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4-12-13 11:52 (Fri)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오피니언 chevron_right 문화마주보기

버금의 반란을 꿈꾸며

흔히 전라북도는 예향으로 일컬어진다. 그것은 이 땅에 거주하고 있는 예술인들의 자존감과 자긍심을 세워주는 무형의 지표이자 도민들의 정신적 버팀목으로 작용해 왔다. 특히 제주까지 포함한 호남을 호령하던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는 활발한 교류, 좌로는 평야를, 우로는 산지를 거느려 그 풍성한 산물의 집산지인지라 자연스럽게 문화의 꽃이 활짝 피어났던 곳이었다. 거기에 주위의 여러 시·군에서 인재들이 모여들어 전주문화에 기여했으니 가히 비교의 대상이 없던 말 그대로 온전한 고장이었던 것이다. 그 풍요는 학문과 여유를 낳고 가무를 낳아 예향의 명성을 획득하기에 이른다. 그런 이 땅에 살고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고 특히 예술인으로 사는 것은 더욱 고마운 일이라 생각한다.물론 과거의 풍요가 이제는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줄 정도로 쇠락했지만 곳곳에 남아있는 유무형의 흔적이 그를 위안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 함정이 입을 벌리고 있다.요즈음은 세상의 흐름이 매우 빨라 트렌드로 자리한 것에 겨우 편승하고 눈을 들어보면 이미 다른 시도가 과정을 밟아가고 있고 그 과정은 다시 결과를 내놓으며 또 다른 새로움을 노리는 시절이다. 그러면 대개는 열심히 좇던 걸음을 멈추며 그 정도면 내 능력 안에서 충분히 노력했다하고 안주하기 십상이다. 물질적 풍요와 찬연한 유산들이 오히려 우리를 가두어 버리고 머물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는 순간이다. 보다 척박한 환경에서 강자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으려 몸부림치는 서울 쪽의 태도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절대 강자가 없는 환경 속에서, 그런대로 괜찮은 능력으로도 으뜸이 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버금들을 비웃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사전적적인 의미로 으뜸이란 사물의 중요한 정도로 보았을 때, 첫째나 우두머리를 뜻하고 버금은 등급이나 수준, 차례 따위에서 으뜸의 바로 다음을 뜻한다. 한강 이남에서 최고, 지역에서 최고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을 자주 접한다. 그것으로 족하다는 이야기이거나 서울은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여기는 자기한계의 노정이라고 보여 진다. 물론 예술 뿐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각 지역에서 가장 우수한 인자들이 모여든 서울에서 무한 경쟁을 펼치고 훨씬 더 넓고 많은 창구를 확보하고 있는 그들과 정면승부 한다는 것은 힘들고 버거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라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모든 것이 따라잡기에 나서도 그냥 있어야 하는 것이 순수학문이고 기초예술이다'라는 논리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게으름과 안이함이 우리 주위를 감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고, 새로움에 대한 적응이 더딘지라 고집하고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주판을 유일한 계산기로 여겨 전국대회까지 있었던 시절에 초기 출시된 전자계산기는 천덕꾸러기였다. 컴퓨터가 보급되어 서울 쪽에서는 이미 상용단계에 이르렀는데도 '손맛이 안 나서, 정서가 메마를까 봐'를 외치며 수기를 고집했던 일이 생각해보면 불과 10여 년 전의 일이다. 단지 수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인지하고 있지 못해도 우리가 배웠고 거느렸던 시절보다 변화의 페이지는 정말 빠르게 넘어가고 있다. 우리의 망설임이 자칫 으뜸자리에서 더욱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으니 단순한 열심이나 자만에 빠져있지 말고 으뜸을 연구하고 다소 부실한 환경이지만 그것을 넘어설 시도를 즐기고 그 태도를 견지해 나가야할 것이다.물론 이 시기에도 원형의 보존이나 스승의 가르침을 의문 없이 받아들이고 다시 후배들에게 전수하는 사람은 있어야한다. 하지만 계승과 함께 이미 충분한 여러 예술적 자양분이 새로운 움직임과 간혹 마주서고 얽히게도 하여 예향전북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의 특질로 인정받는다면 그것으로 단순히 으뜸을 넘어서는 정도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견인하는 지위까지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이유로 망설임 속에 있는 전북의 예술혼들이 보다 원대한 꿈을 가지고 으뜸을 넘어서는 버금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기 바란다.△ 조 회장은 (사)한국연극협회 이사와 익산 서동축제 총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7.16 23:02

유네스코 등재 우리문화 이야기

"문화융성", 새롭게 들어선 이번 정부의 국정기조 중 하나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문화'를 국정 운영의 전면에 내세우며 추진한 정부가 있었나 생각해본다. 이렇게 문화가 중요시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사회는 과거 산업혁명을 거치며 단순히 상품 생산을 중심으로 한 '생산'을 넘어 이러한 결과물들이 한 데 섞이고 상생하며 또 다른 가치를 만들어 내는 '융합'의 시대이다. 그리고 그 융합의 현상을 이끌며 가치 추구의 중심에 서있는 것이 바로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문화'라는 것은 무엇일까? 궁극적인 질문이다. 사전을 찾아본다.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삶을 풍요롭고, 편리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가고자 사회 구성원에 의해 습득, 공유, 전달이 되는 행동 양식"이라고 적고 있다. 즉, 의식주 해결의 문제를 넘어 사람이 보다 아름답고 풍요롭게 살고 싶어 하는 기본적인 '욕구'의 고급스러운 표출이 바로 '문화'인 것이다. 문화는 인간으로 하여금 다양한 행동을 하게 하는 원동력을 제공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경제활동이다. 인간은 '문화적 욕구'를 해소하고 싶어 하며 이를 위해 사람들은 경제적 투자와 소비를 이어가며 이는 다시 새로운 투자를 만들어 내고 새로운 문화현상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얼마전 타계한 미국의 IT천재이자 혁신의 상징인 "스티브 잡스(Steven Paul Jobs, 1955~2011)"는 아이팟과 아이폰으로 대변되는 첨단 스마트기기를 선보이며 전세계인을 IT 기술이 만들어 내는 마법과 환상속의 세계를 직접 현실에서 경험하게 하였다. 또한 본인은 혁신과 IT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하며 폐업 직전까지 몰렸던 자신의 기업 애플을 세계 최고의 브랜드가치를 지닌 기업으로 올려놓은 것은 물론, 미국과 세계 IT 업계에 새로운 경제 시장을 제시하며 활력을 불어 넣었다. 이렇게 스티브잡스가 신선한 문화적 충격을 주며 전세계인을 열광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보통 그를 기업가나 엔지니어로 생각하지만 정작 본인은 디자이너로 불리우기를 원했는데, 이를 반영하듯 그가 만들어낸 제품들은 하나 같이 시대를 뛰어 넘는 탁월한 디자인을 갖고 있다. 여기에 실용적이면서도 안정적인 제품 성능과 사용자들의 수요(Needs)를 미리 예측·선도하고, 혁신적인 상상력과 아이디로 첨단기술을 융합하고 이를 최적화 시키는 탁월한 능력이 바로 전세계인이 그를 연호하게 하였던 이유다. 바로 여기에 답이 있다. 즉, 스티브잡스는 인간이 원하는 고급스러운 '욕구'를 해소해줄 수 있는 '문화'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혁신적 사고로 융합해냈고 이를 결과물로 만들어 소비자에게 제공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정확하게 문화현상을 이해하고 진단하며,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대응을 취할 때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부가가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능력은 단순히 경제적 이득을 넘어 개인의 능력과 국가의 국격을 평가할 수 있는 중요한 가치수단 중 하나가 되는 것이며, 이러한 문화를 선도하고 이끌어 나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또는 어느 국가인지가 다가올 미래의 선도 주자가 되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것이다. 이에 필자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담아 본 지면을 통해 5회에 걸쳐 독자들과 함께 UNESCO 지정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세계인들과 함께 보존하고 공유하여야 할 유산으로 인정 받은 우리의 전통예술 콘텐츠 살펴보고,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의의와 가치, 그리고 그 속에 녹아 있는 우리의 '문화'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 정 원장은 국립국악고, 서울대 음대 국악과를 졸업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종묘제례악) 이수자로 국립남도국악원·국립부산국악원·국립민속국악원 장악과장을 역임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7.09 23:02

