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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문화 도시로서의 역할

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하여 보니 우리나라 국가 브랜드는 33위로 이집트 28위와 인도의 20위보다 뒤떨어지고 있다. 미술과 디자인은 고부가가치 산업이므로 기술개발을 통하여 5배의 매출 증대 효과가 있다면 모든 제품에 미술적 감성을 입혀 디자인을 개발할 경우 22배의 반사이익과 기대치를 높일 수 있다고 한다. 더불어 국가 브랜드도 올라갈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므로 이제 신 성장 동력산업으로 미술적 감성을 덧씌운 디자인을 재확인하며 인식의 전환을 꾀하고 이에 따른 정책적인 지원이 우선적으로 선행되어야한다. 이는 바로 '컬쳐노믹스'이다. 문화와 경제의 합성어인 컬쳐노믹스는 문화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경제적 가치에 접목하여 고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는 의미이다. 편리함과 기능성만을 추구하는 과학과 현대화된 회색도시에 감성이 담겨있는 문화의 옷을 입히면 관광객이 늘어나고 외국인 투자가 확대되어 국가가 만든 상품의 가치도 상승하게 될 것이다. 과거의 문화가 닫힌 문화라면 미래의 문화는 열린 문화다. 우리는 일단 문화라고 하면 먹고 사는 일상생활과는 다른 특별한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는 21세기에 필요한 문화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 컬쳐노믹스의 의미를 다른 차원에서 문화와 도시의 결합인 '컬쳐시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국내 곳곳에 혁신도시와 기업도시가 거듭나고 있다. 이들 도시가 성장만을 도모하는 급조된 도시가 아닌 시민의 삶과 질을 높일 수 있는 도시가 되어야 한다. 아이들을 마음 놓고 양육할 수 있는 공공 보육시설이 있어야 하고,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문화시설 또한 있어야 시민들의 안락한 생활을 보장 할 수 있는 도시로서의 기능을 다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예산을 통해 문화사랑에 앞장 서야 한다. 정부청사나 공공기관, 도서관 등에 문화예산을 꼭 책정하도록 의무화해야 한다. 또한 도서관, 박물관과 미술관, 공연장을 갖추도록 법제도화 하고 정책지원을 강도 높게 추진해야 한다. 특히 창작 인프라에 열정을 집중하고, 그 결과물에 최우선 예우를 해야 한다. 모든 미술품이나 도자기 그리고 조각은 물론이고 음악 등 각 분야의 문화예술인들이 언제든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창작스튜디오가 필수적이다. 창작 스튜디오나 종합 세트장 등을 세워 충분한 연습과 국내에서의 검증을 거쳐 국내외 유명한 장소에서 공연할 수 있는 시절을 꽃피우도록 그 성공할 수 있는 문화생태계를 조성해야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어쩌면 전주 교동 한옥마을이 문화생태계로서의 다양성을 갖추기에 적절한 곳이다. 한옥마을과 지근거리에 있는 동문사거리를 중심으로 작가들의 창작스튜디오가 조성되어 한옥마을과 전주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장소로 거듭날 때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생활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이 생명력을 지니려면 생활과 결합이 되어야 한다. 시간이나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언제든지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예술 공간의 인프라 확충은 건전한 생활문화를 키워내는 산교육장이 될 것이다. 그럴 때만이 진정한 컬쳐시티가 될 것이다. 여기에 보통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문화적인 소양이 자라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선진국들처럼 박물관 전시관 음악당 등 문화시설을 충분히 갖추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당장 이런 하드적인 시설이 없이도 가능한 부분들도 있지만 여러 기능이 다각도로 맞물려 쌍두마차처럼 균형을 유지해야 진정한 문화예술이 꽃피울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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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9.18 23:02

방석집의 추억

가장 한국적인 도시라는 우리 전주에도 옛날에 방석집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모르긴 해도 칠십 년대에 대학을 다니면서 술깨나 마셨던 이들의 가슴 한쪽에는 방석집에 얽힌 추억 한두 개쯤은 찰랑거리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방석집도 급수가 있었습니다. 흔히 요정이라고들 불렀던 고급 한정식집이 윗자리였겠지요. 'OO정'이나 'OO회관'들 말입니다. 그곳에서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젊은 아가씨들이 즉석에서 따끈따끈하게 구워주는 가야금 소리가 고급술의 감칠맛을 더해주었을 겁니다. 하지만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대학생들한테 그런 술집은 아득한 나라의 얘기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술 따라주던 여자들 속치마에 땟국물 마를 날 없어도 오가는 인정 하나는 푸지고 걸쭉했던 방석집은 따로 있었습니다. 갖은 반찬과 찌개 안주로 막걸리를 퍼마시다 흥이 나면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 옆구리에 젓가락 장단을 두드리며 송창식과 어니언스를 돌려가며 불러재꼈던 그 방석집 출입문 이마에는 대개 'OO집'이라고 적힌 함석 간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술값 착한 OO집들은 주로 전주역(현재의 시청사 자리)하고 덕진공원 근처에 몰려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술값 대신으로 싸구려 손목시계까지 선뜻 받아주던 주인아주머니의 인심만은 큰이모의 팔뚝처럼 넉넉했습니다. 내가 아는 어떤 선배는 친구들이 술값 얻으러 나간 사이 볼모로 잡혔다가 곁에서 술에 취해 졸고 있는 색시를 방석 위에 자빠트린 적도 있다며 가끔 우쭐대기도 하는 걸 보면 그 OO집들에는 댄서 같은 순정도 넘쳐났던 것이지요. 그런 방석집도 이제는 시대변화에 따라 전성기의 모습을 찾기 어려워졌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의 그 방석만은 세월을 거슬러 이 도시의 제법 괜찮은 한정식집을 고슬고슬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거의 모든 삼겹살집까지도요. 겨울에는 솜방석, 여름에는 대자리 방석. 그런 걸 보면 이 도시의 음식점 사장님들은 너나할 것 없이 그 시절 방석집이 못내 그리운 모양입니다. 아니면 우리네 전통적 난방문화 만큼은 잘 보존해서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 있거나요. 사실 이건 방석집에서 술 한 번 푸지게 마셔본 적 없으면서 엉뚱하게도 그 방석 때문에 간혹 곤혹스러울 때가 있어서 늘어놓는 푸념입니다. 학내의 보직 때문에 나는 외국에서 우리 대학을 찾아온 손님들을 접대할 일이 자주 있습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처음에는 멋모르고 유명 한정식집부터 예약했습니다. 그런데 입구에서 신발을 벗는 것조차 생소했던 그 중국 손님들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한 순간도 편하게 앉지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소위 G20 국가들 중 방석에 엉덩이를 깔고 책상다리로 식사를 하는 나라는 아마 우리뿐일 겁니다. 그런데도 이 도시의 대중음식점들은 가는 곳마다 신발부터 냉큼 벗고 올라와서 방석을 깔고 앉으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런 식사 자세는 소화불량 등 각종 내외과 질환의 원인이라는 학계의 보고도 있는데 말입니다. 하긴 모름지기 식사는 방석을 깔고 책상다리를 틀고 해야 제격이고 품격도 높아진다고 하면 할 말이 없긴 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다들 아파트 생활을 하고, 또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합니다. 그러다 보니 방석을 깔고 앉는 게 웬만큼 익숙해 있는 우리도 허벅지가 저리고 무릎이 쑤시는 판에 책상다리 자체부터 생소한 외국인들은 오죽할까 싶습니다. 그러니 외국손님을 맞을 때마나 의자에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있는 마땅한 음식점을 찾지 못해서 곤혹스러울 수밖에요. 하여튼 전통문화를 잘 보존하고 있는 가장 한국적인 도시 전주에서 국제교류 업무를 제대로 추진한다는 게 이래저래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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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9.11 23:02

