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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컬렉션과 채용신, 그리고 어진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부 부장을 지낸 민병훈 박사로부터 얼마 전 전화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고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에서 만난 한 작품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란다. 그가 주목한 작품은 작가 불명의 `채용신 평생도병풍`이었다.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비롯해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수련` 등 대한민국 최고 부호의 수장고에 있던 진귀한 수집품들이 즐비하게 진열된 전시장에서, 그것도 작가 불명의 작품이 그를 붙든 것은 전북과의 연관성 때문이었다. 민 박사는 전주 출신으로 국립전주박물관에서 학예실장을 지냈다. 그가 지목한 병풍 속 주인공인 석지 채용신(1850~1941)은 근대 초상화가의 거장으로, 인생 전반부 무관으로 활동하다가 후반부 전북에서 화가로 살았던 인물이다. 고종의 어진을 그리면서 어진화가로 화명을 떨쳤으며, 사대부와 우국지사, 일반인까지 초상화 대상을 넓혔다. 그가 그린 최익현 초상과 황현 초상은 보물로 각각 관리되고 있고, `운낭자초상`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국내 미술계도 석지의 독특한 기법과 표현양식, 회화의 근대성에 주목하며 채용신 관련 연구들을 꾸준히 해왔다. 채용신 관련 연구 논문이 석박사 논문을 포함 20편에 이른다. 2000년대 초 국립현대미술관이 `서거 60주년 기념 석지 채용신전`을 연 것도 그 연장선에서다. 그러나 정읍 태인에서 아들 손자와 함께 공방을 운영했고, 그의 묘소도 선산이 있는 익산 왕궁에 자리하는 등 석지의 활동 기반이었던 전북에서 정작 그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전북도립미술관이 그의 사후 70년이 된 지난 2011년에서야 기획전을 연 정도다. 이건희 회장이 어떤 연유로 채용신의 일생을 담은 병풍을 수집했는지 알 수 없으나 작가 미상의 작품이기에 작품 대상의 주인공과 작품성에 주목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10폭으로 이뤄진 병풍은 채용신의 어린 시절 공부에서부터 과거급제 후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 수군으로 활동했던 모습 등을 연대기 순으로 담았다. 박물관 측은 조선말 사회변화상을 잘 드러낸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번 355점 컬렉션 전에 이 작품을 내걸었다고 귀띔했다. 민병훈 박사가 주목한 것은 그보다 채용신이 어진을 모사하는 모습의 다섯번째 작품(사어용도)이다. 지금은 없어진, 그 당시 흥덕전(덕수궁 궁전자리)에서 태조 어진을 그리는 장면이 생생하게 담긴 것을 두고서다. 임금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병(해와 달, 그리고 다섯 개의 산봉우리가 담긴 병풍)을 펼쳐놓고 여러 신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마치 살아 있는 왕의 모습을 그리는 것 같은 어진모사 모습을 이 병풍이 보여주고 있다. 어진은 조선시대 왕을 상징하는 핵심 문물이어서 어진 제작과 봉안, 관리 때 왕을 모시듯 했다. 그러나 이렇게 공들인 제작에도 전란과 화재로 대부분 어진이 소실됐다. 경기전 태조어진만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유일한 전신상 어진이다. 봉안처인 경기전이 함께 남아 있다. 10여 년 전 경기전 내 어진박물관도 새로 만들어졌다. 전국 유일의 어진 전문 박물관이다. 그러나 콘텐츠는 부족하다. 전북에서 활동한 채용신과 어진 관련 콘텐츠가 담긴 `채용신 평생도 병풍`이 어진박물관에 놓인다면 여러모로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건희 회장 유족은 그의 수집품 대부분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고, 지역 연고와 작가 연고가 있는 광주 대구 등 지역의 공립미술관에도 100여점을 나눠 기증했다. `채용신 평생도 병풍`의 제자리는 어진박물관이지 싶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수장고가 아닌, 어진박물관에 있을 때 이 작품과 어진박물관, 채용신이 더욱 빛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에 전북의 소중한 문화자산인 어진박물관과 채용신이 재조명 됐으면 좋겠다. /김원용 논설위원

  • 오피니언
  • 김원용
  • 2022.06.07 16:02

도닥도닥-이건희 컬렉션과 채용신, 그리고 어진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부 부장을 지낸 민병훈 박사로부터 얼마 전 전화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고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에서 만난 한 작품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란다. 그가 주목한 작품은 작가 불명의 `채용신 평생도병풍`이었다.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비롯해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수련` 등 대한민국 최고 부호의 수장고에 있던 진귀한 수집품들이 즐비하게 진열된 전시장에서, 그것도 작가 불명의 작품이 그를 붙든 것은 전북과의 연관성 때문이었다. 민 박사는 전주 출신으로 국립전주박물관에서 학예실장을 지냈다. 그가 지목한 병풍 속 주인공인 석지 채용신(1850~1941)은 근대 초상화가의 거장으로, 인생 전반부 무관으로 활동하다가 후반부 전북에서 화가로 살았던 인물이다. 고종의 어진을 그리면서 어진화가로 화명을 떨쳤으며, 사대부와 우국지사, 일반인까지 초상화 대상을 넓혔다. 그가 그린 최익현 초상과 황현 초상은 보물로 각각 관리되고 있고, `운낭자초상`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국내 미술계도 석지의 독특한 기법과 표현양식, 회화의 근대성에 주목하며 채용신 관련 연구들을 꾸준히 해왔다. 채용신 관련 연구 논문이 석박사 논문을 포함 20편에 이른다. 2000년대 초 국립현대미술관이 `서거 60주년 기념 석지 채용신전`을 연 것도 그 연장선에서다. 그러나 정읍 태인에서 아들 손자와 함께 공방을 운영했고, 그의 묘소도 선산이 있는 익산 왕궁에 자리하는 등 석지의 활동 기반이었던 전북에서 정작 그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전북도립미술관이 그의 사후 70년이 된 지난 2011년에서야 기획전을 연 정도다. 이건희 회장이 어떤 연유로 채용신의 일생을 담은 병풍을 수집했는지 알 수 없으나 작가 미상의 작품이기에 작품 대상의 주인공과 작품성에 주목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10폭으로 이뤄진 병풍은 채용신의 어린 시절 공부에서부터 과거급제 후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 수군으로 활동했던 모습 등을 연대기 순으로 담았다. 박물관 측은 조선말 사회변화상을 잘 드러낸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번 355점 컬렉션 전에 이 작품을 내걸었다고 귀띔했다. 민병훈 박사가 주목한 것은 그보다 채용신이 어진을 모사하는 모습의 다섯번째 작품(사어용도)이다. 지금은 없어진, 그 당시 흥덕전(덕수궁 궁전자리)에서 태조 어진을 그리는 장면이 생생하게 담긴 것을 두고서다. 임금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병(해와 달, 그리고 다섯 개의 산봉우리가 담긴 병풍)을 펼쳐놓고 여러 신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마치 살아 있는 왕의 모습을 그리는 것 같은 어진모사 모습을 이 병풍이 보여주고 있다. 어진은 조선시대 왕을 상징하는 핵심 문물이어서 어진 제작과 봉안, 관리 때 왕을 모시듯 했다. 그러나 이렇게 공들인 제작에도 전란과 화재로 대부분 어진이 소실됐다. 경기전 태조어진만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유일한 전신상 어진이다. 봉안처인 경기전이 함께 남아 있다. 10여 년 전 경기전 내 어진박물관도 새로 만들어졌다. 전국 유일의 어진 전문 박물관이다. 그러나 콘텐츠는 부족하다. 전북에서 활동한 채용신과 어진 관련 콘텐츠가 담긴 `채용신 평생도 병풍`이 어진박물관에 놓인다면 여러모로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건희 회장 유족은 그의 수집품 대부분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고, 지역 연고와 작가 연고가 있는 광주 대구 등 지역의 공립미술관에도 100여점을 나눠 기증했다. `채용신 평생도 병풍`의 제자리는 어진박물관이지 싶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수장고가 아닌, 어진박물관에 있을 때 이 작품과 어진박물관, 채용신이 더욱 빛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김원용 논설위원