다시 '사무사(思無邪)'를 생각함

시가 무엇인지,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를 설명하는데 인용되는 고전적인 문구가 있다. "시삼백 일언이폐지왈 사무사(詩三百 一言以蔽之曰 思無邪)"가 그것이다.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으로, "시경 삼백 편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생각함에 간사함이 없다는 것이다."로 번역될 수 있겠다. 주로 정치를 논하는 위정편에서 이 말을 한 것으로 보아 위정자들에게 시에서 추구하고 있는 '사특함이 없는 경지'를 언급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올바른 시 정신을 참구할 때도 회자되는 구절이다.이 구절을 두고 뒷날 많은 성현들이, '시 자체가 그러한(사무사) 것이다, 시를 쓰는 시인의 마음이 그래야 한다, 시를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러해야 한다.' 등 여러 가지 해석을 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하나의 해석이 옳다고 말하기보다 이 세 가지를 다 포함하는 말이라고 보면 되지 싶다. 시를 쓰는 일과 그 결과물과 그것을 바라보는 눈이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80년대가 지나고 '시의 시대는 갔다.'고 시의 위기를 말하던 때가 있었다. 이는 일면 옳고 일면 잘못 진단한 말이다. 인터넷 매체의 보급과 함께, 또한 문예지의 전성시대를 맞이하여 시는 오히려 양적인 면에서 어느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성장, 확산되고 있다. 시인 지망생들은 중장년 혹은 노년층까지 다양하고 등단 시인이 아니더라도 블로그나 인터넷 카페에서 시인의 이름으로 왕성하게 창작활동을 하고 있음도 보게 된다. 수많은 문학 동호회 활동도 왕성하다. 문학 가운데에서도 특히 시는 일대 부흥기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동호인끼리 만든 조그만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해도 시인으로 호칭하며 시집도 내고 무슨 문학상도 주고받고 하는 걸 보면 이제 우리나라는 가히 시의 나라라 해도 손색이 없다. 좋은 일이다. 온 국민이 시인이라고 해서 나쁠 게 무엇인가? 그러나 그 안을 들여다보면 또 개탄할 일이 적지 않다. 옛사람들은 마음의 사특함을 몰아내고 인격을 도야하려는 마음에서 서 · 화와 함께 시를 수양의 기본 덕목으로 삼았다. 앞서 인용한 '사무사'의 경지를 시로써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생애의 어느 대목에 이르러 뒷날에 남을 가편을 쓰기도 하는데, 요즈음은 이러한 시정신은 돌아볼 틈 없이 오로지 시인의 이름을 얻고자 시를 학습하고 시를 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름이 좀 있다하는 시인에게 첨삭지도를 받고 그렇게 해서 조립한 작품을 연줄이 닿는 문예지에 싣고 등단을 거치는 예가 적지 않다고 들었다. 그 사이에 금품이 오고가는 사례도 없지 않다 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시의 시대는 갔고 시는 위기가 아닐 수 없다.시인은 벼슬이 아니다. 등단은 면허증이 아니다. 명함에 시인 아무개라고 박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한 페이지가 넘도록 약력을 채워 쓰는 게 중요하지 않다. 허욕과 허장성세는 사무사의 시정신과는 너무 먼 거리에 있다. 시인은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다. 온 인격과 영혼을 쏟아 부어서 이루어내야 할 것이 시이다. 시인이라는 허명을 얻기보다는 제대로 된 독자, 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한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다. 이 말은 물론 이름을 크게 얻은 시인에게도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시인 그 이름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이 참다운 시정신일 것이므로. △ 복 회장은 계간 '시와 시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마늘촛불' '따뜻한 외면' 등이 있다. 현재 남원 금지중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7.02 23:02

기본이 없는 나라, 기초가 없는 지역

세종대의 일이다. 세종은 자신의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에 대해서 사관들이 어떻게 기록했는지 궁금했고, 편찬이 끝난 태종실록을 보고 싶어서 사관들에게 가져오라 명하였다. 당시 좌의정이었던 맹사성 등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이를 보신다면 후세의 임금이 반드시 이를 본받아서 고칠 것이며, 사관(史官) 또한 군왕이 볼 것을 의심하여 그 사실을 반드시 다 기록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그 진실함을 전하겠습니까."라 하니 세종은 실록 열람을 그만 두었다. 세종 13년(1431)의 일이다. 실록은 비밀기록이었고, 함부로 열람할 수 없는 역사였던 것이다. 최근 국정원의 고 노무현대통령 NLL대화록 열람허가와 국회의원들의 내용 공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행위이다. 정치적 의도로 채색된 논란의 핵심은 법을 만든 자들이 법을 어겼다는 점이다. 대화 내용의 진위에 앞서 여당 국회의원들은 일단 보안각서를 휴지조각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불감증이다. 기본이 되어 있지 않다. 국정원의 대화록이 대통령기록인가 아닌가를 떠나서 최소한의 법률이 규정하고 있는 공개금지 조차도 당리당략에 의해 아무렇지 않게 발설해버리는 기본이 없는 행위이다. 대통령기록은 역사의 평가에 맡겨야 한다. 정치적 상관관계가 얽힌 사람들에 의해서 이용될 수 없는 신성한 역사 기록인 것이다. 맹사성의 말처럼, 자신의 행위가 곧 바로 정치사냥꾼들의 먹잇감이 된다면 누가 진실을 기록할 것인가? NLL의 대화 내용보다 이런 일련의 정치적 행위들이 진실을 더 감추게 될 것이라는 점이 더 무서운 것이다. 대통령기록이 보호받아야 하는 기본적인 이유인 것이다. 기본이 반듯해야 뭘 해도 잘할 수 있다. 기본이 없는 나라는 언젠가 망할 수밖에 없다. 법이 중요한 것은 법이 바로 사람들이 합의한 최소한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합의가 기본이라면 기초는 사회적 합의 하에 이루는 학습이다. 기본이 튼튼해도 기초가 약하면 발전하기 어렵다. 기초는 기본을 사회적으로 실현하는 것인 셈이다. 세금낭비라는 비판은 기초가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기초가 잘못되면 반듯한 집을 지을 수는 없다. 기초가 없이 일을 벌이면 뭘 해야 할지 모른다. 국가정책으로 시행된 많은 일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아직도 국가시책을 생각하면 먼저 떠올리는 것이 하드웨어이다. 몇백억짜리 건물을 짓거나, 도로를 내는 데만 집중한다. 4대강 사업이 대표적이다.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할 학문분야의 예산은 4대강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원전의 비리도 마찬가지이다. 기본과 기초를 갖추진 못한 인재들의 쌈짓돈이 된 것이다. 국민의 안전에 대한 불감증이다. 집을 짓긴 지었지만 뭘 해야 할 지 모르는 대표적인 건물 한국전통문화전당이다. 17회 한지문화축제가 이곳에서 열렸는데, 무슨 건물인지 아는 사람을 없었다. 한스타일진흥원으로 세워진 건물, 지금은 한국전통문화전당이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건물, 기초가 없기 때문이다. 전통문화의 도시, 가장 한국적인 도시 전주가 가지고 있는 현실이다. 전통문화도시의 이름은 얻었지만 전통문화에 대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지, 무엇을 드러내야 하는지, 누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가르쳐야 하는지 통 알 수 없다. 뭔가 있을 것 같은데 뭔지 알 수 없는 참으로 복잡한 도시가 되는 것은 아닌지. 전라감영 복원문제가 지지부진 한 것만큼 갑갑할 노릇이다. 기본 없는 나라처럼 기초 없는 지역이 누군가의 불순한 의도에서 재생산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이라도 시작해야 할 것이다. 튼튼한 기초를 쌓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이지 살피고, 곧바로 실천에 옮겨야 할 때이다. 정치가 문화에 우선할 수 없고, 문화는 사람에 우선할 수 없다. 사람이 사람다운 세상을 만들고, '백성들이 곧 하늘이다.'라는 조선시대 국왕들의 정치 철학은 이 사회에 가장 기본이 되고 기초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해 준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6.25 23:02

문화예술의 꽃 문화인력들의 불편한 진실

사람은 문화를 이루며 산다. 그 가운데 문화예술 활동은 삶의 질을 높인다. 일상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켜 행복한 삶을 이끌기 때문이다. 지금 문화예술은 정신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경제 발전도 이끄는 시대가 되었다. 최근 한옥마을이 북새통을 이루고 경제도 좋아진 것은 그곳에 문화예술이 밑받침하고 있어서이다. 지역의 문화예술 현장 한 가운데에는 문화인력들이 있다. 문화예술 현장은 창작현장을 비롯하여 문예회관, 박물관, 문학관, 도서관, 미술관, 문화의집과 같은 시설은 물론 축제, 체험, 교육 등이 이루어지는 우리사회 곳곳이다. 이곳에서 이들은 지역문화 환경을 토대로 창조하고, 가꾸는 역할을 한다. 만약 문화예술 현장에 이들이 없다면 문화예술은 생산할 수도, 매개할 수도, 향유할 수도 없게 된다. 실제로 문화인력은 겉은 화려해 보이지만 낮은 임금과 근무환경에 처해있다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문화인력들은 서로 임금을 묻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불편한 문화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이들의 불편한 진실을 사회가 모르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학계에서는 지난 2007년도 문화인력 노동실태조사를 보고한 바가 있다. 이 과정에 문화시설 인력들이 높은 학력과 근무활동의 만족도를 보이는데도 실질임금은 턱없이 낮다는 사실을 밝혔다. 당시 발표책임자는 문화인력의 임금이 10급 공무원 임금의 기준에도 잡히지 않는다고 하며 시급한 개선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더불어 우리사회에서 직업군으로도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문화인력들에게는 보험가입이나 자신의 직업을 공적으로 제출해야 할 때 경험한 경우가 있는 일이지만, 생활에서 불편을 가지지 않는 내용이라고 생각들을 했다. 그러나 이것은 표준산업분류로 포괄하지 못함으로써 체계적인 분석의 자료기준도 되지 못하는 유령과도 같다는 불편한 진실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2012년도 같은 문제로 임금을 비롯한 노동실태를 조사한 보고가 있었으나 내용의 변화는 크지 않았다.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날 토론회 자리에는 발표자와 토론자만 참석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그간 문화예술이 가시적으로 활성화되어 문화인력은 물론, 문화예술인들의 활동 가치를 인지하는 관계기관의 관심도 많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변하지 않은 환경에 살아온 문화인력들이 발표회 자리에서 또 다시 임금으로 불편한 진실을 밝히는 아픔을 느끼거나, 문화예술현장의 기쁨마저도 앗아가는 '갑'의 눈초리를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2013년 가족을 이루고, 전문가로서 문화시설에 근무하고 있는 40대 박사급의 문화인력이 가까이 있다. 이들은 경제활동이 어렵고 직업군에 속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을 감추고 살고 있다. 그래서 문화인력의 이름을 버리고 떠나는 이도 있고, 작은 자리라도 후배에게 건네주고 활동을 접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도 오늘 문화인력들은 현장에 있다. 그리고 가치지향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소박하게 작고 실질적인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처지에 있는 또 다른 동료들을 보며 견뎌내기도 한다. 문화예술 현장에서 창조활동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유일하게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 그나마 최근 통과된, 예술인 복지법이 있지만 문화인력 전반을 포괄하지도 않고, 실질적인 내용이 적어서 예술인들들 조차도 관심 밖에 있다. 문화인력은 지역문화예술의 생산자로서 또는 매개자들로서 사회 곳곳에서 지역문화의 가치를 빛내고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는 실질적인 존재들이다. 따라서 우리사회가 이들의 가치를 인정하고 더 나은 환경을 만든다면, 우리지역은 문화예술이 꽃피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약속할 수 있다. 지금 문화인력의 불편한 진실을 담아주는 참된 사회가 요구된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6.18 23:02