장수가야는 '봉수(烽燧)왕국'이다

백두대간이 가야의 서쪽 자연경계를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백두대간 산줄기 서쪽 금강 최상류인 장수군 일대에서 가야계 왕국으로까지 발전했던 장수가야의 존재가 새롭게 밝혀지고 있다. 진안고원에서 유일하게 장수군에만 가야계 지배자 혹은 지배층 무덤으로 추정되는, 가야계 고총이 200여 기 정도 남아있다. 장수군 일대에 지역적인 기반을 두고 가야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웠던 장수가야의 정체성은 한마디로 '봉수왕국'이다.봉수란 낮에는 횃불과 밤에는 연기로써 변방의 급박한 소식을 중앙에 알리던 통신제도이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근대적인 통신제도가 도입되기 이전까지 개인정보를 다루지 않고, 오직 국가의 정치군사적인 전보기능만을 전달했다. 그리하여 가야계 왕릉 못지않게 가야계 왕국의 존재여부를 방증해 주는 가장 진솔한 고고학 자료이다.진안고원 일대에서 삼국시대 봉수가 최초로 그 모습을 드러내 역사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현재까지 80여 개소의 봉수가 장수군을 여러 겹으로 에워싸듯이 배치되어 있다. 이들 봉수는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내륙교통로가 잘 조망되는 산봉우리에 입지를 두었다. 그리고 산봉우리 정상부에는 대체로 장방형의 토단을 만들고 돌로 쌓은 석성을 한 바퀴 둘러놓았다.그런데 봉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봉수로의 최종 종착지가 어딘가이다. 충남 금산군과 전북 무주군진안군임실군, 남원시 운봉읍에서 시작된 여러 갈래의 봉수로가 모두 장수군에서 만난다. 조선시대 때 전국의 5대 봉수로가 서울 남산에서 합쳐지는 것과 똑 같다. 전북 동부지역 봉수로의 최종 종착지가 장수군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이들 봉수의 운영주체는 장수가야와의 관련성이 가장 높다.우리나라에서 산성 및 봉수의 밀집도가 가장 높은 곳이 진안고원이다. 아마도 선사시대부터 줄곧 교통의 중심지이자 전략상 요충지인 진안고원을 장악하려는 삼국의 정치군사적인 목적과 관련이 깊다. 제일 먼저 백제가 진출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웅진 천도 이후 한 동안 정치적 불안으로 영향력을 갑자기 상실하게 되자, 이를 틈타 장수가야가 백제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봉수를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이 무렵 신라도 백두대간의 덕산령을 넘어 무주군 무풍면 일대를 장악하고 그 여세를 몰아 진안군과 금산군까지 신라의 영향권에 포함시켰다. 그리하여 진안군과 무주군, 금산군 일대에서 백제와 가야, 신라의 유적과 유물이 공존한다.진안고원을 차지하려고 백제와 가야, 신라가 서로 치열하게 각축전을 펼쳤다. 그러다가 장수가야가 백제에 복속되었고, 백제의 멸망 이후에는 진안고원이 더 이상 주목을 받지 못했다. 아마도 백제의 수도와 진안고원을 왕래하던 내륙교통로가 끊긴 것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렇다면 가야계 왕국으로 장수가야의 발전과 삼국의 각축장으로 진안고원이 막중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가 그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사실 삼국시대의 봉수와 관련된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고단한 지표조사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오늘도 전북 동부지역 봉수를 찾고 알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고고학자들의 도전과 열정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운봉고원의 야철지와 함께 장수가야의 봉수도 전북과 전북인이 꼭 기억해야 할 우리 선조들의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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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9.04 23:02

문예진흥기금 단상(斷想)

Good9월이 오고있다. 문화예술인들의 가장 큰 언덕이자 디딤돌인 문화예술진흥기금 지원금 사업들이 9월부터 러시를 이룬다. 문예진흥기금은 1972년 공포된 문화예술진흥법을 근거로 조성됐으니 새마을운동과 비슷한 시기에 탄생했다. 흰쌀밥 먹기가 죄스럽던 가난한 시절임에도 사회구성원 중에 문화예술인이 더욱 어렵다하여 창작활동을 돕기 위한 기금이 조성됐으니 참 고마운 일이다. 문화예술인들에게는 일용할 양식과도 같은 이 기금은 그동안 착실히 운용됐고 우리도의 경우 도세에 비해 꽤 짱짱한 기금규모를 갖고 있다. 연말이면 문화예술인들은 다음해 사업계획을 세워 기금사업 제안을 하고 연초 심사 선정이 이뤄져 봄부터 사업이 시작되지만 여름 휴가기간을 거쳐 9월이 돼야 모든 장르에서 본격적인 활동이 개시된다. Better언제부터인가 문예진흥기금이 아마추어나 동호인들도 노려봄직한 '만만한' 기금이 됐다. 선정된 사업과 단체 목록을 살펴보면 씁쓸함을 금할 길이 없다. 문화예술계에서 일하는 이라면 누구나 골라낼 수 있는 비전문가의 사업들이 상당수 포함돼있다. 문진금은 문화예술을 업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창작활동을 돕는데 사용돼야한다는 본래의 취지는 빛을 잃어가고 있다. 지방자치제 이후 시민의 문화향유가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 잡으면서 빚어진 일이다. 당초 시민의 문화향유란 문화예술인의 성과물을 더 많은 시민이 누리게 하자는 것이지 시민이 직접 만들어내는 문화예술을 문진금이 지원해야한다는 취지는 아니었다. 시민이 만들어내는 문화예술은 '사회단체보조금'등에서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경제적 양극화와 상대적 결핍감속에서 문화예술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 문진금만큼은 문화예술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Best우리 문화예술계 일부에서는 문진금을 당연한 선물로 여기는 풍조가 있다. 문진금은 내가 속한 공동체의 양보와 배려 속에서 형성된 기금이다. 기금을 혹시 '눈먼 돈' 쯤으로 여기지 않았는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수십년 받아온 기금이기 때문에 관성이 붙어 도덕적 책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나 되돌아봤으면 한다. 많은 사람들의 양보로 내게 주어진 이 돈을 써도 좋을 만큼 내 준비가 충분한가, 나는 최선을 다했는가, 끝없이 스스로 검증해야 한다. 내 준비가 부족하다면 나보다 더 준비가 잘된 이들에게 양보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수많은 문진금 사업이 튀어나오는 가을, 시민들이 문화예술의 향연에서 무엇부터 선택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즐거운 비명이 아우성을 이루도록. Beyond best우리는 언제쯤 문진금이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문화예술계 달력에서 1~3월은 암흑기에 해당한다. 문진금 접수와 심사, 선정이 이뤄지는 시기, 기금이 가동되지 않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문진금이 없으면 활동을 못하는, 혹은 안하는 현실이다. 문화예술인은 이 3개월 동안 밥을 먹지 않나? 시민의 문화향유는 3개월쯤 유예돼도 좋은가? 지난 40년동안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문진금의존증에 걸린 것은 아닐까. 문화예술인의 건강한 삶은 자신의 예술을 팔아 생활할 때 가능한 것이다. 미술작품과 공연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문화예술인이 생활인으로서 자존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더 많이 공연하고 그림 그려야 한다. 문진금을 넘어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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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8.28 23:02

쾌락을 넘어선 삶의 자양분으로서의 역할

필자가 대학 강단에서 미술이론 및 실기를 지도하고 있지만 미술이론에서 특히 미학강의는 수강자와 소통이 가장 어려운 과목이기도하다. 미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쾌락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쾌락주의적 예술이론가들은 쾌락을 예술작품의 가치를 매기는 척도로 사용한다. 극단적인 쾌락을 제공하는 작품이 최고며, 미적 경험을 쾌락으로 간주한다. 이 이론은 미의식에 대해 심리학적 접근을 가능하게 만들어 미학이론을 가장 직접적으로 접근한다. 더 나아가 고통 또는 불쾌를 부정적 가치로 동일시하며 윤리적 가치를 논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술적 가치를 일원론적으로 접근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쾌락은 예술 향유 효과들 중 한 부분이지 전체가 될 수 없다. 또한 극단적으로 쾌락을 쫓은 작품의 경우에는 고통으로 환원되는 현실과 동떨어진, 현실 도피적 경향을 띰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그러나 예술적 향유측면에서 어렵고 난해한 미학적 지식이나 예술사적 관점과 선입견을 일단 접어 두고 연주나 그림의 수준이 좀 떨어지더라도 상관이 없다. 고급문화만이 훌륭한 문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문화적 감수성은 타고 나는 것도 있지만 자라면서 듣고 보며 형성되는 것도 있다. 특별한 사람들이 향유하는 고급문화만을 문화라고 생각하는 관점은 기껏해야 비뚤어진 엘리트문화 의식만 생길 뿐이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 공원을 발견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기저기에서 수많은 공원들이 조성되고 있다. 각박한 도시 속에서 긴장하며 살아가는 도시인에게는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디 그뿐인가 대형빌딩과 거대한 아파트 단지 내에는 어김없이 공공조형물이 설치되어있다. 이처럼 공공예술 측면에서 보자면, 미술작품은 미술관, 화랑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변 곳곳에 미술작품이 있다. 도로와 공원. 광장 여기저기에 세워진 조각이나 설치 작품들과 공공건물 내. 외벽에 그려진 벽화 같은 것들 말이다. 이렇게 일상의 생활영역에 배치된 미술작품들은 성격상 미술관과 화랑에서 전시중인 작품들 보다는 공공성의 문제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공예술품 특히 야외에 전시된 조각에 대한 어떤 고정 관념을 갖고 있다. 이 같은 고정관념은 조각이라는 것은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형태와 모양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과 예술은 잘 모르겠지만 뭔가 예술적인 분위기가 풍겨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예술은 예술품 같아야 한다거나 조각은 조각 같아야 한다는 고정된 인식이 강하다. 그러나 공공조형물은 사람들에게는 문화향수권의 신장과 정서적 안정을, 작가들에게는 예술 활동에 대한 지원과 창작활동의 자극제 역할을 하게 된다. 나아가 지자체에게는 새로운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문화상품으로서도 자리매김 할 수 있다. 또 다른 유형의 공공미술은 수용자와 사용자의 견해와 참여를 보다 중시하는 작업이다. 많은 미술가들은 소외지역이나 생활현장에 개입해 지역주민들과 직접 소통하고 그 소통에 기초해 작업을 진행한다. 미술대학 학생들이 지역주민들과 연계하여 벌이는 거리미술전이나 지역주민들과의 소통을 전제로 시도된 공공미술 프로젝트들이 이 경우에 속한다. 이렇게 공공미술을 개인과 사회집단의 여러 이해가 서로 맞물려 있는 논쟁의 장 속에 있다. 공공미술에는 개인적인 가치와 공공적인 가치가 함께 공존하며 서로를 의지한다. 이 양자는 때론 격렬히 다투면서, 때로는 타협하면서 우리의 도시 풍경을 직조해 왔다. 이 양자의 긴장이 적절하게 조율 될 때 우리 도시는 좀 더 아름다워지고 보다 풍요로운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예술작품은 항상 우리주변에서 쉽게 만나고 접할 수 있을 때만이 쾌락의 차원을 넘어서 진정한 삶의 자양분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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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8.21 23:02

