동에 오랫동안 몸담아 오시면서 일구어온 성과가 큽니다. 출판인에서 정치인으로 왜 길을 바꾸었는지 궁금했습니다.오래전부터 정치 쪽에 관여는 해왔지만 직업 정치인은 아니었으니 시작이 빨랐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확고한 신념이나 의지로 선택한 길은 아닌데, 그렇다고 정치와 무관한 길을 걸어왔다고 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제 삶이 늘 정치와 맞닿아 있었거든요.-학생운동을 열심히 하셨죠.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했으니 꽤 긴 세월이죠. 제가 고 3때 유신헌법이 통과되었습니다. 이대로 가만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친구들을 독려해 헌법이 통과된 다음날 유신반대 데모에 나섰지요. 덕분에 제적을 당했습니다. 다행히 다음해에 구제를 받아 졸업장을 받긴 했지만 10월 유신 최초 데모 주동자이자 최초 제적생이 되었습니다.-고등학교 시절, 사회현실에 눈을 뜨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현실이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야말로 정의란 무엇인가를 늘 생각했던 때인데, 친구들이 모두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때 데모했던 친구들 중 3명이 퇴학당하고, 여러 명이 무기정학을 당했는데, 대부분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저와 함께 퇴학을 당했던 채수찬 전 의원 같은 경우는 그 다음해 서울대에 수석으로 합격했는데, 제가 꼬드겨 데모한 덕분이니 수석도 내 덕분이라고 말합니다.(웃음)-대학에 들어가서는 학생운동의 날개를 달았겠습니다.친구들은 대부분 1학년 때부터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저는 대학에 들어가서는 앞에 나서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감시가 워낙 심하기도 했고요. 학내활동보다는 다른 학교 학생들과 연대해서 하는 활동을 했습니다.-요주의 인물이었군요. 그래도 줄곧 사회변혁 활동은 주도해 오셨을 텐데요.삶의 틀 자체가 그런 기반 위에 있었으니까요. 군대 다녀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지하철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했고, 방산시장에 정식으로 취직을 해 짐 나르는 일을 했습니다.-출판 일은 어떤 계기로 시작하셨습니까.출판일은 사회운동을 해오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82년 즈음, 학생운동 출신들이 노동현장으로 많이 들어갔습니다. 그중 일부는 출판 쪽으로 갔지요. 그즈음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이 모여 〈금요회〉를 만들었는데 우리나라 사회과학서적의 문을 연 출판사였습니다. 당시 출판 쪽에서 일하던 16명이 뜻을 함께 했었는데, 그 중 정치 분야로 진출한 사람이 여럿 있습니다. 당시에는 출판보다 서점을 통한 사회운동이 더 활발했었는데 사회과학 서적을 출간하는 출판사와 서점이 짝을 이루는 형식이었습니다. 당시는 책을 내면 문공부의 심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모든 것이 반쪽이었던 시절이었는데, 이를테면 자본주의 경제학은 있으나 사회주의 경제학은 없는 식이었습니다. 변증법이라는 이름을 내건 책 한권이 없었을 때였으니까요. 모든 학문이 반쪽으로 되어 있으니 우리가 반쪽을 채우자고 해서 운동권 인사들이 출판 쪽으로 많이 들어갔죠. 우리가 펴낸 책들은 대부분 판금되는 번역서들이었는데 그래서 책을 내고 도망 다니는 일의 반복이었습니다.-〈금요회〉의 역할이 컸겠습니다.16개 출판사가 모였으니 상징적인 모임이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번역서를 내는 일을 도모했는데 3년 정도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제가 초대 총무였는데, 85년에 저희 출판사(이삭)가 등록 취소되는 일이 벌어졌어요. 자유실천문인협회 기관지를 펴냈었거든요. 네 권 째까지는 판매금지가 되긴 했지만 잘 지나왔는데, 다섯 권 째 민족문학 5호는 제본소에서 5000부 전량을 압수당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누군가가 그 중 한권을 빼와 그것을 마스터로 돌려 다시 5000부를 찍어 냈지요. 그 때문에 등록 취소가 되었고요. 계간지 취소는 있었지만 출판사 등록을 취소한 것은 이삭이 처음이었습니다.-출판 활동이 중단되었겠군요.그런데 마침 전주에 후배들이 등록한 출판사가 있었어요. 그것이 산하입니다. 86년부터 그 이름으로 출판활동을 했지요. 그러다가 88년에 산하를 서울로 가져온 겁니다.-어린이책은 언제부터 시작하셨습니까.88년부터 기획은 했는데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90년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계기가 있었나요.우리 아이들 덕분이었어요. 큰애가 초등학교 다닐 때인데, 하루는 방학숙제용 책을 가져왔더라고요. 들여다보니 선정된 책의 면면이 정말 엉망인 거예요. 학교에 항의했지요. 그런데 학교는 정작 모르는 일이더군요. 학부모들이 납품 업체들로부터 리베이트를 받고 책을 공급받아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는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학교에서는 교육청에서 허락을 받았을 것이라고 했지만 교육청에서도 모르는 일이었고요. 다른 학교도 다 마찬가지 상황이었습니다. 이럴 수가 있나 싶어 화가 나더라고요. 당시 언론에 보도가 되면서 이슈화되기도 했었습니다.-그것이 산하가 어린이책을 기획하는 계기가 되었군요.아빠가 출판 일을 하는데,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좋은 책 한두 권은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기회가 닿았어요. 이오덕 권정생 윤기현 조월례 선생님, 이현주 목사님이 우리 아동문학을 살려야한다는 생각으로 출판사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산하와 인연이 닿은 것이죠. 우리 아동문학의 개척자이자 공로자이신 선생님들과의 인연이 산하어린이시리즈를 만들어낸겁니다. 그때만 해도 어린이책은 단행본은 없었고 거의 전집류였어요. 10만원 20만원씩 하는 책값만으로도 경제적 부담이 컸지요. 그래서 큰 부담 없이 사서 볼 수 있도록 2000원짜리 단행본으로 만든 겁니다. 첫 번째 책이 〈참나무 선생님〉이었어요. 그 뒤 산하어린이 시리즈가 10권 정도 나왔을 때 언론이 관심을 갖게 되면서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요.-경제적으로도 성공하셨겠네요.실상은 그렇게 되지 못했어요. 그때는 어린이책에 인세란 개념이 없었어요. 삽화는 물론이고요. 매절(lump sum, 買切) 방식으로 발간하는 것이 관행이었죠. 저희도 어린이책을 돈벌이로만 생각했다면 그렇게 했을 텐데 글 원고는 물론이고 그림도 인세 제도를 시행하고 싶었어요. 내부적으로도 찬반 양론이 있었는데, 결국은 인세를 시행했지요. 그것이 출판사가 어려움을 겪게 되는 시작이었어요. 더구나 삽화를 회화를 전공한 작가들에게 부탁하면서 그 부담이 더 커졌고요.-그 부담을 고스란히 출판사가 안게 되었군요.그때부터 수입보다는 투자의 비중이 커지게 되니 인세가 밀리게 되었는데, 그러면서도 시리즈를 계속 냈습니다. 98년, 시리즈를 시작한지 8년 만에 100권을 돌파했지요. 국내 필자의 창작동화로만 100권을 만들었으니 출판계의 화제가 될 만했습니다. 힘은 들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일반물을 같이 하면서 베스트셀러로 이어졌기 때문에 경제적 부담을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었는데, IMF가 터지면서 서점에서 받은 어음이 부도나면서 출판사가 어려워졌어요.-지금은 출판사나 서점이나 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환경인데요.출판업의 문제는 사실 유통에 있습니다. 온오프라인 서점을 비롯해 공급받는 대상에 따라 공급률이 달라지거든요. 과거에는 서점에 정가의 80% 가격으로 공급했었는데 지금은 50%에도 못 미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도서정가제를 시행하고 있다 해도 출판사나 독자들은 그 혜택을 못 받고 있는 것이지요. 구조적 모순과 문제점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정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보겠습니다. 그동안의 시간을 돌아보면 정치 쪽의 일이 무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사실 〈금요회〉 시절부터 출마 권유를 받았었습니다. 당시 전북 출신 운동권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전북민주동우회〉를 만들었는데 제가 운영하던 이삭출판사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때 자연스럽게 정치권 진출을 모임 내부에서도 고민했었는데, 제 경우는 출판 일을 버리고 정치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 뒤로도 끊임없이 선거철만 되면 말이 나오긴 했는데, 그때는 마음을 접고 있는 상황이었죠.-출마는 하지 않았지만 정치 쪽 일은 지속적으로 해 오신 셈인데요.직업으로 정치를 삼지는 않았지만 재야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자연스럽게 그쪽 일을 하게 되었으니까요. 본격적인 계기라면 98년에 김근태 선배가 국민정치연구회를 만들었을 때부터 함께 하기 시작해 새천년민주당 창당 준비위원으로도 참여하게 되었고, 그 이후 열린우리당 시절에는 국정자문위원을, 김근태 선배가 의장으로 있을 때는 의장 자문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국회의원 선거는 2008년에 처음 도전했었죠. 왜 광주였습니까.친하게 지냈던 문학진 의원 지역구가 하남 광주였습니다. 문 의원이 출마했을 때 선거를 도와주었는데, 아쉽게도 3표 차이로 낙선했어요. 그 뒤 선거구가 새롭게 획정돼 문 의원이 하남 쪽으로 가면서 권유를 했고, 정동영 선배가 대선 출마할 때는 제가 그 지역의 선대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인연이 되었습니다.-국회에 들어와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시는 현안이 많습니까.물론입니다. 제가 지금은 사드에 관한한 가장 강경한 반대론자가 되어 있을 정도로 사드 문제에 앞장서고 있지만 그 못지않게 절박한 현안이 세월호입니다.일부에서는 세월호 피로감이란 표현까지 써가며 이야기하는데 정말 잘못된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해결하고자 하는 세월호 문제는 참사의 진상을 밝혀 잘못한 사람을 처벌하자는 것만이 아니라 또 다른 사고를 없게 하자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정부가 먼저 나서서 명명백백하게 밝혀내는 것이 우선이거든요. 그런데 입장이 바뀌어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정말 기가 막힙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내는 조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또 다른 세월호 사건을 만들어내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정치적으로 보더라도 이 사건은 박근혜정부가 마무리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나중에 벌어질 후유증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그렇습니다. 세월호는 미뤄둘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새만금과 관련된 법안을 김관영 의원과 공동발의하셨던데 새만금을 어떻게 보십니까.저는 전라북도가 홀대 받는 가장 구체적이면서도 명확한 증거가 새만금이라고 생각합니다. 30년 가까운 동안 투자된 예산이 아마 4조~5조 정도 될 겁니다. 사대강은 어떻습니까. 3년 만에 22조를 다 썼습니다. 환경문제 등 아직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작용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새만금에 이성적이기 보다는 감성적인 부분이 먼저 작동하게 됩니다. 지금이라도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대안을 찾고 투자해야 한다고 봅니다.-출판인으로서 일궈놓은 일이 많습니다. 정치인으로서는 어떤 일들을 해나가실 생각입니까.기회가 된다면 남북문제를 해결하는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들여다보니 6자 회담이 2008년에 열린 것이 마지막이었더군요. 지금은 대화 자체가 완전히 막혀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10년 햇빛정책의 결실이 아깝기만 합니다. 그 불씨를 살려내는 일에 앞장서고 싶습니다.● [소병훈 의원은] 고교 졸업 때 "남북통일 위해 태어났다" 다짐민주화운동 온힘소병훈 의원은 군산에서 태어나 자랐다. 중학교(전주북중)에 입학하면서 전주로 온 그는 초등학교를 군산에서 다닌 탓에 친구가 없었다. 자연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었는데 전국에서도 시설 좋기로 이름난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일이 거의 유일한 낙이었다. 덕분에 그는 엄청난 양의 책을 독파할 수 있었다. 전주고에 들어가서도 책읽기를 좋아했던 그는 반민주적인 우리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게 됐다. 정의는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잘못된 사회를 바로 잡는 옳은 길을 가겠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선언했다. 헌법이 통과되자 그는 친구들과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데모를 이끌었다. 주동자가 되어 제적을 당했지만 다행히 이듬해에 졸업장을 받았다.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 그는 나는 남북통일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고 썼다. 어떤 길을 가든 남북통일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고 싶어서였다. 성균관대 철학과에 입학한 그는 학내에서 데모나 시위를 주도하는 대신 다른 대학 운동권과 교류하고 연대하는 일을 도모했다.대학 졸업 후엔 지하철 현장과 방산시장에서 짐 나르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다. 결혼을 한 이후였지만 노동의 대가를 보상받는 정도만으로도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다고 여겼다.80년대 초반 운동권 출신들이 노동현장에 들어가거나 출판 분야로 눈을 돌릴 때 그는 출판을 택했다. 83년 출판사 이삭을 열었다. 출판 분야에서 일하던 운동권 출신 선후배들과 뜻을 모아 〈금요회〉를 만들고 사회과학서적을 출간하는 일에 앞장섰다. 엄혹한 시절이었으나 그만큼 민주화를 위한 저항운동의 의지도 강해졌다.85년 문공부는 그의 출판사 이삭의 등록을 취소했다. 86년 후배들이 등록해 갖고 있던 산하의 이름을 빌려 출판활동을 지속했다. 88년에는 산하를 서울로 가져와 본격적인 출판 사업을 시작했다. 일반 도서류를 출판하면서 꽤 많은 베스트셀러를 냈다. 89년부터는 어린이 책을 단행본으로 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출판사에 기록될만한 산하어린이시리즈 시작이었다.2008년 처음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더불어민주당)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사회변화를 꿈꾸어온 그의 새로운 도전이었다. 연고가 없는 경기도 광주를 정치적 고향으로 삼아 재도전까지 결행했으나 당선고지가 보이는 바로 앞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2016년 20대 국회의원 선거에 다시 도전해 당선, 초선의원이 됐다. 문화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상임위원회를 교육문화체육관광위에서 활동하기를 희망했으나 안전행정위원회에 배정돼 활동하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6.09.30 23:02

지리산문화자원연구소 김용근 소장 "판소리 자체가 '종합인문학'…사설부터 모든 것 정말 흥미로워"

