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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기술의 융합이 화두다. 기술이 재발견되는 영역에서 문화는 재구성되고 창조된다. 상품의 경쟁력 또한 기술력과 문화적 가치의 융합이 좌우하는 시대. 문화콘텐츠의 힘은 그만큼 더 강해진 셈이다. 기술과 문화가 각각 따로 갈 수 없는 환경이라면 갈 길은 더 분명해졌다. 국가가, 각 도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문화와 기술과의 융합을 기반으로 한 창조산업에 나서는 이유다.올해부터 문화콘텐츠기술학회 회장을 맡게 된 한동숭교수(55, 전주대)를 만났다. 한 교수는 이미 오래전부터 문화와 기술의 융합을 주목해 그것을 학문적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다시 산업화의 길로 물꼬를 트는 일을 주도해온 연구자다. 2010년 호남권 문화기술공동연구센터를 개설하고 운영하면서 문화를 기반으로 한 스마트공간 기술 개발을 이끌어온 그는 전북, 전주야말로 문화융합 기술을 리드하고 풍요롭게 발전시켜나갈 수 있는 환경이라고 단언한다.한교수가 들려준 문화콘텐츠와 기술의 융합 환경을 보니 이미 우리 일상은 지배당하고 있다. 그 속도가 만만치 않다. 낯설지만 받아들이고 적응해야 하는 필연적 환경이라면 기술력에의 도전과 경험의 축적이 우선 필요하다.문화와 기술의 융합이 가져올 우리의 미래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 예견되지 않는 환경에서 인간과 과학 기술의 바람직한 관계는 과연 어떤 것일까 궁금해졌다.그러나 한가지만은 분명해졌다. 문화와 기술의 융합이란 이 도도한 흐름에서 더 인간적이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한 교수는 그 답 또한 인간이 주도하는 과학기술로부터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지금까지의 기술은 어떻게 보면 기술자체적으로 발전해왔다고 봐야한다. 인간과 상호작용하기 보다는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일방적으로 제공해주는 시스템이었다고 하는 것이 맞다. 그것이 대량생산 시대의 한계다. 그러나 지금은 환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수요자를 생각하면서 만들어내는 콘텐츠여야 성공한다. 당연히 인간을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삶과 감성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호남권 문화기술공동연구센터의 사업이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짧지 않은 동안 성과도 많았겠습니다.5년 사업이었습니다. 중간에 힘든 시기가 있었지만 성과가 있었죠.-국가사업 아니었습니까.물론 국가지원사업이었습니다. 그런데 담당부처가 바뀌면서 사업의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렸어요. 애초는 문체부에서 시작했는데, 정부부처가 개편되면서 미래부로 사업이 이관되었거든요. 사업이 힘을 금방 잃게 되더군요.-다른 권역의 상황도 마찬가지였겠는데요.네 권역별로 전국에 3개의 센터가 있었는데, 대구는 문체부에 그대로 남고, 부산과 전주는 미래부로 갔거든요. 그나마 저희는 센터를 스마트공간문화기술공동연구센터로도 역할을 할 수 있게 운영하고 있어서 연구 주제별로 사업을 유치해서 진행하면서 센터의 인력이나 시설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센터는 R&D기능이 중심이었겠죠.꼭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저희는 학교 안에 센터를 두어서 자연스럽게 그러한 기능을 강화할 수 있었지만 부산이나 대구는 기업과 친화적인 부분은 잘 이끌어갈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R&D 기능을 수행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겁니다. 우리는 학교라는 공간을 활용할 수 있었으니 기자재라든가 시설 인력 부분에서 일정하게 연속성을 가져갈 수 있었지요.-문체부에서 처음 이 사업을 수행할 때 목표를 어디 두었었습니까.목표는 지역의 문화기술을 극대화시켜보자는 것이었어요. R&D 네트워크와 산업화에 중점을 두었죠. 사실 이전까지는 문광부 사업이라해도 R&D를 중심으로 한 사업은 대학이 중심이었죠. 그런데 그 사업이라는 것이 작은 랩에서 1년에 2억 원 정도 지원하는 수준이었거든요. 그렇게 하다 보니 이 사업이 개인 연구의 연속선에서 이루어지는 것 이상 되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이제 그 부분을 통합해 권역별 정책 사업으로 바꾸어 목표를 확장시킨 것이죠. 연구사업과 함께 지역 산업을 일으켜 일자리를 창출하고 문화기술쪽에 새로운 산업군을 형성하게 하는 그런 역할을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센터가 개설된 2010년이면 지금과는 환경이 많이 달랐지요.IT와 문화기술 분야의 혁신이 시작되는 시점이었어요. 2009년 11월에 한국에 아이폰이 처음 들어왔거든요.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등장한 셈인데, 저희는 그때 논란이 있었긴 했지만 센터의 별칭을 스마트공간으로 붙였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시작해서 스마트혁명을 이루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 기술을 지역의 기존 전통산업과 연계시켜야겠다고 생각했죠. 지금은 누구나 앱을 쉽게 개발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당시는 도내는 물론, 서울에서도 프로그래머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래도 그 목표를 포기하지 않았죠. 전라북도가 갖고 있는 문화적 특성을 살려 문화관광과 스마트폰을 연결시키는 스마트 혁명을 이뤄내고 싶었거든요. 관련된 기술 업체들을 이전 시켜 그 기업들이 센터를 기반으로 사업을 활성화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문화 관광 전시 분야에서 기술 개발이 이뤄졌습니다.-실제 현장에서 적용한 예가 있습니까.여수 엑스포 참여를 들 수 있겠습니다. 2013년 여수 엑스포를 위해 2년 정도 준비했었죠. 스마트폰과 연결해 인터랙션을 전시기법에 들여놓았는데, 전시 개념을 확장시키는 성과를 가져왔어요. 호응이 높았죠. 또 한편으로는 도내 업체와 함께 관광 앱과 게임을 만드는 일을 진행했고요.-개발된 앱의 활용도는 어떻습니까.자치단체와 함께 이끌었던 사업인데, 앱개발은 성과가 좋았어요. 경기도의 문화관광앱을 제작하는 업체도 있었으니까요. 증강현실기술을 관광앱에 적용한 예가 그리 많지 않았었거든요.-우리 지역의 IT업체 규모나 수준은 어떻습니까.대략 아이티 업체들을 40개정도로 보는데, 규모로 보면 크진 않지만 서울이나 대전 같은 광역에는 못 미치지만 게임분야는 우리지역이 뒤처지지는 않습니다. 최근에는 부산이 게임 산업이 부상하고 있지만 전북이 수준도 만만치 않거든요.-그렇다면 우리지역의 IT업체는 게임분야가 대부분인가요.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는 게임업체보다 SI(system integration, 시스템 통합) 업체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분야의 업체들이 경쟁하면서 성장하기에는 한계가 있는데다 컴퓨터가 발전하면서 일반인들도 쉽게 다룰 수 있게 되었잖아요. 그러다보니 SI업체들이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게 되었죠. 사실 IT산업이 어떻게 가야하는지를 고민해보면 앞으로는 당연히 콘텐츠 쪽으로 가는 것이 맞거든요. 콘텐츠분야의 강화는 세계적인 흐름이기도 한데, 문화콘텐츠의 60%정도가 게임산업입니다. 그렇다보니 게임업체가 늘어나게 된 것이죠.-전라북도의 게임 관련 업체는 어떻습니까.수준이 높은 편이지요. 사실 독자적으로 게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업체가 지역에서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전주와 대구 부산 정도라고 생각하는데, 우리지역은 전주정보영상진흥원이 2000년대 초반부터 모바일과 핸드폰 게임을 만들어내는데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문화기술공동연구센터가 유치되면서 전라북도에서도 게임에 관심을 갖고 지원정책을 폈죠. 작년에는 글로벌 게임센터가 생기면서 서울의 업체들까지 내려오는 환경이 된 겁니다.-기반 선점이 주효했던 것 같군요.물론이죠. 지속성이 중요하니까요. 현실적으로도 우리 지역이 모바일이나 스마트폰 게임 분야를 주목했던 것은 잘된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가령 영화 같은 분야는 어차피 대자본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그만큼 큰 규모의 인프라가 필요한 부분이죠. 그러나 모바일이나 스마트폰 게임은 작은 규모여서 지역에서도 잘 할 수 있는 분야니까요.-문화기술의 확장성은 어떻게 보십니까.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스마트폰만 해도 불과 4-5년 만에 우리 일상 속에 완전히 들어와 있지 않습니까. 이런 환경의 변화를 보면 미래를 어떻게 예측하고 가느냐가 중요한 것 같은데. 지금은 빅데이터와 IOT(Internet of Things)가 화두예요. 거기에 3D까지. 모두 아직은 낯선 분야지만 스마트폰이 그랬던 것처럼 곧 우리 일상에 들어오게 되겠죠.- IOT의 경우는 우리 일상을 엄청나게 변화시킬 것 같은데요.물론입니다. 이미 시작되었죠. 사물인터넷(IOT)은 모든 것에 컴퓨터 인터넷을 집어넣는 방식인데 지금까지는 인간과 컴퓨터가 연결되어 통신 하는 방식이었지만 이제는 컴퓨터끼리, 다시 말하자면 사물끼리 연결해 통신하게 하는 것이죠. 인간이 직접 조작하지 않아도 한 가지만 작동해놓으면 사물끼리 통신을 해서 작업을 진행하는.-갈수록 인간이 할 일은 더 없어지겠군요. 아직은 좀 먼 이야기 아닐까요.그렇지 않습니다. 빅데이터도 그렇지만 IOT는 다양한 분야에 모두 적용되는 것이어서 이미 많은 산업제품들의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자동차가 그렇고, 가전제품도 다 적용되는 분야지요. 전라북도 경우는 농생명에 IOT를 접목시키는 작업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농장에 스마트 팜을 조성하고 스마트 팜을 통해 습도 조절이나 모든 필요한 작업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죠. 이미 기반은 다 개발되어 있는 상태고 다만 얼마나 정확하게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검증이 남아 있습니다. IOT가 콘텐츠 뿐 아니라 생산현장을 바꾸게 될 날이 머지않았습니다.-3D가 가져올 변화도 주목됩니다. 예전에 3D를 이용한 맹아인 앨범을 만든 것을 보았어요. 눈으로 볼 수 없었던 것을 손으로 만져서 느끼게 하는 기술이 놀라웠습니다.3D 프린터는 가격도 아주 저렴합니다. 컴퓨터 쪽에서 연결해서 프린팅하는 방식이어서 누구나가 쉽게 할 수 있지요. 앱이 개발되어 있어서 스마트폰에서도 가능하고요. 모델 데이터가 필요한데, 데이터만 있으면 일반 프린터의 기능과 똑같습니다.-3D의 확산 역시 일상에 큰 변화를 가져 올 것 같아요.어떻게 보면 이제는 물체의 이동이 가능해졌다고 볼 수 있는데, 3D 역시 콘텐츠의 측면 뿐 아니라 생산현장을 완전히 바꾸는 기반이 됩니다. 20세기가 대량생산의 시대였다면 이제는 수용자 한명 한명에 대한 맞춤형 생산을 하는 질적 생산의 시대가 된 겁니다. 모델링 데이터만 있으면 소재 뿐 아니라 색상까지 모든 것이 가능하니까요. 3D프린터로 다리도 만들고 건축도 하고 있어요.-전주가 3D산업에 주목하고 있지 않습니까.3D 프린팅 센터가 유치되었죠. 미래부에서 전국에 4개를 만들었는데, 그 중 하나가 전주에 와있고, 또 하나가 익산니트산업연구원에 있습니다. 3D산업은 전라북도의 미래이기도 합니다. 전망이 밝죠. 특히 전주의 센터는 주로 탄소 소재를 활용한 것인데 새로운 소재개발 뿐 아니라 공예를 비롯한 전통문화와 관련된 부분을 3D프린터와 연결시키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우리의 가까운 미래에 만나게 될 동력들이 흥미롭습니다.VR(virtual reality, 가상현실) 분야도 있는데, 흐름으로 보면 가상현실도 주목해야 할 분야입니다. 정부도 VR을 올해의 핵심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가상현실도 아직은 확장성이 크지 않은 것 같긴 한데 우리 일상과 직접 연결되는 기술이 아니겠습니까.가상현실은 그동안 주로 교육용으로 접할 수 있었죠. 그러나 그 확장성이 커서 문화콘텐츠와 접목시키는 작업이 보다 활발해질 겁니다. 가상현실보다 더 나아간 것이 AR(Augmented Reality), 증강현실인데 이제는 개인적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기술 개발이 진행되고 있거든요.-기술력의 발전을 듣다보니 가까운 미래의 삶이 두려워지기도 합니다.(웃음)그러나 사회는 앞으로도 계속 변화할겁니다. 그러니 그러한 사회의 변화를 읽어내는 일이 중요하지요. 북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보면 이러한 변화를 창의적으로 수용하고 이끌고 있지요. 개인적으로는 그런 나라들이 어떻게 사회시스템을 만들고 운영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인간적인 삶을 추구하면서도 IT 쪽만 해도 유명한 게임 회사들은 거의가 북유럽에 속해있거든요. 자본 중심이 아니라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산업들에 강한 북유럽을 우리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우리나라는 그런 점에서 과제와 한계가 크지 않습니까. IT강국이라고는 해도 콘텐츠의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있는 것 아닌가요.그렇죠. 기술력은 있으나 콘텐츠 측면에서는 미흡한 것이 사실이니까요. 정부가 창조경제를 내세우고 있지만 문제는 창조경제를 이끌어 갈만한 기반이나 체제가 만들어져 있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가 지금 필요한 것은 철학부터 사회적인 시스템을 점검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교육체제부터 바꾸어야 해요. 고등학교 과정만 해도 여전히 문과와 이과를 나눈 시스템을 고수하고 있지 않습니까. 융복합을 내세우면서 교육단계에서부터 이런 식으로 시스템을 가져가는 현장은 모순이죠. 지금 우리에게는 사회 전반에 대한 점검이 필요합니다.한 교수는 전북이 문화기술융합의 새로운 물결을 주도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확신한다. 풍부한 문화자원이 그렇고, 문화적 감성을 지닌 인성이 다른 지역과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가 인터뷰 말미 조심스럽게 내비친 아쉬움이 있다.우리 지역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소극적인 것 같아요. 서로를 격려하는 문화도 아쉽고요. 귀 기울일 대목이다.● [한동숭 회장은] 문화기술공동연구센터 유치 이끈 'IT 과학기술 전문가'한동숭 교수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했다. 전주사람이 된 것은 1993년 전주대 교수로 임용되면서부터다. 전공은 수학. 서울대 자연대에 들어갔을때 부모님은 다른 과 선택을 기대하셨으나 실험을 해야 하는 과는 적성에 맞지 않아 자연스럽게 어릴적부터 좋아하고 잘했던 수학을 택했다. 내친김에 석사와 박사과정까지 서울대에서 마쳤다.전주와의 인연은 대학시절에 이뤄졌다. 학생운동에 몸담았던 그는 농활을 위해 전주 인근으로 내려와 고된 경험을 했다. 오가는 길에 들렀던 전주는 걸판졌던(?) 막걸리와 안주상으로 기억하게 됐다.전주대 교수가 된 이후로는 전주를 떠난 적이 한번도 없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전주사람이라고 생각한다.IT와 스마트 등의 과학기술 분야의 전문가가 된 것은 순전히 관심과 시대의 환경을 빨리 읽어내는 개인적 특성 덕분이다. 그가 교수로 처음 몸담았던 수학과는 전산수학과를 거쳐 게임콘텐츠학과가 되었다.학교 안을 넘어서 지역의 문화콘텐츠기술 역량을 키워 보고 싶다는 의지를 갖고 이 분야를 주목해온 그는 2010년 문체부의 문화기술공동연구센터를 호남권에 유치하는데 성공한 이후 5년 동안 운영해오면서 문화콘텐츠를 기술과 접목시키는 기술 개발을 지원하고 이끌었다. 센터를 중심으로 미디어아트캠프를 만들어 지역 예술인들과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함께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싶었으나 예술인들의 참여가 미미해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도 지역 예술 창작 환경의 변화를 아쉬워 한다.어릴 적부터 노는 것을 좋아했으며 특히 영화와 드라마 보는 것을 즐긴다. 중고등학교시절까지는 입시공부에 매달려 책 읽을 기회가 거의 없었지만 소설읽기를 좋아했다. 대학에 들어가 인문과학 서적을 만나면서부터는 수학보다 이 분야를 더 많이 좋아하게 됐다.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인식과 관점을 이때 갖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문화기술공동연구센터 사업은 끝났지만, 문화기술 융합에 더 큰 관심이 생겨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다.개인적으로는 창조산업 창조경제의 기반을 만드는 일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며 이 지역의 콘텐츠 산업 발전과 인력 양성 기반 조성을 고민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문광부의 콘텐츠랩 사업을 전라북도와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지난 연말, 문화콘텐츠기술학회 회장을 맡게 된 이후 문화콘텐츠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정부에 제안하고 정책화시키는 활동을 활성화할 계획을 갖고 있다.
어쩌면 치미는 슬픔 같은 먼 봄날의 아지랑이/이렇게나마 겨우 늙었다 /강을 건너온 시간이 누군가의 언덕이 되기도 한다/ 두 귀가 순해질 차례다( 마음의 북극성 중)나이 한살 더해서일까. 새해 아침 시를 읽다가 유독 마음 둥글게 만드는 문장을 얻었다. 시인을 떠올렸다. 이 시가 실린 그의 일곱 번째 시집 이름은 〈중독자〉. 늘 따뜻함으로 풍요로운 그의 시와 산문을 생각했다. 거친 말도 온 힘을 다해 다독여 순한 말로 되살려내는 시인의 치열함을 품은 시집의 이름은 그래서 왠지 낯설었다.모악산을 떠난 지 13년째. 경남 하동군 악양면 동매마을 지리산 자락에 살고 있는 박남준 시인을 만나러 갔다.신경림 시인의 말처럼 자연 속에서 자연에 순응해 사는 게 아니라 스스로 그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하는 시인을 만나 나이를 더하고 이제 두 귀가 순해질 차례를 기다리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겨울의 고비에서도 햇살은 마치 봄날 마냥 넓게 퍼진 날이었다.동매마을 맨 윗자락에 자리 잡은 시인의 작은 집, 지붕 아래 곱게 깎아 말린 곶감이 예뻤다.시인은 어느새 우리 나이로 예순이 되었다.나이 한살 더하는 일이 나는 참 기분 좋아요.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나이 먹는 것이 유난히 즐겁고 호기심이 생기거든요.들을 이야기가 참 많겠다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인터뷰 예정시간을 넘기고도 이야기는 차고 넘쳤다. 그의 시력 30년을 돌아오는 동안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하는지도 다시 알게 됐다. 가슴 따뜻해지는 시인의 이야기를 덜어낼 것도 더할 것도 없이 그대로 전해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이유를 독자들도 알게 되었으면 참 좋겠다.-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올해 쉰아홉, 벌써 예순이 바로 앞이더군요.우리나이로 예순, 내년이 환갑이죠. 나는 60이 되는 나이를 정말 기다려왔어요. 내가 그 나이를 먹을 수 있을까 궁금했죠.-늙는다는 것을 기다렸다는 말씀인가요.그렇죠. 설레기도 하고. 아름다운 관계란 시에 그 마음을 담기도 했어요. 돌도 늙어야 품안이 너른 법 오랜 날이 흘러서야 알게 되었지 그래 아름다운 일이란 때로 늙어갈 수 있기 때문이야 라고.-나이 이야기부터 꺼내는 것이 어떨까 싶었는데, 이렇게 반색을 하시니.내가 마흔 살이 될 때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너무 궁금했어요. 그래서 서른아홉이 끝나는 12월 31일 잠들기 전에 삽십대의 마지막 내 얼굴을 기억하려고 거울을 오랫동안 들여다봤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자마자 얼른 거울을 보았어요. 그랬더니 똑같더라고요.(웃음)-나이 이야기는 끝이 없겠군요. 주제를 바꾸어야겠습니다. 들어올 때보니 예고 없이 불쑥 불쑥 찾아오는 독자들을 향한 경고문이 없어졌던데요. 지금은 그런 무례한 손님들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너그러워지신 것인지.여전하죠. 그리 너그러워진 것은 아닌데 나이 들어가니 나이 값을 좀 하고 살아야겠다 싶더라고요.-건강이 나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심근경색이었다고 했던가요.3년 전에 불안정성 급성 심근경색으로 고생을 했지요. 지금도 자유롭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절박한 상황은 아니어서 치료중입니다.-수술을 받지 않는다고 하셔서 지인들이 걱정이 많았다고 하던데요.당초 한 번의 수술이 더 남아 있었는데 마음으로는 순리를 거스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수술을 않겠다고 작정했거든요. 그런데 주위에서 하도 성화를 하니 정말 마음이 편하지 않았어요. 어느 날 수경스님과 연관스님이 오셔서 수술비를 놓고 가셨어요. 적은 돈도 아니고. 그런데 수술을 안 할 생각이었으니 그 돈을 빨리 해체해야겠더라고요. 네팔에도 보내고 시민단체도 보내고 다 나누어 없애버렸죠.-괜찮으셨습니까. 수술비까지 그렇게 없애셨다면.그런데 작년에 일이 났어요. 시집이 나오고 여기저기 강연까지 다니면서 몸이 좀 안 좋아진 것이죠. 스님들이 화를 내시더라고요. 기껏 수술비 마련해주었더니 다 퍼주었다고요. 그래서 넉달동안 수술비를 채워 병원에 갔어요.-작년에 등단 30년을 맞아 펴낸 시집 〈중독자〉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지역 출판사에서 펴낸 것만으로도 화제가 되던데요.나는 보통 원고를 다 쓰고 퇴고도 다해놓고 출판사를 알아봅니다. 지금껏 그래왔죠. 이 시집도 출판을 앞두고 원고를 가지고 다니면서 그때그때 수정하고 퇴고하고 있던 때인데 시낭송 행사가 있어서 함양에 갔다가 진주 수목원의 납매(臘梅)가 피었다는 기사를 보고 지인들과 함께 진주를 가게 되었어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진주문고 사장을 만났지요. 진주문고는 오래전부터 좋은 일을 많이 해온 곳인데, 들어보니 출판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겁니다.-지역 출판사는 더러 있지 않습니까.출판사를 만들려는 뜻이 특별했어요. 진주문고가 30년 되어 가는데 지역의 문화환경을 돌아보니 인문학 전문 출판사가 없더랍니다. 이런 환경을 가진 도시를 문화도시라고 할 수 있겠는가 싶었대요. 30년 동안 진주 시민들의 힘으로 서점을 키웠으니 이제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들으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어요.-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도둑 제 발 저린다고 그동안 지역문화가 꽃피우려면 지역 문화예술인들이 지역에서 활동을 하고 그 결과물들이 그 지역에서 무대에 올려지거나 출판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다니면서도 정작 시집 출판은 이름 알려진 서울의 출판사에서 해야 한다고 여겨왔었거든요. 위선이었어요. 생각해보니 얼굴이 뜨거워지더라고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결정했어요. 출판사의 첫 작품이 됐죠.-이 시집에 실린 마음의 북극성이 유독 마음에 와 닿던데요.재작년 세월호 사고가 4월 16일에 났는데 20일이 곡우여서 찻잎을 땄어요. 차를 비벼 항아리에 넣고 그날 저녁 발효되는 향기를 맡으며 차가 되어가는 과정을 들여다보는데, 문득 차를 마셔서 뭐하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세상은 말도 안 되는 작태로 돌아가는데 나 혼자 향기로운 차를 만들고 마시는 일이 갑자기 의미 없어지는 거죠. 자괴감으로 가슴이 미어져왔어요. 지금 나이를 어떻게 먹고 있나하는 생각도 들고. 그러다가 다시 마음을 바꾸었어요. 향기로운 차를 만들어 사람들과 나누고 이 향기로운 차가 향기로운 말이 되고 향기로운 소문이 되어 세상을 떠돌고 그래서 세상의 귀가 순해지는 이야기가 들려지고 떠돌게 되면 좋겠다는. 아 그래! 그럼 이 차 이름을 이순(耳順)이라 짓자 생각했어요. 그날 쓴 시가 마음의 북극성 입니다. 그래서 이순이란 부제가 달렸죠.-각별한 의미가 담겨 있군요. 강을 건너온 시간이 누군가의 언덕이 되기도 한다는 부분이 있는데, 내가 예순 살 쯤 되면 누군가의 등을 기댈 언덕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자락이 되어서 살아야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쓴 시죠. 사실은 시집 이름을 마음의 북극성으로 할까 고민했는데, 중독자에 밀렸어요. 그래서 시낭송을 가면 제목이 되지 못한 이 시를 낭송합니다.-최근 강연을 자주 나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좀 뜻밖이었습니다.강연은 제게 새로운 환경이죠. 지난 대선 끝나고 사실 패닉 상태에 빠져 지냈어요. 정신을 차려야겠다 싶어서 산더미처럼 쌓인 나무를 이틀 만에 도끼질을 해서 다 팼어요. 눈뜨면 나가서 허기질 때까지 도끼질을 했죠. 그 즈음 한 고등학교 아이들이 집으로 찾아와 이야기를 듣는 일정이 있었어요.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그래도 해줘야 한다고 해서 아이들이 찾아 왔는데, 이야기를 하다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울음을 터뜨렸어요. 주체 할 수 없이 터져 나온 울음에 아이들이 조용하더라고요. 그 적막감에 고개를 들어 둘러보니 아이들의 표정이 너무 숙연했어요. 그런데 한 아이가 손을 들더니 선생님 저희들이 2년 후면 투표권이 생깁니다. 저희들 위해서 강의를 계속해주세요. 라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또 울어버렸어요. 희망이 없던 나라의 희망을 본 것이죠. 그래서 힘들어도 열심히 강연을 다니게 됐어요.-무슨 이야기를 하십니까.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하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은 것인가. 행복이란 뭘까. 다양한 곳 다양한 직업을 이야기합니다.- 동네밴드는 잘되고 있나요. 밴드를 만든 배경도 궁금합니다.2008년에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을 공약으로 내세웠죠. 그때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시인으로서 자괴감이 생기더라고요. 말도 안 되는 폭력 앞에 방패가 되어주거나 창이 되어주지 못하는 시인. 이렇게 나약한 것이 시고 시인이구나 하는 생각이었죠. 다시 걷기 시작해 104일 동안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서 만든 것이 동네 밴드예요. 그때만 해도 동네 사람들과 친해지지 못했을 때인데, 몇사람이 찾아와 농산물 직거래 장터를 만드는데 가수를 초청하고 싶다는 거예요. 예산을 물었더니 200만원, 조금 무리하면 300만원까지 마련할 수 있다는 거예요. 황당한 상황이었죠.-우선 예산이 턱없이 부족했겠군요.물론이죠. 그래서 왜 가수를 굳이 초청하려고 하느냐고 물었더니 재미있게 놀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들이 밴드를 만들어보라고 권했죠. 사실 그냥 별 기대 없이 한 이야기였어요. 그런데 며칠 후에 전화가 온 겁니다. 밴드 연습하는데 놀러 안 오냐고.-시작이 흥미롭군요.집에 있던 기타를 둘러매고 갔는데 연습실 앞에서 들어보니 실력이 예사롭지 않은 거예요. 기타를 숨겨놓고 맨몸으로 들어갔죠. 밴드에 참여하고 싶어서 보컬은 안뽑냐고 했더니 오디션을 보래요. 3곡을 불렀는데 안 되겠다고 해서 돌아왔지요.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 자꾸 섭섭해지더라고요. 갑자기 제가 갖고 있던 하모니카가 생각났어요. 앞에서 연습을 좀하다가 전화를 했죠. 마침 두 곡 정도에 하모니카가 간주로 들어간다고 해서 다시 갔어요.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하모니카 신동이라며 동네밴드에 겨우 끼었죠. 첫해 무대에서는 겨우 두곡하고 내려와야 했어요. 안내려오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온갖 잡다한 악기를 스스로 구해 어떻게든 끼어들었죠.(웃음)- 동네밴드하시면서 무엇을 얻습니까.첫째는 문화를 일방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것이죠. 농촌은 어떻든 문화를 수용하는 입장이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문화를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리고 단순한 수용이 아니라 스스로 연주하고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힐링도 되고 자긍심이 생기는 것 그것이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경제적인 삶이 우선되는 시대에 돈을 쓰지 않고 벌지 않는 삶을 택하셨는데 지금도 전 재산은 통장에 들어있는 관 값 200만원이 전부인가요.물가가 올라서 통장 잔고도 300만원으로 올렸어요. 지금도 그 이상으로 돈이 생기면 빨리 나누어 없애야 마음이 편안합니다.-그렇게 나누는 삶을 지켜가는 일이 쉽지는 않을 텐데요.어렵지도 않은 일입니다. 서로 살아가는 방식 가치가 서로 다를 뿐이죠.-그런 나눔이 행복하십니까.물론이죠. 저는 가끔 스스로에게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냐고 묻습니다. 명색이 시인이니 한편의 시, 마음에 어느 정도 흡족한 시를 썼을 때가 세상 어느 기쁨보다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라고 답하죠. 또 한 가지는 내가 가진 삶,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든 간에 그것을 세상에 내놓고 나누었을 때 그때 가장 행복하다고 답합니다. 내가 아직 나눌 것이 있다는 것, 나누는 삶을 아직 살아내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짧지 않은 시간동안 그의 이야기는 내내 즐거웠고 감동스러웠고, 가슴 먹먹해지게 했다. 인터뷰 말미, 그에게 시인의 존재는 어떤 것이어야 하냐고 물었다.혁명가가 되어야 해요. 시대를 제대로 읽어 내는 올곧은 시정신을 가진 혁명가를 늘 꿈꿉니다.이런 막막한 시대에서도 혁명을 꿈꾸는 시인, 우리 옆에 그런 시인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박남준 시인은] 마을공동체 운동대운하 반대욕심 없는'지리산 시인'박남준 시인은 1957년 전남 법성포에서 태어났다. 일찍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큰누나가 살던 전주로 대학을 오면서 전주 사람이 됐다. 전주대 영문과에 입학했지만 대학생활에 대한 기억은 별반 없다. 우리 역사와 현실에 눈뜨게 된 청년 시절의 일상이 온전히 민주화 현장과 길 위에 가있었기 때문이다.1984년 〈시인〉지를 통해 등단하면서 시인이 됐다. 20대에서 30대로 건너는 길, 그는 가난했으나, 가난할수록 세상을 보는 눈은 뜨거워졌다. 아무리 사소한 것에도 부정 부당한 것을 용납지 않는 성정은 단호한 결기를 더 단단하게 다졌다.80년대 말, 아주 짧게 방송작가 생활을 했다. 궁핍한 삶(?)의 끝에서 선택한 길이었으나 시가 아닌 방송 원고를 쓰는 일은 궁핍함 보다 더 큰 고뇌를 안겼다. 다시 전주로 돌아와 문화공간 운영을 맡았으나 1년 만에 전업시인으로 돌아갔다. 모악산 기슭에 거처를 마련한 즈음이었다. 산중에서 살면 돈을 쓰지 않는 삶이 가능하겠구나. 그렇다면 돈을 벌지 않아도 되겠다.는 깨달음을 그때 얻었다. 최소한의 양식과 음악과 책과 자연으로 온전히 가벼워진 삶을 얻은 모악산 생활은 시인에게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다.언제부터인가 원고청탁이 밀려들어 정신 차릴 수 없었다. 경제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경계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통장에 내 몸을 누일 관하나 값만 있으면 되겠다는 생각은 그래서 얻은 답이다. 얼마 전 물가 인상을 고려해 300만원으로 올리기까지 오랫동안 그의 전 재산은 통장에 든 200만원이 전부였다.모악산 시인이 된지 12년 만에 지인들의 권유로 경남 하동군 악양면 동매마을로 이사하면서 지리산 시인이 됐지만 정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가벼워진 삶에 마을공동체 운동이 더해져 뜻 맞는 친구들과 소박한 일상의 행복을 함께 나누며 살 수 있게 됐다.2004년 도법 수경스님과 생명탁발순례를 떠나 제주도까지 꼬박 1년을 걸었다. 이 땅에서 시인으로 살면서 걸어야 하는 길은 무엇인가를 묻고 또 물었다. 2008년 대운하 정책이 발표되자 잠 못 들던 시인은 다시 길 위에 섰다. 한강과 낙동강, 영산강, 금강을 그리고 다시 거슬러 한강까지 104일을 걸었다.그해 겨울, 마을 늙은 청년들과 작당해 동네밴드를 만들었다. 지금은 꽤나 이름을 얻어 여기저기서 부름을 받는 동네밴드에서 그는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무대를 지킬 수 있는 하모니카나 잡다한(?) 악기를 도맡고 있다.1990년 첫 시집 〈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를 낸 이후 5년을 주기로 〈풀여치의 노래〉,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적막〉, 〈그 아저씨네 간이휴게실 아래〉, 〈중독자〉까지 일곱 권의 시집을 냈으며 산문집 역시 〈쓸쓸한 날의 여행〉를 시작으로 〈작고 가벼워질 때까지〉 〈별의 안부를 묻는다〉 등을 5년 주기로 펴냈다.이제는 악양에 뼈를 묻어도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전주를 오간다. 시도 때도 없이 그를 불러들이는 친구들의 성화도 있지만, 시인에게는 전주가 늘 그리움의 대상인 탓이다.
