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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삶의 질 지수’가 전세계 대도시 가운데 중위권을 기록하고 있다는 보도를 접하며, 이 지역의 많은 이들도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이지역은?’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서울 생활을 부러워하면서도 맑은 공기나 훈훈한 인심 등을 내세우며 이 지역에서의 삶에 억지춘향 자족해 하는 사람들은 더욱 그러한 질문을 절실하게 제기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의 막연한 기대와는 다르게 우리 지역의 지수가 훨씬 더 낮으리라는것이 일반적인 예측이다. 이를 단적으로 예증하고 있는 것이 몇 년째 유지되고 있는 각종 불명예기록 전국 1위라는 오명이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문으로만 나돌던 교통사고 발생률 전국 최고라는 사실은 대한손해보험협회의 구세적 조처를 통해 명백하게 입증되었다. 자동차보험 손실 누적이 타 지역에 비해 매우 심각하기 때문에 손해보험회사들이 ‘탈(脫) 전북’을 추진하고 있으며 실제로 상당한 수의 지점들이 폐쇄되고 있다. 이 지역에서 보험에 드는 사람이 증가하면 할수록 회사가 손해를 보게 된다는 이유에서이다. 교통혼잡 정도는 다른 대도시에 비하여 심하지 않은데도 교통질서 준수도는 전국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사고 발생 시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한 ‘싸움’이 우리 지역처럼 치열하게 진행되는 곳도 없는 것이다.훈훈한 인심도 아득한 옛날의 전설 속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각종 음해성 투서의 인구당 비율이 타 지역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다. 자치단체장들이나 교육위원을 비롯한 각종 정치꾼들의 독선과 비리도 주요 평가 항목인 정치적 안정성 부문에 상당한 감점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며, 때늦은 개발논리도 수질오염 등의 부문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구미나 울산 등 선진 개발지역들이 오염의 몸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데 이 지역에서는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지 못하고 개발컴플렉스에 사로잡혀 철지난 ‘산업사회로!’의 구호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그나마 위안을 주고 있던 교육파문화의 고장이라는 명성도 빛 바랜 자화자찬이 되고 말았다. 이에 대한 투자에 인색한 점도 그렇지만, 치적용, 생색용으로 전락해버린 예산 덕분에 문화예술인들의 긍지마저 무참하게 짓밟히고 만 것이다. 이로인해 민주주의나 지방자치 자체에 대한 회의마저 비등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문: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젊은이들이 맨 처음 얻기 쉬운 직업은? 답:실업(失業). 요즘 PC방이나 인터넷등에서 젊은이들 사이에 뜨는 블랙 코미디 가운데 하나다.외환위기 이후 몰아닥친 경기 침체로 대학 졸업자들의 취업난이 좀처럼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구조조정이 급한 기업들이 신규 인력 채용을 외면하는 바람에 어쩌다 구인광고라도 낼라치면 지원자들이 구름처럼 몰려 든다.정부가 실시한 인턴 직종 모집에 수십만명이 응모하여 바늘구멍 경쟁을 벌인것이 엊그제다. 버젓한 직장은 고사하고 아르바이트 일자리 하나 구하기도 힘든 현실이다. 올해 졸업반에 진학하는 대학 3학년생들 가운데 70%이상이 휴학계를 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실업한파는 비단 대졸자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잘다니던 직장이나 근로현장에서 내몰린 중·장년 실직자나 실업자들이 거리에 넘쳐 난다. 가정을 버린채 지하철역이나 공원벤치등을 둥지 삼는 노숙자들도 IMF 직후 상황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여기다가 실업률 통계에는 잡히지도 않는 ‘구직 단념자’도 급증하고 있다는 통계청발표이다. 취업을 하고 싶어도 받아주는 일자리가 없어 아예 이력서 내기조차 거부하는 구직단념자들의 경우는 그야말로 구조적 사회문제가 될 공산이 크다.실업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온 미국의 토머스 코틀이라는 사회학자에 따르면 6개월 이상 일자리를 갖지 못해 낙심한 실업자는 죽어가는 환자들과 비슷한 생리적 증세를 보인다고 한다. 일종의 ‘심리적 죽음’상태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 있어도 죽은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체념하고 쉽게 분노하며 극단적인 자살이나 자동차 돌진, 이유없는 폭력등 충동적인 행동들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초기 증상일뿐 실업상태가 장기화 하면 아예 니체식 허무주의에 빠져 ‘될대로 되라’식의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들고 만다니 그과정의 고통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사회정신이 병들어 가는 실업사태, 정말 심각한 문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따 먹은 금단의 열매가 사과라는 사실은 성서(聖書)에 나오는 얘기다.실제로 ‘과일의 왕’이라 할수있는 사과를 재배한것은 BC13세기경 이집트의 파라오인 람세스2세로 알려져 있다. 그는 나일강변에 자리잡은 모든 과수원에 사과나무를 심도록 했다는 것이다.그리스인들은 BC7세기경 아티카 지방에 처음으로 사과를 재배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황금과일’이라고 부르며 즐겨 먹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헤라가 제우스와 결혼하면서 선물로 사과를 바치는 장면이 나올정도다. 그토록 인류문명과 함께 한 사과는 유럽문화에 짙게 투영돼 있다. BC12세기 10년간 계속된 황금사과는 헬레니즘을 상징하고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의 사과는 근대과학의 기초를, 빌헬름 텔의 사과는 근대 정치사상사에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된다.이처럼 신화와 역사의 벽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사과가 우리나라에서는 선물과 뇌물의 경계에서 사회풍향계의 역할을 하는 과일로 회자된다. 개발독재시대까지 사과는 일반적 정서로는 가장 소박한 선물의 대명사였다. 명절에 궤짝이나 바구니에 담긴 사과는 정분의 표시였다. 그러나 그것이 상자에 담기고 뇌물의 전달수단으로 이용되면서 부정부패의 도구로 변질됐다.그 백미(白眉)가 한보그룹 정태수회장의 ‘특별한 사과’였다. 그는 사과상자에 2억원의 현찰을 가득 채워 ‘특별한 사과이니 혼자서 드시라’며 요로에 뇌물로 전달했다고 털어놔 국민들을 아연케 했다. 한보사태 청문회장에서였다.그 부패의 망령이 엊그제 열린 도내 모 기관장 부인의 뇌물수수혐의 공판장에서 되살아 났다. 그녀는 돈받은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현찰 3천만원을 줬다고 시인한 공무원은 사과상자 밑바닥에 1천만원짜리 두 다발과 5백만원짜리 두 다발등 네 뭉치를 채워 넣은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양쪽 주장이 서로 다르니 진실은 법정에서 판가름 낼 일이다. 하지만 과일의 대명사처럼 불리우는 사과가 ‘뇌물의 대명사’처럼 비치는 현실은 착잡하기만 하다.
