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nd news
고창군 해리면 나성리 월봉마을에 '책마을 해리'가 문을 연 것은 지난해 2월이다. 이 공간의 주인은 출판기획자 이대건 씨. 고창이 고향인 그는 '책마을 해리'를 품고 귀향했다. 고창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고 서울시립대 국문과에 입학하면서 고향을 떠났으니 20여년만이다. 그는 대학을 다니면서 출판계에 입성했다. 글쓰기를 좋아하고 재능도 있었던 그가 책 만드는 일을 평생 직업으로 삼은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일찌감치 출판기획의 능력을 인정받아 꽤 잘나가는 출판사의 주간까지 거친 그는 언제부턴가 마음에 품고 있던 귀향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창 일할 40대, 그것도 출판인으로서 성공할 수 있는 정점을 맞은 시기에 삶의 방향을 온전히 바꾸는 일은 쉽지 않았으나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 가족들까지 설득해 귀향했다. 목표는 하나였다. 책마을을 만드는 일. '책마을 해리'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가 책마을을 연 월봉마을은 경주 이씨 집성촌이다. 마을이라야 10가구 남짓, 대부분이 인척이어서 마을과 한 몸이 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폐교가 된 나성초등학교의 교사를 고쳐 출판캠프를 열고 책마을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책마을을 꿈꾸기 시작했던 것이 2006년, 처음에는 격주로 드나들면서 폐교된 공간에 정을 붙이며, 지역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지역 콘텐츠를 발굴하고 그 가치를 살리는 통로를 찾고 싶었다. 스스로 잘할 수 있는 일을 돌아보니 출판이었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고창은 유명한 '고창한지'의 고장이다. 1960년대 중반까지도 수십 개의 한지 공장이 운영됐다. 고창은 우리나라 그림책의 원형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석씨원류 선운사 판본을 가진 고장이기도 했다. 그림책은 그가 석사과정에서 연구했던 논문의 중심이다. 책마을을 만들겠다는 명분은 그래서 좀 더 확고해졌다.'책마을해리'는 그의 설명으로는 범주개념이다. 구체적으로는 고창어린이책박물관과 버들눈도서관, 작은 학교가 되기를 꿈꾸는 책과 이야기가 있는 이야기학교 '나성'이 그 범주에 실재하는 것들이다. 이미 소장한 책만도 10만권이다. 그가 꿈꾸는 책마을은 '디지로그' 방식으로 운영되는 공간이다. 활자꾸미기와 글.그림만들기, 편집하기, 전통방식으로 제본하기 등 책(기획부터 제작까지)을 둘러싼 다양한 캠프를 연다.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채우는 콘텐츠는 물론 고창의 역사, 문화, 생태와 농업활동과 지역생활사다. 지난해 7월부터 시작된 출판캠프에는 참가 신청이 줄을 잇고 있다. 욕심 부리지 않는다면 적당한 규모다. 그러나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따로 있다. '책마을 해리'가 지역을 살리는 문화의 거점으로 자리 잡는 일, 그래서 우리나라 곳곳에 또 다른 '책마을 해리'를 만들어내게 하는 동력이 되는 일이다.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 사라지고 있다. '빠름'과 '편리함'이 최고의 가치가 된 환경이 가져온 결과다. 디지털 문화의 도도한 흐름 앞에 우리가 결별했거나 결별하고 있는 익숙한 일상은 적지 않다. '책'도 그 중 하나다. 책은 더 이상 잉크냄새 배인 종이위의 활자로만 읽혀지지 않는다. 손안의 휴대전화로, 책상 위의 컴퓨터로 책을 만나고 읽는 시대, 종이와 활자의 존재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인류의 오래된 문명의 결정체인 종이책의 존재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아날로그적 일상의 가치가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움직임이 있다. 종이책을 일상으로 다시 들여놓는 일, 책과 책읽기의 가치를 주목한 '책마을' 운동이다. 이 문화운동을 먼저 시작한 곳은 유럽의 도시들이다. 이들 중에는 마을공동체를 살리고 관광명소로 발전시키는 결실로 세계의 주목을 받는 도시들이 적지 않다. 현재 세계적으로 책마을로 지정된 곳은 '세계 최초의 책마을'을 선언했던 영국 웨일스의 헤이온 와이를 비롯한 27곳. 모두가 마을의 역사와 문화, 풍광을 온전히 껴안은 아름다운 공간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런 책마을을 가질 수 없을까. '고창의 책마을 해리'가 반가웠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블로그로 만난 '책마을 해리'는 이름만으로도 마음을 움직였다. 작은 마을의 폐교를 터 삼아 책마을을 만들고 있는 이대건 대표(44)를 만났다. 출판기획자로 성공할 수 있었던 환경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책마을운동을 시작한 그의 꿈과 용기가 궁금했다. 여름더위가 느리게 물러가고 있는 9월 초, 고창 읍내에서도 한참 떨어진 해리면 월봉마을 가는 길, 양옆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이 먼저 마음을 빼앗았다. '책마을 해리'는 지난 2001년 폐교된 나성초등학교의 새로운 이름이다. 잡풀로 덮인 넓은 운동장과 두개의 단층짜리 교사, 조그만 부속건물이 전부인 이곳에서 이 대표는 행복한 꿈을 꾸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책마을 해리'를 만날 수 있는 날은 그리 멀지 않았다. -마을이 참 예쁩니다. 초등학교가 꽤 오래전에 폐교되었더군요. 10년이 넘었는데 인연이 있었습니까. "이 마을은 아니지만 조금 떨어져있는 매남마을이 고향입니다. 이 학교는 증조부께서 지어 마을에 기증한 것이죠. 증조부는 시골에서는 큰 부자였는데 적지 않은 일을 하셨습니다. 흉년들었을 때 노적을 헐어 나누는 일은 기본이고 지게지고 겨우 다니던 길을 넓혀 '구루마'가 다닐 수 있는 신작로와 큰 저수지를 만들어놓으셨어요. 1930년대 말에는 땅 3천 평과 산을 내놓고 교사 한 채를 목조로 지어 내놓았지요. 그래서 학교를 유치했습니다. 나성초등학교는 1933년 정식학교가 아닌 간이학교로 인가를 받았는데 당초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이 교사가 지어지면서 이사해왔습니다. 새 터전을 갖게 된 것이죠."-그런데 어떻게 다시 이 학교를 얻게 된 것인가요."나성초등학교가 2001년에 폐교되었는데 당시에는 폐교를 매각하는 정책이어서 교육청에서 연락을 했더군요. 교육목적으로 기증을 받았는데 그냥 매각해버리면 그 뜻과 달라져버리니 후손과 연고자들에게 먼저 동의를 구하는 절차였어요."-그럼 다시 사신 거군요. 책마을을 만들겠다고 생각하신 것은 계기가 있었나요. "개인적으로 오래전부터 꿈꾸어온 일이기도 하고, 증조부의 뜻을 받는 길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제 증조부를 인근 주민들은 '참봉 하나씨'라고 부르며 존경했습니다. 선각자셨지요. 사실 그 깊은 뜻을 제대로 알 수는 없지만 교육사업을 하시려고 했다면 어떤 의지가 있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후손으로서 마땅히 그 길을 따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과 상의해 이 학교를 다시 인수했죠. 2006년 1월입니다."-그렇다면 아직은 사유재산인데 책마을은 공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물론입니다. 이 학교는 공적인 공간이 되어야 하고 공적인 기구가 만들어지면 기부해야죠. 학교를 매입한 아버님과 또 다른 친척분의 동의를 이미 얻었습니다. 만약 실컷 일해 놓았는데 '팔 테니 나가라'하면 어쩌겠어요.(웃음) 이 공간의 가치를 끝까지 가져가야 한다는 것은 어른들의 뜻이기도 합니다."-'책마을 해리'란 이름이 참 잘 어울립니다. 언제 문을 열었습니까. "작년 2월입니다. '출판캠프'는 작년 7월부터 시작했고요. 그러나 준비는 꽤 오래전부터 했어요. 2006년 학교 인수를 한 후 거의 격주로 서울에서 내려왔습니다. 처음에는 혼자 오다가 나중에는 가족들과 함께 왔죠. 그때는 물론 풀을 베거나 교사가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일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책을 모으기 시작했죠. 지금은 10만권 정도 모았습니다. 아는 출판사들이 도와주었고, 독서운동 단체와 지인들, 학교도서관문화운동네트워크가 나서서 모아준 책들입니다."-가족들과 함께 귀향했는데, 결정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준비기간이 길어서 그나마 큰 반대는 없었습니다. 물론 결단이 필요했어요. 아이들의 교육문제도 그랬고. 애들한테는 동물원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을 했죠. 격주로 내려와 텃밭을 가꾸고 동물들도 가까이하면서 아이들의 거부감을 줄이려고 노력했습니다. 지금은 아이들도 잘 적응하는 편이고 아내는 저보다 더 즐거워합니다."-책마을이 지니게 될 공공성으로 보자면 공간도 그렇지만 운영방식도 사적인 영역에서 벗어나는 일이 중요할 것 같은데요. "그래서 법인을 만들었습니다. 우선은 영농조합으로 했는데, 이름이 '꽃피는'입니다. 이 법인에서 학교를 장기임대해 운영하는 형식이죠. '꽃피는'은 다섯 명 조합원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모두 고창 사람들이고 선후배 사이죠. 책마을을 마음의 양식만이 아니고 몸양식도 같이 주는 공간으로 만들어내자는 데 뜻을 모은 동료들입니다. 책마을이 지역사회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나 가공품들을 유통하는 통로로 기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또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출판 캠프도 함께 운영합니다. 그러나 조만간 법인을 사단법인으로 바꿀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영농법인이면 영농과 관련된 일이 중심이어야 하지 않나요."그렇죠. 영농조합은 목적이 영농행위가 중심이니까요. 그러나 체험 학습이 가능하죠. 그래서 출판캠프도 체험학습의 성격으로 진행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면 출판과 영농체험이 상관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저희는 오히려 그 간극을 깨고 싶었습니다. 저는 이 지역에서 꿰어 낼 수 있는 콘텐츠들은 모두 '영농'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영농'에 대한 규정이 흥미롭군요."예를 들면 고창이 올해 유네스코 생물권지역으로 지정이 됐어요. 그래서 올해 출판캠프의 큰 주제를 '생태 생명'으로 정했습니다. 실제 농업체험만이 아니라 지역의 소중한 콘텐츠를 활용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생태체험 역사문화체험 예술체험 모두가 이 지역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것이고, 그래서 이 지역을 브랜딩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큰 틀에서 볼 때 '영농'이 아니겠어요."-지역의 콘텐츠들을 출판을 통해 활용하는 것 자체가 지역의 훌륭한 '영농'이라는 말씀이군요. 큰 틀에서 보면 굉장히 중요한 지역문화운동이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도시에서 일방적으로 이식하는 문화운동이 아니라 지역의 가치들을 끌어올리는, 교류하면서 균형 있게 문화를 소통하게 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마을은 전통적으로 먹고 입고 자는 모든 것을 만들어내고, 일할 사람까지도 생산해내는 곳입니다. 책마을도 책방이든 도서관이든 자료관이든 모두 책을 소비하는 장이 중심이 되지만, 저는 그러한 책의 생태계에 생산도 함께 하는 구조를 담고 싶어요."-문제는 그런 구조을 유기적으로 조직하고 실행하는 일일 텐데요. "물론입니다. 생산 구조는 결국 이곳에서 책을 만드는 체험이 중심이 되는 형식이 될 텐데, 그런 구조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봅니다. 실제로 작가들이나 편집자들이 일정한 기간에 모여 레지던스 프로그램처럼 머물면서 함께 작업하는 형식도 답이 되겠지요. 이 지역 아이들과 다른 도시의 아이들이 드나들면서 책을 만들어보고 글도 써보면서 글과 이미지를 다루어보는 경험을 한다면 그 어떤 체험보다도 이 아이의 삶은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소비와 생산이 결합된 구조의 미덕이겠죠."-출판캠프 이야기를 해보죠. 책을 만드는 체험의 의미나 가치, 특히 아이들이 그런 경험으로부터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 "스스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혹은 사진을 찍어 자신의 책을 만드는 일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저자가 된다는 일은 나의 좌표를 설정하고 내 주변을 확산시켜 가면서 나와 만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살펴보는 일이지요. 그러니까 단순히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행위의 의미를 넘어 내가 무언가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 내가 무엇을 써서 내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읽힐 수 있다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저자가 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삶을 객관화시키는 과정이라는 겁니다. 그런 체험은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근거를 제공해주죠."-아이들에게는 아주 큰 의미가 있겠군요.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갈 삶의 주인공이 되게 하는데 큰 계기를 체험하게 하는 것, 그것이 좀 더 근본적인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책마을과 지역과의 소통은 어떻습니까. "이제 시작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고창에 책과 관련된 동아리가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책마을이 문을 열면서 동화 읽는 모임 같은 동아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에 첫 모임을 갖습니다. 작지만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는 것이 반갑죠." -책마을은 주민들의 참여가 가장 중요한 것 아닐까요. "주민들이 참여하지 않으면 책마을의 의미는 없습니다. 이미 지역과 연계하는 작업은 시작됐어요. 출판캠프를 진행하면서 필요한 요소들, 이를테면 볼거리 먹을거리 등은 지역을 이어주는 중요한 끈이 됩니다. 책마을은 책이 중심이 되는 공간이지만 체험을 다양한 형식으로 확산해서 지역과 만나는 통로를 개발하려고 합니다. 체험은 현장에 있는 주민들만큼 잘 할 수 있는 주체가 없죠. 가령 갯벌체험만해도 인근의 장호마을이 최고거든요. 주민들도 재미있어하고 규모는 작지만 경제적인 활동에도 도움이 되고요. 책마을은 출판을 지역 주민들의 삶과 결합이 되는 구조로 발전시켜나갈 생각입니다."-2006년부터 준비를 해왔다면 너무 더디가는 것 아닌가요. 혹시 운영재원 마련이 어렵습니까. "재원 확보는 중요하지만 우선되는 가치는 아닙니다. 학교 교사를 리모델링을 하면서 농진청의 지원을 받긴 했지만 운영은 자비로 충당하고 있지요. 리모델링도 아주 더디게 하나씩 하다보니까 답답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언제 끝나냐, 빨리 고쳐서 본격적으로 운영하라는 조언들이 쏟아집니다. 그런데 저는 책마을을 만드는 일은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더디더라도 하나씩 만들어가는 과정, 지역을 알고 지역이 한 몸이 되고 그래서 함께 이루어가는 그릇이어야 하니까요. 더 중요한 것은 그런 과정이 하나의 건강한 문화운동이 되어 다른 지역에도 확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책마을이 궁극적으로 마을을 살려내는 문화적 거점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여러 지역에 책마을이 만들어지면 좋겠군요.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습니다. 제가 우스갯소리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서울에서 출판경기 안 좋다고 죽네사네 하지 말고 지역으로 내려가라. 귀향도 좋고, 귀촌도 좋다. 일단 지역에 가면 발굴해낼 콘텐츠가 너무 많다. 발굴은 됐지만 유통이 안 되는 것도 많다. 출판기획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널려있다'구요."-아무리 콘텐츠가 많다해도 그것을 발견해 활용해야 가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지역의 콘텐츠로 문화상품을 만들 수도 있고, 지역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들에 스토리텔링을 입힐 수도 있죠. 요즈음은 스토리텔링이 근본도 없이 그럴싸하게 붙이는 것 투성이입니다. 그러니 금방 사그라지고 말죠. 지역의 역사를 조명하고 스토리텔링을 만들면서 누군가 그것을 가지고 좋은 출판물을 만들고 확산시켜나가면 지역의 건강한 커뮤니티 비즈니스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 중심적인 역할을 출판, 혹은 출판이 이루어지는 책마을이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앞으로 그 역할을 '책마을 해리'가 증명해보이겠습니다."
조장남 단장의 고향은 전남 신안군 도초다. 어렸을 때부터 노래부르기를 좋아했지만, 어린 시절 그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 여름이면 마을에 들어와 가설극장을 만들고 상영했던 영화를 보며 키웠던 꿈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서울의 공연장에서 보게 된 오페라 '춘희'가 그의 꿈과 삶을 바꾸어놓았다. '성악가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오페라 가수가 되고 싶다'는 바람으로 고향을 떠났다. 교육공무원이었던 아버지와 농사짓는 어머니는 아들의 선택을 묵묵히 성원했다.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그는 대학만은 서울로 가고 싶었지만 '레슨'에 쏟아부어야 하는 경제적 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에게 음악의 길을 열어주었던 스승을 따라 대구 영남대에 입학했다. 대학 4년 동안 공부하면서도 허전함을 채울 수 없었다. 성악의 본고장에 가서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는 바람이 그만큼 깊어졌다. 이탈리아 유학을 계획했으나 준비과정은 쉽지 않았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여건에서는 역시 경제적 부담이 가장 큰 장벽이었다. 유학비를 마련하는 일이 우선이어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정읍 호남고 교사로 2년, 전주 기전여고 교사로 2년 재직했다. 그 사이 교사였던 아내를 만나 결혼하면서 유학의 길은 더 멀어져 보이는 듯 했으나 끝내 이탈리아 유학을 강행했다.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면서 오페라 가수를 선망했지만 노래를 부르는 일 못지 않게 지휘나 연출 기획 등 오페라 제작의 그 모든 것에 더 눈길이 갔다. '어차피 내가 갈 길은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3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기전여대 전임강사가 된 그는 지역에 오페라 운동의 디딤돌을 놓고 싶었다. 그러나 지역의 문화적 환경은 열악했다. 경제적 여건도 그렇지만 '오페라'는 어렵고 특정 계층이 즐기는 것이라는 선입견을 극복하는 일이 과제였다. '시작하면 길이 보인다'는 확신을 스스로 다지며 1986년 호남오페라단을 창단했다. 첫무대는 '루치아'. 그가 예술감독을 맡아 올린 작품이었다. 기대보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더 컸다. 이듬해 1회 정기공연으로 푸치니의 '토스타'를 올리며 본격적인 오페라 제작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제작해 올린 작품은 수십편, 순수한 창작오페라만 여덟편이나 되고 공연 횟수로 치자면 100회를 훌쩍 넘는다. 그 사이 호남오페라단은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창단 10년만에 사단법인으로 옷을 바꾸어 입었고, 2002년에는 이 지역에서 첫 전문예술법인으로 등록했다. 예비 사회적 기업으로 새로운 도전을 했으나 예술분야의 특성을 배려받지 못하는 사회적기업의 높은 장벽 앞에서 포기해야 하는 상처를 안기도 했다. 대한민국 오페라 대상을 비롯해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이 모든 과정에 그의 삶이 온전히 놓여있다.
