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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독립현장] 진안·무주, 학생과 시민이 주도한 3·1 운동

진안 마령면의 시위는 진안군 최대의 31운동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무주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도시와 멀리 떨어진 산간 지역이여서 한 달 늦게 발생했다. 두 지역의 만세운동은 학생과 시민이 주도한 운동이었다. △진안, 주천과 마령에서 외친 독립만세 1919년 3월 25일 진안군 진안읍 장날을 기해 수백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진행했다. 이를 바라보던 장사꾼들도 합세, 읍내에 만세의 환호성과 태극기의 물결로 가득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일본 헌병대가 부산하게 움직이며 해산을 시도했다. 하지만 감격과 흥분에 쌓인 군중의 행렬은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며 적의 제지선을 피하며 만세의 함성을 더욱 우렁차게 외쳤다. 여기저기서 헌병대와 승강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쌍방 모두 극단적인 충돌을 피했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날의 시위는 큰 피해 없이 해산 됐다. 주천면 주양리의 사립 화동학교 유지 김주환 등은 4월 3일을 기해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했다. 화동학교 의생도 양해관 등을 권유해 함께 만세를 부르자고 했다. 만세를 부를 것을 생각하고 있던 양해관 등은 참석의사를 밝혔다. 사건 당일 생도와 주민들이 학교운동장으로 집합해 대한독립만세의 환호성을 부르짖었다. 모두들 감격과 환호로 어찌할 줄 몰라했다. 교정에서 만세를 부른 후 자진해산한 이들은 다시 청년. 생도들의 긴밀한 연락으로 당일 오전에 주민, 생도 약 60여명이 동리 앞 논들에서 모여서 횃불을 들고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밤의 정적을 깨고 메아리쳐가는 만세소리는 더욱 웅장했다. 이웃마을 에서도 호응의 만세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주범자로 지목된 김주한은 헌병대에 구속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진안군민의 독립을 향한 마음은 막을 수 없었다. 3일 뒤인 6일. 마령면 평지리 뒷산에서 오기열. 김영상. 김구영. 황해수 등의 주동으로 인근주민 수백명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불렸다. 하지만 헌병의 출동으로 제지당해, 주동 인물의 한 사람인 황해수는 무력에 의해 끌려갔다. 황해수는 헌병대에 끌려가면서도 이제는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서 편히 쉬고 다시 독립운동을 계속 하라고 격려했다. 12일 성수면 도통리에서도 평소부터 적측의 주목을 받아오던 전경원의 주동으로 수십명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마령시장 만세운동 후에도 진안군의 인사들은 기회 있는 대로 운동을 계획하며 또 산발적으로 만세를 부르고 독립을 위해 활동을 계속했다. 그 중에도 주천면의 청년 김영필 등은 그해 4월부터 대한민보, 독립신문 등 독립운동 관계문서를 무주군 등지에 배포하면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무주, 보통학교 학생들 시위 무주하면 구천동을 생각하고 적상산 사고를 생각하게 되는데 2가지가 모두 인적이 미치기 어려운 심심산곡을 의미했다. 그만큼 교통이 불편하고 다른 지방과의 연락이 잘 안되던 곳이 곧 무주군이었다. 따라서 서울에서 있었던 3.1 독립선언 소식이 무주에 전달된 것은 3월 7일이었다. 다른 지방과 호응해 만세운동을 계획하는 것이 훨씬 늦은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3월 하순께 이웃 고을인 장수진안금산은 물론 경계가 서로 접한 충청도의 영동군, 경상도의 거창군 등지에서도 모두 만세운동이 전개되면서 무주군민은 이대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일부인사들 간에는 다른 지방 인사들과의 접촉도 있고 군내 동지들 간에도 비밀히 연락을 취하며 만세운동의 준비를 했다. 또 이웃고을의 예수교인들이 일부러 이 교통 불편한 무주 산골을 찾아 궐기를 격려하기도 했다. 그중에도 적상면의 애국청년 전일봉은 진작부터 만세운동의 전개를 계획하고 동지들을 규합해 오던 중 4월 13일, 무주 장날을 기해 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을 정했다. 여기에 읍내 보통학교 생도들도 뜻을 같이하기로 했다.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고 기회를 기다렸다. 의거일인 13일 전일봉 등 40~50명이 먼저 시장 중앙에 태극기를 세웠다. 전일봉은 일제의 침략 정책을 공박하고 독립운동의 궐기를 촉구하는 연설을 하니 청년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화답했다. 어린 생도들은 손에 태극기를 들고 애띤 목소리로 목청껏 독립만세를 부르며 앞장섰다. 이들의 의로운 모습에 감격하고 동조하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감격과 흥분에 휘말려 독립만세를 소리 높혀 부르며 읍내를 행진했다. 하지만 헌병분견소에서 무장 헌병대가 출동, 이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상인도, 장사꾼도 짐을 꾸려가지고 귀로에 올라 읍내 만세운동은 일시 진정됐다. 하지만 같은날 저녁, 읍내 주위 산상에서 청년 및 보통학교 생도들이 횃불을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이러한 야간의 봉화와 만세성은 이산에서 저산으로 번지고 이동리에서 저동리로 번져가면서 일본 헌병대의 신경을 괴롭혔다. 시일이 흘러감에 따라 산간벽지 무주군의 독립운동은 다시 흠치교. 공도회등 종교 유사단체를 통하여 번졌다. (끝)