남원은 판소리의 땅이다. 지리산의 강건한 울림을 그대로 안은 동편제 소리가 만들어지고 수많은 명창들이 시절을 보내며 그 울림을 생명의 소리로 다듬고 다스려 전해주었던 땅.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더러는 단절되고 더러는 묻혔으나 남원의 문화적 토양은 동편제 소리의 기반 위에서 성장해 오늘에 이른 것만은 틀림없다. 그래서인가. 남원 사람들이 갖고 있는 판소리에 관한 자긍심은 남다르다. 사실 소리를 생산해내고 또 그 소리를 판소리의 굵은 맥으로 지켜왔으니 자긍심의 근거는 충분하다.남원에서 판소리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해온 김용근 지리산문화자원연구소장(57)도 그 중 한사람이다. 남원에서 태어나 남원에서만 살아온 그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판소리 명창들의 삶을 추적하고 기록해 판소리사의 새로운 역사를 써온 살아있는 백과사전이다. 판소리 명창들의 삶을 찾아 찾아나선지 올해로 30여년.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자료를 섭렵하고 기록으로 남겨둔 그의 일상이 궁금했다.여름 한 중간, 남원시 대산면사무소에서 그를 만났다. 1986년 공무원이 된 그는 지금 대산면사무소의 산업계장으로 근무하고 있다.드러낼 만한 이야기가 별로 없다던 그와의 인터뷰는 예상보다도 길어졌다. 그의 말대로 판소리 이론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연구를 위해 학자들과 긴밀한 교류를 해온 것도 아닌 그의 판소리 연구는 외롭고 험난했으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만의 질서이자 삶의 가치로 안겨 있었다.내가 수집해 놓은 자료들이 이제 좀 좋은 결실로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젊은 사람들의 직업을 만드는데도 그렇고, 옛사람들의 삶과 지혜를 오늘의 우리 삶으로 끌어들이는 통로로도 그렇고. 들여다보면 문화콘텐츠로 활용할 만한 자료가 아주 많거든요.고단했던 여정, 그러나 그가 돌아보는 30년 가까운 세월은 기쁨과 보람으로 빛났다. 생애를 이렇게 후회 없이 살아올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었다.-판소리와의 인연이 궁금합니다.86년에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유난히 일본 관광객들이 많았습니다. 남원에도 외국 손님들이 많았었죠. 그런데 정작 남원을 잘 소개할 수 있는 안내자가 없었어요. 단순하게 문화재를 설명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으나 그 안의 이야기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판소리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했죠.-판소리를 소리로만 접하지 않고 거의 종합인문지리서로 정리해놓으셨던데요.판소리를 공부하다 보니 그 자체가 종합인문학이었어요. 사설부터 모든 것이. 명창들의 삶을 추적하다보니 정말 흥미로운 일들이 줄줄이 이어졌어요. 그래서 판소리도 배우고 북도 배웠지요. 명창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으려면 그만한 노력이 있어야겠더라고요.-〈판소리 북〉이란 책도 내셨죠.북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많아요. 조선시대에는 남원이 북을 가장 잘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우시장이 있었거든요. 궁중에서 쓰이는 판소리 북은 반드시 남원에서 만들어갈 정도로 남원을 인정했습니다. 그만큼 북만드는 기술이 빼어난 장인들이 많았던 거죠.-기록이 있습니까.제가 마을의 노인들께 들은 이야기예요. 실제로 저희 아버지도 북을 만드셨거든요. 남원 북은 소리꾼들 사이에서도 유명했어요. 판소리 소리꾼들은 제자가 소리를 어느 정도 배우고 분가를 하게 되면 그 징표로 북을 맞춰 주었어요. 북을 만들어주려면 남원으로 왔어요. 남원에 귀명창이 많았던 것도 그 덕분입니다. 사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북은 일본식 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아요. 안타까운 일이죠.-한국의 전통 판소리를 일본식 기법으로 만들어진 북으로 장단을 맞춘다면 잘못된 것 아닌가요.북은 귀명창이 만드는 것이거든요. 보통 북을 주문하면 6개월 동안 여덟 번 정도 왔다 갔다 하면서 자기 소리와 맞추었답니다. 소리꾼이 가진 소리의 특성과 잘 맞게 만드는 것이죠. 그런 과정을 거치고 북이 완성되면 스승은 붓으로 써서 제자에게 그 북을 주었어요. 이제 내 소리가 너한테 간다는 뜻이었죠.-지금의 소리 물림과는 많이 달랐군요. 의미가 깊습니다.일본식 기법으로 만드는 북이라고 제가 단언하는 이유가 있어요. 원래 우리 북은 태극단청을 넣었었거든요. 1910년대의 판소리 자료를 보면 북에 태극 마크가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없어요.-판소리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면서 생활사 자료까지 수집하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처음에는 판소리가 그렇게 방대한 분야에 걸쳐있는 것인지 몰랐었어요. 그런데 들어가다 보니 판소리 사설만해도 모든 분야가 집적된 종합인문지리지와도 같더라고요. 이것을 제대로 알려면 풍수지리도 공부해야하고, 의학적인 지식도 있어야 하고. 예를 들어 사설에 약초이름이 나오면 일일이 찾아서 그 의미를 알아야 사설의 해석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흥미도 있었겠지만 힘드셨겠습니다.학문의 경험이 짧으니 온전히 독학으로 해야 했죠. 전문가도 아닌데 모든 과정을 스스로 해야 하니 어쩔 수 없었어요. 지리산 일대의 마을은 다 찾아다녔어요.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씩.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들려준 이야기가 결국은 소리꾼들의 삶을 밝히는 종합서가 되었죠. 〈동편제로 지리산을 말하다〉 같은 책이 바로 그 결실입니다.-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많더군요.사실 지리산을 중심으로 찾아다녔지만 판소리 명창과 관련된 지역은 강원도에서 제주도까지 안간 곳이 없어요. 왜냐면 소리꾼들이 한 곳에서 거주하는 기간이 평균 3.5년이거든요. 이름이 알려진 소리꾼의 후손들은 거의 다 찾았어요. 지금처럼 개인정보공개를 규제하지 않던 시절이어서 호적과 족보를 조사하면 거주지까지 알 수 있었거든요.-얼마 전에 보도됐던 송흥록 명창의 후손도 그렇게 찾으셨군요.그렇죠. 제가 밝혀내기 전까지는 송흥록 명창의 후손도 조상을 모르고 있었어요. 6대 장손이었는데, 집안 어른들이 그런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왜 개인정보를 공개하느냐고 원망도 들었어요. 법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적도 있죠. 그래도 결국은 후손들의 동의를 얻어서 남원 운봉에 송흥록 명창의 묘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보람 있는 일이었죠.-이화중선 명창도 같은 경우일 것 같은데요. 그렇게 명창들의 가계를 밝혀낼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호적이나 족보가 가장 큰 통로예요. 왜냐면 소리꾼들은 대부분 통혼을 하거든요.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끼리. 그러니까 하나를 찾으면 줄줄이 연결이 돼요.-공무원 생활을 하시면서 이런 작업이 가능했습니까.직장 일을 제대로 안한 것 아니냐는 말씀 같은데, 그런 오해를 안 받으려고 업무를 미루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앞서서 맡았지요. 제가 이래 뵈도 국가가 인정한 모범 공무원입니다.(웃음) 담당 업무도 그렇지만 제가 판소리와 관련한 일을 하고 있으니 관광과의 업무도 자주 맡았거든요. 외부에서도 이런 저런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요청해오니 아무래도 일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죠.-표현이 적절치 않지만 잡일이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을 하실 시간에 좀 더 개인적인 역량을 높이는 공부를 했더라면 공무원으로서의 환경도 나아지지 않았을까요.그럴 수도 있었겠죠. 과장 국장 승진도 하고.그런데 그렇게 했으면 제가 해온 제 나름의 질서는 없었겠죠.-소장님만의 질서를 지키며 살아오셨다는 말씀이군요.저희 아버지의 가르침이었어요. 제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을 때 아버지 반대가 심했습니다. 아버지가 일제 징용을 다녀오셨거든요. 그 과정에서 공무원들한테 엄청나게 당하셨다고 하더라고요. 내 아들은 절대 공무원 시키지 않겠다고 작심하신거지요. 그래도 아들이 공무원이 되니 두 가지를 말씀하셨어요.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면 첫째는 아침에 7시 이전에 출근할 것, 둘째는 월급의 30%는 네 것이 아니니 다른 목적으로 쓰라는 것이었어요. 제 경우는 판소리를 연구하는데 30%를 쓴 셈이지요.-아버님의 가르침이 대단하셨군요.저희 아버지는 글을 모르셨어요. 그래도 분명한 당신만의 철학을 갖고 계셨죠. 제게도 그 철학을 주셨는데, 자기가 세운 질서가 공심이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예를 들면 길을 건널 때 파란불이 들어오면 사람들이 건너가는 것은 내가 연구해서 세운 질서가 아니고 누군가 만들어놓은 규칙을 따라가는 거죠. 그런 것 말고 너 스스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어떤 질서를 만들라는 말씀이었죠.-옛 사람들도 소리나 북을 배우는 과정이 고단했겠죠.물론지요. 그런데 제가 만났던 명창이나 노인들은 판소리나 북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배우는 것이 아니고 놀다가 저절로 되는 것이 소리라고요. 놀다가 따라서 하면 그것은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주는 것, 그것이 소리를 배우고 가르치는 방식이었다는 것이죠. 놀이로 배우고 가르치는.-흥미롭습니다. 소장님도 소리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았었을 텐데요.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저는 소리꾼이 되려는 것도 학자가 되려는 것도 아니었어요. 소리와 북을 익힌 것은 조사에 필요했기 때문이죠. 제가 북을 치고 소리를 안했으면 소리꾼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빤했을 겁니다.-어떤 사람이 가도 얻어내지 못하는 자료를 나는 얻을 수 있었다는 자부심이 느껴집니다.(웃음)그 이전에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했어요. 연구자들이 그동안 판소리와 지리산 문화를 조사한 논문만도 4백 권을 수집해 읽었습니다. 그 내용을 바탕으로 제가 허와 실을 검증해보았어요. 많은 부분이 잘못되었더라고요.-그렇게 바로 잡은 고증을 학계도 인정합니까.대부분 공식적으로는 인정하지 않아요. 판소리연구자들이 제가 발굴한 자료를 갖다 쓰면서도 출처 기명은 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고요. 그러면서도 정작 연구에 필요하면 다 찾아오시죠. 그럴 때는 씁쓸하지만 그렇다고 일일이 신경을 쓰진 않습니다. 제가 발굴한 자료로 학술 연구를 진전시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니까요.-이런 작업을 본격적으로 일구신 것이 90년대인가요.판소리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북을 배우면서 명창들을 찾아다니다보니 자연스럽게 이어진 일입니다. 하다 보니 연구 분야가 커졌어요. 소리꾼들은 어떤 음식을 먹고 병이 나면 어떻게 치료를 하는가.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도대체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해지더라고요.-소리를 하는 분들의 건강은 일반인들과 달랐습니까.잔병치레를 하면서도 일반인들보다 건강하게 오래 살았죠. 1910년대까지 우리나라 평균수명이 43.5세였습니다. 그런데 소리꾼들은 62세였거든요. 그리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일반인들은 잔병치레를 15.5개 정도였는데, 소리꾼들은 4.7개. 그러니 병 없이 오래 살았단 말이잖아요.-그런 기록이 있습니까.제가 통계로 수명을 조사해보니 소리꾼들이 일반적으로 오래 사는 것이 흥미로웠어요. 한곳에 정착해서 사는 평균기간이 3.5년~4년인데, 그렇다면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살았다는 말이거든요. 그런데도 어떻게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외국 학자들은 이 부분을 주목해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물론이고 독일 학자들도 이런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남원을 찾아옵니다.-우리나라의 연구는 어떻습니까.아직은 연구자를 못 만났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이런 문제도 있습니다. 제가 분석하기로 소리는 음양오행이 기본이거든요. 사실 판소리는 노래가 아니라 오장육부에서 나오는 소리예요. 진양이네 자진모리네 중중모리네 하는 말은 판소리에 없습니다. 귀명창들은 소리를 권할 때 자진모리 한대목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쓴소리 한 대목 하라고 하죠. 간과 담은 한의학적으로 쓴맛으로 관여합니다. 중중모리는 신소리라 하는데, 신장과 소장, 신맛과 관련이 있어요. 쓴소리 신소리 매운소리 짠소리 이렇게 분류되는 것이죠. 아니리는 헛소리. 소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병이 나는 것은 영양이 모자라거나 기가 막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영향이 불균형하거나 기가 막히거나. 옛날 속담에 기가 막히면 죽는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기를 통하게 해야 합니다. 그 기운은 자연에서 오는 것이죠. 만약 신장과 콩팥이 아프면 신장과 콩팥의 기운을 높여줘야죠. 약으로 쓰는 방법, 호흡으로 하는 방법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선비들은 호흡법으로 치유했어요. 그 호흡과 소리를 합한 것이 판소리인겁니다. 소리를 짠다고 하잖아요. 옛날에는 어느 부잣집에서 가족의 누군가 기력이 약해지면 잔치를 벌였습니다. 소리꾼을 부르죠. 소리꾼은 진단을 합니다. 간이나 담의 기운이 약하다면 거기 맞는 장단의 소리를 짜서 부르는 것이죠.-이런 특성을 아직 연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아쉽군요.우리나라 판소리 연구는 아직도 사설의 어떤 부분이 틀렸네 맞았네 명창의 출생지가 목포네 남원이네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어요. 진전이 없죠. 저는 우리나라 판소리 연구가 일정한 한계를 못 벗어나는 이유가 융합하지 않는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학문과 학문의 융합과 교류가 있어야하는데, 특히 판소리 같은 경우는 학문 융합으로 연구해야할 과제가 많습니다.인터뷰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이야기는 영역과 영역을 넘나들면서 더 흥미롭고 풍요로워졌다. 깊은 바다에서 방금 낚아 올려 반짝이는 그물 안 물고기처럼 그로부터 듣는 지식과 진실은 생생하고 새로웠으며 깊이가 있었다. 어느 기관의 지원 한번 받지 않고도 판소리 연구에만 온전히 바쳐온 30년 삶의 궤적이 우리 판소리 연구의 중심에 놓여 있다. 이제 그의 오랜 소망처럼 전문적인 학술연구자들의 진지한 관심이 더해질 일만 남았다.● [김용근 소장은] 30년 가까이 소리꾼 삶 연구판소리 역사 살아있는 백과사전김용근 소장은 남원 주천면에서 태어났다. 농사짓는 부모님은 아이들에게 공부 잘하라고 강요는 하지 않으셨지만 가르침은 엄하셨다. 특히 아버지는 글을 쓰고 읽을 줄 모르셨지만 자신만의 철학과 질서를 만들어 자식들이 자연스럽게 보고 배울 수 있게 했다. 덕분에 그는 부모의 삶과 태도가 아이들에게는 곧 교과서라고 믿게 됐다. 어릴 적부터 공부보다는 농사짓는 일에 마음을 두었던 그는 남원농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는 대신 군대를 다녀와 공무원이 됐다. 공무원 되는 것을 완강히 반대했던 아버지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아들을 마뜩치 않아 하셨지만 공무원으로서 지켜야 할 두 가지를 약속받고서야 상황을 받아들였다. 임실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지만 1년 만에 남원시로 전입한 이후 그는 줄곧 남원 안에서만 공무원생활을 했다.80년대 중후반, 남원을 찾아오는 외국인 손님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판소리에 관심을 가진 관광객들이 늘어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남원의 판소리에 대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판소리는 들어설수록 신비로운 영역이었다. 80년대 중반, 강도근 명창이 살고 있던 국악원 옆으로 이사를 해 매일 찾아다니며 소리를 배웠다. 판소리 명창들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 이후였다. 기존의 기록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진실을 밝혀내고 싶었다. 주말이면 지리산 일대의 마을들을 찾아 나섰다. 첫 월급부터 지금까지 월급의 30%가 온전히 이 작업에 쓰였다. 판소리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종합인문지리서와 같았다. 판소리 사설은 풍수지리부터 한의학까지 온갖 서적을 읽어 알아야만 해석이 가능한 영역이었고, 소리꾼들의 삶은 신비로웠다. 조금씩 쌓여가는 자료의 가치와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발굴한 자료가 전공자들을 통해 우리 판소리 연구의 확장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랐다. 자료의 효율적인 활용과 좀 더 본격적인 연구를 위해 1989년 지리산판소리문화연구소를 냈다. 1인 연구소였다. 그러나 판소리를 통한 연구영역이 확대되면서 연구소 이름도 지리산문화자원연구소로 바꾸었다.30년 가깝게 발로 뛰며 찾아낸 자료와 기록들은 판소리 연구의 보고가 되었다. 호적이나 족보를 통해 밝혀낸 조선창극사 명창들의 생애 뿐 아니라 옛사람들의 생활사를 밝혀내는 온갖 자료들이 그의 손을 거쳐 정리되어 자료가 됐다. 이름만으로 판소리사에 남았던 명창들의 생애가 그를 통해 비로소 역사가 되었다. 국가공무원으로 30년 살아왔지만 그의 직급은 6급 계장이다. 지금은 남원시 대산면 산업계장으로 일하면서 여전히 판소리와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일에 주말을 바친다. 그동안 펴낸 책만도 10여권. 그것도 순전히 자비로 낸 것들이다. 그의 말처럼 이 책들에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화콘텐츠들이 숨어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6.08.26 23:02

금보성아트센터 제1회 한국작가상 수상한 작가 유휴열씨 "척박한 땅 생명력 불어넣는 잡초처럼…내 그림이 삶에 활력이 되길"

