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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 지방선거, 서로가 만나야 할 그 순간

▲ 김창하 민달팽이 주거협동조합원 이제 지방선거가 곧 치러진다. 지역에 많은 후보들이 자신의 인지도를 올리기 위해 분주히도 움직이고 있다. 명함 한 장이라도 더 돌리기 위해 새벽부터 움직이고, 소개를 받고 인사를 다녀도 짧은 기간 유권자 중 일부만을 만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선거 치루는 사람들은 유권자를 만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고민하게 된다. 특이한 유세 방식을 강구하거나 지인들과 연락으로 사람을 모은다. 각자의 시도가 유권자를 웃음을 짓게도, 눈살을 찌푸리게도 한다. 그 방식의 결과가 어떻든 보다 많은 유권자와 접촉하기 위해 노력한다. 서로마다 수많은 선거운동 방식이 있겠지만, 하루하루 명함한장 더 나눠 줄 수 있도록 열심히 돌아다니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유권자에게 명함 한 장을 나눠 줄 수 있다는 건 후보가 가진 특별함이다. 의원이 되기 전 후보자로서 가지게 되는 권리가 있다면, 시민에게 명함을 나눠 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권리라고 생각된다. 시민에게 다가 갈 수 있는 권한을 공식적으로 후보에게 준 것이다. 유권자를 만나는 방식은 후보에게는 전략적 선택 일 수도 있지만, 유권자 입장에서는 후보의 행동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후보가 가진 정책과 목표의 중요성을 많이들 이야기 하지만, 내 지역의 일을 해나갈 지방선거의 기초의원 후보에게는 친밀함도 중요하다. 내 생활을 변화시킬 의원을 뽑는데 내 생활을 이야기 할 정도로 친밀해야 하지 않을까? 어쨌든 지역의 의원과 친밀해야 된다는 것은 지향점이지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내 지역의 기초의원이 누군지도 잘 모른다. 기초의원은 2인이상 선출하는 중대선거구제라는 것도 나또한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정치에 관심있는 사람들 조차도 기초의원을 해당 지역구위원장의 하부조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때지난 생각일까? 국회의원과 지방의원의 역할은 엄연히 다르지만 지방의원의 쓰임을 지역 유권자들이 느끼기에는 아직 생소한 것 같다. 지금의 시선을 떠나 이번에도 어김없이 지방의회를 알릴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이런저런 잡음들이 들리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나쁘지 않다. 전주시만 볼 때 본 선거를 치루는 이삼십대 청년 후보가 8명 남짓 된다. 정당의 이미지 메이커로 전락하고 홍보 유세에만 동원되었던 이전의 일들과 다르게 본 선거에 많은 수의 청년들이 후보가 되었다. 비로소 청년들에게 친밀한 후보를 뽑을 수 있는 선택지가 생겼다. 지방방송사에서도 후보들을 알리기 위해 발언과 토론회를 기초의원 후보에게도 확장하는 것도 고무적이다. 다양한 정당의 후보들이 보이는 것도 유권자의 선택의 폭을 넓혀주고 있다. 우리는 조금 더 나아가야 한다. 촛불 이후 많은 시민들은 광장의 참여를 통해 정치의 효능감을 몸소 체험했다. 깨어있는 시민들에게 아직 지역정치의 문은 너무 좁고 불편하다. 이번에 도전하는 젊고 새로운 후보들이 조금더 힘을 내어 변화된 시민에게 다가가길 바란다. 기성의 정치구도에 편승하기 보다 새로운 시민을 찾아갈 방법을 고민하고 해나가는 것이 선거운동의 변화를 가져오고 지역의 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리는 초석이 되리라 본다. 첫 만남은 어색하고 힘들지 모르지만, 도전하는 후보와 변화된 시민이 만나는 그 순간을 기대해 본다. 만남 이후 다음의 민주주의로 한걸음 나아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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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27 16:49

미소의 선택

▲ 최진영 독립영화감독 최근에 가장 인상 깊게 본 한국독립영화가 있다. <소공녀>라는 작품이다. 아동과 여성의 고난을 착취하고 전시하며 작금의 산재된 문제들을 드러내는 방식의 여러 영화들에 질려있어서인지 시종일관 자신의 존엄과 취향을 지키며 살아가는 주인공 미소를 끝까지 응원할 수 있는 동력이 극이 진행되는 동안 차곡차곡 쌓여있던 영화다. 경향으로 여기고 싶진 않지만 지금까지 많은 한국독립영화가 캐릭터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방만하지는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소공녀 속 미소는 매력적인 캐릭터다. 더군다나 여성이 어떻게 그려져야 하는지 여성창작자로서 고민해볼 수 있는 문제와 질문에 대해 새로운 답을 제시해줘서 반가운 영화였다. 소공녀 속 미소는 담배와 위스키 그리고 남자친구만 있으면 되는 친구다. 담뱃값과 위스키 값이 오르자 그는 단칸방에서 나오며 24시간 패스트푸드점과 친구들 집을 돌아다니며 도시의 하루를 버텨낸다. 그렇다고 그녀가 노동을 안하는 게 아니다. 일일가사도우미로 일당을 받거나, 재워주고 먹여주는 대가로 집을 깨끗하게 청소해주는 노동을 제공한다. 그렇게 벌어들인 일당은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병을 늦춰주는 한약을 사거나,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담배와 위스키 값으로 지불된다. 스포일러가 되니 자세한 뒷이야기는 못하지만 극의 끝에서도 그녀는 집을 포기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지키는 인물로 남는다. 집은 포기하지만 자신의 취향과 존엄을 지키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나를 돌아보는 건 당연했다. 내가 집을 포기하고 지키고 싶은 건 뭘까. 집 만큼의 교환가치를 생각이나 하고 있었을까. 이런 저런 생각들이 마구잡이로 머릿속을 헤집는 와중에 타인의 시선들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만약 미소였다면 내 주위의 사람들은 그런 나를 철없고 게으른 사람으로 매도할게 틀림없는데. 선택은 내 몫이지만 그런 시선들을 거둘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기에 내가 미소의 삶을 버텨낼 재간이 없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 무엇보다 내 소유의 집이 없다. 백수가 된 후 독립생활을 마치고 다시 부모님 집으로 들어오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이미 친구들을 밤 늦게까지 초대해서 놀 자유,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올 자유, 거실에서 크게 볼륨을 높이고 음악을 들을 자유 등을 반납할 각오를 했다. 얼마 전에는 라디오에서 나가 왜 다시 캥거루족이 됐나?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상당수의 자유를 월세와 공과금으로 교환했으니 나는 결코 미소처럼 지키고 싶은 취향은 별로 없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 지난 해 전국 고시원 숫자가 10년만에 251%가 증가한 1만1800개라는 통계청의 조사결과가 나왔다. 이제는 고시를 준비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청년주거문제의 대안이 된지 오래다. 쉐어하우스도 신주거 문화의 대안이 됐지만 아직 건축법, 주택법 등 관계 법령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정부는 올해부터 25만실의 쉐어하우스를 공급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제대로 된 법이 만들어지지 않는 이상 안전에 취약한 건 불 보듯 뻔하다. 청년들의 취업실업 문제뿐만 아니라 주거취약계층을 위한 주거문제 해결 또한 나아질 기미가 안보인다. 임대주택 확충과 같은 실질적 대안을 제시하지만 아파트 값 떨어진다고 임대주택 건설을 막는 플래카드를 보면 소공녀 속 미소의 선택이 최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니 더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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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20 17:04

청년은 정당으로 쳐들어갔을까?

▲ 김신철 독립서점 북스포즈 공동대표 이사 준비. 그것은 집안 구석구석에 무심코 쌓아온 시간을 정리하는 일 같다. 계약일 이후로 사용할 일 없었던 인감도장, 잃어버린 노트와 책, 사진집까지 찾지 못해 전전긍긍했던 것들이 모두 돌아왔다. 어딘가 숨겨두었을 것이라 굳게 믿었던 비상금 빼고는. 무엇보다 반가웠던 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전북대학교 강준만 교수의 <청년이여, 정당으로 쳐들어 가라!>다. 책이 나왔던 2015년에는 그래 청년이라면 정당으로 쳐들어가야지라고 느껴졌던 이 책이 2018년 현재는 다르게 느껴진다. 그런데 그동안 청년은 정당으로 쳐들어갔던가? <청년이여, 정당으로 쳐들어 가라!>에서는 말한다. 기성세대 혹은 정치인들이 정치혐오를 만들어 청년세대가 정치에 관심이 없게 만든다고. 하지만 청년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그들이 사는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청년들에게 정치 출마를 권하는 건가? 그렇지 않다. 그저 청년들에게 정치에 대한 작은 관심과 행동을 권하는 책이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보자. 청년들은 여전하면서도, 여전하지 않다. 정당정치란 정년들에게 아무래도 노잼(=재미가 없음)이다. 대신에 인터넷 커뮤니티라는 그들만의 정당이 더욱 세분화되었고, 이제는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과거에도 인터넷 커뮤니티는 있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 정치나 이슈에 관한 언급은 금기시되었다. 반면에 최근의 커뮤니티는 앞장서서 이슈를 생산하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명한다. 시민단체나 정당처럼 전문적으로 이슈를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청년들에게 부담이 없는 선에서 정치활동을 이어가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의 첫 번째 목적은 관심사에 대한 공유지만, 정치 역시 자신들의 관심사에서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 현재의 청년 정치 지형은 조금 달라졌다. 2015년에 사는 청년이 토익과 자소서의 늪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2018년은 짬을 내서라도 작은 관심을 갖는다. 촛불을 들어 정권을 바꾸었다는 사회적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작은 승리의 경험이라고 부른다. 작은 승리의 경험은 청년들로 하여금 우리 사회에 만연했던 부조리를 외치게 만들었다.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인이라도 공정성의 문제가 있으면 반기를 든다. 미투 운동을 발화하고, 응원하고, 부딪히는 과정들 역시 커뮤니티라는 청년세대들의 움직임이 중심이 되었다. 그들의 외침대로 세상이 변했는지, 아니면 그들 자신이 망가지는 것인지는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가만히 있지 않으니까, 무언가는 변했다.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온라인 중심의 소속감이 현실까지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서울에 가면 청년의 이야기를 들어줄까 내심 기대를 할 뿐이다. 청년을 위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기성 정치인들의 외침이 유독 큰 요즘이다. 지역에 일자리와 쇼핑센터처럼 돈을 벌고, 쓰는 공간을 만들겠다고 한다. 하지만 청년이슈를 얼마나 많이 발굴할 수 있는가도 중요하다. 그것이 지역 청년들을 건강하게 지역에서 살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할 거리만 던질 수 있면, 또 지역이 바뀔 소지가 있다면 청년들은 정당을 만들어서라도 쳐들어 갈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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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13 17:10

