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출신 가야금연주자 김일륜 중앙대 교수
지난해 11월 29일 이른 저녁, 서울의 국립국악원 우면당 300여석 객석을 가득채운 관객들은 환호했다. 가야금에 판소리를 얹힌, 혹은 판소리에 가야금을 새긴 새로운 병창의 세계. 무대는 치열했으며 객석은 설레였다. 김죽파류 가야금산조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기고, 가야금병창으로 들려준 호남가에 신명났던 객석은 판소리 춘향가를 가야금과 아쟁, 북에 얹어낸 입체창과도 같은 새로운 연희형식을 만나 온전히 매료됐다. 가야금 선율은 긴장과 여운의 경계를 넘나들고, 소리의 공력은 깊어 소리가 먼저인지 가야금이 먼저인지 분별하는 일 조차 무의미해졌다. 가야금연주자 김일륜 교수(54, 중앙대)의 스물두 번째 독주회. 농현담성(濃絃淡聲)이란 주제를 붙인 그의 소릿길 두 번째 무대였다. 최옥삼류 산조의 일인자로 꼽히는 그는 전통을 올곧게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변화를 위한 다양한 시도와 도전을 해온 연주자다. 80년대 중반부터 국악실내악단(어울림)과 가야금삼중주단(서울 새울)을 만들어 국악실내악운동을 펼쳐온 그는 가야금만으로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국악대중화의 새로운 물꼬를 튼 주역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배우고 연구하면서 국악대중화의 지평을 즐거움으로 열어가고 있는 그를 만났다. 전통과 창작의 경계를 넘나들면서도 어느 한쪽도 소홀하지 않고 온전히 자기 음악세계로 만들어내는 지치지 않는 열정이 궁금했다.돌아보면 가야금 선율로 연주하는 캐논변주곡에 맞춰 춤을 추는 비보이 광고로 화제가 된 숙명가야금연주단도 그가 만들어낸 최초의 가야금오케스트라다. 연주곡들은 또 어땠는가. 전통가락이 아닌 비틀즈의 팝송이나 비발디의 사계, 탱고음악까지 대중들에게 친숙한 곡들을 가야금으로 연주하고,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춤까지 추는 파격적인 시도에 경계와 비판이 없었을 리 없다. 음악은 시대에 따라 변합니다. 변할 수밖에 없어요. 그 시대에 필요한 음악과 양식을 접목시켜 가야금을, 우리음악을 대중들에게 알리고 대중들이 즐길 수 있게 하는 일을 연주자들이 스스로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어요. 전통을 흔들거나 깨트리는 일이 아니고, 더 가치 있게 지켜가는 일입니다. 그래서 비판과 우려도 두렵지 않죠. 그가 밝게 웃으며 되물었다. 도대체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확신에 가득찬 그와의 인터뷰는 그래서 더 즐거웠다. -작년에는 연주회가 유독 많았던 것 같습니다. 연말에도 지천명산조축제에 독주회까지 바쁘셨죠. 연주를 많이 하는 편이긴 하지만 지난해는 독주회까지 겹쳐 좀 정신없이 보냈습니다. 독주회는 판소리까지 새로운 형식으로 입혀내다 보니 더 많은 준비를 해야 했어요.-반응이 아주 뜨겁던데요. 이미 2011년 독주회에서도 시도했던 형식 아닌가요. 춘향가 한바탕을 떼어서 가야금에 올려서 불렀습니다. 지난 독주회에서는 사랑가부터 이별가까지 했고, 이번 무대에서는 옥중가부터 마지막부분까지 이었어요. 가야금 뿐 아니라 무대에 선 아쟁연주자와 고수도 함께 했는데 아니리도 주고받고 하다 보니 작은 입체창 무대 형식이 되었습니다. 관객들도 새롭게 접하는 형식이었으니 화제가 되었던 것 같아요.-실내악단 어울림에서도 국악가요를 불렀는데, 소리에 남다른 재능과 애정이 있나봅니다. 어릴 때부터 소리가 좋았어요. 중간에 판소리 배우는 일을 작파했지만, 병창도 그렇고 저에게 잘 맞는다는 생각을 하죠. 늘 마음에 두었던 판소리를 2009년부터 시작했는데, 3년 만에 떼었어요. 적지 않은 시간을 바쳤는데, 기왕에 시작한 일이니 다섯 바탕은 못해도 적벽가는 꼭 하고 싶습니다. 내년 3월부터 다시 시작할 계획인데, 삼국지부터 읽으려고요.-늘 새로운 것을 향한 열정이 식지 않는 비결이 뭘까요.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우리 가락을 몸과 마음에 얹고 살아와서 그런 것 아닌가 싶어요. 무엇인가 시작을 하면 온전히 몰두하는 습성이 있는데, 그것이 끝나고 나면 또 거기서 다시 새로운 것을 시작하게 되거든요. 일상이 그런 것 같아요.-서울대 국악과 출신들은 대부분 정악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민속악 분야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은데, 그에 비해 그동안 민속악 분야의 작업을 많이 해온 것 같습니다. 