붙인다고 다 이름인가

내 일터가 있는 삼례에서 우리는 가까운 봉동으로 국수를 먹으러 가곤 합니다. 삼례와 봉동을 잇는 길은 몇 년 전에 4차선으로 시원하게 뚫렸는데, 그 덕택에 짧은 점심시간에도 맛있는 국수를 먹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지요. 근데, 봉동 가는 이 길 이름이 뭔지 알아요, 형님들? 지난주에도 동료교수 넷이 모여 국수를 먹으러 가고 있었는데, 핸들을 잡고 있던 후배교수가 뜬금없이 그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아, 이 사람아 안 봐도 비디오지, 그것도 몰라? 평소 우스갯소리를 잘하는 다른 교수가 대뜸 말을 받았습니다. 역사적으루다 보더라도 서울하고 부산을 연결하는 고속도로 이름은 경부선, 서울 춘천은 경춘선, 서울 인천은 경인선, 부산 마산은 부마고속도로, 전주 군산은 전군도로, 아, 요새는 천안논산고속도로라고도 안 허든개비, 그럼 뭐겄어? 이건, 틀림없이 삼봉로 아니면 봉삼로다. 아니면 내가 오늘 국수값 쏜다. 어, 맞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후배교수가 핸들을 쥔 채 콜럼버스처럼 탄성을 질렀습니다. 저 표지판에 정말로 삼봉로라고 적혀 있잖아! 아닌 게 아니라 창밖으로 보니 거기에는 녹색 바탕에 흰 글씨로 '삼봉로'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습니다. 어디 길 이름뿐인가요? 다른 교수 한 사람이 거들고 나섰습니다. 상암월드컵경기장, 대전월드컵경기장, 광주월드컵경기장, 전주월드컵경기장. 야구장도 잠실구장, 광구구장, 대전구장, 그러니까 담당 공무원들 입장에서는 축구장이든 야구장이든 그냥 아무 생각없이 그 동네 이름만 갖다 붙이면 골치 아프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만사형통이다 그거지요. 영 맛대가리가 없긴 하지만 말이지요.정말 그러네? 진북터널, 어은터널도 마찬가지잖아? 전북도청 신청사를 연결하는 다리도, 거 규모만 보면 제법 근사하게 지었던데 이름은 떡하니 효자다리라고 썼데? 그게 효자동에 있으니까 그랬겠지만, 하다못해 도청다리라고만 했어도 좋았잖아. 하긴, 효자대교라고 안 붙인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명색이 맛과 멋의 고장이니까, 안 그래? 아, 삼례가 어디여? 동학농민혁명 때 2차 봉기가 일어난 유서 깊은 동네잖어? 항일 농민운동의 발상지라고도 헐 수 있는디, 그럼 이 길을 갖다가 동학농민혁명길이라고 쓰면 누가 잡어가나? 그게 암만해도 길다 싶으면 그냥 동학로나 동학길이라고 써도 무방하고, 그러면 애들한테 교육효과도 있을 거란 말이지, 안 그래?소박하게 봉동을 중심으로 해서 생강길이라고 하는 건 어떨랑가요, 성님들? 후배교수가 짐짓 사투리까지 섞어가며 다시 나섰습니다. 아, 봉동 하면 전국적으로 알아주는 생강 생산지라고 하잖아요. 거 좋네. 그 말을 듣고 봉게 이 봉삼로에서 생강 냄새가 코를 찌르는디? 우리는 그렇게 낄낄거리면서 국수집으로 향했습니다. 국수를 맛나게 먹고 후배교수가 주차장에서 차를 가져오는 동안 나잇값들 하느라고 우리는 거리에서 이쑤시개질을 열심히 해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만 눈앞에 서 있는 도로 안내표지판을 보고 또 실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화살표와 함께 공영주차장의 위치를 알리는 문구가 한글로 적혀 있었는데 문제는 그 아래 병기한 영문표기였습니다. '공영주차장' 아래 GONGYOUNGJUCHAJANG이라고 적혀 있었던 것이지요. 도대체 이걸 누구더러 읽으라는 것인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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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8.14 23:02

운봉고원은 '철의 왕국'이다

지난달부터 국립전주박물관에서는'운봉고원에 묻힌 가야무사'라는 주제의 발굴유물 특별전이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남원 월산리 발굴유물을 중심으로 운봉고원의 가야이야기를 잘 담아냈다. 가야계 무덤에서 최초로 그 모습을 드러낸 중국제 청자인 천계호(天鷄壺)와 쇠로 만든 자루솥을 비롯하여 당시 보물급 유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1500년 전 운봉고원에 묻힌 가야무사가 담아낸 운봉고원은 한마디로 '철의 왕국'이다. 우리나라에서 철불의 첫 장을 열어서 '철불의 본향'으로 평가받고 있는 남원 실상사도 운봉고원을 지킨 호국사찰이다.최근에 지리산 국립공원 내 달궁계곡에서 야철지가 발견됐다. 마한 왕의 달궁터를 중심으로 남쪽 하점골과 남서쪽 봉산골이 여기에 해당된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겨 철 생산유적을 찾는데 고고학자들의 도전과 끈기가 요구됐다. 당시에 철광석을 녹여 철을 생산하던 제련로가 있었던 곳에는 5cm 내외의 크기로 잘게 부순 철광석이 봉분처럼 쌓여있다. 철광석의 채광부터 숯을 가지고 철광석을 환원시켜 철을 추출해 내는 제철공정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제 막 문을 연 철의 유적공원을 연상시킬 정도로 유적의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에 가까워 대자연의 원시림을 방불케 한다.백두대간의 만복대에서 바래봉까지 이어진 산줄기 서쪽에도 3개소의 야철지가 있다. 운봉읍에서 지방도를 따라 정령치로 향하면 선유폭포에 도달하는데, 그 부근에 쇠똥이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다. 남원 고기리 야철지로 운봉고원에서 발견된 야철지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세걸산 서쪽 금새암골에도 수철리 야철지가 있는데, 수철리라는 마을의 지명도 철 생산유적에서 유래됐다. 해마다 5월 철쭉제로 유명한 바래봉 서쪽 골짜기에도 철광석을 볼록하게 쌓아놓은 산덕리 야철지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야철지의 밀집도가 가장 높은 운봉고원은 또 다른 야철지가 더 발견될 것으로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2100년 전 마한의 왕이 진한의 전쟁을 피해 달궁계곡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곳에서 70년 넘게 나라를 다스렸다. 100여 기의 말무덤과 가야계 고총으로 상징되는 운봉가야는 150년 넘게 가야왕국으로 발전했다. 1500년 전 백제 왕이 보낸 천계호와 쇠로 만든 자루솥도 운봉고원 내 가야계 고총에서 출토됐다. 아직까지 김해의 금관가야나 고령의 대가야에서 출토되지 않은 최고의 위세품으로 운봉가야의 역사적인 위상을 최고로 높였다.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은 운봉고원이 철의 생산부터 주조기술까지 응축된 당시 철의 테크노밸리였음을 웅변해 주었다.인류의 역사 발전에 철의 공헌도가 매우 높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고대국가를 출현시켰고, 대가야가 후기 가야의 맹주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도 철의 힘이다. 운봉고원을 무대로 찬란히 꽃피웠던 마한 왕의 달궁터도, 운봉가야의 눈부신 발전상도, 우리나라의 철불이 실상사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역사적인 배경도, 모두 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봉고원 내 철 생산유적의 분포양상과 그 연대를 밝히기 위한 한 차례의 학술조사도 추진되지 않았다. 우리 선조들의 위대한 문화유산인 운봉고원의 야철지는 전북과 전북인이 꼭 기억해야 할 우리의 역사다. 그럴 때 운봉고원이 '철의 왕국'으로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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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8.07 23:02