1997년 5월11일 미국 IBM사가 개발한 슈퍼 컴퓨터 ‘딥 블루’와 세계 체스챔피언 ‘게리 카스파로프’와의 역사적인 지능게임에서 슈퍼컴이 2승3무1패로 ‘카스 파로프’를 꺾자 전 세계가 큰 충격에 휩싸였다. 매스컴마다 특집기사가 쏟아지고 과학계와 산업계에선 ‘인간을 능가한 컴퓨터’의 등장이 몰고 올 파장을 놓고 논란이 분분했다. ‘딥 블루’는 높이 2m, 무계 1.4t의 덩치에 1초에 2억개의 논리함수를 처리하고 5백억가지의 경우의 수를 계산해내는 능력을 가졌다. 여기에 세계 챔피언급 고수가 직접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하여 과거 1백년간 벌어졌던 주요대국 자료를 모두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카스파르프’에 대항시켰던 것이다.컴퓨터가 체스 세계챔피언을 이겼다면 바둑에서도 세계 최강 고수를 꺾을 수 있을까? 대답은 아직까지는 ‘천만의 말씀’이다. 그 이유로 체스는 64칸에서 규칙적인 행마에 따라 수를 읽는데 비해 바둑은 가로×세로 19로(路) 3백61개의 점위에서 무궁무진한 수싸움이 벌어지는 점을 든다. 체스는 연산(演算)이 가능하지만 아무런 제약없이 돌을 놓는 바둑은 사실상 유형화가 불가능하다. 초당 2억개의 행마를 탐색하는 ‘딥 블루’도 산술적으로 바둑에서 돌 하나가 가져오는 모든 가능성을 다 계산하는데 아마도 수년간은 거릴 것이기 때문이다.컴퓨터의 바둑 실력은 1972년 미국의 UCLA대학이 처음연구를 시작한 이후 잉창치(應昌치)나 포스트컵등 세계 컴퓨터바둑대회가 생겨나면서 이제 겨우 8급 수준을 넘어선 것으로 보고 있다. 1987년 대만의 잉창치 바둑재단이 프로기사를 꺾는 소프트웨어에 내건 현상금 1백50만달러는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지난 2∼3일 서울대에서 열린 서울공대-가로수닷컴배 제1회 국제컴퓨터바둑대회에서 중국의 프로그램 ‘고메이트(Goemate)’가 우승, 1천5백만원의 상금을 받았다.미국·영구등 8개국 18개팀이 참가한 이번 대회에서 전즈싱(蔯志行)이란 사람이 개발한 ‘고메이트’가 7전 전승으로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것. 프로바둑 세계대회 그랜드슬램을 눈앞에 둔 전주출신 신산(神算)이창호(李昌鎬)가 버티고 있는 우리나라가 컴퓨터바둑대회에서는 맥을 못주고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궁금하다.
KBS의 오락사극 ‘태조 왕건’이 부동의 종합시청률 1위를 유지하면서 주말 안방극장을 확실하게 평정하고 있는것 같다. “뉴스는 안봐도 왕건은 본다” “술마시다가도 궁예는 보러간다”는 말을 심심찮게 들어와 그 인기도를 실감하고 있던 터에 요즘 정치권까지 ‘왕건 신드롬’에 ‘궁예·아지태 공방’이 뜨거운 것을 보면 뜨기는 제대로 뜬 모양이다.고려 건국사가 21세기들어 때아닌 돌풍을 일으키게 된것은 기획 3년-1백50부작-제작비 2백50억원의 초대형 프로젝트인데다 극의 완성도가 높고 같은 시간대에 필적할 만한 TV프로가 없다는 점이 강점으로 작용한듯 하다. 또 사료(史料)가 확실치 않은 고려건국사를 처음으로 과감하게 다룬 점, 현실정치 상황과 비교되도록 현대적 의미를 살린 기법 등이 시청자들을 매료시킨 요인이 아닌가 싶다.지금까지 역사는 항상 강자의 편에 서왔고 기록한 자의 것이었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우리는 가끔 혼돈스러울 때가 있다.더구나 정사(正史)와 야사(野史)가 혼재하는 대목은 헷갈릴수 밖에 없다. ‘고려사’에 궁예는 왕이 된뒤의 행적을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왕건의 혁명을 합리화하기 위해 폭군으로 몰아부치고 고려 5백년을 거치면서 평가절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후백제를 세우고 한때 후삼국중 가장 강력한 국가로 발전시킨 견휜도 극중에서는 곧잘 패장의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호방형 통치를 한 맹장중의 맹장이었다고 한다.종간은 또 고려사에 젊어서 중이 된후 간사하고 교활한 짓을 하다 왕건 즉위 직후 처형당했다고 기록돼 있으나 극중에서는 정반대로 미화되었고 아지태도 아첨 잘하고 간교해서 처단된 것으로 기술돼 있으나 궁예의 심복이라는 이유로 후일 혹평당했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가 있다.어쨌거나 정사나 야사보다 재미로 보는 드라마가 그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훨씬 깊게 각인되는 경우가 많은데 천년세월을 뛰어넘어 진실은 알수 없고 역사책에서, 극중에서 다시 살고 다시 죽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요즈음 며칠사이 황사현상과 함께 꽃샘추위가 매섭다. 해마다 봄이 올 무렵이면 반복되는 자연현상중의 하나가 바로 꽃샘추위이다. 혹독했던 기나긴 겨울이 끝나고 새봄의 기운이 완연한 가운데 느닷없이 겨울이 찾아 온 듯한 매서운 추위가 몇일씩 지속되며 위세를 부린다.이른 봄이 되면 겨울동안 맹위를 떨치던 시베리아 고기압이 후퇴하고, 시베리아 기단에서 분리되어 나온 이동성 고기압과 중국 대륙에서 발생한 온대성 저기압이 3∼4일 간격으로 교대로 통과하면서 봄이 완연해 갈 무렵 약화되었던 시베리아 기단이 세력을 회복해 매서운 추위가 다시 찾아드는데 이 추위가 바로 꽃샘추위인 것이다.