  • 기획
  • 최정규
  • 2019.04.17 20:16

[전북의 독립현장] 임실, 학생 주도 촉발…장수, 장터 중심으로 만세운동 펼쳐

임실 오수지역 31 만세운동은 1919년 당시 전국 10대 의거지 중 하나로, 3월 10일 오수보통학교 학생들의 주도로 촉발됐다. 오수보통학교의 만세운동은 임실 지역에서 일어난 최초의 31운동이었다. 장수지역에도 자유와 독립을 선포하는 독립선언문이 전달돼 장터 등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독립을 열망하는 지역민들의 항거는 들불처럼 지역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임실지역 서울에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에서 보통학교 학생들의 의해 3월 10일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어린 학생들의 의거에 일본인 교장과 주재소 순사들은 크게 당황해 험한 말로 학생들을 억압했다. 이후 이달 12일에는 임실읍내에서 2000여 명의 군중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임실 장날이었던 이날 오전 10시쯤 시장 한복판에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퍼지자, 모여든 장꾼이 합세해 만세를 불렀다. 태극기가 나부끼고 독립선언서가 배포됐다. 당시 임실읍 뒷산에는 봉화가 높이 올려지며 만세운동이 격화됐다. 오수면과 임실읍에서 촉발된 만세운동은 청웅면, 지사면, 강진면 등 인근 면을 거쳐 남원, 순창, 장수 등 인접지역으로 전파됐다. 3월 23일 오수지역에서 다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기송, 이만의, 오병용 등은 천도교인 및 개신교인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시위 군중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 최대 2000여 명을 헤아렸다. 이들은 시장 내의 일본인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과 면서기들에게 같은 민족으로서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이날 저녁 남원헌병분견대와 임실경찰서에서 파견한 무장 병력이 출동해 발포하자 만세 시위대는 일단 해산하였다가, 300~400명씩 무리를 지어 이튿날 새벽까지 계속 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한 삼혁당 김영원은 일본경찰에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1919년 8월 26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김영원을 비롯해 만세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들은 출옥한 뒤 영춘계(迎春契)를 조직했다. 당시 영춘계에 참여한 오병용, 이기송, 이윤의 등 35명은 밭을 갈면서도 봄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 영춘계원 35명 중 21명이 국가유공자로 추서될 정도로 임실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고, 영춘계는 일본경찰의 탄압으로 4~5년 만에 해산됐다. 임실군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기념도록 영춘을 간행했다. 이 기념도록에는 임실지역 만세운동 기념비 소개와 함께 국가유공자 목록, 각 지역별 31 만세운동 개요, 국가유공자들의 판결문, 국가유공자의 소장 자료, 임실지역 천도교 활동을 알 수 있는 개인소장자료, 기획원고 등이 수록됐다. △오수 만세운동 지도자 이기송 이기송(1888~1939)은 1919년 3월 23일 임실 둔남면 오수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오수리에서는 이미 3월 10일에 보통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돼 임실군 내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그러나 일본인 교장의 압력으로 더 이상 학생들의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이기송은 오병용이만의 등과 연락해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이날 장터에 모인 군중 앞에서 독립운동의 당위성에 대해 호소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기송은 일본경찰에 붙잡혀 7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오수면 둔덕리에 뿌리내린 전주이씨 문중은 이기송을 비롯해 총 16명의 애국지사를 배출했다. △장수지역 장수 산서면 동화리는 1919년 정봉수 열사를 중심으로 15명의 애국지사들이 지역주민들을 모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외쳤던 곳이다. 1919년 3월 19일 인근지역인 임실 지사면의 박정주, 안성섭 등은 동화 장날을 맞아 장꾼들을 격려하며 만세를 부르고 시위행진을 벌였다. 일제는 시위가 격렬해지자, 발포하는 등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어 22일 장수 번암면 노단리 장터에서도 독립만세가 울려퍼졌다. 다음날인 23일에는 산서면 사계리에서 주민 30여명이 만세운동을 벌였다. 장수군은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나라사랑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동화리 괴정마을 입구에 기념비를 건립하고 매년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이와 관련, 장수군은 지난달 1일 산서면사무소와 31운동 기념비에서 100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이날 참석자들은 면사무소에서 31운동 기념비 구간을 가두행진하며 만세 삼창을 외쳤다. 또 유족 대표의 독립선언문 낭독과 산서중고등학교 학생들의 31절 합창과 만세 삼창도 진행됐다. △민족대표로 한국 불교 수호에 앞장선 장수 출신 백용성 장수에서 태어난 백용성(1864~1940)은 31독립만세운동의 민족 대표이자 어려운 불교 경전의 한글화를 처음으로 시도한 경전 번역인이었다. 31운동 당시 백용성은 한용운의 추천으로 민족 대표 33인에 포함됐다. 1919년 3월 1일에 백용성을 포함한 민족 대표들은 서울 종로의 태화관에서 민족 독립을 절규하는 만세삼창을 했다. 이 일로 구금돼 고초를 겪고 1921년 3월에 석방된 백용성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금강경>을 순 한글로 번역간행하는 일이었다. 이후 삼장역회를 설립해 수많은 경전을 한글로 번역간행했다. 1928년에 한글로 된 <화엄경>을 간행하는 기념비적인 일을 해냈다.