그의 그림을 만난 것은 80년대 초반, 인후동의 한 아파트 지하실에서였다. 햇빛 들지 않는 지하, 눅눅한 습기와 퀴퀴한 냄새가 가득찬 좁은 작업실에 강렬한 채색의 그림과 설치 작품이 꽉 차 있었다. 그때 주인 없는 그 작업실을 어떤 연유로 가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생각나지 않지만, 세상을 향한 날선 발언과도 같았던 익숙하지 않은 낯선 화폭들은 오랫동안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았다. 이후로도 그의 작품을 만날 때면 어김없이 그때의 작품들이 떠올랐다. 작가가 새로운 정신으로 구현해내는 또 다른 작품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왜 그 시절 기억이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일까, 늘 그것이 궁금했다.2014년, 전북도립미술관이 기획한 〈유휴열의 신명난 생놀이〉에서 그 답을 얻었다. 도립미술관 전관을 다 채운 그의 작품들은 서로 다른 듯 보이면서도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였다. 입체든 평면이든 소재나 형식에 관계없이 그가 구현해내는 세계는 신기할 정도로 톱니바퀴처럼 그만의 세계를 견고하게 구축해가는, 그래서 그 생명력을 강하게 키워가는 생명체와도 같았다. 초기의 작업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화력 40여년의 시간이 빚어낸 성취, 유휴열만의 독창성이었다.지난 봄, 서울의 한 미술관이 제정한 미술상(금보성아트센터의 한국작가상)에 미술계의 관심이 집중됐다. 1억 원이란 상금 규모도 그렇지만 60세 이상의 작가를 대상으로 수개월동안 10여명의 평론가들을 동원해 후보들을 대상으로 작업실 현장까지 찾아다니며 작가와 작품을 평가하는 과정을 통해 수상자를 선정하는 방식 때문이었다.지난 6월 말, 금보성 아트센터는 제 1회 한국작가상 수상자로 작가 유휴열씨를 선정했다. 우리다움을 통해 찾아낸 우리 것을 보여주는, 그리하여 비로소 한국의 상징으로까지 존재하는 대(大)작가의 탄생을 염원해온 아트센터가 찾아낸 수상자였다.선정의 이유는 명쾌했다.천년 도시 전주에서 현대미술을 상징한 한국작가상으로 유휴열 작가가 선정되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역사와 전통을 현대성으로 재해석하고, 놀이로 승화한 미학을 구축했던 것이 인정되었다. 전주의 특화된 한지라는 재료 대신 알루미늄 판이라는 현대 재료로 작업의 틀을 벗어났으며, 색채 구성 작가정신 등 모든 면에서 그의 밀도 있는 작품세계는 숨겨져 있는 보물 같았다.작가 유휴열씨(67)를 만났다. 완주군 구이면 항가리, 올해로 31년째 살고 있는 모악재는 2-3년 전부터 수장고를 늘렸다. 그 규모가 거대하지만 수장고 안은 셀 수 없이 많은 작품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안채보다 몇 배 더 커 보이는 작업실 역시 벌써 근작들이 차있다.인터뷰가 있던 날, 장대비가 여러 차례 쏟아졌다. 빗소리 때문일까, 여기저기 놓여있는 그의 작품들이 움직였다. 작가의 삶과 작품 이야기가 그 안에서 출렁였다.-큰 상을 수상하셨습니다.감사한 일이죠. 혼자 정신없이 언덕배기 올라오면서 지칠 즈음 누가 등이라도 떠밀어 주면 오르는 길이 훨씬 가볍게 되잖아요. 제가 딱 그 즈음이었던 것 같아요. 이제 뒤를 좀 돌아봐야할 시점이 아닌가 싶었던 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자만하지 않고 천천히 뚜벅 뚜벅 갈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지요.-언제부터 심사를 했습니까.6개월 쯤 된 것 같아요. 여러 명 평론가들이 작업실을 다녀가면서 심사를 하더군요. 후보자를 세 명으로 압축하고 다시 두 명으로 압축해서 최종 선정하는 방식이었어요.-소장하고 있는 작품이 워낙 많은 것 같습니다.초기 작품은 없어요. 20대 시절의 작품은 어느 해인가 모아서 불태웠고, 그 이후 작품은 84년에 미국을 다녀오니 아파트 지하실 작업실이 물에 잠겨 다 훼손되어버렸더라고요. 지금 갖고 있는 작품이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전시실에 걸려있는 작품은 거의 근작들이겠습니다. 저 작품은 알루미늄이 소재인 모양인데 색을 거의 입히지 않았군요. 느낌이 참 좋습니다.욕심을 내지 않은 작품이 확실히 좋은 것 같아요. 담담하게 표현해내는 그런 작품이 길게 가더라고요.-욕심이라면 무엇인가를 많이 표현하려고 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인가요.그렇죠. 아마추어와 프로가 다른 점이 바로 그 지점일 것 같은데, 붓을 떼는 순간을 아는 것이 프로가 아닌가 싶어요. 어디서 멈춰야 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때로는 보는 사람 몫으로 돌려서 무한한 상상도 할 수 있게 하는, 관객으로 하여금 비로소 완성 될 수 있게 하는 것이 필요한데, 사실 그 지점을 찾는 것이 쉽지는 않아요.-그동안 작품 변화가 여러 번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작업에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궁금합니다.몇 번의 계기가 있었죠. 첫 변화는 82년에 파리를 다녀온 이후예요. 당시 파리에는 김창렬 이성자 이응로 선생님 같은 분들이 있었는데, 피악 등의 아트페어에 그 분들 말고는 우리나라 작가가 거의 없더군요.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일본이나 미국의 화단이 궁금했습니다. 파리에서 돌아온 직후 우연인지 일본의 갤러리에서 초대를 받았어요. 그 다음해에는 미국을 가게 됐지요.-그때가 80년대 중반쯤이었겠군요. 화력으로 보자면 그즈음이 가장 중요한 시기였군요.파리 일본 뉴욕의 경험이 제 삶에서 가장 크게 작용했죠. 오늘까지 이어진 그림의 핵이 될 만한 것들이 그 무렵 다 싹을 틔웠으니까요.-작가로서의 삶을 지켜가는 데에는 그런 계기들이 반드시 필요할 것 같습니다.미국은 마음먹고 떠난 유학이었어요. 정말 고생을 많이 했죠. 가져간 돈이 없으니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어요. 그래도 가장 의미 있는 동력을 그곳에서 얻었어요.-선생님 작업의 화두가 된 생놀이는 언제부터 붙잡은 주제였습니까.82년부터일 겁니다. 그때 삶은 놀이라는 생각을 했어요.-놀이의 개념이나 의미가 궁금합니다.간단한 개념인 것 같지만 제가 생각하는 놀이는 양면성을 갖습니다. 저는 굿이나 연희의 과정 속에 녹아 있는 놀이의 의미를 주목했습니다. 고통과 억압 자유로움 해방과 같은 전 과정을 놀이로 보는 것이죠. 한편으로는 모든 살아있는 것의 움직임이 곧 놀이라고 봅니다.-이야기를 듣다보니 작가들은 한번쯤 자신을 스스로 내려놓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아주 중요한 시간이 되니까요. 저는 젊은 세대들에게 시야를 넓혀볼 기회를 꼭 만들라고 권합니다. 밖에 나가 뭘 보고 느꼈냐고 물으면 정작 펴 보일 것은 없지만 스스로에게 스며드는 그 어떤 것이 있거든요. 미술이라는 것이 얼마나 넓고 다양한 것인가를 확인하는 일만으로도 의미 있고요.-구체적으로 선생님은 어떤 변화를 얻었습니까.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모노톤 화풍이 유행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체질적으로 색깔을 쓰고 싶어서도 단색작가는 될 수 없었거든요. 그래서 지인들에게 우스갯소리로 나는 현대작가 못하겠다고 했었어요. 작가마다 내재된 개성들이 얼마나 다양합니까. 그런데 그런 개성들이 집단적으로 유행처럼 번지는 사조에 묶이는 것이죠. 그런데 밖에 나가보니 그런 선택이 얼마나 소모적인 것인가를 알게 되더군요. 제가 지향하는 세계를 더 단단히 구축해갈 수 있는 힘을 그때 얻었죠.-어느 자리에서인가 신석정 선생님과의 인연을 들었습니다. 스승이셨습니까.제가 북중학교에 다닐 때 신석정 선생님은 전주고에서 국어를 가르치셨어요. 북중과 전고는 같은 울안에 있어서 선생님들끼리 교류가 활발했죠. 그때 부모님이 학교 매점을 운영하셨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빵 굽는 기계를 들여오신 거예요. 미술시간에 그 풍경을 그렸죠. 선생님이 그 그림을 교무실 뒤에 붙였는데, 석정 선생님이 내려오셨다가 보시고 저를 부르신 겁니다. 그때 말씀이 중학교 2학년이 그리는 정물화는 대개 화병이나 과일을 그린 것이어야 하는데, 너는 아버지가 먹고 살기 위해 들여놓은 빵 굽는 기계를 그렸더라 며 아름다운 것은 그렇게 생활 가운데 있는 것이다고 하셨어요. 그때 해주신 그 말씀이 지금까지 화두가 되었지요. 이후부터 대학의 실기 대회를 나가면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대학 안의 공사현장 같은 것을 그리게 되었어요. 관점 자체가 달라진 것이죠.-화폭의 변화는 외부로부터도 오지만 내부로부터도 오는 것 아닐까요. 선생님의 작품에서도 그런 변화가 보이는데요.큰 딸을 잃었을 때 그렇게 큰 충격이 없었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시기였는데, 그 시절 그림은 내가 봐도 암울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 고통의 힘이 그림을 바꾸게 하는 동력이 된 것 같아요. 그 변화가 자연스럽게 오더군요.-모악산에 들어온 것도 또 하나의 기점 아니었을까요. 전업 작가로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것도 그 힘이 아닐까 싶고요. 작업실에 놓여있는 누드크로키만으로도 엄청나더군요.이번에 심사한 평론가 한분이 우리나라 작가들은 대개 기본적인 것을 쉽게 놓아 버린다며 지금도 누드 그림을 날마다 그리는 이유를 묻더군요. 저는 비구상 계열의 작업을 하더라도 인체가 순간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화면에 안정감 있게 구성하는 요소가 화면 구상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봐요. 순간적인 것을 포착해 구사하는 능력은 늘 기본이 되어야하죠. 그런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고 언제부터인가 누드그림을 꼼꼼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어느 시기인가 타일 작업도 하셨는데요.2000년 즈음 일거예요. 당시 우리나라 조각품은 돌이나 브론즈 일색이었는데 돌은 너무 차갑고 브론즈는 침침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입체물에 색깔을 입히는 방식을 찾다가 타일 작업을 찾아냈어요. 파편을 구워서 붙이는 형식이었는데 그 후에 가우디의 여러 작품을 보고 나서는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가우디 아류도 안 되겠다 싶어 과감하게 때려 치웠어요.(웃음)-알루미늄 작업은 80년대 초반부터 시작했으니 오랜 작업입니다. 입체에서 평면까지 옮겨온 것은 언제부터인가요.지금 사용하는 빗살무늬 판은 우리나라 전통 토기의 전통문양과도 같잖아요. 그런 특성도 있지만 이 소재를 선택한데는 더 큰 이유가 따로 있어요. 평면 작업에서 가장 큰 고민이 입체적인 표현의 한계거든요. 그래서 피카소도 옆에서 뒤에서 그리는 형식을 들여온 것 아니었겠습니까. 입체파라는 새로운 장르도 만들었고요. 그러나 그런 형식조차 평면이라는 이미지는 바꾸어지기 어렵죠.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어느날 이 빗살무늬 판이 빛을 받는 방향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 보이는 거예요. 평면에 붙여놓아도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혹은 빛이 어느 쪽으로 비치느냐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는 겁니다. 표현의 통로를 찾았죠.-선생님 작품은 큰 이미지 속에 다양한 언어가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소재들을 찾는 것이 마치 숨은 그림 찾기와도 같습니다.제가 의도하는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이 한 화면에서 서로 어우러져 하나로 보이게 하는 그림이죠. 수덕사 현판에 만공 스님의 법어 한대목이 쓰여 있어요. 세계일화죠. 법어를 제 식으로 쉽게 풀면 꽃으로 피어나되 좀스럽게 니 것 내 것 가리지 말고 그냥 하나 되어 꽃 한 송이 피워내라는 말씀일터인데 그 의미가 강하게 와 닿더라고요. 제 그림도 그런 메시지를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세상의 다양한 언어가 조화를 이루어 한 화면에서 한세상 이루어지는 그런 세계. 더 깊게 고민하고 더 열심히 그려내야 이루어질 과제겠지요.금보성아트센터에서 열린 제 1회 한국작가상 수상 기념전 개막식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본디 잡초라는 것 중에서 괜찮겠다 싶은 것을 화분에 잘 올려 거름을 주고 사랑과 물을 주고 가꾸면 그것이 화초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화초가 그렇듯이 잡초 또한 아주 중요한 역할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림을 그려왔습니다. 그 척박한 황무지에 씨앗으로 뿌리를 내리고 그 척박한 땅을 숨 쉬게 해 그 위에 다른 많은 생명을 자랄 수 있게 하는 역할을 잡초가 합니다. 저는 촌에서 그림 그리면서 그려 내 그림이 생명력을 가지고 잘 견뎌줘서 오래도록 잡초여도 좋겠다. 그 역할로 충분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 고개까지 왔습니다. 이제 어찌하다 화분에 올려졌지만 앞으로도 잡초의 역할을 잊지 않고 같은 길 열심히 걸어가겠습니다.작품을 빼 닮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앞으로 만나게 될 그의 〈생놀이〉가 더 궁금해졌다.● 유휴열 화백은- '우리다움'통해'우리 것'보여준 한국 대표화가작가 유휴열은 정읍이 고향이다. 소성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녔으니 그가 품고 있는 정서와 감성은 어린 시절, 그곳에서의 시간들로부터 이어졌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이 컸던 그는 늘 바깥세상을 동경했다.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 때 전주의 중학교에 합격한 형들 덕분에 가족 모두가 전주로 이사를 나오지 않았다면 가출청소년이 되어 지금쯤 다른 길(?)을 걷고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풍남초등학교 4학년 때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미술반 교사는 늘 그를 옆에 두고 그림 심부름을 시켰다. 미술실기대회에 나가 상을 타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부터였다. 북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는 그림 잘 그리는 아이였다. 그에게는 특기가 또 하나 있었다. 탁구였다. 전국체전에 전북 대표 선수로 뽑혀 나갈 정도로 운동에도 능했다. 전주고에서는 탁구 특기생으로, 영생고에서는 미술 특기생으로 그를 불렀다. 부모님들은 전고를 권했지만,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위해 영생고를 선택했다. 고등학교 시절엔 전북일보에 전국의 미술실기대회서 최고상만 10회 돌파한 천재소년으로 소개될 정도로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워낙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그는 2년쯤 꿇고서야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미술로 이름을 알린 대학들의 실기대회 최고상을 휩쓸었으니 대학 입학은 어렵지 않았으나 애당초 대학에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에서 임용하는 강사제도로 중학교 미술강사가 되었다. 스무 살 갓 넘은 시절이었다. 3년 가깝게 강사생활을 하는 동안 친구의 아버지이기도 한 교장선생님은 그에게 대학 입학을 권했다. 야간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영생대(현 전주대)에 들어간 것은 그 때문이었다. 대학은 7년 만에 졸업했다.작가로서의 삶은 질풍노도, 거친 파도 속에 놓여 있는 듯 보이지만 언제나 충만한 작가정신을 구현하는 일에 몰두해온 궤적은 빛나는 결실로 이어졌다.82년, 개인전을 계기로 1년 가까이 파리에 머물렀다. 그때 그가 찾아다녔던 갤러리에서 만난 작가와 작품들로부터 큰 충격을 받았다. 광활한 대지 위에 서있는 듯 한 느낌은 그의 정신을 새롭게 일깨웠다. 생놀이. 그가 평생의 화두로 삼은 주제를 그때 만났다. 파리에서 돌아온 그를 일본 오사카 아마노 화랑에서 초대했다. 일본 미술인들과의 교류가 시작됐다. 84년, 작정하고 미국 유학을 떠났다.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생활하면서 열심히(?) 공부했던 1년 동안의 뉴욕생활은 작가로서 살아갈 수 있겠다는 용기를 갖게 했다. 내친김에 제대로 뉴욕에서 활동하고 싶었으나 서울의 아르코 미술관 초대전으로 귀국하면서 유학생활은 끝이 났다. 이후 수많은 개인전과 단체전, 기획전을 이어왔다. 1982년 전주 금하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을 본격적인 작품 발표의 장으로 치자면 올해로 34년, 전업 작가로 살아온 그의 활동은 국내외의 크고 작은 미술관 공간 안에서 쉬지 않고 이어졌다. 80년대, 전주에 얼화랑을 열고 지역 미술인들의 활동을 북돋으면서 청년미술상을 제정해 후배들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일에 나섰던 그는 지난해, 작업실을 겸한 미술관 모악재를 젊은 작가들을 위한 공간으로 내놓고 중단되었던 청년미술상을 부활시켰다.마니프 국제아트페어 대상, 루벤스상, 예술평론가협회 최우수 작가상, 목정문화상, 전북대상 등을 수상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 부산 광주시립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 삼성문화재단, 금호미술관, 한솔뮤지엄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올해 새롭게 시도되어 국내미술계의 화제가 된 금보성아트센터 제정 한국작가상에 선정됐다.

  • 기획
  • 김은정
  • 2016.07.15 23:02

도시재생 전문가 강동진 경성대 교수 "전북의 도시 '작음의 미학, 다름의 경제학' 가치 지녀"

