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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격'(國格)과 외교

현 정부 들어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에 하나가 '국격'이다. '인격'(人格)이 사람으로서의 됨됨이 즉, 사람으로서의 품격(品格)을 말한다면 '국격'이란 '국가로서의 품격'을 의미한다. 별로 쓰이지 않던 '국격'이라는 단어가 현 정부 들어서 빈번이 쓰인 것은 이명박 대통령이 그만큼 국가의 품위를 중시하기 때문일 것이다.이대통령은 G20 회의를 한국의 국격을 높이는 기회로 삼자고 수차례에 걸쳐 역설했었으며, 청와대는 G20회의를 앞두고 '모든 정부 부처에 국격 향상' 방안을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토록 지시했었다. 또 이대통령은 지난 14일 국무회의에서 한명숙 민주당 대표가 한미FTA 폐기와 관련해 미국대사관을 찾아간 것에 대해 "과거 독재시대도 아니고 외국 대사관 앞에 찾아가서 문서를 전달하는 것은 국격을 매우 떨어뜨리는 일"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제 우리나라도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으니 이에 걸맞는 행동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품위없이 후진국이나 제3세계 국가들처럼 국제사회에서 비난받을 일을 하지 말자는 이야기다. 외교는 '의전'이다재외공관장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한 한덕수 주미대사가 지난 16일 돌연 사의를 표명한 후 회의에도 참석치 않고 미국으로 급히 돌아갔다. 한 대사는 재외공관장 회의기간인 24일 기자간담회 일정도 잡아놓은 상태였다. 전례없는 일이다. 외교적 상식과 관례에서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났다. 속된 말로 대한민국은 질서나 규칙이 없는 나라가 돼버렸다. 외교는 '의전'(protocol)이다. 쉽게 말해, 품위있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대사는 정부를 대표하며, 국가원수를 대신하는 사람으로 대한민국의 얼굴인 것이다. 따라서 국가간 관계를 담당하는 창구인 외교관의 거친 행동이나 막말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아무리 화가 나도 웃으면서 얘기를 해야한다. 외교가 잘못되면 그 다음은 전쟁이기 때문이다. 보통 우리가 상대방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기분 나쁘지 않게 말할 때 '외교적 발언'을 한다고 얘기한다. 상대방의 말을 거절할 때도 "깊이 생각해 보겠다"라고 얘기하는 거와 같다. 한 대사가 귀국하고 빠른 시일 내에 후임 대사를 지명해도 후임자는 곧바로 부임할 수 없다. 후임자는 미국 정부의 아그레망(agrement)이라는 사전 동의절차를 비공개로 받아야 한다. 대사임명은 한국정부에서 하지만 그를 대사로 받아들이느냐는 해당국에서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대통령에게 직접 신임장을 제출하고 나서야 비로소 대사로서 업무를 시작할 수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선거로 인해 일정이 바쁘면 며칠 아니 몇 달이고 기다릴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 절차는 서둘러도 최소 1개월 이상 걸린다. 일반적으로 대사가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기 전에 후임자에 대한 아그레망을 상대국에 요청한다. 그리고 해당국 외무성에 귀국을 통보하면 상대국 외무장관은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고 이임식 행사와 훈장을 수여한다. 그리고 재임기간 친분을 쌓아온 주요 인사들에게 이임인사를 하게된다. 교민들을 포함 주재국 각계각층의 주요 인사들과 이임식 행사와 환송연을 통해 양국간의 결속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외교적 관행에 속하는 일이다. 소위 외교적 품위라고 할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대체적으로 지켜지는 일이다. 물론 예외는 있지만 소위 선진국들은 아니다. 외국에 나가있는 자신의 얼굴을 스스로 구겨버리는 행동은 말그대로 '국격'을 손상시키는 일이다. '국격'이 필요한 시점이다따라서 일반적으로 대사의 경질은 사전에 충분한 시간 여유를 두고 인선 및 교체 결정, 발표가 이뤄진다. 더구나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이른바 한반도를 둘러싼 '4강' 대사의 경우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번 한덕수 주미대사의 경질은 국제관례를 고려치 않는 후진국 또는 독재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방식으로 이뤄졌다. 무역협회장 후임이 얼마나 급한지 모르겠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다. 이제 우리의 외교도 선진국에 걸맞는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정말 '국격'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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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2.24 23:02

나는 꿈을 꾼다, 고로 존재한다

소설가 스티븐슨은 우리가 밤에 꾸는 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밤새도록 환하게 불이 켜진 자그마한 두뇌 극장에서 펼쳐지는 게 바로 꿈이다. 그 공연의 기획은 소인들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들의 작품이 너무도 생생하고 감동적이어서, 어느 문학 작품보다도 더 흥미진진진하다." 꿈은 재미있다. 그러나 또한 꿈은 엉뚱하고 무섭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우리 삶에서 꿈처럼 날마다 일상적으로 경험하면서도 신비와 불가해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것도 달리 없다. 물론 고대로부터 인류는 꿈이 무엇인지, 그리고 꿈을 왜 꾸는지 이해하고자 노력해왔다. 그 중에는, 우리가 잠든 상태에서도 뇌는 깨어 있는데, 꿈이란 수면 중에 뇌의 움직임을 우연히 자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견해도 있다. 그러나 꿈의 해석을 통해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의 행동에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입장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이 마음의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도 어느 정도 꿈과 관련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꿈의 결핍이 마음의 병을 유발한다고 한다. 오로지 꿈만이 제공할 수 있는 심리적 배출구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꿈의 결핍은 곧 꿈의 중요성을 무시할 때 생겨나는 자연스런 결과다. 꿈을 풍요롭게 하려면 밤에 잠자리를 잘 보살필 필요가 있다. 밤의 세계는 중요하다. 논길에 가로등을 설치하자 이삭이 패고도 결실을 맺지 못하고, 동물원에서는 보안등 불빛으로 동물들이 수태를 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낮과 밤이 서로 잘 어울릴 때 비로소 우리의 하루가 완성되는 것이고, 그 역할을 수행하는 중요한 원동력이 바로 꿈이다. 관심을 가지고 대하고 보면 꿈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간혹 무의미해 보이는 꿈도 있지만, 그것은 밤의 심리 세계가 내보내는 수수께끼를 해독할 만한 감각이 우리에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무의식은 현실 속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의 해결책을 알리기 위해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내오고 있고, 그 메시지가 곧 꿈이다. 어떤 때에는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불쾌한 꿈이 계속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꿈의 세계를 진정으로 이해해야만 비로소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진실을 찾아 나설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 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어떤 꿈을 꾸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 그러나 두려워 할 일은 아니다. 꿈은 나의 편이다. 어찌 보면 꿈은 통제할 수 없는 야생마이기도 하지만, 여하튼 나는 꿈의 주인이다. 꿈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잠은 몸을 쉬게 하고, 꿈은 마음을 쉬게 한다. 나는 꿈이 이를테면 우리 마음의 리셋 버튼이라고 생각한다. 꿈은 마음속에 맺힌 부분을 풀어주거나 산만하게 어지럽혀져 있는 것을 정리해준다. 그 과정에서 지나치게 단단한 매듭이 끊어지기도 하고 느슨한 부분에 과도한 힘이 가해지기도 한다. 꿈이 우리에게 행복하고 우호적으로만 경험되지 않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꿈과 좀 더 친숙해지고 우리 내면에서 꿈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문제에 대해 지금도 수많은 심리학자들이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다만 나는 예술이 꿈과 무척 흡사하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갖가지 예술 장르의 작품들은 우리가 깨어 있으면서 꿈을 경험하게 한다. 달리와 마그리트의 그림, 사티와 드뷔시의 음악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꿈과 예술은 삶의 불가사의함과 신비로움을 드러내면서 그로부터 아름다움과 경건함을 불러일으킨다. 예술에 영혼의 정화 능력이 있듯이, 나는 꿈 또한 그러하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흔히 네 꿈은 뭐냐고 묻는다. 그런가 하면 아침에 일어나서 간밤에 무슨 꿈을 꾸었냐고 묻는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희망어린 삶의 목표를 '꿈'이라고 하고, 밤에 겪는 환몽도 마찬가지로 '꿈'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어쩌면 우리 조상은 낮의 세계와 밤의 세계에서 좋은 꿈을 꾸는 것이 동일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꿈의 그 두 가지 의미로 나 자신에게 낮게 되뇐다. '나는 꿈을 꾼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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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2.17 23:02

어떤 학교가 좋은 학교인가

이제 곧 새 학년도와 새 학기가 시작된다. 이 무렵이면 학부모들은 자녀들이 다닐 학교가 어떤 학교인지 매우 궁금해 한다. 특히, 학교 선택권이 주어질 경우 학부모들은 마음에 드는 학교를 선택하고 자녀가 다닐 학교가 결정될 때까지 노심초사해 한다. 자녀를 평판 좋은 고등학교에 보내고 싶은 데, 다른 부모 마음도 마찬가지여서 그 고등학교 지원자가 넘쳐 자녀가 배정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나 중학교의 경우는 학부모들이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지만, 원하는 학교에 자녀를 보내려고 이사를 하는 등 무리를 하기도 한다. 어떤 학교를 학부모들은 선호하는가? 학부모들이 마음에 들어 하는 학교는 매우 다양하다.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학생들의 잠재능력을 최대한 계발하는 학교, 기초학력 미달 학생이 없는 학교, 여건이 좋지 않은 지역에 위치하면서도 대학진학에서 기대 이상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는 학교, 일반고이면서도 특목고에 못지않게 대학진학 성과를 거두고 있는 학교 등등일 것이다. 이렇게 학부모가 마음에 들어 할 학교들은 한마디로 좋은 학교라고 할 수 있다. 좋은 학교라고 불리는 학교들의 한 가지 공통점은 여건이 비슷한 주변의 학교들과 비교할 때 학생들의 교육적 성취가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이다. 연구에 따르면, 학생들의 교육적 성취에는 학생의 특성, 지역사회 여건, 가정환경, 학교의 특성 등 다양한 요인들이 영향을 미친다. 이들 요인이 잘 어우러진다면 학생들이 교육적 성취는 분명 높아질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루어진 학교 효과에 관한 수많은 연구가 공통적으로 밝히고 있듯이, 좋은 학교는 다른 요인(예: 학생특성, 가정환경, 지역적 특성 등)이 비슷할 경우에, 학생들이 그 학교에 다니는 것이 다른 학교에 다니는 경우보다 높은 교육적 성취를 내도록 만드는 학교이다. 학생들이 다니고 싶어 하는 좋은 학교는 무엇보다도 학생들의 교육적 성취를 중요시 하면서 학생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계발 또는 개발해 주려고 노력하는 학교다. 학생들은 교과 공부를 통한 지적인 계발을 소홀히 하는 학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적인 계발을 경시하면서 다른 것을 잘 하게 하는 학교는 사실상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지적 공부를 소홀히 하는 학교들은 그들 학교의 학생들의 학업성취가 낮은 이유를 학생들을 전인적으로 교육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기도 한다. 그러나 지적 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고서는 전인교육이 가능하지 않은 것은 명백하다. 전인이란 지, 덕, 체가 균형있게 발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좋은 학교는 지적인 교육을 기본으로 하면서 학생들의 다양한 교육적 욕구의 충족을 가능하게 하는 활동들이 이루어지는 학교들이다. 선생님들이 생각하는 좋은 학교는 전문성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학생들의 교육에 헌신할 수 있는 학교이다. 선생님들은 전시성 행사를 하는 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학교, 선생님들 사이에 학생들의 교육을 함께 의논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학교, 학생들과 상호작용이 활발하고 가르침의 결과가 학업성취도의 향상으로 이어지는 학교를 좋아 한다. 선생님들은 이런 학교에서 자신들의 학생들과 인격적 교감을 하며, 최선으로 그들을 돌보려고 애쓰면서 머물고 싶고 근무하고 싶어 한다. 좋은 학교는 개인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학생들의 교육적 성취 수준을 높일 뿐만 아니라, 가정 배경 등에 따른 학생들 간 학업성취의 차이를 줄여주기 때문이다. 비록 가정이 어려워 제대로 지원을 받지 못하여도 학생들은 학교 교육을 통하여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이른바 학교를 통하여 가난의 대물림을 끊을 수 있다. 학부모들은 자녀들의 잠재적 능력이 좋은 학교의 교육을 통하여 보다 더 계발되기 때문에 학교 이외의 교육에 덜 의존하게 되어 사교육비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좋은 학교는 국가적 수준에서는 한정된 재원으로 국가가 기대하는 교육목표의 달성을 보다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기 때문에 교육투자의 효율성을 높인다. 좋은 학교를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사명감을 갖고 다함께 뜻을 모아 '좋은 학교 만들기'에 직간접적으로 동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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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2.10 23:02