  • 기획
  • 최명국
  • 2019.04.10 19:59

[전북의 독립현장] 부안, 학생들까지 앞장선 만세시위...고창, 총·칼에도 굴하지 않는 청년들의 항거

나는 밥을 먹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잠을 자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해왔다. 이것은 나의 몸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도산 안창호 부안지역의 31운동은 3월 중순부터 4월까지 각 종교계와 청년, 학생 등을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조직적으로 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일본 순사들의 탄압에도 줄포보통 학생들까지 주도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는 등 4월 중순까지 부안 지역에 만세운동의 불을 지폈다. 고창도 고종황제의 국장을 기점으로 청년들과 학생들의 독립만세운동이 진행됐다. 특히 1919년 시작된 만세운동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1920년에 또다시 독립만세운동의 의지를 이어가는 등 고창의 만세운동은 구국의 혼을 불사른 성지로 평가된다. △부안 인근 지역 동지들까지 함께한 독립운동 불씨가 학생들에게로 1919년 31 만세운동이 시작된 후 부안군의 천도교인들은 이웃 고을인 정읍군의 천도교측과 긴밀한 연락을 취해 가며 30일 부안읍 장날에 기해 거사를 계획했다. 3월 중순경부터는 예수교측 및 일반 청년층과도 만나 부안군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했고 25일에는 실천단계로 들어갔다. 특히 부안군내의 청년 중 동진면의 은희송이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원래 일본의 순사보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각 지역에서 31운동이 일어남과 함께 자기의 지난날을 반성하며 뜻을 고쳐 독립운동에 힘을 바칠 것을 결심했다. 병을 이유로 순사보의 직을 그만둔 뒤 병을 치료한다는 것을 핑계 삼아 군내 및 정읍군 등지로 다니며 은희상 등 동지가 될 만한 사람들을 찾아 독립운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또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그는 3월 26일경 천도교 및 예수교측의 인사들과도 연락을 취하면서 3월 30일 부안읍 장날을 기하여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예수교측에서는 전도 교인들을 통하여 전도를 가장해 각 면동을 순회하면서 만세운동에 가담할 것을 권유하고 은희송 등 청년들은 태극기와 선언서를 준비해 배부했다. 하지만 이를 눈치 챈 일본은 경계를 삼엄하게 해 운동의 전개를 어렵게 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30일 오후 8시께 부안읍 뒷산에 만세운동을 알리는 봉화가 타오르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독립만세를 외치는 함성이 일기 시작했다. 봉화는 빠르게 산을 옮겨가며 번져 갔고 이에 따라 만세 함성도 부안읍 전체에 차례차례 울려 퍼졌다. 4월 7~8일에는 줄포에서 공립보통학교 3~4학년 생도들을 중심으로 학교 교정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려 계획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당시 만세시위를 주동했던 김태순, 박기봉, 김동섭, 이병근, 박병섭 등은 4월 18일 줄포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이들은 태극기를 비밀리 제작해 18일 아침 보안면사무소 게시판과 큰길가 소나무 등에 매달았다. 오전 11시 수업시간이 끝나자 이들은 시장으로 달려가 태극기를 장사꾼들에게 나누어 주며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주변에 경계를 하고 있던 줄포경찰서 순사들이 이들을 제지했고, 주동 학생 중 4년생 김태순, 김동섭, 서용순, 이병근, 박병섭, 이병갑 등이 체포되었다가 학교장과 부모들에 의해 석방되었다. 하지만 그날 밤 10시, 학생들과 주민들은 인근 부락에서 봉화시위와 독립만세를 외치는 행진 등 만세운동의 불씨를 이어갔다. △무장면의 만세운동 횃불 고창 전역으로 무장면 광산 김씨 후예 김영완은 고종황제의 국장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상경했다. 이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의 시위행렬에 참가한 그는 독립선언문 등 유인물을 가지고 무장으로 내려와서 친족 김용표, 김상수, 친우 이용욱, 이준구, 김진호, 박흥선, 오태근, 박흥수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결행하기로 했다. 3월 15일 무장 장날을 이용해 거사를 단행하기로 한 이들은 장꾼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 오전 10시가 되자 이용욱, 김용표 등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주고, 김영완은 군중들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해 대열을 남산으로 이끌며, 그곳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들은 태극기를 높이 들고 선두에 서서 군중을 지휘하며 무장면 네거리로 행진하며 선언문을 살포하고 남문을 지나 면사무소와 주재소 앞으로 나가며 수백 명 군중과 함께 행진했다. 얼마 후 고창에서 증원된 수십 명의 일본경찰 병력이 총칼로 강압해 시위군중을 해산하였고, 끝까지 항거한 주동자 김영완, 김용우, 김두남, 김영해 등은 현장에서 검거됐다. 다른 주동자들도 다음날 모두 검거돼 고창경찰서로 압송된 후 갖은 고문을 당하고 정읍 재판소로 옮겨져 형을 받았다. 김영완은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어 복역하다가 혹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그해 11월 5일에 옥사했다. 3월 21일에는 고창읍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인 김승옥, 오동균, 김창규 등과 청년들이 결성한 고창청년회원은 조직, 공작, 연락동원에 이르는 계획을 은밀하게 준비했다. 21일 오전 1시 청년회원들과 고창보통학교의 일부학생 등 100여명이 모양성에 올라가 손에 태극기를 들고 회동했다. 김승옥이 나서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선동연설을 하였으며 오동균은 선언문과 독립가 등을 배포해 군중들의 궐기를 호소했다. 이에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 시내로 내려와 시장거리를 통과, 시가지를 누비며 시위행진을 했다. 도중에 일본경찰의 저지를 받게 된 군중은 군청으로 이동했지만 총을 쏘며 달려온 경찰의 폭압으로 강제 해산 당하기도 했다. 현장에 앞장섰던 행동대원 김명만이 먼저 잡히고 이어 김승옥, 오동균, 김창규 등 10명이 체포되었다. 고창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형을 선고받은 김승옥, 오동균 등은 그해 8월에 서울에 있는 고등법원에 상고하며 조선사람으로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것은 조선사람의 본분이다며 이것이 불의의 일도 불량한 일도 아닌데 어째서 처벌하느냐고 항쟁했지만 모두 기각 당했다. 이후 3월 28일에는 흥덕면에서 애국청년들과 학생들의 만세 시위가 진행됐고 다음해인 1920년 3월에는 성내면 월산리에 거주하는 청년 이종철과 학생 이대성, 이종주, 유판술 등이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만세운동을 결의하고 독립선언문의 등사 취지문 작성준비를 하는 등 독립을 향한 만세운동의 불씨를 이어갔다.