도시재생이 화두다. 오래된 도시일수록 낙후되고 쇠퇴했던 공간을 일으켜 세우는 일은 현실적인 과제가 되었다. 도시재생을 정책으로 실현한 영국을 선두로 이미 오래전부터 낡은 공간들을 동력으로 삼아 힘을 잃어가던 도시를 살려낸 사례는 더 이상 새롭거나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낡고 빈 공간으로 남아있는 건물을 리모델링해 창조적인 상상력으로 새로운 옷을 입힌 공간을 가진 도시들은 모든 도시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된다. 도시 재생으로 죽어가던 강과 도시가 살아나고 공동화되어가던 옛 도심이 생기를 되찾았으며 가난했던 도시가 문화와 관광의 도시가 된 사례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오래된 공간, 방치되었던 공간을 재생시켜 도시를 살리는 작업은 이제 세계 모든 도시들의 목표가 됐으니 이쯤 되면 도시의 패러다임은 이미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우리나라의 도시들도 너나없이 재생을 성장 동력으로 내세운 길을 실천하거나 모색하고 있다.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도시재생의 과정과 실질적인 목표다. 도시재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지속가능한 도시발전의 힘을 얻는 것일 터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미 도시재생에 나선 우리나라 도시들을 돌아보면 그 도시와 공간의 정체성을 담아내는 노력은 잘 보이지 않는다. 다를 것 없는 내용과 형식이 그렇고, 자생의 힘을 일찌감치 포기해버린 차별성 없는 콘텐츠의 구현이 그렇다.강동진 경성대 교수(52)를 만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강 교수는 90년대 초반부터 세계 도시들의 마을만들기와 역사와 문화를 활용한 도시재생 사업 정책과 실행의 결과를 주목해 현장을 찾아다니며 실질적인 연구를 해온 도시재생 전문가다. 그는 2006년, 산업유산으로 다시 살린 일본의 도시 이야기를 엮은 책을 펴냈다. 90년대 초부터 15년 동안 30여회 이어진 답사의 결과물이다. 27개 크지 않은 도시들을 주제별로 엮은 이 책 앞에 이런 글이 있다.이들 도시는 나름대로 꿈을 가지고, 버려진 것들과 하찮아 보이는 것들을 재활용해서 다시 회복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 도시들이다. -중략- 일본의 이런 도시들에 비해 우리 지방 도시들은 힘들게 고군분투하고 있으며 뭔가를 잡기 위해 조바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박수를 쳐주고 싶은 도시는 손에 꼽을 정도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각 도시마다, 각 사안마다 처해있는 상황이 다르고, 해법 또한 다를 터인데도 우리의 지방도시들은 결과만을 벤치마킹 하려한다.이 책을 펴낸 지 10년. 강 교수가 우려했던 문제는 이제 해결되었을까. 안타깝게도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30년 가깝게 도시를 들여다보아온 그가 들려주는 건강한 도시재생의 길이 더 환하게 보였다. 이 분야를 공부하면서 작음의 미학, 다름의 경제학의 가치를 더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문화유산이 풍부하고 독창적인 전라북도의 도시들은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좋은 도시들인데, 중요한 것은 서두르지 말고 그 길을 어떻게 열어갈지에 대한 고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건축에서 도시 연구로 길을 바꾼 계기가 궁금합니다.대학원에 들어가면서 전공을 바꾸었어요. 본격적으로는 석사 논문으로 경주의 구시가지 역사 환경을 보존하는 연구를 하면서부터 도시를 공부했습니다.-도시재생 연구도 그 연상이었겠군요.그렇죠. 박사과정을 공부하면서 논문 주제를 고민하는데 지도교수님이 양동마을을 던져 주시더군요. 그래서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양동마을을 문화재 관점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다음 다음 세대까지 어떻게 하면 지속해서 살게 할 수 있을까를 들여다보고 싶었어요. 요즈음 이야기하는 재생의 관점이었지요. 특히 저는 컬티베이션(cultivation), 이를테면 변화를 인정하는 보존을 주목했어요. 그때 역사 경관과 함께 사람으로 관점이 확장되었던 것 같아요.-그때는 낯설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주제를 잘 잡으셨던 것 같습니다.(웃음)건축을 전공한데다 도시 공부를 시작한 대학원에서 좋은 선생님들을 만났습니다. 해외에서 도시를 제대로 공부한 40대 초반의 연구자들이었는데 얼마나 치열하게 가르쳤는지 그때의 2년이 제 인생의 모든 것을 다 바꾸어 놓았죠.-그런 점에서 교수님들의 역할이 정말 중요한 것 같군요.그래서 저도 그 흉내를 내보려고 하는데 잘 되지 않습니다. 쉽지도 않고요. 그때는 학부에서 건축 조경 법학 경제를 전공한 학생들이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자기 베이스를 가지고 전문적인 지식을 같이 탐구를 하다 보니 그 효과가 놀라웠거든요. 교수님들이 가르쳤던 수업 방식이 요즘 이야기 하는 참여형이었는데, 지금은 일반화되었지만 당시에는 문화충격이었어요. 그때 배웠던 것이 공공성과 공익이었죠. 그래서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일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어요.-도시마다 도시재생이 과제입니다. 무분별한 개발이 문제더니 지금은 난립하고 있는 도시재생 사업들이 또 새로운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맞아요. 중요한 것은 재생에 관심은 있는데, 본질을 이야기 하고 무엇을 어떻게 재생해야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는 사람은 적은 것 같거든요. 특히 지방도시들의 경우 재생의 대상이 모두 오래된 것이고 낡은 것이다 보니 다음세대가 할 수 있는 대상조차 재생이란 명목으로 파괴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거든요.-다음 세대에 물려준다는 의미가 새롭습니다.저는 도시재생에 있어서는 방치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방치가 오히려 좋은 선택이 될 수 있거든요. 지금은 낡은 공간을 방치해두는 일을 못견뎌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빨리 바꾸어 사업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렇다보면 다음 세대가 할일이 없어집니다. 요즘 습관적으로 지속가능한 개발을 많이 쓰는데, 그 뜻이 뭘까요. 저는 그것의 본질적인 의미는 후손이 손 댈 수 있는 땅을 남겨놓자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세대가 개발할 수 있도록 남겨 놓는 것. 지속가능한 개발이란 끊임없이 개발하자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 또 그 다음세대도 손을 댈 수 있고, 할 수 있도록 우리가 절제하자는 뜻이 더 강합니다.- 방치는 곧 개발을 절제하는 방식이기도 하겠습니다. 방치나 더 나아가 절제라는 말이 사실은 재생의 키워드가 되어야 바람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당장 모든 것들을 재생의 대상으로 끌어당기면서 그것을 다 풀어내는데 조급하거든요. 게다가 스스로 해야 될 일을 거의 모두 국가 의존적으로 풀어가죠. 국가에서 사업을 따오는 형식인데, 국가에서 돈을 받게 되니 어떤 결과가 당장 나와야하고, 그 결과를 나오게 하려니 1년 단위로 보여야하는 하드웨어 사업에 집중할 수밖에 없고, 소프트웨어 사업이 있다하더라도 요식행위에 그치기 일쑤고.-이런 식으로 나가다보면 도시재생의 부작용이 더 클 수밖에 없겠습니다.물론이지요. 이런 방식은 지속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개발을 우선시했던 시기에 나타났던 부작용들이 다시 나올 수밖에 없게 됩니다. 저는 도시재생 사업이 시간이 흐를수록 도시마다 똑같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작음의 미학, 다름의 경제학의 가치를 확신하게 되었어요.-도시마다 이루어지는 도시재생 공간이나 건축물을 보면 왜 저렇게 같은 길을 계속 갈까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왜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는 결과죠. 현실적으로 왜 하는가를 따져보면 결국은 국가 돈을 받아쓰려고 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는 거죠. 진정으로 그 지역을 위해서 지역의 재생과 미래에 지속가능한 도시를 위해서 이 일이 어떻게 구성되고 운영되어 정착되어야하는가에 대한 생각보다는 예산을 따와 쓰는데 급급한. 참으로 아쉬운 현실이죠.-교수님께서는 특히 산업유산을 주목하고 계시던데요.산업유산은 부산에 정착하면서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어요. 2001년 즈음부터 산업유산을 연구하기 시작했었는데, 산업유산이라는 용어로 논문을 쓴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산업유산은 앞으로 도시마다 큰 과제일 것 같은데, 바람직한 활용의 방식이 궁금합니다.저는 산업유산이라면 작동을 멈춘 지 적어도 10년 정도는 묵혀놓아야 한다고 봐요. 외국의 경우는 20년 30년도 그대로 묵혀 놓습니다. 당장 활용한다고 리모델링에 나서거나 손을 대버리면 그 시점에서의 발상밖에 나오지 않거든요. 국가의 예산에 기댄 것이라면 그 예산만큼만 할 수 밖에 없게 되고요. 그 예산이나 그 시간에 맞는 아이디어 밖에 쓸 수 없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다 욕심을 부려 모든 것을 다 손 댑니다. 전국적으로 그런 식으로 예산을 허비하고 있는 곳이 적지 않아요. 콘텐츠를 보세요. 다 비슷비슷하죠. 창조적인 답을 찾지 못하니까요.-교수님 말씀대로 현실적으로 주어진 예산과 시간 안에 창조적인 답을 찾는 일이 쉽지 않죠.창조적인 답을 찾으려면 10년, 20년 그곳을 원래 상태에서 최소한의 변화로 활용하거나 시민들이 이용하면서 그 시대에 맞는 답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한꺼번에 몇몇 사람의 머리로, 또 자기가 알고 있는 몇몇 외국 사례를 응용해서 하려다 보니 비슷한 답 밖에 못 찾게 됩니다. 그대로 놓고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거든요. 다른 나라의 예를 보면 비엔날레나 문화행사 등으로 활용하면서 그곳을 잘 지키고 유지하면서 공간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예가 많습니다. 에너지를 결집해 쏟아부을 수 있을 때 제대로 된 지역의 자산이 되고 재생 효과가 생길 수 있습니다.-그런 점에서 국가의 방식도 바뀌어야 되지 않을까요.물론입니다. 정부 부처의 방식이 거의 비슷한데, 공모로 경쟁을 시키고 선택을 해서 예산을 주는 방식으로 모든 사업을 진행하다 보니 자치단체마다 난리가 아니에요.-그런 방식이 오히려 복제품을 만들어내는 일을 부추기는 것 같습니다.그렇죠. 사업의 바탕이 되는 조사 작업은 소홀히 하고 늘 보이는 내용으로 사업의 중심을 세우거든요. 다른 나라를 보면 재생사업을 할 때 조사만 열심히 하겠다는 프로젝트에도 지원을 합니다. 조사결과가 큰 성과거든요. 조사가 잘 이루어지면 그 과정에서 시민들의 생각이 모아질 수도 있고, 새로운 발상이 나올 수도 있고. 그래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데 우리는 용역으로 바로 들어가니 조사가 한두 달 정도, 계절 조사도 제대로 안하는 일이 허다하죠. 그렇다보니 앞의 보고서 베낄 수밖에 없고. 공간이 갖고 있는 본질은 없어지고 예산이 투입되니 오히려 본질이 약해지고 왜곡되기 일쑤입니다. 손을 안대는 것만 못한 결과가 되는 것이죠.-도시재생도 결국은 시민들의 의식이 중요할 것 같아요.결국은 사람이죠. 성공사례를 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좋은 시민단체나 좋은 공무원이 꼭 있습니다.-일본은 그나마 산업유산을 잘 보존하고 있죠.우리와는 좀 다르죠. 우리는 그 시절 힘들게 일했다, 다시는 기억하기 싫다는 부정적 기억을 많이 갖고 있는데, 일본인들은 그렇지 않거든요. 똑같은 프로세스를 거쳐도 지난 과거나 역사, 어떤 시설을 바라보는 시각이 우리와는 다르죠.-우리 재생 사업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일까요.대부분 아웃사이더들이 관심을 갖는다는 것 아닐까요.-아웃사이더라면.바깥에 있는 사람들이죠. 전문가나 행정가들. 일본은 반대예요. 대부분이 그 안에 있는 주민들이 일을 시작합니다. 그것이 가장 큰 차이죠. 그리고 더 큰 문제는 한꺼번에 한다는 것이에요. 도시재생법을 만들어서 권한을 갖게 하고 돈을 만드는 것은 좋은데, 그 법을 만들다보니까 끊임없이 매년 사업을 해야 하고 그런 바탕에서 움직이다 보니 비슷한 아이템들이 계속 도출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죠.-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도시재생에서 절제의 힘이 아주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도시재생의 핵심은 지속가능한 방식을 찾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절제와 방치가 사실은 진짜 도시재생입니다. 다음 세대에 기회를 주는. 방치는 있는 그대로의 공간을 활용하면서 공간의 가치를 지켜내는 방식으로서의 방치를 말합니다.강 교수는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의 세계화를 위한 전략 연구〉를 주제로 한 프로젝트다.우리의 근대를 다시 찾는 일입니다. 세계적인 관심을 끌 수 있는 근대의 유산들을 조사하고 가치를 규명해내는 연구지요. 이 작업만 해놓으면 그래도 중요한 일은 마무리 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전국의 도시들을 찾아다니며 그가 찾아낸 우리의 근대유산이 곧 우리 앞에 놓일 것이다. 그의 작업이 가져올 의미와 가치가 새롭다.● [강동진 교수는] 도시재생 시민보존 운동 참여각종 프로젝트 대안 제시강동진 교수의 고향은 통영이다. 통영에서도 충무 바닷가 강구안, 아름다운 마을에서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목선을 만드는 재료를 공급하는 목재소를 운영하셨는데, 덕분에 집 앞에 있던 공장이며 톱밥 창고, 나무를 실어나르는 레일까지 모든 공간이 그의 놀이터였다. 그는 아직도 초등학교 시절의 삶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특별한 고민 없이 건축을 전공하고 도시설계를 공부하게 된 바탕이 거기 있다고 생각한다.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목선이 철선으로 바뀌면서 아버지가 운영하는 목재소가 도산하게 되자 가족 모두 서울로 이사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전학을 간 이후 고향은 늘 그리워하는 공간이 되었다. 대학에 들어갈때는 건축가가 되겠다는 특별한 목표 없이 건축공학과(성균관대)를 택했다. 공대에서는 그래도 가장 공학스럽지(?) 않고 생각하고 뭔가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했던 자신에게 맞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졸업할 즈음, 고민이 생겼다. 그즈음 읽은 책의 영향이 컸다. 김홍식의 〈민족건축론〉과 하싼 화티의 〈이집트 구르나 마을 이야기〉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누구편에 서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얻었다. 개인을 위한 일이 아니라 시민과 주민, 공공을 위한 일을 하겠다는 의지를 그때 다졌다. 도시를 공부하고 싶었던 그에게 도전해보라며 용기를 준 사람은 대학시절 은사였다. 스승은 유학보다는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공부할 것을 권했다. 석사과정을 공부하면서 인생의 좋은 스승들을 그곳에서 다시 만났다. 도시에 대한 관심을 더 증폭시킨 것은 주거환경 수업으로 진행한 서울의 마포 도화동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생각에 큰 변화를 얻었다. 석사논문으로 경주 양동마을을 택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600년을 지켜온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다음 600년을 이어가게 할 것인가가 주제였는데, 1년 넘게 양동마을에서 살다시피하며 연구한 덕분에 150가구의 양동마을과 마을 사람들을 온전히 안게 됐다. 논문으로 끝난 줄 알았던 양동마을은 후에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준비하면서 그와 다시 인연이 됐다. 양동마을이 2010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후에는 2년 동안 학생들과 마을 신문을 만들어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발굴하고 정리하는 작업으로 봉사했다.첫 직장인 대구한의대에서 3년 근무하다 2001년 경성대로 옮긴 이후 줄곧 부산의 도시재생에 애정을 쏟고 있는 그는 특히 도시의 산업유산을 주목하고 있다. 무조건적인 개발에 대항하다보니 의지와 관계없이 자연스럽게 시민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 그는 부산으로 옮겨온 초반부터 영도다리, 하야리아 부대, 동천, 북항, 산복도로, 동해남부선 폐선부지 등 각종 도시재생 시민보존 운동에 참여해왔으며 한국의 역사마을과 남한산성,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 작업을 이끌어 왔다. 학문적 연구와 국내외 도시들을 찾아다니며 확인하고 조사하는 현장 연구를 병행해온 덕분에 우리나라 도시들의 재생 프로젝트 문제점을 실질적으로 분석해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도시재생 전문가로 꼽힌다.〈역사와 문화를 활용한 도시재생 이야기〉, 〈세계의 도시디자인〉 〈도시재생〉 〈한국건축 개념 사전〉을 비롯한 10여권의 저서를 전문가들과 함께 펴냈으며, 2006년에는 산업유산으로 다시 살린 일본의 도시 이야기를 엮은 〈빨간 벽돌창고와 노란전차〉를 출간해 주목을 받았다. 국토교통부 국토디자인시범사업 민간전문가와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을 맡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6.06.24 23:02

고창농악보존회 이명훈 회장 "풍물 자체가 삶이고 놀이였던 어르신들에게서 배워"