어느 매체의 인터뷰였을 것이다.사람에게는 중요한 두 가지가 있다. 생명과 권리가 그것이다. 임상의학이 생명존중의 의학이라면 법의학은 권리존중의 의학이다. 한국 법의학의 살아있는 역사 문국진 박사가 책에서 읽은 내용을 소개한 대목이다. 법의학의 개념을 그때 이해하게 됐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법의학의 영역이 낯설기는 마찬가지다.법의학자는 죽은 자들의 사인과 과정을 과학적으로 찾아내고 분석해 객관적 근거로 규명하는 일을 한다. 단순한 기준으로 보자면 사인을 밝혀내는 역할이지만, 법의학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왜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가의 과정을 규명하는데 더 큰 무게를 둔다. 대개의 경우, 법의학자들이 분석한 죽음의 과정은 우리가 약속해놓은 사회적 질서로부터 이탈한 국면들이다.전북대 의학전문대학원 이호 교수(47)를 만났다. 이 교수는 전북에서 유일한 법의학자다. 그가 매체를 통해 우리와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대형 참사나 충격적인 사건사고로 죽은 자들의 사인을 규명하는 검안의이자 법의학자로서 그의 활동이 그만큼 두드러져있다는 증거다.이 교수를 만나러가는 날은 햇빛이 좋았다. 다행이었다. 어둠을 끌어들이는 죽음을 품어 다시 세상에 내놓는 법의학자의 이야기를 밝은 기운으로 들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의 많은 시간을 죽은 자와의 만남으로 이어가는 이교수의 공간(연구실)은 의외로 소박(?)했다.20년 가깝게 부검의 현장을 지켜온 이 교수가 들려주는 법의학 이야기는 날생선의 비늘처럼 조밀했다.법의학의 수준은 한 사회의 건강성을 평가합니다. 죽은 자를 통해 우리는 교훈을 얻게 되지요. 죽은 자의 사인을 규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죽음을 맞았다면 사회적 시스템 안에서 예방을 할 수는 없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법의학이 해야 할 중요한 역할입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얻은 교훈을 사회가 수용할 자세가 되어 있는가의 문제인데 안타깝게도 한국사회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법의학자로서 사회에 기여하는 일을 고민해온 그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여러 번 반복만 말이 있다. 모투이 비보스 도슨트(Mortui vivos docent), 망자가 산자를 가르친다.숱한 부검의 현장으로부터 그가 낚아 올린 이야기는 선명하면서도 무거웠다. 그만큼 사회를 향한 메시지의 울림이 컸다.-주로 연구실에 계십니까.그렇죠. 대부분의 일상이 연구실과 법의학교실에서 이뤄지니까요. 오늘 오전에도 부검이 있었어요.-부검이 이곳에서 직접 이뤄진다니 놀랍습니다.부검은 통상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해야 하는데 국과수의 인력이 부족한데다 우리 지역에서 변사사건이 발생하면 광주까지 가야하거든요. 관계되는 인력까지 함께 가야하니 시간적 물리적 소모가 크죠. 그래서 국과수와 전북대가 MOU를 했습니다. 웬만한 사건은 전북대에서 할 수 있게 되었죠.-그 과정이 꽤 복잡하겠죠. 일이 많을 것 같습니다.오늘 같은 경우는 오전 9시에 부검이 끝나고 나면 의뢰해온 검사를 거쳐 감정서를 씁니다. 밀린 감정서도 서야 하고, 제가 부검한 사건이 법정에서 다툼이 있는 경우는 사실관계 질의에 대한 답변서를 쓰거나 제가 하지 않은 경우에 대한 법의학 자문도 해야 해서 물리적인 일이 많은 편입니다.-대중들은 드라마나 영화로 만나게 되는 법의학자를 상상하게 되는데, 상당히 차이가 있겠는데요.현실은 드라마와 많이 다르죠.(웃음)-최근 대형 참사나 충격적인 사건들이 이어지면서 법의학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낯선 영역입니다. 우리 일상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도 인식이 부족한 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법의학은 한 사회의 건강성을 평가하는 지표가 됩니다. 단순히 죽은 사람의 사인을 규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죽음을 사회적으로 예방할 수는 없었는지를 분석합니다. 만약 사회적 시스템이 잘못되어 한 사람이 죽음을 맞았다면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하는 책무를 안게 되겠지요. 법의학이 사회에 기여하는 역할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회가 법의학의 기능을 통해 발견된 잘못된 시스템을 바로 잡을 자세가 되어 있느냐의 문제인데, 한국사회는 그런 수준에 이르지 못했어요. 안타까운 현실이죠.-법의학은 권리존중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생명을 지키는 일도 중요하지만 권리를 지키는 일의 가치를 추구하는 법의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요.법이 존재하는 이유는 자기보존에 있습니다. 사회 안에서 내가 죽음을 원치 않았는데도 죽음이 발생했다면 그 사회는 법에 의해 철저한 규명과 그 원인행위를 한 범법행위자를 처벌해야 하죠. 그것이 개인이 사회와 맺은 약속이니까요. 일반적으로 의사들은 신체에 대한 질병을 진단하고 병의 경과를 막아주거나 지연시키거나 치료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생물학적 죽음의 생사에 관한 것이죠. 그러나 법의학을 하는 의사는 죽은 자들의 사인과 과정을 과학적으로 찾아내고 분석해 객관적 근거로 규명하는 일을 합니다. 그 과정에서 죽은 사람이 권리침해를 당했는지의 여부, 사회적으로 예방할 수 있었음에도 그것을 놓쳤다면 무엇이 문제였는가를 규명해내는 역할을 하지요.-세월호 참사 같은 대형 사건이 반복되는 사회에서 법의학의 역할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우리 사회에서는 왜 그런 악순환이 지속되는 것일까요.세월호를 비롯해 우리가 경험한 대형 참사는 우리가 가야할 길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그 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세월호의 경우만 봐도 한사람의 문제로만 부각시키지 않습니까. 유병언이란 개인만 없었으면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건강한 사회라면 유병언 같은 사람이 100명쯤 있다해도 이런 사고는 나지 않아야 합니다.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예죠. 그만큼 사회적 안전망이 약하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또한 외국의 법의학과 한국의 법의학 차이이기도 합니다.-외국의 경우는 어떻습니까.법의학이 안착된 나라에서는 사망에 접근할 때 누가 죽였는가를 먼저 찾는 것이 아니라 예방이 가능했는가를 먼저 찾습니다. 이 죽음을 우리가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호주 멜버른 사건의 예가 있습니다. 클럽에서 시비가 붙어 사망한 사건인데 우리나라 같으면 신고한 사람과 목격자가 있고, 증거도 있으니 부검에서 장기파열의 소견이 나오면 끝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호주에서는 거기서 끝나지 않거든요. 이 사람의 사인이 복부파열인데, 왜 6시간 만에 사망했는가. 그것을 추적합니다. 이 사람이 병원에 실려 왔을 때 머리 쪽 CT를 찍었어요. 넘어뜨렸다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만약 이 사람의 복부를 먼저 점검 했으면 살릴 수도 있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이죠. 사람을 사망하게 한 개체의 폭력과는 별개로 응급시스템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겁니다. 이 사건으로 멜버른에 있는 구급대원과 상황실 직원들은 모두 보수교육을 받았고, 의회를 움직여 상황실에 간호사 출신을 배치하게 만들었습니다. 법의학이 사회에 기여하는 기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세월호 사고를 되돌아보면 참으로 아쉬움이 큰데요.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가 불러온 결과 아니겠습니까.물론이죠. 왜 배가 침몰했는지를 주목하고 추적하는 대신, 처벌할 사람 처벌했고 보상했으니 막대한 예산을 들여서 세월호를 끄집어내면 뭐하냐는 식으로 덮어버리면 언젠가 배는 또 뒤집어지는 상황을 맞게 될 수밖에 없겠죠. 대구 지하철 참사도 보세요. 기관사가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들어와 혼자만 나가면서 승객들에게는 기다리라고 했거든요.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법의학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거든요.-화제를 좀 돌려보죠. 우리나라의 경우 법의학연구소는 얼마나 있습니까.국과수 말고는 없죠. 대학에는 물론 없고요.-법의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법의학연구소 같은 기구의 확산이 매우 중요할 것 같은데요.그렇습니다. 그런데 아직 우리 현실에서는 어려운 일이예요. 제가 저희대학 산학협력단에 기구를 설치하려고 시도했었는데, 여러 가지 행정적 절차에 의해 포기하고 말았어요.-국내의 법의학자는 몇 명이나 됩니까.50명도 채 안됩니다. 법의학자의 수가 적은 것은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결국은 권리에 대한 시민의식이 변해야 합니다. 거기에 우리사회의 1프로 미만의 사람들이라고 하는 엘리트 집단이 선봉에 서줘야 법의학이 사회적으로 안착할 수 있습니다. 법의학은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시민정신과 시민의식, 제도가 탄탄한 인프라로 구축되었을 때 제 길을 갈 수 있습니다.-그렇다면 우리 법의학의 발전 가능성은 없습니까.방법이 없진 않겠지요. 그러나 민주국가라고 하는 기본 전제는 입법을 하는 사람들을 우리 손으로 뽑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입법자로 뽑힌 사람들은 입법 활동을 제대로 해줘야하고요. 그런데 우리 정치판은 그런 건강성을 찾기 어렵거든요.-죽음 앞에서는 누구라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한 사회의 시스템은 건강하게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죽음 앞에서 얻어내는 교훈을 잘 구현해내야 하지요.-법의학자의 길은 어떻게 들어서게 되셨습니까.운명 같습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학생운동을 하게 됐죠. 1989년에 충남대에서 전대협 집회가 있었는데, 그때 민주화운동의 전면에 나섰던 조선대 이철규씨의 시신이 발견되었어요. 충남대 집회에 그의 시신이 도착했는데, 온몸은 파랗고 눈은 뜨고 있고, 코에서는 피가 나오고, 정말 처참했습니다. 실종 된 후 보름이 지나 발견되었죠. 고문치사. 그런데 부검의는 사인을 익사라고 발표했습니다. 법의학을 공부하겠다는 마음은 그때 결심했습니다.-당시 국과수의 결과 발표는 공분을 일으켰었죠.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였어요. 그때 이런 학문이 있다면 사회에 기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부터 대학으로 다시 돌아가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법의학만을 생각하고 왔지요.-법의학 분야에서도 특별히 주목하고 있는 영역이 궁금합니다.제가 생각하고 있는 분야는 예방법의학입니다. 임상법의학이라는 이름으로 2007년에 호주 멜버른에서 1년 동안 공부를 하고 왔어요. 이후 임상법의학을 포함해 예방법의학을 주목하기 시작했지요. 개인적으로는 일련의 과정이 사회학 관점으로 바라보는 학문으로 이어져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다보니 사회의 안전망 구축에 관한 부분도 제가 추구하는 모토가 되었어요.-예방법의학이란 사회적 안정망 구축과 직접 적인 관계가 있겠습니다. 이런 일은 입법기관에서 치열하게 고민해 입법 활동으로 이어낸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겠는데요.다시 강조하지만 입법 활동은 우리가 투표를 통해서 선택한 사람들이 활동의 중심에 섭니다. 그러니 그들은 시민의 안녕을 위해서 기본적으로 이런 부문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야할 의무를 갖고 시작해야 합니다. 시의원이나 도의원이라면 조례를, 국회의원이라면 법률에 문제 해결을 위한 내용을 담아내줘야 할 시대적 의무가 있다는 것이죠. 그것이 곧 후손들을 위한 의무이기도 하고요.-혹시 지역 단위에서도 이런 시스템 구축이 가능할까요.행정적 절차는 잘 알지 못하지만 지역의회 의원들이 관심을 갖고 자치단체장의 의지가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재정자립도도 중요하지만 주민들의 안전을 가장 우선시하는 도시가 된다는 것,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죠.이 교수에게는 얼마 전에 법의학자로 들어선 제자이자 후배가 생겼다. 덕분에 전북에서 유일한 법의학자란 별칭 대신 전북 1호 법의학자가 되었다. 법의학자로서 가는 길에 더 큰 희망이 생겼다는 그는 인터뷰 말미, 이제 동료교수가 되는 후배가 본질적인 법의학, 우리가 이야기 하는 범죄와 연관된 사법부검을 중심으로 연구를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길을 가려고 하는가.사회적 안전을 중심으로 한 예방법의학을 연구하고 싶어요. 임상법의학도 그렇고요. 제가 강조하는 사회적 안전 시스템 구축은 뛰어난 한사람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렇게 시작해서도 안 되고.법의학자로서 사회적 기여를 삶의 목표로 삼은 이 교수의 존재가 미덥다.● [이호 교수는] 전북 1호 법의학자대검찰청 자문위원 활동이호 교수는 1968년 임실에서 났다. 네 살 때 전주로 이사를 왔지만 교육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여러 도시로 전학을 다녔다. 이과를 선택했던 고등학교 때는 누구나 그러하듯이 성실하게 공부했고 덕분에 성적이 좋았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 전북대 의대에 입학했으나 사회적 현실에 눈을 뜬 그는 곧바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어렸을 적부터 책읽기를 즐겼던 그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우연히 찾게 된 사회과학서점에서 현실을 바로 보게 하는 책들을 만나면서 사회의식을 다졌다. 대선을 앞두고는 공정선거감시단에서 활동하면서 현장을 지켰다. 다시 학교로 돌아온 것은 전남대 이철규 열사의 시신을 접하고 나서였다. 사회에 기여하는 의사, 그것도 법의학자가 되겠다는 꿈은 그때 다졌다. 예비의료인으로서 의료인운동도 열심히 했다. 건강한 의료운동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의료인 내부로부터 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련과정을 마치고 병리전문의 과정을 거쳐 국과수로 들어갔다. 98년이었다. 1년에 400건이 넘는 시신을 부검하는 생활이었다. 2004년 모교인 전북대 의대 법의학교실에서 그를 교수로 불렀다.그는 당시 호남에서 유일한 법의 학자였다. 전남대와 조선대에 법의학교수가 자리 잡으면서 전북 유일의 법의학자가 되었지만 최근, 제자이자 후배인 노상재 박사가 교수로 임용되면서 도내 1호 법의학자로 자리를 바꾸었다.2007년에는 예방법의학 공부를 위해 호주 멜버른 빅토리아법의학연구소에서 1년 동안 공부하고 돌아왔다. 이후 예방법의학과 임상법의학은 그가 앞으로 해나갈 연구의 중심이 되었다.돌아보면 법의학을 공부하고 연구해온 길은 외로웠다. 전국 12만 명 의사 중 법의학자는 여전히 50명도 채 안 되는 현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는 어려움 모르고 법의학자의 길을 걸어왔다고 말한다. 법의학이란 분야가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바닥을 칠만큼 척박한 분야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죽음으로 부터 배우는 학문인 법의학의 길에 들어선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사회적으로 안전을 보장하는 시스템 구축에 누구보다도 관심이 많은 그는 시민정신과 시민의식이 사회의 건강한 시스템을 이끌어낸다고 믿는다. 병원의 고객지원실장을 맡아 의료사고나 민원 해결에 앞장서는 일을 미루지 않는 것도 같은 연상에 있다.방송대학에 들어가 법학석사를 마칠 만큼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는 전북대 의학전문대학원 법의학교실 주임교수를 맡고 있으며 대한법의학회 학술이사이면서 대검찰청 법의학자문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생태에세이 〈나의 생명수업〉이란 책을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았다. 저자는 7년 전, 〈큰오색딱따구리의 육아일기〉를 펴내 주목을 받았던 생명과학자 김성호 서남대 교수(54)였다. 자연의 벗들에게 배우는 소박하고 진실한 삶의 진리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그의 네 번째 저서. 털어놓자면, 자연이야기를 엮어놓은 그만그만한 책쯤 되겠지 싶었다. 그런데 그 근거 없는 추측은 서문을 읽으면서부터 여지없이 깨졌다. 지리산과 섬진강을 벗하며 살아온 20여년 세월이 촘촘하게 놓인 이 책은 그저 그렇게 자연 이야기를 풀어놓은 보고서도, 기교 넘치는 글쓰기로 화려하게 치장한 자연예찬의 에세이도 아니었다.눈을 맞추면 친구가 되는 자연에 다가서서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더불어 사는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배운 생명과학자가 진솔하게 써낸 자기고백서와도 같았다. 기교 없이도 따뜻하고 편안하게 자신의 이야기에 온전히 귀 기울이게 하는 글의 힘이 곳곳에서 빛났다. 덕분에 생명을 향한 경이로운 그의 사랑이 일깨워주는 삶의 진리 또한 그윽하고 깊었다.전공이 아닌데도 자연에 깃든 생명을 찾아다닌 지 25년째, 자연의 생명을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에 평생을 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우연히 마주친 고목나무에 둥지를 틀기 시작한 큰오색딱따구리의 이야기를 50일 동안 움막에서 지내며 관찰하고 기록한 〈큰오색딱따구리의 육아일기〉나 〈동고비와 함께 한 80일〉 〈까막딱따구리 숲〉과 같은 생태 에세이로 수많은 독자들을 감동시킨 김 교수와의 인터뷰는 기대보다도 훨씬 즐거웠다.오랜 세월, 내 발로 직접 다가서고, 눈높이를 맞추려 내 몸을 낮추고 오래도록 자세히 생각하면서 보기를 실천하며 자연을 마주해온 그의 일상이 그만큼 생생하고 가깝게 다가온 덕분이었을 것이다.-생태에세이를 여러 권 내셨던데요. 전공과는 다른 분야더군요.전공은 식물생리학이에요. 식물체 안에서 일어나는 화학반응을 연구하는 것이니 좀 거리가 있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과 개인적인 일을 따로 하고 있는, 일종의 이중생활입니다.(웃음)-그것이 가능했습니까. 자연을 관찰하는 일은 때가 있으니 형편에 따라 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닐 텐데요.몸이 좀 고달파서 그렇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제가 잠을 줄이는 연습을 오래전부터 해왔거든요. 그래서 하루를 길게 쓸 수 있었습니다. 관찰하는 동안 딱따구리가 번식에 들어서는 봄에는 하루 두세 시간 정도 자게 되는데 그런 생활을 10년 가깝게 했어요. 물론 강의도 성실하게 했죠. 그런데 이제는 좀 힘들어졌어요. 내 가슴에서 빛나는 것을 찾았는데 너무 늦게 찾아서 이제는 체력이 따라주지 못한다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큰오색딱따구리의 육아일기〉는 교수님을 생명과학자로 주목받게 한 책입니다. 이전에도 지리산 섬진강 일대의 자연과 생명 이야기를 관찰해오셨는데, 왜 딱따구리가 앞서게 되었는지 궁금하군요.91년부터 들꽃이며 새, 나무, 식물 등 자연에 깃든 친구들을 만나고 다녔습니다. 생명 하나하나에 다가서서 하루 종일 그것을 들여다보고 사진 찍고 마음에 고인이야기를 적는 일을 했지만 그런 생활을 17년쯤 하고 나니 지치더군요. 내용도 정보 차원에 그치고요.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들여다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얻고 싶었습니다. 그즈음 지리산 자락에서 죽은 고목나무에 둥지를 막 짓기 시작한 큰오색딱따구리를 만났어요.-그것이 계기였군요.하얗고 검은 무늬에 빨간색 오색딱따구리를 만났을 때 가슴이 떨렸습니다. 무엇에 홀린 듯 마음이 빠져들더군요. 그때부터 알을 낳고 새끼를 키워 떠나보낼 때까지 나무 옆에 움막을 짓고 50일 동안 지켰습니다.-일상을 지키면서 움막 생활이 가능했습니까.새벽 4시부터 밤 10시까지 관찰해야 하는 생활이었는데, 그 사이에 수업이 있으면 나갔다 왔어요. 필요하면 밤을 새우기도 했는데 수업이 없는 주말에는 아예 움막에 들어와 지냈죠.-상상이 잘 되지 않습니다.다행히 봄에 시작해 여름을 맞는 때여서 지내기는 어려움이 없었어요. 힘든 시간이 있었다면 물리적 고통이 아니라 어린 새를 떠나보낼 때였던 것 같습니다. 너무 섭섭하고 허전해서 울었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를 그때 배웠어요.-서남대는 언제부터 재직하셨습니까.91년 개교와 함께 이 학교로 왔습니다. 임용되자마자 돌을 갓 지난 첫아이를 데리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남원에 내려왔지요. 선생은 학교 옆에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거든요. 생물학과가 개설된 학교에서 연구하는 일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잘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와서 보니 기본적인 실험조차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어요. 암담했습니다.-지리산과 섬진강 답사를 시작한 것과 무관하지 않겠군요.맞습니다. 사실 대학교수는 연구와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함께 할 수 있는 직업이죠. 그런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상황에 맞닥뜨린 겁니다. 연구를 선택한다면 학교를 떠나야 하고, 학생을 선택한다면 전공을 내려놓아야 했어요.-자연의 생명 이야기를 찾아 나선 이유겠습니다.내 몸이 장비가 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보았어요. 다행히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고 느낄 수 있는 가슴도 있다는 것이 새삼 소중하더라고요. 그러다가 지리산 섬진강이라는 자연을 보게 되었는데 지리산 품안에서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이 행운이었어요. 카메라 하나 들고 땅과 자연에 다가서기 시작했습니다. 91년이었어요.-대상은 어떤 것이었나요.들꽃부터 온갖 자연에 깃든 생명은 모두 관찰 대상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다가서서 눈높이를 맞추고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더니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생기더군요. 글이 늘어나면서 내 몸 속에 고여 있는 생각들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 같았어요.-새에 대해서는 지식이 있었습니까.어느 정도 상식은 갖고 있었지만 깊이 알지 못했어요.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들여다보는 일을 택한 겁니다. 큰오색딱따구리를 관찰했던 50일 동안은 새벽 3시에 일어났어요. 사실 그 시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저는 남의 사생활 엿보는데 예의는 지키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어둠이 숲을 덮고 나서야 조용히 움막에 들어가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어요.- 생명에 대한 예의가 각별하셨군요.덕분에 숲에서 배운 것이 있어요. 새벽은 빛으로만 열리지 않더라고요. 소리가 먼저 깨어나서 일어나기 시작하죠. 잠들었던 소리들이 깨어나는데 눈으로 볼 수 없으니 귀로 듣고 가슴으로 듣게 되죠. 보이고 들리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기록할 수 있는 일상이 시작된 겁니다. 몸은 고달팠지만 그 작은 변화들이 신비로우니 내일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죠. 1초 앞이 궁금해지고 내일이 궁금하고 그렇게 하루하루 쌓이다 보니 50일이 되었어요.-딱따구리가 교수님께 특별한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내 가슴에서 빛나는 것이 뭔지를 그때 찾았으니까요. 아무도 없는 숲에서 하루 종일 나무 하나 지켜보고 있는 일을 몇 달 동안이라도 잘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그때 알게 된 거죠. 그 다음부터는 그냥 앞을 보고 간 겁니다. 딱따구리가 내 운명을 바꾸어놓은 셈이죠.-딱따구리에 빠진 또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요.딱따구리를 보면서 60년을 목수로 살아오신 아버지가 떠올랐어요. 저희 집은 늘 가난했습니다. 그래도 부모님은 가난 속에서도 저희를 사랑으로 키우셨죠.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웠습니다. 사실 50일 동안 움막생활을 지켜올 수 있었던 것도 평생을 목수로 살아오신 아버지께 기록으로라도 딱따구리 이야기를 전해 드리고 싶었어요. 딱따구리가 새끼를 키워내는 과정이 우리들의 자식사랑과 똑같더군요. 자꾸 나를 들여다보게 되더라고요.-책을 읽다보면 쉽고 편안한 글쓰기의 미덕이 돋보입니다. 글 연습을 따로 하셨습니까.워낙 글쓰기에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다만 독자들에게 잘 전달된 부분이 있다면 제가 오래 깊이 들여다본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글쓰기가 조금이라도 단련되었다면 글 연습을 본의 아니게 해야 했던 시간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특별한 시간이 있었습니까.글을 많이 쓰는 계기가 있었어요. 제가 좀 오지랖이 넓은 편이거든요.(웃음) 이 학교에 오자마자 정년시기를 생각해보니 35년을 근무하게 되더라고요. 정년이 되면 내 삶을 담아냈던 학교를 떠나는 것인데, 그때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고민해보았어요. 일기를 써서 35년의 기록으로 남기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10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썼습니다. 3650통의 편지가 만들어졌죠. 그런데 10년이 되면서 학교가 더 어려워지고 불안해지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자연히 날마다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더군요. 암울하고 아픈 이야기뿐이었어요. 희망도 보이지 않았을 때 일기쓰기를 멈추었습니다. 그 파일은 모두 삭제했죠. 가슴 아픈 경험이었습니다.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자연을 관찰하는 것을 기록하는 일만 했습니다.-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죠. 큰오색딱따구리 이후 연이어 동고비, 까막딱따구리 책을 내셨더군요. 시간적으로도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은데요.맞습니다. 온전히 관찰에만 시간을 쏟을 수도 없고, 마음이 거기에 있으니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한해 쉬고 한해 복직하는 식으로 3년을 쉬면서 관찰 작업을 했습니다.-지리산 일대에서는 볼 수 없는 까막딱따구리를 그래서 관찰할 수 있었군요.그 새는 강원도와 경기도 인근에서만 만날 수 있어서 학교를 휴직하고 강원도에서 1년 동안 지냈어요. 강원도 화천에 있는 숲인데, 우리나라 딱따구리가 이 숲 안에 모두 살고 있죠. 정말 좋은 숲입니다.-동고비는 딱따구리와는 다른데 관찰을 하게 된 이유가 있었나요.동고비도 딱따구리 둥지에 붙여서 집을 짓고 살아가는 새이니 상관없는 새는 아닙니다. 몸이 작은데 진흙으로 제 몸만 빠듯이 들어갈 수 있게 집을 짓죠. 딱따구리 둥지는 입구가 넓습니다. 거기 붙여서 집을 짓는 것인데, 도감에도 동고비는 딱따구리의 옛 둥지에 진흙을 발라 번식을 하는 새라고 딱 한줄 나옵니다. 너무 흔한 새여서 눈길을 받지 못하죠. 그래서 지켜봤습니다. 딱따구리 둥지 하나가 허투루 버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흥미로웠습니다. 딱따구리가 살고, 동고비가 살고, 하늘 다람쥐가 살고. 자연에는 허투루 버려지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죠.-우리나라 딱따구리는 몇 종이나 됩니까.쇠딱따구리, 아물쇠딱따구리, 오색딱따구리, 큰오색딱따구리, 청딱따구리, 그리고 가장 큰 까막딱따구리까지 6종이예요. 번식일정까지 관찰은 다 했습니다. 제가 마지막 할일도 우리나라의 딱따구리를 정리하는 것인데 95% 정도는 되어 있지만 5%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봄부터 여름까지는 딱따구리를 보고 다니죠. 여름에는 팔색조, 긴꼬리 딱새 등을 보고, 10월 11월에는 물수리를 따라 다니는데 계절마다 그들을 만날 생각에 마음이 설렙니다.-25년이면 짧지 않은 시간입니다. 같은 일을 해오시면서 고비는 없었습니까.답답한 시기가 있었죠. 이정도면 무엇인가 쥐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정작 자연 속에 있으면 그런 마음이 다 사라지더라고요. 주위에서는 〈큰오색딱따구리의 육아일기〉를 쓰기 전 17년을 의미 없는 시간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큰오색딱따구리〉에 제가 그동안 자연 속에 있으면서 자연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던 시간이 다 들어와 있는 셈이거든요. 자연이 제게 가르쳐준 아름다운 이야기를 많은 분들에게 전해드릴 수 있는 것도 그 시간으로 쌓여진 힘 덕분이고요.김 교수는 생태에세이 뿐 아니라 강연으로도 이름이 높다. 요즈음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꼭 강연이 있게 되는데, 그가 강연과 관련해 정해놓은 우선순위와 원칙이 흥미롭다. 같은 여건이면 초등학생과 중고등학생, 교사, 학부모 순이고, 가까운 거리보다는 먼 거리를 선택한다. 왕복거리에 강연까지 14시간이 족히 걸리는 강원도를 가장 많이 다니게 된 이유다. 강연료도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데, 대학 교수로 있는 한 강연료는 받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워 책을 다시 구입해 되돌려준다.그에게 강연은 어떤 의미일까.때로는 버겁기도 하지만 내 이야기를 들어주겠다는 사람들이 고맙습니다. 내 이야기를 통해서 뭔가 삶의 작은 변화가 생길 수 있다면 감사한 일이죠. 가장 즐거운 강연이 초등학생들을 만날 때인데,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해지는 것을 보면 제 영혼도 맑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큰 행복이죠.그가 좋아하는 강연 주제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번잡한 일상, 손쉬운 것들에 마음 빼앗긴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그가 자연과 눈 맞추며 지내온 시간을 들여다보니 그의 강연에 객석이 뜨거워지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김성호 교수는] 지리산섬진강 일대 자연관찰 기록 '큰오색딱따구리의 육아일기' 펴내김성호 교수는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했다. 목수였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단칸방에서 3남매를 사랑으로 키웠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60년을 목수로만 살아온 아버지를 그는 가장 존경한다. 부모님은 공부보다는 뛰어놀기 좋아하는 아들에게 단 한번도 공부하라고 다그치지 않았다. 덕분에(?) 성적은 늘 꼴찌 근처에 있었다. 휘문고 2학년 때 어머니가 중병을 얻었다. 속 썩인 일도 별로 없지만 그렇다고 기쁨을 드린 적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밤을 새우며 교과서를 외웠다. 겨우 몇 십 등 올라간 성적표에 어머니가 크게 기뻐하셨다.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내친김에 좋은 대학을 들어가고 싶었다. 어려운 형편에 재수까지 하며 연세대 생물학과에 들어갔다. 석박사과정을 밟는 동안 스스로 학비와 가족의 생활비를 벌었다.1991년 서남대 교수로 임용됐다. 안정된 길이 있었으나 새로 문을 여는 대학이 더 의미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기본적인 실험 장비도 갖추지 못한 환경에서 학자로서의 연구 작업은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다. 개인적인 출구가 필요했다. 지리산과 섬진강이 마음속에 들어왔다. 오랫동안 그 일대를 누비고 다니며 자연과 눈 맞추고 살아온 그는 2008년 〈큰오색딱따구리의 육아일기〉를 펴냈다. 50일 동안 딱따구리의 둥지가 있는 나무 옆에 움막을 짓고 관찰해온 결실이었다. 2년 후에는 다시 〈동고비와 함께 한 80일〉을, 그 이듬해에는 〈까막딱따구리의 숨〉을 펴냈다. 주목받게 된 이 책들을 통해 생명과학자로서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자연에 깃든 생명을 지키는 일과 관찰을 통해 얻은 아름다운 생명 이야기를 나눈 일은 이제 삶의 목표가 되었다. 생태에세이 〈나의 생명수업〉과 〈관찰한다는 것〉을 이어 펴냈다. 서남대 기초의학과 교수. 자연의 진리를 나누는 외부 강연도 열심히 하고 있다.
진안군 마령면 계서리 계남마을 입구에 있는 오래된 정미소가 문화공간으로 변신한 것은 2006년 봄이었다. 산과 강이, 들과 숲이 푸르게 달려오던, 찬란한 봄 햇살이 들판위로 쏟아져 내리던 바로 그 봄날이었다.개관을 기념한 첫 전시는 〈계남마을 사람들〉. 마을 주민들의 개인사를 담은 100여장의 빛바랜 사진이 주인공이었다. 기억과 경험을 공유하는 일은 그렇게 시작됐다.낡은 정미소 건물 이마에 〈공동체 박물관 계남정미소〉란 이름을 달고 등장한 이 공간은 금세 화제가 됐다.오래된 마을과 사람들, 그 일상의 흔적들을 길어 올려 추억하게 하는 일을 도모한 사람이 누구인가 관심이 쏠렸다. 사진가이자 전시기획자인 김지연씨(67, 서학동사진관 관장)가 거기 있었다.계남정미소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숱하게 이름을 올렸다. 일 년에 많게는 네 번, 적게는 두 번 기획된 전시회는 마을공동체의 소중한 가치와 그 의미를 기억하게 하는, 그 자체로 또한 소중한 통로가 되었다. 때로는 사적인 기억이, 때로는 공적인 기억이 교차하는 이 공간은 새로운 것들에 열광하는 시대에서 충분히 특별하고도 새로운(?) 존재였다.그런데 지난 2012년 9월, 계남정미소는 빗장을 걸었다. 잠정적 휴관을 내세웠지만 빗장은 아직 열리지 않고 있다. 들여다보니 온전히 혼자의 힘으로 공간을 만들고 운영했던 김 관장의 고단했던 일상이 그 노정위에 놓여있다. 7년 가깝게 전주와 진안을 오가며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모든 일을 건사해왔던 김 관장이 결국은 의지의 끈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궁금했다.김 관장은 지난 2013년 봄, 전주 한옥마을 인근 동서학동에 〈서학동 사진관〉을 열고 새로운 문화 활동을 엮어가고 있다. 〈서학동 사진관〉은 역시 좁고 오래된 한옥을 고쳐 만든, 지역에서는 유일무이한 본격적인 사진전문 갤러리다. 개관한지 3년째, 50평도 채 안 되는 비좁은 공간의 존재는 빛난다. 온전히 그가 일구어온 힘이다.비가 내리는 날, 동서학동 귀퉁이 골목에서 만난 〈서학동사진관〉은 예뻤다. 인터뷰 내내 쏟아지는 빗소리가 작아졌다 커졌다를 반복했다. 계남정미소와 서학동사진관을 잇는 10여년 노정이 그 소리위에서 움직였다.-갤러리가 조용하군요. 개인적인 작업을 하시기 에는 더없이 좋겠습니다.(웃음)전시회가 열리고 있으니 관객들이 들러주는 것이 좋은데, 그렇다고 너무 많이 관객들이 찾아와 번잡해지면 혼자 감당하기 버거울 것 같아요. 워낙 드문드문 찾아오시니까 이런 분위기가 낯설지는 않습니다. 그 사이 제 일도 좀 할 수 있고요.-서울 전시를 앞두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준비로 바쁘시겠군요.10월 3일에 시작해 11월 30일까지 이어지는 전시입니다. 빈방에 서다가 주제인데 지난번에 선보였던 낡은 방에 이어진 작업이에요. 방이라는 주제를 확장시킨 이 두개의 작업을 함께 묶은 사진집도 나옵니다.-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지극한 시선이 더 농밀해졌을 것 같습니다. 역시 공간이 대상이겠죠.오래된 마을을 돌아다니다보면 사람이 모두 떠나버리고 없는 빈집, 빈방에 발을 들여 놓을 때가 많습니다. 흡사 관 속에 들어가는 것 같은 서늘함이 느껴지죠. 한 때는 가족의 희망이며 보금자리였을 공간이 모든 희망을 걷어가 버리고 절망과 회한만을 남기고 간 자리로 남아있는 모습은 안타깝습니다. 이런 공간을 남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지만 누군가가 살았던 소중한 공간을 기억하는 일, 그것만으로도 그들에게 작은 위로가 된다는 믿음으로 하는 일이죠.- 서학동 갤러리가 개관한 것이 2013년 봄이니 계남정미소를 휴관한지 5개월 만에 다시 새로운 터전을 마련한 셈입니다. 계남정미소 휴관을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는데, 갤러리 개관과 연관이 있었나요.많은 분들이 계남정미소를 닫고 서학동 갤러리 문을 여니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실상은 전혀 관계없이 이뤄진 일이거든요. 계남정미소는 제가 할 수 있는 물리적 정신적 능력의 모든 한계에 맞닥뜨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던 일입니다. 당시에는 어떤 공간을 다시 운영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어요.-그러나 결과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고, 다시 혼자 힘으로 운영해가고 있지 않습니까.상황이 그렇게 된 것이죠. 서울에서 활동하는 사진가가 전주에 갤러리를 마련하고 싶어 했어요. 그 일을 도와주다가 지인으로부터 이 공간을 소개 받았지요. 우여곡절 끝에 집주인이 되었는데, 속마음으로는 계남정미소를 살리지 못하고 끝내 나와 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서울의 사진전문갤러리 류가헌 같은 갤러리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또 뛰어들게 된 것이죠.-말씀이 나왔으니 계남정미소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7년 가깝게 운영해오셨는데 왜 갑자기 휴관을 했습니까.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전주에서 정미소까지 매일 출근하는 노동 강도는 그만두고라도 운영과 관리, 기획과 자료수집, 전시에 관한 모든 일을 혼자서 해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계속되면서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려운 한계를 맞게 된 거죠. 제 의지로 만들어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6년 넘게 버텨오면서 그래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그런 믿음도 한순간에 허물어지더군요.-그래도 그렇게 견디고 버텨온 시간이 6년이 넘었지 않습니까.휴관을 결정하기까지 지역 분들을 모셔서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자원봉사 할 사람을 찾아보기도 했고.......사실 갑작스럽게 문을 닫은 것이 아니거든요.-계남정미소는 마을 공동체의 의미를 되살리는 가치 뿐 아니라 낡은 공간을 문화공간으로 활용하는 모범적 사례로도 이름을 널리 알렸습니다. 지역에서도 계남정미소는 자랑스러운 자산이었고 자긍심이었는데 행정의 지원은 없었나요.전국의 사설박물관이나 미술관이 모두 안고 있는 어려움 일 텐데, 형식적인 지원만으로 이런 공간을 유지해나가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저도 처음부터 자치단체나 지역의 도움에 의지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일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고 공공적인 역할을 하게 되면 자치단체나 지역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줘야겠더라고요. 개인적 역량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거든요.-여러 가지 제도를 활용하는 방법도 있지 않았을까요.계남정미소 폐관 소식이 알려지면서 뒤늦게 정미소를 살려야 한다는 요구가 지역에서도 있었어요. 그래서 재작년에 자치단체 협조까지 받아가며 사립박물관 등록을 추진했었죠. 거의 모든 절차를 밟았는데 포기했어요. 공간의 특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기존의 박물관 시설과 기능에 맞추어 모든 것을 갖추어야하는 현실적 부담이 너무 버거웠거든요.-그 뒤로는 어떤 노력도 더해지지 않고 있습니까.뜻있는 지인이 마을 공동체 운동을 하고 싶다고 해서 기꺼이 열쇠를 내주었어요. 몇 분이 사겠다고 나섰지만 팔지 않고 그 공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누구라도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아무래도 개인적 이익이 아닌 공공적 일을 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지금으로서는 마냥 기다리고 있기도 안타깝습니다.-그대로 두면 건물 자체도 유지되기 어려울 텐데요.가장 마음 쓰이는 일이죠. 건물이 삭고 허물어 내리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프고 내가 괜한 일을 했던 것이 아닌가 후회도 들어요.-그래도 후회하신다는 이야기는 뜻밖입니다.정미소는 개인적인 공간이 아니었어요. 처음에는 제 작업을 위해 마련했지만 처음부터 목적을 바꾸었죠. 마을에 사라져가는 것들을 주민들과 함께 살려내면서 문화공동체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지금은 전국적으로 그런 활동들이 많이 확산되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낯선 일이었거든요. 계남정미소는 그런 활동을 하기에 환경이 좋지는 않았죠. 허허벌판에 서있는 낡은 정미소에서 그런 활동을 어떻게 꾸려갈 수 있겠는가, 사실은 저 스스로도 의심하면서 일을 했습니다.-정미소를 선택한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정미소를 문화공간으로 만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고, 그 전부터 해왔던 사진작업 덕분이었어요. 사라져가는 것들에 주목하고 있는 저에게 2000년 즈음 급격하게 없어져가는 정미소가 크게 다가왔어요. 진안을 비롯해 전라북도의 마을을 돌아다니며 정미소를 찍고 다른 지역도 찾아 나섰어요. 수백 개의 정미소 풍경을 얻을 수 있었는데 정미소 내부를 살려놓은 공간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침 계남정미소를 만나게 되었죠.-아무런 지역적 연고가 없는 곳에서 공동체 운동을 하는 일이 쉬울 리 없었을 텐데요.무모한 시작이었죠. 그래서 오히려 주목을 받았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중간에도 너무 힘들어 그만하고 싶을 때가 많았어요. 마을 사람들도 협조적이지 않았거든요. 2년 정도는 마음고생을 많이 했어요. 아는 사람도 한명 없는 곳에 와서 그렇다고 성공한 예술가도 아닌 아줌마가 이상한 짓 하고 있다는 시선이 많았거든요.-그래도 지역의 많은 분들이 휴관에 들어갔을 때는 안타까워했다고 들었습니다.그랬었죠. 마을 분들도 그렇지만 오히려 인근의 다른 마을 분들이 많이 아쉬워했어요. 기획전이나 책 작업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러 다닐 때 그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덕분에 할 수 있었던 일이 참 많습니다. 이장님들 사진 찍으러 다닐 때도 그 분들 아니었으면 힘들었을 일을 즐겁게 했죠. 마을에서도 휴관 후에 안타까워하는 분들이 많이 생겼는데 언젠가 계남에 갔더니 이장님이 전주에 전시관 만들었다면서요하고 물으시더라고요. 바람피우다 들킨 사람처럼 마음이 콩닥거려 혼났어요.(웃음)-그래도 진안의 사라져가는 것들을 기록으로 엮고 자료로 남기는 작업이 정미소의 결실로 남아있습니다. 의미도 있고 보람도 큰 작업이었죠.진안의 사회사로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도 귀한 작업이었죠. 2010년과 11년에 개인적으로 작업에 집중했는데, 마을이야기나 용담댐 기록을 진행하면서 물리적으로 너무 힘들게 되니 대상포진이 오더라고요. 거의 초죽음이 되어 더 이상 지탱 할 수 없게 되었죠.-그만큼 계남정미소의 부활이 바람이기도 하겠습니다.물론이에요. 저는 비록 여러 가지 한계 때문에 전주로 나와 새로운 일을 하고 있지만 계남정미소가 마을공동체의 중심공간으로 되살려질 수 있다면 언제라도 힘을 보탤 생각입니다. 뜻있는 분들이 있으면 좋겠어요. 마을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그런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오늘의 농촌 현실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죠. 뭔가 답을 찾고 싶은데 아직은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김 관장은 계남정미소 휴관에 스스로 얹어 놓은 마음 빚이 큰 듯 보였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의 이야기는 담담함과 격정 사이를 오갔다.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은 담담함으로 추억되다가 고단했던 시간은 격정으로 차오르기 일쑤였다.사실 여러 해 동안 발품 팔아가며 누볐던 진안의 마을과 진안사람들의 역사를 기록으로 안고 있는 그의 여정은 놀랍다. 사진가이자 전시기획자인 그를 아키비스트(archivist)라고 불러도 낯설지 않은 것은 그 여정 때문이다.지난 봄, 서학동 사진관에서 서학동 언니 프로젝트라 이름 붙인 전시회가 열렸다. 지역을 가르며 돋보이는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들이 김지연 관장을 응원하기 위해 나선 전시회였다. 전시회의 이름만으로도 흥미로웠던 자리에서 그의 외로운 투쟁은 힘을 얻었다.새로운 것들에 열광하는 시대지만 사진가로서 그가 기록하는 모든 것들은 새로운 것들보다도 더 빛난다. 일흔을 앞둔 나이에도 열정이 식지 않는 그의 작업을 주목하게 되는 이유다.● [김지연 관장은] 민중생활사 아카이브 구축한 '정미소' 작가김지연 관장은 1948년생이다. 일흔을 앞두고 있지만 농촌을 누비며 사라져가는 것들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그의 치열함은 세월을 잊은 지 오래다.광주가 고향인 그는 결혼하면서 전주사람이 됐다. 서울예전 연극영화과를 다녔던 그는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현실에 맞부딪히면서 꿈을 접었다.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우며 20여년 온전히 주부로 살았지만 삶이 강퍅할 때는 잊혔던 어릴 적 꿈은 가끔씩 마음을 헤집어 놓았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문학과 철학 미학 등 관련 있는 분야를 책으로 만났다. 살림만 하던 그가 꿈을 다시 되살려 뛰쳐(?) 나온 것은 나이 오십에 이르러서다. 우연히 서울의 한 기관에서 여는 사진 무료강좌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됐다. 사진은 다른 장르에 비해 오랜 숙련기간이 필요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계의 도움을 얻어 생각과 의지를 담아낼 수 있는 사진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처음에는 강렬한 이미지로 감동을 주는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작가로 인정받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지연과 학연으로 얽혀진 예술계의 장벽은 예상보다도 훨씬 높았다. 자괴감으로 심한 갈등을 겪으며 그는 단단해졌다.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기록이 마음을 잡았다. 처음 마주한 대상이 정미소다. 그는 잘 찍겠다는 욕망을 버리고 천천히 기록해가겠다는 마음을 다잡으며 카메라를 마주했다.2002년 서울 인사동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예술적 완성도에 무게를 놓은 주류 사진예술 풍토에서 그의 사진은 폄훼됐다. 기록으로서의 사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시절이었다.그의 작업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4년 서울시립미술관이 기획한 전시회에 참여하면서다. 기록사진이면서도 영상미와 사진예술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진을 평론가들이 주목했다.그는 정미소 작가가 되었다. 이후 이어진 작업은 김지연 만의 기록사진을 구축했다. 이발소, 묏동, 근대화상회, 학교, 이장님, 낡은 방, 빈집, 장날을 비롯해 마을공동체의 작은 유산들이 그의 카메라 안으로 들어가 역사가 되었다.2006년 봄, 오래된 정미소를 되살려 공동체박물관을 만들었다. 진안군 마령면 계서리에 문을 연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다.외롭고 고단한 여정이 시작됐으나 작업은 더 치열해졌다. 전주에서 진안의 계남마을을 오가는 일상은 그를 전사로 만들었다. 〈계남마을 사람들〉을 시작으로 〈마이산에 가다〉 〈시간에게 길을 묻다-진안골 졸업사진첩〉 〈전라북도 근대학교 100년사-우리학교〉 〈용담댐, 그리고 10년의 세월-용담 위로 나는 새〉 〈시어머니의 보따리를 펼치며〉 등의 귀한 전시회가 정미소라는 공간에서 생명을 얻었다. 그러나 온전히 혼자의 힘으로 일구었던 정미소 작업은 더 이상의 물리적 경제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2009년 가을부터 휴관에 들어갔다. 2013년 봄, 전주 동서학동에 작은 한옥을 고쳐 사진전문갤러리 〈서학동 사진관〉을 열었다. 그가 꿈꾸는 도심의 새로운 마을 공동체를 실현해나갈 공간이다.10여회의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여했으며 〈나는 이발소에 간다〉 〈우리 동네 이장님은 출근중〉 〈근대화상회〉 〈용담 위로 나는 새〉 〈정미소와 작은 유산들〉 〈삼천 원의 식사〉 등의 사진집을 냈다.