북경 798에서 전북미술이 배워야 할 것들

2주 전 중국 베이징 아트투어를 다녀왔다. 우진문화재단이 1994년부터 진행해온 '청년작가초대전'의 역대 초대작가 33명을 초청한 프로그램이었다. 우리 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작업하는 작가군으로 불리는 이들이지만 나라밖 미술이 어떻게 변화하고 트렌드는 무엇인지 직접 경험하여 예술적 자극을 받아보자는 재단 설립자의 의지가 있었다. 4일간 북경의 대표적 예술구인 다산즈(大山子) 798과 쑹짱(宋莊), 허거쯔앙(何各庄) 등지를 탐방했다. 중국에 최초로 상업갤러리가 생긴 것은 1991년, 이로부터 10여 년 후인 2002년경 북경의 798지역이 예술구로 개발되기 시작했으며 다시 10여년이 흐른 지금 북경은 아시아미술의 중심일 뿐 아니라 세계미술의 손꼽히는 현장이 되어있다. 북경의 예술구는 창작열에 불타는 작가들 스스로 조성하기 시작했다. 쓸모없이 버려진 공장지역에 미술가들이 하나 둘 모여 작업실로 활용하면서 상업갤러리가 따라 들어서 규모화 되자 아시아서구권의 유명 갤러리와 컬렉터가 모여들어 거대한 예술구가 형성된 것이다. 예술구에서 본 중국은 자본주의 체제인 우리보다 훨씬 전위적이며 실험적이고 상업적이다. 다산즈에만 9000여 명의 전업작가가 상주하는데 이들은 국가 보조 없이 작품을 팔아서 생활하고 있다. 다산즈의 임대료가 치솟고 포화상태에 이르자 자연스럽게 비용이 덜 드는 장소를 찾아 형성된 것이 쑹짱과 차오창티, 허거쯔앙 등 다른 예술구들이다. 북경 예술구에서 우리 일행은 그 규모에 경악했다. 다산즈만 200여 개의 창작실과 400여 개의 화랑이 밀집해있고 카페와 디자인회사, 아트샵이 공존한다. 연간 160여 건의 미술품경매가 이뤄지고 2조원 규모의 미술품이 거래되고 있다. 다산즈만큼의 거대규모는 아니더라도, 우리 지역에서 작업실의 집중화는 가능한 일이다. 웨딩거리, 가구거리에서 보여지듯 집중화는 그 분야의 활성화에 한 몫 한다. 작가들이 모여 있다 보면 서로의 작업을 지켜보게 되고 긴장과 협력관계가 조성된다. 작가의 작업실은 문을 열어두면 그대로 갤러리가 되어 컬렉터를 바로 만날 수 있다. 외부인을 만나기 싫은 날은 문을 걸어두면 된다. 전북도가 추진하고 있는 '문화예술의 거리'는 이러한 맥락에서 추진돼야 한다. 작가의 작업실과 락 카페와 같은 상업시설을 동시에 추진하면 둘 다 실패할 확률이 높다. 문화시설은 자발적 추진을 뒷받침하는 지원에 의해, 상업시설은 상업적 수요가 있을 때 100% 민간자본으로 형성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북경에서 또 하나 절실하게 느낀 것은 우리 작가들의 해외진출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해외 아트페어 등 현재 진행하고 있는 해외 전시지원을 좀 더 강화하고, 소수인원이라도 우리 작가를 해외 스튜디오에 6개월~1년 정도 상주시키는 지원이 절실하다. 북경만 해도 현대미술의 블루칩으로 불리는 인도 등 아시아권과 유럽미국, 호주 등지의 작가들이 둥지를 틀고 작업 중이다. 작업능력과 열정을 갖고 있는 우리 작가가 세계의 작가들과 나란히 겨루고 자극받으며 치열하게 작업하고 상업적 능력을 갖춘 전문갤러리를 통한 판로개척에 나설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우리 지역에서도 키아프(KIAF)나 마니프(MANIF) 등 대규모 아트페어를 경험한 작가들이 작업의 변화를 갖고 역량을 키워 작품판매를 늘려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예술가 해외파견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나 전북과 같은 변방의 작가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국가사업에 끼워주기를 마냥 기다릴게 아니라 한 두 명이라도 우리 힘으로 먼저 보내기 시작해야한다. 장샤오강이나 위에민준과 같은 스타작가를 통해 중국미술이 동반성장하여 세계현대미술시장의 2위를 점하게 된 사례를 새겨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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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7.31 23:02

일상생활 속의 문화와 예술

대부분의 사람들은 흔히 문화예술이란 예술가와 문화예술 관련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처럼 인식한다. 일반인들과는 거리가 먼 고급문화, 또는 이해할 수 없는 정신세계라고 여긴다. 그러나 아무리 심오한 예술이라 해도 그 근원은 우리 주변의 가장 일상적이고 평범한 생활에서 비롯된다. 사람은 누구나 예술 속에서 살아간다. 다만, 아름다움과 특별함을 알아보는 눈과 그것을 느끼는 마음이 사람마다 다를 뿐이다. 그러나 일상에서 문화와 예술을 누린다는 것은 마음처럼 쉽지만은 않다. 최근 우리나라는 문화 예술이라는 단어가 우리 주변에서 자주 만날 수 있고 그런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이 많이 조성되어있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문화의 범위를 알지 못하며, 문화생활과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한다. 문화와 예술이라는 범위가 워낙 크고 다양하나 자세히 보면 대부분의 문화생활을 우리 주변에 쉽게 열려져 있다. 대중문화에 대하여 대다수 사람들은 다른 생산된 물건들을 살 때처럼,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손쉽게 돈이라는 교환 수단을 통하여 교환할 수 있는 생산물이라는 생각을 하는 듯 보인다. 여기에는 향유라는 느낌보다는 소비라는 느낌을 강하게 지니는 것을 보게 된다.아는 것만큼 본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예술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수반될 때 가능하다. 하지만 실생활에서 우리 자신도 모르게 예술적 향기를 쉽게 느껴보고 음미하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인간의 의식주로서 먹고, 마시고 자고, 움직이고, 보고, 듣고, 만지는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이 예술과 맞닿아 있다. 음식의 맛을 통해 미각과 좋은 음악을 듣고 평온한 마음을 영화 한편을 보고 감동을 미술관에서 훌륭한 그림 한 점 을 보고 감동을 받을 때가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우리는 항상 문화예술 홍수 속에서 살고 있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문화예술이다. 너무 가까이 혹은 이미 우리 생활 곳곳에 녹아들어 있어 판단을 유보할 따름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TV를 켰을 때 가장 세련된 광고를 보고, 잘 꾸며진 드라마 세트장, 출연진들의 의상과 패션, 메이크업에 시선을 돌린다. 평소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앙증맞고 예쁜 소형 가전제품들, 책 내용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는 표지 디자인과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디자인으로 업그레이드 된 스마트폰, 패션 잡지 속의 모델들, 새로운 차가 나오면 연비는 관심 없고 디자인과 컬러에 먼저 관심을 보이는 소비자들, 현대 사회는 거대한 예술의 용광로라는 틀 속에 흡수되고 녹아들기 마련이다. 이처럼 예술은 미술책에서나 보는 먼 나라 얘기가 아니다. 생활 속으로 성큼 들어왔다.갤러리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예술을 이제는 욕실과 주방, 입고 있는 옷에서도 볼 수 있다. 벽지만으로도 침실 벽을 우아하게 인테리어를 할 수 있고, 수억 원을 호가하는 고흐의 그림도 주방에서 아침저녁으로 감상할 수 있다. 수백만 원짜리 명품보다 아티스트의 그림이 그려진 의상 한 벌로 한층 품격이 높아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이만큼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가 불투명해졌고, 이제 각자 삶의 문화적 토대에서 예술을 즐길 수 있다. 과거 예술에 대한 전통적 개념은 이미 바뀐 지 오래고 떨쳐낼 필요가 있다. 예술이 가진 창의성과 수용성 그리고 다양성을 우리는 각자 상호소통적인 관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예원대 미술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미술평론가 화가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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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7.24 23:02

그래도 세상은 아름답다

야, 세상 참 요지경속이더라. 안주로 나온 파전을 간장에 찍으면서 친구가 입을 열었습니다. 비도 오는데 낮술이나 한잔 하자고 해서 함께 막걸리잔을 비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며칠 전에 말이다, 이 몸이 자동차 사고를 덜컥 냈다는 거 아니냐. 신호대기를 하고 있다가 잠깐 딴생각을 하는 바람에 앞차가 출발하는 줄 알고 무심코 브레이크에서 발을 뗐는데, 이게 스르르 밀려가다가 그만 앞차를 추돌하고 말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엑셀을 밟은 것도 아니니까, 그냥 갖다 댄 수준이었거든. 친구는 앞차에서 내린 젊은 부부한테 어디 다친 데는 없냐고 묻고, 교통이 혼잡한 퇴근시간이고 해서 명함을 교환한 다음 보험처리를 약속하고 자리를 떴다고 했습니다. 그럼 됐네? 요즘에는 보험회사에서 다 알아서 처리하잖아.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순진무구하게도.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 왜, 또 뭐가 문젠데? 사고접수를 하고 이틀인가 지나서 보험사 직원이 전화를 했더라. 그 친구가 사고처리 경위를 설명해주는데, 세상에 뭐 그런 사람들이 다 있냐? 보험사에서는 피해자가 원하는 공업사에 자동차 수리를 맡겼고, 그 기간에 타고 다닐 차량도 임대해 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이다, 그 운전자하고 배우자가 목이 뻐근하다면서 병원에 입원을 했다는 거야.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추돌이라고 할 수도 없는 사고였거든. 짐작이 갔습니다. 젊은 부부는 일반 상해보험 같은 걸 가입해서 보험금을 타려고 했을 것이고, 병원에서는 또 환자가 아프다니까 상해 정도에 관계없이 입원을 시킨 게 뻔했습니다. 보험사로서야 현행법상으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을 것이고. 친구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몇 년 전 일이 떠올랐습니다. 나도 비슷한 사고를 겪은 적이 있습니다. 신호대기를 하고 있다가 뒤에서 추돌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뒷차 운전자는 만취상태였는데, 행색을 보니 험한 일을 하는 사람 같았습니다. 나는 다친 데가 없다, 내 차 범퍼만 교환해 준다면 보험사든 가해자한테든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걸 약속한다, 대신 저 운전자의 음주사실만은 문제를 삼지 말아 달라. 현장에 도착한 보험사 직원에게 나는 쉽게 결정하고 부탁했습니다. 저런 만취 운전자한테 사고를 당했을 때는 맘만 먹으면 기백만 원은 거저 손에 쥘 수 있거든요. 나를 집으로 태워다주면서 그렇게 말하는 보험사 직원에게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착한 일을 했으니 언젠가는 좋은 일이 생기겠지요. 야, 나는 말이다, 그런 사고를 갖고 병원에 입원해서 보험금을 타내려는 사람도 문제지만, 양심을 파는 의사들은 거의 범죄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하긴, 당장 수입이 보장된 환자를 앞에 두고 의사로서의 양심 따위가 무슨 대수겠냐. 내 잔을 채워주는 친구의 씁쓸해하는 낯빛을 보면서 나는, 요즘 경기도 어렵다는데 그 젊은 부부가 보험금으로 이번 여름휴가를 잘 다녀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친구도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하긴 그 사람들도 품위유지를 제대로 하고 살자면 의사로서의 소신 따위에 연연해서는 안 되겠지? ※ 송 교수는 진안 출신으로 전북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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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7.17 23:02