어려움은 없었나요.우려가 많았지요. 실제로 하고 싶은 일을 접은 적도 많습니다. 그래도 제 음악을 확장시키기 위해 여러 장르를 공부하고 섭렵하는 일을 밀어내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섰죠. 덕분에 조금은 그런 분야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사실 도제식 교육이 바탕인 국악분야에서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완고해서 계통을 벗어나는 일이 쉽지 않죠. 그런데도 그 새로운 도전과 시도가 줄기차게 이어졌던 것을 보면 스승으로부터 미움을 안받으셨나봅니다.(웃음)그런 우려가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제가 하는 일에 많은 스승들이 힘을 주셨어요. 제가 시도하는 실험적인 일들이 전통의 입장에서 보면 일탈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궁극적인 지점은 오히려 전통의 가치를 제대로 이어가는데 있거든요.-실제 가야금의 전통가락을 얻기 위해 많은 공력을 쏟으셨죠. 산조만 해도 여러 가야금명인들의 산조를 다 섭렵했는데, 한 연주자가 여러 유파를 연주하는 일은 굉장한 공력이 필요한 일 아닌가요. 가야금연주자로서 당연한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술은 시작은 있으나 끝은 없는 것 같아요. 특히 산조는 국악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분야거든요. 그래서 한 유파를 온전히 받아들이는데도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지만 여러 유파의 산조를 섭렵해야 비로소 제 음악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일전에 교수님의 산조연주에 어떤 류의 산조를 연주하더라도 원곡을 뛰어넘는 아름다움을 표현한다는 평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극찬을 들으면 연주자로서 이제 됐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황송하죠. 그러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스스로 그렇다고 생각해 안주하고 싶다거나 연습을 게을리 한 적은 없습니다. 연주자는 평생을 연습해도 늘 부족하거든요. -김일륜이란 이름을 대중들에게 알리기 시작한 것은 역시 국악실내악단 어울림이겠죠. 국악은 고루하고 재미없다는 인식이 있던 시절이었는데, 당시 슬기둥과 어울림이 국악실내악단으로 창단하면서 우리악기와 연주를 대중화하는 일에 나섰어요. 국악실내악운동의 물꼬가 트였지요. 우선 대중들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음악이 친숙해져야 하니 국악가요도 만들어 연주했는데, 노래를 제가 불렀어요. 그때부터 부른 가요가 제법 되어서 그 곡만 모아 음반으로 낼까 계획하고 있습니다.-서울 새울 가야금 삼중주단도 이름을 알렸죠. 연주 실력도 빼어난 세 명 가야금주자들이 모인 단체여서 더 그랬고요. 90년에 창단했는데 가야금중주단으로는 그것도 처음이었죠. 새로운 울림이라는 뜻을 담아 서울 새울이란 이름을 붙였는데, 91년에 창단공연을 비롯해 그 이후에도 박범훈 백대웅 이병훈 선생님 같은 작곡자들이 창작곡을 많이 주셨어요. 국악 대중화에 기여했다면 이런 뜻과 열정이 모여진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실제 실내악 운동은 국악대중화의 물꼬를 텄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교수님 개인적으로도 동력이 되었을 것 같은데요. 물론입니다. 실내악 운동은 제게 굉장한 에너지가 되었어요. 덕분에 또 하나의 기회가 주어졌는데, 아무연고도 없는 숙명여대 대학원에서 가야금만으로 대학원을 만들어 저를 불렀거든요. 한 학년에 10명씩 40명 학생들과 만나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가야금오케스트라를 생각해냈어요. 처음엔 연주할 수 있는 곡이 없어 가야금 파트를 나누고 기존 관현악단에서 연주하는 곡들을 다시 구성해서 나누어 연습했죠. 그러면서 비틀즈의 팝음악, 비발디의 클래식 작품 등 대중들이 친숙한 곡들을 편곡해 연주하기 시작했어요. 요즈음 연주단체들이 쓰는 비틀즈 메들리도 저희가 처음 얻어 연주한 것이에요. -국악실내악도 그렇고 전통 악기인 가야금으로 다양한 곡들을 연주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가장 큰 어려움이 바로 그것이었죠. 우리 가야금이 5음계라는 것, 한계가 분명하거든요. 