백제가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고대 동아시아 권역에서 가장 빛나는 문화적 역량을 발휘했지만 700년 찬란한 역사를 끝으로 패망하고 난 뒤, 그 존재조차 미미해졌던 백제의 부활은 흥미롭다.지난 7월, 공주와 부여, 익산을 잇는 8개의 백제역사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수년 동안 등재를 위해 나섰던 학계 연구자들과 관련기관, 자치단체의 협업이 가져온 결실이다. 이 작업을 주도했던 기구가 있다. 공주부여익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 등재 추진단과 그 안에서 등재에 관련된 실질적인 일을 진행했던 추진위원회다.지난 3년 동안 노심초사하며 갖가지 준비 작업으로 백제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끌어낸 노중국 추진위원장(66계명대 명예교수)을 만났다.그는 백제사 연구의 권위자로 꼽힌다. 학문적으로도 척박하기만 했던 백제사 연구는 1970년대 그의 도전으로 생명을 얻고 꽃을 피웠다. 학문에서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일은 외롭고 고단한 일이다. 미루어 짐작컨대, 선행 연구 자료가 거의 없었던 환경에서, 그것도 지역적 연고로도 한계(?)가 분명한 그의 백제사 연구는 더 고달픈 여정이었을 것이다.그래서일까.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세계유산 등재에 대한 그의 기쁨은 컸다. 그는 기쁨의 무게를 학문적으로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의미로 선택했던 추진위원장의 역할에 두었다.백제가 부상하고 있는 시대적 상황을 주목하고 있는 그는 고대 동아시아의 공유문화권 관점에서 백제의 역할과 가치를 강조했다.백제는 중국에서 문화를 받아들였으면서도 그것을 자기화하고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 일본이나 가야 같은 이웃나라에게 전파했습니다. 문화교류의 핵심 역할을 했지요. 자연히 외교적으로도 특별한 역량을 발휘했습니다. 오늘날 국제적 상황에서 대한민국이 가야할 길도 백제가 취했던 이런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인터뷰는 대구 그의 자택 근처의 조용한 카페에서 있었다. 정년퇴임 이후 개인적인 연구와 저술 작업에만 전념하고 있는 노교수와의 인터뷰는 강의를 듣는 듯 특별했다. 한국고대사 연구자로 걸어온 그의 길이 더 촘촘해 보였다.-지역적 연고도 없고 학문적으로도 한계가 있는 백제사를 연구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 김철준 교수님 밑에서 공부해보고 싶었는데, 막상 고대사를 전공하려고하니 어느 시기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되더군요. 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찾아보니 삼국 중에서도 유독 백제는 거의 없었어요. 신라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고구려였는데 백제는 아예 없더라고요. 그때 다른 사람이 안한 시기를 한번 공부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선행 학문적 성과가 구축되지 못한 상황에서 연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힘들어서 포기할까 고민도 많았죠. 일단 자료가 너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1971년에 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 백제에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더군요. 기왕에 시작하려고 한 것이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무령왕릉이 교수님 연구에 추동력이 되었군요. 일종의 계시가 아니었을까요. 포기하지 말라는.....(웃음)의지는 다졌지만 그래도 공부하는 과정은 힘들었어요. 77년에 석사논문을 발표했는데 백제사로 쓴 석사학위 논문 1호가 됐어요. 86년에 발표한 박사학위도 마찬가지고요. 그만큼 백제사 연구자는 수적으로도 적었고, 연구 작업도 미미했어요.-고대 삼국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서도 백제는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학문 영역에서도 그 정도가 심각했군요.다행히 90년대가 되니 백제사로 박사학위를 받는 연구자가 꽤 많아지더군요. 지역도 확산되면서 연구자들의 모임을 만들었어요. 문헌으로 공부한 연구자나 고고학 자료로 공부한 연구자들이 모여 교류하다보니 학문적 활동도 활발해지고 좋은 점이 많았습니다.-영남 지역 출신이어서 지역적 한계가 걸림돌이 되지 않았나요.지금도 영남 지역에서 백제사를 공부하는 연구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질문을 곧잘 받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런 면에서 좋은 점도 있고 불편한 점도 있다고 말합니다. 현장을 자주 가보지 못하는 한계는 불편한 점이자 어려운 점이지만 역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역사 연구는 지역 정서가 반영되면 자칫 또 다른 왜곡이 될 수 있거든요.-등재 추진위 활동을 듣고 싶습니다. 과정이 지난했죠.처음에는 자치단체들이 각각 등재를 추진했어요. 맨 처음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했던 것은 무령왕릉입니다. 공주시와 충남이 94년쯤 잠정목록으로 추진했죠. 세계유산이 되려면 두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하나는 잠정목록에 등재되어야 하고 그 중 한해 하나씩 신청을 할 수 있어요. 일단은 우선 등재가 되어야 신청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당시 무령왕릉은 한계가 많았어요. 그래서 충남도에서 2010년에 공주부여 역사유적지구를 우선 등재 추진대상으로 다시 신청했어요. 그런데 같은 해에 익산에서도 익산 백제유적지구를 우선 등재 대상으로 신청한 겁니다.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죠. 결론은 따로 가서는 안 된다.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었어요.-그래서 통합해 추진하게 된 것이군요.2011년 1월에 공주부여익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 등재 추진단이 발족되었죠. 그 밑에 추진위원위가 만들어지면서 제가 위원장을 2012년 5월부터 맡게 됐습니다.-다섯 개 자치단체가 협업으로 추진한 것이 등재에 상당한 동력이 되었겠군요. 추진위원장으로서도 힘이 분산되지 않으니 다행이었겠습니다.그렇죠. 그러나 처음에는 부담스러웠습니다. 지금은 결과적으로 등재 되었으니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돌아볼 수 있지만 처음 시작할 때는 온갖 우려와 걱정이 많았거든요. 다만 학문하는 입장에서 개인적으로는 자기연구 열심히 하면서 학생들 잘 가르치는 것이 기본이고, 학문적으로 관련해서 사회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 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어요. 백제유적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한다는 일은 학문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백제사를 연구해온 사람으로서 사명감도 있었죠.-등재는 어떻게 준비했습니까.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은 모든 인류가 공동으로 보존하고 관리해야 할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OUV)와 진정성, 완전성을 동시에 갖춰야 합니다. 이런 까다로운 조건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등재는 그만큼 어려운 일이죠.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등재추진단은 4년여 동안 준비해왔는데 그 과정의 핵심은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어떻게 증명해내느냐 하는 것이었어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려면 6개 기준 중 1개 이상을 충족시켜야 하는데 우리는 그 중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류 문화전통 또는 문명의 독보적이거나 특출한 증거 인류 역사의 중요한 단계를 보여주는 건축적기술적 총체 또는 경관의 탁월한 사례를 주목했어요. 마지막에는 경관의 탁월한 사례를 빼고 두 가지로만 증명했죠.-어려움이 있었겠군요.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서로 모순된 의미잖아요. 그럼에도 그 가치를 찾아내야 했어요. 분석해보니 그 증거들이 충분하더라고요. 아시아 3국에 불교는 다 있습니다. 공통이죠. 이것은 보편성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익산 미륵사의 경우 3탑 3금당이라는 아주 특별한 구조를 갖고 있거든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것은 탁월한 덕목이었죠. 건축기술이나 사후세계를 보여주는 무덤의 구조의 특징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화적 전통이나 기술은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였지만 그것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 적용했고, 이것을 다시 일본에 전해주었죠. 교류와 교류를 잘 보여주는 사례예요.-진정성이나 완전성은 어땠습니까.완전성은 가장 취약한 부분이었어요. 세계문화유산은 기본적으로 건조물이 많거든요. 유물이 아니라 건축물 위주죠. 그래서 지나치게 파괴되고 없어졌다면 완전성을 인정받기 어렵게 됩니다. 결국 그 유산이 얼마나 본래모습을 지니고 있느냐의 문제인데 사실 백제역사유적은 눈에 보이는 것이 별로 없거든요. 그런데 이 취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찾은 겁니다. 건조물 중심의 사고는 유럽식 사고죠. 유럽은 석조건축물이 중심이어서 시간이 흘러도 별로 문제가 안됩니다. 그에 비해 동양은 목조건축이 중심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비록 지상부에 남아 있는 것이 없어도 땅속에는 원래의 구조가 잘 남아 있다는 것이에요. 이 점을 유네스코가 인정한 겁니다. 진정성은 손을 댄다 해도 유적의 재질이나 색깔에 원형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느냐의 기준인데 이점에서 가장 우려되었던 미륵사 동탑과 서탑의 경우도 진정성을 규명할 수 있었습니다.-이런 기준을 다 거치고 세계유산이 된 백제 문화의 의미가 더 새롭게 다가옵니다. 당시 백제의 역사적 위상은 어땠습니까.백제는 천도를 두 번이나 한 나라입니다. 고구려 역시 두 번 천도를 했지만 자발적인 천도였죠. 백제는 한번은 쫓겨 내려와 세운 것이고, 한번은 자발적인 것인데 우리가 지금 주목하고 있는 것은 공주로 내려오면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중국 문화의 확산입니다. 백제는 자연조건으로도 강과 바다를 안고 있어서 수운 해운 교통이 발달했죠. 개방적인 특성을 갖게 된 배경입니다. 선진문화를 받아들여서 자기화 하고 더 발전시켜 주변국에 다시 전달하는 교류 문화는 백제의 가장 큰 덕목이랄 수 있습니다. 그만큼 역사적 위상이 탄탄했다는 이야기도 되죠.-고대 동아시아의 공유문화권에서의 백제 역할을 주목하시던데요.고대동아시아 공유문화권을 만들어내는데 핵심역할을 한 나라가 백제입니다. 공유문화권의 기본요소는 의사소통 수단으로서의 한자, 정치이념으로서의 유교, 종교로서의 불교, 사회를 유지하는 법질서로서의 율령, 곧 법이죠. 중국 일본 한국이 공통적으로 다 갖고 있는 요소입니다. 그런데 불교와 유교, 율령을 일본에 전해준 것이 백제거든요. 가야에 불교를 전해준 것도 백제입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중국으로부터 직접 받았지만 백제는 거기서 머무르지 않고 2차로 확산시켰죠. 문화교류의 핵심역할을 한 곳이 백제예요. 저는 바로 이 모습이 오늘의 대한민국이 가야할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시대는 다르지만 한류 열풍과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맞습니다. 일본에서는 백제 문화의 열풍이 대단했습니다. 백제 이름이 붙은 지역도 많고, 건축과 음악 등 예술 각 분야에 백제문화가 파급되었어요. 그런 점에서 한류의 시작은 백제시대부터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백제역사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기쁨이 크지만 앞으로 과제가 더 많을 것 같습니다.물론입니다. 세계문화유산은 보존관리가 가장 중요합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근본 목적이 보존이거든요. 이것을 어떻게 잘 활용해서 관광수입을 올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잘 보존할 것인가가 목표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메시지예요. 잘 보존하고 관리하면서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어떻게 살려나갈 것인가, 각 지역마다 특성을 살리면서도 세계문화유산 도시를 어떻게 조성해나가느냐 하는 문제는 시급한 과제입니다.-익산 미륵사나 왕궁리유적은 다른 도시에 비해 여건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시내권에서 떨어져 있다는 면에서 특징적인 환경을 잘 살릴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왕궁리는 정말 귀한 유적이죠. 발굴을 통해 드러난 전조후원형 궁궐구조는 유일할 겁니다. 미륵사도 마찬가지예요. 서탑 해체는 아쉽지만 갖고 있는 공간의 의미와 가치, 스토리텔링의 요소가 특별합니다. 이런 요소를 잘 살리면 좋은 공간으로 지켜질 수 있습니다.-교수님 말씀 들으면서 복원과 상상으로 지켜질 수 있는 유적의 가치를 생각하게 됩니다. 가령 유럽의 역사유적이 보이는 것의 가치라고 설명한다면 우리 역사유적은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로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요.맞습니다. 방문객들에게 보여줄 구체적 유적이 부족하다고해서 실체가 규명되지 않은 섣부른 복원은 해선 안 됩니다. 사실 백제유적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7월 4일 이전이나 이후나 그 역사는 똑같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제 이 유적들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설명할 수 있는 근거들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죠. 첨단 기술과 예술이 결합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노교수는 초등학교 때 읽었던 삼국지를 자신이 역사를 공부하게 된 끈으로 여기고 있다.삼국지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 인물들은 어려운 시기, 이른바 난세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상황을 극복해갈 것인가를 보여주죠. 별 볼일 없는 사람도 난세를 통해 두각을 드러내고,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가는 인물도 만들어집니다. 큰 교훈이 거기 있더군요. 역사는 결국 사람이 만들어가는 것, 그래서 모든 것의 중심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죠.역사는 또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한시대의 역사를 우리가 반추하며 귀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도 거기 있지 않을까. 백제가 지금 우리 곁에 성큼 와있다.● [노중국 추진위원장은] 지역학문적 한계 극복한 '백제사 연구 개척자'노중국 교수는 1949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만 졸업한 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집안일을 도와야 했다. 소를 키우며 지내면서 시내로 고등학교에 다니는 같은 또래 친구들의 등하교길이 마냥 부러웠다. 누군가가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독학으로 공부해 검정고시를 통과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과목 과락에 걸려 재수를 하고서야 합격했다. 때마침 계명대 사학과에 전액 장학금 제도가 있었다. 돈을 들이지 않고 대학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대학 3학년 때 지도교수의 권유로 한국고대사 연구에 마음을 두기 시작했다. 기왕에 나선 연구자의 길, 고대사 부문의 권위자였던 김철준 교수 밑에서 공부하고 싶어 서울대 대학원을 택했다. 대학원 입학을 하고 공군장교로 군대를 가 4년 5개월 동안이나 군 생활을 했다.백제사를 연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선행 연구가 적은 탓에 연구를 진전시켜줄 자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한때 포기의 유혹으로 갈등하기도 했지만 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 백제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의욕이 생겼다. 무령왕릉 발굴은 노교수가 백제사 연구의 길을 계속 갈 수 있게 한 동력이 되었다.그는 백제사 연구의 개척자다. 석사논문과 박사논문이 모두 백제사연구 첫 논문이 됐다. 석사학위를 받고 곧바로 모교인 계명대 교수로 고향에 돌아왔다. 지역적인 여건으로나 학문적 환경으로나 백제사 연구는 외로운 작업이었다. 90년대에 이르러서야 백제사 연구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백제사 연구자 모임을 만들어 함께 답사를 다니고 토론하면서 학문교류를 확장시켜갔다.2000년대 들어서면서 백제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추진되기 시작했다. 공주와 부여, 익산이 각각 따로 추진하던 것을 통합해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 등재 추진단을 발족시켰다. 2012년 5월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됐다.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라고 판단해서다. 백제역사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한 고된 노정이 시작됐다. 2015년 7월, 공주 부여 익산을 잇는 8개의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지역적, 학문적 한계를 극복하고 백제사 연구에 열정을 쏟아온 노교수의 열정이 그 과정에 놓여 있다.문화재위원회 위원과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한국고대사학회 회장을 거쳐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백제정치사연구〉 〈백제부흥운동사〉를 비롯해 네 권의 백제사 관련 단행본을 펴냈다.36년 동안 몸담았던 계명대를 퇴직한 이후에는 대학 강의를 접고 최종 목표로 삼은 백제생활문화사 연구에 집중하면서 저술활동과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의미와 가치를 지키고 열어갈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공연 무대에 뮤지컬 바람이 거세다. 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뮤지컬은 다소 부침이 있긴 했으나 지속적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뮤지컬의 성장은 반갑지만 워낙 편식이 심한 우리의 문화 환경에서는 자칫 다른 장르의 침체를 불러오는 후유증을 예고하기도 한다.비슷한 시기, 우리 공연무대에서 시도되기 시작한 또 하나의 양식이 있다. 창작 오페라다. 한국적 오페라를 내세운 창작 작업은 그리 짧지 않은 시간동안 지속되어왔지만 여전히 관객들에게는 낯설고 실험적인 양식이다. 전국적으로 수많은 오페라단이 창작오페라를 제작하고 올려왔으니 양적 성장으로 본다면 그 성과가 크지만 오늘의 무대에서 관객들과 잘 호흡하고 있는 창작오페라의 면면은 그리 탄탄하지 않다.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창작오페라의 부질없는 명멸은 안타깝다.그럼에도 지난해 우리지역에서 만들어진 창작오페라가 2014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에 선정됐다. 〈논개〉에 이어진 두 번째 결실이다. 게다가 이 두 작품 모두 지역적 소재를 끌어들인 토종 오페라다. 이 두 작품을 써낸 작곡가 지성호씨(62)를 만났다. 그는 한국적 오페라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스스로는 한국적 오페라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서양음악 작곡을 전공한 그는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지역의 이야기에 판소리를 끌어들인 새로운 오페라 양식을 입혀내는 작곡가다. 판소리와 오페라가 만나는 무대. 그의 작업은 도창이 관현악단의 연주에 맞춰 판소리를 하고, 벨칸토 창법의 성악가들의 우리언어의 특징을 살려 노래 부르는, 이 순탄치 않은 노정으로 이루어진다. 대작만 5개 작품을 얻어낸 과정에서 그는 한국적 오페라 양식의 답을 얻었을까.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이태리에서 만들어진 오페라의 역사를 보면 그 답은 더 확연해집니다. 나라마다 가진 언어의 독창성이 이태리 오페라를 프랑스 오페라로, 독일 오페라로 분화시킨 것이거든요. 한국적 오페라에 판소리를 주목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지요. 언어에 의해 결정되는 음악적 양식에서 그 답을 찾고 싶습니다.완주군 구이면, 아름다운 그의 작업실 겸 자택에서 가진 인터뷰는 즐거웠다. 작곡의 길에 들어선지 30여년, 창작오페라 작업만으로는 10여년. 한국적 창작오페라의 길을 내고 있는 그의 작업은 아직 외롭지만 의연했다.-정원이 참 아름답군요. 마음이 편해집니다.이곳에 들어온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처음에는 어설펐는데 꽃도 나무도 제자리를 찾은 것이죠. 돌봐야하는 시간이 필요하긴 하지만 이제는 일상이 되어 번거롭지 않습니다.-모든 작업을 이곳에서 다 하십니까.요즈음에는 컴퓨터로 모든 과정을 다 진행할 수 있으니까요. 작업실은 서재 안에 아주 작은 공간으로 만들었는데, 제가 곡감옥이라고 이름 붙일 만큼 문만 닫으면 바깥과는 단절되는, 그래서 온전히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곡감옥이란 이름이 재미있군요. 그만큼 고통의 시간을 거친다는 말씀이군요.오페라 작업이 시작되면 거의 1년 정도 다른 작업은 병행할 수 없게 됩니다. 감옥 생활과 다를 바 없죠. 저는 오페라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의도적으로 어떤 모임도 갖지 않거든요. 스스로 묶이는 것이죠.-이곳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습니까.시내 아파트에 살 때도 사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없었어요. 하루는 잠을 자고 있는데 아파트가 들썩거리는 거예요. 2002년 월드컵 축구경기 때문이었는데, 밖을 보니 아파트 전체가 온통 불을 켜놓고 축제분위기더라고요. 그때 나만 외로운 섬에 고립된 존재처럼 여겨졌어요. 아파트에 살면 안 되겠다 싶더군요. 그즈음 모악산을 다니다 이 마을을 만나게 되었어요.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집을 지어 이사를 했는데 처음에는 낯설어서 또 마음고생을 했어요.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렸죠.-이런 공간을 마련하니 곡이 절로 써지던가요.(웃음)천만에요. 이곳으로 들어온 뒤 5년 동안은 오히려 한곡도 못썼어요. 집짓느라 안게 된 경제적 부담이 컸거든요. 집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에 회의도 컸죠. 얼마 전에야 자유로워졌는데,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 의지를 세우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물론 중요한 것은 어떤 의지를 세우느냐겠죠.-서양음악의 교육을 받고 작곡을 전공했는데, 판소리를 접목한 한국적 오페라 양식을 시도한 계기가 궁금합니다.사실 이전에는 실적위주에 급급했어요. 계기가 있었죠. 우석대 심인택 교수님이 여러 번 국악 곡을 의뢰했어요. 국악은 공부하지 않은 분야여서 처음엔 거절했는데 지속적으로 권하시는 거예요. 함께 작업하면서 맞춰 가면 된다고 하시니 그 꾐에 넘어갔죠.(웃음) 한곡이 두곡이 되고, 소품이 대작이 되고.경험이 축적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다 결정적인 계기를 만나게 됐죠.-결정적인 계기라는 것이 대서사음악극 혼불인가요.맞습니다. 월드컵이 있던 2002년 1월이었는데, 그해 월드컵 문화공연을 전주시립예술단체가 연대해서 혼불을 공연하기로 했어요. 처음에는 작품 전체 중 한 부분인줄 알았는데 전체를 다 써야 하는 것이더라고요. 단호하게 거절했죠. 결국은 다 맡을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책임감과 긴장감이 더해지면서 포기의 유혹이 커지고 내가 분수에 맞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겹쳐지면서 정말 고통스러웠어요. 하루 3시간씩 쪽잠 자면서 겨우 완성을 했죠.-그 무대가 200명이 함께 섰던 공연이었잖아요. 성공적인 공연이었고 평가도 좋았죠.감사한 일이죠. 관객이 들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는데 다행히 공연장 계단까지 관객들이 찼을 정도로 관심이 컸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내 작품을 200여명의 전문가들이 땀흘려가면서 현실화시켜가는 과정도 그렇지만 무대에서 내 생각이 구체화 될 때의 그 희열은 정말 벅찬 감동이었어요. 곡을 통해 내 존재감이 무대 위에 구현될 때 의지가 더 단단해지더군요. 이를테면 강한 중독성 같은 것인데, 그것이 결국 다음 작품을 다시 쓰게 되는 바탕이 되게 했어요.-그 작품은 음악극이긴 하지만 오페라 양식은 아니었죠. 한국적 오페라로 판소리를 도입해 만든 첫 작품은 어땠습니까.정읍사를 주제로 한 달하 노피곰 도다샤였어요. 첫 작품이어서 대단한 열정을 쏟았는데 잘 살아나지 못했어요.-판소리를 끌어들인 오페라 양식으로서는 처음이었는데 그런 형식의 시도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정말 고민을 많이 했어요. 연행 방식이 전무하기도 했지만 판소리를 하는 분들은 구전심수로 악보 없이 소리를 익혀왔잖아요. 게다가 국악에서 기보법은 최소한의 기호일 뿐 전부는 아니거든요. 양악에서는 전부지만 시김새나 농현 등으로 구현해내는 국악은 연주자의 몫으로 이뤄지는 것들이 많죠. 그런데 오케스트라의 속성은 그런 여지를 두지 않고 기계처럼 일정한 시간 속에서 정확하게 약속을 한 내용으로만 가능한 것이니까요.-형식도 그렇지만 국악과 양악은 기본적으로 철학이 다르지 않습니까.기본적으로 이념이 다르죠. 그래서 접목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저도 의심했어요. 그러나 기왕에 의뢰를 받은 마당이고 저는 작곡가니까 위촉자의 의도를 또 존중하지 않을 수 없죠. 그래서 모험을 한 겁니다.-그 작품으로 가능성을 얻었습니까.그 곡을 통해서 무엇을 실험하고, 찾아야하는지에 대한 답을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판소리 연행방식이 오페라와 연행 방식과 공통분모가 있다 해도 각자의 소리가 추구하는 본질자체가 달라서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았는데 그 작품을 통해서 많은 방식을 깨우쳤죠.-며칠 전에 지인의 페이스북에 올려놓은 선생님의 댓글을 읽었습니다. 짧지만 명료한 분석이 국악과 양악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더군요.늘 갖고 있던 생각이었어요. 전주에서 활동하는 덕분에 국악 양악을 넘나들게 되었고 그렇다보니 제 나름의 견해가 생겼거든요. 국악의 기보는 최소한의 영역이지 모두는 아니라는 것, 시김새나 농현과 같이 연주자의 해석의 몫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작곡자는 언제나 이 여지의 공간을 비어둘 줄 알아야 합니다. 서양악기는 발현되는 소리가 한번 울려 퍼지면 큰 변화가 없지만 국악기는 그 소리를 생성과 소멸까지 내면화해서 끌어올리고 끌어내리고 흔들고 꺾으면서 아주 변화무쌍한 세계를 만들어내거든요.-그런데 그 특성 때문에 판소리와 접목한 창작오페라에 대한 편견이 여전히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판소리를 끌어들인 한국적오페라가 갈 길이 멀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공감하게 됩니다.오페라사를 보면 이태리에서 만들어진 오페라가 자연스럽게 분화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 오페라와 독일 오페라인데 그것의 중심축이 언어거든요. 언어의 독창적인 구조 속에서 오페라 분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저는 주목합니다.-문화 예술에 있어서 언어는 중요한 영역이죠.노암 촘스키도 모든 문화는 언어에 의해 결정된다고 했잖아요. 우리나라에 오페라가 들어온 지 70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한국적 오페라를 정립하지 못한 바탕에는 바로 언어의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작곡가들의 화두는 아마도 정체성일 텐데, 오늘의 문화환경에서 보면 모순된 점이 많거든요. 우리문화 저변에 여전히 식민의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 있고요. 그렇다면 우리다움, 독창성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되지 않겠어요. 한국적 오페라를 구현하는 일도 마찬가지죠. 저는 그 답을 우리 모국어에 충실하자는데서 찾겠다는 겁니다. 거기에 내가 살고 있는 전주라는 지역성과 판소리의 고장으로서의 정체성을 담아내고 싶습니다.-이 작업에 대한 음악전문가들의 관점이 궁금하군요.인색하죠. 처음에는 판소리 형식을 도창이라는 역할로 끌어들였는데, 아니리만으로 연결하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평론가들은 무반주로 그 부분을 처리하는 것에 대해서 작품성 운운하면서 지나치게 가볍게 처리한다고 의심했죠. 저는 판소리의 본래 특성을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는데, 그래서 할 수 없이 오케스트라 반주로 도창이 소리하는 형식으로 바꾸었습니다.-무대에 서는 성악가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나요.어렵죠. 소리꾼 한명이 들어옴으로써 오페라의 전체 색깔이 달라지는데, 서양의 벨칸토 창법을 훈련받은 성악가들이 판소리적 언어를 습득해야 하는 과정이 쉽지 않거든요. 그래도 제 작품을 할 때는 노력해달라고 주문합니다. 소리의 공명에 매달리지 말라고요. 그것은 본질이 아니라 일종의 테크닉이거든요. 우리 언어는 첫음절에 악센트가 있잖아요. 게다가 모음과 자음을 잘살려야 가사를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으니 자음을 소홀히 취급하면 안 되죠.-선생님 오페라에서 실상 판소리가 차지하는 부분은 크지 않던데요.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무엇입니까.판소리의 분량이 적긴 하지만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죠. 제 오페라의 판소리들은 정통적인 판소리가 아니라 우리 언어를 노래화하는 것과 판소리가 갖고 있는 목소리의 색깔을 끌어들이는 것에 무게를 둡니다. 우리 독자성을 갖는 오페라를 만들어내는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지역성을 갖고 있는 작곡가로서 판소리를 오페라로 끌고 오되 오페라의 전부가 아니라 부분적인 도입을 통해 한국적 오페라의 색깔을 내는데 중요한 모멘텀으로 만들고 싶어요.인터뷰는 애초의 약속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끝이 났다. 오페라를 창작해내는 과정의 지난함만큼이나 쌓아온 시간 속 이야기가 많았다. 지역에서 작곡가로 사는 이면을 듣고 싶었지만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학연과 지연이 우선되는 서열 중심의 풍토에서 회의를 단 한 번도 갖지 않았다면 거짓이지만 되돌아보면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는 깨달음이 삶의 큰 힘이에요.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의 작곡가로서 누구 못지않게 행복한 여건에서 작업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지성호씨는] 지역 이야기에 판소리 접목불편한 옷 입고 쪽잠 자며 곡 써지성호씨는 부여에서 태어났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전주로 온 이후 줄곧 전주에서 살았다. 그의 유년시절은 음악으로 차고 넘쳤다. 교회 풍금 반주자였던 고모는 늘 어린 조카를 옆에 끼고 노래 부르며 음악을 들려주었다. 돌아보면 그의 음악적 자질은 그때부터 싹을 틔운 셈이다. 공무원에서 사업가가 된 아버지는 음악에 특별한 애정과 관심이 있었다. 덕분에 형제들은 어린 시절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거나 피아노를 쳤다. 그가 인문계 고등학교(전주고)를 다니면서도 음악을 전공하고 싶다고 나섰을 때 아버지는 기꺼이 응원군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아버지의 사업이 주저앉으면서 그가 그렸던 미래는 불투명해졌다. 동가숙 서가숙하던 시절, 울산에서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고 있던 친구 누나를 찾아가 일을 도왔다. 누나의 권유로 계명대 음대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지만 적응하기 어려웠다. 군대를 다녀와 복학하지 않고 때마침 신설된 전북대 사대 음악과를 다시 들어갔다. 교사라는 안정된 직업과 작곡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진안의 고등학교 교사가 됐다. 교육자로서의 길은 생각보다 낯설었다. 교사생활 6개월 만에 대책 없이 사표를 냈다. 대학 2학년 때 초등학교 동기와 결혼했던 그는 가장이었다. 1990년대 후반, 우석대 국악과 심인택 교수와 인연이 되어 국악관현악단의 연주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양식과 철학이 서로 다른 우리음악과 서양음악을 악보로 만나게 하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우리음악의 아름다움에 그때 눈을 떴다.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전주 시립예술단체가 함께 서는 무대의 작품을 의뢰받았다. 대서사음악극-혼불이었다. 대본이 완성된 것이 2월, 그에게는 고작 3개월 남짓한 시간이 주어졌다. 분수에 맞지 않은 일을 맡은 대가는 컸다. 혼불 작가 최명희 선생 유족은 원작에 누가 되지 않게 해달라는 경고성(?) 요청을 두 번씩이나 그에게 안겼다. 부담은 배가 됐다. 깊은 잠에 들까봐 일부러 불편한 옷을 입고 하루 세 시간 쪽잠을 자면서 곡을 쓰기 시작했다. 면도할 시간도 아까워 방치했던 수염은 그때 얻은 격전의 전리품이다.산고 끝에 만들어진 혼불은 그의 삶을 변화시켰다. 창작오페라 작곡 의뢰를 받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판소리를 접목한 한국적 오페라 작곡이 시작됐다. 첫 작품은 달하 노피곰 도다샤. 이후 〈서동왕자와 선화공주〉 〈논개〉 〈흥부와 놀부〉 〈루갈다〉 등 10여 년 동안 대작만도 5개가 창작되어 관객들을 만났다. 오페라에 판소리를 접합시킨 독특한 양식은 한국적오페라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지난해 전주의 호남오페라단 공연으로 전주와 서울에서 발표된 루갈다는 지성호식 창작오페라의 정점으로 평가 받았다. 창작 기간만 2년이 넘게 걸린 〈루갈다〉는 〈논개〉에 이어 2014년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에 선정되는 기쁨을 안기도 했다.음악미학을 담은 책을 내고, 오페라 무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보다 더 아름다운 한국적 창작오페라를 만들어내는 일이 남은 과제. 22년 전, 작곡에만 온전히 몰두하기 위해 직접 짓고 이사한 완주군 구이면 작업실을 겸한 자택에서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장 행복한 작곡가로 살고 있다.
대한민국이 메르스 공포에 휩싸여있던 때, 식인물고기 가 뉴스에 등장했다. 지난 7월 초였다. 강원도 횡성 한 저수지에서 발견되었다는 피라니아가 주범이었다. 아마존에 사는 식인물고기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것은 처음. 외래어종의 무분별한 유입이 가져올 생태계 파괴의 공포가 확산될 조짐이 일었다. 저수지의 물을 다 퍼내고도 더 이상의 식인물고기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다행이었다.사실 외래어종의 환경생태계 파괴는 이미 오래전에 제기됐던 문제다. 우리에게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던 황소개구리가 대표적인 예다. 환경문제에 무지했던 우리에게 황소개구리의 등장은 충격이고 공포였다. 외래어종의 무분별한 유입으로 토종어종은 위기에 처하고 생태계는 불안해졌다.그러나 돌아보면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고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갈 수 없게 된 절박한 현실은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결과다. 외래어종의 유입이 아니어도 산업화와 경제성장에 따른 환경오염의 정도는 이미 도를 넘어선지 오래 아닌가.물고기 박사 김익수 교수(73, 전북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40년 넘는 학문의 길을 물고기 연구에만 온전히 쏟아온 그는 90년대 황소개구리를 발견해 외래어종의 생태계 파괴 문제를 우리사회에 확산시킨 어류학자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새로운 물고기종을 발견해 자신의 이름을 딴 학명을 붙인 그는 학문적 업적으로도 국내외의 주목을 받아왔다. 그러나 우리가 그를 주목해야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전주, 이 도시를 끼고 흐르는 전주천의 생태계 역사가 그의 연구 노정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1975년부터 시작된 그의 전주천 조사 연구 작업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올해로 40년, 연구의 족적은 한 도시의 생명줄처럼 흐르는 전주천의 오늘과 맞닿아 있다.그는 2000년대 초반에 시작된 전주천 살리기 작업의 중심에 있었다. 그것도 수많은 자치단체들이 주목했던 공원형 하천으로의 인공적 복원이 아니라, 스스로 흐르면서 수많은 생명들을 들여와 공존하게 하는 자연형 하천으로의 복원을 갈망했다. 오늘에 이르러 전주천이 국내 많은 도시들의 벤치마킹 사례가 된 것은 그의 고집(?)이 주효한 덕분이다.여러해 전에 대학 강의를 접고 연구와 신앙 봉사 활동으로 일상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는 김교수는 인터뷰를 꺼렸다. 몇 번의 권유 끝, 7월 초 가장 더운 여름 한낮에 한옥마을에서 만난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고기 이야기를 참으로 재미있게 들려주었다.자연은 인간이 필요에 따라 이용하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공동 운명체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지는 듯 하면 어김없이 튀어나왔던 말이다.-건강해보이십니다. 요 며칠 식인물고기 등장으로 외래어종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습니다. 우려와는 달리 더 이상 확산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져 다행인데 매체들이 너무 과도한 추측과 해석으로 여론을 주도하지 않았나싶기도 합니다.경계할 일이긴 했지만 지나치게 과민했던 것 같아요. 드러난 개체수도 생각했던 것보다 적었고, 확산된 형태도 아니었죠. 조사를 제대로 하고 발표를 했더라면 이렇게 해프닝으로 끝나지는 않았겠죠.- 피라니아 사건을 보면서 황소개구리 생각이 났습니다. 교수님 연구팀이 제기했었죠.그때 저희 연구팀이 여러 해 동안 전국의 강을 조사하고 다녔는데 어느 해인가 여러 곳에서 황소개구리가 많이 발견됐어요. 조사해보니 처음에는 식용으로 황소개구리를 들여왔는데, 양식 하기 쉽지 않게 되니 방치하게 되고 개구리들이 그 틈에 밖으로 튀어나가 산야를 거쳐 강이나 저수지에 들어가면서 문제를 일으키게 된 것이더라고요.-그즈음에 전주천 살리기가 시작되었습니까.그 뒤가 아닌가 싶은데요. 1992년 리우환경회의에서 환경문제에 대한 중요성이 대대적으로 제기되었어요. 의제 21이 발의됐죠. 2000년엔가 전주도 의제 21이 만들어졌는데 제가 운영위원장을 맡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전주천 살리기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당시 많은 도시들이 비슷한 사업을 동시에 추진했었는데요.도시가 개발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환경은 심각하게 오염되기 시작했죠. 특히 도시를 끼고 흐르는 하천은 그 정도가 매우 심각했습니다. 그래서 정부가 오염된 하천을 공원화하는 사업을 들고 나왔어요. 전주도 그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전주의제21과 시민단체들이 공원화 사업 대신 자연형 하천으로의 복원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죠.-어려움은 없었습니까.이미 설계까지 끝난 상황에서 복원 방향을 돌리는 일이 쉬웠을 리 없죠. 그때 김완주 시장님을 찾아가 설명하고 공무원들을 설득했어요. 공원화 사업은 펌핑으로 물을 끌어올리는 형식이 중심인데, 그것은 인위적인데다가 하천이 자생력을 갖기 어려운 형식이거든요. 시간이 좀 걸려도 스스로 생명력을 찾아가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빨리 결과를 내야하는 자치단체로서는 선택하기 쉽지 않았을겁니다. 그래도 끝내 주장을 굽히지 않고 설득했는데, 다행히 우리 뜻이 받아들여졌어요. 자치단체장의 철학과 의지가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자연형 하천으로 만드는 일이 바람직하긴 하지만 그 과정도 그렇고 확인된 사례가 있었나요.자연형 하천으로 복원한 사례는 없었지만 공원으로 추진해 실패한 사례가 있었거든요. 대구나 광주가 그 예인데, 제가 현장에 가서보니 흐르는 물이 오염된 물 그대로더라고요. 펌핑으로 물을 끌어올리느라 한 달에 들어가는 예산이 1억이라는데, 흐르는 물의 양은 많지만 그 물이 오염된 그 자체인데. 어처구니가 없더라고요.-자연형 하천으로 복원하면 전주천이 살아날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습니까.그런 확신은 있었죠. 제가 1975년에 전주에 왔는데 그때부터 전주천 상류를 조사하기 시작했거든요. 상류에 쉬리가 살고 있었어요. 하류로 내려가면 한벽루 부근부터는 이미 오염되어 쉬리 같은 물고기를 찾아볼 수 없었지만 상류는 잘 유지되고 있었죠. 자연형 하천을 만들면 쉬리가 자연스럽게 하류 쪽으로 내려가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그 확신은 주효했습니까.물론입니다. 쉬리는 여울에만 사는데 하천을 직선으로 조성하면 여울이 만들어지지 않죠. 에스자형으로 하천을 조성해나가면서 여울과 소를 반복적으로 만들어놓으니 쉬리가 하류 쪽으로 내려왔어요. 그래서 쉬리가 사는 전주천이란 이름도 얻게 되었죠. 물고기는 서식처를 다양하게 만들어주어야 다양한 종이 어우러질 수 있습니다.-때마침 쉬리가 영화로도 나왔었잖아요. 깨끗한 물에서만 살 수 있는 물고기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되었죠. 쉬리가 사는 전주천도 효과를 톡톡히 봤어요.(웃음) 실제로 쉬리는 색동옷처럼 예쁜 색색이 줄무늬를 갖고 있는 물고기예요. 깨끗한 물에서만 살 뿐 아니라 매우 민첩하죠. 저는 쉬리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유어종이라고 내세웁니다.-오늘에 이르러 전주천은 전주라는 도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많은 자치단체들이 벤치마킹을 했었죠.성공적으로 하천을 복원한 모범 사례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사실 자연형 하천 복원은 우리보다 환경에 먼저 눈을 뜬 일본에서 운동이 이뤄지고 있었어요. 저희도 전주천에 적용을 했는데, 그 성과가 적중한 셈이지요.-70년대부터 전주천을 들여다보아온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저는 75년에 전북대 교수가 되면서 전주로 오게 되었습니다.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프로젝트와 관계없이도 제가 살고 있는 지역의 하천 생태계를 연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완주 쪽과 전주천 상류 쪽으로 돌아보니 물고기 환경이 아주 좋더라고요. 제게는 천혜의 연구실이었습니다.-전주천의 생태사가 교수님의 연구 노정에 놓여있는 셈이군요.너무 과한 평가고요. 전주천에 대한 연구는 전북대 공대 김환기 교수와 함께 진행했어요. 김교수님은 수질 전공이어서 조사 연구한 내용을 전주천 수질 오탁과 어류 군집이란 주제로 묶어 함께 발표하기도 했죠. 그것이 아마 본격적인 전주천 연구의 시작이랄 수 있을 겁니다.-일찍부터 학문의 융합이 이루어졌군요. 교수님의 학문적 성과 또한 국내외적으로 주목을 받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학명이 교수님 이름으로 붙여져 발표되었죠.참종개가 그것인데, 기름종개과(혹은 미꾸리과)에 속한 열여섯 종류 중 한종입니다. 제가 발견한 신종이어서 제 이름이 학명으로 붙여졌어요.-학술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성과로 평가하던데요.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신종을 많이 발표했습니다. 제 경우는 한국인이 우리나라 물고기를 처음 발표하는 것이어서 주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말씀을 듣다보니 우리나라 어류연구의 학문적 성과가 궁금하군요.한국은 해방 이후 어류 연구가 시작되었어요. 그런데 1세대 연구자들은 일본 유학파가 대부분이어서 대표적인 연구자들도 자기 연구보다는 일본인들의 연구성과를 소개하는 역할을 주로 했지요. 그렇다보니 독립적인 연구작업도 그렇고 제자들을 키워내는데도 적극적이지 못했습니다. 연구를 진전시키는 데는 큰 걸림돌이 되었죠.-어류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경우 기초학문에 대한 연구기반 자체가 너무 허술한 것 아닌가요.맞습니다. 기초학문의 기반은 빠른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죠. 꾸준한 연구과정 속에서 학문적 성과가 축적되고 그것이 기반이 되어 다시 학문연구의 진전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현실은 금세 효과를 내거나 응용을 하는 것에만 눈을 돌리고 있잖아요. 저는 오늘날 대학들이 추구하는 방향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취업률과 발표논문의 수치 등 외형적인 성과에만 집착하고 있거든요. 대학은 사람을 길러내는 곳이어서 기초학문에 꾸준히 투자를 해야 해요. 현실은 그 반대로 가고 있죠.-도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보죠. 대도시 대열에 들어선 도시들의 경우 환경문제로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좋은 도시로 꼽히는 예를 보면 대부분 도심에 강을 끼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더군요.어쩌면 그런 조건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연은 인간에게 정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산업화의 과정에서 자연을 없애고 인위적으로 삶의 공간을 변화시켜왔죠. 시간이 흐를수록 그로 인해 우리가 받게 되는 대가가 너무 커집니다. 이제와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추구하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경우가 많죠. 한 도시에서 강의 존재는 그런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국가사업이면서도 우리 지역의 오랜 과제가 된 새만금은 어떻게 보십니까.저는 새만금 반대했던 입장입니다. 지금도 안타까움이 크죠. 새만금을 삶으로 본다면 먼 후대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미 방조제는 막아졌죠. 그러나 지금이라도 해수유통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생태계 문제를 조금이라도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해수유통은 말을 꺼내놓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다시피 했는데 최근 환경단체나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연구자들은 새만금 수질 오염을 우려하고 있던데요.4대강의 녹조현상을 보세요. 녹조는 물을 가두어놓은 환경으로부터 발생합니다. 새만금은 범위가 더 커서 녹조 문제가 아직은 심각하게 드러나진 않지만 남의 일이 아니거든요. 시화호가 큰 교훈이죠. 막았다가 결국 텄지 않습니까. 시화호는 규모가 작아서 빨리 일어났을 뿐 새만금도 서서히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전라북도는 동식물의 다양성 측면, 특히 어류의 경우 환경이 어떻습니까.전북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매우 다양한 환경을 갖고 있습니다. 4개의 국립공원을 안고 있고 동진강 만경강 금강 섬진강 낙동강이 흐르죠. 낙동강은 남원 운봉 쪽으로 그 상류가 지나갑니다. 이런 조건을 가진 지역이 또 있을까요. 자연여건으로 본다면 천혜의 조건이예요. 지금은 도시 발전 정도로 볼 때 뒤떨어졌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삶의 환경이 중요해지는 흐름으로 본다면 아주 소중한 자원을 갖고 있는 셈입니다.-자연환경이 미래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현실에서는 그 가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는 상황이 안타깝습니다.얼마 전에 한 TV프로그램에서 물고기를 특집으로 다루었더군요. 조기나 대구, 명태처럼 우리와 친근하고 좋아하는 물고기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겁니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유엔에서 예고한 우리의 미래가 있어요. 2040년이 되면 물고기를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인데, 상상해보면 정말 무서운 일이거든요. 환경생태학자들은 심지어 2100년쯤에는 지구가 끝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상황을 예측하면서 지금부터라도 환경 생태계를 보호하자는 이야기겠죠. 이미 선진국들은 이런 문제를 매우 중요한 정책으로 반영해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개발에 목매고 있는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상황이 매우 심각합니다. 갈수록 환경부가 멸종 위기종을 늘려가고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멸종위기종이 많아진다는 것은 우리의 생존문제와도 직결되는 문제거든요.김교수와의 인터뷰는 전주천에서 끝이 났다. 자연형 하천으로 복원된 전주천을 갖게 된 전주는 살기 좋은 도시가 됐다. 쉬리가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오고 수달이 돌아온 전주천은 여름 한낮 더 맑은 물로 흘렀다. 김교수가 오래전에 펴낸 책 〈춤추는 물고기〉에는 이런 글이 있다.지금까지 우리는 맑은 물이 있어야 물고기가 산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다양한 물고기가 물을 맑게 한다. 전주천의 존재가 더 새로워졌다.● [김익수 교수는] 신종 물고기 학명에 자신 이름 붙인 한국인 최초 학자김익수 교수는 새로운 물고기종을 발견하여 자신의 이름을 딴 학명을 붙인 최초의 한국인 어류학자다. 정작 그 자신은 그리 내세울 것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어류학의 영역에서 그의 학문적 업적은 빛난다.그는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일곱 남매 중 장남이었던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떠나 광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왔다. 대학에 들어갈 즈음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졌다. 어렸을 적부터 교사가 되고 싶었던 그는 선택의 여지없이 서울대 사범대로 진로를 정했다. 정말 대학생활을 잘하고 싶었으나 입학하던 해에 4.19 혁명이, 이듬해에는 5.16쿠데타가 났다. 현실이 불안한 만큼 마음을 붙잡아 줄 동력이 필요했다. 대학 1학년 때 성경을 접하며 신앙인이 되었고, 함석헌 선생을 정신적 스승으로 삼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취업을 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해에 서울대에 교육대학원이 생기자 대학원에 진학했다. 목포의 중고등학교에 자리가 나자 휴학을 하고 교사 생활을 했지만 부모님의 강권으로 대학원을 마쳤다. 늦게 군대를 갔다. 공군장교로 4년 4개월 근무하고 제대하니 서른이 넘어버린 나이, 취직은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서울대 은사를 찾아갔다. 때마침 연구 프로젝트를 잡아 연구원을 찾고 있던 스승은 그를 연구원으로 앉혔다. 물고기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조교로 있으면서 결혼을 하고 보니 안정된 직장이 절실했다. 때마침 전북대 교수 공채가 났다. 전공 분야가 딱 맞았다. 필기시험을 거쳐 교수를 채용했던 시절, 연고 없는 전주로 내려와 일주일동안 시험공부를 했다.75년 전북대 교수가 됐다. 전주천을 조사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어류연구로 치자면 2세대 연구자였던 그는 물고기 연구에 열정을 쏟았다. 우리나라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물고기종인 참종개를 발견했다. 학명은 그의 이름을 딴 익수키미아 코리시엔스(IKSOOKIMIA KOREENSIS).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학명을 등록한 최초의 한국인 생물학자가 됐다. 이후에도 그는 열여덟 종의 새로운 민물고기를 발견했으며 〈한국 미꾸리과 어류의 분류학적 연구〉를 비롯한 2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2000년부터 전주천을 자연형 하천으로 복원하는 일을 주도하면서 성공적으로 전주천을 일구어낸 그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이다. 한국어류학회 한국동물분류학회 회장, 천연기념물분과 문화재위원, 전주생태하천협의회 상임의장을 역임했다. 좋은 연구자를 키워내는데도 남다른 열정을 쏟았던 덕분에 한국의 어류관련 연구 활동의 중심에는 유난히 전북대 출신 연구자들이 많다. 대중들을 위한 책으로 감동적인 민물고기 이야기를 담은 〈춤추는 물고기〉와 〈내가 사랑한 우리 물고기〉를 펴냈다.