유럽의 여름은 축제로 끓어오른다. 더위를 피해 시민들이 휴가를 떠난 도시는 몰려온 관광객들이 쏟아놓는 열기로 여름을 난다. 세계의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것은 이 도시들의 축제다. 그 축제의 중심에 오페라가 있다. 올 여름, 두개의 축제를 만났다. 오스트리아의 브레겐츠 오페라 축제와 장크트마르가르텐 오페라 축제다. 브레겐츠 축제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를 끼고 있는 보덴 호수가 무대고, 장크트마르가르텐은 브라겐란트주의 작은 마을 장크트마르가르텐의 채석장이 무대다. 공연장이 된 공간의 특성만으로도 관심을 모으는 이 축제는 한 달 남짓 열리는 축제 시즌 동안 연일 객석이 가득 찬다. '죽기 전에 꼭 봐야할 축제'로 꼽히는 명품 축제 '브레겐츠'는 그렇다 치더라도 인터넷 검색으로도 그 이름을 찾기 쉽지 않을 정도로 작은 마을, 축제로서도 역사가 짧은 '장크트마르가르텐'의 오페라 공연에도 매진 행렬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호사스러웠던 축제기행을 다녀온 며칠 뒤 눈에 띄는 기사를 읽었다. 호남오페라단의 '루갈다'가 국립오페라단의 창작산실지원사업에 우수작으로 선정됐다는 내용이었다. 호남오페라단은 전주에서 활동 중인 민간오페라단이다. 지난 86년에 창단했으니 올해로 28년을 맞았다. 우리나라의 첫 오페라 무대는 '나비부인'. 1937년 5월 서울에 있던 부민관에서 공연된 것이 오페라 공연의 시작이니 그 시점으로부터 치자면 우리나라 오페라 역사는 66년에 그친다. 길진 않아도 충분히 정착할 수 있는 역사지만 양식의 특성, 서양음악에 대한 선입견, 특정한 계층의 예술이라는 인식 때문에 오페라는 대중적 관심을 끌어들이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보는 편이 옳다. 1980년대 말과 90년대 초를 거치면서 발전 계기를 맞기도 했지만 뒤이은 뮤지컬의 성장으로 힘을 잃어야 했던 것은 아쉬운 국면이다. 수많은 오페라단이 무대 위에서 사라지거나 제작비의 압박에 시달리면서도 근근이 무대를 올리는 것이 한국 오페라 문화의 현실인 점을 감안한다면 호남오페라단의 존재는 주목받을 만하다. 호남오페라단을 만들고 오늘까지 이끌어온 조장남 단장(63)을 만났다. 청중을 감동시키는 좋은 오페라 가수를 꿈꾸었던 30대, 열정으로 뛰어들었던 오페라 운동의 노정에서 꼬박 30년을 보낸 그는 어느새 환갑을 지나 초로를 맞고 있다. 온전히 호남오페라단의 역사에만 놓여있는 삶의 궤적이다. 청중들에게 감동을 주는 오페라 가수의 꿈을 버리면서까지 오페라단의 생명을 이어온 목표가 무엇인지 물었다. "내가 선택한 예술이 사회에 이바지 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아니었겠냐"고 답했다. 목표는 명료했으나 그가 걸어온 길을 들여다보니 굴곡이 심하다. 부침이 큰 만큼 실망과 좌절의 상처도 길게 남았지만 그는 기대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스스로 '무모했던 도전'이었다고 말하지만 그 도전이 지역 오페라운동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있다. 우려와 비판보다는 기대와 격려로 호남오페라단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반가운 소식 들었습니다. 그동안 고생한 결실인 것 같습니다."우리 오페라단이 지역의 틀을 벗어나는 계기가 아닌가 싶어요. 제작비 걱정 없이 제작할 수 있게 된 기쁨도 있지만 인정받았다고 생각하니 새삼 용기가 납니다."-이번에 선정된 프로젝트가 어떤 것인가요. "2013 '국립오페라단 창작산실 지원사업 우수작품 제작지원' 공모사업입니다. 지난해부터 준비해온 창작오페라 '루갈다'가 최우수작으로 선정되었어요. 지난 9일에 시연을 겸해 최종 심사를 받았는데 최고점수를 받았죠. 제작비 2억 5천만 원을 지원받고 공연장까지 제공받습니다. 12월 공연이에요."-'루갈다'는 이미 공연을 여러 번 했었죠. 몇 년 전에도 화제가 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루갈다는 2004년에 첫 공연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그때 작품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작품입니다. 대본과 작곡을 새로 진행해 지난해 10월에 완성했어요. 2004년 작품은 스토리를 강조하려다보니 너무 설명적이라는 평이 있었어요. 이번 작품은 동정 부부의 내면을 긴밀하게 담아내는데 중점을 두었습니다."-보완한 것이 아니고 루갈다의 새로운 버전이랄 수 있겠군요. 루갈다는 명실공히 호남오페라단의 대표 레퍼토리가 된 것 같습니다. "그렇죠. 이 작품은 이미 2014년 대한민국 오페라페스티벌 참가작으로 결정되어 있어요.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내년 5월쯤 공연하게 됩니다. 그 활동을 바탕으로 내년 연말엔 이태리 로마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데, 로마 쪽에서도 그렇고 국내에서도 관심이 높아 잘 진행되리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너무 한꺼번에 행운이 몰려오는 것 아닌가요.(웃음)"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이런 기회를 받아들여야죠. 지역에서 활동하는 단체가 무대의 경계를 벗고 오페라 관객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그만큼 긴장도 되고 자극도 됩니다.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예요." -뒤돌아보면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감개무량(?) 할 것도 같고요. "올해 창단 28년을 맞았는데, 여건은 좀 나아졌다해도 환경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습니다. 다만 오페라에 대한 인식이 예전보다는 나아지고 공연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단체 활동을 지지해주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반가운 변화죠."-그래도 오페라라는 특수한 양식의 공연무대가 갖는 대중적 한계가 아직은 커서 오페라 운동으로서의 성과는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일정한 관객에 객석을 의존해야 하는 것도 그렇고요."물론입니다. 그래도 우리지역의 오페라 고정 팬들이 많이 늘어났어요. 내 판단으로는 1500명 정도의 고정 팬들이 지속적으로 공연을 지켜주는 것 같아요. 서울의 오페라 공연 고정 팬을 3000여명쯤으로 잡는데 그에 비하면 우리 지역의 대중적 확산이 결코 암울하지만은 않습니다."-호남오페라단의 28년 역사가 일궈낸 몫일 겁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전북의 오페라 문화가 다른 지역에 비해 우월한 것 아닌가요. "지역 오페라는 대구가 활발합니다. 관립과 민간단체가 공존하면서 오페라문화를 잘 이끌어갑니다. 오페라축제를 개최할 정도로 시민들의 인식도 높죠. 전북도 대구보다는 뒤지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특별한 편이죠. 한때 관립오페라단도 있었잖아요."-전북도립오페라단이 있었군요. 관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불과 3년 만에 해단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원을 받는 관립은 없어지고 스스로의 힘으로 운영하는 민간단체는 살아남은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군요. "전북도립오페라단이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가장 반가워하는 사람들이 누구였겠습니까. 저 역시 앞장서서 도립오페라단 창단을 지원했었죠. 관립과 민간단체가 함께 갈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환경이 없지요. 단 그 둘의 관계는 서로 보완하고 지지하는 관계여야 합니다. 지역의 성악 인구라야 빤하잖아요. 더구나 오페라 무대에 설 정도의 역량을 가진 사람들은 한정적이죠. 그러니까 좋은 가수를 발굴하고 그들이 안정된 생활여건을 갖게 되면 민간단체 무대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선순환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재정적 지원은 어땠나요. 관립에 대한 지원만큼은 아니더라도 민간단체에 대한 배려는 있어야 했을 것 같은데요. "문화와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생각하면 그것이 당연하죠.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어요. 지금도 관립예술단체를 갖고 있는 자치단체 중에는 대부분이 '우리는 관립만 잘 운영하면 된다는 인식을 갖고 있어요. 단체장의 인식과도 직결되는데, 그런 경우 민간도 잘 성장할 수 있도록 균형 있게 지원해야 하는데 민간은 뒷전인 상황이 되죠. 문화는 편식해서는 안 됩니다. 관립은 관립대로 역할이 있고 민간단체는 또 그들대로의 역할이 있습니다. 민간단체의 창작활동을 지원하고 북돋는 일을 외면해서는 안 되지요. 균형 있는 정책과 민간 예술단체에 대한 '인큐베이팅'은 자치단체의 직무입니다."-도립오페라단이 없어진 후에는 민간단체에 대한 지원이 늘어났나요. "아니었죠. 제 기억으로는 당시 도립오페라단 예산이 3-4억 원 정도 되었던 것 같은데 민간 오페라 제작에 1억 원도 안 되는 예산이 지원됐었고, 그나마도 금년에는 못 받게 되었습니다. 오페라를 활성화시킬 좋은 통로만 없어진 셈이죠."-그래도 초창기에 비해 많이 나아지긴 했군요. 호남오페라단에 앞서 전북에 또 다른 민간 오페라단이 있었죠. "전주시향을 지휘했던 유영수교수님이 만든 전북오페라단이 있었어요. 창단 작품 올리고 후속 작품을 올리지 못했죠. 경제적 후유증이 워낙 컸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오페라 운동에 용기를 낸 것도 전북오페라단이란 싹이 있었던 덕분이에요. 그 맥을 직접 잇진 못했지만 오페라단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척박한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거든요. 당시 임옥경 김용진 조성민 박상규 송성태 선생 등 당시 활동했던 선후배 동료들이 마음을 모았고, 클래식 음악운동에 앞장섰던 유승국선생님, 이정태 천길량 선생님께서 정신적으로 지원하고 성원해주셨습니다.-지금도 그렇지만 초창기에는 작품 한편 제작하는 일이 더 어려웠을 텐데요. 제작비라도 건 질수 있었나요."그랬다면 제가 지금까지 단장을 하고 있지 않아도 되었겠지요.(웃음) 해마다 제작비 마련하느라 전쟁을 치르는데 속칭 '똔똔'이라도 맞출 수 있으면 맞추면 성공이라고 하죠. 대부분이 적자였어요. 그래도 초창기에는 서로 어려움을 아는 사람들이 모여 작품을 만드니 고정 단원들에 대한 개런티 등 기본적인 경비에 대한 부담이 적었어요. 기억으로는 당시 제작비가 1500만 원 정도 되었던 것 같군요. 지금은 어림도 없죠. 통상 한편 제작에 3억 원이 넘는 예산이 들어가야 합니다."-말씀을 듣고 보니 오페라단의 재정적 자립은 아직 어려운 일이겠군요. "털어놓자면 안고 있는 부채가 적지 않습니다. 대부분이 개인적으로 안게 된 부채지요. 어떤 해인가는 작품을 두개나 올렸는데, 한편에 2500만원의 적자가 났어요. 두개 공연 모두 그렇게 되니까 암담해지더군요. 그래도 이상한 것이 늘 다시 일어서게 되거든요. 무모한 용기죠. 스스로 선택한 일이니 스스로 감당하는 것이 당연하구요. 그래도 암울하진 않습니다. 길이 보이잖아요. 이 길을 열기위해 쏟은 투자라고 생각해야죠."-그런데 오페라 운동의 대중화는 여전히 먼 길 아닌가요. 그것이 꼭 재정적 여건 때문만은 아닐 것 같은데요. "오페라가 갖고 있는 거리감을 좁히는 일이 과제예요. 오페라는 어려운 것이고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계층의 사람들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의 틀을 깨는 것이 절실합니다. 예술장르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이해하기 쉬운 것이 오페라입니다. 보여줄 수 있는 예술적 장르가 다 결합되어 있잖아요. 스토리를 전달하는데 에도 오페라만큼 좋은 양식이 없습니다." -우리 음악의 접목은 특히 호남오페라단의 돋보이는 작업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적 오페라 창작은 호남오페라단이 지향해온 중요한 작업이죠. '논개' '춘향' '심청' 등 창작품 대부분이 국악을 접목한 작품이었어요. 창작판소리와 국악기를 음악적 소재로 들였죠. 국악과 양악은 음악적 어법상 잘 맞지 않지만 상충되지 않게 잘 융합하면 깊은 감성적 호소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창작품들이 호평 받았던 것도 그 덕분이죠." -공연단체는 스타를 발굴해내는 역할도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역 오페라단이 안고 있는 한계가 있을 것 같은데요. "사실 해마다 작품 올리는 일에만 몰두해오다보니까 주역급을 끌어들이는 일이 우선이었고 스타를 만들어내는 성과는 미약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인을 발굴해내는데는 나름대로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교류를 못하고 있지만 세계적인 무대에서 활동하는 김남두씨도 호남오페라단의 무대에서 시작했습니다. 우리지역 출신 성악가들과 교류하면서 좋은 작품을 제작하는 일이 호남오페라단이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최공호 교수는 전남 영암이 고향이다. 어린 시절부터 만드는 일에 취미가 있었지만 특별한(?) 고민 없이 홍익대 미술대에 들어갔다. 목공예를 전공으로 택했으나 실기에 전념하면서 공예의 정체성이 궁금했다. 그러나 문제의식에 대한 답을 구하기는 어려웠다.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 그중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공예사를 선택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홍대박물관과 마사박물관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공예의 정체성과 그 가치를 살려내는 일은 그의 연구 중심에 일관되게 놓여있다. 논리와 주장 또한 지역성과 공예의 가치를 천착하는 연상에 있는데 지역이 언제나 그의 삶과 철학 중심에 있는 것은 그래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는 공예가 제자리를 찾고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지역성의 가치에 주목하는 것이 필연적이라고 강조한다. 공예가 살아나려면 전통의 올바른 성찰과 낮은 자세로 내 이웃의 일상을 보듬어 안으려는 태도를 지녀야하고, 이러한 조건이 곧 공예의 가치 있는 지역성을 만든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다. 한국미술사학회 회장을 맡아 학회 50주년을 사업을 진행하면서 현대공예의 성찰을 큰 주제로 앞세워 내부로부터 적지 않은 원성을 사야했던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대 공예가 본질적 역할을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적 관점을 여전히 놓지 않고 있다. 지난해에는 이태리에서 활동하면서 역량을 주목받았던 일본 디자이너 시로타니 코우세이씨를 아트디렉터로 초빙, 부여의 지역성과 공예의 가치를 발견하고 접목시켜내는 '부여프로젝트'로 주목을 모으기도 했다. 지역성과 공예의 가치를 현대에 되살려내는 일을 가장 큰 과제로 삼아 각 지역의 공예를 주목하고 있는 그는 지역성을 "서울에서 멀어서 불편한 곳이 아니고, 그 지역의 고유한 가치를 에너지원으로 삼아 새로운 중심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재한 곳"이라고 정의한다. 본분을 다하는 일을 삶의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고 있는 만큼 좋은 연구 논문을 쓰는 일과 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일, 그리고 공예의 현재에 어떤 형태로든지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을 일상적 계획으로 삼고 있는 최 교수는 전주와 전북의 공예문화를 특히 주목하고 있다.