민심부터 파악하라

민주주의라는 단어의 사용 빈도가 요즘 부쩍 늘었다. 여러 정파들이 민주주의의 가치적이고 규범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데, 실상은 2012년 4월 국회의원선거라는 대목을 앞두고 한나라당과 민주통합당을 위시해서 여러 정파들이 더 나은 장사를 위해 자신의 모습을 재정비하는 것에 불과하다. 정당들이 당명, 강령, 공천후보 등을 바꾸려는 것은 유권자들의 표를 더 받기 위한 행위이다.여기서 장사로 표현했다고 해서, 필자가 정치행위를 경멸하는 것도 아니고 또 판매행위를 비하하는 것도 아니다. 만일 마케팅으로 대신 표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이거야말로 국어에 대한 멸시이다. 유권자 표를 끌어들이는 정치적 행위가 조삼모사(朝三暮四)적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권자를 만족시킨다면, 정치공학이라고 불리든 정략이라고 불리든 이러한 행위는 민주주의와 부합된 것이다. 즉 만족하는 유권자가 많아질수록 또 유권자의 만족이 단기간에 머물지 않고 지속될수록 좋은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이러한 유권자 표 획득 행위를 비난할 이유는 없다.각 정파가 추진하는 정치마케팅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의외로 정치권에서는 잘 모르는 것 같다. 정치인들은 이해관계가 얽혀있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기 쉽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 떨어져서 정치권을 바라보면 그 정치마케팅의 결과가 더 잘 보인다.정당을 음식점에 비유하면, 유권자는 손님으로 비유될 수 있다. 각 음식점(정당)은 더 많은 손님(유권자)을 받으려 한다.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던 음식점에 갑자기 손님이 줄기 시작했다. 그 음식점은 식탁 배치를 바꿔본다. 손님의 동선을 감안하기도 하고, 더러운 주방이 노출되지 않게 또는 반대로 깨끗한 주방이 노출되게 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엔 풍수지리 원칙에 의해 인테리어 배치를 바꿔보기도 한다. 메뉴를 단순화시키거나 아니면 거꾸로 다양하게 개발하기도 한다. 또 종업원 더 나아가서는 주방장을 교체하기도 한다. 정당도 공천 과정, 정책 변경 및 개발, 당직 교체 등의 변화를 꾀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가 정당 지지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음식점 매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와 동일한 논리로 유추할 수 있다. 음식점(정당) 인기가 올라가지 않을 때에는 기존 음식점(정당)을 완전 폐업시키고 같은 위치에 새로운 음식점(정당)을 개업하기도 한다. 이름이 바뀌면 과거와의 단절은 조금 더 쉬워진다. 새로운 당명의 사용 여부는 과거 당명의 브랜드 가치, 즉 그 당명에 충성적으로 투표하는 의식적/무의식적 지지자의 수를 계산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당명이 가져다 줄 지지자의 수도 계산해야 한다. 물론 단순 지지자 수보다 경쟁정당과의 상대적 지지자 수를 계산해야 한다.음식점의 기존 위치가 소비자들이 더 이상 몰리지 않는 동네라면 그 음식점을 다른 동네로 이전하기도 한다. 좌 클릭이든 우 클릭이든, 정당의 정책 추진 방향을 바꿀 때에도 새롭게 얻을 지지자의 수와 이탈할 지지자의 수를 비교해야 한다.일반적으로 말해서, 좌우나 보혁의 기준으로 전체 유권자들을 배열할 수 있을 때 우파정당은 좌로, 좌파정당은 우로 움직이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 중간투표자정리(median voter's theorem)가 말하는 대로 중도의 위치가 유리한 것이다. 미국의 양당제가 유럽의 다당제보다 더 중도로 수렴하고 있다. 우파정당의 좌 클릭과 좌파정당의 우 클릭이 자신에게 유리하려면, 몇 가지 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한다. 유권자들을 배열할 때 좌우나 보혁의 기준 외에 감안해야 할 기준이 있는지, 정당의 입장과 어느 정도 일치해야 유권자들이 투표하는지, 각 정당에 대한 유권자들의 혐오가 어느 정도인지, 제3의 정당들에 대한 진입장벽이 어느 정도인지 등에 따라 각 당에 유리한 위치는 달라진다.시장조사를 하지 않거나 엉터리 분석만 믿고 개업했다가 망한 음식점은 부지기수이다. 하물며 제대로 된 분석 없이 당명이나 정책이념을 변경하거나 고수하면 군소정당화, 심하게는 정치적 사망에 이르게 된다. 정당에게 차~암 좋은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아는 정당이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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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2.03 23:02

석패율제와 꼼수정치

지난 1.17일 한나라당과 민주통합당은 정치개혁특위를 열어 '지역주의 완화'를 위해 이번 총선에서 석패율제를 도입키로 합의했다. 석패율제는 각 당이 정당명부식 비례대표 후보를 발표할 때 지역구와 동시 출마한 중복 입후보자로 명단을 작성하여 이 중 가장 높은 득표율로 낙선한 후보를 비례대표로 뽑는 것이다. 지역구선거에서 가장 아깝게 떨어진 후보를 구제해주는 것이다. 호남에서도 한나라당 의원이, 영남에서도 민주당 등 야당 의원이 당선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 석패율제가 지역주의 완화와 한국정치 발전에 도움이 될까? 지금도 각 정당들은 비례대표 후보자명부를 작성할 때 취약지역에 대한 배려를 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호남 출신을 그리고 민주당도 영남 출신을 비례대표로 원내에 진출시키고 있다. 원래 석패율제는 2000년 16대 총선 때 민주당이 한나라당에 지역주의를 완화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제안했었으나, 당시 한나라당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었다. 한나라당은 200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영남지역기반을 잠식당할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석패율제를 강력히 반대했었다. 그런데 이제 10여년의 세월이 흘러 지난 지방선거에서 경남도지사, 강원도지사가 한나라당 후보가 아니어도 당선되고, 민주노동당이 영호남에서 선전하는 상황이 됐다. 다시 말해 아직까지도 지역주의 투표행태가 존재하지만 어느 정도 완화된 시점에서 한나라당은 지역주의를 해소하기 위한 방법이라며 석패율제 도입을 제안했고, 그리고 민주통합당은 진보정당과 아무런 논의없이 한나라당의 손을 덥석 잡았다. 대부분의 정치선진국들은 석패율제가 갖고 있는 비민주성 때문에 이를 외면하고 있고 독일과 일본에서만 실시하고 있는 선거제도이다. 정당명부비례제를 택하고 있는 독일은 정당에 대한 투표가 중심이고 지역구 선거는 보조적이다. 유권자는 당의 정강과 정책을 보고 투표를 하기 때문에 석패율제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과거 한 선거구에서 여러 명이 당선됐던 대선거구제에서 현행 소선거구제로 바뀌면서 당의 중진들이 살아남기 위해 채택한 것이 석패율제이다. 일본에서조차 '계파정치의 산물'로 비판받으며, 구시대적 족벌정치를 더욱 강화시켜준 것이 일본의 석패율제이다.지역주의를 완화시키기 위한다는 명분의 석패율제는 첫째, 유권자에 의해 심판받고 낙선한 정치인을 다시 당선시킴으로서 대의 민주주의 정신에 부합하지 않으며 유권자의 정당한 선택을 왜곡시킨다. 둘째, 궁극적으로 신진정치인의 진출을 막고 유력 정치인들의 당선을 보장해주는 보험용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다. 셋째, 영호남지역의 지역구 의원 수를 늘리고 비례대표를 축소하는 효과를 가짐으로써 비례대표를 더욱 늘려야 한다는 규범적 당위성을 제한하는 것이다. 새로운 각오로 국민과의 소통을 통해 혁신과 개혁을 강조하며 출범한 민주통합당은 왜 구태의연한 방식의 정치에 동의했을까? 민주통합당 중진들은 어쩔 수 없는 선택임을 강조한다. 이인영최고위원은 지난 18일 "지역구도를 넘기위한 선거제도로 중선거구제를 도입하거나 최선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차선은 권역별 비례대표제, 차악은 석패율제, 최악은 현행대로 순 아닐까요?"라고 트위터에 올렸다. 한나라당이 중선거제나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차악으로 석패율제라도 해야한다는 궁색한 변명이다. 왜 4월 총선이후에 구성될 제 19대 국회에서 유권자의 의사가 정확하게 반영될 수 있는 선거법을 만들려하지 않는가. 왜 쫓기듯이 선거를 눈앞에 두고 법을 바꿔야하는가. 지난 수십년간 한국정치발전의 발목을 잡아왔던 지역주의 정치를 해소하기위한 올바른 개혁이 몇 개월 늦어지면 어떤가. 개혁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지역주의를 해소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고육책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진정성이나 감동이 느껴지지 않고 왠지 '꼼수'처럼 느껴진다. 나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일까?△송기도 교수는 한국지역혁신교육원 원장, 주 콜롬비아 대사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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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1.27 23:02