4년 전 여름. 전시실 벽면 한쪽을 채운 수묵 채색화 집으로 가는 길이 거기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등지고 걸어가는 거리의 풍경. 몇몇은 깃발을 들고, 몇몇은 바랑을 지고, 또 몇몇은 맨손으로 뒷짐 지고 걸어가는 모습이 서러웠다. 그들 뒤로 놓인 그림자가 키보다 몇 배나 더 길게 드리워진 시간, 떠있는 섬처럼 보였던 군중의 거리풍경 앞에 여러 명 관객들이 쉬이 지나치지 못하고 서있었다.그 해, 화가 박홍규씨(57)의 그림은 그렇게 세상과 만났다. 그는 자신의 언어였던 판화와 만화 대신 한국화로 관객들을 불렀다. 형식은 변했으나 농민들의 삶과 농촌 현장에 더 굳건히 발을 딛고 선 그의 그림은 강하고 깊었다.엄혹했던 80년대, 그는 민중의 현장성과 대중성을 미술의 지향이라고 굳게 믿었던 골수(?) 운동권이었다. 그가 택한 현장은 농촌. 농민이 되고 싶었던 그는 80년대 중반, 세상과 결별하고 농사꾼이 되었지만 붓을 꺾진 못했다. 그는 예술적 그림을 그리는 대신 농민운동을 위한 포스터를 그리고 유인물을 제작했으며 구호를 쓰고 만화로 농민들의 우울한 삶을 형상화해냈다.1999년 들에서 여의도까지로 개인전을 가진 이후 11년 만에 가진 전시회가 주목을 끌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80년대 농촌으로 들어간 진짜 농민운동가 박홍규는 진짜 화가로 돌아왔을까. 화답이라도 하듯 해마다 개인전을 이어오고 있는 그의 삶이 궁금했다.그는 지난해 늦가을부터 다시 판화로 돌아와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순회전시를 가졌다.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맞아 가진 그의 판화전은 잠시 비켜나있는 듯 한 예술의 사회적 복무(?)를 다시 상기시켰다.지난 5월 중순 장흥 전시를 마무리 한 그를 완주군 이서면 허름한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그는 지금 화가로 돌아와 있다. 목판위에 그림을 새기고 만화를 그리는 일로 온전히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 보면 그렇다. 그런데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는 어디에 서있어도 농민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0년 동안 함께 일 해온 농민들과 땅이 그의 가슴과 머리에 그대로 안겨 있었기 때문이다.문화와 예술은 그 시대의 반영입니다. 그러니 시대의 진실과 아픔을 외면하면 안 되죠. 제가 다시 붓을 든 이유이기도 합니다.분출한다는 그의 열정 덕분에 우리는 한 시대를 건너는 농촌과 농민들의 자화상을 자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고마운 일이다.-장흥 전시가 동학 순회전 마지막이었던가요.올해도 계속 작업을 하고 있으니 연작은 더 이어지겠지만 120주년 기념 전시로는 그렇습니다.-전시회에 대한 관심이 컸습니다. 기록화란 의미도 그렇지만, 역사적 사료와 작가적 상상력이 만나 역사를 읽게 하는 힘이 더 컸던 것 같아요.그랬다면 다행입니다. 이 작업을 하면서 저는 마지막 절체절명의 순간과 맞닥뜨리는 120년 전 사람들의 운명을 생각했어요. 피노리 가는 길을 그리면서는 혁명의 패배에 따른 도피길이 아니라 새로운 결전 새로운 준비를 위한, 어쩌면 필연적으로 가야할 숙명의 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현재의 우리 삶과 운동을 돌아보니 갑오년이 우리에게 주는 과제가 더 무거웠습니다.-여의도 국회에서 전시를 했던 것이 재작년이던가요. 빈집의 꿈이란 주제가 뭉클했습니다. 그만큼 메시지도 강했을 것 같습니다.어찌하다보니 국회에서까지 전시회를 하게 되었어요. 그즈음 농촌의 현실 중에서도 빈집을 두고 떠난 사람들과 아직도 빈집을 이웃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었는데, 주제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정해졌죠.-80년대 민중문화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하셨는데, 이제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예술의 역할도 바뀌었다고 생각하십니까.지금은 그림으로 세상을 바꾼다거나 하는 거창한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리는 그림에 대해 아직도 이런 그림을 그리냐고 비난한다면 그것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내 그림은 나만의 그림이 아니라 함께 일하고 부대껴온 농민들의 애환과 절망 희망이 다 담겨있기 때문이지요. 예술은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그 시대의 반영이어야 합니다.-20대에 작가의 길을 버리고 농촌으로 갔지만 다시 화가로 돌아왔습니다. 물론 박홍규란 이름은 그냥 화가가 아니라 농민화가로 훨씬 익숙합니다. 농사를 짓는 일은 이제 끝났습니까.사실 젊었을 때는 농사도 짓고 운동도 하면서 그림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오만했죠. 저는 온전히 농민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농민운동의 현장에서 저를 다시 화가로 불렀어요. 걸개그림을 그리고 구호를 쓰고 깃발을 만들어야 했으니까요. 농사일을 손에서 놓고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 4년 전인데, 지금은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그림에 대한 열정이 솟구칩니다.-그림에 대한 열정이 그렇게 큰데 어떻게 묻어두고 있었는지 궁금하군요. 물론 농민운동 현장에서 그리는 일은 계속해오셨으니 붓을 놓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아무래도 형식과 내용이 달라졌으니 삶에 큰 변화가 왔을 것 같습니다.농사일을 하지 않고 그림만 그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는 있죠. 그러나 제가 지향하는 삶의 목표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은 농민운동의 연상에 있거든요. 저는 저와 함께 부대끼며 살아온 농민들을 이 땅의 주인으로, 주체로 그림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들이 있어야 박홍규도 그림도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요.-한때 만화를 많이 그렸죠. 만화를 계속 그렸으면 지금쯤 잘나가는 만화가로 이름을 알렸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웃음)맞아요. 만화란 매체가 개인적 취향으로도 잘 맞았어요. 메시지를 바로 바로 전할 수 있는 형식이었으니까요. 농민운동의 연상에 있어서도 잘 맞는 틀이었죠. 되돌아보면 만화란 매체가 제가 목표했던 농민운동에 많은 기여를 했어요. 저 스스로도 만화 작업을 하면서 성격도 변하고 사회성도 넓어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리긴 합니다. 삽화도 그리고.-농사 빚이 쌓여 야반도주까지 생각하셨을 때 만화나 삽화를 그렸으면 해결되지 않았을까요.물론 생각했어요.(웃음) 출판사 섭외까지 했죠. 전북대와 전주대 앞에 있는 만화방을 뒤지고 다니며 잘나가는 만화를 다 분석했어요. 그때는 만화주간이 있을 정도로 만화가 잘나갔던 때거든요. 궁핍과 이 절망적인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는 판단이 있었으니까요. 필명으로 연재할 만화를 기획 했는데 실행은 못했어요.-농민운동 안에서도 선생님 만화가 기여했던 부분이 상당히 크지 않습니까.그렇죠. 전농의 역사가 박홍규 그림의 역사라고 이야기하는 분들이 있을 정도로 전농을 만들기 전부터 지금까지 판화, 만화, 포스터, 걸개그림, 유인물 등 거의 모든 농민운동의 매체가 제 손을 거쳤거든요. 그때 제 별명이 야 뺑끼였어요. 뺑끼통을 들고 다니니 붙여진 것이지요.-함께 하는 동료들이 없었습니까.농민운동 바닥에서는 없었어요. 80년대만 해도 치열한 논쟁이 있었잖아요. 이후 현장으로부터 민중문화를 일구어야 한다는 의식을 공유하면서 문화예술인들이 현장으로 많이 들어갔죠. 외곽지원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현장에서 함께 노동자들과 호흡하면서 그 사람들의 감성 심성 현장성 투쟁성을 배우고 익혀서 그것을 표현하는 작업이어야만 진정한 민중문화운동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농민운동 안에서는 그런 경우가 드물었어요. 우선 수적 적었으니까요.-의지와는 관계없이 농민운동 현장에서 붓을 놓지 못했던 이유겠군요.되돌아보면 그림 그리는 일은 제 선택이 아니라 떠밀려서 하게 된 일이라고 하는 것이 맞아요. 농사를 지려고 내려갔지만 그림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만화와 판화로 농민들의 생활, 투쟁, 설움, 절망을 담아내기 시작했고, 결국은 여러 매체들에 그 그림을 담기 시작하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거든요.-그래서인지 모든 작품이 농촌의 풍경과 농민들의 삶을 딛고 서있는데요.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주제가 너무 한정적이지 않은가요.한정적이라해도 제가 담아내지 못하는 부분들이 아직도 많아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제가 그림을 그리는 목적 자체가 농민들의 삶을 담아내고, 그들의 언어를 대신 표현해주는데 있다는 것이에요. 저는 제 그림이 농민들의 언어가 되기를 바랍니다. 치열하게 현장성을 담아야하는 이유가 거기 있지요.-농촌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농사를 지었는데 왜 그리 빚더미에 앉았는지도 궁금하고요.가장 큰 원인은 제가 지켜온 방식에 문제가 있었겠지요. 그러나 농촌의 현실은 저 개인 뿐 아니라도 여전히 궁핍하고 어렵습니다. 농사를 짓는 대부분이 빚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지요. 농민회 안에서도 현상 유지라도 하면서 농사를 짓는 분들은 몇 명 되지 않아요. 성공한 예도 있겠지만, 농촌의 현실은 투자를 많이 할수록 빚이 늘어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저도 전업농이었지만 규모를 늘릴수록 빚을 많이 지게 되더라고요. 구조가 그렇습니다. 규모화된 농사를 지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하는데 결과를 보면 빚잔치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요.-농민회 활동은 어떻습니까.지금은 힘을 많이 잃었죠. 우리나라는 FTA를 많이 한 나라잖아요. 그 때문에 농민들이 타격을 직접적으로 받았지만, 농민 내부를 보면 계층이 엄청나게 분화되었거든요. 예전에는 대농 중농 소농 정도로 구분하면 됐지만, 지금은 계층이 분화되면서 매우 복잡하게 되었어요. 전업농 정책이 20년 동안 실시되면서 돈을 번 귀족농민층도 생겨났지만 여전히 많은 분들, 특히 땅을 지키고 살아온 노인들은 소농과 빈농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죠. 이런 환경 속에서 농민운동은 자연히 힘을 잃을 수밖에요. 농민운동의 대중적 역량이 힘을 잃은 가장 큰 원인은 농업의 규모화와 인구의 노령화에 있습니다.-농민운동 30년 동안 현장을 지켜왔는데 현실이 그처럼 암울하다면 회의는 없습니까.농민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더 힘들어진 것이 맞습니다. 당연히 회의가 들죠. 그러나 현장을 떠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주변을 보면 정말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죠. 농민들 처지를 들여다보면 현재의 궁핍하고 고된 생활을 벗어날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런 상황을 벗어날 수 없는 사회적 구조나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정말 절망적이죠.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이유는 땅과 농민들의 삶으로부터 배우는 진리와 정직함을 알기 때문이에요.-이런 농촌의 현실을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요.지금으로서는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개방농정이 더 심화되고 있고 농민들도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잘 보이지 않아요. 그렇다고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겠다는 희망도 없고.-암울하군요.그래서 저희가 주장하는 것이 기초농산물 국가수매제인데 이를테면 쌀이나 보리, 밀 같은 작목을 국가에서 최저가제를 보장해주고 수매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래야만 기본적으로 식량자급도 되고 식량안보적 기능도 하고 최소한 농민들이 기초농산물만으로도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이죠. 도시 소비자들도 일정 가격에 그것을 살 수 있으니 좋고요. 몇몇 지방자치단체에서 기초농산물 수매 조례 제정을 준비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요.-요즈음 로컬푸드가 대세이다 보니 농촌의 현실이 좀 나아졌을 것이란 생각을 했는데.그런 경우는 아주 일부입니다. 지금은 친환경 농산물도 힘들어요. 친환경농산물은 기본적으로 보장을 해줘야 농사를 지을 수 있거든요. 계약제 형태로 가거나. 그런 환경이 안 갖추어지는데다 오히려 환경이 열악해지니 친환경 농산물도 쇠퇴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로컬푸드로 유지하고 있는 경우는 전체 농가 중에 불과 몇 프로에 불과할겁니다.-친환경 농산물이 쇠퇴하고 있다는 현실은 의외군요.친환경 쌀을 비롯해서 작목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판로가 보장되지 못하니까 농민들이 농사짓는 일을 꺼리거든요.-소비자들은 친환경 농산물을 원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수요가 많아졌을 것 같은데요.사실은 수요도 그렇게 많아지지 않았습니다. 일부계층의 이야기죠. 친환경 농산물은 학교급식으로 해결되는 것이 맞아요. 급식비가 지원되었을 때는 친환경 농산물에 대한 지원까지 더해져서 어느 정도 보장이 되었는데 지금은 지원을 끊은 자치단체가 많잖아요. 중앙정부도 마찬가지고. 친환경 농사가 쇠퇴하는 이유는 학교급식 문제가 영향이 제일 큽니다.-말씀을 듣다보니 농민운동의 현장을 못 떠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그 현장을 지켜오면서 가장 큰 안타까움은 어떤 것인가요.고생만하시다가 돌아가시는 농민들을 보는 것이 가장 서럽습니다. 농번기 때는 논밭에 나가서 일하시느라 새까맣게 타면서도 막걸리 한잔에 즐거워하시던 모습이 생각나서 서럽고, 농민회라도 나오면 뒷방 늙은이 되지 않아도 된다며 고마워하시던 모습이 생각나면 농민회 하나도 예전처럼 꾸리지 못하는 것이 죄스럽기도 하지요. 그런 기억을 되살리면 제가 더 열심히 그림을 그려야하는 이유와 힘을 얻게 됩니다.● [부안출신 박홍규 화가는] 농민운동 '반평생'민중미술 대표 화가화가 박홍규씨는 1959년생이다. 부안 주산면에서 태어났지만 전주로 고등학교를 오면서 고향을 떠났다. 고창고보를 나와 교사와 공무원을 지냈던 그의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면서도 새로운 문화에 대한 관심이 컸다. 중학교 시절 공부 잘하는 아들을 어머니는 전주로 유학 보내고 학기마다 시외버스에 쌀을 싣고 와 학비와 하숙비를 댔다. 그는 대학만은 꼭 서울로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예비고사 성적이 꿈을 꺾어 놓았다. 대학 입시를 두 달 남겨두고 그림공부를 시작했다. 서울의 대학을 가겠다는 일념이었다. 코피 쏟으며 노력한 덕분에 후기였던 홍익대 조소과에 합격했다. 국문과나 문창과에 들어가 글을 쓰고 싶었던 꿈은 그때 버렸다.대학에 들어가서는 학과 공부보다 부조리한 사회 현실에 눈을 돌렸다. 1980년, 대학 3학년 때 광주항쟁이 났다. 1학기를 마치고 군대에 갔다. 운동권 학생들의 언더서클과 탈춤반에서 활동했던 그는 군대 시절에도 농민들의 눈물겨운 소작쟁의를 다룬 송기숙의 소설 암태도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시대라고 생각했다. 군대를 제대한 후 그의 활동은 더 치열해졌다. 농민운동을 삶의 목표로 세웠다. 농사꾼이 되고자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85년 즈음, 가족과도 인연을 끊고 연고도 없는 부여로 갔다.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성실하게 농사일을 배웠다. 노지딸기 농사를 하는 주인집에서 1년 일하고 나니 땅을 얻을 수 있었다.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된 첫해 결혼을 했다. 그의 아내 역시 비슷한 시기에 서천으로 내려와 역시 농민운동을 위해 남의집살이를 하던 활동가였다.87년 충남권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비 피해로 논밭과 가축을 잃은 농민들이 속출했다. 생계가 막막해진 농민들이 거리로 뛰어나왔다. 그 중심에서 농민들의 조직적인 활동을 이끌다 89년 부여군 농민회를 만들었다. 작가로서의 꿈을 버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그는 다시 작가가 됐다. 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이 발족되면서 1기 문화국장을 맡게 된 그는 1년 동안 서울 생활을 했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돼 이듬해 전주로 내려왔다. 몸을 추스릴만 하자 완주군 고산면에 터를 잡았다. 농사꾼의 꿈을 실현하고 싶었다. 5-6년 하우스 농사를 짓다가 화산으로 이사해 1200평 정도의 땅을 얻어 규모를 늘렸다. 열심히 일했지만 5년이 지나고나니 그 앞에는 빚 2억이 놓여있었다. 가장 힘든 시절이었다. 빚에 시달리다 도저히 이렇게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야반도주까지 계획했지만 이서농민회 회원들이 집과 농사지을 땅까지 빌려두고 그를 붙잡았다. 4년 전부터 농사짓던 생활을 벗어나 그림 그리는 일을 전업으로 삼고 있다. 1999년 첫 전시회 이후 2011년에 두 번째 전시를 가졌으며 이후 해마다 전시를 열고 있다. 농민운동 현장에서 깃발로, 구호로, 걸개그림으로 이름을 알렸던 그는 이제 화가로만 대중들을 만나고 있다.두렁창립전, 힘전을 비롯해 80년대 민중미술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해온 그는 판화와 만화 한국화 등의 다양한 형식으로 농민들의 삶과 농촌의 현실을 담아내고 있다. 지난해에는 동학농민혁명을 형상화한 판화로 순회전시회를 가져 주목을 받았다.
호흡기감염증인 메르스가 전국을 강타하고 있었다. 이름도 낯설기 만한 이 감염병의 존재가 우리의 일상을 얼마나 큰 폭으로 변화시켜놓을지 앞날에 대한 전망은 불투명하고, 현실은 그만큼 불안해졌다. 사람들의 일상이 낯설어지면 도시는 질서를 잃는다. 한적해지거나 번잡해지거나 일상의 불편한 변화를 마주하는 일은 마뜩치 않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이 맞닥뜨린 이 불안한 현실은 거의 생중계하다시피하는 언론매체와 SNS의 전파력으로 피해갈 수 없는 일상이 되었다.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한 서울 여의도의 국회의사당. 대한민국의 질서를 이끌어야 하는 이곳에 들어서면서 한숨이 나왔다. 이 공간에서 행해져야 할 질서는 잘 행해지고 있는가, 그 가치는 존중받고 있는가. 심하게 굴곡진 시대, 그래도 희망을 보고 싶었다.새정치민주연합의 진선미 의원(48)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진의원은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초선의원이다. 민변에서 활동한 변호사 경력을 가진 그는 14년 동안 법조인으로 살아오면서 우리 현대사의 현장을 지켰다. 호주제 위헌소송, 양심적 병역 거부자, 성소수자, 여성 인권까지. 우연히 마주친 그 길에서 그의 30대와 40대의 삶은 치열하고 격렬했으며 의미 있고 아름다웠다.사실 그는 호주제 폐지에 앞장섰던 민변의 변호사 중 한사람이지만 그의 이름이 우리에게 더 넓게 알려진 것은 정치인이 되고나서다.그가 막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지난 대선에 나섰던 문재인 후보는 개인적인 친분도 정치적 경험도 없는 그를 대변인으로 불러들였다. 노심초사, 모든 열정을 바쳐 뛰었지만 그의 앞에 놓였던 절체절명의 꿈 정권교체는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더 단단해지고 치열해져야 했다. 변호사 진선미는 그 과정에서 그렇게 정치인이 되었다.그의 입법 활동은 유난히 주목을 끈다. 분명히 이유가 있을 터다.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에 맞닿아 있는 입법의 취지나 목표도 그렇지만 법안 발의에 이르기까지 그가 행하는 과정은 치열하고 엄정하다. 그를 만난 이유다.인터뷰를 하면서 그로부터 유난히 많이 듣게 된 단어가 있다. 왜냐면. 그런데 이 단어가 주는 감흥이 특별했다. 남다른 신뢰와 희망을 그에게서 보게 되었다. -국회 들어와 보시니 어떻습니까.죽을 것 같죠 뭐. 짐작은 했었지만 이 정도인줄은 몰랐죠.(웃음)-초선의원 답지않게 사회적 이슈를 몰고 다닌 탓 아닐까요.그래서 직접 경험이 정말 무서운 것이라는 걸 절감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많은 분들이 같은 길을 앞서 가셨는데도 나 스스로 경험해보니 괴리가 참 크더라고요. 공부를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지요.-오랫동안 국회 입성을 준비하고도 실패하는 많은 입지자들에 비해 진의원님은 수월하게 입성하신 셈이죠.사법연수원 다닐 때 선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10년 후 쯤에는 정치 분야도 여성들의 진출이 훨씬 많아질 것이라고요. 돌아보니 그 시점이에요. 여성에 대한 역차별로 얻은 결실이랄까요.-그런 차별이라면 많아질수록 좋을 것 같습니다.(웃음) 입법 활동을 활발히 해오셨는데, 국회의원의 중요한 역할이 입법 활동이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발의한 법안 대부분이 인권을 비롯한 우리 삶의 기본적인 문제를 담은 것들이어서 특히 활동이 주목을 모으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주민등록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내셨더군요.국회에 들어오고부터 지금까지 개인정보 유출 관련 사건이 지속되고 있어서 줄곧 그 해법을 고민해왔습니다. 전문가 시민단체들과 머리를 맞대어 왔지만 근원적인 해결방법을 찾아내기 쉽지 않았죠. 이 법안은 지난 3년 동안 고민하며 연구해온 결과물입니다.-의안 발의까지 준비기간이 꽤 오래 걸리는군요.제가 법조인이어서인지 법이 가지는 엄중함이나 의미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주제가 정해지면 전문가들과 지속적으로 소규모 간담회를 갖고 같은 문제를 고민해온 단체들과 행정 부서 담당자가 함께 만나 문제를 제기하거나 토론을 통해서 검증하고 또 검증하면서 집적된 결과를 법안으로 마련하죠. 그래서 많은 시간이 걸리는 편입니다.-발의한 법안이 많은데, 성과는 어떻습니까. 실제로 성과를 얻은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시작할 때는 그렇게 까다로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늘 그런 기대를 무너뜨리거든요.-진행되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절실한 법안은 어떤 것인가요.여러 가지가 있지만 형제복지원 진상조사 관련법이 현재로서는 가장 절실한 법안입니다.-그 법은 지난 4월에 통과될 것으로 기대했는데, 불발되었더군요. 국민들의 공분이 그렇게 큰데도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까. 전 정부에 대해 책임을 묻는 일이어서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해가 잘 안 되는 상황이죠. 이 문제는 개인적으로도 12년 전부터 관여를 했고, 법안은 햇수로 3-4년 되는데 결과는 늘 답답합니다. 동료 의원들의 합리적인 판단에 기대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국회의원 첫해부터 준비하신 생활동반자 관계에 관한 법률은 어떻습니까.그 법은 국회 들어 올 때부터 고민했던 문제입니다. 어떻게 보면 제가 국회에 들어오게 된 배경일 수도 있습니다. 변호사를 하면서 여성으로서 사명감을 갖고 접한 것이 가사사건인데 그 사건들이 이 법안을 마련하는 바탕이 되었어요. 3년째 다양한 방식으로 여론을 수렴하며 법안을 다듬고 있습니다.- 그만큼 법안 통과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겠군요. 호주제의 경우, 제도적 변화까지 끌어내는 데는 실질적인 작업만도 10년 이상 걸렸습니다. 그 과정을 이어오면서 우리사회가 가족에 대해 좀 더 유연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이법은 누구에게나 특별한 한 사람을 가질 권리를 부여하는 법률입니다. 삶을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함께 살아갈 것인가 그것을 선택할 권리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행복추구권에 해당하죠. 두 사람이 삶을 공유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고 지원해주는 일련의 제도에 접근할 권리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더 이상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권리의 문제거든요.-구체적으로 어떤 권리들이 있습니까. 국민건강보험국민연금보험수혜, 임대주택에 입주할 권리, 위급할 때 의료적 결정을 할 수 있는 권한, 가정폭력으로부터 공적인 보호를 받을 권리, 정책적 대상으로 고려되고 연구될 권리 등 무수한 제도들이 있죠.-이 법안에 대해 적지 않은 반발과 비판이 있던데요. 법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맞습니다. 사실 이 법은 가족을 해체하거나 혼인을 대체하는 제도가 아니거든요. 오히려 늘어나고 있는 혼인, 혈연 외 관계에 법적인 보호를 제공해 사람들이 함께 잘살아가도록 장려하고, 이를 통해서 사회적 안정을 이루도록 하는 법률이죠. 친족 중심의 가족제도로는 포함할 수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제도의 지체는 정상가족 밖의 사람들을 사회 밖으로 밀어내고 있는 형국입니다. 누군가가 겪게 되는 고독감을 극복하고 서로가 서로를 돌볼 수 있도록 믿고 의지하는 사람과 생을 나눌 수 있도록 하는 법이라고 저는 확신하는데, 사회적으로 고독과 우울의 증가를 막는다면 사회복지비용을 줄이면서도 사회적 통합이 가능해지지 않을까요. 이 법의 실제 내용이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반대의견을 갖고 있었던 분들도 막상 이 문제로 토론을 하면 굉장히 좋은 법이라고 생각이 바뀝니다.-화제를 좀 돌려보겠습니다.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검사나 판사가 되는 과정을 생략하셨더군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고민은 했었죠. 그 당시만 해도 곧바로 여성이 변호사를 하는 경우는 특히 드물었어요. 소위 영업을 해야 하니까. 환경적으로는 어려운 일이었죠. 사건을 수임해야 하는데 사법연수원 경력만으로는 차별성을 갖기도 어렵고요. 그래서 주위에서는 반대가 많았어요. 그런데 어느 한쪽에 서서 싸워주는 일이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일보다 제가 좀 더 잘할 수 있고 맞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행히 혼자 개업 하는 상황이었으면 부담스러웠을 텐데 좋은 선배들이 있는 법무법인에 들어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죠.-법무법인 덕수가 첫 직장이었군요.사법연수원을 마치고 99년 덕수에 들어갔는데, 당시에는 그 곳이 인권과 사회변화를 고민하는 젊은 법조인들이 일하고 싶어 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어요. 덕수에서 일하시던 이석태변호사님을 알게 되었는데 마침 여성 변호사를 찾고 있었던 차에 저와 인연이 닿았던 것이거든요. 저로서는 행운이었어요.-운동권 출신 변호사들이 주축이 된 법무법인에 합류하게 된 이후 더 새로운 길이 열린 셈이겠군요.그렇죠. 선배들 덕분에 사회적 이슈를 공부하며 공론의 중심에 서기도 했고, 그러면서 우리 사회의 면면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어요. 변호사가 되면서 바로 시작한 호주제 연구는 제 삶에 아주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고요. 덕수에서 일했던 10년이 제 삶을 바꾸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길을 열어주었습니다.-많은 사건을 접하셨을 텐데, 그 사건들을 변론하면서 개인의 삶 뿐 아니라 한국사회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킨 보람도 크겠습니다.개인적으로는 행복한 일이죠. 그런 중요한 현장에 함께 있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큰 의미니까요. 생각해보면 송두율 교수님 사건과 같은 이념의 문제부터 하리수씨 사건 같은 소수자의 인권, 고 최진실씨 친권문제 같은 가사분쟁 등의 사회적 이슈를 경험하면서 정치적 실험에 도전할 수 있는 의지를 갖게 된 것 같아요.-시위현장에 직접 나가게 되는 일도 많았겠군요.잘 단련이 되었죠.(웃음) 특히 변호사 초기에는 재건축 재개발과 관련해 철거민들을 오랫동안 도와주신 김형태 변호사님을 열심히 따라다녔어요. 그때 많이 경험했죠.-그러면서 현실적인 문제를 더 긴밀하게 이해하게 되었겠습니다.그때 그분들이 당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사회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저는 지금도 집을 소유하지 않고 임대로 살고 있는데, 그 때 철거민을 보면서 결심했거든요. 왜 재개발로 인한 이익을 소유주만 향유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가더라고요. 정의가 뒤바뀌었다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싸웠죠.-소수자의 입장에 서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사회적인 환경도 그렇지만 저는 특히 정서적으로도 힘든 일들이 많았어요. 눈물이 많은데다 다른 선배들처럼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지 못하거든요. 지금도 돌아보면 부끄러운 일이 많은데, 그래도 치열한 현장에 함께 있었던 10년이 오늘을 있게 해준 중요한 시간이라는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정치에 입문하게 된 배경이 짐작이 갑니다. 최근에 지역구를 맡으셨더군요.강동구를 맡게 되었는데 사실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지만 그래도 할 수 있다는 확신과 해야만 하는 과제가 주어져있으니 용기를 냈어요.-좀 더 강한 정치적 실험이 시작되는 셈인데요. 지역구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생긴 건가요.지역위원장인 이부영의장님이 손을 내밀어주셨을 때 많이 망설였어요. 고민이 많았습니다. 사실 쉬운 지역이 아니거든요. 이부영의장님께서 3선을 한 곳이긴 하지만 우리 당 소속이 아니셨잖아요. 그러나 아직 저의 정치적 실험이 마무리 되지 않았고, 더구나 정권교체라는 꿈이 아직 남아 있는 상황에서 어떤 역할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용기를 갖게 했어요.-대학을 가면서 고향을 떠나셨고 이제 강동에서 두 번째 정치인생을 시작하시는데 밖에서 보는 전북은 어떻습니까.전북은 갖고 있는 장점, 자산이 참 많죠. 한편으로는 소외되고 배척당한 역사가 있지만 그런 문화적 가치가 보호되고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라고 봅니다. 다만 우리가 오늘에 이르러 그런 장점을 진정한 가치로 받아들이고 있느냐의 문제가 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죠. 획일화된 관점에서 벗어나는 일이 쉽지 않으니까요. 가치관을 변화시키고 방향을 조금만 달리 보면 전북만큼 소중한 동력을 가진 곳도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동력의 가치를 재대로 보려하지 않거든요. 제가 만약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런 의식을 바꿀 수 있는 정책의 실현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인터뷰는 당초 정해진 시간을 훌쩍 넘어서야 끝이 났다. 그는 자신이 왜 정치인의 길을 가는가를 묻고 또 묻는 정치인이었다. 현실에 대한 명쾌한 분석과 풍부한 현장 경험으로 다져진 그의 논리는 눈물과 감정을 앞세우던 새내기 변호사의 진정성을 뛰어넘는 설득력으로 답과 질문을 넘나들었다. 그가 궁극적으로 정치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한 번 확인해보고 싶었다. 이런 답이 돌아왔다.2012년 정치에 뛰어들 때 지금까지 살아온 방향을 바꾸는 것에 대한 전면적인 고민을 해야 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죠.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확신이 필요한 지점.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해야할 가치, 지켜야할 가치를 위해 국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그 크고 작은 답을 구체적인 현장에서 찾아내는 일, 그것이 제가 정치적 실험을 이어가는 이유입니다.가뜩이나 웃음 많은 그의 얼굴이 더 환해졌다.● [진선미 의원은] 순창출신 법조인새정연 비례대표로 정치 입문진선미의원은 순창에서 나고 자랐다. 위로 아들 넷을 얻은 후 막내로 얻은 딸을 어머니는 여자는 조신하게 커야 한다는 엄격한 교육관으로 키웠다. 이산가족인 아버지는 초대 순창문화원장을 지낼 정도로 문화적 감성이 특별한 분이었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계는 고스란히 어머니 몫으로 안겨졌다. 어머니는 순창읍내에서 탁구장을 운영하며 아들 넷과 딸을 교육시켰다.중고등학교 시절은 수업료를 독촉받을 만큼 가난했으나 지금 돌아보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생각한다. 큰 오빠는 공부 잘하는 동생에게 법대 진학을 권유했다. 성균관대 법학과에 들어갔으나 법조인이 되겠다는 뚜렷한 목표는 없었다. 대학 1학년 때 과 선배를 만나 큰 굴곡 없이 대학생활을 했다. 그는 사회적 문제나 현실인식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학생운동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사시를 두 번 합격고서야 법조인이 된 큰오빠(진봉헌변호사)와 역시 운동권이었던 넷째 오빠로부터 얻은 일종의 자기 검열(?)이었다.대학 4학년 때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공부하는 동안 인생의 가장 큰 시련을 겪었다. 그때마다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던 사람은 10대에 만나 14년 연애하고 결혼한 남편이다. 이들 부부는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지만 아직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동거부부다. 호주제가 철폐되면 그때 혼인신고를 하자는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던 남편은 정작 호주제가 해결되자 제도에 얽매여 인생의 틀을 결정하는 것에 마음 내켜하지 않는 아내의 변심을 기꺼이 받아들였다.8전 9기로 사시에 합격한 그는 사법연수원 시절 생태와 마음공부 등에 관심을 갖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을 바꾼 책 <조화로운 삶>(스콧 니어링 부부 지음)을 만난 것도 이때다. 법조인으로서의 길을 이끌어준 사람이 그 책을 번역한 이석태 변호사였다. 그 인연으로 검사나 판사 생활을 거치지 않고 덕수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10년,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갈등의 현장을 선배 동료 변호사들과 함께 지키며 건강한 나라를 꿈꾸었다. 덕분에 우리 현대사의 굵직한 지점에서 호흡할 수 있었던 그는 수많은 변론으로 사회적 이슈를 선점하며 제도적 변화를 이끌어냈다. 그중에서도 호주제 폐지는 그의 열정이 온전히 배인 결실이다.19대 총선에 새정연 비례대표로 신청해 당선, 정치인의 길로 들어섰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후보 대변인을 맡아 활약했으며 지난 지방선거 때는 최문순 강원도지사 후보 캠프 수석대변인을 맡았다. 2월부터 서울시 강동구에서 지역민들과 소통을 시작한 그는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지난 5월 말 사무실을 열었다. 강동구는 아직 완성하지 못한 그의 정치적 실험을 더 강한 의지로 실현해갈 지역이 됐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교류하며 쌓은 인맥이 워낙 두터워 곳곳에 지원군이 많다. 이들은 그의 정신을 늘 다잡게 하는 인생의 스승이자 버팀목이기도 하다.