지난해 연말, 우연히 들르게 된 '2013 한국공예트렌드 페어'에서 글을 읽었다. 얄팍한 브로슈어에 실린 '지역성의 가치, 지역의 미래'를 주제로 한 글이었다. '모던이 폐기한 지역과 지역성'을 주목하면서 지역을 서로 다른 가치의 중심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그 글의 논리는 부드러웠으나 힘이 있었다. "지역은 지도상의 변방이 아니라 잠재적인 가치의 중심이다. 지금 발 딛고 서 있는 이곳, 내 무늬 결이나 파동과 같은 에너지의 발신지다. 연못 어디든 돌이 덜어진 곳에서 물결이 퍼져나가면 돌을 던지는 순간, 내가 선 곳은 새로운 중심이 된다. 문제는 내가 지금 돌을 떨구는 일이다."지역을 앞세운 대부분 글들의 '그렇고 그런' 빤한 주장이나 논리 대신 고개 끄덕이게 하고 마음을 울리는 글의 미덕은 필자의 주장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했다.미술사가 최공호 교수(56한국전통문화대)를 만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산업화를 앞세우는 문화의 시대에 지역성과 공예를 짝지워 그 가치를 발견하는 일에 앞장서온 그의 실천적 삶의 풍경도 그렇지만, 산업화의 물량적 공세와 획일화된 일상 문화에 이미 익숙해진 시대에 그가 주장하는 전통공예의 부활은 과연 가능성이 있을까 궁금했다. 지역이 변방을 넘어 다름의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고 믿는 그는 지역의 고유한 가치를 만드는 일을 주목하면서 무엇보다도 공공성의 보편적 가치를 수렴하는 일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교수와의 인터뷰는 염천(炎天), 그야말로 온 땅이 끓어오르는 듯 한 여름 한낮, 부여에 있는 한국전통문화대학 연구실에서 있었다. 넓지 않은 공간에 사방이 책장으로 둘러싸인 그의 연구실은 나뭇결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큰 탁자와 쓰임새를 발휘하는 아름다운 공예품들이 숨은그림찾기처럼 놓여있다. 모두가 곁에 두고 사용하는 일상용품들이다. "공예는 실천이 중요합니다. 일상문화에서 쓰이지 않는 공예는 살아남기 어렵죠. 공예의 본질이 쓰임새에 있는데 그 역할을 포기하면 본질적 가치를 포기하는 것 아니겠어요. 현대 공예가 반성해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최교수에게 듣는 지역성과 공예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책상위에서 쌓여진 이론적 주장이 아니라 전통 공예의 수많은 장인들을 현장에서 만나면서 공예의 가치와 지역성의 의미를 온전히 체득해온 결실인 덕분이었을 것이다. -지난해 한국공예 트렌드페어의 주제가 '지역 공예의 재발견'이더군요. 울림이 컸습니다. 오랫동안 전통공예와 지역성을 주목해오셨죠. "20년 전부터 관심을 가져온 주제입니다. 전통공예를 통해 지역성의 가치를 찾는 일을 주장해왔지요. 아직 보이는 성과는 없지만 잃어버린 가치들에 눈을 돌리는 시대적 변화를 보면서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전시장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전통공예를 마을단위로 계승하고 발전시켜가는 '자생적 공방'이었습니다. 일본 몇몇 도시의 예가 소개되어 있더군요. 지역성과 공예의 가치를 실현하는 방식의 모델이 혹시 이런 것 아닐까 싶었습니다. "다르지 않겠죠. 지역의 전통공예 장인들을 통해 그 가치를 발견하고 현대에 이어내 지속적인 생명력을 갖게 하는 좋은 방식입니다. 제가 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학생들과 함께 진행했던 부여프로젝트의 궁극적 목표도 거기 있었으니까요."-우리나라 전통공예, 지역공예는 이미 힘을 잃은 것 같습니다. 전통의 맥이 단절된 지 오래여서 그것의 부활을 기대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현실은 그렇지만,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부여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 일본의 몇 마을을 돌아본 적이 있습니다. 가장 부러운 것은 우리 전통공예의 기반은 다 무너졌는데 일본은 하부구조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이었어요. 물론 그 배경에는 자기 취향과 표현을 아주 구체적으로 발현하는 일본인들의 일상문화가 있을 겁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전통을 대하는 그들의 진지한 태도와 관점이죠. 전통을 산업화의 발목을 잡는 존재쯤으로 여겨온 우리와는 많이 다르죠."-우리 사회의 경우는 전통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너무 오랫동안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수님의 지역 공예의 가치를 살리는 일은 어떻습니까."지역공예를 살리기 위해 꽤 오래전부터 디자인과 지역 장인의 협업을 지향해왔습니다. 근래에는 그런 작업이 활발해지고 있으니 바람직한 일이죠. 디자이너와 지역 장인의 협업은 장점이 많습니다. 지역 장인들은 고유하고 숙련된 기술, 그리고 그 기술이 갖고 있는 오리지널리티를 갖고 있죠. 대신 동시대 감각을 반영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습니다. 숙련된 기술은 있으나 시대를 읽는 감각이 부족하니 디자이너들과 협업이 이루어지면 우성 결합의 결실이 만들어질 수 있게 되는 것이죠."-그러한 협업형태의 작업에서 부작용은 없을까요. "당초 그런 우려가 있기도 했는데 최근에는 현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전통공예에서 협업은 사람과 사람의 결합입니다. 어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느냐가 중요하죠. 재능만의 결합이 아니라 좋은 사람의 결합이어야 합니다. 디자이너의 역할은 장인들이 앞에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청소를 하고 치워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디자인을 던져주고 제작에만 장인들의 기술을 활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요. 그런 경우, 십중팔구 공예장인의 존재는 미약해지고 당초의 목표인 공예 대중화도 길을 잃게 됩니다. 허위적인 예술가 의식을 좆아가는 통로밖에 되지 않죠. 공예는 일상에서 적극적으로 쓰이게 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전통장인들과 디자이너들이 결합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구요."-문화의 시대에서도 산업화가 화두입니다. 전통공예의 박제화도 이런 논리로부터 비롯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 전통의 어플리케이션이라고 하면 산업화를 먼저 떠올립니다. 매우 단순한 논리고 다소 폭력적인 개념입니다. 전통 공예는 수공예적인 과정을 절대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산업화를 앞세워 공예의 과정을 기계화해버리면 그것은 이미 공예품이 아닌 기계제품이죠. 그 경계선을 나누는 전통공예의 고유성이 바로 수공예인데, 이 수공예를 포기할 수 없다면 대량생산이나 산업화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을 전제하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죠. 산업화는 속도와 규모, 효율을 내세우는 현대의 버전입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고 있잖아요.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가치를 아쉬워하면서 그 그늘에서 상처 받은 것을 치유하자고 난리를 치는 시대가 왔지 않습니까. 이 시대적 흐름을 주목해야하는 것이죠."-이 시대가 수공예적 가치를 필요로 한다는 말씀이군요. "느림과 아날로그적인 따뜻한 가치가 곧 수공예적인 가치잖아요. 그런 가치야말로 현대인들이 다시 찾고 싶어 하는 것 아닌가요. 기계의 차가운 가치로 충족시킬 부분은 충분히 수용을 하고 허용하되, 병행해서 우리 삶에 밀착되는 영역에서는 철저하게 차가운 가치를 배격하고 따뜻한 가치를 지향해가도 될 만한 시대가 되었다고 봅니다."-지역 공예의 활로와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는 지금이 좋은 기회랄 수 있겠군요."물론입니다. 우리 사회의 구조도 그렇고 이제는 그래도 먹고 살만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만약 한줄기 남아 있는 전통 공예, 지역의 고유한 공예의 맥 조차 산업화로 몰고 가면 말이 안되지요. 공예의 산업화는 애당초 성립 불가능한 목표입니다. 앞뒤 맞지 않는 목표죠."-앞서 일본의 공예를 이야기 하셨는데, 실제로 성공한 사례가 적지 않겠죠. "일본 뿐 아니라 세계 각 나라마다 전통공예로 지역을 성장시킨 예가 얼마든지 많습니다. 일본 벳부의 경우도 그 중 하나인데, 거기서는 '반농반도'(半農半陶)의 가치를 이야기합니다. 도자기를 생산하는 마을의 경우, 그 마을에서 생산되는 도자기 양을 스스로 조절을 해가는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장인이 여럿 있는 마을이라 하더라도 수요는 한정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서로 욕심을 내어 생산을 늘려 경쟁을 하다보면 재고가 쌓이고 그렇다보면 빚이 되고, 좌절하게 되고, 결국은 역량을 상실하게 되죠.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일 년에 필요한 도자기 수요를 측정해 그것보다 상회하는 생산능력을 다른 부분으로 활용합니다. 절반의 역량을 농사짓는 일로 쓰는 것인데, 생태적 농사를 지으면서 그 가치를 도자기로 담아 그릇으로 공유하고 소통하면서 삶의 전체를 유기적인 양태로 이어가는 것이죠. 얼마나 바람직한 일입니까. 공예의 살길은 바로 이런 철학적 기반에 있습니다."-수요에 맞게 생산하는 도자기 이야기를 들으니 공예는 결국 쓰임의 실천이 있어야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분명해지는군요. "그것이 핵심이지요. 공예는 실천입니다. 쓰임새가 있어야 공급이 이루어지죠. 공예와 연관된 사람들부터 일상에서 공예의 활용을 실천해야 합니다. 쓰지 않으면 공예의 본질적 역할이 없어지는 것이고, 그렇다보면 공예는 살길을 찾기 어렵게 됩니다." -그러나 현실은 공예의 본질을 잃은 지 오래여서 일상생활에서 우리 전통공예가 자리 잡기에는 어려움이 많을 것 같은데요. "그동안 현대공예에 대해 주장해온 것이 있습니다. 공예가 삶으로부터 일탈해서 엉뚱하게 위치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비판이지요. 예를 들면 금속공예를 보죠. 숟가락을 만드는 작가는 거의 없습니다. 금속공예가 대부분이 주얼리를 만들죠. 그것도 '아티스트'로서 만드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전통적으로 금속공예 영역에서 사용의 빈도수가 많은 것이 뭘까요. 수저와 젓가락입니다. 어떤 물건보다도 중요하죠. 그런데 이 소중한 물건을 정작 공예가들은 만들지 않습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작가의 허위의식 때문이라고 봅니다. 예술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식이죠. 본질을 잃어버린 공예는 가치를 이미 포기한 것과 같습니다."-공예라는 것이 오히려 작가들이 터부시하고, 예술성과 이런 쓰임새와는 별개라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문제가 많군요. "공예품은 쓰임의 역할이 있을 때 부가적 가치가 만들어집니다. 만약 어떤 공예품이 후대에 발견되었다고 해보죠. 누군가 소장했었다는 것과 누군가의 삶의 궤적을 읽어낼 수 있는 용도를 함께 가진 것의 가치는 다르죠. 작가가 만들고 세월이 완성해주는 것이 공예품입니다. 금방 만들어서 가치가 발휘되는 것은 예술품이죠. 공예품은 세월을 두고 묵혀서 쓰고 대물림 해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공예가들의 인식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전업작가가 풍족하게 먹고 살 수 있는 환경은 거의 없습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먹고 사는 문제로 늘 위기에 처해있죠. 공예는 좀 다릅니다. 본질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파인 아트를 하는 예술가보다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스스로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서 달라지요. 공예가나 디자이너들은 삶과 접점을 이루어 삶에 깊숙이 들어갈수록 기여하는 바가 크고 바람직합니다."-공예와 지역성의 가치를 강조해오셨는데 그것의 바람직한 관계는 어떤 것입니까. "공예가 제 자리를 찾고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지역성의 가치에 주목해야 합니다. 필연적인 과제지요. 공예가들이 자신의 작업에 지역성을 어떻게 접목시켜야하는가는 그래서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다른 지역에 없는 이 지역 고유한 역사적 배경이나 문화적 특성을 연동해 자기 색깔을 찾아 나갈 때 지역 공예의 고유성을 찾게 되고 가치를 갖게 됩니다. 제가 진행했던 부여프로젝트도 바로 그런 작업의 연상이지요."-전라북도나 전주의 공예는 어떻습니까. "전주를 중심으로 한 전북은 문화적 저력이 있습니다. 특히 공예의 저력은 압도적으로 우월합니다. 전국을 비교해도 장점이 많은 지역입니다. 지자체 단위에서 지역 공예 분야를 문화재로 가장 많이 지정한 곳도 전북일겁니다. 전주는 특히 장인들이 몰려있는데 그런 사례는 드뭅니다. 물론 지정 과정에서 부정적 측면을 겪기도 했겠지만 그들에게 공통의 목표를 주고 동기부여를 해 밀고 가는 리더십이 있다면 굉장히 바람직한 환경입니다. 중요한 것은 순수한 마음으로 장인들을 돕고 이끌고 보듬어 지역의 고유한 어떤 것들을 지켜가는 것이겠죠. 전주와 전북은 공예의 향기를 가장 진하게 아름답게 피울 수 있는 지역입니다. 가능성이 그만큼 많은 지역이죠. 그래서 부럽기도 합니다."
이선종 원장의 고향은 진안이다. 1944년 정미소집 여덟남매의 둘째로 태어난 그는 지역 사회 활동이 활발했던 아버지로부터 사회성을, 덕과 역량이 높았던 어머니로부터 나누는 삶을 배웠다. 원불교 집안이어서 가족들이 자연스럽게 신앙생활을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만 원불교에 나가지 않았다. 원불교를 마음에 들이고 사상에 눈을 뜨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중학교 3학년때였다. 위중한 눈병을 얻어 치료를 받고 있던 그에게 훈련차 진안에 왔던 원불교 교무님이 물었다. "너는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 그의 답을 듣고 다시 일렀다. "그렇다면 그 꿈을 갖고 인류의 스승이 되어라." 출가를 결심했다. 교무님이 봉직하고 있던 부산까지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원광대 원불교학과에 들어가서는 학점에 연연하지 않고 마음 공부에 전념하면서 '원불교에 내 삶을 온전히 뿌리내리고 살수 있겠는지' 스스로 실험했다. 원불교 교단과 공동체는 대학시절 건강한 리더쉽을 발휘했던 그를 눈여겨 보았다. 첫 부임지는 서울 종로교당이었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환경 등 대도시의 생태에 관심이 갔다. 이런 저런 인연으로 만나게 되는 지도자들을 예리한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안으로는 원불교 사상으로 스스로를 다지고, 밖으로는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눈으로 원을 그리고 싶었다. 유네스코와 흥사단, YMCA 등 여러 사회단체 활동에 참여하면서 역사와 시대, 사회의식을 갖게 됐다. 종교적 사상의 뿌리를 더 단단하게 해준 함석헌 김수환 강원용 이태영 지학순 같은 시대의 지도자들과 한국문화에 눈을 뜨게 해준 한창기 전영필 최완수 같은 문화인들을 만난 것도 그때였다. 사회성 강한 단체에 참여하는 그를 교단은 반가워하지 않았지만 그 길을 꿋꿋히 갔다. '원불교 교법의 사회화'를 위한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세상과 교유하면서 모든 '울'(울타리)을 트기 시작했을 때 병을 얻었다. 요양을 겸해 여수로 내려갔지만 그곳에서도 쉬지 않았다. 지역사회의 지형을 새롭게 바꾸어놓을 정도로 '신나게' 일했던 여수시절은 그의 삶 정점에 놓여있다. 원불교 총부 문화부장과 종로교당 교감 및 종로지구장을 거쳐 여성 교무로는 이례적으로 서울교구장을 지냈으며 중앙훈련원장을 맡아 '교법의 사회화' 실천의 길을 열고자 했다. 종로교당 교무시절 교도(전은덕)가 희사한 서울 원서동의 창덕궁 옆 520평 한옥을 보수하고 일부는 신축해 지난 2007년, 지금은 원불교 문화운동의 보고가 된 은덕문화원을 열었다. 젊은 시절부터 시작한 사회 참여 활동은 '이선종'이란 법명을 종교인의 울안에 가두어놓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대표적 진보인사로 더 널리 알려지게 했다. 평화 인권 환경 여성운동 단체와 다양한 인연을 갖고 있는 그는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지냈으며 지금은 환경재단 대표를 맡고 있다.