  • 기획
  • 엄승현
  • 2019.04.03 20:47

[전북의 독립현장] 정읍, 호남 만세운동 불 지펴…남원, 민·관 함께 의거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정읍지역의 31운동은 호남지역 독립만세운동에 불을 지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본 헌병대의 무력 사용에도 불구하고 10일간 지역 곳곳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남원에서는 덕과면장을 비롯한 면사무소 직원 등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타올랐다. 일본제국주의의 억압에 숨 죽이던 민관이 함께 의거한 독립운동으로 평가된다. △태인에서 불어온 불길정읍 전역으로 1919년 3월 16일 태인 장날 정오를 기점으로 지역 곳곳에서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당시 31운동 직전에 고종황제 국상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했던 태인면 청년 김현곤, 송수련, 박지선은 김성수와 송진우 등 당시 사회지도층 인사들을 만나 만세운동 계획을 알렸다. 또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서를 정읍으로 가져와 뜻을 함께하는 청년들과 만세운동을 논의했다. 이들은 지역민들이 많이 모이는 태인 장날에 의거하기로 하고 각지의 동지들을 규합했다. 태인면사무소 서기를 지내던 김현곤은 송한용의 집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수천장을 등사했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이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시장 상인 및 주민들에게 건넸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청년들은 면사무소 인근에서 시장까지 행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시장에 모였던 수천명의 군중이 호응했다. 만세운동이 격화되자 대부분의 상점은 문을 닫았고, 일부 대열이 주재소까지 나아가자 헌병 등이 총을 겨누고 군중을 폭행했다. 태인지역의 만세운동은 10여일 동안 산발적으로 이뤄졌다. 당시 투옥된 애국지사들은 6월 또는 1년 반의 옥고를 치른 뒤에도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며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투쟁을 이어갔다. 태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정읍 전역으로 퍼졌다. 천도교와 기독교인 등은 3월 23일 정읍 장날을 맞아 만세운동을 계획했지만 전날 헌병대 급습을 받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4월 2일 읍내 장날에 덕천면에 사는 송기룡과 박제구 등 애국지사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수많은 군중이 들고일어났다. 정읍은 독립운동을 이끈 참지성인으로 꼽히는 백봉 라용균(1895~1984) 선생을 배출한 고장이다. 1918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재학 중이던 라용균은 백관수, 김도연 등과 함께 대대적인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우고 28 독립 선언에 나섰다. 28 독립 선언에서 재정 분야 책임자였던 그는 거사 뒤 관련자가 체포되자 신변에 위협을 느껴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후 상하이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돼 법제위원과 정무조사 특별위원 및 정치분과 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입법 활동과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국회에서는 백봉 라용균의 뜻을 기리기 위해 1999년부터 백봉 신사상을 제정해 매년 모범적인 의정 활동을 한 국회의원에게 이 상을 수여하고 있다. △민관이 다 함께 대한독립만세 전북지역에서 가장 치열한 항일운동을 벌였던 임실 둔남면 인근에 자리한 남원 덕과면에서는 면장 등 면사무소 직원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불붙었다. 덕과면장 이석기는 재종제 이성기, 면직원 조동선 등과 1919년 4월 3일 신양리 도화곡의 식수기념일을 맞아 만세운동을 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비밀리에 각 면장에게 만세운동 참가 취지서 등을 보내며 동참을 호소했다. 이석기는 우리 조선 국민도 독립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당시 도화곡에 나온 800여명의 면민들에게 만세운동의 당위성을 역설했고, 면민들이 호응하며 시위 행진을 벌였다. 무장한 일본 헌병대는 만세운동에 참여한 면민들을 억압하는 등 무력으로 군중을 해산시켰다. 이에 영향을 받은 남원지역민 1000여명은 4월 4일 장날 광한루에 모여 태극기를 선두로 만세운동을 벌였다. 기독교인들은 작은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눠줬고, 천도교인들은 등사한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당시 일본 헌병대의 무차별 총격으로 시위 대열은 해산하고, 8명이 현장에서 순국했다. 또 10여명이 중상을 입고 20명이 붙잡혔다. 앞서 3월 2일 서울에서 온 독립선언서가 임실을 거쳐 덕과면 교인들에게 전달됐다. 남원읍 금리에 있었던 천도교 교구장 유태홍은 선언서 취지를 교인들에게 알리는 등 대한독립의 의지를 다졌다. △31운동 길이 빛내리 정읍시와 태인청년회의소는 지난 1일 태인면 일대에서 독립만세운동 기념 행사를 열었다. 이날 기념식에는 1000여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여해 100년 전 나라를 되찾기 위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그날의 역사를 재현했다. 정읍시는 오는 8월 중 태인 31운동 등 정읍지역이 항일 민족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는 내용의 학술대회를 열 계획이다. 남원에는 덕과면 31운동 발상지 기념탑과 함께 기념비가 독립정신을 기리고 있다. 동아일보사는 창간 54주년을 맞아 남원청년회의소의 협력을 받아 1974년 3월 1일 남원 31운동 기념비를 세웠다. 일제의 무단통치에 저항해 민족의 자주독립을 이루기 위한 1919 기미년 31 만세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1919년 4월 3일 남원 덕과면에서 이석기 면장 주도의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4월 3일 덕과면 만세운동은 남원군민에게 많은 자극과 감동을 안겼다. 만세운동은 일제에게도 큰 충격을 줘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됐다. 또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설립되는 밑거름이 됐다. 문화정치기간에 창간된 동아일보사는 이 같은 남원지역의 뜨거운 자주독립의 정신을 기리고 순국선열들을 추모하기 위해 남원청년회의소와 이 비를 건립했다. 국가보훈처는 2002년 11월 이 기념비를 현충시설로 지정했다.

