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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서 농사 짓는 김광화·장영란 부부 "우리 삶 바탕은 생산이 먼저…욕심 내지 않으면 자급자족 가능"

이 가족의 일상을 누군가는 귀농의 삶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참살이라고 한다. 도시를 떠나 시골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으니 귀농이고, 육체와 정신의 건강한 조화로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이어가고 있으니 그야말로 온전한 참살이다.책과 매체에 기고한 글을 통해 김광화 장영란씨 부부 가족의 이야기를 알게 된 것은 여러해 전이다. 부부가 따로, 혹은 같이 써낸 여러 권 책들은 대부분 딸과 아들까지 네 식구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며 기록한 소소한 일상의 풍경들이다.도시를 떠나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지만, 이 가족의 삶은 특별했다. 자급자족의 삶을 추구하는 가치와 자연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순응의 태도가 놀라웠고, 부부의 사랑과 아이들의 교육 방식이 감동적이었다.무주에 들어온 지 16년. 함께 농사일을 하며 자연의 흐름을 온몸으로 체득하고 깨우치는 삶을 실천하는 이 가족의 일상을 만나보고 싶었다.메일로 인터뷰를 요청했더니 휴대전화 문자로 답이 왔다. 무슨 도움이 될는지요. 거절의 의미가 강했다. 우여곡절(?) 끝에 인터뷰는 이뤄졌다. 조심스러웠지만 그만큼 즐거웠고, 특별한 경험이었다.김광화(57) 장영란(55)씨 부부를 만났다. 스물 네 시간 대부분의 일상을 공유하는 부부의 삶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신뢰와 사랑이 깊고, 그만큼 풍요로웠다. 서로 다른 삶의 가치를 추구했으나 굴곡진 노정을 거쳐 이제는 자연이 주는 가치에 함께 눈뜨게 된 덕분일 것이다.부부의 자급자족 이야기 역시 흥미로웠다. 우리도 자급자족의 삶을 공유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욕심내지 않으면 누구나 실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쉽진 않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하는 삶에 너무 익숙해져 있으니까요. 직장생활 하다가 은퇴하는 사람들만 해도 60평생 돈을 벌어서 소비하는 삶을 살아오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좋은 방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삶의 바탕은 생산이 먼저여야해요. 그 바탕에 삶을 내려놓으면 자급자족은 어렵지 않습니다.사실 우리에게는 선망하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자급자족할 수 있는 삶 역시 그렇다. 이 부부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운 일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더욱 마음 따뜻하게 해주는 풍경이다.-앞 산 풍경이 아름답습니다. 겨울 준비는 다하셨나요.어제까지 좀 바빴어요. 이제 콩타작이 남았고, 소소하게 손질하지 못한 것들이 있죠. 농촌일이라는 것이 언제 끝나는 것이 아니거든요. 곧 김장하고 메주도 끓이고 땔감도 하고 일이 많습니다.-달력이 특별한데 직접 만드십니까.말일이 가까워지면 다음 달 달력을 만들어요. 저것은 생강꽃을 그린 것인데, 그림을 따로 배운 적이 없으니 원근감도 없고. 그래도 즐거워요. 달력이 안 붙어 있으면 생활이 답답해지거든요.-지난해 개정판으로 낸 자연달력 제철밥상도 이 달력 만들기로 시작되었겠군요.자연에서 배운 것을 나누고 싶었거든요.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꿈꾸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펴낸 책이죠.-무주 오시기 전에 산청에서 교육공동체 생활을 하며 간디학교를 함께 만들었는데 왜 떠나셨습니까.지금 생각해보면 공동체에 대해 깊이 있는 공부나 이해 없이 시작했었던 것 같아요. 삶의 가치나 추구하는 지점이 같지만 함께 생활하는데는 불편함이 많았었거든요. 2년 정도 공동체 생활을 했는데 그동안 우리가 향유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은 다 나누었어요. 공동체 안에서는 많은 가치들이 충돌하게 됩니다. 가치의 빅뱅이랄까. 폭발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들이 팽창하는데, 그런 가치들을 인위적으로 하나로 묶으려하면 부담이 따르죠. 그 과정에서 자칫 너는 공동체성이 부족해라거나 소양이 부족하다며 개인을 공격하게 되고 상처를 주게 되거든요. 그런 과정을 경험하면서 우리의 접근방식이 잘못되었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삶의 바람직한 목표를 위해 좀 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선택하는 일이 필요했습니다.-가장 중요한 것을 부부공동체라고 하셨는데 부부공동체는 성공하셨습니까.아직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죠. 농사를 지어보면 다 된 것 같아도 마지막 거두기를 잘못하면 망하잖아요. 완성이란 것은 없는 것 같아요.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한데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죠.-어느 글에선가 보니 김 선생님은 부부연애 전도사를 자처하셨던데요.아직 전도를 적게 해서인지 그렇게 불러주는 사람은 많지 않더라고요.(웃음) 저는 진정한 연애는 부부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서로의 단점은 숨기고 장점은 과장하기 마련인데, 부부로 살아가면서는 단점은 받아들이고 장점은 서로 북돋아주고 그런 형태로 나가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아내에 대해 그런 마음이 커지고 그렇다보니 다시 연애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어요. 부부공동체만 잘되면 우리 일상은 훨씬 행복해질 겁니다.-서울을 떠나 내려오셨을 때는 어땠습니까.막막했죠. 제가 시골 간다고 하니 주위에서는 남편이 큰 병에 걸렸거나 큰일이 있는 것이라고들 했어요. 귀농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을 때니까요. 도시를 떠날 때는 새로운 탈출구가 절실해서 선택한 것인데, 너무 막막하니까 아무 생각도 안들더군요. 지금 돌아보면 애들이 있으니 씩씩한 것처럼 행동했지 않았나 싶어요.-무주로 오실 때는 더 그러셨을 것 같습니다.농사일을 본격적으로 해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막막함이란 것이 우리가 알게 모르게 학습한 두려움이란 생각을 하게 됐어요. 사실 사회가 가르치는 것이 대부분 두려움이잖아요. 모든 것들이 두려움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시골에 와서 살면서 알게 되었죠. 그 전에는 몰랐는데 이곳에 살면서 내 자신을 돌아보니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고 아이들에게 그 두려움을 대물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그래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으셨나요.꼭 그런 것은 아니고 아이들의 선택이었어요. 이곳에 왔을 때 작은 아이는 어려서 학교 갈 나이가 아니었고 큰 아이는 초등학교에 다녔었는데 중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하더군요.-모든 일상을 가족들이 함께 하는데 문제는 없었나요.많았죠. 스물 네 시간 똑같은 사람과 똑같은 일정을 공유하는데 갈등이 없을 수 없죠. 부부싸움도 여기 들어온 후로 훨씬 많이 했고요. 아이들도 엄마 아빠의 갈등을 직접적으로 영향 받았죠. 도망갈 때가 없잖아요. 학교에 다닌다면 그 시간만큼은 떨어져 있게 되지만 부부싸움 한 엄마 아빠와 같이 지내야 하니까요.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소통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환경이 된 것이죠. 그래서 소통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운영하는 블로그가 많이 알려졌더군요. 자연이 주는 행복과 즐거움을 도시 사람들에게도 나누는 행복이 클 것 같습니다. 근래에는 곡식꽃 이야기가 많던데요.여러해 전부터 우리를 먹여 살리는 곡식꽃을 주목하게 되었어요. 단순한 흥미나 관심이 아니라 우리가 알게 된 곡식꽃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습니다.-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벼가 꽃이 피는지 콩이 꽃을 피우는지 모르는 분들이 많잖아요. 언제부터인가 곡식꽃에 눈을 뜨게 되었는데,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다 보니 많은 세계가 거기 있더군요. 곡식꽃만해도 종류가 많아 추위를 타는 꽃도 있고, 웬만한 추위에도 끄떡없는 꽃이 있죠. 그 다양한 세상에 감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먹는 곡식은 이런 작물들이 연애하고 사랑한 결실이에요. 농작물들이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결실을 맺는지를 들여다보면서 배우고 깨우친 것들을 나누고 싶었습니다.-작물들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그 과정들이 인생과도 같다는 말씀이군요.옥수수 한 알 쌀 한 톨이지만 그 생물학적인 세계를 들여다보면 서로 사랑해서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는 그 과정이 놀라울 정도로 숭고하고 뜨겁습니다. 우리 삶도 그런 식물의 세계를 배우고 닮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 관점으로 그들을 바라보게 되거든요.-듣기만 해도 흥미롭습니다. 곡식마다 또 특성이 다르겠지요.그런 관점으로 보면 더 그렇지요. 옥수수는 옥수수대로, 당근은 당근대로 밤나무는 밤나무대로 독특한 특성이 있어요. 옥수수만 해도 한 알을 만드는 과정이 참으로 치열하거든요. 옥수수는 우리가 수염이라고 부르는 그 부분이 암술입니다. 옥수수 암술은 다른 작물보다 긴편인데 움직임이 아주 독특하죠. 수정할때 보면 아래로 처지지 않고 중력을 이겨내면서 옆으로, 때로는 위쪽을 향해 바로 섭니다. 자기 주위에 날아드는 꽃가루를 가능하면 더 잘받기 위한 암술의 노력이에요. 옥수수 꽃가루는 바람이 없어도 2미터 정도 나는데, 바람을 타면 몇 백미터까지 날아가 수정을 하죠. 이렇게 노력하는 과정을 보면 어떤 숭고함까지도 느껴져요. 옥수수를 먹다보면 알이 꽉 차지 않고 비어있는 부분들이 있잖아요. 그것은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정이 안된겁니다. 그럴 때는 되게 마음이 짠해요.(웃음)-모든 곡식들이 꽃을 피우나요.거의 그렇죠. 씨앗을 거두다 보면 씨앗 하나가 얼마나 많은 꽃을 피우는지 궁금해집니다. 마늘은 여섯 쪽으로 나오고, 우리가 키우는 작물 중 가장 많은 꽃을 피우는 것은 당근이더라고요. 당근은 십만 개 내외의 꽃을 피웁니다. 당근 씨앗 하나에서 그렇게 많은 꽃을 피우니 얼마나 경이롭습니까. 그래서 당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손을 많이 남기려는 본성을 갖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당근을 좋아하면 아이를 많이 낳는다는 가설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서 제 주위를 둘러보니 당근을 좋아하는 지인이 아이를 넷이나 두었더라고요. 가설에 힘이 실리는.(웃음)-요즈음에는 어떤 작물이나 개량종이 많이 나오지 않나요.물론이죠. 우리는 토종 작물을 키우는데 수정이 안 되어도 열매를 갖는 개량종이 많습니다. 오이도 그중 하나죠. 그래서 무정오이가 많습니다. 토종 오이는 지나면 노각이 되거든요. 개량종은 길이는 길어지는데 안에 씨앗이 아주 부실합니다. 토종은 통통하죠. 자기 몸 안에 씨앗을 품기 위한 스스로의 변화예요. 자기 안에 씨앗을 맺는 오이를 먹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그런 오이를 유정오이라고 부릅니다. 씨앗도 없고 부실한 오이는 그것을 먹는 사람들의 의식과 가치, 철학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봐요.-곡식꽃에서 특별한 행복을 얻은 것 같습니다.작물과 마주하면서 공감하고 그들의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는 기쁨이 크죠. 우리 스스로의 삶에서 아름다움과 기쁨을 찾아 낼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예요. 곡식꽃 이야기를 기록하고 사진으로 옮기는 작업도 소소하지만 가치 있는 이 즐거움을 나누고 싶기 때문입니다.-시골에도 곡식꽃이 예전보다 많이 없어진 것 아닌가요.그럴 겁니다. 꽃을 다 좋아하지만 정작 우리를 먹여 살리는 꽃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날마다 먹는 밥을 만드는 벼꽃이나 콩꽃, 김치를 만드는 배추꽃 무꽃도 그렇죠. 시골에서도 이런 꽃들에 별 관심이 없어요. 왜냐면 꽃을 피워야 하는 이유가 없으니까요. 열매를 거두는 작물은 꽃을 피우지만 무나 배추도 지금은 다 씨앗을 사서 심잖아요. 배추나 무꽃은 늦여름에 심어 겨울을 나면 이듬해 봄에 꽃을 피우죠. 그런데 가을에 배추 무를 뽑고 나면 밭을 다 갈아엎잖아요. 모든 작물농사가 이런 식으로 되다보니 농촌에서도 꽃이 많이 사라질 수밖에 없죠. 이런 순환이 계속되다보면 언젠가는 내가 먹는 것이 자연에서 왔다는 것조차 잊게 되겠죠. 그것이 안타까워서 곡식꽃 작업을 하게 된 겁니다.-우리 일상에서 볼 수 있는 꽃들과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군요. 도시사람들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습니다.몇 군데 매체에 연재하고 있고, 강의도 하는데, 젊은 층들의 호응이 기대이상으로 좋습니다. 강의를 부탁해도 꼭 곡식꽃 이야기를 끼워서 하거든요. 보통 꽃은 피었을 때만 사랑받고 피고나면 그냥 쓰레기인데, 곡식꽃은 지고나면 더 예쁩니다. 앞에 열매를 달고 뒤의 꽃은 시들어 가는데 그것이 참 예뻐요. 그런 것들은 사람들에게 굉장히 큰 영감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지고 나서도 예쁜 것을 볼 수 있다면 세상을 보는 시각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생각해보면 우리 생활이 풍요로워지긴 했는데 삶의 근원적인 즐거움이나 기쁨은 많이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가치 있는 것들을 외부에 의존하기 보다는 우리 스스로 찾아내는 일상의 즐거움이 소중하죠.부부에게 곡식꽃은 새로운 기쁨을 주는 자연의 선물이다. 여러 해째 남편은 사진으로 곡식꽃을 담고 아내는 글로 꽃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부부가 함께 해나가는 이 작업의 결실은 우리들에게 또다시 좋은 선물로 안겨질 것이다. 그 결실이 기다려진다.● 김광화장영란 부부는 대안학교 교육공동체 생활건강한 먹을거리 관련 책 여러권경상도 출신인 김광화씨와 서울 토박이인 장영란씨는 1998년 두 아이를 데리고 무주로 들어왔다. 교사였던 남편과 국문학을 전공한 아내 모두 삽십대 후반, 세상살이가 더 진지해지는 즈음이었다. 부부는 그보다 2년 앞서 남편의 제안으로 서울을 떠나 경남 산청에서 대안학교(간디학교)를 중심으로 모인 교육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공동체 삶에 한계가 왔다. 스스로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무주로 올 때는 산청으로 떠났을 때보다도 앞날이 더 막막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 무모했던 선택 덕분에 삶이 새로워졌다. 초등학생인 딸과 여섯 살 터울인 아들은 시골 생활에 부부보다도 더 잘 적응했다. 무주는 부부보다 앞서 자리 잡은 허병섭 목사와 인연이 닿았던 덕분에 얻은 삶의 새로운 터였다. 논을 구하고 농사를 시작했다. 이웃들은 젊은 사람들이 잘 살 수 있을까 걱정했다.처음에는 벼농사에 온 몸과 마음을 다 쏟았다.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란 덕분에 체득한 농사일과 풍경이 스승이 됐다. 중학교 1학년이던 딸이 봄소풍을 앞두고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아이의 선택을 존중했다.네 가족이 스물 네 시간 한 공간에서 부대끼는 삶이 시작됐다. 나쁘진 않았으나 도시에 있을 때보다 부부싸움이 잦아졌다. 엄마 아빠의 갈등은 아이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부부는 갈등이 심화되면 아이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서로 소통하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된 환경에서 아이들과 대화는 부부싸움에서 벗어나게 한 큰 힘이었다. 가족들이 서로의 무의식 세계까지 알게 되는 환경.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소통하지 않으면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싸우고 열심히 소통하기 위해 노력 했다. 아이들이, 아빠가, 아내가, 엄마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더 존중하고 신뢰하는 사이가 됐다.처음에는 벼농사에만 집중하다가 식구들이 먹는 먹을거리를 스스로 해결해보자고 생각했다. 자급자족하는 일상은 그렇게 시작됐다. 모든 먹을거리를 직접 생산해낼 수 있게 됐다.딸은 3년 전에 서울로 갔다. 역시 청년공동체에서 잘 지내고 있지만 가정을 이루면 시골에서 자급자족의 삶을 살고 싶어 한다. 누나가 살던 아래채를 물려받은 아들은 밥을 같이 먹고 일은 같이 하지만 철저하게 독립된 생활을 한다.부부는 7-8년 전부터 우리에게 먹을거리를 주는 곡식꽃을 공부하며 사계절 꽃의 변화를 기록하고 사진으로 담고 있다.건강한 먹을거리에 관심이 많은 가족은 여러 권의 책을 냈다. 글쓰기의 일상이 가져온 빛나는 결실이다. 〈자연달력 제철밥상〉 〈숨 쉬는 양념 밥상〉 〈아이들은 자연이다〉 〈자연 그대로 먹어라〉 〈열두 달 토끼밥상〉 〈피어라 남자〉 등 인데, 이 중 부부가 펴낸 책 <아이들은 자연이다>는 꾸준한 인기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해 스스로 절판했고, 〈자연달력 제철밥상〉은 지난해 내용을 보완해 개정판을 냈다.

  • 기획
  • 김은정
  • 2014.11.20 23:02

열여섯번째 서예전 산민 이용 선생 "서예인들 고전 읽어야 생명 가진 진실한 예술 할 수 있죠"

문자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그 노정이 같다. 역사는 기록으로 남아야 비로소 제 생명을 얻는다. 기록으로부터 출발한 문자는 시대를 건너면서 그 존재의 가치에 새롭게 눈뜨게 한다. 서예는 그러한 문자가 이루어낸 예술적 성취다.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 옛 사람들은 책을 많이 읽고 교양을 쌓으면 책의 기운이 풍기고 문자의 향기가 난다고 했다. 당대의 명필 추사 김정희는 가슴속에 만 권의 책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 넘쳐서 그림과 글씨가 된다고 했다던가. 그러나 이제 시대가 변했다. 물질문명의 편리함과 속도감이 정점에서 맞닿은 오늘날, 서예의 존재는 무상(?)하다. 일상의 문화로부터 자리를 빼앗긴 서예는 예술의 영역에서 특정계층의 사유물로 존재한다. 어찌 보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일찌감치 서예의 가치에 눈을 떠 삶의 중심을 오롯이 이 문자예술의 영역에 가두어 살아온 서예가 산민 이용 선생(67)에게도 서예의 존재가 무거울까.전통서예와 현대서예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서예의 영역을 넓히고 그 가치를 대중들에게 확산시켜온 그가 열여섯 번째 전시회를 열고 있다(10월 25일까지 한국소리문화의전당). 1981년부터 2년 간격으로 줄곧 대중들과 만나온 그는 옛 글과 문장이 지닌 철학의 깊이를 문자의 조형성으로 다시 해석해 내놓았다. 전통의 영역은 더 견고해지고 창조의 영역은 더 치열해졌으니 교류와 융합의 미덕이 크다. 사실 옛 것의 가치에 천착해온 그의 서력(書歷)은 애애초 외형적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고진한 필치가 생동 운필하는 문자향은 소품이나 대작을 막론하고 스스로를 품어 관객들을 취하게 한다.이번 화두는 선(禪)을 묻다다. 진중한 화법으로 묻지만 즉답을 구하진 않는다. 대신 작가의 바람은 따로 있다.앞만 보고 달려가는 세태를 비판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잠시 걸음을 멈추고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사유는 세상과 나의 관계를 일깨우는 힘이 있거든요.문자의 예술적 성취는 외형에만 있지 않으나 이번 전시에서는 80년대부터 주목해온 금문(金文)의 조형세계는 단연 압권이다. 법화경을 금문으로 옮겨내는데 걸린 시간만 2년. 천착해온 집념도 그렇지만 산민만의 서체로 생명을 얻은 법화경 금문의 회화적 균형미가 놀랍다.최근,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이자 부집행위원장으로 다시 축제의 현장에 합류한 그를 만났다. 위축되어 있는 듯 했던 서예의 존재가 새로워졌다. 기분 좋은 발견이었다.-작품의 규모가 놀랍습니다. 근작들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몇 점을 제외하고는 최근 작품들입니다. 글씨 쓰는 일이 일상이니 작품을 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역시 금문과 예서로 써낸 법화경이군요. 길이만 해도 200m가 넘는다니 우선 그 노동력이 감탄스럽습니다.금문 작업만 꼬박 2년 걸린 작품입니다. 예서는 아직 마무리를 채 하지 못했지만 내놓았습니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는데 펼쳐놓고보니 보람은 있습니다.-물론 2년 동안 이 작품만 써오신 것은 아닐 테지만 그 긴 시간동안 한 작품을 이어내야 하는 공력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서예는 같은 호흡으로 써내려가야 통일성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앞 글씨를 써낸 호흡으로 뒷 작업을 이어내는 일이 쉽지는 않죠. 그래서 자기 공부는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법화경은 그런 점에서 아주 좋은 경험이었습니다.-주제가 선을 묻다입니다. 답을 주시지 왜 구하십니까.(웃음)작품을 하다보면 경향이 조금씩 바뀌는 것을 느낍니다. 예전에는 논어 등 고서에 담긴 글, 인생살이에 가르침이 되는 글귀에 마음이 가닿았어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화적인 글 보다는 스스로를 사유하게 하는 글감들에 마음이 가더군요. 깨달음을 추구하는 선(禪)적 사유랄까, 그런 글귀를 나누고 싶었습니다.-동적이고 치열해지는 세태와 관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세상이 치열해지는데 그런 정적 사유의 힘에 눈뜨게 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그래서 더 사유의 가치 발견이 더 필요해지는 것 아닐까요. 자연과 삶을 관조하며 살자고 하기에는 사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너무 많지요. 잘 살아가기 참 어려운 세상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사유하면 성찰하게 되고 성찰하면 세상을 직시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됩니다.-서예는 옛 사람들에게 일상의 문화였습니다. 오늘에도 그런 문화의 가치가 유효할까요.물론입니다. 오늘날 빚어지는 크고 작은 문제의 근원을 들여다보면 결국은 사람다움을 갖추지 못한 환경에 있습니다. 서예는 올바른 인성과 인격을 갖추게 하는데 좋은 바탕이 됩니다. 아날로그 시대의 유산이라는 점에서 외면받기 십상이지만 디지털 시대에서 더 유효한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그러나 서예인구는 갈수록 줄어들고, 서예문화는 위축되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닌가요.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서예인구는 정체되어 있습니다. 줄지도 늘지도 않았다는 이야기지요. 예전 한 시기, 유행처럼 번졌던 서실(서예학원)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교육의 형식이나 주체가 다양해졌기 때문입니다. 자치단체나 대학이 서예교육을 맡고 나섰잖아요. 전국적으로 열리는 공모전이 수백 개에 이르는 것도 그것을 증명합니다.-대학의 서예학과가 폐지되는 현상은 어떻게 보십니까.인문학이나 순수예술의 위기와 맥을 함께 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비단 서예만의 문제가 아니죠. 물론 서예가 예전보다 위축된 것은 사실입니다. 초중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도 서예는 자리를 빼앗겼으니까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개설되었던 원광대 서예과의 폐과 확정은 정말 안타깝습니다. 근래 들어 아시아 3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서예를 주목하는 경향에 비추어보면 더욱 그렇습니다.-서예 부흥을 기대할 수 있는 움직임인가요.우리나라만 해도 국회에서 서예진흥법 입법 작업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서예진흥운동의 결실이지요. 국회에서 이런 작업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는 배경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정치성을 의심하는 분들도 있지만 세계 외교 분야에서는 아시아 3국 뿐 아니라 서예를 외교의 통로로 삼는 예가 늘고 있습니다. 서예는 인문학 부흥과도 직결된 분야이기도 하고요. 서예박물관의 활성화도 눈여겨볼만한 일입니다.-아시아 3국 서예문화는 어떻습니까.중국은 10여 년 전부터 광풍이라고 할 정도로 서예바람이 대단합니다. 이름 있는 서예가의 작품은 구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주문이 밀려있습니다. 자연히 서예가들의 활동이 활발해질 수밖에 없죠. 그러나 서예문화의 위상으로 본다면 한국서예가 우위에 있다고 봅니다. 중국 서예는 역사도 깊고 저변도 넓어 크게 발전할 여지가 있지만 문화혁명의 여파로부터 아직 자유롭지 못합니다. 일본 서예는 너무 일찍 서구화되면서 소위 전위서예 같은 형식이 확산되었죠. 너무 앞서가다 보니 서예 본질에서 벗어난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 비해 한국 서예는 전통을 지키면서도 현대서예의 창작 영역을 확대해왔고 그 성취도 높습니다.-서예의 대중화는 아시아 3국의 공통적인 과제겠군요.물론입니다. 사실 한중일 모두 서예대중화를 주도한 시기가 비슷합니다. 세대로 볼 때도 비슷한 연령층이고요. 60대 후반부터 70대 초반에 이르는 세대랄 수 있겠는데, 한국 역시 우리세대가 서예를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자료의 덕을 보기 시작했거든요. 중국과의 교류가 시작되면서 서예문화는 새로운 전기를 얻은 셈입니다.-세대의 특성을 더 이야기 한다면 이전에는 완전히 도제식 교육에 의존했었죠. 그래서 임서의 미덕이 가장 크게 부각되었었는데. 그렇다면 선생님 세대에 이르러 글씨의 자기화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이전에는 서예와 관련된 책도 별로 없어서 스승이 써주는 글씨에만 매달려야 했어요. 공부할 수 있는 통로가 한정되어 있었죠. 물론 오래 공부를 하다보면 자기글씨가 나올 수 있지만 기초가 탄탄하지 않으면 창의성을 발휘하기 어렵지 않겠어요. 문자향 서권기라고, 그만큼 책(자료)을 섭렵하는 일이 중요한 겁니다. 그런 점에서 자료를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된 우리세대는 행운이었죠.-오늘과 같은 디지털시대에 손글씨와 같은 아날로그적 요소가 부상하고 있는 것을 보면 서예문화의 부흥이 기대되기도 합니다.물론입니다. 손글씨 쓰기는 매우 좋은 교육이에요. 특히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의 정서에는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내 경험으로 보자면 직접 손글씨로 쓰는 것이 온전히 내 것으로 돌아오더라고요. 책을 읽다가 좋은 글감을 만나면 지금도 반드시 만년필로 쓰는데, 그 쓰인 형태까지도 기억이 되거든요. 무엇을 쓴다는 것 자체가 마음을 다스려주는 행위라고 봅니다.-서예 대중화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80년대부터 현대서예운동을 주도해오셨는데요.80년대 중반부터 현대서예 운동이 일기 시작했어요. 현대서예협회 이사장을 맡으면서 더 열심히 앞장서야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쯤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다시 전통서예를 찾게 되었어요. 물론 그 사이에도 전통서예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작업의 중심이 변화했죠.-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전통이 탄탄해야 비로소 현대서예, 창작의 새로움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서예를 앞세워 너무 쉽게 접근하는 움직임이 보였어요. 기초 없이 글자를 자기 마음대로 해체시키고 조합하면서 예술을 빙자한 근본 없는 작업들이 밀려오는데 겁이 나더라고요.(웃음)-금문에 천착하신 것도 그런 경향과 관련이 있겠군요.그렇습니다. 금문은 청동기에 새긴 문자입니다. 중국의 은나라 주나라시대에 활발했죠. 금문에 마음을 빼앗긴 것은 그것이 지닌 회화성 때문입니다. 제가 현대서예를 했던 것도 임서보다 제 나름대로 재해석해서 서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작업에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다보니 글자의 원류 쪽으로 관심이 가기 시작한 겁니다. 문자의 원류에 가까워질수록 회화성이 빼어난 특성을 발견했지요. 제 경우는 금문 속에 답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어디서 처음 금문을 접하셨나요.고서에서 만났죠. 가슴이 뛸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이 글자가 다 짧은 것들인 거예요. 길어봤자 2-300자. 양에 차지 않았죠. 그래서 중국의 고서와 자료를 섭렵하며 온갖 금문을 모아 연구했습니다.-금문을 발표한 것은 꽤 오래전으로 알고 있는데요.현대서예 운동을 한참 할 때니까 80년대 중 후반쯤 일겁니다. 그때 전시회에 금문을 내놓았더니 반응이 별로였어요. 새롭다는 분들도 있었지만 좀 이질적이라고 보는 경향이 컸죠.-그런데도 꾸준히 연구하고 재해석하면서 산민의 금문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집까지 낸 이유가 궁금합니다.어떤 서체도 따라올 수 없는 회화성이죠. 글자의 의미를 새기며 한자 한자 금문체로 만들어내는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성취감이 크거든요. 지금은 회화적인 예술성에 주목하는 서예가들이 많아져 보람이 있습니다.-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서예축제로는 아시아권에서도 처음이었죠.그렇죠. 지금은 북경비엔날레가 생겼지만 우리와는 형식 자체가 다르고 권위나 위상도 우리가 우위입니다. 북경비엔날레는 규모는 크지만 전시 중심의 단일 행사거든요. 해를 거듭해가면서 발전하겠지만 서예의 대중화를 겨냥한 축제로서의 의미는 아직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가 유일합니다.-축제는 규모도 중요하지만 외형적인 성장만이 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축제의 정신을 어떻게 구현해내느냐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물론입니다. 서예비엔날레는 그런 점에서 제 길을 잘 걸어왔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전통을 지키면서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대중화를 위한 현대 작업의 노정도 주목하는 취지를 잘 반영해왔으니까요.-10여 년 동안 중심에서 활동하시다가 잠깐 쉬셨죠. 올해 다시 부집행위원장을 맡게 되셨는데 서예비엔날레의 방향이 궁금합니다.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서예비엔날레가 이룬 성과는 적지 않습니다. 우선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된 것이 그 성과를 증명합니다. 그렇다고 과제가 없는 것은 아니죠. 이 축제를 시작할 때도 그랬지만 서예의 대중화는 여전한 과제입니다. 대중들이 공감하고 서예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 노력이 더해져야 합니다. 서예 인재를 발굴하고 키워내는 일도 그렇고요. 서예비엔날레를 끌어갈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 과제를 풀어내는 일에 힘을 합할 생각입니다.산민은 책 욕심이 크다. 한때는 광주의 고서점을 뒤지느라(?) 한 달 동안 그곳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우리 고서는 물론이고 중국의 고서에 이르기까지 그가 갖고 있는 자료는 엄청나다. 책만도 만권이 넘고 소소한 자료는 그의 서재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다. 왜 그렇게 고서에 집착하는 것인가 궁금했다.고전은 오늘의 거울이거든요. 고전을 읽어야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서예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특히 고전을 읽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글씨의 형식미가 아무리 빼어나다해도 생명은 가질 수 없습니다. 서예는 진실한 예술이거든요.고전에 놓인 길이 어찌 서예의 길 뿐이겠는가. 그가 대중들에게 전하고 싶은 답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용 선생은 강암 송성용 선생에 배움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탄생 앞장산민 이용 씨는 김제가 고향이다. 한약방을 운영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자연스럽게 글씨 쓰는 일을 익혔다. 서예를 제대로 배우고 싶었으나 아버지는내 글씨 배워서 뭐하냐며 가르치지 않았다. 다만 서예와 관련된 책과 자료를 건네주시며 평생 학문을 가까이하고 글씨를 쓰며 살아라. 대신 글씨 쓰는 일로 먹고 살지는 말라고 일렀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말씀을 어기고 글씨 쓰는 일로 먹고사는 전업서예가가 됐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온 그는 우여곡절 끝에 홍익대 응용미술과에 들어갔다. 불문학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인연이 닿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부장을 도맡아 할 정도로 미술에 재능이 있었지만 정작 미술을 전공하는 일은 마음이 가지 않았다. 유신체제의 어지러운 시대 상황이 그를 학교 밖으로 몰았다. 일간지에 체제 비판 글을 기고한 것이 화근이 되어 어디론가(?) 끌려가 꼬박 열흘 동안 고생하고 나왔다. 그 뒤 자신의 호를 스스로 삼민(三民)이라 지었다. 농민(聾民) 맹민(盲民) 아민(啞民). 귀가 있어도 듣지 않고 눈이 있어도 보지 않으며 입이 있어도 말하지 않고 살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후에 강암 선생은 제자에게 삼민 대신 산민(山民)이란 호를 주었다.그즈음 군대를 갔다. 최전방에 배치되었지만 글씨 잘 쓰고 바둑 잘 두는 잡기(?) 능한 사병을 눈여겨 본 상관들이 가만두지 않았다. 이곳저곳 불려 다니다 보니 소속 군대조차 불분명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부대 사고에 연루돼 월남으로 갔다. 돌아와서는 복학 할 생각이었으나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생계를 위해 책 판매원을 하기도 하고, 기업의 공채로 직장생활도 했다. 강암 송성용 선생을 찾아간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동안 써둔 습작을 들춰본 스승은 그에게 말했다. 글씨 좀 쓰겄네.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사시공부에 잠깐 마음을 두었지만 법원 행정직 시험을 거쳐 법원 직원이 되었다. 서예를 병행할 수 있어서였다. 그러나 그 직장도 6년 만에 사표를 내고 나왔다. 온전히 서예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고서와 온갖 자료를 섭렵하며 폭을 넓혔다. 40대에는 현대서예 운동의 선두에 섰다. 1981년부터 2년에 한번꼴로 전시회를 열어 전통과 창작의 경계를 넘나들며 스스로를 담금질했다. 1997년, 서예 축제로는 최초인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를 탄생시켰다. 50대와 60대로 건너가는 시기 10여년을 서예비엔날레의 기반을 다지고 동력을 만드는 일에 고스란히 바쳤다. 보람은 컸지만 내공을 쌓는 시간이 너무 오랫동안 단절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업(?)으로 돌아와 고서를 섭렵하고 금문 연구에 천착했다. 그동안 출간한 책만도 수십 권. 〈예서시탐〉 〈한묵금낭〉 〈금문천자문〉 〈명문100선〉 〈금문총서〉 등은 스테티셀러가 되었다. 한국현대서예문인화협회 이사장,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집행위원장과 총감독 등을 역임했으며 올해 다시 서예비엔날레 부집행위원장을 맡아 현장에 합류했다. 이번 전시는 열여섯 번째 개인전이다.