한옥의 위용에 잠깐 머뭇거렸다. 큰 대문이 열렸다. 비가 막 그친 오후, 정갈한 한옥 마당을 딛는 느낌이 행복하고 편안했다. 어깨를 잇대고 있는 여러 채 한옥과 소나무의 조화가 단아하고 아름다웠다. 창덕궁 돌담길을 끼고 있는 서울시 원서동 북촌 한옥마을의 은덕문화원 풍경이다. 은덕문화원은 원불교 도량이지만 '종교 울'을 튼지 오래다. 2007년에 개관했으니 올해로 6년째, 은덕문화원은 서울 북촌한옥마을의 문화를 가꾸어가는 중심에 있다. 대중들을 위한 문화활동을 시도하는 종교 도량이 없진 않지만 은덕문화원처럼 적극적으로 '종교 울'을 트고 세상과 소통하는 문화운동을 주도하는 도량은 이례적이다. 게다가 우리문화의 참다운 모습을 가꾸어가는 정신문화의 공간으로 이미 이름을 널리 알렸으니 새삼 이 공간의 태생이 궁금해질 수 밖에 없다. 공간의 가치를 발견하고 시대적 의미를 살려 오늘의 은덕문화원을 만들어놓은 사람은 이선종 원장(69원불교 교무)이다. 여러해 전 교도로부터 건물을 희사 받아 그 쓰임새를 고민해오던 이 원장은 한옥의 가치를 되살려 우리 문화의 요람으로 만들겠다는 뜻을 세웠다. 예산도 없었고, 교단의 호응도 적었지만 척박한 환경을 의지와 열정으로 극복했다. 뜻을 세우니 길이 열렸다. 520평 대지위의 안채와 이층 일식 주택, 사랑채와 낡은 창고 등 보존이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던 집을 2년여 동안의 우여곡절 공사 끝에 전통한옥과 2층 일본식 주택 양식을 그대로 보존한 아름다운 공간으로 만들어냈다. 이 원장을 인터뷰로 만나는 일은 어려웠다. 그렇고 보니 20대부터 사회활동을 시작해 새만금 살리기, 반핵, 평화와 인권, 여성, 환경 등 파장이 큰 시민운동을 반세기 가깝게 주도해온 사람치고는 '이선종'이란 이름 외에 본격적인 그의 이야기가 드러나는 일은 상대적으로 너무 적다 싶었다. 언론을 통해 개인적 삶이 드러나는 것을 철저하게 경계해왔던 때문이었다. 어렵게 이뤄진 인터뷰는 7월 장마가 머뭇거리는 하순, 은덕문화원 인화당 접견실에서 있었다. '인생의 가을'을 맞고 보니 성찰하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이 원장은 '회광반조(回光返照-자신을 반성해서 곧바로 자기 심성의 성품을 비쳐보는 것)'를 일상으로 들여놓은지 오래라고 말했다. 종교인으로서 사회참여의 길을 선택해 곁눈질 하지 않고 걸어온 삶의 지평이 넓고도 깊어 보였다. '원불교 교법 사회화'의 진정한 실천이 그의 50년 교역의 삶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덕분이었다. -기대했던 것보다 건물이 훨씬 아름답고 고졸한 느낌을 줍니다. 손수 공사를 지휘하셨다면서요. "어릴 때 한옥에 살아서 한옥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어요. 기왕에 시작하는 일이니 제대로 하고 싶었지만 재정이 부족해 건축비를 절약하려면 직접 뛰어들 수밖에 없었죠. 밤늦게까지 벽돌 나르고 마당에 돌을 깔고 온갖 일을 몸으로 함께 때운 교무들의 고생이 컸습니다. 원불교가 돈은 없지만 정신은 살아 있어서 그 힘으로 버텨 해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은덕문화원'이란 이름이 원불교의 이미지를 담아 지은 것인 줄 알았는데, 기증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더군요. "이름 지을 때, 내놓고 큰 반대는 없었지만 교단 내부에서 이견은 있었어요. 그러나 원불교 이름을 내세우기 보다는 기증자(전은덕)의 뜻을 기리는 것이 좋다고 보았고, 교법의 사회화를 위해서도 포장으로 '울'부터 치는 일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원불교 재단에서 수리했다는 안내도 조그맣게 붙였어요."-원불교 도량이면서도 종교적 정체성 보다는 문화공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앞세웠는데 교단의 호응을 얻기 힘들진 않았나요. "쉽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원불교가 이제 좀 더 큰살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바로 앞에 세계문화유산인 창덕궁이 있는데 세속적인 기준으로 공간 활용을 앞세우면 안 되잖아요. 창덕궁과 같은 콘셉트로 자리 잡으니 서울시민들에게 확대경으로 비쳐지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결과적으로는 원불교에 대한 이미지도 높아졌고요. 지금은 문화원 자체적으로 꾸리는 사업이 아니어도 시민사회단체, 정부부처, 재외대사관 관련인사들의 왕래가 잦습니다. 다 종교 울을 튼 덕분 아니겠어요."-은덕문화원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지평은 어떤 것인가요. "우리나라의 수도인 서울의 문화교화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희망하지요. 격조 높은 수도도량으로서 국제교화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국제교화의 장이자 종교와 사상을 넘어 문화로 하나 되는 창의적인 교화의 장, 그리고 원불교 사상과 현대담론을 통한 인재 양성의 산실이 궁극적인 목표입니다."-운영하는 프로그램이 많던데요. 그중에서도 역시 사람을 키워내는 아카데미 운영이 눈에 띄었습니다. "중심은 역시 사람을 키워내는 일이니까요. 아카데미에서는 지금까지 300명을 배출했어요. 장학사업도 활발하죠. 대부분이 원불교 신앙을 갖고 있지만 교도가 아닌 사람도 있어요. 아카데미는 원불교 교법과 사상으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시대담론과 코드를 읽는 강좌를 개설해 의식의 눈을 뜨게 하는 프로그램을 구성합니다."-시대담론을 읽고 의식의 눈을 뜨게 하는 강좌를 종교 도량에서 운영하는 일이 흔치는 않을 것 같습니다. 원장님의 지향과 관련이 있겠군요. "개인적 지향만이 아니라 원불교에서도 교법의 사회화는 중요한 화두입니다. 그런데 내 시력으로 보면 그 방식에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교법의 사회화를 원불교 안에서만 이루려고 하면 그 끝이 보이잖아요. 사실 원불교 역사는 1세기가 안됩니다. 그런데도 원불교 안에 머무는 교역자가 많아요. 나는 일찍이 원불교 교법의 사회화에 눈을 떴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트고, '남여울' '종교울' '사상울' '지역울' 도 다 트고 큰 원을 그리려고 노력 했지요. 원불교 사상으로 무장이 되어 있다면 그 사상을 마음으로 활용해 어떻게 쓰고 있는가 들여다보는 일이 중요합니다."-원장님은 종교인으로도 그렇지만 평화 인권 환경 여성 등 시민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해온 삶의 풍경이 대중들에게는 더 강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종교인의 사회참여가 활발하지만 아직도 종교내부에서는 경계의 영역 아닌가요. "시민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종교인이 여전히 미미한 것을 보면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내 경우도 진보냐 보수냐를 가르기 전에 인연으로 교류해왔지만 급진보로 분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종교인의 사회참여가 아직도 그만큼 주목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일 겁니다."-스스로 '중도'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군요. 그동안의 활동 영역을 보면 그런 가름은 무리가 있을 것 같은데요.(웃음)"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지극히 중도적 노선을 걷고 있어요. 보수든 진보든 옳고 좋은 것은 취해 서로 보완해 나갈 때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보수는 경험이 풍부하고, 진보는 창의적 생각으로 시대를 바라보는 역량이 있죠. 가능하다면 이런 좋은 점을 취하고 보완하면 좋겠지요."-그럼에도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비롯해 반핵, 인권과 평화, 환경, 여성운동 단체 같은 진보적 시민운동 단체를 지원하거나 그 중심에서 활동해왔습니다. 교단의 비판이나 정부의 경계로부터 자유로웠습니까. "교단에서도 적잖은 지탄과 비판을 받죠. 그런데 저는 한 시대를 살면서 종교인들이 걸어야할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시대는 어떻습니까. 종교인들이 세상을 이끌고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종교와 종교인을 걱정하는 시대지 않습니까. 격변의 시대에 종교자로서 해야 할 일은 도처에 있습니다. 그것은 곧 교법의 사회화와도 직결됩니다."-올해 초 환경재단 대표를 맡으셨던데요. "환경재단 최열 대표의 공석을 대신하는 역할인데, 환경단체와의 인연도 그렇고 법의 잣대로만 구속되어 있는 최 대표의 어려움을 나누는 입장에서도 그렇고, 기꺼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모범적으로 살아온 분들이 정치적 희생을 당하는 것을 보면 분노할 수밖에 없죠. 재단의 60명 식구 워크숍을 하면서 '사람은 역경에 처해 있을 때 교감이 되어야한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화합단결하고 재단의 주인이 되자'고 말했어요."-정복 입은 교역자로서 그런 일에 나서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예전에 한명숙 총리 기소 때 증인 채택되어 나간일도 있으시죠. 교단의 반대는 없었나요. "왜 없었겠어요. 그래도 내가 잘못된 일을 거드는 것이 아니니 떳떳했어요. 종교인은 시대의 양심이고 그것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러니 거리낄 것이 없죠. 일전에 '남영동' 영화를 보고(충격적 장면에 끝까지 못 보았지만) 다시 확인했어요. 김근태의원 같은 분들의 희생 이 있어 자유와 정의와 민주주의를 얻었잖아요. 그들의 희생을 딛고 살고 있는 우리는 당연히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이 시대의 과제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죠. 하루 세끼 밥 먹을 수 있다고 적당히 이리 흔들 저리 흔들거리며 산다면 그 분들이 흘린 땀 흘린 눈물과 고통 받은 상처를 어떻게 갚겠습니까."-한국 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식견의 배경이 궁금합니다. 원불교 울안에서 언제 그런 심미안을 갖게 되셨나요. "20대부터 크리스천아카데미 YWCA 유네스코 등 다양한 사회문화단체 활동에 참여하면서 의식을 넓히고 교양을 쌓을 수 있었어요. 지성사회를 교화하려면 다양한 영역을 섭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나무는 뿌리가 튼실해야하는데, 교단에서도 그렇고 외부 사회활동에서도 그렇고 여러 역할을 맡으면서 뿌리 없는 나무로 살면 신뢰를 얻지 못합니다.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은 〈뿌리깊은나무〉 발행인이었던 한창기 선생을 만나면서 눈을 뜨고 마음을 틔웠습니다. 우리 것 우리 얼 우리 정신 그 모든 우리 것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우리 존재의 근원에 눈 뜨게 하더군요."-은덕문화원의 문화운동 중심에 우리문화가 있는 이유가 확연해집니다. 고향인 전북은 한국적인 문화와 정서를 대표하는 지역인데, 고향의 미래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전북은 미래의 가능성이 충만한 땅입니다. 한국 오천년 문화의 전통을 이어가는 우리 문화와 우리 얼, 정신, 흥, 맛의 산실이지요. 지금은 불의 시대가 가고 물의 시대입니다. 정신문화의 산실인 전라도가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배경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는 일이겠지요." -격변의 시대에 정신문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런 시대에서 일수록 종교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시대의 종교인이 지녀야할 덕목은 무엇일까요. "종교의 힘은 진실입니다. 종교인은 절대 진실해야 하지요. 두 번째는 공익심입니다. 개인보다는 공(公)을 위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공익심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헌신해야 합니다. 종교를 이용하려고 하면 종교인이 아닙니다. 자기를 썩혀 거름이 되고, 새로운 싹을 만드는 것이 종교인입니다."이 원장은 새만금 방조제 공사가 한창일 때 새만금 반대운동 중심에 있었다. 삼보일배에도 나섰던 이 원장에게 새만금의 미래를 물었다. "새만금이 이렇게 만들어진 것도 운명적인 것 아닌가 싶어요.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떤 가치로 새만금을 보아야 하냐는 것일 텐데 나는 자연생태적인 가치와 첨단의 문화산업에 주목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새만금의 생태적 가치를 강조한 이 원장의 조언은 명쾌했다. "더 이상 후회할 일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방향을 잘 잡으면 새만금은 천혜의 보고가 될 수 있어요. 그래야 미래의 땅이 됩니다."
화가 하반영 선생이 완주군 상관에 작업실을 마련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여름 초입이었다. 말년의 삶을 고향 군산에 의지해왔던 선생의 갑작스러운 이주소식은 뜻밖이었다. 90세가 넘어서도 변하지 않는 왕성한 창작활동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아온 선생이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던 고향을 떠나야했던 이유도 궁금했다. 사실 선생은 암투병중이다. 지난해 가을, 선생의 대장암 수술은 우리나라 의학계의 관심을 모았다. 95세 암환자의 대장암 수술 시도도 그렇지만 그 과정을 거뜬히 이겨낸 환자의 정신력과 건강이 화제였다. 수술 받은 환자가 화가 '하반영'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상의 이목은 더 집중됐다. 수술 받은 지 사흘 만에 선생은 병상에서도 화구를 챙겨 그림을 그렸다. 상관면 소재지에 있는 작업실은 병원에서 퇴원 한 후 선생이 몸을 의지하고 있는 공간이다. 통원 치료를 받으며 회복 중에 있는 선생은 걸음만 불편할 뿐 건강해보였다. 시간은 줄었지만 붓을 잡지 않는 날은 거의 없다는 선생은 올해 96세, 여전히 세상에 남길 이야기가 많다. 장르와 형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화풍을 구축해온 선생의 붓이 마르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투병의 일상에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선생은 지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백수전을 꼭 하고 싶어. 이대로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어. 아흔아홉 살에 전시회를 하게 되니 이제 3년도 채 안 남았거든. 열심히 그려야지."선생의 생애는 한 세기 한국미술사위에 온전히 놓여있다. 그 이유만으로도 선생은 한국미술의 살아있는 역사다. -기대보다 훨씬 건강해보이십니다. 작업실이 불편하지는 않으세요.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다 보니 걷기가 예전만 못할 뿐 지낼만해요."-치료는 어떻게 받으십니까. "지금은 일주일에 한번 정도 통원치료하지. 대장암수술이 잘되었어요. 그런데 수술 하지 못할 부위에 종양이 또 있대.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아.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데 경과가 좋다고 하니 다행이지."-선생님 연세에 암수술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던데, 워낙 건강이 좋았던 모양이에요."건강을 타고 났나봐. 여든만 넘어도 수술하기 쉽지 않다던데. 한 달 정도 금식하는 일이 힘들었지만 의사가 검사해보더니 수술해도 되겠다고 하더라고. 암튼 내 수술이 화제가 되어 방송도 나가고 그랬잖어."-수술로 여러 가지 생각이 드셨을 텐데 백수전 계획도 그때 하신건가요. "백수전 계획은 오래됐어. 몸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암 상태도 좋아졌다고 하니께 할 수 있을 것 같어. 내가 지금도 보청기 없이 이야기하고 안경 안 쓰고 신문 보거든. 이만하면 되지 않겄어.(웃음)"-충분하시죠. 요즘도 날마다 그림 그리십니까. "생각만큼 몸이 따라 주진 않지만 붓은 늘 잡지. 암수술 끝나고도 가장 먼저 붓 가져오라고해서 손힘 먼저 봤어. 몸이 불편하니 다소 둔해졌지만 다행이다 싶었지." -건강을 타고나셨다고는 해도 비결이 더 있을 것 같습니다."내가 가방끈이 짧잖어. 그래서 한 가지 일, 그림 그리는 일에만 완전히 집중해온 덕이 아닌가 싶어. 많은 일에 신경 쓰지 않고 그림 그리는 것만 붙잡고 그것만 생각하고 살아왔거든. 세상 눈치 안보고. 이것저것 생각하면 복잡해지잖아."사실 선생이 걸어온 삶의 풍경은 사회적 규범이나 통념과는 거리가 멀다. 개인사적으로는 더 그렇다. 선생의 삶을 들여다보면 '파란만장'하기도 한데, 누군가는 그것의 근원을 선생의 '자유로운 영혼'으로 지목한다. -그럼 일찍부터 그림을 그리셨군요. "군산 신풍 초등학교를 아홉 살에야 들어갔는데 일본인 교장이 내 그림솜씨를 늘 칭찬했어. 일제 때 선전(조선전람회)이 있었는데, 교장선생님 권유로 출품했거든. 그때는 내가 학생이어서 다른 사람 이름으로 냈는데 최고상인 총독상을 받았어. 학교는 4학년 다니고 안다녔고."-왜 학교를 그만두셨는지요. "집을 나왔거든. 거의 혼자 지냈어요. 친구들과 어울리다보니 일찍부터 술 담배를 배우고 휩쓸려 다녔지. 학교 그만두고 완구공장에서 일하다 열일곱 살에 군산극장 간판 그리는 일을 시작했어." -극장 간판 그림은 따로 배우셨나요. "그건게 어디 있어 그냥 그렸지. 내가 처음 그렸던 것이 게리쿠퍼가 총잡고 있는 것이었어. 브로마이드를 보고 그렸는데 잘 그렸다고 놀라더라고. 당장 내일부터 나오라고해서 다니기 시작했지. 근데 내가 배경은 잘 그리는데 인물은 못 그렸어요. 그래서 데생을 열심히 공부했지. 그때 월급도 많이 받았어. 전주시장이 25만원 받을 때 내가 45만원 받았다니까. 우쭐했지."-그 뒤에 전주로 오신거군요."전주로 가고 싶더라고. 그때 전주가 시로 승격됐거든. 전주극장 간판을 그렸어. 당시 전주극장에는 일본인이 간판을 그리고 있었는데 진짜 실력이 좋았어요. 그이가 한 달 동안 나한테 간판 잘 그리는 법을 가르쳐주었어. 점만 찍어 전체상을 완성하는 기법을 그때 배웠지." -형편이 곤궁하지는 않았겠습니다. "월급을 95만원까지 받았으니까. 인심 꽤나 쓰고 다녔지. 술사고 밥사고. 그래서 인기가 많았어요. 나는 인력거타고 다녔다니까."(웃음)-본격적인 그림은 언제부터 그리셨나요. 극장간판만 그렸다면 화가로 입성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요."나는 간판쟁이 출신이지만 그것이 부끄럽지는 않아. 내가 그것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으니까. 그즈음 해방이 되었는데,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 생겼거든. 그래서 거기 출품을 했어요. 보자기에 놓인 무와 감을 그렸는데 입선했고, 2회때는 풍경화를 그렸는데 낙선했어. 그래도 7회 때까지 연속 입상을 했어. 이만하면 내가 가방끈은 다른 사람들보다 짧아도 그림 실력은 됐다 싶더라고. 국전에 출품하면서 간판 그리는 일은 그만뒀지."-생활은 어떻게 하셨나요. "사실 힘들었어요. 가족들도 고생했지. 순수미술로 바꾼 50년대부터는 그림만 그리면서 살았는데 잘 팔리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시작한 것이 무대미술이었어. 연극 무대나 다른 공연 무대의 장치를 제작했어요. 언젠가 피카소 기념관을 간적이 있는데 피카소가 젊은 시절 제작한 서커스 무대장치를 그대로 남겨놓은 것을 보니 부럽더라고."-스승은 없었나요. "있었지. 금릉 김영창 선생님. 전주에서 만나 모셨는데 본격적으로 사사한 일은 없어. 내가 금릉 선생을 모시고 지낼 때 하루는 이의주가 내 그림을 보고 금릉 그림과 똑같다고 하더라고. 당장 그림을 바꾸었지. 나는 예술은 자기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선생에게 배운 것만 지향하다 보면 영락없이 선생의 그림을 그리게 되거든."-그래도 학교 공부는 필요하지 않았을까요."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상처가 된 적은 있지. 내가 그림을 그려서 내다 팔았는데, 인물화를 그렸거든. 그랬는데 미술대 학생들이 와서는 '저것 간판쟁이 그림'이라고 외면하더라고. 그때부터 인물화는 안 그려. 72년엔가는 강원도로 들어가 5년 만에 나왔는데 그때 국전에 마지막으로 냈는데 특선을 했어. 경기전 고목. 그 후로 그림이 좀 팔리기 시작했어요."-국제공모전에도 출품 하셨죠."실력을 가늠해보려면 그 방법 밖에 없었으니까. 일본 국제공모전인 이과전(二科展)에서 최고상을 받은 후로 일본에서는 내 그림이 인기 있었어. 전시회를 열면 작품 대부분이 팔렸지. 우리나라에서는 잘 안 팔렸지만 일본에서는 나를 알아주었거든."-그럼 일본 유학의 기회도 있었겠는데요."일본인 친구가 모든 지원을 해 줄 테니 일본에 와서 활동하라고 강권했지. 집도 주고 모든 생활비까지 지원하겠다고. 고민은 해봤지만 일본으로 가면 내가 영영 거기 사람이 될 것 같아서 안 갔어요. 지금도 오기만하면 모든 것은 다 지원하겠다는 편지가 와."-젊은 시절,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자유롭게 다니면서 활동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파리 생활은 언제인가요. "79년 나 환갑때. 서양의 미술 흐름을 현지에서 경험하고 싶었어. 그때 친분이 있었던 고암 이응로 오지호 선생이 파리에 있었거든. 6개월만 있다 와야겠다고 떠났는데 파리 8대학에서 공부도 하고 그림도 열심히 그리고, 그곳 화가들과 교류도 하면서 1년도 훨씬 더 지나서 돌아왔어요. 르 살롱 공모전 우수상과 꽁파르죵 공모전 금상을 그때 수상했는데 꽁파르죵 금상은 미테랑 대통령한테 직접 받았어."-국제적으로도 선생님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였겠습니다."그렇지. 파리에서 정말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그 그림을 모아 85년엔가 뉴욕초대전을 하고 87년에는 미국평론가협회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하면서 미국에도 좀 알려졌지."-선생님은 다작은 정평이 났습니다. 다작의 장단점이 있지 않을까요. "나는 많이 그리는 것이 좋은 그림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화가가 그리는 일 말고 할 일이 뭐있겠어. 그런 과정에서 자신의 창작세계를 모색하고 탐구하는 것이지. 그러면서 자기 사상과 시대를 증언하는 작품이 나오기도 하고."지난 96년, 일본 가고시마에서 전라북도와 가고시마현의 미술인 교류전이 열렸다. 그때 가고시마에서 머무르는 5일 일정동안 선생의 손에는 늘 스케치북이 들려있었다. 어느 곳에 있든 눈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선생의 스케치북에 담겼다. 그때 동행했던 젊은 후배들에게 선생의 치열한 일상은 큰 교훈과 감동이었다. -장르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경계를 넘나들며 작업을 해오셨는데요. 궁극적으로 구현하고 싶은 세계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사랑이에요. 인간에 대한, 자연에 대한,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사랑. 작품에는 이야기를 담는 것이 중요한데 그러려면 작가 스스로의 철학과 사상이 있어야죠. 나는 형식이나 기법이 한길로 가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 작품이 세상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선생을 두지 마라는 것도 바로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예요. 내 사상 내 길이 따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최근 그림은 다 추상 작품이군요. "사실적인 묘사의 내면에도 추상이 있어야 해요. 그것이 작가의 철학과 사상이랄 수 있지. 사진도 내면적 추상이 있는데 아직도 그냥 있는 그대로만을 옮겨내는 그림들이 많거든. 나도 구상작업을 많이 했어요. 그것이 잘 팔리니까. 그러나 이것이 아니다 싶으면 다시 내 그림을 그리고 싶어 추상으로 돌아오고. 그런 과정이 늘 반복됐지."-군산 근대미술관에서 선생님 작품전이 열리고 있는데, 100점을 내놓으셨다면서요. "내 미술관 건립이 추진된 적이 있는데, 시에서 근대미술관으로 다시 추진해 개관했어요. 그때 기증했지."-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많으시죠. "쿠바에서 헤밍웨이 기념관을 갔어. 조그만 여관(호텔)인데 바다가 보이는 그곳 방에서 집필했대요. 초라했지만 유품을 잘 전시해 놓았더라고. 우리 기념관들은 너무 깨끗하고 화려한 경향이 있잖어. 정작 작가들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나는 작은 화실에서 그림 그리다가 붓 놓고 잠든 것 같이 가고 싶어. 내 그림이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이 되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 지금으로서는 백수전을 갖고 싶은데 사실 그 꿈은 너무 큰 것이어서 좀 이중적이기도 하지"(웃음)선생에게 백수전은 그림으로 온 생애를 걸어온 노화가가 마지막 힘을 다할 수 있는 지점이다. '몸이 허락하고 형편이 된다면 100호짜리 화폭을 창가 쪽으로 세워놓고 물감 뿌리고 붓질하면서 맘껏 그리고 싶다'는 선생의 삶을 들여다보니 부유와 궁핍, 자유와 속박, 고난과 평화가 경계 없이 가로질러 놓여있다. 그 부침의 세월이 파란만장하지만 선생은 그 어느 것 하나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예술가의 결기다.