法頂의 의자와 모래시계

지난해에 입적한 법정 스님은 땔감으로 쓰던 참나무 장작으로 의자를 만들고 그것에 '빠삐용의 의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영화 속 주인공 빠삐용이 절해고도에 갇힌 게 인생을 낭비한 죄 때문이었듯이, 스님도 그 나무 의자 위에 앉아 혹시 자신도 인생을 낭비하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 보기 위한 것이었다. 깊은 산속의 암자에서 명상과 참선을 하며 홀로 지내신 스님도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게 아닌가 경계를 해야 하는 마당에, 하물며 우리 같은 속인들이야 시간의 속절없는 흐름 속에서 어찌 마음을 제대로 가다듬을 수 있겠는가. 시간이란 생각하면 할수록 복잡하고 까다롭기 짝이 없는 대상이다. 우리는 시간에 의해 태어나고 시간에 의해 죽는다. 시간은 우리를 낳고 또 거두는 것이다. 어찌 보면 살아 움직이는 건 시간 자체일 뿐이고, 인간 개개인은 그 시계의 숫자판 위에서 째깍거리며 돌아가고 있는 미세한 바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모든 인간이 시간의 흐름을 재는 작은 단위로 잠시 존재했다가 사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래시계 속에 들어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한 해가 지날 때마다 365 개의 모래 알갱이를 소모한다. 우리 발밑에서는 끊임없이 모래가 빠져나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모래가 남아 있지 않게 되면 우리의 생체 시계는 완전히 멎고 만다. 그러나 시간은 그렇게 가차 없고 무자비하게 돌아가는 톱니바퀴 같은 것만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이란 무척 상대적이다. 뇌 의학과 관련된 임상보고서에는 몇 가지 특이한 사례들이 발표되고 있다. 뇌 작동에 이상이 생긴 한 남자는 시간의 흐름을 남들보다 더 빠르게 인식한다고 한다. 때문에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갈 때, 그 찻잔이 입을 향해 달려드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뇌의 해마 조직에 손상을 입은 한 남자의 경우에는 기억이 15분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고 한다. 때문에 그는 시간의 역사를 감지하지 못하고 15분이라는 영원한 현재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그렇듯 특별한 사례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시간이 항상 물리적으로 균질하게 흐르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뭔가에 몰두하면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고통스런 상태에 빠져 있으면 시간은 더할 나위 없이 느리게 흐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릴 때 시간의 흐름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달리 말해 우리는 매순간 행복해야 하고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증을 가지고 있는데, 그 때문에 오히려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잘 맞추지 못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인생은 행복한 것도 불행한 것도 아닐 터이다. 따라서 시간을 항상 너무 빨리 흐르게 하거나 혹은 너무 느리게 흐르게 하는 데 의식적으로 집착해서도 안 될 것이다. 마라톤이나 자전거 경기에서 기준이 되는 속도를 만드는 선수를 페이스 메이커라고 부른다. 인생이라는 경주에서도 오르막길이 있고 내리막길이 있다. 우리는 움직이는 시계라고 부르는 페이스 메이커의 감각을 익혀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게,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또 때로는 적절한 리듬으로 흐르게 할 필요가 있다. 며칠 전에 겨울 산행을 하다가 꽝꽝 얼어붙은 폭포를 보았다. 그러나 그 두툼한 얼음 층 안에서는 작은 물줄기가 졸졸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겨울에는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제 곧 날이 풀리고 봄이 오면 얼음이 녹아 거침없이 물이 쏟아져 내리리라. 내 모래시계 속의 모래도 폭포수처럼 빠르게 빠져 나가리라. 그러나 올해에 나는 그 빠른 물살 속에서 멱도 감고 서핑도 하고 래프팅도 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내게 주어진 이 한 해의 시간이라는 재산을 가지고 적절히 소비하고 관리하고 또 투자도 하려 한다. 신년을 맞이하여 어느 날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모래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중에 문득 든 생각이다. 최수철 소설가는 춘천 출생으로 서울대 불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8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맹점으로 등단했으며 윤동주 문학상, 이상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장편소설 『고래뱃속에서』,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사랑』 4부작, 『벽화 그리는 남자』, 『불멸과 소멸』, 『매미』, 『페스트』, 『침대』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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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1.20 23:02

학교폭력 예방은 타인존중 학습부터

지난 해 12월 친구들의 폭력에 시달리던 대구의 한 중학생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안타깝고 슬픈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의 학교폭력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 계기가 되었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시도교육감들과 함께 학교폭력 대책을 의논하고, 언론 매체들은 연일 학교폭력의 원인과 실태, 대책과 관련하여 전문가들의 백가쟁명(百家爭鳴)식의 주장을 전하고 있다. 그동안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자살과 같은 극단적 선택을 할 때마다 문민정부에서부터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쳐 현 MB정부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이 나서서 학교폭력 대책을 주문하고 교육과학기술부가 중심이 되어 학교폭력 종합대책을 세우는 등 매번 반복적 노력을 해 온 게 사실이다. 2004년에 제정된 현행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도 그러한 노력의 소산이었다. 이 법률은 학교폭력의 예방과 대책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피해학생의 보호, 가해학생의 선도교육 및 피해학생과 가해학생 간의 분쟁조정을 통하여 학생의 인권을 보호하고 학생을 건전한 사회구성원으로 육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법률은 학교폭력을 예방하고 근절하기 위하여 국가, 지방자치단체, 단위학교 수준에서 해야 할 일들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와 시도교육청, 단위학교들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학교 폭력 예방과 근절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전개해 왔다고 얘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폭력은 크게 줄어들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에 따라 그동안의 대책이 선언(宣言)적 수준에 머물렀다거나 학교폭력의 복잡한 현실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여 실효성이 없는 것이었다는 비판도 일었다 . 일부 학자들과 전문가들은 학교폭력을 획기적으로 줄이기 위해서는 학교폭력 예방 환경을 제대로 조성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의하면, 학교폭력 가해 학생에 대한 신고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고 가해학생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도록 하는 체계가 우리 사회에 확실하게 구축된다면, 학생들이 폭력을 휘두를 엄두를 내지 않게 되고 학교폭력은 그에 따라 줄어든다는 것이다. 일견 타당한 주장으로서 대구 중학생의 자살사건 이후에 꽤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대책으로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신고체계의 구축과 폭력에 상응하는 처벌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학교폭력 예방 환경의 조성은 가해학생들의 폭력적 행동의 표출을 억제할 뿐 그것의 내면적 원인인 공격적 심성을 없애거나 완화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다. 공격행동에 대한 모방학습 연구들이 공격적인 폭력 행동이 벌을 받는 것을 본 아이들조차도 공격행동에 대한 모방학습을 하고, 특정의 상황에서는 폭력이나 공격행동으로 표출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데서 이를 알 수 있다. 그런데, 모방학습은 공격성의 형성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모방학습은 공격성과는 다른 여러 마음의 형성에도 일어난다는 게 학자들의 공통적 견해이다. 바로 이 점에서 보다 근본적인 대책은 학생들이 학교 내외에서 폭력적 행동과 공격성을 학습하는 기회를 최소화함과 동시에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아끼는 마음을 기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가정에서 부모가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자녀들을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 학교에서는 학교장과 교사가 서로 존중하며, 교사들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혹시라도 폭력적 언어를 사용하거나 그런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고, 그들을 인격체로서 존중해야 한다. TV 드라마 등의 등장인물이나 지도자 등 가시성이 높고 영향력이 큰 사람들은 약자를 무시하거나 폭력적으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 학생들이 이렇게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태도와 행동을 통하여 공격성보다는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학습하고 기르게 될 때 학교폭력을 예방하는 근본적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김성열 부총장은 서울대 대학원 교육학 박사를 거쳐 제6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교육학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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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1.13 23:02

케빈 베이컨 6단계 법칙과 L2L

미국 영화배우 케빈 베이컨은 1994년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할리우드의 모든 배우는 자기와 같은 영화에 출연했거나, 아니면 자기와 함께 출연한 적이 있는 다른 배우와 같은 영화에 출연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케빈 베이컨의 6단계'라는 게임도 나오고 책도 나왔다. 케빈 베이컨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풍자기사도 있었고, 심지어 케빈 베이컨이 알카에다와 연결되어 있다는 풍자기사도 있었다. 여섯 번만 거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서로 연결된다는 케빈 베이컨 6단계 법칙은 오늘날 SNS 활성화로 그 단계가 축소되고 있다.연결 단계가 간소화되려면 수많은 영화에 출연한 케빈 베이컨처럼 큰 연결고리가 있어야 한다. 물류에서 이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거점(hub)이다. 항공사들은 거점 공항 중심의 항로 개발을 통해 한정된 직항로 수를 갖고도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지역으로 운항한다. 거점(hub)-바퀴살(spoke) 방식에서 각 지역의 물건은 일단 거점으로 간 후, 그 거점에서 다른 거점으로 보내진 후, 다시 개별 지역으로 수송된다. 모든 지역은 거점에서 바퀴살로 연결되기 때문에 한정된 연결로를 갖고도 많은 개별 지역에 연결되게 하는 것이다.이러한 거점 중심 방식은 지역 간 연결을 왜곡시키기도 한다. 수도권 거점과 지방 거점을 각각 하나씩 운영하는 물류회사에서는 서울에서 춘천으로 물건을 운송할 때 대전을 경유할 때가 많다. 한 시간 거리를 네 시간 거리로 만드는 연결이다.특히 지방과 지방은 직접 연결되지 못하고 서울을 매개로 연결되는 경향이 강하다. 춘천에서 부산으로 갈 때 거리상으론 중앙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가깝지만, 시간상으론 서울을 경유해서 KTX나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이 지름길이다. 우리의 서울은 남한 전체의 지도상으론 서북쪽에 치우친 변방임에 분명하나, 연결 지도에 있어서는 중심이다.연결 단계가 거점을 통해 간소화되면 될수록 거점과 주변 간의 불평등은 심화된다. 세상이 연결되면 되면 될수록 그 연결고리에 있는 사람들의 영향력만 커지지 연결고리에 없는 사람들은 주변에 머무르기가 쉽다.이에 비해 비(非)하드웨어 연결에서는 서울이라고 해서 구조적으로 지방보다 반드시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연결당 비용이 추가되지 않기 때문에 아무데에서나 아무데로 연결할 수 있고, 오프라인 식의 거점이 필수적이지도 않다. 거점을 통하지 않고 지방에서 지방으로 바로 연결하는 L2L(로컬-투-로컬)은 연결에 따른 추가 비용 없이 연결 단계를 축소시켜 효율적일 수 있다.지금 이 글은 한국지방신문협회 가입 전국 지방신문의 지면에 동시에 게재된다고 한다. 필자조차 그런 L2L 연결이 있었는지 몰랐다. 옆 동네라도 길이 없으면 서울을 둘러가야 하고, 사람들이 다니면 없던 길도 생기며, 사람들이 다니지 않으면 있던 길도 폐쇄된다. 여론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L2L의 여론 교류는 진정한 지방 발전에 필수적이다.대한민국 지방의 문제는 지방끼리 매우 유사하다. 고민과 해결책도 유사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서울 타도를 부르짖는 것은 결코 도움 되지 않는다. 서울이 죽어야 지방이 산다고 부르짖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 결과는 그 집단의 권력획득이었지, 지방 전체에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서울도 사람이 사는 지방 가운데 하나이다. 서울을 포함한 여러 지방들이 배타적이지 않은 협력으로 윈-윈 할 수 있다. 지방분권이 잘 된 외국의 경우, 각종 물류의 거점들이 있지만 거점이 아니라고 해서 낮은 수준의 복리를 받는 것은 아니다.현행 헌법상 국회의원 선거가 4년마다, 대통령 선거는 5년마다 실시되고 있다. 두 중요 선거가 함께 있는 해는 20년에 한 번에 불과하다. 올해가 바로 그런 해이다. 두 중요 선거를 앞두고 지역마다 선심성 그리고 선동성 언행들이 난무할 것이다. 다른 지역 사정을 모르면,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선심과 선동이 통할 수 있다. L2L 증대는 그러한 선동을 억제시키고 동시에 지역 간 불평등을 방지하는 데에 기여할 것이다. 활성화된 L2L은 공정한 경쟁에 기반을 둔 지속가능한 지역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김재한 교수는 서울대와 동 대학원 정치학석사, 미국 로체스터대 정치학박사를 거쳐 DMZ 학술원 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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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1.06 23:02