배려하는 문화

최근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 "한국에 일베가 있다면, 일본에는 재특회가 있다. 극우 청년, 그들의 절망과 증오의 뿌리를 찾아 나선 탐사 르포"라는 매우 자극적인 문구와 사진이 커버에 실려 있는 책으로, 야스다 고이치의 『거리로 나선 넷우익, 2013』이다. 재특회는 '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으로 2007년에 설립되었다. 조선학교 무상교육 반대, 외국 국적 주민에 대한 생활보호 지원금 지급 반대, 불법 입국자 추방, 핵무장 추진 등의 목표를 표방하고 있으며, 설립 후 4년 만에 34개 지부, 1만여명의 회원을 거느린 일본 최대 조직으로 성장했다. 이 조직은 회비 없이 클릭한번으로 가입이 가능한 메일회원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회원들 대부분이 실명이 아닌 닉네임을 사용하고 철저한 비밀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의 시위는 저급한 욕설과 무식한 폭력으로 일관되며 이런 행동을 실시간으로 인터넷으로 생중계하여 격렬한 찬반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현재 이들은 한류드라마를 방송한다는 이유로 보수 방송국인 후지TV를 비난하고 있으며, 원전 시설을 유지하고, 핵무장을 통해 일본을 지키자라는 원색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재특회로 대표되는 넷우익은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애국?반조선?반중국?반좌익 등을 호소하는 극렬보수단체로 1990년 이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넷우익의 반한 감정이 확대된 계기가 2002년 한일월드컵 기간에 비친 한국인의 응원모습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사이버공간상에서만 활동하다가 '50만 재일코리안에 의해 1억 2천만 일본인이 위협받고 있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며 거리로 뛰쳐나와 애국을 외치고 있다.프리랜서 기자인 야스다 고이치는 이들을 1년 반 동안 밀착 취재하면서 느낀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대부분 근거가 없으며 논리성을 결여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을 통해 무분별하게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재특회 회원들의 본모습은 매우 평범하고 순박한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집회에 나가기만 하면 과격한 인종주의자로 돌변한다는 점, 가족과 개인의 신상이 노출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할 만큼 이들은 사이버 공간의 익명성속에 숨고자 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저자는 그들의 폭주가 그들 사회 내부에 숨어 있는 증오와 폭력이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맘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적으로 몰아 무차별로 공격을 한다는 점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런 재특회가 비단 일본에만 있는 것일까? 사이버공간상에서 익명성을 보장받는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언어폭력이 행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우리 아이들 또한 스마트한 세상에 살면서 상대를 배려하고 이해하기 보다는 저열한 표현과 욕설을 통해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정보는 넘쳐 나는데 진실과 거짓을 가리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수용하여 타자를 비판하는 안타까운 현상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우리안에 내재된 폭력이 폭주하지 않도록 조금만 더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기를 바란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6.11 23:02

아는 만큼 보이는 우리 문화

이번 학기에 교양 강의를 진행하면서 수강하는 학생들에게 각자 자신이 사는 지역의 전통 문화 공간을 찾아 둘러보고 답사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했다. 아직 마감일이 지나지 않았지만 수강생의 70% 정도가 착실히 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한 상태이다. 한국 사상, 특히 우리의 전통 사상을 수강하면서 배운 내용을 참고해서 지역의 문화재를 자세히 확인하고, 몸으로 체험한 내용을 정리해서 제출한 수강생들의 보고서를 일일이 확인하면서 새삼 '우리 문화,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특히 수강생들이 제출한 보고서 말미에 적힌 지역 문화에 대한 애정 어린 감상은 이 말을 더욱 생각하게 하였다.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머리말에서 인용하여 인구에 회자(膾炙)되었던 조선 정조 때의 문장가 유한준(兪漢雋)은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라고 하였다. 당대의 수장가였던 김광국(金光國)이라는 사람이 여러 그림을 모아 엮은 화첩에 발문을 쓰면서 언급한 이 글귀는 우리 문화에 대한 애호 정신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리고 이 글귀에서 지역 문화에 대한 지금의 지향점을 발견하게 된다.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진부하기까지 한 지역 문화에 대한 관심과 애호는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그리고 지역 문화를 통해 지역민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전승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유한준의 언급에서 읽어낸 코드는 무엇보다 지역 문화에 대한 애정, 그리고 주체적인 문화에 대한 앎으로부터 출발하여 지역민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그 내용을 확산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아는 만큼 보인다고 해서 날카로운 지성의 학술적인 글만이 지역 문화 이해에 도움이 되는 유일한 통로는 아닐 것이다. 작은 석탑에 조각된 조그마한 부조에 얽힌 지역민의 삶의 이야기가 지역 문화를 다시 보게 하고, 그 깊이를 더하게 하여 가슴에 와닿기 때문이다. 알아야 한다고 해서 그저 사실적 비판적 기술에 의지해서는 문화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없고, 지역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으로 연결되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 최근 전국 각지에서 지역학의 중심 내용으로 관심을 쏟고 있는 내 고장 스토리의 발굴과 확산은 의미가 깊다. 특히 스토리텔러 양성을 통해 지역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마을 공동체를 회복하는 데 앞장 서는 것은 지역 문화 발전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현재 인천의 한 지역에서 진행하고 있는 스토리텔러 양성과정에서는 실제 살고 있는 지역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어 지역 주민들의 호응도가 높이고 있으며, 삶의 터전인 지역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인식을 심어주고 있다. 역사가 담긴 장소를 직접 방문하여 관련 지식을 습득하고, 자기들만의 강의안을 만들어 온라인 커뮤니티에 공유하는 등 열정적인 강의를 펼치고 있다. 타 지역에서 펼쳐지는 이러한 움직임은 지역민에게 전하는 이야기의 생산자가 단순한 이야기의 전달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는 이야기, 나아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꿈과 희망을 디자인하는 창조자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우리 지역에서도 다양한 지역문화 프로그램이 진행되어 왔다. 그리고 그 성과 또한 적지 않다. 하지만 앞으로 지향해야 방향은 무엇보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문화를 찾고 가꾸고 만드는 문화 창조자가 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아는 만큼 보이지만, 우리 주변에 전승된 지역 문화와 얽힌 이야기와 내용도 찾고, 현재의 문화로 가꾸고, 미래의 문화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문화의 소비자로만 머물지 않고 생산자의 위치에 서게 되지 않을까 한다. 낯선 지역 문화가 살갑게 우리의 곁에 오게 하는 길을 찾을 때이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6.04 23:02

어진박물관, 세계 50대 박물관으로

한옥마을은 여전히 유효할까? 경기전 유료화를 둘러싼 논쟁이 무색하리만큼 여전히 한옥마을과 경기전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질 않고 있다. 관광객 하나만 놓고 본다면 한옥마을이 어디까지 갈까를 걱정해야지 무슨 우려가 필요하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위기가 곧 기회일 수 있다면, 호황은 곧 위기일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연일 발뒤꿈치가 밟힐 정도로 사람들이 오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그만큼은 아니어도 조금씩 혹 불리듯 불어나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이러한 징조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있다.콘텐츠에 대한 지적이 있다. 물론 이제 두 번째이니 섣부른 판단일 수 있지만 한옥마을과 유료화한 경기전 내의 콘텐츠에 대한 고민이다. 현재 경기전 내에서는 왕실의상체험, 전례 및 수문장체험, 탁본, 왕실 가마타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고 관람객들 호응도 뜨겁다. 콘텐츠를 우려하는 사람들의 지적은 프로그램이 잘 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기대만큼 만족스럽지는 않다는 평가일 것이다. 이들 체험프로그램은 경기전만의 것은 아니다. 다른 지역에서도 해 볼 수 있는 체험이니, 언제든 식을 수 있을 것이라는 바쁜 마음의 지적인 것이다. 분명 특화된 체험프로그램의 개발은 필요하다. 직접 체험 이외에도 보고 공부할 수 있는 체험도 구상했던 대로 시행할 필요가 있다. 경기전과 한옥마을 내, 빼놓을 수 없는 시설은 어진박물관이다. 유일본인 태조어진과 어진을 봉안할 때 사용했던 장엄구들을 모셔놓은 어진박물관은 어진훼손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불가피하게 만들어진 박물관이지만 5백만 명이 넘는 한옥마을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담보해 낼 수 있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경기전 내의 체험프로그램과는 달리 어진박물관은 경기전의 역사문화유산을 온존히 담아내고 있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콘텐츠의 핵심일 수 있다. 2012년 어진박물관 관람객 수가 50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이는 2010년 기준을 볼 때 세계 박물관 중 96위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2011년 3,239,549명으로 9위에 올랐고, 국립민속박물관은 2,355,956명으로 16위를 차지했다. 1백만명을 넘기면 세게 50대 박물관에 들어갈 수 있다. 그야말로 세계적인 콘텐츠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쳐야 할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첫째, 어진박물관의 컨셉을 확장해야 한다. 현재 어진박물관은 태조어진과 이안 장엄구가 중심이다. 이를 왕실의 기록문화와 왕실의례로 넓힐 필요가 있다. 전주사고에 보관했던 조선왕조실록의 복본이 이미 제작되었고, 조선후기 실록도 복본 중에 있다. 이들 국가기록의 보존소로서의 기능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대산사고 전시관 건립이 추진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적극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제례 역시 콘텐츠로서 강화할 필요가 있다. 국가의 기강을 세우는 것은 그 근본을 바로 세우는 것이었으니,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찾는 것이 곧 국가의 근본이었던 세상이었다. 전시실로 쫓기 듯 들어간 반차도 인형도 선점할 수 있는 좋은 콘텐츠이다. 반차도 인형에 대한 호응도가 유물을 넘어설 정도이니 독립적인 공간의 마련도 고려해 볼만하다. 아울러 한지공예고장으로서 닥종이 인형의 전시산업화에도 눈을 돌려보아야 할 것이다.둘째, 시설의 확장이다. 어진박물관에 하루 1만명 이상의 관람객이 들어온다는 것은 그야말로 시장통을 방불케 한다. 변변한 휴게실 하나 없고 교육 장소는 말할 것도 없다. 사람에 밀려서 보고 지나쳐야 하고 더위에 그늘이랍시고 계단 옆에 쭈그리고 앉아야 하는 실정이다. 콘텐츠가 아무리 중요해도 관람객의 편의를 무시할 수는 없다. 우리 지역는 늘 고만 고만하나는 이야길 많이 듣는다. 경기전과 한옥마을, 잘 나가고 있을 때 더 큰 꿈을 꿔보는 것이 곧 실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5.28 23:02