1918년생인 하반영 선생은 최고령 현역작가다. 그리는 일만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나 지금이나 그림과 관련된 일상을 크게 흩트리지 않고 보낸다. 뇌혈전으로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은 이후 지난해 대장암 수술까지 받은 선생은 예술을 향한 의지의 경계가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선생의 아흔여섯해 삶은 한국미술의 역사에 온전히 놓여있다. 고향은 김천이지만 아버지가 가족들을 데리고 군산으로 이사하면서 군산사람이 됐다. 측량기사로 일했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 유복자가 됐다. 선생은 하씨지만 오랫동안 김씨로 살았다. 어머니가 군산 양조장집 안동 김씨에게 재가했기 때문이다. 본명은 구풍(俱豊). 철이 들어 스스로 하씨 성을 다시 찾았지만 화가의 길을 가기 위해 일찌감치 예명인 반영(畔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아홉 살에 학교(군산 신풍초등학교)에 들어가 4학년까지 다녔지만 어린나이에 집을 나와 자유롭게(?) 살았다. 초등학교 시절 일본인 교장의 '그림 잘 그린다'는 격려가 그를 화가로 키웠다. 그림과의 인연은 극장 간판이 시작이다. 열일곱 살에 처음 군산극장 간판을 그렸으며 후에는 전주로 옮겨 극장 '간판장이'로 지내면서 영화인들은 물론, 전주의 화가, 문인들과 교류했다. 유머가 빼어나고 베풀기 좋아하는 성품으로 주변에는 늘 예술인들이 끊이지 않았다. 전라북도에서 처음 시작된 전시회며 예술단체 중심에 선생이 앞서 있는 것도 그 덕분이다. 신석정, 김해강, 서정주, 이병기 시인과 가까웠으며 금릉 김영창 선생을 첫스승이자 마지막 스승으로 모셨다. 고암 이응로, 오지호, 전혁림 선생과도 교분이 깊고 운보 김기창 박래현 부부와도 인연이 있다. 6·25전쟁으로 부산 피난시절엔 이중섭을 만나 여관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담배은박지에 그린 이중섭의 그림은 팔리지 않고 화선지에 실경을 그린 선생의 그림은 잘 팔려 함께 먹고 지냈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는 아낌없이 그림을 내놓아 수많은 자선전을 독립적으로 열거나 참여했다. 50년대 후반, 오지호선생과 함께 시화전을 열어 한하운 시인을 도운 일을 화가로서 한 일 중 가장 아름다운 일로 꼽는다. 환갑이 된 1979년에는 파리로 건너가 8대학에서 공부하며 르 살롱전과 꽁파르죵 공모전에 참가 우수상과 금상을 받으며 주목 받았다. 시인이자 수필가인 큰 며느리 김용옥씨를 각별하게 생각하는 선생은 '내 인생에 김용옥 시인을 만난 것이 인생에 제일 잘한 일'이라며 존중하고, 김씨는 '아버지는 화공 아닌 화신(畵神)'이라며 선생의 예술혼에 외경심을 보낸다. 선생은 며느리의 환갑을 앞두고 '내가 너를 위해 100점의 그림을 그려주겠다'고 선언(?)한 후 그 약속을 지켰으며, 며느리 김씨도 시아버지의 뜻을 받아 써낸 시를 모아 지난 2010년 화시집 〈빛, 마하, 生成〉을 발간, 화제가 됐다. 국내는 물론 일본과 중국 미국과 프랑스 등 수많은 전시회를 열어 횟수를 세는 것 자체가 의미 없다. 스스로를 화공이라 부르며 '걸작은 가난 속에서 나온다'는 철학으로 남에게는 아낌없이 베풀면서도 자신은 검약하는 생활을 지켜왔다.
"사회의 부조리한 단면들을 담아내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죠. 희곡도 써봤고, 기획사를 하면서 그 꿈을 실현하고 싶었지만 현실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어요. 전북일원에서 제작되는 영화현장에는 참여하지 못했어요. 안타까운 현실이죠. 우리 지역에서 제작하는 영화현장의 문턱이 너무 높더라고요."'밥차'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기능으로 분류해보자면 그보다 앞서 시작된 '함바식당'이나, 세련된 전문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케이터링 서비스' 류가 된다. 이 밥차의 성장이 참으로 놀랍다. 예전에는 영화나 드라마, 뮤직비디오나 뮤지컬 제작현장의 전유물로 기능했지만 이제 국토대장정이나 동아리 체육대회 같은 현장에서도 존재의 가치를 빛낸다. 덕분에 수도권을 비롯해 각 지역마다 적지 않은 '밥차'가 운영되고 있다. 시장경제로 보자면 '밥차시장'이 확대되고 있다는 것은 사업성이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들여다보면 이 '밥차'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영화나 드라마를 제작하는 현장에서 식사를 제공하는 '이동 식당차'로 시작된 것이 2000년대 초반이니, 아무리 길게 잡아도 10년을 조금 넘는 연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부침이 없이 성장해온 '밥차시장'의 존재는 흥미롭다. 이러한 성장의 중심에 '전주밥차'가 있다. '전주밥차'는 '밥차'란 이름을 만들어낸 연원이자 그 자체로 밥차의 역사다. 물론 90년대 초부터 음식 관련 업체들의 '외식부페'나 '캐터링 서비스'가 현장에서 이루어지긴 했지만 온전히 '밥차다운 밥차'는 '전주밥차'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지금 '전주밥차'는 밥차시장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크고 작은 기업들이 '전주밥차'를 부르기 위해 줄을 서고, 영화나 드라마 제작현장에서도 섭외 순위 1위도 불변하다. '전주밥차'의 채수영사장(44)을 처음 만난 것은 2006년 봄이다. 밥차를 시작한 것이 2002년, 5년차 밥차의 젊은 사장은 도전과 열정이 넘쳐보였다. 이미 전주밥차의 이름을 한껏 올리고 있었지만 온전한 '밥차'를 만들기 위한 실험과 투자가 필요했던 때여서인지 경제적 여건은 녹록치 않았었다. 7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여전히 밥차시장의 선두를 지키고 있는 '전주밥차'의 성장과 뒷이야기가 궁금했다. 그 사이 밥차가 8대로 늘어날 정도로 사업 규모가 커졌지만 채사장은 여전히 밥차가 있는 현장에 있었다. 1.2톤 밥차위에서 쉴 새 없이 일을 하는 그는 예나 지금이나 행복해보였다. -여전히 밥차를 지키고 있군요. 지금도 직접 하십니까. "밥차 사장이 현장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지요. 오늘 아침 일찍 올라왔습니다. 현장에 문제가 생겨서 불 끄러 왔어요.(웃음)" -사장님이 직접 와야만 해결되는 큰일이 무엇일까요. "큰일은 아니고요. 스태프들이 저녁식사를 맛있게 하면 해결되는 일입니다. 10개월째 식사를 제공하고 있는데, 조금 변화를 주려고 밥차팀을 바꾸었더니 바로 민원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부랴부랴 올라왔지요." 인터뷰를 위해 그를 만난 곳은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다. 전주밥차는 지난해 9월부터 이곳에서 공연을 시작한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스태프 식사를 1년 가깝게 전담하고 있다. 인터뷰 도중, 공연팀의 식사 담당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채사장이 '오늘은 괜찮죠?'라고 묻더니 환하게 웃었다. '만족스럽다'는 답을 들은 덕분이었다. -예전보다 일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다른 업체에게 일을 넘겨줄 정도면 매출도 적지 않겠군요. 이제 직접 현장에 나오지 않고 관리만 해도 되는 것 아닌가요."경제적으로는 많이 좋아졌지요, 그렇다고 제 할 일이 달라질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하다 보니 저만의 노하우가 생겨 웬만한 곳은 혼자 다닙니다. 운전하고 현장에 가서 음식 만들고 배식까지 모든 과정을 혼자 해결해도 380명 정도의 점심과 저녁은 너끈합니다. 그래서 이 바닥에서 전주밥차 채사장은 혼자 다니는 사람으로 이름났어요."-밥차를 처음에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습니까."대학을 졸업하고 CF나 영상물을 제작하는 기획사를 차렸어요. 그런데 지역의 일거리가 한정되어 있고, 일을 맡아도 스태프를 구성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어요. 그때 제작 현장을 다니면서 가졌던 고민이 스태프들의 식사였어요. 현장에서 밥다운 밥을 먹을 수는 없을까 생각하다가 외식부페나 케이터링서비스가 아닌 현장에서 직접 밥을 해주는 방법을 찾게 되었는데, 그것이 밥차였어요."-그때도 밥차가 있지 않았을까요."현장에 와서 식사를 주는 차는 있었죠. 그런데 그 차들은 대부분이 이미 조리된 밥이나 반찬을 가져와서 도시락처럼 배식해주는 식이었죠. 모든 음식을 현장에서 조리해 먹을 수 있게 하는 즉석 밥차는 없었습니다."-밥차란 이름도 전주밥차가 처음 썼다면서요.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저는 밥차란 이름이 서민적이어서 친근했는데 다른사람들의 밥차에 대한 선입견이 그렇게 안좋은줄 몰랐어요. 사회적 편견이 얼마나 심한지 멸시하고 무시하고, 난장 밥장사처럼 함부로 대하기 일쑤였으니까요. 그런 편견에서 자유로워진 것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이 사업을 시작하고 가장 어려웠던 것도 그런 편견과 사회적 인식이었어요."-가장 힘든 점이 사회적 편견이었다니 뜻밖입니다. 경제적 여건은 괜찮았나요. "어려웠지요. 보기에는 차한대에 간단한 설치만 하면 될 것 같지만 밥차는 새로운 영역이어서 계속 투자를 해야 했거든요. 게다가 고등학교 졸업한 이후 혼자 힘으로 대학을 다니고 사업도 혼자 힘으로 시작해서 형편이 늘 빠듯했어요."-투자란 것은 밥차 시스템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그렇죠. 제 경우 밥차를 연구하고 시스템을 개발하는데 꼬박 3년 걸렸어요. 어떤 현장을 가도 기능을 다할 수 있는 현재의 모델을 얻은 것이 2005년이니까요."-어떤 문제들이 있었던가요."우선은 대부분의 현장이 실내가 아닙니다. 특히 영화제작 현장 같은 야외는 기상 여건도 다 다르죠. 어느 때는 바람이 불어 불이 날아다니니까 제대로 조리할 수 없고, 어느 때는 수백 명 밥을 하기 위해 가스 화구를 계속 사용하니까 밥차가 열기를 못 이겨 문제가 생기기도 하구요. 여러 번 경험하면서 뜯고 다시 만드는 과정을 거쳐 화구를 개발했습니다. 이제는 다됐다 싶었는데 한번은 스태프들이 '청소좀 해야겠다'고 하더라고요. 밥차위에 조리 찌꺼기들을 채 치우지 못하고 배식 하다 보니 지저분한 광경을 그대로 보게 된 것이죠. 그래서 배수구 설치 시스템을 고안해냈어요."-이제 완벽한 시스템을 얻으셨습니까. "전주밥차는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을 만큼 완벽하다고 자신하죠. 현장을 다니다보면 가파른 경사도 올라가야하는데 잘못하면 뒤집어지고 쏟아지고 난리가 나죠. 전주밥차는 그럴 염려가 전혀 없어요. 짐들이 서로가 서로를 다 잡아주어서 경사진 곳을 올라가도 끄떡없거든요."-시행착오를 여러 번 거쳤겠군요. 다른 밥차들은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이제는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 대한민국의 밥차 상당부분이 저희 차의 시스템을 가져간 것이에요. 그동안 별별 일을 다 겪었거든요. 새벽에 몰래 와서 차 내부를 사진으로 찍어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일 배운다고 왔다가 아예 차를 갖고 도망간 예도 있습니다. 그래도 전주밥차 덕분에 밥차를 잘 만들 수 있었다고 인사하는 분들도 있으니 아주 나쁜 일만 있는 것은 아녜요."-밥차다운 밥차를 만든 것도, 자의든 타의든 대중화한 것도 결국 전주밥차였네요. 그 전에는 온전한 밥차라고 보기 어려웠겠어요."그래서인지 허영만 화백께서 저희 차를 꼼꼼히 보시더니 '야 이것이 진짜 밥차'라고 하시면서 차에서 경험이 묻어나온다고 하셨어요. 그 인연으로 식객 주인공이 되었죠."-저도 보았습니다. 식객 70화이던가요. 밥차가 대중화되는데도 식객만화가 기여했을 겁니다. 서울 종로에 식객촌을 조성한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저희도 초대되었습니다. 10여개 업체가 들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식객 주인공들 중에서 선정했다고 하더군요. '전주밥차'를 걸고 처음 식당을 운영하는 것이어서 설레고 기대도 됩니다. 12월에 오픈할 계획인데 실내디자인을 준비중입니다."-서울 한 중심에 식당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죠. 게다가 벌써부터 '식객촌'에 대한 기대가 커서 제주도와 동부산에도 유치한다는 소식이 있더군요. '전주밥차'의 더 큰 성공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아예 회사를 서울로 옮겨가는 것은 아니겠죠."전주밥차의 고향이 전주인데 옮겨가면 안 되죠. 그런데 고민은 있습니다. 저희 사업자등록증이 도소매유통으로 되어 있어서 세금을 몇 배로 내고 있거든요. 이 불합리한 상황을 개선하려면 음식으로 사업자를 내야 하는데 전주에서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다른 지역 밥차들은 음식업 사업자로 등록되어 있거든요. 다른 지역에서 되는 일이 왜 정작 음식 도시 전주에서는 안 되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놀라운 일이군요. 밥차를 음식업 사업자로 못 내주는 이유가 뭘까요. "식당 시설에 대한 조건이 충족되지 못해서라고 하는데 수도권 밥차 업체들은 별 문제 없이 설명하고 사업자 등록을 다 했거든요. 그동안 여러 번 시도 했는데, 세무서와 구청이 원론적 입장만 고수하고 있어서 해결되지 못하고 있습니다."-잘 해결되어야 할 일이군요. 전주밥차가 서울에 주소지를 둔다면 앞뒤가 맞지 않죠. 이 지역의 한계 같습니다."이번에 다시 길을 찾아보고 안 되면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어차피 서울에 식당이 생기는 것이니 옮길 수 있는 길도 있구요."-화제를 돌려보죠. 영화를 전공했고, 영화일이 좋아서 밥차사업도 착안했는데, 영화제작의 꿈은 버렸습니까. "포기하지 못할 꿈이죠. 현장을 못 떠나는 이유 중에는 그 꿈도 있습니다. 어쨌든 영화나 광고 드라마 공연 현장에 가면 괜히 신이 나요. 저도 제작에 참여한다는 의식을 갖게 되거든요."-영화나 연극을 왜 그렇게 하고 싶으셨습니까. "광대의 특권 때문이었을 겁니다.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통로로 영화와 연극을 생각했어요. 사회의 부조리한 단면들을 담아내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죠. 희곡도 써봤고, 기획사를 하면서 그 꿈을 실현하고 싶었지만 현실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그래도 영화현장에서 밥을 제공하고 있으니 한국영화에 기여하는 힘이 큽니다. 전주밥차의 밥심으로 만들어지는 한국영화가 많잖아요.(웃음)"2002년부터 함께 했던 영화들이 많이 있죠. 최근에는 〈은밀하게 위대하게〉에 참여했어요. 그런 현장에서 일할 때면 영화제작의 꿈이 더 가까이 오기도 합니다. 언젠가는 꼭 돌아가고 싶습니다."-전북일원에서 제작되는 영화현장은 거의 전주밥차의 몫이었겠군요. "거짓말 같겠지만, 저는 단 한 번도 전주시 지원을 받으며 제작되는 영화현장에는 참여하지 못했어요. 안타까운 현실이죠. 외레 다른 지역에서 제작하는 영화현장에는 끊임없이 불려 다니는데, 제가 노력을 해도 우리 지역에서 제작하는 영화현장의 문턱이 너무 높더라고요. 지금은 포기했습니다. 일도 밀리고요."-식객촌 식당 개업 준비로 하반기는 바쁘실 것 같습니다. 사회적 기업에도 관심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특별한 목표가 있어서인가요. "제가 얻은 밥차운영의 노하우를 조금은 어려운 분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어서입니다. 사실 밥차라는 것이 자기 노력만 있으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거든요. 밥차 시스템과 운영의 노하우만 익히면 삶이 팍팍한 분들이 일어서는데 좋은 기반이 될 수 있습니다. 일자리를 만드는데 에도 좋은 통로가 되지요. 기회가 되면 그런 일에 기여하고 싶습니다."-밥차시장이 그만큼 확대되고 있다는 말씀인 것 같은데, 그동안 대기업들의 포식(?) 대상이 안되었던 것이 신기합니다.(웃음)"그럴 리 있겠습니까. 당연히 했었죠. 알만한 대기업 식품관련회사가 시도했었습니다. 그런데 밥차의 특성상 자본이 뛰어들 수 없다는 것을 알았죠. 아무리 자본이 많아 투자를 한다해도 규칙적이지 않는 현장의 특성을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있거든요. 결국 사람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일이지요."홍보물 하나도 붙이지 않은 작은 트럭 앞부분에 '촬영'이라는 글자만 쓰여 있는 그의 밥차가 눈에 들어왔다. 전주밥차 다운 디자인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웃으며 말했다. "제가 고객들에게 드릴 수 있는 예우예요. 일종의 동질감 같은 것이죠. 근사한 디자인으로 차 외관을 꾸미면 외식업체의 식당차로서는 알려지겠죠. 그러나 저는 어떤 현장에서든 그 현장의 스태프란 자세로 일하고 싶거든요." 개조한 차의 주방쪽 문을 올리니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대박을 기원합니다.'모두 함께 즐거워질 수 밖에 없는 풍경이 아닌가.