중국 일본 악기는 음역이 넓어 우리 악기보다는 한결 나은데,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었어요. 86년도엔가 대만에서 서울대로 유학 온 쟁 연주자가 있었는데, 그를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으로 따로 초대해 쟁을 배웠죠. 그러면서 숫자보를 비롯해 중국의 음악을 폭넓게 접하게 되었는데, 우리 가야금이 어떻게 개량되어야하는지를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고민하고 답을 찾기 시작했어요.-음계를 넓히는 작업이 가장 우선이었겠군요.그렇죠. 정악청부터 민요청까지. 물론 그 안에는 산조청이 들어가죠. 그것이 다 호환될 수 있는 음역이 이 플렛부터 에이 플렛까지인데, 25현을 7음계로 쌓아보니까 되더라고요. 그때가 90년대였는데, 마침 박범훈교수님도 그런 부분을 많이 고민해서 22현으로 연주할 수 있는 곡을 만들었거든요. 95년에 제가 연주했던 새산조 22현이 그 곡입니다. 국내 초연이었죠. 그래도 저음이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25현이 필요하더라고요. 그래서 악기장에게 부탁해서 25현 가야금을 만들었어요. 줄 간격까지 다 정해주면서 제작했는데, 그동안 안고 있던 문제점이 어느 정도 해결된 거예요. 그렇게 제작한 가야금이 지금은 가야금 연주자들의 필수적인 악기가 되었죠.-25현 가야금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군요. 만들어진 배경도 흥미롭고요. 악기장 입장에서는 전통악기를 만드는 일과 다르니 마뜩치 않았겠습니다.악기장 선생님은 처음에 25현을 의뢰하니까 나는 12현만 만들지 그런 악기는 안 만든다고 단호한 입장이었어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수요가 많아지니까 하루는 내가 25현 만들어도 되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제발 만드시고 연주자들에게 싸게만 돌려주세요했지요.-의미 있는 일을 하셨군요. 25현은 12현 전통가야금 연주가 지닌 깊은 맛과는 또 다르지만 대중들이 가야금과 친숙해지는 데는 좋은 통로가 되는 것 같습니다. 변화 있고 다양한 곡을 연주하거나 서양악기와 협주는 25현이어야 하니까요. 12현 전통악기로는 그런 변화를 담아내는데 한계가 있죠.-전통악기 연주자가 악기까지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에 비판은 없었습니까. 왜 없었겠어요. 죄인처럼 만들었죠. 야단도 들었고요. 그래도 제 생각에는 연주자로서 좋은 연주에 필요한 것은 다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가야금의 음역 확대가 꼭 필요했으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지요.-다시 판소리를 하게 된 이야기를 해보죠. 가야금으로는 다 이루어놓으셔서 새로운 영역을 시작하셨습니까.사실 판소리는 누구나 시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죠. 그런데도 이상하게 판소리도 하면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정작 해보니 어렵긴 하지만 춘향가 한바탕을 떼고 나니 그래도 아마추어 소리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어요. 즐기더라도 제대로 즐기고 싶은 것이죠. 그리고 중요한 것은 판소리가 가야금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인데, 제 음악을 넓혀주는 통로가 되죠.-소리를 하거나 아쟁을 하거나 모두 교수님의 작업 정점에는 가야금이 있고, 또 그 중심은 김일륜의 음악이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뒤돌아보니 열심히는 했더군요. 안정된 직장을 갖고나서도 안주하지 않고 열심히 걸어왔던 것 같은데, 그런 길이 후배 제자들에게 조금은 도움이 되고 존중 받을 수 있으면 좋겠죠.-늘 새로운 것을 공부하게 하고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대단한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 음악 연주자로서 어떻게 하면 한걸음 더 나갈 수 있을까 늘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과 태도가 일상이 된 것 같아요. 그것이 도전하게 하고 실험하게 하는, 이 시대의 음악을 찾아가게 하는 동력이라고 믿고 있습니다.