섬마을 어르신과 문화적 치유의 만남

전국의 기초생활수급자 비율이 2.9%에 비해 전북은 5.1%를 차지하는 곳으로서, 경제적 약자를 위한 생계보호 정책이 어느 다른 곳보다도 절실하다. 경제적 약자는 문화소외도 크기 마련이다. 문제는 문화소외가 단지 경제적 지원을 한다고 해서 일거에 해소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문화소외는 의식의 영역으로서 지역과 계층, 경제적 여건 등에 포괄적으로 연관되어 작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천편일률적이고 개별적인 지원에 안주하지 않고, 소외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대로 포착하여 대상에 맞는 종합적인 문화적 접근이 뒤따라야 한다. 지난 14일에 진행된 부안군 위도 방문행사에서 그러한 접근의 보기를 찾을 수 있었다. 위도중고등학교 강당에서 펼쳐진 행사는 사회복지전문가, 의료진 그리고 예술인들과 부안군지역 자원봉사자 등 100여명이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여 마을 어르신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이날은 건강진단이 제일 큰 관심사라는 것을 전해준 사회복지전문가의 의견에 따라 먼저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건강진단을 실시하였다. 행사장에 도착한 어르신들은 먼저 접수를 하고, 건강진단과 처방과정에 예술가들의 공연이 곁들여졌다. 링거를 투약하면 수십 분 동안 움직이지 못하는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함이었다. 작은 무대에 선 연주자들의 정답고 진심어린 연주는 경직되었던 어르신들의 마음을 풀어주었고, 어느새 깊게 패인 눈가와 입주름에는 미소가 번졌다. 형식적인 문화관람이 아닌 현실조건을 고려한 공연양식과 내용이었다. 이는 노년층 지원이 식사나 의료제공 등 개별적이고 성과위주적인 방식에서, 복합적이고 종합적인 지원방식으로 변화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었다.뒤이어 진행된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캐리커처와 네일아트에는 더 큰 의미가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동안 서로를 바라보거나 마주잡으며 작업이 전개되어 서로 따듯한 온기와 마음으로 교감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 그들의 대화는 건강의 문제를 넘어서, 살아온 이야기를 정답게 담아 도화지와 손톱에 그려지고 있었다. 이 순간 네일아트와 캐리커처를 하는 사람들은 단순한 문화 제공자가 아니었다. 그들 역시 치열한 삶 속에서 지혜를 터득한 어르신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즐거워했다. 그들은 서로의 손을 붙잡거나 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로 상대방을 끌어안으며 행복한 시간을 사진에 간직하고자 했다. 결국 베풀고자 했던 것은 매개물이었을 뿐, 오히려 만남과 이야기로 통해 서로를 문화적으로 치유할 수 있었다. 미국 코넬대학교 칼필머 교수는 저서를 통해 사회와 기업이 노인들의 지식과 지혜를 활용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지구만한 행복도 순간 속에 담겨있다'고 표현하며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을 먹듯 삶의 음미하라는 것'이라고 했다. 결국 우리의 문화적 만남이라는 것은 한 순간이라도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행복한 순간'을 음미할 수 있어야 한다. 문화적 만남은 시혜와 수혜가 아닌 서로 만나 행복하고, 공유하는 것이다. 문화는 거래의 대상이 아니다. 이날 섬마을에서의 문화적 만남은 모두에게 일어나거나 장시간 지속된 것은 아니다. 그 곳에는 여전히 행세와 치적 중심의 만남도 있었고, 수혜자와 시혜자를 규정하면서 냉정한 갑과 을의 관계도 공존해서, 보는 이에 따라 소개한 내용이 무색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섬마을에서 본 작은 행복한 순간을, 이 시대의 문제를 치유할 수 있는 문화적 만남으로 주목한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5.21 23:02

융통성에 대하여

계절의 여왕 5월이다. 우리 마을 여기저기에서 크고 작은 행사들이 이루지고 있다. 행사가 많다 보니 만드는 사람도 많고, 즐기는 사람도 많고, 지시·감독하는 사람들도 많다. 즐거운 기억을 가지고 돌아가는 사람도 있고, 불쾌한 나들이 기억을 가지고 돌아가는 사람도 있다. 만드는 사람들 또한 열심히 만들었는데 정작 만드는 과정이 아닌 선보이는 과정에서 상처를 받는 일이 많다. 제한된 시간, 한정된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다 함께 즐기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약속된 규칙이다. 이런 규칙을 운용하는 과정에서 사소한 실수가 발생하거나 과부하가 생기면 꼭 등장하는 말이 '융통성'이다. 아울러 이런 규칙을 무너트리기 위해 등장하는 말은 '특별함'과 '형평성'이다. 특별함의 논리와 형평성의 논리 속에서 규칙을 지키고 융통성을 발휘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난위도의 작업인지 모두들 공감할 것이다. 우리 공간에서 가장 많이 생기는 말은 '특별함'이다. 우리 아이는 다른 아이에 비해 특별하니까 입장해도 충분히 작품을 소화해내고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다른 단체에 비해 특별하니까 전업예술가 못지않은 기량을 지녔고 그러기에 무대에 설 자격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 이면에는 다시 '형평성'과 '일관성'을 주장하는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저 아이는 되는데 왜 내 아이는 안 되는가? 저 단체는 되는데 왜 우리 단체는 안 되는가? 지난번에는 가능했는데 왜 이번에는 안 되는가?융통성(融通性)이란 형편이나 경우에 따라서 일을 이리저리 막힘없이 잘 처리하는 재주나 능력을 말하며 신축성, 변통성, 주변성, 탄력성이란 말과 관련이 있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들 사용하는 유도리(ゆとり)라는 일본 말도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될 정도로 폭넓게 쓰이는 말이다. 일을 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지시·감독하는 사람에게 제일 먼저 듣는 말 중의 하나가 '융통성 없이 처리했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이라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지금 당장 나도 편하고 너도 편한 것은 융통성 있게 빠르게 처리하는 것이다. 특별하게 대접받았다는 고객의 만족과 잡음없이 해결했다는 스탭의 안도감을 동시에 해결시켜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융통성만이 우위에 서는 조직은 결코 오래갈 수 없다. 우리에게는 특별함을 요구하는 소수보다 일년내내 우리 공간을 찾아오는 다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규칙보다 융통성을 더 우위에 두는 사고방식을 가졌을까? 아마도 우리의 내면에 거절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고 거절하는 것에 미안함을 느끼는 심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규칙을 적당히 어기고 특별하게 대접받아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잠재적 심리도 있을 것이다. 4000명이 줄을 지어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데 주관자의 특별한 배려로 새치기해서 들어갔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 정상이다.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고 느끼거나 나도 저런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만연해지면 더 이상 규칙은 힘을 발휘할 수가 없게 된다. 만드는 사람들이나 진행하는 사람들은 '다수의 특별하지 못한 사람들'의 항의를 거칠게 받을 것이며,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허탈할 것이다. 이러기에 규칙은 엄격하게 지켜져야 하며, 이런 엄격한 규칙위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융통성은 필요해지고 빛을 발하는 것이다. 우리 공간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다 특별한 손님들이다. 특별한 손님들이기에 정해진 규칙에 따라 신속 정확하게 처리하여 기쁨을 느끼고 즐기게 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누구 하나 소중한 권리를 침해받지 않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동등하게 대우 받았다는 상황에서 기쁨은 배가 되는 법이다. 느리고 더디게 가지만 그것이 결국 모두가 다 함께 가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평범한 진리가 새삼 다가오는 계절이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5.14 23:02