  • 오피니언
  • 김원용
  • 2022.06.07 12:21

손편지 진정성, 인사로 보여달라

정권교체 때 지역민들이 가장 높은 관심을 갖는 게 지역 현안의 국책사업 반영과 지역 출신 인사의 중용 여부다. 새로 출범하는 정부로서도 선거로 갈라진 민심을 다독이며 사회통합을 이루는데 지역균형발전정책과 탕평 인사만한 좋은 수단이 없다. 지역발전사업은 임기 중 하나씩 풀어갈 문제다. 인사가 당장 시험대다. 새 정부가 보통 첫 부처 장관급 인사에서 출신 지역을 고려하는 것도 지역갈등 해소와 지역화합을 중요 과제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대 보수정권은 인사에서 지역배려를 외면했다. 이명박 정부 때는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강부자(강남 땅부자)’ 내각이라는 유행어가 나올 만큼 학연·지연 등 연고주의에 함몰됐다. 박근혜 정부 때도 조각 초기부터 내내 변변한 장관 한 자리에 앉은 전북 인사가 없었으며, 주요 핵심 권력에 곁불도 쬐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엊그제 발표한 8개 부처 장관 후보자에 영남 인사가 절반이 넘는 5명이다. 호남 출신 인사는 1명도 없다. 아직 절반의 부처 장관 인사를 남겨두고 있지만, 일단 1차 인선만 보면 역대 보수정권에서의 호남 차별 인사가 재연될 것 같은 조짐이다. 보수정권들이 흔히 능력중심의 인사원칙을 앞세운다. 윤 당선인도 그 맥을 같이 하는 것 같다. 그는 부처 장관 지명 후 “인선에 할당이나 안배는 하지 않겠다” “유능한 분을 찾아 지명을 하다 보면 결국 지역과 세대, 남녀의 균형이 잡힐 것”이라고 했다. 출신 배경을 떠나 출중한 능력을 가진 분을 모셔 국가의 동량으로 쓴다는 걸 탓할 국민은 없다. 그러나 능력이라는 게 주관적이다. ‘능력’이라는 미명 아래 얼마든지 정실 인사와 밀실 인사, 낙하산 인사가 합리화 될 수 있다. 지역 안배 인사를 운운하는 것이 ‘능력 인사’ 앞에 협량하게 보인다. 인사권자에게 ‘능력중심’의 인사원칙은 그야말로 요술방망이인 셈이다. 대선에서 표를 많이 준 지역을 배려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일 것이다. 호남에서 갓 10%대 지지를 해놓고 지역 안배 인사를 요구하는 게 가당치 않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정부 부처 장관 자리를 승자의 전리품으로 전락시켜선 안 된다고 본다. 대통령이 실질적인 임명권을 행사할 수 있는 주요 정무직 자리가 수백 개에 이른다. 올바른 방향은 아니지만, 정실 인사가 가능한 자리들이다. 그러나 부처 장관은 해당 부서의 최고 책임자일 뿐 아니라 국가운영 전반을 논의하는 국무위원이다. 부처 장관 임명 때 국회 청문회를 거치게 하는 것도 이 같은 상징성과 중요성 때문이리라. 물론 전북 출신 부처 장관 중 지역의 기대에 걸맞은 역할을 했는지 의문부호가 따른다. 지역안배 차원에서 배려를 받고도 본인의 입신양명만 생각하는 ‘무늬만 전북인’도 없지 않았다. 역대 정권 중 가장 많은 전북 출신 장차관과 청와대 참모들이 활동했으나 지역 현안들은 그대로다. 정치인들만 호가호위 했을 뿐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그럼에도 ‘나무는 큰 나무 덕을 못 보아도 사람은 큰 사람 덕을 본다'고 했다. 10년 보수정권시절 나돌던 전북 출신 중간 간부급도 찾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쏙 들어간 것만으로도 어디인가. 윤석열 당선인은 후보시절에 호남발전을 약속하는 내용의 손편지까지 썼으며, 재경도민회 행사에 참석해 호남이 홀대받지 않도록 하겠다고도 약속했다. 그 시금석이 인사라고 본다. 굳이 당선인의 약속이 아니더라도 국가의 중요정책 과정에서 인력을 균형있게 활용하는 것은 대통령의 책무다. 차기 정부의 안정적 착근이나 국민의힘의 진정성 있는 호남동행을 위해서도 탕평인사가 뒷받침돼야 할 것이다. 조만간 이뤄질 2차 정부 부처 장관 인선을 지켜볼 일이다. 보수정권 때마다 입에 붙은 ‘호남 차별’이라는 말이 윤석열 정부에서 마침표를 찍길 바란다. /김원용 논설위원

  • 오피니언
  • 김원용
  • 2022.04.12 14:16

윤석열 손편지와 호남표심

이메일과 소셜미디어로 안부를 주고받다 보니 요즘 손편지 쓸 일이 없다. 친지의 손글씨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연하장이나 결혼 초대장 정도다. 개인간 정을 주고받던 편지가 일상에서 유물이 됐으나 정치영역에서는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며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선거철이면 후보의 인사편지가 쏟아진다. 대개 친필 서명조차 없는, 사람 냄새 나지 않는 의례적 인쇄물이지만 후보로선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린 것만으로도 홍보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가 설 명절을 전후해 호남 유권자들에게 보낸 손편지를 두고 뒷말이 많다. 국민의힘은 선거법상 허용되는 예비 홍보물 모두를 윤 후보의 손편지로 호남 유권자에게 보냈다. 윤 후보가 진정성을 전하기 위해 손으로 직접 눌러 쓴 편지란다. 반면 대선 후보의 그저 정책 홍보물을 포장한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나온다. 윤 후보 편지가 얼마나 호남 표심을 흔들지 모르겠지만 일정 부분 반향을 일으켰음은 분명하다. 인쇄물이지만 대선 후보의 손편지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호남 유권자만을 대상으로 한 보수당 후보의 적극적 구애라는 점에서 역대 대선에 없었던 이례적 이벤트로 받아들여지면서다. 내용상으로도 호남을 한껏 치켜세우고 지역발전 약속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면서 감성과 공약으로 표심을 자극했다. 윤 후보의 손편지를 두고 당장 엇갈린 반응이 나왔다. 호남·제주지역 청년 1000여명이 엊그제 “윤 후보의 호남을 향한 진심이 담긴 손편지를 보고 뜻을 모으게 됐다”면서 윤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국민의힘이 손편지를 홍보전략으로 십분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다른 한편에서 광주전남 대학생진보연합은 윤 후보의 손편지를 버리는 SNS 캠페인을 벌였다. 여기에 일부 민주당 열성 지지자들 사이에 윤 후보의 호남 손편지를 조롱하는 글들도 SNS에서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보수당 대선후보의 행보가 이렇게 호남에서 논란거리로 떠오른 것만으로 `윤석열 편지정치`가 먹혔다는 이야기다. 실제 윤 후보에 대한 호남 지지세가 예사롭지 않다. 호남에서 윤 후보 지지율이 28%에 이르는 근래 여론조사도 있다. 물론 손편지 하나만의 영향이라고 할 수 없다. 김종인 비대위원장 때 국민의힘은 호남지역구를 맡아 자신의 지역구처럼 챙기는 `호남동행`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윤 후보는 재경전북도민회 행사에 참석해 호남이 홀대받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호남 민심잡기에 공을 들이고 있다. 역대 보수정당이 펼친 `호남 포위론` 에서 `호남 존중론`으로 선회한 셈이다. 국민의힘의 이런 호남공략은 부울경 텃밭을 민주당에게 잠식당한데 따른 선거공학 측면의 변화로 읽힌다. 과거 호남포위론으로 정치세력화의 한계를 절감한 것이다. 그렇다고 호남유권자들이 국민의힘에 쉽게 마음을 열지는 미지수다. 편지 한 통과 몇몇 이벤트로 몇 십년간 꽁꽁 언 호남의 마음을 녹이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선거공학적 접근으로는 더욱 안 될 말이다. "호남에서 저에게 주시는 한표 한표가 호남을 발전시킬 책임과 권한을 저에게 위임해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편지 속 글이 그 점에서 걸린다. 호남에서 받은 표만큼만 호남을 발전시킬 책임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오로지 선거공학에 갇힌 구애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윤 후보의 손편지는 국민의힘 호남공략의 상징이 되고 있다. 윤 후보의 호남에서 득표와 상관없이 존재감을 보여줬다. 텃밭으로 여긴 민주당에게도 자극제가 됐을 터다. 국민의힘이 진정으로 호남 유권자들의 마음을 열려는 노력이 계속되길 바란다. 여야 경쟁 구도가 만들어질 때 지역정치도 한단계 더 발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김원용 논설위원

  • 오피니언
  • 김원용
  • 2022.02.15 15:27

도닥도닥-윤석열 손편지와 호남표심

이메일과 소셜미디어로 안부를 주고받다 보니 요즘 손편지 쓸 일이 없다. 친지의 손글씨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연하장이나 결혼 초대장 정도다. 개인간 정을 주고받던 편지가 일상에서 유물이 됐으나 정치영역에서는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며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선거철이면 후보의 인사편지가 쏟아진다. 대개 친필 서명조차 없는, 사람 냄새 나지 않는 의례적 인쇄물이지만 후보로선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린 것만으로도 홍보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가 설 명절을 전후해 호남 유권자들에게 보낸 손편지를 두고 뒷말이 많다. 국민의힘은 선거법상 허용되는 예비 홍보물 모두를 윤 후보의 손편지로 호남 유권자에게 보냈다. 윤 후보가 진정성을 전하기 위해 손으로 직접 눌러 쓴 편지란다. 반면 대선 후보의 그저 정책 홍보물을 포장한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나온다. 윤 후보 편지가 얼마나 호남 표심을 흔들지 모르겠지만 일정 부분 반향을 일으켰음은 분명하다. 인쇄물이지만 대선 후보의 손편지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호남 유권자만을 대상으로 한 보수당 후보의 적극적 구애라는 점에서 역대 대선에 없었던 이례적 이벤트로 받아들여지면서다. 내용상으로도 호남을 한껏 치켜세우고 지역발전 약속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면서 감성과 공약으로 표심을 자극했다. 윤 후보의 손편지를 두고 당장 엇갈린 반응이 나왔다. 호남·제주지역 청년 1000여명이 엊그제 “윤 후보의 호남을 향한 진심이 담긴 손편지를 보고 뜻을 모으게 됐다”면서 윤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국민의당이 손편지를 홍보전략으로 십분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다른 한편에서 광주전남 대학생진보연합은 윤 후보의 손편지를 버리는 SNS 캠페인을 벌였다. 여기에 일부 민주당 열성 지지자들 사이에 윤 후보의 호남 손편지를 조롱하는 글들도 SNS에서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보수당 대선후보의 행보가 이렇게 호남에서 논란거리로 떠오른 것만으로 `윤석열 편지정치`가 먹혔다는 이야기다. 실제 윤 후보에 대한 호남 지지세가 예사롭지 않다. 호남에서 윤 후보 지지율이 28%에 이르는 근래 여론조사도 있다. 물론 손편지 하나만의 영향이라고 할 수 없다. 김종인 비대위원장 때 국민의힘은 호남지역구를 맡아 자신의 지역구처럼 챙기는 `호남동행`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윤 후보는 재경전북도민회 행사에 참석해 호남이 홀대받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호남 민심잡기에 공을 들이고 있다. 역대 보수정당이 펼친 `호남 포위론` 에서 `호남 존중론`으로 선회한 셈이다. 국민의힘의 이런 호남공략은 부울경 텃밭을 민주당에게 잠식당한데 따른 선거공학 측면의 변화로 읽힌다. 과거 호남포위론으로 정치세력화의 한계를 절감한 것이다. 그렇다고 호남유권자들이 국민의힘에 쉽게 마음을 열지는 미지수다. 편지 한 통과 몇몇 이벤트로 몇 십년간 꽁꽁 언 호남의 마음을 녹이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선거공학적 접근으로는 더욱 안 될 말이다. "호남에서 저에게 주시는 한표 한표가 호남을 발전시킬 책임과 권한을 저에게 위임해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편지 속 글이 그 점에서 걸린다. 호남에서 받은 표만큼만 호남을 발전시킬 책임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오로지 선거공학에 갇힌 구애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윤 후보의 손편지는 국민의힘 호남공략의 상징이 되고 있다. 윤 후보의 호남에서 득표와 상관없이 존재감을 보여줬다. 텃밭으로 여긴 민주당에게도 자극제가 됐을 터다. 국민의힘이 진정으로 호남 유권자들의 마음을 열려는 노력이 계속되길 바란다. 여야 경쟁 구도가 만들어질 때 지역정치도 한단계 더 발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 오피니언
  • 김원용
  • 2022.02.15 15:14