전북은 농악의 맥이 탄탄하고 화려하다. 농악이 어느 특정한 지역의 전유물이 아닌 마당에 그 수준이나 질을 거론하는 것은 적절치 않지만 적어도 호남, 그중에서도 전북의 농악은 한국의 농악을 대표하는 큰 줄기를 잇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우리의 전통문화 대부분은 원형을 잃거나 훼손되었다. 농악도 예외가 아니지만 다른 장르와는 달리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다. 농촌의 현장에서 사그라져가고 있던 농악이 오늘에 이르러 그 지역적 특성을 온전히 지키면서 계승되어 질 수 있었던 동력의 정체(?)다. 들여다보면 그 한 바탕에 엄혹한 시대 상황을 직시한 젊은 세대들의 열정이 있다. 한 시대, 농악은 대학의 동아리 문화의 한 중심을 지켜왔다. 방학이 되면 농촌으로 들어간 젊은이들은 봉사활동을 하면서 현장에서 농악의 원형을 몸으로 마음으로 익히며 받아들였다. 한때 농촌에서보다 대학의 광장에서, 도심의 거리에서 더 활발하게 농악이 울렸던 이유이기도 하다.엄혹한 시대를 향한 젊은이들의 표현과 발언의 통로가 되었던 농악의 존재는 지역적 한계를 갖고는 있지만 비교적 건재하다. 고창농악은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농악이다.1985년, 고창에서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당시 고창문화원장이었던 향토사학자 이기화씨가 오거리당산제 재현을 위해 고창지역 마을마다 통문을 보내 풍물잽이들을 불렀다. 그 통문을 받고 모인 풍물잽이들은 놀랍게도 500명이나 되었다. 자연히 심사를 거칠 수밖에 없었는데, 기량으로 40여명을 뽑고 보니 50대부터 70대까지 노인층이 대부분이었다. 젊은 시절 한가락했던 잽이들의 귀환은 의미가 있었다. 고창농악보존회가 탄생한 바탕이다. 고창농악을 다시 살려 지키고 전승해온 고창농악보존회의 간판으로만 보자면 30여년 이력을 갖고 있지만 그 뿌리는 10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다. 1990년대 초반, 고창농악단에 20대 여성 풍물잽이가 합류했다. 오늘의 고창농악보존회를 이끌고 있는 이명훈 회장(48)이다. 스물세 살에 고창농악을 만났으니 올해로 25년 째, 쉰을 바라보고 있는 그가 고창농악을 지켜온 역사는 눈물겹다.여름 더위가 미리 찾아온 봄날, 고창군 성송면에 있는 고창농악전수관에서 그를 만났다. 전수관은 지금 대대적인 공사가 한창이다. 1999년 학천초등학교가 폐교되자 이듬해 고창농악보존회는 이곳을 위탁받아 전수관을 만들었다. 그 후 15년, 고창농악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풍물을 배우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뒤를 잇자 자치단체가 전수관 건립에 나섰다. 오는 6월 준공 예정인 고창농악전수관은 고창농악을 지켜온 사람들의 열정이자 희망이다.오랜 소망이 이루어지는 셈이에요. 규모가 커서 어깨가 무겁기도 하지만 잘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의욕이 더 큽니다.여전히 앳되어 보이는 그의 얼굴이 유난히 밝아 보였다.-전수관 식구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고창농악 본래의 일 뿐 아니라 공연이나 다른 기획프로그램이 많아졌거든요. 지난해부터는 〈한옥자원활용 야간상설공연〉까지 제작하게 되면서 일거리가 더 늘어났습니다.-생각보다 전수관이 고창 읍내에서 많이 떨어져 있네요.읍내에서 12킬로미터 정도 거리죠. 이곳으로 온 이유가 있었어요. 고창농악단 상쇠 황규언 선생님이 계시던 곳이었던 점이 첫번째였고, 연습을 하다보면 아무래도 소음 때문에 민원이 많은데, 이곳은 그럴 걱정이 없었죠.-언제 전수관을 열었습니까.학천초등학교가 1999년에 폐교 되었는데, 저희가 그 이듬해 1월 전수관 문을 열었어요. 교육청에서 무상임대로 제공해주어서 2005년까지 사용하다가 이후에는 군이 매입을 하고 숙소동까지 지어 고창농악보존회가 위탁운영하게 되었습니다.-단체 이야기 말고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풍물은 언제부터 쳤습니까.대학 다닐 때니까 스무 살 때 시작했네요. 지금 제 나이가 마흔아홉. 아직 삼십년도 안됐군요.(웃음)-고창과의 인연은 고향이어서 인가요.시작은 그렇게 된 것은 아닌데, 결과적으로는 고향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되었습니다. 대학 졸업하고 노동자 문화운동연합 풍물분과에 들어갔었거든요. 선배들과 공부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농악을 전수받았었어요. 사실 고창이 제 고향이긴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풍물을 별로 본적이 없었는데, 농악을 배우러 다니다보니 자꾸 고창농악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91년엔가 이기화원장님을 찾아 뵈었죠. 그때 황규언선생님을 소개시켜주셨어요.-그때부터 고창농악단에 들어갔습니까.아예 옮겨왔던 것은 아니고, 오며가며 선생님한테 배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인가 공연이 있다고 오라고 하셨어요. 그때 제가 만난 고창농악단은 정말 충격이고 감동이었어요. 30-40명 할아버지들이 꾸리는 농악단을 그때 처음 보았거든요. 이분들이 다 어디에서 오셨을까 놀라웠습니다. 또 각각의 기량은 얼마나 좋으신지. 신천지 같았어요.-어르신 모두가 스승이었겠군요.물론지요, 모든 악기는 물론이고 잡색까지. 보고 듣는 것이 모두 가르침이었어요. 감동이었죠.-그분들이 어떻게 고창농악단을 지켜올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고창문화원 이기화원장님이 85년에 오거리 당산제를 지내기 위해 각 읍면에 통지를 보내셨대요. 농악을 할 수 있는 사람들 다 모이라고. 그런데 고창 실내체육관에 500명이 모였다는 거예요. 놀라운 일이었겠죠. 그 분들 중 악기별로 잘하는 사람을 뽑아 농악단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고창농악단이 된 겁니다.-대부분이 한가락씩 하시던 분들이었겠습니다.그렇죠. 그 분들 중 꽹과리를 가장 잘치는 황규언 선생님이 상쇠가 되어 농악단을 이끌었는데, 누구하나 뒤처지는 분들이 없었어요. 그때 어르신들이 옛날 굿판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그 이야기를 듣다보니 이 분들이 살아 계실 때 고창 지역의 굿을 조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음이 조급해져서 그때부터 직접 나서 밤마다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굿 조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언제였죠.고창에 정착한 다음이니까 98년이에요. 제가 풍물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어 전북대 국악과를 다시 들어가 졸업한 후거든요.-전북대 국악과에 들어간 것은 서울에서 활동할 때였군요.제가 93학번인데, 그때는 서울에서 단체 활동을 하면서 선생님들 공연이 있으면 내려왔었어요. 할아버지들이 정말 저를 예뻐 해주셨는데, 대학에 갔다고 돈을 얼마씩 걷어서 장학금으로 주시기도 했어요. 손녀처럼 대해주셨죠.-어르신들의 사랑 때문에도 고창에 오셨어야 했을 것 같습니다.그즈음 고창농악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고, 이런 좋은 가락과 장단을 나만 배워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제가 서울에 있는 대학생들과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중 연세대 풍물패 후배들에게 고창으로 내려가자고 권했어요.-오늘의 고창농악이 이어지게 된 바탕이 거기 있었군요.많은 사람들이 제 고향이 고창이니 이런 일을 했다고 하는데, 그 것은 아주 일부분 이예요. 털어놓자면 저는 서울에서 활동하면서 고창에 와서 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어르신들이 보여주시는 그 모습에 반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죠. 그 분들의 삶이 온전히 담긴 풍물을 대하며 저 바탕을 내가 이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겼던 것 같아요.-사실 농악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물론이에요. 제가 오늘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함께 해온 후배들 덕분이죠.-고창농악단에서 나이도 어리고 게다가 여성이 대표를 맡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특별한 과정이 없이 자연스럽게 된 일인데, 상쇠였던 황규언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곧바로 제가 상쇠를 맡게 되었어요.-그 과정에서 갈등은 없었습니까.저는 원래 장구를 쳤어요. 황 선생님이 상쇠로 이끌 때는 가끔씩 끝쇠로 꽹과리를 치기도 했지만, 장고잽이가 주된 역할이었죠. 어르신 중에 부쇠도 따로 계셨고요. 그런데 상쇠란 자리가 꽹과리만 잘 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그 어르신도 가락은 좋은데 판 전체를 보고 이끌어 가는데는 한계가 있었어요. 제가 워낙 어르신들과 잘 통하기도 하고, 귀여워해주시기도 하니까, 그런 점들이 판을 어울어내는 데에 작용을 했던 것 같아요.-그런 자리를 놓고 분란이 생기는 단체들을 여럿 보았었습니다.그런 예가 많죠. 그런 점에서는 제가 복이 많아요. 이곳은 다 어르신들인데 어린 여자아이가 혼자 들어와 배우며 열심히 하는 것으로 보고 고창농악을 이어갈 사람은 이명훈이라는 생각들을 하셨던 것 같아요. 저도 뒤돌아보면 어려운 시절이 있긴 했어요. 2000년에 전수관 관장을 제가 맡게 될 상황이었는데 보존회장님이 안주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명훈이는 시집가면 고창을 떠날 아이라고. 당시 제가 전수 작업이나 보존회 일의 중심이었거든요. 섭섭하더라고요. 자리에 대한 욕심은 아닌데 꼭 제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시집을 안가고 고창농악을 지키겠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렇게 해야 의지를 믿어주실 것 같았죠.-가장 강한 협박이었겠는데요.맞아요. 제게 관장을 맡기셨죠. 그런데 회장님도 나중에 후회하셨어요. 제가 정말 결혼을 안하고 있으니 더 마음 부담이 크셨던 것 같아요.(웃음)-돌아보면 긴 세월입니다.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걸어온 길 인데요.마흔이 될 때까지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 지도 모르고 온 것 같아요. 그만큼 일이 많았어요. 굿 정리에 사람들 키우는 일, 마을농악단도 만들어야하고 이런 저런 행사도 치러야하고. 끝이 없었어요. 그런데 마흔이 넘어가면서 저를 돌아보게 되더라고요.-어떤 물음이 컸습니까.저의 정체성에 대해서죠. 나는 뭔가 하는. 돌아보면 제가 진정한 굿쟁이거나 예술가였다면 달라졌을 것 같아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나한테 주어진 임무였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그동안 쌓아온 일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고창농악을 정리해놓은 작업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던 것 같아요.개인적으로도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일이었죠. 98년부터 조사를 다니기 시작해 10년 만에 결실을 냈는데, 세권의 책으로 발간하고 보니 감회가 더 컸어요. 아마추어들이 열정하나로 강행한 일인데, 전문가들이 함께 했다면 더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겠지만 당장 어르신들이 계셔야 할 수 있는 일이니 미룰 수 없는 일이었죠.-한 지역의 농악을 이처럼 체계적으로 정리해놓은 예가 또 있나요.지역 농악을 많이 정리 했는데, 저희처럼 체계적으로 방대한 양을 조사해서 한 예는 거의 없을 겁니다. 유일하다고 할 수 있어요.-고창농악에 관한 것은 거의 다 기록으로 남긴 셈이군요.그렇긴 하지만 아무래도 아쉬운 부분도 많아요. 어르신들이 살아 계신다면 아직 여쭤볼 것이 많이 있죠.-10년 작업을 해놓았으니 더 허탈한 마음이 컸을 것도 같은데요.그런 점은 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는 생각. 그래서 이제 제 할일이 없다는 판단이 들고, 그렇다면 이제 내 할일을 다시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정리도 했고, 가르치는 일도 할 만큼 해왔고, 대중적으로도 고창농악이 확산됐고, 이제는 잘 가기만 하면 되는 시점이 됐다는 판단이 드는 것이죠. 그래서인지 이즈음은 나는 어떻게 살아갈까에 대한 고민이 깊어요.-답은 얻었습니까.제 굿을 치면서 살고 싶어요. 쟁이, 예술가로서 저 스스로 만족할만한 기량을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다른 분들은 후하게 평가해주시지만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격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크거든요. 돌이켜보면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며 공부했던 지난 세월이 너무 아깝고, 20대와 30대의 빛나는 시절을 연행자로서 기량을 가꾸었으면 지금쯤은 우뚝 설 수 있는 나이가 아닌가하는. 그래서 만족 안 되는 제 삶이 힘들었어요.-그렇다면 이제 연행자로서 무대 위의 이명훈을 더 가깝게 만날 수 있겠습니다.그럴 수 있으면 좋겠어요. 무대만이 제가 서야할 자리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제가 선생님들한테 반해서 풍물을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선생님들이 다 돌아가신 지금은 후배들에게 우리가 그것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생님들 같은 연행자들이 되어 있어야죠.30년 가까운 세월, 굿판을 지키며 고창농악을 보존하고 발전시켜온 그의 궤적은 빛났다. 가장 치열한 굿판의 현장에서 풍물 자체가 삶이고 놀이였던 어르신들을 만나 장단과 가락을 마음으로 정신으로 온전히 받아들였던 세월이 가져다준 선물이었을 터다. 그런데도 그는 정작 앞으로 가야할 길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 진정한 굿잽이가 되는 길, 그가 다시 선택한 그 길이 쉬워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무대 위에서 더 빛나는 이명훈을 만나는 즐거움을 머지않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이명훈 회장은] 고창농악 원형 발굴한 '진정한 굿잽이'이명훈 회장은 1968년 고창군 고수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판소리 좋아하셨던 할아버지를 따라 김소희명창의 공연에 가거나 임방울이며 박동진 같은 명창의 소리를 할아버지의 테이프로 들어본 적은 있으나 우리음악에 특별한 관심은 없었다.고창여고 시절, 문학에 재능이 있다는 선생님의 말에 용기를 얻어 서울예전 문창과에 들어갔다. 좋은 소설가가 되고 싶었으나 타고난 재능에 문학적 감성이 풍부한 동료들을 보며 글은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 길이 아니다싶어 고민하다가 민요동아리를 만났다. 세상을 보는 가치관이 달라졌다. 풍물은 그렇게 시작했다.졸업을 한 후에는 노동자문화연합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풍물을 공부했다. 선배들과 학습(?)하면서 전국의 농악단을 찾아다니며 장단과 가락을 배웠다. 고창농악을 알게 된 것은 그 과정에서였다. 호남 좌우도 농악 이야기가 나올 때면 어김없이 앞세워지는 고창농악의 면모가 궁금했다.91년 고창에 내러가 이기화 고창문화원장을 만났다. 꽹과리 명인 황규언 선생을 만난 것도 그때였다. 그는 고창을 오가며 황규언 명인을 스승으로 고창농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30-40명 어르신들은 손녀딸 같은 그를 애정으로 지켜보며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사랑과 관심을 주었다.93년, 어차피 들어선 이 길을 제대로 가고 싶어 전북대 국악과를 다시 들어가 내친김에 석사과정까지 마쳤다. 같은 해 고창농악 전수 조교를 시작했다. 농사를 짓던 부모님은 아들 다섯 사이에서 얻은 딸이 굿판이나 쫓아다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그는 끝내 굿잽이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어르신들의 기량에 마음을 뺏긴 그는 장고와 쇠, 고깔소고춤, 부포까지 다양한 부문의 기량을 배우고 익히며 연행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그가 전수조교가 된 이후 고창농악보존회의 전수와 공연활동 대부분은 그의 손에서 기획되고 진행됐다. 그 즈음 서울의 마음 맞는 후배들을 불러들여 고창농악의 뿌리를 찾아 보존하고 발전시킬 바탕을 마련했다. 구재연 임성준 임승환 이성수 이광휴 주영롱 씨 등 오늘의 고창농악을 지키고 있는 후배들이 그들이다.1998년에는 고창농악 정리 작업을 시작했다. 할아버지들을 찾아다니며 구술을 기록하는 대장정이었다. 10년 동안 지속된 이 작업으로 〈고창농악〉 〈고창의 마을굿〉 〈고창농악을 지켜온 사람들의 삶과 예술세계〉와 같은 빛나는 결실을 얻었다. 그 사이 문굿과 풍장굿 같은 고창농악의 원형을 발굴하고 재현해냈으며 지난해에는 발굴된 굿을 새롭게 구성한 풍무를 전주에서 공연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개인적인 기량도 빼어난 그는 서울 민속박물관 토요무대,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 서울국제무용제개막공연, 화성백중제 젊은 명인전, 서울세계무용축제 등에 초대되었으며, 현재 전북무형문화재 고창농악이수자, 상쇠 나금추 이수자로 활동하면서 고창농악보존회 회장을 맡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6.06.03 23:02

진메마을 고향집으로 귀향한 김용택 시인 "어머니 삶처럼…문학으로 우리사회 경계 없애는 데 여생 보낼 것"

10년 전쯤의 일이지만 아직 생생한 풍경이 있다. 여름이 막 지나고 있던 9월 한낮이었다. 시인과 시인의 제자인 아이들이 길 위에 섰다. 임실군 장산리 진메마을부터 천담까지 이르는 십리길. 길 위의 아이들은 걷지 않았다. 넘어질라, 뛰지 말고 걸어. 선생님은 소리쳤으나 아이들은 서지도 걷지도 않았다. 그렇게 뛰어가면 들꽃을 볼 수 없다고 소리치자 그제야 아이들이 섰다.길 밑으로 강물이 조용히 흐르고, 반짝이는 나뭇잎과 온갖 풀숲으로 넉넉해진 나지막한 산들이 엎드려 있는 동안 들꽃들이 피고 지고 있었다.이렇게 예쁜 꽃들이 있고, 맑은 강물이 있고, 저기 산을 봐라. 나무들은 또 얼마나 예쁘냐. 아이들의 눈이 반짝였다.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아 세상으로부터 잊혀진 것처럼 놓여있던 그 길은 시인이 나고 자란 진메마을을 거쳐 천담으로 흐르는 섬진강 물을 끼고 구불구불 이어진 길이다. 강이 꺾어지는 지점이면 어김없이 길도 꺾어지지만, 길이 이어지는 동안 산도 물도 따로 가지 않으니 강길 이랄 수도, 산길 이랄 수도 없었다.가을로 가는 늦여름 들꽃들이 지천이었던 천담 가는 길에 시인은 오래전, 또 다른 시인들을 불렀었다. 앞서 세상을 떠난 김남주 이광웅 시인이다. 들꽃과 강물과 나무와 숲과 산중문답. 가진 것 없이 걷는 길을 시인들은 좋아했다. 김남주 시인은 이 길을 따라 걷는 행복을 별천지 비인간이라고 했었다던가.강물 흐르는 소리가 잦아들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더 환하게 울렸던 그 길은 이제 잘 다듬어진 산책길로 모습을 바꾸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로 가득 채워지는 길이 되었다.시인은 2008년 초등학교 교사로 퇴직을 한 그 해에 고향마을을 떠났다. 그리고 8년. 시인은 다시 돌아왔다. 산과 들, 다시 지천으로 꽃이 피어나는 봄날이었다.김용택시인(68)을 만나러 갔다. 시인이 돌아온 진메마을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가 살았던 오래된 기와집은 낮은 돌담을 거느리고 더 낮게 내려앉았다. 뒤편에 들어선 새로운 공간들을 배려한 조화다.시인을 찾아간 날, 진메마을 앞 낮은 산을 가득 채우고 있어야 할 산벚나무 꽃이 보이지 않았다.밤새 비바람이 세게 불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보니 산벚꽃이 다 떨어졌네요. 산벚꽃이 피어나는 지금이 제일 좋을 때인데.전주살이 시간이 길었던 모양이다. 그는 들판에 벌거벗고 서있는 듯,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소리에 밤새 뒤척이다 깼다고 했다.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처음 전주로 갔을 때의 낯설음을 이제는 바뀐 환경으로 다시 안게 되었으니. 곧 괜찮아지겠죠.환갑을 넘긴지 오래지만, 시인의 웃음은 여전히 아이 같다. 인터뷰 하는 내내 그의 웃음소리가 낯설다는 그의 새로운 공간 안에서 유쾌하게 떠다녔다.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괜한 걱정이다 싶었다.-몇 년 만인가요. 고향집에 다시 돌아오신 것이.아내와 두 아이가 96년엔가 전주로 이사를 했는데, 나는 한동안 어머니도 계시고 학교도 있어서 전주와 고향집을 오가며 살다가 2008년 퇴직한 해에 전주로 갔습니다. 가족들은 20년만이고, 나는 8년 만에 돌아온 셈이군요.-떠나는 것도 쉽지 않았겠지만, 다시 돌아오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생각이 많았어요. 전주의 아파트 생활이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미 익숙해져버려 다시 시골생활로 돌아가는 것에 자신이 없었죠. 그래도 아이들이 다 커서 떠나고 아내와 단둘이 지내다 보니 고향집이 그리워지더군요. 어머니가 요양원에 계시니 빈집이지만, 인생의 마무리를 이곳에서 하고 싶었습니다. 아내가 또 원했고요.-계기는 따로 있었죠.사실 오랫동안 고민해온 일이었는데, 임실군이 섬진강 벨트 사업에 참여하면서 결정이 빨라졌어요. 예술가와 작업실을 지원하는 사업인데, 제가 고향 집과 뒤편 땅을 기부채납하고 농림축산부와 임실군이 예산을 지원해 공간을 마련하게 됐습니다.(진메마을 그의 고향집 뒤편에는 오른쪽과 왼쪽에 단층짜리 벽돌 슬래브 건물이 들어섰다. 왼쪽은 시인의 살림집이고 오른쪽은 그의 서재를 겸한 문학공간이다.)-문학관으로 활용하기에는 규모가 작아 보입니다.문학관으로 활용되기에는 어렵지요. 제가 아직 원하지 않고요. 제가 소장하고 있는 책과 자료를 정리해 보존하면서 서재로 사용할 생각입니다. 물론 찾아오는 독자도 이곳에서 만나고 동네 주민들과 아이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도 구상하고 있습니다.-이름을 김용택의 작은 학교라고 지었더군요.우리 동네에 열 두 가구가 살고 있습니다. 그 중 초등학생이 세 명, 유치원생이 한명 있어요. 이 아이들을 불러서 재미있게 놀 생각입니다. 인근 지역 아이들에게도 글쓰기와 책읽기를 가르치고 글을 써보게 할 생각이에요. 작은 학교에서 하게 될 가장 중요한 일이죠.(웃음) 그 아이들이 모두 자매인데, 아이들 엄마가 제 제자예요. 동네 할머니들을 위한 시간도 갖게 될 겁니다. 이따금씩 소리꾼이나 연주자들을 부르기도 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어드리고요.-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데, 그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없나요.그동안에도 우리 마을에 문학기행을 오는 사람들이 꽤 많았어요. 게다가 우리 동네에서 천담까지 가는 길이 잘 다듬어지면서 관광객이 몰리게 되었죠. 마을 사람들의 불편이 큽니다. 제가 집에 있을 때는 그 분들과 만나 마을이야기며 산과 강이야기, 제 문학과 삶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이 공간이 찾아오는 분들에게 쉼터가 되고, 때로는 도서관이 될 수 있겠죠. 자치단체나 다른 단체의 힘을 얻지 않고 올해 1년은 자연스럽게 제 힘으로 꾸려가보려고 해요. 여건이 된다면 임실 순창 지역의 문인들과도 만나 책읽기도 하고 글쓰기도 나누고 싶습니다. 지역에 작은 도서관이나 독서동아리가 꽤 많더라고요.- 김용택의 작은 학교가 규모를 앞세워 지어진 적지 않은 문학관들의 역할에 새로운 모범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문학관을 먼저 내세웠다면 저 또한 그런 범주에서 자유롭지 못했겠지요. 그래서 군과 다소 갈등을 겪으면서도 제가 원하는 공간을 고집했습니다. 지어놓고 보니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래전부터 군에서 큰 예산을 들여 문학관을 짓자는 제안을 해왔었지만 제가 생각해보니 문학관을 지을 만큼 문학적인 성과가 있는지 스스로 판단이 서지 않아 응하지 않았었거든요. 이번에도 사실은 17억 원 정도의 예산이 마련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땅을 제가 내놓았으니 적은 예산으로 공간을 짓고 나머지는 마을을 위해 써달라고 했어요.-그동안 강연을 많이 다니셨는데 강연 요청은 지금도 많습니까.많이 줄었어요. 강연은 퇴직 한 이후 8년 동안 본격적으로(?) 다녔어요. 안 가본 자치단체가 별로 없죠. 주말을 제외한 평일은 거의 강연하는 일이 일상이었으니까요. 처음에는 40년 가깝게 아이들과 만나다가 퇴직을 하다 보니 허허로움이 커서 강연을 더 열심히 다녔던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일상이 되었고.-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실텐데 어떤 이야기를 하십니까.대상에 따라 다르죠. 강연하면서 소통이 가장 잘되는 분들은 학부모들과 교사들이예요. 일반 대중 강연도 재미있는데,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이 좋아하죠. 가끔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는데, 강연을 정말 열심히 듣습니다. 할머니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확인시켜드리니까요. 저는 어머니를 통해 할머니들이 살아온 삶의 시간들을 압니다. 강연이 끝나고 나면 제 손을 잡고 우시는 분들도 많아요. 당신들의 삶에 대한 회한이겠죠.-어떤 이야기에 가장 공감하시나요.어머니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어머니가 살았던 삶이, 어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내 시를 만들어주었다고 이야기 하죠. 어머니가 말하는 것을 받아썼더니 시가 되었으니 여기계신 어머니들이 모두 시인이시라고 말합니다. 때로는 요즘 며느리들이 얼마나 싸가지 없는가 흉도 봐요. 엄청 좋아하시죠.(웃음)-그분들로서는 마음 치유가 되는 시간이겠군요.사실 치유가 되는 것은 그 분들만이 아니라 저도 치유가 됩니다. 오히려 배움은 제가 더 크죠.-강연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는 소리도 있습니다.알지요. 그런데 저는 강연이 정말 재미있어요. 말하는 것이 즐겁고요. 제가 워낙 말하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제 일상은 다른 사람들과 좀 다릅니다. 저녁 아홉시면 자고 새벽 세시나 네시에 일어나죠. 새벽 2-3시간이 글도 쓰고 책도 읽는 시간입니다. 아침이 되면 그때부터는 할일이 별로 없게 되죠. 제 경우에는 두 시간 정도 글을 쓰다 보면 지치더라고요. 창의성도 떨어지는 것 같고. 그래서 저는 강연이 없을 때는 그냥 놉니다.-그래도 강연을 다니다보면 시를 쓰는 시간이 아무래도 적어지지 않을까요.저는 전혀 별개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선 강연을 하는 일이 즐거우니 문제 될 일이 전혀 없어요.-선생님의 시와 강연의 역할이 같다고 생각하시나요.물론이죠. 시가 곧 말이고 말이 곧 시예요. 저는 강연을 다니면서 많은 공부를 합니다. 지역을 알게 되고, 그곳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알게 되죠. 그렇다보면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시인이 따로 있고, 강연자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저는 제 시와 삶이 강연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이란 삶을 정리해주는 것이죠. 제 철학이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 풀어졌다가 다시 내 삶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저는 즐깁니다. 나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시를 쓸 때가 아니고 삶을 살아갈 때거든요. 그래서 저는 삶의 현장에 함께 있다는 것을 매우 소중한 가치로 여깁니다.-화제를 좀 돌려보죠. 여러 해 전, 문화예술계의 지인들과 함께 고향집에 가끔씩 열리는 학교를 열 계획은 어떻게 되었습니까.다양한 영역의 문화예술인들이 만나 그 일을 도모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 또한 즐거운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죠. 그러다 결국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섰어요. 저는 무엇을 하든 지속성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데, 자신이 없더라고요. 몇 번 주목받는 행사로 그런 일을 꾸려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그때 구상했던 일들을 지금 담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요.맞아요. 앞으로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을 것 같아요. 공간이 생겼으니 어쨌든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도모할 생각이죠. 시를 가지고 와서 이야기도 나누고, 그것들이 모여지면 그 시들을 예쁘게 마을 여기저기에 걸어두고 싶어요. 좋은 시를 읽으면서 마을길을 걷게 하는 시간을 나누는 거죠.-시를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문학을 동경하게 되는 것일까요맞아요. 어릴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문학을 꿈꿉니다. 나이가 들면 시나 에세이를 쓰고 싶어 하죠. 그래서 문학을 공부하게 되고. 그런데 사실 시를 쓰겠다는 것을 목표로 세우는 것은 잘못된 일이예요. 시를 쓰려고 하면 안 되죠. 생각을 써야합니다. 생각을 쓰다보면 시를 쓰려는 사람은 시를 쓰게 되고, 소설을 쓰려는 사람들은 소설을 쓸 수 있게 되거든요. 돌이켜보면 저는 시를 쓰려고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무엇을 쓰겠다는 생각보다 책을 읽다보니 생각이 많아지고 그 생각들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 날 시가 되었던 거죠.-그것이 마음처럼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좀 더 쉽게 시와 가까워지는 방법이 있을까요.시를 많이 만나는 것이겠죠. 제가 여러 해 동안 해온 일이 있습니다. 제 두 아이가 멀리 떠나 있을 때 매일 아침 한편씩 시를 써 보냈습니다. 그러다보니 천여 편 시를 보냈더군요. 저는 시가 사람을 잘 살도록 도와준다고 믿습니다. 잘사는 방법 중의 하나는 자기가 살고 있는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이거든요. 시는 자신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눈을 가질 수 있게 합니다. 그것은 곧 세상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죠. 저는 세상을 이해하는 일을 시로부터 배웠습니다. 그래서 시를 만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를 쓰고 싶다면 우선 자기 생각을 글로 쓸 것을 권하고 싶어요. 글을 쓴다는 것은 세상을 새롭게 보는 일이고, 내가 새로워질 수 있는 일이거든요. 저는 새로워지려고 글을 씁니다.시인은 어머니로부터 삶이 곧 공부라는 것을 배웠다. 그의 어머니는 세상 어느 것에도 경계를 짓지 않았다. 어머니의 삶이 그러했다. 나무처럼 다 받아들이는 어머니의 삶을 보며 그는 삶이란 받아들이는 힘을 키우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받아들여야 나를 새롭게 세상에 그려낼 수 있습니다. 받아들여야만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를 보세요. 경계가 없는 곳이 없죠. 분단의 우리 역사가 그렇고, 좌파니 우파니 이념의 문제가 그렇고, 학연이니 지연이니 지역주의까지 패거리문화에 익숙해진 우리 삶은 황폐해져있습니다. 그 경계를 없애는 일을 나는 문학이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제 시가 많은 사람들에게 생각을 갖게 하고 받아들이는 힘을 키워내는 통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도시 생활에 익숙해진 시인의 일상이 다시 새롭게 바뀌어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다. 시인의 귀향이 반갑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은] 1982년 詩 '섬진강' 발표삶의 아름다운 풍경 서정적으로 노래김용택 시인은 섬진강 시인으로 불린다. 창작과 비평사에서 펴낸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온 것이 1982년. 당시 발표작이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로 시작되는 〈섬진강〉이었다.그는 섬진강 줄기가 흐르는 강변, 임실군 덕치면 장산리 진메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농사꾼의 장남으로 아들로 태어난 그는 순창농고를 졸업했지만 직장을 얻기 보다는 농사짓는 삶을 꿈꾸었다. 그러다 우연히 보게 된 교원양성소 시험에 합격해 초등학교 교사가 됐다. 스물두 살, 모교인 덕치초등학교 교사가 되고 보니 아이들을 가르치고 함께 노는 일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운 일인가를 알게 됐다.교사를 하면서 시인이 되었지만 처음부터 시인이 되고자 시를 쓰지 않았다. 교사가 된 후 그는 책읽기에 빠졌는데, 책을 읽다보니 생각이 많아지고 깊어졌다. 생각을 글로 써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쓰여진 글은 어느 날 시가 되어 독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그의 시가 맞닿아 있는 지점은 늘 자연과 어머니와 고향마을이다. 그가 쓰는 시와 산문과 동시는 어린 시절을 지나 어른이 되고,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해 아이를 낳아 키우고,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만나고, 시인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오랜 세월 삶의 흔적이 아름다운 풍경이다.작고 사소한 것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깨우쳐 주며 살아온 그의 시와 삶은 따로 가지 않는다. 수많은 독자들이 김용택의 시에 마음을 주는 이유다.2008년, 38년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마무리 했지만 일상은 더 분주해졌다. 전국 각지에서 그를 찾는 강연 요청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강연에 나서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더 넓어졌다. 계층이 따로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는 받아들이는 힘을 기르는 일이 곧 사는 것임을 깨닫게 됐다.아내와 아이들이 전주로 나간 지 20년, 그가 고향집을 떠난 지 8년. 다시 진메마을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이곳에 작고 예쁜 살림집과 김용택의 작은 학교라 이름 지은 문학공간을 새로 얻었다. 시인은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고 있다.〈섬진강〉 〈맑은 날〉 〈그 여자네 집〉을 비롯한 열권의 시집과 〈인생〉 〈오래된 마을〉 〈콩, 너는 죽었다〉 등 여러 권의 산문집과 동시집을 냈으며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