  • 기획
  • 김은정
  • 2014.10.23 23:02

전북도립미술관서 '컬렉션' 전시 하정웅 수림문화재단 이사장

어린 시절, 궁핍한 환경에서도 화가가 되고 싶었던 소년이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식민지 시대, 가난을 못 견디고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온 재일교포 1세였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고단한 일상은 그를 더 이상 화가로서의 꿈을 갖지 못하게 했다.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한 소년은 어디에 가든 성실하게 일했다.예기치 않았던 어려움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지만 나보다는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생활철학이 긍정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하는 힘을 안겼다. 실명의 위기를 극복하고 빚더미에 쌓인 전자제품 가게를 일으켜 세우면서 30대에 부를 이루었다. 디아스포라의 운명에 처한 재일교포 작가들을 지원하고 싶었던 그는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5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면서 세계적 거장들의 작품까지 1만여 점 작품을 수집한 세계적인 미술품 컬렉터가 됐다. 그러나 그가 수집한 작품들은 그의 것이 아니다. 모든 작품을 광주시립미술관을 비롯해 대한민국의 여덟 곳 도립 시립미술관에 기증했기 때문이다.우리나라 메세나 운동의 선구자 하정웅 수림문화재단 이사장(75). 그는 미술품 기증으로 이름을 알린 재일교포 2세 화가이자 사업가다. 대기업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로라하는 재벌 2세도 아닌 그가 재산의 대부분을 쏟아 수집한 미술품을 온전히 대한민국의 관립미술관에 기증한 이유는 무엇일까.마침 하정웅 컬렉션을 기증받은 시도립미술관들이 지난해부터 특별한 전시회를 기획했다. 하정웅 컬렉션이란 이름으로 열리고 있는 기도의 미술이다. 다섯 번째 순회전 차례인 전북도립미술관 전시가 지난 9월 19일부터 시작됐다. 전북도립미술관이 개관했던 초기, 재일교포 화가 손아유의 작품을 비롯해 200여점의 작품을 기증하면서 그는 이 지역에도 아름다운 기증운동의 꽃씨를 심었다.개막식 참석을 위해 아내 유창자씨와 함께 전주에 온 하 이사장을 만났다. 세 시간 가까운 시간동안 그의 이야기는 칠십 여생 험난했던 인생노정만큼이나 격정적으로 굽이쳤다.명역역(明歷歷) 노당당(露堂堂). 좋은 일은 반드시 좋은 일로 돌아온다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아왔습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어머니는 나쁜 짓 하지마라, 하늘이 다 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가르침이 제게는 신념이 되었는데, 덕분에 사회에 공헌하는 일에도 눈을 뜰 수 있었을 겁니다.이산(離散)의 고달픈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그의 노년은 유난히 아름답고 빛이 났다. 이웃에게 베풀고 나누는 삶이 가져온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 길은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생존의 문제와 맞닥뜨리면서도 좋은 일에 마음을 두었던 그의 선택이 그래서 더 소중해 보였다.- 전국시도립미술관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하정웅 컬렉션 특별전에 남다른 소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많은 분들이 관심 가져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정웅 컬렉션으로 지금까지 9개 관립미술관에 1만여 점 정도 기증해왔습니다. 여러 해에 걸쳐 기증운동을 하다 보니 관계자들이 소통하면서 이 전시를 기획하게 된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또 다른 보람을 갖게 된 셈인데, 제 컬렉션으로 지역과 지역이 교류하는 계기가 이어지고 있으니 반가운 일입니다.-국내에서는 이 전시가 내년까지 이어지던데 일본 전시도 계획되어 있습니까.국내전을 마치면 일본 6개 도시 순회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재일교포들은 물론이고 컬렉션을 기다리는 미술애호가가 많습니다. 미국이나 유럽 도시에서도 전시회를 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단순히 컬렉션을 과시하고 평가받는 자리가 아니라면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합니다.-특별전에 기대하는 메시지가 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저는 컬렉션을 시작할 때 분명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디아스포라가 중심이었죠. 맨 처음 재일교포작가들의 작품부터 수집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전 세계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10억, 우리 민족만도 700만 명 정도가 흩어져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산의 삶은 위태롭습니다. 늘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기 일쑤죠. 저 역시 국적은 한국이지만, 삶의 터전은 일본인 디아스포라입니다. 미술을 통해 저와 같은 운명을 가진 디아스포라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킬 수 있다면 세상에 이바지 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미술품 수집을 시작했을 때 재일교포작가 작품을 주목했던 이유가 거기 있었군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부모님은 가난 때문에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오셨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고단한 삶이었죠.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어머니는 특별한 일을 시켰어요. 마을 뒤편에 절이 있었는데 그 곳에 무덤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한 봉분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명절이면 음식과 함께 저를 그곳에 보내어 절을 올리고 오라고 하셨죠.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들의 무덤이었습니다.-이름 없는 노동자들이었겠군요.제가 살았던 아키타는 강제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들이 많았습니다. 아키타에 일본에서 제일 깊은 다자와코라는 호수가 있었는데, 이 호수에 댐을 만들고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면서 그 현장에서 일하게 된 노동자들이었어요. 그들 중에는 힘든 노동과 추위에 시달리다 도망치거나 영양실조로 죽은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 무덤도 그들 중 누군가의 무덤이었겠죠.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이산의 아픔을 알게 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그 일이 미술품 수집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합니다.이름 없이, 그것도 내나라도 아닌 곳에 끌려와 죽음을 맞은 사람들의 운명이 강하게 와 닿았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부턴가 이들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었거든요. 그래서 처음 그림을 모으기 시작할 때 이 분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기도의 미술관을 만들자고 결심했습니다.-목표가 분명했는데 왜 미술관 건립은 하지 않으셨습니까.미술관을 짓기 위해 땅도 사고 설계까지 마쳤어요. 호수 옆이었는데 제 뜻을 존중하고 환영하는 일본인들이 많았습니다. 행정에서도 적극적인 지원을 해주겠다고 약속 했죠. 그런데 그즈음 한일관계가 악화되었어요. 강제징용 위안부 문제 등이 불거졌죠. 갑자기 상황이 경색되면서 미술관 건립을 환영했던 일본인들이 돌아서기 시작하더군요. 90년대 초반이었어요. 인연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계획을 접었습니다.-미술관을 염두에 두고 수집한 작품도 많았을 텐데요.작품 양도 그렇지만 기도의 미술관을 위해 수집한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아쉬움이 더 컸지요. 그런데 뜻하지 않은 운이 돌아왔어요. 그 사이 땅값이 다섯 배로 오른 겁니다. 다 팔았죠. 그래서 더 많은 작품을 모을 수 있게 되었고요. 결과적으로 땅 투기한 셈이 됐습니다.(웃음)-광주시립미술관에 작품을 처음 기증한 것이 그 즈음 아닌가요.맞습니다. 아주 묘한 인연이죠. 82년엔가 광주에 가게 되었어요. 전화황이란 재일교포 작가 작품을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싶어 서울과 대구, 광주에서 순회 전시회를 했었거든요. 그런데 과로를 했던 탓인지 광주에서 쓰러졌어요. 일주일동안 시각장애인 안마사의 도움을 받아 겨우 회복되었는데, 그때 그 안마사가 부탁을 하더군요. 시각장애인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 마련을 도와달라고요.-그 분이 이사장님을 잘 알아보셨군요.(웃음) 그래서 도와주셨습니까.사정이 아주 절박했어요. 광주에만 2천명 이상 시각장애인이 있는데, 먹고살 기반이 없다. 자립을 못하니 가족과 주변사람들에게 짐이 되어 살고 있다. 젊은 사람들은 교육이라도 시켜 자립할 기반을 마련해주고 싶다고 하는데 참 딱하더라고요. 나도 시각장애를 가진 분들과의 인연이 있거든요.-어떤 인연인가요.고등학교 시절, 기차를 타고 통학을 했는데 그때 시각장애인들이 서로에게 의지해 기차를 타고 내리는 것을 보며 감동했습니다. 나중에는 그들과 친구도 되었고요. 그리고 저 역시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시력을 잃은 적이 있지 않습니까. 돕고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경제적으로만 지원하는 일은 의미가 없어 먼저 당신들이 의지를 갖고 시작해보라고 했어요. 200만원만 모금을 하면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지요.-약속은 지키셨습니까.물론입니다. 1년도 안되어 연락이 왔더군요. 모금운동으로 목표액을 만든 겁니다. 애초 약속은 30평 부지에 사무실 공간 30평 정도의 건물이었는데, 160평 부지에 120평짜리 건물을 지어드렸습니다. 장기적으로 이 공간의 활용도를 생각해보니 그만한 공간은 확보되어야겠더라고요.-광주와의 인연이 그렇게 시작되었군요.잘된 출발이었죠. 시각장애인들이 직접 나서서 씨앗을 뿌린 셈인데 당시만 해도 그런 운동이 드물 때여서 모범적인 시민운동의 결실로 꼽혔습니다. 93년에 다시 광주에 갔는데 오승윤씨를 만나 광주시립미술관이 건립되었다는 것을 듣게 된 겁니다. 그래서 가보았더니 건물을 지어놓고도 소장품이 없어 전시회 하나도 제대로 기획하지 못하는 처지였어요. 50점 정도 기증을 부탁하더군요. 하정웅 컬렉션 전시실을 마련하자는 것이었어요. 일본으로 관계자들을 초대한 자리에서 212점을 기증했습니다. 내 컬렉션의 출발이 된 전화황의 작품 92점을 비롯해 모두 재일교포 작가의 작품이었습니다. 광주의 정신과 맞는다고 생각했고, 기도의 미술관을 만들어 가장 중심에 놓아두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작품들이기도 했습니다.-이사장님에게는 다른 어느 작품보다도 귀한 작품들이었겠습니다. 개인이 그렇게 많은 작품을 한꺼번에 기증한 예는 없었을 것 같은데요.그런 기증이 처음이어서인지 화제가 되었죠. 그런데 한편에서 비난이 쏟아지더군요. 기증한다더니 재일교포 작품만 했다고. 숫자만 많지 쓰레기 같은 그림들이라고요. 기가 막혔습니다. 나를 이름이나 알리려는 졸부쯤으로 평가하는 것은 마음 쓰지 않으면 될 일이지만 작가들의 작품을 그렇게 평가절하 하는 일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그 안에 이우환선생의 작품도 있었다면서요.그 당시는 이우환씨가 아직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지 않은 때였죠. 이우환 작품이 당시 열 두 점이었는데 지금은 그의 작품이 미술시장에서 100호 기준으로 수십억 원에 거래되고 있으니 미술관으로서는 큰 자산이 됐습니다. 당시 쓰레기로 평가받았던 작품인데.(웃음) 기증한 작품들은 우리나라의 현실과 문화를 알고 선택한 것들이에요. 역사적 맥락에서 가치 있다고 판단한 작품들입니다. 작품수나 외양만 보고 평가하는 일은 비문화적이죠.-그런 오해를 받으면서도 광주시립미술관에 여러 차례 작품을 기증하셨지 않습니까.지금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2300점 기증했습니다. 한국 작가는 물론, 피카소 샤갈 달리 헨리무어 등 이른바 하정웅 컬렉션으로 불리는 작품들입니다. 광주시립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의 70퍼센트 가까운 양이라고 들었습니다.-그래서 소장품 기근을 겪고 있는 관립미술관들이 이사장님의 작품 기증을 기대하게 된 것 같습니다.다 같은 여건이니까요. 여력이 되면 돕고 싶었고, 그래서 기증운동이 확산된 것입니다. 특별한 계기도 있어요. 40년 전에 한국에 왔을 때 덕수궁 미술관에 갔어요. 그 건물이 이방자 여사가 살던 집이었지 않습니까. 그것을 보면서 미술관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들고 역사적 공간에 미술관을 들여놓아야 하는 문화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소장품도 없었죠. 우리나라 역사를 4천년, 5천년 역사라고 내세우면서 변변한 미술관 박물관 하나 갖지 못한 현실에 정신이 들었어요. 우리나라 문화진흥을 위해 무엇인가 공헌해야겠다는 의지를 갖게 된 겁니다.-미술품을 수집할 때 어떤 기준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컬렉터들은 아무래도 작품의 가치를 명망성에 두게 되지 않나요.저는 처음부터 역사적인 맥락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저와 같은 운명을 갖고 있는 디아스포라 작가들의 작품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역사성에 무게를 두었기 때문이지요. 그동안 수집한 작품들을 보면 아무래도 디아스포라 작가들이나 그런 주제를 다룬 작품들이 많습니다. 역사성을 반영하고 현실과 사회를 직시하면서 그에 대해 비판하고 경고하는 그런 세계를 갖고 있는 작품들이죠. 그런 작품들이어야 관객들이 미술을 통해 역사를 읽고 우리가 무엇을 반성해야 하고, 지향해야 하는가를 인식하게 됩니다.-일본과 한국을 오가시면서 문화 활동으로 헌신하는 이사장님의 삶이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습니다. 앞으로도 하실 일이 많을 것 같습니다.내가 살아온 과정에서 배운 경험을 많은 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매체 인터뷰 역시 그런 통로가 되겠지요.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도와주는 정신, 나누는 정신을 나는 추양(推讓) 정신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행복을 찾고 평화를 만들어내는 사회를 소망합니다. 하정웅 컬렉션은 그러한 기도의 철학이 바탕입니다. 그 취지를 살리는 일을 좀 더 오래 지속하고 싶습니다.하 이사장은 전주를 여러 차례 오고갔다. 전주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그는 전주만의 문화 전통을 잘 지키는 것이 미래의 가장 큰 힘이라고 조언했다. 인터뷰 말미, 따끔한 충고도 더해졌다. 한옥마을이 참 좋았었는데, 어제 둘러보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일과성 바람이랄까. 한옥마을다움이 없는 이상한 문화에 잠식되었더군요. 그런 바람은 정말 위험합니다. 우리 문화의 가치가 살아 있는 마을을 지키세요. 주민들이 나서야합니다.● 하정웅 이사장은 미술품 1만점 국내기증 재일교포 2세메세나 운동 선구자하정웅 이사장은 재일교포 2세다.전남 영암이 고향인 그의 아버지는 식민지 치하,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교포 1세이고 동향인 어머니 역시 아버지와 결혼하면서 일본으로 갔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던 부모님은 하루 벌이 노동으로 5남매를 키웠다. 그는 그림을 잘 그리고 명민했으나 고등학교 입학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생활이 곤궁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아버지를 도와 일을 할 생각이었던 그를 일본인 스승이 붙잡고 눈물로 호소했다.아무리 어려워도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한다. 그래야 행세라도 할 수 있는 시대다. 아들이 전해준 그 말을 듣고 어머니는 어떻게든 고등학교는 가르치겠다며 암거래 쌀장사로 학비를 댔다. 졸업만하면 일류회사 취직이 가능했던 명문 아키타 공업고등학교를 들어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미술교사가 아키타현 공모전에 그의 작품을 출품했다. 첫 출품에 입상의 기쁨을 안았다. 여러해 동안 출품하고도 번번이 낙선했던 스승은 제자에게 말했다. 오늘부터 니가 내 선생님이다. 그 말 한마디에 자존감을 얻었다.졸업 직후 학교 추천으로 취업을 했다. 전기회사였는데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심한데다 적성도 맞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아버지처럼 하루 벌어 사는 노동을 시작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디자인 학교를 다녔다. 2년쯤 되었을 때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았다. 영양실조에 과로가 원인이었다. 3개월 동안 어둠속에서 지냈으나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야 했다. 조총련 조직에서 재일동포들이 인권을 찾을 수 있는 일을 해달라며 그를 불렀다. 4년 동안 온전히 동포들의 인권을 찾는 일에 매달려 살았다.스물 네살에 재일교포인 윤창자씨를 만나 결혼했다. 그즈음 조총련 조직과도 결별했다. 신혼살림을 마련하면서 인연이 된 가전제품 상점을 우여곡절 끝에 인수하게 됐다. 1964년 도쿄올림픽 개최를 한해 앞둔 해였다. 전자제품 바람이 일본 전역에 불어 그의 상점도 성업이었다. 3개월 만에 떠안았던 빚을 갚고도 큰 돈을 벌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자신처럼 꿈을 갖고 있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포기한 동포들을 돕기로 했다. 첫 대상은 재일교포 화가들이었다. 작가들을 지원하고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수집한 작품은 1만 여점. 피카소 샤갈 뭉크 앤디워홀 달리 등 20세기 거장들의 작품부터 이우환 손아유 등 세계 화단에서 주목받는 한국인 작가들의 작품이 망라되어 있다. 그는 애초 일본에 의미 있는 미술관 건립을 준비했었다. 그러나 한일관계가 악화되면서 계획이 무산되고 난 후 지방도시에서는 처음으로 문을 연 광주시립미술관에 작품 기증을 시작했다.기증운동은 더 확대되어 한국의 웬만한 도립 시립미술관이 그로부터 적게는 수백점, 많게는 수천점의 작품을 기증받았다. 화가이기도 한 그는 지금도 작품을 수집하고 기증하는 메세나 운동을 이어오고 있다. 2009년부터 수림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그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보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최근 자신의 삶을 담은 에세이 날마다 한 걸음을 펴냈다.

  • 기획
  • 김은정
  • 2014.10.09 23:02

'고대기술복원 프로젝트' 나선 옹기장이 이현배 씨 "옛 사람들 '자작자족' 지혜, 우리 일상으로 들여놓고 파"

옹기를 만들기 시작한지 10년. 30대였던 그는 전통의 관점으로 현대를 해석하는 일에 몰두했다. 일상에 옹기를 들여놓는 일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던 그는 옹기의 쓰임새를 확장한 다양한 식기를 만들어내는데 많은 시간을 쏟았으며 그 덕분에 한식 상차림의 반상기 세트와 온갖 아름다운 식기, 일상 소품들이 옹기로 태어났다. 서울의 이름난 호텔 양식부에 들어가 일주일동안 실습하면서 양식과정과 그릇의 품새를 익히고 난 뒤 옹기 양식세트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작업은 고단해보였으나 에너지가 넘쳐나는 그의 일상을 만나는 일은 특별했었다.옹기장이 이현배씨(52,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 솥내마을)의 10여 년 전 삶의 풍경이 그랬다. 그가 4-5년 전부터 나주 문화재연구소와 별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고대기술복원프로젝트. 영산강유역 고대문화의 상징인 옹관 제작 기술을 재현하는 작업이었다. 1995년 그의 첫 전시회 팸플릿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글이 생각났다. 옹기는 세상에 태어날 때 태항아리, 밥을 담는 오모가리, 똥을 담는 합수독아지, 죽어서는 옹관까지 한반도 사람들의 나고 죽는, 그야말로 처음과 마지막을 담는 모든 것이다.그렇고 보니 옹기의 질서(?)를 철저하게 재현해내는 그의 작업이 어디까지 왔을지 궁금했다.사실 그가 만든 손내옹기는 전통옹기 대중화의 상징적 브랜드가 된지 오래다. 인사동 쌈지길의 전문 옹기가게를 통해 이름을 널리 알리기도 했지만, 전통적인 조형이 아니고도 모던한 조형미에 현대적 쓰임새를 결합시킨 옹기로 특별한 소비자층을 매료시킨 덕분이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몸을 낮추어 옛 것으로부터 배우는 지혜와 깨달음을 옹기 만드는 일로 풀어 나간다.옛 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의 가치가 열망이 되어버린 시대. 옹기장이로 살아가며 전통의 미덕을 현재에 되살리는 일을 삶의 목표로 삼은 그를 만났다. 짧지 않은 세월, 적지 않은 고난과 맞닥뜨려야했지만 그의 의지는 더 단단해지고 결연해진 듯 보였다. 새로운 과제를 설정해놓은 덕분이었다.제 나름대로 생각하는 손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일상에 자작자족(自作自足)의 가치를 복원해내는 일이예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사회는 소비를 통해 마치 자아완성이 될 것처럼 세팅되어 있잖아요. 이 질서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자작자족은 삶의 질을 높이는 통로가 될 수 있어요. 필요하다면 문화운동으로라도 확산해가고 싶습니다.그가 제안한 일은 낯설지만 새로운 일은 아니다. 되돌아보면 자작자족은 옛 사람들의 가치 있는 일상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크고 작은 항아리며 새로운 조형의 옹기도 그렇지만, 옹관이 흥미롭습니다. 크기만으로도 만만치 않은데 제작 과정에 어려움은 없습니까.규모화의 특성이 있긴 하지만, 제작의 속성을 알면 만드는데 어려움은 없습니다. 완성된 것을 옮길 때 복잡한 문제가 생기죠. 박물관 식구들이 와서 작업을 의뢰했을 때도 제작은 걱정 없다고 말했었어요. 실제로 무난히 만들었고요.-옹관 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된 것입니까.2008년에 국립 나주문화재연구소 의뢰로 시작하게 되었어요. 5년 동안 진행하는 작업이었는데 근간은 고대기술복원이었죠. 그러니까 옹관 제작 기술 복원인데, 재작년 1차 프로젝트를 끝내고 작년에 2차로 다시 5년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1차에서 얻은 성과가 있었던 모양이군요.고대기술 복원인데, 실험고고학의 측면에서 진행하는 것이니 제작 과정의 다양한 실험에 의미가 있습니다. 영산강 유역 고대문화의 상징인 옹관의 재현을 통해 역사성과 가치를 실험고고학 측면에서 시행하는 작업입니다. 제가 하는 일은 고고학자들의 요구에 맞게 작업하는 것이죠. 흙이나 형태, 색깔까지 주어진 과제대로 맞추어 만들고 불을 땝니다. 그래서 결과물을 얻습니다.-옹관 가마가 따로 있던데 여기서 제작을 하나요.프로젝트 작업은 나주에 가서 진행합니다. 제 가마터에 있는 옹관 가마는 옹기장이로서 제가 하고 싶은 작업을 해보려고 만들었어요. 일을 하다 보니 고고학자가 궁금해 하는 과제와 제가 개인적으로 실험하고 싶은 내용이 달랐거든요. 가령 불을 땔 때의 효율성도 그렇고, 서로 파악하고자 하는 속성도 다르고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실험을 다시 해보는 것이죠. 옹기의 조상이랄 수 있는 옹관은 모든 토기의 완성형이거든요.-옹관과 옹기 만드는 일은 별개의 작업 아닌가요.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축적과 생성이라는 말을 쓰는데 옹기를 보면 그 형식이 그대로 적용되죠. 옹관도 똑같습니다. 생성에 이르기까지 축적된 요소를 찾아 적용시키면 되거든요.-근원을 따진다면 옹기보다 옹관이 먼저겠군요.그렇죠. 사실 옹기는 사회적으로 개념 규정이 명확치 않습니다. 안타깝지요. 도자사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고 실생활에서도 너무도 당연한 것 익숙한 것으로 놓여 있다가 생활환경과 형태가 변하면서 소멸된 그런 존재죠.-환경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우리 식생활의 기반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너무 빠르게 일상에서 자취를 감춘 것 같습니다. 주류가 아닌 서민들의 일상에 더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요.꼭 그렇진 않습니다. 궁중에서도 옹기는 중요한 그릇이었죠. 옹기가 아니면 장류라든지 중요한 먹거리를 어디 담아두었겠습니까. 생활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옹기는 너무 흔하고 익숙한 생활용품이었죠. 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생활에서 당연하고 너무 익숙한 것이다 보니 소중한 줄 몰랐던 것이죠. 옹기는 우리 먹거리 문화에 있어서는 생존요소였습니다.-어쨌든 생활의 틀이 바뀌면서 옹기는 빠른 시간에 거의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게다가 단절된 시간이 길어지니 아무리 현대 생활에 맞게 개발을 한다 해도 일상의 복귀가 어려운 것 아닌가 싶습니다.옹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현대적 품새로 자격이 있습니다. 조형의 아름다움으로도 그렇고요. 요즘 말하는 경제적 가치로 이야기하더라도 부가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다만 그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한 것이죠.-다양한 쓰임새와 조형을 개발해내는데 그 바탕의 비중은 어디에 놓습니까.제가 하는 일은 옹기에 없던 것을 새롭게 부여하는 일이 아닙니다. 일을 시작했던 초기에 지인이 옹기를 예술로 풀어보면 어떻겠느냐고 하더군요. 생활용품으로서 쓰이는 옹기만 만들어서는 생활하기에도 빠듯하다는 것을 잘알았지만 그렇다고 예술로 옹기를 풀어내는 것은 제가 하고자 했던 일의 본질이 아니었어요. 옹기가 지닌 아주 부분적인 특성을 적용해내는 작업에 마음을 주면 나중에는 얕잡힐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생존하기 위한 길이 아니다 싶기도 했고요. 그래서 더디더라도 본질을 찾아 가겠다고 마음먹었죠.-옹기의 본질과 가치를 담아낸 작업을 바탕에 두면서도 현대적 그릇을 고민해오셨는데 그 노력만큼 현대생활에 옹기의 쓰임이 가닿지 않는 아쉬움은 없습니까.옹기는 일제시대를 거쳐 오면서 잘못 이해되기 시작했어요. 옹기의 가치가 폄훼된 것도 그렇고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도자기란 말도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것이거든요. 우리는 도기 자기를 따로 썼죠. 도기는 옹기, 자기는 사기였는데, 도기보다는 사기라는 말을 더 많이 썼잖아요. 일본은 도자산업으로 문명을 일으켰으니 도자사를 강조하지만 한국문화에 대해서는 열등감이 있었지 않습니까. 게다가 옹기는 그들로서는 용도가 없는 그릇이니 자연히 도태시켰고, 미술사적으로도 도자기와 옹기를 별개로 삼았죠. 더구나 근대화과정을 거치면서 옹기는 양은그릇이나 플라스틱과 경쟁해야 했어요. 살아남으려니 천박해질 수밖에 없었죠. 값으로도 그렇고.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있어요. 플라스틱 초기 형태를 보면 모두 옹기 조형입니다. 옹기가 축적해낸 크기와 조형을 그대로 카피 했죠.-그렇게 소멸되었던 옹기의 가치가 요즈음 새롭게 부상하고 있습니다. 역시 한민족의 전통적인 먹거리 근원인 발효의 가치와 맞물려서겠지요.그렇죠. 옹기가 지닌 가장 큰 힘은 발효와의 조합입니다. 우리 먹거리의 힘은 발효에 있고요. 그러니 옹기는 한민족의 일상에서 꼭 복원되어야하는 물건이예요.-외국에서 전시 의뢰를 받지만 대부분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특별한 이유 때문은 아니고 옹기는 본질적 가치와 그 쓰임새로 더 주목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외국의 나라들은 대부분 우리의 발효문화와는 거리가 멀잖아요. 그러니 그 본질이 아니라 옹기가 도자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손내옹기가 유네스코 우수 수공예품으로도 인증 받았죠.달항아리와 전골 솥이 인증을 받았어요. 전골솥은 제가 조형을 만들어낸 것인데 나중에 한창기선생님 박물관 전시회 때보니 골동품 초기 토기에 조형이 똑같은 것이 있더라고요. 전율을 느낄 정도로 놀랐습니다. 제 몸속에 그런 유전자가 있었나봐요.(웃음)-근래 들어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옹기의 일상화는 어떻습니까.큰 변화는 아직 없지만 서서히 달라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털어놓자면 옹기를 사용해보신 분들의 주문이 이어지지만 제작시간의 한계로 항상 일이 밀려있습니다. 전통 옹기의 한계이기도 하죠.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제가 파는 일에 아쉬워 조급해했다면 전통방식의 미덕을 지켜내기 어려웠을 겁니다. 소비자가 아쉬워해주었으니 그래도 이만큼 지켜올 수 있었을 거예요.-손내옹기는 우수성을 인정받지만 가격 면에서는 경쟁력이 없죠. 그 원인이 전통가마 방식의 한계에 있겠지만 다른 해결 방법이 없을까요.가격이 낮게 나오는 옹기들은 최신식 터널 가마로 대량 생산하는 물건들입니다. 흙으로 빚어 굽고 완성품을 얻는데 3일이면 나오죠. 그러나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대로 구워내려면 순환구조상 두 달이 걸립니다. 가마에 불을 때려면 그 안의 공간을 구성할 요소들이 잘 채워져야 해요. 그래야 구조력을 가질 수 있거든요. 저도 내열 옹기는 현대식 가마를 씁니다. 내열용은 장작 가마로 해결되지 않거든요. 옛날 사람들은 옹기를 불에 직접 닿게 할 때 진흙을 붙여서 사용했어요. 현대생활에서는 그 자체가 불가능하니 아예 직화할 수 있는 내열성을 갖추어 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현대식 가마를 사용하는 겁니다.-디자이너와의 협업은 어떻습니까.이전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2009년부터 문화재단 예올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디자이너와의 협업으로 현대적 식기를 개발하는 일입니다. 그동안에도 시도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식 양식 겸용 식기를 만들어냈어요. 옹기는 흙에 철분이 많아 쇳소리가 납니다. 결도 나이프를 사용하기에는 적절치 않아 도기와 자기가 나뉘는 시점의 초기 청자를 콘셉트로 제작했는데 반응이 괜찮은 것 같습니다.-요즈음은 주거문화가 아파트 위주로 변해서 큰 항아리 종류는 쓰임이 적어졌겠죠.한동안 아예 쓰임이 없었는데 식생활에 대한 변화가 시작되면서 큰 독도 적지 않게 찾습니다. 사실 장독은 옹기의 기본이에요. 옛날 옹기장이들은 장독을 만들지 않으면 아예 옹기장이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옹기장이의 중심일은 장독이거든요. 가마나 기법이 모두 그 중심이고 나머지는 다 파생된 물건이죠.-옹기의 좋은 점을 아무리 강조해도 일상에 자리 잡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특히 편리함이 우선인 현대인들에게는 옹기는 여전히 낯선 영역인데요.그래도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편리함과 속도가 우선인 시대지만 그래서 잃었던 삶의 가치들이 다시 부상하고 있지 않습니까. 옹기는 그 가치를 제대로 담고 있는 물건입니다.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한다면 우리 몸의 근원을 다시 찾게 해주거든요.-옹기 일을 10년만 하시겠다는 계획이 20년이 되고 다시 10년을 향하고 있습니다. 또 새로운 목표가 생긴 것인가요.(웃음)개인적으로 꼭 이루어가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자작자족. 자기가 만들어서 자기가 쓰는 일을 확산시키자는 것인데요. 다시 말하자면 수공예의 대중화입니다. 저는 인생의 스승을 잘 만나 문화의식과 철학을 먼저 배우고 기능을 나중에 갖추었어요. 좀 더디게 일을 배우고 깨우쳤지만 오히려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소비사회를 살고 있지만 소비가 진정으로 삶의 질을 높여주진 않거든요. 옛 사람들의 자작자족 지혜를 우리 일상에 들여놓으면 제대로 된 삶의 질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수공예적 가치를 배웠으면 좋겠어요. 삶의 의미나 가치가 달라지거든요.그의 이야기는 때로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때로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그래서 남감할 때가 적지 않은데, 이상한 것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그가 가진 이상과 현실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자작자족도 그 중의 하나인데, 그는 창조성 창의성이 강조되는 이 시대에서야말로 생각하는 손을 갖는 일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수공예의 가치를 일상에 되돌려 놓는 일은 더디지만 의미있는 작업이다. 그의 새로운 목표가 주목되는 이유다.● 이현배씨는 농촌 삶 관심호텔조리사 접고 '옹기장이' 변신이현배씨는 장수군 장계가 고향이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어린 시절은 생각 없이 보냈고, 고등학교 때부터야 생각하며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이 너무 깊었던지 늘 가슴이 답답하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싫어 분노와 화로 많은 날들을 보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가출해 서울로 갔다. 우연히 인문학 잡지 뿌리 깊은 나무에서 발행인 한창기 선생의 칼럼을 읽고 모순의 의미를 깨닫게 됐다. 집으로 돌아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대학 입시에 낙방해 다시 서울로 가 재수를 했지만 계획대로 삶이 풀어지진 않았다. 농촌의 삶에 관심이 많아 농대에 관심을 가졌지만 먹거리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경희호텔경영전문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공부했다. 대학 1학년 때 휴학하고 고물상으로 1년을 살았다. 그때 다시 뿌리 깊은 나무와 브리태니커에서 나온 한국의 발견을 만나 문화에 눈을 떴다. 제주도로 가고 싶었으나 대학은 졸업해야 한다는 큰누나의 강권에 복학했다. 힐튼호텔 실습 시절, 예술적으로 음식을 만들 줄 아는 그의 감각을 눈여겨본 상사의 추천으로 큰 힘들이지 않고 힐튼에 취업했다. 그즈음 한국화를 전공한 아내를 만났다. 호텔에서 6년 근무하면서 신뢰를 쌓았지만 뭔가 새로운 일을 하고 싶었다. 고민과 갈등이 깊어져 떠난 여행길, 전남 벌교에서 징광옹기를 만났다. 그곳에서 인생의 멘토인 한창기 한상훈 선생과 옹기스승인 박나섭 선생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옹기일은 징광에서 3년, 문경에서 반년 배웠다. 징광에 터를 잡으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물에 의미를 두고 살아온 그는 물이 있는 곳에 정착하고 싶었다. 진안 백운면 솥내옹기터에 자리 잡은 것도 섬진강 발원지가 가깝기 때문이었다. 당시 대포가마가 그대로 남아 있던 옹기가마터의 불구멍을 틔운 젊은 옹기장이는 20여 년 동안 이곳을 지켜왔다.쉽게 가는 길보다 더디지만 옹기의 본질을 찾는 길을 지켜온 덕분에 손내옹기는 전통 방식과 현대적 조형, 본질적 쓰임새를 갖춘 물건으로 이름을 알렸다. 옹기 일을 하면서 마을이 해체된 현실에 마음을 두기 시작, 마을문화 복원과 지역 활성화를 고민했다. 백운면의 공공미술과 문화를 매개로 지역 활성화를 이어내는 시범사업을 진행했다. 옹기를 제대로 하려면 마을을 제대로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그는 마을을 재구성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14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주목받는 기획전에 초대되었고, 전통공예기술 보존및 개발을 위한 전통문화(옹기) 전문인력양성 영산강유역 대형전용옹관 고대기술복원 숭례문복구용 기와가마 자문및 조성 옹기식기개발 등의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쓴 책으로는 흙으로 빚는 자유가 있다. 농사꾼이 되지 못한 것을 늘 아쉬워하면서 농촌과 농업이 지닌 숨은 가치를 주목하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4.09.18 23:02

'대통령의 글쓰기' 펴낸 강원국 前 청와대 연설비서관 "삶의 진정성 묻어나는 글 써야 사람의 마음 움직여"

그는 청와대에서 대통령 연설을 담당하는 연설비서관이었다. 연설비서관이란 직업은 특별하다. 통념으로 짐작해보자면 웬만큼 능력을 갖추지 않은 사람이 넘나보기 어려운 영역이다. 그런데도 그는 8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을 같은 자리에서 보냈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정부에서 3년,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에서 5년이다. 청와대에서 나온 지 6년. 그가 책을 냈다. 대통령의 글쓰기라는 이름을 붙인 책이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에게 배우는 사람을 움직이는 글쓰기 비법이란 부제가 붙었다. 책 제목부터 부제까지 심상치 않은(?) 이 책은 짧은 시간에 화제가 되었다. 화제가 되었다는 말은 그만큼 책과 저자에게 관심이 집중되고 있음을 뜻한다. 책은 6만권 판매를 앞두고 있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기관과 단체들의 강연요청은 말 그대로 쇄도하고 있다. 사실 글쓰기에 관한 책은 넘쳐난다. 소통의 시대, 자기언어와 표현 방식에 대한 욕구가 높아지고 있는 덕분이다. 그러나 수많은 글쓰기 책 중에서 이 책만큼 짧은 시간, 대중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예는 드물다. 글쓰기와 대통령의 묘한 융합(?) 덕분이었을까. 저자를 만났다. 강원국씨(52, 메디치미디어 주간)는 이 책을 두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과 8년 동안의 배움에 대한 감사의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현직 시절, 그에게 특별한 주문을 했다. 대통령 연설문을 쓰면서 경험한 것을 공유해라. 책으로도 쓰고 강연도 했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남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일을 경험한 자네는 특혜와 특권을 누린 결과가 된다. 두 대통령과 함께해서 행복했던 8년을 글쓰기로 추억해낸 그는 책을 내고 난 뒤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일상을 맞고 있다. 예고 없이 찾아온 변화지만 그는 기꺼이 이 시간들을 즐긴다. 사람을 움직이는 글쓰기의 비법이 따로 있을까.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글의 감동은 기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진정성에서 나오지요. 그래야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말과 글이 따로 가지 않는 그와의 인터뷰는 편안하고 즐거웠다. -강의가 많은 모양입니다. 강의를 통해 글쓰기 비법을 다 털어놓으시면 책은 잘 안 읽히겠는데요.(웃음) 글쓰기에 대한 관심이 정말 높은 것 같습니다. SNS영향이 아닌가 싶은데, 제가 회사다닐때만 해도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사람을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아니었거든요. 오히려 말없이 성과 내는 사람, 결과로 보여주는 사람이 인재로 인정받았죠. 그런데 지금은 설득하는 과정이 모든 일의 중심이 되다보니 말 잘하고 글도 잘 쓰는 사람이 능력을 인정받는 것 같습니다.-강연을 하다보면 그런 분위기를 실감하십니까. 제 이야기를 들으러 오시는 분들 중 직장인이 많습니다. 사실 요즈음은 직장생활의 대부분이 글 쓰는 일, 이를테면 보고서니 기획안이니 문건을 작성하는 일이죠. 자연히 글쓰기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요즈음은 연령이나 계층에 관계없이 글쓰기에 관심이 많더군요. 제 강연에도 일흔이 넘는 분들이나 주부들이 많아서 놀랐습니다. 기본적으로 자기표현 욕구가 그만큼 강해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그런 분들에게 어떤 비법을 들려주시나요. 사실 글쓰기는 글쓰기 강연을 듣는다고 해서 느는 것은 아닙니다. 글쓰기는 그냥 글을 자주 쓰면 늡니다. 진짜 글을 잘 쓰고 싶으면 시간을 내어 글을 많이 써보는 것이 정답일거예요. 비법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제 경험을 바탕으로 전합니다. -책을 읽어보니 강 주간께서도 글을 잘 쓰지 못했다고 하셨던데, 어떻게 글 쓰는 직업을 갖게 되었습니까. 대학에서는 외교학을 전공하셨던데요. 젊은 시절 꿈은 기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대학 4학년 때 결혼 하면서 직장을 잡아야 하는 바람에 기자직을 놓쳤죠. 첫 직장이 대우그룹 홍보실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글쓰기는 남일 이었어요. 그런데 마침 제가 입사한 해가 회사 창립 20주년이었어요. 제가 사사 제작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원고를 맡은 외부 필자에게 문제가 생겨 제가 원고까지 맡게 된 겁니다. 그때만 해도 기자직은 연령제한이 있어서 한번정도 기회가 남아 있었는데, 사사 만드느라고 그마저도 놓쳐버렸죠.-아예 글쓰기의 기본이 없었다면 그런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습니까. 고군분투하면서 사사를 제작했어요. 그러고 나니 제가 대우그룹 안에서는 글 쓰는 전문가가 되어 있더라고요. 김우중 회장이 전경련 회장을 맡게 되셨을 때 자연스럽게 스피치 라이터(speech-writer)가 되었죠. 그때부터 연설문 쓰는 일이 시작된 겁니다.-청와대와의 인연도 그렇게 이어진 것이겠군요. 그렇죠. 김대중 대통령 때 경제 분야 글을 쓰는 행정관이 필요했었나봐요. 마침 연설비서관실에서 전경련 회장 원고를 누가 썼는지 알아보다가 저를 찾게 된 것이죠. 그래서 예상치도 않았던 청와대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국민의 정부에서 3년을 행정관으로 근무하고 다시 참여정부의 연설비서관으로 일하게 되셨는데, 아주 이례적인 경우 아닌가요. 8년이니까, 아마 저 같은 경우는 없을 겁니다. 국민의 정부가 끝나고 참여정부에서도 일하게 될 줄은 상상하지 않았거든요. 노무현 대통령 인수위 시절에 2개월 동안 파견 나가 연설문 쓰는 일을 맡았었는데, 그동안 쓴 연설문을 노대통령께서 단 한 번도 읽지 않으셨어요. 참담했죠. 그랬으니 더욱이나 다시 인연이 될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습니다.-그런데도 참여정부 5년을 연설비서관으로만 지내셨잖습니까. 어차피 정권이 바뀌면 청와대 조직도 바뀌게 되죠. 같은 정권이 연장되었다고 해도 들어올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겠어요.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원칙이 있었습니다. 논공행상식이 아니라 적임자를 앉게 하는거죠. 공이 있다고 해서 자리로 보상해주면 시스템이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대통령께서 글을 쓰는 사람은 그대로 일을 맡게 하라고 해서 제가 연설비서관실에 남아있게 되었어요.-인수위때 썼던 글을 한 번도 읽지 않으셨지만, 인정은 받으신 셈이군요.(웃음)글이 마음에도 안 들고 내 연설문도 아니다고 생각하신 것이죠. 그런데 취임식 날 오찬과 만찬 때 혹시 준비된 원고가 있느냐고 찾으신 거예요. 취임식 연설에 집중하느라 오찬과 만찬 연설을 미처 못챙기셨던 것이죠. 마침 제가 마련해놓은 연설문이 있어서 드렸죠. 그런데 청와대 비서실 첫 순시 때 저를 찾으시더니 자네 덕분에 낭패를 면했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때는 제가 비서관도 아니고 행정관이었는데. 정말 솔직한 분이었습니다. 감사나 사과를 할 때는 격을 따지거나 말을 가려서 하지 않으셨어요. 마음을 그대로 전달하셨죠. 미안하고 사과할일이 있으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대로를 전하셨습니다. 사실 그날도 대통령이 낭패를 볼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준비를 하는 것이 정상이죠. 그날 그 말씀 듣고 두 달 동안의 피로가 싹 가셨어요. 그때 이분을 모실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었죠.-두 대통령으로부터 말과 글을 배웠다고 하셨더군요. 물론입니다. 사실 제가 그 두 분의 글을 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죠. 8년 동안 두 대통령의 연설문 초안을 쓰고, 수정 첨삭까지 철저하게 배웠습니다. 그 소중한 배움을 월급까지 받으면서 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행운이에요.-그렇다고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겠죠. 개인적인 삶이 거의 없었다고 봐야죠. 계속 사무실에서 글을 쓰는 일상이었으니까요. 제가 오랫동안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이유 하나뿐인데, 그런 일상을 성실함으로 버텼거든요. 사실 그런 일상을 알고 나면 연설비서관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겁니다. 다른 일들은 대통령께 보고하면 그것으로 업무가 끝납니다. 대통령이 판단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연설문은 대통령이 직접 말로 해야 하는 것이거든요. 시원찮게 끝나면 그 시원찮은 것을 갖고 연설을 해야 하는 결과가 되죠. 그러니 대충 오케이 할 수 없는 겁니다. 지적받고 혼나면서 결론을 뽑아야 하는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되지요.-8년 동안 그러한 일상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았겠습니다. 참여정부 5년 동안은 내내 혼나는 일이 일상이었어요. 사실 연설비서관은 특별한 실력이 필요 없습니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철저하게 대통령의 생각과 말에 글을 맞추어야 하지요. 대단한 식견과 글 솜씨 재주가 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 두 가지 능력을 다 갖춘 연설비서관은 좋은 연설문을 쓰지 못합니다. 대통령의 글이 아니라 자기 글을 쓰게 되거든요.(웃음)-그것은 좋은 리더를 만났을 때 나 해당되는 것 아닐까요. 그렀겠네요. 그렇지 않으면 리더의 생각과 글을 대신해주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저는 좋은 리더들을 만난 덕분에 두 대통령의 분명한 생각을 옮기기만 하면 되었어요. 문체까지도. 그러니 이런 경우는 글 솜씨조차 필요 없는 겁니다. 성실하고 몸 건강하고 말귀만 알아들으면 되었죠. 제가 오랫동안 일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합니다.(웃음)-두 분의 글쓰기가 많이 달랐었다면서요. 두 분 모두 대통령의 연설(말)을 위해 정말 많은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스타일은 물론 달랐어요. 김대중 대통령은 연설문 원고를 일일이 수정하고 다듬고, 고쳐서도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녹음을 해서 돌려주셨죠. 노무현대통령은 글을 쓴 사람을 불러 직접 지적하는 방식이었어요. 그분의 원칙은 내 글을 쓸 사람과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이었어요. 그야말로 실무자와 격의 없이 만나셨죠. 제가 처음에는 연설비서관도 아니고 행정관이었는데, 직접 내 글을 쓰는 사람과 이야기하겠다며 저를 부르셨어요. 행정관들이 초안을 작성하거든요.-연설문에 대한 주문 같은 것이었습니까.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였는데, 자네가 내 연설문을 써야하니 어떻게 써야하는지 알려주겠다고 하셨어요. 두 시간 정도로 기억하는데 글은 모름지기 이렇게 써야 한다며 이야기를 하셨어요. 책에 소개된 서른 두 가지 내용입니다. 일종의 지침이었는데, 글쓰기의 기본이자 주옥같은 비법이었죠. 제 경우는 그 내용을 5년 동안 계속 학습해 온 셈입니다. 제가 그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으니까요. -참여정부에서는 연설비서관으로 연설문을 책임 짓는 역할이었으니 부담이 더 컸겠습니다. 두 분 모두 정말 좋은 글을 쓰는 분들이시잖아요. 그러니 연설비서실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부담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만큼 컸습니다. 특히 노 대통령께서는 직접 글을 쓴 사람을 만나 대화하면서 지적하고 수정하고, 또 좋은 생각이 나면 다시 더하고, 이런 과정을 연설 직전까지 하셨거든요. 스트레스가 심했지만, 모두 배움의 과정이었죠.-기억나는 일화도 적지 않겠는데요. 노대통령은 글쓰기를 즐기고 조금이라도 더 수준 높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어떤 경우는 다음날 연설 하는데 그 전날 밤에 다시 구술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한번은 국회 연설이었는데, 전날 밤에 1시간 30분 정도를 구술하셨어요. 이것을 연설문으로 정리하려면 5시간은 족히 걸리죠. 마음 졸이며 작업하고 있는데, 새벽 3시쯤 어디까지 썼냐고 전화를 하셨어요. 3분의 2정도 된다고 말씀드렸더니 이제 그만 자고 나머지는 나한테 보내라고 하시더군요. 고생했다면서. 대통령도 못 주무시고 기다린 거죠. 두 시간 후에 다시 전화를 하셔서 메일로 보냈다고 하시더군요. 그 짧은 시간에 마무리 인사까지 다 쓰셨더라고요. 글의 수준도 정말 놀라웠죠.-두 분에 대한 그리움이 크실 것 같습니다. 책을 쓰면서는 어땠습니까. 사실 책을 써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미리 써놓은 메모나 자료가 없었습니다. 작년 11월에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12월까지 두 달 동안 8년 동안의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이어지는 거예요. 모두 담아내기 버거울 정도였어요. 두 대통령 모시던 시절로 돌아간 듯 한 느낌이었죠. 정말 행복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쓰기 비법이란 부제를 달았더군요. 어떤 글이 사람을 움직이게 할까요. 좋은 글쓰기는 철저하게 말하듯이 쓰는 것입니다. 글쓰기를 어렵다고들 하는데 잘 쓰려고 하니까 그런 겁니다. 잘 쓰려고 한다는 것은 자기의 생각과 말을 어떻게 하면 잘 꾸밀까하는 고민이 전제되어 있어요. 그러나 자기 생각을 글로 옮기는 글쓰기는 어떻게 쓰느냐보다는 무엇을 쓸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글짓기와는 다르죠. 문학은 창작을 하고, 글짓기를 합니다. 그러나 생활글을 쓰려고 하는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를 말하듯이 쓰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글쓰기도 쉽고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습니다.그가 말하는 좋은 글쓰기의 비법은 상대방과 교감할 수 있는 글쓰기에 있다. 그는 두 대통령의 연설문을 쓰면서 그 비법을 전수받았다.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쉬운 말로, 가장 많은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비법의 중심에는 배려와 공감이 있다. 말과 글이 넘쳐나는 시대, 그의 글이 주목받는 이유도 거기 있다.● 전주출신 강원국씨는 '책 내는 일' 인생 목표편집인으로 '제 2의 삶'강원국씨는 전주가 고향이다. 교육공무원이었던 부모님 덕분에 유복하게 자란 그는 특별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교육청 장학사였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외할머니와 지내야했던 그는 전주교대부속과 중앙초등학교를 거쳐 풍남초등학교를 졸업했다. 6년 동안 세군데 학교를 전전하면서 그는 일종의 우울증을 앓았던 것 같다고 기억한다. 동중학교 다닐 때는 제법 공부를 잘했지만,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화나게 하는 일을 만들어 개인적으로는 생애에 가장 많이 맞는 충격적인 일을 경험했다. 그래서였는지 별일 없이 합격하리라고 생각했던 전주고 입시에 실패하고, 신흥고도 턱걸이로 합격했다. 아버지는 처칠도 육사를 세 번이나 떨어졌다는 말로 위로해주었다. 그래도 인생의 쓴맛을 제대로 경험했던 시절은 전주고 앞을 지나 신흥고에 다녔던 3년 동안이다.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던 1980년 5월, 그는 3학년 반장이었다. 전주에서는 신흥고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 선두에 그가 있었다. 정치의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몸이 앞서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유인물과 피켓을 준비하고 행동을 선도하는 그는 주동인물이었다. 학생들을 독려해 거리 진출을 시도했던 그는 결국 실행에는 이르지 못한 채 정학처분을 받았다. 학교에 복귀했지만 그 해 입시정책이 바뀌어 3학년을 한해 다시 다녔다. 1년을 재수하고 할머니의 뜻대로 서울대 외교학과에 들어갔지만 군대 먼저 다녀온 후, 학과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 대학 4학년 때 결혼하면서 취업이 급했던 그는 애초 기자가 되려고 했던 계획 대신 대우그룹의 홍보실에 취직했다. 1년쯤 다니다 언론사 시험을 보려고 했지만 계획이 어그러지면서 인생은 결코 생각대로만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글쓰기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그는 사사 제작을 하면서 사내에서 글 쓰는 사람으로 알려지기 시작해 전경련 회장의 연설문을 쓰는 스피치라이터가 됐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청와대 연설비서실 행정관으로 들어가 참여정부 연설비서관까지 8년 동안 일했다. 청와대를 나와서는 효성 상무와 벤처기업, KG그룹 상무를 거쳐 출판사 메디치미디어의 주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생 후반은 편집인으로 살고 싶었던 그는 꿈을 이루었으나 다른 책을 기획하면서 내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첫 결실이 대통령의 글쓰기다. 책은 기대 이상으로 화제를 모았다. 책을 내고 난 뒤 인생이 바뀌었다고 할 정도로 그의 일상은 변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목표의식이 더 뚜렷해졌다는 그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많은 사람들에게 책 내는 일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보길 권하고 있다. 책을 내고 그는 얻은 것이 많다. 지금까지의 삶속에서 남을 위해 뭔가를 했던 기억이 없다는 것도 큰 깨우침이다. 20년 가깝게 기업에서 일해 온 경험을 살린 두 번째 책을 쓰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4.09.04 23:02