학교폭력에 대한 장기적인 대책

지난 12월 20일 한 대구 중학생이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자신의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해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매스컴엔 이 사건이 매일 보도 되었고 인터넷에서는 사람들이 그 잔혹성이 얼마나 진화되었는지 통탄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그 원인과 대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몇일이 지나면 언제 그런일이 있었나 하고 사람들은 망각할 것이다.그러나 이 문제의 심각성을 생각하면 방치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2011년 학교폭력 실태에 관한 청소년폭력예방재단의 자료에 따르면 재학기간 동안의 학교폭력 피해 경험을 묻는 질문에 대해 23%가 학교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 것으로 응답했고, 이 중 54%는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폭력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학교폭력 피해로 인한 고통에 대한 분석결과 응답자 중, 14%는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20%는 많이 고통스러웠다, 27%는 고통스러웠다로 대답해 학교폭력 피해로 인한 고통이 방관할 수준을 넘은 것같다.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학생들의 폭력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야 할 것이다. 매스컴보도에 의하면 경찰조사과정에서 가해자들은 과거에 별 탈 없던 평범한 학생으로 이 사건은 그저 장난이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또한 가족구성원이나 경제적인 면에서 평범한 가정으로 보인다. 따라서 미래의 학생지도를 피상적인 개인가정환경이나 행동양태에 따라 소수의 학생을 대상으로 할 것이 아니라,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해야한다. 심각성을 파악하기 위해서, 학생들 개개인에게 물어 보면 정직한 대답을 얻기 힘들지만 익명의 설문 조사를 통해 학교전체를 상대로 하면 의외로 학생들이 자신이 당하고 있는 또는 목격한 폭력사태나 따돌림, 그에 대한 문제의식, 신고의 문제점 등을 말함으로, 사태 파악이나 해결 방법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학교폭력의 원인으로는 핵가족 중심구조에서 자란 결과 부모가 과잉보호하여 아이들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잠재된 폭력성이 나타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고 보는 이도 있다. 이런 현상은 중국에서 '소황제'라고 불리는 무례한 아이들이 양산된 경우와 같다. 학교에서는 입시 교육 뿐만이 아니라 올바른 인성교육을 통해서 공동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서로 간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교육해야 한다. 선생님들이 모여서 해결 방안을 자체적으로 모색하거나 외부에서 전문가를 모셔와서 의견을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예산이 문제 될 수도 있지만 미국의 경우 처럼 아는 사람을 통해서 또는 학교라는 특수성을 이용해 전문가들이 무료로 봉사할 수 있도록 그들을 설득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만하다. 현실에서 뿐 아니라 페이스북이나 다른 소셜네트워크를 통한 사이버 폭력이나 왕따로 번질 때 더욱 통제하기가 힘들어 전문가의 도움이 더욱 필요로 할 것이다. 현재의 처벌제도가 약해서 이런 사건이 생긴다고 믿고 강력한 처벌을 옹호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처벌이 사건을 방지한다는 것은 가해자가 이성적 판단을 한다는 가정하에 통한다. 미국의 경우 처벌이 심해 억제력이 있을 것 같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오히려 학교가 정학이나 퇴학을 가할 경우, 단기간에 다른 학교 학생을 보호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는 학생을 학교에서 제거함으로써 이들을 교육시킬 기회를 상실하고 이들이 더 큰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상황으로 모는 경우도 많다. 학교폭력은 사후대책보다 예방교육을 통해서 방지를 도모하는 것이 상책이다. 피해 학생들이 부모, 선생,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면 사건의 실마리가 풀릴 수 있지만 요청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청소년폭력예방재단에 따르면 2010년의 경우 학교 폭력 피해시 도움 요청을 하지 않은 이유로, 일이 커질 것 같아서(28%), 이야기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서(19%), 알려지는 것이 창피할 것 같아서(15%), 보복당할 것 같아서(13%) 등이다. 많은 학생들이 학교폭력을 목격 했을 때 모른척 하는 것(62%)도 큰 문제다. 신뢰 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춘 뒤에 학교가 어떻게 폭력이 방지될 수 있는가를 학생들에게 설명하면 피해자, 또는 폭력을 목격한 학생으로 부터 신고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폭력이 가져오는 고통을 학생들에게 실감시키는 것도 하나의 대책일 수도 있다. 미국에서는 신체장애자를 위한 경사로를 설치하는 비용 때문에 건물주들이 주저했을 때 그들을 초대하여 신체장애자처럼 휠체어를 타고 하루동안 생활하면서 그들의 고통을 느끼도록 한 경우도 봤다. 한국 학생들도 피해자로 하루 동안 살면서 가상적으로 고통을 느끼게 한다면 모든 학생들이 학교폭력을 외면하거나 또는 무감각하게 받아들여 장난으로 남을 괴롭히는 사태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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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12.30 23:02

삼년상의 정치학

삼년상은 유교의 고유한 의례다. 군주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부모의 사후에는 삼년상을 치렀다. 임금이건 평민이건 사람의 자식이라는 점에서는 똑같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계든, 농사든, 학제든 주로 1년을 단위로 삼는데 부모의 장례는 어째서 3년이어야 할까? 사람이 태어나 제 발로 걷고, 제 손으로 숟가락을 뜨기까지 3년간은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라고 유교는 설명한다. 그 동안 부모는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는" 은혜를 베푼다. 이 보살핌은 일방적이기에 절대적이다. 그것을 되갚을 수 있는 기회는 평생토록 없다. 부모가 돌아가신 다음에야 그 은혜를 유추하여 되갚는 의례를 재현해 볼 따름이다.즉 태어나서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3년의 경험이 삼년상의 수치적 근거다. 오늘날로 당겨와 해석하자면 삼년상은 부모의 죽음을 기화로, 인간 삶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명상하는 '인문학 페스티벌 기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나아가 삼년상에는 더 깊은 뜻이 들어있다. 부모에게조차도 '빚지고는 못 살겠다'는 오연한 자존심 말이다. 부모에게 입은 신세조차 빚으로 여기고, 그 빚은 장례를 통해서라도 되갚고야 말겠다는 '자존심 강한' 인간관이 그 밑에 깔려있다. 그래서 옛날에는 부모의 죽음에 삼년상을 치르고서야 제대로 된 사람으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문제는 통치자의 경우에서 발생한다. 과연 한 나라의 안위를 책임진 국가경영자가 제 부모의 장례 때문에 3년씩이나 공직에서 물러나 있어도 될 것인가? 유교를 표방한 중국이나 조선에서는 자주 삼년상 문제가 정치적 이슈가 되곤 했다. 특히 국가건설 초창기에는 인재풀이 좁았기에 몇몇 관리들이 삼년상을 치르느라 물러나면 국가경영에 큰 타격을 입곤 했다. 요즘 인기를 끄는 드라마 '뿌리깊은나무'의 주인공인 세종의 처지가 그러했다. 그래서 세종은 한 달을 한 해로 쳐서, 삼년을 석 달로 줄이는 편법을 쓰기도 하였다.(이것을 '단상'이라고 부른다.)지난 주말, 북한의 통치자 김정일이 죽었다. 그 아버지 김일성의 사후에 '유훈통치'라는 이름으로 삼년상을 치르더니, 그의 아들 김정은도 삼년상을 치를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북한이 유교국가일 수는 없다. 다만 북한의 문화에 삼년상을 미풍양속으로 보는 전통적 습속이 남아있는 증거로 삼을 수는 있을 것이다. 이미 서구화된 우리들 눈에 삼년상은 퇴영적이고 우스꽝스런 짓으로 보이겠지만, 북한은 여태 서구문화를 직접 체험하지 않은 곳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그만큼 전통문화와 습속, 그리고 생각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뜻이다. 삼년상은 정치적 측면에서도 유용한 제도다. 혈연으로 정통성이 계승되는 왕조의 경우 더욱 그렇다. 우선 삼년상은 후계자가 막후에서 통치자 훈련을 받는 수습과정으로 활용할 수 있다. 후계자는 효성스러운 상주로 숨으면서 초창기에 빈번히 발생할 정치적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삼년상은 전통을 계승하고, 과거의 폐단은 혁신하는 개혁정치의 계기로 삼을 수도 있다. 공자가 "3년간 아버지의 정치방식을 고치지 않아야 효자라고 이를 수 있으리라."고 말했던 것은 전통의 계승적 측면을 유념한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전문가들을 기용하는 집단지도체제를 운영함으로써 향후 인재풀을 확장할 수 있다.이모저모 삼년상이라는 제도가 정치적으로 유용할 순 있지만, 그러나 이미 과거의 풍속일 따름이다. 조선시대라면 군주의 삼년상은 정쟁을 3년간 휴전시키는 정치적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삼년상은 그런 정치적, 문화적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 특히 북한의 경제사정은 통치자가 3년 동안 막후에서 책임을 비켜나있을 만큼 한가롭지 않다. 객관적으로 볼 때, 북한은 머지않아 큰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싸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인민들의 경제적 삶이 윤택한 상황이라면 삼년상이라는 효행이 정치적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겠지만, 기아상태에서는 도리어 사치스런 짓거리로 폄하될 수 있겠기 때문이다. 맹자가 누누이 지적했듯, '유항산, 유항심'(有恒産, 有恒心)이라, 인민들의 경제적 삶이 여유로워야 충성심도 영속적일 수 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진리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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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12.23 23:02

"시적으로, 인간은 거주한다"