삶은 주거와 맞닿아 있다

▲ 김창하 민달팽이주거협동조합원 공유주거살이가 두달이 되었다. 공간이 바뀌면서 내 삶도 소소히 변해 가고 있는 것 같다. 늦은밤 아파트 주차장에 겨우 주차하고 무겁게 걸어가던 귀갓길이 이제는 산책길이 되었고, 하루일정을 마무리하고 차한잔 마실 맘에 꼭 드는 공간이 생겼다. 다른 주거살이 때보다 많은 이웃이 생겼고, 기웃하는 고양이와 이웃집개의 짖음도 이제 삶의 일부가 되었다. 물론 단독주택은 여러모로 손이 많이 간다. 일찍 나가 밤늦게야 집에 들어오는 생활에서 한동안의 주말은 청소하는 날로 고정되어 있었다. 청소기 돌리고 걸레질만 반나절, 청소를 할수록 구석구석 더 치워야 할 곳이 눈에 띈다. 분리수거도 직접 해보니 쉬운일이 아니다. 평소처럼 시켜먹은 음식을 음식물이 묻은채 버려서 악취가 난적도 있었고 여전히 부엌은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집에서 일어난 많은 일들 하나하나가 해야할 일로 귀결되곤 한다. 내 손을 거쳐야만 유지되는 집의 모습은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정리가 되지 않는 것은 집의 잘못이 아니라, 평소에 어지르고 다니던 나의 모습이다. 집을 정리하는 것은 한동안 산만했던 나의 마음속을 정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여전히 공용공간은 치우지만 개인공간을 어질러 놓는 나의 모습은, 겉으로만 잘 보이려는 나의 성격을 투영하고 있는 것 같다. 애써 돌아보려 하지 않아도 나를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은, 돌아보지 못한 채 삶은 살아가는 나에게는 큰 축복이다. 나를 투영하는 장소에 누군가를 초대한다는 것은 각별한 일이다. 사회주택, 공유공간이라는 형태가 짧은 기간이지만 많은 이들을 맞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타지역 활동가들, 지역 동료들, 일정상 짧게 머무르는 손님이 숙박을 한다. 다양한 사람들의 면면 만큼 이야기도 다양하다. 활동, 삶, 연예, 요즘의 고민들, 각자 분야의 이야기들 이런 다양한 이야기도 겨울과 봄 계절이 바뀌면서, 날씨에 따라 나누는 대화가 달라진다. 이런 다양한 주제들도 결국에는 서로가 살아왔던 것, 지금 살아가는 것,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이야기, 결국 같이 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되곤 한다. 같이 사는 식구들과도 바쁜 일상이지만, 한주에 한번은 저녁식사를 같이 하면서 이야기를 한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국 공유주거는 주거의 물리적 정도도 중요하지만, 성패의 관건은 서로의 삶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지가 아닐까 생각된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면 상대가 투영된 그 공간은 당연히 불편함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해한다면 내가 투영된 공간에 누군가를 받아들이면서 안정과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 물리적 공간은 제한되어 있기에 자신만 이해받기 원하거나 혹은 한쪽만 이해해주려 한다면 그 불균형은 삶 전반에 스트레스가 되어 공동체를 와해시킨다. 삶을 공유하면서 서로간 줄다리기는 계속 될 것이고, 서로의 탐색없이도 행복한 삶을 가지는 것이 아닌 어느 순간이든 상대를 이해 해보려는 노련함을 얻는 것이 공유하는 삶의 방향일 것이다. 공유주거는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은 사실 독립된 개인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당연히 감내해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조금은 불편하지만 서로의 삶을 바라보며 다같이 행복하자고 권하고 싶다. 독립을 통해 사회에서 스스로 설 수 있는 경험, 공유를 통해 함께하는 경험 이런 것들을 함께 하자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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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29 18:02

지속가능한 지역의 창작가·활동가에게 필요한 것은

▲ 최진영 독립영화감독 올 봄 역시 벚꽃 풍경들을 놓쳤다. 지구온난화 때문에 점점 빨라지는 개화시기도 그렇지만 미세먼지로 밖에 나갈 엄두가 안났다. 날이 좋을 때 쯤이면 봄비가 내려 꽃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내가 오라해서 오란 적 없고 가라해서 가란 적 없는 게 계절이니 아쉬움은 이쯤 접어 두자. 그 사이 나무들 사이로 현수막들이 펄럭이고 있다. 제19회 전주국제영화제를 알리는 현수막이다. 전주국제영화제는 인구 67만 도시의 가장 큰 축제이자 영화 표현의 해방구라는 슬로건을 걸고 국내외 독립영화와 디지털영화와 같은 대안적 흐름에 관심을 갖고 개최되는 영화제 중 하나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영화제 평가 2년 연속 1위를 차지했고 올해는 역대 최다 작품을 상영한다고 하니 가뜩이나 쏠림 현상이 만연한 한국영화시장에 불만인 영화 팬들에겐 좋은 기회가 아닐까 싶다. 전주 토박이인 필자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영화제가 처음 열렸으니 이렇게 시간이 흘렀나 싶고 그만큼 본인의 나이가 이렇게 먹었나 해서 씁쓸하기도 하지만 꿋꿋하게 영화제가 치러지고 외연도 확장되고 대표적인 축제로 거듭나는 걸 보니 지역의 영화활동가가 아니더라도 세금을 내는 시민으로서 흐뭇한 일임은 자명하다. 하지만 지역을 떠나지 않고 이 곳에서 창작활동을 하는 창작자의 입장에선 여러 가지가 아쉽다. 이 아쉬움은 영화제 측에 토로하는 게 아니니 부디 오해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당부의 말을 먼저 건넨다. 전주국제영화제, 전북독립영화제, 전북인권영화제, 익산여성영화제, 시민영상제등을 제외하면 도내에서 창작되는 작품들이 소개될 기회가 많지 않다. 물론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이 있지만 온전히 지역에서 창작된 작품들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이 상영되진 않는다. 최근 들어 지역의 젊은 활동가들이 힘을 모아 대안적인 상영구조로 이뤄진 무명씨네 도킹텍프로젝트 협동조합 같은 다양성영화전용극장이 생겼지만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민간 극장의 활동이 잡히지 않는 현재의 구조로는 활동가들의 생계비와 상영료가 제대로 돌아갈수 있을지 걱정이다. 다양한 영화를 취사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세금을 내는 시민들이 누려할 또 하나의 권리다. 그러기 위해선 지속가능한 상영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도 행정가와 정치가들이 고려해야 할 몫이다. 영화표현의 해방구라는 슬로건은 창작활동가들에게 반가운 표현은 분명하지만 위태로운 생계의 최전선에서 당장 내일의 삶을 고심하는 활동가들에게 무엇이 최선일까? 갑자기 뻥하고 봉준호가 튀어나오진 않는다. 갑자기 알을 깨고 박찬욱이 튀어나오진 않는다. 당연히 그런 거장 감독님들도 젊은 시절 갖은 고생을 거치며 높은 자리에 올랐을 터다. 그러나 너희들도 고생을 거치고 그 자리로 가려무나 라는 말은 모질다. 최저임금이 오르니 사장님은 해고를 하고, 당장 인건비를 이유로 김밥 값은 오백원이 올랐고 시나리오를 써왔던 까페의 커피값도 오백원이 올랐다. 우리라고 마냥 노는 게 아니고 활동가들은 어디선가 웨딩 촬영, 오십만원 짜리 뮤직비디오 촬영, 다가오는 지방 선거 아르바이트를 준비 하고 있다. 굳이 서울이 아니더라도 (물론 서울에 안주할 집값 또한 없다) 이 지역에서 계속 창작을 해보겠다는 젊은 창작자들이 노동을 하면서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어떤 건지 고려해보는 정치가와 행정가를 만나보고 싶다. 아시아의 문화심장터라는 전주시의 굳은 의지가 비웃음으로 돌아오지 않길 바라는 간절한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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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22 17:11