진안 동향면에 귀농한 이재철·박후임씨 부부 "마을 살리기는 농촌 희망…'마을'다운 방식으로 복구하고 파"

마을의 위기는 오래전에 찾아왔다. 사람들은 떠나고 두레와 품앗이 전통으로 지켜져 오던 공동체 문화가 무너지면서 마을의 존재는 잊혀지기 시작했다. 마을을 해체한 것은 산업문명과 자본이다. 그러나 도시와 농촌 그 어디에서나 마을은 여전히 존재한다. 존재는 하되 마을이 지녔던 의미와 가치를 잃어버린 현실은 더 공허하다. 마을을 살리자는 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2000년대에 들어서다. 도시의 삶을 접고 귀농 귀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마을 살리기는 농촌의 희망이 됐다. 그리고 10여년. 그렇다면 마을살리기 운동의 궤적을 딛고 선 오늘의 농촌마을은 다시 살아났는가. 진안군 동향면 학선리 봉곡마을의 이재철(44) 박후임씨 부부를 만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귀농 9년차. 목사인 아내 박후임씨와 신학도였던 남편 이재철씨는 봉곡마을에서 마을박물관을 만들어 운영하고, 봉곡교회의 행복한 노인학교를 운영하며 단절되었던 농촌 문화를 가장 마을 다운 방식으로 복구해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도시에서 종교를 통해 나눔과 소통의 가치를 실천했던 부부는 땅과 자연의 소중함, 생명의 의미에 새롭게 눈을 뜨면서 오랫동안 안아 왔던 교회 밖 보이지 않는 목회활동의 고민에 대한 답을 얻었다. 귀농이었다. 늦은 나이에 부부의 연을 맺고 귀농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한 부부는 그러나 낯선 땅 진안에 터를 잡은 지 3년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마을사람이 될 수 있었다. 도시와 농촌 문화의 벽은 그만큼 높고 견고했다. 그 벽을 없애는데 3년 걸렸습니다. 어른들이 말씀하시기를 농사일도 3년은 겪어봐야 몸에 들어온다고 하시더군요. 도시에서의 삶에 익숙해진 마음과 몸을 농촌의 삶으로 돌려놓는 일이 쉬웠을 리 없지요. 내존재가 부정당하는 것 같은 억울함을 털어내는 일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내안에서 그런 갈등과 다투고 풀어내다 보니 모든 탓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깨달음이 있고서야 마을과 사람들을 얻게 되었죠.인터뷰는 여름 한낮, 봉곡마을의 마을박물관 안에 있는 행복한 노인학교 교실에서 있었다. 박물관이라고해야 폐교된 초등학교 분교 널찍한 교실과 복도가 전부지만 소박하게 전시실로 꾸며진 교실 안, 학선리 주민들의 생애사를 온전히 보여주는 온갖 일상용품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웠다. 전시품 중 새울마을 할머니가 내놓은 다리미의 설명글이 있었다. 나 수무살 먹어 시집올때 어머니가 해주셨다. 다리미다. 숯불 담아서 옷다려 이부라고 할머니가 삐뚤빼뚤 직접 쓴 글을 읽다보니 가슴 따뜻해졌다.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농촌에 들어오는 일이 어렵진 않지만 정착하기까지에는 어려움이 적지 않다고들 합니다. 처음에는 누구에게나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마을과 떨어져 산다면 도시에서의 삶을 옮겨 살 수 있겠지만, 마을 안에 들어와서 산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마을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 과정에서 갈등은 당연한 것입니다. 삶의 여정이 다르고 살아온 방식이 다르니까요.-그런 어려움은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생각하는 것, 일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다르니 불편이 따르더군요. 고민과 갈등이 있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인데. 문화의 차이였어요. 낯설고 불편하고 어색했죠. 그런데 결국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 같아요. 어느새 우리도 낯선 문화에 적응이 되어있더군요. -처음 귀농 하실 때 돈은 있었습니까.(웃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있으면 좋겟지만 저희는 돈이 없었어요. 1000만원이 전 재산이었죠. 그중 500만원으로 중고 트럭을 사고 나니 500만원이 남더군요. 그래도 큰 불편은 없었어요.-귀농을 결심하려는 사람들에게 반가운 이야기겠는데요. 저희는 좀 특별한 경우일겁니다. 그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는데,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어떤 사람은 500만원으로도 성공 하지만, 어떤 사람은 몇 억을 가지고 있어도 안 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가치관을 갖고 그 의지를 지켜 가느냐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처음에 가진 땅도 없었는데 농사는 어떻게 지을 수 있었습니까. 2005년 9월에 빈집을 얻어 들어와 도배만 하고 살았어요. 가을에는 할 일이 없어 마을 어르신들 일을 도와드리면서 얼굴 익히는 시간을 가졌고, 겨울에는 골목길의 눈을 열심히 치우면서 지냈습니다. 마을 어른들과 친해질 수 있었던 덕분인지 논과 밭을 빌려주시더군요. 그래서 이듬해부터 천 평 정도의 천수답과 밭을 얻어 농사일을 시작했어요. 나름대로 친환경 농법을 시도했는데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요. 고구마는 멧돼지가 먹고 고추는 탄저병이 와서 안 되고, 논은 거름이나 논자재 준비가 안 되어 있다 보니 실패하고. -농사일만으로 생활은 해결되셨나요. 아니죠. 그래서 위기감을 갖게 되었어요. 그해 가을을 보내면서 두 사람 생활이라도 자급자족 시스템을 갖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민 했어요. 가계부를 정리해보니 매달 현금으로 50만원만 수입이 되면 최소한의 생활은 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있었습니다.-큰돈은 아니지만 어떻든 수입을 올릴 통로가 필요했겠군요. 그래서 더불어 식구란 이름으로 회원을 모집했어요. 회원들이 매달 2-3만원씩 보내주면 50만원은 되겠다. 대신 농작물을 보내드리는 것이죠. 돈에 대한 등가의 개념이 아니라 많이 나오면 많이 보내고 적게 나오면 적게 보내는. 대부분 지인들이어서 기본적으로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가치를 공유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지금은 회원이 20명 정도인데 잘 해결되고 있습니다.-회원을 더 늘리면 소득도 늘어날 텐데요.그렇긴 하지만 더 늘릴 수는 없습니다. 너무 부담이 되니까요. 최소한의 수입만으로도 저희 가 뜻하는 일을 할 수 있으니 족하죠. 작년에 집을 지어서 빚은 좀 졌지만 이 수준에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습니다. -집을 갖게 되었으니 재산이 늘어난 셈이군요. (웃음)땅 사는 일은 안하려고 했어요. 땅을 갖게 되면 묶이게 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2007년 즈음 교회 분들과 마을 어르신들이 땅을 사라는 권유를 강하게 하셨어요. 땅을 사놓아야 우리 동네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신 것 같았어요. 그런 마음을 알고는 외면하지 못하겠더라고요.-마을 일을 들여다보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사실 저희가 농촌에 온 이유는 마을 일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마을 안에 있는 빈집에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마을 어르신들과 농사일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농촌의 문제, 농촌의 현실, 마을이라고 하는 공간이 우리 가슴속에 들어오게 된 것이죠. 그렇다보니 마을일을 하게 되었는데 어르신들이 잘 하지 못하는 일들, 가령 행정 업무나 서류 작성이나 마을을 대표해 회의에 참석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마을 살리기도 그렇게 시작되었겠군요.그렇죠. 처음에 했던 일이 농촌개발사업인데, 공공부문 일을 맡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런 일을 하면서 사고의 전환이랄까 어떤 물음이 생기더군요. 10년, 20년 후에 이 마을에는 누가 남아 있을까, 그때도 이 마을은 존재 할 수 있을까 하는.-마을 문제는 역시 경제적인 것에 원인이 있지 않겠습니까. 저도 처음에는 오롯이 소득의 문제로만 보았어요. 도시에 비해 농촌에는 자본의 투입이 미미한데서 모든 문제가 이어진다는. 그래서 나름대로 소득사업을 추진하고, 여러 가지 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는데 꼭 그것만이 원인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득사업을 하다보면 많은 갈등이 불거지더라고요. 이해관계가 첨예한 곳에는 갈등이 많잖아요.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건물 먼저 짓고 보조금만 일단 받고 보자는 그런 인식도 있고. 어느 사이에 마을의 어른들을 가르치고(?) 마을의 질서를 바꾸려는 마음이 강해졌어요. 기존의 질서에서 불합리한 예를 보면 무조건 뜯어고치려고 하는 마음이죠. 그 시기는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일을 많이 하시는 만큼 어려움도 커졌겠습니다. 다행히 깨달음이 있었어요. 어느 순간, 내가 없었어도 이 마을은 10년 전, 50년 전에도 존재했었다는. 나름대로의 삶의 모습과 방식으로 살아오면서 마을을 떠나지 않고 지켜온 어르신들의 삶을 제대로 보게 된 것 이예요. 참 오만했구나하는 자책이 들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무엇을 열심히 바꾸려고 하지 않았어요. 원인을 들여다보면 문화의 차이였거든요. 대개 귀농한 분들이 갈등을 겪는 이유는 농촌을 도시의 관점으로 보려니 그런 겁니다. -결국은 시간이고 기다림이지 않을까 싶군요. 농촌에서는 시간의 간격을 길게 보는 것이 맞습니다. 살다보니 마을 어르신들의 삶이 훌륭하더군요. 남들이 다 떠날 때 땅을 지키면서 생명의 먹거리를 생산을 하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마을을 지키고 있는 분들의 삶은 존경스럽습니다. 종교적으로 이야기 하면 도시에 있는 교인들보다 훨씬 더 천국에 가까이 있는 삶을 산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행복한 노인학교나 마을박물관을 열게 된 동력이 궁금합니다. 마을 어르신들의 삶에 존경심을 갖게 된 것이 동력이랄 수 있습니다. 어르신들은 알게 모르게 나는 배우지 못해서 남아 있다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분들의 삶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었죠. 한국사회에서 농촌은 영향력이 없지 않습니까. 정치적으로도 그렇고 시장경제로도 농촌은 효율성이 낮은 대상이죠. 그러나 한국사회가 어떻든 간에 마을 어르신들 스스로의 삶에 사랑을 부여해줄 수 있는 방식이 절실했습니다. -노인학교는 박목사님이 주도하셨죠.봉곡마을에 자리 잡고 3년쯤 되면서 남편은 마을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저는 다른 일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농사일이 좋고 그것만이 내일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저도 서서히 마을이 제 안으로 들어오면서 남편이 할 수 있는 마을의 일과 내가 할 수 있는 마을의 일이 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죠. 저는 어르신들과의 관계가 중요했어요. 행복한 노인학교를 하면서 어르신들을 더 깊이 만나게 되었죠. 특히 할머니 이야기반을 만들고 한글반을 운영하면서 어르신들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달았어요. -마을 박물관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마을 박물관을 제안 한 것은 이곳에 살고 계신 분들이 스스로 삶의 자존감을 갖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매개체가 뭘까 고민하다가 박물관을 생각했죠. 처음에는 사진을 모아보자고 시작했는데, 마침 귀농귀촌인 지역사회 기여사업에 공모를 해서 150만원을 첫해에 지원받았어요. 처음부터 큰 사업으로 계획한 것이 아니었는데 시간이 예상보다 오래 걸렸습니다. 학선리 마을의 100여 가구를 대상으로 했는데 사진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듣다보면 한나절이 걸리기도 했으니까요. 사진을 수집하다보니 어느 집에선가 방치된 생활용품이 눈에 띄었어요. 장롱에서 사성이 나오기도 하고, 헛간에서 베틀이 나오기도 하고. 이런 것들이 모아져서 박물관이 채워졌지요.-마을박물관 일을 해오시면서 얻은 가치가 적지 않겠습니다. 주제가 오래된 기억 미래를 열다 이던데요. 배운 것이 많지요. 처음부터 거창하게 계획을 세우지 않고 소박하게 시작한 것이 주효했던 것 같아요. 이곳 마을 박물관을 통해 어르신들과 그 후손들이 삶을 뒤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이 소중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만날 수 있는 매개체, 도시와 농촌이 만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살리고 싶었죠. 여기서 도시는 출향인들을 뜻합니다.-박물관 운영이 장기적으로 볼 때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사실 걱정이 많습니다. 우선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아서 걱정이고요. 그냥 볼거리로 남아 있는 박물관이라면 의미가 없습니다. 내용을 채워넣어야죠. 노인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상호작용을 하면서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큰 걱정은 앞으로 어떻게 운영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우선은 이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을 계획하고 있습니다.인터뷰를 끝내고 부부가 지은 흙집을 들렀다. 볏짚과 황토를 이용한 스트로베일하우스라고 했다. 에너지 자립을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생태건축물인데, 그 건축가가 같은 마을에 살고 있다고 귀뜸해주었다. 귀농귀촌인진안군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는 아내와 영농회장을 맡고 있는 남편은 이제 귀농이란 틀이 자연스럽지 않을 만큼 온전히 봉곡마을의 주인이 됐다. 마을의 미래를 위한 일에 그들은 온전히 자신들의 삶을 내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재철박후임씨 부부는 서울 구로공단 목회활동 나눔과 사랑 실천이재철 박후임씨는 진안에서 새로운 삶을 꾸린 귀농 9년차 부부다. 충북 제천이 고향인 남편 이 씨와 경기도 파주가 고향인 아내 박씨는 2005년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진안에 터를 잡았다. 부부는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만났다. 목사였던 아내와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신학을 공부하고 있던 남편은 추구하는 종교적 가치와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신뢰를 갖게 됐다. 삶의 지향이 같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96년 목사가 된 박 씨는 서울 구로공단의 새터교회에서 17년 동안 목회활동을 했다. 구로공단 주변의 가난한 여성과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활동이었다.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교회의 모습을 추구했던 그는 어린이집이나 공부방 등을 통해 나눔과 사랑을 실천했다. 목회 10년째, 의식의 변화가 밀려들었다. 아이들을 위한 주말농장을 운영하면서 자연과 함께 할 때 아이들이 훨씬 건강하게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자연으로부터 위로받고 상처를 치유하는 아이들의 변화는 놀라웠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면서 교회나 잘 짜인 조직이 아닌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주목하게 됐다. 안식년을 맞은 해에 처음 교회 밖을 나와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의 문화를 만나면서 지금껏 경험했던 신앙의 폭을 넓혔다. 그는 신학공부를 하며 이웃 간의 대화, 종교 간의 대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남편을 만나 2004년 부부가 되었다. 보이지 않는 목회를 통해 본질적인 삶의 문제와 가치를 만나고 싶었던 이들은 도시를 떠나 농촌에서의 삶을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귀농은 이들 부부의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자신들의 새로운 삶을 뉘일 땅을 찾기 위해 강원도부터 해남 땅끝 마을까지 각 지역을 돌아다녔던 부부는 지인의 소개로 진안에 빈집을 얻어 정착했다. 귀농의 삶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도시와 농촌 문화의 경계는 높았다. 그 경계를 허물고 온전히(?) 마을사람이 되기까지는 꼭 3년이 걸렸다. 빌린 땅에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어 자급자족의 길도 마련했다. 지인들을 중심으로 더불어 식구 회원을 만들고 쌀과 작물을 나누면서 기본적인 생활비를 해결했다. 3년이 지나면서 마을이 보이기 시작하고 농촌의 현실이 부부의 삶 안에 들어왔다. 남편은 농촌개발사업을 비롯해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맡고 나서고 아내는 마을의 어르신들을 위해 행복한 노인학교를 제안해 운영하기 시작했다. 2009년에는 마을의 역사를 담는 박물관도 열었다. 지난해 이들 부부는 집을 새로 지었다. 이제 부부는 더 이상 언젠가는 떠날 외지인이 아니다.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는 마하트마 간디의 사상을 실현하고 싶다는 부부의 미래는 몇 십 년 후에도 건재 하는 농촌 마을의 존재에 놓여있다. 이들의 농촌살리기 운동을 주목하는 이유다.

  • 기획
  • 김은정
  • 2014.08.14 23:02

〈백석평전〉 펴낸 안도현 시인 "현재진행형 '백석의 삶'…영원한 탐구 대상이죠"

1980년대 초반부터 일었던 한국사회의 문화운동은 기존의 어떤 형태의 운동보다도 더 대중적이고 힘 있게 사람들을 끌어들여 시대와 현실을 공유하게 했다. 그 문화운동의 중심에는 문학이 있었다. 60년대 김수영이나 신동엽으로 대표되는 참여문학운동, 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을 돌아보면 우리사회 문화운동의 선도적 역할은 문학에 의해 이루어졌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80년대에 뜨겁게 전개됐던 전북지역의 문화운동 역시 젊은 문학인들이 주도했다. 역사와 시대를 직시하는 문학인들은 남민시 동인이나 땅전과 같은 무크지 운동을 이끌어냈다. 20대였던 시인 안도현도 그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30년. 80년대와 90년대, 2000년대를 관통해오는 동안 세상과 늘 치열하게 맞서있었던 시인의 삶은 온전히 글로 담겨 수많은 독자들을 문학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면서 진보지식인으로 주목받아온 그는 지난해 7월 이후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이 됐다. 그렇다면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시는 단정한 모습을 보여야 하고, 세상이 차가울수록 시는 따뜻한 편에 서야 한다는 그의 시정신을 만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어려워진 것일까. 지난 봄,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어(항소심에서 무죄 판결) 정치참여의 후유증을 단단히 겪고 있는 안도현 시인(53)이 최근 백석평전(다산북스)을 펴냈다. 시가 아닌 평전으로 시인을 만나는 일은 새롭다. 더구나 스무 살에 백석의 시를 처음 만났다는 시인이 10년 넘게 준비해온 이 평전은 시인적 직관과 통찰력으로 백석의 생애를 완벽히 구성해내는데 성공했다는 찬사와 함께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시인은 이 책 서문에서 백석을 베낀 시간들을 고백한다. 그렇고 보니 안도현의 시에서 백석이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안도현 시인(53)을 만났다. 시대의 경계를 가르고 백석과 안도현이 만나는 지점을 만나고 싶었다. 인터뷰는 우석대 그의 연구실과 완주군 구이면 작업실을 오가며 이루어졌다. -백석과의 인연이 꽤 깊더군요. 스무살 때 백석의 시를 처음 만나셨다니 30여년 세월인데 그때는 백석의 존재가 완전히 가려져 있던 시절 아니었습니까. 그렇죠. 저도 박항식 교수님이 펴낸 수사학에서 백석의 시를 처음 읽었어요. 모닥불이란 시였는데, 그동안 읽었던 시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때 알게 되었어요. 〈사슴〉이란 시집이 있고 〈문장〉에 가끔 작품 발표를 했다는 것이 전부였어요.-월북시인에 대해 관심이 높았었던 때였나요. 오히려 관심을 갖는 일조차 금기시 되던 때였죠. 월북작가들에 대한 관심은 87년 6월 항쟁 이후에 그들의 작품이 책으로 나오면서 이루어졌다고 봐야겠죠. 우리 사회 민주화 분위기와 함께 월북 납북 작가들에 대한 재조명이 그때 이루어졌지 않습니까. 더구나 백석은 평남 정주에서 태어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활동한 재북작가여서 발표된 시도 제대로 발굴되지 않았었죠.-백석 시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궁금해집니다. 제가 스무 살 때까지 읽었던 시와는 전혀 다른 시였다는 겁니다. 시 한편이 주는 인상이 아주 강했어요. 향토적인 듯하면서도 모던하고, 시인이 자기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도 독특했어요. 아주 잘 찍은 사진 한 장을 보는 듯 한 감동이었습니다. 백석만의 그러한 독특한 시적 성취는 우리 근대시사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30년 동안 짝사랑해왔다는 고백이 있던데요. 스무 살 이후 시인의 시를 본격적으로 만날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습니까. 별로 없었죠. 30-40년대 잡지 속에서 한 두 편씩 만날 수 있었던 것이 전부였으니까요. 그런데 작고하신 이광웅 시인이 백석시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선생님이 감옥에서 나온 직후니까 87년쯤 되었을 것 같은데, 노트 한권을 보여주시더군요. 백석의 시를 직접 필사한 것이었어요. 정갈하게 쓰인 그 노트에 새로운 백석의 시가 있었습니다. 그 시를 읽으면서 가슴 떨렸던 기억이 있어요. -백석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많은 시가 실려 있지만 그의 삶과 시에 대한 연구 작업은 여전히 미진한 것 같습니다. 우선은 발굴된 그의 시가 많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시집은 사슴 한권뿐인데, 그 마저도 국내에 대여섯 권 있을 정도로 귀하죠. -그래서 이번 평전이 더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 또한 앞서 나온 일대기와 시선집이 없었다면 연구의 진전이 어려웠을 겁니다. 그렇긴 하지만 기왕에 나와 있는 백석 일대기는 여러 한계로 오류가 있거나 백석을 지나치게 과장한 경향이 있었습니다. 애초 평전의 취지를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백석의 생애와 관련된 사실의 객관적 자료를 근거로 재구성하자는데 두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평전을 펴낸 특별한 이유가 또 있습니까. 정서적으로는 30여 년 동안 내가 깃들일 둥지로 나의 시를 견인해준 백석에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평전이라는 형식으로 백석의 생애를 복원해 본다면 그를 직접 만나는 방식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백석의 후기 시가 연구자들에 의해 발굴되면서 30년대에 모던보이로 불리던 시인이 만주로 건너간 후에, 또 해방 후 북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다른 시를 쓰게 되었는지도 궁금했지요. 그래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기왕에 나온 다른 책들과 다른 성과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백석이 어떤 계기로 시를 쓰게 되었는지, 그가 일본에서 유학하며 습작할 때 누구의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 그동안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었어요. 이 책에서는 1920년대 일본의 모더니즘 시론을 폭넓게 수용했다는 점을 밝혔지요. 시와 산문에 드러나 있는 내용과 그의 행적을 비교해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습니다.-독자들에게는 백석의 젊은 시절 연인이었던 자야 김영한 여사와의 연애담이 아무래도 흥미로울 텐데요. 사실 자야여사가 에세이 〈내 사랑 백석〉을 펴낸 후 독자들의 관심이 더 높아졌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에세이 역시 기억의 오류로 사실이 잘못 알려진 부분이 있었어요. 그동안 지나치게 과장되었거나 풍문으로만 떠돌던 백석의 연애담과 결혼생활도 가능한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정리했습니다.-백석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시인들에 비해 대중적 관심이 훨씬 높은 것 같습니다. 이유가 있을까요. 수많은 시인 중에서 그런 관심을 받는 것 자체가 특별한 일이긴 하죠. 정지용 김기림 신석정 등 동시대에 활동했던 시인들은 이미 해방 후 교과서를 통해 알려지고, 그러면서 교과서적인 시인으로 굳어졌지만 백석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백석이 독자들에게 알려진 것이 1988년 이후이고, 교과서에 그의 시가 실린 것은 90년대 중반부터거든요. 늦게 알려진 덕분에 궁금증을 자아내는 측면이 있고, 다른 시인들은 문학사적으로 규정되었거나 평가가 이미 이루어진 옛날시인처럼 느껴지는데, 백석과 그의 시는 현재 진행형인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렇다보니 백석의 작품이 발굴될 때마다 언론이 주목하게 되고 관심이 증폭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백석은 식민지와 분단 시대를 살았던 시인인데도 친일의 혐의가 없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백석은 해방 이전의 민족시나 저항시 계열의 시인이 아니었지만 친일의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해방직전에는 거의 모든 시인들이 친일 작품을 썼지 않습니까. 더구나 백석은 일본 유학에 조선일보 장학금으로 유학생활을 했어요. 친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사회적 분위기를 피하기 위해 만주로 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다면 이념이 대립된 시대에 어느 한쪽에도 서지 않겠다는 그런 입장이었을까요.아니죠. 오히려 어느 한쪽을 확실히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친일을 하지 않겠다는. 그런데 독특한 것은 시는 또 아주 모던한 경향을 보이거든요. -문학사 쪽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백석을 굳이 민족시인으로 규정하거나 전체적으로 색칠할 필요는 없지만 당시 지식인의 민족의식, 특히 글 쓰는 지식인으로서 가져야 할 민족의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시인이었습니다. 북에 돌아가서 쓴 시들도 겉으로는 체제 찬양하는 시지만 당시 북에서 발표됐던 다른 시인들의 시와 비교해보면 표현방법에 있어서 백석만의 특징이 아주 강합니다.-시 못지않게 동시로도 작품 활동이 활발했었다고 하던데요.백석은 북에 돌아간 이후 시를 발표하지 않고 동시를 썼어요. 동화시 같은 새로운 장르도 개발했지요. 그러다가 57년쯤 격렬한 아동문학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백석은 동시가 이데올로기로부터는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교훈이 담겨있긴 하지만 직접적이지는 않은. 그런데 백석이 동시를 발표하자 북한 문단의 주류 아동문학 작가들이 공격을 시작했죠. 백석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 아동문학평론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더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주류 측은 아동문학작품에도 사상성을 적극적으로 담아내야 한다는 것이고, 백석은 아이들이 읽는 작품은 사상성 보다는 문학성 예술성이 먼저여야 한다는 입장이었죠. 문학창작의 자율성과 집단적 획일주의가 맞선 셈인데, 이 논쟁으로 결국 백석이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문학사에서 백석은 온전히 자리를 잡았다고 보십니까.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죠. 아쉬운 것은 해방이후에 발표한 시에 대해 본격적인 평가 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데, 북한 체제에 순응적인 시들이 많다보니 단순하게 체제순응의 시라고 규정해버리고 있거든요. 그러나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하면 새로운 평가와 사실이 드러날 수 있을 겁니다. -서문에 백석을 베낀 시간들을 고백하셨더군요.(웃음) 그래서인지 백석의 시와 닮은 점이 보이기도 합니다. 거대담론보다는 일상의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관심도 그중 하나일 듯 하고요. 조심스럽지만 어떻게 보면 백석으로부터 배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이 세계를 보는 태도와 자세겠지요.-화제를 돌려보죠. 요즈음 시는 어떻습니까.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난해한 시가 너무 많다고도 하는데 가뜩이나 시가 안 읽혀지는 시대에 독자들을 밀어내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요. 특히 일부 젊은 시인들의 시는 지나치게 자폐적이고 난해해서 시인이나 비평가들조차도 읽기 힘들어합니다. 한국현대시 자체가 소수 전문가들의 소유로 변해가는 어떤 전환기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로 돌아가자고 할 필요는 없겠지요. 사실 이런 경향은 세계적인 흐름 이예요. 일상문화의 변화 탓도 있을 겁니다. 스마트 폰이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나 자신을 강조하고 나 자신에 관심을 갖게 되는 성향이 더 강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젊은 세대들의 시쓰기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자기 안에서 자기 세계만 들여다보니까.-청소년기에 시를 많이 읽으면 좋을 것 같은데요. 사실 창의력을 키우는 텍스트로 시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적어도 학교교육 안에서는 시가 거의 유일한 셈입니다. 시교육의 목표를 창의력 신장으로 잡는 것이 바람직하죠. 그러나 오늘의 학교교육에서는 아이들이 시를 국어시험에 나오는 지문의 하나 정도로 압니다. 시를 즐기지 못하고 문제풀이의 대상으로만 여기게 된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지난해 7월, 시를 쓰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입장을 밝힌 후에 정말 시는 한편도 안 쓰셨습니까. 1년 동안 메모도 안했습니다. 제 시쓰기는 보통 어떤 소재를 만나면 메모하고 그것을 컴퓨터에 옮겨 나중에 시를 쓸 때 꺼내어 쓰거든요. 아예 시를 안 쓰겠다고 마음먹었더니 메모도 안 떠오르더군요.-세상에 대한 관심도 무디어지는 것 아닐까요.할 이야기는 트위터로 하죠. 절대 무디어진 것은 아녜요.(웃음) -시는 언제부터 다시 쓸 수 있게 될까요. 제 나름대로 시인이 시를 안 쓰는 것도 세상과 맞서는 방식일 수 있겠다 싶어서 택한 일인데 예상보다 마음이 편합니다. 이번 기회에 나를 비우고 좀 더 새로운 시쓰기를 얻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안도현 시인이 펴낸 〈백석평전〉은 한편의 장대한 소설 같은 책이다. 백석을 향한 짝사랑, 그리고 그 경계를 뛰어넘는 존경이 품격 높은 그만의 상상력과 조우하면서 백석의 생애를 온전히 복원하고 있는 덕분이다. 그의 말대로 현재진행형인 백석은 안도현의 영원한 탐구 대상이다. 시가 아닌 평전으로 문학의 정신을 다시 새롭게 만나게 해주는 일은 시인 안도현이 독자들에게 돌려주는 선물이다. 시를 쓰는 자유를 내려놓음으로써 더 많은 자유를 누렸던백석 처럼 시인은 잠시(?) 시를 내려놓고 있다. 더 큰 자유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터다.● 안도현 시인은 전북 문화운동 이끈 주역통일교육운동도 앞장안도현 시인은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대구 대건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전국의 백일장을 휩쓸었을 정도로 문재를 날렸다. 경희대 장학생 입학자격을 얻었으나 원광대 국문과를 택했다. 대학을 졸업한 80년대 초부터 지역 문화운동의 현장을 지켰던 그는 시인이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국어교사였다. 그러나 80년대 후반, 전교조 교사로 교육운동을 벌이다 학교에서 쫓겨나 해직교사가 됐다. 94년 복직이 되어 다시 교단에 섰지만 3년만인 97년, 이번에는 스스로 교직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가 됐다. 대중적 기반을 확고하게 다져놓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 〈연어〉를 내놓은 지 1년만이었다. 전업 작가가 된 후 창작 작업은 더 치열해졌으며 시집과 산문집을 아우르는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한국의 대표적 시인이자 인기작가가 됐다. 그는 한동안 연애시류의 시쓰기와 대중들을 더 가깝게 만날 수 있는 산문쓰기에 집중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이른바 인기작가나 대중작가 되고 대중적 이미지를 공고히 다지는 동안에도 그는 통일운동과 교육운동을 실천했다. 북한어린이돕기로 통일운동의 전면에 나섰으며 사회변화에의 갈망을 정치운동으로 풀어냈다. 2000년대 중반부터 그의 정치활동은 치열해졌다. 덕분에 〈연어〉의 작가 안도현의 대중적 이미지는 정치적 진보 지식인으로 바뀌었다. 정치활동 보폭은 갈수록 넓어져 2010년 62 지방선거때 치러진 교육감 선거에서는 진보진영 후보의 홍보위원장을 맡아 선거캠프를 주도했으며, 국회의원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후원회 대표가 되어 벌이는 그의 정치활동은 더 이상 대중들에게 낯설지 않게 되었다. 지난 19대 총선에서는 정치활동 전면에 나서 민주당 비례대표 공천심사위원으로도 참여했다. 올해 봄, 선거법위반으로 기소돼 법정 다툼을 거쳐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 그의 정치활동이 적극적이고 공개적으로 전개되면서 대중들은 시인 안도현이 앞으로 정치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혐의(?)를 갖기 시작했지만 정치는 하고 싶다. 그러나 정치인은 결코 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힌 이후 자유로워졌다. 대구매일신문(1981년)과 동아일보(1984년) 신춘문예에 당선하며 등단한 그는 〈서울로 가는 전봉준〉부터 〈북항〉까지 열권의 시집을 냈으며 〈외로울 때는 외로워하자〉 〈사람〉을 비롯해 여러 권의 산문집을 냈다.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 〈짜장면〉 〈증기기관차 미카〉 등으로도 주목받았으며 그를 인기작가로 만든 〈연어〉는 130쇄를 기록, 6개국의 언어로 번역돼 출간됐다.2004년, 우석대 문예창작과과 신설되면서 교수로 임용돼 다시 교단에 선 그는 10년 동안 준비해온 백석의 시와 생애를 통찰한 〈백석평전〉을 펴내 주목 받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4.07.31 23:02

여성국극 부활 나선 이소자 선생 "전통 잇는 아이들 가르치는 내가 더 즐겁고 행복"