건축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내가 믿기로는 그 건축이 서는 땅이다. 이 땅과 관련한 '지문'이라는 단어가 요즘 내 건축의 중요한 화두며, 지난 일년 동안 써 온 이 칼럼의 주제어이기도 했다. 지난 글을 통해 나는 서양과 우리의 도시에 대한 차이를 역사적 맥락을 통해 설명했다. 서양인들은 도시를 머리 속에서 구상하고 이를 평지에서 실현한 반면, 우리의 선조들은 땅을 먼저 이해해서 그 생리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으며, 그 맥락을 다치지 않도록 가만가만히 마을의 구조를 얽고 섞는다고 했다. 지맥과 산수, 명당이 그런 말이며 배산임수가 그런 연유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로마군단 캠프가 유럽 중요도시들의 원형이니 이 임시적이고 표준화된 도시는 결국 땅과는 무관한 다이어그램이었으며, 그 관습이 르네상스 시절, 더욱 다이어그램적인 유토피아를 실현하기 위해 그들 도시는 반드시 평지에 세워졌다고 했다. 또한 20세기 들어 세워진 수많은 신도시들도 차별적 지역지구제와 계급적 도로망을 그린 평면의 도시여서, 평지의 그 도시들은 정체성을 갖기 위해 랜드마크라는 인공시설물이 반드시 필요하였다고 밝혔다. 우리는 다르다. 산과 계곡과 물길로 아름다운 형상을 만들어 놓은 땅 위에 지어지는 우리의 마을은 이미 공간적이며 입체적이다. 랜드마크는 인공적인 게 아니라 자연의 산세와 물길이 이루는 풍경이었고, 그 속에 자리하는 집이 땅과 밀착되지 않으면 오히려 죄스러운 것이었다. 우리의 삶은 땅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잠시 기대어 살 뿐이며, 집의 수명이 다하면 주된 재료인 흙과 나무는 그대로 다시 땅으로 귀속되어 자연과 합일되는 이치였으니, 자연을 깔고 뭉개며 세우는 서양의 집과는 그 근본이 다른 것이다.터무니라는 말이 있다. '터-무늬'에서 파생된 이 말은 말 그대로 터에 새겨진 무늬를 뜻한다. 터무니없다는 것이 근거 없다는 말이고 보면, 터에 새겨진 무늬를 몽땅 지우고 백지 위에 다시 짓는 재개발 같은 사업은 터무니없는 사업이요, 그 결과로 얻어져 판에 박은 아파트에 사는 삶은 터무니없는 삶 아닐까. 이 터무니를 한자말로 지문(地紋)이라고 고치고, 자연의 무늬 위에 삶의 기록을 덧대어지므로 문양 紋을 글 文으로 바꾼 게 地文이다. 땅은 엄청나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땅마다 다 다르며 그 내용도 마치 인간의 손금과 지문처럼 모두 다르다. 뿐만 아니다. 땅은 여전히 우리의 새로운 기록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의 선조들은 땅의 생기를 중시했고 풍수와 오행을 논하며 조심스레 집을 지었던 것이다. 땅을 지지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건축의 모든 단서는 결국 땅에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새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그 땅을 보지 않고서는 어떤 이미지도 그릴 수 없다. 땅을 가보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인 나는 땅을 처음 대하는 순간이 항상 벅차다. 요행히 땅이 지닌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경우, 그 이야기의 결에 맞추어 지금 필요한 희망적 삶을 덧대어 그리면, 설계가 물 흐르듯 끝나게 된다. 장소가 원하는 내용을 경청하고 그를 시각화하는 일, 이게 건축설계요 도시설계여야 한다.급기야 서양이 땅의 생리에 눈을 돌렸다. 우리가 서양화가 근대화인줄 착각하고 서양의 미학을 추종하고 있는 사이, 그 미학의 한계에 봉착한 그들은 도시와 건축의 윤리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분열된 공동체의 문제를 심각히 겪은 그들이 이제 그 극복을 위해 거주의 방식을 다시 성찰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커가 "거주한다는 것은 개인과 세상과의 평화로운 조화"라고 했으며, "거주함을 통해 우리는 존재하며, 그 거주는 건축함으로 장소에 새기는 일"이라고 했다. 장소에 새긴다고 하는 것, 바로 새로운 터무니를 만드는 일이다. 그렇다. 구태한 서양미학의 미망에서 이제라도 벗어나, 새 역사 창조한다며 터무니를 깡그리 지워 우리를 떠돌게 한 비뚤어진 방식을 다시 바로 잡아야 한다. 금수강산 속에 덧대어 온 아름다운 우리의 터무니를 지키는 일은 우리를 존재시키고 지속하게 하는 방식이며, 우리 삶의 존엄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올 한 해의 칼럼을 마치며 하이데커가 인용한 휠더린의 싯구를 덧붙이고 싶다. 마치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할 옛 풍경 같아서이다. '시적(詩的)으로, 인간은 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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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12.16 23:02

市長이 청중 수준을 만든다

유럽 문화에서 부러운 것 중의 하나가 관객 기반이 아닐까 싶다. 정장 차림의 원숙한 관객들이란 연주가에겐 최상의 선물일 것이다. 좋은 관객이 좋은 극장을 만들고 고스란히 그 감동을 되돌려 받는다. 거꾸로 관람에 익숙하지 않은 불편한 관객은 모두를 힘들게 한다.때문에 오페라, 콘서트, 연극, 미술관에 안목있는 청중과 콜렉터들이 얼마나 있는가가 도시의 문화 성숙도를 말해주는 증표다.필자는 클래식 대중화를 위해 80년대부터 해설음악회란 것을 수백 회나 진행해왔는데 지금은 상당한 인프라 확충과 관객 기반의 증가를 몸으로 느낀다. 돌이켜 보면 70~80년대는 르네상스, 필하모니 같은 감상실 문화가, 80년대는 오디오 및 음반 회사의 레코드 및 영상감상회가 주종을 이뤘다.그러다 번스타인 해설음악회를 본 딴 ‘금난새 해설음악회’가 나오면서 대중화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90년 들어 대학의 사회교육원과 지자체 구민회관에서도 다양한 프로그램이 개발되었다.2000년 들어서 예술의전당을 출발한‘11시 콘서트’는 공연의 패러다임을 바꿔 아침 시간대에 주부들과 소통하며 전국의 인기 프로그램으로 정착되었다. 직업상 수천 회의 공연을 경험한 평론가 입장에서 지역에 따라 관객 편차가 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요즈음은 학부모들이 문화를 쫓아 주거를 이동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고 한다. 문화가 도시 경쟁력과 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이다.청중이 없어 좋은 공연물을 소화할 수 없다면 공연 기획사들이 회피하기 때문에 그 격차가 날로 심해진다. 정부도 이런 심각한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란 것을 운영해 제작비 절감, 네트워크 교류의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그러나 러시아 관객들처럼 발레리나 이름을 축구 선수 이름 외듯 한다던가, 연주회에서 무조건 큰 소리로 앙코르를 외치지 않는 성숙한 문화를 만들어 가려면 비평가도 필요하겠지만 행정의 장인 시장(市長)의 마인드가 대단히 중요하다.모차르트 시대의 귀족들은 모차르트가 작곡하고 연주한 곡에 대해 바로 즉석에서 평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천재 모차르트도 귀족들의 입맛을 맞추며 예술성을 유지하는 줄타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한다.이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서야 한다. 예산권을 쥐고 있는 공무원과 일품 요리사를 뽑는‘공모’가 과거처럼 요식 행위로‘임무 ??繭?생각하면 시대착오다. 방송의‘나가수’처럼 활짝 여는 방식을 취하거나 삼고초려를 해서라도 제대로 된 사람을 뽑아야 한다. 세계 최고의 악단인 베를린 필의 지휘자를 단원들이 뽑는 것은 오케스트라가 지휘자의 독점적 카리스마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호 존중과 호흡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민주적인 절차를 채택한 것이다. 극장장, 지휘자 어느 쪽이든 인맥, 학맥, 향토색에 얽혀 형식적인 들러리 인사를 한다면 그 폐해는 고스란히 시민에게 돌아가고 결국에는‘트위터의 화살’이 인사권자인 시장을 향하게 되는 세상이다. 그것은 마치 종교시대의 도시 건물들이 사원의 높이를 넘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한 것처럼 오늘날엔 시장의 눈 높이가 법과 같은 결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법인화 이후 바람 잘 날 없었던 세종문화회관을 비롯해 전국 지자체의 여러 극장과 단체에서 장을 뽑는다는 공고가 나부낀다. 삼삼오오 커피를 마시며 부임한 예술감독의 예술성에 대해 담론하는 유럽의 행복한 관객들의 모습을 우리는 언제쯤 닮을 수 있을까.지금 트위트에 정명훈 지휘자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글쓴이의 주장대로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정 지휘자를 영입한 것이 토목공사 식 발상이었는지, 어땠는지 잘 모르겠으나 토론은 소비자의 안목을 터주는 학습 효과가 있을 것이다. 청중 수준을 끌어 올리는 최고의 방법은 참 능력의 리더를 뽑는 것. 그 절차와 낙점은 인사권자인 시장의 몫이다. 청중이 감동하면 박수와 앙코르가, 잘못하면 야유가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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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12.09 23:02

국민들은 FTA 실체를 알고 싶다

격동하는 현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정치가들은 선거 때 유권자들에게 고개를 납작 엎드리면서 잘 모시겠다고 약속을 하지만 일단 유권자가 한번 모셔보라고 당선을 시켜주면 유권자는 뒷좌석에 팽개치고 사익 추구 또는 소속 정당의 이해타산에 따라 행동한다. 야당도 집권당이 무리하게 과속할 때 절제하는 견제 장치가 아니라 깜빡 잊고 켜 논 사이드 브레이크처럼 무조건 집권당에 반대만 하면서, 타는 냄새 뿐만이 아니라 아예 최루탄 냄새까지 풍기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처럼 정치제도가 삐꺽 거리는 것에 실망한 유권자들은 새로운 정당, 정치세력의 출현을 갈망하고 있다.과거에 유권자들은 선거철에 만 정치가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가 있었고 평상시에는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대중매체를 통해서 정치에 의견을 피동적으로 반영하는데 그쳤다. 이제는 소셜미디어의 등장으로 이런 모델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경제생활에서 “소비자는 왕이다” 라는 대접을 받아 온 유권자들은 정치면에서도 같은 대접을 바라고 있다. 소셜네트워크는 이런 시민들의 욕구를 충족 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등장했다.소셜네트워크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며, 어떻게 사용되느냐는 그곳에 참가한 사람들의 이슈에 대한 지식과 대화에 대한 태도에 달려있다. 다른 관점을 배우려고 하는 자세라면 담론과 소통의 장이 될 수 있고, 자신과 같은 생각 만을 접하려고 한다면 선동의 매개체로 전락할 것이다.얼마 전 국회에서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이 통과된 후 각계 반응이 다르다. 어떤 이는 이제는 미국시장에서 한국 기업이 차별 받지 않고 진출하여 힘을 마음껏 써 볼 기회가 될 것처럼 생각하고, 어떤 이는 좋은 세상이 다 끝나고 이제는 미국기업의 냉혹한 이윤추구 때문에 한국 산업이 거덜나고, 국민들의 삶이 더 빠듯해 질 뿐 만 아니라 정부의 정책수행이 ISD(투자자 국가소송제)에 의해서 제한을 받기 때문에 이것은 망국의 조약이라고 부르고 있다.필자 의견은, 총체적인 경제적 성장은 더 빨라질 것으로 본다. 대기업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더 높아 질 것이고, 수출이 늘어나고, 경쟁이 치열해 지면서 기업내지는 생산자의 체질이 강화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고도의 경쟁에서 살아남는 기업에서 고용의 급속한 증대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동시에 경쟁에서 지는 기업이나 산업은 약화내지는 사라짐으로써 실업자를 발생시킬 것이다. 또한 소비자들은 공급자간 경쟁이 치열해 짐에 따라 양질의 재화와 서비스를 받는 상황이 올 것이다. 초기에는 가격 저하로 소비자가 혜택을 누리겠지만, 소수기업이 시장을 지배할 경우 가격이 오르고, 만약 기업이 만족할 만한 이익을 거둘 수가 없다고 판단하면 서비스를 거부하는 부작용도 예상된다. 최근에 미국에서는 에이티 앤 티 (AT&T,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핸드폰 통신회사 )와 티 모바일 (T-mobile, 네 번째로 큰 핸드폰 통신회사)가 연방정부로부터 반독과점 문제로 합병승인에 차질이 예상되자 합병을 포기했다. 한국에서 독과점을 막기 위해서나 또는 사회적 약자나 중소기업 보호를 위해서 정부가 외국기업을 효율적으로 규제할 수 있을지는 ISD때문에 의문이다. 한 사건이 모두에게 똑같이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이 한국 전체에 단순하게 이익 또는 손해가 된다고 결정할 일이 아니라 한국 국민 누구에게 어떤 이익이 되고, 어떤 손해가 되는지, 단기적인 관점과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리고 이익 보는 측과 손해 보는 측의 부의 재분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라지는 산업에서의 잉여 노동을 어떻게 재훈련시켜 부흥 또는 신생 산업으로 이동을 유도할 것인지를 논의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사회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이 성장이라면, 수출을 통해서인지, 내수의 진작을 통해서 인지, 언제까지나 성장추구를 할 것인지, 성장과 경쟁 중심의 경제정책이 한국산업과 국민들에게 최선의 정책인지에 대해 따져봐야 한다. 또한 분배 중심정책은 재정적자와 경제체질의 약화를 가져오는지 등도, 모든 국민들이 충분히 논의한 후에 한미자유무역협정에 대한 결정을 했어야 마땅하다. 정치가들은 다차원의 문제를 일차원적으로 해결하려 하고, 소통 보다는 단절 속에서 행동하여 유권자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다.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는 짧은 의견을 달기는 적당하지만 심도 있는 논의를 다루기에는 부족하다. 천상 전통적인 대중매체인 신문이나 방송, 또는 인터넷 매체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문제를 종합적으로 다뤄 줌으로써 시민들로부터 신뢰를 쌓고 더 많은 담론의 광장을 제공한다면 국민들을 거리의 광장으로 내모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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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12.02 23:02