대선과 전북의 존재감

김원용 논설위원 야권 유력 대선 주자인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오늘 전북을 찾는다. 윤 후보와 전북 유권자의 공식적인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다. 윤 후보는 당내 경선 과정에서 여러 차례 광주전남을 다녀갔다. 그러나 그는 당내 경선 과정에서도 전북 패스를 했다. 이번에도 당초 오롯이 전북만 2박3일 계획했던 일정을 1박2일로 줄이고 전남행을 덧붙였다. 코로나 상황 등을 감안했다고 하지만 호남에 묶여 광주전남의 변방이기를 싫어하는 전북 민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셈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도 처음 전북을 패싱했다. 이 후보는 지난달 3박4일의 광주전남 방문을 호남행이라고 했다. 이 후보가 광주전남에 이어 곧바로 2박3일 전북행 매타버스(매주 타는 민생버스)를 탄 것은 그나마 전북 민심을 다독인 이례적인 일정이었다. 호남 일정에 전북을 붙여 가거나 전북을 패스했던 관행을 깼다고 캠프측은 의미를 부여했다. 이 후보는 전북 방문에서 전북의 삼중 차별론을 이해했단다. 수도권 대 지방, 영남 대 호남, 호남 내 차별까지 소외된 전북 도민들의 위화감을 처음 이해하지 못 했으나 타당성이 있다고 공감대를 나타냈다. 전북 유권자들이 대선 주자들의 방문에 이렇게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는 게 서글프다. 대선 주자들이 지역을 찾는 건 표를 위해서다. 당연히 가성비를 따질 것이다. 호남 종속변수로 여기는 데다 특정 정당에 치우친 전북에 대해 가성비를 낮게 평가하는 걸 탓할 수만은 없다. 전북 인구가 매년 줄고 있는 현실에서 앞으로도 이런 현상은 개선되기 힘들 것이다. 대선 후보들이 전북 유권자들을 무시하지 않도록 전북의 존재감을 더 키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가장 알기 쉬운 게 지역에서 정당 경쟁구도를 갖게 하는 방법이다. 주요 선거 때마다 캐스팅 보트를 가진 충청은 늘 핫플레이스였다. 그곳 유권자들로선 어떤 후보가 지역을 찾느냐마느냐로 신경 쓴다는 게 멋쩍은 일일게다. 특정 정당에 대한 쏠림 현상을 깰 때 가능하겠지만 전북에서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그렇다고 인구 측면에서 전북이 큰 소리 칠 입장도 아니다. 전북인구는 180만명 선도 무너지며 전국 인구 대비 3.5%에 불과하다. 매년 인구가 줄고 있어 전북의 정치 위상이 올라갈 가능성도 희박하다. 하지만 통계청이 근래 발표한 2020 인구주택총조사 표본 집계 결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11월 1일 기준 출생지별 인구 분포를 살펴보면, 전북 출생 인구는 전국 6.3%인 315만명으로 올라간다. 부산(318만명)에 버금가며 충남(308만명) 충북(209만명)보다 많다. 서울에 거주하는 인구의 출생지를 따지더라도 서울(48.3%), 경기(8.0%), 전남(7.3%) 에 이어 전북(5.6%)이 네 번째다. 전북에 살지 않더라도 출향민들은 어떤 식으로 든 고향과 연결돼 있다. 꼭 선거가 아니더라도 출향민을 지역의 자원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 점에서 지난 10월 국회를 통과해 2023년 1월1일 시행되는 고향사랑기부금법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제도는 해당 지자체의 주민이 아닌 사람이 개인별 연간 500만원 한도에서 기부할 수 있고, 기부자는 세액공제와 지자체로부터 답례품을 받을 수 있다. 재정적 목적이 크지만 출향민과 유대를 더욱 돈독히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고향사랑기부금 제도가 인구유출로 왜소해지기만 하던 전북에 희망의 씨앗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고향사랑기부금 제도가 지역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아니더라도 지금과 같이 적은 인구 때문에 무시당하는 설움을 덜 받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지역을 아끼고 사랑하는 출향민과 관계망을 활성화시킬 때 그 길도 열릴 것이다. /김원용 논설위원

  • 오피니언
  • 김원용
  • 2021.12.21 23:51

지방소멸 미봉책으로 안 된다

김원용 논설위원 30호가 넘던 마을은 10가구도 채 남지 않았다. 한 집 건너 빈 집이다. 그것도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다. 아이 울음소리는커녕 60대가 마을에서 가장 젊다. 초등학생만 40~50명이던 마을에 지금은 학생 한 명 없다. 4킬로 남짓 위치했던 초등학교가 폐교된 지 20년이 넘었다. 100년 가까운 역사에 전체 학생 수 2000명에 이르던 학교였다. 어릴 적 고향 모습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내가 살던 마을 이야기지만, 전북지역 농촌마을이 거의 비슷한 풍경일 게다. 이렇게 쇠락한 농촌마을을 사람 소리 나는 곳으로 다시 돌릴 수 있을까. 정부가 최근 전국 89개 기초지자체를인구감소지역으로 지정하고, 내년부터 매년 1조 원씩 10년간 지방소멸 대응기금을 집중 투입할 계획을 밝혔다. 또 국고보조사업 선정시 가점을 주는 등 행재정적 지원을 해 인구 소멸의 위기에서 탈출하는 것을 돕기로 했다. 정부가 직접 인구감소지역을 지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지방소멸에 대한 위기 상황을 그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인 조치다. 그러나 인구감소에 따른 지방소멸 위기에 경고음이 커진 게 어디 어제오늘의 이야기인가. 지방소멸 대응기금 얼마로 과연 인구소멸 위기에 처한 지방을 구할 수 있을까. 전북인구동향만 따져보더라도 별 실효성이 없을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전북인구는 1966년 최대치일 때 252만3708명이었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 10% 이상을 차지했으나 지금은 180만 명 선도 무너졌다. 감사원은 2017년 인구를 기준으로 전망한 50년 뒤 전북인구는 118명, 100년 뒤 48만 명까지 추락할 것으로 예측했다. 100년 뒤 우리나라 예측 인구를 1510만 명으로 전망하고 있어 전북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지난해 처음으로 전체 인구가 감소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인구소멸지역에 국한된 대응책이 미봉책일 수밖에 없는 셈이다. 지역의 인구감소 원인은 되새김질이 필요 없을 만큼 분석됐다. 출산율 감소와 고령화, 일자리 부족, 수도권 집중화 등 하나같이 해결이 쉽지 않은 구조적 문제들이다. 출산율을 높이려고 정부와 지자체마다 각종 지원책을 내놓았으나 성과가 없다. 출산율 저하에 따른 고령화는 불가피하다. 대기업 본사가 수도권에 집중된 나머지 지역에서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나마 정부 의지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수도권 집중을 막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현 정부가 과연 진정성 있게 수도권 집중을 막는 정책을 펴고 있는지 의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당시 5대 국정목표 중 하나로 고르게 발전하는 지역으로 정하고 국가균형발전 정책을 수립했다. 그럼에도 지역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정책 실행이 있었는지 기억할 만한 게 별로 없다. 근래 메가시티 구축 계획이 나왔으나 전북에 오히려 위협요소가 되고 있다. 또 다른 인구블랙홀로 농촌지역의 인구 소멸을 앞당길 우려마저 나온다. 수도권 3개 신도시 건설이나 GTX(수도권광역 급행철도) 건설 등은 수도권 집중을 더욱 강화할 것이다. 대신 수도권 공공기관의 지역이전은 현 정부에서 물 건너가는 모양새다. 대선을 앞두고 지역간 경쟁을 의식한 나머지 혁신도시 시즌 2조차 열지 못하고 있다. 시즌 2를 마무리하고 다음 정부에 시즌 3를 기대하는 지역민들로선 실망과 허탈감이 클 수밖에 없다. 농촌지역의 인구감소는 중소도시에 이어 대도시 인구감소로 이어질 것이다. 현재와 같은 대도시 중심의 발전정책이 이를 더 부추길 우려가 크다. 내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이 지역소멸 문제와 지역균형발전에 얼마만큼 의지를 갖는지 지켜볼 일이다. 옛 고향 모습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고향을 간직해야지 않겠는가.