철불 제자리 찾기에 큰 관심을

우리 선조들이 쇠에 장인의 혼을 불어넣어 예술적인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이 철불이다. 얼마전 실상사에서 '실상사 가람배치와 철불 제자리 찾기'라는 주제로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실상사 철불의 역사성과 본래의 봉안처를 찾기 위한 주제발표와 각계 전문가들의 열띤 토론 속에서 진행됐다. 이번 행사를 계기로 실상사의 오랜 숙원사업인 철불 제자리 찾기에 큰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남원 실상사는 구산선문 최초로 문을 연 실상산파의 본사로 흥덕왕 3년(828) 당나라에서 귀국한 홍척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다. 흥덕왕은 김헌창의 난 때 동조세력이 많았던 남원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홍척을 국사로 삼고 실상사의 창건을 후원했다. 840년 홍척국사 입적 이후 제자 수철화상이 실상산문의 2대조에 올랐고, 문성왕의 후원으로 실상사의 사역을 확장하는 과정에 철불이 조성됐다는 것이다. 신라하대의 철불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철조여래좌상이 만들어져 우리나라에서 철불의 첫 장을 열었다. 그리하여 남원 실상사가 철불의 본향이다.실상사 철불은 옆으로 뻗은 눈과 짧은 코, 두툼한 입술, 길게 늘어진 귀에 신라하대의 불상양식이 잘 표현되어 있다. 신라하대의 아담한 체구의 돌로 만든 불상과 달리 분할주조법으로 제작된 높이 273cm의 대형 불상이다. 천 년 넘게 사바세계 중생들의 고통과 괴로움을 덜어 준 부처님의 한없는 자비로움이 넘친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측량조사를 실시하여 철조여래좌상의 외형이 40개 이상의 조각으로 분할되어 주조됐음이 밝혀졌다.철조여래좌상의 이름에 대해서는 약사불설, 아미타불설, 노사나불설이 있다. 이번에 주목을 받았던 노사나불설은, 철조여래좌상이 시무외여원인의 노사나불이며, 실상사 창건 당시의 금당인 보광전에 봉안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가지산문의 보림사와 성주산문의 성주사 등 신라하대 선종사찰에서 노사나불을 주존으로 봉안했던 예를 그 근거로 들었다. 어떤 불상을 주존으로 봉안하느냐에 따라 법당의 이름이 결정된다. 노사나불을 주존으로 봉안한 법당을 보광전이라고 부르는 것도 노사나불설에 힘을 실어줬다.실상사에서 철불이 최초로 만들어진 역사적인 배경과 관련해서는 운봉고원의 외부에서만 그 요인을 찾았다. 해상왕 장보고의 해상활동에 힘입어 신라 유학승들이 당나라에서 귀국하면서 불상 재료에 대한 인식변화로 철불이 제작됐다는 것이다. 당시 널리 유행했던 풍수지리나 비보사상에 바탕을 두고 철불을 봉안함으로써 사찰을 지키고 보호하려는 목적도 빼놓을 수 없다. 이처럼 신라하대의 사회경제사상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철불이 실상사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운봉고원이 '철의 왕국'이라는 내용이 다루어지지 않아 향후 과제로 남게 됐다.1996년부터 시작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학술발굴에서 보광전의 최하층에서 철불을 모신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하대의 건물지가 확인됐다. 이 건물지는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내부 면적이 99평에 달한다. 본래 보광전에 주존으로 봉안된 철조여래좌상은 1680년 실상사를 중창하는 과정에 현재의 약사전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50여 체의 철불 중 최고의 걸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이 제자리를 찾아 호국사찰인 실상사가 더욱 융성하길 기원해 본다.※곽 교수는 전북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가야계 왕국인 운봉가야와 장수가야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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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7.10 23:02

판소리 명창, 당신에게

우리에게도 언젠가 부터 로망이 되어버린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natigo), 산티아고 순례길을 아시지요. 예수의 열두제자 중의 하나인 야고보의 무덤을 찾아가는 800km 여정. 프랑스 생장에서 시작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의 산티아고까지 하루 30km를 걸어도 한 달은 걸리는 고단한 길. 피 같은 돈 들여 금쪽같은 시간 들여 그 모진 고생을 하고도 하나같이 벅차오르는 감격에 눈물 흘리는 산티아고 순례길. 이 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판소리명창, 당신을 생각합니다. 소리의 길에 들어선지 얼마나 되셨나요. 공연히 소리가 좋아서 혹은 주변의 권유에 의해 덜컥 이 길로 들어서 명창으로 불리우고 있지만 지금은 솔직히 지치지 않았나요. 소리배우는 과정의 고생에 비해 벌이가 썩 괜찮은 것도 아니고 판소리명창이라는 사회적 지위가 그리 폼나는 것도 아니지요. 애들 교육비나 집안살림에 드는 소용이 소리꾼이라해서 특별히 면제되는 것도 없는데, 누리는 것 없이 책임과 의무는 잔뜩 지워진 당신의 어깨, 많이 눌리어 있지요. 지고지난한 소리의 길에 들어선 소리꾼은 순례자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여정을 홀로 가야합니다. 홀로 무대에 선 당신의 모습은 험준한 산맥과 비바람, 더위와 추위, 거친 노면을 견디는 순례자와 겹치어지는군요. 순례자가 야고보의 산티아고성당에 다다랐을 때의 환희는 당신이 득음의 경지에서 느끼는 경이로움에 견줄만하겠지요.그러나 지금 이 순간 당신을 흔들리게 하는 것은 판소리라는 장르가 과연 지속가능한 예술이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노나 가부키도, 중국의 경극도 모두 같은 고민에 쌓여있다지요. 오죽하면 유네스코가 문화유산이니 무형유산걸작이니 하는 지위를 부여해가며 전통연희의 생존방식에 관여하겠습니까. 20년 넘게 판소리공연을 열어온 문화재단에 몸담고 있는 저는 당신께 조심스럽게 완창으로 돌파구 삼을 것을 권합니다. 완창은 공연형식으로 보면 소리꾼에게나 관객에게 부적합한 양식일지도 모릅니다. 짧게는 3시간, 길게는 7~9시간이 소요되는 긴 공연을 한명의 소리꾼이 하루에 해내는 완창을 두고 과연 누구를 위한 공연이냐고 묻는 이들도 있습니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정면돌파하라는 말이 있지요. 고 박동진 명창은 판소리가 고사위기에 있던 1960년대 50대의 나이에 처음으로 완창을 시도하고 다섯바탕을 내리 완창하여 대중의 관심이 판소리에 쏠리게 하였습니다. 소리를 살리기 위해 탄생한 공연양식이 완창이었던 것입니다. 완창을 준비하는 긴 시간동안 당신은 앳되고 설익은 소리로 책걸이하듯 완창하였던 초심자시절의 포부를 떠올릴 것입니다. 완창은 완창 자체로서의 의미보다 소리의 진면목을 되살리는 힘의 원천으로서의 의미가 크지요.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의 전바탕을 다시 연습한 당신의 소리는 더욱 단단해지고, 깊고도 풍부한 판소리의 예술성에 흠뻑젖은 당신은 다시 순례의 길을 계속할 힘을 얻게 되지 않을까요. 진정한 무대는 지켜봐줄 관객을 갖게되고 소릿길과 순례는 백년 이백년 이어지지 않을까요.※ 김 실장은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한 후 전북대 행정대학원 언론홍보학 석사를 마쳤다. 도내 일간지 기자로 활동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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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7.03 23:02