우리 문화 전통 속에서 다시 생각하는 가정

대지의 빛이 신록으로 물드는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했다. 변덕스러웠던 날씨도 숨을 죽이고 화창한 하늘이 대지를 밝게 비춰 곳곳에서 열리는 지역 축제마다 손을 부여잡은 가족 나들이객으로 넘쳐난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공포의 달'이 되었다고 투덜거리기도 하니 신록의 계절 5월을 보내는 것이 그리 녹녹한 것만은 아닌가 보다. 가정의 달에 펼쳐질 각종 기념일에 들어가야 할 금전적 지출이 적지 않아 얇아질 지갑을 걱정하는 이들의 볼멘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니 말이다.가정 내에서 빚어지는 끔직한 범죄행위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오늘의 가정은 그리 온전해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많아지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어느 일간지의 칼럼니스트는 사랑의 온실이고 화목의 그루터기라는 가정이 현실에서는 점점 더 불화의 근원이고 비극의 발원지가 된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가 주목한 것은 그리스 비극에서 보이는 가족 간의 갈등과 비극적 결말이었다. 이 칼럼을 보면서 왠지 우리 사회 일각에서 비극으로 치닫는 현실이 스쳐지나가 서글프다.하지만 눈을 돌려 우리의 전통 문화를 보면 생각은 달라진다. 우리네 전통 속에서 가정은 언제나 정이 충만한 곳이었고, 부모와 자식 간의 주고받았던 사랑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새록새록 포근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특히 우리 지역에서의 키워낸 효 문화 전통 가운데 조선불교사의 대표적인 선승(禪僧)인 진묵대사(震默大師)의 일화는 종교적 제약마저 뛰어넘는 것이었기에 더욱 주목된다.불교계는 물론 유교, 증산교, 원불교의 중심인물로부터 추앙받았던 진묵 대사는 출가하는 자식을 두고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천년동안 제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안심시키고, 출가한 후 절 가까운 곳에 어머니를 모셔 봉양했으며, 모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어머니를 위해 산신령에게 고해 모기떼를 다 쫓아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만경 북쪽 산의 길지를 택해 장사지냈는데, 그가 어머니 묘소의 풀을 깎고 제사를 지내면 그 지역의 한 해 농사가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지역은 물론 먼 곳에 있는 사람들까지 앞 다투어 묘소를 돌보았고, 그 전통은 오래도록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가 어머니에게 한 약속이 허언이 아니었던 것이다.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그가 어머니에게 바친 제문이다. "열달 동안 태중(胎中)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리오. 슬하에서 3년 동안 길러주신 은혜 잊을 수 없습니다. 만세 위에 다시 만세를 더하여도 자식의 마음에는 그래도 부족하온데, 백년 생애에 백년도 채우지 못했으니, 어머니의 수명은 어찌 그리도 짧습니까?"라며 절절한 심정을 담은 그의 제문에는 우리네 전통 속에서의 부모 자식 간의 온전한 정이 담겨 있다. 특히 그가 어머니 배 속에서의 열 달 동안의 은혜, 그리고 3년 동안 길러주신 은혜라는 언급은 부모의 자애속에서 굳건히 자란 자식의 보은의 정이 오롯이 담겨 있다.진묵대사의 제문에서 드러난 언급처럼 우리네 전통 문화 속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와 덕목은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이었다. 일방성이 아니라 호혜성이 자리한 가정이라야 굳건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부자유친(父子有親)을 가르칠 때 부모의 자애와 더불어 자식의 효순(孝順)을 함께 가르쳤고, 부부유별(夫婦有別)을 이야기 할 때 남편의 도리와 더불어 아내의 도리를 함께 가르쳤던 것이다.오늘의 가정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이러한 호혜성의 원칙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목소리가 커진 어느 일방의 목소리에 묻혀 가족구성원이 숨죽여 지내거나 가족 누군가의 일방적인 요구나 베풂에 난감해 하는 가족 구성원이 아니라 서로에게 도타운 온정을 베푸는 우리네 가족구성원이 가정 내에 자리해야 가정은 사랑의 온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지역의 효 문화를 통해 서로 정을 주고받는 가정의 달 5월을 기대해 본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5.07 23:02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 급하다

동학농민혁명 2주갑이 내년으로 다가왔다. 2014년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설립된 지 10주년이고,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설립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인본주의 사상은 사람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했던 조선의 민중들에게 '인간다움'을 갖도록 한 사상으로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전환을 촉진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동학농민혁명정신이 항일전쟁과 독립운동, 통일운동, 민주화운동으로 계승되는 것은 사람을 소중히 여긴 때문이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이고 나아가 미래의 꿈을 이루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단순한 기억이 아닌 기념과 계승에 연결해야 한다. 1926년 천도교 청년당에서 처음으로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기 시작한 것은 당 시대의 바램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50년전 정읍에서 갑오동학농민혁명기념탑을 건립한 것은 '동학난'을 혁명으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만들었고, 그 자체로서 또 하나의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동학농민혁명 계승사업은 100주년 사업을 기점으로 재평가가 진행되었으며, 2004년 특별법 제정은 본격적인 역사평가가 완료되어져 가는 출발점이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에 대한 명예회복은 혁명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완성하는 일이면서 아울러 현대적 계승 방안을 모색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특별법 제정 이후 10년이 넘도록 국가기념일은 지정되지 못했다. 국가기념일 지정과 관련한 지역 간의 갈등이 깊어만 가고, 그 사이 동학농민혁명 정신은 모두의 머리에서 사라졌다. 죽기를 각오하고 이루고자 했던 참여 농민군의 여망을 짓밟아 버린 것이었다. 특별법 제정 이후 동학농민혁명 정신의 현대적 계승을 모색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2주갑은 두 번의 삶이 돌아온 것을 말한다.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계기로 동학농민군이 이루고자 했던 대동세상을 구현하기 위한 새로운 기념사업 방향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민족과 계급모순의 갈등에 대항했던 동학농민혁명 정신의 올바른 계승사업은 계승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혼돈을 초래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출범 이후 기념사업의 주체는 지역단체의 기념사업과 국가 기념사업으로 나뉘면서 각자의 편의적 관점에서 불분명하게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 국가기념일 지정문제가 촉발되었다. 기념일을 어느 지역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일로 정하느냐가 마치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의 주도권으로 인식된 결과이다. 이유야 어떻든 논란이 반복되면 진실은 잊혀지고 감정만 남는다. 현재 기념일 지정을 둘러싼 갈등이 바로 이렇다. 최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교체되었다. 120주년 사업을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하기에는 너무나도 시간이 촉박하다. 국가기념일 지정 없이는 국가적 기념사없도 없다. 하지만 아직 합의된 바도 없고 어는 한쪽이 수긍해주기를 바랄 수도 없다. 그만큼 갈등의 폭은 넓고 깊다. 동학은 '대동'을 토대로 한다. 갈등 속에서 어느 쪽으로 정해지는 것은 또 다른 갈등은 나을 뿐이다. 조심스럽게 특별법 제정일을 기념일로 하고, 농민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 된 마음으로 대동세상을 위해 2014년 천하대동판을 만들어 영명한 농민혁명군들을 위무하고 기억하며, 그들이 꿈 꾼 세상을 보여주는 것은 어떨까?

  • 오피니언
  • 기고
  • 2013.04.30 23:02

문화행정 '팔길이 원칙' 필요하다

21세기 이전에만 해도 문화예술을 즐기는 것은 '있는 사람'의 전유물로 인식되어 왔다. 당시에는 '없는 사람'이 문화예술을 한다는 것은 '사치'로 인식하는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경제상황이 어려운 가운데에도 생활문화예술 활동은 오히려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는 경제적인 풍요가 삶을 윤택하게 해줄 것이라는 '필수요건'에서 생활 속의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것이 물화와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라는 것으로 변화하고 있다. 국민문화향유의 가치에 관해서 정치적 관심은 지속적으로 정책변화를 가져왔다. 주목할 점은 공적인 지역문화 정책추진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지역문화재단의 설립도 전국 광역지자체와 기초지방자치정부로 확대되고 있다. 문화인력에 관한 정책도 전개되었다. 대표적으로 문화예술교육사 양성과정이다. 문화예술교육사는 2011년 문화예술교육지원법 시행에 따라 법에 정하는 국·공립 교육시설에 1인 이상 의무적으로 배치될 예정이다. 2016년부터는 도내 교육시설 등에도 문화예술교육사가 배치되어 전문적이고 역동적인 활동을 전개할 것이다. 또한 소외계층의 문화향유 기회를 도모하는 문화복지사의 경우도 문화복지 담론이 확대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면, 제도시행이 기대된다. 이들도 시·군 단위 주민센터에 의무적으로 배치되어 생활문화예술 활동이 활성화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전북이 생활문화예술동호회 활성화를 위해 문화전문인력(문화기획자)을 배치한 것은 선진적인 문화정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전주문화재단 직원 공금횡령으로 문화계의 파장이 크다. 전주시는 문화재단 관계자 문책을 넘어 전주시내 문화관련 시설들을 전면평가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전면평가 이전에 전주시 당국의 성찰이 요구된다. 전면평가는 전주시 민간위탁 문화시설과 인력들의 자존감과 활동이 위축되는 것이 자명하다. 왜냐하면 전주시의 민간위탁시설들은 전주시로부터 '을'의 관계임을 재인정하는 것과 함께 범법행위의 부류로 치부되어 버리는 자존감에 상처를 입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전주시내 모든 문화시설의 활동을 부실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전주시는 공금횡령사건 발생의 행정기관 관리가 부실했다는 내부적인 성찰이 요구된다. 문화전문인력이 문화행정관련 전문성을 갖춘 것이 아니라 문화정책 추진과 현장 활동영역에 비중이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공적예산 관리는 행정관청에서 전문성을 발휘하여 지원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는 우리지역 문화예술 활동이 질적으로 변화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한편에는 민간영역에서의 전문성은 문화예술 활동의 진정성과 열정은 물론 업무추진의 투명성과 전문성도 고루 갖춰야 한다. 행정기관 또한 문화의 시대에 걸 맞는 문화적 방식에 어울리는 전문적인 행정관리가 요구된다.분명한 것은 이 사건으로 우리도민들의 문화예술 활동이 위축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 도민들의 문화예술향유 욕구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전북지역의 생활문화예술 활동은 타 도에서도 전북지역의 생활문화동호회 활성화 정책을 유입하고 있는 실정이다.이러한 정치적 관심과 배려만으로 반드시 문화가 진전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는 문화적 방식으로 문화권을 향유하는 민간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보장하는 제도를 수립해야 하고, 행정은 공공의 문화예술 활동이 전개될 수 있도록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 '팔길이 원칙'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4.23 23:02