  • 기획
  • 김은정
  • 2016.04.29 23:02

부안마실축제 이동석 총감독 "다큐멘터리의 생명이자 가치는 사실의 탐구 "

1980년대와 1990년대, TV앞에 우리를 불러놓고 한국역사와 한국문화에 새롭게 눈을 뜨게 해주었던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한국탐구〉 〈한국의 이미지〉 〈한민족탐험〉 〈잊혀진 전쟁〉 같은 프로그램이다.털어놓자면 연속기획물로 방영되었던 이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들에 마음을 빼앗겨 역사책을 다시 읽고 우리 문화를 만나면서 옛 것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만큼 프로그램이 준 감동과 충격이 컸던 것인데, 사실을 추적해가는 탐구의 세계인 다큐멘터리의 힘을 알게 된 것도 그 덕분이었다.돌아보면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분단의 어둡고 처절한 역사의 민낯을 드러내는 일이나, 이미 사라지고 잃어버린 문화의 원형과 정신을 찾아 그 가치를 오늘에 되살려 놓는 일은 오랫동안 금기시 되거나 묻혀있던 영역이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진실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 다큐멘터리 제작은 그만큼 더 고단한 작업이었을 것이다.이 프로그램들을 기획하고 만들어낸 이동석 다큐멘터리 감독(68, N미디어 회장)을 만났다. 정신을 단단히 무장하지 않으면 도전조차 쉽지 않았을 이 고된 영역에 뛰어들어 꼬박 35년 동안 다큐멘터리 감독으로만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직접 연출한 작품만도 200여편. 기획하고 제작한 작품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의 손을 거쳐 나온 수많은 작품들은 거개가 명징한 주제를 인간적 감성으로 담아낸 것들이다. 덕분에 그의 이름은 독립제작사, 특히 다큐 PD와 작가들 사이에선 전설이 됐다.인터뷰는 즐거웠다. 방송으로만 만났던 다큐멘터리 제작 현장을 그는 아직 생생하게 살아있는 기억으로부터 불러냈다. 귀한 시간의 궤적들이 살아나 다시 가슴을 뛰게 했다.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쏟았을 열정과 고된 노동의 시간을 짐작해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에게 다큐는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다. 논리적이지만 결코 단호하게 규정짓지 않는 철학을 지키며 다큐멘터리 PD로만 일관되게 살아온 삶의 노정에 답이 있었다.-아직 현역이시죠.이제 물러났죠. 현업에서 나온 지 여러 해 되었어요. 지금은 가끔씩 후배들 작업을 자문해주고 있는 정도죠.-40년 가까운 시간을 제작현장에서 보내셨는데 축적된 경험과 제작 노하우를 가두어놓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아쉽습니다.많은 제자와 후배들이 현장을 지키고 있고,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으니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을 격려하고 힘이 되어 주는 것이겠죠.-방송일은 어릴 적 꿈이었습니까.그렇진 않아요. 신문기자였던 아버지 영향도 있었지만, 고등학교 국어선생님 말씀을 듣고 신문방송학과를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었거든요.-기자가 아닌 PD가 되신 것은 군기 때문이었군요.(웃음)대학 4학년 때 TBC 방송실습과정을 거쳤는데, 실습생 중에 2명이 특채됐어요. 저는 드라마를 하고 싶었는데, 신임 PD를 선임하는 편성부장이 다큐파트로 불렀어요. 그때 막 다큐라는 형식이 들어왔거든요.-처음부터 다큐로 시작하신 셈인데, 마무리까지 다큐로 하셨으니 흔치 않은 과정입니다.그렇게 되었네요. 당시는 드라마나 엔터테인먼트도 하고 싶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다큐라는 길을 일관되게 걸어갈 수 있게 해주셨으니 감사할 일이예요.-살다보면 그런 계기나 인연이 참 소중한 것 같아요.맞습니다. 저도 제 인생에 가르침을 준 선배들이 있어요. 군대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인연이 된 분들인데 제가 세상을 조금이라도 의미 있게 잘 살아올 수 있었다면 그분들의 덕분이지요.-감독님이 권해주신 글 중에 조차장이야기가 감동이었습니다. 조차장은 제 직속 선배였어요. 나이로는 다섯 살 위였는데,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의식과 정신세계를 가진 분이었죠. 공은 후배들에게 돌리고 과는 자신이 안는 것은 물론이고 늘 당당하게 세상과 맞서는 분이었지요. 일화가 정말 많습니다. 우리에게 그는 전설이었어요. 그런 선배를 만났다는 것이 정말 행운이었죠.(이 감독은 인터넷 카페 하나를 소개했었다. 다큐멘터리 제작과정의 일화와 경험을 글로 올린 카페였다. 내가 만난 사람들편에 조차장 이야기가 있었다. 단숨에 여러 편 글을 읽었는데 드라마 한편을 보고난 느낌이었다. 드라마 PD가 되고 싶었다는 그의 말이 생각났다. )-그런 선배가 지켜주고 있었으니 일하는 보람이 컸을 것 같습니다.자존감이 강한 만큼 내공도 깊은 그 선배가 교양팀의 차장으로 있었으니 우리 팀은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을 자존심과 옮고 그름에 대한 판단, 비판에 강했어요. 어느 날 정신적 육체적 고단함과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사표를 내고 집에 처박혀 잠자고 음악 들으며 지내고 있었는데 입사동기생이 찾아왔더군요. 조차장이 차장이 싫어서 사표는 내는 거라면 이대로 끝내고, 회사가 싫어서 그런 거면 빨리 나와라. 회사는 우리가 노력해서 고치면 되는 거니까라는 말을 그대로 전하라고 했다면서. 이튿날 출근했어요.(웃음)(조차장은 어느 날 불쑥 이 감독에게 말했단다. 나는 말야, 이런 예감이 들어. 당신은 방송생활을 민족의 문제, 한민족의 냄새를 찾아다니는 일로 시종할 것 같은 예감. 돌아보면 그의 작업 대부분이 민족이란 주제로 엮어져 있으니 그 선배의 예감은 기막히게 적중한 셈이다.)-감독님 첫 작품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카메라의 눈인데, 10분짜리 가십 프로그램이었어요. 한주간의 이슈를 다루면서 고발도 하고 알리기도 하고. 피디저널리즘이랄 수 있는 시작이 아닐까 싶습니다.-화제를 좀 돌려보죠. 2001년인가요. 〈인간극장〉이 방송됐습니다. 반향이 컸지요. 휴먼다큐란 새로운 형식도 그렇고, 다루는 주제가 주는 따뜻함도 그렇고. 감독님 제작사 작품이죠.맞아요. 휴먼다큐멘터리로 새롭게 만들어낸 것인데, 그 전까지 제작된 휴먼 프로그램은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제작을 했어요. 당시 유행했던 것이 입지전적인 인물을 다루는 것이어서 내용이 부실하거나 재미가 없으면 침소봉대하는 예가 많았어요. 그런 환경이니 프로그램에 어떤 틀이 생기게 되겠죠. 책의 소제목 같이 완전히 정제되고 가로세로 구획 정리 된 듯한, 그렇게 매끈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죠. 시청자들은 그런 프로그램에 쉽게 식상해 합니다. 잘난 사람들의 이야기인 모양이다.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이런 식이 되는 거죠. 새로운 휴먼다큐를 만들어내고 싶었어요.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희로애락을 그대로 전달하는 형식이었죠. 시청자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시청자들의 몫에 맡기고 전달에 충실하자는 것.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인간극장〉입니다.-사실 감독님이 운영하셨던 리스프로도 인간극장 때문에 알게 되었거든요.리스프로는 제가 만든 독립제작사예요. 프로덕션 2호지요. 〈인간극장〉은 2001년에 안성에 있는 방송대학 기숙사에 우리 회사 PD와 작가 20여명을 합숙시켜가며 얻어낸 결실입니다.-지금까지도 방송되고 있으니 15년 장수 프로그램이군요.우리는 2008년 회사 문을 닫으면서 그만두었어요. 당시에는 30명 정도가 7개 팀으로 나누어 제작을 했는데, PD 작가 자료조사원 조연출 등 한 팀이 아이템을 결정해 제작하는 형식이었죠. 그때는 전 과정을 점검하면서 소제목까지 함께 정했어요. 소재발굴부터 완성까지 철저한 검증을 그쳤죠.-〈인간극장〉은 리스프로 식구들이 함께 일궈낸 대표작이었군요.그런 셈이죠. 독립제작사는 스스로 방송을 해보겠다고 들어온 사람들이어서 열정과 의욕이 대단합니다. 군인으로 치자면 육군사관학교 같은 곳에서 훈련받은 것이 아니라 자생적으로 모여드는 지망생들이거든요. 촬영부터 편집까지 과정은 물론이고, 방송 저널리즘도 다 넣어주어야 하죠. 남다른 결속력이 생기게 됩니다.-제도권 방송국에서는 그런 과정이 시스템으로 정착되어 있지만 독립제작사 같은 경우는 그렇지 못하니 어려움이 컸겠습니다.장단점이 있지만 독립제작사 출신 PD들은 전사가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경비 시간 장비까지 어느 것 하나도 충족한 여건에서 제작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니까요. 그러니 실력도 더 쌓아야하고 노력도 더해야 하죠.-한때 리스프로는 정말 잘나갔던 제작사였지 않습니까.일하는 식구가 120명이나 되던 시절도 있었으니까요. 늘 편하지만은 않았습니다. 프로그램을 하나 맡으면 최소한의 인건비는 나오니 유지할 수는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는 상황이어서 늘 불안하거든요. 관례적으로는 6개월 단위로 방송국 프로그램이 편성되는데 6개월로 끝나버리면 인력도 빼게 되니 가슴이 아프죠. 공간도 그렇고요. 덕분에 이사도 수없이 다녔습니다.- 리스프로의 대표작이 많지요.인간극장 전에 〈현장르뽀 제 3지대〉가 있었어요. 기자들 뒤통수치는 프로그램으로 알려져 있었죠.(웃음) 〈어른들은 몰라요〉 〈무한지대 큐〉 〈퀴즈 대한민국〉 같은 프로그램을 들 수 있는데 거의 롱런 했어요.-처음 두 명으로 시작한 회사의 성장도 놀랍거니와 앞날이 창창하던 방송사를 나와 독립제작사를 열었던 용기가 궁금합니다.부장이 되고 보니 중간 역할의 어려움도 그렇고 그 과정에서 안게 될 갈등과 스트레스를 이겨낼 자신이 없었어요. 여섯시 내 고향을 시작한지 6개월 만에 사표내고 나왔죠. 방송을 안하겠다고 나온 터여서 2년 동안은 방송과는 다른 분야의 일을 맡아 했습니다. 그런데 식구들이 늘면서 젊은 친구들이 방송 쪽으로 마음을 두더라고요. 모른 척 할 수만도 없어서 방송 쪽 일을 시작했어요. 그러나 갑과 을의 관계로 일하기는 싫더군요. 온전히 피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서로 존중해주는 여건에서 일을 할 수 있었죠.-현장에서 뛸 때의 다큐와 지금 다큐를 비교해보면 어떻습니까.요즈음은 방송을 안보니 알 수 없어요. 프로야구 중계나 고전영화 정도 보는 것이 전부지요. 그러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메커니즘이 많이 달라진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우선은 외형적으로도 화질이나 화면 스케일이 달라졌잖아요. 고급화가 되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다큐를 만드는 사람들의 정신이나 자세가 그만큼 따라가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우리는 장인정신으로 내 작품을 만들었거든요. 지금은 시스템화 되면서 직장이라는 인식이 더 큰 것 같더군요. 필생의 업이나 소명의식으로 하기 보다는 직장일로 하는. 들어보면 제도권 방송사가 아닌 독립제작사들은 3D 업종 비슷하게 인식되면서 특히 다큐멘터리 PD가 갈수록 줄어든다고 해요.-우리나라의 방송프로그램도 큰 폭으로 발전한 것이 사실인데, 현장에서 투쟁하다시피 제작해온 독립제작사의 공도 큰 것 같습니다.물론이죠. 방송 내부에서도 많이 발전했고요. 일단 시청자들의 눈높이가 높아지니 거기 맞추는 노력이 필요했겠죠.-다큐의 흐름은 어떻습니까.세계적으로는 퇴조 현상이에요. 일단 따분하고 딱딱하잖아요.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제대로 보는 시청자들이 많지 않을 겁니다. 문화 환경 변화와도 관계가 있지요. 다큐멘터리는 원인과 결과로 짜입니다. 중간에 놓치면 벽돌 한 장 빠진 것처럼 앞뒤의 맥이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죠. 논리적인 프로그램이라면 더더욱 집중해 보아야 하는데 가볍고 흥미 있는 프로그램들 속에서 시청자를 붙잡고 있기 쉽지 않아요.-예능이 대세인 것과도 무관하지 않겠습니다.요즈음은 다큐멘터리도 예능 플러스 다큐 비슷한 형식이 생겼잖아요. 그리고 이제는 코미디니 예능이니 경계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게 되었거든요. 그렇다보니 다큐멘터리 작가도 줄어들고 있다고 해요. 활동하고 있는 다큐 작가들도 현실적으로 고민이 많고요. 어느 방송사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교양팀을 아예 없앴다고 하던데요. 사실이라면 안타까운 일이죠.-대학에서 인문학 순수예술이 구조조정 되는 상황과도 같군요.방송도 문화니까 변하는 것이 당연하죠. 그렇긴 하지만 기본적인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은 안 되는 일이예요.이 감독은 나직하고 정갈하게 대화를 한다. 그래서 현장에서만 30여년, 온갖 역사물과 문화기획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겪었을 극적이고 역동적인 순간들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정제된 논리와 분석이 바탕이 된 진실의 힘이 아주 생생하게 전해진다는 것이다. 종군위안부 역사를 밝혀내는 이야기가 그랬고, 한민족의 근본적 심성을 밝혀 미래를 예측하고자 했던 한민족탐험의 이야기가 그랬다.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카톡에 올라있는 그의 말풍선 글이 생각났다.안녕하세요. 잘 계시죠.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배려. 더 이상 다른 이유가 필요 없었다.● [이동석 감독은] 방송사PD광고기획자에서 독립제작사 설립, 다큐멘터리 지평 넓혀감동 주는 작품 고수이동석 감독은 김제가 고향이다. 세 살 때 전주로 이사와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전주에 살았다. 고등학교 입학하면서 전주를 떠났지만 여전히 전주 사람이다.그는 방송국 프로듀서로 일하면서 다큐멘터리 제작에 입문했다. 방송국 PD가 된 것은 기자였던 아버지의 영향과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의 조언이 컸다. 고등학교 2학년 국어시간, 그가 존경했던 선생님은 신문방송학과를 권했다.고려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해 대학신문사에 들어갔으나 워낙 센 군기에 눌려 포기하고 대학 방송국으로 옮겼다. 후에 방송인으로 이름을 알렸던 이계진 김종호 씨 같은 좋은 선배를 그곳에서 만났다. 대학 4학년 때 TBC가 졸업반 대상으로 개설한 방송실습이 끝나고 특채로 임용 됐다.1975년 방송국을 그만두고 광고기획사를 냈으나 2년 만에 손을 들고 오리콤에 들어가 카피라이터 밑 광고기획자로 일했다.1981년에 다시 KBS에 입사했으나 교양제작국 부장으로 승진하던 해에 퇴사해 MBC프로덕션에서 2년 동안 역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다 1993년 독립제작사 리스프로를 설립했다.방송국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한국탐구〉시리즈나 〈한국의 이미지〉 〈김용운 교수의 한민족 탐험〉 〈이민 이후 한인들〉 〈잊혀진 전쟁〉 등 민족적 문제를 천착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두 명으로 출발한 리스프로는 독립제작사 중에서도 실력 있는 제작사로 성장해 2008년 타의에 의해 문을 닫을 때까지 다큐멘터리 영역의 지평을 열고 넓혔다. 〈현장르포 제 3지대〉 〈인간극장〉 〈퀴즈대한민국〉 〈생방송 큐〉 〈스님 성철 큰 스님〉 등이 리스프로가 제작한 프로그램이다. 한국방송대상, 백상예술대상, 한국방송위원회 프로그램상 등을 수상했다.현장에서 뛰던 시절, 자료 수집을 위한 잘 드는 가위와 날선 칼이 늘 그의 곁에 있었다. 충분한 자료를 통해 밀도 있는 구성을 하지 않으면 다큐멘터리의 완성도를 얻기 어렵다는 믿음은 그가 직접 연출하고 제작한 모든 프로그램에 적용됐다.감동이 있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고 믿는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다큐멘터리를 남기고 싶었다.그 역시 회사 문을 닫은 고통을 견디며 1년 반 동안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후배들과 제자들이 스승의 날에 보내온 수많은 카드꾸러미에 감동하며 힘을 얻었다.그의 한글 글씨는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있다. 한 후배가 현업을 떠난 그에게 글씨를 컴퓨터 서체로 만들어볼 것을 권했다. 그래서 시작한 한글 서체 폰트 개발을 위한 붓글씨 쓰기는 지금 즐거운 일상이 되었다. 최근엔 부안마실축제 총감독으로 선임되면서 새로운 일을 맡게 됐다.