'오병이어'기적과 노인복지관 북카페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 예수를 쫓아온 무리 중에서 어린아이가 내놓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여자와 어린이는 뺀 숫자)을 배불리 먹였다는 이야기다. 필자는 광주시 광산노인복지관의 '더불어 락(樂) 북카페'를 보면서 오병이어가 떠올랐다. 시설 이용자들이 내놓은 5000원에서 시작해 1억 4000만원의 북카페 건립비용을 관의 도움 하나 없이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한 드라마에서 남자주인공이 울적해 하는 여자주인공에게 신생아실의 갓난아기를 보여주며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일종의 '베이비테라피'다. 광산노인복지관이 6년 된 휴게실을 개조해 북카페를 만들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1세대(노인)와 3세대(아이들)가 자연스럽게 교류함으로써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세대교류공간, 즉 노유(老幼)복합공간으로서 북카페를 구상한 것이다. 문제는 1억4000만원이었다. 주무관청에 도와달라고 눈빛을 보냈지만 신통치 않았다. 그때 누군가 십시일반으로 만들어보자는 말을 꺼냈다. 모두가 공감했고, 곧바로 추진위를 꾸려 노인들을 한명한명 만나면서 기금을 마련했다. '누가 선뜻 돈을 내놓을까?' 우려 했지만 반응이 의외였다. 적게는 5000원에서 많게는 30만원까지 내놓았다. 여세를 몰아 일일호프도 열었다. 그렇게 4900만원을 모았다. 부족한 돈은 재능기부로 해결했다. 돈을 내기 힘든 노인들은 건축, 설비, 전기기술을 살려 공사를 도왔다. 이번에는 지역주민이 나섰다. 주변상점에서 물품을 협찬했고, 한 가구회사는 성탄 전야에 책상과 의자를 직접 들고 와서 열람석 30개를 조립해줬다. 책은 '기적의 책꽂이' 사업에서, 그리고 보험회사와 출판사 등에서 5500권 정도를 기증받았다. 한 초등학교 학생들은 커튼을 보내왔다. 정말 십시일반으로 광산노인복지관에 125㎡의 '더불어 락(樂) 북카페'가 탄생한 것이다. 개관식에는 지역주민 1000명이 초대됐다. 노인복지관 북카페이지만 지역주민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공동의 공간이라는 얘기다. 북카페 안에는 영화도 보고, 락(樂)콘서트도 할 수 있는 정말 작은 무대가 있다. 낮은 책꽂이에는 아동도서가 빼곡해 방과 후 아이들의 좋은 놀이터가 되고 있다. 함께 온 부모들은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고, 아이 옆에서 책을 보는 노인들은 아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치료효과를 얻는다. 주중 밤이나 주말이면 대학생이 찾는다. 저녁 10시까지, 그리고 토요일, 일요일도 문을 열기 때문이다. 도서관 사서와 카페 바리스타 등 인력도 자원봉사다. 광주 광산노인복지관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두 가지다. 공공시설(문화시설, 사회복지시설) 유휴공간을 활용해 세대통합 문화공간으로 만들었다는 것과 이 모든 일을 시설 이용자와 주민 스스로 해냈다는 사실이다. 사회복지시설, 문화기반시설은 관이 책임져야할 공공시설이다. 하지만 시설을 활성화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시설 운영자와 이용자, 나아가 지역주민의 역할이 크다. 그런 점에서 십시일반으로 기적의 북카페를 만든 광산노인복지관 사례는 문화기반시설, 주민자치센터, 사회복지시설, 관청 유휴공간을 문화공간으로 활성화하려는 전라북도가 반드시 눈여겨봐야할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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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26 23:02

'한 문화예술인의 고백'

'문화마주보기'의 마지막 글이다. 아껴둔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그 전에 한 마디. 이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다. 따라서 글의 책임은 모두 '이근영'에게 있다. 술자리의 뒷담화는 가능하나, 현명한 독자라면 비난과 비판과 비평을 필자에게 해 주시라. 이메일([email protected])은 늘 열려있으니. 전주시립극단에 입단한 1986년을 전라북도 문화예술계 데뷔로 치면 어느새 26년이 되었다. 그사이 서울과 광주에서도 일했고, 한 눈도 팔고, 가끔 쉬고, 가끔 놀았다. 그렇다고 해도 15년이 넘는 시간을 전북의 방송계와 문화판에서 뒹굴었다. 지금은 '근영아, 근영 씨, 이근영 씨'라고 부르는 사람보다 '선배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졌다. 문화시설축제지자체사업 등에 대해 필자의 의견을 묻는 기자들도 생겼다. 각설. 필자의 고백은 '한 문화예술인'이 된 사연이다. "○○○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이거 취재에요?""아니요, 우선 공부부터 좀 하려고요."안심한 나는 전화기를 잡은 손이 저려 올 때까지 떠들어댄다. 근질근질한 내 '입'은 잠시 시원해진다. "어머, 어쩜, 저랑 생각이 똑같으세요! 방금 하신 말씀 기사에 써도 될까요?"'아마추어'처럼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댄 나는 머뭇거린다. "어? 그게, 아, 좀.""아! 네, 곤란하시지 않게 잘 써볼게요. 고맙습니다."뱃고동은 진즉 울렸고, 배가 떠난 지도 한참이었다. 그날 나는 해당 신문의 인터넷 판에 관련기사가 올라오는 시간까지 안절부절못했다. 내 의견은 앞뒤가 잘렸다. 가장 자극적인 멘트만 덩그러니 올라가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내가 기자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래도 안심이다. 그 기사 앞에 내 이름은 없다. 다만, '지역의 한 문화예술인'이 있을 뿐이다. '아찔'하면서도 '짜릿'했다. 비록 익명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한 문화예술인'으로 둔갑한 적이 몇 번이었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틀림없이 비겁했다. 부끄럽게도 나의 익명 비평은 문제의 핵심을 변화시키거나 여론을 환기시키는데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한 문화예술인'들은 갈수록 늘었다. 결국 나를 비롯한 '한 문화예술인'들의 주장은 '신뢰와 공감'이 아니라 조롱거리가 돼가고 있었다. 혹시 또 다른 '한 문화예술인'들이 이 글을 보고 있다면 진심으로 부탁드린다. 제발 실명으로 코멘트해주시라! 그럴 수 없다면 하고 싶은 말을 '꿀꺽' 삼키시길. 실명의 의견 하나. 전북 지역 문화계의 일자리는 대부분 1-2년 계약직 신세다. 그러나 계약기간이 남아있어도 해임 될 수 있다는 선례가 생겼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해임에 대한 말이다. 그래서 이 일은 '그 사람의 해임'만이 아니다. 그리고 해임당한 당사자가 과정과 결과를 설명할 일도 아니다. 해임 권한을 가졌던 사람들이 이 일이 '권한 남용'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야 한다. 권한과 책임은 쌍둥이기 때문이다. 그 권한이 정당했음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 영화계와 전라북도 문화예술계 후배들의 눈을 어찌 바라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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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19 23:02

'또따또가'와 '팔길이 원칙'

얼마 전 부산 출장을 다녀왔다.최근 문화예술의 거리의 성공 모델로 뜨고 있는 부산 '또따또가'를 직접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2010년부터 부산 중앙동, 동광동 등 부산의 대표적인 원도심 지역에 조성된 '원도심 창작 공간 '또따또가'. 현재 300여명의 예술가들이 이 거리에 터전을 잡고 3년동안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2012년 문화예술의 거리의 좋은 예로 뜨고 있다. 먼저, '또따또가(T0TATOGA)'라는 용어부터 설명을 한다면, 관용의 의미와 문화다양성을 대신하는 용어인 '똘레랑스(Tolerance)'와 '따로 또 같이'라는 우리말을 조합하여 만든 합성어이다. 예술가들의 창작공간이 때로는 지역과의 협력을 통한 하나의 문화지대를 만들고, 많은 예술가들이 각자의 공간에서 활동하지만 때로는 통합 사업이나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통해 함께 작업해 가는 문화 클러스터를 지향한다는 뜻이다.독특한 이름에서 풍겨 나오듯이 직접 눈으로 본 부산의 '또따또가'는 억지스럽지 않고, 참으로 자연스럽게 운영되고 있었다. 문화예술이 거리라고 해서 도시를 화려한 색의 페인트칠을 하지도 않았고, 헌 건물을 새 건물로 뜯어 고치지도 않았다. 그냥 오래된 건물에 예술인들이 둥지를 틀고, 그 안에서 창작 공간을 조성하고 있었다. 3년 전만 해도 저녁이나 주말에는 사람 구경하기 힘들었던 이 곳에 문화예술의 거리 조성 3년째를 맞자, 서서히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새로운 가게들이 문을 열어 지역 상권이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렇게 '또따또가'는 예술가의 전문적 문화가치와 시민의 보편적 문화가치가 결합되어 창조적 상상력이 넘치는 역동적 프로슈머(Prosumer) 문화시민의 양성과 이를 토대로 문화예술 생태계의 선순환 구조로 잘 운영되고 있었다. 이런 결과가 있기까지 민관의 역할 분담이 모범적으로 잘 진행이 됐다고 한다. 부산시가 문화예술의 거리를 운영하는 센터에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고 있었다. 철저하게 '팔길이 원칙'을 지키고 있었다. 센터를 운영하면서 사업비 지원과 정산때 말고는 공무원 얼굴을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운영자는 부산 문화예술의 거리 '또따또가'의 성공 요인을 철저하게 '팔길이 원칙'을 지켜준 덕분이라고 했다. 다 아시는 것처럼 불필요한 어떤 간섭도 없는 '팔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은 1945년 영국에서 시작됐다. 영국 정부가 1945년 예술평의회 창설했고, 예술을 정치와 관료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서 팔길이 원칙을 채택했다. 영국은 국가주도 지원제도를 피했고, 예술가 사회가 갖고 있는 관료들의 간섭에 대한 깊은 불신을 인식해 팔길이 원칙을 통해 이런 불신을 극복하고자 했다.'팔길이 원칙'은 지원은 하되 간섭은 없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정부가 예술기관에 대해 지원을 하면서도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진다. 정부나 지자체로부터 지원을 받는 사업을 운영해 본 분들은 공무원의 지나친 간섭과 참견을 한번쯤은 경험해 보셨을 것이다. 관의 입장에서 보면,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 알고 있기는 하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문제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예술이 그 본연의 특성을 잘 살려 생명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내버려두어야 한다. 조급함과 보여주기 식을 버리고, 믿고 기다릴 줄 아는 성숙한 문화지원만이 지금 전라북도에서 추진하고자 하는 문화정책들이 성공할 수 있는 지름길일 것이다. '팔길이 원칙' 2012년 전라북도 문화정책에 원칙이 되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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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05 23:02