창극은 최초의 작품 은세계가 1908년 공연된 이후 1950년대 말까지 대중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우리의 공연예술 양식이다. 새로운 대중문화의 도도한 물결 속에서 부유하기도 했었으나 1962년 국립창극단이 문을 열어 그 맥을 이어왔으니 100여년 한국적 공연양식의 온전한 역사는 지켜져 온 셈이다. 2년 전쯤에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으로 재직했던 유영대 고려대 교수를 인터뷰 한 적이 있다. 판소리 연구자이기도 한 유 교수는 국립창극단 무대를 통해 창극의 양식을 다양하게 실험하면서 시대에 맞는 창극을 발굴해내는 작업으로 주목을 모았다. 그가 지향했던 창극은 보편적 음악극으로서의 양식. 그래야만 창극이 우리시대의 공연양식이 될 수 있다고 유 교수는 확신했었다.한 시기, 대중들과 호흡했던 창극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보존의 가치로만 존재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긴 하지만 공연무대에서 새로운 가치로 조명되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최근 창극의 또 다른 변형 양식인 여성국극의 온전한 부활을 꿈꾸는 단체가 만들어졌다. 그것도 판소리의 탯자리인 남원에서 움트는 의미 있는 운동이다. 자연히 관심이 더해질 수밖에 없는데, 이 운동을 이끌어낸 사람이 원로 여성국극배우 이소자 선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올해 여든 넷. 이소자선생의 나이다. 선생은 여성국극의 초창기 무대를 지켰지만, 그 명맥을 온전히 이어온 국극배우는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수십억 원에 이르는 전 재산을 여성국극의 부활과 발전에 내놓겠다며 기증식을 가졌다. 지난 6월 남원에서 열린 국악인의 밤에서다. 놀란 것은 국악인들만이 아니었다. 이 지역과 연고도 없는 선생은 왜 남원에서 여성국극을 부활시키려하는 것일까. 선생에게 여성국극은 어떤 의미인가, 삶의 여정이 궁금했다.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선생은 손사래부터 쳤다.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인터뷰는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지만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선생은 열정에 넘쳐보였다. 인터뷰는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그의 자택에서 있었다. -건강하십니다. 전화 목소리만으로도 연세를 짐작하기 어렵던데요. 직접 뵈니 그런 생각이 더 드는군요. 젊게 봐주니 고맙습니다. 예전에는 걸음도 후적후적 다녔는데, 아무래도 나이는 못 속이는지 조심조심 걷게 되요.(웃음) 팔십 노인인데 특별히 아픈데 없이 이만큼 유지하고 사는 것도 감사해야죠.-남원과는 지역적 인연이 있습니까. 특별한 인연은 없어요. 젊은 시절 유독 전북지역에 공연을 많이 다녔는데 인연이라면 그것이 전부예요.-집 분위기가 공연 연습실 같습니다. 무대 의상이나 소품들이 참 많군요. (그의 집은 넓지 않았다. 그런데도 방은 무대의상과 소품으로 들어차있고, 거실 곳곳에도 소품들이 놓여있었다)공연을 위해 내가 만든 의상이에요. 경비를 좀 줄여보려고 이것저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하죠. 소품도 그렇고. 애초에는 이 건물 지하에 연습실이 있었는데 남원에 설립한 햇님여성국극보존회 운영비를 보내야 해서 세를 내줬어요. 그래서 춤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은 거실에서 연습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지금도 춤을 가르치십니까. 내가 만든 창작무용이 있어요. 밤길 이라고 이야기가 있는 춤인데, 독특한 양식으로 되어 있지요. 탈 같은 소품도 필요하고. 호감을 갖는 사람들이 있어 배운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는 가르쳐줘요. 탈 만드는 기술은 나만의 비법이 있는데 안 가르쳐줘요. 아직 공개하고 싶지 않거든요. (웃음)-남원에서 열린 춘향제때 여성국극 춘향전을 공연했는데 평은 어땠습니까. 올해 무대가 두 번째인데 아주 좋았어요. 평도 괜찮았고, 아이들도 즐겁게 했습니다. 작년 무대는 첫무대여서인지 아무런 경험이 없는 애들을 가르쳐서 무대를 올리려니 어려움이 많았거든요.-주로 판소리를 전공한 학생들이었겠지만 국극이란 양식이 아주 생소했을 텐데요. 국극은 또 연기에 좀 더 비중이 있지 않나요. 소리는 잘하는데, 연기를 맞추려니 더 힘들었어요. 그래도 한번 경험이 있어서인지 애들이 곧잘 하더군요. 작년에는 학교에서 결정한 일이니 할 수 없이 하는 아이들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올해는 지원자도 많아지고, 자기 역할에 관심도 많아 이 아이들이 연습을 잘 하면 남원에서 좋은 여성국극을 만들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우선 가르치는 내가 더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지난 3월부터 남원을 오가면서 애들을 가르쳤죠. -아이들을 지도할 때 선생님 목표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욕심이야 애들을 좋은 국극배우로 만드는 것이죠. 아직은 고등학생들이지만 졸업하고 나면 여성국극단에 참여시킬 수 있겠다는 희망이죠. 우선 판소리 실력이 좋은 아이들이 많아 금세 따라오더라고요. 사실 이번 공연을 앞두고 본 공연장에서는 리허설도 제대로 못했는데 학교 강당에서 리허설을 완벽하게 해서인지 실수도 없었고, 그런대로 좋은 기반이 되었습니다. -여성국극을 연고도 없는 남원에서 재현해내시는 것이 궁금합니다. 2011년에 서울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내가 제작한 여성국극 춘향전을 올렸어요. 순전히 사비를 들여서 제작한 무대였죠.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긴 하지만 나름대로는 오랫동안 가져왔던 여성국극 부활의 꿈을 실현하는 첫 번째 시도였어요. 다행히 관객들의 반응이 좋았습니다. 용기를 얻었지요. 그러다가 남원 국악예고 이상호이사장님을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았습니다. 그래서 춘향제에도 초대를 받았는데, 이상하게 남원과의 인연이 마음에 딱 와 닿았어요. 몇 번 오고가면서 여기면 되겠다 생각했지요. 그래서 작년에 남원에서 햇님여성국극보존회를 발족했습니다.-지난 6월에는 선생님의 재산을 온전히 여성국극을 위해 기부하겠다는 기증식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감동의 파장이 컸습니다. 애초에는 내가 가고나면 적당한 사람에게 재산을 맡기고 여성국극을 발전시키는 일을 하게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지금 내 일을 도와주시는 분이 선생님 살아 계실 때 이런 일을 다 하시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더군요. 생각해보니 옳은 이야기라고 판단했습니다. 사실 사단법인을 추진할 때 힘든 과정이 있었어요. 이해할 수 없는 일인데, 도움보다는 경계하고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기증식으로 확실하게 방향도 정하고 의지도 보이고 싶었습니다.-기금은 얼마나 되고 어떻게 쓰여지는지 궁금합니다. 구체적인 금액으로는 환산해보지 않았고, 다만 내가 갖고 있는 부동산이 좀 있습니다. 서울과 용인 쪽에 집과 땅이 있지요. 그것들을 다 처분해 기금으로 돌릴 생각이에요. 이 집도 이제 엄밀히 말하면 내 집이 아닌 거죠. 이미 기증 했으니까. 이제 법적인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아마 기금 운영 형식은 장학재단을 통한 형식이 되지 않을까 싶고요. 우선 어느 정도 정리되면 여성국극 전용극장을 건립할 생각입니다.-여성국극의 부활을 삶의 목표로 세운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나의 젊은 시절을 바쳤던 것이고, 또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국극은 참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과 즐거움을 주었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여성국극 무대에서 가장 가슴 설레고, 행복했던 것 같아요. 그만큼 매력 있는 공연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그 명맥이 딱 단절되었잖아요. 물론 몇몇 공연이 그사이 재현되어 다행이지만, 어디에선가는 지속적으로 여성국극이 올려지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연세로 보아서는 여성국극 1세대가 아니실까 싶은데요. 아닙니다. 나는 좀 늦게 시작했어요. 이십대에 배우가 되었으니까요. 나는 소리는 못했어요. 판소리를 잘했다면 제 삶이 달라졌을 겁니다. 소리 공부를 안 해 아쉬움이 많았지만 그때부터 소리를 배우기에는 또 한계가 있었어요. 그래서 배우로서의 역량을 쌓기 위해 연기 연습을 더 많이 했던 것 같아요. 1세대는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1.5세대쯤이나 될까요.-어떻게 배우가 되셨는지가 궁금하군요. 14후퇴 때 어머니와 군산으로 내려왔어요. 하루는 거리를 걸어가는데 한 남자가 오더니 배우냐고 물어봐요. 그래서 그냥 그렇다고 했죠. 그랬더니 공연 연습실로 데리고 갔어요. 지금 기억으로는 십자성 가는 길이라는 작품을 연습하고 있었는데, 배역을 하나 주더군요. 아무 경험도 없는 사람이 잘할 리 없죠. 그래도 배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완전히 뺏겼습니다. 절간 같은 곳에서 몇 달씩 연습을 하면서 밥이나 겨우 얻어먹는 생활이었는데도 열심히 배웠어요. 공연이라고 해야 평지도 아닌 곳에 가설무대를 만들고 멍석을 깔고 솜뭉치 같은 것으로 조명을 만들어서 했는데 첫무대에 섰을 때는 떨려서 앞이 하나도 안보였어요. 대사만 얼마나 열심히 외웠는지 안 틀리고 겨우 해냈지요. 그 후에 아세아 극단으로 들어가서는 제법 배우다운 활동을 했습니다.-그럼 여성국극단 활동은 언제부터 하신 겁니까. 아세아극단에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겨우 밥이나 얻어먹는 정도여서 그만두고 부산으로 갔죠. 그때 부산에서 백조가극단이 공연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고인이 된 강효실씨가 했던 역할을 해보라고 하더군요.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는 사람이 여성국극을 구경가자고해요. 햇님여성국극단이었어요. 박귀희 김소희씨가 참여했던. 당시에는 그분들이 다 그만둔 이후였는데, 공연이 너무 좋더라고요. 얼마나 그 공연을 하고 싶었는지 대사도 없는 남장 역을 맡아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하는 품이 초짜 같지 않다는 무대감독의 말도 용기가 되어 망설일 것도 없이 여성국극에 발을 디뎠어요.-국극은 창극의 다른 용어로 시작되었지만 소리보다는 극의 비중이 커진 양식이죠. 당시 여성국극은 시기는 길지 않았지만 한 시절, 정말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고 들었습니다.대중들이 아주 좋아하는 공연이었어요. 여성들로만 구성되었으니 여자배우들이 남장을 하고 무대에 서는 것도 흥미로웠던 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습니까.바보온달을 목포에서 공연할 때였어요. 평강공주를 사랑하는 고야수라는 악역이 있었습니다. 나는 고야수의 졸병을 맡았는데, 고야수 역할을 맡은 배우가 너무 악역이어서 못하겠다고 한거예요. 내게 그 역할이 왔어요. 일생일대의 기회였지요. 당시 무대에는 마이크 두개가 전부였는데, 뭔가 제대로 하고 싶더군요. 그래서 대사도 그렇지만 한껏 폼을 잡으며 관중들을 웃음 터지게 했어요. 나중에는 그것이 유행이 되어 마의 태자 등 다른 단체 단원들도 그런 방식을 따라했지요. 그 뒤로는 주로 악역만 했는데 여성국극에서는 악역이 특히 중요합니다. 그런데도 다른 배우들은 관중들에게 미움을 받는다고 피하죠. 저는 기꺼이 했어요.-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았지만 여성국극 역시 단명한 우리 공연양식 중의 하나입니다. 1960년 초반에 국극단이 사라졌죠.나도 60년 이후에는 단체 활동은 못했어요. 그래도 여성국극에 대한 마음을 온전히 접지 못하고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을 모아 작품을 만들었어요. 68년엔가는 KBS의 의뢰를 받아 방송도 했는데, 꽤 인기가 있었습니다.-그 뒤로는 극단 활동을 하신 겁니까.74년에 미국 이민을 갔어요. 세상을 좀 넓게 보고 싶어서 갔는데, 먹고 사는 일만으로도 고생을 많이 했죠. 예술을 작파하고 뷰티샵이나 명품가게 등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했어요. 겨우 아파트 임대비 해결하는 빠듯한 생활이었지만 참고 견뎠습니다. 나중에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영주권을 포기할 수 없었어요. 77년에 잠깐 나왔을 때 여성국극 공연을 하던 동료들의 제안을 받아 국극을 다시 하기 시작해 2-3년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 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여성국극 부활을 절실한 꿈으로 안게 되었을 겁니다. 여성국극을 내 힘으로 살려봐야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가 2009년에 완전히 귀국하면서 그 꿈은 더 단단해졌지요. 그래서 춘향전부터 만든 겁니다. -여든 살에 새로운 출발을 하신 셈이군요. 2011년에 제작해 올린 춘향전이 첫 결실인데, 제작비 부담은 없었나요. 미국에 있으면서 먹는 것 하나까지 아끼면서 돈을 모았어요. 30년 세월입니다. 처음에 부동산을 샀는데, 다행히 그것을 잘 활용해서 이번에 내놓을만한 재산이 되었어요. 얼마 남지 않은 여생, 헛된 삶이 된 것 같진 않아 감사하고 있습니다.선생과의 인터뷰는 흥미진진했다. 가난한 어린 시절, 춤꾼이 되고 싶었다는 그는 스무 살이 넘어서야 배우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그 길에서 만난 여성국극. 30년 이민생활에서도 늘 여성국극단 시절의 무대를 추억하며 살았다는 그의 오랜 꿈은 이제 현실이 된다. 그런데 볼거리가 넘쳐나는 시대, 과연 여성국극은 대중들의 마음을 잡을 수 있을까. 일본에는 다카라스카가, 중국에는 월극이란 여성배우만의 공연 양식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여성국극이 있지요. 지금은 볼거리가 넘쳐나는 시대여서 시간과 돈만 있으면 어디든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외레 우리만의 공연이 살아나야 한다고 봅니다. 보존의 의미로라도 지켜져야 하는 것이 전통이지 않을까요. 좋은 작품을 만들어서 상설공연을 하고, 그래서 젊은 세대들이 그것을 기억하고, 외국인들이 우리 공연양식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남원이 여성국극을 살려내는 터전이 될 겁니다.선생의 웃음이 환했다.● 이소자 선생은 군산서 캐스팅 '배우의 삶'전 재산 기부 '여성국극' 부활이소자 선생은 1930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영희.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는지 그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데, 집안이 망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3남매와 강보에 싸인 그를 데리고 서울로 이사를 했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가뜩이나 곤궁했던 시절, 어머니가 가장인 그의 집은 늘 배고픈 일상이었다. 소학교를 거쳐 배화여중에 입학할 때만 해도 춤을 잘 추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졸업은 하지 못했다. 늘 예능에 끼를 보이는 딸을 건사하느라 노심초사했던 어머니는 그가 집밖으로 나다니지 않고 집에서 음전하게 살림하다 좋은 사람만나 시집가는 것을 원했다. 14후퇴 때 어머니와 군산으로 내려와 지냈던 그는 길을 가다가 우연히 극단 관계자의 눈에 띄어 배우가 되었다. 이를테면 길거리 캐스팅이었다. 스무 살이 넘어 시작된 배우로서의 생활은 가난하고 궁핍했으나 하고 싶었던 일이어서 행복했다. 당시 대중들의 인기를 휩쓸었던 햇님여성국극단의 공연을 보고는 매료돼 고민 없이 여성국극 배우가 되었다. 대부분 소리를 하다가 배우가 된 단원들과는 달리 소리 공력이 없었던 그는 소리를 배우지 못한 것이 늘 아쉬웠다. 연기에 더욱 공력을 쏟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전성기를 구가했던 여성국극단은 60년대 초반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그 역시 개인적으로 공연활동을 하다가 74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다시 돌아온 것이 2009년, 35년 이민사는 외로움과 가난함의 시간으로 엮어졌다. 생계를 위해 예술을 내려놓고 개인이 운영하는 가게의 아르바이트로 생활하면서 모은 돈으로 한국에 부동산을 샀다. 자신을 위해서는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돈을 쓰지 않았다. 덕분에 5년 전 영구귀국 했을 때 그는 남부럽지 않은 재산을 갖게 됐다. 귀국하자마자 그는 여성국극 부활의 꿈을 실행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사비를 들여 제작한 춘향전을 2011년 서울 무대에 올리면서 힘을 얻고 의지를 다졌다. 2013년, 뜻을 같이 하는 인사들과 함께 남원에서 햇님여성국극보존회를 출범시켰으며 지난 6월에는 전 재산을 여성국극 기금으로 내놓아 화제를 모았다. 남원국악예술고등학교 국악인재들을 여성국극 배우로 키워내는 일을 여생의 소망으로 삼고 있는 그는 여성국극의 온전한 부활이 남원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4.07.17 23:02

디자이너 은병수 대표 "모든 디자인, 삶에서 시작…전통공예도 산업화 가능"

더할 나위없는. 2009년에 열렸던 제3회 광주디자인비엔날레의 주제다. 영어로는 The Clue(실마리)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제목이 붙었다. 명징하지 않는, 그래서 다소 불친절하게 보이는(?) 주제의 이 전시회는 앞서 치러졌던 광주디자인비엔날레의 질서를 새롭게 재편하는 한편의 사건에 다름 아니었다. 한국전통으로부터 새로운 디자인의 실마리를 찾는 일은 어떤 의미이고 가치인가. 더할 나위 없는 우리 디자인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 답을 찾는 일은 산업화된 사회, 그 중심에서 가치의 영역을 확대해가고 있는 디자인 분야에서 절실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해 광주디자인비엔날레의 총감독을 맡아 전시회를 기획하고 진행했던 은병수 대표(56)는 답을 얻었을까. 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한국의 디자인 영역에서 새로운 길을 열며 디자인 가치의 역사를 새롭게 써나가고 있는 그를 만났다. 우리나라에서 디자인회사를 처음으로 창업해 90년대 각종 전자제품을 비롯, 기업의 브랜드 제품 디자인을 주도하며 이름을 널리 알렸던 그의 행보는 한국 디자인 발전의 노정과 맞닿아 있다. 디자인의 역할과 가치에 미처 눈뜨지 못했던 시절부터 악전고투하며 기업들의 관심을 제품디자인으로 이어냈던 그는 3년 동안의 세월을 오롯이 전통문화유산을 만나고 한국미술을 공부하는 일에 매달리면서 한국적 디자인 VIUM 을 탄생시켰다. 그동안 개발해낸 전통문화 상품은 130여종. 장인과 디자이너가 협업으로 만들어지는 이들 비움연작은 국내는 물론 해외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런데도 해결되지 않는 궁금증이 있다. 수공예의 가치와 산업화 시대의 규모화 생산이 충돌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 공예품의 산업화 가능성이다. 모든 디자인은 삶으로부터 옵니다. 일상용품의 근본에는 공예가 깃들어있어요. 전통공예를 일상으로 다시 들여와야 합니다. 과제가 많지만 수공예의 가치에 대한 인식의 폭을 조금만 넓히면 산업화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있습니다.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2009년에 열렸던 광주디자인비엔날레의 반향이 꽤 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전시회를 통해 우리의 디자인이 안고 있는 문제를 제기했었는데 답을 얻었습니까.전시회 기획의도가 꼭 명확한 답을 얻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문제제기였던 셈인데 우리 전통문화로부터 디자인의 실마리를 찾자는 제안을 담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우리의 의식주부터 한글과 국악을 모티브로 한 학(學)과 락(樂)을 내세운 소주제전이 흥미로웠습니다. 최근 전통문화 자산을 콘텐츠로 활용해 우리만의 독창적인 디자인을 개발하는 작업이 부쩍 활발해진 것 같습니다.한국의 디자인은 한국적인 미와 문화적 가치를 담아내는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내 얼굴을 가질 수 있어요. 우리 문화를 들여다보면 훌륭한 자산이 많습니다. 소재로서도 그렇고 정신적 가치도 우리 디자인에 꼭 담아야 할 콘텐츠입니다.-처음부터 우리문화에 천착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저 역시 서양식 관점으로 디자인을 공부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제품디자인을 하는 것이 전부였지요. 디자인적 요소를 고민 하면서도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은 없었으니까요.-우리문화를 들여다보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디자인 회사를 만들어 초창기 어려움도 이겨내고 잘나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영국 디자인박물관에서 우리가 만들어낸 제품 디자인에 관심을 보여 전시회에 초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포트폴리오를 제작하기 위해 작품을 고르는데 수많은 제품디자인을 들춰봐도 보낼 것이 없는 겁니다. 우리의 한계를 스스로 확인하면서 충격이 컸습니다. 결국은 전시회에도 참여하지 않았죠.-제품 디자인 대부분이 호평을 받았고 여러 기업들로부터 제품을 의뢰 받았던 회사인데, 정작 자체적인 평가가 그렇게 인색했다니 뜻밖입니다.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저희도 궁금했습니다. 금세 답이 나오더군요. 우리만의 색깔, 우리만의 얼굴이 없었던 거예요. 우리만의 디자인을 위해 근본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때가 90년대 후반이었습니다.-그럼 사업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겠군요.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들과 우리문화 공부를 시작했어요. 답사도 하고 책도 읽으면서 한국적 미의식을 공유했죠. 때마침 외환위기가 오면서 자연스럽게 일거리도 줄어들었어요. 그 기간이 딱 3년이었습니다. 우리문화에 집중한지 3년 후부터는 상품 개발에 나섰습니다. 샘플작업을 한 3년 정도 했는데,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니 비로소 우리문화 가치를 담은 상품이 만들어지더군요.-VIUM이란 브랜드가 그 결실이군요.그렇습니다. 목기와 옻칠, 나전, 금속공예 등 다양한 기법의 전통공예에 디자인을 담아 현대적 상품을 개발했는데, 종류가 늘어나면서 이 상품들을 통합하는 브랜드가 필요했던 것이죠.-상품 생산 못지않게 마케팅이 중요했을 텐데요. VIUM은 국내보다는 해외를 겨냥한 브랜드여서 해외 시장의 마케팅이 중요했습니다. 뉴욕에 전시판매장부터 냈던 것도 그 때문이죠.-뉴욕 전시장 개설은 의미 있는 일이었지만 아쉽게도 얼마 안 되어 문을 닫았던데요. 그랬습니다. 브랜드 이름이 비움인데, 실제로 투자비를 다 없애고 원점으로 돌아왔으니 경제적으로도 다 비운 셈이 되었죠.(웃음) 뉴욕 진출 실패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전시장을 오픈하기 바로 직전에 911테러가 일어났는데 그 여파가 컸고요. 투자를 과도하게 했습니다. 뉴욕에서도 중심지역에 공간을 너무 크게 시작했던 것이죠. 그래도 어떻게 극복해보려고 했는데 3년 동안 유지하다보니 경제적 부담을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제품 디자인으로 번 돈을 비움으로 탕진한 셈이 되었군요. 그래도 큰 틀에서 보면 실패했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뉴욕에 전시장을 개설했던 덕분에 유럽에서 우리를 주목하게 되었거든요. 크고 작은 전시회에 초대되기도 하고 주문이 이어지기도 했는데, 2006년 파리 메종 오브제에 특별초청된 것은 적잖은 성과죠.-비움의 상품은 대부분 장인들과 디자이너의 협업일 텐데, 대량생산까지는 아니어도 주문 생산의 수준은 이루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수공예적 가치를 살리면서 생산량을 맞추는 일이나 비용 면에서 대중화가 가능한가요.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공예를 활성화하려면 결국 산업화 차원으로 이끌어내야 하는데, 우리의 여건으로서는 힘들거든요. 생산량이 많아져야 종사자들의 삶이 윤택해지고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데 수공예로 이루어낼 수 있는 한계가 분명하니까요. -비움은 어떤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아시아 국가와의 협업을 도입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공예의 전통적 생산 방식이 단절된 지 오래죠. 예전에는 마을 단위나 가족 단위로 공예품을 제작했지만 지금은 몇몇 기능보유자들에 의해 기법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현실이거든요. 필리핀이나 베트남은 다릅니다. 여전히 공예 인구가 많죠. 비움은 장인들과의 협업으로 1차 작품을 제작한 다음 상품화시키는 단계의 제작은 필리핀이나 베트남의 인력과 협업합니다. 우리나라 장인들의 수공예적 가치를 살리는 상징적인 작품은 마스터피스(masterpiece)로 존중하면서 대량생산을 위한 협업을 진행하는 겁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공예의 산업화는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가 됩니다.-전통공예를 부활시키고 산업으로 발전시키려면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 선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공예의 산업화를 내세우긴 하지만 정작 우리 일상에서도 공예는 자리를 잃어버렸는데 그 자리를 회복하는 일 또한 절실한 것 같습니다. 물론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공예의 역사는 삶의 역사와 맞닿아 있습니다. 디자인의 역사가 오랜 북유럽을 비롯해 대부분의 국가들은 공예를 일상에서 단절시키지 않았어요. 그에 비해 한국은 60~70년대 초반, 산업화를 내세우면서 전통 공예의 가치를 놓치고 말았죠.-대학 교육과정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산업디자인과가 각 대학마다 개설되어 있고, 해마다 배출되는 디자이너들이 적지 않지만 정작 일상용품을 디자인하는 작업은 미미한 것 같거든요.실제로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면 전자제품 디자인은 잘하는데, 주전자 같은 일상용품의 디자인은 잘못합니다. 공예 전공자도 마찬가지일겁니다. 근래 들어 산업공예라는 분야가 생겨서 환경이 달라지긴 했지만 공예와 디자인이 융합되지 못하고 따로 가고 있는 현실은 안타깝습니다.-2000년대 중반부터 진행해 오신 아시아 디자인 작업이 궁금합니다. 아시아의 공예와 디자인을 주목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2004년 아시아 워크숍에 초청받았는데, 그때 그 나라 사람들의 놀라운 지혜와 공예 기술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들의 디자인을 꾸준히 탐색해왔지요. 그 나라들은 경제력은 우리보다 미미하지만 디자인에 대한 철학이나 자기들만의 독특한 디자인의 미학은 수준이 높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아시아디자인전을 여러 차례 기획해온 것도 그 때문입니다. 자연재료와 전통기술, 현대화된 상품 디자인까지 그들의 작업은 협업을 위해서도 기반이 잘 갖추어 있습니다. 앞으로 다양한 형식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시리즈를 만들어낼 계획인데 이미 지난해에 베트남, 필리핀, 라오스의 디자이너들과 함께 실험적 협력을 했습니다.-지역에서도 전통공예를 일으켜 문화산업으로 발전시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업들이 개발 단계에만 머물거나 진전된다고해도 마케팅 단계로 이어지지 못하는 한계가 있더군요. 지역 뿐 아니라 공예를 산업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케팅이 중요합니다. 장인과 디자이너를 연계해 상품을 개발하는 코디네이션은 어려운 일이 아녜요. 자치단체가 이런 사업에 나선 경우라면 더구나 마케팅이 강화되어야 합니다. 사업단 같은 조직이 상설화되어 있다면 마케팅 전문가가 포함된 TFT를 꾸려 목표를 설정하고 장기계획을 세워 매출의 목표, 생산 단가는 물론 투자 규모와 수익 배분까지 구체적인 내용으로 진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례들이 있습니까. 필리핀은 우리에게 저개발국가로 인식되는 나라죠. 그런데 그 나라 수공예 가구는 아주 좋습니다. 대나무 라탄 수초 같은 자연산 재료로 만드는 것들인데 그 나라에서는 판매가 잘 안됩니다. 그래서 필리핀 정부가 아이디어를 냈어요. 일종의 무역협회 같은 것을 만들어 가능성 있는 디자이너 그룹을 선정하고 그들을 지원할 수 있는 TFT를 구성했습니다. 해외마케팅과 국내마케팅, 기술지원 팀을 두었죠. 선정된 디자이너들은 서양에서 디자인을 공부했으면서도 자기나라의 전통공예 기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디자인과 전통공예를 접목해서 상품을 개발하게 한 것이죠. 3년 만에 유럽시장에 첫 수출을 했습니다. 지금은 그 그룹들의 매출이 엄청납니다.-우리나라 공예의 경쟁력이 더 걱정되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아시아권 나라와의 협업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공공디자인 작업은 어떻습니까. 서울시청의 상징적 공간이 된 시민청은 콘셉트를 잘 살린 공간으로 호평받고 있는데요. 그 공간은 원래 홍보관 이었는데 일방적인 홍보관 보다는 시민들의 자율과 참여를 담아내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좋겠다 싶어 바꾼 예입니다. 밥상에 빈 그릇을 놓고 그들이 재료를 채워 맛있게 먹을 수 있게 하는 공간으로 만들자는 것이 목표였는데, 실제 활용이 기대 이상으로 잘되고 있어 다행입니다.인터뷰 말미, 은 대표에게 디자인의 추구하는 본질적 가치를 물었다. 디자인은 결국 사람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사람을 위해 사람을 배려하고 사람을 나누고, 사람을 위해서 하는 일이지요. 그런데 저도 과거에는 사람보다는 산업을 위해 디자인을 했어요. 부끄러운 일이죠.나눔의 철학을 담아내는 그의 디자인이 우리 사회를 위해 우리의 일상을 위해 어떻게 기여할지 더 궁금해졌다.● 은병수 대표는 우리나라 최초 디자인 회사 창업전통공예 부활 이끌어은병수 은카운슬대표는 부안 줄포면 파산리가 고향이다. 양조장집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유학을 가 부모님 대신 형과 누나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시골에서는 제법 잘산다는 말을 들었지만 부모님이 한 달에 한 번씩 보내주시는 생활비는 열흘도 못가 바닥나는 바람에 7남매의 서울 생활은 늘 가난했다. 같은 나라 안에서 돈의 단위가 다르게 쓰인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던 자동차 만드는 일을 어떻게 하면 실현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공과대학이 아닌 미술대를 택한 것은 순전히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정작 서울대 응용미술학과에 들어가 공업디자인을 공부하면서는 디자인의 가치에 눈을 떴다. 현대자동차와 금성사에 취업의 문이 열렸지만, 자동차 회사가 아닌 금성사를 선택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2년 남짓한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유학을 떠나 미국 뉴욕의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석사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와 1989년에 디자인회사 212디자인(당시는 212코리아)을 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디자인회사였다. 디자인에 대한 인식이 거의 전무했던 시절, 사업 초기의 어려움을 고스란히 안아야 했다. 그러나 웅진코웨이 정수기 등 전자제품과 굴착기, 전기자동차와 스쿠터까지 다양한 영역의 기업 제품들이 그의 손을 거쳐 옷을 입기 시작했다. 1994년,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그를 영국디자인박물관이 초대했다. 전시 포트폴리오를 위해 그동안 제작해낸 제품디자인을 정리하면서 그는 어느 것 하나 내 얼굴이라고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작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만의 것을 찾기 위한 고민과 탐색의 여정이 시작됐다. 한국 전통문화와 미술을 공부하면서 한국적인 미와 가치에 눈을 떴다. 2001년 전통과 현대를 접목한 은병수만의 얼굴, VIUM-비움은 그렇게 탄생됐다. 그해 전통공예 장인들과 현대적 디자이너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100여종의 1차 상품을 개발해 뉴욕 맨해튼에 전시 판매장을 냈다. 911테러의 여파가 컸지만 애초 계획대로 강행했다. 그러나 가중되는 운영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2년여 만에 문을 닫았다. 회사의 경제력도 비움이 됐다. 그런데 그 실패가 기반이 되어 새로운 길이 열렸다. 아시아권 국가의 공예디자인과의 만남이었다. 그가 고민해온 전통과 현대, 장인과 디자이너의 협업은 비로소 날개를 달았다. 한국 전통을 더욱 부각시키는 디자인 작업은 아시아 디자인 프로젝트와 이어져 다양한 전시회에 초대됐다. 우리나라 공예의 부활을 위해 아시아권 국가와의 협업을 확대해나가고 있는 그는 2009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예술총감독을 맡아 한국적 전통과 디자인 융합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인식시키기도 했다. 공공디자인 작업도 활발해 서울 광화문 KT본사 1층의 복합문화공간, 서울시 청사 시민청, 지난봄에 개관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등 화제의 공간들이 그의 손을 거쳤다. 비움의 브랜드를 달고 나오는 생활 소품뿐만 아니라 공공 구조물, 상징물, 공간 등에 우리 문화의 가치를 담는 디자인 작업을 확장시켜가고 있는 그는 공공 사이트와 구조물 변환 프로젝트, 지역 사회 상징물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 기획
  • 김은정
  • 2014.07.03 23:02

중국 상해 '상윤무역' 박상윤 사장 "대륙에서 성공하려면 중국인 마음부터 움직여라"

지난해 말, 책 한권을 받았다. 상하이 박의 진심경영스토리라는 부제만 보아서는 성공한 기업인의 자서전쯤 되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책의 제목이 마음을 끌었다. 선한 영향력이라니.기업의 사회적 기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선한 영향력이 주는 메시지가 묘했다. 이 책의 저자는 10여 년 동안 대기업의 상해 주재원으로 일하다 1인 기업으로 무역회사를 창업, 5년 만에 주목받는 강소 무역회사로 키워낸 박상윤 사장(51)이다. 세계 시장의 중심에 중국이 들어선지 이미 오래, 사실 주재원에서 기업인으로 성공한 예는 박 사장이 아니고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의 경영스토리는 남다른 면이 있었다. 창업은 대개의 경우, 인생을 바꾸는 새로운 도전이다. 그러나 창업은 철저한 준비를 한다 해도 시행착오의 과정이 통과의례처럼 따라붙기 마련이어서 창업을 꿈꾸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많은 시간을 준비에 쏟는다. 그런데 박 사장의 창업은 준비 없는 결행. 목표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전부였다. 이쯤 되면 창업한지 5년 만에 연매출 400억 원 규모의 무역회사로 성공한 경영스토리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선한 영향력의 정체(?)도 궁금했다. 지방선거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전인 지난 4월, 마침 짧은 일정으로 전주에 온 그를 만났다. 빠듯한 일정에도 그에게서는 피곤함 대신 긍정적 에너지가 넘쳐났다. 중국인의 마음을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눈 앞 비즈니스의 좁은 셈법을 떠나 중국인의 진정한 벗이 되어야 해요. 중국 진출을 꿈꾸는 젊은 세대들에게 주는 그의 조언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성공한 사람은 성공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그와의 인터뷰로 새삼 깨닫게 됐다.-책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주재원에서 1인 기업 창업자로, 그리고 지금은 주목받는 강소 무역회사 대표로 성장하기까지 예상했던 것보다는 순탄한 길을 걸어오셨더군요. 고난의 길을 상상했었는데요.(웃음)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비교적 순탄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꿈을 갖고 구체적인 현실을 상상하면서 성실하게 일 하면 언젠가는 그 꿈이 이뤄진다는 것을 좌우명처럼 갖고 살아온 덕분인 것 같습니다. 창업할 당시에는 수출영업으로 직장생활을 해온 경험과 노트북 하나면 무역을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전부였거든요.-책의 제목 선한 영향력이 주는 메시지가 정서적이면서도 강했습니다. 기업의 사회적 기여를 말씀하시는 것이겠지요. 2년 전에 아프리카에 가 있던 조카가 이메일을 보내왔어요. 달라부쉬(Dollar Bush)라는 식물이 있는데, 볼품없는 이 식물이 사막에 홀로 서있으면서도 동물들에게는 수분을 공급하고 곤충들에게는 서식처가 되는 등 그 안에서 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예쁘지는 않지만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활용해 가장 자기답게 주변에 선한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가장 나답게 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이 되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 아닐까 생각한다는 이야기였어요. 생각해보니 선한 영향력은 상득익장 윤택사방(相得益章 潤澤四方)-서로 협력하고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을 풍요롭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자는 우리 회사의 기업정신과도 맞닿아 있었습니다. 그런 기업, 그런 사람이 되자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대기업 상해 주재원으로 있다가 본사 임원으로 발령 난 그해에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했더군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상해에 가족들을 두고 나와 혼자 지내는 일상이 힘들었고,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교육 등 뒷받침 해줘야할 경제력 부담에 대한 중압감이 컸습니다. 고단하더라도 독립해보자는 생각이 들어 사표를 냈죠.-창업을 갑자기 결정하셨다면 준비할 시간도 없었겠군요. 직장생활을 하면서 내 미래를 위해 무엇인가 준비를 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20년이나 직장생활을 했는데 정작 사표 내고 나와 보니 막막하긴 했습니다. -대개의 경우, 창업을 하려면 빈틈없이 준비를 하던데요. 준비는 중요하죠. 그런데 회사에 몸담고 있으면서 개인 일을 위해 시간과 회사 업무를 활용한다는 것은 결코 바른 일이 아니지요. 책에도 썼는데, 어떤 조직에 있을 때 정말 열심히 성실하게 일해야 나중에 그 조직을 떠났을 때 남아 있는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고, 잘되기를 빌어줍니다. 그렇지 않고 조직에 있을 때 자신만을 위한 틀을 만들고 기반을 닦아놓는 일에 마음을 쏟으면 동료들로부터 외면당하게 됩니다. 뒷말하고 흉보고 욕하고. 그런 에너지는 결국 부정적인 힘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어요.-중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우선 중국인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중국인들과 신뢰를 쌓을 수 있을까요. 진심을 다하면 됩니다. 우선은 언어가 중요한데, 소통이 되어야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의외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중국어를 배우지도 않고 창업부터 합니다. 물론 통역을 두긴 하지만 한계가 크죠. 중국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익혀야 합니다. 언어는 친밀감을 높이고 신뢰감을 줄 수 있는 유일한 통로거든요.-중국어를 일찍부터 공부하셨더군요. 딱히 나중에 중국에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신입사원 시절부터 중국어를 공부했습니다. 그것이 알려져 회사에서 지원하는 중국어학연수의 길을 얻게 되었고, 중국 주재원 발령도 받았습니다. 덕분에 좋은 중국친구들도 만났고, 신뢰를 쌓을 수 있었죠.-중국에서 사업을 하다 실패하고 돌아오는 사람도 적지 않던데요. 결국 언어 때문일까요.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언어도 안 되는데다가 많은 한국인들이 실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런 근거 없이 중국인들을 하대하거든요. 편견 때문인데, 한국이 중국보다 앞선 문화권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가 권위적입니다. 직위 상하를 막론하고 옷차림이 수수하고 상사와 직원의 관계가 수평적인 중국인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태도지요.-중국 친구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한 비결이 있었습니까.어깨에 힘을 빼고(웃음) 회사 직원이든 아니든 모두 친구로 생각하고 교류하면 됩니다. 우리 회사에는 직원들이 20대부터 있습니다.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모두 친구예요. 마음을 열고 존중하며 대하니 신뢰가 쌓이게 되더군요. 중국 직원들이 저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平易近人. 중국말로 핑이찐런이라고 하는데 가까이 하기에 너무 편한 당신이란 뜻입니다. 황송한 말이죠.-회사의 경영스토리를 듣고 싶습니다. 무역회사인데 업종은 어떻습니까. 크게 보면 기능성 섬유와 산업용 섬유, 화학제품이 주력 업종이지만, 법적으로 규제하는 품목이 아니면 뭐든지 다룬다는 것이 우리 회사의 철학입니다. 역량만 된다면 비행기나 배도 다루고 싶고 해외에 나가 자원개발에도 참여하고 싶거든요. 이런 철학이 회사 성장에 큰 동력이 되었습니다.-무역업에도 전문성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장단점이 있겠죠. 그동안 지켜보니 특정한 업종을 다루는 무역회사는 중간에 문을 닫는 경우가 많았어요. 흐름과 경기를 타기 때문이죠. 우리는 고객들의 니드에 맞추어 중국의 솔루션을 제공합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솔루션 프로바이저(Solution Provider)인 셈입니다.-많은 업종을 종합적으로 다루려면 무역의 흐름을 잘 파악해야겠군요. 그렇긴 하지만 흐름을 파악하기 보다는 상해에 뭐든지 해결해주는 상윤무역이 있다고 소문을 냅니다. 박상윤은 뭐든지 하는 사람이라고. 2008년 말 즈음 세계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상해에서도 적잖은 한국 업체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직물을 다루는 회사는 직물만 하고, 봉제나 의류용 직물을 다루는 회사는 또 그것만 하는 회사들이었는데 경기가 악화되면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이 그 분야였거든요. 그런데 우리 회사는 모든 것을 다루는 회사여서 그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 동쪽에 불이 안 켜지면 서쪽에 켜지지 않느냐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부분이 위축되면 어떤 부분이 그 자리를 대신해주는 것이죠. -한우물만 판다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닌 것 같은데요. 위험요소가 있겠지만 분명한 장단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 회사 역시 섬유만 하는 전문 부서가 있고, 뭐든지 하는 종합부서가 있습니다. 섬유본부는 섬유만 집중하고, 무역본부는 모든 것을 열어놓고 종합적으로 취급합니다.-혹시 전북과도 연계되는 업종이 있습니까. 전주에 탄소섬유를 만들어내는 효성이 있죠. 효성의 탄소섬유 중국 대리점을 맡고 있습니다. 고향에서 나오는 탄소섬유를 제가 중국시장에 파는 셈인데, 그래서 자부심이 있습니다.-효성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습니까. 2010년 효성이 안양에 특수섬유를 생산하는 공장을 갖고 있었어요. 방탄복 등을 만드는 산업용 섬유인데, 그때부터 중국대리점을 했습니다. 신뢰를 쌓다보니 효성 본사의 사업팀과 연계되었고, 그 인연으로 탄소섬유도 다루게 되었죠. 또 제 전공이 섬유여서 더 관심이 크기도 합니다.-한국기업과의 신뢰는 특별한 노하우가 필요할텐데요.우리 회사 일처리 방식을 한국 기업들이 좋아합니다. 제가 주재원을 10년 넘게 했잖아요. 본사에서도 수출업무를 담당했고요. 그래서 한국 기업 수출담당자들의 심리적 니드를 잘 압니다. 가령 현지의 에이전트들은 바이어를 통해 물건을 싸게만 가져가려고 하거든요. 한국 기업의 담당자로서는 현지 시장상황이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회사는 위클리 리포트를 만들었어요. 거래처별로 정보를 구해 거래처 상황과 일주일 동안 상담한 내용을 모두 담습니다. 그것을 한국기업의 담당자, 팀장에게 보내줍니다. 중국시장에 관한 정보를 다 알게 되는 것이죠.-일종의 정보 공유인 셈이군요. 기업에서는 속성상 정보 공유를 꺼리지 않습니까. 대부분 정보 공유를 하지 않죠. 특히 무역회사 같은 경우는 정보를 넘겨주면 한국 기업들이 직접 거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가 파악한 정보는 다 공유하자는 입장이에요. 우리를 빼고 직접 진행한다 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그런 방식으로 열어놓으니까, 회사에 대한 신뢰가 더 높아지더군요. 경험으로 확인한 교훈입니다.-정보 공유는 소통할 수 있는 좋은 방식인 것 같습니다. 회사 안에서도 서로의 지식과 정보를 공유합니까. 직원간 경쟁의식도 있고 회사의 정보 유출 문제도 있을 텐데요. 상해에서 사업하는 사람들이 제가 창업하니까 직원들에게 다 알려주지 말라며 거래처를 다 가지고 나간다고 조언해주더군요. 실제 저보다 일찍 사업을 시작한 업체 사장이 있는데 주재원 시절부터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는 절대 안주는 사람이었어요. 자기만 알고 있는 고급정보라고 생각해서였겠죠. 나중에 그 사람이 회사를 열었는데 사업을 오래해도 남아 있는 직원이 늘 2-3명 정도였어요.-회사의 거래처나 모든 정보를 직원들에게 공개하나요.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직원들에게 다 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앞으로 계속 새로운 정보를 알면 되잖아요. 퇴사하는 직원이 정보를 좀 빼 가면 어떻습니까. 두렵지 않아요. 사실은 누군가가 퇴사하면서 거래처 정보를 가져간다 해도 우리 회사는 이미 직원들이 정보를 서로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직원이 퇴사하면 다른 직원이 업무인수 인계를 받지 않아도 곧바로 그 일에 개입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이야기를 듣다보니 창업 이후 큰 어려움은 정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실패의 경험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한 조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저도 초창기에 어려웠습니다. 창업할 때 2억 원으로 시작했는데, 6개월 지나니 1억 원 남았더군요. 직원이 다섯 명이었는데, 상황은 더 어려워질 가능성이 컸습니다. 업무가 주로 중개 일이다보니 커미션도 바로 돌아오지 않고 계속 자본금만 나가는 형국이었죠. 게다가 경기는 나빠져 주문도 없고 저는 월급도 없이 일해야 했습니다. 매출이 없으니 영수증 처리도 못하고 막막했죠. 그런데 문득 사랑의리더쉽이란 여섯 글자가 떠올랐어요. 직원 한명을 그만두게 할까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깨달음이 있더라고요. 어려울 때일수록 웃음과 사람으로 직원들을 대해야겠다는. 다음날부터 웃으며 직원들을 진심으로 대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다른 업체들은 더 어려워지는데,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하더군요. 2008년 12월, 덕분에 신용장을 받아 중국에서 오픈할 수 있었습니다.2011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오면서 재정위기를 먼저 맞은 것은 유럽이었다. 중국 수출도 막혀 박 사장의 회사도 이익은 줄고 비용은 증가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설상가상, 상해 시에서 외지인들의 4대 보험 의무 가입 정책을 발표했다. 5년 유예기간이 있었지만 박 사장은 이때도 정면돌파를 택했다. 규정이 발표되자마자 전 직원 4대 보험을 들고 내친김에 직원들의 출산 양육비를 정기적인 임금으로 지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직원들은 더 열심히 일했다. 1-2월 비수기에도 실적은 100% 성장했다. 위기를 맞을 때마다 정공법으로 맞서 오히려 동력을 만들어낸 박 사장은 이제 다시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가 꿈꾸는 선한 영향력이 더 크게 발휘 될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박상윤 사장은 창업 5년만에 연매출 400억주재원서 '1인 기업 성공 신화'박상윤 사장은 익산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익산에서 다녔다. 초등학교를 나와 공무원이 된 아버지는 타고난 부지런함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었는데, 공직에서 은퇴한 후에는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열어 여든을 앞둔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하는가 고민하던 사춘기 시절,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자신의 이름 상윤(相潤)의 뜻에 눈을 떴다. 서로 잘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을 그때부터 마음에 새겼다. 전북대 상대 무역학과에 입학한 1980년대는 학생운동이 치열했던 시기였다. 운동권에 적을 두진 않았지만 운동권 친구들과 교류하면서 의식을 공유했던 그는 학교를 드나드는 사복경찰에게 감시의 대상이었다. 결국은 덕진공원 옆 여관에 불려가 1박 2일 동안 전단지를 뿌렸다는 자술서를 쓰라는 강요를 받았다. 하지 않은 일을 거짓으로 인정해야하는 자술서 대신 군 입대를 택했다. 복학 후에는 공부에만 몰두해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마치고 선경케미칼에 입사했다. 지방대 출신이란 핸디캡을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극복했다. 입사 첫날부터 중국 주재원으로 발령 나기까지 매일 아침 7시 30분 출근시간을 지켰다. 가끔씩 사무실을 둘러보는 회사 사장은 가장 일찍 출근해 중국어를 공부하는 신입사원을 눈여겨보았다. 회사가 지원하는 중국어학연수에 뽑힌 것도, 중국 주재원 발령을 받은 것도 그 덕분이었다. 1996년 1월부터 상해 주재원으로 일하기 시작해 12년 만에 서울 본사로 발령이 났다. 가족들은 상해에 두고 귀국해 여덟 평 남짓한 오피스텔에서 지내면서 창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곧바로 회사를 그만두고 상해로 돌아와 자본금 2억원을 투자해 1인 기업 상윤무역을 열었다. 2008년 3월이었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오로지 직무에만 충실했던 그는 아무런 준비 없이 결행한 창업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주재원으로 일하면서 친분과 신뢰를 쌓았던 중국지인들의 도움으로 매년 100% 이상 성장, 창업 5년 만에 연매출 400억 원 규모의 강소 무역회사를 만들었다. 직원들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그들의 가능성을 믿어 기회를 갖게 해주고, 미래의 꿈을 공유해온 기업 철학이 가져온 결실이었다. 인생의 전반전을 끝내고 이제 후반전의 시작점에 선 그는 오랫동안 품어온 기업의 선한 영향력으로 사회와 소통하는 미래를 꿈꾸고 있다. 크고 작은 강연을 통해 자신의 기업 철학과 가치관을 공유해온 그는 지난해, 중국진출을 꿈꾸는 젊은 세대를 위한 책상하이박의 진심 경영스토리-선한영향력을 펴냈다. 중국인의 마음을 움직인 그의 진심경영 민낯이 거기 담겼다.