봄추위는 춘한(春寒)이라는 한자어를 쓰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순수한 우리 토박이말인 꽃샘이라는 말로 흔히 표현된다. 꽃샘은 어감도 예쁘지만 꽃피는 봄을 샘내는 겨울의 표정까지 읽을 수가 있어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계절까지도 이웃처럼 의인화하며 살아왔던 한국인의 유별난 자연감각이 꽃샘이라는 한 마디 말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네 조상들의 시적 감각과 자연에 대한 애정이 물씬 배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꽃샘이 봄을 방해하는 존재가 아니며, 봄을 알리는 전령으로서 그리고 봄의 동반자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인생에서도 분명 꽃샘추위에 해당하는 고난이 한 두 번씩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와 같은 꽃샘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그 혹독하고 긴 겨울을 잘 견디어냈으면서도 정작 아주 짧은 꽃샘추위에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두려워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물론, 어려운 살림살이에다 취업난은 가중되고 구조조정의 한파에 떠밀려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계절은 봄이 왔건만 그내들 가슴속의 봄은 아직 오지 않았기에 이 봄의 꽃샘추위가 더 차갑고 고통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좌절할 수 없다. 꽃샘추위 속에서도 꽃이 피어나듯이 어려운 시대를 아름답게 가꿔가야 할 책임도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수차례에 걸친 불미스러운 일로 본인의 망신은 물론이요 이 지역 교육계 전체를 수렁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비난을 받아오던 교육위원들이 이번에도 또 한 차례 ‘일’을 내고 말았다. 이 지역 전통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리라 기대를 모으고 있는 전북전통문화고에 국악과를 제외해야 한다며 난데없는 트집을 잡고 나선 것이다.애초 이 특수학교는 소리의 고장에 걸맞게 국악과를 비롯하여, 공예과, 생활문화과, 한국미술과를 개설하여 전통문화를 계승한 전문인력을 키우겠다는 취지에서 그 설립이 추진되었다. 당연히 국악과가 그 중심에 있으며 이를 부인하기는 어지간한 무지나 몰염치가 아니고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교육 전문가라 자처하는 위원들이 국악과를 제외시키는 수정안을 일방적으로 의결해버린 것이다.그들이 내세우는 하나의 명분은 관련 지원자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기존의 남원정보국악고나 전주예술고의 관련 학과의 정원도 채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이는 바로 이들 두 학교 관계자들의 반대 이유와 너무도 흡사하다. 로비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기왕의 교육제도로는 전문 국악인을 키우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런 복수목적고를 설립하자는 것이니 만큼 지원자 부족이 과 설치 반대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이런 학교의 설립 취지가 바로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켜 지원가능 인력을 늘리자는 데에도 있는 것이다. 공공재원으로 훌륭한 교육시설과 여건을 갖추겠다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기왕의 두 학교는 이런 면에서 과연 최선을 다하고 있을까? 혹 부실한 교육여건이나 학습환경 때문에 관심 있는 학생들마저 등을 돌리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 기득권에 안주하다가 정작 이 지역의 많은 인재들마저 서울이나 타지역으로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교육위원들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이러한 점을 지도·감독하는 일이다. 이들 사립특수목적고가 그 설립취지에 알맞은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지원자가 부족하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일 말이다. 본연의 책무는 방기한 채 이들 기득권을 비호하기 위해 알량한 권한을 남용한다면 그나마 겨우 유지하고 있는 자리마저 위태로워질 것이다.