연필 깎는 일이 세상을 바꿀까

▲ 김신철 독립서점 북스포즈 공동대표 서점 카운터에 앉아있으면 책 보다 그 책을 읽는 사람이 더욱 궁금하다. 그들이 사 간 책을 통해서 이 사람은 이런 취향과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잠깐 상상을 하는 재미랄까. 가끔 너무 궁금하면 이 작가를 좋아하는지 물어보기도 하는데, 이번 손님은 톨스토이부터 임경선까지 다양한 종류의 책을 여러 권 샀다. 이런 경우는 상상을 포기하고 매출에만 만족해야 한다. 손님은 자리에 돌아가 친구들과 함께 구매한 책을 읽었다(역시, 여러 사람의 취향이 섞여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곧 그들은 어떤 책 한 권에 매료되었다. 심지어 한 명이 책의 내용을 읊어주고 일행들이 감탄사를 외치는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나의 청력은 21세기 공산당 선언 같은 현장에 집중되었다. 그들의 외침을 지면을 통해 밝힌다. 연필을 깎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연필과 연필 깎기. 그리고 충분한 상상력이다. 그렇다. 그들은 데이비드 리스의 <연필 깎기의 정석>이라는 책을 장장 3시간 동안 입으로 읊고 갔다. 문제는 나도 어느새 그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한낱 연필을 깎는 일 때문에 톨스토이가 외면받은 상황에 분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최근에는 거대하고, 심오한 주제를 다루기보다 일상적이고 긍정적인 주제를 다루는 것이 유행이다. 소소한 일상에서 확실한 행복을 찾는다는 소확행 열풍 때문이다. 지난해 내내 베스트셀러 리스트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던 <언어의 온도>도 바뀌어버린 독자들의 취향을 콕 짚은 책이 아니던가. 하지만 우리의 연필 깎기의 정석을 소확행 열풍으로 나온 책들과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다. 이 위대한 책은 연필을 깎는다는 너무도 평범한 일을 아득한 경지에 올려놓는다. 연필과 연필 깎기의 종류는 기본이고 문필가와 예술가, 목수 등 직업별로 다른 모양의 연필 깎기 기술을 알려주는데 경외감마저 들 정도다. 심지어 샤프는 순 엉터리다라고 정파성까지 보여준다. 감탄스럽다. 이것은 순전히 연필을 깎는 일 자체에 몰두하고 행복해하는 작가의 태도 때문이다. 만약 연필과 연필 깎기에 대한 역사를 총망라해서 작성한 책이었다면 이 정도의 감동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연필 깎는 과정에서 중간중간 나오는 유머는 장인으로서 여유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책은 아주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소확행의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감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책의 추천사를 빌어 말하자면 그는 가장 보잘것없는 일이 때로는 가장 심오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사람들은 그에게 자신의 연필을 부탁하기 위해 35달러를 지불한다. 그리고 만족한 경험을 공유한다. 개인의 행복을 부르는 행위가 정체성이 되면 장인이 되고, 영감을 주고받는 공동체가 된다. 함께 진보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장이 멈춰버린 시대에서 행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우리의 사사로운 행위가 더욱 건설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요즘 들어 물질적인 소비 행위를 소확행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때에 소확행의 의미와 비전을 보여줄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책이 아닐까? 적어도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나와 손님은 그런 뜨거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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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15 16:42

봄비가 내린 다음날에는 꽃들이 올라옵니다

▲ 신성원 또바기농장 대표순창 더불어농부회장 아침 6시 거실에서 흘러들어오는 티비 소리가 내 귀를 깨운다. 시골 어르신들의 부지런함은 몸에 배인 습관이라고 할까? 어김없이 6시면 티비를 켜시고 뉴스를 보신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도 보시지만 꼭 챙겨 보시는건 일기예보. 농사에 꼭 필요한게 날씨 정보이다보니 하루도 빠짐없이 똑같은 시간 똑같은 곳에서 티비를 보시고 나 또한 시골에서 농부로 살다보니 일기예보를 챙겨보는 습관아닌 습관이 생겨버렸다. 오늘 밤부터 전국적으로 봄비가 시작되어 내일 오전까지 봄비가 내리겠습니다. 기상캐스터의 저 말이 왜이리 반가울까? 기다리던 봄비다. 이제 정말 한해 농사를 시작하는 시기가 왔구나. 비가 온다하니 비가 오기전 서둘러 준비할게 많다. 미리 밭 정리도 해야하고 하우스안에 있던 모종도 밖으로 옮겨 심어야 하고 할 일이 너무 많다. 그래도 농부라서 그런가, 나만 그런가, 비가 온다하니 기분이 좋다. 저녁이 되니 한 두방울 시작한 빗줄기가 어느새 집앞 밭을 다 젖게 할 정도로 내리기 시작하고 보일러실 지붕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나에게 자연음악회를 선사해준다. 난 비내리는 날이 좋다. 뭔가 거창한 이유는 없지만 뭔가 깨끗해지는 느낌과 어렸을적 비를 맞으며 놀았던 생각이 나서 그런지 비내리는 날이면 이분위기를 만끽하고 싶어진다. 비 내린 다음날 농장을 둘러보러 나가니 나올랑 말랑한 새싹들이 성큼 나와 봄을 알리고 또랑에는 계곡물이 콸콸 철철 흐르고 산이며 들판이며 푸른빛이 돌기 시작하고 있는데 봄이 우리들 곁에 왔다는걸 새삼 다시한번 느끼게 해주는 봄비였다. 사실 농촌에 봄비는 도시에서 보는 봄비와 의미가 많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시에 비가 내리면, 비 오네 우산 가져가야겠네 하는 것이 일상이겠지만 농촌은 비가 오면 논에 물대랴 밭에 모종 심으랴 물 모으랴 할 일이 많아진다. 또한 농사에 있어서 봄에 비가 어느정도 왔냐에 따라 올해는 풍년이다 흉년이다 하면서 한해 농사를 예견하는 풍습도 있고, 봄비가 와야 장마철까지 쓸 물을 모을 수 있기에 이런 작은 봄비 하나도 농촌에서는 큰 의미가 있고 바라보는 시선이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의 난 비를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지고 비가 오면 하는 일들이 생겼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난 싫지가 않다. 비오는날 비옷입고 하는일이 왠지 모르게 재미가 있다. 온몸은 흙탕물로 뒤짚어 쓰지만 농촌에서 자연과 함께한다는 것은 농부만의 특권이 아닐까 한다. 누가 어디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 농부니까 농사꾼이니까 누리는 특권이지. 하지만 다른 의미로 본다면 정작 봄비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농촌이 아닐 수도 있다. 지금의 봄비는 다른 의미로도 많이 쓰이고 있지만 난 점점 살기 힘들어지고 있는 현세대에 살고 있는 청년들에게 봄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봄비가 온다는 소리만으로도 사람들은 봄이 왔다는 느낌을 받고 설레고 기분이 좋아진다. 왜냐면 봄비가 내린 다음날에는 모든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나기 때문. 어느때보다 청년이 살기 힘든 시대 이런 청년들에게 작은 봄비라도 내려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봄비가 내린 후에는 모든 봄꽃이 화사하게 피어나듯 청년들도 그 어느 누구보다 화사하게 피어날 것이기에 하루빨리 우리의 청년들에게 봄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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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8 19:58