  • 기획
  • 김은정
  • 2014.06.12 23:02

한국여성단체연합 김금옥 상임대표 "사회변혁 위해 젊음 불태우는 세대에게서 희망 발견"

인터넷 검색어에 그의 이름 석 자를 쳐보았다. 크고 작은 기사와 블로그 글이 적잖이 쏟아졌다. 모두가 여성인권과 여성평등을 향한 치열한 분투의 현장기록. 2000년대의 치열했던 여성운동 현장에 그의 삶이 촘촘히 놓여있었다. 절망과 분노, 기대와 희망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20대와 30대의 아름다운 청춘과 40대를 가로질러온 30년 세월을 온전히 여성운동에 바친 그에게 세상은 얼마큼 변했을까. 한국여성단체연합 김금옥 상임대표(50)를 만났다. 사회의 고질적 병폐와 견고한 장벽을 허무는 싸움이 쉬울 리 없지만 그는 고단함 대신 패기가 넘쳐보였다. 1990년대 전주에서 여성운동을 시작했던 그는 2000년대 초반, 한국여성운동연합 정책국장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대학시절 학생운동 동지로 만나 결혼한 남편과 10년째 주말 부부로 지내며 전주와 서울을 오가고 있다. 짧지 않은 세월, 사회변혁을 위해 현장을 지켜온 그 힘의 근원은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그는 내가 기꺼이 선택한 길이니 어떤 일이 주어지든 피하고 싶지 않았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나 그의 삶을 들여다보니 그를 길 위로 부른 분명한 주체가 있었다. 인권을 유린당한 여성들의 절규, 그들과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의 소명이었다. 인터뷰는 서울시 영등포구 영등포동의 여성미래센터 한국여성단체연합 그의 집무실에서 있었다. -사무실이 아주 좋습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이 마련한 건물이라는데 재력이 탄탄한 모양입니다.세 들어 살다가 그것도 단체의 자력으로 내 집을 얻었으니 자랑스럽긴 하죠.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좀 버겁습니다.(웃음) -그래도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은 여성운동 관련 단체와 활동가들에게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미래여성센터라는 이름도 상징적이고요. 재원은 어떻게 마련했습니까. 여연 사무실이 있던 장충동 건물을 팔아 기본 재원을 만들었어요. 당시 여성 단체들의 전세금과 독일 재단의 지원금으로 마련했던 여성평화의 집 이었는데, 건물이 너무 낡아 정비가 필요했거든요. 그래서 아예 새 건물을 마련하자고 뜻을 모아 추진했죠. 2005년에 간신히 팔려 임시 사무실을 얻어 지내다 모금으로 재원을 보태 이 건물을 얻었습니다.-김 대표가 서울로 올라온 직후겠군요. 그렇죠. 처음엔 정책국장으로 있다가 2005년에 사무처장을 맡게 되었어요. 그때 새로운 사옥 마련 사업이 막 시작되어 제가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건물을 얻느라 서울시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는데, 그렇다보니 부동산 용어에 익숙해져서 부동산 투기꾼으로 오해받기도 했어요. 형편이 넉넉하지 않으니 자력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아서 건축설계에 조경까지 공부하며 예산을 절감했습니다.-서울로 옮겨온 것이 2004년인데, 그동안 쉴 새 없이 일하셨더군요. 성매매방지법을 비롯해 김 대표가 일했던 지난 10년 동안 여성인권과 관련해 성과가 많았습니다. 돌아보니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군요. 한국여연과 인연이 된 것이 2004년 1월인데, 정책국장으로 일을 시작했을 때가 마침 선거를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어요. 와서 보니 그 전해 말에 여연에서 맑은정치 여성네트워크 운동을 진행하고 있더군요. 호주제 폐지를 위한 민법 개정안도 국회에 내놓고 있었고, 성매매방지법 제정 특별위원회가 설치되어 전문가들이 각국의 선진법을 검토하면서 우리나라의 윤락행위방지법을 전면 개정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그런 사업 모두 한국여연이 중심에 서야할 일이었습니다.-당시맑은정치 여성네트워크의 성과 또한 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여성들의 국회진출이 눈에 띄게 늘어나지 않았습니까. 워낙 여성 국회의원이 적었으니까요. 여성 국회의원 100인보내기 운동을 내세워 한국여성단체협의회와 통합선거 여성연대를 만들어 운동을 벌였는데 여성의 정치참여 확대를 위한 법제도를 개선하고 국회의원 30% 할당 등 기본적 방향은 함께 추진했지만, 단체의 지향성은 서로 다르니 여연은 맑은 정치네트워크를 따로 만들어 후보 선정기준으로 삼았어요.-어쨌든 성과도 좋았고 반향도 컸지요. 물론이죠. 17대 때 여성의원들이 가장 많이 들어갔어요. 13% 정도 되었던 것 같은데 기초의원까지 합하면 비로소 아시아 평준이 됐다고 기뻐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여성연합의 맑은 네트워크 정당이 가장 많은 여성 의원을 당선시켰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그때는 정당도 여야 구분하지 않았어요. 오로지 여성으로만 승부했지요.(웃음)-그해에 성매매방지법도 만들어졌죠.성매매방지법은 2004년 3월에 통과되었습니다. 역사적인 일이었는데 그 법이 통과하는 현장을 저 혼자 보았어요. 당초 2월 말일엔가 국회에 상정되어 우리 단체에서도 방청을 하러 갔는데, 안건이 밀리면서 처리 되지 못해 다음 회기로 넘어갔거든요. 그 날은 또 안 될 수도 있겠다 싶어 혼자 갔는데 통과된 거예요. 그때의 기쁨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습니다.-성매매방지법 제정의 기쁨은 김 대표께 특히 각별할 것 같습니다. 그 법의 동인이 된 것이 군산 윤락업소 집결지 화재사건이지 않습니까. 사실 성매매방지법은 사회적 논쟁의 지점도 많고 합의하기 쉽지 않은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군산 화재사건이 우리 사회에 아주 강한 메시지를 던졌고, 그에 대해 누구도 이견을 제기하기 어려웠거든요. 전문가들이 소신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성매매방지법에 반하는 입장을 취하기 어려운 사회적 조건이 형성되었던 셈이에요. 그때 내용을 보면 처벌법과 보호법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만장일치, 하나는 기권이 나왔어요. 군산 개복동 윤락업소 집결지 화재사건은 2002년 1월 29일, 그곳에서 일하는 20대 여성 14명이 화재로 숨진 사건이다. 그에 앞서 2000년 9월, 군산시 대명동에서도 20대 여성 5명이 숨지는 화재사건이 일어났다. 모두가 매매춘 여성들이었다. 당시 전기누전으로 밝혀진 이 화재는 20여분 만에 진화됐지만 희생된 매매춘 여성들의 일기와 수첩이 발견되면서 인권을 유린당한 채 감금된 일상을 살아야 했던 성매매여성들의 삶이 낱낱이 밝혀졌다. -군산 개복동 화재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지 않습니까. 그곳 피해 여성들의 국가대상 소송을 비롯해 성매매방지법 제정을 위한 토대를 이루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했었죠. 대명동 화재사건도 그렇지만 연이은 개복동 화재는 정말 큰 충격이었어요. 사실 그 사건은 어쩌면 단순 화재 사건으로 묻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곳에 성매매여성들을 지원하는 새움터가 있어 실상이 밝혀질 수 있었죠. 개복동 화재가 난 직후 저희가 갔을 때 현장은 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어요. 문을 밖에서 걸어 잠근 현장을 보며 분노가 치밀어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웠습니다. 인신매매와 감금상태에서 성매매와 성착취를 당하며 살고 있는 여성들이 21세기에도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정말 가슴 아팠습니다.-그런 실상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성매매방지법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군요. 그런 희생을 딛고서야 법을 만들 수 있었던 셈인데, 성매매방지법보다 훨씬 앞서 추진되었던 호주제 폐지법보다도 앞서 제정될 정도로 사회적 공분이 컸습니다. 성매매방지법이 제정되고 6개월 후 시행된 첫날이 9월 23일이었는데, 바로 그날 군산화재사건 피해자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한 대법원 확정판결이 났어요. 9월 23일은 그래서 더 의미 있는 날이었습니다.-성매매방지법이 시행되면서 후유증은 없었습니까. 엄청났어요. 성매매방지법이 제정되고 시행되면서 그 곳에서 나온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그렇게 되니 업주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법제정에 반기를 들었죠. 사실 그 세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지능적이고 조직적입니다. 얼마나 지능적으로 진화하는지 놀라워요. 개별범죄가 아니라 조직범죄이기 때문에 더 그렇죠. 기득권 권력과도 연결되어 있고. 규모가 큰 집결지는 선거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인데 성매매여성들의 주소지를 옮기게 해 투표권을 갖게 하고 그것으로 세력을 만들었다고 합니다.-제정도 그렇지만 이 법이 어떻게 정착되어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느냐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이죠. 그런데 정작 이 법이 시행되면서 엄청난 반발이 있었어요. 성매매방지법을 교묘하게 왜곡시켜 성매매여성들을 자극해 거리로 나오게 했지요. 사실 성매매라는 용어는 객관적으로 알선업자와 수요자를 말하는 겁니다. 여성은 거기서 주체가 아니거든요. 우리 쪽에서 제안했던 법안에는 성을 사는 사람과 알선업자는 처벌하되 여성들은 처벌하지 않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국회에서 이견이 나오면서 조항 몇 개가 빠져 통과되었어요. 제정된 성매매방지법은 본인이 자발적인 성매매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입증을 해야 처벌을 피할 수 있게 되었거든요. 어려운 일이죠. 그런 내용을 악용해 업주들이 니들 생존권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니냐며 거리로 내몰았어요. 여성들이 길거리로 마스크와 모자 쓰고 나와 시위를 하고, 업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항의 전화와 협박이 쏟아졌지요.-그래도 보람 있는 성과였고, 성문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죠.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이 법이 시행되면서 언론도 그렇게 호의적이지는 않았는데, 오히려 외신들이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우리보다 앞선 나라가 스웨덴인데, 우리 법도 스웨덴에 버금가는 내용으로 만들었거든요. 사실 군산 화재 사건이후에 미국무성이 내놓는 인권보고서에 한국이 3등 국가로 찍혔었어요. 그러다가 2004년 성매매방지법이 만들어지면서 다시 1등급으로 올라갔습니다.-화제를 돌리겠습니다. 격변의 시대 상황에서 시민운동은 새로운 변화가 있었습니다. 여성운동 역시 그 흐름의 중심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2000년대는 특히 부침이 심했던 시기여서 여성운동도 큰 틀에서 보면 시민사회운동의 변화와 같은 연상에 있습니다. 그래도 여성운동은 특히 돋보이는 성과들이 있었습니다. 성매매방지법 호주제 폐지 등 법제정 성과가 나왔고. 여성들의 정계 진출도 두드러졌죠. 가시적인 성과들이 유난히 많았던 셈인데, 그래서 비판도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여성인권 여성문제 해결을 위한 고민의 영역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말씀이겠군요. 맞습니다. 그런 비판들을 수용하면서 법제도를 어떻게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권리로 실현될 수 있게 할까 대중적 확산의 방식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촛불시위 이후 이런 고민은 여성운동 진영에서 더 본격적으로 하게 됐지요.-그렇게 된 시대적 환경이 있는 것 아닙니까. MB정권이 들어서면서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여성부 존속문제까지 나오면서 그동안 일궈온 사회변화의 물결이 후퇴하는 환경에 직면했던 때문이죠. 개인적으로도 그때 당시의 상황을 목도하면서 제 그동안의 삶이 부정당하는 것 같았습니다. 청춘을 바쳐 함께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위해 열심히 일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환경이 거꾸로 돌아가는 상황을 감당하기 어렵더군요.-그런 상황에서도 미래여성센터를 열었고 여성인권 문제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진전된 활동을 해오셨는데요. 희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열악한 환경을 알면서도 여성운동에 나서거나 사회변혁을 위한 일에 자기 꿈을 갖고 실현해가는 젊은 세대들을 만나면 다시 의지가 생기거든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의 토대가 여전히 탄탄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절망할 수준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을 보면서 확인하게 됩니다. 각자 다른 삶이 있음에도 함께 가는 방향을 바라보는 것, 그런 곳에서 희망을 보게 되요 -공동대표를 거쳐 올해 상임대표를 맡았습니다. 부담이 적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어떤 부담이었습니까. 지금까지 여성운동을 해오면서 조직 안에서 주어진 일에 대한 책임을 다하겠다는 자세를 지켜왔습니다. 상임대표가 안겨졌을 때도 그런 의지로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상임대표로서 갖게 되는 부담은 또 별개의 것이었습니다. 상임대표는 진보개혁적인 사회운동을 하는 시민운동 영역의 여성부문 대표성도 갖고 있는데다 그 대표성 때문에 격려도 비판도 받는 자리예요. 한편으로 한국여연은 대중적 신뢰와 한국사회의 진보적 여성운동에 기여했던 공로가 있습니다. 여성단체 연합이란 이름이 갖고 있는 명예도 있고요. 그러한 명예를 상임대표라는 이름으로 갖게 되는 것이 가장 부담스럽더군요. -가뜩이나 일을 몰고 다니시는 편인데, 앞으로 하실 일도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웃음) 여연은 중임제만 허용합니다. 공동대표와 상임대표까지 중임을 거치는 셈이니 2017년이면 제 임기가 끝납니다. 그런데 2017년은 우리 단체가 3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새로운 여성운동의 기틀을 만들어야하죠. 여성노인문제, 여성빈곤화 등 새로운 의제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의제를 발굴해 대안을 모색하고 30주년에 대한 비전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이런 저런 모색들을 올해와 내년에 해야 합니다. 올해가 그 시작인 셈입니다.● 김금옥 상임대표는 군산 출신, 여성운동 30년 외길성매매 방지 법제화 앞장김금옥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는 군산에서 태어나 성장했다.원칙과 공정함을 생활의 기본으로 삼아온 부모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부당한 일에 늘 맞서왔으며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키우려고 이름을 금옥(錦沃)으로 지었다는 어머니 말씀을 듣고 난 후 평등하고 당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됐다. 전북대 국문과에 들어가 일찌감치 학생운동에 뛰어든 것도, 여성운동의 길에 들어선 것도 그러한 의식의 영향이 컸다.총여학생회장이 되어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에 눈을 떴다. 대학 졸업 후에는 전북지역 여성운동의 기틀을 다진 전북민주여성회에서 일했다.여성인권과 여성평등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성폭행에 대한 사회적 이슈를 불러일으킨 김부남 사건 대책위원회에 참여하면서 성폭력예방센터에서 활동했던 그는 노동운동 현장에도 관심이 높아 위장취업을 하기도 했다.94년 결혼한 이후에는 위기에 놓였던 전북여성단체연합에 들어가 제 2의 창립을 도왔다.전북지역 여성운동의 토대를 만들고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발굴해 정책과 사업으로 이끌어낸 보람은 있었지만 대학원 진학의 꿈은 꺾였다. 20대부터 지금까지 30년 가까운 여성운동의 궤적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로 꼽는 것은 성매매방지법 제정을 이끌어낸 군산 개복동 화재 피해자 지원과 성매매여성 지원 대책 활동이다.2000년 대명동화재의 악몽이 가시기도 전에 2002년 개복동 화재가 일어나자 그는 현장으로 달려가 인신매매와 강압적인 성착취의 삶을 살았던 여성들의 현실을 사회에 알리는 일에 앞장섰다.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관성적으로 일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새로운 운동영역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창조적 아이디어와 에너지를 위해 2003년 전북여연에서 나와 필리핀에 갔다. 국제적인 시민운동단체 활동가들과 연대하며 운동의 새로운 영역을 모색하고 싶었다.1년 남짓 NGO의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길을 찾았지만, 한국여성단체연합의 제안을 받고 서울로 갔다.2004년 1월이었다. 정책국장으로 시작해 사무처장과 공동대표를 거치는 동안 늘 일을 몰고 다녔다. 성매매방지 호주제폐지 법제화로 여성평등 여성인권의 사회적 장치를 마련한 것도, 한국여연의 번듯한 거점을 마련한 것도 그가 중심에서 일구어놓은 성과다.여성운동의 대중화를 늘 고민해온 그는 최근 여연 상근 활동가 출신 동료들과 함께 협동조합 형식의 연구소를 만들었다.2017년 임기가 끝나면 그곳에서 새로운 열정으로 일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4.04.10 23:02

대통령 직속 문화융성위 김동호 위원장 "통일 한국 대비, 100년 내다보는 문화정책 가꿔가야"

지난 해 3월 단편영화 한편이 전국에서 동시 개봉됐다. 주리. 영화제 심사위원들의 심사과정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소통의 단절을 통해 영화란 무엇인가를 유쾌하게 담아낸 이 영화의 상영시간은 24분. 상영시간 분량으로만 보자면 단독 개봉은 어차피 불가능해보였다. 그러나 어찌됐든 이 영화는 옴니버스가 아닌 단독으로 전국 12개 상영관에서 개봉됐고 화제를 모았다. 단편영화의 가치를 보여주는 새로운 계기가 되었던 이 영화가 주목받은 이유는 또 있었다. 영화를 연출한 감독의 이름이다.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대한민국 영화제의 상징이 된 그의 첫 연출작에 국내외 영화인들 뿐 아니라 영화 마니아들까지도 경의를 보냈다. 2010년 부산영화제 15회를 끝으로 집행위원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던 김동호 위원장의 새로운 시작은 의외의(?) 창조였지만 아름다웠다. 같은 해 여름, 그의 이름이 또다시 매스컴을 탔다. 대통령직속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의 직함으로다. 큰 도전이자 모험으로 보이는 이 일을 그는 정치가 아닌 문화의 일이니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위원회가 발족한지 7개월. 의도하지 않아도 경계와 비판,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위원회는 실제로 비판과 격려, 때로는 과분한 기대의 여론 속에서 항해하고 있다. 여전히 고군분투, 민(民)과 관(官)의 경계에서 대한민국의 문화융성의 길을 찾고 있는 김동호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78)은 답을 얻었을까. 지난해 위원회를 발족하자마자 전국 광역자치단체를 돌며 현장의 목소리를 들었던 김 위원장은 3월부터 2차 현장 순회를 시작했다. 일주일에 3~4회 지역을 찾아다니는 문화현장 탐방은 오는 4월까지 그의 중요한 일상이다. 지역을 돌아보니 문화융성의 길이 현장에 있음을 알겠어요. 지난해 광역단체 탐방 때와는 또 다른 과제를 안게 됩니다.현장탐방 일정이 비어있는 시간을 쪼개어 인터뷰로 내준 김 위원장은 기꺼이 맡은 일이니 즐겁게 일하면서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하고 싶다고 했다. 강행군의 일정에도 지쳐 보이지 않는 김 위원장과의 인터뷰는 금세 두 시간 남짓한 약속시간을 넘겨버렸다. 치열하고 촘촘한 그의 삶의 한편을 겨우 들여다본 시간, 대한민국 문화정책의 궤적이 거기 있었다. -현장 탐방이 강행군이어서 힘드실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는 일요일에도 일정이 잡혔던데요. 어떤 일이든 즐겁게 하면 괜찮습니다. 아직은 체력도 견딜만하구요. 지난 일요일에는 덕적도를 다녀왔어요. 정말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현장에 가봐야 문화융성의 답을 제대로 찾을 수 있겠더군요.-어떻습니까. 작년에 진행했던 현장 탐방과 비교하면. 지난 1차는 광역 자치단체를 대상으로 했었기 때문에 광역시나 도 단위 예술단체와 문화재단, 지역 문화예술인들을 만났습니다. 지역사회 기층의 여론과는 좀 다른 것이었죠. 올해는 문화소외 지역과 특히 마을 단위의 현장을 찾아 문화예술인과 지역 주민들을 만나는 일정입니다. 문화 현장의 실태와 환경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겁니다.-문화융성위원회가 발족한지 7개월이 지났습니다. 위원회로서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겠지만 외부에서는 그 역할과 성과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위원회 활동의 체감이 없다는 평가가 있더군요. 그런 평가와 조언은 모두 경청할 내용들입니다. 그래야 모범 적인 답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활동성과나 체감의 문제는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 문화라는 것이 어떤 정책을 세우고 시행한다고 해서 곧바로 시책의 효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이 아니죠. 융성위 활동도 국민들이 제대로 체감할 수 있게 되는 시점은 문화융성위가 (대통령 직속위원회란 성격으로 볼 때) 끝나는 때쯤이 되지 않을까요. 시간도 그렇고 정부의 노력도 더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문화융성위원회 일과 동시에 학교(단국대 영상대학원장) 일을 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학교 일은 융성위 일을 하는 동안 차순위로 미뤄놓았습니다.(웃음) 지난해 6월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심사하고 있을 때 융성위 위원장 제안을 받았습니다. 문화융성위 출범은 매체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제가 할일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었거든요. 고민은 했습니다. 그러나 정치가 아닌 문화계 일이라는 생각을 하니 내가 할 수 있겠다 싶더군요. 또 한편으로는 내 나이에 마지막으로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원회가 발족한지 7개월이 지났는데 위원장님이 계획하신대로 활동 과정에 진전이 있습니까. 사실 위원회의 역할은 정책 결정이 아니라 대통령 정책 자문입니다. 그 역할도 아직은 미진합니다. 앞으로 과제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난해 연말, 문화기본법이 통과되고 지역문화진흥법이 제정되면서 문화융성위에서는 장기문화발전계획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장기계획을 잘 세워놓아야만 향후 한국 문화가 융성될 수 있겠지요. 그 장기계획이 우선은 5년을 위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100년을 내다보고 통일 한국에 대비한 문화정책의 기본 구상으로 마련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위원장 임기가 1년으로 되어 있더군요. 기본적 역할을 해내기에도 너무 짧은 것 같습니다. 물론 연임의 규정이 있지만 당초부터 이런 임기 연한은 위원회 역할에 대한 신뢰를 갖게 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지속성의 문제가 있긴 하겠지만 우선은 주어진 임기 안에서 해야 할 일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겠죠. 임기동안 문화콘텐츠와 인문정신 진흥 정책도 만들 계획인데 지금 추진하고 있으니 장기계획과 함께 기본 골격은 짜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과 함께 문화정책 전체를 아우르는 문화발전 장기계획 골격을 완성시켜놓으면 올해 과제는 어느 정도 완성되지 않을까 싶습니다.-올해 융성위에서 문화가 있는 날을 제정했는데 성과는 어떻습니까. 아직 초반이어서 확산의 성과는 잘 보이지 않지만 점차 국민 속에 정착되어나가면 국민들이 문화예술 활동의 주체가 될 수 있으니 그것이 바로 문화융성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문화가 있는 날의 진정한 취지가 지역까지 확산되면 일상 속에 문화를 자리 잡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겁니다.-영화제도 그렇고 문화예술에 대한 기업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이끌어오셨고 또 성과도 있었습니다. 문화융성 역시 관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마침 오늘도 신세계백화점과 문화융성위원회가 MOU 체결을 했습니다. 앞으로 기업들의 참여를 더 확대해 나가려고 합니다. 기업이 주체가 되어 문화소외지역을 찾아다니면서 문화 활동을 확산시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문화소외계층을 위한 문화바우처가 시행되고 있지만 그것도 덕적도 같은 곳에 가보니 아무런 소용이 없더군요. 당장 육지에 나가야만 활용할 수 있으니 생업에 매달려야하는 주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이고 게다가 변변한 공간도 없으니 문화 활동은 남의 일로 되어버리는 것이죠. 다니면서 보니 작은영화관처럼 지역마다 환경과 특성에 맞는 맞춤형 문화 공간과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일이 필요하더군요. -문화가 다양한 만큼 형식에 있어서도 다양하게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이군요. 사실 위원장님께 말씀하신 작은 영화관 같은 문화공간은 전북이 처음입니다. 작은도서관 작은영화관 작은목욕탕 등 의 시도를 전북이 주도했죠. 그런 좋은 사례를 지역적으로 확산할 필요가 있습니다. 얼마 전 예술의 전당에서 국립발레단의 호두까지 인형 공연을 촬영용 영사기로 기록했는데, 공연 실황을 영화로 만들어 작은영화관에 보급하는 것도 좋은 콘텐츠가 될 것 같더군요. -궁극적으로 문화융성위의 목표는 어떤 것입니까. 모든 국민들이 일상 생활 속에서 문화 활동의 주체가 되거나 또는 문화예술활동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문화예술을 통해 국민들의 개개인 삶이 풍성해지고, 삶의 질 자체가 높아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문화융성위의 기본 목표이자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지점입니다. -이제 좀 화제를 바꾸어보겠습니다. 부산영화제를 만들어 세계의 5대영화제로 성장시켰습니다. 전주에도 전주국제영화제가 건강한 영화제로 잘 성장해나가고 있습니다. 부산영화제의 목표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비경쟁 영화제로는 세계 탑 랭킹에 올라갈 수 있는 좋은 영화제를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특색 있는 영화제로 가져가야 한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아시아의 신인감독과 새로운 영화를 발굴해서 세계에 소개시킨다는 기조는 그래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 기본방향은 1회 때부터 지금까지 부산영화제가 지켜온 근간입니다. 그러나 해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개발해야 하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시아 변두리, 한국의 부산이란 도시까지 해외의 영화인과 영화계 인사들이 찾아오겠는가를 스스로 물으면서 단련했습니다. 프로그램과 프로젝트가 좋지 않으면 영화제의 미래는 없어지죠. 새로운 프로젝트를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 바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성공시킨 동력이었습니다. -문화 분야의 행정전문가, 특히 영화 행정가로서의 소중한 경험과 열정을 쏟아낸 부산영화제를 떠날 때 섭섭하진 않았습니까. 천만에요. 제가 부산영화제를 하면서 영화의 전당 건립 계획을 세우고 8년 동안 공을 들였습니다. 기획과정 3년, 예산 확보하는데 3년, 공사하는데 2년. 그래서 거기에 쏟은 애정과 노력을 아는 주윗분들이 개관은 보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만류하더군요. 그런데 집행위원장 사임은 저 스스로 이미 오래전에 정해놓은 것이었어요. 새 건물에서 영화제를 하게 되면 영화제 자체가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나가는 것이잖아요. 새로운 세계는 새로운 사람이 맡아서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개관 1년 전에 그만둔다고 공언해왔지요.-당시 위원장님의 결단과 아름다운 퇴진이 또한 화제가 되었었습니다. 감사할 일이죠. 저로서는 굉장히 행복한 일이구요.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이 그해 영화제 개막식에 왔었는데 나는 김 위원장처럼 그렇게 그만두지 못할 것 같다며 부럽다고 하더군요. -영화진흥공사 사장 시절부터 부산영화제까지 위원장님이 한국영화산업에 미친 영향 또한 큽니다. 오늘의 한국영화는 어떻게 보십니까. 잘 성장하고 있습니다. 산업적으로는 올해 시장 점유율 60%까지 이루었죠. 또 1천만 관객 시대, 1억명 관객시대가 왔고요. 지난해 전체 영화 관람인구가 2억 명을 기록했고, 그 중 한국영화가 1억 명을 넘어섰으니 양적으로 대단한 성장을 한 셈입니다. 질적으로도 국제영화제 수상이 반드시 평가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98년 이후 한국영화가 칸 영화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돋보이는 성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부작용도 있습니다. 98년에 멀티플렉스 극장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3개의 메이저 영화사들이 전국상영관의 8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수직계열화 문제가 생기고 독립영화가 상영될 수 있는 공간은 줄어드는 안타까운 환경도 있습니다. 대기업과 영세한 중소기업, 특히 독립영화와 예술영화가 공생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내는 일이 절실합니다.-그동안 한 나라의 문화는 지역문화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오셨습니다. 우리나라 지역문화의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오늘의 지역문화를 저는 긍정적으로 봅니다. 이번 현장 탐방에서도 돌아보니 자생적인 문화 활동들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더군요. 대도시에서는 원도심 재생운동이 있고, 마을단위에서는 문화로 마을을 가꾸는 활동들이 돋보였습니다. 문제는 이런 활동들을 확산시키려면 지방자치단체나 정부에서 지역문화에 대한 더 많은 관심과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문화융성위도 지역문화의 자생력을 발전시켜가는 길을 찾는 일이 큰 과제입니다.● 김동호 위원장은 문화예술진흥법 초안 만들고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지내김동호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은 1937년생이다. 고향은 강원도 홍천. 세살 때 서울로 이사해 625전쟁으로 부산에 피난해 있었던 때 말고는 줄곧 서울에서 성장하고 살아왔다. 선친은 광산업을 했는데 사업이 실패한 뒤 여러 일에 손을 댔지만 결국 재기하지 못해 곤궁한 시절을 보냈다. 제동국민학교와 경기중고를 거쳐 서울법대를 들어간 후에도 생활형편은 나아지지 않아 청량리 집에서 지금의 대학로에 있던 학교까지 걸어 다녀야 했고, 교과서 한권 사지 않고 대학을 마쳤다. 사법고시 대신 취직의 길을 선택한 것도 가족의 생계가 위태로웠던 현실 때문이었다. 1961년 문화공보부 공무원이 됐다. 밤새워 일하면서도 승진시험을 놓치지 않아 고속(?)으로 사무관이 되는 길을 얻었다. 기획부서에서 일을 한 것도 동료들보다 빨리 승진하는 통로가 됐다. 공보와 문화 분야에서 두루 일했는데, 72년에 문화과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문화정책의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진흥법 제정, 문화예술진흥원 설립, 문화예술진흥 5개년 계획 등이 모두 그의 손안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문화예술진흥법 초안은 당시 유네스코에서 발간한 각국의 문화정책을 숙독하고 전공(법학)을 살려 그가 직접 만들어낸 것이다. 같은 부처에서만 8년 동안이나 기획실장을 지냈지만 차관 승진을 못한 채 영화진흥공사 사장으로 나왔다. 영화와의 인연은 여기서 시작됐다. 한국영화를 부흥시키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 그는 특히 자국의 영화 수출을 확대하기 위해 전 세계를 다니는 미국영화인협회(MPAA)의 잭 발랜티 회장의 로비 활동을 보면서 한국영화계의 합법적인 로비스트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세계영화계와 교류하기 위해 해외영화제 진출의 폭을 넓히고 영화인들을 독려해 함께 다니기 시작했다. 몬트리올영화제 모스크바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가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한국영화 상영 프로젝트를 만들어 모스크바 헝가리 우즈베크스탄 카자흐스탄 루마니아 등 각국을 돌면서 한국영화 알리기에 나섰다. 국내에서는 종합촬영소 건립을 추진해 성사시켰다. 전관개관을 앞두고 있던 91년, 예술의전당 사장으로 발령이나 다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낮에는 문화예술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나고 밤에는 직원들을 만나 예술의전당의 미래를 위한 개혁안을 만들었지만 문화부 차관 발령이 나면서 개혁안 추진은 끝이 났다. 92년부터 차관으로 일했던 11개월 동안에는 개관을 코앞에 두고도 터덕거리고 있던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을 떠안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을 마지막으로 쉬고 있던 1995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제안을 받았다. 작지만 세계가 주목하는 영화제가 우리나라에도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젊은 영화인들과 의기투합했다. 아시아의 신인감독과 새로운 영화를 세계에 소개시킨다는 기조를 세우고 영화제의 골격을 만들어 예산을 확보했다. 영화진흥공사 사장 시절에 교류했던 해외영화제와 해외영화인들과의 친교를 확대하면서 부산영화제의 위상을 다지기 시작했다. 세계의 5대영화제로 우뚝 선 부산영화제의 오늘은 김동호위원장의 아름다운 고투(苦鬪)가 이루어낸 결실이다. 세계 건축사가 주목할 만한 기념비적인 예술작품으로 평가받는 부산 영화의전당 역시 그의 열정으로 추진됐던 결실. 부산영화제 15회를 끝으로 집행위원장에서 물러났으며 단국대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던 지난해 대통령직속 문화융성위원회가 발족하면서 초대위원장으로 위촉돼 대한민국의 문화융성의 기틀을 마련하고 지원하는 일을 열정적으로 주도하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4.03.27 23:02