  • 오피니언
  • 김원용
  • 2021.11.02 16:45

동학농민혁명 완결은 독립유공자 서훈이다

김원용 논설위원 동학농민혁명 최고 지도자였던 전봉준 장군의 후손은 지금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전 장군이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6명의 가족이 있다고 답한 게 유일한 실마리다. 연구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부인과 자녀 4명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가계도 완성을 위한 퍼즐 맞추기에 애를 써왔다. 근 30여년 전봉준 가족사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가 없던 차에 전봉준 장군의 증손자라고 자처한 분이 나타났다. 경남 진주에 사는 전장수 씨(63, 목사)가 그다. 전북대 송정수 명예교수가 최근 낸 <전봉준 장군과 그의 가족 이야기>에서 그의 증언을 수록됐다. 전 씨는 아버지(전익선)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전 장군의 큰 딸(전옥례) 집을 방문했던 당시 상황과 모습을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자신의 조부며 전 장군의 아들인 용현 씨가 어떻게 이동하며 고난의 시절을 보냈는지도 서술했다. 그러나 전 씨의 증언일 뿐 그가 전 장군의 직계 혈족임을 증명할 직접 증거는 역시 남아 있지 않다. 현재 명예회복심사위에 유족 심사가 진행되고 있어 그 가부가 곧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최고 지도자의 가족관계조차 모를 정도로 동학농민군 자손들은 긴 세월 숨을 죽였다. 후손을 자처한 전씨의 증언은 진손 여하를 떠나 동학농민군 후손들의 피폐했던 삶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도자들 대부분이 반역죄로 처형되면서 그 가족들은 역적 집안이라는 낙인에다 가난의 대물림으로 배움도 변변치 못했다. 동학의 후손들이 그나마 어깨를 필 수 있었던 계기는 2004년 특별법 제정으로 명예회복과 복권이 이뤄지면서다. 이 역시 유족이 아닌, 역사학계와 시민사회단체의 노력에 의해서였다. 배움과 부를 쌓지 못한 유족의 힘은 미미했다. 그저 명예회복으로 만족할 뿐 독립유공자 서훈을 요구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동학농민혁명은 단순 명예회복을 넘어 국가기념일로까지 지정됐다. 더불어 혁명 참가자들에 대해 독립유공자 인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동학농민군 서훈 논의는 100주년 때부터 나왔으나 근래까지도 별 진전이 없었다. 특별법 제정으로 근거를 마련했으나 서훈에 따른 유족 지원금 등 재정부담과 의병과 같은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는데 반대하는 여론도 무시할 수 없었던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가 최근 많이 달라졌다. 혁명의 성격을 의병으로 규정짓는 많은 연구물도 쌓였다. 연구자들은 제2차 동학농민혁명이 현행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을 적용하더라도 서훈 자격이 충분하다고 보고 있다. 유족회와 천도교 등을 중심으로 서훈 요구 1인 시위가 이어지고, 동학 관련 50여개 단체가 엊그제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까지 발족했다. 그러나 국가보훈처가 아직 명확한 답을 내지 못하고 있다. 연대측은 의병 전공 심사위원들이 그 대척점에 있었던 동학농민군의 서훈에 동의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보훈처에 별도의 동학혁명분과를 둬 독립유공자 서훈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동학농민혁명 유공자 서훈에서 유족에 대한 지원은 부수적인 문제다. 더 중요한 것은 혁명의 정신을 곧추 세우는데 있다. 전봉준 장군의 동상이 서울 광화문 광장에 우뚝 섰고, 국가기념일로 제정됐으며, 국가사업으로 동학농민혁명공원 조성이 마무리 단계에 있다. 관련 기록의 유네스코 세계기록물 유산 등재도 추진되고 있다. 독립운동 서훈은 그 연장선에서 또 하나의 큰 진전이 될 것이다. 대통령 선거 때면 전북을 찾는 후보마다 동학의 후예라고 치켜세우며 동학농민혁명의 가치에 힘을 준다. 이제 추상적 구호가 아닌, 동학의 후예들이 진정 자긍심을 느낄 수 있게 국가 서훈으로 답해야 할 때다. /김원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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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원용
  • 2021.09.14 16:39

새만금과 갯벌 사이

김원용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고창갯벌과 서천갯벌, 신안갯벌, 보성순천갯벌이 뭉친한국의 갯벌이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세계유산으로 인정받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세계유산으로 자연유산은 과학상, 보존상, 미관상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있는 자연지역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문화유산에 비해서도 그 요건이 까다롭다. 세계유산 1100여점 중 자연유산은 200여점으로, 800여점의 문화유산에 비해 희귀성도 있다. 미국 그랜드 캐니언옐로스톤 국립공원, 에콰도르 갈라파고스 제도, 베트남 하롱베이, 탄자니아 킬리만자로 등 걸출한 세계적 명소들과 같은 반열의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갯벌이 어찌 자랑스럽지 않겠는가. 갯벌은 강과 하천에서 유출되는 토사가 쌓여 연안에 형성된다. 우리나라 서해안은 만조와 간조의 차가 커 하천에서 공급된 퇴적물이 해안을 따라 멀리까지 이동한다. 한강 금강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등 큰 강들의 하구가 있고, 해안은 경사가 완만해 갯벌 생성에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셈이다. 그러나 우리가 서해안 갯벌 가치에 주목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그저 질퍽한 뻘로 이뤄진 쓸모없는 땅으로 여긴 채 농지로 간척하는 데 급급했다. 고도성장기인 1970년 이후 대규모 간척지 개발과 항만산업단지 조성 등으로 국내 전체 갯벌의 절반 가까이가 훼손됐다. 새만금 간척지 개발이 갯벌 훼손의 상징처럼 거론되고 있으나 그 이전 훨씬 많은 갯벌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국내에서 갯벌의 가치를 일반 국민들에게 알리기 시작한 계기가 된 게 새만금사업이었다. 환경운동가들이 2000년대 초 새만금사업 중단을 요구할 당시 담수화에 따른 수질문제와 함께 갯벌 문제를 제기하면서다. 새만금 백지화를 주장했던 이들은 비용 대비 수익 계산에서 갯벌의 경제적 가치가 지나치게 낮게 평가됐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종교인들이 새만금간척지에서 서울까지삼보일배로 의지를 다져 새만금사업을 잠정 중단시키기도 했다. 20년 세월을 건너 새만금개발과 갯벌보전이 다시 대립하는 양상을 빚고 있다. 새만금사업에서 화룡점정이라고 할 공항 건설을 두고 환경단체가 새만금의 마지막 갯벌이 사라질 것이라며 근래 반대 활동에 나서면서다. 환경단체들은 고창갯벌의 세계유산 등재를 새만금공항 건설 반대 명분으로 하나 더 보탰다. 고창갯벌의 세계유산 등재는 분명 전북 도민들이 환영하고 자랑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곳은 어디까지나 고창 곰소만 일대다. 한국의 갯벌에 포함된 곳 중 전남지역이 전체의 약 87%를 차지한다. 국제공항이 있는 무안은 해수부에서 지정한 국내 첫 습지보호구역이며 고창에 앞서 람사르습지로도 등록됐으나 개발 여건 등을 감안해 한국의 갯벌에 포함되지 않았다.갯벌왕국이라고 할 신안에 국내 4번째 긴 7.22km의 천사대교가 건설된 것도 2년 전이다. 그럼에도 이 지역 환경단체들이 갯벌을 살리자고 지역의 대형 국책사업에 조직적으로 반대했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갯벌의 지속가능한 관리란 무조건 보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 세대와 미래 세대 모두에게 갯벌을 균형 있게 보전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세계유산지역이 아닌 새만금에서 다시 갯벌 때문에 전북인의 염원이 담긴 국제공항 건설이 차질을 빚어서는 안 될 말이다. /김원용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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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원용
  • 2021.08.03 17:10

호남과 전북, 그리고 이준석

김원용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전남대 호남학연구원에서 10여년 전 발행한 <호남학>에호남과 관련해 국사교과서를 분석한 논문이 게재된 적이 있다. 김병인 교수(사학과)가 국사교과서에 호남 관련 용례를 분석한 결과 호남이라는 표현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사용되었단다. 호남 대신 전라도라는 용어로 사용했는데, 역사연구자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호남이라는 용어를 채택하지 않는 것이 과연 서술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지킨 것인지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호남에 대한 애착은 호남대 조상현 박사가 호남이라는 명칭 등장시기를 앞당기는 논문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는 2018년도 발표한 전라도 별칭 호남의 연원이란 논문에서 호남 용례가 13세기 중엽 이전 기록에서 확인했다며 기존 견해보다 150여 년 이상 그 연대를 올려도 무방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인용한 두 학자의 논문이 아니더라도 광주전남지역의 호남사랑은 각별한 것 같다. 광주전남에 국한된 이야기일지라도 호남으로 곧잘 확장시킨다. 광주광역시와 전남도가 전라도 천년을 맞아 2018년 공동 설립한 학술기관의 이름도한국학호남진흥원이다. 지방거점 국립대인 전북대 부설 연구기관 명칭이 전라문화연구소인 반면, 비슷한 성격의 전남대 연구기관 이름은 호남학연구원이다. 전북에선호남이라는 이름을 건 공공기관과 사회단체, 연구소, 기업체가 손으로 꼽을 정도다. 전주관문에 걸린호남제일문이 오히려 어색하다. 이와 달리 광주전남에서 호남은 자연스럽게 통용된다. 왜 광주전남과 전북에서 호남이란 별칭이 주는 어감이 다르고 활용도에서 차이가 날까. 구한말 행정구역 개편이 이뤄지기 전 광주전남과 전북은 전라도라는 울타리에서 동질감을 가졌다. 그러나 전라북도와 남도로 나뉘고, 나아가 지방자치가 시작되면서 연대의식 대신 경쟁관계로 변했다. 이 과정에서 호남 몫으로 광주전남이 항상 우선이 되다보니 전북의 피해의식은 클 수밖에 없었다. 전북이 호남에 그리 애정을 갖지 못하는 이유다. 광복 후 대한민국 인구가 2배 넘게 늘었으나 유일하게 인구가 감소한 곳이 전북이다. 경제적 낙후로 인구유출이 그만큼 많았다는 의미다. 호남을 무기삼아 그나마 지탱해온 전남광주와 달리 전북은 호남 몫도 대접받지 못한 것이다. 호남이 전국적으로 통용되는 것과 달리 충청권을 호서로 부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영남이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긴 하지만, 정치권역과 경제권역을 묶어 부를 땐 대경권(대구경북권), 부울경권(부산울산경남권)이 널리 사용된다. 참고로 호남이라는 별칭이 중국 사대주의에서 유래한 만큼 청산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기준이 되는 김제 벽골제가 호수가 아님에도 중국의 동정호(동정호를 경계로 중국에서 호남과 호북을 구분)와 같은 큰 호수로 상상하면서 호남과 호서를 구분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전북이 현실적으로호남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가장 큰 요인이 정치적 동질성이다. 거의 모든 선거에서 전북과 광주전남은 한 몸처럼 움직였다. 기성 정치인들이호남으로 상징되는 기득권을 내려놓을 리 만무하다. 국민의힘 이준석 바람이 거세다. 취임 후 전북을 찾은 이 대표는 전라도 지역 주민들에게 미래와 비전을 가지고 당당히 민주당과 경쟁하겠다고 밝혔다. 그 바람이 일당 독주의 호남당에 금을 가게 할 지 지켜볼 일이다. 정치영역에서 전북의 존재감이 드러나길 바라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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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원용
  • 2021.06.22 17:20