1980년대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경기도 파주의 한편, 황량한 땅위에 출판도시 깃발을 든 출판인들이 모였다. 민주화의 열망이 솟구쳤던 시대. 말과 글이 곧 책이 되던 책의 시대였다. 첫 삽을 뜬지 27년. 황량했던 도시는 이제 책이란 옷을 입고 주목을 받는 출판도시가 됐다. 모든 가치는 공유할 때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도시. 그 고난의 여정 중심에 출판인 이기웅 열화당 대표(75)가 있다. 올해로 27년. 30년 가까운 세월을 고군분투하면서 결국 세계가 주목하는 도시를 만들어낸 그의 삶은 그 자체로 출판도시의 역사가 됐다.그를 만났다. 출판의 역사가 깊은 전주의 미래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었다. 조선시대 융성했던 전주의 출판문화 뿌리를 오늘에 되살릴 방법은 없을까. 기대는 빗겨갔다. 그는 도시의 미래를 이야기 하는 대신 말과 글과 책의 참다운 가치를 이야기했다. 세상에 분별없이 넘쳐나는 말에 대한 비판은 단호하고 엄격했다. 도시를 만드는 일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인터뷰는 파주 출판도시 열화당 그의 사무실에서 있었다.-중국에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었나요.중국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심천의 북시티 조성과 관계된 강연이 있었어요. 심천은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으로 성장한 도시인데 중국의 4대도시로 꼽힐 정도로 성장했죠. 지금은 시진핑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는 심천 전해지구에 새로운 문화지구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북시티는 그 중심에 있는 프로젝트인데, 파주 출판단지가 매우 중요한 선례가 되거든요. 이번에 가서 보니 그들의 파워풀함이 놀랍더군요.-확실히 파주출판도시 조성 과정이 많은 도시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군요. 북시티의 확산이 흥미롭습니다.바람직한 일이죠. 특히 심천에 조성하려고 하는 북시티는 가능성이 있어 보였어요. 지역에 문화인들도 많고 그 준비 작업이 아주 탄탄하게 이루어지고 있더군요. 파주에도 관계자들이 여러 차례 다녀갔는데 이런 교류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어떤 조언을 해주셨습니까.사실 전해지구에 출판 분야만 들어오는 것은 아녜요. 금융을 비롯해 각 분야가 다 들어오죠. 그 중 하나가 출판입니다. 규모로 따지자면 결코 대단하다고 볼 수 없지만 출판이 갖고 있는 의미는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어요. 출판은 각 분야에 스며있는 바탕이라는 것을 인식시켜주고 싶었습니다. 모든 분야가 스스로 정리하고 기록하고 프로모션도 해야 하고, 미디어를 통해서 모두가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시민과 전문가를 대상으로 두 차례 강연했는데, 매우 주의 깊게 경청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론으로는 배울 수 없는 실전의 귀중한 경험을 전수해주셨군요.주제가 출판도시 27년의 역사를 말한다였는데 그분들에게는 좋은 자료가 되었을 겁니다. 이번에 다녀오면서 국가 간 교류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동안 한중우호나 교류를 많이 경험했지만 우리가 우위에 있는 경우는 드물었거든요. 그런데 이번 경우는 우리가 확실히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는 입장이었어요. 현장의 경험으로부터 증거들이 확실하니까요. 그래서인지 받아들이는 태도가 매우 숙연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우도 극진했고요.(웃음)-파주에 출판도시 조성 작업을 시작한 것이 88년이었으니 30년이 되어가는군요.맞습니다. 그 이듬해인 89년에 위원회를 구성하고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니까요. 뜻을 함께 하는 출판인들이 모여서 추진했는데, 돌아보니 그 과정에 우여곡절이 참 많습니다.-출판도시는 책의 시대를 상징하는 그릇과도 같습니다. 얼마 전 그 과정을 기록한 세 번째 책을 펴내셨던데요. 출판도시를 향한 우리의 여정이라는 제목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속력의 힘으로 질주하는 시대에 27년은 사실 짧지 않은 시간입니다. 압축성장의 가치에만 눈을 돌려온 시기에 어려움이 적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속도전에 익숙한 현실을 극복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요. 그러나 우리 스스로 만들어놓은 가치와 원칙을 지키면 어려움은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뜻을 함께 하는 출판인들이 모여 이 일을 처음 도모할 때 세워놓은 가치와 그 가치를 지켜갈 원칙이 있었거든요.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그 원칙은 끊임없이 위협 받았죠. 그야말로 위기였는데 그럴 때 흔들리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어요.-어떻게 그런 위기를 이겨내셨습니까.편한 길보다는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고민과 갈등이 깊어질 때면 어린 시절 어르신들이 주신 가르침과 책으로 배운 질서를 생각해냈어요. 어렸을 때부터 체득한 공동체 정신과 가치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사대부 가옥으로 이름이 알려진 강릉의 선교장에서 나고 성장하셨습니다. 특별한 환경이었죠.선교장이라 이름 붙여진 공간 안에서 많은 친인척들이 함께 살았어요. 20가구가 넘었을 겁니다. 선교장에서는 어르신들의 가르침이 곧 법이었어요. 옛날부터 내려오던 집안의 질서, 책의 질서, 말씀의 질서가 집안을 단속했습니다. 부잣집이었지만 개인은 돈이 없었어요. 학교 앞에 있는 사탕가게에서 사탕하나 제대로 사먹지 못할 정도였지요. 먹을 것 입을 것 다 갖추어 주는데 왜 다른 용도로 돈이 필요하냐는 것이었는데, 그때는 불만이 많았어요. 그 덕분에 절제를 배웠다는 것을 한참 후에 알게 되었죠. 선교장의 공동체 생활로 공동의 가치,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예의와 본분을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공동체 훈련이 잘되어 있습니다.(웃음)-선교장 안에 열화당이 있었죠. 그 시점으로부터 치자면 올해 열화당이 200주년을 맞는다고 들었습니다. 열화당의 역사가 흥미로운데요. 열화당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란 책도 펴내셨죠.열화당은 선교장안의 책방이었어요. 덕분에 어릴 때부터 책더미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경험이었는지를 어른이 될 때까지 잘 몰랐어요. 책에 대한 깊은 사유가 부족해서였을 겁니다. 사실 우리 민족에게는 잃어버린 시간이 많이 있습니다. 지성인들이 나라를 통치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인간은 지성을 바탕으로 한 존재인데 그렇게 되지 못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책의 가치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환경도 같은 연상에 있습니다. 우리 환경을 보세요. 빠르고 편리함만을 추구하면서 시간으로부터 시간을 죽여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소중한 것들을 잃는지는 깨닫지 못하는 것이죠. 잃어버린 시간들을 찾는 열화당이란 화두는 제가 책을 만들게 된 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태생적 환경과 맞닿아 있습니다.-출판도시를 이끌어온 여정에도 사장님의 그런 신념과 철학이 스며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맞습니다. 출판도시 일을 해오면서 고독한 시간들이 많았어요. 초창기에는 출판단지안의 첫 건축물인 인포름에서 숙식을 하면서 일했습니다. 당시 이 건물은 허허 벌판에 외로운 배 같은 존재였어요. 그때 내 체온을 이 땅에 스미게 한다는 생각으로 일했습니다. 밀림을 헤치는 사냥꾼처럼 일을 했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숙연한 생각을 많이 갖게 되었는데, 특히 우리 역사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인포름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면서 분단된 나라의 아픔을 절감했어요. 역사성에 천착하게 되면서 역사적 인물도 다시 보게 되었죠.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면 시대마다 인물들이 많은데도 왜 우리는 그토록 많은 것을 잃어야했는가 궁금했습니다. 결국은 구슬이 꿰어지질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만드는 출판도시가 이런 저열한 부분을 극복하는 기지가 될 수 있기를 소망했어요. 단순히 내 출판사나 잘 운영해보자는 생각만으로는 안 된다는 인식을 공유해야했습니다. 출판도시는 이미 집단화된 틀이었으니까요. 거대한 집단이 모였는데 공동성, 공동의 가치라는 깃발을 세우지 않고 개별의 깃발을 치켜들면 안 되는 일이었죠. 함께 치켜올리는 깃발을 늘 생각했습니다.-출판도시 1단계에 이어 추진한 2단계도 마무리 단계라고 들었습니다. 2단계 주제인 책과 영화의 결합은 어떻게 추진하셨는지 궁금합니다.영화를 2단계에 도입해야겠다고 했을 때 이견이 많았어요. 지금은 당연시하고 환영하는 일이 되었지만 상상력의 빈곤이랄까 책과 영화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았어요. 우리 현실을 돌아보면 당연시 하지 않는 당연한 일들이 참 많습니다. 당연한 것을 배제하고 사는 졸렬한 삶에 너무 익숙해져 있죠. 외부로부터 침략을 받고 식민지치하를 거치고, 서로 갈등하고 싸우는 과정에서 우리민족의 상상력이 설자리가 없어진 것 같아요. 어쨌든 반대도 있었지만 2005년에 책에서 피어난 꽃 영화란 주제로 전시회를 열었어요. 그때 기대 이상의 큰 호응이 있었어요. 사유의 폭을 넓히는 책의 세계는 다 통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때 많은 분들이 인식한 것 같습니다.-융합의 시대에 선견지명이 있었군요.(웃음)출판도시를 조성할 때도 출판사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 사회는 분화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것을 잃었어요. 분화가 좋은 것 같지만, 그것이 사실은 제대로 된 분화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종합을 염두에 두고 분화해야 하는데, 갈라서기만 한겁니다. 그러니 다 따로 놀게 되었지요. 2단계 조성하면서 영화를 합쳐놓으니 융복합이라고 하더군요. 마치 새로운 현상처럼.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새로운 결합이 아니라 원래 제자리 찾아가는 것이라고요. 우리 사회는 너무 많이 분화되고 갈라서서 인간의 존재가 어디에 있는지 잘 보이질 않아요. 반드시 회복해야할 가치입니다.-오늘에 이르러 출판도시의 존재감은 참으로 큽니다. 많은 것을 뿌리고 거두고 있는 것 같아요.보람이 없지는 않지만 그만큼 걱정도 많습니다. 영원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란 것이 있나요. 꽃이 필 때는 오래갈 것 같지만 꽃이 지고 열매가 떨어지고 어떤 것은 말라죽기도 하고. 그래서 절대성을 확보할 수 없는 현물과 현상들에 대해 내가 온 힘을 다해 소진하면서 뛰어온 일이 과연 옳은 일인가 가치 있는 일인가 가끔 의심을 갖게 됩니다.-이번에 펴내신 출판도시를 향한 책의 여정에서 염(殮)의 진리를 매우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염이란 망자를 목욕해드리는 것인데 매우 심오한 뜻이 있죠. 이승에서 잘못된 부분을 씻어내고 반듯하게 정리해 저세상으로 보내드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개인적으로 저는 자기 스스로 염을 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봐요. 책을 만드는 일도 책을 읽는 일도, 출판도시를 만드는 일도 그와 같은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지난해 발족한 무형유산창조협력위원회 위원장을 맡으셨던데요. 이 위원회가 전주에 문을 연 무형유산원과 인연이 있어 더 기대가 큽니다.그 자리에 앉긴 했는데, 부끄럽게도 한 일이 거의 없습니다. 위원회를 발족하긴 했는데, 거의 활동을 하지 못했어요. 그렇지 않아도 이 직분에 대해 고민이 많습니다.-열화당은 문화유산을 주목해온 출판사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문화유산에 대한 사장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개인적으로 문화유산, 특히 문화재에 대한 생각이 많습니다. 정책도 그렇지만 기능보유자나 전수자들에 관심이 많아요. 우리 문화가 전승된다면 그것은 결국 문화재들의 손끝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거든요. 손끝이 뭡니까. 마음의 끝입니다. 마음이 손끝에 전달되어 구현되는 것이 유산이죠. 더구나 무형유산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보유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지켜 가는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형유산원이 해야 할 일도 그런 바탕위에서 그들을 진정으로 지원하고 힘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개원한지 수개월 지났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런 기대를 갖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화제를 좀 돌려보겠습니다. 전주는 출판의 역사가 매우 깊습니다. 책과의 인연도 마찬가지지요. 잘 아시겠지만 감영에서 제작했던 목판본인 완판본의 존재가 아직도 귀중한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출판도시로 성장한 파주의 오늘과 미래에 더 큰 관심이 갑니다.전주는 갖고 있는 유산이 참으로 많습니다. 문화적 전통이 탄탄하고 풍요롭지요. 다른 도시들에게는 부러운 대상입니다. 그것을 잘 살리는 일이 중요한데, 전주의 문화역사적 위상을 좀 더 품위 있게 구현해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를테면 인근의 작은 도시들을 품어 함께 가는 방식을 권하고 싶습니다. 문화는 스며드는 것이어야 해요. 행정 단위로는 갈라져있지만 문화성으로는 서로 의지하고 함께 갈 수 있는 도시로 나가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른 도시들은 그것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이 미흡하지만 전주는 다르거든요. 출판 정신을 살려 역사 깊은 출판문화도시의 정체성을 살려가는 것도 매우 좋은 길이라고 봅니다.이기웅 대표와의 인터뷰는 예상보다 길어졌다. 하나의 화두는 또 하나의 화두로 이어져 질문과 대답의 경계는 없어져버렸다. 열정적인 강연을 듣고 있는 듯 한 느낌이었다. 출판인으로 살아온 그의 오랜 삶으로부터 축적된 지식은 그만큼 깊고 깊었다.그는 백범일지 복간을 준비 중이다. 기록하는 민족이 살아남는다는 그의 철학을 온전히 담는 작업이다. 우리에게는 정신을 세우게 하는 또 하나의 선물이다.● [이기웅 대표는] 건강한 책문화 이끈 출판문화계 든든한 거목이기웅 열화당 대표는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사대부 가옥으로 이름난 강릉의 선교장이 그의 집이다. 어린 시절 집안의 친인척들과 선교장 한울타리에서 자란 그는 대대로 이어져온 엄격한 가풍 속에서 어른들로부터 절제되고 검소한 삶의 지혜를 배웠다. 대가족의 공동체 삶은 그에게 삶의 품격과 규범의 가치를 안겼다.성균관대를 졸업하고 1960년대 일지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그는 1971년 출판사 열화당을 열었다. 열화당은 1815년, 5대조인 오은 이후(李厚)가 선교장 안에 지은 일종의 도서관 이름이다. 그때로부터 치자면 열화당은 200년이란 시간을 안고 있는 셈이다. 초창기 미술전문 출판사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던 열화당은 우리문화의 뿌리를 잇는 기획물로 대중들의 관심을 모았다. 1988년 몇몇 출판인들과 뜻을 모아 파주출판도시 계획을 입안하면서 그 중심에 선 그는 출판도시를 일구는 일에 모든 열정을 쏟았다.위기는 원칙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자갈밭과 같은 출판도시의 여정을 지켜온 그는 출판 관련 분야를 모아냈던 1단계 도시에 이어 책과 영화가 만나는 2단계 도시를 추진, 내년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지금은 3단계 도시로 농사의 개념을 도입해 쌀농사와 책농사를 조화시키는 인간 중심의 새로운 도시 북 팜시티를 기획해 추진하고 있다.1980년대 창간한 출판저널 편집인, 한국출판협동조합 이사장, 한국출판유통주식회사 설립운영위원장, 2005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 2014 세계문자심포지아 조직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지금은 파주출판도시 명예이사장과 국제문화도시교류협회 이사장, 무형유산창조협력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출판도시를 만드는 과정을 기록한 출판도시를 향한 책의 여정을 비롯해 사진집 세상의 어린이들과 내 친구 강운구를 펴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파주출판도시를 절제 있는 도시로 만들고 싶었다는 그는 열화당을 절제와 균형 이 돋보이는 건축물로 건립, 출판도시 안의 아름다운 출판사 건물 중에서도 손꼽히는 사옥으로 만들었다.2009년 증축하면서 도서관과 책방의 성격을 조화시킨 도서관+책방을 갖추었던 열화당 중심 공간은 지난 2013년 박물관으로 등록해 열화당 책박물관이란 새 이름으로 관객들을 맞고 있다.
지천이 꽃인 봄. 전주의 봄은 축제의 물결로 온다. 그 선두에는 전주국제영화제가 있다.지난 4월 30일 개막한 전주영화제는 올해 더욱 다양한 시도와 변화로 주목을 모았다. 가장 큰 변화는 야외상영장과 영화상영장의 동선 확장이다. 덕분에 외연의 확장과 시민들과 가까워진 영화제란 키워드는 영화제가 열리는 내내 새롭게 확장된 공간과 거리를 떠다녔다. 단정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전주영화제가 시민들에게 한걸음 더 가깝게 다가갔다는 지점으로만 보자면 의미 있는 행보였던 것만은 틀림없다.그렇다면 9일 동안 새로운 영화바다를 항해한 올해 전주영화제의 목표와 가치는 주효했을까. 형식의 변화에만 주목하지 않는다면 그에 대한 논쟁의 여지는 적지 않을 것 같다.돌아보면 전주영화제는 꽤 오랫동안 주류나 익숙한 것보다는 비주류와 낯선 것을 주목하는 대안영화제로서의 정신이 빛났던 영화제였다. 그래서 여전히 낯설고 실험적이며 논쟁적인 영화로 가득 찼던 전주영화제는 그 자체가 미덕이자 정체성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전주영화제의 성장과 함께 이러한 가치는 얼마 전부터 조금씩 힘을 잃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전주영화제를 첫해부터 한해도 거르지 않고 찾았던 부산국제영화제 김지석 수석프로그래머(55)를 만났다. 해마다 전주의 봄을 조우해온 그는 올해도 일주일을 꽉 채운 긴 시간을 전주를 찾아온 영화인을 만나고 영화 보는 일로 보냈다.부산영화제를 만들고 20년 동안 그 중심에서 영화제 역사를 함께 써온 그에게 전주영화제의 올해 변화는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듯 했다.사실 그가 몸담고 있는 부산영화제는 올해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해 다이빙벨 상영으로 불거진 자치단체와의 갈등이 엄청난 후유증을 몰고 온 탓이다. 올해 20주년을 맞은 부산영화제는 그래서 갈 길이 아직 험난하다. 그만큼 부산영화제가 놓인 상황은 우울했으나 인터뷰는 즐거웠다.-영화는 많이 보셨습니까.하루 네 편이 목표인데 상영장 동선이 달라져서 예전만큼 여유 있게 다니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변화된 환경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불편했습니다. 상영장 여건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내년에는 영화의 거리 안에 상영장이 신설된다니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겠죠.(웃음)-주로 어떤 영화를 선택하십니까.저는 아시아 영화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아시아 영화를 집중적으로 봅니다. 올해 아시아영화들 중에는 이미 본 작품이 많아서 한국영화를 중심으로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전주영화제에는 독립영화가 특히 많이 나오기 때문에 주목할 만한 작품이 많이 있죠.-우리나라 독립영화 환경은 어떻습니까. 눈부신 성장을 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여건은 늘 어려운 것 같거든요.그래도 한국의 독립영화는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훨씬 건강합니다. 여건은 어렵지만 좋은 재능들이 꾸준히 발견되고 있거든요. 근래 들어 일본 중국에서는 주목할 만한 신인 감독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너무 하지 않나 싶을 정도지요. 그러나 한국 독립영화를 보면 영진위 지원도 그렇고 환경이 점점 더 열악해지는데도 재능 있는 감독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거든요. 이런 상황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독립영화와 예술영화를 지지하는 전주영화제는 그런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군요.물론입니다. 디지털 삼인삼색도 그렇고. 영화제가 해야 할 역할이 여럿이지만 그중에서도 중요한 역할이 그런 것이죠. 영화제 역할을 이야기 할 때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용어가 대안 마켓 이거든요.-그런 역할이나 기능은 어떤 영화제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가져가야 할 부분인가요.일반적으로 영화시장은 주류 영화, 상업 영화를 중심으로 하지 않습니까. 그대로만 놓아둔다면 예술영화나 독립영화는 죽을 수밖에 없는 구조죠. 그래서 영화제는 그런 주류마켓이 하지 않는 대안마켓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전주영화제처럼 독립영화를 발굴하고 피칭 행사를 통해 투자자를 연결해주면서 재능을 발굴하는 역할은 매우 중요하고도 큰 미덕입니다.-부산영화제는 어떻습니까.부산도 그런 역할을 하고 있죠. 이런 역할을 하는 영화제는 많을수록 좋습니다.-전주영화제가 이런 역할을 더 활발하게 해야 하겠군요. 해외에서도 이런 성격의 모범적인 영화제가 많죠.전주영화제처럼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성향을 가진 영화제라면 로테르담영화제를 꼽고 싶습니다. 전주영화제도 JPM이나 프로젝트 마켓을 운영하잖아요. 피칭행사도 있고. 로테르담은 그런 성격으로는 아주 잘되고 있는 영화제입니다. 사실 프로젝트 마켓은 아시아에서 부산이 제일 처음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모델이 로테르담이었어요. 그곳에 프로젝트마켓이 있는데 정말 제대로 키워놓았어요. 부산영화제가 프로젝트 마켓을 시작할 때 거기서 영감을 얻고 많이 배웠죠. 전주영화제도 독립영화와 예술영화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대안마켓을 얼마나 잘 운영하는가가 과제일겁니다. 로테르담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어요.-결국은 재정이 문제 아닐까 싶은데요.전주영화제도 이런 역할을 잘하려면 펀드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틀림없이 올 겁니다. 물론 지금도 디지털 삼인삼색 같은 경우는 제작비를 지원하고 있지만 펀드는 그것과는 성격을 좀 달리 할 필요가 있거든요.-부산영화제도 펀드를 운영하고 있지 않습니까.그렇긴 합니다만 저희는 제작비를 직접 지원하지 않습니다. 후원을 받아 진행하지요. 예를 들여 시나리오 개발을 지원하기도 하고, 다큐멘터리 제작이나 후반작업을 지원하는 것도 있는데 후반 작업을 지원하는 경우는 국내 후반작업 업체들의 후원으로 이루어지거든요. 업체들이 후원에 나서는 것은 그만큼 프로모션 효과가 크기 때문이고요. 저희는 직접 지원을 하지 않고 제작하는 동안 작업하는 실질적인 경비만 지원합니다. 다큐멘터리 제작 지원도 부산의 영화과를 갖고 있는 6개 대학이 협찬을 합니다. 영화제로서는 의미도 있고 재정도 해결할 수 있는 통로지요.-로테르담 영화제는 규모가 크지 않나요.단편이 워낙 많아 상영편수가 400편 가까이 됩니다. 로테르담 영화제는 예술영화를 전문적으로 배급하는 회사에서 시작했어요. 배급에 관해서는 일가견이 있는 셈이죠. 그래서 로테르담에서 상영된 영화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유럽 전역에 배급이 될 수 있는 통로를 얻게 됩니다. 토론토 영화제도 그런 역할을 매우 잘하고 있는데 그곳은 프로그래머가 10명이 넘습니다. 제작사를 갖고 있거나 세일즈 회사를 갖고 있는 프로그래머도 있지요. 그런 시스템을 잘 작동해서 토론토에서 소개된 영화들에 대해 판권을 잘 팔 수 있도록 지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 특성들이 토론토를 꼭 가야겠다는 동기부여를 하게 되고요. 우리로서는 매우 부러운 여건이죠. 부산이나 전주도 그런 역할을 강화하는 쪽으로 가야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영화제의 기본적인 의미와 가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말 그대로 축제로서의 가치와 대안시장으로서의 가치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영화제는 다른 축제와는 달리 충성도와 몰입도가 상당히 강한 축제예요. 영화제를 찾는 관객들의 공감도가 매우 높습니다. 영화제 관객들이 모르는 사이라 하더라도 동료의식을 갖게 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죠. 대안시장으로서의 가치는 최근 국내의 영화시장의 상황을 보면 더 더욱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영화제가 없다면 영화시장은 그야말로 예술영화와 작가영화는 사라지고 오로지 상업영화만이 지배하는 독과점 시장이 되어 버릴겁니다.- 대안 마켓으로서의 기능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군요.영화제는 예술영화와 작가영화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영화시장에서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자리로서의 의미가 큽니다.-전주영화제 뿐 아니라 지속성과 건강함을 유지하는 것은 모든 영화제의 고민일 듯 합니다. 상업성과 축제성의 사이에서의 고민도 그렇고요. 국내 영화제들은 다행스럽게 저마다의 정체성이 서로 다른 것 같은데요.이제 국내의 영화제들은 자기 정체성이 분명해 진 것 같습니다. 때문에 국내에 국제영화제가 너무 많다는 주장은 별 설득력이 없습니다. 다만 국내 여러 영화제들이 고유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세계무대에서 유사한 성격의 타 영화제들과 경쟁하고, 위상을 높여나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해외영화제와 어깨를 견주어도 될 만큼 성장했다는 이야기도 되겠군요.그렇습니다. 이제는 영화제들이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고 그들의 영화가 영화시장에서 좀 더 폭넓게 수용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에 눈을 돌려야 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칸이나 베를린, 토론토영화제가 세계적 위상을 유지하는 강력한 무기중의 하나가 바로 마켓 혹은 마켓 기능이에요. 전주영화제는 마켓은 없지만, 토론토영화제처럼 마켓기능은 수행하고 있지요. 앞으로 이 마켓을 좀 더 확대했으면 좋겠어요. 이러한 기본 방향만 분명하게 설정되어 있다면, 축제성을 강화한다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나 영화비즈니스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특정 영화제를 가야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 영화제의 정체성과 축제성 모두가 그들에게는 중요하기 때문이죠.-화제를 좀 돌려보죠. 아시아 영화 전문가로서 최근 활발해지고 있는 중국의 영화산업은 어떻게 보십니까.중국영화산업이 너무 급성장하고 있어서 거품이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될 정도입니다. 최근에는 부동산회사와 IT 기업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투자의 흐름이 형성되고 있어요. 그들이 중국영화시장에서 강력한 배급망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지난 해 중국에서는 오주(五洲)영화배급사가 탄생했습니다. 중국 최대 멀티플렉스 체인망을 보유한 완다그룹과 다디, 진이, 헝디엔 등이 함께 만든 배급라인인데, 오주는 단숨에 중국시장의 45%를 장악하는 막강한 배급라인으로 떠올랐어요. 중국 최대 부동산회사인 완다그룹은 영화산업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동산회사와 IT 기업들과 기존의 영화제작사들, 화이브라더스나 각 지역의 스튜디오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느냐에 따라 중국영화산업의 방향은 달라질 겁니다.-급작스럽게 이루어지는 이런 현상에서 문제도 있을 것 같은데요.물론 그림자도 있습니다. 바로 양극화 현상인데 대작과 저예산 영화 편중현상이 그것입니다. 중간급 규모의 영화가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으니 새로운 재능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거죠. 바로 이 점 때문에 거품현상을 우려하기도 합니다.-문화가 도시를 발전시키는 동력이 된 시대에서 문화 인력을 키워내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지역의 문화 인력은 수많은 축제에서 늘 고민과 과제이기도 합니다. 부산영화제도 예외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부산, 혹은 부산영화제가 부산의 영화 인력을 어떻게 성장시켜 가는지 궁금합니다.부산 역시 이러한 고민이 큽니다. 영화제의 경우는 이제 부산 인력만으로도 운영이 가능한 정도가 되었습니다. 지난 20여 년간 꾸준히 지역 인재들을 키워낸 덕분이죠. 영화산업의 인력 문제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부산의 영화산업 기반이 아직은 허약하기 때문인데 부산지역 6개 대학이 영화과에서 배출한 인재들은 대부분 서울로 올라가야 합니다. 부산지역의 영화 인력을 성장시키는 데에 있어 보다 근원적인 과제는 지역의 영화산업을 어떻게 성장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부산도 전주와 마찬가지로 영상위원회, 소규모 스튜디오를 가지고 있지만, 아직은 촬영하기 좋은 도시로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당분간은 지역의 인재들이 서울에서 자리 잡게 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정도의 역할밖에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영화제 뿐 아니라 자치단체의 지원을 받는 모든 축제나 문화관련 행사들은 자치단체와 늘 갈등과 긴장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부산영화제는 특히 올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자치단체와 영화제의 바람직한 관계는 어떤 관계여야 할까요.자치단체와 영화제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팔길이 원칙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특성상 이러한 아름다운 원칙은 언제든지 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최근 부산영화제 사태가 이를 증명했죠. 더 안타까운 것은 공무원 사회 전체가 아니라 단체장 한사람의 문화인식 수준에 따라 이러한 사태가 생겨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팔길이원칙이 타당하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 전체가 공감하고 있지만, 공무원 조직의 특성상, 혹은 특정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러한 원칙이 무시되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지요. 결국은 깨어있는 시민의식만이 이 같은 상황을 제어할 수 있을 텐데 안타깝지만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 사회의 수준이 여기까지라는 것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서글픈 현실이지요.전주와 전주영화제를 향한 그의 애정은 각별했다. 반면교사. 인터뷰 말미에 전주영화제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올해 전주영화제는 그 어느 해보다 큰 변화를 겪은 것 같습니다. 시민들에게 좀 더 다가가려는 시도를 공격적으로 했죠. 이러한 변화가 옳은지 그른지는 제가 판단할 문제는 아닙니다. 독립영화와 대안영화를 지지하고 후원하는 영화제로서의 대원칙, 정체성만 변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시도는 분명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다만, 이러한 시도가 좀 더 다듬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은 듭니다.영화와 영화제를 이야기 하다 보니 전주영화제의 길이 보였다.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김지석 수석프로그래머는] 부산국제영화제 위상 높인 '아시아 영화 전문가'김지석 수석프로그래머는 부산 토박이다. 고등학교시절부터 영화를 좋아해 대학에 가서는 영화동아리에 들어가 열심히 활동했다. 영화를 공부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은 영화동아리 활동의 동력 때문이었다. 중앙대 대학원 영화과에 들어가 아예 진로를 영화로 바꾸어버렸다. 영화를 공부하면서부터는 아시아영화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80년대 후반, 아시아국가의 영화들은 국내에서 볼 기회도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대상이었다. 아시아 영화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일본 야마가타 영화제를 다녀와서부터다. 야마가타 영화제는 그가 처음 만난 해외영화제인데 다큐멘터리를 주제로 하는 그 영화제에서 그는 큰 문화충격을 받았다. 이듬해 아시아 영화를 중심으로 소개하는 홍콩영화제에서 다양한 아시아 영화를 만나면서 다시 한 번 아시아 영화의 가능성을 주목하게 됐다. 고군분투, 아시아영화를 공부하는 과정은 외로웠지만 선두주자라는 자긍심으로 극복해냈다. 부산을 떠나지 않고 영화와 관련된 작업을 하면서 당시 경성대 교수로 있던 이용관교수와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경성대에 출강했던 전양준씨와 의기투합해 영화전문지 영화언어를 만들었다. 영화언어를 통해 영화를 이야기 했던 시간들이 부산국제영화제를 만들어내는 바탕이 됐다. 제 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수영만 요트경기장에서 막을 내렸을 때 그를 만난 지인들은 꿈을 제대로 이뤘다고 격려해주었다.1996년부터 프로그래머로 참여해온 그는 특히 아시아 영화를 전담하면서 수많은 영화인들과 친분을 쌓아왔다. 덕분에 그의 인적 네트워크는 예상하는 것보다도 훨씬 두텁고 견고하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아시아의 대표주자가 된 바탕에는 그의 성실하고도 열정적인 노력과 도전의 힘이 놓여있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그는 스스로 감독으로서의 재능이나 평론가로서의 재질은 없지만 영화제 프로그래머는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 시절 단편영화를 제작하기도 했지만 그 이후에는 영화 제작에 마음을 두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영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준 스승으로는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을 꼽는다.수많은 영화제들을 다니면서도 순수한 관객의 입장으로 찾는 유일한 영화제로 전주를 꼽는 그는 한해도 거르지 않고 전주를 찾는다. 전주영화제를 소풍으로 삼아 아시아 게스트들과 전주와 인근 도시의 맛집 순례하는 일을 큰 즐거움으로 삼고 있다.계간지 영화언어 편집장을 지냈으며 넷팩(아시아영화진흥기구)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프로그램부터 영화제 앞뒤를 다 들여다봐야하는 수석프로그래머를 맡고 있는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아시아영화 전문가이기도 하다.
도시마다 봄 축제가 뒤를 잇고 있다. 축제를 알리는 플래카드와 포스터와 사인탑은 도시의 거리를 부유한다.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그러나 축제의 일상은 우리의 기대처럼 늘 평탄하지만은 않다. 축제가 도시의 경쟁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부침이 심한 축제의 결말은 늘 불안하다. 자치단체가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붓는 축제라면 더 그렇다.대한민국의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많은 축제 중에 우리가 진정으로 선망하는 축제는 얼마나 될까.지난 2004년, 인구 6만 명의 군 단위 작은 도시에서 새롭게 이름을 올린 축제가 있다.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이다. 북한강 유역, 비가 와 물이 불어나면 잠겨서 없어지는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섬. 쓸모없는 땅으로 버려져있던 이 섬이 재즈 페스티벌로 깨어나 지금은 아시아 최고의 재즈페스티벌이 열리는 풍요로운 낭만의 땅이 됐다. 시골의 작은 섬과 재즈라는 전혀 대중적이지 않은 음악 장르의 만남은 흥미롭다. 더구나 이 페스티벌은 이제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아시아를 대표하는 음악페스티벌이 됐다.자라섬재즈페스티벌을 만들어 12년째 이끌고 있는 공연기획자 인재진 자라섬재즈페스티벌 총감독(51, 호원대 공연미디어학부 학부장)을 만났다. 햇살 좋은 3월 봄날이었다.30대부터 40대를 거쳐 50대에 이른 그의 삶은 대한민국에서 공연기획자로 살아온 험난한(?) 여정위에 온전히 놓여 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골라서 걸어온 그의 궤적은 성공보다는 실패의 시간들로 이어진다. 그러나 돌아보면 어느 순간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그는 말한다. 자라섬페스티벌과 같은 성공한 무대는 그의 표현대로 위대한 실패가 가져온 결실이다.30대와 40대를 거쳐 오는 동안 그가 올렸던 공연무대는 1000여회, 이중 적자를 면했던 공연은 100분의 1정도에 그친다. 이쯤 되면 기획자로서 능력 부족은 충분히 검증(?)된 셈이다. 그의 이름 앞에 흥행업계의 마이너스 손 희귀음반 제작자 라는 별칭이 붙었던 것도 이때다. 그런데도 그는 그 실패를 딛고 살아남았다.아무도 하지 않는 장르를 개척해 좋은 공연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갖고 시작한 일이어서 그만 둘 수 없었습니다. 상업적으로 실패했다고해서 그것이 좋은 공연무대가 아니었다는 것은 아니죠.비결은 따로 있지 않았다. 그의 좌우명대로 꾹 참고 그래도 안 되면 말고 다시 일어서 온 인고의 시간들이 바로 비결이었다.인터뷰 전날 그는 전주의 축제기획자들와 문화기획자를 꿈꾸는 젊은이들을 만나 강연을 했다. 2시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강연 현장은 웃음소리가 넘쳐났다. 그의 위대한 실패가 주는 울림은 컸다.-자라섬 재즈 페스티벌과 감독님 이름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니셜을 JJ로 쓰시던데요. 자라섬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습니까.우연히 이루어진 특별한 인연이죠.(웃음) 친구 대신 특강을 하게 되었어요. 그때 축제에 대해 이야기 했는데 그 자리에 가평군청 문화담당 공무원이 있었나봐요. 그 분이 가평에서도 그런 것 할 수 있겠느냐고 나중에 연락이 왔어요. 막상 가보니 그 분이 안내해준 곳은 축제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돌아오면서 마지막으로 보여준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자라섬이죠.-인연이 특별하군요. 그때 자라섬은 그냥 방치되어 있는 섬 아니었습니까.맞아요. 자라섬은 비가 와 물이 불어나면 소양댐이 방류를 하게 되니 가라앉는 섬이었죠. 그런데 저는 여기다 싶더라고요. 자라섬 같은 아름다운 섬에서 언젠가는 꼭 재즈 페스티벌을 만들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주위에서는 다 말렸다고 들었는데요.회사 식구들부터 반발이 컸어요. 외진 곳이고 게다가 대중성이 없는 재즈페스티벌을 하자고 하니 그럴수 밖에요. 그래도 설득을 했죠. 저도 사실은 걱정이 많았어요.-그래도 어떤 확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계기가 있었죠. 핀란드에서 열리는 포리재즈페스티벌에서 영감을 받았거든요. 포리는 인구 8만 명의 작은 해안도시예요. 1966년에 포리재즈페스티벌을 만들었죠. 핀란드 전체 인구가 520만 명인데 연평균 15만 명이 이 페스티벌을 보러 옵니다. 지난 40년 동안 모든 국민이 다녀간 셈이죠. 포리 페스티벌을 만든 사람이 유리키 캉카스감독인데 그 분을 2000년 시드니에서 만났죠. 스물한 살에 그 페스티벌을 만들었는데 얼마전까지만 해도 디렉터로 일하다가 65세를 맞아 은퇴한 분입니다. 그 인연으로 포리를 가게 됐습니다.-공연 기획자로 일할 때였겠군요.제가 30대 중반, 재즈 전용 소극장을 운영했던 직후인데 재즈와 월드뮤직을 전문으로 하는 공연기획사를 운영 하면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죠. 좋은 인연이었는지 그 다음해에 핀란드 대사관을 통해 저를 초청해주셨어요. 항공과 숙박, 개인 경비까지 지원을 받았는데 가서 보니 포리는 완전 별천지인거예요. 더구나 제게는 무대 뒤 대기실 뿐 아니라 원하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ALL Access Pass 가 주어졌어요. 거기서 재즈계 스타들을 다 볼 수 있었죠. 관객 4만 명이 열광하는 그 무대를 보면서 한국에서 꼭 저런 페스티벌을 만들겠다는 꿈을 갖기 시작했어요.-자라섬 첫해 예산은 얼마나 되었습니까.가평군에서 지원해준 예산이 3억 원이예요. 군 단위 자치단체로서는 큰 부담이었지만 페스티벌을 치르기에는 많이 부족했어요. 세계 각국의 뮤지션을 섭외하고 초청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으니까요. 스폰서십을 유치해 몇 군데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축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터져 나오는 일들이 많아 고생했죠.-재정은 어떻게 해결했습니까.공무원들에게 빌렸어요. 적잖은 돈을 과장 계장 담당공무원한테 부탁했지요. 처음엔 황당해했는데 그래도 빌려주시더라고요. 그래서 더 돈독한 관계가 되었어요.(웃음) 그때 우리나라 공무원들이 돈이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죠. 그 돈을 마련하느라 여기저기 융통해서 해결해주었거든요. 정말 고마운 일이죠. 그런 훌륭한 공무원들을 만나고 나서 대한민국 공무원들에 대한 선입견을 날려버렸습니다.-복이 많으십니다. 그래도 첫해 부담이 컸을 텐데요.물론입니다. 제가 공연료를 받겠다고 하니 자치단체에서는 당연히 반대했죠. 예산을 지원했는데 무슨 돈을 받느냐고. 그래도 상징적으로라도 입장료를 받아야 한다고 우겼어요.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잘한 선택이었어요.-지금은 자라섬 페스티벌이 정체성으로도 그렇고 경제적으로도 성공한 페스티벌로 꼽히는데 지원에만 의존했던 상황이 반전된 것은 언제부터인가요.축제 초기는 늘 적자로 허덕였어요. 4회쯤엔 제가 살고 있던 서울집을 팔아 적자를 좀 해결하고 가평으로 이사했죠. 다행히 적자 폭이 줄기 시작해 5회 쯤 되니 투자와 수입이 거의 맞는 상황이 되었어요. 조금 여유 있게 축제를 준비하고 가능성을 더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 그 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야기를 좀 되돌려보죠. 어렵게 공연기획사를 운영하셨다고 들었습니다. 90년대 중반쯤인가요.그렇죠. 기획사를 차리고 온갖 잡다한 일을 다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뮤지션들을 행사에 보내주는 역할을 주로 했는데 전문적인 매니지먼트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한 일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프로축구 개막전이 있을 때 밴드 하는 아저씨들 50명 이어주는 것. 일종의 음악 인력 공급업이었죠.(웃음) 그런데 그때 그 일을 하면서 많은 뮤지션들을 알게 되었어요.-돌아보면 소중하지 않은 일은 없는 것 같아요.맞습니다. 음악적인 영역에서 보면 그때가 가장 넒은 인적 교류를 할 수 있었던 기회였어요. 그즈음 방송 드라마 덕분에 재즈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했는데, 재즈는 낯설긴 했지만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일이니 해보고 싶더라고요.-다른 사람이 가지 않는 길에 대한 관심. 거기에 자라섬의 성공 비밀이 있을 것 같습니다.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때 재즈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되니 재즈뮤지션들과 일을 같이 하게 되고 그러면서 대학로에서 딸기 소극장이란 재즈 전용극장까지 열었으니까요.-대학로에 재즈 전용 소극장을 연 것도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딸기소극장은 100석 정도의 작은 공연장이었어요. 아는 분이 소극장 운영이 어려워지니 니가 한번 해보라해서 맡은 것이었죠. 매일 재즈 공연만 했는데 어떤 날은 두 명 관객을 놓고 그보다 더 많은 뮤지션들이 무대에서 연주를 했어요. 그래도 재즈라는 장르로만 운영되는 전문극장이 없어서인지 관객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해 꽤 운영이 잘되었는데 건물주가 바뀌는 바람에 아쉽게도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잘되어가던 소극장이 문을 닫으면서 다시 시작해야했겠군요.건물주가 바뀌면서 극장을 접게 돼 없어졌는데 그 뒤로는 떠돌며 되지도 않는 공연 기획해서 망하고 다시 시작하는 악순환이 계속됐어요. 결국 기획사는 망했죠.-감독님 말씀대로라면 좀 망해봐야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저는 너무 여러 번 망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과정 모두가 소중한 경험이 되었어요. 물리학자 닐스 보어가 전문가란 특정 분야, 자기 주제에 관해서 가능한 모든 실수를 이미 저지른 사람이라고 정의했잖아요. 저는 그 정의를 좋아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저는 넘치는 전문가거든요.(웃음) 지금도 여전히 많은 전문가들이 대한민국의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실수와 실패를 하고 있을 겁니다.-자라섬을 맡기 전까지도 수많은 공연을 하셨죠.기획사를 하면서 정말 많은 공연을 했어요. 그것도 재즈와 월드뮤직만으로 자라섬 페스티벌을 맡기 전까지 대략 1000회 정도 공연을 했더라고요.-재즈라는 영역이 대중적이지 않아서 관객들을 끌어들이기에 어렵지 않았습니까.소극장을 운영할 때 그런 어려움은 단련되었던 것 같아요. 관객이 없으면 뮤지션이나 관객이나 기획자나 모두가 서로에게 미안한 상황이 되죠.-그런 상황을 어떻게 극복합니까.그래도 해야 합니다. 저는 뭐든지 한 번에 이룬 일은 없어요. 소극장 관객도 무대 위의 연주자보다 많은 상황까지 가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더라고요. 그 경험으로 어떤 공간이 특화된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간과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그런데 대부분이 그 시간을 못참는것이겠지요.그렇죠. 그래서 또 다른 길을 찾게 되는데 그것이 답은 아니거든요. 그 실패가 경우에 따라서는 굉장히 중요한 경험이 되어 길을 알려주기도 하고 기반이 되기도 하지요.-상업적으로 성공한 공연도 있지 않나요.대부분 망해서. 1000회 공연하면서 돈을 번 것은 한 열 번쯤 될까요. 그렇다고 뭐 큰돈을 번 것은 아니고 적자를 면했다는 것이죠. 위축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대중성을 좇아가고 싶진 않았어요. 남들이 하지 않는 좋은 공연을 하려고 노력했죠.-감독님이 생각하는 좋은 공연은 어떤 것인가요.기의 흐름이 원활해서 무대 뒤에서부터 관객까지 그 흐름이 이어지는 공연입니다. 모두가 행복한 공연이죠. 무대 뒤에 있는 사람들도 즐겁고 신나야 좋은 공연이 되는 것이거든요. 무대 위에 있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관객은 관객대로 감동을 받아야 하고. 역으로 그런 기의 흐름이 관객으로부터 무대 뒤까지 전달되는 그런 공연이죠.-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그래도 그런 공연을 늘 추구해왔어요. 대한민국에서 아는 사람이 5명만 된다 해도 공연을 무대 위에 올릴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했죠. 오히려 낯선 영역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보여줄 수 있는 그런 무대를 기획할 때 더 즐겁게 일했던 것 같아요. 즐거움이란 것이 꼭 익숙하고 아는 것으로부터만 찾아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가령 지나치게 아방가르드하거나 어려운 공연이라 하더라도 완성도 있는 좋은 무대라면 관객들은 감동 받게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감동이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막연한 것이라도 의미가 있죠.-그것이 곧 진정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의 자라섬은 아시아권에서도 재즈음악의 네트워크 중심에 있다고 들었습니다.아시아권에도 좋은 재즈페스티벌이 여러 개 있는데 그런 페스티벌의 네트워크가 잘 이루어지고 있어요. 세계 각국의 뮤지션들이 올 때 그 네트워크로 초청이 되기도 하고 찾아오기도 하는데 중심 역할을 지금은 자라섬이 하고 있어요. 해외 유명 아티스트들이 올 때 자기들끼리 투어 계획을 짜고 오기도 하는데 자라섬을 중심으로 동선을 구성하는 일이 많죠. 굉장히 큰 발전이에요.인 감독에게는 일과 관련된 두개의 꿈이 있었다. 하나는 국제적인 축제를 만들어 일흔 살 될 때까지 감독으로 일하다 은퇴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멋진 아티스트를 지원해서 전 세계를 다니며 공연할 수 있는 일을 해보는 것이었다. 자라섬재즈페스티벌을 만들어 세계의 뮤지션들을 불러 모으는데 성공했고, 세계적 재즈아티스트 나윤선씨와 생의 동반자가 되었으니 그의 꿈은 이룬 셈이 됐다. 생각하고 있으면 이루어진다 는 그의 철학은 좋은 문화기획자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의미 있는 명제다.자라섬 축제의 미래를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런 답이 돌아왔다.축제란 것이 흥망성쇠가 있기 마련인데 자라섬페스티벌은 언제까지나 청년처럼 건강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 건강함을 나눠가는, 꿈꾸는 생활을 하루라도 실험해볼 수 있는 그런 페스티벌을 항상 꿈꾸죠.● 인재진 총감독은 수 많은 실패 딛고 재즈 대중화 이끈 공연기획자인재진 감독은 충남 당진에서 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조기 유학을 가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녔다. 경찰대를 가고 싶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수로 고려대 영문과에 들어갔다. 방황이 시작됐다. 학교 다니기를 싫어해 철저한 아웃사이더가 됐던 그를 붙잡아 둔 것은 밴드부였다. 취주악부라는 밴드부에서 그는 나팔을 불었지만 연주보다는 연주자 섭외에 남다른 능력을 발휘했다. 당시 취주악부는 고려대와 연세대 경기의 대규모 응원전에 필요한 음악을 담당했는데, 수가 부족해 밤무대 뮤지션들을 섭외해 응원전에 참여해야 했다. 그의 역할은 빛났다. 음악 비즈니스의 첫 경험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짧은 미국생활을 거쳐 취업 전선에 도전했다. 신문사방송국광고기획사여객기 조종훈련생 모집까지 가리지 않고 응시했다. 뜻대로 취업은 되지 않았다. 스물아홉 살에 의류를 취급하는 무역회사에 들어갔다. 그가 맡은 일은 수출영업이었는데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업무를 해야 했다. 함께 일하는 팀장을 보니 자신의 미래가 거기 있었다. 첫 직장생활은 6개월 10일 만에 끝났다.1993년 1월 언론사 시험 준비를 함께 했던 친구들과 창업을 했다. 서울 시내 대학에 들어가는 무가지였다. 주간생활정보지의 성격을 띤 신문의 이름은 제 3강의실. 그러나 두 달 만에 망했다. 열정만 믿고 뛰어든 대가였다. 동료들은 다시 취업의 길로 갔지만 그는 공연기획자로 삶을 시작했다. 기획사를 차려 음악과 관련된 일이라면 가리지 않았다. 주로 했던 일은 연주자들을 행사와 연결시켜주는 것이었다. 전문적인 매니지먼트는 아니었지만 그때 수많은 연주자들을 알게 됐다.98년 대학로에 재즈 전문 소극장을 차렸다. 재정은 녹록치 않았지만 매일 공연을 올리며 재즈 대중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재즈뮤지션들과 교유했던 그 시절이 인감독의 오늘을 있게 하는데 큰 힘이 됐다. 그러나 그가 일구었던 1000여회의 공연과 음반제작 사업은 부침이 심해 늘 적자에 허덕였다. 흥행업계의 마이너스 손이라거나 희귀음반 전문제작자라는 별칭은 그래서 붙었다.2004년 우연히 가평군의 문화담당 공무원과 인연이 되어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을 시작하게 됐다. 기대보다는 우려가 컸던 첫 공연 이후 12년. 그의 열정을 바탕으로 성장한 자라섬 재즈페스티벌은 대한민국의 가장 멋있고 풍요로운 음악축제가 됐다. 아시아 최고의 재즈 페스티벌로 평가받는 이 축제로 인해 대한민국은 재즈라는 음악장르의 세계지도위에 비로소 존재를 알리게 됐다.9년 전 가평으로 이사해 아예 가평 군민이 된 그는 40대에 음악적 인연으로 만난 세계적 재즈 아티스트 나윤선씨와 결혼했다.자라섬청소년재즈센터 이사장과 호원대학교 공연미디어학부 학부장을 맡고 있는 그는 지난해 공연기획자로 살아온 삶의 기록을 담은 책 청춘은 찌글찌글한 축제다를 펴냈다.