어린이 전용 문화공간이 필요하다

〈난타〉를 기획한 송승환씨의 한 마디, "어릴 적 보았던 공연의 감동은 집으로 오는 길에도, 잠자리에 들어서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제 가슴에 생생히 살아있습니다." 유럽 국가들은 아동청소년기의 문화예술교육을 강조한다. 집에서부터 학교, 그리고 생활 속 어디서라도 언제든지 문화예술을 배우고, 즐길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어릴 적 경험이 성인이 된 이후의 문화생활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전북발전연구원이 4월에 전북도민 1,1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어릴 적(19세 이전) 문화예술에 친숙했는가를 묻는 질문에 4.9%만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매우 그렇지 않다'가 46.8%, '그렇지 않다'가 16.9%로서, 전북도민 대부분이 어릴 적에 문화예술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전북도민의 직접 예술관람률(연간 1회 이상)이 전국 평균(2010, 67.2%)보다 높지만(2012, 69.5%), 창작발표율은 2.4%에 그치고 있는 것도 어릴 적 문화예술의 경험부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요즘 각광받고 있는 것이 어린이 전용 체험식 핸즈온(Hands-on) 박물관이다. 유리 진열장 뒤에 전시품이 진열되어 있는 전통적 박물관의 개념과 달리 전시품을 직접 손으로 만지고 조작해 볼 수 있는 체험식 박물관으로, 1899년 미국 브루클린 어린이박물관에서 세계 최초로 시작했다. 1980년대부터 급속도로 증가했으며, 현재 미국에만 300여개, 세계적으로 400여개가 운영 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95년 삼성어린이박물관이 처음 문을 열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어린이박물관과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로 독립된 건물로 지어진 경기도어린이박물관은 2011년 개관 이후 대박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개관한 지 2달 만에 10만 관객을 돌파했으며, 올해는 72만명을 목표로 세계 60위권 박물관을 노리고 있다. 핸즈온 박물관 형식을 취한 대전어린이회관도 2010년 개관한 이후에 연간 관람객이 50만명이다. 이밖에도 인천어린이박물관, 청주어린이미술관처럼 '에듀테인먼트' 바람을 타고 어린이 전용 문화공간이 사랑받고 있다. 전라북도 거주자 중에서 초등학생 자녀를 둔 세대는 대략 10만 가구다. 이들은 주5일제가 시작된 이후 주말마다 고민이 깊다. 아이를 데리고 갈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동물원, 도립미술관(앞 놀이터), 한국소리문화의전당(가끔 전북대문화관) 등이 전부다. 몇 주만 돌면 끝이다. 어린이전용공간은 어린이회관 뿐인데, 그나마 문을 연 지 20년이 되면서 시설은 노후화됐고, 전시체험프로그램은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한다. 아이를 데리고 대전으로, 경기도로 갈 수밖에 없다.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만의 전용 문화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전라북도 어린이가 전라북도 문화를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한강과 물'이라는 경기도 문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체험하는 일이 빚어지고 있다. 에듀테인먼트 소비의 도외 유출도 심각하다. 전라북도 곳곳이 어린이 문화천국이 될 수 있도록, 전라북도 어린이가 전라북도 사회문화예술을 경험할 수 있도록, 어린이박물관, 어린이미술관, 어린이극장, 어린이음악홀 등 어린이 전용 문화공간이 필요하다. 어린이 문화체험이 곧 가족(부모) 문화체험이기 때문에 문화복지 차원에서도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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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5.29 23:02

'슈퍼푸드'블루베리와 '로컬푸드'블랙베리

참으로 우연히도 짙은 보라색빛깔을 띄고 시력보호와 노화방지, 피로회복 등에 아주 좋다는 안토시아닌이 다량 함유된 두 가지 식품이 일주일 사이를 두고 우리 공간에 들어왔다. 슈퍼 푸드란 애칭을 달고 있는 블루베리농축액은 신제품 홍보 차 유명회사에서 영업사원이 들고 들어섰다. 원료는 미국산 블루베리농축액 100%, 식품의 유형은 과채주스이고 1회용으로 포장하여 선물용 박스에 담겨져 있었다. 이보다 일주일전 도착한 블랙베리는 완주군의 추천으로 농장에 전화를 걸었더니 '가시 없는 복분자'라고 불리는 열매가 스티로폼 냉장포장에 쌓여 택배로 배달되어 왔다. 아무튼 블루베리와 블랙베리 모두 주스이든 건강식품이든 매우 값비싼 것이고 몸에 좋은 것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았다. 자 이제부터는 먹어 본 소감이다. 먼저 슈퍼 푸드 블루베리 과채주스는 먹기가 '너무' 편리했다. 가위와 컵만 있으면 된다. 그런데 너무 편리한 것이 요즘 너무 흔해서인지 우리 공간에서는 큰 장점이 되진 않았다. 안타까운 것은 입맛만으로는 값싼 포도 주스인지 비싼 블루베리 과채주스인지는 완벽하게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부분 먹어 본 사람들에게 포장용기를 보여주고 가격을 설명한 다음에야 '아 그렇게 몸에 좋은 것이냐?'는 반응이었다. 반면 로컬 푸드 블랙베리는 택배 상자를 열자마자 함께 본 모든 사람의 입에서 '와'하고 탄성이 터졌다. 짙은 보라색의 탱탱한 열매가 눈을 시원하게 하고 입안에 침을 돌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맛있게 먹기 위해선 손이 두어 번 더 가야한다. 요구르트 등 다른 재료에 섞어서 내어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응은 매번 아주 좋았다. 받아든 손님들은 작은 그릇에 담긴 하얀 요구르트와 보라색 블랙베리의 조화로운 색채를 눈으로 먼저 먹고 그 다음 입으로 먹는 것 같았다. 이 정도 되면 이 시음기록은 이미 결론이 났다. 그러나 이 결론은 공평하지 않다. 하나는 '블루베리 농축액'이고 하나는 '블랙 푸드 열매 그 자체'로 비교했기 때문이다. 농축액과 과실의 효능에 대한 비교분석까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변명을 하자면 이 글은 빠듯한 살림에 가족의 건강을 위해 값비싼 블루베리 농축액을 구입하는 소비자를 폄하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 것은 좋은 것이니까 수입농산물은 배척하고 로컬 푸드를 구입해서 농촌을 살리자는 캠페인을 할 정도로 필자가 농촌문제나 생명농업 등에 대한 고민과 실천이 평소에 많았던 것은 더욱 아니다. 필자는 이 글이 건강에 좋은 식품을 고르는 것과 먹는 방법이 다양할 수 있다는 것과 이 다양한 방법을 찾는 창조적인 고민이 바로 '문화'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사람도 살리고 지역도 살리는 '슈퍼 로컬 푸드'를 위해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고 실천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나보다. 장담하건데 식품이나 음식에 관해서는 먹는 것이 불편해도 용서가 된다. '잘 먹었다'는 칭찬에 '먹기 편했다'는 항목의 점수는 아주 낮은 것 같다. 그 보다는 재료 그 자체의 '가치' 가공과정의 '정성', 차림의 '조화' 등이 더 많은 점수를 받는 것 같다. 결론이다. 고작 일주일 시음을 해본 필자의 소견은 이렇다. 블루베리 농축액 보다는 블랙베리 열매가 먹기에는 훨씬 손이 많이 가고 불편하지만 '슈퍼 로컬 푸드'가 될 확률이 높다. 따라서 토마토, 참외, 수박, 포도 등 이 땅에서 건강한 여름을 보내기 위해 먹어왔던 전통적인 과일, 채소들도 아직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하여 주장한다. 생산자를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은 창조적인 고민을 하는 소비자가 "나는 이런 저런 것을 이렇게 저렇게 먹고 싶어요!"라고 까다로운 목소리를 자주 자주 내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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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5.22 23:02