전주동물원의 어제와 오늘

김원용 논설위원 동물원 기능은 계속 변화해 왔다. 과거 야생의 희귀한 동물들을 시설에 가둬놓고 보여주던 동물원의 역할이 지금은 동물의 보전과 연구, 교육기능을 더 중시하게 됐다. 특히 철창에 가둔 전시를 동물학대로 여길 정도로 동물보호에 대한 가치가 높아지면서 동물원 시설의 획기적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실제 지난 2013년 서울대공원의 돌고래 쇼가 동물학대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됐다. 서울대공원은 여론조사와 시민토론회 등을 거쳐 남방큰돌고래를 바다로 방사시켰다. 동물원 속 동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새롭게 해준 계기였다. 그럼에도 동물원은 도시에서 야생동물을 접할 수 있는 곳으로 여전히 중시되고 있다. 시민들의 지적 호기심과 유희를 충족시키는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전주동물원의 존재 가치는 지금도 매우 높을 수밖에 없다. 전주동물원이 1978년 개원할 당시 전북지역 전체를 통틀어서도 변변한 유희 시설이 없었다. 황량한 축사에 동물 4백여마리로 개원했음에도 동물원을 찾는 관람객이 연간 30~40만명에 이를 정도로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왔다. 전북뿐 아니라 대전 오월드 동물원(2002년)이 설립되기 전까지 전주동물원은 중부권까지 아우르는 명소였다. 그렇게 많은 시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추억과 재미를 안겨준 공간이 전주에 또 있을지 싶다. 그러나 전주동물원의 위상은 갈수록 떨어졌다. 과거 대전권에서 전주동물원을 찾았으나 지금은 역으로 전북 도민들이 대전 동물원을 찾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40년 이상 오랜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정작 차별화를 꾀하지 못했다. 현상유지에 급급할 뿐 획기적인 투자가 이뤄지지 않으면서다. 뒤늦게나마 전주시가 전주동물원을 생태동물원으로 새롭게 탈바꿈시키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어 다행이다. 콘크리트와 철창 등으로 이뤄진 동물원 내부를 풀과 나무, 꽃 등으로 구성된 숲이 더욱 확대되고 동물이 이들 숲 속에서 뛰어놀 수 있는 환경으로 재구성 하고 있다. 동물의 특성에 맞게 토종동물 숲과 초원 숲, 종보전센터, 새들의 숲, 맹수 숲, 생태 숲, 아쿠아리움, 에코돔 등으로 공간 배치를 계획하고 있다. 한마디로 동물 친화적 여건을 조성해 동물들도 행복하고, 관람객도 즐겁게 하는 방향이다. 실제 전주동물원 모습이 최근 몇 년 새 많이 바뀌었다. 철창이 거의 사라졌고, 사육 공간도 넓어졌다. 그러나 전주동물원의 현재 공간은 협소해 서식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야생 동물을 놓아기르는 자연공원에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차 안에서 구경하는사파리는 언감생심이다. 최근 전주시의회 이남숙 의원이 전주동물원 내 놀이기구를 이전하거나 신축할 것을 촉구했다. 기본적으로 생태동물원과 위락시설은 어울리지 않는다. 전주시가 동물원 내 수영장을 개설하려고 했을 때 시민단체에서 반대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렇다고 마땅한 어린이 놀이시설이 없는 마당에 무작정 철거가 능사는 아닐 것이다. 대안으로 제2동물원을 조성하면 어떨까. 현 전주동물원은 어린이동물원으로 기능하도록 하고 현대적 개념에 맞는 동물원을 새로 만들자는 것이다. 현 동물원 내 위락시설은 철거하고 그 자리에 어린이동물원에 걸맞은 교육전시관과 체험장을 둬 산교육장으로 활용한다. 위락시설은 민간투자 유치를 통해 인근에 대단위로 설치한다. 제2동물원은 야생동물 보존에 우선을 두고 기존 동물원과 확연히 차별성을 갖도록 한다. 꼭 전주 도심일 필요는 없다. 다른 시도의 경우 공영동물원 외에 민간에서 운영하는 동물원이 많다. 인근 광주전남만 하더라도 등록된 민간 동물원만 8개나 된다. 제2동물원이 만들어지면 매년 어린이날 전주동물원이 막상 사람 구경이 되는 상황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김원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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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원용
  • 2021.04.27 17:52

태권도 사관학교 결실 거둘 때다

김원용 논설위원 태권도는 세계 200여개국에서 1억 명 이상이 수련하는 스포츠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 첫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이후 태권도의 국제적 위상은 한층 높아졌다. 그러나 올 도쿄 올림픽까지 6회 연속 올림픽 무대에 서지만 늘 퇴출종목 후보군에 들어 여전히 국가적 돌봄이 필요하다. 도쿄 올림픽에서 일본 국기인 가라테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돼 더욱 긴장의 고삐를 당겨야 하는 상황이다. 국민적국가적 자부심이 담긴 태권도가 혹여 올림픽 종목에서 제외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허탈감과 파장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무주군이 최근국제 태권도 사관학교 설립에 팔을 걷었다. 태권도 사관학교 설립 100만인 서명운동과 함께 세계태권도연맹국기원 등의 응원을 끌어냈다. 세계태권도연맹 조정원 총재는 세계 태권도인을 아우를 수 있는 국제 사범을 양성하는 전문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것은 태권도인들에게는 영예를 안기는 일이자 국기 태권도와 태권도 종주국의 위상을 높이는 일인 만큼 연맹 차원의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 국기원 이동섭 원장도 대한민국 국기 태권도가 우슈나 가라테 등이 범접할 수 없는 위상을 갖추고 올림픽 정식종목으로서도 흔들림 없이 꽃피우기 위해선 국제태권도사관학교가 반드시 설립돼야 한다고 응원했다. 태권도 사관학교 추진은 사실 때늦은 감이 있다. 2004년 무주 태권도원 유치 당시 계획에 태권도 사관학교 설립이 포함됐다. 문체부도 이 같은 필요성에 공감하고 2015년 태권도사관학교 설립 타당성 조사연구를 진행했다. 당시 연구에서 태권도의 질적 향상을 통한 새로운 발전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태권도 전문인력을 양성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기관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다만 전문교육기관으로 사관학교 설립을 특정하지 않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무예원을 설치하거나 태권도 대학원 대학교 설립, 문체부 산하 사립대학 설립방법 등을 제시했다. 태권도원의 청사진에 포함되고 문체부의 타당성 조사가 있었음에도 사관학교가 별다른 진전 없이 유야무야 된 데는 무주군과 태권도원 운영 기관인 태권도진흥재단, 지역 정치권의 의지 부족을 탓할 수밖에 없다. 태권도원은 무주와 전북이 갖고 있는 소중한 체육관광 자산이다. 태권도원을 조성할 당시 무주군은 태권도와 태권도인들의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비전으로 태권도 정신과 태권도인의 생활까지 모두 담아낸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태권도 사관학교 외에도 정예 선수촌, 종합 무술테마파크, 태권도 문화마을, 태권도인 실버타운, 태권도 전문병원, 태권도 추모공원 등이 들어 있었다. 다양한 수익사업을 위해 태권도 지방공사 설립까지 계획으로 내놓았다. 그러나 2014년 개원 7년째를 맞은 태권도원이 태권도 성지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2017년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개최했고, 매년 3만명 가량의 외국인 수련생이 찾아 나름 지명도를 높여왔으나 거기까지다. 세계 1억명 태권도인들의 정신적 고향이 될 수 있는 태권도원이 이름값조차 제대로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태권도 사관학교가 이런 의문과 안타까움을 일거에 해소시키진 못하더라도 실마리는 될 수 있다고 본다. 기존 대학에 태권도 전공학과들이 있어 이해충돌이 생길 수 있고, 국공립 여부와 지도자 양성 세부 과정 등도 결정해야 하는 등의 과제도 있다. 그러나 태권도 세계화를 위해 국제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인재양성 필요성 앞에 큰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태권도원이 한걸음 나아가기 위해서도 사관학교 설립이 중요하다. 현 정부의 국정과제에 태권도원 성지화 사업이 들어 있고, 100여명 의원이 참여한 국회의원 태권도연맹이 우군이다. 국기원을 무주로 이전시키려다가 유야무야로 끝낸 3년 전 전철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지역 정치권에서도 태권도 사관학교 설립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김원용
  • 2021.03.16 18:09

전주가 후백제 서울 맞나

김원용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경북 문경시가 최근 이 고장 출신의 후백제 견훤왕을 테마로 본격적인 관광자원화에 나섰다. 탄생 설화의 마을에 후백제 민속촌과 테마영상 전시관을 조성하고, 견훤의 활동과 관련된 유적지를 둘레길로 조성하는 계획 등을 내놓았다. 이런 문경시의 견훤왕 프로젝트는 뜬금없이 진행되는 사업이 아니다. 문경시는 견훤의 출생과 관련한 전설 및 유적에 대한 학술조사를 실시했고, 이를 토대로 출생 설화가 전해지는 금하굴을 정비하는 등 성역화 사업을 벌였다. 20년 전이다. 문경이 견훤의 탯자리 설화를 바탕으로 관광자원화에 관심을 갖는다면, 충남 논산은 묫자리로 견훤을 기념하고 있다. 충남 논산 연무읍의 나즈막한 야산에 자리한 견훤왕릉은 1981년 충남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논산시는 견훤왕릉을 국가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 2000년부터 견훤왕릉보존위원회가 발기돼 해마다 왕릉제를 지내고 있으며,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을 꾸준히 건의할 정도로 왕릉에 대한 지역의 자부심은 적지 않다. 그렇다면 후백제 왕도였던 전주에서 그에 걸맞게 견훤과 후백제를 기억하고 있을까. 전주를 본거지로 한 후백제에 대한 연구와 지역의 관심은 여전히 적다는 게 답일 것 같다. 후백제는 짧은 기간 존속했지만,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중국일본과 다각적인 외교 활동을 펼쳤으며 백제문화를 재현했다. 그 중심이 전주였다. 후백제를 빼고 언제 전주가 한 나라의 중심에 섰던 적이 있었던가.조선의 본향 이상으로 후백제가 전주의 역사에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삼국시대 이후 유일하게 왕궁을 찾지 못한 나라가 후백제다. 문헌 기록이 거의 없고, 급속한 도시화 진행에 따라 발굴에 한계가 있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후백제와 같은 시기에 존립하며 후백제보다 훨씬 열세였던 강원도 철원에 위치한 태봉만 해도 고대 왕도로서 기본적인 성격과 특징이 대부분 밝혀졌다. 후백제에 대한 지자체의 의지와 연구자들의 집요한 노력이 강원도 만큼 따랐는지 태봉 사례로 돌아볼 일이다. 물론 후백제 왕궁터를 찾기 위한 노력과 활동이 나름 꾸준히 이어지기는 했다. 특히 고 전영래 박사(전 원광대 교수)가 90년 대 초 후백제 왕궁터로 동고산성을 지목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전 박사는 당시 발굴 조사를 통해 주건물지를 포함해 여러 건물지를 확인하고, 건물지에서 발견된 全州城이라고 쓰인 기와 등을 통해 동고산성을 왕궁지로 확신했다. 그러나 자연환경적 위치와 일상 생활에 쓰인 유물이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학자들 사이에 의문이 제기됐다. 이후 물왕멀설, 전라감영설, 인봉리설 등이 나왔으나 가능성만 열어둔 채 지금껏 확실한 왕궁지를 지목하지 못하고 있다. 후백제 유적의 백미는 왕궁일 수밖에 없다. 후백제 왕궁 찾기가 계속되는 이유다. 그렇다고 왕궁터를 확인할 때까지 후백제를 재조명하고 역사자원으로 활용하는 일에 손을 놓아야 할 것인가. 후백제 관광자원화에 본격 나선 문경과 경쟁하라는 말이 아니다. 문경의 견훤유적지 정비사업은 오히려 후백제 역사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 논산의 견훤왕릉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견훤왕이 논산 개태사에서 임종할 때 완산이 그립다고 해 현 위치에 묘지를 잡았는데, 실제 맑을 때 그곳에서 모악산이 보인다고 왕릉 안내문은 적고 있다. 그간 후백제 관련 발굴조사와 연구활동으로 쌓인 성과물이 적지 않다. 그 성과물이 어떻게 보존되고 관리되는지 지역민들조차 모른다. 눈으로 보는 역사가 만들어질 때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도 높아진다. 후백제 홍보관 하나 없어서야 전주가 어디 후백제 서울이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지역에서 단 한사람나는 왕이다!라고 부르짖었던, 파란만장의 풍운아였던 백제가 망한 후 오늘날까지도 기죽어 사는 우리 향민에게 무한한 꿈과 긍지를 간직하게 해왔던 그의 발자취를 밝히고야 말겠다는 마음다짐이 한시도 나의 뇌리에서 사라진 일이 없었다. 동고산성을 발굴한 뒤 30년 전 본보 기고를 통해 밝힌 전영래 박사의 소회가 후학들을 부끄럽게 할 것 같다.