우위에 서 있다 자만하지 말고…

'공로패 하나 제작하는데 결재를 도대체 몇 번이나 받았는지 몰라요. 이 상을 주어야 한다는 취지의 기획안과 제작 단가에 대한 결재를 최종 결재권자에게 받았는데, 다시 총무부에 이렇게 제작하겠다는 형식의 내부 통지 기안을 또 해서 결재를 받는 등 최소 10번의 결재라인을 거쳐서 5만원 상당의 상패하나가 만들어진 거예요.' '이벤트용 볼펜을 사는 데 조직 내부의 결재를 받고, 또 관련 상급 기관의 공무원의 결재를 또 받아야 해요. 조직내부 기관장보다 공무원의 결재 순서가 더 뒤인 것을 보고 우리가 막 웃었어요. 결재 받느라 일을 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정작 대형 프로젝트의 경우는 어느 정도 추진된 이후 중간 결재를 거치는 경우가 많아요. 이건 뭔가 아이러니 아닌가요?'두 가지의 하소연은 문화관련 일을 하는 후배들에게서 들어온 푸념이다. 두 가지 모두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결재를 했는데도 정작 자금 집행 과정에 있는 행정부서의 결재를 왜 또 받아야 하는지 의문을 표하고 있다. 그런데 더 우스운 것은 이런 이중 삼중의 안전장치를 하는데도 정작 대형비리와 대형부정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사소한 것들은 이중 삼중으로 걸러내서 업무의 비 효율화를 유발하고 있으면서, 정작 큰 것들은 전혀 감시기능을 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 때문이리라. 어느 분야의 일이든 모두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나 문화관련 일을 하다 보면 지나친 행정 바라기, 행정을 향한 줄서기를 느낄 것이다. 그것은 문화상품 자체가 인풋과 아웃풋의 불균형이 가장 크기 때문이리라. 유무형의 결과물 모두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 문화상품임에도 양적인 평가와 자금 회수율만 가지고 아웃풋을 평가해야 하기 때문에 정정당당하게 일을 했음에도 무언가 잘못한 혹은 취조하듯이 아웃풋을 요구하는 시스템이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행정 바라기의 고질적인 병폐는 춘향을 구하러 온 이몽룡부터 출발하지 않았을까? 사서삼경을 줄줄이 단순 암기하여 과거 급제한 신진 행정 엘리트가, 자기 여자를 핍박한 지방 수령의 비리감찰을 단숨에 꿰뚫어 보았다라는 설정. 이런 황당무계하고 전지전능한 혜안을 사대부집 도련님에게 부여하고 함께 카타르시스를 느낀 우리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7급 공무원을 패러디한 영화만 봐도 내 주위의 공채출신 친구들과는 전혀 다른 이능력을 지니지 않았던가. 아직도 여전히 선비가 최고이고 재인은 천인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런 편견은 업무 수행방식에 그대로 잔존해 있다. 그러다 보니 자신들 내부의 크로스체크는 하지 않고 문화예술분야의 자금집행은 삼중으로 간섭하여 업무비효율을 갈수록 늘려가고 있지 않은가.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이 있을까? 찾아가는 예술무대처럼, 행정은 단순히 감시와 견제만 하려 하지 말고, 현장에 나가 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일을 하기 보다는 담당자를 설득하고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그런 시간이, 더 좋은 작품과 더 좋은 기획안을 위해 투자할 시간적 여유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문화정책 생산자를 끊임없이 늘려가고 모니터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예향의 도시라는 말처럼 예술인도 많고 기획자도 많은데 정작 중요한 프로젝트에 항시 외지 인력을 전문가라고 (사실 전문가인지에 의문을 표하는 게 아니라 그 역량을 지역이라는 현장에 발현시키기에 시간적, 공간적으로 무리가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늘 데려오는 것은 행정의 책임회피용 시책이 아닌가 싶다. 너무도 잘 알려진 팔길이 원칙을 새삼스레 다시 쓰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예단하지 말고, 우위에 서있다 자만하지 말고, 줄 세우지 말고, 함께 어울려서 일을 한다는 동지적 사고방식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할 때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4.16 23:02

전북의 정신문화에 관심을 가질 때

전북에는 다양한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다. 국내 유일의 국보 어진인 조선 태조어진을 비롯하여 김제 금산사 미륵전, 익산의 미륵사지석탑 등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가 있으며, 3천5백여 항목에 이르는 무형문화유산이 있는 것으로도 확인되고 있다. 일찍이 전통문화의 보고(寶庫)라는 별칭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이 지금까지 진행된 여러 조사를 통해 밝혀지고 있는 셈이다.하지만 이러한 문화 자산에 대한 지역민의 관심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불과 1년 앞으로 다가온 동학농민혁명 2주갑, 즉 120주년 기념사업에 대한 관심도 그리 크게 부각되지 않고 있으며, 도나 시군에서 진행하고자 하는 각종 문화 사업에도 큰 열의가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관은 관대로, 민은 민대로 그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는 형국이 아닌가 저어되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러면 왜 이러한 현상이 드러나는 것일까? 그동안 우리가 우리의 문화를 특징짓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시키며, 동시에 지역민의 동질적 유대감을 일깨우는 전통의 정신문화에 상대적으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보통 정신문화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가치, 의미, 생활방식, 그리고 그것의 실천행위라 이해된다. 현재의 삶은 과거의 삶이 반영된 것이며, 아무리 변화가 거듭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정신문화의 특징은 미래에도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19세기 성리학자 오희상(吳熙常)은 당시 특정 지역에 사는 백성들의 풍습과 습관을 살피면 1천 년 전 삼국시대의 유풍을 확인할 수 있다고 단언하기도 하였다.문화의 문제는 공동체의 문제이다. 따라서 지역공동체의 정체성과 동질적 유대를 결정짓는 주요 변수 중 하나는 공동체 문화의 밑거름이 되는 정신적 가치라 하겠다. 다양한 공간 속에서 자발성과 자율성을 토대로 공동의 연대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오면서 구축해 온 정신문화는 지역 문화와 지역민의 삶의 향방을 결정짓고, 그 지역의 특징적인 면모를 만들어왔다. 따라서 유무형의 문화자산으로 통칭되는 문화유산의 기저에는 지역의 정신문화가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전북을 중심으로 한 호남은 이러한 정신문화의 자산이 풍부하다. 불의에 항거하고 대의의 실천을 위해 몸 바쳐 싸운 의기(義氣)의 본향이었으며, 학문적 소통과 새로운 학문의 발상지이기도 하였다. 개혁지향의 실천적 학문이 자라났고, 지역민의 정서와 결합하여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그 기저에서 면면히 자라난 정서에는 현재의 삶을 반추하며 고절한 정신에 대한 자긍이 승화된 문학과 예술이 자리하였다. 특히 다른 지역과 달리 소통과 개방의 특징이 부각되면서 포용의 학문이 꽃 피우기도 하였다.풍부하고 다채로운 우리 지역의 정신문화 자산은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나아가 지역 사회의 질적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측면이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유형의 문화자산에 대해 단순히 산업적인 측면이나 경제적 가치로 판단하고 그 의의를 살피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기저에 깔린 가치와 의미를 지역민이 인지하고 공유하도록 해야 하며, 이를 통해 지역민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기제로 삼아야 한다.이러한 점에서 영남의 한 지역에서 정신문화 연수생을 최근까지 6만 여명 배출했고, 이러한 결실을 맺기 위해 십여 년 전부터 해당 도시가 그 지역의 정신문화 자산을 21세기 한국의 정신적 가치로 이끌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과 교육시설 기반 구축을 위해 적극 지원해 나서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하겠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4.09 23:02