디지털 교육 시대

21C를 정보화시대라 혹은 디지털시대 라고 일컫는데 요즘은 스마트 시대라는 말이 대세가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즉, 스마트 기기의 확산과 함께 지식과 정보가 변화를 주도하고 여기에 다양한 콘텐츠의 생산 . 유통이 사회를 점점 더 빠르게 창의적이고 다양성 있게 변화 시켜 가고 있으며 때로는 하나의 주제나 사건에 대중이 함께 몰입하기도 한다. 다양성, 유연성, 복잡성, 융합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21C의 모습인 것 같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특징짓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정보통신기술의 급격한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정보통신산업의 발달은 사회, 문화,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변화를 요구하고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줄 수 있는 가능성의 제공과 함께 우리 삶의 새로운 전환을 요구한다. 인적물적 교류의 영역이 대폭 확장되면서 새로운 정보와 지식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사회는 이러한 변화에 따라 정보를 검색수집분석하고 새로운 지식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는 처리 능력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시대 흐름에 맞는 지속적인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먼저 학교 교육 현장에서 우선 되어져야 할 것이며 학교교육을 마친 직장인들의 경우에도 성공적인 삶을 위해 필요한 것 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시기의 교육은 지식의 습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식의 가공과 활용이 더욱 중요한 것으로 지금까지의 교육 방법과는 상당이 다른 모습이 될 것 이며 그 변화를 주도할 첫 번째 도구가 전자책(e-Book, 디지털 교과서) 이라고 할 수 있겠다. 최근의 IT기술의 발전은 이와 같은 실험을 교육환경에서도 실현 할 수 있게 하였고 지금도 인터넷과 각종 스마트기기 들을 활용하여 학습 성과를 높이려는 시도가 다방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사이버교육은 기존의 교육 방법이 가지는 한계인 시공간의 제약을 극복하여 전통적 수업방식을 대체 할 수 있는 새로운 학습 시스템으로 이미 자리 잡았으며, 이제는 디지털 교과서인 전자책이 또 하나의 학습 변화를 주도해 갈 것으로 보인다. 바야흐로 IT기술의 발달이 교육 혁명을 이루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디지털 교육의 핵심인 전자책 시장이 미국에서는 상당한 점유율로 성장하고 있는데 반해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주춤한 모습이었으나, 곧 학교 교육에 도입될 전망이며 비즈니스에서도 반전의 모습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는 것이다. 아마존과 애플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미국의 전자책 시장을 MS가 진출을 선언하였고, 이에 맞추어 한국 기업들도 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상황이 만들어 지고 있으며 교과부는 교과서로 이용하기위한 준비를 마무리해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이런 환경의 IT기반이 이미 세계적인 수준에 와 있기에 도입에는 문제가 없으나 학교교육에 있어서는 지식 습득을 위주로 하는 입시제도가 하나의 장애 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이러한 과정에서의 아쉬운 점은 전문적인 학습이론이나 디자인적인 고려 없이 단순히 교과서나 텍스트로 대체하려는 생각에 치중한 나머지 정작 변화의 핵심인 지식 습득과 활용, 가공 등 달라질 교육 내용과 방법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하고 있다는 점과 학습효과를 증진시킬 수 있는 양질의 콘텐츠 확보엔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디지털교육을 통한 우리 교육이 변화해 가고 있으며 이를통해 우리 교육이 더욱 인본적이고 풍성해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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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5.15 23:02

사람을 살리는 품격있는 문화

얼마전 사회적 기업에 몸담고 있는 후배와 담소를 나누다 안타까운 얘기를 전해 들었다. 입주한지 일 년도 안되는 영구 임대 아파트에서 지난 몇 달 사이에 노인들의 자살이 3건이나 발생했다고 한다. 자살 이유는 '외로움'이었다. 하루 종일 아파트에 갇혀, 말 한마디 건네는 사람 없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없는 그래서 세상에서 쓸모가 없다는 우울증이 밀려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어르신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가슴 한 켠이 저려온다. 수백 세대가 모여 사는 아파트의 불빛은 따뜻하지만, 그 안에 살고 계신 분들은 정작 외로웠다. 군중 속의 고독은 비단 어르신들만이 느끼는 건 아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요즘 일중독에 빠진 필자의 입에서도 최근 가장 많이 나오는 푸념이기도 하다.'아~ 외롭다' 시계 초침처럼 분주하게 짜여진 일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공감하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사람이 사는 곳에서 사람이 그리운 이중적인 모순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복지 정책의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아쉬운 구석이 있다. 외로움은 사람이 온기가 닿아야 치유가 되는 병이다. 단순한 물질의 지원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대한민국 헌법 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헌법에 따라 우리 각자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행복해지려고 결혼하여 가족을 만들고, 행복해지려고 사업을 벌이고, 근로를 하며, 행복해지려고 여행을 가며, 오늘도 자기개발에 열심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다. 행복과 관련하여 그 추구함의 권리는 무궁무진하다.그렇다면,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제 보다 품격 있는 행복을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감히, 삶의 질을 높이는 '품격'을 제안한다. 그 중에서 문화를 통한 품격은 인 마음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품격 있는 삶은 결국 사람답게 사는 방법이고, 내 삶에 만족을 주며, 사회를 돌아볼 줄 아는 나눔의 마음이 생길 수 있다.그리하여 세상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문화의 향유자이자 생산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즉 '사람을 살리는 문화'이다. 이웃과 만나고, 정을 나누고, 소통할 수 있는 문화 즉 사람을 살리는 문화. 성과와 결과 위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 이상의 가치는 아닐까? 은퇴를 설계할 때 연금 통장 못지 않게 중요하게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한 가지 악기에 도전하라. 음악을 통해 아름다운 선율을 즐기고, 사람을 만나고, 악기에 대한 도전은 인생 2막의 새로운 꽃을 피우게 할 것이고, 품격 있는 문화 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삶의 주체자로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사례를 들며 글을 마칠까 한다. 70~80대로 구성된 익산의 어느 실버 난타팀은 10분 공연을 소화하기에 팔 힘이 부족하다. 공연 후반부로 갈수록 스피드는 떨어지고, 얼굴은 벌게지지만, 그 분들이 보여주는 진지한 감동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런 게 문화의 품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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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5.08 23:02

'문화의 민주화'에서 '문화민주주의'로

문화복지정책과 관련해서 '문화의 민주화(democratization of culture)'와 '문화민주주의(cultural democracy)'라는 두 개념이 있다. '문화의 민주화'는 그림, 창극, 오페라, 발레, 오케스트라 같은 고급예술을 보다 많은 국민에게 보급함으로써 소수 상류계층의 전유물이던 고급예술을 가능한 많은 이들이 누릴 수 있도록 접근성을 확대하는데 목적이 있다. '문화민주주의'는 고급과 저급의 이분법을 반대하며, 모든 사람이 창조적 역량을 발휘해 스스로 예술을 향유하고 창조할 수 있도록 참여에 주목한다.두 개념 모두 인권으로서 문화권(cultural rights)을 뿌리로 하지만 지향점은 다르다. '문화의 민주화'는 비평가 등에게 미학적 질을 인정받은 고급예술을 중심에 두고, 이를 생산소비하는 예술기관을 중요한 정책파트너로 삼는다.정책대상도 관객보다는 예술가를, 아마추어보다는 전문예술인을 우선한다. 생산과정보다 예술작품 그 자체에 무게중심을 두고, 원형을 후대에 보존전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무형문화재 전승제도, 문화바우처, 찾아가는 예술서비스 등이 대표적이다. '문화민주주의'는 아마추어예술, 지방예술, 실험예술, 대중예술까지 포함하며, 대안문화, 비기구화, 비집중화란 특성을 갖는다.예술의 '질'보다 정치적성적민족적사회적 형평성을 우선 고려한다.아마추어와 전문예술가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으며, 예술참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객지향성도 보인다. 대표적인 사업으로 생활문화동호회 지원, 문화의집 조성 등이 있다. 우리나라 문화복지정책은 '문화의 민주화'에 가깝다. 문화바우처 예산을 대폭 늘린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저소득층에게 문화향유 기회를 확대하는 데 초점을 두기 때문이다.이와 달리 유럽 국가들은 1970년대부터 '문화민주주의' 전략을 전면적으로 도입, 문화의 참여권을 강조하고 있다. OECD가 조사한 행복순위에서 스웨덴(3위), 노르웨이(5위), 덴마크(6위) 등이 상위권을 차지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랑스테드(Jorn Langsted)는 '문화의 민주화'가 '모든 사람을 위한 문화(culture for everybody)'라고 한다면 '문화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에 의한 문화(culture by everybody)'라면서 문화수용자의 주체적 측면을 강조한다.지금까지 문화복지를 위해 건물을 짓고 찾아가서 보여주고 돈을 주면서 극장으로 이끌었다면, 이제는 지역주민이 스스로 문화창조 활동을 향유하도록 환경을 만드는데 중점을 둬야 한다. 고창농악경연대회는 더 없이 좋은 사례다. 가을이면 읍면을 대표하는 16개 농악단이 한 자리에 모인다. 프로는 없다. 모두가 평범한 아마추어들이다. 농악경연대회가 열리는 1박 2일 동안 마을주민 천여 명이 함께 하면서 응원도 하고 축제도 즐긴다. 일상에서 문화를 향유하고 이를 매개로 문화공동체를 형성하는 '문화자치'의 모델로서 고창농악경연대회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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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5.0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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