나는 잠재적 가해자가 맞다

▲ 김창하 민달팽이주거협동조합원 나에게 욕구는 존재한다. 얻고자 하거나 하고자 하다는 사전적 의미처럼 욕구는 무엇을 얻거나 행위를 함으로써 충족된다. 특히 욕구중 성욕 성적 행위에 대한 욕망의 사전적 의미로 보면 행위를 함으로써 욕구를 충족 시킨다.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대상이 필요하다. 그러한 대상은 물건이 아니고 나와 같은 사람이기에 상대에 대한 이해와 배려 협의의 과정 없이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힘들다. 일반적으로 성욕을 채우기 위해서는 많은 과정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남성으로 산다는 것은, 매우 쉬운 방법으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을 가지게 된다. 나의 형편이 어쨌든지 간에 스스로 마음만 먹고, 지갑에 몇만원만 있으면 자신의 성욕을 채울 수 있다. 성매매를 통한 특히 성매매집결지에서의 성행위는 상대에 대한 배려를 할 필요도, 성관계 후 상대에게 받는 피드백도 필요없다. 오로지 자신의 성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상대를 사용하면 된다. 마치 상대를 자위도구처럼 사용한다. 도구처럼 사용한다고 해서 상대가 사람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자위기구는 물건을 사용하는 것이지만, 성행위는 상대에게 가해지는 것이다. 돈으로 협의했다고는 하지만(성매매는 명백히 불법이다) 이런 일방적인 성행위는 상대에게 가해지는 분명한 폭력이다. 그래서 가해자는 처벌 받아 마땅하다. 성욕은 성별에 관계없이 가질 수 있지만, 성욕을 충족시키는 방법은 남성과 여성이 다르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경우 결혼과 연애(앤조이의 경우를 포함)등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동의를 받는 일정한 절차를 거치며 욕구를 해소할 수 있지, 남성의 경우처럼 마음먹고 얼마의 돈만 지불해서 욕구를 해소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남성의 경우 서로간의 확인을 하고 나서 합의하에 하는 관계보다 일방적인 관계를 경험을 더욱더 쉽게 할 수 있다. 온라인에서 각종 여성을 상품화 한 성관련 매체는 어디에나 있고, 성매매업소는 도심 지역 사람이면 어디있는지 누구라도 알고 있다. 요즘은 인터넷 어플을 통해 성매매업소 종사자가 아니어도 매매가 이루어 지고도 있다. 남성의 입장에서 서로를 이해하며 하는 정상적인 행위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상대를 어떻게 하든 뒤탈도 거의 없다. 의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남성이 한국사회에 적응하면서 욕구를 해소하는 방법은 서로를 확인하고 알아가는 방식보다, 일방적으로 행사하는 방식을 쉽게 학습하게 된다. 일방적인 폭력에 떳떳하고,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불편한 그런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 스스로가 각성하지 않는 한 잠재적 가해자로 있을 확률이 더욱 높다. 일방적인 가해의 경험(마음만 바꾸면 가해를 할 수 있는 상황)은 피해자에 한해 가해자를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만든다. 한 성별로 편중된 상황은 대상화된 남성을 권력자로, 여성을 종속하게 만들었다. 여전히 남성들의 자리에서 대상화된 여성을 하대하고 추행하고 강간한다. 마치 욕구 해소보다 권력행사로 우월감을 가지는 것으로 보일 때가 많다. 2018년 3월 5일 늦은밤 뉴스에 나온 미투 가해자의 모습은 한국에서 남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와 다르지 않았다. 내가 가해자가 아닌 이유는, 잘못을 이야기 해주는 주변의 여성 동료들 그리고 미투 피해자들의 용기 덕분이다. 나는 미투를 지지한다. 그리고 여성이 마땅한 권력을 취해 내가 더욱더 조심하는 세상에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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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1 16:26

제주 4·3사건 70주년을 맞이하며

▲ 최진영 독립영화감독 제주도가 43희생자추념일 지방공휴일 지정에 관한 조례안을 공포했다. 지난 1월에는 전국 17개 광역시도의회가 제주 43 사건 특별법 조속 개정 촉구 건의를 상정,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제주 43 사건이 제주도만의 문제가 아닌 범국가적 차원에서 논의 될 일임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2016년 12월부터 2017년 3월까지 나는 매달 제주도에 가서 다크투어리즘을 했다. 43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몇 달을 그렇게 돌아다녀보니 제주도라는 섬 자체가 그냥 43 이었다. 곳곳이 학살의 현장이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평생동안 짊어지며 살고 있었다. 빨갛게 핀 동백은 섬을 더 아름답게 표현하는 꽃이지만 그건 섬의 아름다움을 좇는 이방인인 우리의 눈에 그렇게 보이는 거고, 상처를 갖고 살아야했던 제주도민들에겐 내 가족, 내 이웃이 흘리고 간 피였다. 함덕을 거치면 북촌리라는 작은 해변 마을이 있다. 북촌리는 국제법상 전쟁중일지라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는 제노사이드(집단학살)의 대표적인 사례를 간직하고 있는 지역이다. 1949년 1월 17일 남녀노소 300여명이 한날 한시에 희생됐다. 또 아이고 사건, 즉 1954년 초등학교 교정에서 주민들이 모여 몇 년 전 소각됐던 자신의 마을과 희생된 사람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묵념을 하면서 아이고 아이고 하며 대성통곡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에 다시는 집단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각서를 쓰고나서야 풀려났다. 국가이성이 붕괴되고 야만이 통치하던 시절이였다. 그리고 연좌제에 묶여 남은 가족들과 생존자들은 신산한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그러고 보며 제주는 오래전부터 중앙정부의 가혹한 수탈이 반복됐던 곳이었다. 고려시대엔 몽골의 직접지배를 받았고 전라도와 경상도의 연안지역에 정착하여 사는 두무악이라고 불리던 제주도민은 17세기까지 일반 양인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지도 못했다. 일제시대에는 태평양전쟁에 많은 도민들이 동원되었고, 일본군 7만 5000명이 진주하여 군사기시설을 구축했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끔찍한 43을 겪어야 했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연좌제의 족쇄까지 견뎌야했다. 수탈과 착취와 참상이 반복됐던 그 질곡한 역사를 겪어야 했던 제주도민들에게 미안함과 동시에 어떤 존경심이 피어오른다. 그들의 희생을 돌아보며 평화와 인권의 개념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본다. 사실 43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고민을 더 했어야 했고 잘 만들었어야 했다. 아직도 희생자들의 유족들과 피해자들이 생존하고, 유해 발굴이 되지 않은 곳도 많은데 너무 쉽게 이 사건을 접근하지 않았나 싶다. 누를 끼쳐 죄스러울 따름이고 영화라는 매체에서 재연되는 비극적 역사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야할지 고민을 해본다. 겨울 이불을 빨고 널어놓으면서 봄 햇발의 기운을 느낀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43 사건이 그렇고 제주도로 향하다 침몰한 세월호가 그렇다. 그렇지만 마냥 슬퍼할 수는 없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억해야 한다. 그게 우리가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극복이 아닐까 한다. 다시 한번 제주 43사건의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애도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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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25 19:12

도쿄의 서점

김신철 독립서점 북스포즈 공동대표 봄이 싹을 텄다. 새 학기를 맞이하는 학생들은 기지개를 켠다. 동시에 전북대학교 앞에 위치한 서점 북스포즈에도 찾아주는 손님이 늘어났다. 오고 가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무언가를 급하게 찾고 있다. 바로 여권이다. 미안 손님들, 저 일본 도쿄에 좀 다녀올게요. 놀러 가는 것은 아니다. 도쿄의 현재에서 한국 그리고 전주라는 도시의 가까운 미래를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쿄 이 스포일러 같은 도시라고 생각하며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화산 폭발 뉴스, 비와 추위가 우리를 맞이해줄지는 몰랐다. 비바람을 뚫고 먼저 찾은 곳은 다이칸야마에 있는 츠타야 서점이다. 마스네 무네아키의 <지적 자본론>을 통해 알려진 곳이다. 츠타야 서점의 특징은 책의 구분을 문학이나 역사가 아닌 주말에는 프랑스에 떠나는 게 어때요?라는 식으로 제안을 한다는 점이다. 문제는 내가 2년 전에도 츠타야 서점에 왔었다는 것. 그리고 한국의 서점들도 츠타야 못지않게 기획과 큐레이션을 잘한다는 것이다. 실망감에 한참 츠타야 서점을 떠돌다가 깨달았다. 나는 아직 오토바이 코너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곳의 오토바이 잡지와 단행본의 개수가 북스포즈 전체 책 보다 많았다. 그렇다. 도쿄의 서점들은 수집력이 돋보였다. 대형서점인 츠타야 서점의 장기는 아니었다. 근처에 있는 아주 조그마한 서점인 카우북스에는 좁은 공간에 꽂힌 책 하나하나가 모두 쉽게 구할 수 없는 책이었다. 70, 80년대의 빈티지 책과 잡지를 모으는 이곳의 책들을 어떻게 구해왔을지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반대로 서점을 찾는 손님 입장에서는 오래된 책을 구할 때 무조건 카우북스를 떠올릴 것이다. 책 자체에 대해서도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책은 굉장히 가볍고 가격이 저렴한 문고판이었다. 책의 종류도 많지만, 책을 구매하고 들고 다니며 읽는데 전혀 부담이 없었다. 우리는 어떤 책이 인기를 얻으면 일단 커버를 두껍게 교체하고, 내용을 추가해서 부풀린다. 아직 독서보다 기념품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과하면 독이 된다고, 이런 책들은 들고 다니기보다 베고 자는 용도로 많이 사용된다는 게 아쉬운 점이다. 지갑은 마지막 서점에 닿아서야 열리고 말았다. 가구라자카 역 근처에 있는 동네서점 카모메 북스다. 여러모로 북스포즈와 닮아있는 이곳에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직원 분이 종종종 따라와 이런저런 책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친절함에 나는 책을 한 권 구입했다. 그런데 맙소사! 그들은 책을 예쁜 포장지로 감싸서 북커버를 만들어 줬다. 결국 다른 책과 연필, 수첩, 카모메북스의 배지까지 사고야 말았다. 이런 일본의 친절함은 오모테나시라고 불린다. 성심을 다해 손님을 모신다는 뜻이다. 혹자는 손님이 원하는 것을 예상해 요구하기 전에 제공하는 것을 일본의 오모테나시라고 말한다. 이들의 수집력, 실용성도 대단하지만 결국 첫 발을 딛게 하는 것은 친절함이었다. 만족스러운 일정이었다. 이제는 북스포즈를 방문한 분들에게 조심스럽게 말도 붙여보려 한다. 아직은 쑥스럽지만 이러다 보면 나도 오모테나시의 경지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마침 손님이 오셔서 이야기를 건넸다. 그는 말했다. 저 전북일보에 쓰는 글 보고 와봤는데요. 나는 고개를 또다시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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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18 17:07