‘사이’에 대한 명상

사람이란 개인이 아니라 관계로 이뤄진 존재다. 사람을 한자로 인간(人間), 즉 사람 사이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제 한 몸 건사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상대방과 제대로 관계를 맺을 때라야 참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냐, 사람 짓을 해야 사람이지!라는 우리 속담도 같은 의미다. 여기 사람 짓이란 곧 상대방과의 사이를 제대로 수행할 적에야, 즉 소통할 수 있을 때라야 올바른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덕담으로 자주 쓰는 사이좋게 지내라는 당부 속에도 그런 뜻이 담겨있다.이 점에 주목한 것이 유교의 오륜이다. 오륜은 5가지 인간 관계망, 즉 네트워크를 뜻한다. 부자간, 부부간, 벗들 간의 사이를 잘 이룰 때라야, 사람다움을 획득한다. 오륜의 핵심은 나를 중심에 놓지 않고, 외려 상대방을 중시하는 데 있다. 노랫말을 빌리자면,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를 몸소 실천하는 것이다. 문제는 상대방의 처지로 바꿔 생각하기가 몹시 어렵다는 사실이다. 옛날 공부란 입장 바꿔 생각하기를 몸에 익히는 과정을 일컬었다. 명륜당이라, 오륜을 닦아 밝히는 집이 대학(성균관)의 본부건물이었던 까닭도 그 때문이다. 인터넷이란 컴퓨터 통신망이다. 관계를 맺어 서로 연결하고 또 소통한다는 점에서 인터넷의 핵심도 사이에 있다. 인간의 간(間)과 인터넷의 인터(inter)는 그 뜻이 똑같은 것이다. 인터넷의 특징은 정보교류가 상호적이고, 수평적이라는 점에 있다. 인터넷은 위에서 하달하는 명령보다는 평등하게 교류하는 정보가 주를 이룬다. 사람의 사이가 상대방에 대한 측은지심으로 사람다움을 이뤄낸다면, 정보의 사이 곧 인터넷 세상도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람들의 자발성으로 구성되는 곳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사람이든 인터넷이든, 사이는 도덕성을 본질적으로 내장한 듯하다. 이 사이를 이어주는 것을 정치라고 부른다. 정치란 청와대나 정부청사, 혹은 의사당에서 이뤄지는 의사결정 과정만이 아니다. 도리어 비근하고 구체적인 일상 즉 가족 간, 동료 간의 사람-사이를 적절하게 소통하는 것이 정치다. 그런 점에서 언론의 기능은 전형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다.사람들 사이의 문제, 즉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는 것도 정치가 해야 할 역할이다. 공자가 정자정야(政者正也)라, 정치란 바로잡는 것이라고 지적한 까닭이다. 문제는 이 사이가 힘과 돈을 가진 자들에 의해 망가지고 왜곡되는 데서 발생한다. 그리고 언론기관과 정치가들이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때 문제는 심화된다. 정치는 본래부터 정치가의 전유물이 아니며, 소통은 언론기관의 사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정치는 전문가들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장삼이사의 평범하고 서투른 사람들이 행하는 유일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이 안철수 원장의 1500억원 기부를 정치적 행보로 규정하며 과학자는 과학을 해야 한다. 왜 정치권에 기웃거리느냐고 힐난한 것은 정치를 제대로 알지 못한 탓이다. 이 지점에 오늘날 나는 꼼수다로 상징되는 사적 미디어의 흥기와 안철수 현상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두 현상은 모두 사람의 사이와 정보의 사이가 공정하지 못하고, 공평하지 못하다는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꿩 잡는 게 매라고 했듯, 사람과 정보의 사이를 제대로 소통하는 자가 정치가일 따름이다. 아니 평범한 시민인 내가 잘못된 정책에 분노하고 쫄지 말고 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 곧 정치다. 시인도 이 생각을 응원하는 듯하다.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 학자는 오로지 학문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 시와 경제의 사이 / 정치와 경제의 사이 () 관청과 학문의 사이를 /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 다만 휴지와 권력과 돈과 착취와 () 억압과 통계만 남을 뿐이다. (김광규, 생각의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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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11.25 23:02

“성찰적 도시, 메타폴리스(Metapolis)”

중세에 지은 이탈리아 시에나 시청사 내부에는 암브로지오 로렌체티가 그린 도시와 농촌의 관계를 나타내는 프레스코 벽화가 있다. 그림 속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는 많은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밝은 분위기의 시민들은 상거래에 몰두하고 있다. 반면에 어둡게 그려진 성밖에는 농부들이 죄다 머리를 숙이고 경작에 열중하는 동안, 잘 포장된 도로 위를 성에서 나온 귀족들이 사냥도구를 실은 말을 타고 하인들을 데리고 가고 있다. 동서를 막론하고 옛날에도 도시와 농촌의 차이는 빈부와 신분의 차이였던 게다. 사실 도시가 발생하고 나서야 농촌이라는 공동체가 생겼다. 농촌은 도시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공급처였으니, 늘 도시에 의해 그 성격이 정해졌고 도시가 요구하면 사라지기까지 했다.그러나 프랑스 시민혁명으로 정신의 자유를 얻고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물질의 자유를 취득하게 된 19세기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포화상태를 견디다 못한 성벽은 마침내 허물어지고 도시는 이제 기회의 땅이 되어 보랏빛 미래를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개방되어 확장일로에 놓이고 만다. 그렇게 커진 도시를 메트로폴리스(Metropolis)라고 부른다. 이는 mother를 뜻하는 그리스어 meter에 어원을 두는데 원래 식민도시를 거느린 큰 도시를 뜻했다. 현대에서도 주변에 위성도시를 여럿 둔 대도시를 의미하는 말이어서 그 배경은 확장과 성장에 있다. 백만 명의 인구를 가진 이 메트로폴리스는 오늘날 무려 450개나 되며, 이는 천만 명 인구의 메갈로폴리스를 낳아 현재 세계에 20여 도시에 이르는데, 이 초대형 도시는 도시 상호간의 연합을 촉진하여 에큐메노폴리스라는 이름으로 지구전체의 도시화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미래를 예견하는 이들은 죄다 비관적이었다. 1927년에 나온 미래도시에 관한 공상영화 “메트로폴리스”에서는 도시는 지배자와 노동자 계급으로만 나뉜 갈등의 집단으로 그려졌고, 1982년의 영화 “블레이드런너”가 그린 2019년의 로스앤젤러스는 산성비에 젖은 음울한 풍경으로 나타났다. 온실가스, 지구 온난화, 이상기후, 석유자원의 고갈, 원자력의 공포 등등…. 온갖 지표와 예측도 불안하다. 과연 우리 인류는 지속할 수 있을까?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도시 그리고 그 화려한 종착점인 메트로폴리스에 성찰이 필요할 때 아닌가.미국의 도시학자 리차드 세네트는 민주주의를 목표로 하는 도시의 성격을 이렇게 정의했다. “다원적 민주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하려 한 시노이키모스(synoikimos), 즉 종족간, 경제적 이해간 혹은 정치적 견해간의 차이들이 함께 어울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중앙집중화 된 권력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의 차별성이 발전의 주체이다. 이 민주주의적 비전은 거대하고 집중적인 건물들이 표현하는 상징보다는, 뒤범벅된 공동체 속에 여러 언어가 적층된 건축을 선호한다. 궁극적으로 다원적 민주주의의 형상은, 전체로서의 도시를 표현하는 이미지를 철저히 부스러뜨리는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그가 그렸던 도시는, 단일 중심의 땅을 용도별로 나누며 기능의 최대화를 목표로 통제적 체계를 가지고, 기념비적 건물을 통해 도시의 이미지를 지배하는 메트로폴리스와는 대척점에 서 있었다.좋은 조짐이 보인다. 서울과 부산, 광주와 대구 등에서 도시재개발이 아니라 원주민을 정착시키는 도시재생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는 과거를 지워 스펙타클한 광경 만들기에 몰두해온 지난 날의 잘못된 관행에 대한 성찰이었다. 뿐만 아니라 도시와 농촌이라는 종속적 관계의 공동체가 아닌, 이 둘의 기능이 결합된 공동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위 도시(Urban)과 농촌(Rural)을 합친 러반(Ruban)라이프, 농촌에서 5일을 살고 주말 이틀을 도시에서 머물며 즐기는 삶이다. 물론 IT산업이 가져다 준 스마트환경 때문에 발생한 풍경이다. 도시재생이든 러반라이프든 이들 공동체는 네트워크로 묶여진다. 여기서는 땅을 구역별 용도별 기능별로 나누지도 않을 뿐더러 뒤범벅이며 다중적이고 이질적으로 이뤄져 있다. 이런 도시가 한계에 봉착한 메트로폴리스를 뛰어넘는 도시, “메타폴리스(Metapolis)”라고 프랑스의 도시학자 프랑수아 아쉐가 제안하였다. 나는 이를, 지난 우리의 못난 도시개발을 반성하는 도시라고 풀이하며 “성찰적 도시”라고 번역하였다. 그렇다. 이제 성장과 팽창은 과거의 유산이며, 개발과 재개발이 아니라 재생과 치유, 그리고 절제를 통한 지속적 삶과 우리의 감성과 지혜를 나누는 연대적 삶이 새 시대 우리의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 그게 “성찰적 도시”가 그리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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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11.18 23:02