일제 침탈 사료 찾기 나선 군산 동국사 주지 종걸 스님

지난 설 연휴, 근대문화유산이자 국가등록문화재인 군산의 사찰 동국사가 빗장을 걸었다. 절집 문을 연지 100년여 만에 처음이었다. 내막가거 왕막가추(來莫可拒 往莫可追 ). 사람을 피해 산속 깊이 들어가 살았던 9세기 선승 법상(法常)도 문하에 들고자 몰려오는 수많은 제자들을 내치지 않고 들어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붙잡지 말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산문을 폐쇄했다면 예삿일이 아니다. 평일이면 300~400명, 주말에는 1000명도 넘게 들른다는 이곳 동국사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때마침 설 연휴를 맞아 찾아왔던 수천 명 관광객들이 되돌아가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어려움에 처한 것은 절집뿐만이 아니었다. 근대문화유산 도시로 관광의 이미지를 높이겠다는 정책이 무색해지면서 더 난감해진 것은 군산시였다. 사실 동국사의 산문 폐쇄는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관광객들이 몰려오면서 절집 시설은 훼손되고 쓰레기는 쌓였다. 국가보물로 지정된 문화재 보호도 낙관할 수 없게 됐다. 동국사는 관리의 어려움을 시에 호소했지만 묵묵대답이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산문 폐쇄는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던 셈이다. 더 이상 관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니 산문을 닫는 것 밖에 답이 없었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동국사를 여러 해 째 홀로 지켜온 종걸스님의 결의는 단호했다. 그러나 빗장을 건지 5일이 채 안되어 산문은 열렸다. 시가 대책 마련에 나선 덕분이기도 하지만, 이어지는 관광객들의 걸음을 더 이상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국사는 왜 주목받는 사찰이 된 것일까. 동국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우리나라에 세웠던 500여개 사찰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본식 사찰이다. 일본의 조동종(曹洞宗) 사찰로 지어져 해방이 되자 대한민국 정부로 이관되었다가 조계종 선운사의 말사로 등록됐다. 외관 장식이 없고 창문이 많은 대웅전은 건축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동국사의 이력은 여기까지였다. 그런데 동국사의 이력이 새롭게 더해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자료가 발굴되고 내용이 공개되는 과정에서 일제 침탈 자료 수천점이 수집됐다. 그만큼 침탈의 역사는 더 명료해졌다. 학계도 주목하게 된 이 역사의 기록을 찾아내고 정리해 일제 침탈의 역사를 우리 앞에 내놓은 사람은 놀랍게도 역사학자가 아닌 동국사 주지 종걸스님이다. 인터뷰가 있던 날, 스님에게 보내온 택배상자가 있었다. 그 안에서 보은감사(報恩感謝)라고 새겨진 도시락이며 일장기, 수공예품 등이 쏟아졌다. 모두가 일제강점기 자료들이었다.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던 스님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것 참, 이렇게 철저하게 식민사관을 심었으니. 고작 60년 밖에 안 된 역사인데,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돌아보면 정말 큰일이에요. 스님의 소리가 높아졌다. -어디서 온 자료들인가요. 경매에서 사들인 거예요. 내가 옥션을 하거든. 옥션 하는 스님은 낯설죠?(웃음) 그런데 할 수 없어요. 자료를 구하려면 이런 통로가 아니면 어렵거든.-자료의 진위를 가리는 일이 쉽지 않겠는데요. 인터넷 옥션으로 하시다보면 더 그렇겠구요. 그래서 경매 현장에 가능하면 직접 갑니다. 자료 내용도 꼼꼼히 보고 제대로 된 자료를 가릴 수 있으니까요. 그동안 많은 자료를 접하다보니 이제 눈에 들어와요. 가치가 있는 자료인지 진품인지.-수집한 일제강점기 자료들이 꽤 많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 많은 자료를 모으신 건가요.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수집한 자료 중 일제강점기 것만 5천점 정도 되는데 침탈사 관련해서는 양적으로도 그렇지만 꽤 의미 있는 사료들이죠. 그중에는 일본 아오모리현의 조동종 운상사 주지인 이치노헤 쇼코 스님이 보내준 사료도 적지 않습니다.-이치노헤 스님은 지난해 조선 침략 참회기란 책을 내셨죠. 조동종이 일본의 조선 침략과 조선인 황민화 정책에 얼마나 깊숙이 개입했는지를 낱낱이 드러내는 이 책의 내용을 보고 스님의 용기에 감동 받았습니다. 스님과의 인연이 궁금하군요. 동국사 역사를 추적하다가 일본 조동종을 알게 되었어요. 일제강점기 침탈 사료를 수집하다보니 연구자들과도 교류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이기도 한 스님을 소개받게 되었지요. 스님은 저의 일제자료 수집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어요. 일본에는 아직도 그런 자료가 많이 있어서 뜻만 있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거든요.-2012년 동국사에 참사문비를 건립한 것도 그런 인연 덕분이었겠군요.일본 불교의 종파인 조동종은 일본의 아시아 침략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습니다. 이치노헤 스님은 자신이 속한 조동종의 그러한 과거 역사를 검증하고 사죄하는 일을 해왔죠. 중국과 우리나라를 답사하고 조동종의 전쟁 조동종은 조선에서 무엇을 했는가란 책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스님이 해온 일을 들여다보면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 스님을 만나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 뿐 아니라 동국사로서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동국사에 세워진 참사문비를 보면 침탈을 사죄하는 내용이 절절하던데요. 그 참사문이 20년 전에 조동종 종무총장의 이름으로 발표된 공식 문서라면서요. 이치노헤 스님도 그 문서를 보고 일본 불교가 본연의 자리에서 벗어나 침탈에 가담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저도 동국사의 이력을 찾다가 그 내용을 알게 되었는데, 동국사를 지원하는 모임까지 만들어 큰 힘을 주는 이치노헤 스님께 그 참사문을 새겨 동국사에 건립하는 것을 제안해 참사문비를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제막식에는 양심 있는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도 참가했었는데, 지금 일본에서는 그것 때문에 스님이 곤욕을 치르고 있어요. 조동종 본부에서 참사문비 철거를 요구하고 있거든요.-아베 신조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그 정도가 더 심하겠죠. 일본 우익세력의 준동도 이제 도를 넘어선 것 같던데 이치노헤 스님 같은 분들이 겪을 고통을 짐작할만합니다. 그렇지만 스님은 웬만한 압력과 협박에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작년 부산에 갔을 때는 일본 영사관 관계자로부터 한국입국이 제한 될 수 있다는 경고를 받았지만 스님의 의지는 더 결연해졌어요. 저도 스님 덕분에 일제의 조선침탈 뿐 아니라 중국침탈에도 눈을 뜨게 되어 해마다 남경학살 추모식에도 동행합니다.-스님은 어떻게 일제침탈의 역사에 주목하게 되었습니까.제가 동국사에 온 것이 2005년입니다. 그해에 대웅전 남쪽 범종 명문을 탁본했는데, 내용을 보니 단재 신채호 선생이 떠오르더군요.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하셨잖아요. 과거역사라고 해봤자 고작 60여년 지난 일인데, 이 사찰이 누가 언제 창건했는지, 주지는 누가 거쳐 갔는지 아무런 기록이 없는 거예요. 한 줄의 글도, 한 장의 사진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 저를 움직이게 했지요. 일본 사찰로는 유일하게 남은 이 절을 통해 일제 식민지 역사를 후손들에게 알릴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것만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동국사의 의무라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자료 수집에 나섰어요.-불과 60여 년 전 역사라고는 하지만 자료 찾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실제 전국을 다니면서 보니 대부분 훼손되었거나 멸실되었더군요. 특히 전라북도 안에는 일제 사료가 거의 없었습니다. 일본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는데, 일본에는 자료를 구할 수 있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긴 하지만 드나들기도 쉽지 않고 경비도 부담이 되었어요. 그래도 힘닿는 데까지 하나씩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습니다.-전북에 일제 강점기의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어떻게 보면 군산을 비롯해 수탈의 기지였던 전북이야말로 자료가 많이 남아 있을 것 같은데요. 저도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이유가 있더군요. 해방되던 해에 전북에서 모든 자료를 15일 동안 소각했다는 기록을 철수작전이란 일본 자료에서 보았습니다. 공장과 관공서 소각장에서 태웠는데, 일주일동안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을 정도로 많은 양을 태웠다고 합니다. 당시 도청의 국장급 정도 되는 일본인 관료가 진행한 일인데, 이 사람이 각 시군에 자료를 다 태우라고 지시를 내렸더군요. 전북에 유독 남아 있는 자료가 없는 이유가 그 때문인가 싶었죠. -그럼에도 스님은 많은 양의 사료를 수집했으니 근대문화유산도시를 표방한 군산으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제 침탈사와 관련한 사료로는 가장 많다고 하더군요. 양으로도 그렇지만 질적으로도 괜찮은 사료들이 많습니다. 다만 아직은 개인적으로 수집한 것들이어서 공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쉽습니다. 사실은 이제 보관의 문제도 심각한 지경이에요.-우선은 그렇게 많은 사료를 보관하는 일이 어렵겠는데요. 자치단체나 대학에서 이런 사료들에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이 뜻밖입니다. 자치단체에 무상기증의 뜻을 밝혔는데 합의되지 못한 조건이 있어서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일제 침탈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작은 전시공간을 동국사 근처에 마련되기를 바라거든요. 그래야 동국사가 갖고 있는 상징성, 역사적 의미가 후손들에게 제대로 전해질 수 있을 테니까요. 거창한 박물관 같은 시설이 아니고도 제대로 시설만 갖춘 전시실이면 좋겠어요. 그런데 자치단체로서는 그것이 어려운 모양입니다. 한편에서는 이런 사료들을 특정 종교에 대한 지원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니 안타까운 일이지요.-연구자들이 주목하고 그 가치를 알게 되면 혹시 다른 지역이나 기관에서 오히려 관심을 갖지 않을까요. 다른 지역으로 넘어갈까 걱정도 되는군요. 올해 성균관대에서 예산을 세워 일부 사료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이죠. 사실 사료라는 것이 무조건 수집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어서 그동안 몇 차례 기획전시를 했는데 개인적으로 역부족이었어요. 전시공간이 없어 법당 한쪽에 전시장을 마련했는데 시설은 변변치 않지만 아쉬운 대로 전시는 할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올해는 신사와 군사 자료를 전시합니다. 제 바람은 동국사 근처에 전시실을 마련하는 것이니 그 소망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지난 설 연휴에 산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여건이 좀 나아졌습니까. 그런 결정을 내릴 때는 얼마나 답답하고 마음이 편치 않았겠습니까. 화장실은 시도 때도 없이 고장이 나고 언제 어떤 시설이 훼손될지도 모르겠고, 쓰레기는 쌓이고 도저히 그대로는 안 되겠더군요. 절박한 심경으로 내린 최후통첩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몇 가지 대책을 시가 세운다니 기다려봐야죠.-군산은 근대역사문화경관지구까지 조성하면서 근대문화유산의 도시로 가꾸어나가겠다는 정책을 갖고 있는데, 그 상징적 공간인 동국사의 존재를 주목하지 않는 상황은 어떻게 봐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초 근대역사문화경관지구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참 황당했었어요. 내부적으로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가 중심이 되는 사업이라면 동국사는 중요한 공간이잖아요. 치욕의 역사도 역사입니다. 후손들이 그런 역사를 기억해 오늘의 교훈으로 삼게 하는 일이 필요한 것 아니겠어요.-스님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신다고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이 어려운 일을 하면서 일본을 더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고 하셨는데요. 그러니 마음이 어지럽습니다. 일본강점기 마지막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가 남긴 연설 내용을 보세요. 우리는 비록 전쟁에 패했지만, 조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우리(일본)는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놓았다. 조선인은 분열하기 좋아하고 싸우기 좋아하고 이간질하기 좋아한다. 조선인이 제정신을 차리고 옛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 더 걸릴 것이다.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고 했잖아요. 정말 섬뜩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거기 있습니다.-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일본의 아베 총리는 아베 총독의 손자입니다.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군요. 물론입니다. 지금 드러나고 있는 일본 관료들의 역사관을 보세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망언들은 정말 어처구니없잖아요. 게다가 최근에 있었던 우리의 교과서 왜곡사건은 또 어떻습니까.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식민사관에 물들어 있는 이 치욕적인 상황을 벗어나는 일은 일제강점기 역사를 직시하는 일입니다. 그러려면 우선 실질적인 사료를 찾아 후손들에게 보여주고 깨우쳐주는 일이 중요해요. 제가 사료수집을 중단할 수 없는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동국사는 종걸스님을 만나 제 역사를 찾았고, 스님은 동국사를 만나 일제강점기 우리 역사에 눈을 떴다. 동국사는 조계종 24교구인 선운사의 말사다. 스님이 동국사에 머무를 수 있도록 확정된 시간은 앞으로 3년이다. 그래서 스님은 마음이 조급해진다고 했다. 동국사 근처에 일제 침탈사 전시관을 마련하는 일이 과제로 안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뜻을 바로 세웠으니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라고 스님은 믿고 있다. 그 믿음이 곧 희망이다.● 종걸 스님은 - 40대에 출가2005년부터 동국사와 인연종걸스님의 고향은 경남 함양이다. 어린 시절 그는 외갓집에 살았다. 외할아버지는 학문에 관심이 커서 집에 서당을 차리고 선생을 모셔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게 했다. 스님도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어깨너머로 서당공부를 했다. 정자문화가 꽃피었던 함양은 마을 가깝게 흐르는 강위에 정자가 유독 많았으며 강과 정자를 잇는 암벽에는 암각화가 이어졌다. 고향의 풍요로운 문화와 분위기를 좋아했던 어린 시절, 같은 또래와 어울리기 보다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겼다. 아버지는 과거급제한 집안의 장손에 대한 교육열이 남달라 중학교 졸업할 즈음 교육을 위해 거창에 살림을 냈다. 기독교 계열의 고등학교를 다녔으나 불교에 심취했던 그는 스님이 되는 길을 선망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출가하여 해인사에서 행자생활을 1년 정도했지만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와 고등학교 학력은 갖추어야 스님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돌아왔다. 그러나 절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은 시간이 갈수록 요원해졌다.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기업에 취직을 했지만 몽중몽(夢中夢)이라, 모든 일상의 꿈이 절집에 닿아있었다. 인생에 큰 변곡점은 없었으나 꿈을 꾸어도 절집에 있는 꿈을 꾸었고, 몽상을 해도 산속에서 노는 삶을 상상했다. 속세의 삶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 의문이 생겼다. 40대에 출가를 결행했다. 그때서야 집안에서도 진즉 풀어줬어야 할 일이었다며 받아들여주었다. 중앙승가대학을 거쳤고, 승가대 신문사 편집국장으로 일했다. 선운사 내장사를 거쳐 군산 성불사 주지로 있다가 은사인 재훈스님의 뜻을 따라 동국사로 옮겨와 재훈스님이 입적하신 이후 동국사 주지가 되었다. 2005년 동국사와 인연을 맺은 이후 9년. 수행하는 시간 외의 대부분 일상은 일제강점기 역사의 흔적을 좆는 일에 대부분 놓였다. 동국사 역사를 추적하다 발전된 일제침탈사 사료수집은 적지 않은 경비를 필요로 했으나 기본적인 의식주만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스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일본의 평화운동가이자 진보적 종교인인 이치노헤 쇼코 스님과의 인연은 역사관을 더 치열하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종걸스님이 그동안 수집한 사료는 5000여 점. 절집의 여러 공간을 채우고도 모자라 스님의 방은 간신히 누울 자리만 비워놓고 온갖 사료들이 들어차있다. 그래서 사료 관리하는 일이 점점 더 버거워지지만 사료 수집은 계속할 생각이다. 군산경실련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4.03.06 23:02

40년만의 회향전 마친 김병종 교수

개막을 하루 앞둔 전시실은 부산했다. 화가의 그림을 넉넉하게 품은 다섯 개 전시실이 30여년 세월을 교직하며 어깨를 잇는 동안 모악산의 기운은 생동하는 듯 공간을 가로 질렀다. 해가 엎드려가는 늦은 오후, 서울에서부터 달려온 관객이 있었다. 다음날 폐암수술이 예정되어 있는 시인이었다. 수술 받는 병실에서 이 그림을 생각하며 기운을 받고 싶어전주행 고속버스를 탔던 시인은 잰걸음으로 전시실을 돌아보았다. 되돌아가는 시인의 걸음이 가벼웠다. 지난 16일 끝난 김병종 교수의 회향전이 열린 전북도립미술관의 한 컷 풍경이다. 김병종 교수(62, 서울대 미술대)가 30년 화업의 의미를 담아 올해 초 고향에서 처음으로 회향전(回鄕)을 열었다. 전북도립미술관 5개 전시실과 전주한옥마을의 교동아트미술관을 가득 채운 그의 그림들은 많은 관객들을 감동시키고 열광케 했다. 전시는 한 달을 훌쩍 넘기는 짧지 않은 일정이었지만 관객 행렬은 이어졌다. 엄마 따라 온 초등학생은 그림이 너무 재밌다. 나도 화가가 되고 싶다는 글을 남겼고, 바보예수 연작이 놓인 전시실을 돌아보던 50대 관객은 끝내 눈물을 흘렸다. 80년대부터 시작된 그의 화업 노정은 늘 빛났다. 그의 작업은 고난을 마주했을 때 더 힘을 얻었다. 바보예수 생명의 노래, 그리고 다시 만난 길 위에서의 연작은 10년을 주기로 그의 분출하는 창작 열정을 담아 우리 앞에 놓였다. 돌아보니 그의 작업에 국내외의 평론가들이 주목하며 헌사를 올리는 이유가 있었다. 늘 한 장르와 한 소재에 머무르지 않고 실험적인 영역에 도전해온 예술정신은 한국화의 새 지평을 열어 세계를 주목하게 했다. 전시 막바지, 화가를 만났다. 인터뷰의 대부분 시간이 화가의 유년에 놓였다. 그 기억은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이거나 에너지로 차고 넘쳤다. 그의 화폭에 생명이 넘실거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회향의 의미가 각별하게 와 닿는 전시였습니다. 전시회 또한 기대 이상의 많은 관객들로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외형적 성공도 그렇지만 교수님께는 특별한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털어놓자면 이처럼 훈훈하고 아름다운 전시를 또 어디서 할 수 있을까 할 만큼 만족스러운 전시였습니다. 작가로서는 대단히 축복받은 기회라고 할 수 있죠. 전시실과 작품이 이처럼 잘 소통될 수 있을까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작품을 펼쳐놓은 전시실에 처음 들어섰는데 모악산의 어떤 신비한 기운이 전시공간에까지 들어와 가득 차있는 느낌이 있었어요. 굉장한 경험이었습니다.-도립미술관의 공간성에 대한 새로운 발견입니다. 처음 도립미술관을 이곳에 지을 때 지역사회로부터 엄청난 저항이 있었거든요.미술관의 역할로 보자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이번에 받은 느낌은 사뭇 다릅니다. 유명한 건축가들이 지은 대도시의 아름답고 세련된 미술관은 얼마든지 많이 있죠. 이즈음에는 미술관이 본래의 기능에 충실한 미술관보다는 아무개 건축가 작품으로 브랜딩 되면서 정작 그 공간에 전시되는 미술작품들은 종속품으로 존립하게 된 경우가 많습니다. 도립미술관은 그런 미술관과는 달리 관객들이 작품으로 만나고 어우러질 수 있게 하는 공간성이 돋보이는 곳이더군요. 전시장을 다녀간 전문가들도 한결같이 그런 독특한 분위기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전시회의 여진이 상당히 큽니다.(웃음)-그 어느 때보다도 설레였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외국의 이름난 미술관이나 갤러리 초대전과는 어떤 점이 달랐는지 궁금합니다. 전시 할 때 작가는 늘 공간을 염두에 둡니다. 독일의 구아르니미술관, 파리의 몽뜨니나 가나보부르 갤러리, 헝가리의 기욜시립미술관 등에서도 전시 했지만 500호 1000호를 비롯한 대작과 화업 30년을 읽어낼 수 있도록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내는 공간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동안의 전시는 공간 규모도 그렇지만 특히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지면서 따뜻한 기운이 소통하는 전시는 아니었어요. 작품을 내보이고 관객들이 왔다 흩어지는 통상적 전시랄까. 그래서 저의 사적 비전을 전시를 통해 공적 논리화 시키는 이런 대규모 전시로 연출된 유니크한 분위기가 더 강하게 와닿았던 것 같습니다.-관객들의 반응도 특별했습니다. 바보예수 생명의 노래 길 위에서로 이어지는 연작의 스펙트럼이 주는 감동이 워낙 강했던 것 같은데, 그림이 관객들과 어떻게 소통되기를 원하십니까. 사실 작품에 몰두하면 완전히 자아중심적이 됩니다. 관객들과 소통하겠다는 의지까지 미치지 못하죠. 주관적인 어떤 느낌 속에서 만들어내는 작품에 공감하고 호응해주는 관객들의 반응은 그래서 더 큰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경험은 물론 국내보다 외국 전시에서 더 크게 와닿습니다. 그런데 작품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을 지난 30여 년 동안의 여정 속에서 돌이켜보면 다양한 울림으로 왔던 것 같습니다. 바보예수 연작은 초기에 대단한 논란의 대상이 되었어요. 바보라는 단어가 신성모독이 아니냐는 지탄부터 거칠게 부딪쳐 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바보예수라는 명제가 갖는 상징성을 이해하고, 오히려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관객들이 많습니다.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던 부분까지 끄집어내는 관객들, 진정성을 갖고 진솔하게 그림과 교유하는 관객들의 늘어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겠죠. 물론입니다.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는 동력 중의 하나가 바로 그런 관객들을 만났을 때예요. 저를 다시 일으켜주는 에너지를 제공하거든요.-관객들과의 소통을 이야기하자면 화첩기행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화첩기행은 지금껏 시도된 기행문학 중에서도 화첩이라는 형식을 새롭고 독창적인 영역으로 확대시키면서 낙양의 지가 를 올렸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인기를 얻었죠. 두려울 만큼 독자들의 반응이 높았었습니다. 사실 저의 40대와 50대의 가장 굵은 지점이 온전히 화첩기행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죠. 화첩기행은 제가 내밀하게 실험해왔던 결과물입니다. 문학소년, 문학청년기를 보내면서 안고 있던,문학이라는 가지 않는 길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 이 책을 만들었습니다. 늘 수채화 같은 문장과 시 같은 그림을 한 화면에 놓을 수는 없는 것인가 생각했거든요.-이번에 북아프리카기행을 담은 5권을 내면서 예전의 화첩기행을 전면 개정해 출간했는데 개정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첫 권을 낸지 15년 지나니 내용의 보완이 필요했습니다. 5권을 펴내면서 이 기회에 내용도 보완하고 전집 형식으로 구성했어요. 처음 책이 나왔을 때 보여준 열광적 반응은 아니지만 독자들의 관심이 기대 이상으로 높다고 합니다. 옛 가수가 다시 무대에 선 것처럼 긴장도 되는데, 제 작품에 대한 순수한 독자층과 색깔 있는 문장에 호응하는 독자층이 어우러지면서 제게 글을 쓰게 하는 힘의 동력이 됩니다.-그림은 물론이고, 교수님의 강연을 듣거나 글을 보면 고향과 유년의 기억이 유독 짙고 깊습니다. 유년의 기억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열두 살, 열세 살까지의 삶이 한 사람의 생애를 책임 짓는다고 생각합니다. 제 작품의 주제, 이를테면 바보예수나 생명의 노래 연작의 원소도 모두 유년시절의 종교체험과 자연체험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죠. 연을 날리는 실이 연자에서 풀려나듯이 그림의 근원을 좇아가보면 역시 연자에 감겨있는 실처럼 내 유년의 나날들이 거기 감겨 있습니다. 지리산의 부성적 강인함과 섬진강의 모성적 푸근함에 제 유년시절이 놓여있습니다.-화가로서는 매우 소중한 체험이었겠습니다. 오늘의 김병종을 있게 한 유년의 체험이 그래서 더 궁금해집니다.어렸을 때부터 저는 유난히 그림그리기를 좋아했어요. 그런데 그 재능을 인정받지 못했죠. 아버님이 열 두살때 돌아가셨는데, 집안 어른들은 집안이 기울어지는 것과 제가 그림을 그리는 것의 관계를 특별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환쟁이를 만들 수는 없다 싶었겠죠. 그래도 늘 그림을 그렸어요. 땅에도 그리고 허공에도 그렸죠. 그러다가 들키면 쥐어 박히는 일이 허다했는데, 그 어린나이에 나는 이 길을 갈 수 밖에 없나보다는 생각을 했었어요.-그러한 예술적 재능은 누구로부터 받았습니까. 제 기억으로는 아버님이 취미로 사군자를 그리셨어요. 제가 열두살 때 돌아가셨는데, 학교 가다 다시 돌아와도 혼내지 않고 오히려 잘했다고 해주셨죠.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3남 3녀를 키우셨는데, 그만큼 힘이 드셨을 텐데도 그런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결코 부유하지 않은 생활이었는데도 그런 환경을 절감하지 못할 정도로 늘 낙천적이고 긍정적이셨어요. 우리 형제가 모두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어떤 어려움을 마주해도 그 어려움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관점이 있습니다.-어머니도 그림 그리는 일을 반대하셨습니까. 반가워하지는 않으셨죠. 제가 엉뚱한 일을 많이 했거든요. 중학교 2학년 때 했던 전시회 주제가 유혹이었어요. 어른들 눈으로는 이상한 그림들이었죠. 크리스마스 카드를 그려 팔고, 만화나 부교재를 그대로 그려 아이들에게 반값으로 팔기도 했어요. 펜으로 똑같이 그린 책이니 아이들은 좋아했지만 부교재를 권한 체육선생님은 아주 기분 나빠하셨죠. 이런 일들이 어머니와 형님들의 귀에 들어가면 상심이 컸습니다. 그래서 더 강압적으로 그림을 못 그리게 했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유년의 나를 알릴 수 없는 곳, 이해받을 수 없는 곳, 억압된 곳이란 인식이 제 삶에 긍정적인 면 부정적인 면으로 작용해왔던 것 같아요. 아직도 열두 살 어린아이가 자라지 않고 내면에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도 그림 그리는 일을 끝내 놓지는 않았군요. 그림에 대한 욕구가 봇물 터지 듯했거든요. 나름대로 절제는 했지만 장강대하처럼 나오는 욕구를 통제하기 힘들었죠. 그런 열정은 지금도 달라진 것 같지 않아요. -교수님의 엄청난 작업양은 어린 시절부터 지속되어 온 것이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강의실에 들어갈 때면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가르치는 일에 대한 희열 때문이 아니라 반짝이는 제자들에게 뒤지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죠. 그래서 제대로 했느냐고 하면 명쾌하게 답할 수는 없지만 양적인 면에서라도 뒤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해온 것 같긴 합니다.-이번 전시는 한 화가의 화력을 들여다보는 의미로서 뿐 아니라 고향과 유년시절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들 합니다. 그동안 연작들이 10년을 주기로 새롭게 등장했지만 그 중심을 관통하는 주제는 역시 생명입니다. 그 원소 역시 유년시절로부터 나온 것이겠지요. 물론입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서울대 미술대 출신 중 외국으로 가 다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자기 발전을 위한 일이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자기세계를 찾는 일은 감성의 문제입니다. 예술가가 자기만의 원소를 발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죠. 내 경우에는 생명이라는 원소를 모으기 위해 외국으로 눈을 돌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내가 지닌 토속적 정서 속에 널려있는 자원과 재료들이 아직도 무궁무진하거든요. 그런 면에서 이곳을 고향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축복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내 작업을 통해 연자에서 실이 풀려나오듯 끊임없이 서로 먼저 다투어 나오려고 하는 것들은 결국 유년의 체험과 상상력의 응축이고 소산이예요.-남원에 건립되고 있는 미술관에 관심이 높습니다. 미술관 하나가 도시의 문화를 이끌고 발전시키는 선례가 많이 있더군요. 유년을 보낸 고향 남원은 특별한 도시였습니다. 유년의 나날들에 자연이 주는 풍성한 감성과 색채는 넘쳐났는데 문화적인 공간이나 체험은 전무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서 좁고 답답한 고향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그림 그리는 일을 반대하고 핍박했던 것도 문화공간의 부재에서 온 것 일겁니다. 저의 어린 시절 야생의 들풀처럼 아무런 문화적 혜택을 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좋은 체험을 돌려주고 싶다는 바람이 큰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예산 규모는 다른 미술관에 비해 아주 적던데 그 역할에 대한 지역사회의 기대는 커서 부담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국에서 제일 작은 미술관이 될 것 같아요. 적당한 규모가 필요하지만 어떤 콘텐츠로 미술관을 구성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여서 규모에만 연연하고 싶진 않습니다. 남원이 지닌 문화적 잠재력을 이 공간에서 키워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전시 못지않게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구성해 남원 문화를 이끌어가는 예총과도 교류하면서 유니크한 공간으로 운영해볼 생각입니다. 마침 남원시에서 복합문화공간인 한타운 아트밸리를 조성하고 있는데 소리문화체험과 도예가들의 작업장, 고서점과 자연캠프 등이 들어선다고 하더군요. 제가 구상하고 있는 미술관의 프로그램이 이 공간들과 결합하면 더 좋은 인프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겁니다.김교수는 이번 전시에 대한 감회가 특별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그는 30년 작업을 한자리에 펼쳐놓고 보니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몽롱했던 행선지가 보인다고 말했다. 그가 다시 열어놓을 새로운 길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김병종 교수는 한국화 새 지평 연 '화첩기행' 화가로 유명김병종 교수(서울대 미술대)는 1953년 남원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책읽기와 그림 그리는 일을 좋아했던 그는 책이 많았던 친구 집에서 빌린 책들을 가리지 않고 읽으며 책읽기의 갈증을 풀었지만 그림그리기는 아이의 재능을 미리 막고자 했던 집안 어른들의 강한 반대로 늘 경계의 대상이 됐다. 열두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장이 된 어머니도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품이었지만 막내아들의 재능을 응원하진 않았다. 그럴수록 장강대하처럼 분출되는 욕구는 스스로도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넘쳐 중학교 2학년 때 남원 시내 다방에서 첫 전시를 열고 시집을 펴냈다. 늘 그림을 못 그리게 되지는 않을까 조바심으로 불안했던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찬밥 비벼먹고 완행열차 타고 영등포역에 내렸다. 좋은 그림 그리는 화가가 되겠다는 각오는 여물고 단단한 것이었으나 그에게 그리는 일은 잘 해보라는 응원을 받으며 해온 일이 아니라 눈물겨운 간절함으로 해온 절박한 일상이었다. 지금도 그림을 못 그리게 되는 악몽을 꿀 정도로 그리는 일에 대한 핍박은 트라우마가 되었지만 서울대 미술대를 들어간 후 재능은 제대로 빛을 냈다. 전국대학미전에서 대통령상을 받고 시와 소설로 서울대문학상을 휩쓸었으며, 희곡 여러 편이 무대에 올려졌다. 동아일보 (1980)와 중앙일보(1981) 신춘문예로 문단에 데뷔한 그는 대한민국문학상과 삼성문화재단 저작상 등의 수상작가로서도 이름을 알렸다. 90년대 후반에는 글과 그림을 아름답게 조화해낸 화첩기행으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기행문학의 여정은 지금까지도 계속돼 최근 북아프리카기행으로 다섯 번째 화첩기행을 펴냈다. 80년대, 작업을 시작했을 때부터 새로운 형식과 명료한 주제의식으로 한국화의 새 지평을 열어왔던 그는 가장 한국의 원초적 정서를 다양한 형식에 담아내면서 국내외 평론가들의 관심과 헌사를 받아왔다. 프랑스 헝가리 영국 미국의 이름난 미술관과 갤러리가 그를 초대했으며 런던의 대영박물관을 비롯해 세계의 주요 미술관과 기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서울대 미술대 학장과 미술관장을 지냈으며 30년 동안 가르치는 일을 해오면서도 반짝이는 제자들에게 뒤질까 두려워 그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남원 송동면에 2016년 문을 열 작고 아름다운 미술관이 건립되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4.02.20 23:02

전주출신 가야금연주자 김일륜 중앙대 교수

지난해 11월 29일 이른 저녁, 서울의 국립국악원 우면당 300여석 객석을 가득채운 관객들은 환호했다. 가야금에 판소리를 얹힌, 혹은 판소리에 가야금을 새긴 새로운 병창의 세계. 무대는 치열했으며 객석은 설레였다. 김죽파류 가야금산조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기고, 가야금병창으로 들려준 호남가에 신명났던 객석은 판소리 춘향가를 가야금과 아쟁, 북에 얹어낸 입체창과도 같은 새로운 연희형식을 만나 온전히 매료됐다. 가야금 선율은 긴장과 여운의 경계를 넘나들고, 소리의 공력은 깊어 소리가 먼저인지 가야금이 먼저인지 분별하는 일 조차 무의미해졌다. 가야금연주자 김일륜 교수(54, 중앙대)의 스물두 번째 독주회. 농현담성(濃絃淡聲)이란 주제를 붙인 그의 소릿길 두 번째 무대였다. 최옥삼류 산조의 일인자로 꼽히는 그는 전통을 올곧게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변화를 위한 다양한 시도와 도전을 해온 연주자다. 80년대 중반부터 국악실내악단(어울림)과 가야금삼중주단(서울 새울)을 만들어 국악실내악운동을 펼쳐온 그는 가야금만으로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국악대중화의 새로운 물꼬를 튼 주역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배우고 연구하면서 국악대중화의 지평을 즐거움으로 열어가고 있는 그를 만났다. 전통과 창작의 경계를 넘나들면서도 어느 한쪽도 소홀하지 않고 온전히 자기 음악세계로 만들어내는 지치지 않는 열정이 궁금했다.돌아보면 가야금 선율로 연주하는 캐논변주곡에 맞춰 춤을 추는 비보이 광고로 화제가 된 숙명가야금연주단도 그가 만들어낸 최초의 가야금오케스트라다. 연주곡들은 또 어땠는가. 전통가락이 아닌 비틀즈의 팝송이나 비발디의 사계, 탱고음악까지 대중들에게 친숙한 곡들을 가야금으로 연주하고,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춤까지 추는 파격적인 시도에 경계와 비판이 없었을 리 없다. 음악은 시대에 따라 변합니다. 변할 수밖에 없어요. 그 시대에 필요한 음악과 양식을 접목시켜 가야금을, 우리음악을 대중들에게 알리고 대중들이 즐길 수 있게 하는 일을 연주자들이 스스로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어요. 전통을 흔들거나 깨트리는 일이 아니고, 더 가치 있게 지켜가는 일입니다. 그래서 비판과 우려도 두렵지 않죠. 그가 밝게 웃으며 되물었다. 도대체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확신에 가득찬 그와의 인터뷰는 그래서 더 즐거웠다. -작년에는 연주회가 유독 많았던 것 같습니다. 연말에도 지천명산조축제에 독주회까지 바쁘셨죠. 연주를 많이 하는 편이긴 하지만 지난해는 독주회까지 겹쳐 좀 정신없이 보냈습니다. 독주회는 판소리까지 새로운 형식으로 입혀내다 보니 더 많은 준비를 해야 했어요.-반응이 아주 뜨겁던데요. 이미 2011년 독주회에서도 시도했던 형식 아닌가요. 춘향가 한바탕을 떼어서 가야금에 올려서 불렀습니다. 지난 독주회에서는 사랑가부터 이별가까지 했고, 이번 무대에서는 옥중가부터 마지막부분까지 이었어요. 가야금 뿐 아니라 무대에 선 아쟁연주자와 고수도 함께 했는데 아니리도 주고받고 하다 보니 작은 입체창 무대 형식이 되었습니다. 관객들도 새롭게 접하는 형식이었으니 화제가 되었던 것 같아요.-실내악단 어울림에서도 국악가요를 불렀는데, 소리에 남다른 재능과 애정이 있나봅니다. 어릴 때부터 소리가 좋았어요. 중간에 판소리 배우는 일을 작파했지만, 병창도 그렇고 저에게 잘 맞는다는 생각을 하죠. 늘 마음에 두었던 판소리를 2009년부터 시작했는데, 3년 만에 떼었어요. 적지 않은 시간을 바쳤는데, 기왕에 시작한 일이니 다섯 바탕은 못해도 적벽가는 꼭 하고 싶습니다. 내년 3월부터 다시 시작할 계획인데, 삼국지부터 읽으려고요.-늘 새로운 것을 향한 열정이 식지 않는 비결이 뭘까요.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우리 가락을 몸과 마음에 얹고 살아와서 그런 것 아닌가 싶어요. 무엇인가 시작을 하면 온전히 몰두하는 습성이 있는데, 그것이 끝나고 나면 또 거기서 다시 새로운 것을 시작하게 되거든요. 일상이 그런 것 같아요.-서울대 국악과 출신들은 대부분 정악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민속악 분야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은데, 그에 비해 그동안 민속악 분야의 작업을 많이 해온 것 같습니다. 어려움은 없었나요.우려가 많았지요. 실제로 하고 싶은 일을 접은 적도 많습니다. 그래도 제 음악을 확장시키기 위해 여러 장르를 공부하고 섭렵하는 일을 밀어내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섰죠. 덕분에 조금은 그런 분야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사실 도제식 교육이 바탕인 국악분야에서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완고해서 계통을 벗어나는 일이 쉽지 않죠. 그런데도 그 새로운 도전과 시도가 줄기차게 이어졌던 것을 보면 스승으로부터 미움을 안받으셨나봅니다.(웃음)그런 우려가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제가 하는 일에 많은 스승들이 힘을 주셨어요. 제가 시도하는 실험적인 일들이 전통의 입장에서 보면 일탈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궁극적인 지점은 오히려 전통의 가치를 제대로 이어가는데 있거든요.-실제 가야금의 전통가락을 얻기 위해 많은 공력을 쏟으셨죠. 산조만 해도 여러 가야금명인들의 산조를 다 섭렵했는데, 한 연주자가 여러 유파를 연주하는 일은 굉장한 공력이 필요한 일 아닌가요. 가야금연주자로서 당연한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술은 시작은 있으나 끝은 없는 것 같아요. 특히 산조는 국악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분야거든요. 그래서 한 유파를 온전히 받아들이는데도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지만 여러 유파의 산조를 섭렵해야 비로소 제 음악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일전에 교수님의 산조연주에 어떤 류의 산조를 연주하더라도 원곡을 뛰어넘는 아름다움을 표현한다는 평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극찬을 들으면 연주자로서 이제 됐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황송하죠. 그러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스스로 그렇다고 생각해 안주하고 싶다거나 연습을 게을리 한 적은 없습니다. 연주자는 평생을 연습해도 늘 부족하거든요. -김일륜이란 이름을 대중들에게 알리기 시작한 것은 역시 국악실내악단 어울림이겠죠. 국악은 고루하고 재미없다는 인식이 있던 시절이었는데, 당시 슬기둥과 어울림이 국악실내악단으로 창단하면서 우리악기와 연주를 대중화하는 일에 나섰어요. 국악실내악운동의 물꼬가 트였지요. 우선 대중들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음악이 친숙해져야 하니 국악가요도 만들어 연주했는데, 노래를 제가 불렀어요. 그때부터 부른 가요가 제법 되어서 그 곡만 모아 음반으로 낼까 계획하고 있습니다.-서울 새울 가야금 삼중주단도 이름을 알렸죠. 연주 실력도 빼어난 세 명 가야금주자들이 모인 단체여서 더 그랬고요. 90년에 창단했는데 가야금중주단으로는 그것도 처음이었죠. 새로운 울림이라는 뜻을 담아 서울 새울이란 이름을 붙였는데, 91년에 창단공연을 비롯해 그 이후에도 박범훈 백대웅 이병훈 선생님 같은 작곡자들이 창작곡을 많이 주셨어요. 국악 대중화에 기여했다면 이런 뜻과 열정이 모여진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실제 실내악 운동은 국악대중화의 물꼬를 텄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교수님 개인적으로도 동력이 되었을 것 같은데요. 물론입니다. 실내악 운동은 제게 굉장한 에너지가 되었어요. 덕분에 또 하나의 기회가 주어졌는데, 아무연고도 없는 숙명여대 대학원에서 가야금만으로 대학원을 만들어 저를 불렀거든요. 한 학년에 10명씩 40명 학생들과 만나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가야금오케스트라를 생각해냈어요. 처음엔 연주할 수 있는 곡이 없어 가야금 파트를 나누고 기존 관현악단에서 연주하는 곡들을 다시 구성해서 나누어 연습했죠. 그러면서 비틀즈의 팝음악, 비발디의 클래식 작품 등 대중들이 친숙한 곡들을 편곡해 연주하기 시작했어요. 요즈음 연주단체들이 쓰는 비틀즈 메들리도 저희가 처음 얻어 연주한 것이에요. -국악실내악도 그렇고 전통 악기인 가야금으로 다양한 곡들을 연주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가장 큰 어려움이 바로 그것이었죠. 우리 가야금이 5음계라는 것, 한계가 분명하거든요. 중국 일본 악기는 음역이 넓어 우리 악기보다는 한결 나은데,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었어요. 86년도엔가 대만에서 서울대로 유학 온 쟁 연주자가 있었는데, 그를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으로 따로 초대해 쟁을 배웠죠. 그러면서 숫자보를 비롯해 중국의 음악을 폭넓게 접하게 되었는데, 우리 가야금이 어떻게 개량되어야하는지를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고민하고 답을 찾기 시작했어요.-음계를 넓히는 작업이 가장 우선이었겠군요.그렇죠. 정악청부터 민요청까지. 물론 그 안에는 산조청이 들어가죠. 그것이 다 호환될 수 있는 음역이 이 플렛부터 에이 플렛까지인데, 25현을 7음계로 쌓아보니까 되더라고요. 그때가 90년대였는데, 마침 박범훈교수님도 그런 부분을 많이 고민해서 22현으로 연주할 수 있는 곡을 만들었거든요. 95년에 제가 연주했던 새산조 22현이 그 곡입니다. 국내 초연이었죠. 그래도 저음이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25현이 필요하더라고요. 그래서 악기장에게 부탁해서 25현 가야금을 만들었어요. 줄 간격까지 다 정해주면서 제작했는데, 그동안 안고 있던 문제점이 어느 정도 해결된 거예요. 그렇게 제작한 가야금이 지금은 가야금 연주자들의 필수적인 악기가 되었죠.-25현 가야금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군요. 만들어진 배경도 흥미롭고요. 악기장 입장에서는 전통악기를 만드는 일과 다르니 마뜩치 않았겠습니다.악기장 선생님은 처음에 25현을 의뢰하니까 나는 12현만 만들지 그런 악기는 안 만든다고 단호한 입장이었어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수요가 많아지니까 하루는 내가 25현 만들어도 되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제발 만드시고 연주자들에게 싸게만 돌려주세요했지요.-의미 있는 일을 하셨군요. 25현은 12현 전통가야금 연주가 지닌 깊은 맛과는 또 다르지만 대중들이 가야금과 친숙해지는 데는 좋은 통로가 되는 것 같습니다. 변화 있고 다양한 곡을 연주하거나 서양악기와 협주는 25현이어야 하니까요. 12현 전통악기로는 그런 변화를 담아내는데 한계가 있죠.-전통악기 연주자가 악기까지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에 비판은 없었습니까. 왜 없었겠어요. 죄인처럼 만들었죠. 야단도 들었고요. 그래도 제 생각에는 연주자로서 좋은 연주에 필요한 것은 다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가야금의 음역 확대가 꼭 필요했으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지요.-다시 판소리를 하게 된 이야기를 해보죠. 가야금으로는 다 이루어놓으셔서 새로운 영역을 시작하셨습니까.사실 판소리는 누구나 시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죠. 그런데도 이상하게 판소리도 하면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정작 해보니 어렵긴 하지만 춘향가 한바탕을 떼고 나니 그래도 아마추어 소리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어요. 즐기더라도 제대로 즐기고 싶은 것이죠. 그리고 중요한 것은 판소리가 가야금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인데, 제 음악을 넓혀주는 통로가 되죠.-소리를 하거나 아쟁을 하거나 모두 교수님의 작업 정점에는 가야금이 있고, 또 그 중심은 김일륜의 음악이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뒤돌아보니 열심히는 했더군요. 안정된 직장을 갖고나서도 안주하지 않고 열심히 걸어왔던 것 같은데, 그런 길이 후배 제자들에게 조금은 도움이 되고 존중 받을 수 있으면 좋겠죠.-늘 새로운 것을 공부하게 하고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대단한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 음악 연주자로서 어떻게 하면 한걸음 더 나갈 수 있을까 늘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과 태도가 일상이 된 것 같아요. 그것이 도전하게 하고 실험하게 하는, 이 시대의 음악을 찾아가게 하는 동력이라고 믿고 있습니다.인터뷰 말미, 그에게 우리 음악은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곧바로 답이 돌아왔다. 우리 음악은 제게 일상의 공기예요. 그러니 이 길을 열심히 갈 수 밖에 없는데, 서양문물이 들어오기 전에 국악이 누렸던 대중화의 인기몰이까지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하더라도 우리나라사람들이 대중음악 듣듯이 국악을 일상에서 즐길 수 있는 때가 왔으면 좋겠어요.사실 외국의 팝에 환호하고 대중가요에 마음을 뺏긴 세태에 일상 속 전통음악의 부활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그는 길이 보인다고 말했다. 30년 가깝게 이 시대의 음악을 만들기 위해, 대중들과 만나기 위해 그가 쌓아온 흔적과 결실을 돌아보며 갖게 된 확신일 것이다.● 김일륜 교수는 최옥삼류 가야금산조 일인자다양한 음악세계 시도최옥삼류 가야금산조의 일인자로 꼽히는 김일륜 중앙대교수는 전주 토박이다. 양쪽에서 떠오르는 해가 중간에서 수레바퀴처럼 하나가 되는 태몽을 꾼 아버지가 그의 이름을 일륜(日輪)이라 지었다. 초등학교 입학하기도 전에 춤과 소리를 배웠고, 남다른 재능을 주목받았다. 아버지(김세영씨)는 예술에 남다른 일가견을 갖고 즐기는 애호가였다. 그의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그림을 배우기 위해 남도의 허백련 화백을 찾아 나서 여러 달씩 집을 비웠던 기억이 생생하게 놓여 있다. 취미로 그림을 즐겼던 아버지는 그를 곁에 두고 화선지를 말게 하거나 난을 치는 것을 보게 했으며 천자문을 가르쳤다. 뭔가 알 수는 없지만 화선지에 번지는 먹의 농담(濃淡)이 황홀했다. 단소를 즐겨 불렀던 아버지는 아예 국악원(전주국악원) 열고 운영했는데, 덕분에 그는 소리며 춤을 그곳에서 배웠다. 워낙 재능이 탁월하기도 했지만 시키지 않아도 소리를 따라 부르며 좋아했던 그를 명고수 김동준선생이 눈여겨보아 소리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걸걸한 목소리가 다른 아이들의 목소리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더 이상 소리를 배우지 않고, 대신 가야금을 시작했다. 사춘기가 오면서 가야금을 손에서 놓았지만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그는 중고등학교시절엔 고적대장이며 응원대장을 도맡아 했다. 전주여고 들어갈 땐 동네의 예쁜 약국아줌마를 보고 약사가 되고 싶어 이과를 택했다. 그러나 고3 올라갈 즈음 그의 재능을 알고 있던 음악선생님이 서울대 국악과 지원을 권유했다. 가야금 연주자로서의 길이 그렇게 시작됐다. 대학 4학년,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한 미국 15개 대학 순회연주회에 참여했는데, 그때의 경험이 그에게 연주자로서의 길을 어떻게 가야하는지 깨우쳐주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곧바로 국립국악원 민속반에 들어갔다. 가야금병창을 맡게 되자 박귀희선생을 찾아가 병창을 배웠다. 스승은 어디 갔다 이제 왔냐고 반색할 정도로 그를 아꼈지만, 아쉽게도 적통을 이어받지는 못했다. 같은 직장에 몸담고 있던 남편(임재원 서울대 교수)을 만나 결혼하면서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으로 직장을 옮겼다. 국악대중화를 향한 도전과 실험이 시작됐다. 80년대 중반, 국악실내악 운동의 중심축이었던 어울림에 참여, 전통음악 뿐 아니라 창작음악과 국악가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을 섭렵하고 연주하면서 관객들을 국악으로 끌어들였다. 최초의 가야금중주단인 서울 새울을 창단해 가야금 앙상블의 새로운 영역을 열었고, 1999년 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교수가 된 이후에는 숙명 가야금연주단을 창단해 가야금의 대중화를 시도했다. 비발디의 사계, 비틀스의 팝송 등 친숙한 음악이 가야금에 얹혀 대중들을 끌어들였다. 그의 실험적인 도전은 늘 주목과 경계의 대상이 되었지만, 찬사에 들뜨거나 우려에 위축되지 않고 우리음악의 대중화의 의지를 지켰다. 중앙대 국악과로 자리를 옮긴 것이 지난 2007년. 그는 두 번째 가야금 오케스트라인 중앙가야스트라를 만들어 가야금의 창작세계를 더 새롭게 실현해가고 있다. 지난해 11월에 가진 농현담성까지 22회의 독주회를 가졌으며 최옥삼류, 정남희제 황병기류, 성금연류, 김병호류 김죽파류 신관용류 가야금산조를 완주했다. 독집만도 최옥삼류 가야금산조 농현을 비롯해 다섯 장의 음반을 냈다.