아침을 울리는 시골의 닭울음소리

▲ 신성원 또바기 농장 대표순창 더불어농부회장 꼬끼~~~~오. 어김없이 아침이면 수탉의 울음소리가 농장의 시작을 알린다. 오늘도 시작이구나 생각하며 보일러실로 들어가 화목난로에 땔감을 수북이 넣어주고 타닥타닥 타가는 땔감을 보며 오늘의 농장일정을 잠시 생각을 해본다. 겨울을 지나 찾아온 농장 밭에 심을 꽃들을 위해 작년에 씌워논 비닐을 벗기고, 지주대를 뽑고 정리하고, 모종에 물주고 양봉 자재를 보관할 창고를 만들고, 오늘도 할게 많구나 생각을 하다 우선 농장 동물들 밥이나주자 하고 일어나 사료통에 사료를 담아 동물들에게 인사를 하러간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우선 달구(닭)를 세어보고 다음으로는 달구(닭) 친구 염소를 둘러본다. 깜순아 잘잤어? 물어본다. 순하디 순한 깜순이가 다가와 내몸에 자기 머리를 비비며 밥이나 달라고 말한다. 이렇게 염소까지 밥을 주고 마지막으로 우리집 말썽꾸러기 멍멍이들에게 밥을 주러 가보자. 역시나 오두방정 난리가 났다. 그렇게 6마리 모두다 밥을 주고 나면 하루일과중 하나가 끝. 이제 농장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나도 든든하게 아침을 먹어야 하기에 다시 집으로 들어가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흰쌀밥에 아침을 든든히 먹고 농장일을 사작한다. 나의 하루는 별 특별함이 없다 하지만 실증도 귀찮음도 없다. 나는 이 일이 즐겁고 이제 내일이다, 천직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가끔은 나의 하루가 남들과 뭐가 다를까? 남들의 일상은? 내가 바라본 나의 평소 일상은 특별함이라곤 별로 없는거 같은데 남들은 왜 나를 부러워하며 나 처럼 살고 싶다고 할까? 그건 아마 나를 부러워 하는게 아니라 시골이라는 친근함과 평온함을 부러워하는 말일 것이다. 나 또한 고층건물로 이루어진 도시라는 정글보다는 발전이 느린 시골이 더 마음이 편하고 내 집이라는 확신이 든다. 확실한건 이건 시골농촌이 주는 선물이라는는 것이다. 모두가 바쁘게 사는 도시. 포기할게 많은 현시대. 하지만 조금만 느리게 가는 삶을 선택한다면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과 보고 싶었던 것을 볼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많은 것들을 경험할수 있는 기회가 찾아 올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선택은 쉽지 않다는걸 모두다가 알고 있으며 용기가 필요한 일일 것이다. 나 또한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이 모두가 원하는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는 원하겠지만 누구는 도시의 삶을 원할 것이고 도시의 삶에 행복을 느낄 것이다. 단지 삶에 지치고 일에 지치고 내 몸과 마음이 지쳐 휴식이 필요할 때 어느 다른곳이 아닌 시골로 가보면 어떨까 한다. 언제나 가깝게만 있어 무심했던 곳. 가깝게 있었지만 멀게만 느껴졌던 곳. 다른 삶이라 생각했던 우리의 고장, 시골농촌. 하지만 그리 멀지않고 우리에게 무심하지 않았던 곳이 농촌이다. 언제나 우리가 와주길 바라는 곳, 우리가 봐주길 원하는 곳, 우리와 함께 하고 싶었던 곳이 바로 시골이 아닌가 싶다. 별다른 특별함은 없다. 그렇다고 특별함이 없지는 않다. 모두에게 똑같이 대해주고 똑같이 준다. 그게 시골이다. 다만 그걸 원하고 원치않고는 우리의 선택이고,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나는 말하고 싶다. 남들보다 조금은 느리게 가도 괜찮다고. 좀 느리다고 누가 뭐라하지 않는다고. 때로는 조금 느린게 도움이 될수 있다고. 내 청춘은 도시보다는 느리지만 그 어느 청춘보다 행복하고 만족스럽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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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11 20:48

1인 주거, 이제 모두가 고민해야할 복지

▲ 김창하 민달팽이주거협동조합원 핵가족화란 단어도 이제 사용하기 어색한 요즘 세상, 1인 주거는 이제 피할 없는 삶이 되어가고 있다. 대가족이었던 때 혼자 산다는 것은 드문 일 이었다. 가족의 구성원이 몇몇이 빠진다 해도, 삶의 전반은 혼자 지낼 일은 없었다. 하지만 핵가족화 이후 지금 삶은 어떨까? 편부모 가정, 부모와 같이 살지 않는 가정, 잦은 주거 이동으로 인해 가족 간에 떨어져 지내는 일을 물론, 가족이래도 2-3인의 작은 인원으로 인해 가족 구성원이 분가, 반려자와의 이별등으로 1인 주거에 쉽게 놓이게 된다. 어쩌면 삶의 마지막은 혼자 일 수 있다. 이제 1인 주거는 언젠가 받아 들어야 하는 현실이 된 것이 아닐까? 가족을 준비하던 삶에서 혼자를 준비해야 하는 삶이 되어 가고 있다. 미래는 그렇다고 쳐도 지금은 어떨까? 현재 전북지역은 노인층 인구 중 약 25%, 청년층 인구중 약 25%가 1인 주거의 형태를 띄고 있다. 이런 1인 주거는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치고 있다. 특히 노인층이 겪는 1인 주거 문제는 스스로가 안전을 담보하지 못해 더욱 심각하다. 나이가 든다는 건 이제는 홀로 자신을 지킬 수 없는, 부양자가 필요해 지는 삶을 의미한다. 매순간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그 누군가가 없다. 행동에 제약으로 사회적 관계망도 협소하다. 진짜 옆에 사는 이웃이 아니고는 관계망을 형성하기 힘들다. 도움을 구할 곳을 찾는 것도 도움이 필요하다. 앞으로도, 마지막 순간까지 혼자인 삶일 수 밖에 없다면, 이는 사회에서 책임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청년의 1인 주거도 그리 녹록치는 않다. 특히 여성의 경우 혼자 살며, 위협을 느꼈던 경험이나 추행의 경험은 누구나가 겪었던, 혼자 사는 때 반드시 당면해야하는 일이라 한다. 청년 누구나 좁은 방에서 살고 있지만, 이웃은 안정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주변에 많은 이들과 살고 있지만, 자신이 신뢰할만한 이웃은 존재하지 않는다. 청년의 사회적 관계망은 바깥의 관계망(학교, 직장, 가족) 이외에 주변의 이웃이란 관계망은 만들어지기 어렵다. 현재 우리지역도 고독사와 청년 니트 문제에 당면해 있다. 하지만 주거문제에 대한 지원 정책은 주거비에만 집중되어 있고, 이마저도 가족이어야만 받을 수 있는 것 이 대부분이다. 1인가구는 계속 증가하고 있지만 주거안전망은 가정에만 집중되어 있다. 가족문화가 큰 지역에서 홀로 산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가정을 이루기 전 단계처럼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1인 주거인은 이미 존재하고 앞으로 계속 증가할 것이다. 이런 노인과 청년은 가족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혼자 사는데 지장이 없도록 사회적 안전망이 필요하다. 이웃 안에서 노인은 자신을 도와줄 보조자를 찾지 못해 괴로워하고, 청년은 신뢰할 사람이 곁에 없어 외로워한다. 곁에서 풀어야 하는 문제를 외부에서 해결을 하려면 막대한 비용만 들이게 될 뿐 효과는 미미하다. 노인의 보조자를 이웃의 청년에게 찾는 것은 어떨까? 청년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내 옆의 사람이 되면 어떨까? 혼자 살아가는 삶이지만, 홀로 감당할 수는 없는 것이 삶이다.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그들 이 이제 함께 살아감을 도모해야 할 때이다. 노인에게 복지를 청년에게 일자리를 서로의 연결망을 통해 채워나가는 것, 무엇보다 이런 연결망을 강화되도록 제도가 도와 주는 것이 앞으로 1인 주거 사회에 고민해야할 복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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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04 19:34