  • 기획
  • 김은정
  • 2016.04.08 23:02

완주책박물관 박대헌 관장 "책으로 자생하는 마을…주민과 함께 삼례를 책으로 덮고 싶어"

완주군 옛 삼례역 앞, 7개동의 양곡창고가 변신한 것은 3년 전이다.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온몸으로 지키고 있던 쌀 수탈의 현장 양곡창고의 변신은 놀라웠다. 공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건물의 외형을 입고 들어선 문화공간. 비주얼미디어아트미술관, 디자인뮤지엄, 김상림목공소, 책공방북아트센터, 책박물관, 문화카페까지 6개의 공간은 낡은 건물의 가치를 새롭게 살려낸 모범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관객들을 불러들이는 곳, 책박물관이 있다. 완주책박물관이라고 이름붙인 이곳은 옛 책의 가치를 새롭게 일깨워주는 귀한 공간이다. 사실 책박물관은 수년전 영월책박물관으로 이미 이름을 알렸다. 시골마을의 폐교를 활용해 만든 책박물관은 영월을 박물관도시로 성장시키는 동력이 됐다. 그러나 우여곡절을 겪고 영월책박물관은 문을 닫았다.2013년 완주에 책박물관이 다시 문을 열었다. 책박물관 주인인 박대헌 관장(63)의 새로운 도전이 이곳에서 시작됐다. 그는 고서대학을 열고 의미 있는 책기획전을 이어가면서 관객들의 고서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박관장을 만났다. 봄날인 듯 봄날이 아닌 듯, 찬바람이 부는 봄날이었다. 두툼한 자료집을 들고 나온 그는 허름한 창고 안으로 안내했다. 그 안 풍경이 놀라웠다. 셀 수도 없이 수많은 헌책이 거기 있었다. 10만권은 족히 되는 양이라고 했다. 이 책들은 삼례문화예술촌 바로 옆에 조성되고 있는 책마을문화센터에 들어갈 고서점 호산방에 놓일 책들이었다.오는 4월 완공되는 삼례 책마을문화센터는 박관장의 제안으로 완주군이 조성하는 공간이다. 책마을 기획의 중심에 있는 그는 모든 열정을 이곳에 쏟고 있는 듯 했다. 연고도 없는 삼례에 들어와 오랜 꿈을 희망으로 실현해가는 그의 목표는 무엇일까 궁금했다.삼례를 책으로 덮고 싶어요. 책으로 자생하는 그런 마을. 삼례가 그런 마을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상상만 해도 행복한 풍경이 힘을 내게 합니다.그에게 책이 존재 이유이고 삶 그 자체라는 것을 이해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책박물관이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것 같습니다. 좋은 기획이 이어지면서 삼례예술촌을 알리는데도 좋은 역할을 하고 있고요. 삼례로 오신지 3년째인가요.벌써 그렇게 되었군요. 2013년 6월에 문을 열었으니까요. 책박물관의 기능을 살리려고 노력은 하는데, 여건상 아쉬움이 많습니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책마을이 문을 열면 서로 보완하면서 좋은 공간으로서 역할을 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 그렇게 되어야하고요.-삼례문화예술촌 앞에 조성되는 책마을이 거의 완공단계에 있던데요. 준비는 잘되어가고 있습니까.공식적인 이름은 삼례책마을문화센터입니다. 4월에 개관 예정인데, 전체적으로 진행은 잘되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헌책도 정리되어가고 있는 중이고요. 주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이 과제인데, 주민들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어서 적응해가는 과정에 여러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삼례예술촌에 들어오자마자 고서대학을 열었어요. 고서와 헌책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프로그램을 운영했죠.-책마을의 콘셉트가 헌책방이라고 들었습니다.헌책방이 중심이 되고 다양한 문화시설이 들어섭니다. 한국학아카이브도 구축되고요. 그러나 역시 가장 큰 건물 한 동은 온전히 헌책방들로 구성됩니다.-단순히 책을 볼 수 있는 도서관 기능보다는 실제 헌책을 사고파는 책방으로서의 기능이 강조되겠군요.사고파는 행위가 이루어져야 책마을이 활성화될 수 있으니까요. 필요한 책은 사고, 자기가 갖고 있는 책을 누군가 읽을 수 있도록 내놓는 문화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공간은 생명력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문화적 토대를 어떻게 지속적으로 확장시켜 가느냐가 과제겠지요.-좋은 기획자와 행정이 만나 좋은 사업을 만들어낸다해도 주민들의 외면으로 실패하는 사례를 많이 보아왔습니다. 삼례책마을은 어떤가요.삼례책마을도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과정이 있습니다. 주민들이 새로운 것 낯선 것에 관심을 갖게 하고, 과정을 공유하면서 자연스럽게 주인이 될 수 있게 하는,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주민들의 일상과 삶의 바탕이 제대로 결합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죠.-삼례책마을문화센터의 구체적인 구성이 궁금합니다.건물 4동이 조성됩니다. 그 중 북하우스가 중심이죠. 그 공간에 제가 운영해온 고서점 호산방이 들어섭니다. 여러 헌책방도 함께 들어섭니다. 이 공간은 모두 주민들의 직접적인 참여가 가능한 곳입니다. 누구나 책을 갖고 참여할 수 있어요. 코너를 만들어주고 자신이 갖고 있는 헌책들을 내놓게 되죠. 구체적인 규정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지만 헌책방 코너를 한데 묶어 공동 판매하는 형식으로 묶어 운영해볼 계획입니다. 책방운영의 경험이 없는 주민들도 참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죠. 호산방 운영의 30여년 노하우를 이곳에서 다시 풀어가려고 합니다.-주민들에게도 좋은 기회가 되겠군요. 기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호산방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호산방이 문을 닫은 지난해 많은 분들이 안타까워하는 기사를 보았습니다.작년 9월에 서울 창덕궁 앞에 있던 책방 간판을 내렸으니 호산방을 시작한지 꼭 32년만이군요. 고서점 운영의 한계를 맞은 것이죠. 시대적 한계니 어쩔 수 없지만 고서에 대한 가치를 모르고 대접하지 않는 문화적 환경이 안타깝습니다.-호산방은 고서점계의 혁신을 이끌어온 서점으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박관장님의 안목과 실력이 가져온 결과겠지요. 고서점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습니까.헌책을 좋아해 수집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서점을 열게 되었어요. 고등학교 시절부터 고서에 빠져 책에 둘러싸여 사는 일상을 늘 꿈꾸었거든요.-고서와의 인연은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국어학자 강기진 교수님이 고등학교 때 국어를 가르치셨어요. 수업시간에 수주 변영로 선생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명정 사십년〉이란 책을 꼭 구해서 읽어보라고 하시는 겁니다. 술에 읽힌 일화를 쓴 책인데 쉽게 구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이셨죠. 곧장 청계천 헌책방으로 갔어요. 그때 처음으로 청계천 헌책방을 가봤는데, 두 시간을 뒤져도 없는 거예요. 그 뒤로 매주 찾아갔지만 번번이 허탕 쳤어요. 몇 년 후에서야 그 책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헌책방을 뒤지고 다니다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헌책에 눈이 가더라고요. 그때부터 고서를 사기 시작했죠.-말씀을 듣다보니 책 장정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맞아요. 고서들을 보면서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울까 탄복한 책이 많습니다. 그래서 고등학생으로서는 버겁지만 용돈을 털어 비싼 책을 사기도 했어요.-책을 만나는 방식에 따라 책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이상하게 저는 책의 내용보다 겉이 좋았어요. 내용은 언젠가는 보게 되거든요. 필요한때 찾아 읽으면 되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매스컴의 서평이나 책소개를 보고 책을 사죠. 그리고는 책을 못 읽으면 불안해합니다. 스트레스까지 받으면서 왜 책을 사고 읽는지. 저는 책을 많이 삽니다. 언젠가는 필요할 것 같아서 신간도 사는데, 읽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아요.(웃음)-산 책을 다 읽지 않는다는 말씀이 큰 위로가 됩니다.(웃음) 고서와 헌책은 다른 것인가요.물론이죠. 국어사전에는 고서를 옛 책, 고서적 또는 헌책이라고 정의해놓았지만 그 의미는 좀 다릅니다. 저는 굳이 고서(옛책)와 헌책을 구분한다면 비교적 가치가 있으면서 오래된 책을 고서라 할 수 있고, 가치가 덜하면서 오래되지 않은 책은 헌책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한국고서연구회는 고서를 1959년 이전에 출판된 책이라고 규정하고 있죠. 그러나 저는 고서를 구분할 때 육이오전쟁이 끝난 1953년을 기점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육이오 전쟁으로 수많은 책이 소실되었고, 전쟁 중에는 출판활동에 많은 제약이 따라 출판된 책의 수가 매우 적기 때문이죠.-가치로 본다면 모든 오래된 책이 고서라고 할 수는 없겠군요.사실 고서가 되려면 시간적으로는 30년에서 50년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오래되었다고 해도 고서로서 가치를 발휘하는 책은 많지 않아요. 출판하는 분들에게 종종 좋은 책은 30년 50년 후에 고서점에서 팔리는 책이라고 말합니다. 좋은 책을 기획하는 바탕으로 삼으라는 이야기죠.-호산방은 언제 어떻게 문을 열었습니까.20대를 고서와 고미술 공부로 보내다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고서점이었어요. 1983년 장안평 고미술상가에 고서점을 열었죠. 막상 가게를 열긴했는데 문제가 있었어요. 고서화 몇 점에 그동안 모아둔 고서가 전부였거든요. 고서를 사모으기 시작했죠. 그때까지 사둔 고서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 대부분이 가치 있는 책들이어서 한권을 팔아 두 권을 샀죠. 그리고 다시 두 권을 팔아 네 권을 사는 방식으로 사업을 꾸려갔어요.-한두 권씩 사모은 고서가 바탕이 되어 서점을 살렸군요.그런 셈입니다. 제가 관심을 가졌던 분야가 옛사람들의 필사본과 간찰,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때의 역사 문학 관련 양장본 책이었거든요. 이 책들 덕분에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안정을 찾았어요.-우여곡절이 없지 않았겠지만 호산방은 단연 고서점 명가로 꼽혔었습니다. 그만큼 호산방을 찾는 단골 고객이 많았다는 증거인데요.단골 고객들과의 교유가 호산방을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고서점은 신뢰와 소통이 바탕입니다. 서점 주인은 그만큼 고서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해요. 저는 일찍부터 고서에 눈을 뜬 덕분에 다행히 고서점 주인으로서 역할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어요. 탄탄하게 다져진 교우관계가 오늘의 호산방과 저를 있게 한 셈입니다.-2000년대 초반, 영월 폐교에 책박물관을 만들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영월책박물관은 피폐해가는 농어촌 마을에 문화의 힘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통로였어요. 그래서 영월책박물관이 문을 닫았을 때 안타까웠습니다. 덕분에 삼례에 책박물관이 들어서게 되었지만요.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영월은 오랜 꿈이던 책박물관을 실현하는 터전이었어요. 1998년 폐교된 학교를 임대해서 가족들이 아예 다 이사를 했습니다. 이듬해 책박물관을 열었습니다. 영월에 들어간 것은 사실 책박물관 뿐 아니라 책마을을 만들고 싶어 선택한 곳이었어요. 박물관고을사업을 군에 제안해 함께 중앙정부에 기획안을 올렸죠. 다행히 선정되어 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덕분에 지금 영월에는 스무 개가 넘는 박물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추진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어요. 신뢰가 없어지니 더 이상 견디기 힘들더군요. 개인적으로는 큰 상처를 입었죠. 그래도 이겨내야 했습니다. 호산방 역사가 있었으니까요. 10년 만에 서울로 다시 나왔지요. 프레스센터에 서점을 낸 것이 그 직후입니다.-삼례책박물관과 책마을에 관장님이 더 큰 열정과 의지를 갖게 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사실 처음 완주군에서 저를 찾아왔을 때는 자치단체장의 의지가 없으면 100프로 실패한다고 말했어요. 당시 여러 자치단체가 저를 찾아왔거든요. 그 대부분이 접근하는 방식과 지향이 미덥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완주는 달랐어요. 특히 완주군청 안에 있는 공무원 독서모임에 호감이 갔습니다. 완주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죠.-책박물관을 정착시키고 책마을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어려움이 적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다시 책마을 이야기로 돌아가게 되는데, 헌책방으로 도시를 살려낸 사례가 적지 않으니 기대도 큽니다만 헌책방 거점으로 자리 잡기까지 과제가 많을 것 같습니다.물론입니다. 좋은 기획이 더해지지 않으면 공간의 생명력을 지켜갈 수 없게 됩니다. 헌책방이 중심이 되는 책마을을 제대로 갖추기 위해 호산방의 10만권 소장 서적으로 이곳에서 새로운 역사를 쓰려고 합니다. 희귀본 등 보물급 고서들의 판매가 이루어질 겁니다. 다양한 프로그램도 준비하고 있어요. 세계고서점들이 참여하는 국제북페어 개최도 중요한 사업이죠. 정병규북디자인 학교도 유치합니다. 시간을 갖고 지켜보아주시면 꼭 좋은 결실이 있을 겁니다.-호산방에서 만들어낸 책들도 화제입니다. 특별한 의미와 가치가 돋보이는 책들이던데요.몇 권 만들어내지는 않았지만 호산방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책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처음 내놓은 책이 〈서양인이 본 조선〉이라는 책인데, 상하 두 권에 150만원 정가를 붙였어요. 다들 이해하기 어렵다고들 했죠. 물론 몇 권 제작하지 않았습니다. 팔리겠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어요. 그 책은 영월로 들어가면서 박물관용으로 작업한 책입니다. 내공이 없어 보이면 안 될 것 같아서요.(웃음) 다행히 하버드나 유명 박물관과 미술관 등 국내보다 외국에 많이 팔렸습니다. 출판기념회 대신 전시회를 했는데 지금까지도 책 전시로는 회자되고 있는 전시가 되었습니다.박관장의 고서를 향한 애정의 깊이는 헤아리기 어려웠다. 단호하고 확신에 찬 그의 말들은 신념이 되어 옛 책과 옛 책 사이를 건너다니는 듯 했다. 고서점 운영 30여년. 그의 일상은 여전히 그리고 온전히 옛 책과 함께 놓여있다.● [박대헌 관장은] 영월 이어 완주에 책마을 조성, 국내 대표 고서전문가박대헌 관장의 고향은 서울이다. 고서점 호산방을 운영하면서 우리나라 고서점의 역사를 새롭게 써온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고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독학으로 고서와 고미술을 공부했다.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들려준 수주 변영로 선생의 술이야기에 빠진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명정사십년〉을 구하기 위해 청계천 헌책방을 처음 찾았다. 고서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청소년기에는 도자기에 관심이 많아 도예가가 되기로 마음 먹었던 그는 20대 중요한 시기를 온전히 도자기에 바쳤지만 정작 작가가 되진 못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중앙도서관 서울의 고서점을 순례하는 일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던 그는 1983년, 고서점 호산방을 열었다. 해방 이전 문학책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그는 고서점을 연 이후 옛 사람들의 간찰과 필사본에 주목했다. 이 책들의 가치를 가려내기 위해 한적과 간찰을 공부했다. 남다른 안목과 지식을 얻었다. 많은 전문가들이 그의 내공을 인정하고 신뢰했으며 교유했다. 동국대 정보산업대학원에 신문방송대학에 들어가 출판 잡지를 전공하기도 했다.고서점으로 우뚝 선 호산방이 번창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오랜 꿈이었던 책박물관과 책마을 조성 실현에 나섰다. 강원도 영월의 폐교를 만났다. 1999년 그곳에 책박물관을 열었다. 2000년대 초반, 폐교를 활용한 책박물관은 전국적인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10년 만에 그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자치단체와의 갈등은 그에게 큰 상처를 안겼다. 3-4년 호산방 운영에 전념했으나 많은 자치단체들이 그를 찾았다. 그중 완주군이 있었다. 2013년 완주군 삼례읍에 책박물관을 이전해 다시 문을 열었다. 책마을을 조성할 수 있다는 희망이 그를 완주로 끌었다. 박물관을 열자마자 그는 고서대학부터 운영하기 시작했다. 외로운 싸움이었지만 신념에 찬 그의 도전은 자치단체를 설득시켰다. 완주군이 조성하는 삼례책마을문화센터는 그가 기획하고 제안한 결실이었다.삼례 책마을은 헌책방이 중심이 되는 공간. 고서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그의 꿈은 현실이 되고 있다.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한 〈서양인이 본 조선〉 〈우리책의 장정과 장정가들〉을 펴내 화제를 모았으며 고서와 함께 한 25년을 세월을 정리한 〈고서이야기〉와 〈한국 북디자인 100년〉도 펴냈다.

