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 독립현장] 부안, 학생들까지 앞장선 만세시위...고창, 총·칼에도 굴하지 않는 청년들의 항거
나는 밥을 먹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잠을 자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해왔다. 이것은 나의 몸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도산 안창호
부안지역의 31운동은 3월 중순부터 4월까지 각 종교계와 청년, 학생 등을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조직적으로 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일본 순사들의 탄압에도 줄포보통 학생들까지 주도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는 등 4월 중순까지 부안 지역에 만세운동의 불을 지폈다.
고창도 고종황제의 국장을 기점으로 청년들과 학생들의 독립만세운동이 진행됐다. 특히 1919년 시작된 만세운동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1920년에 또다시 독립만세운동의 의지를 이어가는 등 고창의 만세운동은 구국의 혼을 불사른 성지로 평가된다. △부안 인근 지역 동지들까지 함께한 독립운동 불씨가 학생들에게로 1919년 31 만세운동이 시작된 후 부안군의 천도교인들은 이웃 고을인 정읍군의 천도교측과 긴밀한 연락을 취해 가며 30일 부안읍 장날에 기해 거사를 계획했다.
3월 중순경부터는 예수교측 및 일반 청년층과도 만나 부안군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했고 25일에는 실천단계로 들어갔다.
특히 부안군내의 청년 중 동진면의 은희송이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원래 일본의 순사보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각 지역에서 31운동이 일어남과 함께 자기의 지난날을 반성하며 뜻을 고쳐 독립운동에 힘을 바칠 것을 결심했다.
병을 이유로 순사보의 직을 그만둔 뒤 병을 치료한다는 것을 핑계 삼아 군내 및 정읍군 등지로 다니며 은희상 등 동지가 될 만한 사람들을 찾아 독립운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또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그는 3월 26일경 천도교 및 예수교측의 인사들과도 연락을 취하면서 3월 30일 부안읍 장날을 기하여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예수교측에서는 전도 교인들을 통하여 전도를 가장해 각 면동을 순회하면서 만세운동에 가담할 것을 권유하고 은희송 등 청년들은 태극기와 선언서를 준비해 배부했다.
하지만 이를 눈치 챈 일본은 경계를 삼엄하게 해 운동의 전개를 어렵게 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30일 오후 8시께 부안읍 뒷산에 만세운동을 알리는 봉화가 타오르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독립만세를 외치는 함성이 일기 시작했다.
봉화는 빠르게 산을 옮겨가며 번져 갔고 이에 따라 만세 함성도 부안읍 전체에 차례차례 울려 퍼졌다.
4월 7~8일에는 줄포에서 공립보통학교 3~4학년 생도들을 중심으로 학교 교정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려 계획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당시 만세시위를 주동했던 김태순, 박기봉, 김동섭, 이병근, 박병섭 등은 4월 18일 줄포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이들은 태극기를 비밀리 제작해 18일 아침 보안면사무소 게시판과 큰길가 소나무 등에 매달았다.
오전 11시 수업시간이 끝나자 이들은 시장으로 달려가 태극기를 장사꾼들에게 나누어 주며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주변에 경계를 하고 있던 줄포경찰서 순사들이 이들을 제지했고, 주동 학생 중 4년생 김태순, 김동섭, 서용순, 이병근, 박병섭, 이병갑 등이 체포되었다가 학교장과 부모들에 의해 석방되었다.
하지만 그날 밤 10시, 학생들과 주민들은 인근 부락에서 봉화시위와 독립만세를 외치는 행진 등 만세운동의 불씨를 이어갔다. △무장면의 만세운동 횃불 고창 전역으로 무장면 광산 김씨 후예 김영완은 고종황제의 국장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상경했다.
이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의 시위행렬에 참가한 그는 독립선언문 등 유인물을 가지고 무장으로 내려와서 친족 김용표, 김상수, 친우 이용욱, 이준구, 김진호, 박흥선, 오태근, 박흥수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결행하기로 했다.
3월 15일 무장 장날을 이용해 거사를 단행하기로 한 이들은 장꾼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
오전 10시가 되자 이용욱, 김용표 등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주고, 김영완은 군중들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해 대열을 남산으로 이끌며, 그곳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들은 태극기를 높이 들고 선두에 서서 군중을 지휘하며 무장면 네거리로 행진하며 선언문을 살포하고 남문을 지나 면사무소와 주재소 앞으로 나가며 수백 명 군중과 함께 행진했다.
얼마 후 고창에서 증원된 수십 명의 일본경찰 병력이 총칼로 강압해 시위군중을 해산하였고, 끝까지 항거한 주동자 김영완, 김용우, 김두남, 김영해 등은 현장에서 검거됐다.
다른 주동자들도 다음날 모두 검거돼 고창경찰서로 압송된 후 갖은 고문을 당하고 정읍 재판소로 옮겨져 형을 받았다.
김영완은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어 복역하다가 혹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그해 11월 5일에 옥사했다.
3월 21일에는 고창읍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인 김승옥, 오동균, 김창규 등과 청년들이 결성한 고창청년회원은 조직, 공작, 연락동원에 이르는 계획을 은밀하게 준비했다.
21일 오전 1시 청년회원들과 고창보통학교의 일부학생 등 100여명이 모양성에 올라가 손에 태극기를 들고 회동했다.
김승옥이 나서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선동연설을 하였으며 오동균은 선언문과 독립가 등을 배포해 군중들의 궐기를 호소했다.
이에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 시내로 내려와 시장거리를 통과, 시가지를 누비며 시위행진을 했다.
도중에 일본경찰의 저지를 받게 된 군중은 군청으로 이동했지만 총을 쏘며 달려온 경찰의 폭압으로 강제 해산 당하기도 했다.
현장에 앞장섰던 행동대원 김명만이 먼저 잡히고 이어 김승옥, 오동균, 김창규 등 10명이 체포되었다.
고창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형을 선고받은 김승옥, 오동균 등은 그해 8월에 서울에 있는 고등법원에 상고하며 조선사람으로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것은 조선사람의 본분이다며 이것이 불의의 일도 불량한 일도 아닌데 어째서 처벌하느냐고 항쟁했지만 모두 기각 당했다.
이후 3월 28일에는 흥덕면에서 애국청년들과 학생들의 만세 시위가 진행됐고 다음해인 1920년 3월에는 성내면 월산리에 거주하는 청년 이종철과 학생 이대성, 이종주, 유판술 등이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만세운동을 결의하고 독립선언문의 등사 취지문 작성준비를 하는 등 독립을 향한 만세운동의 불씨를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