전사가 될 것을 고백한다

▲ 최진영 독립영화감독 곳곳이 난리다. 터질게 터졌다는 반응이다. 오래전부터 떠돌던 소문을 현실로 마주했다. 공동체를 지향한다며 촌으로 들어간 연극집단의 연출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자행했다. 극단의 대표는 여성임에도 같은 여성단원을 연출가의 황토방으로 밀어 넣었다. 공동체가 아니라 위계와 권력으로 개인의 육체와 정신을 말살하는 집단주의였다. 자고 일어나면 성폭력 가해자 리스트가 늘어나고 있다.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대중문화예술인들의 이름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 우울증과 자괴감만 증폭된다. 무엇보다 나를 견딜 수 없게 하는 건 피해자들의 이런 용기를 예언이랍시고 음모론으로 퉁치는 김어준의 말이다. 그는 미투운동이 한국에는 없었다는 말도 했었다. 이미 2016년부터 SNS를 중심으로 각종 문화계에서 00계 성폭력 고발이라는 해쉬 태그 운동이 돌고 있었다. 여자들은 죽을 힘을 다해 싸우는데 지식인이라는 자가 공작 운운하며 공중파에 나와 헛소리를 하고 있다. 현장에서 당한 피해자들의 참담함을 공감하기는커녕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 독자들이 판단해주셨으면 한다. 기꺼이 용기를 낸 생존자들의 고백과 고발을 유행하는 구호쯤으로 여기는 자가 시사평론가라면 이 사회의 시사라는 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물어보고 싶다. 문화계 성폭력 가해자들이 더 악랄한 이유는 자신의 위계 권력을 이용하여 피해자들의 미래와 밥줄을 인질삼아 유린한 점이다. 청소년 시절, 남교사로부터 귀를 비롯한 신체터치와 속옷 검사를 이유로 여학생들의 척추를 이리저리 만졌던 불쾌한 기억들은 많은 여성들이 경험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그 불쾌한 경험을 저항 대신 침묵으로 치환했다. 왜냐면 그는 교사고 우리는 학생이었으니깐. 권력과 위계를 등에 업고 자행되던 숱한 폭력들은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2차가해, 여성혐오, 성적대상화가 심해지고, 가해자의 시선으로 훑는 강간 묘사의 영화들은 많아지고 있다. 2월 초 서지현 검사의 행동에 용기를 받았다며 피해자는 자신이 경험한 일을 고백했다. 가해자는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했을뿐 아니라 여성영화인상을 받았던 인물이다. 가해자는 은퇴를 선언했다. 사실 은퇴를 선언했다는 말도 수긍하기 어렵다.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하여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가 마치 선심이라도 쓰는 듯한 뉘앙스다. 사실상 파문 퇴출이라는 단어가 맞다. 그러니깐 현재 거론되는 성폭행, 성추행 가해자들은 자숙 죄인의 심정이라는 말로 물타기 하지 않았으면 한다. 당신들은 범죄자니깐 법의 심판을 조용히 기다리면 되는 거다. 올림픽 최초로 설립된 성폭력 상담센터의 총괄 책임을 맡은 김성숙 수녀는 성폭력은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너무나 당연한 말임에도 그동안 피해자들은 침묵을 강요당하고 2차가해의 피해까지 입어왔다. 그러고 보면 성폭행의 위기에서 가해자의 혀를 잘라 재판을 받았던 피해자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의 원작자가 이윤택이라니 아이러니하다. 숱하게 말을 했지만 되돌아오는 건 메아리뿐이었던 사회. 가해자뿐 아니라 침묵과 조롱으로 동조한 그치들 덕분에 우리는 더 전투적으로 싸울 것이다. 몇 천년동안 전사로 위치 선점했던 당신들은 그만 투정하라. 당장 젠더의 위계 폭력을 멈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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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2.25 17:46

안녕하세요 시간입니다

14세기, 광장에 시계탑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출근시간과 퇴근시간 그리고 지각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분침이 나오고, 초침이 나왔다. 시간의 흐름이 선명해질수록 인류는 바쁘게 움직였다. 동시에 전례 없는 시간 부족에 시달렸다는 것이 시간의 아이러니다. 역사상 가장 많은 시간을 밤을 새워 사용하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말한다. 난 이렇게 바쁜데, 왜 시간이 부족하지?현대인의 관심은 한정된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각종 자기계발서 역시 시간관리서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개인 사례를 모델로 저자의 시간 사용 성공담을 주장하는 것에 가까워 그들의 성공이 우리에게 100% 일치되는 것은 지구 반대편에 나와 꼭 닮은 사람을 찾는 것만큼 어렵다.시간의 꽁무니를 쫓느라 지쳐 있을 수 없다. 슈테판 클라인의 안녕하세요 시간입니다는시간에 대한 우리의 고민을 해결해준다. 이 책은 뇌과학과 심리학의 입장에서 시간을 이야기한다. 나이가 먹을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이유, 시간을 느리게 가게 하는 방법 등 한 번쯤 궁금했던 이야기에 대해 논문과 실험을 배경으로 설명해준다. 너무 쉽고 재미있어서 시간가는 줄모른다는 점만 뺀다면 시간의 대부분을 파악한 기분이 든다.예를 들어보자. 나이가 들수록 하루가 빨리 지나간다는 느낌의 정체는 경험이 주는 자극의 차이라고 말한다. 어렸을 때의 하루는 매시간이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게 되면 일상이 반복된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로 시작하는 일은 뇌에 큰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때문에 우리는 시간이 어떻게 흐른 것인지, 무슨 일을 한 것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지만 개인마다 다르게 흐른다. 이 책에서는 물리적인 시계와 별개로 인체에는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는 생체시계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시간에 쫓기거나, 느리고 빠르다고 느끼는 일들은 이 두 시계의 간극이 만들어낸 일이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이론을 설명할 때 아름다운 여성과 대화하는 것은 1시간이 1분처럼 느끼지만, 뜨거운 난로 위에 손을 올리면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진다.라고 말했다. 시간의 상대성에 대한 가장 멋진 설명이다.그렇다고 우리가 시간을 잡기 위해 뜨거운 난로 위에 손을 올린다거나,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들을 필요는 없다. 우리가 좋아하는 일은 빠르게 지나가지만 기억 속에 방을 만든다. 덕분에 시간이 지나도 그때의 풍경과 향기, 분위기까지 언제든 꺼내어 볼 수있는 것이다. 찰나의 순간이 영원히 기억된다는 것. 이는 시간이 가진 매력적인 면이다.안타깝게도 우리는 내 생체시계에 맞춰 생활하거나 좋아하는 일만을 하고 살 수없다. 현대인의 무력감은 방을 만들며 사용되어야 할 시간을 못 만드는 데있다. 우리는 자신의 시간을 통제할 수 없을 때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스트레스 받은 상태에서 일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지난해 열풍이었던 YOLO도, 퇴사들도 모두 촘촘해지는 시스템속에 자신의 시간을 뺏긴 이들이 만들어낸 마지막 탈출구였다.신정이 엊그제 같은데 설날도 훌쩍 지나갔다. 그럴듯한 새해다짐의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느낌이다. 이 때 안녕하세요 시간입니다를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올해는 속절없는 시간의 꽁무니를 쫓는 것을 넘어 시간과 마주하고 인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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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2.19 23:02

제 꿈이요?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종이 한 장을 주시며 장래 희망이나 꿈을 적어 보라고 하신 적이 있다. 나는 의사라고 썼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8살 어린 아이가 의사의 역할을 알고나 썼는지.미국에서는 어린아이들에게 꿈을 물어 보면 베트맨 슈퍼맨 등 세상을 지키는 히어로 이름들이 많이 나온다는 뉴스를 봤다. 뉴스에서는 우리나라 교육방식과 외국의 교육방식이 너무 다르고, 어린시절 꿈이 그 아이가 성장해 살아가며 느끼는 행복 만족도에 영향을 준다는 내용도 있었다.생각해보면 어렸을 때 부모님과 선생님은 꿈에 사자가 들어가는 걸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우리는 아무런 의문을 가지지 않고 그게 맞다고 살았다. 나는 그당시 꿈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은 농부니까.시골에 내려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강의를 들으러 간적이 있는데 그때 어느 교수님께서 꿈에 대해 이야기를 하셨다. 우리의 꿈과 목표는 달라야 하고 다르다라고. 지금의 청년들에게 꿈을 물어보면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 CEO가 되는 것, 시험에 합격하는 것 등 자신의 희망 직업이나 바로 앞에 닥친 현실을 잘 풀렸으면 하는 그런 말을 많이 하는데 그건 꿈에 가기 위한 자신의 목표일뿐 꿈이라 할수 없다고 하시는 것이다.꿈이란 이상적인 것으로 자신을 끊임없이 이끌어 주고 가슴을 뛰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하셨다.예를 들어 한 농부가 있습니다. 그 농부의 꿈은 사람들의 마음의 병을 치료해주는 농부가 되는 것이었죠. 의사도 아닌 농부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겠죠. 하지만 농부는 자신의 꿈을 위해 목표를 세웁니다. 농장을 체험농장으로 바꾸고 원예치료사 공부를 해서 자격증을 취득하겠다고, 그리고 하나둘씩 계획을 완성해 갑니다. 농장을 체험 농장으로 바꾸고 밤에는 원예치료사 공부를 했습니다. 그렇게 2년이 지난 뒤 그 농부는 농부라는 직업말고 원예치료사라는 또 하나의 직업을 가지게 됩니다. 그후 그 농부는 자신의 농장에 찾아온 사람들에게 원예치유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다양한 치유활동을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여기서 중요한건 꿈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현 모습과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꿈이란 언제 어느 때든 가질 수 있는 것이며 어떤 방향으로든 갈 수가 있고 꿈이 있기에 목표가 생기고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생각해보면 난 꿈이 뭐였을까? 지금까지 살아온 날을 다시 생각해보니 목표만 있었을뿐 꿈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꿈을 가져 보기로 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데 막상 생각해보니 내 꿈을 잡기가 힘들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가져보는 진짜 꿈이랄까? 그렇게 한 달이란 시간을 보내고 나니 내가 하고 싶고 가지고 싶은 꿈이 생겼다.그것은 청년농업인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사람이다.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내가 가장 하고 싶고 앞으로도 하고 싶은 일을 봤을때 이 꿈이 나에게 딱 인거 같다. 이제 꿈을 잡았으니 목표를 세워 앞으로 나아가련다. 꿈이란 언제 어느 때 꾸어도 상관이 없는 것이기에 시골에 내려온 나는 처음으로 꿈을 가져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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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2.12 23:02