오랜만에 봄볕이 좋았다. 그러나 전주에서 부안으로 가는 길은 예전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도시와 농촌을 잇는 도로는 곡선을 없애고 직선으로 치닫는, 그것도 여기 저기 사방을 불쑥불쑥 자르면서 길을 터가고 있는 탓이다. 그래서 도로의 어디쯤에선가는 늘 공사 중이다. 돌아보면 몇 년 전만해도 부안의 모든 길은 정말 아름다웠다. 나지막한 산과 해안선이 마주보며 이끌던 아름다운 길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부안생태문화활력소 허철희대표(64)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생태문화활력소는 부안군 변산면 마포리 옛 마포초등학교에 있다. 마을의 아이들이 하나둘 줄어들어 입학생이 없어지자 학교는 폐교됐다. 이 학교 건물을 사진가 허철희씨와 지역문화연구에 뜻을 같이 하는 후배들이 의기투합해 위탁받았다. 새만금과 핵폐기장 반대 운동의 고단한 싸움을 겪으면서 지역의 생태와 문화 환경을 지키는 일을 의식적 책무로 안게 된 활동가들의 의미 있는 출발이었다.건물 안은 온통 부안의 역사와 문화사, 자연생태의 기록물로 채워져 있다. 자료의 양도 그렇지만 내용의 깊이가 만만치 않다. 사진 자료는 거개가 허 대표의 수십 년 작업 결실이다.길은 잘 찾으셨습니까. 자칫하면 헷갈려서요. 좋은 경관 다 없애며 무슨 도로 공사를 그렇게 많이 하는지...... 오랫동안 부안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찍은 자생식물 사진으로 꽉 채워진 벽 앞에 서서 그가 말했다. 툭툭 잘라져나가는 산허리, 사막으로 변하는 갯벌을 마주하면서 그는 더 조급해진다고 했다.청소년기에 고향을 떠났던 그는 변산반도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고향을 찾기 시작했다. 순전히 사업적으로 시작한 홍보사진 촬영을 위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부안댐 건설로 갯벌을 잃은 주민들의 삶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며 의식이 바뀌었다. 자성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철학은 단단해졌다. 30년 가깝게 부안을 기록해온 그의 작업은 그렇게 시작됐다.인터뷰를 고사하는 그를 어렵게 만났다. 지역의 모든 것이 그의 카메라와 함께 있었다. 부안의 가치를 새롭게 만나게 된 시간, 사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됐다.-부안에는 언제 내려오셨습니까.88년 변산반도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사진을 찍기 위해 자주 내려오다가 90년대 후반부터 여기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어요. 새만금과 핵폐기장 반대운동을 하던 시절에는 거의 대부분 시간을 여기서 머물렀죠. 지금은 서울과 부안에서 절반씩 보냅니다.-하시는 일이 참 많더군요. 시민단체 활동으로도 그렇지만 인터넷 신문도 운영하시던데요.지금은 저 혼자 운영하는 1인 매체입니다. 2000년 6월에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개인 홈페이지로 운영하다가 지역의 이슈를 기사로 생산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 인터넷신문으로 등록했지요. 핵폐기장 반대운동이 벌어졌던 시기에는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지금은 몇몇 필자들의 도움으로 부안의 역사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싣고 있는 수준입니다.-광고기획자에서 사진가로 길을 바꾸셨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충무로에서 광고기획 일로 잔뼈가 굵었어요. 사진도 사업상 필요해서 시작했죠. 관광홍보물 제작에 관여하다보니 사진도 그런 주제로 찍게 되었고요. 대한민국의 풍경과 자연유산을 많이 찍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철없던 시절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 일에 회의가 생겼어요.-부안에 자주 내려오시는 시기였나요. 그때는 새만금이 시작되었을 때죠.그렇죠. 부안댐 건설로 갯벌을 뺏긴 어민들을 보면서 그들의 삶이 황폐해지는 것이 안타까웠어요. 거기에 새만금 사업까지 시작되는 것을 보면서 이것은 아니다 싶더군요. 제 삶이 바뀌게 된 계기입니다. 그때부터 새만금 반대운동을 하면서 지역주민들의 공동체에 참여하게 됐어요.-그때만 해도 주민들이 새만금을 자신들의 삶과 직결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맞아요. 반대하는 목소리가 없었죠. 그런데 주민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계기나 통로가 없었을 뿐 문제의식은 갖고 있었거든요. 98년 즈음부터 주민들과 소통하면서 환경단체와 결합해 새만금 반대운동을 시작했어요. 덕분에 공부도 할 수 있게 되었죠.-공부라면.(웃음) 사진으로도 그렇고 지역도 그렇고 제가 너무 무지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는데 저는 겉만 보았던 겁니다. 문득 내 자신의 철학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죠. 제가 찍는 사진의 관련 분야를 공부를 해보니 관점도 달라지고 의식이 변해 새로운 가치를 만날 수 있었어요.-되돌아보면 새만금 반대운동의 많은 부분이 문화적 활동과 연계되었던 것 같습니다.개인적으로도 새만금 반대운동은 문화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어요. 문화적인 논리로 대응하면 훨씬 설득력을 갖게 되니까요. 갯벌의 가치를 분석해 널리 알리는 일도 그 중의 하나였는데, 당시만 해도 갯벌에 대한 인식이 아주 낮아서 성과는 높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갯벌의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게 되었지만 이미 상당부분이 사막으로 변했으니 안타까운 일이죠.-새만금도 그렇지만 핵폐기장 반대 때는 지역사회의 갈등과 상처가 아주 깊었죠.주민들 사이의 갈등과 반목이 깊었죠. 되돌아보면 엄청난 시련이었어요. 부안 사람들에게는 온전히 치유되기 어려운 트라우마죠.-현장을 지키며 사진으로 기록해놓으셨으니 9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르는 부안의 생생한 사회사가 생생하게 남아 있겠습니다.자료는 거의 다 있죠. 제 할일이 그것이었으니까요. 특히 새만금에 관한 모든 것은 기록으로 남기려고 노력한 덕분에 그 과정과 흔적 대부분이 현장 사진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자료 요청도 많이 받습니다.-특히 기억에 남는 사진이 있습니까.새만금 방조제가 2006년 4월 21일에 막혔잖아요. 그 이튿날부터 3일 동안 패닉상태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래도 몸을 추스려 나가봐야겠더라고요. 현장에 가보니 그렇게 건강했던 갯벌이 어느새 하얀 소금 꽃이 핀 사막이 되어 있는겁니다. 고작 3일 지났는데. 충격이었습니다. 3일 전과 3일 후의 갯벌 풍경을 담게 되었는데 극과 극의 현상이 놀랍습니다.-지금 완공된 새만금을 보면 어떻습니까.국토이용 차원에서 본다면 이제 제대로 잘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그러나 지금도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그렇게 잘되어가고 있는 것 같지 않거든요. 저는 부안 시내에 나갈 일이 있을 때는 산길로 갑니다. 바닷길이 막히고 갯벌이 사막화 된 것을 보면 가슴이 아파 그 길로는 못가겠더라고요.-이제는 새롭게 생겨나는 땅을 희망적으로 활용하는 길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데요.그렇겠죠.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요. 돌아보면 더 안타깝기 만한데 지금도 갯벌을 잃은 어민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눈물 나와요. 갯벌을 잃고 실어증에 걸린 분들도 있어요. 왜 안 그렇겠어요. 70대 할머니들도 갯벌에 나가서 일을 하면 하루 몇 만원씩 벌었는데 지금은 몇 천원이 없어 시내를 못나온다고 합니다.-일상이 파괴된 상황이 안타깝군요.새만금과 관련해 아마 군산부터 부안까지 2만세대가 보상을 받았을 겁니다. 근데 그 보상이라는 것이 형편없었거든요. 젊은 사람들은 하루에 10만원도 넘게 벌었는데 갯벌이 없어지니 인력시장에 나갑니다. 고창 정읍까지 가서 하루 농사일을 하고나면 몇 만원 받는다는데 그 일거리 마저도 부족해 아는 후배는 택배 일로 생활을 꾸려갑니다.-화제를 좀 바꾸어보죠. 갯벌에 대한 추억이 많으시죠.그럼요. 어려서는 갯벌이 놀이터였어요. 마을에서 조금만 나가면 갯벌이었으니까요. 그때 몸으로 체험하면서 얻은 지식을 지금 작업에 잘 써먹고 있지요. 처음에 갯벌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려고 보니 지도가 그려지더군요. 물때가 언제인지, 종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생태계를 알고 있으니 시행착도 없고 어려움도 겪지 않았죠.-자료가 엄청날 것 같습니다. 분야도 그렇지만 양도 방대하겠죠.부안에 관한 것은 자연 생태부터 문화적 역사적 공간과 유산, 사회사를 망라해 기록했고, 역사적 사료도 복사해 후에라도 지역연구에 활용될 수 있도록 자료화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그 양이 많죠.-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요.지역의 현재를 기록함으로써 역사적 사료가 될 수 있게 하는 것이죠. 한 개인의 작업이니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지역을 기록하는 이런 작업들이 있어야 지역사가 바로 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좀 거창하지만 지역의 가치에 대한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싶어요. 역사 문화 민속, 지역적 특성을 온전히 보여주는 자생식물과 갯벌, 그리고 옛 문헌까지를 포함해 제가 작화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자료로 남아 있는 것까지도 모두 모아내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자료는 어디에 보관해놓으셨나요. 예전에는 필름 사진이어서 그 분량이 꽤 많을 것 같은데요.(웃음) 그것이 문제예요. 디지털 사진 이전에는 필름을 활용했잖아요. 그때 찍은 필름이 정리되지 못한 채로 있거든요. 보관할 당시에라도 메모를 잘했어야 하는데 기억할 수 있겠지 싶어 그냥 쌓아둔 양이 너무 많아요. 작년에 아카이브 구축을 하기 위해 정리 작업을 시작했는데 기본적인 정리 작업만 꼬박 1년이 걸렸죠. 서울 올라가면 그 일만 하다 내려왔다니까요.-개인적으로 담아내기에는 버겁겠습니다. 경비도 그렇고. 혹시 자치단체나 관련 기관에서 지원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개인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관련기관이나 자치단체의 지원은 한계가 있어요. 제가 해온 일들이 대개 관과는 대척점에 있는 일들이었으니까요.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럼에도 이런 자료들이 지역과 관련 분야에 꼭 필요한 자료들이니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아직 적극적인 통로를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자료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자치단체나 관련기관에서 가져야 마땅한 일이죠. 어느 지역도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 방대한 자료를 갖고 있기 힘든 일이거든요. 그런 점에서 보면 부안은 행복한 곳입니다.그런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 있다면 반가운 일이죠. 모든 역사는 기록이 말해줍니다. 지역은 더 그렇죠. 가장 지역적인 것이 정말 가치 있는 것인데, 우리는 늘 다른 것만을 바라보며 따라하려 하거든요. 우리 것을 잘 갖고 있어야 자긍심을 가질 수 있고 고향을 떠났던 젊은 세대들도 돌아와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가치 있는 것들을 잘 지키는 것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책무이기도 합니다.-여러 분야 중에서도 가장 힘들인 작업이 궁금합니다.오랫동안 새만금 갯벌 생태와 어민들의 삶을 주목했었어요. 새만금 일대의 생태지도를 그려놓고 싶었죠. 그래서 막히기 전에는 거기에만 집중적으로 매달렸습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학자들조차도 갯벌에 관심을 가진 분이 적었어요. 그러니 대중들이야 갯벌의 가치를 알고 있을 리 없죠. 갯벌은 간척해서 땅으로 만들어 활용해야 더 가치가 있다고 본겁니다.-지금은 부안의 자생식물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몇 년째 헤매고 있는 작업이죠. 변산의 자생식물은 끝이 없는 일 같아요. 제가 주위에 나 발목 잡혔다 말할 정도죠. 이제 됐다 싶어 그만할까하다가도 뭔가 더 좀 조사해야 할 것 같거든요. 그래서 늘 준비를 하고 있죠. 언제라도 계곡을 뒤질 태세가 되어 있는 겁니다.(웃음)-그렇게 많습니까.이쪽이 해안을 끼고 있는데다 남방계 식물의 북방한계선, 북방계 식물의 남방한계선이 겹쳐지는 지점이 많거든요. 또 해안가 식물은 또 그들대로 따로 있기 때문에 엄청 많아요.-학계에 보고된 것 이외에도 많이 나옵니까.국립공원에서 필요한 영역을 조사하는데 대략 800여종이 보고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영역을 넘어 위도와 왕등도까지 포함해 조사해보니 900종은 훨씬 넘고 1천종 정도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전문 연구자가 아니어서 찍은 것을 도감과 비교해 구분하고 수정하면서 정리하고 있는데 그 결과가 그렇습니다. 다시 분류를 정확하게 하면 구체적인 종수가 나오겠지요.-부안은 아름답고 역사도 깊고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곳입니다. 이런 요소가 부안의 가장 큰 힘이겠지요. 그래서 오늘을 기록하는 일이 더 소중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부안은 이미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천혜의 보고인 갯벌도 그 아름답던 해안선도 사라졌습니다. 후회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 되었죠. 둑을 트지 않으면 답이 없으니까요. 우리 지역에서는 이제 섬진강 하나 남았습니다. 보로 막혀있긴 하지만 그래도 지켜야 합니다. 강화도가 건강한 것은 그곳 하구가 막히지 않아서예요. 금강 영산강 낙동강 다 막혔잖아요. 자원의 가치로도 그렇지만 생태적으로도 죄짓는 일입니다.인터뷰를 하는 동안 허 대표의 작업은 언제까지고 계속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지역의 자연이, 역사와 문화가, 사회사의 기록이 진행되고 축적되는 과정은 의미 있는 일이다. 부안은 다른 지역보다도 이런 작업이 활발하다. 건강한 의식을 공유하는 단체와 사람들이 지역을 보듬어 안고 가꾸어나가는 풍경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우리 시대에 맞는 지역문화의 건강한 모습은 어떤 것일까. 허 대표와의 인터뷰가 그 답을 준다. 부안의 미래가 기대된다.● 허철희 대표는 새만금핵폐기장 반대 운동인터넷 신문 창간하기도허철희 대표는 부안 변산면 마포리가 고향이다.부모님은 농사를 지었지만 그의 어린 시절 놀이터는 조금만 나가면 끝없이 펼쳐지는 갯벌이었다. 자연스럽게 갯벌의 생태를 그때 체험으로 알게 됐다.중학교를 마치고 형제들과 함께 서울로 갔다. 청소년기를 보내고 비교적 이른 나이에 충무로에서 광고기획 일을 배웠다. 수습을 거쳐 정식으로 일하는 동안 그는 광고기획의 전반적인 업무를 실전으로 익혔다. 아이디어를 내고 기획과 편집까지의 전반적인 업무가 그의 몫이었다. 그때의 경험이 그를 역량 있는 광고기획자로 성장시켰다.카피라이터부터 아트디렉터 과정을 밟아 광고기획자로서 독립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광고기획을 하다 보니 외주로 나가게 되는 사진작업의 분량이 너무 많았다. 사업성 면에서 보면 큰 손실이었다. 어차피 관심 있었던 분야이기도 해서 본격적으로 사진을 배웠다.80년대 중반 즈음 독립해 작은 광고기획사를 내고 전국을 대상으로 관광홍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88년 변산반도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자 고향의 풍광을 제대로 담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2년 정도 작업하면 사계절을 담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는 것도 지식도 없이 의욕만 갖고 덤벼들었던 무지했던 시절이었다.본격적으로 지역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부안의 자연과 역사가 새롭게 다가왔다.사진가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88년부터 부안의 모든 것을 기록하기 시작한 그의 작업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이유다. 덕분에 부안의 생태와 자연 경관은 물론, 문화사와 지역사회사까지의 모든 시간이 그의 사진에 담겼다.1998년 서울에서 운영했던 광고기획사의 문을 닫고 프리랜서가 됐다.부안댐 건설로 어민들의 삶이 무너져 내리는 현장을 마주하며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인지를 깨닫게 된 즈음이었다. 더 이상 그는 고향을 떠난 출향민이 아니었다.새만금과 핵폐기장 반대 운동의 중심에 서면서 부안을 지키겠다는 의지는 더 단단해졌다. 2000년에 인터넷 신문 부안21을 만들었고, 2006년에는 뜻이 맞는 후배들과 부안생태문화활력소를 열었다.지역사에 대한 열정은 더 깊어져 2009년 지역 인사들과 부안역사문화연구소를 만들어 활동하면서 지역 답사를 이끌고 있다.새만금과 관련된 각종 기획전과 광주비엔날레에 초대되어 전시했다. 2000년 1월 전국적인 관심을 모았던 새만금 매향제를 기획한 이후부터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사진을 모아낸 〈새만금 갯벌에 기댄 삶〉을 펴냈으며 〈허철희 사진집〉과 〈변산반도자생식물〉을 냈다. 지금은 오랫동안 이어온 부안의 자생식물 탐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의 일상이 이 작업에 걸려있다.
젊은 시절부터 클래식 음악 발전에 열정을 쏟았던 바이올리니스트 은희천 교수가 새로운 일을 앞두고 자리를 마련했던 것은 7년 전쯤의 일이다. 개인 연주 활동 뿐 아니라 실내악단 활동과 전주시향 악장으로 오랜 세월을 보낸 그는 지역 클래식 음악에 늘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오는 주역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무슨 일인가를 도모(?)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월급 주는 민간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싶다.”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지만 그래도 목적과 운영 기반은 어떻게 만든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환갑을 앞둔 나이에 다시 민간 오케스트라를 만들겠다니 반가움 보다 걱정이 앞섰던 까닭이다. 답은 명쾌했다.“의지와 뜻이 가장 큰 재산이고, 좋은 연주자를 키워내는 일과 클래식 음악을 발전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뜻을 세우면 좌고우면 하지 않는 은교수의 성품을 아는 지인들까지도 ‘가능한 일일까’ 우려가 높았다. 척박하기만한 지역 문화계의 풍토를 잘 아는 사람들일 수록 ‘무리’라고 조언했다. 2009년 4월 18일, ‘클나무필하모닉오케스트라’란 이름의 민간 오케스트라가 클래식 팬들을 초대했다. 지휘는 클래식 대중화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온 금난새 감독. 테너 김남두와 메조소프라노 김정화, 바이올리니스트 전강호가 협연한 무대에 관객들은 환호했고, 지역 문화계는 격려를 보냈다. 은교수가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월급 주는 민간오케스트라의 첫 걸음이었다. 그 후 6년, 그의 꿈과 희망은 채워지고 있을까. 전주대 은희천 교수(65)를 다시 만났다. 대학 연구실에서 만난 은교수는 온통 은색인 머리카락이 무색할 정도로 열정과 도전 의지가 여전히 뜨거웠다. 어떤 힘이 이 은발의 연주자를 늘 새로운 도전으로 몰고 가는 것인지 궁금할 정도였다. “누구나 무엇인가를 꿈꾸고 실천하며 살아가지 않나요. 사람마다 다를 뿐 생각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특별한 일은 아닐 겁니다. 내게는 그 일이 클래식음악을 향한 일인 것이죠.”내년 초 정년퇴임을 맞는 그는 올해 추스르고 실천해야 할 일이 많다. 가뜩이나 정해진 스케줄로 하루가 빠듯한 그는 덕분에 마음이 더 급해진다고 했다. 돌아보면 그동안 쏟았던 열정이 허허로울 정도로 보람보다 아쉬움이 크게 와 닿지만 지역 클래식 음악 발전에 작은 기반이라도 마련한 흔적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그가 걸어온 길은 그의 말처럼 희미하지 않다. 흔적은 뚜렷하고 오래된 시간의 결실은 곳곳에서 빛나고 있다. -벌써 은퇴하신다니 세월이 참 빠르군요. 늘 청년이신 것 같았는데요. “시간강사로 출강하기 시작한 것이 75년부터이니 40년, 전임강사가 된 것이 83년이니 33년이나 되었어요.(웃음)”-지역의 대표적 실내악단인 글로리아스트링오케스트라도 교수님이 만드셨죠. “글로리아는 제 젊은 시절의 열정과 꿈이 고스란히 놓여있는 연주단입니다. 후배 제자들과 마음을 한데 모아 가장 순수한 열정으로 연주 활동을 했어요. 지금은 무대에 함께 서지 않지만 애정과 관심이 깊습니다.”-글로리아는 30여년 역사로도 그렇고 활동으로도 지역 클래식 음악의 자존심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봐주시면 감사한 일이죠. 전주라는 곳이 클래식 연주 활동을 의욕적으로 해나가기에는 열악한 환경인데 글로리아는 흔들리지 않고 한 길로 달려온 단체예요. 25주년에는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를 했었는데 지방 실내악단으로는 시도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죠. 그때 객석이 2000석이나 되었는데 거의 차서 모두들 놀라워했어요. 생각해보니 그런 시간들이 다 기쁨이고 보람이군요.”-글로리아를 만들었을 때도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은데요. “글로리아를 81년에 창단했는데 그때 군산대 전북대 전주대에 출강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전공하는 아이들이 실내악을 공부할 기회가 없더라고요. 현악 앙상블을 공부시켜야겠다 싶어서 제자들 중심으로 연습을 시켰는데 그것이 토대가 되어 실내악단을 만들게 됐죠. 처음에는 우리 집 아파트에서 접이의자 놓고 연습을 했어요. 나중에 노송성당 교육관을 빌려 쓸 수 있게 되었는데 그때 이름을 글로리아로 붙이게 됐습니다.” -전주시향 악장으로 활동하시면서는 초창기 연주단체의 체계를 잡아놓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환경이 참 열악했죠. “그때 광주시향에서 1년 동안 악장대행을 맡고 있었는데 전주시향에서 불렀어요. 와서 보니 연주활동만 하기에는 한계가 너무 많더군요. 그래도 관립이니 서서히 체계를 잡을 수 있게 되었죠. 전주시향 악장으로 20여년 활동했는데 우여곡절과 부침이 많았어요. 개인적으로는 살아가는데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교수님 활동에는 어김없이 70년대부터 이어온 지역의 클래식 음악 운동이 앞세워집니다. “70년대부터 고전음악감상회를 만들어 운영했었거든요. 패기만만한 시절이었죠. 겁도 없고. 처음에는 전공자들이 거의 없어 음악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면서 함께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자고 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게 됐죠.”-그때가 전주 클래식 음악 저변확대의 싹을 틔운 시절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끌었지 않습니까. “74년으로 기억하는데 군대 제대하고 돌아와서 바로 고전음악회감상회를 만들었거든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일주일에 한번 모임을 가졌죠. 가톨릭 센터 사무실을 빌려 썼는데 처음에는 회비를 받다가 나중에 대관료 없이 공짜로 사용하게 해주었어요. 성실함을 높이 샀죠.(웃음) 모임 횟수가 900회를 훨씬 넘었으니 역사가 꽤 깁니다.”-지금은 활동 하지 않나요.“감상회는 중단되었어요. 고전음악감상회가 아니어도 좋은 음악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오디오가 나오고 방송국의 FM음악 방송이 자리를 잡게 되니 회원들의 충성도가 약해질 수밖에 없었거든요.”-추억이 많을 것 같습니다.“생각해보면 회원들의 열정이 대단했어요. 그때만 해도 오디오가 귀한 시절이어서 매주 감상회가 있을 때면 회원이 집에 있는 오디오를 자전거에 싣고 와서 들었어요. 그러니 그 집에서는 좋아할 리가 없었겠죠. 나중에 별표 전축이 나왔을 때 오디오를 처음 마련했어요.”-그런 열정이 있어 지역에 클래식 바람을 일으킬 수 있었을 겁니다. 전주시향을 그만두고, 글로리아도 연주를 중단하셨는데 왜 다시 민간오케스트라를 창단했는지 궁금했습니다. “꼭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우리 지역 출신 연주자들이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도 들어설 자리가 없는 환경이 마음을 움직이게 했어요. 그때 전주시향이 8년 동안 단원을 한명도 뽑지 않았을 때거든요. 해마다 예산이 증액되어야 현실적인 운영이 가능한데 예산이 움직이지 않으니 기존 단원들의 인건비를 그것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인것이죠. 젊은 연주자들은 갈 자리가 없으니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가고. 그런 악순환이 지속되는데 문득 생각해보니 이러다 쓸 만한 연주자를 다 뺏기겠더라고요. 예술은 재능 있는 인력이 있어야 꽃을 피웁니다. 그래야 대학도 유지되고 교향악단의 수준도 향상될 수 있죠. 도시의 문화적 격도 따라서 높아지게 되고요.”-주위에서는 어떤 반응이었나요. “용기를 주는 분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안 될 일이라고 했죠. 아마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한편에서는 개인적인 목적이 따로 있는 것으로 오해도 했어요. 그래도 하고 싶었고 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월급 주는’ 오케스트라의 약속은 지켜졌습니까.“클나무 전신이 전북아트필하모닉오케스트라인데 그때는 월급이 없었어요. 클나무로 이름을 붙여 창단하면서 기본 월급과 연주수당을 주었죠. 사회적 기업이 되고 자치단체의 일자리창출 지원을 받아 그나마 유지할 수 있었어요. 올해 사회적기업의 지원이 끝나게 된다니 걱정이 크죠. 연주활동만으로 그 수준을 지키기 어렵거든요.”-음악감독으로 여전히 활동하십니까. “지난해 초에 그만두고 독립시켰습니다. 오케스트라 스스로 연주회를 기획하면서 운영해나가는 체제로 바꾸었죠. 걱정했는데 잘해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클나무 연습을 위해 건물도 새로 지었죠. “제 오래된 꿈이었어요. 오케스트라 연습실과 공연장, 실내악 연주실, 음악에 관한 책과 음반 등을 파는 가게 등 한곳에서 음악에 관한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을 꼭 마련하고 싶었거든요. 아직은 능력이 없어서 역부족 이예요. 큰 부담을 안게 되긴 했지만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으니 큰 꿈을 하나 이룬 셈이죠.”-작년에 그만두셨어도 5년 동안 클나무를 운영해오는데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클나무 활동을 위해 후원회를 조직했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어요. 지속적으로 후원금을 내는 일도 어려운 일이고요. 객석을 채우는 일도 큰 숙제여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를 만들었죠. ‘하나임오케스트라’인데 취미로 연주활동을 하면서 그들 스스로 관객도 되어주는 선순환의 환경을 위한 것이었어요. 내부적으로 크고 작은 부침이 있긴 하지만 그동안 다섯 차례의 정기연주회를 가졌고 지속적인 활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클래식 산책’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정기적인 음악 감상회도 운영하고 있고요.”-클나무 창단 연주 지휘를 금난새 감독이 맡았었는데 인연이 있었습니까. “창단연주를 앞두고 찾아가 처음 만났어요. ‘전주에 클나무오케스트라를 만들었는데 금선생이 지휘를 맡아주면 잘 풀려갈 것 같다’고 했죠. 금난새 선생은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 대중화에 상징적인 존재여서 클나무의 대중적 인지도를 높여가는데 큰 힘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객석을 채우는데도 아주 효과적인 선택이었어요. 기대만큼 성과가 있었습니다.(웃음)”-교류는 지속되고 있습니까. 클나무에 대한 기대는 어떤가요. “높이 평가해주십니다. 작년에 오셨을 때는 ‘클나무 오케스트라는 이제 큰 나무 오케스트라다. 만약 이런 단체가 서울에 있었다면 훨씬 대단한 단체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격려하셨어요. 저와 뜻을 모아 민간오케스트라 활성화를 위한 전국오케스트라협의회도 만들었죠. 각 지역의 민간 오케스트라 12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창립할 때는 문광부의 지원도 이끌어내면서 민간오케스트라 발전을 좀 더 적극적으로 이어가고 싶었는데 기대만큼 활동이 따라주지는 못합니다.”-클나무 연주무대는 늘 새롭고 활기가 넘치는 것 같습니다. 대중과 만나려는 기획이 신선하더군요.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죠. 국악은 물론이고 대중가수들과 함께 하는 무대를 기획하기도 했는데 공과가 다 있는 것 같아요.”-아무래도 민간오케스트라의 존속을 위해서는 기업의 후원이 필요한데 상황이 어떻습니까.“지역 환경도 척박한데다 클래식음악에 대한 인식과 관심이 낮아서 기업 참여는 거의 기대하지 못합니다. 기업 메세나는 우리에게 멀기만 한 이야기죠. 사실 기업의 참여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거든요. 작게라도 기업은 협찬하고, 오케스트라는 예술 활동을 제공하는 그런 관계가 확산되면 좋겠어요.”-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활동을 꾸려오셨으니 대단한 성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내년 은퇴 이후 다시 새롭게 준비하시고 있는 일이 있습니까. “좋은 연주자를 찾아낼 수 있는 일을 해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클래식음악 대중화도 함께 이뤄갈 수 있는 일이죠. 스즈키 메소드 교육인데 바이올린을 어렸을 때부터 가까이 하게 하는 문화를 확산하는 데는 더없이 좋은 통로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거든요. 아무래도 학원 같은 형식으로 운영해야 하기 때문에 사회적 통념으로는 고민스러운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음악 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굳이 피하지 않으려고 합니다.”-클래식 음악을 우리가 가까이 해야 하는 이유가 있겠지요. “예술의 모든 분야가 그렇겠지만 클래식 음악은 인간의 감성을 깨워줍니다. 수백 년전의 작곡가가 만든 음악을 지금 이 시대에 들으면서 감동하는 것만으로도 위대한 장르라는 것이 증명되죠. 클래식 음악은 감정의 모든 표현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요즈음은 기쁨을 얻는데에만 주목하는 것 같아요. 기쁨 뿐 아니라 슬픔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슬픔을 공유할 수 있는 아이들은 커서도 좋은 인격을 갖게 됩니다.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자주 들려주면 감성교육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큰돈이 드는 것도 아니니 일상 속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일이죠.”은 교수의 대화는 직설적이다. 에둘러 표현하지 않는 화법으로 때로는 속내를 다 드러내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순수함이 상대방에게 온전히 전해진다. 그만의 미덕이기도 하다. 고전음악감상회를 만들어 클래식 음악을 일상 속에 확산시키고, 실내악단을 창단해 연주자들의 역량을 키우고, 전주시향을 일구고, 민간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지역 클래식 음악의 텃밭을 일구어온 그의 음악 인생은 그가 쏟아온 열정 만큼 화려하진 않으나 살아 숨 쉬는 생생함과 예술적 품격으로 빛이 난다. 무엇보다도 지역 음악 현장에서 스스로 도전하고 부딪쳤던 40여년, 한결같았던 세월의 힘이 안겨준 결과다.● 은희천 교수는 한번 뜻 세우면 실행하는 '클래식 전도사'은희천 교수는 광주가 고향이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직장을 전주로 옮기면서 전주 사람이 됐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남들보다 일찍 클래식 음악을 만날 수 있었다. 클래식과의 첫 만남은 초등학교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시립교향악단의 광주연주회를 갔을 때였는데 그 음악이 마음에 아주 깊게 남았다. 중학교 때부터 브라스밴드 활동을 하면서 취미로 바이올린을 배웠다. 아버지는 그가 의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전주고 입시에 떨어지고 신흥고에 들어가면서 길이 바뀌었다. 아버지도 연주자가 되겠다는 뜻을 꺾진 않았지만 기대를 못 따라 주는 아들에게 실망해 대학 입시원서를 쳐다보지도 않고 도장을 찍었다. 연세대에 다니던 시절에는 동료들과 토론하는 공부모임을 만들어 열심히 활동했다. 그러나 군대를 제대하고 전주에 내려와 보니 전공자도 거의 없는데다 함께 공부할 수 있는 모임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클래식 대중화를 위한 노정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74년쯤 클래식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모아 고전음악감상회를 만들었다. ‘가리방’ 등사기로 해설집을 만들던 시절이었다. 이 모임은 7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전주에 클래식 음악을 확산시키는 통로가 됐다. 이듬해부터 지역의 각 대학 음악과에 출강하기 시작했다. 교육자가 되니 제자들이 가야할 길이 보였다. 글로리아스트링오케스트라를 만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번 뜻을 세우면 실행하고야마는 품성으로 그는 늘 음악 현장의 중심에서 날선(?) 활동을 이어왔다. 전주대 전임강사로 임용된 것이 83년. 그는 학교에서는 좋은 교육자가 되고 싶었고, 연주자로서는 좋은 무대를 많이 열어 클래식 대중화를 이끌어내고 싶었다. 덕분에 그에게는 ‘클래식 음악 전도사’라는 별칭이 붙는다. 광주시향 악장 대행을 거쳐 전주시향 악장으로 오랫동안 활동했으며 스스로의 단련을 위해 개인 연주회를 활발하게 열어왔다. 2009년에는 민간오케스트라 클나무필하모닉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월급 주는 오케스트라’를 표방한 이 오케스트라는 5년 동안 그의 열정을 바탕으로 무리 없이 운영되어 왔으며 지난해 그로부터 독립한 후로도 고군분투, 지역의 척박한 문화 환경을 딛고 패기 있게 항해하고 있다. 내년 봄,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는 그는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스즈키 메소드 바이올린 교육 현장에 나서는 일이다. 