지방자치제 실시이후 자치단체간에 설화나 작품속 주인공에 대한 지역연고와 ‘원조(元祖)다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국문학사상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의 출생지 다툼이다. 연세대 설성경교수에 따르면 홍길동은 실존인물이며 절제사 홍상직의 서자로 1450년 지금의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에서 출생한 것으로 되어 있다.이를 근거로 장성군이 홍길동 캐릭터를 지역특산품 개발에 이용하자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의 고향인 강릉시가 ‘허균이 강릉사람이면 홍길동도 강릉사람’이라면서 역시 홍길동을 강릉의 마스코트로 선정하여 개릭터 사업에 나서고 있다는 것이다.‘효녀 심청’도 마찬가지다. 심청전의 무대를 둘러싸고 전남 곡성군과 인천시 옹진군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가운데 곡성군은 국내외 현장조사와 관련사료를 정리하여 심청이 곡성사람이며 몸을 던진 인당수는 전북 부안군 위도해역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밖에 논개의 고향을 놓고도 장수군과 경남 진주시가 서로 연고권을 주장하고 있고 정력의 화신인 변강쇠가 남원 사람이니, 경남 함안군 사람이니 하면서 양쪽 지자체간 신경전이 팽배하다.이같이 지역연고 다툼이 거세지고 있는것은 두말할것도 없이 고전이나 설화에 나오는 이들의 이미지가 지자체 홍보에 도움을 주고 캐릭터 상품으로 활용할 경우 수입도 제법 짤잘하게 올릴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웃 고창군에까지 선전탑을 세워놓고 있는 장성군은 홍길동 캐릭터 하나만으로도 1억여원 이상의 수입을 올렸다고 한다.이런 경우와는 조금 다르지만 무주군이 청정환경의 상징인 반딧불이를 캐릭터로 활용하여 지역 이미지 홍보에 큰 효과를 얻고 있다고 한다. 무주군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특산물에 반딧불이 암블럼을 상표로 부착한 결과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경기도의 모 지자체에서도 반딧불이 집단 서식지를 발견했다하여 지역홍보에 나서고 있는 터라 무주군이 아예 반딧불이 캐릭터를 차용(借用)하지 못하도록 특허 등록까지 완료했다는 소식이 반갑게만 들린다.
올해로 탄생 5백주년을 맞는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함께 조선 성리학의 일문을 이룬 거유(巨儒)였다. 퇴계의 성리학은 주자(朱子)가 체계화한 개념을 수용하여 이를 보다 독자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이(理)를 기(氣)보다 중시하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했다. 반면 율곡은 이기(理氣)는 서로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이와 기의 성질을 구분하여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라고 해야 옳다는 학설을 내놓았다.조선 중기의 사색당쟁이 무르 익을 무렵 두 유학자의 주장은 훗날 이기(理氣)논쟁의 단초를 제공했고 실학사상이 싹튼 조선후기엔 선대 유림들의 ‘공맹(孔孟)타령’이 국세(國勢)를 기울게 했다는 매서운 비판을 받기도 했다.그러나 퇴계는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가기도 했지만 평생 79번이나 출사(出仕)를 사양할 정도로 출세에 초연했고 사욕에 흔들림없이 청렴 강직한 선비정신으로 후학을 양성하는데 정진한 인물이다. 그의 위대성이 지금 한창 재조명 되는 시점이다. 그런데 요즘 익산시가 난데없이 산하 공무원들과 시민들을 대상으로 ‘퇴계사상 교육’을 실시한다 해서 여론이 분분한 모양이다. 조한용(趙漢龍) 시장의 독단(?)에 의해 실시되는 이 교육이 과연 이런 식으로 이루어져도 괜찮으냐는 항변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조시장이 퇴계사상에 심취한것이 무슨 연유인지는 알수 없지만 아마도 퇴계가 강조한 ‘자기 수양이 부족한 자가 공직을 맡는것은 국가의 녹을 축내는 도적질이나 다름없다’는 경구(警句)나 경(敬)사상의 가르침 때문은 아닌지 궁금하다. 하기야 목민심서의 예전육도(禮典六條)에도 보면 ‘목민관의 직책은 백성을 가르치는데 있고 여러가지 정치가 담아지지 않으면 교화를 할 겨를이 없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의 발상이 결코 비판의 대상이 될수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퇴계와 같은 훌륭한 선현(先賢)임에랴. 하지만 개명한 민주사회에서 봉건적 목민관의 개념을 머리속에 담고 있다면 그건 착각이다. 이념적 스펙트럼이 다양한 사회에서 특정인의 사상을 더구나 주입식으로 교육한다는것 자체가 얼마나 허황된 일인가.
런던 근교의 스토크포지(Stokepoges)에 있는 성(聖) 자일즈(Saint Giles)교회의 스테인드 글래스 앞뒤 한줄로 세운 두 바퀴를 설치한 차체에 사람이 타고서 발로 지면을 차며 달리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른바 자전거인 것이다.그러나 이 스테인드 글래스 그림은 현재의 자전거 모양과는 차이가 많이 있으며, 그림의 상당 부분도 여러 사람이 손을 가해 별개의 그림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사람이 언제부터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는가 하는 자전거의 역사에는 억지가 많으며 설도 다양하다. 기술이나 인명이 각기 나라마다 다르고, 연대 또는 출처도 부정확 할 뿐만 아니라 도면의 신뢰성 등이 눈에 띄게 낮다.따라서, 자전거의 발명은 독일, 프랑스, 영국, 소련 등의 각국이 자기 나라가 원조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어떤 형태의 것을 최초의 자전거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들이다. 일반적으로는 드라이스를 자전거의 원조로 삼는 문헌이 많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조향(調向)이 블능인 것으로 시브락이 먼저이고, 조향이 가능한것에서는 사진의 발명가 니에프스 드라이스보다 조금 먼저인 것으로 보인다. 니에프스의 차는 처음은 조향 불능의 것이었으나, 곧 조향이 가능한 것으로 개량되었다. 전혀 별개로 독일과 프랑스에서 동시에 매우 닮은 구조의 이륜차가 발명된 셈이다.벨로시페드 이후에는 더욱 타기 좋게 개량이 이루어져 현재에 이르렀으며, 대체로 오늘날과 같은 기본적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1910년의 일이다.지금은 자동차에 밀려 그 모습이 점점 사라져가는 자전거이지만 요즘은 다시 우리생활에서 자전거가 그 자체로 훌륭한 운동수단이자 가장 쉽고 중요한 환경운동 수단으로 부각되고 있다. 전북도의 지자체(地自體)중에는 자전거타기 운동을 전개하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 자전거 타기 운동이 성공을 거두려면 자전거타기에 적합한 각종 부대시설과 여건조성이 필요할 것이다.