열심히 일할수록 불편한 나의 노동

4년전 지금처럼 활동가와 일을 병행하지 않고, 일에 몰두했었다. 지방 중소기업에서의 일이란 여러명 몫을 혼자 해나가는 것이라, 하루의 일과는 8시에 시작해 밤 11시에 퇴근을 해도 업무가 끝나지 않았다. 물론 주말에도 일은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일을 시작할 때 마음가짐은 회사에 기여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했다. 회사를 위해서 일하고 미진한 부분을 개선해 나가면 회사와 내가 함께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선의의 노력이 좋은 결과를 가져 올 것이라 그렇게 믿었다.하지만 2년간의 노력은 기대했던 것과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회사의 급여는 조금 올랐으나 업무의 강도는 올라간 급여보다 가중되었다. 업무 수행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은 업무에 소홀해서가 아니라, 혼자하기에는 너무 과중한 업무 탓이었다. 회사에 기여하면 좋은 파트너로서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업주에게 나는 파트너가 아니라 낮은 임금에도 일을 더 시킬 수 있는 수입원에 불과했다. 더 화나는 것은 일인분 이상의 일을 수행하는 나의 노력은 결과적으로 남이 해야 하는 노동을 빼앗았다. 정당한 대가를 받지도 못하면서 남의 일자리까지 뺏어 왔던 것이 나의 노동이었던 것이다. 나는 노동법 위반에 동조한 것이고, 누군가에게 생계가 될 수 있는 지역의 소중한 일자리도 빼앗은 것이다. 물론 나도 피해를 본 것이지만, 이런 행태를 묵인하면서 또다른 피해자를 만드는데 한 몫 거든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그리고 관행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편법 불법 행위들이 묵인되고 있다. 견적서를 부풀리거나 세금을 덜내기 위해 계산서를 고치는 행위는 어느 회사에서나 항상 해오던 일이었고, 연구비의 일부 내역을 속여 횡령하는 행위는 주변에 공공연하게 들리는 이야기다. 갖가지 사고로 안전에 대해 민감한 지금도 여전히 자격증을 대여하여 직원 혼자 여러명 몫의 업무를 하는 것은, 회사의 수익을 위해 마땅히 해야하는 일이 되었다.문제라는 것은 모두 알고 있지만 사람들은 입을 모아 법이 현장과 맞지 않다고, 법까지 다 지키면서 먹고 살 수 없다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법은 시민을 지키는 최소한의 안전망이다. 그런 안전망은 관행이 앞서서 작동되지 않고 있고, 지역의 대부분의 청년들을 법 테두리 밖의 노동자로 만들었다. 불법체류자처럼 보장받지 못하는 노동을 하고 있다. 해마다 하는 최저임금 인상안을 보며 지역에서는 법조차 지키지 않는 현실에 최저임금 1만원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일까란 생각을 할때가 많았다. 일자리창출에 목을 매고 있지만 청년은 일자리의 질을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고 일자리의 질은 거창한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청년이 지역에서 최소한 노동자로서 인정을 받는 것, 적어도 법의 테두리에 넣어 달라고요구하고 있는 것이다.직장인으로 하루를 살아가면서, 그래도 의미있는 하루를 보내고 누군가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음을 느끼는 보람과 잘못된 부분을 방관하며 불평등한 구조에 협조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같이 느끼고 있다. 열심히 일할수록 부끄러워져야 하고, 부끄러움에 무뎌지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곳에서, 퇴사와 니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그나마 낼 수 있는 작은 용기가 아닐까 싶다. 당신의 판단은 올바르다고 조금 더 용기내자고 힘내자고 말하고 싶다. 앞으로 지역살이에서 적어도 노동법이라는 안정망이 청년들을 지켜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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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2.05 23:02

격렬한 진군들을 위하여

9년이 지났다. 새해를 맞이하여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우는 와중에 아침부터 절망적인 소식을 접하고 그날은 하루종일 술을 마셨다. 21세기에도 진압을 이유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게 도무지 이해가 안갔다.엊그제 용산참사를 다룬 영화 공동정범을 봤다. 거대한 적을 상정한 다른 다큐와 달리 용산 철거민과 연대 했던 사람들의 균열이 주가 되는 내용이다. 개발과 철거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미시사라고 해두는게 낫겠다.어쨌거나 경찰 무전기에서 말하듯이 그들은 격렬한 진군들이었고 검찰에 기소될 땐 공동정범이 됐다. 외부에서 봤을 땐 국가폭력이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으나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그들 나름대로 잘잘못을 가르고 있었다.하지만 모두가 상처였던 2009년 1월이었다.근 십 년이 지나고 있지만 여전히 비슷한 상처가 만연하다. 강정이 그랬고, 세월호가 그랬다. 어쩌면 한국 현대사는 이런 상처의 관통일지도 모른다. 대추리도 있었고 한진중공업도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지척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한탄이 우리를 움직이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모든 게 가장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살기 위하여! 아름다움과 숭고함이 아닌 그저 살기 위하여 사람들은 투쟁을 했고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다.어쩌면 그 살기 위하여 자체가 숭고함이 아닐까 싶다. 내 뜻대로 태어나지 않았으나 내 뜻대로 살아갈야 할 이유와 권리를 그들은 비명으로 대신했는지도 모른다. 작년에 제주 43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 과정에서 고통이 엄습했다. 그 시대와 세대를 겪어보지 않았던 21세기의 시민도 고통이 스멀스멀 올라왔을 정도인데 그 참혹한 현장을 겪어야 했던 생존자들은 어땠을까. 영화를 완성하고 반성했던 게 다시는 내가 겪어보지 못했던 현장과 사건을 함부로 다루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이었다. 살기 위해 살아가는 것들을 밟고 죽였던 현대사를 겪어야 했다. 밀고를 하고 복수를 하고 밟아야만 살아갈 수 있었던 이 비극의 현장을 그린다는 게 창작자의 입장에선 고통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원경이 아닌 현미경으로 그들의 상처를 관찰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공동정범의 창작자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쉽지 않았을 이야기와 그림을 덤덤하게 그려내가는 이 영화는 쉽게 상처를 봉합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어쩌면 계속해서 잊지 말라고, 기억하라고, 망각에 저항하라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생존과 연명을 위해 우리는 노동을 하고 끼니를 때우고 잠을 잔다.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실행했을 뿐인데 잔인한 폭력앞에 속수무책이다.뻔히 피해자들의 상처가 보임에도 우리는 구원과 용서를 당위라는 단어로 덮어버리려고 한다. 어떻게 백주대낮에 총검에 찔린 광주시민들에게 이제 그만 용서를 하라고 할까. 모든 매체가 실시간으로 보여준 가라앉는 배의 피해자들에게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정범의 후반에서 이충연씨의 눈물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절망에 무뎌진 우리에게 연대의 대오와 망각에 저항하는 것. 그리고 진짜 공동정범은 영화 속 그들이 아니라는 것. 오랜만에 관람을 권하는 영화 한편을 봤다.이 글을 쓰는 와중에 곳곳에서 화재 소식이 들려 용산 참사를 다룬 공동정범에 관한 글을 쓰는게 망설여졌다.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안전에 관한 법률과 제도가 정착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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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29 23:02