  • 기획
  • 최명국
  • 2019.03.13 20:55

[전북의 독립현장] 한강 이남 최초 만세운동 군산 3.5운동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의 독립이오하고 답했을 것이다. (백범 김구) 1919년 1월21일 고종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만주 지린의 2.1 무오독립선언재일 조선유학생을 중심으로 2.8독립선언이 있었다. 이런 움직임은 국민을 하나로 단합시켰고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종교인과 학생중심의 군산 3.5만세운동, 10여명이 3만명 되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니 서울평양의주선천원산진남포 등 7개 도시에서 만세운동이 동시에 일어났다. 3월 2일 함흥수안황주중화강서대동해주개성 등으로 확대됐으며 3월 3일 서울에서 치러진 고종황제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많은 국민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3월 5일 남대문역 광장에서 학생중심의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그 날 군산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군산 만세운동은 한강 이남 최초의 만세운동이다. 군산 3.5만세운동은 당시 구암동산에 위치한 군산영명학교(현 제일중고)를 졸업하고 학교장의 추천을 받아 서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재학중이었던 김병수 학생에 의해 시작됐다. 그가 민족 33인 중 이갑성 애국지사로부터 독립선언문 200여매를 전달받아 2월 26일 군산에 내려와 영명학교 은사인 박연세(구암교회 장로) 교사집에서 이두열김수영고석주김윤관김연묵이동욱문용기 등을 만나 서울의 독립운동을 은밀히 알리고 군산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는 것에 협의했다. 이후 박연세 교사는 같은 학교 교사들과 학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문 3500매와 태극기를 만들었고, 3월 6일 서래장날을 기점으로 거사를 준비했으나 5일 새벽 군산경찰서 일본인 경찰 10명이 무장하고 나타나 주모자인 박연세이두열김수영 등을 연행해 거사는 좌절될 위기에 놓였다. 이 같은 사태가 벌어지자 당시 표면에 드러나지 않게 활동하던 김윤실 교사는 학생간부들과 긴급회의를 열고 곧바로 시위를 열자고 결의했다. 당시 학생이던 양기철전세종김영후송기옥이도준홍천교고준명유복섭오한길간규언강인성 등이 앞장서 시위에 들어가니 같은 기독교 계통의 학교인 멜본딘(현 군산 영광중여고) 여학교의 학생도 합세했다. 또 시민 정문선김영상전종식문재봉홍종억전봉신박동근임종우이병관이 합세하며 그 수가 500여명으로 늘었다. 경찰서 앞에 이를 때는 1000여명으로 늘어나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하늘에 사무쳤다. 군산의 기미 3.5독립만세운동은 1903년 2월 미국 예수교 남장로회선교회에서 기독교선교를 목적으로 설립한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 교사학생궁멀 예수병원 사무원과 구암교회 성도 등 기독교인이 주축이 되어 시작됐다. 이어 천주교불교범종교와 시민도 합세했다. 민족의 자주독립을 외쳤던 3.1만세운동은 군산 구암동산에서 3월 5일 발원해 총 28회에 걸쳐 연인원 3만700여명이 참여했으며 사망자 53명실종 72명피해인원 195명이 발생했다. 군산의 3.5만세운동은 호남 최초한강 이남 최초의 거사이며 전북지역 최다수의 순국자가 발생한 만세운동으로 군산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 구암교회 건물을 3.1운동 역사공원으로 조성했다. 공원 안에는 100주년 기념관과 추모공원 등이 조성돼 있다. △일경의 제지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선 김제 원평장터 독립만세운동 당시 김제군에서도 3월 2일 이미 김제읍 천도교구실에 독립선언서가 도달됐다. 교구장 공문학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교인 김봉빈안백균 등을 통해 죽산부량 등 각 면에 배포하고 인근 고을에 전포했다. 3월 5일 군산옥구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크게 전개돼 김제군에서도 지사청년이 앞장서 연락망을 구축해 연락을 취했다. 3월 4일에는 김제역 대합실에서 독립선언서 20장 등이 발견되고, 6일에는 읍내에서 선언서가 산포되고 운동이 진행되는 듯 했으나 일본 경찰 등에 의해 무산됐고 경계는 더욱 삼엄해졌다. 그러나 도내에서 만세 함성이 매일같이 울려퍼지는 분위기 속 김제군도 잠잠하게 있을 수만은 없다고 판단해 3월 20일 오후 김제 동남단인 수류면 원평리 원평장터를 시작으로 만세운동을 벌였다. 수류면 구월리 청년 배세동은 13일 전주읍 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참가하고 돌아와 수류리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일찍이 결심하고 3월 16일 같은 마을 전도명전도근전부명이병섭김성수 등과 함께 모여 3월 20일 원평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결정했다. 배세동 등의 주요 인물들은 선언서태극기 제작 등을 준비했고, 이병섭 등은 각지의 동지를 규합하는 연락망을 가동하는 등 업무를 맡았다. 20일 오후 원평장터에서 전도근전부명 등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눠줬고 배세동은 9척(약 2m 70cm)이 넘는 긴대에 큰 태극기를 게양해 들고 나서 만국 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하고 손병희선생 등 33인이 나라의 독립을 선포하였으니 우리도 당당한 독립국민이 될 수 있도록 모두 함께 나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자고 외쳤다. 독립만세가 울려퍼지자 김대희 등 수백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따라 나섰다. 시장 곳곳에서 만세소리가 울려 퍼졌으나 감시하고 있던 일본 경찰의 무력에 군중은 해산되고 배세동 등 10여명이 잡혀가 6개월에서 1년의 강제형을 당했다. 4월 4일 만경장날에는 만경공립보통학교 훈도생도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임창무오연길장태석이석재 등은 일찍부터 독립정신을 동기생에게 전했고 익산군 오산면 애국지사 문용기 등과 비밀 연락을 취했다. 4일 정오께 임창무가 34학년 생도 모두를 교정에 불러 모아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니 우리도 동참해야 한다며 태극기를 들고 앞장서 독립만세를 부르니 100여명이 모두 대열에 합류해 독립만세를 부르며 뒤따랐다. 임창무의 만세대열이 시장에 나가자 수백명이 합세해 만세를 불렀다. 순찰 중이던 순사와 승강이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만세대열은 한참동안 시장을 돌며 진행됐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김제경찰서 무장대가 출동해 폭력을 행사하며 제지했고, 결국 대열은 해산되고 주동인물인 임창무 등이 붙잡혔다. 계속되는 독립만세운동은 더욱 강화되는 일본 경찰의 탄압에 의해 좌절됐다. 그러나 애국지사와 애국동포들의 독립염원구국의 활동은 계속됐다. 그 중 김제면의 조기렵김환김성택과 금구면의 송산선쌍감면의 조용철 등은 정읍의 이헌부안의 신헌황해도 활주의 김선복경남 거창의 임양재 등 독립투사들과 김제무주정읍목포 등 각지에서 동지를 모으고 애국 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는 등 활동을 하다 1920년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 기획
  • 박태랑
  • 2019.03.06 20:23