사회적 통념으로는 자존심과 권위를 버려야만 가능한 일이지만 그는 좋은 연주자을 발견할 수 있고 클래식 음악 확산에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만으로도 선택의 여지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린이들을 좋은 연주자로 키워내는 ‘꿈의 오케스트라’ 사업을 제안하고 이끌어온 그는 어릴때부터 클래식 음악을 가까이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교육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어린이 교육에 마음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 젊은이들을 분석한 책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이 화제다.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가 이 책을 펴낼 때의 나이는 26세. 자신의 세대를 스스로 분석한 보고서인 셈이다. 이 책은 절망적인 일본사회에서 자기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기는 젊은이들이 증가하고 있는 현상을 주목했는데, 저자는 그 이유를 그들이 더 이상 희망적인 미래를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 일본 젊은이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그저 끝나지 않는 일상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미래를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우울하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이 처한 현실이 한국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해지는 이유다.전주 남부시장 한쪽 건물 옥상에 자리 잡은 청년몰의 젊은이들은 그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남부시장 청년몰 볶음밥 전문 음식점 더 플라잉팬 김은홍 대표를 만났다. 날아다니는 프라이팬을 상상하며 들어선 그의 식당은 예상대로 비좁았다. 꽉 차게 앉아도 겨우 아홉 명이 어깨를 나눌 수 있는 공간. 고개만 들어도 훤히 들여다보이는 주방에서 은홍씨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손님들을 맞았다.시장 옥상에 청년장사꾼들을 불러 모은 것은 2012년 문화관광부의 문전성시 프로젝트였다. 그는 이 공모에 서른아홉 살, 턱걸이 청년으로 응모해 점포를 얻었다. 늘 꿈꾸어오던 자신만의 요리를 만들어 나눌 수 있는 첫 공간. 한식당과 중식당을 거쳐 식품회사의 제품 개발까지 밑바닥부터 실전을 쌓아온 그에게 더없이 행복한 일상이 찾아왔다. 함께 문을 연 11개 점포 청년 장사꾼들과 뜻을 도모하며 그는 새로운 미래를 열었다. 6개월 남짓 지나면서 청년몰은 생기를 얻기 시작했다. 젊은 디자이너와 문화기획자들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샘솟는 공방들, 카페와 화원, 작은 가게의 문이 바빠졌다. 그의 식당은 그 중에서도 잘나가는 가게로 꼽혔다.가게 인테리어와 주방 기자재를 갖추는데 350만원이 들었어요. 중고 재료를 사다 모든 작업을 제 손으로 했거든요. 주방 기자재도 가능한 중고를 사거나 얻었죠. 그러다보니 초기 투자비용이 엄청 낮아지더라고요.창업 자금 350만원으로 만든 그의 가게는 그동안 다녀간 손님들이 남겨놓은 흔적으로 아주 재밌는 공간이 됐다. 꽤 이름난 캘리그라퍼의 손글씨체며 웃음이 절로 나오게 하는 은홍씨가 직접 써놓은 가게 운영 지침까지 크고 작은 메모지가 빼곡히 들어차있는 식당 안은 그 자체로 즐거움을 준다. 맛도 있지만 재미를 주는 음식을 개발하고 싶다는 그의 바람이 공간에도 그대로 스며있는 덕분이다. 그와의 인터뷰도 공간만큼이나 발랄하고 즐거웠다.-가게 안이 복잡하면서도 재미있군요. 사장님 아이디어인가요.한두 명 손님들이 남기고 간 메모를 없애지 않고 그대로 두었더니 자연스럽게 이런 공간이 만들어졌어요. 고마운 일이죠. 저도 가끔씩 읽어보면 재미있고요.-이곳에 들어온 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햇수로 4년차, 만 3년 되어갑니다. 문광부 문전성시 두 번째 공모로 들어왔어요. 청년몰이 입소문 나면서 경쟁률이 꽤 높았는데 다행히 들어오게 되었죠. 사실 제게는 기회가 딱 한번 밖에 없었거든요. 나이가 청년으로는 턱걸이여서. 그러니 꼭 되어야만 했어요.(웃음)-심사를 통과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요.아이템 덕을 본 것 같아요. PT 설명으로 심사를 받았는데 제 아이템이 다른 사람들과 중복되지 않고 좀 특별했거든요. 저는 그동안 앞으로 만들 요리를 위해 개발해놓은 레시피도 적지 않았고, 창업을 언젠가는 꼭 할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준비가 되어 있었어요.-준비된 장사꾼이었군요. 전공은 요리와 거리가 있지 않나요.디자인을 전공했으니 전혀 다른 길이죠. 그런데 요리는 사실 오래전부터 제가 가장 잘하고 신나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광고회사를 다니면서도 일이 재미는 있었지만 내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죠.-음식점 창업이 꿈이었습니까.좀 멀리 내다본 꿈은 음식 프랜차이즈 사업이에요. 제가 만든 요리 레시피를 바탕으로 한 프랜차이즈죠. 많은 사람들이 즐겁고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그런 요리를 만들고 싶거든요. 식당은 그 과정이겠죠.-음식 프랜차이즈는 아무래도 인스턴트식품의 성격이 강하니 건강한 먹거리와는 대별되는데, 왜 프랜차이즈인지 궁금하군요.프랜차이즈도 얼마든지 건강한 먹거리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거든요. 건강한 재료를 쓰면 해결되는 부분이 있고요. 일단 문제가 되는 것은 보관을 위한 방식인데, 유통기간을 짧게 하거나 멸균 방식을 고민하면 충분히 해결 방법은 있다고 봐요.-그런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익산에서 식품회사를 다닐 때 우리나라 통조림 제조 초창기에 참여했던 부장님과 일한 적이 있어요. 그때는 레시피 개발이 주 업무였지만 품질 관리도 중요해서 부장님으로부터 배우고 미생물 실험도 할 수 있어야겠다 싶어서 인터넷을 뒤져 공부했습니다. 헤썹(HACCP)은 식품 제조과정에서 위해요소를 분석하고 사전에 예방적인 관리로 식품의 안전성을 확보하는 안전관리시스템을 말하는데 꼭 필요한 부분이어서 그것도 독학으로 공부했고요.-이 식당에서 프랜차이즈 꿈이 영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메뉴를 보니 요리 방식이 특별한 것 같습니다. 맛도 특별하겠군요.일종의 퓨전 음식인데 음식 맛과 방식은 여기 아니면 맛볼 수 없는 것들이죠.-레시피 개발은 어떻게 합니까.제가 요리 전공자도 아니고 체계적으로 공부한 것도 아니어서 가능하면 많은 음식을 맛보는 일, 책을 통해 보고 상상하는 일이 제 공부의 전부랄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저만의 특별한 방식은 사진을 보고 그 음식을 상상하는 일이예요. 무슨 맛이 날까, 색깔은 왜 이럴까 상상하면서 재료를 파악하고 제가 만들어보죠. 저도 맛을 보지만 손님들이나 주위 사람들의 시식 소감을 들어 성공적이다 싶으면 레시피로 개발해놓습니다.-결국은 요리를 개발하는 것도 치열한 자기 연구와 노력이 필요할 겁니다. 궁극적으로는 자시만의 철학을 음식에 담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물론이죠. 저는 맛도 중요하지만 재미있는 음식을 만들고 싶어요. 음식에 즐거움을 담아내는 것이 제가 추구하는 음식 철학인데 사실 그것이 쉽지 않거든요. 맛과 모양은 물론 재료와 그릇까지도 다 조화를 이뤄야 가능한 일이겠죠.-누군가가 맛있게 재미있게 먹는 것을 상상하는 일 자체가 요리하는 사람으로서는 꽤 즐거운 일이겠습니다. 본격적인 요리 공부는 어떻습니까.외국의 전통 있는 요리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도 좋겠죠.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면 다른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게는 다른 음식을 맛보는 것이 가장 큰 공부지요. 먹어보면 그 맛을 상상하면서 요리를 만들어 낼 수 있거든요.-실전과 경험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군요. 레시피를 만들 때는 어떤 점을 가장 중요하게 고려합니까.특별한 계층만 먹게 되는 값비싼 요리보다는 서민들이 편하고 즐겁게 먹을 수 있는 대중적인 요리로 개발할 수 있게 하는 것이죠.-대중들을 위한 요리라면 아주 보편적인 맛이어야 할 텐데 그렇다보면 특별함은 그만큼 반감되는 것 아닐까요.음식은 주관적 기준으로 평가 받습니다. 사람들마다 취향이 다르니까요. 저는 음식은 선입견 없이 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정관념을 갖고 대하면 좋은 음식 맛있는 음식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그런 분들은 익숙하지 않으면 다 맛이 없다고 느끼거든요. 그런 틀을 깨고 싶어요. 여기서도 새로운 음식을 내놓을 때면 손님들에게 설명을 자세하게 해줍니다. 방식과 재료까지.-화제를 좀 바꾸어보죠. 그동안 경력을 돌아보면 식품 쪽이 아니고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 같습니다. 어느 일이든 최선을 다하고 또 스스로 영역을 확장해가는 자세가 돋보이던데요.어떤 일이라도 열심히 잘해낼 자신은 있어요. 두렵지 않거든요. 그런데 내 식당을 갖고 하다 보니 이 일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고 이야기해주는 것도 고맙고 단골이 생겨 그분들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런 저런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쁨도 큽니다. 이 길이 정말 내 길이었구나 다시 확신하게 된 것이죠.-그렇다면 지금 하시는 이 일이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그 답은 좀 고민이 되는군요. 좀 멀리 내다보면 아무래도 확신을 갖기에는 위험 요소가 많거든요.-위험요소라면 어떤 것인가요.구체적으로는 청년몰이 처한 상황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출이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말부터 큰 폭의 변화가 있어요. 이곳이 아무래도 한옥마을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인데, 식당의 경우는 한옥마을 길거리 음식 후유증을 단단히 받고 있거든요. 저희 뿐 아니라 구도심 음식점 매출에도 영향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얼마 전에 시작된 남부시장 야시장도 청년몰과는 막혀 있어 주말 매출에 영향이 있어요. 사실은 요즈음 조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건축물로서의 문제도 있지 않나요.이 곳이 워낙 오래된 건물인데다 합법화된 공간이 아니니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있어 해결책을 찾기 쉽지 않아요. 전통시장 대부분이 안고 있는 문제일겁니다.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관광특구 지정을 받는 것이죠. 그런데 관광특구 지정은 일정한 유동인구를 확보해야 하고 갖추어야 할 조건이 까다로워서 어려운 일이더라고요.-청년몰에 입점한 가게는 몇 개나 됩니까.서른 두개가 문을 열고 있는데 가게가 비면 수시로 새 주인이 들어옵니다.-청년몰이 개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들고나는 가게가 있습니까.잘되어서 나가는 친구들도 있지만 공동체문화에 적응 하지 못해 나가는 경우도 있고, 의욕이나 호기심만으로 시작했다가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죠. 어느 일이나 절실함과 치열함이 있어야 밀고 나가는 힘이 생기는 것 같아요.-조금 다른 이야기인데요. 나이로 청년을 가르자는 것은 아니지만 이곳 청년몰이 창업의 플랫폼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요. 3년이나 5년 정도 운영 연한을 정하고 이곳에서의 경험과 자생력을 기반으로 다른 곳에서 창업 할 수 있도록 하는 순환구조를 갖게 하는 것이죠. 물론 그런 경우 특별한 지원책이 있어야겠죠.저도 처음에는 그런 방식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5년 정도 일하고 나가면 다른 친구들이 와서 일하는 구조죠. 그런데 사실 해보니 이곳에서는 경험을 쌓는 일밖에 할 수 없는 여건이에요. 다른 곳에서 창업 할 수 있는 자력을 마련하는 일은 꿈도 못 꾸죠. 그만큼 수익이 나지 않으니까요.-현실적으로 그런 한계가 있겠군요. 그런데 자치단체 같은 곳에서 좀 더 많은 청년들에게 기회를 주고 또 이곳을 거친 사람들의 창업을 지원해주는 정책을 마련한다면 어느 정도는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요.그런 대책이 마련된다면 좋은 정책이 될 것 같습니다.-시장은 일상성이 생명일겁니다. 그런데 청년몰은 관광객들에게는 인기가 있지만 전주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찾아오는 공간이 되기에는 아직 한계가 큰 것 같아요.그것이 가장 큰 고민입니다. 우선은 시민들의 공간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관광객들이 들러 가는 곳으로만 자리 잡다 보면 시장으로서의 자생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겠죠.-자체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 아닐까요.물론이죠. 다양한 기획을 구상하고 있는데 지난해에도 청년몰 식당들이 중심이 되어 푸드 페스타를 열었어요. 반응이 좋았죠. 올해도 전주 시민들이 함께 할 수 있는 행사를 기획하고 있어요. 환경도 새롭게 바꾸고 먹거리의 질도 높이고 길거리 음식과 차별화해서 단골을 확보할 수 있는 방식을 열심히 고민하고 있습니다. 봄에는 좀 더 새로운 청년몰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남부시장 청년몰은 어쨌든 들고나는 관광객들로 활기가 넘쳤다. 덕분에 청년 장사꾼들의 꿈과 의지가 쉽게 꺾일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그러나 일상성이 시장의 생명력이라면 청년몰도 전주 시민들이 찾아오는 일상 공간이 되어야만 한다. 그만큼 갈 길이 멀다.인터뷰 말미, 그는 남부시장 청년몰의 미래는 전통시장의 미래와 함께 있어야 옳다. 청년들의 꿈이 살아있어야 전통시장의 꿈도 산다고 말했다. 청년몰과 전통시장을 한 몸으로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도 절실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김은홍 대표는 광고식품회사 거치며 실전 경험한 준비된 장사꾼김은홍 대표는 전주에서 나고 자랐다. 올해 마흔 한 살. 서울에서 1년 남짓, 익산에서 5년 남짓 직장생활 한 것 말고는 전주를 떠난 적이 없다. 한 때는 그래도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서울로 올라갔지만 경제적 가치보다는 풍요로운 삶의 가치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그는 공부에는 별다른 취미가 없었다. 그림 그리는 일을 좋아해 미술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자식 교육에 완고한 아버지가 무서워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마음 졸이며 중고등학교 6년을 다녔다. 성적이 한참 뒤처지는데도 경제학과나 무역학과에 들어가기 원하시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대학 입학 원서를 냈다. 예상대로(?) 낙방했다. 대학 대신 디자인 학원 같은 곳에서 실력을 쌓아 취업하려고 마음먹었지만 담임선생님이 전문대 입학을 권했다. 미술공부를 정식으로 해본 적 없던 그는 1주일 속성으로 학원에 다니며 정밀묘사를 공부해 디자인과를 지원했다. 실기시험에서 주어진 과제는 빨래집게. 고작 우유팩만 다섯 번 그려본 경험으로 입시에 합격했다. 그러나 대학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1학년 2학기를 마치고 군대를 갔는데 마지막 휴가를 나오니 아버지 사업이 부도나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복학을 했지만 2학기를 코앞에 두고 그만두었다. 광고회사에 들어가 온갖 일을 다 하며 버텼다. 복학해 간신히 졸업장을 받았다. 광고회사 일도 그런대로 할만 했지만 본격적으로 요리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대신 만든 음식을 입맛 까다로운 식구들이 타박하지 않고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며 스스로 자신의 재능(?)을 깨달은 덕분이다. 일식과 양식 조리사 자격증을 땄다.첫 직장은 전주의 한정식 식당이었다. 6개월 일하다 서울에 일자리가 생기자 주저 없이 올라갔다. 프랜차이즈 중국 음식점이었다. 업무는 매장 관리였지만 중식 요리도 눈여겨 배워두었다. 결혼을 앞두고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다 다시 전주로 내려왔다. 마땅한 직장이 없어 택배회사에 들어갔다. 몸도 고단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시기였다. 결혼하고 익산에 있는 식품회사로 직장을 옮겼다. 새로운 요리를 개발하고 레시피를 대중화하는 일을 꿈꾸어왔던 그로서는 좋은 기회였다. 업무는 물류를 다루는 지게차 담당이었지만 디자인 전공을 살려 회사 로고도 바꾸고 엑셀을 익혀 자료를 정리하고 체계화하면서 제품개발에도 참여했다. 사업을 확장하던 회사가 어려움에 처하면서 거래처였던 프랜차이즈 식품업체로 옮겨야했다. 그즈음 전주 남부시장의 청년몰 공고가 났다. 나이 제한으로는 턱걸이여서 마지막 기회였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볶음밥 전문점 더플라잉팬을 창업했다.햇수로 4년차. 그는 3평도 채 되지 않는 작은 공간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만든 볶음밥으로 손님을 만난다. 가게는 단골이 늘고 입소문이 나면서 청년몰 안에서도 제법 잘나가는 식당으로 꼽힌다. 큰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앞으로 몇 년은 즐겁게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건강하고 재밌는 음식을 담아내는 프랜차이즈 사업이 여전히 그의 열정을 부추긴다. 휴일인 월요일에도 가게로 나와 레시피 개발에 시간을 쏟는 것도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한 준비다.
전주에서 제천까지 3시간 가까운 동안 안개는 쉬이 걷히지 않았다. 앞만 보고 달리는데도 길은 가까워지거나 멀어지거나 요동쳤다. 덕분에 길을 돌고 돌아 빠르게 갈 길을 주춤대며 돌아가야 했다. 판화가 이철수씨(61)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80년대의 폭압적인 사회를 저항의 언어로 고발해온 그는 90년대를 거치면서 자기 성찰의 사유하는 힘을 일상과 자연을 향한 깊은 통찰로 담아내는 우리 시대의 판화가로 우뚝 섰다. 그의 판화는 시대를 직시하면서도 맑은 글과 그림으로 독자들을 감동시키고 깨어나게 했다. 그만큼 성찰의 시간은 그의 일상이 됐고, 사유는 깊었다.3년 동안 바깥세상과 거의 결별하고 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원불교 대종경(大宗經)을 목판화로 옮겨내는 대대적인 작업이었다. 불교 경전과 성서 등 종교의 경계를 가르지 않고 우리 시대에 필요로 하는 지혜를 판화에 담아온 그동안의 작업 연상에서 보면 새로운 일이 아니지만 경전의 모든 내용을 판화로 옮겨내는 과정은 그의 생애에 특별한 대장정이 아닐까 싶었다.원불교 100년 사업으로 건네진 대종경 목판화 작업은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했다. 경전을 읽고 또 읽는 동안 세상에 전할 이야기는 자꾸 늘어났다. 300개의 목판 밑그림이 그려졌다.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은 그 중 200개의 목판을 새기는 일이다.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지나칠 수 없는 주옥같은 가르침을 새기는 작업이다.그의 경전 읽기는 대화의 과정이다. 덕분에 목판화의 작업 역시 경전의 글귀에 그림과 자신의 해석을 덧붙였다. 선문답 같은 이철수식 독특한 형식은 이 연작에서도 여지없이 빛을 발한다.경전에 대한 새삼스러운(?) 눈뜸에 그는 큰 인연의 기쁨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 기쁨은 온전히 그의 목판화에 담겨 오는 가을이면 대중들을 만나게 된다. 대중들에게도 큰 행복이다.그는 인터뷰 내내 목판 새기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대화를 하면서도 목판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저기 쌓여있는 것이 대종경 작품인가요. 엄청나군요.200점정도 되는데 쌓아 놓으니 더 그렇게 보이는가 봐요. 완성된 것이 100여점 되는데, 다른 것들도 아주 손을 안댄 것은 아니어서 전체 작업 양으로 보면 70퍼센트 정도는 끝난 셈이에요.-대종경 자체가 워낙 방대한 분량이니 그렇겠습니다. 담긴 내용을 다 새기는 것은 아니겠죠.물론이죠. 어차피 모든 것을 다 새길 수는 없으니까요. 내용을 읽으면서 메모를 했다가 그 중에 필요한 글을 다시 가리죠. 밑그림을 그린 것이 300여점 되는데 그 중 200점 정도를 새길 계획입니다.-언제부터 시작하셨습니까.올해가 원불교 개교 100년이어서 기념사업으로 5년 전 쯤 제안을 받았어요.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한 것은 3년 전인데, 그동안 경전을 열심히 읽는 일을 거듭하고 밑그림을 만들었어요. 올해 10월에 전시가 예정되어 있어 마음이 바쁩니다. 애초에는 100점정도 예상했는데 그 정도로는 내용을 압축하기 힘들었어요. 아쉬움에 더하다 보니 300점이나 밑그림을 그리게 되었네요.-그만큼 세상에 전하고 싶은 말씀이 많았다는 것이겠죠.처음 이 작업을 제안 받았을 때는 망설였어요. 60대를 앞두고 이 작업에 바치게 될 시간이 2년이 될지 3년이 될지 모르는데 이 시기를 이 일하는 데만 써도 좋을지 고민이 되더군요. 중국 선승들의 선문집 작업을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대종경을 두 번 정독 하면서 원불교 대종경과 다시 인연이 이어지게 된 것을 아주 다행으로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만큼 좋은 경전이었죠.-다시 만났다고 하셨는데, 무슨 이야기인가요.20대에 원불교 경전을 읽은 적이 있어요. 아내가 원불교 신도였거든요. 그런데 사실 그때는 지금만큼 크게 와 닿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번에 읽으면서는 아주 새삼스럽게 참 좋은 경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죠. 그래서 이 심부름을 마음을 다해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을 잡았을까요.기본적으로 쉬운데다 지극히 생활적인 내용이에요. 뜬구름 잡는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습니다. 요즈음 시대를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에 관해 의심을 갖기 십상이고, 잘 살고 있는지에 관해서 고민을 하게도 되죠. 그러면 뭔가 가르침을 찾아보고 싶어 하잖아요. 그래서 어르신들이나 지혜로운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찾아가 들으려고도 하는데 많은 이야기들이 실제로는 내 이야기로 실감 있게 느껴지기는 어렵거든요. 들을 때는 솔깃해도 돌아서면 잊게 되거나 그 가르침으로 살아가는 일은 더구나 어렵죠. 그래서 때로는 지혜로운 언어조차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이 경전은 생생한 생활법문들로 가득차 있어서 시간적으로는 백년 혹은 수십 년 세월을 겹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 있는 법문으로 얼마든지 읽힐 수 있겠다는 것이죠.-허황하지 않은 지혜가 담겨 있다는 말씀이군요. 원래 선불교에 관심이 많으셨죠.그동안 그림을 통해 불교적인 지혜를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내려고 애를 많이 써왔죠. 그런데 여기 정말 새로운 보물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원불교에 마음을 둔 분들에게는 아주 반가운 이야기겠습니다.그동안 불교적 지혜를 빌려 쓸 때도 그랬고, 원불교 경전으로 작업 하면서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특정한 종교를 선전하겠다는 의도는 전혀 없어요. 다만 어느 지혜든 우리가 필요한 것이라면 다 가져다 쓰고 싶다는 욕심이 있죠. 혹시 종교에 관해서 불신을 갖고 있거나 특정 신앙을 가지고 있어 거부감을 갖게 되는 분들에게 이 이야기는 꼭 해드리고 싶어요.-이렇게 온전히 이 작업에만 매달려 있으면 바깥세상이 궁금하지 않은가요.집에 앉아 있어도 저절로 다 알게 되는 것이 세상일인데요. 걱정 없어요.(웃음)-지난해에는 작업에만 전념하시기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세월호 참사만 해도 그렇고.세상에 성을 낼 일이 너무 많아 힘들었죠. 그런데 끝이 날 일이 아닌 것 같네요.-어떻게 보내셨습니까.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명에 관한 생각을 새삼스럽게 좀 더 되뇌거나 고민을 더 하거나 하는 시간이 길었어요. 존재에 대한 생각도 깊어졌고요. 남은 과제가 많잖아요. 슬픔과 분노가 커질수록 세상을 바꿔내야 할 과제는 과제대로 차근차근 해결해가는 자세가 필요할 것 같아요. 남은 생명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정직하게 생각하고 이야기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경전 읽기가 그래서 더 특별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작품마다 대종경에 담긴 글과 선생님의 해석이 붙여있군요.거의 그렇죠. 아주 예외적으로 덧붙일 말이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 제 나름의 해석이 놓여 있습니다.-경전과의 대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모든 책읽기가 결국은 대화가 아닐까요. 경전 같은 책 읽기는 더 그렇죠. 단순한 정보를 전달 받는 차원이라면 경전이라고 하기 어렵지 않겠어요.-어떤 대화를 어떻게 나누는 것이 좋은 읽기일까요.경전 속의 이야기가 깨달음을 얻은 분의 이야기이거나 혹은 이야기가 있는 예화이거나 그것을 잘 읽어낸 독자는 그 말씀을 바깥 어느 지혜로운 분의 말씀으로가 아니라 내 이야기로 들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럴 때 가장 훌륭한 경전 읽기가 되겠지요.-작품이 세상에 나왔을 때 어떤 역할을 기대하십니까.경전에 담긴 내용이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어요. 대종사께서 내세운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하자 같은 표어는 정말 놀라운 표현인데, 당시 파리 박람회나 도쿄박람회를 보면 산업사회가 보여줄 수 있었던 물질의 확장이나 확대가 굉장했죠. 우리나라에서도 어느 정도는 그런 환경을 공유할 수 있었겠지만 100년 지난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물질의 개벽만큼 실감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도 산업사회가 보여준 물질의 변화를 보고 개벽이라는 표현을 내놓을 만큼 그 변화를 아주 깊이 이해하거나 통찰한 점은 정말 놀라워요. 정신을 개벽하자는 말씀은 물질의 급격한 변화, 상상할 수 없는 형태나 내용의 변화가 몰려오는 지금 상황에서 우리 사회와 인류 전체의 화두로 삼아도 좋을만한 큰 화두예요.-그동안 불교 뿐 아니라 성서 작업도 많이 하셨죠.부분적으로 했었죠. 이 일이 끝나면 중국 선승의 선문집과 성서 연작 작업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그동안에도 종교적 경계를 가리지 않고 작업 해오긴 했는데 이제는 그런 연작 작업을 통해서 그 안의 가르침이 어쩌면 같은 경지의 것일지 모른다는 가설을 확인해보고 싶어요.-목판 작업을 옆에서 보니 노동량이 만만치 않습니다. 200점 연작을 하는 일이 힘들진 않습니까.이런 분량의 연작은 저도 처음이에요. 특히 이 작업처럼 글씨가 많으면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릴 수밖에 없죠. 그러나 다른 경우는 비교적 단순한 형태의 작업이 많습니다. 기운을 소진하는 일이 예술인에게만 있는 일이겠습니까. 더러는 창작의 어려움을 말하지만 밥벌이로 하는 일도 힘이 드는 일이죠. 훨씬 더 힘들게 사는 사람들도 많고요. 우리처럼 이미 허명도 조금은 생기고 이런 저런 기회가 생긴 사람들의 일은 보상을 충분히 받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처음 판화 작업을 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일품회화처럼 그저 한 두 사람 손으로 넘어가면 끝나는 방식 자체가 도대체 민주적이지도 않고 공공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에는 시대적 상황도 그랬고 무한히 찍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가치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죠. 그래서 밑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조금 더 정교하게 가다듬는 수묵으로도 할 이야기는 대략 전해지는 것일 텐데 그것을 또 새겨서 찍는 번거로운 작업을 하게 되었죠. 지나고 보니 순진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어쨌든 여러 사람의 손에 갈 수 있다는 공유의 가치에 마음이 있었던 것이죠.-지금은 어떻습니까.새기는 작업을 하다보면 붓으로 그린 것과 목판으로 새겨서 찍는 것과는 또 좀 더 다른 결이 있습니다. 판각이 가진 독특한 아름다움, 단순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선전물 같은 매개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고 판화의 미학적인 요소가 있죠. 요즈음은 과거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던 기능을 출판이나 SNS 등 다양하고 기능적으로 변한 전달매체들이 대신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예술이라는 희미한 가치를 통해 판화의 존재의미를 확인하려고 하는 차원에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이번 작업은 그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게 되는 것인가요.책을 만들어 내거나 전시를 하는 것도 좀 더 많은 대중과 만나겠다는 의도가 있는 것이겠죠. 그래서 더욱 중요한 것은 원본이 얼마나 감동 있고 설득력이 있나 하는 것, 혹은 얼마나 아름다움을 담을 수 있는가하는 과제일겁니다. 제가 해야 할 일도 그 일을 잘해내는 것일 텐데 감동도 아름다움도 공감도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판화를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헛발질을 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웃음)-10년 넘게 해 오신 나뭇잎 편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고 정신을 깨우는 통로가 된다고들 합니다. 그런 글쓰기는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가요.여러 통로가 있겠지만 제가 즐기는 중국 선승들의 선문집류 읽기로부터 얻는 깨달음이 큽니다. 그 글은 대개 볼 것도 느낄 것도 가질 것도 많은 세상에서 최소한만을 가지고 겨우 배를 채우고 겨우 몸을 가리고 겨우 누울 다리를 만들어서 때로는 자기 먹을 것을 위해 밭을 일구는 최소한의 일을 하면서 삶을 온통 묵묵히 앉아 있는 일로 보내는 공부하는 사람들, 다른 곳에 한 눈 파는 일을 최소화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길어 올린 이야기거든요.-이야기를 듣다보니 원불교 경전 뿐 아니라 모든 경전이 가진 의미와 가치가 새롭게 느껴집니다.경전은 아주 좋은 인생의 지침서 같아요. 존재에 관한 고민이 있거나 최소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이 이렇게 흘러가도 좋을까하는 의심이 드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존재를 한번 돌아보게 하는 매개로서도 원불교 경전은 참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이자면 모든 경전이 다 그럴 겁니다. 그래서 이런 경전들을 만나볼 것을 권하고 싶어요.마치 정갈한 강의를 듣는 것처럼 인터뷰는 특별했다. 어수선한 시절, 우리 앞에 놓인 길은 그의 표현처럼 오리무중이다. 게다가 삶이 고단해질수록 일상은 부유한다. 자기 성찰과 생명의 본질에 천착한 화가는 답을 얻었을까 궁금했다. 오래전 내놓은 작품 중 개가 짖어도 법문이다는 글귀가 있어요. 그 앞에 원래는 마음을 열고 들으면이 있었죠. 사는 것이 좀 힘들긴 하지만 마음을 열면 긍정적인 힘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마음을 열자고 애쓰는 일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데 다 외면하고 있으니 삶이 고단할 수밖에 없지요.다시 정신을 깨우고 마음을 일으켜 세워줄 그의 목판화가 기다려진다. 예술의 기능이 유난히 새삼스럽다.● 이철수 씨는 시대의 아픔 깎는 판화가80년대 저항의 언어로 소통판화가 이철수 씨는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려서부터 책읽고 글쓰고 그림 그리는 일을 좋아했지만 결국 화가를 택했다. 80년대, 시대는 엄혹했고 암울했다. 시대의 벽을 걷어내고 싶었다. 덕분에 이십대와 삼십대를 광장의 화가로 뜨겁게 살았다. 시위와 집회가 있는 현장에는 어김없이 메시지 강한 그의 판화가 함께 있었다. 폭압적인 사회를 향한 저항과 분노의 언어는 거리로 나선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힘이 됐다.빈민운동을 하던 허병섭 목사의 동월교회에서 아내 이여경씨를 만났다. 서로에게 참 좋은 반려자가 되었다. 20대부터 좋은 스승과 선배들과 교유했다. 그중에서도 70년대 후반에 만난 이현주 목사, 장일순 전우익 권정생 선생은 그의 삶과 예술을 변화시킨 인생의 스승들이다.81년 첫 개인전을 비롯해 몇 차례의 개인전을 가지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판화가로 섰다. 89년에는 독일과 스위스를 순회하며 전시를 했다. 동구권 공산주의가 몰락하던 즈음이었다. 전시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예술의 본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성찰의 시간이 길어졌다. 1년 반 넘도록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그림의 변화가 시작됐다. 자기 성찰과 생명의 본질에 대한 관심이 화폭에 옮겨지기 시작했다. 그림과 글이 잘 조화된 이철수식 판화가 대중들을 만나기 시작했다.종교적인 화두, 자연과 생명의 언어를 담은 그의 그림은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달래는 따뜻한 위로를 건네거나 황폐해진 현대인들의 마음을 새롭게 일깨웠다.간결하면서도 단아한 아름다움의 그림과 선가의 언어 방식을 끌어들인 글쓰기는 깊은 울림으로 독자들을 열광시키고 끌어들였다. 광장의 걸개그림으로 생명을 얻었던 그의 그림은 이철수식 판화로 독창적인 경지를 구축했다. 낮은 목소리로 존재의 경이를 이야기하고 삶의 긍정을 말하는 그의 그림은 그만의 새로운 형식으로 전통적 회화를 현대적 판화로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80년대 후반 충북 제천으로 이사한 그는 아내와 함께 농사를 짓고 살면서도 판화가로서 대중들과의 소통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주위의 도움으로 운영하고 있는 그의 홈페이지에는 8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등록해 날마다 보내오는 그의 그림 엽서 나뭇잎 편지를 받아보는 즐거움을 나눈다.디지털 문화를 멀리하면서도 대중들과의 소통을 위해 기꺼이 인터넷 작업을 받아들인 그는 독자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매일 저녁 그림을 그려 홈페이지에 올려놓는다. 10년 넘게 해오는 작업이다. 최근 3년 동안은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대종사의 언행록인 대종경(大宗經)을 목판화로 새기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다. 2011년 목판화 작업 30년을 맞아 펴낸 나무에 새긴 마음을 비롯, 판화산문집과 판화집, 엽서 산문집 등 20여권의 책을 펴냈다.