기록문화의 허브도시를 꿈꾸자

전주는 역사적으로 기록문화 도시의 위상을 갖고 있다. 굳이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냈다는 역사적 경험을 말하지 않아도 전주는 지방의 단일도시로는 조선시대 가장 많은 책을 간행한 도시이다. 조선왕실의 비밀 도서인 실록과 귀중본을 보관했던 전주사고의 전통과 완판본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기록은 정보이고 그 정보를 담는 것은 매체이다. 어떤 정보를 어디에 담을 것인가는 그 지역이 가지고 있는 사회ㆍ경제ㆍ문화적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 기록문화의 메카로서 전주가 한지로 유명한 것도 그런 맥락에 놓여있다. 새로운 소재를 개발하는 것 역시 다양한 쓰임새 중 정보를 담아 널리 보급하고 후세에 전한다는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시도이다. 그러나 매체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조선시대 목판과 목활자의 제작 기술을 보유하고 정보를 구성하고 생산할 수 있으며, 이용하는 지식인 계층의 문화적 욕구가 없었다면 전주는 한갓 한지생산지에만 머물렀을 것이다. 지금, 전주의 기록문화 명성은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사업과 완판본 문화관의 설립, 한지산업지원센터, 국립무형유산원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탄소와 전자인쇄매체 산업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수 있을 터이지만, 역사적 전통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하다. 이러한 다양한 하드웨어에 무엇을 담아 풀어낼 것인지에 대해서 발전적 지향점을 생각할 시점이다. 지난 3년 동안 전주시와 문화체육관광부는 전주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의 복본화를 끝냈을 뿐 아니라 조선후기 실록의 복본화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문화재청에서는 조선시대 사고와 실록 및 의궤의 보존 활용에 대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으며, 오대산에는 실록 전시관을 설치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전개되고 있다. 전남지역에서는 한국학 호남진흥원 설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기도 하다. 안동 한국학진흥원에서는 경상도 지역의 기록문화를 샅샅이 뒤져 수집 연구하고 있다.반면, 우리 지역은 어떨까? 적상산사고와 전주사고에 어느 지역보다 먼저 전시관을 꾸며 놓고, 어진 박물관을 개관 운영하고 있으면서도 기록문화의 메카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데는 뒤처지고 있다. 전주의 한스타일도 소재(한지)는 들어가 있지만 한국학은 제외되어 있다. 얼마전 '한류원형문화권' 설정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현 정부의 한류정책으로 K-Culture 전략을 모색 중에 있다. 가시적 노력이 조속이 이루어져야 할 때인 것이다. 다만, 이러한 일련의 노력이 소재주의에 머물러 있다면 뜻은 크나 손에 쥐기에는 너무나도 작은 결과가 도출될 수 있다. 공간으로서의 한옥마을과 소재로서의 한지, 생활로서의 한식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기록문화의 집적화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한스타일이던 K-Culture든지 특성화된 기록문화의 허브를 조성해야 한다. 한식ㆍ한지ㆍ한옥ㆍ한국음악ㆍ출판문화 등 전주가 가지고 있는 특화된 주제에 대한 기록정보의 수집과 운영을 담당할 수 있는 제도와 조직을 갖추는 것이다. '한류원형문화원'이 대안일 수도 있고, 'K-Culture Archives Center(한국문화기록센터)'를 설치해도 될 일이다. 포괄적이 아닌 세부적이며, 보편적이지 않은 특수성을 가진 기관의 설립과 운영을 통해서 우리는 물리적 집적과 자료의 수집을 포함하여 활용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 허브도시는 확산과 네트워크를 전제로 한다. 전주에서 한국의 전통문화를 느낄 수 있다는 명제가 과연 유효한 것일까? 언젠가는 사라질 신기루는 아닐까?

  • 오피니언
  • 기고
  • 2013.04.02 23:02

문화향수권과 삶의 질 정책

꽃샘추위가 여전하지만 얼어붙은 땅이 풀려 새싹이 돋고, 들녘엔 개나리꽃이 노랗게 피어 만발하다. 자연의 예술적 조화는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감동을 안겨준다. 문화예술의 체험과 감동은 자연조화에서만 느끼는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학예발표회를 할 때의 두근거림은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책속의 이야기에 빠져 주인공이 되는 것으로도 마음이 설렌다. 엄마와 아내가 아닌 한 여성의 주체로서 문화시설 문을 두드리는 순간에 찾아오기도 한다. 심지어 상상만으로도 봄바람을 타는 듯 마음이 설렌다. 이처럼 문화예술활동은 볼 수 없으나 마음으로 느끼는 행복감이다. 하지만 서민들의 곁을 보면 행복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 하루 품이 변변치 않아 생계가 어려운 이웃이 있다. 놀 틈, 쉴 틈, 잠잘 틈 없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거동이 불편하여 집 밖을 나서지 못하고 하루를 보내는 노년의 어르신들과 장애인이 있다. 과로와 퇴출에 따른 불안감에 찌든 직장인이 많다. 대부분 저소득층인 경우가 많지만, 반드시 그들만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이들에게 문화예술활동은 다가설 수 없는 것이자 여유로운 사람들의 전유물이 되고 있을 따름이다. 국민의 문화적 소외는 국가와 사회의 책임이기 때문에 개인의 책임과 곤핍으로 내몰려서는 안 된다. 선거를 앞두고 복지담론이 형성되고, 후보자들의 복지공약이 전면에 나섰던 것은 이러한 책임에서 비롯된 것이란 점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 헌법 제10조에는 행복추구권을 보장하고 있으나 문화영역에서 국민 문화향유에 관한 제도는 변변치 않고 문화예술진흥법에 편재되어 있을 뿐이다. 문화예술진흥법에는 제3장(문화예술복지의 증진)에는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가 문화예술소외계층의 문화예술복지 증진 시책을 강구할 것(제15조3항)'과 문화이용권(제15조4)지급을 명시하고 있다. 동시에 시행령(제23조의 2)에는 문화소외계층의 범위를 저소득층과 장애인 등 경제소외계층을 중심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문화예술진흥법 제1조 목적에 '문화예술의 진흥을 위한 사업과 활동을 지원함으로써 전통문화예술을 계승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여 민족문화 창달에 이바지함'에 있는 것으로 보면 문화향유문제를 어설프게 끼워 맞추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문화계는 제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지역문화진흥법과 문화기본법 제정을 줄곧 요구해왔다. 이는 헌법을 기반으로 문화영역에서 지역 간 불균형을 해소하고, 국민의 문화향유를 제도적으로 보완하기 위해서다.최근 출범한 박근혜 정부는 문화기본법 제정을 천명한 바 있어 이후 귀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보다 눈에 띄는 것은 전라북도가 2012년부터 전개하고 있는 '삶의질 정책'이다. 이 정책은 정부보다 먼저 삶의 질로써 문화정책을 추진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둘 수 있다. 아직은 초기단계로서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하기는 섣부르다. 정책추진과 더불어 반드시 지켜 봐야할 점은 제도적 장치인 조례의 문제이다. 자치단체에서 조례는 정책에 머물지 않고 이후 지속적 추진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 어느 곳 보다 먼저 '삶의질 정책'을 추진하면서 타 지역의 관심을 유발하고 있다. 유의할 점은 정책의 선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추진과정이 드러나야 한다. 관료적 태도보다는 문화적 방식으로 정책이 추진되어야 하고, 도민의 의견을 모아 제도로 안착되어야 한다. 또한 도민들도 주체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문화향유의 문제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전라북도가 앞장서서 문화예술로 행복한 전북이 되도록 노력해야한다. 그것은 지역문화 활성화의 기반을 만드는 것이고, 문화예술의 고장 전북이 다시 한 번 꽃피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이는 전라북도가 문화로 풍요로운 새 길을 개척했음을 의미한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3.26 23:02

팥쥐 엄마와 정여사의 트라우마

팥쥐 엄마는 어느 날 두 딸에게 불공정한 과업지시를 내렸다. 팥쥐에게는 집 앞의 텃밭을 콩쥐에게는 산비탈의 넓은 자갈밭을 매라고 하면서, 팥쥐에게는 쇠로 된 호미를, 콩쥐에게는 나무로 된 호미를 주었다. 팥쥐 엄마는 그것도 모자라 원님 잔치에 팥쥐를 데려가면서 콩쥐에게는 벼 세가마니를 찧어 놓고 오라는 시간차 공격을 하면서도, 잔치옷도 주지 않았다. 그에도 불구하고 이 불공정 경쟁에서 팥쥐 엄마는 승리의 기쁨이라는 보상을 받을 수 없었다. 불만제조기인 정여사 딸이 소주를 바꾸러 갔다. 소주가 써도 너무 쓰다는 이유로 이미 반절이나 마신 소주를 천연덕스럽게 바꿔~줘 라고 했고 매장 직원은 이를 거절했다. 이에 떼쟁이 정여사가 나타나 억지를 써서 결국은 원하는 보상을 얻어내 진상의 여왕임을 과시했다.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팥쥐 엄마가 있고 수많은 정여사가 있다. 그녀들은 무슨 트라우마가 있는 것일까? 트라우마는 재해를 당한 뒤에 생기는 비정상적인 심리적 반응으로 외상에 대한 지나친 걱정이나 보상을 받고자 하는 욕구 따위가 원인이 되어 외상과 관계없이 우울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신체 증상으로 표현된다고 한다. 팥쥐 엄마는 그 사회에서의 아웃사이더였을 것이고 그에 대한 보상심리로 콩쥐가 가질 모든 것을 자신의 딸 팥쥐가 갖도록 노력했다. 정여사는 현대사회에서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그런 성격을 표출하는 블랙컨슈머이다. 발이 큰 팥쥐에게 맞지도 않은 꽃신을 억지로 신기는 행동이나, 말도 못하는 브라우니에게 공격을 명령하는 애교스러운 억지를 쓰는 우리 주위의 평범한 사람들이다. 두 엄마 모두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지나친 악의가 있는 것도 사실 아니다. 그보다 정도가 훨씬 심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으며, 현대사회가 갖는 불합리와 모순은 이미 우리들 모두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어 우리를 매일 우울하게 한다.그런데 왜 우리는 팥쥐 엄마나 정여사의 개그를 보면서 미워하지 않고 웃어넘기는 것일까? 정당한 행동도 아니고 그렇다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것도 아니며 약간 바보스럽기까지 한 그녀들의 '진상짓'이 작게나마 모두 우리 안에 존재해서일까? 아니면 더 큰 불합리함이 존재하기에 사소한 그녀들의 억지는 그냥 넘기게 된 것일까? 트라우마가 너무도 다양하고 많은 정여사나, 재혼이 주는 사회적 중압감에서 오는 팥쥐 엄마의 트라우마를 인정해서일까?내가 있는 공간도 다양한 행동양식으로 표현하는 정여사들이 있다. 바꿔줘 라고 단순하게 우기는 고객부터,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한 주장을 펼치는 고객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논리정연하고 냉철하게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켜 원하는 보상을 받으려고 한다. 개그에서 나오는 정여사는 여기에 비하면 정말로 애교가 많은 블랙컨슈머일 뿐이다. 내가 있는 공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들이 가끔 술을 마시면서 자기가 만난 여러 가지 타입의 정여사들을 설명한다. 그러면서 타 공간에 가서 자신이 그보다 훨씬 더 치밀하게 정여사가 될 수 있는데, 굳이 그러고 싶지 않다고도 말한다. 거기에도 역시 자신들 같은 아르바이트가가 있을 것이고 자신들이 겪은 수모나 힘듦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리라. 나보다 한참 어린, 이제 사회를 막 배워 나가는 친구들에게서 역지사지를 배운다. 현대사회의 트라우마는 분명 치료되어야 할 병이다. 악의가 없는 내안의 정여사를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치유하면 어떨까?