채수영 사장의 고향은 익산이다. 백제대에서 연극영화를 전공하고 이론적 틀을 쌓고 싶어 다시 원광대 신문방송학과에 편입해 공부했다. 백제대 캠퍼스 커플로 아내를 만나 결혼하면서 전주사람이 된 그는 프로덕션을 차려 2년 정도 운영하다 경제적 현실에 부딪쳐 밥차 사업을 시작했다. 2002년에 문을 연 채수영사장의 전주밥차는 정평이 나있다. 10여년 경험과 시행착오로 얻은 밥차 시스템과 운영 노하우 덕분이다. 그는 밥차를 시작한지 3년, 여덟 번의 실패와 쓴 경험을 바탕으로 오늘의 전주밥차를 얻었다. 이 밥차 트럭의 크기는 1.2톤. 더 커도 안 되고 작아도 불편하다. 현장을 다니다보면 시골길 산길 가리지 않고 오르내려야 하니 들락날락하기 쉬워야 하고, 현장에서 너무 많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아야하는 특성을 고려한 규모다. 그래서인지 그가 개발한 밥차는 어느 사이엔가 대한민국 밥차의 표준이 되었다. 전주밥차는 시설로도 가치를 빛낸다. 조리시설은 화구와 찬장이 전부지만 크지 않은 트럭 뒤편 위에 7개의 화구와 배수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그 화구와 기자재의 배열도 조화로워 한사람이 올라가 음식을 만드는 동선의 활용이 환상적(?)이다. 다른 밥차들이 따라올 수 없는 식재료에 대한 관심도 전주밥차만의 가치다. 전주밥차가 환영받는 이유는 맛. '전주'라는 도시 이미지를 저버리지 않는 맛의 비결을 채사장은 기본양념에 둔다. 여덟 대 차가 각자 따로 운영되지만 채사장의 손길을 닿지 않는 곳이라도 모든 기본양념은 전북산을 사용하는 이유다. 인스턴트 재료대신 가능한 천연재료를 사용하는 것도 전주밥차의 장점이다. "내 가족이 먹는 음식이라고 생각하면 재료를 고르는데도 마음을 쓸 수밖에 없다"는 채사장은 메뉴 개발을 따로 하지 않는다. 그때그때 현장에 따라 연령별 성별 특성을 가리고 날씨와 출신지역까지 고려하면서 식단을 짠다. 채사장은 7월 1일부터 시작되는 한 제약회사의 대학생 국토대장정 21일 동안의 여정에 함께 나선다. 벌써 여러 해 째지만 늘 기다려진다는 여정. 그는 전주밥차가 달리는 그 길 위에서 더 큰 꿈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고전(古典)은 장강(長江)이다. 크고 작은 물길을 거두어 도도하게 흐르는 길고 큰 강처럼 고전은 시대와 역사를 안아 오늘의 우리를 비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은 장강과도 같은 고전을 잊은 지 오래다. 새로움과 속도만을 앞세우는 시대에서 고전의 가치는 빛을 잃었고 창조적 미래를 꿈꾸는 세대도 더 이상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진정한 삶의 가치와 지혜는 언제나 고전에 있었다. 고전이 외면 받는 불행한 시대에서 고전의 가치를 주목하며 고전의 숲을 가꾸는 일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나라 고전번역의 중심에 있는 번역학자 변주승 교수(51전주대)를 만났다. 지난 2009년 50권 분량의 '여지도서' 번역본을 펴내 화제를 모았던 그는 2004년부터 시작한 '추안급국안' 번역을 이미 오래전에 마무리하고 90권 장대한 규모의 책 출간을 눈앞에 두고 있다. 고전 번역을 시작한 것이 1996년, 삼십대와 사십대의 빛나는 시절을 거쳐 올해 지천명의 나이가 된 그에게 고전번역은 지난 18년 동안 삶의 전부였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전 번역은 학문영역에서는 동료들과 함께 만드는 한편의 영화이고, 개인적으로는 마라톤과도 같았다. 그만큼 고전을 향한 애정은 깊고 뜨거웠으며 번역의 목표는 명징했다.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쉽게 번역'하기 위해 바친 그의 일상은 경이롭고 신선했다. 현실의 유혹을 밀어내고 오래된 것을 더욱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내는 삶은 치열했으며 그래서 더 아름다웠다. 덕분에 그에게 듣는 고전은 더 새로웠다. 이제 우리가 고전의 가치에 눈뜨는 일이 남았다. 고전의 숲속으로 들어가야만 가능한 일이다. -머리가 많이 센 것을 보니 번역작업 18년 동안의 고행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혹시 유전은 아니겠지요."집안에서 머리가 센 사람은 저 혼자이니 유전은 아닐 겁니다. 번역작업의 고단한 작업에서 얻은 훈장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웃음)"-고전 번역과의 인연이 궁금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번역이 운명이었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96년에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된 해에 지도교수님께서 사료 하나를 넘겨주셨어요. '신유박해' 사료였습니다. 처음에는 왜 나한테 이 일을 주시는 것인가 의아했죠. 한문을 잘하는 동료들이 많았으니까요. 그래도 시키신 일이니 대학원 선배들과 함께 12월에 번역을 시작했는데, 아이엠에프가 터졌어요. 원고료도 못나오는 지경이 되니 교수님이 중단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때가 제 인생의 기로였던 것 같아요. 선배들도 그만두었는데, 혼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꼬박 3년이 걸렸지요. 그런데 은혜를 받았는지 나중에 예산이 만들어져 원고료도 나오고 명예훈장까지 받았어요."-천주교 신자셨습니까. "아니에요. 저는 유학자이셨던 아버님(변시연 선생) 덕분에 유교의 학풍에서 성장했고, 처가는 기독교 집안이었으니 천주교와는 인연이 없었죠."-아무 연고도 없는 전주는 어떻게 오시게 됐습니까. "제가 전주로 온 것이 96년인데, 92년부터 전주대 강의를 나왔긴 했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고, 특별한 계기도 없었습니다. 다만 아버님이 늘 '너는 노령산맥 이남으로 오지 마라. 오면 내가 이룬 것도 망치고 너도 큰일을 못한다'고 말씀 하셨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죠." -번역을 시작 할 때 박사논문까지 마친 때였으니 취업이 더 절실했던 것 아닌가요. "학문의 길을 택했으니 대학에 자리를 잡는 것이 우선일 수 있었겠죠. 그러나 번역을 시작하고 나서는 대학으로 가는 일이 그렇게 절박한 과제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번역은 학교로 자리 잡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는 환경인데도 왜 그렇게 번역에 매달렸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때는 번역 책 한권이 논문 한편으로도 평가받지 못했었을 때거든요."- '신유박해' 사료가 첫 번역인가요. "데뷔작이었죠. 번역은 자기주장을 증명하는 논문과 달라서 옳고 틀린 것이 그 자체로 확실히 드러나잖아요. 처음 번역을 하면서 난해한 부분이 참 많았어요. 그러니 이 일이 내가 할 일인지 확신이 없었는데, 번역과 관련된 치명자산을 갔다가 거기서 알 수 없는 어떤 기운을 느꼈어요. 실력이 부족해도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그때 하게 된 것 같아요."-그 작업이 계기가 되어 번역과 운명적인 조우를 하시게 되었군요. "그런 셈입니다. 저를 오롯이 이 작업에 전념하게 할 수 있게 해주신 김진소 신부님과의 인연도 이때 이루어진 것이니까요."-김신부님께서는 교수님의 번역작업을 가장 신뢰하고 전적으로 후원해주신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신부님의 지원이 없었다면 우리 팀의 번역작업은 생각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신유박해 사료를 번역하면서 천호성지로 처음 신부님을 찾아갔을 때 '한국 천주교회가 변주승 선생에게 못할 일을 했다'고 하시더군요. 그 자리에서 담배를 한 개비 말아주셨는데 제 인생에 가장 맛있는 담배였던 것 같아요. 그때 알 수 없는 어떤 인연의 끈이 느껴졌어요. 그리고는 신유박해 번역을 마무리하고 99년에 책을 냈는데, 그즈음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해찬 교육부 장관이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정책으로 반영하기 시작했어요. 그 일환으로 '동서양 명저 번역 사업'이 있었는데 함께 공부했던 후배가 '신청해보자'고 하더군요. 그 책이 10권으로 발간됐던 '대한계년사'입니다. 그 작업을 천호성지의 신부님 사제관에서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작업하느냐도 중요할 것 같은데요. 어떻게 진행하셨습니까. "제 아버님이 칠십 살 되시던 해에 장성의 집을 떠나 백양사 입구 산속으로 들어가셨어요. 당시 아버님께서는 많은 일들을 하고 계셨는데 항상 저희에게 말씀하셨던 '분수를 알고(知分) 만족할 줄 알고(知足), 그칠 줄 알아야(知止) 한다'는 교훈을 그때 실천하셨던 겁니다. 어머님은 돌아가신 뒤여서 홀로 지내시며 학문하시는 아버님 곁에 있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때 후배 몇 명이 함께 들어갔습니다. 그 후배들과 대한계년사를 함께 번역하게 되었죠."-천호성지 사제관은 그때부터 번역작업의 산실이었군요. "번역 팀의 네 명 모두 거주지가 전국에 흩어져 있었어요. 저도 시간강사라 연구실은커녕, 책상도 없었던 시절이었죠. 신부님을 찾아가 상의 드렸더니 '여기 와서 공부하라'고 하셨어요. 호남교회사를 정리하신 신부님 서재는 번역작업의 보고였습니다. 책만도 만권이 넘는 거대한 자료실에 저희가 필요한 모든 것을 신부님이 해결해주셨어요. 신부님께서는 저희 때문에 모든 일상이 불편하셨지만 심지어 뒤풀이 술자리까지도 응원해주셨죠. 천호성지 사제관은 18년 저희 번역작업의 모든 과정이 담겨있는 산실입니다." -팀으로 번역작업을 시작한 '대한계년사'와 '여지도서' 그리고 '추안급국안'까지 정말 대대적인 과정이었을 것 같습니다."생각해보면 정말 기가 막힌 생활이었어요. 이상하게 한 작업이 끝나가는 시점에 꼭 다른 작업이 시작되었어요. 한 작업당 한 달에 한 번씩 공동 윤색을 위한 작업을 하는데 그것이 매주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2박 3일의 일정이거든요. 저는 모든 팀의 책임을 맡고 있어서 매주 주말을 천호성지에서 보내게 되는 겁니다. 10여년을 꼬박 주말 없이 보냈죠."-공동윤색 과정이 궁금합니다. 번역을 각자해서 함께 점검하는 것입니까. "네 형식은 그렇죠. 근데 그 과정이 치열합니다. 공동 작업이니까 개인이 해온 과제를 함께 읽고 번역의 표현에 동의하는 과정이랄 수 있습니다. 오역이 있을 수 있고, 난해한 표현의 한계가 있을 수도 있는데, 그것을 지적하고 합의하는 과정에서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심각한 갈등을 겪기도 했어요. 그 과정에서 제가 악역을 참 많이 했어요. 더구나 쉬운 번역을 내세웠기 때문에 교정과 윤색의 과정은 더 지난하고 치열해져야 했지요."-번역을 할 수 있는 인력은 충분했습니까. "공부하는데 뜻을 함께 하는 선후배들이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2004년부터는 이 지역 연구자들을 찾아 합류시켰습니다. 지역 사람들이 판을 벌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선택은 지금생각해도 잘했던 것 같습니다. 전주가 고전번역의 도시로 주목 받게 된 것도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정권이 바뀌는 동안에도 인문학과 고전번역에 대한 관심이 중단되지 않은 것은 참 다행스런 일인 것 같습니다. 이번에 교수님이 몸담고 있는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이 한국고전번역원 협동번역사업 준대형 거점연구소로 선정된 것도 그동안의 작업과 관련이 있겠죠. "무관하지 않지만 별개의 사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업은 학교 연구소 차원에서 3년 동안 전쟁처럼 준비했어요. 민족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2010년에 국가에서 전통문화를 콘텐츠화하는 정책을 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있는 고전번역원에서 이 일을 주도하기에는 벅차죠. 승정원일기만 번역한다해도 엄청난 시간이 걸리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권역을 나누어 거점 연구소를 운영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번 선정은 의미가 큽니다."-교수님 번역작업과 관련해 한옥마을에 문을 연 한국고전문화연구원 이야기도 듣고 싶습니다. "제가 만들었기 보다는 아버님이 지난 58년에 만들었던 한국고문연구회의 법통을 이어받으면서 연구원 체제를 갖추고 이름도 바꾸어 2006년 9월에 법인 사무실을 냈어요. 아버님이 평생 모으신 책과 자료들도 모두 옮겨왔지요."-그 자료를 옮기는데 문제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상당부분이 전남의 도지정문화재였다면서요."아버님의 뒤를 잇고 뜻을 제대로 잇기 위해서는 우선 공간을 일원화하는 것이 필요했어요. 제가 그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제 활동영역은 전주여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 결의를 아버님께 말씀드리고 승낙을 얻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해에 책과 자료를 다 옮겨왔어요. 그래서 제가 전남과 특히 고향 장성에서는 매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버님 책 중에 도지정 문화재가 있었는데 관내이탈이 되어버리니 아예 문화재 지정을 해제시키는 일이 불가피했거든요. 제가 더 열심히 연구하고 그 뜻을 잘 이어야하는 이유입니다."-인생의 중요한 30-40대를 고전번역으로만 보내셨는데 '추안급국안'을 마무리하고 운영해온 대학 연구소도 큰 성과를 거둔 지금, 개인적인 소회는 어떻습니까."헤아려보니 신유박해 초한서와 대한계년사, 여지도서, 추안급국안 작업 중 40-50권이 제가 개인적으로 직접 번역한 책이더군요. 그런데 보람이 큰만큼 허전하고 허탈합니다."-워낙 큰일을 해낸 뒤여서 그런 것 아닐까 싶은데, 말씀을 듣다보니 새로운 일에 대한 관심과 의욕이 커보입니다. "이제는 저도 세상과 소통하고 싶습니다. 고전문화연구원을 열어놓고 정작 하지 못했던 회원들과의 교류와 소통이 우선이지요. 번역에 몰입하면서 개인적인 성과는 쌓였지만 가족들과 지인들, 80년대 같은 꿈을 꾸었던 동료들이 제 삶의 반경에서 너무 멀리 있었던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연구원 회보에 '다시 옷깃을 여미며'란 글을 썼는데, 제심경을 그대로 거기 담았습니다."-지금까지의 작업과는 성격이 다른 일을 시작하실 것 같군요.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용역'이라고 하는 사업에만 매달려(그것이 매우 중요한 사업이라 하더라도) 너무 많은 시간을 소진한 듯 한 느낌이 듭니다. 평가받고 기획서에 매달려온 시간의 환경을 바꾸고 싶은 욕망이 그만큼 크죠. 이제 지천명의 나이가 되었으니 새로운 일을 할 때도 되었고요. 개인적으로도 너무 일찍 고전 번역으로 와서 96년 이후 논문다운 논문을 쓰지 못했어요. 이제는 제 글을 쓰고 싶습니다. 특히 지역사에 관한 글을 써보고 싶은데 다행히 천주교사를 공부할 기회가 있었고, 여지도서를 통해서 전라도 전체를 조망할 기회와 추안국안을 통해 전라도의 전말과 이면을 볼 수 있는 기회까지 얻었죠. 이제 20년 세월을 바친 그 번역 사료들을 바탕으로 지역을 주제로 한 글을 써볼 생각입니다. 사회와 소통하는 작업도 고민하고 있고요." 인터뷰 말미, 그로부터 흥미로운 번역의 원칙을 들었다. 이른바 세모꼴 원칙이다. 좋은 번역을 하는 조건으로 그는 한문에 대한 빈틈없는 독해와 아름다운 한글을 쓸 수 있는 능력과 자기가 번역하고 있는 텍스트의 역사에 대한 구조적 이해를 꼽았다. 아랫변과 윗변 그리고 꼭짓점 도형의 세모꼴을 적용한 번역의 원칙은 그가 주도하는 고전번역에 그대로 담겨 적용됐다. 지금까지 우리 앞에 놓인 고전의 내용이 대중들에게도 흥미 있게 다가올 수 있는 비결이 거기 있었던 것이다.