인터뷰 말미, 그에게 우리 음악은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곧바로 답이 돌아왔다. 우리 음악은 제게 일상의 공기예요. 그러니 이 길을 열심히 갈 수 밖에 없는데, 서양문물이 들어오기 전에 국악이 누렸던 대중화의 인기몰이까지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하더라도 우리나라사람들이 대중음악 듣듯이 국악을 일상에서 즐길 수 있는 때가 왔으면 좋겠어요.사실 외국의 팝에 환호하고 대중가요에 마음을 뺏긴 세태에 일상 속 전통음악의 부활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그는 길이 보인다고 말했다. 30년 가깝게 이 시대의 음악을 만들기 위해, 대중들과 만나기 위해 그가 쌓아온 흔적과 결실을 돌아보며 갖게 된 확신일 것이다.● 김일륜 교수는 최옥삼류 가야금산조 일인자다양한 음악세계 시도최옥삼류 가야금산조의 일인자로 꼽히는 김일륜 중앙대교수는 전주 토박이다. 양쪽에서 떠오르는 해가 중간에서 수레바퀴처럼 하나가 되는 태몽을 꾼 아버지가 그의 이름을 일륜(日輪)이라 지었다. 초등학교 입학하기도 전에 춤과 소리를 배웠고, 남다른 재능을 주목받았다. 아버지(김세영씨)는 예술에 남다른 일가견을 갖고 즐기는 애호가였다. 그의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그림을 배우기 위해 남도의 허백련 화백을 찾아 나서 여러 달씩 집을 비웠던 기억이 생생하게 놓여 있다. 취미로 그림을 즐겼던 아버지는 그를 곁에 두고 화선지를 말게 하거나 난을 치는 것을 보게 했으며 천자문을 가르쳤다. 뭔가 알 수는 없지만 화선지에 번지는 먹의 농담(濃淡)이 황홀했다. 단소를 즐겨 불렀던 아버지는 아예 국악원(전주국악원) 열고 운영했는데, 덕분에 그는 소리며 춤을 그곳에서 배웠다. 워낙 재능이 탁월하기도 했지만 시키지 않아도 소리를 따라 부르며 좋아했던 그를 명고수 김동준선생이 눈여겨보아 소리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걸걸한 목소리가 다른 아이들의 목소리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더 이상 소리를 배우지 않고, 대신 가야금을 시작했다. 사춘기가 오면서 가야금을 손에서 놓았지만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그는 중고등학교시절엔 고적대장이며 응원대장을 도맡아 했다. 전주여고 들어갈 땐 동네의 예쁜 약국아줌마를 보고 약사가 되고 싶어 이과를 택했다. 그러나 고3 올라갈 즈음 그의 재능을 알고 있던 음악선생님이 서울대 국악과 지원을 권유했다. 가야금 연주자로서의 길이 그렇게 시작됐다. 대학 4학년,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한 미국 15개 대학 순회연주회에 참여했는데, 그때의 경험이 그에게 연주자로서의 길을 어떻게 가야하는지 깨우쳐주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곧바로 국립국악원 민속반에 들어갔다. 가야금병창을 맡게 되자 박귀희선생을 찾아가 병창을 배웠다. 스승은 어디 갔다 이제 왔냐고 반색할 정도로 그를 아꼈지만, 아쉽게도 적통을 이어받지는 못했다. 같은 직장에 몸담고 있던 남편(임재원 서울대 교수)을 만나 결혼하면서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으로 직장을 옮겼다. 국악대중화를 향한 도전과 실험이 시작됐다. 80년대 중반, 국악실내악 운동의 중심축이었던 어울림에 참여, 전통음악 뿐 아니라 창작음악과 국악가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을 섭렵하고 연주하면서 관객들을 국악으로 끌어들였다. 최초의 가야금중주단인 서울 새울을 창단해 가야금 앙상블의 새로운 영역을 열었고, 1999년 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교수가 된 이후에는 숙명 가야금연주단을 창단해 가야금의 대중화를 시도했다. 비발디의 사계, 비틀스의 팝송 등 친숙한 음악이 가야금에 얹혀 대중들을 끌어들였다. 그의 실험적인 도전은 늘 주목과 경계의 대상이 되었지만, 찬사에 들뜨거나 우려에 위축되지 않고 우리음악의 대중화의 의지를 지켰다. 중앙대 국악과로 자리를 옮긴 것이 지난 2007년. 그는 두 번째 가야금 오케스트라인 중앙가야스트라를 만들어 가야금의 창작세계를 더 새롭게 실현해가고 있다. 지난해 11월에 가진 농현담성까지 22회의 독주회를 가졌으며 최옥삼류, 정남희제 황병기류, 성금연류, 김병호류 김죽파류 신관용류 가야금산조를 완주했다. 독집만도 최옥삼류 가야금산조 농현을 비롯해 다섯 장의 음반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