정치와 예술은 거리가 필요하다

10·26 재보선 서울시장 선거는 박원순 시민운동가의 승리로 끝났다. 박 시장은 변화를 열망하는 시민의 승리라고 답했다. 재보선은 끝났다지만 정치권은 내년 총선과 대통령 선거를 향해 무한질주할 것이다. 국민이 요구하는 변화의 실체가 뚜렷이 무엇인지는 입장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한마디로 경제가 잘 돌아가 사람 살기가 좀 편했으면 하는 요구일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몇 번에 걸친 보수와 진보 진영의 권력 장악을 해오면서 진저리 치는 이전투구의 싸움을 펼쳐 온 만큼 이제는 투쟁보다는 설득하고 포용하는 리더십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반대를 위한 반대는 정치에 혐오감을 주고, 각자의 勢(세) 규합만으로는 어느 쪽도 큰 승리를 할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다.기존의 식상한 정당(政堂) 정치를 벗어나기 위해 최근 신당론(新黨論)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안철수 서울대과학기술대학원장 같은 인물을 찾기 위해 당은 물론 지자체에서도 큰 고민에 빠진 것이다. 박 시장이 오세훈 전 시장의 측근을 가까이 둔 것도 포용의 리더십을 통해 보다 강력한 변화의 열망을 실현하기 위하려는 뜻일 것이다. 여기서 정치와 예술의 나쁜 관행도 이번 기회에 좀 고쳤으면 한다. 사실 MB 정부 들어 최장수 문화부 장관을 지낸 유인촌 전 문화부 장관이 예술에 정치 색깔은 맞지 않다고 옷을 벗긴 사례가 몇 있지 않았는가 . 말은 옳지만 결과는 엉뚱하게 코드인사 역풍으로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꼴이 되고 말았다. 단체장이 바뀔 때마다 옷을 함께 벗어야 한다는 관행이 이제 예술계 전체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문화계는 나름대로 굳건한 질서와 전통이 자리 잡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름 석자도 생소한 인물이 정치권력을 업고 등장하면 예술가들은 아연실색이다. 이들이 훈장이라도 단 듯 종횡무진하면 예술가들은 허탈감에 빠져 창조력이 감퇴하고 숨고 싶을 것이다. 박수 받을 사람은 떠나고 인적 네트워크가 빈약한 실습 수준의 인물이 나타나 다시 시동을 켠다면 이는 변화가 아니라 후퇴요 잘못하면 침몰이다. 예술은 정치가 혼돈스러울 때에도 시민을 위로해주고 믿음을 주어야 한다. 재정(財政) 러시아나 세계 2차대전중에도 오페라하우스 불을 훤하게 밝힌 것은 사치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혼을 달래기 위한 ‘기도’였음을 알아야 한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는 시인이 고통받는 사회는 병든 사회라 했다. 그런데 정치가 뺨치게 알량한 예술가들이 정치권의 허리띠를 붙들고 동행하면 예술은 죽고 만다. 지금 KBS 교향악단 지휘자 문제가 내홍(內訌)에 빠졌다. 애시 당초 환영할만한 실력 검증의 인사였는지 들리는 소문대로 정치권 낙점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갈등이 장기화 되면 국민 혈세는 물론이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오케스트라는 돈이 있다고 만들고 당명(黨名) 바꾸듯 갈아 업는 정치의 희생물이 아니다. 전신인 국립교향악단을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만들겠다고 정치권이 손대어 KBS교향악단으로 바꾸었는데. 다시 정치가 가세해 무덤을 판다면 역사에 오점을 남기게 된다. 탁월한 예술경영으로 꽃이 피는가 싶었던 고양아람누리극장, 성남아트센터, 창원성산아트홀, 대구수성아트피아 등 높은 평가를 받던 극장장들이 코드에 걸려 입장을 달리하면서 노하우를 잃어가고 있다. 그래서 때를 묻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치와 예술은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당장 내년도 서울시 문화예산이 대폭 삭감이라니 예술을 사치로 보는 것일까. 최고의 복지가 정신복지인데 포퓰리즘의 민생복지에 밀려 꿈도 꾸지 말라는 것인지.가난한 아이들, 총으로 무장된 폭력의 아이들에게 악기를 손에 들게 해 도시 전체를 변하게 한 엘시테마 운동이 상륙한 것은 MB 예술정책의 큰 성과인데 이런 것이 뒤집힌다면 노하우를 잃는 안타까움이다. 정치와 예술의 거리를 찾기 위해서 때론 예술가들도 목소리 내야 하지 않겠는가. ‘침묵은 동조’라는 말이 싫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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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11.11 23:02

정당의 위기와 신문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젊은 유권자들이 정당도 없고 정치 경험도 없는 무소속 박원순 씨를 시장으로 선출했다. 이것은 정치가들이 현 세대들이 겪고 있는 등록금, 취업, 안정적 고용, 육아, 주택 등의 문제를 유권자 입장에서 이해하고 해결하려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신,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국회에서의 몸싸움 등을 함에 따라 시민들이 현실 정치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시민 개개인의 조그만 목소리가 침묵으로 사라졌던 과거와 달리 소셜네트워크는 이를 수용, 정제, 확장함으로써 하나의 웅장한 교향악을 창출하는 효과를 냈다.과거에는 정당에 가입하면 경쟁 상대가 타 정당의 소수 정치인뿐이었으나 이제는 소셜네트워크를 통한 새로운 다크호스의 등장 가능성으로 과거의 좋은 시절은 다 가버렸다. 한국의 신문도 정치인과 비슷한 입장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2008년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언론 수용자 의식조사 자료에 의하면, 시민들은 신문기사 및 뉴스에 대한 설문에서 기자들의 전문성이나 신문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신문에 대한 신뢰감은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치적으로 편파적이라고 느낀 사람이 68.8%, 국민의 이익보다 자기 회사이익을 우선한다고 보는 사람이 67.8%, 부유층과 권력층 입장을 대변한다고 보는 사람이 65.8%였다. 반면에 2009년 언론인 의식조사에 의하면 국민이 신문을 신뢰한다고 보는 언론인이 그렇지 않다고 보는 언론인보다 9.3%가 많았다.신문이 이런 착각 속에서 시민들의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변화를 꾀하지 않으면, 기존의 일부 독자들은 관성으로 신문을 계속 읽겠지만, 젊은 세대들은 신문을 염두에 두지 않고 아예 소셜네트워크를 주 정보원으로 삼을 것이다. 신문이 광고수입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 있으면 이런 악조건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겠으나, 작금의 상황은 신문이 변화하지 않으면 정치판에서처럼 커다란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을 예고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수입의 80%를 차지하던 광고수입이 2010년에는 5년 전에 비하여 52%나 감소했다. 한국의 경우 2009년에는 2년 전과 비교해서 매출액이 약 33%나 감소했다.경제상황 외에 한국신문은 또 하나의 복병을 갖고 있다. 지금까지 광고주들은 신문의 광고효과보다는 책정된 광고비를 다수의 신문사들에게 나눠 줌으로써 신문이 자사에 유리한 기사를 내보내고, 불리한 기사는 빼거나 약화시킬 거라는 기대로 광고를 준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공정사회가 진행되고 이제는 신문사 이외에 인터넷 등 수많은 정보 공급자가 생겨 신문사와 손을 잡을 경우 효과가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면서 신문사에 발행부수공개를 요구해 왔다. 한국ABC협회는 1996년 처음으로 발행부수를 공개하기 시작한 지 10여 년 만인 지난 2009년 말, 신문사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일간 신문의 부수를 공개하게 했다. 조만간 광고주들은 발행부수가 아닌 유료구독부수의 공개를 요구할 것이다.그렇다면 신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는 부수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세계최고의 권위지인 뉴욕타임스의 부수는 2011년 3월 말 약 92만 부,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침으로써 닉슨 대통령을 하야시켰던 워싱턴 포스트는 55만 부에 그치고 있다. 미국의 신문들은 절대 부수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신문구독료를 올려왔고, 절독하는 독자들을 잡기 위하여 과거처럼 할인 정책을 쓰지 않고 있다. 가능한 한 많은 독자를 확보하는 것보다 확고한 유료독자만을 간직함으로써 안정된 구독 수입을 올리고 신규독자 확보, 신문 인쇄, 배달에 드는 비용을 절감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둘째는 질로 승부를 봐야 한다. 수용자 조사가 보여 준 것처럼 전반적으로 공정하고 시민의 입장에서 사건이나 문제를 보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독자에 대한 데이터 베이스를 만들어 그들의 욕구와 필요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중 어떤 분야에 집중, 특화를 하는 것이 자사에 가장 유리할 것인지 파악해야 한다. 셋째는 독자들의 관심, 취향, 소비 패턴 등의 정보를 모으고 이를 매개로 광고 효과를 높여 광고 단가를 높여야 한다. 넷째, 신문은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에 있는 젊은 층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동시에 급속하게 퍼지는 태블릿 PC, 스마트폰을 통해서 어떻게 젊은 세대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까 고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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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11.04 23:02

[금요칼럼] 더러운 입

오백년 전, 지리산 골짜기에 숨어살던 조식선생이 출세한 제자와 함께 저녁 밥상을 맞았다. 내내 기름진 음식을 먹던 제자는 헐한 밥과 박한 찬이 목에 넘어가질 않았다. 선생이 한 마디 던졌다. "자넨 음식을 등으로 먹질 못하는구먼!" 헐한 음식을 억지로 삼키려면 목울대를 울리고 등을 움찔해야 넘어가는 것을 두고, "등으로 먹는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음식은 창자를 채우기면 하면 될 뿐, 입맛에 집착하지 말라는 회초리다.저녁 무렵 텔레비전을 켜면 언제나 먹을거리 타령이다. 이마엔 비질비질 땀을 흘리며 목젖이 다 보이도록 입을 벌려 음식을 우적우적 씹는다. 또 그게 채 목구멍으로 넘어가기 전에 엄지손가락을 쑥 내밀고서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것이" 해가며 호들갑을 떤다. 먹는 음식을 두고 이런 추한 모습을 꼭 보여야 맛 기행이 되고, 고향 탐방이 되는 것일까 싶다.50년 전 보릿고개 시절 오늘의 풍요를 헤아리지 못했듯, 또 머지않아 굶주리는 때가 있을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일. 그래서 저 입들이 두려운 것이다. 문득 "음식에 탐닉하는 걸 비천하게 여기는 까닭은 고작 입의 욕망에 휘둘려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라던 맹자의 말이 귀에 따갑다. 먹는 입은 더러워지기 일쑤인 것이다.음식을 삼키는 입보다 더 조심스런 것이 내뱉는 입이다. 말 속에는 그 사람의 사람됨이 들어있다. 하이데거의 말마따나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사람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흰소리를 자주 하면 사람이 실없어지는 것이 이 때문이다.그렇다고 입으로 내뱉는 것이 모두 다 말은 아니다. 지키지 못할 말, 책임지지 못할 말, 거짓말은 '말'이 아니다. 말 속에 의미가 없고, 말 뒤에 실천이 따르지 않는 것은 '소리'일 뿐이다. 소리를 내는 것은 짐승이다. 흰소리, 발림말, 거짓말은 새가 지저귀는 것이나 개가 짖는 것과 진배없다. 그러니까 말이 뜻을 잃고 소리로 떨어지면, 사람은 곧장 짐승으로 추락하는 것이다.옛말에 "사람이 사람 짓 하기 어렵다"라더니 말 한마디 잘못에 짐승이 되고 마는 셈이다. 그렇다면 또 알겠다. 불교에서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이라, '입이 저지른 악업을 씻는 진언'을 외고 나서 의식을 시작하는 까닭을. 먹을거리에 집착하는 것이야 제 한 몸의 추잡함에 그치지만, 말을 잘못 내뱉으면 여러 사람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이리라.그러니 말은 내뱉는 이의 사람됨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말에는 듣는 상대방이 있게 마련이다. 말은 사람과 사람을 잇고 맺어서 공동체를 이뤄주는 매개체요, 공공재인 것이다. 한자어 신(信)을 세로로 쪼개면 사람(人)과 말(言)로 나눠지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사람의 말, 즉 사람다운 말일 때라야 신뢰가 생긴다는 뜻이다. 신뢰가 사라지면 말은 소리로 추락하고, 사회는 망가지고 마는 것이다. 공자가 "사람들 사이에 신뢰가 없다면 공동체는 존재하지 못 한다"(民無信不立)라고 경고한 것이 바로 이 자리에서다.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유독 흑색선전이 창궐했다. 흑색선전은 오로지 상대방을 해코지하기 위해 없는 사실을 만들어 유포하는 악독한 짓이다. 의도적으로 불신을 조장하고 조직적으로 말을 파괴하는 짓이다. '흰소리'도 사람을 실없게 만들거늘 '검은소리', 흑색선전이야 말할 게 있으랴.한나라당 중진의원인 김무성은 선거과정이란 난장판이라며, 안철수 교수더러 "난장판인 선거전에 기웃거리지 말고 강의나 하라"고 권했다고 한다. 말인즉 틀린 말은 아닌 듯하나, 곰곰 생각하면 참 무섭다. 본인을 위시한 의원들이 모두 협잡과 사기, 거짓말과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난장판 출신이라는 자기고백으로 들려서다.정치가가 자승자박하는 '소리'를 태연히 내뱉는 이 뻔뻔한 사태를 어찌할 것인가. 음식에 껄떡대는 입이야 제 한 몸을 누추하게 만들 뿐이지만, 공공재인 말을 검은색으로 오염시켜 공동체를 망가뜨리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저 더러운 입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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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10.28 23:02