  • 기획
  • 김은정
  • 2014.01.23 23:02

판소리꾼 성대 연구하는 홍기환 전북대 의전원 교수

방송사마다 서바이벌 오디션(survival audition) 프로그램이 대세다. 노래와 춤이 가세하더니 최근에는 디자인까지 그 영역도 다양해졌다. 서바이벌 오디션프로그램은 이제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새로운 아이콘이 된 듯하다. 다양한 오디션 프로그램 중에서도 가장 큰 인기는 역시 가수를 뽑는 프로그램이다. 방송사의 케이팝(K-pop) 오디션을 보았다. 출연자들의 재능과 끼가 만만치 않다. 그래도 어찌됐든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누구는 뽑히고 누구는 탈락한다. 자연히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에 관심이 쏠리게 되는데, 심사위원 개인별 특성에 따라 쏟아내는 평이 또한 흥미롭다. 어떤 심사평은 유행어로 발전해공기반 소리반과 같은 용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명징하지는 않지만, 충분한 호흡으로 자연스럽게 내는 소리를 뜻한단다. 그런 소리를 갖고 있다고 칭찬을 받는 출연자는 드문 것을 보니 그렇게 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언제부터 우리민족은 노래를 저렇게 잘했을까 궁금해졌다.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에게는 판소리와 같은 독창적인 노래가 있다. 판소리는 거칠고 쉰 듯 한 탁성의 결정체다. 맑고 깨끗한 소리를 중시하는 서양의 오페라 가수들이 지향하는 소리와 비교해보면 정 반대의 소리다. 그런데도 오페라를 일상에서 즐기는 유럽인들 중에는 이 탁하기 만한 판소리에 열광하는 관중이 적지 않다. 판소리의 예술적 가치와 특성이 주목받는 이유다. 판소리꾼의 성대를 연구해온 전북대 의학전문대학원 이비인후과학교실 홍기환교수(58)를 만났다. 국내음성 질환의 명의(名醫)로 이름을 알린 홍 교수는 90년대 초반부터 소리꾼의 성대를 연구하기 시작해 20여 년 동안 판소리 성대의 비밀을 임상적으로 추적, 소리꾼들이 성대를 지키면서도 판소리를 잘 구사할 수 있는 수술법을 개발해냈다. 이 분야 최초의 연구이고 가장 돋보이는 성과다. 득음의 반열에 이른 명창부터 이제 소리를 배우는 신인들까지 뒤를 이어 홍교수를 찾는 이유는 하나다. 의학적인 잣대로만이 아니라 소리꾼들의 특성을 살리는 치료법으로 목소리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실제 많은 소리꾼들은 그의 치료법 덕분에 건강한 소리를 오래까지 유지하며 무대에 서고 있다. 우리 판소리의 건재를 그가 일구고 있는 셈이다. 그의 연구실에서 이루어진 인터뷰는 강의와도 같았다. 국악전반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에 놀랐고, 판소리와 소리꾼들에 대한 애정에 감동했다. 홍교수는 이 치료법의 스승은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환자들이라고 말했다. 판소리의 가치를 지키려는 그의 열정이 답을 찾게 했을 것이다. -많이 바쁘시더군요. 치료할 환자가 그렇게 많습니까. 우선은 수술이 많아요. 갈수록 성대질환이 많아지니까요. 갑상선암과 후두암을 주로 수술하는데, 정해진 일정대로 생활하다보면 연구실에 제대로 앉아있을 시간이 없어요.-성대질환이 늘고 있다면 원인이 있을 텐데요.소리에 변화가 온다는 것은 스트레스와 관련이 있습니다. 세상살이가 각박해지고, 그렇다보니 목소리를 사용하는 빈도가 늘어나겠죠. 목소리를 사용하고 소리를 낼 때 긴장하는 것도 성대질환의 원인이 됩니다. 현대사회의 병폐가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죠.-판소리꾼의 성대 치료법을 개발하셨는데 어떻게 이 분야를 연구하시게 되었습니까. 계기가 있었어요. 전공의 시절, 일본에서 후두음성을 공부하신 선생님이 계셨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목소리를 연구한 분이었습니다. 당시 활발한 활동을 하던 명창이 선생님을 찾아왔어요. 성대질환이었죠. 의학적 지식으로는 당연히 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좋지 않았어요. 성대는 부드러워졌는데, 소리가 안 나오는 상태가 된 것이지요. 수술만 서너 번 했던 것 같은데, 성대는 손을 댈수록 굳는 것이어서 목소리는 더 안 좋아지는 악순환이 지속됐습니다. 이 치료법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어요.-성대질환은 치료됐는데 소리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면 판소리꾼으로서는 치명적인 상황이었겠군요. 환자의 성대에 혹이 튀어나와 있으니 의학적으로는 수술이 정답이었어요. 과학적 개념으로 음성을 분석하면 혹을 떼어내면 소리가 좋아질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거든요. 그 뒤 그분의 치료를 맡게 되어 다시 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지막에는 혹을 떼지 않고 계속 굳어지는 성대를 조금이라도 이완시켜주는 치료를 했습니다. 그때 판소리로 생긴 성대질환은 서양의학적 지식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그럼 소리꾼 환자들의 성대질환은 수술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으셨나요. 결론은 그렇게 되었죠. 이런 경우 애를 먹었는데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이 다르듯이, 질환을 해석하는 근본적인 관점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인식을 갖게 되니, 답을 찾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더군요. 예를 들어 종교음악이 뿌리인 서양음악은 깨끗한 소리가 울려 퍼져야 좋은 소리가 되지만 판소리는 그 기저가 민중들의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이잖아요. 서양음악은 깨끗한 울림소리가 아름다운 음악이지만 판소리는 약간 탁하고 곰삭은 소리, 습해야 좋은 소리라고 합니다.-성대에 생기는 혹이 그런 좋은 소리와 관련이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판소리를 하는 소리꾼들은 득음을 하기 위해 피를 토하면서까지 성대를 훈련시킵니다. 고운 미성을 버리고 거친 소리를 얻기 위해 성대에 두툼한 근육을 만드는 것이죠. 그 과정에서 성대에 상처가 생기고 그것이 혹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말하자면 일반인들의 혹은 떼어야 할 질환이지만, 소리꾼들의 혹은 고행의 흔적이어서 오히려 그 혹을 잘 조절하면서 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대 수술은 아무리 예리한 칼로 한다해도 상처가 남기 마련인데 상처가 남으면 성대는 뻣뻣해지거든요. 말랑말랑한 유연성은 떨어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원칙적으로 판소리꾼은 수술을 안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수술을 꼭 해야만 할 경우 수술을 하고나서도 적절한 탁음을 유지시키면서 성대를 떨리게 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결국은 음악적인 소리의 질을 지켜주는 치료법이랄 수 있겠습니다. 그러한 확신을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목에 관한 의학적 지식은 학회를 통해 얻을 수 있지만 판소리 성대와 같은 것은 의학적 정보와 지식이 전무했어요. 결국 임상실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죠. 사실 의사들의 가장 큰 스승은 환자거든요.-임상실험은 역시 판소리꾼들이 대상이었을텐데요.판소리에 관한 음질 연구와 판소리를 하는 환자가 가진 성대의 특성을 연구했어요. 판소리꾼의 음성을 분석해 그들이 갖고 있는 성대의 특성에 따른 소리를 분류했지요. 도립국악원 창극단 단원 30여명이 연구를 도와주었습니다.-창극단원들로서는 단순히 임상을 돕는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성대 특성을 가리는 기회도 되었을 것 같습니다.그래서 귀찮아하지 않고 좋아했어요.(웃음) 내시경 찍고 목소리를 녹음해 분석해 어느 소리가 잘나는지 분류했지요. 이런 과정을 통해 구체적인 치료법도 얻었지만, 우리 소리에 관한 이해가 가장 중요하고 또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서양과학의 지식에만 의존하지 않고 동양적인 정서와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아주 의미 있는 연구였어요.-일반인들에게는 질환인데, 소리꾼들에게는 일종의 훈장(?) 같은 것이군요. 저는 용어도 달리 사용합니다. 의학적인 용어로는 성대결절 성대용종 성대낭종 등으로 분류되는데, 소리꾼들의 성대질환을 저는 병명으로 쓰지 말고 성대 비후증(성대가 커졌다는 뜻)으로 부르자고 합니다. 판소리꾼들이 스스로 내가 병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소리를 낼 때도 위축되어 자연스럽고 좋은 소리를 내지 못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환자들에게 성대 비후증은 소리를 자꾸 하면 좀 더 두꺼워지고, 쉬면 얇아지는 것이니 잘 조절하면서 공부하라고 일러줍니다.-이제 판소리 성대 연구는 마무리 된 셈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도 과제가 남아 있고,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소리 음질이나 성대 변화, 소리의 분석 등은 서양 의학 장비를 통해서 마무리 되었지만 판소리 발성법에 대한 분석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지난해부터 시작했는데 일반적인 서양발성법과 근본적인 차이점을 알아내는 작업이에요. 이를테면 소리꾼들이 소리를 낼 때, 역시 서양 음악가들처럼 같은 복식호흡을 하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근본적으로는 다릅니다. 판소리는 단전호흡이라해서 같은 복식호흡인데도 더 깊은 내공이 필요해요. 이것을 의학적으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어떤 용어를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 찾기죠.-판소리 발성법이 그렇게 좀 더 과학적으로 분석되면 스승의 경험에 의존한 도제식 교육으로 소리를 공부해온 젊은 세대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옛 명창들은 소리를 낼 때 하늘에 띄우라거나 얼굴에 소리를 내라는 등의 표현을 썼거든요. 그것이 결국은 릴렉스 하라는 것이고 복식호흡을 하라는 의미거든요. 발성법을 통해 소리를 내는 방식과 호흡법을 알려줄 수 있는 의학적 자문이 가능해질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목소리에 관심이 많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전공한 분야가 이비인후과고 그중에서도 목 분야가 전공인데, 이비인후과의 모든 것이 목소리와 연관되어 있으니 관심을 갖게 된 것이고 우리 지역 특성상 판소리하는 분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판소리를 좀 더 깊게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요즈음 제 일상은 암환자 수술이에요.-갑상선암도 그렇고 후두암도 그렇고 늘어나는 원인이 무엇인가요. 갑상선암은 여러 이유가 있는데, 후두암의 가장 큰 원인은 흡연입니다. 후두암은 패턴이 비슷해요. 목소리가 변하고 3주 이상 증상이 계속되면 무조건 병원에 가는 것이 좋습니다. 후두암은 다행히 같은 암이라도 다른 암에 비해 예후가 좋습니다. 증상이 먼저 나타나거든요. 조기암으로 오는 것인데, 그 정도는 방사선 치료도 하지 않고 레이저로 처치합니다. 목소리가 조금 변하지만 무리 없이 회복도 가능합니다. -후두암이 진전되어 목소리를 잃은 환자들을 위한 재활훈련도 일찍 시작하셨지요. 후두 전체를 떼어내면 말을 못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기관지에 구멍(누공)을 뚫어서 목소리 재활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 방법을 식도발성이라고 하는데, 지난 1991년에 전북대 의과대학에 식도발성교실을 열었습니다. 당시 서울 대한적십자사에서 수술 받는 사람들을 위한 교실을 처음 만들어 재활을 시켰는데, 호남지역에서는 우리 대학이 처음 만들었어요. 지금은 꽤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목소리를 찾는 성공률은 60% 정도 되죠.-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찾아주는 일인데, 전문가에 의해 교육이 이루어지나요. 교육을 받고 목소리를 찾은 환자들이 다시 새로운 환자들에게 교육을 해주는 방식입니다. 1991년에 동경대 음이비인후과 음성언어연구소에서 공부했는데, 당시 대학 안에 아시아식도발성센터가 있었어요. 아시아 전역에서 후두암 치료를 받은 환자들을 초빙해 교육을 시키고 다시 돌아가 발성법을 나눌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을 했습니다. 대단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센터가 발간한 식도 발성법 책이 있었는데 그것을 우선 번역해 우리 환자들에게 읽게 하고, 환자 두 명을 보내 동경대에서 식도발성 교육을 받게 했어요. 그 분들이 돌아와 식도발성교실 교육을 시작했죠. 재활교육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일종의 동호인 모임입니다.-목소리가 중요해진 시대입니다. 매체의 발전이 그런 시대를 몰고 오는 것 같습니다. 좋은 목소리는 어떤 것일까요. 사회적인 목소리와 생리적인 목소리가 있겠죠. 생리적인 목소리는 암컷과 수컷이 서로를 매혹적으로 유혹하는 소리입니다. 사람의 경우 남성의 목소리는 저음, 여성은 고음에 비성이 섞인 소리를 말합니다. 콧소리 내는 여자 연예인들이 있지요. 그런 소리예요.(웃음) 한때 미국 영화배우인 험프리보가트의 중후한 저음의 목소리를 따라하려는 사람들이 많아 험프리보가트 신드롬이란 말이 생기기도 했었죠. 사회적인 목소리는 개인적인 활동의 영역, 이를테면 직업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타고난 소리를 억지로 교정하는 것보다는 건강한 목소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관심을 쓰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물을 많이 마시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홍기환 교수는 세계 첫 '타액선질환 수술법' 개발, 명의로 주목홍기환교수는 전주 토박이다. 어린 시절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지만 꽤 공부를 잘했다. 신흥고를 졸업, 교사를 꿈꾸었지만, 진학하고 싶은 대학의 사범대에는 못 미치는 성적이어서 전주에 주저앉았다. 감히(?)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지만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전북대 의대에 진학했다. 대학시절에도 공부를 열심히 해 수석으로 졸업했다. 의지대로라면 내과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밀려서 이비인후과로 갔다. 당시 전북대 이비인후과는 초창기의 열악한 환경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지만 의지를 갖고 공부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한 선배의 이비인후과의 가능성을 향한 응원이 힘이 됐다. 이비인후과 두경부 분야는 우리나라 전체로도 미개척 분야였지만, 두경부 암 치료의 기반을 다진 전주예수병원의 의료진과 시설이 그의 연구 작업에 자극을 주었다. 이비인후과에 들어온 후로 그의 관심은 목과 목소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만큼 연구에 집중했지만 경험이 많지 않아 늘 자신의 치료법에 의문이 들고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다못해 가장 흔한 편도 수술을 하면서도 그런 의문감과 열등감은 지워지지 않았다. 확신을 갖고 싶어 일찌감치 유학을 떠났다. 1991년 동경대 연구생활과 미국 UCLA의 유학생활에서 자신감을 얻었다. 80년대 중반 전공의 시절, 판소리꾼의 성대 치료법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후 판소리 성대에 관한 연구는 그에게 큰 보람을 안겨주었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판소리 발성법 연구 성과도 판소리 계승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가 개발한 적지 않은 수술법은 대부분 화제를 몰고 왔다. 세계최초로 개발한 타액선질환 수술법이나 성대마비 환자들의 정상목소리를 찾게 하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APM 갑상연골성형술도 그중 하나다. 1998년 한 일간지에서 지방에서는 유일하게 명의로 선정된 이후 이비인후과 명의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의 활동 덕분에 전북대 이비인후과는 두경부암의 메카로 꼽힌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환자들에게 소리를 찾아주는 식도발성교실도 그가 이룬 결실이다. 지역의 환자들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의사로서 사회에 공헌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온 그는 스스로 그 정도까지는 해냈다고 평가한다. 대한음성언어의학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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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은정
  • 2014.01.09 23:02

지구촌 사랑나눔 대표 김해성 목사

낡은 건물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높고 경사가 심했다. 안내판도 잘 눈에 띄지 않아 멈칫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간 비좁은 곳에서는 약품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외국인노동자전용병원이란 간판을 보고서야 건물을 잘못 짚은 것을 알았다. 바로 그 옆 건물 이층에 있는 지구촌사랑나눔 사무실도 비좁기는 마찬가지였다. 대표의 업무실은 온갖 자료와 물품이 쌓인 사무실 안쪽에 있었다. 세평도 채 안되겠다 싶은 좁은 공간, 삼면을 둘러싼 책장과 책상, 몇 사람 앉을 의자가 전부인 그곳이 외국인 노동자의 대부 김해성 대표(53)가 일하는 공간이다. 책장 안을 들여다보니 인권과 노동 관련 책자들이 빼곡히 들어차있다. 널리 알려져 있는 그의 이름 앞에도 몇 개의 별칭이 놓여있다. 모두가 노동자, 이주외국인, 중국동포와 관련된 것들이고, 30여년 한 길을 걸어온 그의 궤적을 상징하는 것들이다. 지난 10월,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의 지구사랑나눔 건물 1층 이주민 무료급식소에 불이 났다. 이 사고로 건물은 새카맣게 불타버리고 10명이 부상을 당했다. 방화범은 이곳에서 잠자리와 먹을 것을 도움 받아 지내온 중국동포였다. 외국인 노동자와 중국동포들을 식구처럼 따뜻하게 안아온 김 대표는 큰 충격을 받았다. 충격은 분노가 되어 그를 괴롭혔다. 사흘째 되던 날 스스로를 되돌아보니 부끄러웠다. 방화범을 용서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지만 뇌수술을 받았던 방화범은 사망했다. 김 대표는 밀렸던 병원비와 장례비, 장례까지 도맡아 치르고 그의 아들과 딸을 돌보겠다고 약속했다. 문을 닫게 된 급식소와 쉼터, 방화범을 용서하고 오히려 사랑으로 껴안은 김 대표의 나눔 정신과 실천이 알려지자 후원자들의 성금이 모여지기 시작했다. 화재현장의 복구작업이 시작되고 부상자들의 치료비 부담도 덜어졌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늘 길은 열렸다고 그는 말했다. 도시빈민과 노동자, 어느 누구도 선뜻 손길 내주지 않는 외국인 노동자와 중국동포의 인권을 위해 30여년 세월을 고스란히 바친 지구촌사랑나눔의 대표 김해성 목사를 만났다. 고단한 길을 만나 한눈팔지 않고 걸어온 삶의 궤적을 들여다보면서 문득 루쉰의 글이 떠올랐다.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의 고향 중에서-지나고 나면 짧기 만한 1년을 다시 뒤돌아보게 되는 연말, 그가 열어온 길은 더 빛나 보였다. -정말 바쁘시군요. 어떻게 이 많은 일들을 처리하는지 궁금합니다.하루 시간으로 버겁긴 하지만 다 해야 할 일이니까요. 저는 인터뷰도 열심히 합니다. 다른 분들처럼 인터뷰 요청을 거절도 하고 사양도 하고 싶은데 이 또한 제가 할일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매체들의 인터뷰가 사실은 우리 사업을 알리는 중요한 통로가 되거든요.(웃음)-지구촌사랑나눔은 언제 문을 열었습니까.2001년도예요. 제가 80년대부터 성남에서 도시빈민운동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한국노동자들의 인권운동을 하다가 이주외국인노동자, 중국동포들의 인권에도 관심을 갖게 되면서 사업이 확대되었습니다. 지금은 다문화가정의 한국사회 정착을 위한 활동이 중요한 사업입니다.-30년 전이라면 한국사회의 상황이 매우 절박했을 때 아닌가요. 민주화 운동이 봇물처럼 터졌던.저도 80년 광주민중항쟁 세대예요. 한신대 신학과 2학년 때 광주항쟁이 터졌으니까요. 전두환 정권의 비상계엄령 아래 최루탄과 화염병이 날마다 거리를 메우는 엄혹한 시절이었죠. 광주가 집인 친구가 있었는데, 광주 항쟁이 터지자마자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전남도청을 사수하는 대열에 섰는데, 사살됐습니다. 망월동에 묻혔죠. 저도 시위 참여자로 지목되어 수배령이 내려졌는데 도망쳤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비겁하게 목숨을 부지했다는 죄책감이 깊어졌죠. 그 죄책감이 성남으로 가 도시빈민운동을 시작하게 했습니다.-성남의 도시빈민운동은 꽤 활발했었죠. 당시 성남은 서울의 쓰레기를 버리는 변방 도시였어요. 그곳에서 도시빈민 선교운동을 하는 이해학 목사님을 만났어요. 도시빈민 선교활동을 하면서 노점상 철거민 도시빈민들을 돕는 활동을 열심히 했죠. 탄압받는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조합을 만들다 연행되어 구속되기도 했고, 경찰에 잡혀가 두들겨 맞기도 했습니다. 노동자들이 억울하게 해고되고 잡혀가는 것을 보면서 한국사회에서 노동자들이 가장 열악한 삶을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공장에 들어갔죠. 노동운동을 본격적으로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위장취업이라해서 1년도 안 돼 해고당했어요.-도시빈민선교활동도 노동운동의 좋은 통로가 아니었을까요. 그렇긴 하지만 좀 더 그들 가까이에서 고난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해고된 후에는 개척교회(산자교회)를 열고 노동자 선교를 더 열심히 했죠. 노동상담소를 만들어 한국인 노동자를 돕는 일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성남 지역 기독교 인권위원회도 만들었어요. 그때부터 시작한 이 일이 인권문제 노동문제 전문가로 만들었습니다.-그즈음에 외국인노동자들이나 중국동포들이 취업을 위해 한국에 쏟아져 들어왔던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당시 중국동포들은 물론, 필리핀 베트남 스리랑카 등 각국에서 노동자들이 몰려 들어왔어요. 대부분 불법체류에 불법취업이었습니다. 당연히 임금을 못 받고, 산재를 당하거나 업주로부터 폭행을 당해도 신고조차 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이었어요. 그즈음 우연히 지역에서 인권운동을 하던 이재명 변호사(현재 성남시장)가 산재로 큰 부상을 당한 중국동포와 16층에서 사고로 추락사한 중국동포 사건을 의뢰했어요. 보상도 제대로 받고 사망한 동포는 장례까지 잘 치러주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는 해당 기업과 숱한 갈등과 싸움이 있었죠.-보상을 받은 당사자들이나 유족들에게는 큰 힘이었겠습니다. 같은 처지의 중국동포나 외국인노동자들에게도 희망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그런 소문은 얼마나 빨리 나는지, 금세 쫙 퍼져 문제가 생기면 김해성을 만나라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였어요. 그렇다보니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사건이 뒤를 이으니 쉴 시간이 없었어요. 각국 대사관과 관련 기관들을 찾아다니며 협박도 하고 간청도 하면서 일을 해결했습니다. 얼마나 일이 많은지 끝내 쓰러져 입원 했어요. 그것을 보고 이해학 목사께서 김해성이 살리려면 우리가 함께 해야 한다고 나서 전문가들이 모였습니다. 외국인노동자의 집이 그렇게 조직되었죠.-일이 일을 몰고 온 셈이었네요. 길이 길을 여는 것처럼. 외국인노동자의 집을 열고나니 중국동포들의 항의가 들어왔어요. 우리는 한민족 한 핏줄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외국인이냐는 것이죠. 그래서 그 옆에 /를 치고 중국동포 노동자의 집을 붙였어요.(웃음) -스리랑카 대통령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코끼리 이야기는 대표님의 사랑 실천의 상징이 아닐까 싶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즐거움도 크고 국가에 기여도 했으니 보람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스리랑카 마한다 라제팍세 대통령과 막역한 사이가 되었어요. 코끼리까지 선물로 받게 되었죠. 처음에는 황당한(?) 선물이어서 거절했는데, 마침 그때 국립동물원 코끼리가 수명을 다하면 혈통을 이을 수 없다는 뉴스를 보았어요. 그래서 다시 연락해 암수코끼리 한 쌍을 선물로 받아 동물원에 기증했죠.10여 년 전 김 대표는 경기도 광주를 다녀오는 길에 허름한 행색의 외국인 두 명이 추위에 떨며 서있는 것을 보았다. 궁금해 그냥 치지 못하고 말을 건넸는데, 취업을 하기 위해 한국에 들어 온 스리랑카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일자리를 찾아주고 자고 먹을 곳을 구해주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일요일이면 그의 교회에 스리랑카 노동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명절을 기념한 행사에 한 노동자가 자신의 작은 아버지를 초청해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야당국회의원이었던 그는 노동부 장관 시절 스리랑카 노동자들의 한국진출을 도운 사람이었다. 한국을 다녀간뒤 그는 국무총리가 거쳐 대통령이 되었다. 얼마전 재임에도 성공한 마한다 라제팍세 스리랑카대통령이다. -가족이 된 다문화가정 삼남매와의 인연도 궁금합니다. 이제 제 아이들이 되었어요. 입양은 아니지만 친권과 양육권을 다 받았죠. 5년 전 쯤 아빠가 세 아이를 데리고 저를 찾아왔어요. 엄마가 사망했는데 장례를 못치렀다는거예요. 아이들 피부색이 까맣더군요. 엄마가 가나출신 흑인 여성이었어요. 10년 넘게 한국에서 살았지만 한국국적을 얻지 못했죠. 장례를 치루려니 절차가 복잡했어요. 가나대사관에서는 본국의 동의서를 받아오라고 하고. 백방으로 방법을 찾아도 안 되겠더라고요. 그때 저는 거의 장례전문가가 다 되었었는데, 영안실에서 시신을 찾아 관에 넣고 옮겨 대사관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이튿날 대사관에서 놀랐는지 장례를 치르게 해주었어요.-그런 경우 경비 부담은 없습니까. 크죠. 그런데 이때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방송에 소개되면서 모금이 많이 됐어요. 이제 잘 살면 되겠다 싶었는데 일용노동자였던 아빠가 자살을 했어요. 그것이 3년 전인데, 장례를 치루고 유족들과 논의 해보니 아이들을 맡을 사람이 없는 거예요. 제가 맡을 수밖에 없게 되었죠.-그래도 얼굴색이 다르고 세 명이나 되는 아이들과 가족이 되기에는 어려움이 컸을 것 같습니다. 아빠라고 부르게 하는 데만도 1년이 걸렸지요. 힘든 고비도 있었지만 지금은 더없이 소중한 제 아이들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집에 갔더니 컴퓨터에 지금 우리가 어리지만 아빠 기대하시라 짠이라고 쓰여 있더군요. 아이들이 꿈을 갖게 된 것도 제게는 아주 기쁜 일입니다. 큰 딸은 모델이 꿈이고, 둘째 아들은 배우가 꿈입니다. 이미 마이 리틀 히어로란 영화에 조연급 아역배우로 출연했어요. 저는 그 아이의 매니저죠.(웃음) 막내는 축구선수가 꿈인데 지난 월드컵 조별 예선 쿠웨이트 전에서 볼키즈 역할을 했어요. 학교에서는 반 회장을 맡아 제가 회장님이라고 부릅니다.-한국사회에서 다문화가정 문제는 심각합니다. 인식은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그들에 대한 이해와 관심의 벽이 높은 것 같은데요. 물론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20만 명이 넘는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어떻게 하면 잘 키워낼 수 있을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구촌학교를 만든 것도 그 때문이에요. 다문화 가정 아이들의 학교 이탈률은 매우 높습니다. 초등학교가 15%, 중학교 39%, 고등학교는 69%죠. 초등만 보면 그 비율이 대한민국 전체 이탈률의 220배라고 합니다. 가슴 아픈 현실이죠. 그들도 우리의 미래입니다. 작년 12월에 기획재정부장관이 국회에 다문화인 차별금지법을 제출했어요. 노동부나 법무부 여성부가 아닌 기획재정부에서 왜 그런 법안을 만들려했을까요. 그들을 대한민국의 미래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지구촌나눔사람에서 문을 연 병원은 가리봉의 기적이란 별칭이 붙어 있던데요. 모든 것을 무료로 제공하는데도 운영이 가능하다는 것이 믿기 어렵습니다.모두들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희도 반신반의했으니까요. 병원을 연 것은 제가 사망한 외국인노동자들의 장례를 치러주면서 병원에서 조금만 빨리 치료만 받을 수 있었어도 살 수 있었던 사례를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었어요. 처음에는 직원 모두가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강행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 전용병원이라는 이름을 걸고 문을 연지 10년이 지난 지금 병원은 건재합니다. 그것도 정부지원 없이 민간후원으로만 50만 명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어려움에 처하면 그만큼 후원의 손길도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기적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가리봉의 기적, 외국인전용병원이라는 이름도 얻었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을 보면서 그래도 대한민국은 희망이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지구촌 사업 모두가 정부지원없이 민간 후원으로만 추진된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다. 병원도 그렇지만 학교도 민간후원으로만 운영합니다. 학생들은 학비 식비 수업준비물 교통비까지 무료입니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아오면서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는 명제의 임상실험을 끝냈지요.(웃음)-정부도 하지 않는 일들을 대표님과 지구촌사랑나눔 식구들이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주노동자와 중국동포문제, 다문화가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도적 법적 장치를 만드는 것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정치 분야에 진출하신다면 이런 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여러 번 제안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시 태어나도 종교인으로서의 길을 가고 싶습니다. 만약 제가 그쪽으로 간다면 30년 동안 쌓아온 인권 노동운동의 빛도 한 순간에 스러질 겁니다.-5년이나 10년 후에도 이 길 위에 서계실까요. 5년 후는 몰라도 10년 후는 좀 다른 길을 가고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인생계획으로는 아프리카에 가서 에이즈 퇴치 운동을 할 생각이거든요. 아프리카의 사망자 절반이 에이즈가 원인입니다. 아프리카가 절단 날 위기에 있는 셈이죠. 그런데 별 방법이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해온 노동 인권운동의 모험적이고 혁명적인 방법을 그 분야에도 결합해보고 싶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계획도 세워놓고 있는데, 궁극적으로는 세계적인 에이즈 퇴치운동의 불씨를 만들고 싶은 소망입니다.● 김해성 목사는 익산출신 노동인권운동 전문가실천하는 지성인 '명성'노동과 인권운동가이자 전문가인 김해성 목사(지구촌사랑나눔 대표)는 익산시 춘포면 인수리가 고향이다. 영어교사를 지낸 그의 아버지는 교육열이 높아 자녀들을 일찍부터 서울로 유학을 보냈는데 김 목사 또한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갔다. 그러나 그에게 서울은 낯설고 두렵기 만한 대상이었다. 학교에 간 첫날 아이들은 그를 놀렸다. 영문도 모르고 놀림을 당했던 그는 울기 시작했다. 담임은 반장을 불러 울음을 그치지 않는 그의 뺨을 때리게 했다. 충격적인 그 경험은 어른이 되어서도 트라우마가 되어 그를 괴롭혔다. 그는 일찍부터 약자와 가난한자들의 억울한 일을 대하면 의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런 의식이 트라우마로 안긴 그때의 경험 때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선대부터 기독교 신앙을 대물림했던 덕분에 그는 특별히 갈등하지 않고 한신대에 들어가 종교인의 길을 걷기로 했다. 엄혹했던 군부시절, 광주항쟁을 계기로 그는 자연스럽게(?) 운동권이 됐다. 광주항쟁으로 목숨을 바친 친구에게 마음 빛이 컸던 그는 사회의 첫발을 도시빈민운동으로 시작했다. 20대의 빛나는 청춘이 선택했던 노동과 인권의 길을 30대와 40대를 거쳐 50대에 이르는 동안 한 번도 바꾸지 않고 걸었다. 목사가 된 후에는 산자교회를 세웠으나 이주노동자와 중국동포들의 인권문제에 뛰어들면서 역시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아내 김현의 목사가 세습(?)했다. 정치외교와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있는 그의 두 딸은 시민운동으로 밖에서만 지내는 아빠 점수를 100점 만점에 8점 밖에 주지 않았지만 커서는 아버지의 길을 자랑스러워한다. 노동자들의 숱한 어려움을 해결하고 아픔을 함께 나누어온 그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늘 길을 개척하고 많은 사람들을 함께 걷게 한 선구자다. 지금까지 그가 이루어온 일들은 모두가 정부가 나서 해야 할 일들이다. 외국이주노동자와 중국동포의 문제가 그렇고, 다문화가정을 지원하는 사업이 그렇다. 그럼에도 그가 주도해온 모든 사업들은 최근에 이루어진 민간위탁사업 한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정부지원 없이 오로지 민간후원으로만 일궈왔다. 한눈팔지 않고 대한민국의 약자들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해온 그를 한 언론사는 실천하는 지성인으로 꼽았으며 여러 신문사가 선정하는 한국의 미래를 열어갈 100인에도 그의 이름은 여러해째 빠지지 않는다. 포스코청암봉사상을 비롯해 국민훈장 석류장 등 수많은 상이 그의 앞에 놓였지만 그 결실 모두는 나눔을 실천하는 일에 되돌려졌다. 많은 지식인과 지성인을 깨어나게 한 전태일 평전을 인생에 가장 감명 깊게 읽는 책으로 꼽는 그는 운명을 선취해 인류에 기여하는 길을 열어가는 일을 가치 있는 삶이라고 믿는다.