변주승교수에게 고전번역은 지난 18년 동안 일상의 한 중심이었다. 그의 부친은 호남의 대표적 한학자인 산암 변시연 선생(1922~2006).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유학의 학풍 속에서 성장한 그는 우연한 기회에 고전번역의 길에 들어선 이후 30대와 40대의 학문적 열정을 오로지 번역에만 쏟았다. 고려대에서 석박사과정을 마치고 난 직후부터 시작해 근래까지 지속된 그의 작업이 일군 고전 번역의 숲은 깊다. 첫 작업은 오롯이 개인적으로 일궈냈던 '신유박해' 사료집. 그 후 동료들을 규합해 번역팀을 만들어 이어낸 작업으로 '대한계년사' '여지도서' '추안급국안' 등이 번역의 옷을 입었다. 모두가 고전을 읽는 일이 곧 역사를 읽는 일임을 새롭게 일깨우는 귀한 사료들이다. 고전번역원의 '동서양 명저사업'으로 진행했던 '대한계년사'는 대한제국시대의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이 조선총독부가 만든 것인데 반해 고종의 비서실장 격이었던 정교가 직접 기록한 대한제국의 말년사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사료다. '여지도서' 는 영조 시대 조선팔도 353개 고을을 전체적으로 조망한 인문지리서. 조선왕조가 국가차원에서 조망한 마지막 인문지리서라 할 수 있는 이 책을 번역하는데 변교수는 특별히 공을 들였다.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작업은 지도의 복원. 빠듯한 예산에 지도 복원을 중심으로 들여놓는것에 내부에서도 반대가 심했으나 변교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 지도를 번역해 놓지 않으면 후대 사람들이 읽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역시 번역을 마무리한후 출판을 위한 교정 작업까지 마친 '추안급국안'은 우리 역사의 새로운 보고라 할 만큼 흥미로운 사료다. 조선시대, 반역 등 국가의 존립과 관련된 사건의 심문기록을 통합해놓은 이 자료는 선조대부터 고종대까지 범죄자들을 직접 심문하면서 옆에서 적었던 속기록. 변교수는 '추안급국안'의 두 가지 가치를 주목하고 있다. 하나는 조선왕조실록이 갖고 있는 한계를 벗고 조선시대 법제사 정치사 사회사를 밝히는 사료적 가치와 함께 새로운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생활사의 보고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중세국어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는 국어사로서의 가치다. 오는 가을 출간될 예정인 이 사료는 분량만도 90권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 또 한번 번역의 지형을 바꾸고 역사 연구의 진전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되는 결실이다.
길거리 춤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거리에서든 광장에서든 무리지어 춤을 추는 아이들은 이제 도시의 풍경이 되었다. 풍경이 되었다는 것은 '소통'의 힘을 얻었다는 증거다. 이러한 변화를 거리 춤의 진화라고 해두자. 그런데 사실 진화하고 있는 것은 춤만이 아니다. 춤을 담는 공간과 소통 방식의 진화는 더 새롭다.거리에서 공연장 안으로 들어온 춤이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몸짓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예술의 영역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녹록치 않다. 예술이 아닌 것으로부터 예술이 되는 일, 혹은 예술이 되게 하는 일은 쉽지 않다. 오랫동안 우리 의식을 지배해온 편견의 산물인 '경계의 명징성' 때문일 것이다.비보잉 '라스트 포 원'의 리더 조성국씨(31)를 만났다. 2000년대 초반, 힙합의 대열에 혜성처럼 등장한 '라스트 포 원'은 한국을 대표하는 비보이 그룹 대열의 중심에 있다. 전주출신 10대 비보이들의 재기 발랄함으로 무장한 '라스트 포 원'이 거리로 나온 것은 2002년, 각종 대회를 휩쓸면서 주목을 받았던 이들은 2005년 독일 '배틀 오브 더 이어(Battle of the Year)'에서 우승하면서 정상에 섰다. 비보이들의 우상이 된 '라스트 포 원'의 이름은 창단 11년째를 맞는 지금까지 건재하다. 그런데 그들의 활동이 뜸해진 듯 했다. 팀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전통문화'의 정적 이미지에 갇힌 도시 전주에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이미지를 안긴 '라스트 포 원'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전주와 서울의 연습실에서 그와 팀원들을 만났다. 현실과 싸움하고 있는 그들의 전투력(?)은 의외로 강해보였다. 지금 그들에게 춤추는 일은 고행과도 같지만 그것은 쉽게 중단될 것 같지 않은 고행이다."춤은 우리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방법 이예요. 그러니 쉽게 포기할 수 없지요."그래서 알게 됐다. 비보이들의 춤에 열광만 하지 않고 그들의 저항정신과 자유를 향한 치열한 몸짓의 진정성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영화와 공연으로 보아서인지 친숙하게 느껴지는군요. "영화 '플래닛 비보이'를 꽤 많이보셨더라구요. 그래서 더러 알아보아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영화 덕분에 '라스트 포 원'이 더 많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지요."-전주는 자주 내려오나요. "공연이 있을 때 내려옵니다. 오늘은 '2013 전주 B-boy 그랑프리' 심사가 있어서 왔습니다. 아버지가 전주에 계시니 자주 내려와야 하지만 이럴 때 뵙고 가는 정도지요."-영화에서 보니 춤추는 것을 반대하셨던 아버지께서 나중에는 든든한 후원자가 되셨던데요. 춤은 언제부터 추었나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왔어요. 티브이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추는 춤을 보았는데 정말 멋있더라구요. 그 춤을 따라 하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춤만 생각하며 살았어요. 중학교 때는 H.O.T와 젝스키스가 우상이었지요. 생각해보니 아이돌 1세대의 춤이 제 교과서였네요."-그때 우리나라에 유행하기 시작했던 힙합은 단연 선풍적인 인기였지만 열 살짜리 아이가 비트가 강한 음악과 빠른 리듬을 입힌 힙합에 그렇게 마음을 뺏겼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티브이 프로그램을 녹화해서 따라 추었어요. 나중에는 인터넷으로 외국 사이트를 뒤지거나 비디오를 구해 연습했고요. 학교 갔다 오면 춤만 추었어요. 독학이었지요."-공부는 안하고 춤만 추면 부모님 걱정이 많으셨겠군요."반대를 많이 하셨죠. 제가 중학교 때 부모님이 헤어지셨는데, 그때까지 저를 키워주신 분이 친엄마가 아니라는 것을 함께 알게 되었어요. 충격이 컸죠. 그래서 더 춤에 빠졌던 것 같아요. 뭐랄까. 가족관계의 혼란스러움을 잊을 수 있는 출구가 필요했지요."-춤이 위로가 되었군요. 춤 연습은 어디서 했나요. "지금 생각해보면 춤이 있어서 나쁜 길로 빠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 춤을 출 수 있는 모든 공간은 다 연습실이었어요. 롤러장은 가장 훌륭한 연습실이었고, 빌딩 앞 공터나 좀 한산한 길거리까지. 원래 힙합이 길거리 춤으로 시작했잖아요." -그때만 해도 춤을 추는 아이들에 대한 시각이 좋지 않았죠. 그것도 길거리에서 떼로 몰려다니며 춤추는 아이들에 대한 편견은 심했을 때인데. "공부 안하고 놀러만 다니는 애들에 대해 인식이 좋을리있겠어요. 춤춘다고 몰려다니는 아이들을 불량배로 생각하는 어른들이 많았어요. 학교에서도 아이들이 저희를 '양아치'로 생각했으니까요."-그런 편견을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그냥 춤만 열심히 추었어요. 최고의 춤꾼이 되겠다는 생각뿐이었죠. 아버지께서 인정해주신것도 결국은 실력으로 가능한 일이었어요. 중학교 때부터 팀을 만들어 온갖 대회를 다 나갔거든요. 상을 받으면 꼭 아버지께 보여드렸어요. 처음에는 눈길도 안주셨는데, 가출까지 하면서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열린 비보이 대회에 나가 입상하고 왔을 때 '꼭 춤을 춰야겠냐'고 물으시더군요. 그래서 정말 하고 싶다고 했더니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어요. 묵언의 허락이었어요."-춤이 우선이었으면 학교와는 담을 쌓았겠군요. 졸업은 했나요."믿기 어렵겠지만 중학교 때는 개근상 받았어요. 대신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졌지요.(웃음) 그런데 고등학교 졸업은 간신히 했어요. 출석이 워낙 부족했거든요."-'라스트 포 원'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라스트 포 원'은 2002년에 결성했어요. 제가 중학교 때 만들었던 'E. Y. C'를 받아 활동하고 있던 후배들이 '라스트 포 원'을 만든 것을 알고 합류했어요. 제가 활동했던 '맥스크루' 선배들이 군대를 가게 되면서 팀이 해체되었거든요. 그리고 맥스크루는 팝핀이나 라킹 등 여러 장르를 추는 그룹이어서 언젠가는 비보이 팀을 갖고 싶었어요."-언제 서울로 갔습니까. "2005년이예요. 전주와 서울을 오가면서 활동했었는데 2003년 즈음부터 '라스트 포 원'이 완전 핵돌풍을 일으켰죠. 지방팀인데도 서울을 비롯한 전국 대회를 석권하면서 바빠지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아예 서울에서 활동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죠." -처음부터 지금까지 리더를 맡고 있는데. "이유가 있었어요. 제 또래의 단원들이 군대를 가면서 리더를 바꾸어 할 만한 사람이 없었어요. 저도 현역을 자원했었는데, 허리디스크와 목디스크 척추분리증이 겹치고 집안형편까지 어려워지면서 면제 대상이 되었죠. 군대를 안 갔으니 리더가 감당해야할 몫이라도 잘 해야겠다 싶었습니다."-지금 전주 영화의 거리 입구에 있는 광장 이름이'라스트 포 원'이잖아요. 전주의 비보이가 세계 최고라는 자긍심을 상징하는 공간이 되었는데 당사자들도 자랑스럽지 않나요.(웃음)"그때 핸드프린팅까지 했었어요. 거리의 아이들이 전주의 도시의 브랜드가 되었으니 기뻤죠. 그런데 전주는 딱 거기까지인 것 같아요. 물론 큰 규모의 비보이 대회가 만들어지고 관심도 높아졌지만 비보이를 문화의 한 장르로 정착시켜 성장시켜갈 수 있는 기반은 여전히 척박하잖아요."-이야기가 나왔으니 '라스트 포 원'의 근황을 듣고 싶습니다. 어렵다는 이야기가 들리던데요."많이 힘듭니다. 지난해 연말 즈음엔 절망적인 상황이었어요. 2009년에 저희가 전속되어 있던 기획사가 파산했거든요. 투자사들로부터 제작비를 모아 만든 뮤지컬 '스핀 오딧세이'가 원인이 되었는데 월급이 나오지 않기 시작하면서 꽤 오랫동안 맨손으로 버텼지만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팀원들이 나가면서 정상적 활동에 한계가 왔었어요."-나가는 팀원들에 대한 원망이 컸겠습니다. "섭섭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그래도 이해가 되더라고요. 집안 형편이 어려운 사람도 있고, 미래가 불안하기도 했을 것이고. 털어놓자면 저도 마음이 흔들렸거든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서도 춤과 팀을 지켜왔는데 주저앉을 수는 없겠다 싶었습니다."-기획사가 문을 닫으면서 연습실도 없어졌다면서요. "지금은 '도도'라는 여성타악그룹 연습실에 얹혀서 연습합니다. 오갈데 없이 지내다가 연습실이라도 빌려 쓸 수 있으니 다행이지요."-세계 최고의 비보잉 '라스트 포 원'이 연습실도 없다는 현실이 서럽진 않나요."춤을 출 때의 아찔함은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하루하루가 불안하니까요. 그래도 뜻을 같이 하는 후배들이 있어 희망을 갖게 됩니다. 바닥까지 내려왔으니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생각을 하죠."-그래도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힘이 될 텐데요. "월급 받으면서 맘껏 연습하고 공연할 수 있었던 시기가 있었죠. 2006년부터 1년 반 정도, 매월 월급을 받았어요. 120만원. 먹고 자는 일 해결되고 월급까지 받았던 그 시절이 이제 꿈이 되었네요."-지금은 그만큼의 수입도 안된다는 이야기군요. 그래도 이 길을 가야한다고 생각하나요. "제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춤추는 일 뿐이거든요. 지금은 한 달에 적게는 2-3개, 많게는 5-6개 정도의 공연을 하는데 일상적 삶을 해결하기에도 빠듯한 여건이어서 단원들이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해결합니다. 이런 궁핍한 생활은 비보이들의 운명적인(?) 삶인 것 같아요."-힙합의 진화에도 불구하고 힙합을 이끄는 사람들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군요. 한류의 콘텐츠로 부상한 비보잉 그룹의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아직 희망을 갖고 있어요. 비보이의 정신이 저항성과 역동성이잖아요. 현실과의 이 치열한 싸움이 어쩌면 저희의 전투력을 더 강하게 하는 기회인지도 모르겠어요."-듣기 거북할지 모르겠지만 역동성이 생명인 브레이크 댄스에 삼십대 비보이로서 고민은 없나요. "춤추는 일에 정년은 없어요. 어떤 춤을 어떻게 추느냐의 문제겠지요. 역동성이 블레이크 댄스의 특징이긴 하지만 분출하는 것만이 역동성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역동성이 강조되는 춤도 삼십대 후반까지는 출수 있을 것 같은데요?(웃음)"-힙합이 주류문화로 들어온 지 꽤 되었지만 예술의 영역으로 인정하는 환경은 여전히 미흡하죠.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죠. 그런데 유럽이나 다른 나라에서 저희는 아티스트입니다. 독일 배틀대회에 나갔을때 네임카드를 주더라고요. 거기 '아티스트 조성국'이라고 써있었어요. '나는 아티스트다'는 자긍심을 그때 갖게 되었습니다. 비보이를 예술가로 대접하는 국가에 대한 경외감도 생겼어요."비보잉과 같은 힙합은 더 이상 뒷골목에서 이루어지던 저항의 표현이 아니다. 그라피티가 미술의 정당한 영역으로 자리 잡았듯이 비보잉도 예술이다. 그 예술적 완성도를 위해 비보이들은 모든 고통과 가난을 맞서 춤을 춘다. 인터뷰를 하고 다시 궁금해졌다. 비보이의 대명사가 된 '라스트 포 원'을 자랑으로 여기는 전주는 지금 무엇으로 그들을 존중하는지. 그들의 춤을 위해, 그리고 내일의 '라스트 포 원'을 꿈꾸며 거리로 나선 청소년들을 위해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비보이(B-boy)는 브레이크 댄스( break dance)를 추는 남자 아이들을 뜻한다. '라스트 포 원'은 한국을 대표하는 비보이 그룹이다. 2002년, 최고의 춤꾼을 꿈꾸는 전주의 비보이들이 의지를 모아 만든 '라스트 포 원'은 활동을 시작한 직후부터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비보이들의 선망인 2005년 독일 '배틀 오브 더 이어' 우승으로 세계 정상에 섰다. 대중들에게 더 널리 알려진 것은 그해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 '플래닛 비보이'를 통해서다. 그즈음 '라스트 포 원'의 이름 뒤에 '전주'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전주의 비보이, 전주의 비보잉 문화에 대한 발견이었다. 덕분에 전통문화의 상징적 도시였던 전주는 자유와 창조의 젊은 문화도시가 됐다. 비보이 그룹의 존재는 '배틀(battle)'로 확인된다. 수많은 대회에서 펼쳐지는 배틀은 각 그룹과 개인의 기량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비보잉만의 독특한 형식이다. '라스트 포 원'은 팀원들의 결속력도 대단하지만 각자 지닌 개인적 색채가 서로 다르고 기량이 빼어나다는 평을 받는다. 다른 예술과 접목하고 소통하는 감각과 감성도 탁월하다. 국악이나 무용 연극과 같은 다른 예술과의 융합을 시도하는 실험 작업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덕분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외공연으로 한류를 강화시킨 '라스트 포 원'은 기획사에 전속되어 활동하고, 한 기업체가 지정 후원에 나설 정도로 존재를 빛냈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악조건의 환경에서 분투하고 있다. '라스트 포 원'은 몇 차례 연습생 모집을 통해 단원을 구성했다. '이제는 끝까지 함께 갈' 가족, 리더 조성국과 이용주(31) 신영석(28), 장우진(32) 이원기(28) 박정현(27) 정상현(26) 송경한(25) 강장원(23) 박홍혁(23), 그리고 군복무중인 임성진(27)이다. 단원들의 지역적 연고가 깨진지 오래지만 '라스트 포 원'의 고향은 그래도 전주다. 리더 조성국이 판소리와 비보잉을 결합한 스토리 있는 작품을 계획하고, 전주의 브랜드 공연무대를 꿈꾸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진을 찍기 위해 서울 강남의 빌딩 앞에서 '라스트 포 원'이 브레이크 댄스를 추었다. 허공을 훨훨 나는 비보이, 바닥을 짚고 거꾸로 튀어 오르는 비보이에게 공간의 경계는 무의미하다. 세상을 향해 말을 거는 몸짓만으로도 행복해하는 그들이 거기 있었다.