도시는 복잡하다. 길과 길이 엮이고 건물과 건물이 엮인 도심은 말할 것도 없고 어쩌다 조금 한적한 골목길도 더 이상 여유롭지 않다. 빠르고 편리함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온 시대적 산물이니 온전히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스스로가 빚어낸 풍경일터다. 왜 우리는 끝없이 높이고 채우고 더하려하는 것일까. 그런 도시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 것일까.건축가 승효상씨(63이로재 대표)를 만났다. 빈자의 미학으로 대중적 관심을 모으고 있는 그는 지난해 9월 서울시 총괄건축가로 임명됐다. 총괄 건축가는 우리에게 낯설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 도시들을 비롯해 건축문화가 앞선 세계의 여러 도시들은 이미 이런 직제를 두고 도시의 건축을 관리해오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시행된 행정기관의 직제다.그럼에도 공공성을 건축의 최고 가치로 내세우고 철저하게 지켜온 궤적으로 보면 총괄 건축가로서 그가 수행해낼 역할은 기대를 갖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도시 서울의 미래를 주목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승효상씨가 대표로 있는 건축사무소 이로재는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 있다. 대학로 한 중간쯤에서 빗겨 들어가 좁디좁은 골목을 따라가다 보면 주택들 사이에 녹슨 강판으로 마감한 건물이 보인다. 단순한 외형에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녹슨 강판의 외벽이 인상적인 이곳이 이로재다.인터뷰는 이 건물 1층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서 있었다. 외부 손님들은 2층에서 안내를 받아 내려가게 되는 모양이었다.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비좁고 경사가 급해 조심스럽고 다소 불편했지만 재미(?)있었다.두 시간 남짓한 인터뷰 말미에 어떤 집이 좋은 집인가 물었다. 조금은 불편하지만 즐거움을 주는 집이 좋은 집입니다. 불편함이 결코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거든요.우리의 일상에서 불편함의 존재는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것인가. 그럼에도 그는 그 불편함을 즐길 수 있어야 좋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단언한다.그가 건축의 지표로 삼아온 빈자의 미학 역시 그 연상에 있다. 궁극적으로 건축은 건축가가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이뤄지는 삶에 의해 완성 된다고 말하는 그는 가난할 줄 아는 사람을 위한 미학을 실현하기 위해 늘 성찰하며 건축의 가치를 찾는다. 그 덕분인가. 우리 일상에 들어오는 그의 건축이 왜 가치 있는 것인지를 알게 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서울시 총괄건축가로 선임되셨더군요. 이런 직능을 만든 것이 처음 아닌가요.우리나라에서는 처음입니다. 유럽 여러 도시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정착되어 있는 제도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시행되지 않았죠.-어떤 역할을 합니까.전반적으로 서울시의 건축에 관한 자문을 하죠. 정책 결정에도 일정한 역할을 하게 되고요.-전반적으로 자문 뿐 아니라 정책 결정과 시행에도 일정한 역할을 한다면 엄청난 권력인데요.(웃음) 권력을 잘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그렇죠. 엄청난 권력이죠. 그래서 스트레스도 엄청납니다.-하시는 일은 어떻습니까.결과적으로는 적을 많이 만들고 있어요. 들어와 보니 도심 재개발 곳곳에 문제가 많아요. 이미 법규로 정해져 있는 내용이지만 도저히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부분들이 있더라고요. 용적률이 쟁점인데 그것 때문에 개발업자들과 많이 부딪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민들과는 부딪치지 않는다는 거예요. 주민들은 만나서 설득하면 금방 이해하거든요. 개발업자들 이익에서 조금만 양보하면 혜택이 시민들에게 돌아갈 수 있으니 제 의견을 굽힐 수 없게 되죠.-도시재생은 이제 유행이 된 듯합니다. 재생은 의미 있는 과정이고 가치도 있지만 무조건 낡은 것을 부수지 않는 것만이 옳은 일인지, 자칫 도시마다 도시재생이란 명분을 내세워 획일적인 재생사업이 성행하지는 않을지 의구심도 듭니다.그런 재생은 옳지 않지요. 재생하려면 중요한 가치를 판단해야 합니다. 그것이 공공성에 부합되는지 안 되는지에 대한 가치를 따져보면 답이 나옵니다.-공공적 가치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이해관계가 다른 주민들의 갈등과 분열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설득해야죠. 서로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합의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그래야 공공적 가치를 확보할 수 있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논쟁이 필요하다면 그 시간이 길어진 다해도 충분한 논쟁을 해야 하고요.-도시가 건강하게 발전하려면 건축이 중요한데요.옛날 로마시대나 이집트 시대에는 독재자들이 건축으로 국민들을 조정했어요. 전쟁에서 이기고 오면 건물을 세워주기도 했죠. 특히 히틀러는 건축물로 민심을 조작했던 대표적인 독재자예요. 행정의 결과도 결국은 건축물로 남게 되는데 그만큼 건축은 중요합니다.-옛날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물론입니다.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이 야합해 만들어놓은 도시 풍경의 후유증이 그 증거예요. 다행스러운 것은 시민의식이 달라져 이런 도시 풍경이 우리를 더 이상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죠.-본질적인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개발의 과정을 통해 너무 많은 기억들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울은 개발이 아니라 재생 쪽으로 도시정책을 많이 전환했어요. 랜드마크보다는 네트워킹하는 것으로 전환했고, 일시적으로 한꺼번에 다하는 것 보다는 순차적으로 조금씩 점진적으로 하는 방식이죠. 이것은 선진도시들이 함께 고민하고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전 시대의 마스터플랜 방법이 아니라 침술적 방법이랄 수 있는데, 국소적인 부분을 잘 치유해 만들어놓으면 그것이 자장역할을 해서 주변에 영향을 주게 되거든요.-전라북도에서도 재생사업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전주는 한옥마을의 변화, 전라감영 복원, 종합경기장 개발 등 도시 풍경의 축이 새로운 경계를 맞고 있는데요.전주는 여러 번 다녀왔습니다. 한옥마을은 이미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죠. 그러니 이제 주변에 고층빌딩 같은 것을 만들어 한옥에 관한 풍경을 흐트러뜨리는 우를 범하면 안 됩니다. 전주야 말로 역사적으로 소중한 흔적들이 있고 전주만의 정서도 잘 지켜왔는데 어느 도시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고층건물 같은 아류로 전주 풍경을 어지럽힐 이유가 없어요. 완전한 도시 전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능성이 많은 도시입니다. 중소도시로서 대표적인 도시로 성장할 수 있어요. 그런 가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옥마을은 지나치게 상업화된 공간으로 바뀌면서 그 변화의 속도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상업화가 많이 진행되었더군요. 사실 저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었어요. 5-6년 전에 한옥마을을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는데 마을 보존하는 일을 주민들이 나서지 않고 관이 하더군요. 그것도 주민들에게 직접 예산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습니다. 개인에게 돈으로 직접 지원하는 것은 좋지 못한 방법이거든요. 한옥마을을 제대로 지속적으로 보존하기 위해서는 공공영역, 이를테면 길이나 마당, 광장 같은 공간들을 아름답게 디자인하는 방식으로 공공재를 투자해야 합니다. 개인에게 지원하게 되면 지원금이 목적이 되는 경우가 많아지거든요. 이런 지원금이 잘못 활용되면 지가를 올리는 수단이 되고 땅값이 오르면 거주 보다는 상업 활동이 많아지게 되니까 자연히 상업공간화 되는 것이죠. 이미 세계의 여러 도시들이 이런 교훈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바로 잡기에는 때늦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지금이라도 땅값을 올리지 않게 하는 정책이 필요한데 그것이 쉽지는 않죠. 궁극적으로는 공공에서 한옥마을 안의 건물을 구입해 위탁이나 임대하는 방식으로 거주할 수 있는 사람들을 지키고 끌어들여야 합니다. 그렇게라도 지금 개입을 해야 한옥마을이 유지될 겁니다.-공공성의 가치와 윤리를 늘 강조하시는데요.건축은 개인이 소유할 수 없습니다. 사용권은 건축주가 갖고 있지만 소유권은 사회와 시민들에게 있습니다. 건축물이나 땅을 갖고 갈 수 있습니까. 후대로부터 잠시 빌려 쓰고 있을 뿐이지요. 그러니 개인의 욕심을 줄이고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윤리의식이 필요합니다.-지금 전주는 종합경기장 개발 방식을 두고 도와 시 행정의 두 축이 갈등하고 있습니다.지혜롭게 해결하는 방식이 있겠지요.언론 보도 등을 통해 내용을 알고 있는데 건축적으로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드러난 것으로만 보자면 종합쇼핑몰이 쟁점이던데 현재의 경기장 여건으로 보면 그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컨벤션센터나 호텔 등 구상중인 시설을 들여놓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땅의 기억을 유지하는 것인데 그것이 기존의 시설물을 유지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최선의 방식입니다. 이미 이런 사례는 세계 다른 도시들에서도 얼마든지 있거든요. 경기장을 완전히 철거하고 고층빌딩을 지어야만 쇼핑몰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고요. 애초 MOU를 체결했다는 롯데도 기존에 갖고 있는 쇼핑몰에 관한 전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좀 더 창의적인 활동을 위한 형식과 콘텐츠를 고민하고 제안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사실 쇼핑몰의 개념이나 성격도 많이 달라지고 있지 않습니까.물론이죠. 원래부터 쇼핑몰의 형태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죠. 얼마든지 형태는 다를 수 있는데, 경기장이 있었다는 기억을 갖고 있는 쇼핑몰이면 더 매력이 있을 수 있다는 거죠. 서울이나 대도시에 있는 쇼핑몰을 그대로 가져다 놓는다면 전주의 풍경도 망치게 되고 그 자체적으로도 사업이 될까하는 의심도 됩니다.-사실 대형쇼핑몰 건립은 전주 같은 중소도시로서는 매우 민감하고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문제의 본질이 바로 거기 있는 것 같아요. 지역 상권에 관한 문제죠. 건축적으로는 기존 시설을 보존하면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지역 상권이 붕괴되는 것을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것이 더 절박한 문제가 아닌가요. 상권 붕괴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고 답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지역사회의 합의를 이끌어낼 때 건축도 공공성의 가치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화제를 조금 돌려보겠습니다. 어떻게 건축을 하게 되었습니까.원래 신학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부모님 반대로 바꾸었어요. 건축은 누나의 권유로 하게 되었는데 공부도 그런대로 잘하고 그림도 곧잘 그리니까 그렇게 권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나중에 제가 알게 된 것은 공부 잘하고 그림 잘 그린다고 좋은 건축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건축하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었어요.-대표작으로 꼭 수졸당을 앞에 내세우시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다른 것은 잊어버리고 싶고 또 잊어야 하는데, 수졸당은 잊으면 안 되는 집이예요. 내가 얼마만큼 와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시작점을 기억하고 있어야하니까요.-그동안 남다른 가치와 철학 때문에 건축주와의 갈등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초기에는 안 맞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럴 때는 설득하고, 설득이 안 되면 작업을 포기했습니다. 건축이 자기 개인의 재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죠. 건축이 공공적 가치라는 것을 인정해야 작업을 할 수 있는데 그런 경우는 그럴 수 없으니 갈라서게 되죠.-주택도 마찬가지인가요.물론이죠. 모든 건축물은 주변에 영향을 줍니다. 모든 건축은 공공적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것이 곧 건축윤리입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해요. 지어지는 모든 것이 다 그렇죠. 그런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한테 이집은 당신 개인 집이 아니라고 하면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웃음) 처음에는 그런 일이 하도 많아 많이 굶었어요. 제가 워낙 많이 굶는 일에 단련이 되어 있어서 잘 견뎠죠. 독립하려는 후배들에게도 10년 정도 먹을 수 있는 돈이 있거나 굶을 수 있는 자신감이 있으면 하라고 합니다. 그래야 건축주의 시녀가 되지 않고 좋은 건축을 할 수 있거든요.-여행을 즐기시는데, 건축과 여행은 어떤 관계인가요.건축은 땅위에 서는 것을 전제로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땅을 가봐야 그 건축의 진실을 알 수 있어요. 땅은 또 그 주변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어서 주변을 파악해야 그 땅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저는 그 진실을 알기 위해서 여행을 합니다.그의 서재는 도서관의 열람실처럼 책장이 들어서있다. 이로재의 모든 직원들에게 오픈되어 있는 공간이다. 소장된 책만도 만권에 이르지만 그는 늘 책을 부지런히 사고 읽는다.그에게 책은 어떤 것일까.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훔쳐보는 일이예요. 책 한권을 읽으면 다른 사람의 역사를 얻게 되죠. 건축이라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의 삶을 설계해주는 것인데 다른 사람의 삶을 알게 된다는 것은 건축을 하는데 제일 좋은 무기예요.두 시간 동안 나눈 이야기는 넘쳤다. 말의 성찬이 아닌 정신을 일깨우는 생명력 있는 담론이었다. 인문학적 관점으로 건축을 사유하고 실현해나가는 건축가의 존재는 우리에게 빛과 같은 것이 아닐까.● 승효상씨는 사유하는 건축가'빈자의 미학' 실천승효상은 195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평안남도 정주 출신인 그의 부모님은 해방이 되자 남으로 피난을 왔다. 덕분에 그는 유년기를 부산 피난민촌에서 보냈다. 집안 형편이 곤궁하진 않았지만 중학교 시절, 가세가 기울어 육성회비를 못 낼 정도로 어려워졌다. 수업도 제대로 받을 수 없던 상처와 갈등을 책읽기로 치유했다. 만화로 시작한 그의 책읽기는 건축가 승효상을 사유하는 건축가로 만든 바탕이 됐다. 경남고를 졸업하고 신학대를 가고 싶었으나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쳤다. 공부 잘하고 그림도 곧잘 그리는 그에게 건축과 진학을 권한 것은 누나였다. 대학시절은 투쟁의 시기였다. 유신시절, 군사독재 정권에 맞선 젊은 세대들은 항거와 투쟁을 위해 거리로 나갔다. 대열에 함께 했던 그를 선배가 불러들였다. 건축공부에만 전념해라. 갈등이 없진 않았지만 거리와 광장을 떠나 오로지 건축 공부에 몰두했다. 세상과 결별했던 시절이었다.졸업 후에는 스승의 추천으로 당대 우리나라를 대표했던 건축가 김수근의 문하(공간연구소)에 들어갔다. 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주어진 길이었지만 열심히 일했다. 80년 광주항쟁 직후, 이 나라에 산다는 일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오스트리아 유학을 선택했다. 스스로의 도피였다. 돌아와서는 다시 공간연구소에서 일했지만 독립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김수근 선생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에게 공간을 맡으라는 유언을 남겨 꼼짝없이 공간 대표로 일해야 했다. 공간연구소와 함께 부채 30억 원이 그에게 안겨졌다. 3년이 지나 승효상 건축사무소를 열어 독립했다. 그의 이름을 걸고 내놓은 첫 작품은 수졸당.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교수의 집이다. 그는 이 집을 설계해주고 유 교수로부터 이로재(履露齋)라 새겨진 귀한 옛 현판을 선물 받았다. 그 뜻이 마음을 움직여 건축사무소의 이름을 이로재로 삼았다. 90년대 초반에는 젊은 건축가들을 규합해 한국건축의 담론을 생산해내는 43그룹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승효상의 건축을 찾고자 했다.건축을 왜 하는가를 일상의 화두로 삼아온 그는 금호동 달동네에서 빈자의 미학을 발견하고 건축의 지표로 세웠다. 절제와 검박함의 아름다움을 담은 건축이 우리 앞에 놓이게 된 바탕이다.서울대 건축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오스트리아 빈 공대에서 공부했다. 파주출판도시 코디네이터로 활동했고 2011년엔 광주디자인비엔날레 공동감독을 맡아 이끌면서 참신한 형식과 주제로 세계적인 이슈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런던대학과 한국예술종합학교 객원교수를 지냈으며 한국건축문화대상과 대한민국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유럽과 미국, 중국과 일본 등의 건축프로젝트와 전시회에 참여하면서 세계적인 건축가로 이름을 알린 그는 지난해 9월 서울시 총괄건축가로 임명돼 서울시에서 이뤄지는 모든 건축물에 대한 정책과 실행을 자문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목숨을 봤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마지막을 준비하는 환자와 가족들의 이야기를 그린 다큐멘터리다.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 환자와 가족들에게 닥친 임종의 순간을 마주하는 일은 편하지 않았다. 영화촬영을 허락한 임종환자들은 남은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며 삶의 마지막 순간을 내어주었단다. 그들이 남겨준 선물로 가슴 먹먹해진 시간은 길게 갔다.생각하는 일조차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것.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왜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외면하고 불편해하는지 궁금했다.호스피스 활동으로 노년을 보내고 있는 내과전문의 안득수 박사(76, 성바오로복지병원 의무원장)를 만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안 원장은 인터뷰를 꺼렸지만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이해하고 배울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 시간을 내주었다.인터뷰가 있던 날은 눈이 내렸다. 며칠 전부터 하루건너 눈이 내린 참이었다. 완주군 소양면 성바오로복지병원으로 가는 길, 눈을 뒤집어 쓴 하얀 산들이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동안 20분 남짓한 거리가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아스팔트길이 얼어붙은 탓이었다.안원장이 일주일에 이틀 나가 근무하는 성바오로복지병원은 요양병원이지만 임종을 앞둔 환자들이 많다. 그는 이곳에서 환자들의 진료와 생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환자들이 편안하게 임종을 맞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한다. 호스피스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지 5년.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임종을 맞았다.인터뷰 역시 시작부터 끝까지 죽음에 관한 이야기였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환자들의 죽음을 지켰던 시간이 쉬웠을 리 없지만 안 원장은 오히려 나 스스로에게 축복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사람들은 죽음을 애써 피하려고 하죠. 입 밖으로 꺼내는 일조차 꺼립니다. 왠지 불운해질 것 같은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을 전혀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데, 삶의 그 끝에 죽음이 있어요. 죽음을 제대로 알게 되면 삶이 더 소중해집니다. 가치 있는 삶에 가까이 갈 수 있어요. 나는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진지하게 이해하고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그래도 죽음을 우리의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여전히 낯설고 불편하다. 이런 마음을 읽었을까. 안원장이 웃으며 말했다. 죽음을 알면 행복해집니다.-이곳은 환자가 몇 명이나 됩니까.많지 않아요. 한 50명 쯤 될 겁니다.-요양병원이지만 아무래도 임종을 앞두고 있는 분들이 많겠군요.치료와 요양을 위해 들어온 분들도 있지만 임종을 맞는 분들이 많습니다.-치료를 받아 완쾌되기를 바라는 환자들과 어쩔 수 없이 임종을 기다리는 환자 사이에서 원장님 역할이 특별할 것 같습니다.환자들의 대부분은 임종을 맞게 된 사람들이어서 역할이 특별히 다를 것은 없습니다. 물리적 고통을 덜어주면서 조금은 편안하게 임종을 맞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죠.-임종을 편안하게 맞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자연스럽게 그 순간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특별한 과정이 필요할 것 같은데 원장님이 생각하시는 죽음은 어떤 것입니까.누구나 피할 수 없는, 누구에게나 오는 것. 그것이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에게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죠.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 때문에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이죠.-환자 대부분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물론이에요. 그래서 호스피스가 필요한 것이죠. 제가 이 병원에 온 것이 2009년인데, 그동안 120명 쯤 임종을 본 것 같아요. 그 분들 중 절반 정도는 제가 손을 잡고 임종의 순간을 함께 했습니다. 대부분이 편안하게 가셨어요.-처음부터 자신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텐데요. 그런 환자들은 어떻게 돌보십니까.이곳에 들어온 분들은 대부분이 더 이상 치료 받는 일이 의미 없게 된 환자들입니다. 처음 환자와 마주할 때는 환자가 느끼는 물리적 고통을 덜어주는 일이 우선이죠. 그런데 이런 환자들은 물리적 고통 못지 않게 불면증이나 괴로움을 안게 됩니다. 물리적 고통도 이런 마음의 고통으로 인해 그 정도가 더 심해지기 마련인데, 이러한 상황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환자가 의사에게 신뢰를 갖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임종을 앞둔 환자는 특히 그렇죠. 환자와 의사 사이에 이루어지는 신뢰를 심리학적 용어로 라포르(Rapport)라고 하는데, 그것이 형성되지 않으면 호스피스도 의미 없게 되어버려요.-단순히 의사로서 치료해주는 것만으로도 라포르가 형성될까요.그렇진 않죠. 환자가 나에게 최선을 다해주는구나라는 마음을 가져야 가능하겠죠.-원장님께서는 어떻게 환자들의 마음을 얻었는지 궁금합니다.환자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인데, 우선은 내 마음을 온전히 환자에게 가게 해야 해요. 이를테면 노인 환자들은 대변을 못 보는 경우가 많은데 다른 방법이 없을 때는 내 손가락으로 파내기도 합니다. 환자들이 그런 과정을 갖고 나면 자연스럽게 라포르가 형성되더라고요.-의사로서의 치료 뿐 아니라 간병일 까지 나누시는군요.간호사들이나 간병인들이 하는 일이지만 필요하면 해야죠.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두니 별 거부감 없이 하게 되더라고요.-의료기술로 해결 되지 않는 고통을 계속 호소할 때는 어떻게 하십니까. 자신의 고통이 덜어지지 않으면 라포르가 형성되기 어렵지 않을까요.아무래도 고통을 제대로 덜어주지 못하면 어렵겠죠. 치료를 하는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몸에 생기는 물리적 고통을 해결해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정신적 고통을 치유해주는 것이예요. 이 두 가지가 잘 해결되어야 진정한 라포르가 형성되죠.-정신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관계가 중요하겠군요.라포르가 이루어지면 환자는 자신의 고민을 다 털어놓게 됩니다. 고백하는 것이죠. 생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고백을 듣기도 합니다. 가족 사이의 미움과 갈등은 물론이고, 살아오면서 마음속에 감춰놓았던 1급 비밀까지 듣게 되요.(웃음) 환자들이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것인데, 저는 제 신앙으로 얻은 답을 전해줍니다. 내 의견이지만, 환자 대부분이 그 답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주죠. 그런 후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준비를 하게 되더군요.-끝까지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물론이죠. 끝까지 간직하고 가려는 사람도 있어요. 이생에 대한 집착을 끝내 털어내지 못하고 죽음 이후에 대한 생각은 아예 안하려는 분들이죠.-임종 순간을 지킨 환자들이 많은데 어떻게 그 많은 환자들의 순간을 지킬 수 있었습니까.가능하면 제가 치료한 환자들의 임종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환자의 최후 숨(last breath)을 내가 지킬 수 있기를 늘 기도하지요. 인간의 삶을 마무리 하는 그 순간에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임종의 순간에 제가 병원에 없으면 연락이 오는데, 그럴때는 어느 시간이든 달려옵니다. 그래서 제 운전 실력이 좋아졌습니다.-원장님은 천주교 신자지만 임종 환자들이 모두 신앙을 갖고 있진 않죠.이곳에 오시는 분들 중 60%정도는 천주교 신자인데,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분들이라도 저는 그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세상과 화해하고 편안하게 임종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진심을 담는 기도에 많은 분들이 감응해주십니다.-편안하게 임종을 맞지 못한 분들을 보낼 때는 안타깝겠습니다.그런 분들은 대개 일찌감치 부터 희망을 포기하고 불안해하다 임종을 맞습니다. 죽으면 내가 어떻게 될까하는 두려움으로 불가항력적인 삶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하거든요. 그럴 때는 마음이 아프죠.-결국 편안한 죽음이란 세상과의 화해라고 할 수 있겠군요.그렇습니다. 세상과 화해하면 모든 것이 풀어지죠. 결국 사랑의 문제인데 살아오면서 쌓았던 갈등 미움, 욕심을 털고 나면 기쁨과 사랑으로 임종을 맞을 수 있게 됩니다.-특별히 마음에 남아 있는 임종 환자들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모든 분들이 마음에 남아있지만 몇몇 분은 특별한 기억이 있습니다. 폐암으로 임종을 맞는 분이 있었는데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혼자 지내다가 병을 얻었는데, 늘 지갑에 20만 원 정도의 현금을 갖고 있었어요. 함께 식사도 하는 친한 사이였는데, 하루는 자기가 호주머니에 항상 칼을 넣고 다닌다고 털어놓는거예요. 통증이 오면 내가 이러다가 비참하게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 언제라도 그런 때가 오면 조용하게 산으로 가서 마감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오랜 시간 대화하면서 편하게 임종을 맞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죠. 결국 칼을 돌려 받았죠. 6개월 정도 투병하다 돌아가셨는데, 제가 임종을 지켰습니다. 가족들과 화해하고 편하게 가셨는데, 그 후에 가족들이 제게 적지 않은 돈을 가져왔어요. 그 분 유언이었답니다. 병원 후원금으로 쓰였죠.-어린 환자들의 임종은 더 가슴 아프시겠어요.열여덟 살 소녀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습니다. 한번은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원장님께 식사 대접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결국 약속을 못 지켰는데 그나마 임종은 편안하게 맞아 외로가 되었습니다.-아무리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다해도 수많은 죽음을 지켜보다보면 심적 고통이 클 것 같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죽음은 어떤 것인가요.드문 경우이긴한데 끝까지 죽는 것을 대비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내가 기적적으로 살아날 수 있을까 치유를 계속 희망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는 다는 것을 인정 하지 않고 살고 싶다는 바람이 워낙 크다보니 임종의 순간까지 편안함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경우죠.- 죽음의 질에 대한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죽음 알림 주간이 있고, 데쓰 카페(Death Cafe)가 운영된다고 하던데요.죽음의 질(생애 말기 치료) 1위 국가가 영국입니다. 어느 자료를 보니 한국은 32위더군요. 영국에서는 죽음이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이 활발합니다. 죽음에 대한 사회적 준비를 정책적으로 실행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원장님께서는 어떤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까.의사에는 네 가지 종류의 의사가 있습니다. 종기 고치는 의사, 병 고치는 의사, 의료기술이 좋은 의사 그리고 마음을 고치는 의사예요. 의료기술이 빼어난 의사를 우리는 명의(名醫)라고 하죠. 마음까지 고치는 의사는 심의(心醫)인데, 내가 생각하기에 심의는 명의보다 더 위대한 의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는 않죠. 누구나 명의와 심의가 되기를 원할 겁니다. 저 또한 바람은 컸지만 돌아보면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어요.-지금 하시는 일에 만족하십니까.스스로 선택한 일이니까요. 통념으로 보자면 나는 이제 인생의 절정에서 내려오고 있는 중이지요. 의료인으로서도 그렇고. 의사의 길에 들어서면서 인턴으로 출발했다가 지금 다시 인턴의사가 된 것 같아요. 육체적 고통이 가장 절정에 이르는 임종 시간이 대략 3시간인데, 그 시간을 함께 하고 나면 눈에 핏줄이 터지기도 하고, 탈진해서 걸을 기력도 없는 때가 많아요. 그래도 되돌아보면 그 순간이 참으로 축복받은 시간이었다는 알게 되는데 그렇게 임종을 잘하고 나면 보람과 기쁨이 또 새로운 힘이 됩니다.죽음을 주제로 한 인터뷰는 조심스러웠다. 무겁고 진지한 시간을 예상했던 것도 주제의 버거움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가볍진 않았으나 그다지 무겁지도 않았다. 안원장의 편안하고 따뜻한 웃음과 친밀한 화법 덕분이었다.죽음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준비하며 살아가면 삶이 훨씬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느껴집니다. 죽음을 애써 외면하지 않고 생각하며 살다보면 성찰의 시간이 많아지거든요.어수선한 연말, 한해를 보내며 죽음의 한편을 알게 됐다. 귀한 선물이다.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안득수 원장은 임종 맞은 환자들과 마음 교류하는 '호스피스 의사'안득수 원장은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농촌 살림으로는 어려움 없이 보냈지만 아버지가 수리조합장에 출마하면서 가산이 줄어 금세 집안 형편이 어렵게 됐다. 부모님은 장남인 그가 중학생이 되었을 즈음 의사가 될 것을 권유했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특별한(?) 고민 없이 전남대 의과대학에 들어가 내과전문의가 됐다. 고학으로 학비를 벌어야했던 대학시절, 고단한 생활과 마음의 고통을 의지할 곳 없을 때 천주교를 만나 신자가 되었다. 부모님 뜻에 따라 의사가 되었지만 평생 안고 살았던 위장병을 치료하고 아들 덕분에 병이 나았다며 기뻐하는 어머니를 보며 의사가 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본격적인 의사 생활을 전주에서 시작하면서 전주사람이 됐다. 성모병원과 전북도립병원에서 근무했던 그는 전북대 의과대학 교수와 전북대 병원장을 지내고 2004년 은퇴했다. 2007년부터 2년 남짓 개인병원 원장으로 일하면서 처음으로 경제적인 자유로움을 가족들에게 안길 수 있었지만 어느 날 마음속에 갖고 있던 일을 늦기 전에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젊은 시절, 후배의 갑작스런 죽음을 마주하며 죽기 전에 의사로서 할 수 있는 보람 있는 일을 찾아서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아내와 상의도 하지 않고 사표를 내고 성바오로복지병원으로 왔다. 2009년이었다. 처음에는 그의 선택을 반대했던 아내도 뜻을 함께 해주었다. 학위를 끝내고 개업할 기회가 왔을 때도 학교에 남기를 권했던 아내 덕분에 지금껏 경제적인 여건에 마음 쓰지 않고 의사로서 행복한 삶을 걸어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본격적인 호스피스 활동이 시작됐다. 임종환자를 만났던 초기, 마음을 열지 않는 환자들을 보며 죽어가는 사람에게 의사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답을 찾았다. 성바오로복지병원에서 일한지 5년, 100명이 넘는 임종환자들이 그를 찾아 보살핌을 받았다.죽음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말하는 그는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알게 되면 삶을 더 가치 있게 살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잘사는 것(well-being) 못지 않게 잘 죽는 것(well-dying)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길 기대한다.1986년 천주교 전주교구 성령쇄신봉사회 회장으로 본격적인 봉사활동을 시작한 이후 평신도 협의회 총회장전동성당 사목회장을 역임했으며 지금도 새벽 다섯 시 반, 전동성당 첫 번째 미사로 하루를 시작한다. 1990년대 초, 고즈넉해서 좋았던 전주 한옥마을에 집을 지어 살고 있는 그는 여전히 한옥마을을 지키고 있는 오래된 주민이다.
20년도 더 지난 일이다. 전주의 조소녀 명창 연습실에서 소리 잘하는 남자아이를 보았다. 제 또래의 여자 아이들 틈에서 유독 자신감 있게 소리하는 그 아이가 눈길을 끌었다. ‘타고난 국악 재목’이라고 했다. 그 뒤로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스스럼없이 당당하게 소리하는 것을 가끔씩 보았다. 고등학생 시절 지역방송사의 국악프로그램에 얼굴을 내밀더니 대학을 졸업하고 국립창극단 단원이 되어서는 작품마다 주인공을 도맡아 무대를 석권(?)했다. 국악계 안팎에서 일찌감치 부터 알려졌던 그의 이름이 대중들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8년 TV의 시사뉴스 프로그램 뒤에 이어지는 ‘시사난타’란 코너에서다. 판소리로 담아내는 그의 시사풍자는 시청자들을 들썩이게 했다. 판소리 실력에 입담, 거기에 연기까지 겸비한 재능의 힘이었다. 소리꾼 남상일씨(36). 국악인으로서는 드물게 팬 카페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로 인기를 모았던 그는 지난해 초 10년 동안 몸담았던 국립창극단을 나왔다. 국악대중화를 실천하기 위해 선택한 길이라고 했다. 프리랜서(?)가 된 후 그의 활동은 더 활발해져 종횡무진, 무대의 경계는 이미 의미가 없어졌다. 수많은 무대가 그를 찾고, 방송사의 예능 프로그램이 그를 앞세웠다. 그의 이름에 ‘만능’ ‘재주꾼’ ‘국악계의 싸이’ 등의 별칭이 붙었다. 대중들은 환호했으나 명창으로 성장을 기대했던 국악계에서는 우려의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도제식 교육의 질서가 여전히 확고한 판소리 판에서 보자면 그는 여지없이 이단아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경계와 우려에 마음 쓰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다양한 무대에 화답하고, 다양한 장르와 결탁(?) 했으며 대중들을 만나는 일이라면 기꺼이 몸을 낮추어 다가갔다. 소리꾼 남상일의 길은 달라졌을까. 궁금했다. 인터뷰 시간을 맞추기 어려울 정도로 일상은 분주했다. 11월에는 하루도 쉴 날이 없었다는 그를 12월 첫날 서울 예술의전당 커피숍에서 만났다. 서른 중반을 넘겼는데도 얼굴에 장난기 가득했던 어린 시절이 남아 있다. “이제 명창이 되려는 꿈은 접었느냐”고 물었더니 크게 웃었다. 그러더니 금세 진지한 답이 돌아왔다. “오늘의 기준으로 보자면 저는 명창이 될 수 없겠지요. 그런데 제가 50대 60대가 되어서도 ‘명창’의 기준이 오늘과 같을까 생각해보면 그것은 잘 모르겠어요. 저는 제가 소리를 하고 있는 한 시대와 소통하는 소리꾼이 되고 싶거든요. 그런 활동을 할 수 없는 명창이라면 제 자리는 아닌 것 같아요.”그는 국악, 그중에서도 판소리의 대중화를 꿈꾼다. 그는 갈 길이 멀지만 자신의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30대를 이 길 위에 온전히 놓은 이유다. -하루도 쉴 날 없이 공연과 강연이 이어지면 소리공부할 시간이 없겠군요. 소리꾼으로서는 조바심이 생길 법 하겠는데요. “공연도 그렇지만 요즈음엔 행사나 특강에 초대되는 일이 많아요. 지칠 정도로 일상이 바쁘긴 한데 그렇다고 소리공부를 등한시 하는 것은 아니에요. 공연이나 특강 준비과정이 소리 공부거든요.”-특강이 부쩍 많아졌다고 하시는데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하나요. “판소리 이야기죠. 우리 소리에 관심이 많아진 것은 분명한데 여전히 판소리는 어렵다는 생각을 갖고 있잖아요. 그런 인식을 깨고 싶어서 우리 소리를 재미있게 흥겹게 들려주고 이야기 하는 거죠.“-관객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제가 어쨌든 방송에 자주 나오니까 일단은 친근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저보다 소리도 잘하고 멋진 분들이 적지 않지만 제가 하는 이야기나 소리는 그 친근감 덕분에 훨씬 더 흡인력이 큰 것 같더라고요. 그럴 때는 방송 출연이 국악대중화를 위해서 의미가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죠.”-작년 초에 국립창극단을 그만두었는데, 활동은 기대했던 만큼 이루어지고 있나요.“넘치고 있죠.(웃음) ‘물들어올 때 배 띄우라’는 말이 있잖아요. 지금이 제게는 그 때인 것 같아요. 30대 소리꾼으로서 할 수 있는 일,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여유로워질 겨를이 없어져요.”-국립창극단에서는 작품마다 주인공을 도맡을 정도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었지 않습니까. 그만큼 그만두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돌아보니 단원 생활이 어느새 10년이 되었더라고요. 창극단 활동도 좋지만 제가 추구하는 길을 함께 병행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어요. 외부 일이 많아지면서 제 활동을 좋게 봐주시는 분들도 있지만 개인활동에 대한 비판도 있어서 더 이상 직장에 누가 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죠. 또 한쪽을 놓아야 그 한편을 제대로 해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컸고요.” -남 대표의 활동을 둘러보니 대중들에게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시사난타라는 방송프로그램이었던 것 같더군요. 방송과는 어떻게 인연이 되었습니까. “고등학교 때 방송 고정으로 처음 출연했는데 대학 시절 국악프로그램 진행과 공연 등으로 출연이 잦아졌어요. 그렇다보니 시사뉴스 프로그램과 인연이 닿았는데 개인적으로도 재미있고 보람이 있었습니다. 판소리로 세태를 풍자하는 코너였는데, 시대 상황이 판소리 사설이 만들어진 세태와 어쩌면 그렇게 닮아있는지 저도 놀랐다니까요.”-대본도 직접 썼나요. “주제를 작가가 알려주면 판소리에서 맞는 대목을 제가 골라서 전해주는 방식으로 했어요.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딱딱 들어맞는 대목들이 있는지…. 치열하게 시대를 통찰해낸 판소리의 힘을 확인하는 계기였어요. 공부가 많이 됐죠.”-예능프로그램에도 출연하면서 국악인 남상일에 대한 인지도가 더 높아졌는데 그럴수록 국악계의 우려는 더 높아지는 것 아닌가요. 좋은 재목 잃은 것은 아닌가하는 걱정도 있던데요. “애정 있는 분들의 조언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에 잘 새기고 있습니다. 더러는 좀 억울한 비난도 있지만 제가 소리꾼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좋은 소리꾼이 되기 위한 길이라고 믿고 선택한 것이니 우려나 비난까지도 감수해야겠다는 마음이에요.”-애니메이션 더빙 작업에도 참여했던데요. “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이라는 작품인데 판소리는 이 작품에서 소설이 가진 해학을 재현해내죠. 도창과 주인공 역을 맡았는데,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었어요. 다른 장르를 통해 판소리를 알릴 수 있으니 그 역시 좋은 기회죠.”-이야기를 듣다보니 지금 실천하는 작업의 중심이 온전히 판소리에 있는 것 같군요. 그런데 궁금한 것이 지금까지 완창회를 한 번도 안하셨다면서요. “완창을 못해서는 아니고요. 반창은 여러 번 했는데….(웃음) 작년 제야에도 안숙선 선생님과 중앙대 한승석 선생님과 수궁가 완창을 나누어서 했어요. 이번 주말에도 내년에 프랑스 공연을 앞두고 안숙선 선생님 모시고 수궁가를 공연합니다.”-판소리판의 질서로 보아서는 완창회의 비중이 크지 않습니까. “물론이죠. 그런데 저는 완창무대가 갖는 의미를 크게 두고 있지 않아요. 많은 선생님들이 완창이야말로 자신과의 싸움이고 이 과정을 통해서 한 단계 성숙해진다고 말씀하시죠. 맞는 말씀인데 제가 생각할 때는 완창이 의미는 있지만 짧은 소리라도 대중들을 감동시키고 소통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예전에 조상현 선생님도 5분짜리 10분짜리 소리를 제대로 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하셨어요.”-그렇다면 문화재 이수나 전수에도 관심이 없었겠군요. “오래전부터 그런 부분에는 관심도 없고 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능력도 그렇고요. 또 소리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제 나름의 상처도 안았고. 그래서 독립군처럼 소리 공부하는 방식을 혼자서 터득했는데 그때의 경험이 제가 소리꾼으로서 다양한 형식을 실험하고 도전하는 바탕이 되었던 것 같아요.”-안숙선 명창과는 특별한 사제지간으로 알고 있는데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가면서 선생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입시때 선생님이 면접을 보셨는데 제게 소리 말고 다른 것 뭘 할 줄 아느냐고 물으셨어요. 가야금도 하고 춤도 춘다고 말씀 드렸더니 그 자리에서 춤을 추어보라고 하시는 거예요. ‘음악도 없는데 어떻게 춥니까’했더니 ‘내가 장단 쳐주마’하셔서 춤을 췄죠. 입시인데도 정말 즐거웠어요. 운 좋게 선생님 제자가 되었죠. 적벽가와 수궁가를 선생님으로부터 2년씩에 걸쳐 받았습니다.”-선생님을 각별히 존경하는 특별한 배경이 있습니까.“선생님은 다른 분들과 많이 다르시더라고요. 늘 창극에 대해 판소리에 대해 고민하시거든요. 당장 개인적인 사사로운 고민이 아니라 우리 음악의 큰길을 고민하시는 것이잖아요. 그런 부분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아요.”-남대표의 활동에 대해서는 어떤 조언을 해주십니까.“걱정이 많으실겁니다. 주위에서 많은 소리를 들으실테니까요. 그래도 정작 제게는 말씀을 아끼시지요. 그래서 저는 제자를 믿고 ‘너 하는데 까지 해보라’는 가르침을 주시는구나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용기를 낼 수 있고요. 한 가지 약속드릴 수 있는 것은 제가 이어가는 이 작업이 판소리를 위한 일이라는 것이고, 이 길을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겁니다.”-요즈음 이루어지는 창작판소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는 딱히 창작 판소리를 즐겨하는 것도 외면하는 것도 아닌데, 분명한 것은 창작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겁니다. 판소리 창작도 결국 정통판소리에 기반을 두어야 하는데 아예 음악적 고유한 틀까지 무시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저도 가끔 작창을 의뢰를 받는데, 작업을 하다보면 정통판소리의 선율을 그대로 따서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저는 창작판소리도 정통판소리의 선율을 잘 지키면서 시대적 의미를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통판소리가 가진 요소를 그 안에 다 녹여서 제대로 살려낼 수 있어야 좋은 창작판소리라고 할 수 있겠죠.”-남대표가 만든 창작판소리 ‘노총각 거시기가’는 많이 알려져 있던데요. “무대에서는 정통판소리를 주로 많이 하는데 제가 드물게 작업 한 것 중 하나가 그것입니다. 창작판소리로는 유일하게 국악관현악곡으로 편곡 됐어요. 그 덕분에 전국의 많은 관현악단과 협연을 해봤습니다. 호응도 높고 저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중심에 두는 것은 역시 정통판소리예요.”-즐겨 부르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적벽가를 제일 좋아하고 즐깁니다. 박봉술 바디를 안숙선 선생님으로부터 받았는데 제 소리와 잘 맞는 것 같아요.”-남대표의 소리 특징이 있던데요. 다른 소리꾼에 비해 소리가 맑고 깨끗한데다 상청이 강하고…. 근데 소리꾼으로서는 거친 목이 더 환영받지 않나요. “제 소리의 단점이자 장점이기도 합니다. 웅장함과 힘이 부족하죠. 소리꾼에게는 몸이 악기인데 몸집이 작으니 그런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다행히 요즈음은 음향이 좋아서 제 소리도 살 수 있게 됐죠.(웃음)”-소리를 해오면서 위기는 없었나요. “이상하게 변성기도 겪지 않았어요. 저는 소리할 때가 제일 편하고, 딱맞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거든요. 부모님이 주신 복이라고 생각하죠.”-이야기를 듣다보니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시련도 없었습니까. “있었겠지만 지나고 나면 다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던 것 같아요. 제게 가장 큰 시련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충격이에요. 아버님은 양복점을 운영하시면서 제가 소리를 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죠. 2006년에 갑자기 암이 발명했는데, 이미 늦었더라고요. 1년 투병하시다 돌아가셨는데, 1주일 전까지 제가 하는 공연에 늘 동행하셨어요. 아버님 항암제는 저였거든요.”-앞으로의 계획은 어떻습니까. “그런 질문이 제일 난감한데, 언제부터인가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이 순간에 충실하자는 것이 철학이 되었어요. 아마도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내가 원하는 대로만 세상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 얻은 생각일겁니다. 그래도 굳이 갖고 있는 뜻이 있다면 나이가 들면 좋은 창극을 만들 수 있는 일을 하고 싶고, 국악스타를 만들어내는 일에도 앞장서고 싶어요. 지금 제가 하는 이 다양한 일이 바로 그런 일을 하기 위한 바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남상일씨는 전주 출생, 국악 신동서 '국악계 싸이'로남상일씨는 올해 서른여섯 살, 젊은 국악인이다.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예고를 졸업한 그는 서울로 대학을 가면서 고향을 떠났다. 본격적인 소리 공부는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시작했지만 말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장난감보다 TV에서 나오는 우리소리 우리가락을 더 좋아해 ‘열광(?)하는 특별한 아이였다. 까닭 없이 울다가도 우리 소리가 나오면 울음을 그치고 따라하는 아들을 눈여겨 본 아버지는 아이의 소리를 녹음한 테이프와 편지를 방송에 나오는 조상현 명창에게 보냈다. 뜻밖에도 명창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무릎장단에 맞춘 ‘사랑가’와 ‘이별가’를 녹음한 테이프와 ‘이대로 부르게 하라’는 편지가 들어있었다.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그 테이프로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소리를 익혔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전주의 조소녀 명창의 문하에 들어가 소리를 배웠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함께 하는 소리 공부가 재미있었다. 타고난 소리에 기질이 다분한 남상일은 어느 사이에 국악계가 주목하는 국악신동이 되어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그에게 첫 시련이 닥쳤다. 국악경연대회 참여를 둘러싸고 뜻밖의 오해와 소문에 휩싸이면서 혼자 소리 공부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맞았다. 어린 마음에 상처가 컸지만 꿋꿋이 버텨냈다. 그때부터 독립군처럼 소리 공부를 했다. 전주예고에 들어가서는 학교의 자랑이 됐다. 동아콩쿨 1등 입상을 비롯해 각 대회를 휩쓸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가 ‘존경하는 스승’ 안숙선 명창을 만났다. 국악 대중화를 위한 활동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의 재능을 주목한 국악 방송 프로듀서들이 그를 불렀다. ‘시사난타’를 비롯해 시대의 언어를 판소리로 담아내는 시사방송 프로그램까지 가세해 그를 끌어들였다. 빼어난 판소리 실력에 입담 좋고 청중을 끌어들이는 흡인력과 특유의 친화력으로 그는 길지 않은 동안에 국악스타로 섰다. 2003년 국립창극단에 들어가 10년 동안 단원으로 지내면서도 작품마다 주인공으로 발탁되는 기쁨을 안았다. 그러나 국악 대중화를 위한 활동에 마음을 두고 있던 그는 창극단원으로서의 활동과 외부 활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10년 만에 사표를 냈다. 다양한 형식의 공연과 강연, 축제와 행사의 초청 등이 이어지면서 그의 실험은 날개를 달았다. 가는 곳마다 환호를 받았으며 ‘국악계의 싸이’라는 별칭이 주어질 정도로 많은 대중들을 얻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명창 재목’의 외도(?)에 염려와 비판이 쏟아졌다. 그래도 꿋꿋이 버티며 ‘남상일 100분쇼’로 최고가 국악콘서트를 열어 화제를 모으고 다양한 장르의 무대와의 협업으로 국악 대중화의 길을 열어가고 있다. 판소리 마니아를 위한 완창회보다 다양한 계층의 관객들을 만날 수 있는 재밌는 국악콘서트를 많이 열고 싶다는 그는 30대에 즐길 수 있는 이 작업을 할 수 있는 만큼 해볼 생각이다. 민속악연주단체인 ‘수리’대표와 젊은 소리꾼들이 주축이 된 ‘우리창극연구회’ 대표를 맡고 있다. 전국에서 그를 찾는 무대가 많아 휴일 없는 강행군을 하고 있지만 내년 2월에는 ‘남상일 100분쇼’를 다시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KBS국악대상(2012)과 한국방송대상 문화예술인상(2012) 등을 수상했으며 지난해에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로 선정됐다.
곽영길 회장 "전북과 동반자적 협력 관계...실질적 협력 모델 만들어 나갈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