[전북의 독립현장] 전주 남문에서 만세 운동 울려 펴져

나는 대한 사람이다. 나라를 위해 독립만세를 부른 것도 죄가 된단 말인가(유관순 열사) 1919년 3월 1일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은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만세를 삼창함으로써 3.1독립만세운동의 불을 지폈다.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국내 뿐 아니라 대외적으로 알린 만세운동은 전국 주요 도시로 확산됐다. 3.1운동의 마중물로 재부각되는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로 꼽히는 전북 곳곳에서 일제에 맞서는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이에 전북일보는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광복회 전북지부와 함께 매주 한 차례에 걸쳐 도내 만세운동 근원지를 조명하고, 해당 자치단체의 기념사업 및 사적지 정비 계획을 소개한다. 두 번째 순서로 전주와 금산에서의 만세운동을 되짚어봤다. △채소가마니에 숨긴 태극기, 남문에서 만세 소리와 함께 펄럭이다. 1919년 3월 1일 전주군 천도교 교구실에서 은밀한 논의가 진행됐다. 서울에서 온 이종익으로부터 독립선언서 1000여장과 함께 서울에서의 상황이 전주로 전달됐다. 천도교구 배상근, 김진옥 등은 이러한 사실을 임실의 천도교 교구실과 익산, 이리, 함열, 김제, 옥구, 무주, 정읍, 태인, 순창, 고창, 금산, 부안 등 각 지방으로 전파했다. 또 교인 민영진, 김태경, 서호순 등을 통해 예수교회 측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는 등 교회 조직을 통해 만세운동을 도모했다. 쉽지 않았다. 일제는 종교 단체 관계자들에 대한 집중 감시를 벌였고 일부 인물들이 일경에 붙잡혀 운동이 시작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3월 13일. 전주 남문 일원에서 장날을 기해 대규모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신흥학교와 기전학교의 학생들은 학교 지하실 호롱불 밑에서 태극기 및 선언서 등을 준비하며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예정일인 13일 일경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채소가마니에 숨긴 태극기를 남문시장까지 옮겨왔다. 이날 정오께 남문에서 울린 인경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행동이 개시됐다. 천도교, 예수교인, 신흥학교 및 기전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150여명이 남문시장부터 태극기를 들고 일제히 대한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짖었다. 기전학교 여학생들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나눠줬다. 이명수는 태극기를 양손으로 흔들며 대한사람으로서 만세를 부르지 않는 사람은 반역자!라고 독려했다. 대열은 삽시간에 불어났다. 남문에서 공립제2보통학교, 대화정을 지나 대정정, 우편국 앞까지 행진했다. 거리는 태극기와 독립 만세의 물결로 넘쳐났다. 독립만세운동은 자정을 넘겨 다음 날 새벽 2시까지도 독립만세와 검거된 애국 동포 석방을 외치며 곳곳에서 계속됐다. 이날 전주 읍내에서 검거된 인원만 300여명에 이르렀다. 당시 한 시민은 일본 헌병이 휘두른 칼에 태극기를 움켜쥔 팔이 잘려나가자 다른 손으로 태극기를 집어 올렸다. 그 팔도 잘리자 입에 태극기를 물고 만세를 외치는 등 독립을 향한 열망은 막을 수 없었다. 일경이 총칼을 들고 막아섰지만 해산하지 않는 대열에 총을 발사하기도 했다. 