  • 기획
  • 김은정
  • 2013.12.12 23:02

건축가 백지원 얼반테이너 대표 "나는 권력집단 아닌 대중을 위해 일하는 '팝 건축가'"

유쾌한 인터뷰였다. 약속된 시간이 훌쩍 지나가면서 예정되어 있던 그의 일정이 약간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굳이 서둘러 마무리 하지 않았다. 참신한 실험성과 분명한 철학과 탐구정신으로 무장한(?) 그의 공간들이 그렇듯이 그의 내력 또한 충분히 궁금했으며 흥미진진했다. '건축가'가 아닌 '건축도'를 고집하는 '얼반테이너'의 백지원 대표(39) 이야기다. 4-5년 전 만해도 무명의 건축가였던 그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2009년을 즈음해서다. 그해 4월,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카키색 컨테이너로만 만들어진 건물이 들어섰다. 규모와 고급 자재, 화려한 디자인으로 치장한 건물들이 즐비한 강남 한복판에 등장한 이 건물은 스물여덟개의 군수용 컨테이너를 연결한 구조물에 아스팔트로 바닥을 입힌 개방된 공간. 각각의 컨테이너가 독립된 공간으로 바뀌어 젊은 아티스트들의 스튜디오가 되고, 전시와 공연, 쇼케이스와 파티, 포럼 등 다양한 문화활동에 따라 구조를 바꾸는 복합문화공간 '플래툰 쿤스트할레(Palatoon Kunsthalle)'다. 백대표는 이 건물의 설계와 프로젝트 기획과 운영을 주도했다. 문화계는 그를 주목했으며 젊은 대중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4년, '백지원'은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젊은 건축가가 되었다. 그를 만났다. 30대 건축가의 성공 뒤에는 어떤 삶이 있는지 궁금했다. 대학 입학과 함께 고향 전주를 떠난 지 20년. 치열했던 일상이 엮어놓은 그의 청년기는 때로 험난했으며 때로 고달팠지만 그를 온전히 세운 빛나는 힘이 되었다. 그래서 알게 됐다. 어느 날 갑자기 알려진 그의 이름이 결코 요행이 아니라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스스로 부딪치고 스스로 치유하면서 열어온 '경험'의 축적이었다는 것을. 인터뷰는 서울 장충동 얼반테이너 사무실에서 있었다. 주택가 사이의 낮은 빌딩 1층과 2층을 트인 공간으로 구성한 이 회사에는 대표의 방이 따로 없고, 직능 부서간 경계도 없다. '직책은 역할과 책임을 규정하는 기능을 할 뿐 누구나가 동등한 위치에서 일한다'는 회사의 철학을 그대로 반영한 구조다. 요리를 할 수 있는 너른 주방이 가장 전면에 위치해 있는 사무실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는 일도 즐거웠다. -'얼반테이너'란 회사 이름이 흥미롭군요."'어반(urban)'과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컨테이너(container)'를 조합한 것입니다. '도시를 담는 유쾌한 그릇'이라는 의미죠. 우리가 지향하는 회사의 방향과 정체성을 드러내줄 이름을 찾기 쉽지 않아 6개월 동안 고민해 얻은 이름이에요."-2009년에 회사를 열었는데 짧은 시간에 자리를 잡은 것 같습니다. 비결이 있습니까. "비결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회사를 만들면서 정해놓은 원칙을 지키면서 긍정적 사고로 일한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그 원칙은 얼반테이너의 식구들이 모두 즐겁고 유쾌하게 일하면서 보람을 찾을 수 있게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즐겁게 일하면 좋은 결과가 나오고, 그 결과가 또 즐거운 일거리를 불러들이는 선순환 구조를 얻게 됩니다." -그 원칙이 궁금합니다. "세 가지인데요. 첫 번째는 경쟁 입찰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회사의 능력을 원하는 곳에서만 일을 하겠다는 뜻인데, 그래서 수의계약으로만 프로젝트를 받습니다. 두 번째는 하청 일을 하지 않는 것이고, 세 번째는 가족경영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신입사원 프레젠테이션 첫 장에 이 원칙을 담죠. 아직까지 어겨본적이 없지만 사실 회사가 어려울 때는 유혹에 흔들리기 십상이어서 스스로를 지키며 원칙을 강화하려는 노력입니다." -얼반테이너를 만들기 전에는 1인 스튜디오를 운영했던데요. "디자인부터 현장일, 회계와 영업까지 혼자서 해냈던 8년이 오늘의 저를 있게 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건축에 관한 모든 것을 현장에서 부딪치며 온몸으로 체득했던 시간이었으니까요. 1인 스튜디오를 열고 가장 많이 했던 일이 도배하고 장판 깔아주는 일이었어요. 아파트 인테리어가 주된 일거리였는데, 창업하고 3-4년 동안은 순익은 커녕 해마다 적자를 봤어요. 현장일을 전혀 모르고 뛰어든 대가였지요.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거짓말처럼 빚을 갚고 흑자로 돌아섰어요. 생각해보면 정말 힘든 시기였는데, 무슨 고집에서였는지 그때도 하청은 받지 않았지요."-경제적으로 어렵게 되면 유혹이 컸을텐데요. "갈등이 없지 않았죠. 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그때 모두 몰려왔으니까요. 집이 어려워지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현실적 벽은 높고. 외롭게 이 세상과 대면하는 시기였는데, 힘들수록 자존감 존재감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졌고, 결국 그 고민이 그 시기를 지킬 수 있게 했던 것 같아요."-건축을 전공했는데, 왜 굳이 혼자서 하는 일을 택했는지 궁금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들어갔는데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하는 일이 많았어요. 친구들과 게임방 운영을 하면서 아르바이트로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했어요. 물리적으로 세 개의 일을 동시에 한다는 것이 힘들었는데, 그 시기를 겪으면서 강해졌죠. 그러나 결국 대학원을 포기하고 게임방도 정리하면서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그래픽 일을 하는 회사에 들어갔어요. 사무실에 자면서 하루 15-16시간 일했죠. 어느 날부터인가 회의가 밀려들더군요. 나의 근본을 찾아야겠다 싶었죠. '나는 건축가이고, 디자이너'란 생각이 정신 차리게 했습니다. 스케치를 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싶었죠. 컴퓨터와 결별하고 곧바로 삼성동 여덟 평짜리 지하 월세방에 들어가 4개월 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살았어요. 후배들이 가져다주는 쌀과 라면으로 연명했던 시절입니다."-그래도 그 시기가 길게 가지 않아 다행이군요.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니 그래도 건축과 인테리어였어요. 그래서 1인 스튜디오를 시작했지요."-설계사무소 같은 곳이나 현장 경험이 없는데 일거리가 있었습니까. "보험 외판원들처럼 영업을 하러 다녔어요. 친척 선배 친구들부터 찾아다녔죠. 아파트 인테리어 일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입소문이 나면서 바빠졌어요."-특별한 노하우가 있었겠군요. "처음엔 앉아서 적자를 봤죠. 제 경쟁상대는 아파트 앞 인테리어가게 사장님들이었는데 그 가게들의 단가를 죽어도 맞출 수 없었거든요. 파이프라인이 없었으니까요. 어떻게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나만의 무기를 만들었죠. 고객들이 원하는 것을 시뮬레이션으로 만들어 컴퓨터로 보여주었어요. 고객들의 인식이 달라지면서 단가가 조금 비싸도 계약이 되더군요. 서비스정신으로 무장하면 안 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죠. 그때부터 입소문, 그것을 저는 구전마케팅이라고 하는데(웃음) 옆 동네 누구 누구 하는 식으로 일이 확장되고 카페, 병원 등 다양한 공간의 인테리어가 들어왔어요."-아파트와 카페나 병원 같은 공간들은 성격부터 달랐겠는데요. "그때부터는 제 작품이라는 생각으로 공간의 성격을 탐구해 디자인을 하고 실행했습니다. 경력이 쌓이면서 그 작품들은 고스란히 재산이 되었죠. 그 일을 하면서 건축 인테리어에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때 건축 분야 생태계도 알게 됐죠. 작업을 하나 진행하는데 100명 정도가 동원되거든요. 그 분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이 저에게 있는 셈이지요. 단가를 너무 낮추어서 계약하면 안 되고, 손해가 나더라도 그 분들과 부담을 나누어서도 안 된다는 신념을 그때 현장에서 터득했어요."-'플래툰 쿤스트할레'는 건축가 백지원의 이름을 알린 계기가 되었습니다. 건축주인 독일의 플래툰은 아트커뮤니케이션 그룹인데, 그 인연이 궁금합니다. "플래툰은 서브컬처(비주류 문화)운동을 주도하는 그룹입니다. '플래툰 쿤스트할레' 또한 기존의 문화가 담지 못하는 것들을 담아내는 복합문화공간이지요. 저는 이전부터 컨테이너 작업을 해왔는데, 플래툰의 친구들이 그것을 주목했던 것 같습니다. 서울은 플래툰이 베를린에 이어 두 번째로 쿤스트할레를 들여놓은 도시죠."-컨테이너 작가라는 닉네임까지 얻었는데 컨테이너를 주목한 특별한 배경이 있습니까. "어린 시절에 그 뿌리가 있습니다. 제가 살았던 농장이 아주 넓고 산을 끼고 있었는데, 그때 부터 움직이는 건축물에 관심이 많았어요. 컨테이너는 이동 가능한 최고의 구조물이어서 제가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모듈건축의 기반이 된 것이죠."-건축물에 대한 기존의 인식과는 많이 다른것 같군요. "사실 이동 가능한 건축물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큽니다. 집이라는 공간이 이동가능하게 되면 아주 특별한 사회적 환경 변화가 일어납니다. 첫 번째가 지주와 결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인데 다시 말하자면 권력집단과의 결별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죠. 우리나라는 특히 땅이 좁아서 땅을 가진 사람들의 힘이 큽니다. 여전히 봉건주의 시스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인데 만약 이동가능한 집이 만들어지고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늘게 되면 상황은 달라지지 않겠어요. 땅의 가치가 달라진다는 이야기죠. 빈 땅이 많아지면 그만큼 가치가 떨어질 것이고 결국 이동가능한 집을 가진 사람들이 땅을 가진 사람들의 클라이언트가 되겠죠. 요즈음 젊은 세대들에게는 주택 소유의 개념이 많이 다릅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환경변화의 시작이라고 봅니다."-백 대표가 지향하는 건축 철학은 생태적 환경에 있는데, 컨테이너가 그 통로가 될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지금 이산화탄소 발생수치는 지구가 30년 안에 멸망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할 만큼 위험한 수치입니다. 화두는 우리가 이산화탄소를 어떻게 낮출 수 있느냐죠. 지금의 환경에서는 이산화탄소 배출의 47%가 건설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양이죠. 그런데 건축물의 소재를 컨테이너나 자연소재를 이용하거나 필요에 따라 이용 가능한 구조물을 대치한다면 달라지겠죠. 환경을 살리는 길이 여기 있는 겁니다. 컨테이너가 아니더라도 변형 가능한 모듈건축에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모듈건축의 재활용적인 가치를 주목하는 것인가요. "리사이클링만이 아니라 업사이클링이 되는 건축으로서의 가치죠. 업사이클링되는 건축물이 많아지면 건축의 건강한 생태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 젊은 건축가 50인에 선정돼 연설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세상에 절대 남지 않을 건축물을 만들고 싶다며 옮겨 다닐 수 있는 건축물을 만들어 인류의 꿈과 희망을 해결하고 싶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좋아하지 않는 건축가들이 많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인스턴트 건축가'라고 놀리기도 했어요. 그래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권력집단을 위해서 일하는 건축가가 아닌 대중들을 위해 일하는 '팝 건축가'라고 말했습니다."-그렇고 보니 백 대표의 작업 대부분이 대중문화를 선도하거나 그 중심에 있는 것들이군요. "카페나 클럽 같은 공간들의 인테리어부터 브랜딩과 마케팅, 팝업 스토어 등 다양한 작업을 합니다. 중심은 공간을 브랜드화 하는 작업이죠."-백 대표가 즐기는 파티도 대중문화를 이끄는 중요한 통로겠죠.(웃음) "물론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지만 회사를 만들고나서 아주 적극적으로 파티를 열었어요. 아티스트들의 파티는 단순히 즐기는 장소로서가 아니라 함께 즐기고 교류하면서 수많은 크리에이티브가 이루어지는 중요한 공간이거든요. 파티는 여러 사람이 모여 재미있게 즐기는 문화입니다. 특히 좋아 하는 부분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이 섞여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가며 즐겁게 논다는 것인데, 재미있게 놀다 보면 새로운 것들이 생겨 나게 됩니다. 저는 그것이 창조와 혁신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합니다."인터뷰 말미, 그가 생각하는 '좋은 사회 유쾌한 도시'는 어떤 것인가 물었다. "다양한 것들이 공존하는 세상"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를테면 일등만이 잘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 꼴찌에게도 주목하는 사회,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회라고 그는 덧붙였다. 디자인과 건축이 사회를 변화 시킬 수 있다고 믿는 그는 다가올 미래의 주거환경과 에너지문제, 엔터테인먼트 서비스 디자인을 연구하고 있다. 아직은 먼 미래의 일처럼 보이지만 그에게는 다음 세대를 위해 꼭 해야 할 선택이고 책임이다.● 백지원 대표는 컨테이너 작가로 유명평창 스페셜 올림픽 무대 디자인백지원 얼반테이너 대표는 전주 출신이다. 대학 시절 고향을 떠났던 아버지(백형기)는 할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완주군 상관면에 내려와 농장을 겸한 목장을 운영했다. 덕분에 그는 상관에서 전주교대부속초등학교까지 두 살 터울의 여동생 손을 잡고 버스 통학을 해야 했다. 동네에 또래가 없어 늘 혼자 놀아야 했던 그에게 농장은 유일한 놀이터였다. 어렸을 때부터 만드는 것에 특별한 재주를 보였던 그는 초등학교때 이글루를 만들어 그 안에서 지내기도 했다. 그가 만든 생애 첫 구조물이었다. 그는 건축가였던 외할아버지와 가구디자이너였던 어머니로부터 만드는 재주를, 아버지로부터 도전과 실험정신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한다. 우석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국민대 건축과에 입학했으나 컴퓨터 그래픽에 이끌려 전공보다는 컴퓨터동아리 활동을 더 열심히 했다. 대학 1학년 때 조형론을 강의했던 금누리교수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그는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의미를 통해 '누구를 위해 재능을 쓸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인류를 위한 일에 기여하겠다는 의지를 그때 굳혔다. 대학원에 진학했으나 집안형편이 기울고 어머니가 작고하면서 다른 길을 모색해야 했던 그는 회사생활 2년을 마지막으로 독립, 1인 스튜디오를 열고 건축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첫 작품은 성북동 주택. 건축 경험이 전혀 없던 그의 창조적 사고만을 믿고 부지 선정부터 모든 과정을 온전히 맡긴 건축주 덕분에 그는 건축 현장의 모든 것을 체득할 수 있었다. 1인 스튜디오 생활을 정리하고 '얼반테이너'를 연 것이 2009년. 디자인 설계가 중심이 되는 인테리어와 브랜드 마케팅을 총괄하는 공간 브랜드 기획자로 이름을 더 알리기 시작했다. 대표 작품은 역시 32회 한국건축가협회상을 안긴 '플래툰 쿤스트할레'지만, 그의 손에서 만들어진 이름난 클럽과 카페도 적지 않다. SKT의 가로수길 팝업스토어, 화제를 모았던 'SK Week & Water Tank Exhibition'(2009)과 서울 디자인페스티벌의 홍보부스 디자인, 네이버 앱 스퀘어(2011)로 대중들과 더욱 친해졌으며 2013년 평창 스페셜 올림픽 개폐막식 미술감독과 무대디자인을 맡았다. 얼마 전 중국 상해에 한식당 '안녕 키친'을 열어 새로운 문화전쟁(?)을 시작한 그는 지난해 디자이너이자 사진작가인 사라 케이트 왓슨과 결혼, 문화적 동지를 얻었다. 전통과 창조적 힘이 공존하는 전주를 자랑스러워하지만 좀 더 창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벽이 높은 것 같아 안타깝다는 그는 전주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도 고민하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3.11.14 23:02

청소년대표 후보선수단 맡은 익산출신 양영자 감독

올해 초 전북일보가 펴낸 사진집 '기억'에서 청춘의 그를 만났다. '기억'은 1950년대부터 오늘을 잇는 전북의 60년 현대사에 놓인 풍경이다. 잊고 싶거나 잊고 싶지 않은 순간을 되살리는 사진의 힘은 사진가 정주하의 표현처럼 '자화(自話)하는 역사'로서의 의미에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의 포연이 가시지 않은 50년대, 궁핍했던 60년대, 산업화에 눈떴던 70년대, 민주항쟁의 80년대, 변방으로 밀려난 90년대, 가능성과 희망의 2000년대가 고스란히 담긴 그 사진집에서 만난 흑백 사진 한 장. 앳되어 보이는 짧은 커트머리의 그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탁구 국가대표 선수 양영자다. 그가 우리에게 주었던 기쁨과 환호의 순간이 그리웠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온 국민을 열광케 했던 그 순간은 벌써 25년, 사반세기를 넘는 과거의 시간이 되어 있다. 그렇고 보면 20대의 빛나는 청춘, 녹색테이블 앞에서 온 국민을 환호하게 했던, '씨'나 '선수'를 붙이지 않고 그냥 우리들의 '양영자'로 불렸던 그의 이름이 '기억'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였다. 우리나라 탁구 중흥기를 열었던 그를 만났다. 은퇴한지 25년, 양영자 청소년국가대표 후보선수단 감독(49)은 조금 낯설었다. 운동선수답지 않은(?) 차분한 성품 때문이기도 했다. 인터뷰 내내 조용조용한 대화를 나누는 그를 보며 문득, 88서울올림픽 탁구 여자 복식 결승전에서 중국을 제치고 금메달을 안았던 순간에도 결코 요란하지 않았던 그의 승리 세러모니가 생각났다. 89년 은퇴한 이후, 남편과 함께 몽골과 중국에서 선교활동으로 개인적인 삶을 지켜왔던 그는 올해 초에 귀국, 지난 7월부터 국가대표 후보 선수단 감독으로 복귀했다. 지난해 런던올림픽에서 SBS해설가로 데뷔, 단절되었던 거리를 좁히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지만 탁구현장에서 지도자로 시작하는 그의 의지는 더 특별해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날의 탁구는 그가 전성기를 구가했던 80년대의 상황과 맞닿아 있지 않다. 더 이상 인기 종목의 대열에 끼지 못한 현실도 그렇거니와 새로운 '스타 선수'의 귀환도 먼 이야기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한국 탁구가 80년대의 영광을 다시 찾을 수 있는 희망이 있는가"를 물었더니 한참을 생각하다가 "한때 국제무대를 석권했던 유럽 국가들의 추락을 한국이 절대 걷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없다. 우리의 현실이 그렇다. 유럽처럼 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일본처럼 10년 앞을 내다보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의 새로운 목표가 분명해보였다. 한국 탁구의 80년대 영광을 다시 찾는 일에 이제 그가 나섰다. -언제 귀국하셨습니까. 몽골과 중국에서만 14년 생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작년 3월에 들어왔습니다. 청소년 지도하는 일은 7월부터 시작했는데, 워낙 외국생활을 길게 한 터여서 아직 일상이 익숙하지 않습니다."-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여자 복식 금메달을 딴 이듬해 은퇴했으니 25년 만에 현장으로 돌아온 셈이군요. "벌써 그렇게 되었더라고요. 선교활동도 탁구를 가르치는 일로 해왔으니 탁구선수 출신으로서의 삶을 그대로 유지해온 셈이지만 의미는 많이 다르지요."-현역 선수로 은퇴하더라도 대부분 지도자로서의 길을 오랫동안 걷는데, 바로 체육계를 떠났던 이유가 있었습니까. "저도 코치 생활을 1년 남짓 했었어요. 그런데 건강이 좋지 않아 접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신학공부를 시작했어요. 덕분에 선교사의 길을 택한 남편을 만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선교활동이 삶의 중심에 들어서게 됐죠."-국가대표로 활동했던 시절에도 건강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들었습니다. 은퇴 결정도 결국 건강 때문이었겠군요."간염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했습니다. 가족력까지 있어서 관리를 잘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운동은 결국 훈련이 답인데, 간 건강은 절대 무리하면 안 되거든요. 병원에서 탁구 하는 것을 말릴 정도로 심각했었죠. 고통과 고난의 시기였습니다. 88올림픽때 뛸 수 있었던 것도 기적이었죠."-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필요했겠습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신앙이었습니다. 신앙을 갖지 않았으면 그 시절을 온전히 선수로 남아있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신앙의 길을 걷게 된 좀 더 뚜렷한 배경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몽골에서 선교활동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몽골은 우리처럼 분단된 나라입니다. 외몽골과 내몽골로 갈라져 있지요. 몽골은 구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지만 90년대에 들어서 체제를 바꾸어 개방외교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제 막 개방된 사회적 분위기에서 국민들이 겪을 정신적 공황을 짐작할 수 있었지요. 이런 시기에 선교가 절실히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몽골어는 한국어와 많이 다르지만 어순이 같아 언어를 익히는데도 그리 어렵지 않겠다 싶었죠. 지금은 소통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언어는 익숙해졌습니다."-선교를 위해 가족이 모두 들어갔는데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나요."분명한 목적이 있었으니까요. 그때 아이들이 네 살 다섯 살이었는데, 겨울이 길어 추운 날이 너무 오래 지속되는 것 말고는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몽골 주식이 육식이다 보니 채식을 하는 저로서는 식생활 불편을 감수해야 했던 정도지요." -돌아오셔서 마주한 한국 탁구 현실은 어떻게 보십니까. 80년대와 90년대에 비해 많이 위축되어 있지 않나요."안타까운 현실이죠. 특히 여자탁구는 이전의 생기를 찾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래서 제가 맡은 일도 '드림팀'이라해서 초등학교 중학교 아이들을 우수한 선수로 키워내는 일입니다. 남자와 여자 10명씩을 선발했는데, 저는 여자팀을 맡게 되었지요. 앞으로 4년 동안 전념해야 할 일입니다."-인기종목으로부터 멀어진 탁구의 현실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그대로 반영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동네마다 있었던 탁구장이 요즈음은 찾아보기 어려워졌죠. 국민적 열광이 없어진 종목이 안게 된 현실이겠죠."그래도 다행인 것은 생활체육으로 붐이 일고 있고, 실제로 생활체육현장의 탁구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은 희망이 있다는 증거겠지요."-한때 세계 1위인 중국을 위협했을 정도로 우세했던 한국 탁구가 왜 이런 상황이 된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세대교체를 이루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전에는 중국에 이어 한국이었는데 지금은 일본이 앞서 있는 형국이거든요. 들여다보면 일본은 이미 오래전에 세대교체를 위한 정책을 실행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선수를 선발해 키워내면서 자연스럽게 세대교체를 이루었죠. 10년 앞을 내다보고 준비를 했으니 그렇지 못한 한국은 뒤처질 수밖에 없습니다."-예전의 스타들이 여전히 현장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신진 선수 발굴이 안 되고 있다는 증거겠군요. "남자 국가대표 선수들만 봐도 연령대가 30대를 훌쩍 넘습니다. 문제는 그 선수들을 능가할만한 선수들이 안 나오는 것이고, 그렇다보니 이들이 계속 현장에서 뛸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죠. 은퇴도 마음대로 못하는 현실인겁니다."-세대교체가 되면 잠깐 동안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겠지만 멀리 내다보면 보다 과감한 선택이 필요하다는 말씀이군요. "작년 올림픽만 해도 남자선수들이 은메달을 땄습니다. 당장 메달 하나 더 따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죠. 그런데 그것에만 매이다 보면 과감하게 세대교체를 못하게 됩니다. 문제는 당장 코앞의 성과를 선택하느냐, 아니면 장기적인 미래를 선택하느냐 인데, 우리의 경우는 그 선택의 결과가 지금 드러나고 있는 셈입니다."-한국 탁구는 80년대와 90년대가 절정기였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때는 기량 있는 선수들이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기억에 남는 대회가 많이 있을 텐데요. "86아시안게임과 87세계선수권대회, 88올림픽이 저에게는 가장 소중한 기억입니다. 그중에서도 잊지 못할 순간들이 몇몇 있는데, 87세계선수권대회 단식 준결승은 제 생애에 가장 극적인 대회였습니다."-그때 금메달은 놓치지 않았나요. "개인 단식에서는 항상 은메달에 머물렀어요.(웃음) 그때 준결승에 중국선수와 붙었는데 2대 2, 마지막 세트에서 18대 11로 제가 지고 있었는데 상대방 점수를 그대로 묶어놓고 내리 10점을 선점했어요. 역전승이었죠."-어느 경기나 마찬가지겠지만 탁구는 특히 민첩하게 상대방의 전략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요. 그만큼 심리전 성격이 강할 것 같은데요. "정신력이 중요하죠. 사실 18대 11의 상황이라면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기 마련인데, 그때 도 욕심을 버리고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으로 담담하게 한걸음씩 나갔던 것 같아요. 역전승이 현실이 되었을 때 기쁨은 정말 컸죠."-건강이 안 좋은 상황이었는데 그래도 늘 경기 성과는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충분한 훈련을 하신 덕분이겠죠."아쉽게도 경기 때마다 충분한 훈련을 못했습니다. 몸이 아파서 훈련의 양이 언제나 부족했어요. 그래서 항상 불안했습니다. 믿음이 없었으면 그런 상황을 이겨내기 어려웠을 겁니다."-탁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양감독의 모교인 익산 이일여중과 이일여고가 탁구명문으로 이름났었죠. "우연히 탁구를 시작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야외수업을 했는데, 미술시간이었죠. 그런데 제가 그림은 그리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애들 그림만 기웃거리고 다니는 것을 선생님이 보신 거예요. 그때 마침 탁구부가 만들어지는 때였는데, 선생님이 권유하시더라고요. 별 고민도 없이 탁구부에 들어갔죠. 이일여중과 이일여고 탁구부도 우리들이 입학하면서 생겼습니다."-선생님께서 양감독의 신체조건과 민첩함을 읽어내셨던거군요. 일찍부터 운동부에서 활동하셔서 어린 시절의 기억이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중고등학교를 탁구선수로만 보냈으니 아무래도 그렇죠. 그래도 어릴 때 놀러 다녔던 배산 이라든가 창인동 골목길의 추억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함께 뛰었던 선수들 중에서는 누가 가장 친분이 깊었나요. "역시 88올림픽에서 콤비를 이루었던 현정화 선수죠. 저보다 나이가 다섯 살 아래지만 후배이자 동료로 서로 의지하고 존중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이상하게 같은 연배의 선수는 없었네요."-탁구가 88올림픽 때부터 정식 종목으로 되었더군요. 아까 말씀 하신대로 오늘날의 탁구는 경기로서 비인기종목이지만 근래의 분위기로 보아서는 생활체육으로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탁구는 민첩한 운동이에요. 작은 공간에서 할 수 있고, 다른 어떤 운동보다도 기구도 비싸지 않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죠. 특히 크게 체력을 소비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전신운동이 되는 매력 있는 운동입니다. 상대가 있으니 경기하는 재미도 있고요. 그래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일상 속의 운동으로도 권할 수 있는 종목이지요."-다른 운동은 안하시나요. "걷기 이외에 다른 운동은 안합니다. 골프를 해보았는데, 죽어 있는 볼을 치는 과정에 흥미를 못느끼겠더라구요. 탁구는 살아 있는 볼을 주고받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굉장히 역동적이고 재미있죠. 골프 치는 분들은 다른 입장이겠지만요.(웃음)" -탁구 분야의 상황이 녹록하지만은 않지만 머지않아 예전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있습니다. 그만큼 양감독님의 역할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의지는 있지만, 결과를 지금부터 재단하고 싶진 않습니다. 성실하게 제 맡은 역할을 해나갈겁니다. 선수들의 재능을 발견하는 일이 우선이겠고, 그 재능을 잘 살려서 좋은 선수로 키워내는 것이 그 다음 목표겠지요. 앞으로의 4년이 제 인생에서도 아주 중요한 시기가 될 겁니다."양감독은 오는 11월부터 초등학생과 중학생 꿈나무 지도를 시작한다. 충북 단양에 있는 훈련 전용 탁구체육관에서 합숙훈련으로 진행하는 고단한 과정이다. 드림팀으로 선발된 10명 여자아이들 못지않게 그 역시 마음이 설렌다. 건강이 최악의 상황을 맞았을 때도 포기하지 않고 쏟았던 탁구 열정을 이제 후진들을 위해 쏟을 시간이 그의 앞에 놓여있다. 한국 탁구가 다시 세계의 녹색테이블을 석권할 날을 준비하는 여정의 시작이다.● 양영자 감독은- 스카이서브 처음 개발11월부터 충북서 꿈나무 지도양영자 감독은 전북 익산이 고향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탁구부에서 라켓을 잡기 시작했다.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이에리사와 정현숙선수가 최초로 단체전 우승을 하면서 탁구 열풍이 막 불기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10대와 20대,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10여년을 국가대표 선수로 보냈다. 팔꿈치 부상을 당했던 대학시절에 고비를 맞았었고, 이어진 간염 투병으로 탁구선수 인생 중단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 때마다 신앙의 힘으로 어려움을 이겨냈다. 국가대표에서 탈락되는 아픔을 맛보기도 했던 그는 86 서울 아시안게임 개인전에서 처음으로 중국선수를 이기고 은메달을 따 화려하게 컴백했다. 86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 87 세계탁구선수권 복식 금메달과 단식 은메달에 이어 88올림픽에서는 현정화 선수와 콤비를 이뤄 중국을 제치고 복식 금메달을 따 국민의 영웅(?)이 됐다. 다섯 살 아래인 현정화 선수는 피할 수 없는 라이벌이기도 했지만 지금도 '같은 길을 가는 인생의 최고 파트너'로 꼽는 동료이기도하다.그는 당시에는 시도하지 않았던 탁구공을 높이 올리는 '스카이브 서브'를 처음 개발해 화제가 됐다. 그의 강공 드라이브와 스카이브 서브는 상대 선수들을 위협하는 주특기였는데, 특히 그의 강력한 드라이브에 온 국민이 환호했다. 88올림픽 직후 간염으로 건강이 악화돼 이듬해에 은퇴했으며, 그 무렵 어머니가 간암으로 작고해 우울한 시기를 보냈다. 신학공부를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는데, 1992년에는 연합통신 기자 출신으로 선교사의 길을 가고자 하는 남편을 만나 결혼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모든 삶을 선교에 바쳐온 그는 1997년 몽골로 건너가 14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남편은 교회개척과 성경 번역으로, 양감독은 몽골의 탁구클럽에서 선수들을 지도하며 선교활동을 했다. 지난해에 사역을 마치고 올해 초 귀국했으며, 지난 7월 청소년국가대표 후보선수단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20년여 만에 복귀했다.지금이 한국탁구가 다시 일어서는 전환점이라고 생각하는 그는 유망주를 발굴해 하루라도 빨리 세대교체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탁구로 얻은 자신의 영광을 후진들을 위해 쏟겠다는 의지는 그래서 더 강하다.

  • 기획
  • 김은정
  • 2013.10.17 23:02

안영길 중국 하얼빈 한국음식점 '순풍' 사장

두 번 한국을 떠났다. IMF가 터졌던 98년이 첫 번째고, 한국에 돌아왔다 야반도주(?)하다시피 다시 떠나야 했던 2003년이 두 번째다. 10년이 지난 지금, 중국 하얼빈에는 한국 요리로 이름난 음식점이 있다. 원래 이름은 '순풍(順風)'이지만 한국짜장면으로 이름난 덕분에 아예 '한국짜장면'이 가게 이름이 되다시피 한 음식점이다. 길게 줄을 서야 하는 번거로움을 기꺼이 감수해야만 짜장면 한 그릇 먹을 수 있는 곳, 엄지손가락 높이 치켜올려 세우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맛으로 중국인들을 사로잡은 곳. 이 음식점 주인은 한국사람 안영길 사장(57), 두 번의 도전 끝에 하얼빈에서 '한국짜장면' 신화를 써낸 주인공이다. 그의 성공담은 낯설지 않다. 온갖 고난에도 좌절하지 않고 역경을 극복해 끝내 성공한 사람들의 인생스토리가 우리 주위에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 사장의 성공담은 좀 다른 면이 있다. 고난의 강도나 시련의 깊이 때문이 아니다. 마음먹은 일은 실천하고야 마는 도전정신은 그렇다하더라도, 멀리 내다보는 일에만 마음 맡기지 않고 '오늘'에 더 충실하고, 늘 '내 주위 사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쏟는 삶의 태도가 그의 오늘을 있게 한 바탕이었다면 어떤가. '전혀 특별하지 않은' 일상적인 삶의 태도만으로도 역경에 처한 자신을 온전히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면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추석을 하루 앞둔 연휴, 고향을 찾은 그를 전북대 안 카페에서 만났다. 80년대 후반부터 10여 년 동안 전북대 앞에서 중국음식점을 운영했던 그에게 전북대와 인근의 풍경은 각별한 의미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성공했으나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 했던 이 공간은 추억이 되었지만, 언제나 그의 존재를 다시 확인시켜주는 바탕과도 같은 곳이다. 그래서인지 바쁜 일정에서도 그는 여유로워보였다. 고단한 일상을 짐작하기 어려운 편안함이 그의 삶, 뒤편을 더 궁금하게 했다. -일정이 바쁘시더군요. 내일 중국에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긴 시간 나와 있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한국에 나온 김에 중국 들어가면서 아이들이 있는 북경에 잠깐 들러 하얼빈으로 갑니다. 애들이 학교 다니느라 북경에 가 있는 5년 동안 한 번도 못 갔거든요."-중국은 언제 가셨습니까. "2003년 4월이니까 10년이 조금 넘었군요. 그보다 앞서 98년에도 중국에 들어갔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처럼 일이 풀리지 않아 1년 3개월 만에 다시 돌아왔지요. 전북대 인근에 다시 음식점을 열었는데, 장사가 잘 안되었어요. 4년 동안 고생하다 빚을 지고 부끄럽지만 거의 야반도주하듯이 중국으로 떠났습니다."-실패의 경험이 있는 곳에 다시 돌아가 도전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인연이었던 것 같아요. 다시 하얼빈에 갔을 때 바로 사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어요. 아이들 교육이 제일 큰 문제였는데, 그 당시에는 한 달 동안 있어보면서 애들이 잘 적응할 수 있다 싶으면 우리 부부는 한국에 다시 들어올 요량이었습니다. 우선 돈을 벌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아내가 먼저 한국에 들어간 뒤의 상황을 보니 중국에 애들만 남겨놓는 것만큼 나쁜 선택이 없더군요. 제가 남았죠. 그때부터 2005년 9월 식당을 열기까지 오로지 애들 교육에만 전념했습니다."-전업주부 일을 하신 셈이군요.(웃음) 경제적 어려움은 없었나요. "두 번째 간 것이 4월이었는데, 그곳 학교는 9월에 학기가 시작하니 애들이 집에 있어야 했어요. 애들이 넷이나 되니 생활비가 만만치 않았죠. 한국에서 아내가 남의 식당일 해주고 보낸 돈이 전부였는데, 그래서 돈을 벌 요량으로 대련에 가서'보따리 무역'도 잠시 해보았어요. 기대만큼 벌이가 안 되더군요. 대련은 살기 좋은 도시였지만 생활비가 많이 들어가고 할일은 마땅치 않았어요. 그래서 지인이 추천해준 진황도로 갔는데 우선 작은 도시인데다 인천에서 직항 뱃길이 열린다고 하고, 한국 사람이 거의 없는 것도 마음에 들었죠. 1년 쯤 살았습니다."-한국 사람이 있어야 외로움도 나누고 할 것 같은데 오히려 없는 곳을 선호하셨군요. "한국 사람과 교류하면 아무래도 그것이 편하니까 중국 적응하는 시간이 늦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잠깐 다니러 간 것이 아니고 살려고 간 곳인데……. 하얼빈에서도 아이들이 한국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가능하면 못하게 했습니다. 제가 중국에서 빨리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도 중국인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적응하기 위해 교민사회와 떨어져 있었던 덕분이었죠."-기대한 만큼 중국 사회에 적응은 빨리 되었습니까. "물론입니다. 아직 중국말이 서툴 때였지만 많은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았어요. 제가 만난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호의적이고 아주 친절했습니다. 도움을 요청했을 때 거절하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난 적 없습니다." -특별한 비결이 있었을까요."우선 내 자신이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늘 인식했습니다. 중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만만한 나라가 아닙니다. 중국 사람들은 배타적이지 않아요. 경계를 하지 않죠. 그런데 주위 사람들을 보면 중국과 중국인들에 대해 왜곡된 편견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더군요."-많은 사람들이 낯선 나라에 가서 겪게 되는 어려움을 쉽게 해결하신 것 같습니다."외국에 가서 살게 되었을 때, 어떤 태도로 그 나라 문화에 적응하려고 하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겸손한 태도가 필요하지요.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예의가 없습니다. 중국의 경우는 더 그런 것 같아요. 오히려 폄하하는 듯 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중국이 잠시 세계의 중심에서 밀려나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보이는 것만이 중국의 모든 것이 아니거든요."-식당이 길지 않은 시간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일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중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짜장면 이야기 해보죠. "87년에 중국음식점을 열었으니까 25년이나 되었군요. 처음 2년은 철가방 배달도 했습니다. 그 후에는 주방에 들어가 직접 요리를 하기 시작했죠. 어깨너머로 배웠지만 수많은 요리책과 자료들을 보고 좋은 재료로 좋은 음식을 만드는 것이 성공 비결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 원칙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어요."-음식점을 열기 전에는 대학에서 학과 조교로 일하셨다면서요. 어떻게 삶을 한꺼번에 바꾸셨는지 궁금합니다. "당초부터 학문과는 잘 맞지 않았던 것 같아요. 석사과정까지 마쳤지만 그 이상의 길이 보이지 않았어요. 당시 개인적인 상황도 힘들었고, 그래서 마음을 접었지요. 별 갈등 없이 중국음식점을 학교 앞에 열었습니다."-왜 꼭 식당이었습니까. "돈을 벌고 싶었어요. 몸이 성하니 배달이라도 할 수 있겠다 싶었고, 학교 인근에서 가장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음식점은 해볼만하다고 생각 했죠."-그 음식점이 이 일대에서 가장 붐비는 곳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도 여러 번 갔었거든요.(웃음)"장사가 아주 잘되었죠. 짧은 시간에 돈을 벌어 인근에 건물을 살 정도였으니까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제 인생에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랄 수 있지요."-그런데 왜 빈손이 되어 중국으로 가게 되었습니까. "다른 일에 마음을 팔았어요. 욕심을 낸 것이죠. 내 자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넘어 사채에 제 2금융권까지 활용하면서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다른 돌파구가 필요했지요. 첫 번째 중국행도 그랬고, 다시 돌아와 4년 동안 버티다가 두 번째 떠날 때는 더 절박한 상황이었어요."-그래도 '순풍'이라는 음식점을 열고 8년 만에 하얼빈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짜장면' 식당이 되었으니 오히려 그때의 실패가 오늘을 있게 한 바탕이 된 셈이군요. "그런 셈인데, 그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컸습니다."-가장 어려웠던 시간이 언제였습니까."가족이 떨어져 살았던 5년 여 동안이에요. 아이들은 엄마와 떨어져 3년 동안 얼굴을 못보고 지내기도 했지요. 개인적으로는 아내가 2005년 9월에 식당 문을 열면서 잠시 다녀간 적이 있는데, 개업을 앞두고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가장 견디기 힘들었어요. 아내에게 미안함이 컸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싸한 아픔이 몰려오더군요."-그런 아픔이 더 의지를 강하게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경제적 빈곤도 벗어나야 했지만 가장 절박한 것은 가족이 함께 사는 일이었으니까요. 지금도 가족이 흩어져 살고 있지만 그때와는 동기가 전혀 다르죠."(웃음) -듣기로는 식당의 매출이 놀랍던데요.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겠지요."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지요. 처음 하얼빈에 식당을 열었을 때 하루에 한국 돈으로 10만원 매출이었다면 지금은 수십 배 늘었어요. 처음에는 주방장과 두 명 직원까지 네 명이었는데 지금은 주방만 25명, 서빙 관리 등 모두 합하면 50명 직원입니다. 연 매출이 40억 원이 넘습니다."-기업이군요. 그렇게 성공하기까지 시행착오가 많았다면서요."메뉴에서부터 쓰린 경험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몇 가지 한국음식을 정해놓고 이중에서 골라라는 방식이었죠. 그런데 중국인들이 오면 다른 메뉴를 찾는 거예요. 고집을 꺾지 않다가 결국은 내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한국 손님들은 많이 왔지만 그들이 다른 손님을 데리고 오는 파급효과는 적거든요. 중국인들이 많아야 고객이 늘지 않겠어요."-짜장면 말고 다른 특별한 메뉴도 필요했나요. "전체 매출의 가장 큰 부분을 짜장면이 차지하지만 지금은 고추장삽겹살이 인기 있습니다. 한국음식을 중국인들의 입맛과 문화적 특성을 고려해 개발한 것이죠.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니 재미도 있고, 또 찾아오는 손님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내놓을 수 있으니 보람도 있고요." -'한국짜장면'을 중국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한 비결이 궁금하군요. "짜장면은 중국식 작장면과는 전혀 다릅니다. 재료도 만드는 방식도 다르지요. 한국식 짜장면은 고소하고 단맛, 그리고 쫄깃한 면발이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곳 재료만으로는 그 맛을 내기 어렵더라고요. 온갖 재료를 다 동원해서 그 맛을 살려낸 것이 주효했죠. 신선하고 좋은 재료를 사용하는 것도 그렇고요."-중국인 직원들과는 신뢰가 중요할텐데요. "저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특히 낯선 나라에서는 더 그렇죠. 한 가족이 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 많습니다. 50명 직원들을 모두 내 가족같이 생각해야 그들도 주인의식으로 일할 수 있게 되죠. 입장을 바꾸어, 저 한국인 사장이 돈만 벌 목적으로 식당을 운영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으면 신뢰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온전히 중국인이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외롭긴 했지만 그 대가는 큰 선물이 되었죠. 우리 직원들은 저에게 '한국사장'이라고 절대 부르지 않습니다. 그냥 '사장님'이죠. 저를 거의 교주로 대합니다.(웃음)"-친 가족처럼 대해주신 덕분이겠군요.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돈을 벌기 위해 중국 진출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우선은 그곳 주민이 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한발만 딛고 돈 벌어 가겠다는 생각으로는 십중팔구 실패합니다. 저는 중국인이 되기 위해 언어를 열심히 익혔고,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배우겠다는 자세로 그들을 대했습니다. 그것을 직원들과 손님들이 먼저 알아주었습니다. 우선 언어부터 익히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남의 나라 언어를 습득하는 일이 당연히 어려웠지만 지루함과 기쁨과 보람이 동시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어를 바탕으로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이 필요합니다. 신뢰를 쌓는 일이죠. 중국은 법치국가라기보다는 이치국가로서의 특성이 강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해결되는 일들이 많죠. 법과 규정이 엄격한 사회는 그것에 적응하면 되지만, 사람간의 관계를 중시하는 사회는 소통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만난 날, 그는 하얀 셔츠에 검정바지를 입고 나왔다. 식당에서도 이 옷을 입고 일한다고 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바지 끝은 다 닳아 헤져있고 구두는 금세 터질 것처럼 낡았다. 눈길을 의식했는지 안 사장은 "겨울이나 여름이나 이 바지 하나로 사니 빨리 낡는다"고 말했다. 짐작하기 어려운 검약의 일상이 드러나 보였다. 사실 그는 중국인 종업원들을 1년에 두 번 가족과 함께 초청한다. 경비만도 수천만 원이 드는 이 일을 안사장은 '가족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내가 더 행복한 기쁜 선물'이라고 했다. 궁금했던 그의 성공비결, 그 답을 따로 묻지 않아도 됐다.■ 우여곡절 중국 이민…한국식 짜장면으로 성공신화 1956년 김제에서 태어났다. 열 세살때 농사를 지었던 아버지가 전주시청의 말단직 공무원이 되어 전주로 이사했다. 중고등학교시절 그는 다른 아이들처럼 공부에만 얽매이지 않고 '살고 싶은 대로' 살았다. 고2때는 상록수가 되겠다며 울릉도까지 가출을 감행한 경험도 있다. 다시 돌아와 복학하는 바람에 전주고 1년 후배들이 그의 동기가 됐다. 서울대 미대를 지원했으나 실패하고 이듬해 특별한 목표 없이 전북대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학문에는 뜻이 없었으나 대학 2학년 때 스승의 권유로 연구실에 있게 되면서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대학원(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해 석사과정을 마쳤으나 아무래도 학문은 길이 아니라는 생각에 개인 사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거창한 미래보다는 현실 속에서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1987년 2월, 전북대 정문 근처에 열었던 중화요리집 '사천성'이었다. 성실함으로 무장(?)한 그의 사업은 기대 이상으로 번창해 10년만에 건물주가 되었다. 그러나 과유불급(過猶不及), 아파트개발지구의 상가부지에 눈을 돌린 것이 화근이었다. 은행대출을 받아 건물을 매입한지 한 달이 채 안 돼 IMF가 터졌다. 그의 운명이 바뀌는 계기였다. 그 뒤 두 번의 중국 이민에 도전,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지금은 하얼빈의 이름난 식당 사장이 됐다. 한국식 짜장면과 새롭게 개발한 한국식 요리로 중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덕분이었다. 그의 이민사는 길지 않지만 그 안을 펼쳐보면 중국이민사의 교과서가 될 만하다. 그는 중국어를 익히고 중국인들과 소통하며 중국인들의 문화를 온전히 이해하고 그들의 일상을 존중하며 스스로 중국인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쉽지 않았을 그 과정 덕분에 중국의 지인들에게 그는 '신뢰할 수 있는 한국사람'이 될 수 있었다. 동토의 도시 하얼빈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그는 곧 한국에 돌아올 생각이지만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 '함께 일해준 중국인 종업원들의 인생을 바꾸어주진 못하지만 최소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기반을 준비해주는 일'이다. 얻은 만큼 돌려주는 일, 주위사람을 배려하고 가진 것을 나누는 일, 멀리보지 말고 내 앞과 주위를 소중하게 여기는 일을 일상의 철학으로 지켜온 그에게는 '꼭 지켜내야만' 하는 목표다.

  • 기획
  • 김은정
  • 2013.10.03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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