[금요칼럼] 광주폴리

지난 9월1일 개막된 광주디자인비엔날레가 이번 주말 막을 내리게 된다. 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고 담론의 계기를 만들어 그 지평을 넓힘으로써, 디자인비엔날레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줬다는 유수한 해외언론들의 찬사가, 그간의 노력에 대한 좋은 위로가 되었다. 여러 전시 중에서도 광주폴리라는 이름으로 광주의 도심에 지은 작은 공공시설물이 이번 비엔날레의 성격을 단연코 부각시켰다고 했다. 이 광주폴리는 금번 디자인비엔날레의 주제인 "도가도비상도-디자인이 디자인이면 디자인이 아니다"와 연관하여, 디자인과 장소의 관계를 설명하는 일환으로 기획된 전시였다. 장소와 연관된 디자인이라면 건축이 대표적일 수밖에 없는데, 작은 시설물을 실제로 완공하고 전시하며 이를 광주폴리라고 했다. 폴리(Folly)는 원래 '다소 우둔하고 우스꽝스러운 것'을 뜻한다. 지난 80년대 중반 버나드츄미가 파리의 라빌레트공원을 설계하여 지은 35개의 시설물을 폴리라고 부른 이후, 건축용어로 자리 잡으면서 간단한 구조물이지만 문화적 기능을 수행하는 도시의 공공시설물로 알려지게 되었다.광주는 문화수도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문화와 관련된 많은 도시정책을 야심 차게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비엔날레의 총감독직을 맡고 광주를 오가면서 본 도시모습은 이에 걸맞은 게 아니었다. 급조한 듯한 신도심의 풍경과 낙후된 구도심이 어정쩡히 결합된 모습은 우리 땅에 있는 여느 지방도시와 다를 바 없었으니, 치졸하였다. 풍부한 녹지와 유려한 광주천 그리고 언제나처럼 듬직한 무등산이 빚는 자연환경은 특별한 아름다움이며 그 속에서 빚어 온 인문의 역사는 빛나는 것임에도, 파행적 근대화 과정이 만든 불구의 풍경이었던 것이다.나는 사라진 광주의 읍성에 주목하였다. 광주가 역사도시임을 밝혀주는 광주읍성은 1900년대 초 일제에 의해 도시 확장을 이유로 붕괴되고 말았다. 그러나 사라진 읍성은 도심 내 중요한 도로가 되어 그 존재의 사실이 남아있고, 읍성 안에는 여전한 옛길들이 있었다. 이 광주읍성의 흔적을 밝혀낸다는 것은 역사도시 광주의 복원이며, 원도심과 신도시의 경계를 확인하는 일은 도시발전의 정체성을 찾는 일일 게다. 따라서 우리는 이 2.3킬로미터에 달하는 읍성길을 따라 읍성을 출입하는 문이 있던 자리와 모서리부분 10군데에 광주폴리를 짓기로 하였다. 어느 곳은 작은 공원으로, 어느 곳은 작은 공연장 혹은 전시장, 또는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역출입구를 겸하는 기능을 설정하고 세계유수의 건축가들을 초청하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들에게 이 작은 시설의 설계가 매력 있을 리가 없다. 보상도 턱없었다. 나는 이들을 찾아가 광주의 민주화 운동의 역사와 그 의미를 설명했고 건축가로서 이런 문화운동에 대한 참여의 의미를 강조하며 참가 동의를 받았다. 그리고 이들의 놀라운 헌신으로 마침내 개막일에 맞춰 완공하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모두 뜻한 바대로 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한 곳은 주변의 민원을 풀지 못하여 미완성된 상태로 있다.그러나 벌써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이 폴리를 보기 위해 방문하고 있는 것은 물론, 폴리 주변의 어느 가게는 이들을 맞기 위해 그 업종까지 바꿀 것을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곳곳에서 공연과 집회가 벌어지는가 하면 어떤 곳은 저녁 무렵 주민들이 이 작은 시설에 모여 같이 음식을 나누며 공동체를 확인한다. 이런 움직임은 아마도 증폭하여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마치 수면에 던져진 작은 돌 하나가 파장을 만들며 주변으로 번지듯 이 폴리를 기점으로 주변은 주민 스스로에 의해 새로운 환경으로 바뀌어나갈 가능성이 짙다. 그래서 폴리를 문화적 거점이라고 한다. 더구나 광주시는 앞으로도 매년 광주폴리를 광주 전역에 확대할 것이라고 하였으니, 잘만 되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근사한 문화적 풍경이 광주에 만들어질 것으로 확신하게 되었다.도시를 재개발하기 위해 마스터플랜이라는 이름으로 기존의 환경을 싹쓸이하듯 지워 오래된 삶터를 유린하는 일은 이미 서양에서는 폐기된 방법인데도, 유독 우리의 땅에서는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야합으로 이 생소한 풍경 만들기가 성행되어왔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급조된 시민처럼 급조된 도시환경에서 파편적 삶을 살도록 강요되어 온 것이다. 도무지 지속 가능한 삶일 수 없으며 기억상실을 강요한 천박한 삶일 뿐이었다. 과거에 대한 기억 없이는 어떤 아름다움도 없다고 했다. 지속 가능한 삶이 역사를 기반으로 선다는 것을 알 때, 지금까지 전 국민을 도시의 유목민으로 몰아낸 기존 재개발은 폐기되어야 한다.물론 광주폴리가 모든 도시문제에 대한 해답일 리 없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소득이 있다. 모든 광주시민이 광주가 역사도시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스스로 도심 재생에 나설 조짐이 보인 것이다. 역사를 인식하게 되면 미래가 보이는 법 아닌가./ 승효상(2011광주디자인비엔날레 총감독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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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10.21 23:02

[금요칼럼] 클래식 레퍼토리를 준비하는 지자체들

엊그제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인천시립합창단의 뮤지컬 오라토리오 '모세(우효원 작곡)'공연이 있었다. 시립합창단으로선 이례적으로 2억원의 예산을 투자해 브랜드 상품을 만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그런가하면 고요하고 정적인 정가를 음악극으로 만들어 새로운 변화의 옷을 입히는 것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꼈다.부산국제영화제는 영화전당 개관 기념으로 월드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콘서트가 있었는데 5000명의 청중이 큰 감동을 느꼈다. 각 도시마다 시립교향악단이 있긴하지만 시가 월드필하모닉을 지원해 시민 만족을 높이고 도시 문화 역량을 키웠다는 평가다.대전 시립교향악단도 지난달 서울 콘서트에서 변신의 모습을 보여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처럼 극장은 극장대로 지자체는 지자체대로 문화 역량을 키위기 위해 그간 소외 되었던 예산을 클래식에 투자하고 있다. 관객이 많이 모이는 것이야 대중문화 쪽이지만 이제는 사회 전체가 명품을 찾는 고급 정서가 지배적이어서 클래식을 선호하는 쪽으로 방향이 선회된 느낌이다.서울시합창단은 오는 12월 '칸타타 한강'(임준희 작곡)을 준비하고 있는데 한 은행에서 전석 티켓을 구매하겠다고 요청이 왔다고 하니 격세지감이다. 그만큼 클래식에 대한 시장 수요가 늘고 있는 것이다.경남에서도 경남오페라단에 매년 지원을 하는 지역은행이 있어 문화가 풍성하게 꽃피고 있는 것은 나눔이 기업의 이미지를 높이기 때문이고 지자체도 공공 투자를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변화는 것은 문화의 방향을 바로 보고 있다는 증거다.무릇 세상의 이치가 풍성해지면 보다 나은 것을 찾게 된다. 대중문화 한류가 시장 논리 면에서 거대한 수효를 만들어 가고는 있지만 '동남아'라는 한계 시장에서 맴돌고 있다. 지금의 10대 청소년과 드라마 청중들로 채워진 시장을 벗어나 유럽시장을 공략하려면 현재의 상품으로는 지속적인 시장 개척이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유럽은 동유럽과 서유럽에서도 조차 서로의 문화적 자존심에서 격차를 보이고 있는데 자신들이 접하지 않은 동양의 문화가 이곳 상류 사회로 쉽게 젖어 들 수 없음은 당연하다.우리 것이 소중하다고 일방적으로 우리 것만 이야기해서는 좋은 대화법이 못 된다.클래식에 대한 사회 인식이 달라지면서 지자체의 브랜드 클래식을 만들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보이는 것은 우리가 축적하고 있는 엄청난 인력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얼마 전 해외 시장 개척을 위해 '아리랑 깐딴떼'라는 성악 그룹이 결성되는 가하면 새로운 동호인 시장 개척을 하려는 움직임도 부산하다.이제 지자체 행정 담당직원들도 보다 많은 정보들을 흡수하고 전문가들과 실질적인 네트워크를 열어 좋은 프로그램을 짜는데 능동적인 움직임이 필요할 것 같다.엊그제 청소년 오케스트라 지휘자(김성진)가 터키극장에서 우리 연주가들과 한국 작곡가의 작품을 들고 한터문화교류의 밤을 열어 우리 전통음악과 우리 클래식을 소개한다니 이런 일들이 더욱 왕성해 질 것은 분명하다.그간 우리가 성장에 바빠서 그럴 틈이 없었지만 이제는 발상을 달리해야 할 때가 왔다. 고부가가치의 블루오션 시장에 고급클래식이 나가야 한다. 서구사회에 코리아의 멋과 신명을 잘 보여 줄 때가 왔다. 그들도 동양의 문화를 고대하고 있는지 모른다.콘서트나 오페라극장에서 오피니언 리더를 대상으로 우리 문화를 알리면 그만큼 영향력이 크지 않겠는가. 이제는 양에서 질적인 전환을 해야 한다.이제 창작자를 우대하고 단체 지원법도 고쳐 선의의 경쟁을 통해 완성도를 높여야 할 때다.중앙 공급식 문화도 이제 지자체마다 바로 글로벌 시장을 개척해야하는 패러다임 전환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때가 아닌가.시민들은 정치권에서만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도 신선한 바람을 원하고 있다. 그 변화를 수용하고 다시 일으키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특히 시민의 문화 반응과 요구가 중요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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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10.14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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