  • 오피니언
  • 김원용
  • 2021.02.02 16:54

전주 아파트값의 허상

김원용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코로나19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게 아파트 광풍이다. 아파트 가격 급상승은 수도권을 넘어 전국으로 번지는 기세다. 도내에서는 전주가 이미 회오리 권에 들어갔으며, 인근 지역으로 언제 어떻게 감염시킬지 모를 상황이다. 두어 달 전 전주 에코시티 45평형 아파트가 11억원대에 거래신고 됐을 때만 해도 아파트 가격을 올리려는 중개업자의 농간 정도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뒤이어 10억원대 거래도 신고됐다. 신도심 아파트매물가가 최근 몇 달 새 1~2억원씩 껑충 뛰었다. 급기야 전주시 전역이 부동산 규제지역(조정대상지역)으로 지정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이르렀다. 아파트 가격 상승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해관계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거주 공간으로 만족하지 않고 재테크 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전주시의 경우 아파트 비중이 70%를 넘는다. 내 아파트 가격이 올라가면 내 재산이 그만큼 늘어나는 효과가 있다. 아파트 한 채가 거의 전 재산인 대다수 시민들이 자신의 아파트 가격 하락을 반길 리 만무하다. 아파트 가격 상승에 여러 외부적 요인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아파트 소유자의 이런 심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아파트 가격 상승이 공동체 전반에 미칠 부작용은 훨씬 크다. 무주택자에게 절망감을 안길 뿐더러 실소유자에게도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별 도움이 안 된다. 내 아파트 가격만 오르는 게 아닌, 주변 가격도 덩달아 상승하기 때문이다. 해당 거주지를 떠나지 않는 한 아파트 가격은 허상이다. 집값 상승에 따른 세 부담만 늘어날 뿐이다. 그럼에도 아파트 값은 매년 올랐다. 전주에서 아파트 열기가 뜨거워지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후반 인후동 현대아파트 분양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89년 2차 분양 때 148세대분양에 8000여명이 몰려 53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이 때 분양가가 평당 100만원 선이었다. 그 후 10년 만에 평당 300만원대를 돌파했고, 다시 10년 만인 2010년대 600만원대를 넘어섰다. 그리고 다시 10년 뒤인 근래 1000만원 선을 넘보고 있다. 분양가 기준으로 30년 새 10배가 오른 셈이다.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더라도 전주지역에서 이만큼 수익을 내는 재테크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전주 아파트값이 적정 수준일까. 다시 말해 전주에서 아파트 가격이 이렇게 가파르게 상승할 요인이 있는 지다. 전주로 인구 유입이 많지 않고 주택보급률도 113%나 되는 상황에서 아파트 가격의 급등은 아무리 대내외적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기형적이라는 게 부동산 업계나 시중의 일반적 평가다. 가장 최근 신도심지역 대형 브랜드업체 분양가가 평당 900만원대인데 1600만원대에 거래된다는 게 어찌 정상적일 수 있겠는가. 외지 투기세력이 전주 아파트 가격을 들쑤셨다고 보는 배경이다. 전주 아파트값이 그만한 가치(내재가치)를 갖고 있다면 가격 상승에 별 도리가 없다. 그러나 외지인 농간에 휘둘리도록 방치됐다는 걸 납득하기 어렵다. 전주시가 신도심지역 비정상적 아파트거래에 대해 대대적 조사에 나서 위반 사항을 대거 적발했다고 발표했으나 아파트 가격은 이미 크게 올랐다. 더욱이 아파트값 상승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외지인들의 매집 실태조차 아직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전주 아파트값이 거품인지는 국토부의 부동산규제지역 지정에 따라 시간이 좀 지나면 드러날 것이다. 투기세력의 농간에 실수요자가 봉이 되는 일은 막아야 한다. 수도권에 비해 주거마련을 덜 걱정했던 게 그나마 지역의 강점이었다. 부동산 규제지역에 묶여 수도권과 마찬가지로 집장만이 더 어려워진 현실이 안타깝다. 아파트 문제는 국가정책도 있지만 지역정책이 매우 중요하다. 전주형 아파트정책은 나오기 어려운 것일까. /김원용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 오피니언
  • 김원용
  • 2020.12.22 17:41

가인과 손자의 정치적 실험

김원용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가인 김병로(1887~1964) 선생은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해쳐나갔던 거인으로 평가받는다. 일제강점기 항일 활동과 초대 대법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가인이 남긴 업적은 열거하기 힘들 만큼 넓고 높다. 나라 잃은 국민으로서 거처할 곳 없는, 거리를 방황하는 사람의 뜻으로 사용한 호 가인((街人)이 그의 생각과 사상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7년간 초대 대법원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사법의 기초를 놓고 사법권의 독립과 권위를 수립하는 데 절대적 공헌을 했다. 항일 활동과 초대 대법원장으로서 족적이 워낙 큰 때문인지 가인의 정치적 활동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가인 스스로도 정치에 대해 기본적으로 부정적이었다. 그는 인도를 무시하고 정의에 패려하는 행동을 다반사로 알고 행하는 그 죄악상을 엄숙하게 생각할 때 결국 정치는 죄악이라는 단안을 내리게 됐다. 우리나라가 독립될 경우를 상상하면서도 나로서는 무엇이든지 권력이니 지위나 공리로 투쟁하는 정치적 각축장에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상당히 굳게 가졌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가인은 현실정치에 직간접적으로 깊숙이 관여했다. 광복 직후 한국민주당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군정에 반대하는 활동, 고향 순창에서 국회의원 출마, 야당 통합의 선봉 역할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정치적 활동 대부분은 그가 의도했던 성과로 연결되지 못했다. 한민당 창당에 관여했으나 한민당이 토지개혁에 미온적이어서 결별을 했다. 박정희 군정에 대항하기 위해 `국민의당`으로 단일 야당 창당에 나서 대표를 맡았으나 끝내 통합을 이루지 못했다. 순창에서 국회의원 낙선은 가인에게 큰 낙담을 안겨줬을 것 같다. 재야민주인사로 중앙 정치무대에서 대통령 후보로 거론될 만큼 입지가 단단했던 그가 당시 정치 신인(홍영기)에게 패했기 때문이다. 가인은 마지막으로 고향 심부름이라도 하고 싶어서라고 출마변을 밝혔다. 4.19 직후 올바른 정치하라고 학생들과 국민들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정치는 깨끗한 사람, 올바른 사람, 민주주의 정신에 투철하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맡아야 한다는 생각도 덧붙였다. 그러나 무소속의 가인은 당시 전국적으로 분 민주당 바람을 뚫지 못했다. 가인의 정치실험은 크게 빛을 보지 못했으나 그의 지향점이 오늘의 정치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는 양지를 찾지 않았다. 자리가 아닌, 항상 민주화와 정치발전을 위해 필요로 하는 곳에 섰다. 대통령 후보 자리도 사양할 만큼 자신이 열매를 따먹기 위해서가 아닌, 씨를 뿌리는 데 온통 관심을 가졌던 게 정치인으로서 가인이었다. 가인의 이런 정신과 활동이 손자인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본다. 여러 정당을 넘나들면서도 경제민주화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은 것이 그 하나다. 세 차례나 위기에 처한 정당의 비대위원으로 나선 것도 열매 대신 씨를 뿌리겠다는 나름의 선의로 볼 수 있다. 김 위원장의 최근 행보 중 가장 주목되는 게 호남껴안기다. 김 위원장은 정당 바람에 힘을 쓰지 못했던 조부의 순창 선거를 가까이서 지켜봤을 터다. 물론, 현재 몸담은 국민의힘이 호남의 지지 없이 정권교체에 한계에 있다는 게 현실적인 이유겠지만. 그럼에도 김 위원장이 이끄는 국민의힘 서진정책이 성공적으로 이뤄져야 우리 정치가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다고 본다.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많은 정치적 폐단이 특정 정당의 독주에 있었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야당의 서진정책을 무작정 속보이는 행태라고 비난할 문제가 아니다. 당장의 이해관계가 아닌, 미래의 한국정치와 전북정치를 위해서도 정당간 경쟁체제는 꼭 필요하다. 김 위원장의 정치적 실험이 성공하길 바라는 이유다. /김원용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 오피니언
  • 김원용
  • 2020.11.10 18:55