레임덕(lame duck)이란 임기만료를 앞둔 공직자를 ‘절름발이 오리’에 비유한 말로 미국(美國) 남북전쟁때 처음 사용된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이 말은 특히 재선에 실패한 현직 대통령이 남은 임기동안 마치 뒤뚱거리는 오리처럼 정책집행에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집권당이 중간선거에서 다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해 대통령의 정책이 의회에서 잘 관철되지 않을때 사용하기도 한다.레임덕, 즉 권력누수 현상은 어느 정권에서나 임기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강제로 막으려다가는 오히려 덧나는 수도 있다. 전두환(全斗煥)전대통령은 5공말기 ‘4·13호헌조치’를 강행했다가 ‘6월항쟁’을 촉발시켰고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은 6공말기 후계자 문제로 당시 민정당 대표인 김영삼(金泳三)씨와 벼랑끝 줄다리기를 벌였는가 하면 김전대통령 본인은 문민정부말기 자신이 키운 이회창(李會昌) 당시 신한국당 대통령후보로부터 출당요구를 받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레임덕의 일반적 현상은 여권 내부에 핵분열이 시작되고 강여(强與)와 야당의 충돌로 정국대결이 첨예화하면서 사정과 정계개편등 각종 빅카드가 등장하게 되며 공직사회에서는 어려운 일은 무조건 미루고 보자는 식의 이완된 분위기가 나타난다.국민과 언론 또한 겉으로는 임기가 종료될때까지 대통령의 책무를 성실히 이행해 줄 것을 촉구하면서도 걸핏하면 레임덕 운운하며 힘을 빼버리기 일쑤다. 심지어 한솥밥 먹던 측근들가지 충성심이 급속히 떨어지면서 또다른 태양을 찾기 위해 곁눈질을 하거나 줄서기에 바쁜 추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이러한 일련의 행태들이 험한 세상 살아남기 위한 생존게임 정도로 정당화 된다면 그것은 악습으로 남게되고 그로인해 우리는 많은 것을 잃게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레임덕 현상의 최종 피해자는 국민,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기후는 인류가 지구상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했던 생활조건 이었다. 그중에서도 추위는 생존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조건이었던데 비해 더위는 생존을 떠난 불편 여부의 조건이었지만 인류는 더위를 이겨내는 방안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중국 전국시대에 쓰여진 ‘예기(禮記)’에는 겨울에 얼음을 저장했다가 여름에 쓰는 집을 벌빙지가(伐氷之家)라고 불러 적어도 2천5백년전부터 얼음창고를 이용해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시대에 석빙고를 만들어 얼음을 저장해 여름에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현대 문명사회에서 필수 가전제품의 하나인 냉장고는 가난한 한 인쇄공의 호기심에서 탄생됐다. 19세기 스코틀랜드인으로 인쇄소에서 일하던 제임스 해리슨은 에테르로 활자를 씻던중 에테르가 열을 빼앗아 간다는 사실을 피부를 통해 체감했다. 해리슨은 연구를 거듭한 끝에 최초의 상업용 냉장고를 발명하여 1862년 열린 국제박람회에 전시 판매함으로써 가난한 인쇄공에서 ‘냉장고의 아버지’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그후 과학자들은 가장 우수한 냉매(冷媒)를 찾기 위한 연구를 계속하여 1920년 프레온가스(CFC) 를 이용한 새로운 성능의 냉장고를 개발, 현재까지 계속 사용해 오고 있다.그러나 최근 프레온가스가 지구 오존층을 파괴시키는 주범으로 확인되면서 많은 과학자들이 무공해 냉매를 찾기 위한 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었다.때마침 지난달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이재영(李在英)교수팀이 수조저장합금의 수소반응을 이용한 냉동시스템 개발에 성공, 우리나라의 냉동관련산업 국제경쟁력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낭보가 전해졌다.이교수는 이같은 성과로 미국과 국내특허를 이미 얻고 세계 각국에 6개의 특허를 출원중이며, 김대중(金大中)대통령으로 부터 ‘젊은 과학기술자 상’을 받기도 했다.날로 황폐해져 가는 지구환경을 보전하는데 일조한 이교수의 개가에 성원을 보내며 21세기 다른 첨단과학기술 분야에서도 국내 과학기술진의 정진을 기대해본다.
‘지역문화의 해’를 맞이하여 이 지역 문화계가 오히려 크게 흔들리고 있다. 이 지역 주민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소리문화전당이 그 주범으로 지목도고 잇다. 연 수십억원에 달하는 엄청난 그곳의 운영비 때문에 기와의 도립국악원 등 이 지역 문화예술계 전체가 그 위상과 정체성에 있어 큰 혼란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우선 소리문화전당의 위탁운영을 신청한 단체들의 성격이나 경력이 우리를 두렵게 한다. 기획사가 대부분이다. 이런 대규모 공간을 운영해본 경력을 갖춘 곳도 없다. 모두가 아지역과 문과한 단체라는 점도 주목을 요한다. 어느 업체에게 위탁이 되든 이 지역 문화예술의 정체성이나 발전에 신경을 쓸 여유도 없을 것이며 그 의무감에도 자유로울 것ㅇ다. 말하자면 영리를 앞세운 선정적 공연만이 엄청난 국고를 쏟아 부은 ‘문화의 전당’에서 횡행하리라는 것이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이를 계기로 도립국악원마저 공중 분해될 위기에 직면하였으니 ‘지역문화의 해’가 무색하게 되었다. 그간 부족하나마 안정된 지원속에 활동을 해오던 예술단이 운영비를 부담스러워 해야하는 민간업체에 떠맡겨지게 되었다. 그 앞날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렵게 키워온 전문예술단원들이 구조조정이라는 미명하에 이내 길거리로 내몰리게 될 것이니 말이다.일반인들은 위한 국악실기교육을 맡아오던 부분마저 민간업체에 위탁 운영하겠다는 것은 특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교육은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 지역의 고유의, 그리고 자랑스러운, 아니 국악의 고장에 걸맞은 것으로 칭송을 받아오던 제도이다. 거센 서구 음악의 유입에 맞서 우리 음악을 지켜온 방파제 역할을 해오고 있다 해도 지난 친 말이 아니다. 이처러 ㅁ소중한 것을 돈의 논리에 굴복하여 민간업자에게 넘길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들이 영리를 내세우는 사설학원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모두가 과욕이 빚어낸 업보라 할 수 있다. 소리문화를 키우겠다고 지은 공간이 오히려 소리문화는 물론이요. 다른 문화예술까지 위축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책임지는 사람 하나 나타나지 않으니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지역문화의 해’에 더욱 휘청거리게 된 지역문화가 안타깝기만 하다.