이날을 기점으로 전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은 차츰 분산적이고 장기적인 운동으로 들어섰다. 일경은 군중을 향해 물을 끼얹고, 소방용 갈구리로 전진하는 대열을 마구 찍기도 했다. 거리에 만세운동이 벌어질 때마다 일경은 빨간 잉크를 참여자들에게 몰래 찍어 모조리 붙들어 가뒀다. 상황이 어렵게 전개되자 애국시민은 행동을 밤으로 옮겼다. 기전여학교의 김순실, 김나현 등 여학생과 도민은 도청 앞에서 대한독립 만세!. 구속한 애국동포를 석방하라고 외쳤다. 이렇게 이어진 만세운동으로 일경에 붙잡힌 인원은 300명이 넘었다. 붙잡힌 애국지사들은 일경의 갖은 고문을 받았지만 민족의 긍지와 의지를 굽히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법정투쟁을 전개했다. 전주시는 이를 기념하고자 지역 31운동 발상지인 남부시장 매곡교 인근에 31운동기념비 등을 조성했다. △도로공사 인부들까지 합세한 금산의 만세운동 1919년 3월 23일 금산면의 청년 김용술, 임승환은 만세운동을 계획한다. 이들은 방금 세계 강국은 단체적. 일진적 행동으로 인해 성립하게된다. 아 조선은 건국 4000여 년으로 문명의 자격과 인의의 인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강제정치하에서 신고하는 것은 안일, 우매의사상과 매국적자의 소치인 것이다. 동포 청년은 간교한 적자의 행동을 배우지 말고 인도를 주창하여 압박정치하에서의 금수생활을 면하고 독립적 자유활동을 해야 할 것이다. 이 정신을 가진 동포는 본일 오후 2시 우시장 상부에 집합하여 주동인물과 행동을 함께 할 것이다는 격문을 짓고 읍내의 장꾼들에게 배포한다. 읍내의 분위기가 무거워지고 요동쳤다. 김용술, 임승환이 20여명의 청년과 함께 대한민국독립만세를 외치자 주위의 수천 군중이 호응했다. 놀란 일경은 주동자인 김용술, 임승환을 체포하자 군중은 일시 해산했다. 25일 제원면 제원리의 청년 박영규는 23일에 있었던 읍내의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는 감연히 앞장설 것을 결심한다. 박영규는 집에서 한지에 크게 태극기를 그리고 한쪽에는 국문, 한문으로 대한독립만세라는 글귀를 쓴 큰 기를 들고 나와 종과 큰 북을 쳐서 사람들을 모아 만세를 외쳐 불렀다. 자유와 독립을 외치는 200여명의 대열은 승리를 구가하면서 마을을 돌고 돌았다. 다음날 오후에는 다시 도로 부역에서 돌아오는 주민들을 마을 앞에서 맞이하며 지금 한국은 독립하게 되었으니 일동은 다시 독립만세를 부르자 고 말한 뒤 만세를 불렀다. 28일 금산읍에서 또 한차례의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이른 아침부터 헌병들의 경계가 펼쳐졌다. 일경은 이날 오후 상점은 문을 닫고 노점과 행상들이 짐을 싸니 무사히 장날을 넘겼다는 안도감을 보였다. 하지만 돌아갈 차비를 하려는 것처럼 서성대던 수 백명의 군중은 돌연 태극기를 휘날리고 만세를 부르며 질서도 정연하게 행진을 했다. 당황한 일경은 공포탄을 발사해 해산을 시도했지만 대열은 무너지지 않았다. 며칠 후 3월 31일. 복수면 곡남리 주민 김영호. 정재열. 오연구 등은 곡남리 앞길에서 인근주민 들과 함께 도로를 수리하다가 인부들에게 각 지방의 만세운동 상황을 설명했다. 우리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만세운동을 하자고 제의하기도 했다. 이들이 대한 독립만세를 소리 높혀 부르고 앞장서니 같이 도로수선 공사에 나왔던 수영리의 주민 약 200여명이 대열에 합세했다. 도로공사를 감독하러 나왔던 일경은 이를 제지하려 했지만 김영호. 오연구 등은 이를 모른 체 환호성을 올리며 동분서주로 만세를 지휘했다. 얼마 후 진산면 헌병주재소에서 응원대가 급파됐다. 응원대의 출동으로 군중은 해산되고 김영호. 정재철 등 7명이 붙잡혔다. 하지만 만세운동은 야간을 이용해 혹은 산상에서 산발적으로 두고두고 계속됐다.