일상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 핸드폰에만 의지해도 어려움 없이 살 수 있는 시대에서 대화는 더 이상 삶의 중심에 있지 않다. 소통이 단절되면 '사람'과 '사람'은 서로에게 의미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둘러보면 많은 사람들에게 풍경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풍경은 삶에 지친 이웃에게 위안과 힘을 주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더불어 행복하게 해주는 풍경이다.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공부하는 그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누군가에게 꿈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행복을 준다고 믿는다. '이 사람의 풍경'을 찾아 나서는 이유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지인을 통해 미리 공을 들였다. 뜬금없는 인터뷰를 거절 할 수 있겠다 싶어서였다. 예상은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명망성도 없는 저를 왜 인터뷰하는지..." 첫 질문이었다. 도시를 연구하는 가천대 정석 교수(51). 인터뷰 시작은 난감(?)했으나 끝은 유쾌했다. 명쾌하고 긍정적인 삶의 철학으로 무장한 그와의 대화가 빚어내는 풍경은 도망치다 막다른 골목에서 만난 '비상구' 같았다. "우리나라 도시 문제는 심각합니다. 그런데 그 문제는 어떻게 보면 없어도 되었을 문제거든요. 도시설계 도시계획을 공부하는 연구자로서 자책감이 크고 죄스러운 부분이지요. 그래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더 많습니다."의례적 말이 아니었다. 30년 가깝게 현장을 지키며 도시를 공부해온 그가 진단한 우리시대의 도시는 사면초가, 위기에 놓여있는 것이 분명했지만 그의 분석대로라면 얼마든지 회생할 가능성은 충분해 보였다. 물론 그 중심에는 '함께 행복해지는 도시 만들기'를 고민하고 대안을 찾아온 그 같은 연구자들의 역할이 있어야 가능한 일일 터였다. 그는 사람답게 사는 도시의 정답이 '마을 만들기'와 '마을 공동체'에 있다고 확신했다. 오래된 편견일 수도 있지만 '도시'와 '마을'은 용어만으로 보자면 상대적 개념이다. 그 때문에 도시에서 마을을 이야기하는 간극이 커보였지만, 그가 도시연구에 바친 짧지 않은 삶의 풍경을 마주하고 보니 신뢰가 깊어졌다. 성남에 있는 가천대 연구실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그의 도시 현장 연구 첫 작품인 서울의 북촌한옥마을을 둘러보았다. 오가며 반갑게 인사 나누는 주민들이 적지 않았다. 그가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라고 자평하면서도 가장 큰 보람을 '북촌을 지키며 사는 행복한 주민들을 만났을 때'라고 꼽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서울시의 도시정책에 오랫동안 참여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후반까지면 가장 중요한 시기가 아니었나요. "그렇게 볼 수 있겠네요. 제가 94년에 지금의 서울시정개발연구원에 들어갔는데 2007년까지 서울시 도시정책을 연구했습니다. 90년대는 여러 가지면 에서 중요한 시기였죠. 정치적으로는 80년대 후반에 어느 정도 민주화가 실현되면서 민주화운동이 전국단위의 정치적 운동에서 지역운동으로 전환하는 시기였고, 93년에는 지방자치제가 시작됐습니다. 90년대 초에는 80년대에 일어났던 개발 사업이 정점을 이뤘어요. 분당 일산 등지의 신도시를 만들었지만 집값 전세 값이 걷잡을 수 없이 뛰자 정부가 용적률을 완화하고, 재개발을 양성화하는 등 온갖 규제를 다 풀었죠. 성수대교와 삼풍 아파트 붕괴사건에, 교통사고 사망자가 최고 정점을 찍은 것도 90년대인데 1년에 사망자만 13000명이나 되었잖아요. 고베 지진 때 사망자가 5천명이었으니 우리는 해마다 고베지진 같은 대형 참사가 두 번 반 정도 일어나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개발시대에 대한 반성과 정말 이렇게 살아야 할 것이냐 하는 각성이 일어났던 것 아닐까요. "맞습니다. 각성과 대전환이 일면서 곧바로 2000년을 맞았지요. 서울시는 90년대에 각고의 노력을 했습니다. 개발시대의 도시계획을 다잡고 새로운 2000년의 도시계획을 준비했지요. 조순 시장과 고건 시장 시절이었는데 실제 여러 가지를 바꾸었어요. 용도지역을 세분화한 것도 그중의 하나인데 아름다운 자연을 지키고 문화재 주변을 낮추고 저층주거지 주변은 저층으로 짓고 살아야 된다는 것을 대의명분을 내세워 지켰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이명박 시장이 2002년에 취임하면서 그런 규제들이 다 풀려버렸어요. 어렵게 다잡은 도시계획이 무너진 것이죠. 오세훈 시장 임기까지도 그랬습니다." -연구 초창기 시절에는 어떤 작업을 주로 했습니까. "94년부터 본격적인 연구 작업을 했는데 그때 주제가 마을공동체와 마을만들기, 도시경관 보존 같은 것들이었어요. 특히 보행공간, 자동차보다는 사람이 다니기 좋은 도시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고 북촌이나 인사동 같은 오래된 동네를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 연구했습니다. 학교로 간 후에도 이 작업은 계속했어요. 저는 이런 일들을 전문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문가는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해요. 연구자든 교수든 도시를 공부하는 사람은 도시정책이 제대로 뿌리내리고 잘 실현되도록 돕고, 역할을 해야 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의무죠." -많은 일중에서도 가장 애정을 가진 작업은 북촌정책이 아닐까 싶은데요. "북촌은 2000년에 기본계획을 세우고 2001년에 실행에 옮긴 프로젝트입니다. 개인적으로 북촌은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라고 평가하는데 성과라면 한옥마을을 지켜낸 것입니다. 당시 종로구청이 북촌 한옥들은 보존 가치가 없다며 철거하고 현대적인 건물로 새로 짓는 재개발을 추진했습니다. 그런데 오래된 동네, 오래된 가치라고 하는 것이 건물만은 아니거든요. 길과 땅, 지형, 언덕이 남아 있고 풍경과 골목이 유지되는 것이 모두 가치 있는 일이지요. 역사도시나 오래된 동네를 보존한다는 것은 그것들을 지키는 일이 우선입니다." -관청도 그렇고 주민들을 설득시키는데 어려움이 많았겠습니다. "노인들의 건강을 돌보는 수준 높은 의술은 무조건 수술하지 않고 건강하게 잘 돌보는 것이죠. 도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되었다고 철거하고 뚝딱 건물 짓는 일은 수준 낮은 짓이에요. 갈등도 겪고 분쟁도 적지 않았지만 한옥마을이 유지되면서 풍경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성과입니다. 더 큰 의미는 대단위 전면 철거를 하지 않고도 서울에서 오래된 동네를 지켜내고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물증으로 보여준 첫 번째 사례라는 점입니다." -그 성과는 북촌이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그런 면이 있지요. 그래서 그 후 북촌이 아닌 동네에서 마을 만들기 첫 번째 실험을 했었습니다. 사실 마을만들기의 의미는 철거재개발이 아닌 방식, 오래된 집이나 동네를 고치면서 유지하는 것을 말하거든요. 90년대 중요한 흐름도 그런 것이었는데, 이런 작업이 성공하려면 도시계획을 주민 주도로 바꾸어야 합니다. 하향식 도시계획이 아니라 상향식 도시계획으로, 또 도시의 계획을 세워서 아래로 내려주는 방식이 아니라 마을별로 도시계획을 세워 모아가는 방식으로 바꾸어가야지요. 이런 흐름은 90년대 서울시정의 중요한 변화였습니다. 그 철학을 실제 현장에서 입증시킨 첫 번째 실험이 북촌이었고요." -절반의 실패에 대한 평가도 궁금합니다. "실패는 여러 가지 있는데, 서울시의 재정지원이 효율적으로 이뤄지지 못하면서 오히려 한옥의 가격이 너무 오른 결과를 만들어낸 것도 그렇고, 그러다보니 북촌이 좋아서 사는 주민들은 오히려 밀려나게 된 상황입니다. 한옥과 마을의 껍데기는 지켰는데 그 안에 사는 주민들의 삶이나 공동체를 지키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실패였어요. 지금도 북촌의 한계는 주민 커뮤니티입니다." -북촌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서울시의 공무원들이 현장근무를 했다던데요. 모범적인 사례가 아니었을까요. 특히 북촌은 주거지역이어서 민원이 많았을 텐데요."북촌 정책은 2000년 초에 연구를 시작했어요. 고건 시장 시절이었죠. 그때 연구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고시장님이 한옥을 시가 사서 보존을 하자는 의견을 내셨어요. 우선 철거되는 것이 문제여서 원칙이 흔들리기도 했죠. 연구자들이 반대했습니다. 북촌지역은 주거지역이거든요. 주거지역으로 지켜지는 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금세 상업화되어버리니까요. 사람 사는 집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고 관광은 그 다음이라고 강조했죠. 상업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우선으로 하고 외지 사람들의 상업화는 막았어요. 그런 중요한 원칙을 세워 북촌가꾸기가 시작되었죠. 그때 공무원들이 북촌의 한옥을 사서 사무실을 만들고 현장에서 근무했습니다. 성과가 좋았죠. 그런데 이명박 시장 들어서면서 사업부서를 주택국에서 문화관광국으로 바꾸고 공무원들도 현장에서 철수시켰어요. 대혼란이 왔죠. 다행히 임기 말에 원상 복구되었어요. 그것을 위해서 시정연구원에서 북촌가꾸기 중간 평가도 하고, 장기구상을 만들었습니다. 원상 복구된 후에 이명박 시장이 북촌에 들어가 살았죠."-그런 노력에도 상업화의 흐름을 막는 일은 어렵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오세훈 시장도 취임하면서 관광객 천만을 내세웠어요. 북촌도 관광 쪽으로 드라이브를 걸었고요. 덕분에 북촌의 주거지역이 많이 사라졌어요.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지구단위계획을 세워 무분별하게 용도 변경되는 것을 막아놓았던 것입니다. 외곽에는 상업공간이 들어올 수 있었지만 한옥이 밀집되어 있는 내부 지역은 들어올 수 없었지요."-북촌과 비슷한 환경에 있는 전주의 한옥마을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향인 전북의 도시와는 인연이 없었나요."초반에 있었습니다. 북촌 연구를 시작한 것이 2000년인데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전주 한옥마을도 보존계획을 세웠어요. 그때 자주 내려갔었습니다. 한옥마을 규제한다고 주민들로부터 계란을 맞았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김완주 시장 시절에 서울시정개발연구원 한영주 박사가 꾸린 전주 포럼에 참여했는데 포럼의 목표가 한 달에 한번 정도 만나서 전주를 위해 아이디어를 내자는 것이었어요. 그 첫 회의 때 제가 냈던 것이 전주한옥마을을 살리고 경전철을 놓자는 것이었습니다."-전주한옥마을도 교수님의 관심을 빗겨갈 수 없었군요. "전주는 다른 도시가 갖지 못한 정체성과 매력적인 요소가 충분해서 새로운 것을 개발하기 보다는 그런 자원을 살리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한옥마을과 구도심이 대표적인 예인데, 한옥마을을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곳으로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확신했었습니다."-전주한옥마을은 자주 와보실텐데 어떻습니까.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 완전히 관광지가 되었구나하는 것입니다. 너무 번잡해졌어요. 그렇다보면 본래의 가치는 잘 드러나지 않고 어디에나 있는 유원지 스타일로 바뀌게 되죠. 그렇게 되면 그 가치에 신물이 나는 사람들은 안 오게 됩니다. 지나가는 관광객들만 붐비게 되면 수명도 그만큼 짧아집니다. 단순한 관광객들이야 다른 곳이 생기면 썰물처럼 쭉 빠지기 마련이니까요. 전주시와 주민들이 나서 지속가능한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관광객 수를 제한하는 것도 고려해볼만 합니다. 전주한옥마을의 가치를 지키는 일이 절실합니다." -결국은 무산됐지만 경전철은 지금 생각해도 흥미로운 제안이었던 것 같습니다. "경전철은 익산 군산까지 잇는 제안이었어요. 전주는 구도심이 작고 외곽에 새로운 시가지가 들어섰잖아요. 그래서 시민 대부분이 승용차에 의존하게 됩니다. 그러나 도시가 쾌적하려면 대중교통 중심으로 도시가 유지되어야 해요. 경전철이나 노면전철이 팔달로를 다니고 백제로를 연계해 신시가지를 꿰고, 그대로 익산 군산 까지 가면 세도시가 하나의 도시처럼 상생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세도시가 경쟁할 것이 아니라 경전철을 통해 하나의 도시로 엮어 주면 대단히 효과적이었을 겁니다." -전주는 전라감영 복원사업이 곧 시작됩니다. 감영복원으로 쇠퇴한 구도심이 살아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큽니다. 복원사업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복원은 신중하게 진행해야 합니다. 역사복원이든 보존이든 그것이 건물이든 시설이든 그것을 복원하고 보존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삶을 보존하고 복원하는 일이 우선이에요. 그런데도 복원사업의 대부분이 개발사업처럼 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을 새로 복원하기 보다는 다시 회복 불능하게 철거되고 망가지는 것들을 막는 것이 우선입니다. 오래된 것들이 기운이 빠져 있으면 생기를 불어넣어 스스로 살아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역사도시나 역사적인 것을 살리는 건강한 방식이에요. 복원한다고 오래된 것을 재개발 하듯 드러내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도시마다 역사유적을 복원하는 사례가 많이 있나요. "역사도시들은 대부분 복원을 추진하고 있죠. 예전에는 개발이 주된 관심사였다가 역사가 관심사가 되었잖아요. 또 그것이 관광과 맞물리기도 하구요. 서울도 마찬가지인데, 오세훈 시장 시절 남산 쪽 성곽을 복원했는데, 이런 경우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도시는 어느 한 시대에 만들어져 그대로 보존해온 것이 아니고,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의 삶속에서 변해온 것입니다. 필연적인 변화죠. 한양도성도 원형 그대로 보존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전쟁이 나고 사람들이 피란을 가고 다시 사람들이 도시 안에 들어오면서 숱한 변화가 있었겠죠. 문화재를 대할 때 그런 변화를 얼마나 진실 되게 받아들이고 겪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했느냐가 가치 있는 일입니다. 어쩔 수 없이 망가진 것들을 서둘러 복원하는 것은 진실 되지 않는 일이죠. 세계문화유산도 두 가지 가치를 존중합니다. 진정성과 완전성이예요. 서로 상반된 것 같지만 얼마큼 남아 있느냐 하는 것이 완전성이고, 그것이 진실된 것이냐 하는 것이 진정성이거든요. 복원을 한다해도 진실성이 없으면 가치는 없습니다. 깨진 것 상처받은 것이라해도 진실된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울 북촌한옥마을인사동 지키기 프로젝트 추진정석 교수는 전주한옥마을의 번잡해지는 풍경을 경계했다. 서울의 북촌한옥마을과 인사동 지키기 프로젝트를 주도해온 그에게 전주한옥마을의 급작스러운 상업적 성장은 이미 경험했던 노정이었다. 오래전부터 귀향을 꿈꾸어온 그로서는 고향 전주의 달갑지 않은 변신이 반가울리 없었다. 그는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 동중과 전주고를 졸업했다. 서울 공대에 입학해 건축가가 되고 싶었지만 2학년 학과 배정때 도시공학과로 옮겨 탔다. 지금은 어느 한사람을 위한 멋진 건물을 만드는 건축가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삶터를 돌보는 도시연구자가 된 것을 큰 행운으로 생각한다. 도시를 공부하는 것 자체가 인생의 공부이고 삶의 공부라고 믿는 정교수는 도시공부는 현장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겸허하게 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이런 신념은 그를 줄곧 현장을 지키게 하는 바탕이 됐다. 90년대 초반부터 13년 동안 서울시정개발연구원에서 가슴 설렐 정도로 신나게 일하면서 한강 경관을 비롯한 도시경관, 걷고 싶은 도시만들기, 마을만들기, 북촌과 인사동 보전 등 여러 도시의 설계 연구를 진행했다. 1995년에는 서울시 보행환경을 연구해 보행조례제정을 이끌어냈으며 시민운동에도 관심이 많아 도시 만들기 시민연대(도시연대) 창립에 참여했다. 2004년부터 동북아도시연구센터장을 맡아 북한과 중국의 도시를 연구했으며 2007년 가천대 도시계획학과로 옮겨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연구 저서 외에도 〈세계의 도시디자인〉 〈집은 인권이다〉 〈저성장 시대의 도시정책〉 등의 공저에 참여했으며 도시문제를 연구하고 고민한 글을 모은 저서 〈나는 튀는 도시보다 참한 도시가 좋다〉(효형출판)를 다음 주에 출간한다. 스승의 날인 15일, 도시공부와 연구의 즐거움에 눈뜨게 해준 스승(주종원 교수)께 헌정하기 위해 열정을 쏟은 책이다. 큰 도시의 도시계획 전문가 역할보다는 작은 도시에 살면서 주민들과 같이 마을 공동체를 살려 창의적인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그는 그 때를 위해 10년 전부터 주말농사를 짓고 목공공부를 하고 있으며, 사물놀이도 배우고 있다. 그러나 역시 가장 큰 바람은 '참한 도시' 전주에서 자신이 소망하는 모든 일들을 이웃과 더불어 해나가는 것. 개인 블로그 '정석의 걷고 싶은 도시 살고 싶은 동네'에 그의 행복한 일상이 촘촘히 담겨있다. 박사논문으로 전라북도 촌락 연구를 하고 싶었지만 항공 촬영이 필요한 배치도를 진행할 엄두가 안나 포기한 것이 아직도 아쉽다는 그는 숨 가쁘게 살지 않고 속도를 좀 늦추어 전북 지역을 두루 다니며 연구하는 일도 마음에 두고 있다.
곽영길 회장 "전북과 동반자적 협력 관계...실질적 협력 모델 만들어 나갈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