  • 오피니언
  • 기고
  • 2013.03.19 23:02

3월, 지역 발전의 봄을 찾자

봄은 항시 그렇게 온다. 오는 듯 마는 듯. 지난 겨울 잦은 눈과 추위가 있었기에 기다린 봄이지만, 봄이 되면 겨울은 잊혀진다. 우리 지역은 늘 춥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에서 1면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전북출신 ○명이라는 문구이고, 소외와 낙후라는 단어는 해방 후 줄곧 우리 고장을 대표하는 단어였다. 이는 현재 우리들 모습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출발해서 그 이유를 외적 요인에 찾는 남 탓하는 전형은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중요한 인선과 정책결정이 있을 때면 늘 습관적으로 내 뱉는 말은 아니었을까? 우리들이 그리는 지역의 그림은 무엇일까? 역사적으로 보면 도민들이 공감할 수 있었던 큰 그림은 그다지 볼 수 없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다. 180여 만명이 조금 넘는 작은 지역에서 내 놓을 수 있는 정책도 사람도 없는 데, 이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 탓이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우리 고장에는 정책연구원과 대학 내의 인력들이 적지 않게 있다. 지역의 발전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끝없이 쏟아 내고, 수십명의 인재들이 배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자조적 비판에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있다. 왜 그럴까? 열심히는 하고 있는데 성에 차지 않으니, 이는 내 잘못이 아닐 것이라는 섣부른 결론에 도달하고 있지는 않을까? 분명 지역발전에 대한 정책적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없는 것도 아니고, 비전과 희망도 우리는 가지고 있다. 역사학자로서 지적할 수 있는 유일한 문제는 지역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한다.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고를 떠나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전라북도를 정말 잘 알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지역발전전략은 그 지역이 가지고 있는 내재적 힘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그 힘을 우리들이 얼마 만큼 이해하고 있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의 해결 방식이다. 지역연구는 1965년 지방문화사업조성법의 제정과 1994년 지방문화원진흥법이 공포 되면서 외연적 확장을 거듭해 왔다. '향토애' 등의 단어가 친숙해 진 것도 이 즈음이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전라북도의 향토사에 대한 이해는 마음만 앞서 있을 뿐 지역발전을 견인할 공감대를 형성하지는 못하였다는 것이다. 역사는 단절되지 않는다. 전통이라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지역의 내재적 힘은 수백년 동안 지역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경험에 있다. 외형적 발전의 논리가 아닌 내적 힘으로부터 분출되는 발전 전략을 구상하기 위해서 역사는 반드시 연구되어야 할 분야이다. 전라북도 지역사를 총괄하는 기관이 우리 지역에는 없다. 1997년 전북학연구 3책을 낸 이후 지역 연구는 대학의 몇몇 연구자와 지방 정부의 단편적인 용역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당장 독립된 기구는 아니더라도 전북발전연구원 내에 전라북도역사문화연구부를 설치해야 할 것이다. 지역 발전 전략과 지역사 연구를 비교해 보면 그 필요성은 더 분명해 진다. 지역학 연구에서 전주를 제외하면 무엇 하나 변변하게 추진되고 있지 못하다. 다행인 것은 전라북도에서 작년부터 숨겨진 지역의 역사와 문화유산 찾기에 착수했다는 것이다. 기관장의 관심도에 좌우되지 않고 단편적인 생색내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조직의 신설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포스트 새만금 고민을 풀어가기 위해 새로운 국책사업 발굴에 앞서, 지역이 가지고 있는 숨겨진 힘을 찾는 차분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지역 발전을 위해 중앙정부에 당장 요청할 과제를 찾기 힘든 것은 내 주머니 속에 담긴 카드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라도 전라북도역사문화연구소를 만들고 차분히 채워나간다면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지역 발전은 봄 손님처럼 그렇게 오는 듯 마는 듯 우리 곁에 와 있을 것이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3.05 23:02

정월대보름 망월이야!

정월대보름은 새해 첫 달의 보름날로서 설날과 더불어 우리민족의 중요한 명절 중 하나이다. 우리민족에게 달은 음을 뜻하며, 땅이자 여성으로서 만물을 생산하는 풍요를 표상한다. 그래서 마을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이날 자정을 전후로 당산제를 지내기도 하는데, 풍년을 소망하며 가족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다. 농사가 주를 이룬 전북지역은 정월대보름을 정점으로 새해맞이를 끝내고 본격적인 농사를 시작한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부추기고,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 오곡밥을 지어 먹으며 기운을 돋운다. 그리고 다 같이 달집을 돌며 풍물소리에 맞춰 춤추며 노래하는 불의 축제를 펼친다. 정월대보름맞이는 농촌에서만 전개한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초반, 전주시 다가공원에서 정월대보름맞이가 있었다. 농촌 마을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달집이 세워졌다. 삭막한 겨울 도시에 흥겨운 풍물소리가 울려 퍼졌다. 행사장에는 민속춤과 놀이들이 풍성하게 진행되어 많은 시민들이 함께 참여했다. 무엇보다 이 날의 백미는 둥근 보름달이 중천에 뜰 때 달집을 태워, 달을 향해 망월이야! 라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물끄러미 둥근 달을 바라보는 순간 도시속의 한 개인을 넘어서 우리라는 동질의식을 경험하고, 함께하는 세상을 큰소리로 불러보는 것이다. 이처럼 정월대보름은 농촌을 기반으로 하지만 도시에서도 정월대보름맞이를 하는 우리고장의 즐거운 명절이자 축제이다. 대동놀이로서 정월대보름의 의미는 대보름맞이를 준비하는 방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난 24일 정월대보름날 진안군 백운면 노촌리 마을에서는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가 진행되었다. 30여 년 전 노촌리 4개 자연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청년회를 결성하여 지금까지 꾸준하게 노촌리 정월대보름맞이를 주관해오고 있다. 정월대보름을 맞이하기 전날 마을청년회원들은 각각 역할을 분담하여 달집을 짓는데 필요한 소나무를 산에서 간벌하고, 마을공동산 뒤편의 대나무도 함께 베어 채취한다. 나무더미를 묶어 트럭에 실어, 마을 앞뜰 논 한가운데 옮긴다. 장소는 마을어른과 상의하여 가장 안전하면서도, 마을사람들 모두가 참여하기에 불편이 없는 곳으로 잡는다. 긴 목재는 기둥을 삼아 세우고, 마른 콩대와 짚을 군데군데 불길로 삼고, 생소나무를 층층이 쌓아 올렸다. 해질녘 둥근달이 차오를 때 쯤 집채보다 큰 거대한 달집이 완성되었다. 보름날 점심 마을회관에서는 마을어른들과 주민들이 소원을 적고 있었고, 거실과 다른 방들에서는 나물과 오곡밥으로 소복하니 잔칫상을 차려 마을사람들 모두가 같이 먹는 북새통을 이루었다. 상차림 주변으로는 술판과 이야기판이 펼쳐졌다. 한쪽에서는 풍물소리가 울려 퍼지고, 한쪽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뛰놀고, 마을회관 앞마당에서는 모처럼 윷판이 돌았다. 논 가운데 세워진 달집은 하얀 소원지로 곱게 치장을 했고, 소박한 고사상이 차려졌다. 해질 무렵 마을회관에서 풍물패가 마을사람들을 이끌고 달집으로 향했다. 풍물패는 달집을 한 바퀴 돌아 달뜨는 동쪽을 향해 모였다. 마을 어른들과 젊은 사람들 모두가 달을 향해 마을의 풍년을 기원하며 제를 올렸다. 흐린 저녁하늘이 열리더니 둥근 달이 달집에 걸리자 달집에 불을 붙였다. 큰 달집은 용솟음치듯 불꽃을 일렁이며 생 대나무를 태워 큰소리로 터졌다. 할머니들이 소지를 올리며 비손을 하고, 어린 아이들이 달집주위를 뛰논다. 달이 중천에 뜨고 불기운이 사그라질 무렵까지 마을사람들이 풍물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술과 음식을 나누며 달집을 돌았다. 전주로 돌아오는 길목 여러 마을에서 달집을 태운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월대보름이면 전라북도 전역의 마을들이 축제로 일렁인다. 우리는 같이 일하고 놀며, 빌고 살아간다. 음식을 나누고, 모두의 행복을 위해 생명의 신인 달을 섬기며 풍요와 안녕을 소원한다. 정월대보름맞이는 공동체문화의 표상이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2.26 23:02
오피니언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