  • 기획
  • 김은정
  • 2016.03.18 23:02

등단 50년, 남원출신 원로 극작가 노경식 씨 "진정한 영웅은 나라 살리고 시대 살려…위안부 협상 씁쓸"

2월 초입, 햇빛은 눈부셨으나 바람은 찼다. 겨울 한기가 바람에 얹혀 거리를 부유하고 있는 탓인지 한낮인데도 서울 혜화동 대학로 거리는 스산해보였다.80년대, 연극으로 기반을 닦아 성장한 대학로 풍경은 2000년대를 지나면서 예전만 못하다. 연극과 음악과 춤과 온갖 예술장르가 맞서거나 함께 호흡하고 환호하며 관객을 만났던 공간들이 힘을 잃은 탓일 것이다. 그럼에도 대학로는 여전히 예술인들에게 고향과도 같은 공간이다. 80년대와 90년대를 지나 2000년에 이르는 질풍노도의 시절을 몸으로 체험한 연극인들에게는 더욱 그렇다.원로극작가 노경식씨(78)를 이 거리에서 만났다. 등단 50년, 한국연극의 한 축을 이어온 그의 희곡들은 시대와 시대를 건너는 주제와 사실주의 양식을 기반으로 우리 연극을 일으켜 세우고 힘을 갖게 했다.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희곡 철새로 당선한 이후 발표한 작품은 40편. 그의 작품은 서너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대를 만나 생명을 얻었다. 그래서일까 공연되지 못한 채 작품집에 갇힌 서너 편 작품에 대한 아쉬움은 더 컸다. 2007년 국립극장이 의뢰해 썼던 두 영웅도 그중 하나였다.두 영웅은 같은 시대를 살다간 조선의 사명대사와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퇴고한 그 해에 국립극장 무대에 오르지 못하고 묻혀있던 작품을 깨운 것은 지난해다. 문화관광부의 연극인 지원 프로젝트로 만나게 된 무대는 그에게 더없이 좋은 선물이었다. 더구나 이 무대는 한국연극을 대표하는 원로와 중견배우들이 한자리에 서는 의미 있는 자리다.초연이어서 이기도 하지만 함께 나이 들어가는 동료 배우들이 한 무대에 선다는 것이 참으로 반갑고 가슴 설레게 합니다. 어른스러운 무대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도 기대가 크죠. 열연하는 원로배우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극단 스튜디오 반, 극단 동양레퍼토리가 공동제작하고, 문화관광부와 동양대학교가 후원하는 창작 초연작 두 영웅 은 서울 대학로의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2월19일부터 2월29일까지 11회 공연된다. 그의 말마따나 모처럼 진중한 연극 한편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다.인터뷰는 공연장인 아르코 대극장과 연습장으로 쓰이는 대학로예술극장을 오가며 이어졌다.등단 50년, 시대와 시대를 넘나들고 굽이치면서 관객들을 깨우고 감동시켰던 그의 작품들이 그의 삶이 되어 움직였다. 한 길로만 걸어온 삶이 빛났다.-건강해보이십니다. 작품 집필도 여전하신지 궁금합니다.그렇진 않아요. 집필에 대한 의욕도 좀 떨어지고 해서 오랫동안 쉬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해 마음에 두고 있던 작품 하나를 탈고 했어요. 요즈음은 두 영웅 공연을 앞두고 있어서 마음이 괜히 들떠 있습니다.- 두 영웅은 오랫동안 묻혀있던 작품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번이 초연이죠.2007년에 쓴 작품이니까요. 국립극장에서 위촉한 작품인데, 그해에 올리지 못했어요.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여서 그냥 묻히겠구나 싶었는데 기회가 오네요. 사실은 작년이 한일수교 50주년이어서 내심으로는 이 작품을 올릴 수 있는 좋은 때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냥 지나고 말아 아쉬웠거든요.-위안부 문제로 한일외교 협상 결과가 큰 논란을 불러왔습니다. 두 영웅도 들여다보면 한일외교의 면면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겠던데요.시대만 다를 뿐 상황은 거의 비슷하죠. 사명대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협상을 다룬 작품이니까요. 무대는 일본인데, 1604년 조선에서 탐적사로 파견된 사명당이 그곳에서 활약하는 작품을 담았어요. 사명대사의 역할은 말 그대로 적국 일본을 정탐하는 역할과 두 차례의 왜란으로 잡혀간 선량한 조선인들을 귀국시키기 위한 협상의 사명을 띤, 길고도 긴 여정이었죠.-이 두 사람을 영웅으로 내세운 데에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이 이야기는 400여 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도 오늘의 상황과 다를 바가 없지요. 8년 전에 써놓은 이 작품을 꺼내들면서 어떻게 이렇게 변한 것이 없을까 놀라웠습니다. 최근 위안부에 대한 합의 내용을 보면서는 더더욱 그랬지요. 그러나 400여 년 전, 이 두 사람의 외교를 보세요. 화해를 성공시켰잖아요. 양국의 전쟁을 마무리하며 강화를 했습니다. 수교를 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었지요. 결국은 두 사람 사이에 구축된 신뢰로 이어낸 결과예요. 저는 서로에게 신뢰를 갖게 한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고 생각했습니다.-진정한 영웅은 나라를 살리고 시대를 살리죠.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는 그런 영웅을 만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불행한 일이죠.-이번 작품은 제작 배경도 그렇고 의미가 특별하다고 들었습니다.문화관광부에서 원로 연극인들을 지원하는 프로젝트로 무대를 지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영수 남일우 권성덕 이인철 이호성씨 등 원로 중견배우들이 모두 출연해요. 우리들끼리 만나면 오랜만에 어른스러운 연극한번 하자고 말합니다. 가볍지 않은 무대를 보여주고 싶어요.-70대 이상 원로배우들이 한 무대에 선다는 것만으로도 뜻이 있겠습니다.사실 국립극단이 해체되고 재단법인이 된 이후 이런 무대 제작은 어렵게 되었죠. 말이 나왔으니 덧붙이자면 국립극단 단원으로 수십 년 지내왔던 배우들은 지금 모두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어요. 소속이 거의 없죠. 원로나 중견들은 그래도 이쪽 연극판에서 활동하다가 국립극단 소속이 되었으니 돌아갈 곳이라도 있지만 젊은 단원들은 갈 곳이 없어요. 오도 가도 못하는 낙백이죠. 제 아들도 그들 중 하나예요.(웃음) 보기 안타까워서 극단을 하나 만들어보라고 조언도 하지만 현실이 녹록치 않죠.-국립극단 뿐 아니라 무용단도 그렇고 합창단도 그렇고 모두 재단법인화되면서 소속 상근단원제가 아니라 시즌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더군요. 장단점이 있을 텐데요.저는 바람직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국립극단도 기존 단원을 해체하고 법인으로 출범하면서 시즌단원제라 해서 오디션으로 작품별 출연진을 모집합니다. 어떤 점에서는 장점이 있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배우를 성장시키는 틀을 갖고 있는 국립극단의 해체는 아쉽습니다. 연극은 극적인 앙상블이 중요하거든요. 오랫동안 서로 다지고 호흡해야만 이뤄지는 가치예요. 국립단체 해체는 나라의 문화정책이 그만큼 뿌리 없이 흔들린다는 것을 증명하는 예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두 영웅이야기를 좀 더 해보죠. 작품의 소재는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활동하는 것인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서 담판하고 협상하는 과정을 보면 정말 대단했던 분 같아요.물론입니다. 사명대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쟁을 그만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 진짜인지 화해할 뜻이 있는 것인지를 확인하러 간 비공식 사절입니다. 탐적사라고 했지요. 그가 그 역할을 위해 일본에 들어간 것이 1604년이거든요. 1607년 5월에 돌아왔죠. 그 긴 여정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자기 목적을 이뤄낸 겁니다.-그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에 신뢰가 쌓이게 되었다는 것이 신기한 일입니다.그들의 외교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죠. 1607년에 조선에서 일본에 정식 사절을 보냈는데 그것이 바로 조선통신사 제도 아닙니까. 그 기초를 이 두 사람이 만든 셈이죠. 두 영웅이란 제목을 붙인 것은 그 때문입니다.-사명대사를 다시 보게 되는군요.우리에게는 고난의 위기마다 나라를 구하고 시대를 구한 영웅들이 많습니다. 사명도 그중의 한 사람이죠. 그가 비공식 사절로 가게 된 것도 사실은 조정의 내로라하는 관료들 중에서는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거든요. 사료를 보면 사명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임진록에는 그와 관련된 믿기 어려운 전설이 많아요. 그만큼 위대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선생님 작품을 보면 시대의 폭이나 다루는 소재의 폭이 넓습니다. 주로 국난을 겪는 시대상이나 위기가 고조되었던 시대가 배경이죠. 특별히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주목하는 이유가 있습니까.연극은 시대상을 반영하는 그릇과 같습니다. 나는 어려운 시대에서도 고난을 극복하고 나라와 자신들의 삶을 지켜온 민초들의 힘을 높이 평가합니다. 역사와 인물을 다루거나 분단문제를 다루거나, 대도시 사람들의 이야기거나 농촌의 토속성을 다루거나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똑같습니다. 제 작품을 통해 불행한 역사를 온전히 드러내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성찰하게 할 수 있기를 바라지요.-작가로서 현실참여도 앞장서 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75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도 참여하셨었죠. 예술인들의 사회적 발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사회적 발언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작품은 작가의 철학과 사상을 반영하는 그릇이에요. 사회적 발언이 필요한 국면이라면 당연히 나서야지요.-화제를 좀 돌려보죠. 연극의 길로 들어선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전혀 없었어요. 다만 어린 시절 남원에서 하나밖에 없는 극장 뒤에 살았어요. 악극단 공연이 가끔 있었는데, 그때 공연을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극작가가 될 줄은 전혀 상상도 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특별한 계기를 굳이 꼽으라면 대학 1학년 때 황순원 선생님을 만난 것일 겁니다. 선생님이 글쓰기를 독려하셨으니까요.-지난해에 탈고했다는 작품이 궁금합니다.이제 집필에 대한 의욕이 많이 떨어졌어요. 그래도 꼭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는 두 작품이 있습니다. 하나는 4.19를 다룬 것이고 하나는 고향이야기를 쓰는 거예요. 작년에 쓴 신작이 4.19를 다룬 것입니다. 봄 꿈(春夢)이라고 이름 붙였죠.-왜 굳이 419를 다룬 것이어야 했습니까.내가 419세대예요. 대학 3학년 때 419가 나고, 4학년 때 516 쿠데타가 있었죠. 나는 앞장서 치열하게 나서지는 못했지만 참여는 했습니다. 419세대 작가로서 늘 마음 빚이 있었어요. 우리 문학예술사를 둘러보면 6.25나 다른 역사적 사건들을 다룬 작품은 많은데, 419 민주 혁명을 다룬 작품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거든요. 저는 그 이유가 419가 난 1년 후에 516쿠데타가 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어쨌든 419는 묻혔죠. 작품을 쓸 사람이 없게 되었다면 그리고 그 역사적 사건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면 내가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었어요. 작년 겨울에 장막극 봄꿈을 탈고했죠.-어떤 내용입니까.419는 혁명의 주도세력이 따로 없습니다. 국민이 주체였지요. 학생들부터 구두 닦는 거리의 아이들까지. 특정한 영웅이 아닌 레미제라블처럼 민초들이 주인공이었습니다. 그 의미를 다루었어요. 민초들이 엮어내는 큰 흐름, 그 의지로 역사는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이를테면 이름 없는 사람들의 혁명사라고 할 수 있어요.등단 50년의 시간위에 올려진 그의 40편 장막극은 과하지도 빈약하지도 않는 적당한 양이다. 게다가 그 대부분의 작품이 공연되었고, 일본과 프랑스로 원정을 나가기도 했다. 작가로서는 행복한 일이다.누구보다도 연극 보는 일을 치열하게 해온 그에게 오늘의 연극 지형을 물었다.연극 무대가 왜소하고 가벼워졌다고 할까. 연극 뿐 아니라 모든 장르가 다 그렇게 되었죠. 사적이고 표피적이고 규모로는 왜소하고 소극장으로만 몰려들고 소재도 그렇고. 인생의 깊이라든지 사회에 관한 깊은 천착이나 성찰을 담은 작품은 갈수록 줄어드는 것 같아요. 안타깝지요. 그래서 요즈음은 연극 보러가기도 겁이나요. 연극이 보기 싫어질까봐.그래도 그는 희망을 버리진 않았다고 말한다. 그 희망을 모처럼 올리는 두 영웅 객석을 꽉채울 관객들로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다.● [노경식 극작가는] 역사적 상황인물 주로 그려낸 '정통 리얼리즘 극작가'극작가 노경식씨는 1938년 남원에서 태어나 중고등학교를 남원에서 마쳤다. 대학을 가기 위해 고향을 떠났으니 60년 가깝게 타지에서 살았으나 남원 억양을 아는 사람들은 대화만으로도 그가 남원 사람인 것을 금세 알 수 있다.2대 독자였던 그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할머니와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공부 잘했던 그는 서울대 경제과를 지망했으나 첫해 낙방하고 후기였던 경희대 경제학과를 들어갔다. 대학 1학년 때 교양국어를 가르쳤던 황순원 교수가 학보에 기고한 그의 글을 보고 글쓰기를 권했다. 학교의 문화상 공모에 처음으로 희곡을 써서 당선됐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문학은 그가 걷고자하는 길이 아니었다. 그를 키운 할머니는 손자가 은행원이 되는 것을 유일한 소원으로 삼았으나 직장생활에 별로 뜻이 없었던 그는 군대문제까지 여의치 않게 되자 고향에 내려와 있다가 드라마센터에 연극아카데미가 개설되자 망설이지 않고 서울로 올라가 극작반에 들어갔다. 연극과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됐다.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철새가 당선되면서 등단한 그는 출판사 편집자를 거쳐 81년 전업 작가가 되었다. 71년 발표한 달집은 그의 이름을 알린 대표작. 달집은 국내는 물론 일어로 번역되어 일본 공연이 이루어질 정도로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다. 그동안 발표한 작품은 40편. 그의 말을 빌리자면 운이 좋았던 덕분에 3~4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무대 위에서 생명을 얻었다. 무대를 만나지 못하고 묻혀버리는 희곡이 적지 않은 현실에서 그는 그만큼 스스로를 행복한 극작가라고 생각한다.한일관계의 얼크러진 역사를 주목해 역사적 상황과 인물을 그려내는데 남다른 열정을 쏟아온 그는 달집이나 소작지 징게맹개 너른 들을 비롯, 민초들의 고단한 삶을 담아내거나 천년의 바람 서울 가는 길 하늘만큼 먼 나라등 시대상황을 담는 작품을 통해 관객들을 연극무대로 끌어들였다. 한국 현대 연극사를 관통하는 등단 40여년 궤적으로 그는 유치진, 차범석으로 이어지는 정통 리얼리즘 극작가로 꼽힌다.65년 등단한 이후 출판사에 몸담았던 시절을 거쳐 전업 작가로 살아오는 동안 온전히 극작에만 매달려온 그는 백상예술대상 희곡 부문을 세 차례나 수상했으며 한국연극예술상, 서울연극제 대상, 동아연극상 작품상, 대산문학상, 동랑 유치진 연극상, 서울시 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이 그 앞에 놓였다.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극작으로 건재한 그의 작품 하나가 올해 초 무대에 올려진다. 2007년 국립극장이 위촉해 쓴 두 영웅. 작품은 완성했으나 공연되지 못해 텍스트로만 남아있던 작품이다. 두 영웅은 초연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수십 년 같은 길을 걸어온 원로배우들이 함께 호흡을 맞추는 자리라는 점에서 그에게 각별한 의미다. 19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대극장에서 올리는 두 영웅은 사명대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야기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조선과 일본의 두 영웅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영웅이 사라진 시대의 암울한 현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서울연극협회 원로회의 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차범석연극재단 이사, 사명당기념사업회 이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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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은정
  • 2016.02.1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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