대통령의 빈 자리

김원용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아무래도 성에 차지 않는다.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을 지켜본 소회가 그렇다. 동학농민혁명이 국가기념일로 기려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곡절을 거쳤는가. 2004년 특별법 제정으로 동학농민혁명 참가자들의 명예회복과 함께 국가기념일 제정의 필요성이 제기된 후 지자체간 의견 대립으로 미뤄지다 올 2월 황토현 전승일로 국가기념일이 정해졌다. 어렵사리 국가기념일 반열에 오르게 된 만큼 뭔가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기대했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구호는 요란했으나 정작 국가기념일과 크게 달라진 게 별로 없다는 느낌이다. 물론 국가기념일 지정으로 인해 동학농민혁명의 외형적 위상이 높아졌다. 정부 주도로 서울 한복판인 광화문에서 전국적인 기념식 행사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동안 전북뿐 아니라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전남충청강원 등 전국에서 지자체와 동학 관련 단체 등의 주도로 매년 기념행사를 가져왔으나 제각각 날짜에 분산해서 열다보니 국민적 관심을 한곳에 모으는 데 한계가 있었다. 국가기념일을 만들어 정부 차원의 기념식이 열리면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국민적 이해를 좀 더 넓히는 계기가 됐다고 보다. 그러나 기념식 행사로 국가기념일이 끝나는 것 같아 아쉽다. 기념식 자체도 막상 전북에서 치러지던 행사의 외연을 조금 확대하는 수준으로 보였다. 기념일 날짜와 직접 관련된 황토현 대신 광화문을 기념 행사장으로 정한 것은 혁명의 대중화와 전국화를 기대해서다. 주요 인사들의 많은 참여도 기대했다. 그러나 국무총리와 문화부 장관, 몇 안 되는 국회의원이 주요 인사의 전부였다. 정치권에서 여당 국회의원으로는 김두관 의원이 유일했으며, 자유한국당 의원은 단 1명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특히 아쉬웠던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기념사를 들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문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광화문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부임을 강조해왔다. 기념식장을 찾은 이낙연 국무총리도 기념사를 통해2016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계속된 촛불혁명도 잘못된 권력을 백성이 바로잡는다는 동학정신의 표출이었다면서문재인 정부도사람이 먼저라는 믿음으로 모든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가 동학농민혁명의 정신과 맞닿아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대통령의 기념식 참석 여부가 뭐 대수냐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참석으로 행사 자체의 무게감은 확연하게 달라진다. 특별법 제정과 국가기념일 제정 등으로 외형적 위상만 높아졌을 뿐 실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그리 높지 않다. 3.1운동과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촛불혁명 등으로 그 정신이 이어졌다고 추상적인 의미로만 거론될 뿐 국민 대다수와 친화적이지 못하다. 대통령의 관심과 애정 표현이 무엇보다 필요한 대목이다. 40여개에 이르는 국가기념일에 대통령이 모두 참여하기는 힘들 것이다. 문 대통령은 취임 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감동을 연출했으며, 지난해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대구 2.28 민주화운동 첫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했다. 이에 비춰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첫 기념식인 점과, 현 정부의 성격에 비춰 문 대통령의 기념식 참석을 기대한 게 무리는 아니었다고 본다. 문 대통령의 동학 첫 기념식 참석이 왜 불발됐는지 청와대의 설명이 없어 알 길이 없다. 대통령을 움직이지 못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가 여전히 가엽다. 혁명의 역사를 더욱 곧추 세우는 게 답이다.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에 걸쳤다지만, 첫 기념일과 기념식을 치르면서 동학농민혁명을 기려야 할 주축은 여전히 전북일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전국화대중화를 위해 더 많은 고민과 지혜가 필요할 것 같다.

  • 오피니언
  • 김원용
  • 2019.05.14 20:03

자민련과 민평당

김원용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정당의 이합집산 과정에서 제2의 자민련이 될 것이라고 하면 심한 욕으로 치부된다. 이념이나 정강도 뚜렷하지 않은 채 보스정치와 지역주의에 의존한 채 연명하다가 결국 슬그머니 사라질 정당이라는 뜻으로 보통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자민련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리 호락호락한 정당이 아니었다. 창당 직후 지방선거에서 충청권을 싹쓸이 했고, 1997년 대선에서는DJP후보단일화로 정권 교체에 기여하며 2년간 공동여당으로서 권력의 한 축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후 두 차례 총선을 거치며 군소정당으로 전락했고, 당의 실질적오너였던 김종필 총재의 정계은퇴와 함께 결국 한나라당으로 흡수됐다. 자민련은 비록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정권창출에 큰 역할을 했고, 양당 체제 속에 자그마치 20년 넘게 생명력을 유지했던 정당이다. 오늘의 거대 정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만 하더라도 20년 사이 분열과 통합을 거듭했으며, 당명을 바꾼 것만도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정당을 폄하랄 때 왜자민련 꼴이 난다고 할까. 이는 자민련이 남긴 정치적 유산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자민련이 지역주의의 링거를 달고 오랫동안 연명을 했으나 뚜렷한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안철수 전 대표를 중심으로 국민의당이 창당됐을 때 호남의 자민련이 될 것으로 보는 부정적 시각이 많았다. 그럼에도 새 정당에 자민련과 차별화 될 수 있는 요소들도 있었다. 구심점이었던 JP가 지는 해였다면, 안철수는 떠오르는 샛별이었다. 안철수에 대해 호남만이 아닌, 국민적 신망과 기대가 컸다. 합리적 개혁주의를 표방하면서 새로운 정치에 대한 희망도 던져줬다. 실제 국민의당은 창당 2개월 만에 치러진 20대 총선에서 38석을 확보하며 성공적인 출발을 알렸다. 호남지역 28석 중 23석을 석권하고, 정당비례투표에서도 당시 제1야당인 민주당보다 높은 득표율을 올렸다. 그러나 국민의당의 기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대선을 거치면서 당이 분열되고, 결국 창당 1년 만에 문을 닫았다.자민련 꼴대신국민의당 꼴이라는 빈정거림도 감수해야 할 만큼 짧은 정치적 실험으로 끝난 것이다. 국민의당 의원들이 민평당과 바른미래당으로 갈라졌으나 어느 당이 국민의당 적통인지도 불분명하다. 창당의 중심에 있었던 안철수 전 대표를 기준으로 할 경우 바미당이 적통이겠으나 바른정당과 통합되면서 국민의당 색깔이 오간데 없고, 민평당 역시 새로운 정강정책을 표방하면서 국민의당과 단절했다. 국민의당 자체 아무런 정치적 유산도 남기지 못한 채 공중분해된 셈이다. 그럼에도 민평당은 여전히 전북에서 살아 있는 권력이다. 전북 지역구 국회의원 10명 중 절반인 5명이 만평당 소속이다. 그러나 지역에서조차 민평당의 존재감이 없다. 물론 민평당의 존립 자체가 버거운 상황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원내교섭단체 구성을 못할 정도로 군소 정당으로 전락했고, 지지기반인 전북에서도 한자리수 지지율이 나오지 않는 마당에 의욕을 말하는 것이 사치일 수도 있다. 오죽하면 창당 1주년 기념행사도 치르지 못했을까. 민평당은 이대로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 민평당은 전북도민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국민의당이 해체됐다고 해서 지역 유권자들이 보낸 지지와 성원을 외면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전북의 유권자들이 국민의당을 선택했던 것은 늘 지지했던 민주당이 제역할을 하지 못한 데 대한 염증 때문이었다. 선거 때마다 항상 선택지가 없었던 전북 유권자들에게 국민의당이 대안이었다. 도로 민주당이 될 경우 지역 정치발전은 또다시 과거로 후퇴할 수밖에 없다. 전북에서 야당이 살아야 하는 이유다. 그 중심에 있는 민평당이 이리 무기력에 빠져서야 되겠는가. 내년 총선이 아직 1년이나 남았다. 시대적 소명이 끝나 총선에서 참패를 당할지라도 한 번쯤 뜨겁게 불꽃은 피워야지 않겠는가. 최소한호민련이라도 되려는 열정을 보이는 게 호남 유권자에 대한 민평당의 도리다.

  • 오피니언
  • 김원용
  • 2019.03.26 20:49

군산 근대유산 다시보기

김원용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목포와 군산은 많이 닮았다. 두 도시가 구한말 앞서거니 뒤서거니 개항한 후 급속한 도시발달을 이루고, 광복 후 반세기 가깝게 쇠락했으며, 지금은 국제적인 해양관광물류도시를 꿈꾸고 있는 것까지 닮은꼴이다. 두 도시는 80년대 말까지도 일제강점기 때 형성됐던 도시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때 관공서와 상가들이 밀집했던 곳이 도시의 중심에 자리했다. 구도심의 활성화는 모든 도시들이 안고 있는 과제이지만, 이들 두 도시의 경우는 좀 더 다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건축물이 많이 남았다는 점에서다. 구도심 개발과정에서 일제강점기의 건축물은 계륵이었다. 민족사적 관점에서 일제침략의 잔존물을 말끔히 청산해야 한다는 입장과, 식민지 역사의 아픔도 엄연한 역사인 만큼 역사적 교훈으로 남겨야 한다는 입장이 대립하면서다. 서울의 조선총독부 청사는 문민정부 시절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에서 1995년 철거됐다. 반면 구 군산세관은 철거와 존치를 놓고 이런 논란이 일었으나 보존 쪽으로 결론이 났다. 일제강점기의 근대 건축물이 재조명된 계기는 2000년대 들어 등록문화제가 도입되면서다. 문화재청이 일제 때 만들어진 건축물 또한 당대의 문화역사를 반영한 것으로 보고 기존의 지정문화재보다 완화된 보호제도를 둔 것이다. 목포와 군산 두 도시의 주요 근대 건축물들이 이 때부터 하나 둘씩 등록문화재로 이름을 올렸다. 문화재청은 한걸음 나아가 지난해 선(線)면(面) 단위의 문화재 등록제도를 새로 도입했다. 근대문화유산의 입체적맥락적 보존과 활용을 통한 도시재생 활성화를 촉진하기 위한 취지다. 제도도입과 함께 목포와 군산 내항, 경북 영주 등 3곳이 문화재로 등록됐다. 최근 손혜원 의원의 투기 여부를 둘러싸고 정치적사회적 이슈가 된 곳이 바로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이다. 일반적인 잣대로 특정지역에 수십 건의 부동산을 매입했다면 의당 투기로 비난받는다. 그럼에도 손 의원의 부동산 매집을 두고 지역사회에서 도시재생 활성화의 마중물이 될 수 있다고 옹호하는 분위기도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의원 개인의 처사에 대한 잘잘못은 별개로 치더라도 그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공간이 주목받는 것만으로도 지역적으로 도움이 되고 있다는 판단에서인 것 같다. 군산은 근대유산의 활용 측면에서 다른 도시의 모델이 됐다. 새 등록제도와 상관없이 2000년대 초부터 개별 근대 건물의 보존과 이를 연계한 문화관광 프로젝트를 진행시켰다. 20008년 문화관광부 공모사업으로 근대산업유산을 활용한 예술창작 벨트화 조성에 이어 이듬해 군산 근대역사경관 조성사업을 진행시켰다. 그 결과 군산 역사문화의거리는 군산관광의 아이콘이 됐다. 물론 군산의 경우도 근대문화유산의 자원화까지 적지 않은 진통을 겪었다. 등록문화재로 지정하는 과정에서 건물 소유자와 갈등, 등록문화재로 등록한 후 관리 문제 등이 따랐다. 구도심이 활성화 되면서 일부 외부 투기자본이 유입되고, 당초 취지와 달리 유흥업소나 상업시설로 활용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군산의 근대역사문화공간은 특정인에 의해 휘둘리지 않을 만큼 이미 자리가 잡혔다고 본다. 그러나 목포의 문제를 남의 일 보듯 할 상황은 아닌 듯싶다. 지금은 투기여부로 시끄럽지만 목포의 근대공간이 그만큼 핫플레이스가 됐다는 반증이다.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이 완성되면 그간 군산이 누렸던 차별화도 줄어들 것이다. 군산의 근대역사거리를 찾는 관광객도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올해가 군산 근대화의 시발점이라고 할 군산개항 2주갑이 되는 해다. 군산 근대역사문화공간에 날개를 달 방안을 다시 모색하는 계기로 삼길 바란다.

