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의 질, '지금 당장'
소득수준과 행복지수의 결별점이 있다. 국민소득이 오르면 행복지수도 같이 오른다. 헐벗고 굶주려서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민소득이 15,000~16,000달러가 되면 소득수준과 행복지수의 비례관계가 사라진다. 소득이 기본욕구를 충족하는 수준에 이르면 돈을 많이 번다고 반드시 더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것이 '이스털린의 역설'이다. 미국 일반사회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은 행복에 영향을 주는 요인으로 첫째, 가족관계, 둘째, 재정상태, 셋째, 보람 있는 활동, 넷째, 공동체와 친구, 다섯째, 건강, 여섯째, 개인의 자유, 일곱째, 개인의 가치를 꼽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원천은 '건강', '가족관계' 순이다(2006년 한국갤럽조사). 국민소득이 20,000달러를 넘어선 우리나라도 소득과 행복이 따로 작동하는 '삶의 질 시대'로 접어든 셈이다. 핵심도정을 삶의 질로 잡은 전라북도의 전략은 '슬로시티를 통한 농촌활력화', '문화복지와 체육복지를 통한 행복감 증대'다(사회복지는 삶의 질의 기본 전제로 상정돼 있다). 그런데 막상 도정방향을 바꾸었지만 무슨 일을 할지 막막했다. 손에 익은 성장 패러다임에서 행복패러다임으로 전환하려니 당연했다. "여전히 빈곤층이 많은데 경제성장 없이 어떻게 삶의 질을 보장하겠다는 것인가?", "문화체육복지는 기존 문화체육정책과 어떻게 다른가?", "슬로시티가 왜 삶의 질인가?", "대체 무슨 일을 하겠다는 것인가?" 연구진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개념을 잡고, 방향을 수립하고, 사업을 구상해야 했다. "삶의 질을 연구하는 사람의 삶의 질이 제일 안 좋다", "슬로시티를 연구하는 박사의 업무 속도가 가장 패스트(fast)다"는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로 공을 들였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국내외 사례를 찾아보고, 설문조사도 해보고, 기존 사업을 다 뜯어보며 재구성해도 어째 성에 차지 않았다. 철저하게 '주관적' 행복감인 삶의 질을 '보편적' 정책에 담아야한다는 점이 연구자로서 풀기 어려운 숙제였다.그러다 문득 내 자신을 돌아봤다. 선도적 정책을 생산하고 이러한 정책이 실행돼 성과를 거둘 때 연구자로서 이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행복한가? 가족(나에겐 6살 된 딸이 있다), 친구관계, 건강(수영을 꾸준히 했지만 최근 1년 간 단 한 번도 수영장을 가보지 못했다), 문화향유(연구 때문에 영화관에 가고, 공연장에 간다) 등 나의 행복을 결정하는 요인은 충족되고 있는가? 내 삶의 질은? 읍면동 단위로 문화공간을 만들고, 걸어서 10분 이내에 체육시설을 배치해도 내가 이용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연구를 위해 영화를 보고 공연을 보면 아무 감흥이 없다. '어떻게 하면 전라북도에 적용할까?' 관람 내내 머리만 굴린다. 문화적 빈곤은 아무리 외부에서 강제해도 해결될 수 없다. 반대로 턱없이 부족해도 문화적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다. 내 삶의 질을 높이고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롸잇 나우', 지금 당장 실천이 중요하다.그러면 너부터 그렇게 하라고? 그럴 생각이다. 삶의 질을 연구하고 문화복지 정책을 구상하는 연구자로서 자신의 삶의 질조차 향상시키지 못하는 것은 지극이 이율배반적이다. 그래서 필자도 '롸잇 나우', 나만의 삶의 질을 위한 행동에 나서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