인간과 가장 가깝게 지내는 동물을 예로 들라면 두 말 할것도 없이 개나 소·돼지등 가축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개는 원시 수렵생활때부터 인간에 길들여져 보신·경계·애완용으로 친숙해진 동물이다. 소나 돼지는 농경사회 이후 인간의 식탁을 풍부하게 해주는 영양 공급원이기도 하다.그러나 이런 가축 말고도 인간과 함께 생활하는 동물중 쥐를 빼 놓을 수 없다. 쥐는 안방 천정에서부터 하수구에 이르기가지 인간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서식한다. 심지어 달리는 기차나 선박·비행기 활물칸까지 파고 드는게 쥐다. 대략 3천6백만년전에 지구상에 출현한 쥐는 종류만 2백20속(屬) 1천8백여종(種)에 이르고 전체 포유류의 3분의1을 차지할 정도로 왕성한 번식력을 보인다. 실제로 성숙한 쥐 한 쌍이 1년에 번식하는 숫자가 1천2백마리에 이른다고 한다. 인류가 지구상에서 최후로 대결해야 할 동물은 단연 쥐라는 어느 동물학자의 경고가 결코 빈말이 아니다.쥐가 특히 동양에서 인간과 가깝다는 점은 12간지중 첫번째(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쥐는 다산(多産)과 풍요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하지만 쥐는 인간에게는 여전히 더럽고 귀찮은 존재로 박멸의 대상일 뿐이다. 더러 애완용으로도 키워지고 실험용 흰쥐 덕분에 의학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지만 중세 유럽을 황폐화시킨 페스트균을 전염시킨 것이 바로 쥐라는 사실은 끔찍하기도 하다.연전에 정자가 없는 남성의 생식세포를 쥐의 정소(精巢)에 주입해 일정기간 배양하는 실험이 이루어져 화제를 모으더니 이번에는 미국의 한 생명공학기업이 쥐의 뇌속에서 인간 뇌의 간(幹)세포를 배양하는데 성공했다는 외신이 전해져 또 한번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실험에 참여한 스탠프드대 아이스먼교수는 ‘다음 단계는 대부분의 뇌가 인간의 뇌세포로 만들어진 쥐를 생산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한다. 그렇다면 바로 ‘쥐 인간’의 출현도 머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닌가. 생명공학의 발달이 인간의 존엄성을 쥐에게까지 위탁하는 시대가 됐으니 정말 소를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BC 166년∼BC 165년에 유대는 당시의 강적 그리스군과 시리아군의 침략을 받았으나 각지에서 주민이 종교적· 사회적으로 단결하고 봉기하였다. 장비와 훈련의 부족을 보완하기 위하여 익숙한 지형을 이용하고, 분산·기동·야습, 주민의 협력 등으로 예루살렘을 끝까지 지켰다. 그 전술은 오늘날의 게릴라 전술과 흡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스페인어로 소규모 전투를 뜻하는 게릴라(guerrilla)는 당원, 동지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파르티(parti)에서 비롯된 빨치산(partizan)과 거의 같은 단어로 사용된다.비정규 전투행동 자체를 게릴라전이라고도 하며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원정했을때 스페인 사람들의 무장 저항을 게릴라라고 부른데서 비롯되었다.게릴라는 보통 조직적인 지휘·통신·보급·위생 등이 없고, 단독 또는 소부대의 행동에 의해 적을 기습하여 전과를 거두고, 신속하게 빠져나와 일반 민중속에 숨어서 반격을 피한다. 일반인과 뒤섞어지는 특성 때문에 일반인이 큰 피해를 입기도 한다. 또한 게릴라는 지역 주민들의 지원을 받는 일이 활동의 전제가 되며 주민들의 지원 없이는 효과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가 없다.게릴라는 정규군이 없는 부족이나 민족 또는 나라가 외적의 침략에 대하여 지리적·사회적 또는 종교적·정신적 연대감과 교묘한 전술로 대항한다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게릴라전에 종사하는 전투원들은 어느정도 조직적인 체계를 갖춘 의용대나 민병대원과 달리 포로로서의 대우를 받을 수 없다. 그러나 게릴라가 군사적으로 유효한 수단으로 존재하는 한, 비록 게릴라가 포로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처형된다해도 앞으로 게릴라는 계속 나타날 것 같다.이러한 게릴라의 속성을 인용하여 연전에 게릴라성 폭우라는 말이 등장하였고 며칠전에 모방송국에서 진행하는 게릴라성 콘서트가 전주에서 있었다.전주시 인구 61만명이라고 소개하면서 역대 개최장소중 가장 작은 도시라 성공여부가 걱정된다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하지만 전쟁이건 폭우건 콘서트건 아직도 게릴라는 위력적이었다.