  • 오피니언
  • 김원용
  • 2019.01.22 19:46

연변과 통할 때다

김원용 논설위원선임기자 올 초 중국행 비행기를 타지 못하고 인천공항에서 전주로 돌아온 적이 있다. 어처구니없게 비자 발급도 받지 않고 중국 여행에 나섰다가 당한 낭패였다. 1박2일의 짧은 여행기간에다가 목적지가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사는 연변이어서 국내 여행처럼 편히 여겼던 탓이다. 가까우면서도 멀고, 먼 것 같으면서도 또 가까운 곳이 연변이 아닌가 싶다. 지금이야 중국의 주요 도시 곳곳에 우리 기업이 진출해 있고 중국 여행지도 다양해졌지만, 1992년 중국과 수교 당시만 해도 중국사회에 낯선 한국인들에게 연변은 중국과 통하는 관문이었다. 연변의 남서쪽 끝에 자리한 백두산은 중국 관광의 필수코스였고, 민족의 풍습을 지켜온 공동체 문화가 살아 숨쉬는 연변 또한 한국 관광객들의 핫플레이스였다. 중국의 변방에 머물렀던 연변은 한국과의 수교 이후 급속한 발전을 꾀했다. 연변 내 관광객의 증가와 함께 한국기업의 투자가 이뤄지고, 많은 연변 교포들의 한국행 노무송출을 통해서다. 90년대 초까지 연변의 주도인 연길시마저도 비포장으로 먼지가 풀풀 날렸으나 지금은 국내 중소도시와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할 만큼 자동차가 북적거린다. 거의 모든 가정이 자가용을 보유하면서 오히려 교통체증을 걱정할 정도로 격세지감을 갖게 한다. 우리가 연변을 주목하는 것은 단순히 연변의 사회경제적 발전 때문이 아니다. 연변은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압박을 피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우리 땅 삼아 재충전을 했던 곳이다. 청산리항일전승지봉오동 항일전승지일송정 등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많은 유적을 보유했다. 연변 교포들의 이런 민족적 자긍심은 오늘날까지 면면하다. 민족 학교들의 모습과 3.13만세 운동 등 항일투쟁사를 기억하는 역사전시관이 용정중학교에 세워져 있고, 연길시에 있는 연변박물관은 중국에서 우리 민족의 전통 풍속이 어떻게 지켜지는지 보여준다. 일본 유학 중 투옥돼 옥사한 윤동주 시인의 생가와 기념관을 만들어 민족혼을 일깨우고 있기도 하다. 연변이 지닌 이런 민족사적 특성 때문에 국내 각 자치단체와 연변간 교류가 활발히 이뤄졌다. 광역 단위 차원에서 강원도(1994년)와 충남도(2015)가 연변조선족자치주와 자매결연을 체결했고, 충북도(2008년)는 상호협력 관계를 맺어 교류하고 있다. 기초 자치단체 차원의 교류도 20여개에 이르며, 전국적으로 망라돼 있다. 전북에서는 대학을 중심으로 연변대학과 활발한 교류가 눈에 띈다. 전북대, 우석대, 원광대 등이 연변대와 다양한 형태의 결연 등을 통해 교류를 넓히고 있다. 그러나 전북 자치단체들은 연변과 거의 담을 쌓고 있다. 남원시만이 2002년부터 연변가무단을 초청하는 정도다. 전북 자치단체들의 그간 국제교류를 보면 별 실속이 없었다. 자매우호결연 협약을 체결할 때만 요란한 채 유야무야 되거나, 교류 내용도 전시성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교류대상 국가를 선정할 당시 교류에 따른 효과를 면밀히 검토하지 않은 채 즉흥적으로 결정한 이유 때문이다. 전북도와 도내 14개 시군이 교류대상으로 삼고 있는 도시의 절반 이상이 중국에 치중해 있지만, 정작 동질성이 많은 연변은 없다는 게 그 반증이다. 남북협력이 가시화 되는 상황에서 연변의 교포들이 남북을 잇는 교두보 역할을 할 것이란 점에서 연변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일부 자치단체가 연변의 인적네트워크를 활용해 북한과 공동 프로젝트에 나선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연변의 독립운동사와 연변의 민족예술이 더욱 빛을 발할 것으로 본다. 가장 한국적인 도시를 자부해온 전북도와 전주시가 연변과 교류에 나서야 할 때다. 시대적 흐름이나 문화적 특성을 감안할 때 40개에 육박하는 전북의 중국 교류대상 도시에 연변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 오피니언
  • 김원용
  • 2018.12.04 19:36

전라도 천년, 깃발만 나부껴서야

전라도 3개 광역 자치단체장이 2년 전전라도 천년기념사업을 위해 손을 잡았다. 지난해 이맘때 서울에서전라도 천년 D-1년기념식과 심포지엄을 열고,2018년 전라도 방문의 해를 대대적으로 선포했다. 전라도 천년맞이 타종이 새해 첫날 광주 5.18 민주광장에서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웅크렸던 전라도천년의 잠을 깨울 듯한 기세가 오간데 없다. 전라도 천년은 전라도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바로잡고 지역의 새로운 도약을 끌어낼 수 있는 이벤트 재료였다. 전라도 전체가 이리 같은 목표를 향해 힘을 합칠 수 있는 재료를 찾기도 힘들 것이다. 그런 만큼 전라도 싱크탱크들이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전라도 천년기념사업을 기획했고, 이에 대한 기대도 컸다. 기념사업은 총 30개로, 3개 시도가 10개씩 주관해 공동 협력하는 형태로 추진해왔다. 전라도 방문의 해 운영, 전라도 천년사 편찬, 새천년 공원 조성, 학술문화행사 등 크고 작은 프로젝트들이 기획됐다. 일부 사업은 중장기적으로 추진되고 있고, 일부 사업은 나름대로 성과를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상당수 사업들이 기대 이하다. 특히 지역민들과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사업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전라도 천년의 상징적 프로젝트라고 할전라도 방문의 해 운영만 해도 그렇다. 3개 시도가 참여한 호남권관광진흥협의회가 전북지역 37곳을 포함 전라도 대표관광지 100곳을 선정했으나 정작 관광객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구체적 프로그램을 운영하지 못했다. 전라도의 부정적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기획된 전라도 천년 연중 캠페인도 유명무실하다. 전북은 전라 3개 시도에서도 상대적으로 더 천년사업의 존재감이 적다. 전북에서 주관하는 사업 대부분이 1회성 학술문화행사와 기념식에 머무르면서다. 전라감영 복원이나 지덕권 생태사업의 경우 기존 사업의 연장선일 뿐이며, 랜드마크 조성 차원에서 계획된전라도 새천년 공원조성사업 역시 전라도 천년사업과는 사실상 별개 사업으로 추진되는 처지다. 사실전라도 천년을 꺼내 이벤트로 연결시킨 것 자체는 평가받을 만하다. 서울 정도 600년 행사가 1994년 대대적으로 치러진 적이 있으나 국내에서 지명 이름의 기원 연도를 기념 이벤트로 삼은 적은 없다. 경상도 이름은 전라도 보다 300년이 지난 뒤에 나왔고, 충청도강원도경기도 등은 그보다 더 뒤에 명명됐다. 이렇게 미답지인 상황에서 전라 3곳의 자치단체가 전라도 천년 기념사업을 위해 뭉친 것만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문제는 당초 기획의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규모 국비 확보를 해서 지역의 랜드마크를 만들지 못해서가 아니다. 전라도 1000년이 무슨 의미인지 아는 국민이 얼마나 될 지조차 의문이다.전라도 천년사업이 지나치게 관 주도, 전시성 중심으로 이뤄지면서 정작 주민들과 괴리된 채 진행되는 데서 나온 문제라고 본다. 천년의 이름을 걸어온 전라도는 문화예술의 꽃을 피우고, 의로움을 떨친 자랑스러운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곳이다. 근현대 산업화 과정에서 차별을 받으며 낙후지역으로 소외받은 동병상련의 공감대도 갖고 있다. 전라도 천년은 바로 전라도민들이 자긍심을 갖고, 전라도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다.전라도 천년이 전라도민과 출향민에게조차 감응을 주지 못한다면, 어찌 전 국민에게 울림을 줄 수 있겠는가. 전라도 수부였던 전주에서 내일 기념식을 치른다.전라도 천년이 구호와 깃발만 나부껴서야 되겠는가. 3개 광역 단체장만이 아닌, 500만 전라도민이 손을 잡도록 해야 한다. 전라도를 지탱해온 지역민들의 참여가 새로운 천년의 자양분이다. 전라도 천년의 주인공은 현재를 사는 이 땅의 주민이다. 이제부터라도 주민 중심의 전라도 천년사업이 진행되길 바란다.

  • 오피니언
  • 김원용
  • 2018.10.16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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