  • 기획
  • 최정규
  • 2019.02.27 20:09

[전북 대표 독립운동가 10인] "대한독립만세!" 목숨이 다하는 순간에도 뜨거운 외침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주기 위해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 (독립운동가 손병희) 1919년 3월 1일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은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만세를 삼창함으로써 3.1독립만세운동의 불을 지폈다.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국내 뿐 아니라 대외적으로 알린 만세운동은 전국 주요 도시로 확산됐다. 3.1운동의 마중물로 재부각되는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로 꼽히는 전북 곳곳에서 일제에 맞서는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이에 전북일보는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광복회 전북지부와 함께 매주 한 차례에 걸쳐 도내 만세운동 근원지를 조명하고, 해당 자치단체의 기념사업 및 사적지 정비 계획을 소개한다. 그 첫 순서로 도내 만세운동을 주도한 대표 독립운동가 10인의 행적을 되짚어 봤다. △3.1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박준승 임실 출신인 박준승(1866~1927년) 선생은 3.1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손병희 등과 함께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외쳤다. 1890년 동학에 입교한 그는 1892년 삼례에서 있었던 교조신원운동과 이듬해 김제 원평에서 열린 척왜양창의 운동을 위한 대집회에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03년 손병희의 일본 망명 후 전라도 책임을 맡아 박인호와 항일을 위한 포교에 매진했다. 3.1운동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에는 1926년 천도교 최고 예우직인 종법사에 추대됐다. △민족대표로 한국 불교 수호에 앞장선 백용성 백용성(장수1864~1940) 선생은 31독립만세운동의 민족 대표이자 어려운 불교 경전의 한글화를 처음으로 시도한 경전 번역인이었다. 31운동 당시 백용성은 한용운의 추천으로 민족 대표 33인이 됐다. 1919년 3월 1일에 백용성을 포함한 민족 대표들은 서울 종로의 태화관에서 민족 독립을 절규하는 만세삼창을 했다. 이 일로 구금돼 고초를 겪고 1921년 3월에 석방된 백용성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금강경>을 순 한글로 번역간행하는 일이었다. 이후 삼장역회를 설립해 수많은 경전을 한글로 번역간행했다. 1928년에 한글로 된 <화엄경>을 간행하는 기념비적인 일을 해냈다. △3.1운동의 정신적 지주 문용기 익산 출신인 문용기 선생(1878-1919)은 1919년 4월 4일 익산 장날에 일어난 31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박도현장경춘 등 기독교 계통의 인사들과 만나 31운동 계획을 세우고 장날을 맞아 300여 군중과 함께 거리를 행진했다. 일제가 시위 군중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자 문용기는 군중 앞으로 나가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 이때 장에 나왔던 많은 장꾼이 그의 탁월한 연설에 이끌려 시위에 참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헌병이 휘두른 총검에 찔려 두 팔을 잃고 온몸이 난자당한 채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그는 계속해서 독립 만세를 부르짖다가 순국했다. △자유를 꿈꾼 독립운동가 백정기 이봉창윤봉길과 함께 3의사로 불리는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인 백정기(부안1896~1934)는 국외에서 활발히 독립운동을 펼쳤다. 1923년 여름 일본 도쿄 조천 수력 발전소 공사장 노동자로 신분을 위장해 일왕 암살을 계획했다가 동경 대지진으로 실패하자 피난민 대열에 섞여 1924년 4월에 귀환했다. 같은 해 상하이로 넘어가 이회영, 정현섭, 유자명, 이을규, 이정규 등과 함께 재중국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했다. 1932년 상하이에서 자유혁명자연맹을 조직한 다음 흑색공포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조직을 강화해 대일투쟁을 전개했다 △독립에 향한 멈추지 않는 열정과 헌신을 보여준 정현섭 김제에서 태어난 정현섭(1896~1981) 선생은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으며 7월 미국의회사절단이 내한했을 당시 일본의 침략상을 알리는 활동을 하다가 일제의 추격을 받자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1930년에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조직하는 동시에 백범 김구와 함께 서간단을 결성했다. 당시 서간단은 친일파 숙청을 감행하는 등 본격적인 무력 항쟁을 도모했다. 1931년 1월에는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을 구성원으로 흑생공포단(BTP)을 조직해 일본 영사관과 병영에 폭탄을 던지는 등 무력 항쟁을 이어갔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참된 지성인 라용균 1918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재학 중이던 라용균(정읍1895~1984) 선생은 백관수, 김도연 등과 함께 대대적인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우고 2.8 독립 선언에 나섰다. 2.8 독립 선언에서 재정 분야의 책임자였던 그는 거사 뒤 관련자가 체포되자 신변에 위협을 느껴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후 상하이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돼 법제위원과 정무조사 특별위원 및 정치분과 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입법 활동과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국회에서는 백봉 라용균의 뜻을 기리기 위해 1999년부터 백봉 신사상을 제정해 매년 모범적인 의정 활동을 한 국회의원에게 이 상을 수여하고 있다. △민족의식의 계몽가 김승옥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더는 글방에서 책을 볼 수 없었던 김승옥(고창1889~1962)은 1916년 1월 은규선, 신기업 등 동지 혈서 동맹을 함께 주도한 이들과 고창청년회와 야학회를 조직해 민족의식을 키워 나갔다. 1919년 2월에 그는 고창청년회 동료들과 함께 고창 장날을 기해 만세 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했고 3월 21일 오전 11시 고창청년회 회원 및 학생 10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이후에도 고창청년회의 회장, 고창노동회 회장 및 노동학원장을 맡아 고창지역의 청년노동운동을 주도하는 등 민족사상의 고취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독립을 위한 투철한 희생정신 임규 익산 출신인 임규(1867-1948) 선생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에 가담했다. 이후 그는 189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게이오 의숙중학교 특별과와 게이오 전수학교 경제과에서 학문을 길렀다. 그는 1919년에 최남선, 최린, 현상윤 등과 함께 3.1운동을 계획하고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거사일 직전 일본으로 건너가 번역한 독립선언서와 통고문 등을 일본 정계와 학계, 언론계에 각각 배포했다. 1920년대 초에 보천교의 경성진정원 형평사장을 지내면서 보천교로부터 받은 5만 원을 라용균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한 목회자 김인전 김인전(1876-1923) 선생은 교회의 부흥을 위해 노력한 목사이자 교육 계몽운동가로 전주 3.1독립만세운동을 적극 후원했다. 전주의 3.1독립만세운동은 기독교와 천도교를 중심으로 진행됐는데, 그는 천도교 측과 연락해 만세운동에 참여할 교사와 학생들을 모아 3월 13일 정오 남문시장 광장을 중심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3.1독립만세운동의 배후자로 체포될 상황이 되자 그는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이후 임시정부 의정원의 재무예산위원, 정무조사위원 등을 거쳐 1922년에 제4대 의정원 의장으로 선출됐다. △임실 오수 독립만세운동의 지도자 이기송 이기송(1888~1939) 선생은 1919년 3월 23일 임실 둔남면 오수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오수리에서는 이미 3월 10일에 보통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돼 임실군 내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그러나 일본인 교장의 압력으로 더 이상 학생들의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이기송은 오병용이만의 등과 연락해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이날 장터에 모인 군중 앞에서 독립운동의 당위성에 대해 호소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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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명국
  • 2019.02.20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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