현대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기업의 부침(浮沈)도 가속화하고 있고 있다. 사람의 목숨보다 더 끈길긴 생명력을 발휘하였던 기업도 이제는 그리 쉽지가 않다. 어제까지 멀쩡했던 기업이 다음날 아침에는 소리없이 사라지고 또 다른 새로운 기업이 생겨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이렇게 기업의 부침이 계속되다보면 결국은 그 기업에서 일을 하는 피고용자의 일터인 직장의 부침과 연결될 수 밖에 없다. 기존에 우리는 인간중심의 경영을 하던 기업을 매우 부러워하였다. 일보다는 사람을 우선으로 삼겠다는 기업을 보면 제대로 사람 대접을 받는 것 같아 흐뭇함을 느낀다는 사람들이 많았다.뿐만 아니라 어느 기업에서 슬로건으로 내세운 종신고용이나 평생직장 등의 단어들은 마치 기업과 사람을 하나로 이어주고 일체감을 주기까지 하는 마력과도 같은 말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사회의 기업환경과 기업문화에서는 더 이상 평생직장이나 종신(終身) 고용과 같은 말은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노동시장의 유연화는 더 이상 선택의 문제일 수 없다는 것이다. 평생직장에 대신하여 도입되는 것이 평생직업이다. 평생직업은 비록 직장을 옮긴다해도 특정업무에 평생동안 종사할 수 있는 특징 때문에 관련업무에 관한 지적 재산이 풍부하고 창의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또한 직무분야에서 변해가는 기술이나 소비자의 동향 등에 대한 지속적인 학습이 평생동안 필요하며 같은 직종 내부에서의 경쟁은 점차 증대될 것이다.앞으로 의사나 변호사 등과 같은 전문 자격증은 평생직업인의 필수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격증을 소지했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는 평생직업인으로 성공을 보장받을 수 없다. 자격증 그 자체는 단지 특정 직업에 종사할 수 있는 최소자격을 부여하는 것으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평생직장은 사라지고 평생직업만이 남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가끔 세계질서를 주도하는 위대한 미국인(美國人)들의 ‘유연성’과 ‘이중성’에 충격을 받을 때가 있다. 지난 연말 전세계는 재검표와 법정다툼을 거듭하는 혼란스러운 미국 대선 개표과정을 지켜보면서 민주주의가 만개(滿開)한 미국에서 어떻게 저런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또 결과는 어떻게 도출해낼지 불확실성에 대한 위기의식을 떨칠 수가 없었다.문제를 일으킨 플로리다주 선거는 총체적으로 부실, 한국적 시각으로 본다면 원인무효나 다름없는 선거였다. 잽·W·부시 주지사는 조지·W·부시 후보와 친 형제인데다 후진국에서나 있음직한 투표용지와 투표기계에서 중대한 결함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이애미 해럴드지는 죽은 사람, 무등록자, 투표권 없는 중죄인까지 투표를 했다고 폭로하고 나섰고 수작업 검표를 명령한 주대법원과 이를 중지시킨 명령을 내린 연방 대법원의 판결도 4대3과 5대4의 아슬아슬한 표차였다.극도로 혼탁하고 격렬해서 증오심까지 불러일으킨 선거였지만 연방대법원의 판결 이후 앨·고어 후보는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를 인정한다”고 선언하고 “부시 당선자에게 연설 직전 축하전화를 했는데 이제 또다시 전화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며 좌중을 웃기는 여유까지 보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날 CNN과 USA 투데이·갤럽이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그렇게도 양쪽으로 나뉘어 팽팽히 맞섰던 미국 국민의 80%가 “부시를 합법적인 대통령으로 인정한다”고 응답한 점이다.만약 우리나라에서 이와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면 어떠했을까. 과문인지 모르지만 헌정중단사태가 야기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진실추구가 사회일반의 가치로 자리잡은 미국, 그러나 그들은 명분과 실리중 실리를 택했고 세계의 우려와는 달리 모든 것을 ‘상식’이라는 힘으로 해결해냈다. 그리고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오늘도 세계의 맹주노릇을 하고 있다.