청년들이 가상화폐 열차에 탑승하는 이유

카페에 커플이 앉아있다. 여자는 이야기를 하고, 남자는 스마트폰을 보며 듣는다. 그래서 오늘 무슨 영화 볼까? 신과 함께 아니면 1987? 스마트폰만 주시하던 남자는 처음 입을 연다. 영화보다 재미있는 게 있는데 그런 걸 왜 봐? 참고로 남자가 보던 것은 가상화폐 시세였고, 그 날은 크리스마스였다.우리는 가상화폐가 과학, 경제, 정치를 넘어 두 연인의 사랑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근래에 들어 북스포즈에 가장 많이 들어오는 문의 역시 가상화폐 관련 도서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란! 나는 나름 감동을 하며 화폐의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 그래서 찾으시는 책은요? 비트코인으로 10억 벌기요. 아. 없어요.새로운 기술은 멋지다. 하지만 돈 버는 것은 환상적이다. 가상화폐를 8만 원어치 샀다가 280억 자산가가 된 청년의 이야기에 솔깃하지 않을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한 편의 신화가 되어버린 가상화폐는 투자할 여력도 없는 청년들에게도 손짓을 날린다. 이봐 흙수저, 서민을 탈출할 마지막 기회야. 내 몸 하나 눕힐 집은 있어야지?열차는 출발한다. 청년들은 지금의 상황을 떠나고 싶다. 돈이 없다면 빚을 내서라도 이 열차에 탑승한다. 오르락내리락 끊어질 듯 말듯한 인생의 기찻길이 펼쳐진다.오피니언 리더들은 가상화폐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가상화폐는 투기다. 공감한다. 그런데 여기에 꼭 한 가지 조언을 덧붙인다. 노동의 가치를 알아라. 땡! 그것은 가상화폐 성공신화보다도 허황된 이야기가 된 지 오래다. 그들은 열심히 일한 만큼 경제가 쑥쑥 성장하는 시대를 겪어보았지만, 지금의 청년들에게 그런 시기는 오지 않을 것이다.또한 청년들에게 노동은 자아실현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지 오래다. 청춘의 클라이맥스는 취업 발표이고, 이후로는 계속 하강한다는 것이 노동과 청년이 서로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는 이유 아닌가.그래도 괜찮다. 먹고사니즘을 해결하면 그만이지. 하지만 직업을 가졌다해서 모든 금전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취업을 하면 묵혀놓은 인생의 다음 숙제가 쏟아진다. 명절이 오면 쏟아지는 질문들 결혼해야지, 집은 언제 살 거야. 월급으로는 답도 안 나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이러한 바람들이 모여 가상화폐시장을 비대하게 성장시켰다.가상화폐에 대한 문제는 어떤 식으로 진정될 것이라 믿는다. 규제에 대한 찬성과 반대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고, 업계의 전문가들이 속속 등장한다.하지만 더욱 문제는 가상화폐 열풍이 진압된 후에 남을 청년들이지 않을까? 초단위로 큰돈이 오르내리는 경험을 한 청년들에게 일상은 지지부진하고 비생산적인 일로 치부될 것이다. 결국 다른 투기나 도박으로 탈출구를 정할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쪽도 기형적이라는 생각에 답답해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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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22 23:02

청년농업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충성 중사 신성원. 이말은 일년전만해도 제가 자주하던 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전직 수색부대 직업군인으로 군인이라면 희망하는 장기 진급이 모두 되어 앞날 창창한 사람이었죠. 그런 제가 지금 부모님께서 계신 고향으로 다시내려와 농부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하였습니다. 저도 몰랐습니다. 갑작스런 형의 사고 소식에 많은 슬픔이 찾아 왔지만 어디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님만 할까요. 설상가상으로 그런 성치않은 몸과 마음으로 하우스 일을 하시던 아버지께서 낙상을 하시어 크게 다치시고 전역을 해야 겠다고 결정하였습니다. 많은 주변인들이 반대하고 설득하였지만 자식으로서 어떻게 힘들어 하시는 부모님을 보고만 있을수 있을까요.그날 전 바로 전역지원서를 제출하고 2016년 8월 31일 전역을 해 시골집으로 내려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농부이긴 농부인데 어떤 농부? 무엇을 하는 농부? 지금은 부모님 시대와는 다른 농업인데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전혀 알 수가 없어 찾고 또 찾아보고 여기저기 보러 다녔습니다. 단 농사를 해도 내가 즐기면서 재미있게 할 수 있는 농사, 부모님도 좋아하실만한 농사를 하는 걸 첫 번째 조건으로 시작하였죠. 그래서 제가 좋아하고 아직까지는 주변에 없는 원예치유농장과 양봉농장을 하기로 했습니다. 고향으로 내려와 처음 시작한 농사일은 생각보다 목화와 양봉이 잘 되어 기분이 좋았죠. 그런데 단지 젊은 나이에 농사만 짓고 있는다는 게 무언가 모르게 제자신이 너무 아까웠습니다.그 이유를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바로 젊음. 흔히 젊은 청년이 가지는 열정, 투지라고 하죠. 만일 제가 도시에 살았다면 다른 분야에 열정을 투자했겠지만 지금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청년농업인이기에 저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청년이라는 게 뭐지? 청년농업인이란 게 뭐지? 시골에 인구수가 줄어들고 시골에서 사람 보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는 이런 현실 속에 청년농업인라는 명칭을 가지고 농사만 짓고 살 것인가?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었죠.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청년농업인은 오로지 농사만 짓는게 다가 아닌 지역을 알리고 농업을 발전시키고 우리 부모님들이 이어온 시골문화를 되살리고 후배농업인들이 지금보다는 좀더 쉽게 농사를 지을수 있도록 기틀을 잡아주는 역할이라고 말입니다.지금 저는 저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순창 젊은 청년농업인들을 모아 더불어 농부라는 모임을 만들어 서로 생각을 공유하고 우리지역의 문화를 되살리고자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크게는 시골문화 되살리기죠. 지금은 보기힘든 품앗이 시골장 등 우리들만의 방식으로 시골을 살리고자 활동하고 알리고 있습니다. 청년농업인이란 단지 시골에 들어가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게 청년농업인이 아니라는걸 우리 청년농업인들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들은 예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고 현재 시골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함께 해결하기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단지 나이가 청년이라 청년농업인이라 생각한다면 당신의 청년이 너무 아깝지 않나요? 저는 청년다운 생각으로, 청년다운 모습으로, 청년농업인답게 살아보려고 합니다. 이런 지금 제 모습이 저는 행복합니다.△신성원 대표는 순창 쌍치면에서 화훼와 꿀벌농장을 운영하며 목화 전문 플로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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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15 23:02

지역의 청년살이, 주거부채 해결해야 살아갈 수 있다

주거는 삶에 필수적인 요소이고,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주거를 소유하거나 타인의 주거에 의탁해야 한다. 어쨌든 내 한 몸 뉘일 공간은 확보해야만 살 수가 있다. 주거를 확보하지 못한 삶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이처럼 반드시 필요한 것이므로 주거는 개인의 자산이 아닌 복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전북지역 청년의 주거 복지는 어느정도 수준에 있을까? 수도권의 높은 주거비로 빈곤한 삶을 살고 있는 청년의 삶과 비교되어, 가시화 되지 않고 있는 지방의 청년 주거문제는 어떨까? 전북 청년의 75%는 부모와 함께 살거나 자가를 소유하고 있고, 25%의 청년이 주거비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일단 부모와 살며 주거를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긴급한 경우는 아니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와 함께 살며 현재 주거안정을 누리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잠재적 빈곤층에 불과하다. 스스로 주거비용을 마련하기 힘든 청년들이 수도권으로 거처를 옮기는 경우, 매체에서 떠드는 청년주거문제의 당사자가 지방 출신의 청년이 되는 것이다. 수도권이건 지방이건 결국 주거문제를 심각하게 겪는 당사자는 지방출신의 청년인데 내 지역은 아직 청년문제 중 주거는 아직 괜찮다고 한다. 문제가 발생하는 건 뻔한 일인데도 말이다.그러면 상대적으로 비용이 저렴한 지역에서의 독립은 어떨까? 일단 청년의 재정 상태가 그렇게 좋지 못하다. 지역 청년 1인의 필수 지출 항목인 학자금대출금이자, 주거비, 통신비, 교통비, 공과금, 식비 등 계산해 봐도 독립을 하면 적어도 월 80만원 가량의 돈이 지출 된다. 청년이 숨만 쉬어도 월에 나가는 지출이다. 전북지역의 소득이라고 해봐야 최저소득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로 볼 때 2018년 최저 월급 기준인 157만원도 과하게 책정해 주는 것이고, 아르바이트 하는 청년들의 경우 77만원 세대로 전락한 현재 상황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도 본인의 지출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다. 취업을 위해 학원을 다니기 위해 아르바이트 기간을 따로 둬야 하는 현실은 지역도 다를 바 없다. 현재를 버티기 위해 필수 지출의 30%에 달하는 주거비를 줄이기 위해, 부모와 함께 사는 것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인 경우가 대부분이다.타 지역에서 유입된 청년의 경우는 주거부채를 의탁할 가족이 없기에 지역살이는 큰 부담일 수 밖에 없다. 주변 청년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서 지역을 떠난다고 말하지만, 결국에는 주거비를 감당하지 못해서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다. 일자리는 선택이지만 주거는 필수사항이다. 일은 쉴 수도 있지만 쉬기 위해서는 주거가 필요하다. 지역에 가족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벌어진 부채의 격차를 동일한 일자리만으로 타지역 청년의 유입을 바라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다. 전북이 타 지역 청년의 유입을 계획한다면, 일자리 이전에 그들이 지역에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게 할지, 어떻게 주거를 안정 시킬지를 고민해야 한다. 일자리 일변도의 일방적인 정책보다, 청년의 실태를 파악하고 그들이 정주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야만 비로소 지역살이를 시작할 수 있다.청년의 삶은 부채다 요즘 이 말이 맞는 것 같다. 사회에 나온 청년의 삶은 부채를 안고 시작한다. 일자리를 알선해주고, 청년을 위해 문화 생활을 보장해주고, 결혼을 장려하고 이런저런 시도들을 하고 있지만, 정작 그런 것들은 이번 달 내야 하는 공과금과 대출금이자 월세를 감당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역에 살고 싶은 청년에게 내 몸뚱이 뉘일 곳 정도는 마련되었으면 한다. 꿈과 희망은 그다음에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부채의 고리를 끊는 것이 먼저다.△김창하 씨는 전주시 청년희망단 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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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08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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