우리말 맞춤법이 그 표준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붕괴되고 있다. 채팅이나 이메일 등 사이버 공간에서나 확인할 수 있었던 기형적 글쓰기가 이제 실생활에서도 널리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의 주요 학습내용이던 받아쓰기가 무의미한 것이 된지도 오래되었다. 이를 시행하는 곳도 없지만 시행한다 해도 학생들은 소리나는 대로 써버릴 뿐 신경을 쓰지 않는다.컴퓨터의 일상화로 인한 이런 현상이 우리의 문화적 규범마저 헝클어뜨리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특히 영어의 경우에는 철자를 잘못 쓰면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면서도 우리말에 대해서는 무신경한 것이 영 꺼림직하다. 이는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사나 학부모들에게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묘한 증상이다. 영어지상주의에 의한 조기교육열풍이 그 원인인 동시에 그것을 부추기는 중요한 동인일 것이다.컴퓨터가 맞춤법을 알아서 고쳐 주는 것도 이러한 맞춤법 경시풍조를 조장하고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는 생각이 경쟁력 제고만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먹혀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대학을 졸업하고도 우리말 문장 하나 제대로 구사하는 사람이 흔치 않은 마당에 문장구성은 고사하고 맞춤법마저 흔들리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미국과 같은 선진국의 경우만 해도 대학 교양교육의 상당 부분이 작문연습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중등학교에서도 글쓰기 공부를 강도 높게 실시하고 있는 현실과 견주어 볼 때 우리 국어교육의 현주소가 염려스러운 것이다.일부 청소년들은 심지어 어긋난 글쓰기를 자랑삼고 있으며, 맞춤법을 고집하면 ‘왕따’를 당하기까지 한다니 하루속히 전사회적인 대책마련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언어의 유동성을 몰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표준적 어법의 붕괴는 바로 문화적 규범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다. 특히 외국문화에 무한정으로 개방되어 있는 요즘 문화적 규범의 붕괴는 심각한 문화정체성의 상실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해마다 대학 신입생들이 통과의례처럼 치르는 소위 MT는 영어 Membe-ship Tra-ining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들어진 합성어이다.‘조직 구성원들의 단체의식을 함양하기 위해 실시하는 합숙훈련’쯤의 의미를 갖고 있는 이 합성어는 그러나 영어 본바닥 사람들은 사용하지도 않고 영어사전 어디에도 수록돼 있지 않다.순전히 우리 대학사회에서 처음 만들어 내 사용이 확산 그야말로 ‘콩글리시’일 뿐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새내기들에게 MT는 기대감과 설레임의 대상이다. 입학식이 끝난후 학과별로 또는 서클별로 이어지는 이MT를 통해 갓 대학생이 된 뿌듯함을 느끼게 되고 사회나 역사를 보는 인식에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70∼80년대 암울했던 시기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에겐 MT에서 선배들이 토해 내는 사자후(獅子吼)는 곧 진리요 시대적 사명감처럼 받아 들여졌던 추억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그런데 문제는 MT때마다 빠지지 않는 음주문화의 폐해다. 선배들이 사발 가득히 따라 주는 소주나 맥주 막걸리는 남학생이건 여학생이건 거이 의무적으로 마셔야 한다. 마치 음주량의 다과(多寡)가 호연지기의 측정치나 되는것처럼 주는 쪽이나 마시는 쪽이 모두 결연한 자세다. 주량을 감당 못하는 새내기들에게는 음주를 강요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어김없이 MT음주사고가 나기 마련이다.대학 입학철을 맞은 요즘 전국 각 대학마다 MT가 한창이다. 여러 대의 관광버스에 나눠 타고 MT장소를 출발하는 버스 적재함에는 소주·맥주가 그득그득 실린다. 아니나 다를까, 엊그제 춘천의 한 모텔에서 또 MT음주사고가 났다. 만취상태에서 새벽에 야외 화장실에 나선 한 남학생이 6m아래 절벽으로 굴러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6개월전에 남편이 암으로 세사을 떠났다는 죽은 학생 어머니의 넋두리가 TV화면을 지켜보던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이제 MT도 달라져야 한다. 본래 의미대로 합숙훈련을 통한 건전한 토론문화가 정착돼야 한다. 술 때문에 귀중한 젊음이 희생되는 이런 MT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경제기반이 밑둥에서부터 흔들릴 정도로 치명적 상처를 입힌것이 97년 IMF사태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IMF체제가 국민 모두에게 고통을 안겨 준것만은 아니다. 기업이나 금융기관의 부도·파산, 근로자들의 실직·정리해고와 같은 위기감속에서도 오히려 반사이익을 얻은 계층도 없지 않았다.대표적인 사례가 가만이 앉아서도 고금리(高金利)금융상품에 투자하여 ‘재(財)테크’에 성공한 사람들이다. 한때 25%까지 살인적으로 치솟았던 대출금리를 감당못해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고 서민가게대출자들도 살던 집이 경매에 넘어가 길거리에 나앉을때 이들은 그 희생의 댓가로 형성된 알토란같은 이자수익으로 호의호식하며 IMF위기를 극복(?)해 낸 것이다. 당시 서울 강남의 고급 룸살롱같은데서 ‘금리(金利) 이대로’를 외치며 건배하는 졸부들이 없지 않았던 세태는 지금 돌아봐도 부끄러운 일이다.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이자 배당등 금융소득이 연간 4천만원이 넘어 종합과세 대상이 되는 부자들이 전국적으로 3만명을 웃돌고, 채권 주식외에 5억원이상 현금을 예금하고 이자수입으로 생활하는 알부자들도 대략 10만명쯤 될것이라는 추정이다.이들은 그래서 직업은 없어도 먹고살 걱정은 없고 대신 건강이나 부동산·골프회원권값 걱정이나 하는 ‘화려한 백수’로 분류된다.그런데 지난해까지만 해도 10%대에 이르던 금융상품들이 올들어 잇단 수신금리 인하로 평균 6∼7%의 저금리 시대로 돌아서자 이자소득으로 생활하던 이들에게 비상이 걸렸다 한다. 부동산경기 침체에다 증권시장마저 불안하여 은행에 손을 맡겨놓고 편안하게 ‘이자 따먹기’하던 부자들이 생활고를 걱정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물론 퇴직금 얼마를 받았지만 재테크에 자신이 없어 은행금리에 의존하는 소심한 중산층도 많다. 그들에겐 저금리 체제가 걱정거리가 될만도 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엔 단지 하루 끼니를 걱정하는 빈곤층이나 평균소득에 못미치는 저소득층 또한 많다. 그들에게 이런 ‘가진자들의 배부른 고민’이 과연 어떻게 비쳐질까. 상대적 박탈감이 빈곤층에겐 더 큰 위화감을 준다는 사실도 간과해선 안된다.
안호영 의원 '통합의 길'
삭풍맞은 전북 현실
해상풍력발전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
난 웹툰 작가이다 4
점술사의 시대
남원시, 지방소멸대응기금으로 지역소멸 해법 찾는다
[병무상담] 병력동원소집 보류대상자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합니다
전북특별자치도 특례 추가 확보가 관건
외국인 계절근로자 활용 극대화해야
길거리 ‘공공 쓰레기통’ 확대 설치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